2026.09.16 수요일
[사설] 해양수도특별법 남부권 신성장 이끌 재설계 필요하다
부산시는 2000년 ‘대한민국 해양수도’를 선포하며 동북아 해양관문도시 육성 전략을 제시했다. 시는 이후 4차례 해양수도특별법 제정에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2005년 부산해양특별자치시 설치 및 발전에 관한 특별법, 2013년 해양경제특별구역 지정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 2020년 부산해양특별시 설치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차례로 발의됐지만 모두 자동 폐기됐다. 해양수도 관련 포괄적인 내용을 담은 ‘부산글로벌허브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 역시 국회 상임위 문턱만 간신히 넘긴 채 계류 중이다. 정부의 ‘5극 3특’ 국가 균형발전 전략과 해양수산부 이전을 계기로 해양수도 부산의 위상을 법적으로 완성해 ‘해양수도법 잔혹사’를 끝낼 시점이 됐다. 그동안 해양수도특별법이 잇따라 좌초된 이유로는 제정 당위성에 대한 분위기 조성 없이 ‘부산의 특례’만 주장했다는 점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지역 발전을 위한 필요성에 대해 부산시와 부산 시민만 고취되었을 뿐 법안 통과를 위한 논리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적 명분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왜 부산만 특별한 권한을 받아야 하느냐는 질문에 명확히 답할 근거를 찾아야 정치권을 대상으로 설득이 가능하다. 이에 민선 9기에서 접근법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부산만을 위한 특별법이 아니라 울산과 경남을 포함하는 ‘남부 해양수도권’ 전체의 성장 전략이라는 틀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11월 27일 ‘부산 해양수도 이전기관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하 부산해양수도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함으로써 부산은 해양수도라는 법적 명칭을 갖게 됐다. 이 특별법은 해수부 부산 이전을 신속하게 완료하는 근거는 됐지만, 공공기관과 기업 이전 지원에만 국한됐다. 지난달 5일 국민의힘 곽규택 의원은 기존의 부산해양수도특별법에 ‘해양산업특화 혁신지구 조성 및 지원’ 내용을 덧붙여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해양산업특화 혁신지구 조성·운영, 대학·연구 기관 등 협력체계 구축, 디지털 해양산업 육성 및 혁신지구 기업 지원 등이 핵심인데, 최초 발의안에서 배제됐던 내용을 대폭 보완했다는 점에서 진전이 있었다. 이제는 여기서 더 나아가 남부권 신성장을 이끌 수 있도록 해양수도특별법을 재설계해야 한다. 해양 비즈니스 중심지 부산, 친환경 에너지 허브 울산, 항만물류와 제조업을 가진 경남을 아우르고 북극항로 개척, 해양금융 활성화 등 해양 중심의 동남권 전략 산업 육성을 법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정치적 동력을 얻고 국회와 중앙정부 설득에 나설 필요가 있다. ‘남부 해양수도권’에 걸맞은 지위와 권한도 특별법에 명시해야 한다. 서울특별시에 준하는 위상 변경, 국무총리 직할 기구로의 지정, 전폭적 행정·재정적 특례 등 실질적 권한이 뒤따라야 한다. 특별법 제정을 위해 부울경이 합심해서 세밀한 전략적 대응에 나서야 할 때다.
[사설] 증인도 없는 맹탕 청문회로 김승원 임명 밀어붙이나
15일 열린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국회 인사청문회를 지켜본 국민 상당수는 답답함과 짜증을 참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청문회에선 후보자에게 제기된 의혹이나 도덕성 해소는 뒷전이었고, 고성과 호통이 난무했다. “악마” “흉측한 얼굴” “천사 납셨어” 같은 극한 언사까지 오갔다. 예고된 대로 청문회에는 증인·참고인이 한 명도 없었고 후보자도 자료 상당수를 제출하지 않았다. 여러 의혹과 논란이 집중됐지만 후보자는 요구 자료 376건 중 절반이 넘는 243건을 내지 않았다. 청문회 자체가 국민 정의를 지키는 부처를 맡을 인물을 검증할 준비가 안 된 졸속이었다. ‘이런 청문회를 왜 하느냐’는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김 후보자는 지금까지 드러난 흠결만으로도 장관직을 수행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큰 상황이다. 하지만 청문회는 신약 임상시험 승인 청탁 의혹과 배우자·가족 관련 특혜 논란, 위장 전입, 음주운전 전과 등 의혹들을 충분히 풀지 못했다. 오히려 후보자에게 의혹을 정면 반박하는 기회가 됐을 뿐이다. 김 후보자는 의혹 제기를 주도한 한동훈 의원을 겨냥해 “민주주의의 큰 적”이라며 역공도 펼쳤다. 후보자가 가족 관련 의혹 해명 때 눈물을 보인 일도 부적절했다. 장관 후보자로 청문 자리에 섰다면 개인적 억울함은 뒤로 하고 문제투성이 법무부 장관을 맞을지 모른다는 국민 불안감을 해소하는 데 최선을 다했어야 했다. 청문회를 전후한 여당의 후보자 감싸기 행태도 곱씹어 볼 문제다. 청와대와 여당은 청문 과정에서 김 후보자 임명 강행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후보자에게 제기된 의혹 해소는 외면한 채 야당에는 ‘정치 공세’로, 의혹을 제기한 인사에게는 ‘메신저 공격’으로 반격하며 본질 흐리기에 몰두했다. 청문회 직전 여당 원내대표는 “김 후보자를 실무와 개혁 입법 경험을 모두 갖췄다”며 군불 때기에 들어갔다. ‘용혜인 낙마 카드’를 발판 삼아 ‘김승원 살리기’에 나설 것이라는 예측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국민 여론은 살피는지 의문이다. 과도한 엄호가 김 후보자가 향후 이재명 대통령 공소 취소를 밀어붙일 것이라는 우려를 더 키운 형국이다. 차기 법무부 장관이 짊어져야 할 짐이 결코 만만치 않다. 공소청 전환을 비롯한 형사·사법 체계 개편, 검찰 개혁 마무리, 부실 수사 우려 해소까지 우리 사법 시스템이 겪지 못한 도전들을 풀어가야 한다. 김 후보자가 법무부 장관으로 적절한지 최소한의 검증 자리였어야 할 청문회는 사실상 요식행위로 지나가는 상황이다. 지금까지는 김 후보자가 국회 청문회를 넘어설진 몰라도 ‘국민 청문회’에서는 부적격 인사에 더 가깝다. 여당도 국민보다 정권과 김 후보자만 향한 모습이었다. “보면 볼수록 잘 된 인사”라는 여당 대표의 말이 국정 운영의 성과가 될지, 뼈아픈 실책이 될지는 앞으로 정권이 짊어질 몫이 돼가고 있다.
