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07 수요일
[사설] 거점국립대병원 수술 급감, 지역 필수의료 누가 지키나
소위 ‘빅5’로 불리는 수도권 병원을 찾아 연간 100만 명이 새벽 KTX에 몸을 싣는다. 그로 인해 연간 4조 6000억 원이 넘는 사회적 비용이 지방민에게 전가되고 있다. 의료 인력과 시설, 서비스 수준에서도 ‘서울공화국’의 폐해는 여전하다. 정부가 거점국립대병원을 지역 필수의료의 중추로 육성하겠다고 나선 것은 뒤늦었지만 옳은 방향이다. 부산대병원의 지역 완결형 메디컬센터 추진도 원정 치료의 병폐를 해소하는 전기가 돼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 국립대병원 전문의 수는 ‘빅5’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수술 건수는 줄고 빈 병상은 늘고 있다. 지방 의료는 의정 갈등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국립대병원의 위기는 수치에서도 드러난다. 올해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서울대를 제외한 국립대병원 9곳의 평균 병상 가동률은 2023년 73.6%에서 2024년 56.4%로 급락했고 지난해에도 같은 수준에 머물렀다. 경상국립대병원은 75.4%에서 52.9%로 떨어졌다. 수술 감소는 더 심각하다. 서울대병원을 포함한 국립대병원 10곳의 수술은 2023년 19만 3213건에서 지난해 14만 5810건으로 24.5% 줄었다. 특히 부산대병원은 지난해 1만 3991건으로 2023년보다 37.6% 줄어 감소 폭이 가장 컸다. 부산대병원은 지난해 말 전공의 복귀로 10월 기준 병상 가동률이 75%까지 회복했지만 전공의가 정원의 68%에 그쳐 인력 부족은 여전하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과 재정이다. 올해 6월 기준 지역 대학병원 9곳의 전문의는 1904명으로 ‘빅5’ 3985명의 47.8%에 그쳤다. 병상은 ‘빅5’의 87.1%에 이르지만 10병상당 전문의는 2.37명으로 ‘빅5’의 4.31명에 크게 못 미쳤다. 이래서는 24시간 중증·응급·필수의료 체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렵다. 또 경상국립대병원의 누적 금융 부채는 3392억 원에 달하고 연간 이자만 105억 원에 이른다. 부산대병원도 1235억 원의 부채를 안고 있다. 시설 투자비를 일반 금융권 대출에 의존한 탓이다. 의료진 부족과 경영난이 신뢰 실추와 환자 이탈을 부르고, 이것이 다시 경영 악화로 이어지는 악순환만큼은 막아야 한다. 지역 의료의 붕괴는 ‘서울행’과 동전의 양면이다. 중증 환자가 원정 치료에 나서는 것은 개인의 선택처럼 보이지만, 수도권과 지역 간 의료 격차가 원인이라면 강요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거주지에 따라 건강 불평등이 발생하는 구조를 바로잡는 것은 국가의 책무다. 정부가 국립대병원을 보건복지부로 이관하고 지역 필수의료의 중추로 육성하겠다고 한 만큼 이제 선언을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 중증·응급·희소 질환까지 책임지는 지역 완결형 의료체계가 구축되려면 전문의 확충과 필수진료과 지원, 전공의 지역 배정 확대뿐 아니라 재정 지원도 필요하다. 해답은 거점국립대병원의 혁신에 있다. 정부의 구체적인 로드맵과 속도감 있는 집행이 시급하다.
[사설] '국회 제청 관여는 위헌' 국감서 작심 발언한 대법원장
조희대 대법원장이 6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대법원 국정감사에 기관장 자격으로 출석했다. 민주당은 국감에서 조 대법원장을 상대로 청와대의 대법관 후보자 재제청 요청 거부를 따져묻겠다며 증인으로 채택했다. 하지만 조 대법원장은 일반증인 출석 요구에 대해 지난 2일 법사위에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했다. 조 대법원장은 인사말을 통해 “헌법의 취지에 비춰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에 관해 증언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삼권분립과 사법 독립의 원칙을 훼손할 염려가 있다”며 여당의 일반증인 출석 요구와 증인 선서를 거부했다. 이후 서영교 법사위원장은 조 대법원장의 이석을 허가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법사위는 국감 첫날부터 조 대법원장의 증인 자격을 두고 정면충돌했다. 조 대법원장은 이날 대법관 재제청 논란에 대한 여권 의원들의 의혹 제기에 조목조목 반박하고 나섰다. 청와대의 재제청 요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사유와 헌법적 근거가 명확하게 기재돼 있지 않았고, 공문 내용만으로는 취지를 알기도 어려웠다고 밝혔다. 특히 “대법원장은 국회의 동의 절차, 대통령의 임명 절차에 전혀 관여할 수 없듯이, 국회와 대통령도 대법원장의 제청에 전혀 관여할 수가 없다”고 했다. 국회가 대법원장의 제청에 간섭하는 건 헌법이 명문으로 정한 기관 간 분배와 사법권 독립에 반한 위헌적 조치라고 강조한 것이다. 대법원장이 국감에서 의원들 질의에 답변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국감장에서 통상 대법원장은 인사말, 마무리 발언을 하고 의원들의 세부 질의는 법원행정처장이 답변해 왔다. 삼권분립을 보장하기 위한 오랜 관례였다. 그럼에도 여당 주도로 대법원장을 국감장 증인석에 세워 대법관 재제청 불응에 대한 추궁을 시도한 것은 국회의 견제 권한을 넘어 사법부 독립을 흔드는 일이다. 이날 법사위의 대법원 국감은 민주당의 일방적인 증인 채택과 이석 불허용 등 지난해와 판박이였다. 지난해 국감에서 추미애 법사위원장이 조 대법원장의 이석을 허가하지 않으면서 민주당 의원들은 이 대통령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파기환송에 대한 질의를 쏟아낸 바 있다. 법사위 국감이 여야 정쟁의 장으로 변질돼 안타깝다. 국감 첫날부터 민주당이 조 대법원장을 몰아붙여 증언을 요구하고 국감장 이석 여부를 놓고 국민의힘이 반발하면서 법사위 감사는 파행으로 치달았다. 국감의 목적은 입법부가 행정부의 잘못된 정책은 없는지 꼼꼼히 따져 보고 문제점을 바로잡는 것이다. 물론 사법부의 행정이나 예산 집행을 살필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감이 사법부와 대법원장을 겨냥한 공세의 장이 된다면 그 존재 이유를 찾기가 어렵다. 법사위만 하더라도 형사사법체계 졸속 개편에 따른 문제점 등 시급히 점검하고 수정해야 할 국정 과제가 산적하다. 여당은 사법부 흔들기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행정부 견제와 민생 현안 점검 등 국감 본연의 책무에 충실했으면 한다.
