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장크트 마르가레텐, 채석장이 오페라극장이 되는 밤
아트컨시어지 대표
장크트 마르가레텐 채석장에 마련된 오페라 토스카 무대. 이상훈 제공
오스트리아 빈에서 남동쪽으로 60km. 차로 1시간 남짓 달리면 헝가리 국경과 가까운 부르겐란트에 닿는다. 포도밭과 노이지들러 호수의 평화로운 풍경 사이, 거대한 돌산 속에 뜻밖의 문화공간이 숨어 있다. 장크트 마르가레텐(St. Margarethen) 채석장에 있는 ‘채석장의 오페라(Oper im Steinbruch)’다.
공연장에 들어서는 순간 가장 먼저 시선을 압도하는 것은 무대가 아니라 돌산이다. 수십 미터 높이의 석회암 절벽이 공간을 에워싸고 그 아래 거대한 무대와 객석이 펼쳐진다. 천장은 없다. 지붕은 부르겐란트의 밤하늘이고, 극장의 벽은 오랜 세월 사람들이 돌을 잘라내며 만들어 놓은 거친 암벽이다.
이곳에서 채취된 석재는 빈의 슈테판 대성당 건축과 보수, 링슈트라세의 주요 건축물에도 사용됐다. 오랜 채굴로 산속에는 거대한 인공 협곡 같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산업적 기능만 생각하면 돌을 캐고 남은 빈 공간에 불과하지만, 바로 그 빈자리가 오늘날 이곳의 가장 특별한 자산이 됐다. 돌을 가져간 흔적이 무대가 되고, 절벽은 세상 어디에서도 쉽게 만날 수 없는 극장의 벽이 됐다.
장크트 마르가레텐 채석장은 오늘날 유럽을 대표하는 야외 공연장 가운데 하나다. 일반적인 오페라극장이 정교하게 설계된 건축 안으로 작품을 끌어들인다면 이곳에서는 반대의 일이 벌어진다. 작품이 이미 존재하는 자연과 산업의 흔적 속으로 들어간다. 무대미술 역시 암벽을 가리기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조명과 영상, 대형 세트가 거친 돌의 표면과 만나면서 채석장 전체가 하나의 무대장치가 된다.
객석을 에워 싼 채석장의 석회암 절벽. 이상훈 제공
2026년 여름 무대에 오른 작품은 푸치니의 〈토스카〉다. 이곳에서는 작품의 줄거리 못지않게 ‘어디에서 공연하는가’가 중요한 관전 포인트다. 거대한 암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높이와 깊이, 거친 표면 자체가 공연의 분위기를 결정하고 인간이 만든 무대와 오랜 세월 형성된 채석장의 경계를 지운다.
특히 해가 지는 시간은 공연의 일부가 된다. 저녁 햇빛을 받아 황백색으로 빛나던 암벽은 어둠이 내려앉으며 전혀 다른 얼굴로 변한다. 조명이 켜지고 오케스트라와 가수들의 목소리가 돌벽 사이로 울려 퍼지면 관객은 공연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 거대한 공간 속으로 들어간 듯한 경험을 한다.
유럽에는 폐공장과 발전소, 창고 같은 산업시설을 문화공간으로 되살린 사례가 많다. 장크트 마르가레텐이 특별한 것은 새로운 건축으로 과거의 흔적을 덮지 않았다는 데 있다. 오히려 돌을 캐내며 남은 흔적을 그대로 두고 문화적 자산으로 바꾸었다.
공연이 끝나고 조명이 꺼지면 조금 전까지 거대한 극장이었던 공간은 다시 고요한 채석장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돌산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미 달라져 있다. 버려질 수 있었던 공간에서 장소가 가진 기억과 시간을 읽어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것. 장크트 마르가레텐은 문화공간이 반드시 새로 지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웅장한 돌산으로 보여준다.
이상훈 아트컨시어지 대표. 부산일보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