[사설] 정부 부처 가덕신공항 공사비 '핑퐁' 지역민 속 터진다
부울경에 가장 필요한 인프라는 가덕신공항이다. 부울경 주민들은 1980년대 후반부터 동남권 관문공항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정부와 정치권에 호소했다. 가덕신공항이 개항하면 글로벌 기업들이 동남권에 자리를 잡고, 지역 기업들도 세계로 뻗어가는 것은 물론 해양, 금융, 관광, 마이스 등의 지역 특화 산업과 항공 물류 분야도 글로벌 브랜드로 발돋움할 수 있다며 빠른 개항을 촉구했다. 하지만 40여 년이 흐른 현재 가덕신공항 완공 시점이 2030년에서 2035년으로 늦춰진 것도 모자라 정부 각 부처들은 신공항 공사비 증액을 놓고 책임 공방만 벌이고 있다. 또다시 허송세월할 우려가 높아지고 있으니 속이 터질 일이다. 현재 가덕신공항 사업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공사비 증액 문제다. 중동 전쟁에 따른 원자재 가격 상승 때문에 대우건설 컨소시엄에 참여하고 있는 부산과 경남 지역 건설사들은 컨소시엄 탈퇴까지 검토 중인 상황이다. 만약 현실화된다면 가덕신공항 사업이 다시 표류할 우려가 크다. 더욱이 정부도 공사비 증액에 대한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행 국가계약법상 계약 체결 이후 물가 변동분만 공사비에 반영할 수 있어 제도 개선이 필요한 데도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 등은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해법을 찾아놓고도 미적거리는 것은 가덕신공항 개항을 하루라도 앞당겨달라는 동남권 민심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처사다. 더욱이 정부는 최근 820조 9000억 원에 달하는 내년도 예산안을 편성하면서 가덕신공항 건설사업 예산은 올해 6890억 원에 비해 대폭 감소한 4311억 원만 반영했다. 이에 앞서 부산상공회의소와 지역건설업계 등은 가덕신공항 공사비를 현실화할 것을 지속적으로 촉구했다. 특히 중재에 나선 국무조정실도 기획예산처가 총사업비 관리 지침을 개정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게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기획예산처는 다시 국토교통부에 가덕신공항 특별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정부 내부 조정을 거쳐 지침 개정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정리한 사안을 두고 국회 입법이 필요하다며 다시 공을 넘긴 셈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그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관성에 안주한 낡은 행정문화에서 탈피해 적극적인 행정을 펼쳐줄 것을 공직사회에 주문했다. 가덕신공항 공사비 증액과 관련한 각 부처들의 행태는 이 대통령의 국정 철학에도 정면으로 위배된다. 더군다나 지지부진한 ‘핑퐁 행정’ 때문에 컨소시엄 지분 13%를 가진 지역 건설사들이 이탈할 경우 부지조성공사 본계약 체결과 우선시공분 착공 일정 등 개항 로드맵이 큰 차질을 빚는다. 지역 건설사들은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다며 빠른 증액 등 대책 마련을 읍소하고 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가덕신공항 표류 위기를 해결해주길 당부한다.