[사설] 따져야 할 국정 현안 산적한데 정쟁으로 시작한 국감
6일 이재명 정부 출범 후 두 번째 국정감사의 막이 오른다. 여야는 이번에 정부 부처와 산하기관, 지자체까지 800개 넘는 기관을 대상으로 견제와 감시에 나선다. 올해 국감은 지난해와 달리 이재명 정부가 전적으로 책임진 1년을 점검하는 자리다. 국회 본연의 기능이 더 작동해야 하는 이유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이번 국감을 ‘정책·민생 국감’으로 규정, 정부 국정과제 성과를 부각하겠다는 각오다. 반면 국민의힘은 ‘이재명 정부 실정 검증대’로 보고, 부동산·안보·재정·인사 등 국정 전반을 겨냥한 공세를 벼르고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국감은 여야 모두 국민을 대신해 회초리를 들어야 할 시간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시작 전부터 증인 채택을 놓고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어 ‘정쟁 국감’ 우려가 크다. 당장 대법관 후보자 재제청 갈등 당사자인 조희대 대법원장 증인 출석 문제를 놓고 난타전이 거세다. 민주당이 대법원장을 일반 증인으로 부르자 조 대법원장은 불출석 사유서를 내며 맞받았다. 이어 여당이 사퇴 압박에 나서면서 국민의힘은 조 대법원장 옹호로 대응했다. 조 대법원장이 관례대로 기관장 자격으로 참석한다고 해도 후속 공방이 벌어질 공산이 크다. 국민의힘이 김현지 청와대 제1부속실장, 김용범 전 청와대 정책실장을 증인으로 요청한 일은 또 다른 논란이다. 이번에도 기업인 줄소환 논란은 반복됐다. 국감을 ‘의정 활동의 꽃’이라고 부르는 건 여야가 치열하게 맞붙어 정책을 따지고, 고칠 건 고쳐 국정이 제대로 굴러가도록 바로잡을 기회이기 때문이다. 경제, 사회, 안보, 외교 문제가 얽히고설킨 복합적 위기까지 닥친 상황이다. DMZ 지뢰 폭발과 북 미사일 발사에 따른 대비 태세 점검, 거듭된 대책에도 치솟는 집값과 지방 부동산 몰락, AI 준비·대응 상황 점검, 대미 투자 관련 미국과의 불협화음, 지휘관 없는 공소청·중수청 출범 등 감시할 현안이 차고 넘진다. 지방 입장에서는 3대 메가프로젝트, 2차 공공기관 이전 등의 정책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한다. 국회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하지만 여야가 이번 국감을 대하는 자세를 의심케 하는 조짐들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여당은 압도적인 세를 앞세워 정부를 감싸려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제1 야당인 국민의힘은 지난 3일 서울에서 대규모 장외 집회를 열었다. ‘야당의 시간’이라는 국감 준비에도 아까운 시간에 ‘광장’으로 뛰쳐나갔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다. 여야 모두에 당부한다. 지금이라도 국가 위기와 민생 불안 속에 국민이 국회에 바라는 바를 제대로 살피길 바란다. 여당은 독선을 경계하고, 정부 편만 들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국민의힘을 비롯한 야권 역할은 더 중요하다. 자료를 하나라도 더 모으고, 수치를 꼼꼼히 따져 실정을 파고들길 바란다.
