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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공공기관 이전, 경제성장의 기회로
정부가 균형발전과 공공기관 개혁을 위한 조치로, 내년부터 중앙행정기관을 순차적으로 세종으로 이전하고, 최소한의 기관을 제외한 수도권 공공기관 지방이전을 추진한다. 이에 대하여 나눠주기식 공공기관 지방이전이 되면 안된다는 지적이 있다. 한편, OECD는 올해 7월 한국경제보고서에서 지속적인 생산성 향상을 위해 지역 간 경제적 격차를 완화하고 지역거점에 대한 전략적 투자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균형발전을 단순히 지역 간 형평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성장이라는 관점에서도 살펴볼 시점이다.
사회과학의 여러 이론에는 하나의 공통된 통찰이 있다. 사회의 어느 한 부분에서 일어난 변화는 다른 부분에 영향을 미치고, 그 영향은 다시 처음의 원인으로 되돌아와 전체의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경제학자 뮈르달은 경제와 사회의 격차가 발생하면 그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어 격차를 더욱 확대시키는 현상을 ‘누적적 인과관계’로 설명했다. 우리나라의 수도권 집중과 지방소멸도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지방의 쇠퇴와 수도권의 과밀은 서로를 강화시키는 누적적 인과관계, 즉 순환구조인 셈이다.
수도권 과밀 현상 집적 불경제 초래
지방 쇠퇴와 소멸 비용도 국가 부담
나눠주기식 지역 균형발전 안 돼
지역산업 연관 기관 집적 바람직
2차 이전으로 새 성장축 조성해
성장 선순환 이어지는 계기 만들길
그렇다면 수도권 과밀은 과연 수도권에 계속 이익일까. 수도권 과밀은 결국 수도권에도 비용을 발생시킨다. 집적에는 생산성 향상 등 이익이 있으나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집적의 경제가 집적의 불경제로 바뀐다. 주거비 상승은 장거리 통근과 교통혼잡을 초래하고, 생활비 증가는 삶의 질의 저하로, 교통환경 개선을 위한 비용 증가는 사회적 부담의 확대로 이어진다. 수도권 집중의 편익은 기업과 국가가 얻지만, 과밀의 상당한 비용은 수도권 주민의 주거비와 생활비 등의 형태로 부담한다 할 수 있다. 이 비용은 저출생을 심화시키는 구조적 요인이기도 하다.
지방쇠퇴가 심화되면 수도권이 그 부정적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지역불균형은 국가의 성장자원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는 손실로 연결된다.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하는 시기에는 한 지역에 인구를 집중시켜 얻는 효과보다 전국 각지의 인적·물적 자원을 고루 활용함으로써 얻는 효과가 더 클 수 있다. 지역에서 수도권으로의 인구 유입은 단지 지역 인재 유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재가 지역의 토지·산업·학교·인프라와 결합하여 창출했을 경제적 가치까지 사라지게 한다. 균형발전 정책은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국가의 성장자원을 생산에 투입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또한 지방소멸의 비용은 결국 국가 전체가 부담한다. 지역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다고 해서 기반시설·행정·의료 비용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구밀도가 낮아지면서 일정 수준의 공공서비스를 유지하는 비용이 상승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고령화가 빠른 지역에서는 의료·복지수요가 증가한다. 그 비용은 해당 지역 주민들과 중앙정부의 지출을 통해 결국 국민 전체가 부담하게 된다. OECD의 한국경제보고서도 지역격차 문제와 고령화에 따른 재정부담을 구조적 과제로 봤다.
결론적으로, 지방소멸은 지역의 경제활동인구는 줄어드는데 국가가 유지해야 할 공간과 서비스는 남는 과정이고, 수도권은 그 재정부담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에 균형발전의 목표는 서울의 것을 지방에 나누어 주는 데 그치면 안 되고, 정부의 2차 공공기관 이전도 수도권에서 공공기관을 빼내 지방에 나눠주는 정책이어서는 안 된다. 균형발전의 목표는 수도권 집중과 지역쇠퇴의 악순환을 끊고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새로운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공공기관 이전을 통해 지역의 성장축을 형성함으로써 수도권으로 향하는 인구와 기업의 압력을 낮추고, 수도권의 과밀비용도 줄여야 한다.
이를 위해 이번 공공기관 이전은 1차 이전의 성과를 넘어 수도권 외의 복수의 성장엔진을 만들어내야 한다. KDI의 1차 공공기관 이전 분석은, 혁신도시의 인구·고용은 상당히 증가했으나 제조업·지역서비스업 외에 지속적인 지역성장을 위한 지식기반산업 고용은 유의하게 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2차 공공기관 이전은 단순 배분 대신 지역산업에 연관된 기관을 집적시키고, 이를 토대로 지식기반산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반도체 호황에 힘입어 올해 우리 경제는 2% 후반대 성장을 바라보고 있다. 성장률만큼 중요한 것은 성장의 효과를 확산시키고, 이로써 다음 성장의 기회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대기업의 수출 성과가 당연히 내수경기와 지역경제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역의 기업과 소비시장을 육성해 성장의 성과가 투자와 고용·소비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지역균형발전이 그 주요 방안인 것이다. 지역에 새로운 성장엔진을 더해 국가 경제의 성장잠재력을 높이는 것이 이번 공공기관 이전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2026-09-07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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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재난에는 평균이 없다
지난달 17일 경남 거제에 하루에만 654.3mm 비가 쏟아졌다. 1972년 관측 이래 일 강수량 신기록이자 전국 역대 세 번째 기록으로, 200년에 한 번 내릴 법한 폭우로 판단된다. 사흘 누적 강수량은 평년 여름 한 철 강수량에 육박했다. 섬 지형의 좁은 수로와 경사지 주택 밀집이 피해를 키웠고, 산사태로 1명이 숨졌다. 부산과 통영에서도 침수와 고립이 잇따르자, 정부는 국가소방동원령을 발령했다. 기후 위기가 부르는 극한 재난이 미래 경고가 아니라 현실임을, 이번 폭우가 분명하게 알려준 셈이다.
같은 시각 태평양 건너에선 재난관리 체계를 흔드는 논쟁이 한창이다. 미국 연방재난관리청(FEMA)을 둘러싼 개편 논란이다. 1979년 설립된 FEMA는 대형 재난 시 복구 지원과 이재민 구호, 공공시설 재건을 총괄한다. 노무현 정부가 2004년 이를 벤치마킹해 소방방재청을 세웠던 만큼, 우리 재난관리 체계에도 그 골격이 스며 있다.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닌 이유다.
미국 연방재난관리청 개편 놓고 논란
주 정부 재난 대응 주도 땐 주민 부담
국내 소방방재청 재난관리 체계 비슷
부산·경남, 태풍·해일 등 고위험 지대
국지적 극한 피해까지 담는 게 중요
재난의 새로운 기준과 원칙 세워야
올해 5월, 트럼프 행정부가 구성한 ‘FEMA 검토위원회’는 연방의 역할을 줄이고, 주(州) 정부가 재난 대응을 주도하도록 하는 개편안을 내놓았다. 한 분석 보고서는 개편안이 재난 지원 문턱을 높이고, 비용을 지방정부와 생존자에게 전가할 것이라 경고했다. 재난 선언을 가늠하는 1인당 피해액 지표를 1.94달러에서 2.99달러로 올리면, 2012년부터 2025년까지 주요 재난 선언의 약 29%가 지원 대상에서 빠졌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연간 약 15억 달러(약 2조 원)의 부담이 지방과 피해 주민의 몫으로 돌아갈 것으로 추산된다.
기후 위기 시대에 위험은 배가된다. 이 1인당 피해액 지표는 주 전체 인구를 분모로 삼기에, 인구가 적은 지역은 마을이 초토화돼도 광역 통계에 묻혀 지원에서 배제될 수 있다. 그러나 기후 재난은 이번 거제의 경우처럼 특정 지역에 집중되는 국지성 폭우로 닥친다. 광역 통계로 환산하면 평균에 희석되지만, 그 좁은 지역에 사는 이들에게는 삶터 전체가 무너지는 재난이다. 평균의 함정이 가장 먼저 타격받는 지역을 제도 밖으로 밀어내는 셈이다.
논쟁은 재난 ‘이후’ 지원만이 아니라 ‘이전’의 경보에도 그림자를 드리운다. 개편 논의와 함께 미국 해양대기청의 관측과 예보 예산 감축이 추진되고 있어서다. 지난달 26일 네팔에서는 빙하 붕괴가 부른 돌발홍수로 633명 넘게 숨졌는데, 붕괴는 감시망 밖에서 일어났다. 극한 재난일수록 경보 몇 분이 생사를 가른다. 시간당 100㎜ 이상의 국지성 폭우도 촘촘한 경보와 선제적인 대피 없이는 대참사로 번질 수 있다.
또 다른 뼈아픈 대목은 미국의 개편안이 FEMA의 장기 주거 지원을 없애려 한다는 점이다. 임시 대피에서 더 나은 재건으로 가는 길이 끊기면, 잠깐의 대피가 그대로 돌아갈 곳 없는 처지로 굳어진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지난해 산불로 집을 잃고 임시 조립 주택에 살던 경북 안동과 의성 이재민들은, 올여름 집중호우로 그 임시 주택마저 침수당했다. 이재민을 벼랑 끝에서 붙드는 안전망은, 국가와 지방이 재정과 역량을 함께 쥘 때 비로소 작동한다.
이 논쟁이 묵직한 까닭이 있다. 소방방재청은 2014년 세월호 참사로 국민안전처에 흡수돼 독립 외청의 지위를 잃었고, 2017년에는 행정안전부와 소방청 등으로 다시 쪼개졌다. 통합과 효율의 명분은 있었지만, 재난 대응의 독립성과 전문성이 흔들렸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았다. 재난 전담 역량이 정치적 명분에 따라 흔들릴 수 있다는 점에서, ‘FEMA 축소’ 논쟁은 우리가 지나온 길을 비추는 거울이다.