아라비아 펠릭스
사우디 서쪽면을 따라 위치한 홍해는 고대부터 인도와 이집트, 지중해 일대의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온 곳이다. 특히나 인도양에서 홍해로 접어드는 초입 동편에 위치한 예멘의 서쪽 지역은 고대 아라비아 반도에서 가장 부유한 장소였다. 로마인들이 이 지역을 ‘아라비아 펠릭스(풍요의 아라비아)’라 부를 정도였으니 풍요로움이 넘치던 곳이었을 터이다.아라비아 펠릭스의 중심은 기원전 10세기부터 번성한 사바 왕국이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시바 여왕’은 사바 왕국 통치자의 이름이다. 기원전 8세기에 당시 세계 최대 규모 댐이었던 마리브 댐을 건설해 오아시스 농업을 했을 정도로 풍요로운 나라였다.사바 뿐만이 아니라 이 지역에는 마인, 카타반, 하드라마우트라는 왕국들도 존재했다. 이들 왕국은 지중해 일대를 대상으로 고가 유향과 몰약 무역에 종사했다. 세계사적으로 연구가 활발하지 않아 사료가 적지만 이들 왕국도 아라비아 펠릭스를 이룬 주역임은 분명하다. 해당 지역은 3세기께 급부상한 힘야르 왕국이 패권을 차지하며 주인이 바뀌었지만 힘야르 왕국도 6세기 에티오피아의 악숨 왕국에 정복될 때까지 번영을 누렸다.예멘 서쪽 지역이 고대에 번영을 누렸던 것과는 달리 현대 사우디의 서쪽 지역에 해당하는 홍해 인접지는 고대에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무역 거점들은 있었으나 사바나 힘야르 왕국 같은 농업 문명은 형성되지 않았다. 오히려 현대 사우디의 서남부 지역은 힘야르 왕국 같은 고대 예멘의 영향권 아래에 놓여 있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기독교와 이슬람교, 유대교 등이 왕국의 부침에 따라 혼재했던 해당 지역에서는 힘야르를 정복한 악숨 왕국이 570년께 메카를 향해 쳐들어갔다는 전승이 내려온다. 결국 실패로 끝난 것으로 알려진 이 공격이 고대 예멘 세력이 고대 사우디와 무력 충돌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최근 예멘 후티 반군과 사우디 사이의 무력 충돌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아라비아 반도를 놓고 고대 아라비아의 전쟁이 재현됐다는 얘기들이 나오는 데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다. 고대와 달라진 것은 풍요의 무게 추가 예멘보다는 사우디에 더 기울어 있고 송유관을 비롯한 사우디의 시설에 전 세계의 관심이 쏠려 있다는 점이다. 특히 석유를 주요 에너지원으로 하는 대한민국에게 아라비아 반도는 여전히 아라비아 펠릭스인 듯하다.
논설주간/상무이사
강윤경
수석논설위원
김승일
논설위원
정달식
이상윤
김상훈
천영철
김영한
[박세익의 뷰파인더] 제로클릭 시대, 지역 미디어가 필요한 이유
“앗! 죄송합니다. 제가 헷갈렸습니다.” 생성형 AI 서비스를 누구나 사용하는 요즘, 뜬금없는 AI의 이런 답변을 한번쯤 경험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진실인 양 자신만만하던 AI에게 “그거 아닌 것 같다”고 근거를 들어 확인을 요구하면 바로 꼬리를 내린다. 이용자로선, 그것도 돈을 내고 사용하는 상황이라면 황당하면서도 배신감까지 든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내주는 결과물을 확인하지 않으면 큰일나겠구나 싶다. 바야흐로 ‘제로클릭(Zero-Click)’ 시대가 됐다. 체감상 불과 1~2년도 걸리지 않은 것 같다. AI에 의존해 더 이상 웹서핑 등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다. 제로클릭은 진화한다. 이제 포털 검색을 하면 AI가 찾아준 결과부터 노출된다. 구글 검색 결과 화면의 가장 상단에 제미나이가 먼저 답을 내주니, 이용자의 60% 이상이 아래에 나오는 사이트를 클릭하지 않는다고 한다. 유튜브 영상에도 AI 챗봇이 적용돼 아무리 긴 영상이라도 금방 요약해 주고, 어떠한 질문에도 답한다. 무엇이든 찾아서 요약하고, 정리하고, 종합한다. 사정이 이러니 레거시 미디어와 네이버 등 디지털 미디어가 심각한 위기 상황을 맞았다. 독자, 시청자가 언론사나 포털 사이트, 영상 플랫폼을 보며 손가락으로 만드는 클릭 조회수로 먹고 살던 비즈니스 모델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옥스포드대 부설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의 ‘2026 디지털 뉴스 보고서’를 보면, 올해 우리나라의 AI 챗봇 서비스 이용률은 14%이다. 7~10% 수준인 다른 국가에 비해 가장 높은 수준이다. ‘새로운 물결’에 서둘러 적응하는 한국인의 경쟁 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생성형 AI의 장점이 분명하니 사용자 증가는 피할 수 없는 대세다. 그런데 AI가 ‘정답’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함정이다. AI가 근거라고 내놓는 인터넷 링크를 따라 들어가보면 해당 정보를 찾을 수 없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언론사나 학회 등 그럴듯한 사이트 출처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직접 추적해 들어가면 미로 속을 헤매게 된다. 뻔뻔하게 거짓말을 한다. AI의 결과물은 패스트푸드와 비슷하다. 손쉽게 한 끼를 때울지 몰라도 몸에 이로울지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진짜, 가짜 정보를 구별하는 능력을 탑재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비판적 사고’ 유지하기다. 