저출산과 병역 특례
국방만큼 저출산 리스크에 노출된 분야도 드물다. 1970년대 국군 상비 병력은 60만 명 정도였다. 북한보다 재래식 무기가 모자라던 시절이었다. 정부는 보병의 수로 부족한 화력을 상쇄하려 했다.그러나 60만 명은 군대의 적절한 수용 범위를 넘어선 규모였다. 248km 휴전선 철책 전체에 보병 사단을 촘촘히 박아 넣고도, 군인이 남았다. 방위병과 전투경찰 제도를 대규모로 운영했던 것도 남는 국방 병력이 많았기 때문이다.1973년 병역특례제도가 도입된 것도 징병 자원이 풍부해서였다. 당장 군인을 늘리는 것보다, 북한과의 국력·메달 경쟁에서 앞서는 게 국익에 훨씬 더 큰 도움이 될 때였다. 군인은 어차피 많았다.이후에도 상비 병력은 꾸준히 늘었다. 1980년대 말 65만 명에 도달했고, 1990년대 중후반에는 69만 명 수준까지 늘었다. 북한이 병력을 늘린 것이 확인돼, 정부도 군인 수를 늘렸다. 해군, 공군, 기계화 부대 등이 강화되면서 새로운 군인 수요도 생겼다. 1995년 방위병제 폐지로 현역 입대자가 늘어나기도 했다.나라가 부강해진 것도 병력 증가와 관계가 깊다. 70만 명 가까운 대군을 운영해도 될 정도로 대한민국의 재정과 경제력이 탄탄해졌다.2000년대 초부터 상황이 역전됐다. 1980년대부터 나타난 저출산의 영향과 군복무 단축 효과가 겹쳐 군인 수가 줄기 시작했다. 2010년 상비 병력은 65만 명으로 줄더니, 2018년 말에는 59만 명대로 떨어졌다. 60만 명이 깨진 건 1953년 정전 이후 처음이었다. 5년도 안 돼 2022년 50만 명 선도 무너졌고, 지금은 45만~47만 명 수준이다.줄어드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2030년대까지는 직업 군인을 늘려 지금의 병력 규모를 유지하겠다는 게 정부 계획이지만, 2040년대엔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병력은 20만~30만 명 내외로 떨어질 것으로 추정된다. 60만 명을 운영하던 국방 시스템은 더는 작동하기 어려운 단계로 들어가고 있다.2026년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축구 대표 등에 대한 병역 특례 논란이 거세다. 징집병은 많고 대한민국 브랜드 가치는 바닥이던 시절, 국위 선양을 위해 만든 병역특례제도를 이제는 크게 손질해야 한다. 더불어 어떻게 적은 인원으로도 충분한 전투력을 낼 수 있는 효율적인 군대를 만들지도 더 고민해야 한다. 수년 뒤 징집 가능 인원수는 이미 정해진 미래다.
논설주간/상무이사
강윤경
수석논설위원
김승일
논설위원
정달식
이상윤
김상훈
천영철
김영한
[강윤경 칼럼] 해수부 부산 이전 그 후
해양수산부가 부산으로 온 지도 벌써 1년이 다 돼 간다. 동구 수정동 임시청사에서 개청식을 하고 부산 시대 개막을 알린 게 2025년 12월 23일의 일이다. 그 사이 해수부 신청사 위치도 북항 1단계 재개발 부지로 정해졌고 2030년이면 북항 청사 시대가 열린다. SK해운과 에이치라인해운, 흥아해운에 이어 국내 최대 해운기업 HMM도 부산으로 옮겼다. 팬스타 아크로호가 북극항로 개척에 나서 북극해의 유빙을 뚫고 유럽 노선 운항에 성공한 후 12일 부산항으로 돌아온다. 부산 지역 대학의 해양 관련 학과 입시 경쟁률이 크게 높아졌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해수부 이전 후 골목상권이 들썩인 것을 시작으로 부산에 불고 있는 긍정적 변화들이다. 정부 부처 이동은 그 자체로 낯선 일은 아니다. 1980년대 정부과천청사 이전이 있었고, 2010년대에는 정부세종청사 시대가 열렸다. 이에 비하면 해수부는 일개 부처 이동에 불과하지만, 정부 청사 집합적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의미를 갖는다. 부산으로서는 오랜 해양수도 꿈을 현실화하는 출발점이지만 국가적으로도 수도권 일극주의 성장 전략의 구조적 문제를 극복하고 해양 강국으로 나아가는 전환점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담겨 있다. 수도권에 비견될 남부 해양경제권 생태계를 만들어야 가능한 국가적 과제다. 6·3 지방선거를 앞둔 4월 청와대에서는 이재명 대통령 주재 비상경제점검회를 통해 남부 해양수도권 육성 전략을 발표했다. 해수부는 북극항로를 선도하는, 산업이 대도약하는, 기업·사람·자본이 모이는, 살기 좋은 남부 해양수도권이라는 4대 전략을 중심으로 세부 과제를 속도감 있게 추진하겠다고 했다. 부산 시민은 해수부 이전을 주도한 전재수 후보를 시장으로 선택함으로써 해양수도 부산을 향한 열망을 표출했다. 하지만 선거 후 해양수도 부산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도 조금씩 식고 있다. 전 시장이 해수부를 부산으로 이전하고, 해운 대기업 본사를 유치하고, 동남권투자공사와 해사전문법원을 설립해 해양수도의 꿈을 이루겠다고 반복해도 크게 감흥이 없다는 반응들이다. 이들 사안은 전 시장 당선으로 선 반영됐다는 생각 때문인 듯하다. 기대치가 높아진 만큼 상대적으로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수부는 이전을 계기로 기능을 강화해 명실공히 대한민국 해양 컨트롤타워로 거듭나기를 기대했지만, 선거 후 논의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지역에서는 조선·해양플랜트, 국제 물류, 해양레저·관광 등을 해수부로 옮겨야 한다고 줄기차게 요구했다. 정부 부처를 육상부와 해수부로 나눌 정도의 해양에 대한 기능 집중이 있어야 해양경제권 조성을 이끌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2027년도 정부 예산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여전히 1% 안팎에 불과한 게 현재의 해수부 위상이다. 해수부 이전과 패키지로 약속한 한국해양교통안전공단, 한국어촌어항공단, 해양환경공단, 해양수산과학기술진흥원, 한국항로표지기술원, 한국해양조사협회 등 6대 공공기관 이전도 정부 2차 공공기관 이전에 물타기 돼 버렸다. 