부산과 경남은 이 질문의 최전선에 있다. 태풍의 길목에 자리해 강해진 태풍과 폭풍해일, 도시 침수, 산사태가 겹치는 고위험 지대다. 이번에도 국가 재난 사태로 대응했기에 특별교부세가 긴급 지원됐다. 우리 역시 특별재난지역 선포 기준과 지역 선정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국지적인 극한 피해가 제도 밖으로 밀려날 수 있다. ‘광역이나 기초 지방자치단체가 알아서 하라’는 책임 전가형 분권으로 흐른다면, 지방의 부담은 감당하기 어렵게 된다.
재난 대응체계를 조정할 때는 세 가지가 고려되어야 한다. 첫째, 중앙과 지방 역할 분담에서 사무 이양보다 재원 이양의 원칙을 먼저 세워야 한다. 둘째, 지방에 대한 책임 전가를 우려하는 것은 지방이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부산시와 경상남도는 자체 재난 기금과 조기경보 체계, 전문 인력을 평시에 축적해야 한다. 셋째, 임시 거처에서 삶의 회복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극한 피해를 반영하도록 지방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재난은 행정구역을 가리지 않지만, 청구서는 늘 특정 지역과 계층에 집중된다. 이제 국지적 극한 피해까지 담아내는 재난의 새로운 기준과 원칙을 세워야 한다. 재난에 평균은 없기 때문이다.
2026-09-0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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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런티어] ‘만드는 해운’에서 ‘선도하는 해운’으로
글로벌 해양 환경 규제가 본격화하면서 전 세계 선사들이 짊어져야 할 운항 비용 부담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당장 EU ETS(탄소배출권거래제) 규제에 따라 선박이 부산에서 로테르담으로 이동하는 1항차에 대해, 선사들은 일종의 탄소세 개념으로 약 5억 원에 달하는 탄소배출권을 구매해 제출해야 한다.
왕복 시 무려 10억 원에 이르는, 이 막대한 추가 비용은 상한선이 없으며, 규제가 심화함에 따라 지속해서 상승할 수밖에 없다. 이에 더해 선박 연료유의 탄소 집약도를 직접 규제하는 FuelEU Maritime 역시 본격적인 시행에 들어갔고 2050년까지 감축 기준이 가파르게 강화될 예정이다. 이는 글로벌 해운·조선 시장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고 있음을 뜻하며, 향후 친환경 선박 전환과 고효율 친환경 기자재에 대한 전 세계적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처럼 거세지는 환경 규제의 파도 속에서, 수에즈운하를 우회하는 기존 항로 대비 운항 거리와 시간을 대폭 단축하여 물류비용과 탄소 배출을 동시에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북극항로’의 개척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과거 러시아 야말(Yamal) 프로젝트가 초대형 쇄빙 LNG 운반선 수요를 창출하며 북극해의 상업적 운항 가능성을 증명했듯, 북극권 물류 수송은 이미 세계적 관심사다.
북극항로가 제도적·기술적으로 정비된다면, 부산은 동북아의 관문 항만을 넘어 아시아의 싱가포르를 뛰어넘는 글로벌 친환경 급유 및 해양 종합 서비스 허브로 도약하는 천문학적인 경제적 이점을 누리게 된다. 우수한 해기사와 선원 공급 체계, 기자재 산업, 인근 대형 조선소까지 완비된 부산의 인프라는 이를 위한 최고의 자산이다.
특히 우리는 세계 해운·조선 시장의 구조적 한계를 넘어설 판도 변화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 전 세계 선박의 약 55%가 아시아 선주 소유이고 조선 건조의 90% 이상이 아시아에서 이루어지는 실질적인 해운·조선 강국이지만, 실상은 몸으로 만들어내는 2차 산업 중심으로 기대 수익률에 한계가 있다. 핵심 기술에 대한 라이센스비, 선박금융, 보험, 중개, 국제 규제 제정 등 고차원의 고부가가치 산업은 여전히 유럽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디지털 전환을 아득히 넘어 AI 전환이 현실화하는 지금, 우리가 축적한 독보적인 선박 건조 및 운항 실무 데이터를 기반으로 산업데이터를 수집하고 활용한다면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다. 천문학적인 금액이 오가는 해운 산업에서 데이터 기반의 AI 서비스 생태계야말로 우리가 선점해야 할 거대한 블루오션이다.
이러한 고부가가치 산업 패러다임의 전환은 부산이 직면한 가장 뼈아픈 사회적 과제인 ‘청년 인구 유출’을 해결할 가장 확실하고 근본적인 열쇠가 될 수 있다. 현재 부산에서는 매년 약 2만 명에 달하는 청년 인구가 감소하고 있으며 청년들이 양질의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 등으로 떠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확실한 주도권을 쥔 ‘해운’과 ‘조선’이라는 명확한 테마 위에 AI·데이터, 선박금융 등 지식 기반 일자리를 결합한다면 상황은 완전히 반전된다. 부산은 쾌적한 주거 여건과 도심 인프라를 완벽히 갖춘 도시이니 고부가가치 일자리만 뒷받침된다면 청년과 전문 인재들에게 충분히 어필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비전을 담아낼 도시적 그릇과 지원 체계도 이미 탄탄히 갖추어져 있다. 도심형 워케이션 센터들이 활발히 운영되어 유연한 근무 환경을 제공하고 있으며, 부산테크노파크와 부산창조경제혁신센터 등 지역 혁신 거점 기관들이 청년들의 창업과 기술 도전을 다각도로 지원하고 있다. 나아가 해양수산부의 주요 정책 기능과 산하 공공기관들이 부산에 집적되어 해양 정책의 중심축이 마련된 만큼, 이제는 ‘부산’과 ‘해운’이라는 핵심 키워드를 깊이 있게 엮어내 자본과 투자가 유입될 때이다. 글로벌 해양 규제의 파도를 발판 삼아 북극항로와 친환경·디지털 해운 생태계를 선점한다면, 부산은 청년들의 활기와 자본이 넘쳐나는 대한민국의 진정한 기회의 땅으로 재도약할 것이다.
2026-09-0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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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정이한 피습 자작극과 제3정당의 딜레마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이 지난 8월 26일 당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이주영 정책위 의장을 비롯한 당 지도부 대부분이 동반 사퇴했다. 개혁신당은 천하람 원내대표의 직무대행 체제로 전환됐다. 조만간 임시전당대회를 열고 차기 지도부를 선출하겠으나 전과 같은 동력을 얻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미 가용 자원을 총동원했던 터라 새 지도부를 꾸릴 자원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이준석당’에서 이준석의 대체자를 찾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개혁신당은 지난 6·3 지방선거에서 처참한 성적을 거뒀다. 광역·기초단체장과 지방의원 선거에 192명을 내보냈는데 기초의원 1명을 당선시키는 데 그쳤다. 서울시장 선거의 경우 원외 정당이 된 정의당은 물론 존재감이 미미했던 여성의당보다도 표를 얻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정이한 전 개혁신당 부산시장 후보의 ‘음료 피습 자작극’ 논란이 불거졌다. 검찰 공소장 등에 따르면 정 전 후보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PT 트레이너였던 지인과 피습 자작극을 기획했다. 그에게 “유세 중 음료를 던져달라”고 부탁하며 “물은 옷에 흔적이 남지 않으니 녹차라테처럼 색이 남는 것이 좋다”고 구체적으로 주문했다. 선거 참패에 그쳤다면 무관심 속에 당을 쇄신하는 작업을 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광역단체장 후보의 피습 자작극 논란으로 개혁신당은 도덕성에도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당명에서부터 내세웠던 개혁의 기치가 빛이 바랬음은 물론이다.
개혁신당은 왜 정이한 전 후보에게 부산시장 후보라는 중요한 자리를 맡겼을까. 정 전 후보는 백종헌 국민의힘 의원(부산 금정) 비서관과 국무총리실 사무관을 지냈다. 2025년 9월 개혁신당 대변인에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올해 3월 부산시장 후보로 공천받았다. ‘깜짝 발탁’된 인물은 아니지만, 이력이 길지 않았다. 개혁신당 관계자에 따르면 그의 세평 조회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구석도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개혁신당이 그를 부산시장 후보로 내세웠던 건 마땅한 대안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후보 한 명이 아쉬운 마당에 자신이 큰돈 써가며 부산시장 선거에 나서겠다고 하니, 전과 등에서 심각한 결격 사유가 보이지 않는다면 딱히 마다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개혁신당 같은 군소 정당은 광역단체장 후보를 내기가 쉽지 않다. 이들에게 선거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기본적으로 소선거구제는 인지도가 높고 조직이 탄탄한 거대 양당에 유리하다. 유효투표 총수의 15%(전액) 또는 10%(반액)를 넘어야 비용을 보전받는 선거제도도 더불어민주당·국민의힘보다 작은 정당에서 출마하는 이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사실상 당선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자기 돈을 써가며 선거를 치러야 한다. 어지간한 사명감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다.
제3지대 정당은 보통 기성 정치에 대한 염증과 환멸에서 시작된다. “새로운 정치”를 외치며 호기롭게 깃발을 올리지만 이내 냉혹한 현실에 직면한다. 돈도 조직도 없는 이들이 기대할 수 있는 건 인물 경쟁력뿐. 문제는 작은 정당이 참여자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점이다. 보조금과 당비는 쥐꼬리만큼 들어오고, 챙겨줄 수 있는 자리도 몇 없다. 그래서 양질의 정치 자원들은 당선 가능성이 낮고 보상도 거의 없는 소수 정당에 좀처럼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제3정당은 기존 정당에서 밀려났거나 처음부터 그 리그에 진입하기 어려웠던 인물들로 채워지기 쉽다. 그런 현실을 잘 보여줬던 게 국민의당이다. 국민의당은 한때 호남 지역 의석을 석권하며 돌풍을 일으켰으나 지역 조폭 동원 의혹, 제보 조작 사건, 최고위원의 폭행 사건 등 구성원들의 지저분한 논란이 계속된 끝에 문을 닫았다.