출처 원문을 반드시 확인하는 수고를 기본값으로 놓고, 교차 검증으로 한 발 더 나아간다. 신뢰할 수 있는 언론사, 기관, 단체 등에서 검증을 거쳤는지가 핵심이다. 언론사마저도 실수할 수 있으니 출처가 된 보도자료나 정책 자료 등을 찾아가는 수고를 마다해선 안 된다. 사실 많은 인력과 시간을 투자해 팩트를 검증하고 진실에 가까운 정보를 제공하려고 노력하는 미디어를 아직은 AI가 따라잡을 수 없다. 합법이든 불법이든 데이터베이스를 뒤져 학습하는 AI는 레거시 미디어의 정보에 크게 의존한다. 그래서 중요한 정보는 텍스트와 영상의 요약본이 아니라 ‘풀 텍스트(Full Text)’ 전체를 파악하길 권한다. AI와 함께 미디어를 더 효율적이고 영리하게 활용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AI에게 묻고, 신문과 온라인 뉴스, 유튜브 영상으로 현장을 확인하고, 소셜 미디어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믿을 수 있는 미디어를 통해 팩트를 확인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지방선거 당시 유튜브 채널 부산일보TV는 현장에 출동해 정당과 후보자에 대한 유권자의 솔직한 이야기를 담은 기획 방송 ‘민심르포’를 연달아 내보냈다. 또 9시간에 가까운 개표 상황 생방송을 진행하며 현장과 선거 결과를 생생하게 전달했다. 독자와 시청자들은 현장의 목소리에 뜨겁게 반응했다. AI가 가짜 인터뷰 장면을 생성할 수는 있겠지만, 시민의 진심 어린 한마디에 담긴 표정과 숨결, 맥락까지 흉내낼 수는 없을 것이다. AI에게 ‘실시간 선거 결과’를 물어봤자 “알 수 없다”는 답만 들었을 것이다. 결국 ‘발품’이 만들어낸 정보가 없다면 가장 혁신적인 기술조차 무용지물인 셈이다. 특히 AI가 지역의 입장을 제대로 대변할지도 의문이다. 바다와 육지를 아우르는 부산과 울산, 경남에서 시장이나 노동 현장의 희로애락을 AI가 공감하고 함께 나서줄 리 만무하다. AI가 학습하는 정보의 치우침도 염려된다. 정보량이 많은 수도권 중심으로 학습할 가능성이 커서다. ‘지역 소외’ 제로클릭 시대에 지역의 정통 미디어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부산일보는 지난 10일 창간 80주년을 맞았다. 부울경 시도민이 살아가는 현장을 누비며 80년 동안 흘린 땀방울, 거기서 만난 시민의 숨결을 쌓아 가며 역사를 기록했다. 앞으로도 미디어 기술 발전과 발을 맞춰 가며,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종합 미디어로 언제 어디서나 현장을 지킬 것이다.
[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문턱 넘은 빙하, 과학의 경고를 들어야 한다
다이어트를 시작해 본 사람은 안다. 매일 운동하고 섭취량을 줄여도 체중계 숫자가 꼼짝하지 않는 ‘정체기’가 온다. 몸은 들어오는 에너지와 나가는 에너지의 변화에 맞서 한동안 기존 상태를 지키려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균형이 깨지면 체중이 계단을 내려가듯 뚝 떨어진다. 자연계의 변화도 이와 닮았다. 같은 자극에 곧바로 같은 크기로 반응하지 않는다. 열과 압력이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겉으로는 평온해 보여도, 임계점을 넘는 순간 전혀 다른 상태로 급전환한다. 점진적인 원인이 어느 날 갑작스러운 결과가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지난 8월 26일 네팔과 중국 티베트의 국경 지대를 덮친 대홍수는 이런 ‘문턱의 재난’을 극명하게 보여 줬다. 랑탕리룽봉 부근의 얼음과 암석 덩어리가 무너져 계곡으로 쏟아졌고, 물과 토사, 거대한 바위가 뒤섞인 흐름이 마을과 도로를 휩쓸었다. 처음에는 규모 5.2의 지진이 원인으로 지목됐지만, 미국 지질조사국은 오히려 빙하·암석 붕괴의 충격이 지진처럼 기록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류의 강 수위는 불과 30분 사이 7~9m나 치솟았다. 수십 년 동안 서서히 진행된 온난화와 빙하 약화가 어느 아침 거대한 파국으로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뜻밖의 사고처럼 보이지만, 이와 같은 시나리오는 이미 10년 전부터 경고됐다. 2015년 위성 자료를 분석한 연구는 히말라야 빙하호 면적이 1990년보다 14.1% 늘었고, 빠르게 커지는 118개 호수를 우선 점검 대상으로 꼽았다. 2017년 네팔 전역을 조사한 연구도 0.1㎢가 넘는 빙하호 131개 가운데 42개를 고위험 또는 매우 높은 위험으로 분류했다. 특히 얼음이나 암석 사태가 호수로 떨어져 큰 물결을 만들고, 불안정한 자연 제방을 넘거나 무너뜨리면 하류에 돌발 홍수가 닥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번 붕괴 지점과 시각을 정확히 예언한 것은 아니지만, 재난을 낳는 조건과 연쇄 과정만큼은 오래전 과학이 보여 준 셈이다. 빙하는 단순히 햇볕에 녹아 그 자리에서 조금씩 사라지는 얼음덩어리가 아니다. 표면에서 녹은 물은 갈라진 틈과 수직 통로를 따라 빙하 속으로 스며들어 바닥까지 도달한다. 이 물이 빙하와 암반 사이의 수압을 높이면 마찰과 접착력이 약해지는 ‘기저 윤활 효과’가 생긴다. 동시에 영구동토가 녹고 암반의 틈이 약해지면 가파른 사면을 붙들던 힘은 더 줄어든다. 마침내 중력이 버티는 힘을 앞서는 순간, 빙하 일부와 암석이 통째로 떨어져 거대한 눈·얼음·암석 사태가 된다. 다만 이번 네팔 재난에서 암석이 먼저 무너졌는지, 빙하가 먼저 떨어졌는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기저 융빙수 역시 가능한 촉진 요인이지 확정된 단일 원인은 아니다. 빙하 아래쪽에서는 또 다른 위험이 자란다. 