이런 가운데 지방선거 후 정부의 5극 3특 균형발전 전략으로 3대 메가프로젝트가 발표되면서 해양수도권은 상대적으로 묻혔다. 반도체와 피지컬AI, 데이터센터로 ‘남부권 반도체 혁신 벨트’를 조성하겠다는 것인데 호남은 반도체 팹을 중심으로 800조 원 이상 대규모 신규 투자를 집중하면서 부울경은 기존 수백억 원의 투자를 끼워넣는 수준에 그쳤다. 물론, 반도체 대기업의 호남 투자를 소지역주의 관점으로 시비 걸 일은 아니다. 문제는 호남 반도체 팹에 쏟는 정성이 해양수도 부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대통령까지 나서 광주 군 공항 이전 속도전을 강조하면서 해양수도권의 필수 인프라인 가덕신공항 적기 완공을 위한 공사비 증액은 특별법 개정까지 거론하며 발목을 잡는다. 같은 대기업인데 대한항공의 통합 LCC 부산 거점 약속은 내몰라라다. 정부의 2차 공공기관 이전 원칙을 생각하면 산업은행 부산행도 정부 여당이 결자해지해야 할 사안인데 묵묵부답이다. 지방선거 후 이재명 정부 국정지지율 하락 속에 부울경 민심이 상대적으로 더 싸늘해진 것은 이런 상황이 반영된 결과다. 집권 여당 지지율 하락에 놀란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3일에도 부산을 찾아 ‘2028년 총선 주전장은 한강이 아니라 낙동강’이라고 강조했지만 말로만 될 일은 아니다. 김 대표가 SNS에 ‘돔돔돔, 부캉이’라고 올리며 북항 돔 아레나 지지를 밝힌 것은 반길 일이지만 해양수도권을 위해서는 다방면의 전폭적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 그래야 전재수 시장의 비수도권 맏형 역할에도 힘이 실린다. 그리고 해양수도권 조성은 지역 민원이 아니라 국가의 성장잠재력 회복을 위한 국정 과제다.
[명노신의 스페이스] 우주와 야생마
70여 년의 우주개발 역사에서 수많은 성공 신화가 쓰여 왔다. 1969년 인류 최초의 유인 달 착륙, 1997년 발사되어 2004년 토성 궤도에 진입한 카시니 우주선의 토성 탐사, 그리고 2012년 인간이 만든 물체로는 최초로 태양권을 벗어나 성간 공간에 진입한 보이저 1호의 이정표 등을 들 수 있다. 최근에는 스페이스X가 구축한 스타링크가 우주 경제의 판도를 바꾸는 새로운 신화를 쓰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순간들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언제?”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동시에 이러한 성취를 가능하게 만든 사회적 토양과 동력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요인은 다양하겠지만, 우주 개발의 역사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길들여짐을 거부하고 광활한 미지를 향해 나아가는 야생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스페이스X를 이끄는 일론 머스크 역시 매번 신기술을 발명해 낸 천재라기보다는, 기존의 성공이 주는 타성과 안락함을 과감히 거부하고 우주라는 거친 들판을 향해 달리는 야생마에 가깝다. 머스크, 타성 벗어나 스페이스X 구축 아놀드, 통념 맞선 연구로 노벨상 수상 장벽 깨는 야생 정신으로 미래 개척을 머스크가 팰컨9 로켓 1단의 수십 회 재사용을 통해 발사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었던 것은 재사용이라는 개념 자체를 처음 고안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기존 우주왕복선과는 다른 방식으로 재사용에 접근한 대담한 결단에 기인한다. 과거 미국의 우주왕복선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도 발사 비용을 낮추지 못했던 이유는 기술적 한계만은 아니었다. 나사(NASA·미 항공우주국)와 미 공군의 요구에 더해 각 주의 정치적·산업적 이해관계까지 반영하는 과정에서 시스템이 지나치게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실패의 비용이 극도로 큰 경직된 구조가 만들어졌고, 한두 번의 실패는 곧장 사업 전체의 존폐를 흔드는 치명타가 되었다. 반면 머스크는 실패를 당연한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만들고, 시험하고, 고치는’ 야생의 반복 루프를 통해 이 거대한 관성을 깨뜨렸다. 이러한 야생의 정신이 위력을 발휘하는 또 다른 사례가 있다. 매년 10월 발표되는 노벨 과학상 수상자들이다. 2018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프랜시스 아놀드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칼텍) 석좌교수가 대표적이다. 프린스턴대에서 기계·항공우주공학, 버클리대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그녀는 생물학 전공자가 아닌 공학자 출신 연구자였다. 1980년대 후반 생물학계에서는 단백질 구조를 이해한 후 효소를 정밀하게 설계하려는 접근법이 주류였다. 하지만 단백질 서열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천문학적으로 많았고, 계산 기반 설계에는 한계가 있었다. 공학을 전공한 아놀드는 이 지점에서 판을 바꿨다. 단백질을 신비로운 대상이 아니라, 최적화가 필요한 역학 시스템의 한 부품으로 바라보고, 수학적 ‘최적화’ 개념을 분자 세계에 적용한 것이다. 내부 원리를 모른다면 자연의 방식인 ‘진화’를 실험실에 복제해 무수한 반복 루프를 돌리면 된다는 발상이었다. DNA에 인위적인 무작위 돌연변이를 일으킨 뒤, 우수한 변이체만을 다음 세대로 넘기는 ‘유도진화’ 기법이었다. 