정이한 전 후보의 피습 자작극 논란은 제3지대 군소 정당이 처하게 되는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많은 기회를 포기할지언정 믿을 수 있는 소수정예로 버틸 것인가, 아니면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일단 많은 인물을 확보하는 데 힘쓸 것인가. 개혁신당의 선택은 후자였던 듯하다. 개혁신당은 “99만 원으로 지방선거에 출마할 수 있다”며 진입 장벽을 대폭 낮추었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200명 가까운 후보자를 배출한 건 조직 기반이 취약한 개혁신당으로선 대단한 모험이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피습 자작극으로 개혁신당은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에까지 놓이게 되었다. 남은 기회도 그리 많지 않다. 구성원의 일탈이 다시 한번 반복되면 그땐 정말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인사든 정책이든, 의사결정을 하는 모든 순간이 살얼음판이다. 국민은 왜 유독 군소 정당에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냐는 볼멘소리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제3지대 정당이 부도덕하고 부패한 기성 정치권에 대한 안티테제로 부상하는 것임을 고려하면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기도 하다.
2026-08-3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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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새로운 집을 위한 실험
“안녕하세요? 이번 주 603호에서 독서 모임을 해도 될까요?” “네, 그럼요. 대신에 화분에 물도 주고 환기도 부탁드려요.”
이번 주 토요일 우리 집을 사용하고 싶다는 지인의 문자다. 우리 집을 이웃에게 열어둔 지 반년, 달력에는 매달 크고 작은 예약이 적힌다.
우리 가족은 엄마와 나, 둘이다. 나는 대학생 때부터 줄곧 타지에서 지냈고 부산 본가에는 엄마가 혼자 살았다. 가족 구성원이 떠난 자리에 엄마는 가끔 독서 모임을 열고, 외국인 여행자들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러던 올해 초, 엄마가 갑작스럽게 해외에서 일하게 되면서 집이 아예 비게 되었다. 예정된 근무 기간은 2년, 마냥 현관문을 잠가 두기에는 꽤 긴 시간이었다. 고민 끝에 우리는 집을 지인들과 공유해 보기로 했다.
소식을 알리자, 집을 사용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여럿 생겼다. 이들과 함께 ‘603호 관리위원회’라는 이름의 단체 대화방을 만들었다. 집 사용 일정을 공유하고 집안일을 나눴다. 이름은 거창했지만, 규칙은 간단했다. 집을 사용하는 사람은 다음 사용자를 위해 집을 돌보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찾아올 때마다 우리 집은 다른 이름을 얻었다. 우리 집을 가장 많이 찾는 이들은 엄마의 독서 모임 회원들이다. 예전부터 우리 집에 익숙한 이들은, 창문을 열고 화분에 물을 준 뒤 모임을 연다. 그날의 거실은 동네의 작은 서재가 되었다.
부산 공연을 계기로 인연을 맺게 된 재일교포 극단의 배우와 스태프도 우리 집 단골손님이다. 작은 극단이 타지에서 공연을 준비하려면 숙소를 마련하는 일도 적지 않은 부담이다. 부산에서 공연을 준비할 때면 배우와 스태프는 우리 집에 머물며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한다. 이번 광복절에는 일본으로 강제 동원된 조선인의 삶을 그린 일인극 ‘고픈이’를 부산의 한 소극장에 올렸다. 집 안에 붙여둔 공연 포스터를 본 독서 모임 사람들이 극장을 찾아가기도 했다.
호주에 사는 지인도 몇 년 전 우리 집을 방문한 뒤로, 한국에 올 때면 우리 집에 머문다. 그녀의 할머니가 우리 집 근처에 사시는데, 연세가 든 할머니는 집에 누군가와 계속 함께 머무는 것을 힘들어하신다. 그녀는 우리 집에서 지내며 아침이면 할머니 댁에 가서 식사하고, 오후에는 돌아와 자신의 시간을 보냈다. 우리 집은 할머니와 손녀가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게 지낼 수 있도록 이어주는 동네의 곁방이 되었다.
우리 집을 오가는 사람들은 집을 매개로 서로에게, 그리고 동네에 조금씩 연결되기 시작했다. 공간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시도는 호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멜버른 브런즈윅의 ‘나이팅게일 하우징’은 1인 가구도 이웃과 관계를 맺으며 살 수 있도록 만든 공동주택 프로젝트다. 산업 쇠퇴로 활력을 잃은 동네에서 집을 투자 대상이 아닌 삶의 터전으로 되돌리자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입주자는 각자의 생활을 유지하면서도 필요할 때 이웃과 만나고 공동체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시드니 인근 혼즈비의 ‘빌리지 허브’는 새 시설을 짓는 대신 기존 카페와 주민의 경험을 연결해 모임을 만든다. 하나는 공간을 함께 사용하도록 처음부터 설계한 집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존재하던 사람과 장소가 만날 방법을 설계한 모임이다. 두 사례는 방식은 다르지만, 개인의 독립을 지키면서도 이웃과 연결될 선택지를 열어둔다는 점에서 닮았다.
이에 견주면 우리 집의 변화는 소박하다. 코하우징도 지역 공동체 시설도 아니며, 집의 구조나 소유 방식이 달라진 것도 없다. 다만 우리는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대신 집의 빈 시간을 나눈다. 때때로 집은 동네의 서재가 되다가 공연을 준비하는 숙소가 되고, 다시 할머니와 손녀를 이어주는 곁방이 되기도 한다.
가족의 모습은 계속 달라지는데, 집은 그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가족의 규모는 작아지고 1인 가구는 늘어나지만, 많은 집은 과거의 가족 형태를 품은 채 남아 있다. 부산에서는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37%를 넘어섰으니 열 가구 중 네 가구가 혼자 사는 집이다. 우리 동네에도 1인 시니어 가구가 부쩍 많아졌다. 우리 집 아랫집도, 그 아랫집도 그렇다.
혼자 사는 집이라도 언제나 한 사람만을 위한 공간일 필요는 없다. 어쩌면 미래의 집은 더 편리한 기술과 새로운 구조만큼이나, 달라진 생활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일 수 있다. 이미 있는 집의 쓰임을 새롭게 상상하는 일도 미래의 주거를 준비하는 방법일 것이다. 지금 우리 집은 그 실험을 먼저 해보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머지않아 엄마가 돌아오면 우리 집 역시 1인 가구가 된다. 그때 우리 집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2026-08-26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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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대학판 플랫폼 시대
몇 달 전 중국 항저우에 있는 세계적인 전자상거래 기업 알리바바 본사를 방문했을 때 들은 이야기다. 한 임원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중국의 한 시골마을에서 생산되는 채소를 플랫폼에 올렸더니 소위 ‘대박’을 쳤다는 일화를 전했다. 과거라면 시골장을 벗어나기 어려웠을 상품이 온라인 플랫폼을 만나면서 중국 전역의 소비자와 연결된 것이다.
바야흐로 플랫폼의 시대다. 플랫폼은 공급자와 소비자를 연결하고 선택의 폭을 넓히며 거래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춘다. 좋은 상품만 있다면 어디에서 생산되었는지는 더 이상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대학은 어떨까.
고등교육은 여전히 산업화 시대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학생은 한 대학에 입학하면 대부분 그 대학이 제공하는 교육과정 안에서 공부를 마친다. 국제 교류도 소속 대학이 협정을 맺은 제한된 자매대학과의 교환학생이 중심이다. 세계는 거대한 네트워크로 연결되고 있는데 대학은 아직도 하나의 ‘섬’처럼 운영되고 있는 셈이다.
플랫폼, 소비자·생산자 직접 연결
시골 채소도 전국 '대박' 나는 시대
대학, 여전히 한 학교 내에서 교육
네트워크 연결 시대에 뒤처진 '섬'
여러 대학·학생 잇는 '플랫폼 대학'
'학생 선택권 확대' '대학에도 기회'
특히 아시아 국가들의 상호의존이 갈수록 깊어지는 시대를 살아갈 청년들에게는 아쉬운 현실이다. 기업은 이미 국경이라는 제약이 없이 움직이고 공급망은 여러 나라를 연결한다. 하나의 제품에도 여러 국가의 기술과 인재가 참여한다. 그런데 정작 대학생은 하나의 대학, 하나의 국가 안에서 배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여러 나라에서 공부하려면 비용 부담이 크고, 개별 대학이 수많은 해외 대학과 일일이 협정을 맺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쉽지 않다. 아무리 세계적인 명문대학이라도 혼자서 학생들에게 아시아를 아우르는 교육과 경험을 제공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플랫폼형 대학’이라는 새로운 발상이다. 여러 대학이 각자가 가진 교육 역량과 학생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서로 공유하는 방식이다. 학생들은 그 가운데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직접 선택한다. 학생의 배움과 경험이 소속 대학의 울타리를 넘어 더 넓은 교육 자원과 기회로 확장되는 것이다.
유럽은 일찍부터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을 통해 국가 간 학생 이동의 장벽을 낮췄고, 온라인 공개강좌(MOOC)는 세계 어디서나 우수한 강의를 접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에라스무스가 주로 제도화 된 대학 간 이동을, MOOC가 온라인 강의의 개방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면,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볼 수 있을 것이다. 강의뿐 아니라 공동학위, 인턴십, 현장 프로젝트, 공동연구, 여름학기, 단기연수 등 각 대학이 가진 다양한 기회를 하나의 플랫폼에 모아 학생들이 자유롭게 프로그램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다. 대학과 대학을 개별적으로 잇는 ‘1 대 1 방식’에서 여러 대학과 학생을 동시에 연결하는 ‘다 대 다 방식’으로의 전환이다.
최근 필자가 속한 대학을 포함한 아시아 여러 대학들이 의기투합해 이러한 실험을 시작했다. 오는 10월 출범을 준비 중인 ‘아시아연합대학’(Asia Alliance University)이다. 학생들이 소속 대학의 경계를 넘어 참여 대학들의 교육과 경험의 기회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구상이다. 현재 17개국 163개 대학이 참여 의사를 밝히고 있다.
중요한 것은 특정 플랫폼의 성공 여부보다 이러한 방식이 가져올 변화다. 학생의 선택권이 커지면 대학도 선택받기 위해 더 좋은 프로그램을 내놓게 되고, 개별 대학에서 제공하기 어려운 교육은 다른 대학과 협력을 통해 한층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규모나 명성보다 ‘무엇을 잘 가르치고 어떤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는가’가 중요해질 수 있다. 국제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아시아의 작은 대학도 독창적인 프로그램 하나로 일약 주목받을 수 있는 기획도 잡을 수 있다. 알리바바에서 이름 없는 시골의 채소가 전국적인 상품이 된 것과 같은 원리다.