후퇴한 빙하와 빙퇴석 제방 사이의 낮은 곳에 융빙수가 졸졸 흘러들면, 작은 웅덩이는 해마다 몸집을 불려 빙하호가 된다. 물의 양이 늘수록 흙과 돌로 된 자연 제방에 걸리는 압력도 높아진다. 이번 재난 직전의 위성사진에서는 오래된 대형 빙하호가 뚜렷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빙하·암석 사태가 하천을 먼저 막아 짧은 시간에 임시 호수를 만들었고, 뒤이은 붕괴나 월류로 그 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오래 쌓인 빙하호든 몇 시간 만에 생긴 임시 호수든 원리는 같다. 산 정상 부근에서 떨어진 거대한 얼음과 암석이 물을 밀어 올리거나 제방을 깨뜨리면, 계곡은 순식간에 해일 같은 홍수의 통로로 변한다. 이번 재난은 빙하 붕괴, 산사태, 하천 봉쇄, 범람이 꼬리를 문 ‘복합재난’이었다. 더 두려운 것은 이러한 급변이 히말라야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기후시스템은 온도가 오르는 만큼만 얌전히 변하지 않는다. 빙하와 영구동토, 해류와 해수면, 산림과 생태계는 한동안 충격을 흡수하다 임계점을 넘으면 되돌리기 어려운 속도로 바뀔 수 있다. 폭염과 집중호우가 거세지고, 산지와 해안, 하천이 맞물린 부산에서도 산사태와 침수, 해수면 상승의 위험이 서로 증폭될 수 있다. 과거의 평균에 맞춘 방재 기준만으로는 ‘처음 보는 재난’을 막기 어렵다. 그러므로 과학의 경고를 불안을 부추기는 과장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위성으로 빙하와 산사면의 미세한 가속을 상시 관측하고, 국경을 넘는 자료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위험지역 주민에게 즉시 닿는 경보와 대피 체계를 갖춰야 한다. 우리도 기후·하천·사면·해안 정보를 따로 관리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쇄 위험으로 연결해 감시하고, 임계점을 가정한 최악의 시나리오로 도시와 기반 시설을 점검해야 한다. 정체기는 변화가 멈춘 시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변화가 축적되는 시간이다. 네팔의 참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경고도 분명하다. 자연이 무너진 뒤 수습하는 것보다, 과학이 가리킨 문턱 앞에서 먼저 움직이는 편이 훨씬 안전하고 현명하다.
[데스크 칼럼] 부산대 양산캠퍼스, 마지막 기회 잡자
부산대 양산캠퍼스와 관련해 반가운 소식이 잇따라 들린다. 네이버클라우드와 AI 혁신 생태계 조성을 위한 협약 체결에 이어 ‘서울대 10개 만들기’ 사업 선정, 도시숲 조성도 추진된다. 20여 년째 방치된 양산캠퍼스에 모처럼 훈풍이 불고 있는 것이다. 부산대 양산캠퍼스는 2000년 양산신도시 조성 당시만 해도 지역 발전을 이끌 ‘구원투수’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계획했던 시설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으면서 110만㎡에 달하는 부지 중 54만 2000㎡가 ‘빈 땅’으로 방치되고 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시민들의 실망과 불만도 컸다. 수차례 해법을 모색했지만,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 돌파구로 찾은 것이 2023년 정부의 공간혁신구역 선도사업이다. 용도지역과 건폐율·용적률 등의 규제를 유연하게 적용해 토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양산캠퍼스 유휴부지 개발의 사실상 마지막 기회로 평가됐다. 그러나 부산대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부지 가격을 놓고 이견을 보이면서 사업은 제자리걸음이다. 부산대는 현재 감정평가액 수준을, LH는 과거 매입가격을 기준으로 한 가격을 주장하면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대의 ‘서울대 10개 만들기’ 사업 선정은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다. 부산대는 양산캠퍼스 유휴부지를 산업과 연계한 연구 거점으로 육성하고, 54만여㎡ 규모의 ‘산업AX연구캠퍼스’ 조성을 구상하고 있다. 연구 인력과 기업 등을 지원하는 주거·배후부지도 조성된다. 문제는 재원이다. 지역 거점 국립대의 경쟁력을 높이고 연구·교육 기능을 강화하려면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다. 실제 부산대가 최근 마련한 비공개 활성화 용역안에 8000억 원을 투입하는 방안이 담긴 것으로 알려진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같은 규모가 맞다면 정부 지원만으로 필요한 재원을 모두 충당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결국 부산대가 보유한 자산을 활용해 자체 재원을 마련하는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 장기간 활용하지 못한 양산캠퍼스 유휴부지 일부를 매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이런 점에서 공간혁신구역의 중요성이 커진다. 같은 땅이라도 어떤 용도로 개발할 수 있느냐에 따라 토지 가치는 크게 달라진다. 아파트 등 주거시설을 건립하는 데도 유리해진다. 공간혁신구역이 부산대가 유휴부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미래 경쟁력 확보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될 수 있다. 