이 방식은 당시 학계의 통념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하지만 생물학계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았던 그녀는 오히려 기존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혁신적 방법을 시도할 수 있었다. 마침내 1993년, 효소의 활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킨 변이체를 만들어내며 자신의 대담한 발상이 옳았음을 실험으로 증명해 냈다. 두 이방인이 서로 다른 분야에서 일구어낸 성공의 공통점은 역설적이게도 완벽한 지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는 ‘무지의 수용’이었고, 자신이 속한 분야의 도구를 이웃 분야의 난제에 과감히 들이대는 대담함이었다. 현대의 학계와 사회는 점점 더 좁고 깊은 자신들만의 ‘사일로’(Silo)를 쌓아 올리고 있다. 그 안에서 습득한 지식은 정교할지언정, 성벽 밖의 거대한 우주를 바라보지 못한다. 장벽 내부의 길들여진 모범생들이 안전한 정답만을 고르고 있을 때, 다음 세대의 신화를 쓸 씨앗은 사그라든다. 이제 우주 분야의 빛나는 성취나 노벨 과학상의 위대한 업적을 볼 때마다, 우리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우리 사회의 생태계가 일론 머스크나 프랜시스 아놀드와 같은 비주류의 도전을 포용하고 격려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특히 수도권과 비교하면 모든 면에서 ‘도전자’(Underdog)일 수밖에 없는 부울경이 우주 시대의 주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교과서의 박제된 지식이나 장벽 내부에 갇힌 정답이 아니라 민간 주도의 야생의 정신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주류의 냉소 속에서도 “왜 안 되지?”라는 투박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용기, 비주류의 위치를 도리어 기존 게임의 법칙을 뒤집는 특권으로 여길 줄 아는 개척자의 대담함 말이다.
[데스크 칼럼] 부캉이에게 빌어보는 북항의 소원
부산 북항에 나타났다고 ‘부캉이’란다. 3.5m 길이의 쇼맨십 넘치는 그 상어말이다. 차례상도 사라져 적적해진 추석 연휴, 부산에서 전국구 스타 하나가 탄생했다. 랜드마크 부지를 책임질 민간 투자자 하나 구하지 못해 표류 중인 북항이다. 그런데 부캉이 덕에 전국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핫플레이스가 됐다. 가끔 현실은 허구보다 더 허구스럽다. 알만한 사람은 아는 사실이지만, 부캉이에게는 선배가 ‘한 마리’ 있다. 1964년 느닷없이 해운대 바닷가에 200살 안팎으로 추정되는 바다거북 한 마리가 찾아왔다는 기록과 영상이 남아 있다. 중동 일대가 온천 개발을 시작한 시점이라 이 뜻밖의 존재는 용궁에서 온 귀한 손님 취급을 받았단다. 그 덕에 바다거북은 다친 부위를 치료받고 술에 노잣돈까지 대접받고 떠났다. 바다거북이 바다로 떠나던 당시 3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소원을 빌었다니 지금의 부캉이 못지않은 인기였던 모양이다. 바다거북이 찾아간 1960년대의 해운대는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다. 해프닝의 중심이었던 중동도 해운대구가 아닌, 동래구 해운대출장소 관할의 작은 온천 마을이었다. 신기한 건 거북이 다녀간 그 이듬해부터 관광호텔을 비롯해 숙박업소가 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해운대 온천 개발 사업이 제대로 탄력을 받은 것이다. 지금의 중동과 구남로 일대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부캉이 선배’는 진정 영험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연휴에도 끊이지 않는 부캉이 뉴스를 보며 바다거북을 떠올린 건 간절함 때문이다. ‘북항도 곧 해운대처럼 환골탈태할 거야’라는 희망을 주기 위해 찾아온 메신저가 부캉이가 아닐까 하는 그런 기대 말이다. 부캉이는 외해로 나가라며 쳐놓은 그물도 뛰어넘어 친수공원으로 돌아왔다. 그 친수공원 한가운데가 부산의 미래 성장엔진으로 평가받는 북항 랜드마크 부지다. 오늘도 부캉이를 찾아온 방문객 사이로 웃음꽃이 피어난다. 그러나 정작 그 땅을 바라보는 부산시와 동구, 해수부와 BPA 관계자의 한숨은 늘고만 있다. 2015년 글로벌 리조트 기업인 샌즈 그룹이 그 땅에 5조 원 복합리조트 건설을 제안했다. 그러나 리조트 내 카지노의 내국인 출입 문제를 놓고 옥신각신하는 사이 그 투자 건은 태국으로 날아갔다. 그 뒤로 랜드마크 부지의 민간사업자 공모는 유찰을 거듭하는 중이다. 다행히도 올해 초 전재수 시장과 곽규택 의원이 여야 협치로 항만 재개발법을 개정했다. BPA의 사업 참여를 법적으로 열어놓은 것이다. 1단계 재개발이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평가다. 그러나 확실한 방점을 찍어줄 청사진은 부족하다. 마침 문화체육관광부의 스포츠·공연 복합형 돔구장 건립 사업 공모를 시작했다. 5만 석 규모의 대형 돔과 3만 석 규모의 중형 돔을 지자체 2곳에 건설하겠다는 계획이다. 부산시는 복합돔 공모로 북항 개발의 물꼬를 트겠다는 계산이다. 해당 부지에 돔 아레나를 건설하고 호텔과 공연장 등을 결합한 복합 개발을 제안할 방침이다. 쏟아지는 지자체 문의에도 문체부는 구체적인 국비 지원 규모는 비밀에 부치고 있다. 국비 지원이 어느 정도가 될지, 언제 지원이 이뤄질지 구체적인 안이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단은 지자체들의 제안을 전부 받아보고 틀을 짜겠다는 자세다.