한국 대학에도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한류를 통해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해외 학생들이 한국 대학의 다양한 교육 콘텐츠를 온라인에서 먼저 접하고, 이후 한국을 찾아 프로젝트와 인턴십 등에 참여한다면 관심이 실제 교육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대학의 플랫폼화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학점 인정과 교육의 질 관리, 등록금 배분, 국가마다 다른 학사제도 등 넘어야 할 장벽이 하나둘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 때문에 대학 간 연결 자체를 포기할 이유는 없다.
플랫폼 시대에는 어느 대학에 입학했느냐보다 무엇을 배우고, 어디에서 경험하며, 누구와 연결되는가가 더 중요해질 것이다.
이제 대학도 섬에서 벗어나 플랫폼이 될 때다.
2026-08-24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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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북극항로는 데이터 전쟁이다
이틀 뒤인 8월 22일, 부산항에서 북극을 향한 뱃고동이 울린다. 팬스타그룹의 컨테이너선 팬스타 아크로호가 부산을 출항해 북극해를 지나 영국 펠릭스토우를 첫 기항지로 삼아 로테르담과 그단스크를 거쳐 돌아오는 40여 일에 걸친 항해에 나선다. 수에즈 운하를 거치는 기존 항로보다 짧은 새로운 바닷길이다. 홍해 사태로 글로벌 물류망의 취약성이 드러난 지금, 새로운 항로 확보는 무역 국가의 공급망 안보와 직결된다. 이번 항해는 부산의 해양수도 구상을 북극으로 확장하는 중요한 시험대이기도 하다.
이 출발점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북극항로 시대의 진짜 경쟁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많은 이들이 쇄빙선과 항만 인프라, 물류망과 인력을 떠올린다. 모두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북극해에서는 해빙 상황에 따라 안전한 항로가 수시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기후변화로 급변하는 극지 환경에서 북극해의 얼음은 고정된 장애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변수다. 어제 열려 있던 길이 오늘은 얼음벽으로 막힌다. 극지에서는 위성 관측과 기상·해류 데이터를 바탕으로 항로를 지속적으로 갱신해야 한다. 상당수 해역은 수심과 지형, 장애물을 담은 정밀한 해도가 부족하고, 고위도에서는 통신과 항법 정보의 안정적인 확보도 쉽지 않다. 결국 북극항로에서 배를 움직이는 것은 엔진이지만, 그 배를 지키는 것은 데이터다.
문제는 이 데이터를 누가 확보하고 통제하느냐에 있다. 러시아는 국영기업 로사톰을 중심으로 운항 허가와 쇄빙 지원, 항행 정보를 관리한다. 중국은 지난해 시험 운항에 이어 올해 닝보와 유럽을 잇는 정기 컨테이너 서비스를 시작해 항행 경험과 데이터를 빠르게 축적하고 있고, 미국과 유럽도 극지 관측과 해빙 예측 역량을 꾸준히 강화하고 있다. 우리 역시 해빙 관측과 예측 기술을 축적해 왔지만, 실제 북극항로 운항에서는 러시아 측 정보와 운항 지원에 대한 의존을 피하기 어렵다. 핵심 운항 데이터를 충분히 축적하지 못한 채 상업 운항에 나서는 것은 남이 그려준 항로를 따라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구조는 상황에 따라 운항의 제약으로 돌아올 수 있다. 북극항로는 단순한 물류 경쟁이 아니라 데이터 주도권 경쟁이다.
그렇다면 이번 시범 운항에서 우리가 반드시 남겨야 할 것은 무엇인가. 바로 항해 과정에서 쌓이는 데이터다. 해빙과 기상, 해류, 통신 환경, 선체 거동의 실측 정보는 북극항로 상업 운항 역량을 키우는 기초 자산이다. 이러한 데이터가 지속적으로 축적되고 표준화돼 국제적으로 통용될 때 비로소 경쟁력이 된다. 축적된 데이터는 운항 판단의 불확실성을 줄이고 예측 가능성을 높인다. 이번 시범 운항의 성과가 일회성에 그칠지 장기적인 경쟁력으로 이어질지는 데이터를 어떻게 축적하고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부산은 이미 기반을 갖추고 있다. 해양수산부가 부산으로 이전했고 북극항로추진본부가 출범했으며, 관련 연구·정책 기관도 집적돼 있다. 부산항만공사는 북극경제이사회에 가입해 국제 협력의 발판도 마련했다. 여기에 지역 대학의 해양과학과 데이터·인공지능 연구 역량이 더해진다면 부산은 극지 데이터 허브로 도약할 수 있다. 이제 관건은 이 기반을 실제 데이터 경쟁력으로 연결하는 일이다. 북극항로 특별법은 지난 6월 공포돼 12월 시행을 앞두고 있고, 정부도 북극항로 종합지원체계 구축을 본격화하고 있다.
해운업계에서는 북항에 전용 터미널을 짓고 선박 건조에 새로운 금융 기법을 도입하자는 제안이 나온다. 필요한 논의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인프라를 세우는 지금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인프라도 함께 설계해야 한다. 특별법에 담긴 정보 플랫폼이 실질적으로 작동하도록, 시범 운항과 이후 항해에서 얻는 해빙·기상·해류·통신·선체 거동 데이터를 표준화해 축적하고 산학연이 공동 활용하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위성 기반 해빙 예측, 극지 해역 정밀 해도 구축, 인공지능 항로 최적화도 국가 핵심 연구개발 과제로 키워야 한다. 기술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해빙과 기상, 공간정보와 인공지능을 아우르고 데이터를 실제 항해와 산업에 연결할 전문 인재를 지역에서 길러야 한다. 이는 부산 청년들에게 ‘극지 데이터 전문가’라는 새로운 진로를 여는 일이기도 하다. 데이터는 쌓이고 연결될 때 비로소 기록을 넘어 안정적인 상업 운항을 뒷받침하는 힘이 된다.
150년 전 부산의 개항이 바다의 길을 연 사건이었다면, 오늘 우리가 열어야 할 것은 데이터의 길이다. 북극항로의 경쟁력은 결국 데이터와 이를 활용하는 역량에서 결정된다. 이번 시범운항이 한 번의 실험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여기서 얻은 데이터를 국가의 전략 자산으로 만들어야 한다. 부산이 그 새로운 지도의 첫 획을 긋는 도시가 되기를 기대한다.
2026-08-1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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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부산발 '동아시아 청년 학' 가능할까?
부산의 한 대학교에 있는 국가연구소 두 군데와 공동으로 지난 10주간 릴레이특강을 실시하였다. 청년 문제와 청년 정책은 청년들이 스스로 풀어야 하는 청년 당사자만의 문제인가, 아니면 모든 세대가 같이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미래사회의 문제 혹은 포용의 문제인가부터 공공예술 프로젝트에 뛰어든 도시 청년들의 성공담, 동아시아학의 확대, 문화론과 지역학 연구에서의 문화적 소통론의 중요성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청년 학의 이론과 실제, 포용 사회로 가는 길, 동아시아학의 범주와 관심 영역 확대 등에 관한 논의였다. 주제 가운데에는 우리가 어릴 때 읽었던 탐정소설이 그냥 흥밋거리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근대 그리고 청년의 시대 사명이나 시대의식과 연결된다는 이야기, 2010년대 대만의 ‘해바라기 운동’과 그 이후 국가와 민주주의를 업데이트한 여러 변화, 일본의 청년 서브 문화에서 영향받은 한국 청년들의 흔들리는 자의식과 포용 사회 이야기도 있었다.
이와 더불어, 1940년대 식민지 조선과 대만 청년이 왜곡하여 수용한 ‘일본정신’과 상징폭력도 소개되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시기의 경성과 도쿄의 관계를 넘어, 여전히 계속되는 식민지 유산의 극복 과제라든가 지배구조의 재생산과 강요, 서울과 지역 간의 ‘내부 식민지’ 문제로도 연결되는 부분이어서 오늘날에도 유효한 논쟁으로 보였다. 국가 예산으로 운영되는 대학 연구소와 사업단, 시민 인문학 단체가 머리를 맞댄 이번 제1회 공동릴레이 특강에서는 중국의 현대소설 〈인생〉을 매개로 도농 간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청년 지식인의 문제, 급변하는 시대 배경 가운데서 청년의 자기 규정, 이념과 공간의 ‘교차 지대’ 문제를 다루기도 하였으며, 100여 년 전 나운규의 시베리아 방랑이 영화 ‘아리랑’을 거쳐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BTS의 부산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그 연결고리를 탐색하기도 하였다.
지난 두 달 반의 몰입을 통하여 마음 안에 남는 강한 잔상, 강한 열망 하나는 부산발 인문학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부산은 우리만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과 사회문화적 환경을 안고 있다. 이런 자산과 유산이 강력하고 개성 있는 인문학적 토양이 될 수 있겠는데, 학계와 사회의 어떤 노력이 가해져야 부산만의 인문학을 넘어 한국 사회 전체 혹은 동아시아에 새로운 담론을 제시할 수 있을까? 우리 공동체가 숱한 희생, 우여곡절,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세월을 거쳐 축적하고 키워온 인문적 잠재력을 응집하고 융합하여 부산발 인문학으로 폭발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대륙과 해양이 만나는 곳, 왜관·개항장·한국전쟁 피란수도·현대의 국제항만까지 경계와 경계가 충돌하는 곳, 끊임없이 새로운 문화와 사람이 만나는 이 창조의 공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여전하다. 많은 대학과 시민사회에서의 여러 성과에도 불구하고 유라시아의 출발점이자 도착지라는 이 어마어마한 조건이 안타깝다는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자연적 역사적 문화적 ‘혼종성(hybridity)’ 위에 사투리와 음식과 영화와 음악, 자갈치시장·국제시장·영도·감천문화마을·산복도로에 쌓인 평범한 시민들의 기억과 일상, 방랑과 이동, 이주와 세계 활동이 버무려져서 지역성과 세계성을 함께 담는 다양한 담론이 여기저기서 쏟아졌으면 좋겠다.