네이버클라우드와의 협력도 기대를 높인다. AI 공동연구와 산학협력, 인재 양성, 창업 지원 등을 통해 양산캠퍼스를 동남권 AI 산업 혁신의 거점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대학의 연구 기능과 기업의 기술력이 결합하면, 20년 넘게 방치된 빈 땅이 미래 산업을 키우는 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 윤영석 국회의원이 추진하는 도시숲 조성사업도 눈여겨볼 만하다. 캠퍼스 내 3만 3000㎡에 도시숲과 자연공원으로 조성해 시민들에게 개방하겠다는 계획이다. 연구·산업 기능에 시민을 위한 공간까지 갖춘다면 양산캠퍼스의 역할은 더 커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들 사업을 개별적으로 추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의 사업으로 묶어야 한다. 그래야 양산캠퍼스가 단순한 유휴부지를 넘어 양산의 새로운 성장거점으로 거듭날 수 있다. 이를 위해 부산대와 LH의 결단이 필요하다. 양측이 현실적인 접점을 찾아 공간혁신구역 선도사업이 실제 개발로 이어질 수 있도록 속도를 내야 한다. 양산시의 역할도 중요하다. 최근 모든 부서가 참여하는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적극 대응하기로 했다. TF는 단순한 행정 지원을 넘어 부산대와 LH, 경남도, 정부를 연결하는 실질적인 조정자가 돼야 한다. 필요하다면 제도 개선과 국비 확보에도 나서야 한다. 양산은 인구 40만 명을 바라보는 도시로 성장했다. 도시의 외형이 커진 만큼 새로운 산업과 교육·연구 기능을 갖춰야 한다. 부산대 양산캠퍼스가 그 중심에 설 수 있다.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공간혁신구역이라는 제도적 틀이 마련됐고, 부산대가 미래 연구 기능 강화를 위한 새로운 구상을 내놓았다. 네이버클라우드라는 민간기업과의 협력도 시작됐다. 이제 남은 것은 부산대와 LH가 현실적인 해법을 찾고, 양산시와 지역 정치인이 적극적으로 중재하며, 정부와 경남도 역시 힘을 보태야 한다. 시민들이 오랫동안 ‘기회의 땅’이라며 기다려온 부산대 양산캠퍼스가 더 이상 빈 땅으로 방치돼서는 안 된다. 양산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이번에는 반드시 마지막 기회를 잡아야 한다.
[노트북 단상] 올해도 롯데는 왜 안되노?
20경기가 남았다. 확률은 0.1%까지 떨어졌다. 여기서 0.1%는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가 5위에 등극해 가을 야구에 진출할 확률을 의미한다. “롯데는 왜 안 되노?”라는 질문을 롯데 자이언츠 담당 기자를 하며 가장 많이 받는다. “잘 못 치고, 잘 못 던지고, 잘 못 잡아서 아닐까요?”라는 말로 상황을 모면한다. 올 시즌 롯데 자이언츠의 홈 경기를 직접 보며 여러 기사를 썼지만 사실 직관적으로 얻은 결론이기도 하다. 막아야 할 상황에서 막지 못한 투수진, 점수를 내야 하는 기회에서 침묵하는 타선, 팽팽한 승부의 김을 확 빼는 엉성한 수비. 그 모든 것이 함축된 결과가 안타깝게도 지금 롯데의 현실이다. ‘올해는 다르다’는 희망이자 바람 같았던 구호는 올해도 틀렸다. 시즌 전 야구 전문가들의 예상에서 롯데는 하위권으로 분류됐다. 지난 겨울 자유계약선수(FA) 영입은 없었고 전지훈련 불법 게임장 사태로 주전급 선수들이 전열에서 이탈했다. 이같은 예상을 깨기 위해선 ‘반전’이 필요했다. 신인급 선수의 활약, 예상치 못한 외국인 선수의 활약 같은 것 말이다. 반전은 정반대로 일어났다. 기대했던 베테랑과 지난해 가능성을 보여준 선수들이 동반 부진하면서 롯데는 시즌 내내 완전체 전력을 꾸리지 못했다. 그나마 선발 투수 김진욱, 포수 손성빈, 유격수 전민재가 올 시즌 자리를 잡은 건 소소한 위안거리다. 롯데는 2024년 당대 최고의 명장으로 꼽혔던 김태형 감독을 3년 24억 원의 계약으로 모셔왔다. 9년 연속 두산 베어스를 이끌고 한국 시리즈를 갔던 최고의 감독이었다. 하지만 계약 마지막 해인 올해까지 김태형 감독은 가을 야구 무대를 밟지 못했다. 2024년 ‘윤나고황’ 윤동희, 나승엽, 고승민, 황성빈)으로 불리는 신진급 야수들이 분전했지만 투수진이 아쉬웠다. 2025년에는 8월까지 3위를 달렸지만 8월 돌연 12연패 끝에 7위로 시즌을 마쳤다. 올해는 5위 근처도 못 가보고 시즌이 끝나간다. 20경기를 남겨둔 지금, ‘롯데는 왜 안 되노?’라는 질문은 ‘롯데 감독은 어찌 되노?’라는 질문으로 꼬리를 문다. 2024년(66승 4무 74패), 2025년(66승 6무 72패), 2026년(14일 현재 53승 2무 69패) 3년간 승률 5할을 넘기지 못한 감독. 당연히 경질이 수순이지만 롯데 팬들이 이같은 질문을 하는 데는 ‘감독이 바뀐다고 롯데가 바뀌나’라는 아주 강한 그동안의 실망감이 묻어 있다. 변화를 해야 하는 건 자명하다. ‘다음 감독은 누구?’라는 논의보다 더 큰 논의가 필요하다. 공수주 어떤 부분을 보완해야 하고 어떤 선수를 영입해야 하고 궁극적으로 어떤 야구를 해야 할지 같은 야구단의 방향성 말이다. 방향을 잡은 뒤 그에 걸맞는 사령탑을 모셔야 한다. 2001년~2007년 암흑기를 끝냈던 건 외국인 감독 제리 로이스터였다. 감독 교체라는 하나의 방편을 넘어 야구단 전체의 변화를 해도 가을 야구를 장담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당대 최고라 불렸던 감독 한 명이 팀을 바꾸는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3년간 롯데 팬들은 확인했다. 롯데의 가장 큰 암흑기로 불리는 2001~2007년을 롯데 팬들은 ‘비밀번호 ‘8-8-8-8-9-7-7’로 부른다. 숫자는 정규 시즌 순위를 뜻한다. 최근 9년을 돌아보면 숫자는 더 참혹하다. 7-10-7-8-8-7-7-7-?이다. 내년마저 가을 야구에 실패하면 10년 연속 실패로 한국 야구 역사상 최장 기록이 된다.