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인지도를 높인 북항은 유리한 포지션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 국면이다. 냉기만 감돌던 북항을 부캉이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전국적인 명소로 만들었다. 친수공원에 몰려온 방문객마다 ‘상어 보러 왔다가 북항이 이렇게 좋은지 처음 알았다’며 연신 입을 모은다. 마케팅의 관점에서 보면 억만금으로도 사기 힘든 천운이 북항으로 찾아든 셈이다. 부캉이는 언젠가 다시 바다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친절한 상어 한 마리가 부산에 선물한 천운도 유효기간이 분명 있을 것이다. 부산시와 해수부 모두 북항의 잠재력을 전국에 알린 이 호재가 시들도록 손 놓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북항 돔 아레나는 건설 비용만 1조 3000억 원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된다. 국비 지원을 마중물로 건실한 민간 투자가 지속해서 이어져야 성공할 수 있는 매머드급 사업이다. 끊임없이 헤엄쳐야 사는 상어인 부캉이는 한 곳에만 머물지 않는다. 친수공원 곳곳에 모습을 드러내며 파도타기 하듯 호응을 유도한다. 그게 100만 명을 동원한 인기 비결이란다. 미래 성장엔진에 대한 민간의 관심과 투자 열기가 식지 않도록 해야 할 부산시의 모습이기도 하다.
[노트북 단상] 사건 빨리 끝내야만 유능한 경찰?
드디어 그날이 왔다. 경찰이 수사의 대부분을 책임지고, 그 결과까지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시대. 수많은 논란 끝에 마련된 새 형사소송법은 지난 2일부터 현실이 됐다. 한 번도 가본 길이 아니기에 비관적인 전망도 난무했다. 심지어 “10월 2일부터 범죄자 천국이 되는 세상”이라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튀어나왔다. 이 같은 우려의 중심에는 1차 수사를 책임져야 할 경찰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사건 현장에서 헌신적으로 피해자를 도우려는 경찰 수사관들이 다수라고 믿는다. 지난달 ‘새 형사사법체계 대혼란’ 보도(부산일보 지난달 22일 자 1면 등 보도)를 위해 취재진이 만나 인터뷰했던 복수의 수사관들이 그랬다. 한 수사관은 말했다. “지금 제 킥스(KICS·형사사법정보시스템)에는 사건이 25개 찍혀 있어요. 토요일마다 나와서 일하고 있죠. 자신을 갈아 넣어서 사건에 매달리면 ‘번아웃’이 옵니다.” 이 수사관은 기자에게 거의 하소연에 가까운 속내를 계속 털어놨다. “힘들어도 재미와 보람이 있어 그동안 떠날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번 제도 변화와 조직 대응을 보면서 처음으로 나가야 하나 싶기도 합니다.” 다른 수사관들의 진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력은 부족했고, 숙련된 수사관들은 현장을 떠나고 있었다. 여기에 새 제도가 몰고 올 업무 부담까지 더해지면서 현장의 불안은 한층 커지고 있었다. 이쯤 되면 경찰 수사 불신을 거론하기에 앞서, 그들이 어떤 환경과 조건에서 수사해왔는지부터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특히 부족한 일손에 더해 수사관들을 지치게 만드는 것은 사건 기한·처리율 중심의 업무평가다. 복수의 수사관 증언에 따르면 현장에는 사건의 실체를 파고드는 것보다 사건을 빨리 종결하는 수사관이 유능하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지난해 공개된 감사원의 ‘경찰청 및 서울·부산경찰청 정기감사’ 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보고서는 한 팀장급 경찰관의 발언을 이렇게 전한다. “사건을 대충대충 끝내야 우수한 팀장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오히려 수사 완결성을 높이려 계속 수사지휘를 하다 사건 처리가 늦어지면 무능력한 팀장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 또 다른 팀장급 수사관도 “수사부서 팀장 지휘역량 평가지표를 보면 개별 사건을 꼼꼼히 살펴볼 이유가 없다. 하위 20%가 되지 않으려면 사건을 빨리 처리하라고 독촉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평가지표에는 수사처리기간과 6개월 이상 장기사건 비율 등이 포함된다. 새 형사소송법 시행으로 이제 보완수사마저 기존 3개월에서 원칙적으로 1개월 안에 마쳐야 한다. 수사관의 숙련도와 사건의 난이도는 제각각인데, 시간표는 갈수록 촘촘해지는 셈이다. 이런 구조에서 과연 충실한 수사가 지속될 수 있을까. 새 형사소송법 시대에 불거진 문제를 풀기 위해 백가쟁명식 처방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그에 앞서 경찰 내부에서 당장 손댈 수 있는 것부터 바꿔보면 어떨까. 인력과 예산 확충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 전에 경찰 스스로 손볼 수 있는 것은 ‘빨리 끝낸 수사’를 좋은 수사로 여기는 평가방식이다. 전문가들 또한 사건 난이도와 성격에 따른 가중치, 정성평가를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범죄 피해자가 원하는 지점도 결국 같다. 사건을 적당히 마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억울함과 피해를 끝까지 들여다보고 제대로 풀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좋은 수사는 빨리 끝낸 수사가 아니라, 끝까지 제대로 들여다본 수사여야 한다.