물론, 청년 유출이 가장 심각한 도시에서 ‘동아시아 청년 학’은 무리라는 지적도 있을 수 있다. 통계청과 부산시의 인구 이동 자료를 종합하면, 매년 수천 명에서 1만 명 이상이 부산에서 다른 시도로 유출되고 있다. 그 중심에 20~39세 청년층이 있다. 이들은 주로 취업과 대학원 진학, 더 높은 임금을 찾아 서울·경기 지역으로 이동한다고 한다. 반면에 고령층 비중이 계속 높아지고 있어, 청년 유출과 고령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구조를 안고 있는 곳이 우리 부산이긴 하다. 하지만 반대의 흐름도 있다. 지난해 부산을 찾은 외국인이 364만 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관광 매출 1조 원을 우리 부산에 남긴 이들의 대다수가 일본·대만·중국·동남아국가의 20~30대 젊은 여행객이다. K팝과 부산의 바다, 카페, 야경을 즐기려는 해외 청년층이라고 한다. 부산 청년은 바깥으로 떠나고 반대로 해외 청년들은 부산을 찾아오는 이 역설 사이에 어쩌면 ‘동아시아 청년 인문학’의 공간이 충분하게 열릴 수 있지 않나 싶다. 부디 부산에서 의욕적으로 출발한 청년 학 담론이 범주와 방향의 수정, 실천 영역과의 조화, 동아시아권 여러 대학과의 공조 등을 통하여 학문으로서의 세부 영역을 잘 정립하여 나가길 바란다. 그리하여 담론이 담론에만 그치지 말고, 우리 도시의 청년 정책을 새 환경에 맞게 실천적으로 새로 정립하고 바로 잡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크다.
2026-08-1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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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혐오의 시대, 윤리는 어디서 오는가
지난 7월 중순 무렵 부산의 한 고등학교에서 주제탐구 수업을 진행했다. 1~2학년 학생들 각자가 자신의 관심 분야나 진로와 관련한 주제를 선정해 탐구 활동을 수행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수업이다. 인문·사회 분야에 관심을 둔 20여 명이 선정한 주제는 나름대로 진지한 고민과 궁금증을 담고 있었다. 학생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하나씩 읽어가는 가운데 특별히 눈길을 사로잡는 글이 있었다. 바로, 윤리 수업을 통해 ‘혐오’를 어떻게 근절할 수 있을지를 다룬 글이었다. 뜻밖이었다. 고등학교에서 만나게 되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주제였기 때문이다.
혐오의 언어, 놀이처럼 소비 현상 지속
디지털 공간 통해 전파되며 일상 잠식
예전엔 특정 대상 조롱 용인되지 않아
금기시하는 윤리적 감각이 옅어진 탓
망각된 역사·개별적 삶의 기억 복원을
타인의 얼굴 마주하려는 용기 지녀야
수업이 이루어진 시기는 고교생 야구대회에서 불현듯 울려 퍼진 혐오의 목소리가 온 사회를 들끓게 만든 직후였다. 학생들 사이에서 혐오가 일상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공공연하게 발화될 수 있다는 사실은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혐오에 휩싸인 교실의 실태를 조명한 보도와 방송이 각종 매체를 통해 전해졌다. 놀이가 된 혐오는, 그것을 놀이‘쯤’으로 치부했던 우리 사회의 방만하고 무책임한 태도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주지하듯이, 교실 현장에서 혐오가 문제시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학생들이 ‘일베’를 비롯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양산되는 혐오의 말들을 일종의 놀이처럼 소비하는 현상은 꽤 오랜 기간 지속되어 왔다. 주위에서 전해지는 현장의 실상은 매체가 전하는 소식보다 처참하다. 교실 책상마다 비극적으로 생을 마친 대통령의 이름이 거칠게 새겨져 있고, ‘일베어’는 교사를 도발하고 희롱하는 말로 사용된다. 커뮤니티에 직접 접속하지 않더라도, 학생들의 주요한 생활세계인 SNS와 게임 등의 디지털 공간은 혐오의 언어를 빠르게 전파하며 일상을 잠식하고 있다. 디지털 공간에 접속하는 빈도와 시간이 증가하는 만큼, 혐오는 빠르고 광범하게 퍼져 나간다.
문득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보면, 누군가 일베어를 쓰는 것으로 의심만 되어도 다른 친구들로부터 숱한 눈총을 맞았다. 그것이 호기심이건, 놀이이건 특정 대상을 조롱하고 희화화하는 것은 쉽사리 용인될 수 없는 잘못된 행동이라는 인식이 또래 집단 내에서 공유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한 인식은 타인에 대한 윤리적 감각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정은 다르다. 혐오를 금기시하는 윤리적 감각은 옅어질 대로 옅어졌다. 디지털 세계 속 밈과 숏폼 영상, 노래 등은 어느새 혐오를 놀이의 형태로 뒤바꿔 놓았다. 혐오가 유희적 놀이로 재배치되는 순간 윤리적 잣대는 힘을 잃는다.
이러한 혐오의 놀이화는 혐오의 대상을 실재 세계로부터 ‘탈맥락화’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대상을 그들이 속해 있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삶의 맥락으로부터 떼어내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가 겪어 왔던 숱한 비극적 사건은 물론 그 속에 존재했던 개개인의 삶의 궤적들이 사라질 때, 혐오는 윤리적 잣대가 개입하기 힘든 놀이가 되고 만다. 예컨대, 1980년 5월 목숨을 내던지며 광주를 지켰던 수많은 시민의 삶과 희생이 비가시화될 때, 역사적 비극은 ‘탱크’라는 조롱 섞인 밈으로 치환되어 버린다. 역사적 사건뿐 아니라 인물, 지역, 젠더를 대상으로 한 혐오가 작동하는 방식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이러한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적 논의도 잇따르고 있다. 지난달 부산에서 열린 국가교육위원회 ‘학교시민교육 국가기본원칙’ 토론회에서 차정인 위원장은 “정치 사회의 쟁점을 주제로 삼아 논쟁적으로 다루는 교과수업은 학생의 사고력과 자율적 판단력을 기를 것”이라 전망했다. 학교가 활발하고 건전한 토론의 장으로서 시민교육의 거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무도 강파르고 뒤틀린 오늘날 학교 현실을 점진적으로나마 뒤바꿀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관건은 윤리를 회복하는 데 있다. 놀이의 의장을 걸친 혐오가 대상으로부터 삶의 구체성을 지우는 탈맥락화를 통해 교실 깊숙이 침투했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은폐되고 망각된 역사와 개별적 삶의 기억을 복원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윤리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는 데서 윤리가 시작된다고 말했다. 그것은 타인의 삶의 궤적과 맥락, 그리고 그 속에 자리한 숱한 마음과 직접 대면하는 것이다. ‘탱크’라는 폭압적 기호의 자리에 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희생했던 이들의 기억이 오롯이 들어찰 때, 윤리는 비로소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혐오로 가득한 시대를 지나며, 타자를 향한 윤리를 기대하기는 요원할지 모른다. 불안함과 무력함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우연히 마주한 고등학생의 보고서가 그토록 새삼스러웠던 까닭도 바로 거기 있었다. 그러나 그 작은 글에서 발견했던 것은 이토록이나 암울한 시대를 의연히 건너가려는 의지, 그리고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려는 용기였다.
2026-08-10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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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부산 관광데이터의 나아갈 길
연일 최고기온 기록이 갱신되고 있다. 사람들은 무더위를 피해 바다를 찾고, 야간 관광지를 찾으며, 시원한 실내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사람들의 이러한 움직임을 알게 되는 것일까. 답은 데이터에 있다. 스마트폰을 누르는 손가락 하나, 검색창에 입력하는 단어 하나, 길을 걷는 발걸음 하나까지 모두 데이터가 된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매일 데이터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관광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관광 데이터는 관광객 수, 숙박객 수, 관광지 방문객 수처럼 관광으로 인해 발생한 결과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숫자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데이터는 관광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할 수 있었지만, 관광객이 왜 그 장소를 선택했고 어떻게 이동했으며 무엇을 경험했는지는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 필자는 이러한 데이터를 ‘평면 데이터’라고 생각한다.
관광객 수로 나타난 평면 데이터
다른 정보 조합되면 입체 데이터
무연결 정보 남발 데이터 카오스
새로운 데이터의 중심 축은 시간
미래 세대가 복원할 관광 위해선
시점에 충실한 정보 연결이 중요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위치정보와 소비기록, 검색기록, SNS, 사진과 영상, 교통정보, 날씨, 이동경로 등이 서로 연결되면서 한 명의 관광객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각각의 데이터는 작은 조각에 불과하지만 그 조각들이 서로 연결되는 순간 하나의 관광 경험이 완성된다. 이 같은 데이터는 더 이상 숫자의 집합이 아니라 사람과 공간, 행동과 경험을 함께 설명하는 ‘입체 데이터’로 진화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입체 데이터는 단순히 데이터의 양이 많아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서로 다른 성격의 데이터가 시간과 공간, 사람과 경험이라는 공통된 맥락 안에서 연결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관광객이 언제 어디를 방문했고, 무엇을 소비했으며, 어떤 감정을 남겼는지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데이터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관광의 맥락을 설명할 수 있는 자산이 된다. 데이터의 미래는 누가 더 많은 양을 모았는지보다 누가 더 깊게 연결할 수 있느냐는 데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러나 입체 데이터의 시대가 곧바로 이상적인 미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는 너무 많은 데이터가 생성되면서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날 것이다. 데이터가 넘쳐날수록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하기 어려워지고, 서로 다른 데이터들이 연결되지 못한 채 흩어지는 ‘데이터 카오스’의 시대가 올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미래에는 많은 데이터를 보유하는 것이 경쟁력이 아니라, 수많은 데이터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연결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데이터 카오스를 무엇이 정리하게 될까. 필자는 그 중심축이 ‘시간(Time)’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데이터는 주로 공간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어디를 방문했고, 어디에서 소비했으며, 어디에서 사진을 찍었는지가 중요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시간축을 따라 데이터가 연결되기 시작할 것이다. 특정 장소에서 특정 시점에 사람들은 어떻게 움직였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경험했는지가 하나의 이야기로 복원되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 순간 관광은 새로운 차원으로 진화한다. 우리는 더 이상 현재의 공간만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시간도 경험하게 될지 모른다. 물론 물리적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충분한 데이터가 축적되고 이를 시간축을 따라 재구성할 수 있다면 미래의 사람들은 2026년 부산의 거리와 시장, 바다와 축제, 사람들의 일상까지 실제처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현실 속 타임머신은 아니지만 관광의 관점에서는 시간여행에 가장 가까운 경험이 될 수 있다.