[중앙로365] 어공과 늘공을 넘어, 부산 블록체인의 다음 10년
정권이 바뀔 때마다 관가에는 ‘어공’과 ‘늘공’이라는 말이 다시 등장한다. 선거와 함께 들어온 ‘어쩌다 공무원’이 핵심 자리를 맡고, 오랜 기간 전문성을 쌓아온 ‘늘 공무원’이 뒤로 밀리는 풍경을 두고 요즘에는 ‘관료 잔혹사’라는 말까지 나온다. 그러나 어공이라서 문제도, 늘공이라서 해답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권한을 가진 자리에 그 권한을 감당할 전문성과 책임이 함께 있느냐는 것이다. 민선 9기 부산시가 출범했다. 수장이 바뀌면 사람과 정책의 우선순위도 달라진다. 다만 블록체인과 디지털금융처럼 기술과 금융, 규제와 산업이 얽힌 분야라면 인사의 기준은 더 엄격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어공’은 단순한 자문위원이 아니다. 시장과 가까이 호흡하며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주요 사업의 방향을 최고 의사결정권자에게 직접 설명하고 관철할 수 있는 정무형 책임자다. 그렇다면 이런 자리에 필요한 기준도 분명하다. 시장과의 인연이 아니라 산업에 대한 전문성, 중앙정부와의 협상력, 그리고 결과에 대한 책임이다. 부산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의 성적표를 보면 그 필요성이 선명해진다. 2019년 특구 출범 당시에는 기업 유치와 창업 등 250개사에 이르는 효과가 기대됐다. 그러나 2025년 특구 입주기업은 17개사였다. 신규 실증사업은 2023년부터 3년 연속 없었고, 지금까지 부여된 규제특례 17건 가운데 법령 정비가 완료된 것은 4건이다. ‘블록체인 도시 부산’이라는 이름과 산업의 현실 사이에 간극이 생겼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이 결과를 담당 공무원의 역량 부족으로 설명하는 것도 본질을 놓치는 일이다. 얼마 전 서울의 한 증권사 대표는 전국 여러 지자체와 블록체인 사업을 논의해 봤지만 부산만큼 담당 공무원들이 기술을 공부하고 기업과 함께 해법을 찾으려는 곳이 드물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사람보다 특구가 가진 권한의 한계와, 그 한계를 돌파할 힘의 부족에 가깝다. ‘규제자유특구’라는 이름만 들으면 부산에서 필요한 규제를 자유롭게 풀 수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은 다르다. 부산시는 기업과 사업을 발굴하고 실증을 설계할 수 있지만, 실증특례는 중앙정부와 관계 부처의 검토를 거쳐야 한다. 더 큰 관문은 그다음이다. 실증에 성공해도 전국적인 사업으로 키우려면 해당 규제를 담당하는 중앙부처가 법과 제도를 바꿔야 한다. 부산은 실험의 무대는 만들 수 있지만 제도의 문까지 혼자 열 수는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무형 책임자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산업을 이해하고, 현장 공무원이 축적한 경험을 존중하며, 부산에서 확인된 가능성을 들고 중앙정부를 설득해 규제 개선과 제도 변화까지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부산의 가능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2024년 시작된 블록체인 특화 클러스터 사업은 최근 2년간 178억 원의 투자 유치와 123명의 신규 고용을 만들어냈다. 올해도 19개 기업을 대상으로 55억 원 규모의 지원이 진행되고 있다. 문제는 실증과 규제 개선, 투자와 기업 정착을 하나의 선으로 잇는 힘이다. 스타트업 지원 정책도 같은 원칙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 부산의 일부 지원사업은 부산에 본사를 둔 기업뿐 아니라 지사를 둔 기업에도 문을 열고 있다. 외부의 좋은 기업을 끌어들이려는 취지라면 지사 기업을 배제할 이유는 없다. 다만 공공 재원을 배분할 때 ‘부산 주소’만 확인해서는 안 된다. 부산에서 몇 명을 고용했는가. 지역 인재를 채용했는가. 연구개발과 매출이 실제 부산에서 일어나는가. 지원이 끝난 뒤에도 부산에 남아 투자와 고용을 이어가는가. ‘부산에 사무실이 있는 기업’과 ‘부산에서 성장하는 기업’은 같지 않다. 지원사업의 목적은 좋은 제안서를 고르는 데 있지 않다. 좋은 기업을 키우고, 그 기업이 부산에서 사람을 뽑고 성장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래서 기업의 지원 횟수보다 부산에서 만든 고용과 투자, 매출과 잔류 성과를 더 무겁게 평가해야 한다. 새 시정의 성패는 몇 명의 기관장과 정책 책임자를 바꿨느냐로 평가되지 않을 것이다. 부산에서 몇 개의 좋은 기업이 태어나고, 투자받고, 사람을 뽑고, 결국 부산에 남았느냐. 그 숫자가 진짜 성적표다. 어공에게는 추진력이 필요하고, 늘공에게는 전문성과 행정의 연속성이 있다. 민간에는 시장을 읽고 빠르게 움직이는 실행력이 있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신할 수 없다. 세 힘이 한 팀으로 움직일 때 ‘특구’라는 행정의 이름은 비로소 ‘산업’이 된다. 부산 블록체인의 다음 10년은 사람을 바꾸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부산에서 기업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끝내 남을 이유를 만드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편집국에서] 1인당 소득 4만 달러 시대의 명암