[중앙로365] 부울경 경제동맹을 보는 불안한 눈빛
상상을 한 번 해보자. 에어버스(프랑스·독일)와 사브(스웨덴)가 합병해 미국과 중국에 대항하면 어떻게 될까. 방산·항공만이 아니다. 에너지·유틸리티에서 이베르드로라(스페인)와 에넬(이탈리아), 금융·은행에서 도이치방크(독일)와 BNP 파리바(프랑스) 합병도 생각할 수 있다. 반도체와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ASML(네덜란드)과 미스트랄(프랑스)이 한 몸이 되면 파괴력이 어느 정도일까. 제약과 바이오에서 사노피(프랑스)와 바이엘(독일)이 합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산업 자동화로 눈을 돌리면 지멘스(독일)와 슈나이더(프랑스) 합병도 있을 수 있다. ‘상상 속 합병(Fantasy M&A)’은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FT)가 보도한 유럽연합(EU) 이야기다. 그 배경에는 EU의 짙은 위기감이 깔려 있다. 최근 10년간 경제성장률을 보더라도 EU(연 1.3~1.5%)는 미국(2.2%)과 중국(5%)에 크게 밀렸다. 이대로 가면 빅테크의 미국과 제조업의 중국 사이에서 EU의 존재감은 사라지고 말 판이다. 슬프게도 상상과 현실은 사뭇 다르다. 27개 EU 회원국 정치 지도자들은 ‘유럽 챔피언론’에 공감하면서도, 정작 자국 기업의 피인수는 죽기 살기로 반대한다. 돌이켜보면 EU는 지긋지긋한 전쟁을 다시는 하지 말자며 그 불씨를 제거하는 자원·경제동맹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지금의 EU는 하나의 국가나 단일 시장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국경별 파편화와 ‘작은 것이 좋다’는 뿌리 깊은 고정관념이 그렇다. 제대로 된 혁신을 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다양성(scope)과 규모(scale)이다. ‘규모 없는 다양성’은 강자 앞에서 무력하다. ‘다양성 없는 규모’는 불확실성 앞에서 취약하다. 다양성과 규모가 혁신의 양대 무기로 꼽히는 이유다. EU 회원국의 다양성은 미국과 중국의 규모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중이다. 시선을 한국 내 지자체로 돌리면 EU 딜레마가 남의 일 같지 않다. 당장 부울경이 그렇다. 부울경 대통합을 말하지만 이제 겨우 ‘경제동맹 선언’이란 폼을 한 번 잡아본 정도다. 이런 수준으로 부울경이 초광역권 경쟁에서 ‘메가 프로젝트’를 엮어낼 수 있을까. 수도권에 맞설 새로운 성장축이 될 수 있을까. ‘작은 것이 좋다’는 이념은 종종 다양성으로 포장된다. 하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내 것만 지키면 된다는 소지역주의의 또 다른 표출이다. 근원적으로는 인류가 진화 과정에서 너무 오랫동안 소규모 전통 사회로 수렵·채집 생활을 해 온 탓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먼 조상은 ‘고귀한 야만인’이 아니었다. 전쟁이 지금보다 빈번했고, 그로 인한 사망 비율도 높았다. 심지어 전쟁의 90%가 이웃 집단과의 전쟁이었다는 연구도 있다. 우리는 ‘선’이고 저들은 ‘악’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전쟁은 시작된다. 그 후 인류는 얼마나 진화했을까. 켜켜이 쌓인 소지역주의가 21세기에 와서도 무슨 계기만 생기면 깊숙한 곳에서 바로 얼굴을 내미는 곳이 아직도 많다. 부울경은 소지역주의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부산의 진짜 적은 부산이고, 울산의 진짜 적은 울산이고, 경남의 진짜 적은 경남이 아닌가. 개방과 협력을 외면하는 ‘자기중심주의’야말로 혁신의 가장 큰 적이다. 대학이든 기업이든 지자체든 말이다. 불편한 진실을 앞장서 깨야 할 사람들은 부울경의 정치 지도자들이다. 그들이 자기희생을 각오하고 개방과 협력을 이끌면 서로의 다름은 창조적 파괴로 꽃을 피울 수 있다. 개인은 물론 기업, 대학, 연구소 등 혁신 주체들이 다양성과 규모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마침내 새로운 혁신 생태계가 출현하는 것이다. 부울경은 수도권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인구와 가장 큰 지역내총생산의 초광역권이다. 부산의 해양·물류·관광, 울산의 조선·자동차·석유화학·에너지, 경남의 우주항공·방산·기계라는 산업 포트폴리오는 다른 나라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북극항로 시대가 열리면 수도권을 능가하는 세계적인 도시로 급부상할 가능성이 높다. 폐쇄와 분열의 소지역주의로 갈 것인가. 개방과 협력의 대지역주의로 갈 것인가. 부울경은 기로에 서 있다. 2026년 Kearney 외국인직접투자(FDI) 신뢰 지수는 가장 중요한 글로벌 투자 결정 요인으로 기술·혁신 역량을 꼽았다. 부울경이 대지역주의로 가면 기술 및 혁신 역량을 끌어올릴 수 있다. 2026년 IMD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싱가포르(1위), 홍콩(2위), 스위스(3위), 대만(4위), UAE(5위), 덴마크(6위), 아일랜드(7위) 등이 앞자리를 차지했다. 한국의 국가경쟁력은 21위이지만, 부울경이 대지역주의로 가면 글로벌 도시·강소국과 경쟁할 수 있다. 희망찬 미래를 열 단 하나의 열쇠는 부울경 정치 지도자들의 결단이다.