관광은 원래 시간을 소비하는 산업이었다. 그러나 미래의 관광은 시간을 소비하는 산업을 넘어 시간을 복원하는 산업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과거를 기록하는 수준을 넘어 특정 시점의 과거를 다시 체험하게 만드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그 출발점에는 결국 데이터가 있다.
그렇다면 부산은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이제 중요한 것은 관광객 숫자를 하나 더 세는 일이 아니다. 미래 세대가 오늘의 부산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오늘의 부산을 얼마나 충실하게 기록하고 연결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지금 우리가 만드는 데이터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미래 관광을 위한 시간의 자산이 될 수도 있다.
부산의 관광데이터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필자의 답은 분명하다. 평면 데이터를 넘어 입체 데이터로, 입체 데이터를 넘어 시간축으로 연결되는 데이터로 나아가야 한다. 미래 관광의 경쟁력은 더 많은 데이터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를 얼마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때 비로소 부산의 관광은 공간을 넘어 시간을 여행하는 새로운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2026-08-05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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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금융허브 전쟁, 부산의 시간 많지 않다
세계 금융중심지의 지형이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과거 금융허브 경쟁은 뉴욕·런던·홍콩 등 오랜 시장과 제도적 기반을 축적한 도시들의 영역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는 중동과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와 아프리카의 신흥국까지 국가의 성장 전략을 걸고 국제금융센터 건설에 뛰어들고 있다.
오늘날 금융중심지는 시장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기를 기다리는 공간이 아니다. 법률·감독·세제·외환·비자·분쟁 해결 제도와 전문 서비스를 얼마나 과감하고 정교하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리는 치열한 제도 경쟁의 장이다. 후발국들은 금융 시장과 거래 기반이 부족하다는 한계를 받아들이는 대신, 차별화된 법률 체계와 감독 기구, 파격적인 세제·외환 특례를 앞세워 국제 금융 거래를 선점하려 하고 있다.
두바이 국제금융센터는 영미법 기반의 금융 구역과 독립 규제 기관, 별도 법원을 결합해 기존 금융 시장의 한계를 제도로 뛰어넘었고, 중동·아프리카·남아시아의 금융 관문으로 성장했다. 카자흐스탄의 아스타나 국제금융센터도 영미법 원칙과 독립 감독 기관, 국제 법원·중재센터·거래소를 하나의 플랫폼으로 구축했다.
우즈베키스탄 역시 타슈켄트 국제금융센터 설립을 추진하며 국제상사법원, 별도 금융 감독, 외환과 자본 송금의 자유, 장기 세제 혜택과 외국 전문 인력 특례까지 검토하고 있다. 충분한 시장 기반을 갖추지 못한 후발국조차 시장이 성장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먼저 제도를 만든 뒤 이를 바탕으로 자본과 금융기관을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베트남의 움직임은 부산에 더욱 직접적인 경고다. 베트남은 2045년 고소득 국가 진입 목표와 연계해 호찌민 국제금융센터와 다낭 역내 금융센터를 추진하고 있다. 영국 정부와 금융 산업 단체인 더시티UK(TheCityUK)의 지원 아래 금융 법규 개혁, 국제 중재, 외화 계좌, 녹색 금융, 전문 인력 비자와 금융·법률·회계 생태계를 함께 설계하고 있다. 제조업·수출·항만을 기반으로 성장한 호찌민이 무역 금융과 공급망 금융을 흡수하면 부산과 직접 경쟁할 수 있다.
이들 사례가 부산에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시장의 깊이가 얕다는 사실은 금융허브 도전을 포기할 이유가 아니라 제도 개혁을 서둘러야 할 이유다. 거래가 충분히 쌓일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거래를 끌어오기 위해 금융 법규와 감독 체계를 정비하고 외환·세제 특례, 국제 중재, 전문 인력 유치와 신속한 인허가를 하나의 패키지로 구축해야 한다. 시장의 깊이는 제도를 통해 만들어 가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부산의 금융중심지 전략도 이 관점에서 재설계돼야 한다. 지금까지 부산은 금융 시장 규모와 민간 금융기관의 부족을 반복적으로 지적해 왔지만, 이를 보완할 제도적 장치를 국가 차원의 핵심 의제로 끌어올리는 데는 충분히 적극적이지 못했다. 개별 기관 유치나 공간 조성만으로 국제 거래는 움직이지 않는다. 법률·감독·외환·세제·분쟁 해결 체계를 한 묶음으로 바꾸는 것이 정책의 중심이 돼야 한다.
그러나 제도 개혁만으로 전략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특례를 적용할 구체적인 시장과 거래가 분명하지 않으면 금융특구는 형식에 머문다. 반대로 부산의 산업적 강점만 강조하고 제도를 그대로 둔다면 관련 금융 거래는 계속 서울이나 해외에서 처리될 것이다. 따라서 부산의 제도 개혁과 해양금융 특화는 별개의 과제가 아니라 하나의 전략으로 결합해야 한다.
이 점에서 인도의 GIFT 국제금융서비스센터는 현실적인 이정표다. 인도는 뭄바이라는 기존 금융 중심지를 두고도 구자라트주에 별도의 국제금융특구를 조성했다. 자국 기업의 외화 차입, 국제 채권, 펀드, 재보험, 항공기·선박 리스가 해외에서 처리되면서 수수료와 전문 인력, 세수와 금융 정보가 유출되는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였다. 국내 금융 시장 전체를 개방하지 않고 특정 구역과 기능에 외화·비거주자 거래, 통합 감독과 세제 특례를 적용했다.
부산도 해외에서 처리되는 한국 관련 해양금융 거래를 부산으로 환류시키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한국은 세계적인 조선·해운 산업과 항만·물류 기반을 갖추고 있지만, 선박 금융과 리스, 해상 보험과 재보험, 무역 금융, 항만 프로젝트 금융, 법률·회계 서비스의 상당 부분은 해외 금융허브에서 이루어진다. 선박은 한국에서 건조하고 화물은 부산항을 통과하지만 금융 수익과 전문 서비스는 해외에 축적되는 구조다.
부산의 제도 개혁은 바로 이 해양금융 수요를 겨냥해야 한다. 비거주자와 외화 표시 선박 금융·리스, 해상 보험, 항만·물류 인프라 금융, 친환경 선박 전환 금융 등에 외환·세제·규제 특례를 적용하는 부산형 해양금융특구가 필요하다. 범정부 원스톱 조정 체계와 함께 영문 계약, 국제 중재, 해사·국제상사 분쟁 해결, 금융·법률·회계 전문 인력 유입도 지원해야 한다.
물론 처음부터 국내 금융 질서와 다른 독립적 법률·감독·조세 체계를 전면 도입하기는 어렵다. 제도 이원화와 금융 안정, 조세 형평성, 지역 특혜와 규제 차익을 둘러싼 논란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에는 해양·외화 금융이라는 명확한 기능에 한정해 특례를 적용하되, 국제 금융의 개방성을 높이는 동시에 국내 금융 시장과의 정합성과 금융 안정을 확보할 관리 체계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 이후 거래와 제도적 신뢰가 축적되면 적용 업무의 범위와 법률·감독상의 자율성을 단계적으로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부산의 선택은 제도 개혁과 해양금융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다. 해양 산업이라는 강점을 토대로 개혁의 대상과 범위를 정하고, 과감한 제도 개혁을 통해 그 산업에서 발생하는 국제 금융 거래를 부산으로 끌어오는 것이 핵심이다. 산업적 기반이 없는 금융 특구도, 제도적 뒷받침이 없는 해양금융 구상도 성공하기 어렵다.
세계 금융 도시들은 이미 시장의 부족함을 제도로 보완하며 움직이고 있다. 부산도 조선·해운·항만이라는 실물 경쟁력을 국제 금융 거래로 전환할 제도적 결단을 서둘러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부산은 서울의 축소판이 아니라 아시아 해양금융의 독자적 허브로 발전할 수 있다. 금융허브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부산의 시간은 많지 않다.
2026-08-03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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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피해자에게 뭘 더 하라고 하지 말라
지금 당신을 가장 절망케 하는 건 무엇입니까.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함께 하는 북콘서트 자리에서 이 질문을 받았을 때, 해고노동자의 부인은 담담히 답했다. “저를 가장 절망하게 만든 건, 더 노력해야 된다는 말이었어요.” 김애란 작가는 이 대답을 듣고, 자신이 철저히 그녀의 고통 바깥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아무리 노력한들 세상에는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고통이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그녀의 말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발견한다. 세상의 무관심과 폭력 속에서 철저히 혼자 버려진 느낌을 받을 때, 그 시간에 잠겨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외로움이라고 했다.
여성인권지원센터에서 일을 하면서 현장에서 만난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과 고립감은 이와 비슷했다. 피해 자체가 세상이 믿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신뢰가 무너지는 경험이지만,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은 일상의 회복과 세상과의 연결이 아닌, 더 큰 고립감 속으로 피해자를 던져놓는 것일 때가 있다. 젠더폭력처럼 사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사건일수록 더욱 그렇다. 때문에 사법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은 피해자를 고립시키고 소외시키는 방식은 아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피해자에게 더 노력하라는 말을 하면서 피해자를 고립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사건의 현장에서 고민되어야 할 보완수사권 존폐 문제가 국회로 넘어가 개혁의 언어가 된 것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논란 끝에 더불어민주당은 보완수사권 폐지를 당론으로 정했다. 대신 아동학대, 가정폭력 등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 범죄는 중수청에 전담 부서를 설치하고 피해자 측의 이의신청권을 확대하겠다는 방침이다. 피해자의 이의제기권 신설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결국 피해자가 더 애쓰고, 더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혔기 때문이었다.