지난해 12월 베트남 까마우 앞바다에는 두 가지 색깔의 물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서쪽 해안 지역 바닷가 물색이 적갈색과 파란색으로 뚜렷하게 구분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 경제가 이 바다 풍경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쪽에서는 반도체 호황으로 인한 역대급 수출 실적 기록, 경제 성장률 상승,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전망 등의 ‘굿뉴스’가 연일 나오고 있지만 다른 한쪽으로는 중소기업 연체율과 파산 신청 증가, 청년 실업률 상승, 지방 미분양 증가 등의 ‘우울한 소식’이 올라오고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올해 한국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6%에서 3.3%로 상향 조정했다. 지난 5월 전망치에서 석 달 만에 0.7%포인트(p) 높였다. 지난달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발표한 한국의 경기선행지수(CLI)도 26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에 힘입어 2000년대 이후 가장 높은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지난 1일 산업통상부가 발표한 ‘8월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한국의 수출액은 전년 동월 대비 70.9% 증가한 1022억 5000만 달러였다. 한국의 월 수출액이 1000억 달러를 넘긴 것은 사상 최초다. 전 세계에선 독일과 중국, 미국에 이어 네 번째다. 우리나라는 올들어 지난 10일까지 누적 수출액이 7285억 6000만 달러로, 지난해 연간 수출액(7093억 달러)을 한참 넘어섰다. 정부는 오는 12월 초 1조 달러를 달성할 것으로 전망하면서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를 예고했다. 하지만 우리 경제의 이면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상반기 수출 10달러 중 4달러는 반도체 차지다. 반도체가 대략 40%의 경제를 견인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이클이 있다는 반도체의 실적이 내려간다면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다시 3만 달러, 2만 달러 대로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또한 국내 5대 은행의 지난 5월 말 중소기업 연체율은 평균 0.73%였다. 1%도 안 된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들 은행의 합산 수치가 확인되는 2020년 1월 이후 최고치다. 중소기업 연체율은 작년 말 0.50%에서 수개월 새 0.23%p 급등했다. 법인의 파산신청도 우려스럽다. 법원통계월보 등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전국 법원에 접수된 법인 파산 신청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7.7% 증가했다. 이는 2006년 통합도산법 도입 이후 상반기 기준 가장 많은 수준이다. 경기침체로 기업들의 매출과 영업이익이 줄어들고 있는 가운데 기존 대출의 상환 부담까지 겹치면서 상환 여력이 약화된 때문이다. 지방 부동산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부실 사업장도 늘고 있다. 국토교통부의 7월 말 집계를 보면 전국 미분양 주택 6만 8217가구 가운데 비수도권 물량은 4만 8758가구로 71%를 차지했다. 준공 후에도 팔리지 않은 ‘악성 미분양’은 비수도권 비중이 85%에 달했다. 분양가에서 몇억 원씩 할인하는 사태까지 빚고 있다. 고용 면에서도 양극화 현상을 보인다. 지난 9일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8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OECD 비교 기준인 15~64세 고용률은 70.4%로 0.5%p 올랐다. 8월 기준으로 15~64세 고용률이 70%를 넘어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지난달 15~29세 청년층 실업자는 19만 5000명으로, 전년보다 1만 1000명 늘었다. 청년층 실업률은 5.4%로 0.5%p 상승해 2022년 8월 이후 4년 만에 가장 높았다. 국민들은 혼란스럽다.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는데 내 삶은 결코 나아진게 없다”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대기업 취업도 바늘구멍인데, 이마저도 삼성전자·SK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업종 종사자와 기타 업종 종사자로 갈린다. 반도체 분야 종사자들이 성과급으로 5억~6억 원씩 받아가면서 그렇지 않은 이들의 상대적 박탈감도 커지고 있다. 정부는 이처럼 우리 경제에 만연해있는 경제 불균형에 대한 원인 분석과 처방을 고민해야 할 때다. 청년 실업을 해소하는 방안이 무엇인지, 왜 중소기업들이 빚을 못 갚고 있는지, 지방 미분양은 어떻게 하면 해소할지 등에 대한 분야별 해법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이보다는 ‘선거표’를 의식한 정책 발표로 오히려 갈등만 키우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반도체 호황으로 대기업 법인세가 수십조 원이 더 걷히는 상황인데도 고가 주택 소유자에 대한 보유세를 확대하고, 반도체 단지 추가 건설을 놓고 다수의 후보지에 대한 여론 수렴이나 전문가 평가 없이 특정 지역에 대해 정부 주도로 진행하는 식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지지율이 최근 30%대로 떨어졌다. 이제라도 ‘경제의 균형을 잡는’ 정부로 거듭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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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편백 저기도 편백… 수종 다양성 포기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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