[편집국에서] 전재수의 시험대
최근 이재명 대통령과 전재수 부산시장을 보고 있자면, 안쓰러운 마음이 먼저 든다. 임기 2년 차인 이 대통령이나 취임 넉 달째인 전 시장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공약이나 정책, 개혁의 성공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고 있는 모양새다. 먼저 이 대통령부터 살펴보자. 지방선거 이후 급격한 지지율 하락을 겪었던 이 대통령은 30%대의 지지율로는 사실상 국정 개혁 동력을 크게 상실했다고 봐야 한다. 지지율 추락은 오세훈 서울시장이 당선되는 이변에서부터 시작됐다는 일부의 분석이 있으나, 시작이자 핵심은 진영 내 분열이 기인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듯하다.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선거부터 불거진 친명과 친청(친문) 대결 구도는 결국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라는 정치권의 오래 회자해 온 말을 떠올리게 한다. 급기야 이 대통령은 지난달 18일 기자회견 모두 발언에서 “우리는 모두 친문이고 친노이며 친김대중이며, 이재명의 동지들입니다”라는 말로 지지층의 결집을 꾀했다. 오죽하면 ‘모두의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자기 진영을 향해 호소하는 이례적인 모습을 보였겠는가. 지지율 급락이라는 위기 속에서 보여준 불가피한 읍소였다. 여기에다가 부동산 정책, ETF 레버리지, 장관 인사 등의 실패는 ‘일 잘하는 대통령’이라는 이 대통령의 최대 장점을 흔들리게 했다. 지지층 이탈과 더불어 중도층의 외면을 부추겼다. 한 번 추락한 지지율을 회복하기는 쉽지 않겠으나 해법은 분명하다. 좌고우면하지 말고, 자신의 국정 철학대로 개혁하고 민생 정책에 힘을 쏟아야 한다. 진영 내부 단속은 할 만큼 했다. 집권 2년 차부터 대통령을 흔드는 일부 세력에게 휘둘리는 것은, 국민이 바라는 대통령의 모습이 아니다. 초반의 실패를 거울삼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중도실용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다시 한번 지지율 반등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전 시장의 상황은 취임 초부터 더 만만치 않다. 자신을 둘러싼 정치적 환경이 척박하다. 이 대통령은 그래도 ‘여대야소’로 국회의 과반을 업고 국정을 끌고 갈 수 있다면, 전 시장은 ‘여소야대’라는 부산시의회의 현실과 처음부터 마주쳤다. 또 부산지역 국회의원조차 한동훈 의원이 재보선으로 당선되면서 민주당 의원은 단 한 명도 없다. 시작부터 삐걱댄다. 조직개편안에서부터 부산시와 부산시의회는 충돌했고, 다시 추경을 둘러싸고 시의회는 시의 예산안을 줄줄이 조정했다. 시의 민생정책 중 하나로 추진된 동백전 캐시백 확대 예산은 물론 소상공인과 노인일자리 등 민생 관련 사업 예산까지 삭감됐다. 국비 확보를 위해 국회의원의 지원이 절실한 상황에서 지난달 30일 열린 여야정 회의는 부산시와 국민의힘의 확연한 시각차를 부각할 뿐이었다. 향후 협치가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우려를 낳게 했다. 여기에 내부의 반발까지 거세다. 강서구 생곡소각장 조성과 풍산의 기장군 장안읍 이전을 두고 민주당 소속 기초단체장들이 잇따라 반기를 들고 있다. 인사청문회가 한창 진행 중인 부산시 산하 공공기관장 인사를 두고도 잡음이 나온다. 인재 풀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줬다. 시의회가 검증을 벼르고 있는 부산교통공사와 부산시설공단 등의 기관장 후보는 말할 것도 없이 여러 후보의 면면을 보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특히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지역의 주요 현안에 대해 지역 민심과 괴리돼 있다는 것이다. 시민사회는 물론 항만업계, 건설업계, 금융계 등 상공계는 정부의 4대 PA(항만공사) 통합 반대, 가덕신공항 공사비 현실화, 산업은행 부산 이전, 통합 LCC(저비용항공사) 본사 부산 유치 등을 주장하고 있지만, 전 시장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일단은 지켜본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집권당의 일원으로서 정부에 목소리를 크게 내기보다는 ‘정중동’의 스탠스를 보인다고는 하지만, 벌써부터 민감한 사안은 외면하고 부산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솔솔 나온다. 이제 겨우 취임 넉 달째를 맞는 시장에게 지나친 비판은 가혹할 수 있다. 조금 더 시간을 줘야 한다. 게다가 이 대통령에 대한 해법만큼 간단치도 않다. 하지만 부산이 처한 절박한 상황을 고려하면, 전 시장에게 많은 시간이 남은 것 같지는 않다. 특히 전 시장의 능력에 대한 검증이 아직 덜 된 만큼 그는 성과로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방선거 때 박형준 전 부산시장에 대해 ‘한 게 뭐 있노’라며 했던 공격은 바로 자신에게 부메랑이 돼 돌아올 수 있다. 그래도 할 말은 하는 시장, 유능한 시장으로 남을 것인가. 유약하고 무능한 시장으로 기억될 것인가. 전재수의 시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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