수사와 기소를 분리해야 권력 남용을 막을 수 있다는 문제의식은 당연히 수긍할 수 있다. 검찰이 독점기소권을 악용해온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런 우려는 근거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설령 분리의 방향이 옳다 해도, 그로 인해 생기는 공백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는 전혀 다른 질문이다. 그간 법조계와 인권단체에서는 보완수사권 폐지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시해왔다. 범죄 피해자들이 여러 차례 직접 나서서 보완수사권이 수사의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는 장치로서 국가의 책무라는 점을 강조했다. 장애인과 약자 변호에 힘써 온 김예원 변호사 역시 보완수사권이 폐지되면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사건이 가장 큰 피해를 본다”고 우려했다. 그런데 지금의 방침은 그 공백을 피해자 본인의 노력으로 메우라는 것에 가깝다.
이미 여성단체와 법조인들은 수사기소 분리 원칙에 따라 진행된 지난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수사 지연과 부실 수사 문제가 더 심화했다고 본다.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사건이 경찰에 집중되었으나, 인력과 조직 정비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고 수사 역량 문제가 지적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경찰의 수사 역량 자체는 결코 낮지 않다. 문제는 수사 역량이 아니라 사법 시스템이며, 보완수사권은 그러한 맥락에서 범죄 피해 수사에 한 번의 기회를 더 제공하는 구조적 수단이 되어 왔다. 피해자의 접근권과 절차적 참여권 보장은 사법시스템 개혁의 핵심적인 사안이지만 이것이 수사 오류의 공백을 바로잡을 수 있는 대안이 될 수는 없다.
가정폭력 피해자 중 0.8%, 성폭력 피해자 중 1.8%만이 신고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사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범죄에 피해자들은 신고를 꺼려한다. 피해자가 겨우 용기를 내 신고하는 것만으로 수사에 커다란 단서를 제공한다. 그런데 그 용기 다음에 또 다른 절차적 부담을 얹는 것이 지금의 개편안이다. 이의제기권을 신설하여 마치 권리를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원래 있어야 했던 보호를 피해자의 몫으로 떠넘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현재 경찰 단계의 이의신청권조차 제대로 힘을 못 쓰고 있는 상황에서, 이후의 수사에서도 이의를 제기해야 수사가 겨우 진척되는 구조라면 국가는 형사사법 피해를 구제할 의지가 있는지부터 물어야 한다.
애초 형사사법 시스템은 무고하게 피해를 본 이들을 위한 것이다. 형사사법 개혁은 수사와 기소의 분리라는 거대한 원칙의 문제이기 이전에, 피해자 구제가 그 중심이 되어야 하는 문제다. 보완수사권 폐지 논쟁은 결국 국가의 형사사법 체계가 피해자 구제에 얼마나 적절한지의 문제로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니 제발 피해자보고 뭘 더 하라고 하지 마라. 피해자가 더 애쓰고 뭔가를 더 해야만 바뀌는 세상이라면, 적어도 그것에 개혁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는 말아야 한다.
2026-07-2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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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부산 AI 청사진에 재난 복원력을 함께 그려야
인공지능(AI)은 도시의 미래를 바꾸고 있다. 항만은 물류를 최적화하고, 공장은 생산을 예측하며, 행정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의사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AI가 만드는 편리함 뒤에는 간과하기 쉬운 질문이 있다. ‘AI가 멈추면 도시는 어떻게 되는가’이다. 유엔 재난위험경감사무국(UNDRR)은 오늘날 재난을 여러 시스템을 타고 번지는 시스템 리스크(systemic risk)로 설명한다. 초연결 사회에서는 한 장애가 다른 시스템으로 전이되며 새로운 위험을 낳는다. 에너지, 원자력, 정보기술, 통신, 금융, 교통, 의료, 식량, 방위산업 등 기반시설은 촘촘히 연결돼 있다.
AI가 멈추면 물류·행정·금융도 멈춰
초연결 사회에서 장애 전이되면 위험
위기 발생 때 핵심 기능 지속이 중요
부산시 AI 산업도시 전략도 마찬가지
원전·송전망 타격 땐 항만·공장 '스톱'
기획·설계 단계부터 보안·안전 고려를
지난해 국가정보자원관리원 대전센터 화재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무정전 전원 장치의 배터리 화재가 장비 보호를 위한 선제적 전원 차단으로 이어졌고, 정부 업무시스템 수백 개가 영향을 받았다. 민원 서비스는 중단됐고, 우체국 금융과 택배 업무에 차질이 생겼으며, 모바일 신분증 역시 사용할 수 없었다. 단 하나의 시설 장애가 행정과 금융, 물류 등 사회 전반으로 확산된 대표적인 연쇄 재난이었다.
더 아쉬운 점은 이 위험이 예견됐다는 사실이다. 국회 예산 심사 과정에서 대전과 공주 센터 간 이중화 네트워크 구축 예산이 요구액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지적됐다. 평상시에는 매몰 비용처럼 보였던 백업과 네트워크 이중화가 막상 위기에서는 가장 중요한 복원력이었던 셈이다. 당장의 효율을 앞세워 연결망의 안전장치를 줄이는 순간 시스템 전체의 취약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앞으로 이러한 위험은 더욱 복잡해질 가능성이 높다. 모든 것이 연결된 AI 기반 사회에서는 데이터센터와 통신망, 클라우드, 전력망이 동시에 작동해야 인공지능도 기능한다. 네트워크가 멈추면 AI가 멈추고, AI가 멈추면 물류와 생산, 행정과 금융의 의사결정까지 함께 멈춘다. 이제 안전은 사고를 예방하는 차원을 넘어, 위기가 발생해도 핵심 기능을 얼마나 지속할 수 있는가를 묻는 재난 복원력(disaster resilience)과 연속성(continuity)의 문제로 바뀌고 있다.
현재 부산시가 추진하는 AI 산업도시 전략도 이 질문에서 자유롭지 않다. 전재수 부산시장은 AI 기반 스마트 항만과 제조업 인공지능 전환(AX), 동부산 미디어 AI 특구, 서부산 AI산업 운영센터 조성 등을 제시했다. 부산의 경쟁력을 높일 적절한 방향이다. 다만 AI 항만과 스마트 공장, 데이터센터도 결국 전기와 네트워크 위에서만 돌아간다. 부산의 전력은 상당 부분 인접한 고리 원전과 송전망에 기댄다. 더구나 이런 시설은 사이버 공격만이 아니라 방화, 테러,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현실이 된 드론 위협 같은 물리적 공격에도 노출된다. 도시가 의존하는 ‘소수의 급소’는 노리기 쉬운 표적이며, 그 한 곳이 무너지면 항만과 공장, 특구가 한꺼번에 멈춰 선다. 여기에 핵심 기술 유출을 막는 산업 보안까지 더해진다. 물리적 보호와 대(對)드론 방호가 더 이상 국방 영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도시 기반시설의 기본 요건이 된 까닭이다.
그래서 이제는 제도를 꼼꼼히 연결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재해영향평가, 정보보호 사전점검, 주요 정보통신기반시설 취약점 분석 및 평가, 국가중요시설 방호 계획 등 다양한 사전평가 제도를 갖추고 있다. 문제는 각각이 개별 법령과 기관 안에서 분절적으로 운영된다는 점이다. AI 데이터센터와 기반 시설에는 재난 위험과 사이버 위협, 물리적 공격, 산업보안 위험이 동시에 존재한다. 따라서 이들 제도를 연계해 ‘초연결 복합 위협에 대비한 생애주기 통합 영향 평가’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단순히 현재의 위험만 평가할 것이 아니라 5년, 10년 뒤 예상되는 복합 위협과 연쇄 효과까지 검토해야 한다.
안전은 시설 완공 뒤 덧붙이는 장식이 아니다. 기획과 설계 단계부터 보안과 안전을 고려하는 ‘처음부터 안전과 보안을 고려한 설계’가 기본 원칙이 돼야 한다. 대드론 방호와 물리적 보호, 사이버 및 산업보안 역시 AI 도시 청사진에 밑그림부터 함께 담겨야 한다. 부산시와 한국전력공사, 한국수력원자력, 남부발전, 부산항만공사 등 공공기관, 통신기관, 민간, 국정원, 경찰 등이 동일한 위험지도를 공유해야 한다. 특정 시설이 멈출 때의 연쇄 파급력을 함께 분석하고 개선하는 체계도 필요하다. 첨단 도시는 기술의 나열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다음 위기는 우리가 가장 약하게 연결해 둔 고리에서 시작될 것이다. 위험은 사고 뒤에 수습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 전에 준비하는 것이야 한다. AI 산업도시를 꿈꾸는 부산의 청사진에는 눈부신 혁신만큼이나 치밀한 재난 복원력이 함께 그려져야 한다.
2026-07-27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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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말하지 않는 마음의 번역가
같은 문장을 두고도 사람마다 읽는 방식이 다르다. 문화적 배경에 따라서도 이해하는 방식은 큰 차이를 드러낸다. 어떤 문화는 말한 그대로를 듣고, 어떤 문화는 말하지 않은 행간까지 읽어낸다. 커뮤니케이션 연구에서는 전자를 저맥락(low-context) 소통, 후자를 고맥락(high-context) 소통이라 부른다. 흥미로운 건 어느 쪽도 틀리지 않다는 점이다. 다만 서로의 방식을 모른 채 마주 앉을 때, 한쪽은 왜 저렇게까지 하느냐고 묻고 다른 쪽은 왜 거기서 멈추느냐고 묻는다. 글로벌 기업의 한국 팀을 이끄는 나는, 매일 이 두 문법 사이에 서 있다.
글로벌 기업의 한국 오피스에서, 그것도 재택으로 일한다는 건 하루에 두 개의 시계를 동시에 봐야 하는 일이다. 아침에 메신저를 열면 북미 팀원이 남기고 간 문장들이 잔뜩 쌓여 있다. 우리의 아침과 그들의 오후가 포개지는 시간은 고작 한 시간 남짓. 서머타임이 끝나야 그 시간은 두 시간으로 늘어난다. 겨우 한 시간 늘었을 뿐인데도 체감은 크다. 그 짧은 시간이 끝나고 나면 남은 하루는 각자의 몫이다. 우리는 서로가 편히 저녁을 보낼 수 있도록 바통을 넘기며 일한다.
북미의 동료들은 더없이 친절하다. 영어로 진행되는 회의에서 내 문장이 더듬거려도 끝까지 기다려주고, 실수를 말할 때조차 상대가 다치지 않을 표현을 고르는 기미가 역력하다. 다만 그 친절에는 또렷한 경계가 있다. 퇴근 시간이 지나면 메신저에는 답장이 없다. 자기 몫이 아닌 일 앞에서는 담당자를 정확히 짚어 일을 넘긴다. 처음엔 조금 서운했지만 이내 알았다. 그것은 무심함이나 냉정함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예의였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약속만 하겠다는 정직함이기도 했다. 저맥락의 세계에서는 말한 만큼이 곧 책임의 크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팀원들과 일할 때 나는 다른 종류의 감정을 느낀다. 아무도 요청하지 않았는데 “한 번 더 확인해 봤습니다”하는 메시지. 담당이 애매한 일을 맡게 됐을 때 “저한테 주시면 해보겠습니다”라며 먼저 손드는 사람. 요청받은 항목만 채우면 그만인데도 다음 단계에 필요할 자료까지 정리해 보내는 팀원. 정해진 몫의 경계를 넘어, 결국 이 일이 잘 되게 만드는 데까지 마음을 쓰는 태도다. 말하지 않은 행간을 읽어내는 고맥락의 문법이, 일의 세계에서는 끝까지 책임지는 얼굴로 나타나는 셈이다.
팀을 맡고 나서 알게 된 애환이 하나 있다. 이 마음이 저쪽의 문법으로는 자동 번역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밤새 고쳐낸 결과물을 앞에 두고도 우리 팀원들은 “아직 조금 부족한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그 문장을 그대로 옮기면 바다 건너 저편에서는 정말 미완성인 작업으로 읽힌다. 그래서 팀장의 일 가운데 절반은 번역이다. 겸손을 성과로, 묵묵함을 기여로 옮겨 적는 일. 북미 팀원이 자기 작업을 또렷한 문장으로 설명하는 동안, 한국 팀원들은 이미 다음 수정본을 따로 저장해두기까지 한다. 팀장이 된 지 오래지 않은 나는, 아직 이 번역이 서툴다. 어떤 날은 팀원의 “괜찮아요”가 진짜 괜찮은 건지 몰라 두세 번을 되묻는다. 다만 분명한 건, 말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그 노력을 지켜보는 일이 팀장에게 주어진 몫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미덕에는 그늘도 있다.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이 늘 정해져 있으면, 그 책임은 어느새 당연한 것이 되어 한 사람을 갉아먹는다. 배려로 시작한 일이 소진으로 끝나는 장면을 나는 너무 많이 봤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도와달라는 말을 가장 늦게 꺼낸다. 그래서 북미식 경계 역시 배워야 할 지혜다. 자기 몫을 분명히 하는 일은 무책임이 아니라 오래 일하기 위한 설계이며, 잘 쉬는 사람이 결국 더 오래 책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문법은 어느 하나를 버리는 문제가 아니라, 서로에게서 배워야 할 문제다.
요즘처럼 각자의 몫만 정확히 해내면 된다고 말하는 시대에, 정해진 선 너머까지 마음을 쓰는 사람은 점점 귀해지고 있다. 효율의 언어는 역할과 경계를 중시한다. 하지만 조직을 끝까지 굴러가게 하는 건 그 경계 바깥을 메우는 마음이다. 계약서에도 직무 기술서에도 적히지 않는 이 성실은,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 오래 당연하게 여겨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오늘은 계산 없이 고마움을 적어두고 싶다.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한 번 더 확인해준 사람들, 자기 일이 아닌데도 먼저 손을 든 사람들에게. 성과는 숫자로 기록되지만, 그들이 조용히 메워둔 빈틈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어떤 문법에도 적히지 않지만, 함께 일해본 사람만이 아는 문장이 있다. 그 문장을 저편의 언어로 옮기는 일이 서툰 팀장인 내 몫이라면, 앞으로 더 잘 번역하기 위해서라도 오늘 이 고마운 마음을 기록해둔다.
2026-07-2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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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부산 블록체인 특구, '지역 생태계'가 먼저다
부산에 본사를 둔 블록체인 회사를 운영하다 보면 꼭 듣는 질문이 있다. “왜 지사도 아니고 본사까지 부산에 두셨어요?” “특구니까요” 하고 답하면 상대는 대개 고개를 갸웃한다. 지사만 둬도 혜택은 같은데 왜 본사까지 옮기느냐는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사람과 돈이 몰린 수도권에 본사를 두고 부산엔 지사만 두는 편이 기업으로선 합리적이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올해 지원사업도 본사든 지사든 부산에 주소만 있으면 신청할 수 있다. 그러나 연구개발과 고용을 실제로 옮긴 기업과 서류상 지사만 둔 기업을 같은 줄에 세우면, 부산에 뿌리내릴 이유는 오히려 사라진다. 기업을 붙잡는 힘은 사무 공간이 아니라 여기 남을 이유에서 나온다.
최근 공개된 자료는 고민을 더한다. 부산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에는 2019년부터 2024년까지 416억여 원이 투입됐지만, 2022년 이후 새 실증과제가 없었고 외국인 직접투자 실적도 잡히지 않았다. 이를 모두 부산시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가상자산을 배제한 초기 설계와 중앙 부처 규제, 더딘 법제화 등 지방정부 혼자 넘기 어려운 벽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기업을 발굴하고 무엇을 성과로 부르며 어떻게 부산에 눌러앉게 할지는 부산시가 바꿀 수 있다. 시는 지난달 블록체인 특화 클러스터 사업으로 19개 기업에 55억 원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잘하는 기업에 힘을 싣는 일은 필요하다. 다만 짚어야 할 불편한 사실이 있다.
시, 특화 클러스터 19개 기업 지원
잘하는 기업에 힘을 싣는 일은 필요
평가 방식, 행사 횟수·해외 수상 위주
수도권·대학 연구실 출발 기업 유리
부산 잔존율·지역 고용 등 공개해야
청년 창업가·초기 기업 육성 설계를
지금의 평가 방식은 ‘얼마나 잘하나’를 기준으로 기업을 뽑는 데 가깝다. 특허와 실적으로 줄을 세우면 앞자리는 인력과 자본을 갖춘 수도권 기업, 그리고 대학 연구실에서 출발한 소수 기업이 차지하기 마련이다. 공정한 심사라는 이름으로 스펙 순위를 매길수록, 이제 막 시작한 부산 청년 창업가는 정작 명단에 오르지 못한다. 그렇게 예산은 준비된 소수에게 쏠리고 부산 기업은 수도권에 밀린다. 평가가 틀린 것이 아니라 설계가 낳은 결과다.
부산에 필요한 것은 대표기업 몇 곳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생태계다. 새 기업이 끊임없이 나오고, 넘어진 창업가가 다시 뛰며, 먼저 자란 기업이 후배에 투자하는 순환이다. 화려한 국제행사와 해외 수상은 목표가 아니라 생태계로 가는 수단일 뿐이다. 수상 소식 한 줄보다 값진 것은, 그 기업이 부산 청년을 몇 명 뽑고 부산에서 실증을 몇 건 쌓았는가다. 그러니 조금 부족해도 부산에 뿌리내리려는 기업의 애로를 먼저 듣고, 제 발로 서도록 키워야 한다.
참고할 만한 모델이 중소벤처기업부의 팁스(TIPS)다. 민간 운영사가 유망 기업을 먼저 발굴해 자기 돈을 투자하고 보육·추천하면, 정부가 평가를 거쳐 연구개발·사업화 자금을 얹어주는 구조다. 핵심은 민간의 평가가 아니라 민간의 돈이다. 외부 평가위원은 기업이 망해도 손실을 함께 지지 않지만, 제 돈을 먼저 넣은 운영사는 선발 뒤에도 후속 투자와 판로, 인재까지 챙길 이유가 생긴다. 고르는 권한과 실패의 책임을 한 줄로 묶은 것, 이것이 팁스가 작동하는 힘이다. 부산이 새 기관을 만들 필요는 없다. 이미 민간이 먼저 투자한 기업을 지원하는 B-TIPS가 있고, 부산기술창업투자원이 민간 연계와 지역 펀드를 맡고 있다. 기존 블록체인 예산 일부를 이 구조에 연결해 ‘블록체인 B-TIPS’ 트랙으로 키우면 된다. 운영사는 공개경쟁으로 복수 선정하고 반드시 자기 자금을 먼저 투자하게 하되, 추천 한도와 이해관계 회피 기준으로 쏠림을 막으면 된다. 시는 기업을 직접 고르기보다 규칙을 설계하고 감독하는 편이 낫다.
부산의 예산이 BIFC에 간판만 건 외지 기업의 손쉬운 재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초기 사무 공간과 실증은 지사에도 열되, 대규모 사업화 자금은 본사 이전, 부산 연구개발 조직, 지역 고용 같은 실질 기여에 연동해야 한다. 청년팀과 초기 기업에는 작은 실증 기회를 따로 열어, 스펙 경쟁에 밀린다는 이유로 부산 청년이 출발선조차 밟지 못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성적표도 바꿔야 한다. 입주 기업 수와 행사 횟수, 해외 전시·수상 건수만으로는 부족하다. 지원 종료 2년 뒤의 부산 잔존율, 지역 고용, 민간 후속 투자, 유료 매출, 실증의 상용 계약 전환율을 공개해야 한다. 재는 자를 바꾸면 행정이 향하는 곳도 바뀐다. 지난 1일 출범한 전재수 시정은 이 판을 다시 짤 기회를 얻었다. 바꿔야 할 것은 예산이 흐르는 길과 성과를 재는 잣대다. 정책의 연속성은 특정 인사가 아니라 공개된 규칙에서 나와야 한다.
4년 뒤 부산이 내밀어야 할 것은 몇몇 기업이 해외에서 받아 온 상패가 아니다. 부산에서 창업한 청년이 얼마나 남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고용했으며, 외부 자본이 얼마나 들어왔고, 부산에서 만든 서비스가 얼마나 팔렸는가다. 수상 실적도 값지다. 그러나 그것은 부산의 생태계가 살아 있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부산 블록체인 특구는 소수 정예를 겨루게 하는 대회장을 넘어, 지역 기업이 함께 자라는 생태계가 되어야 한다.
2026-07-20 [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