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모룡 칼럼] 대양적 전환과 부산
대양적 전환은 칼 슈미트의 용어이다. 유럽이 지중해를 벗어나 대서양과 태평양으로 나온 일을 말한다. 아프리카 연안을 따라 인도양에 이르러 향신료 무역을 하던 일이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발견하면서 세계적 규모의 공간 혁명이 시작되었다. 대양(ocean)은 인도양, 대서양, 태평양, 남극해, 북극해 등 다섯 개다. 서구인은 대양과 바다를 아주 선명하게 구별해 사용한다. 바다(sea)는 뭍(land)의 단순한 대응 개념에 불과하다. 육지 속의 바다인 강을 아울러 지구의 7할 이상이 바다이다. 그러므로 대양은 먼 바다이다. 그게 얼마나 먼가를 알려면 육지 사이에 놓인 지중해를 생각하면 된다. 가령 동해에서 동중국해에 이르는 바다는 동아시아 지중해이고 남중국해 아래 동남아 해역을 포함하면 아시아 지중해이다. 이러한 지중해를 모두 연안(coast)으로 규정하는데 대양적 전환은 이러한 연안을 넘어서는 일에 다를 바 없다.
15세기 말에 서구의 대양적 전환이 시작돼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미국으로 그 주도권이 바뀌어 왔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과 더불어 서둘러 해양을 지향했다. 청나라에 이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북방 대륙은 물론 남방 해역으로 제국의 영역을 넓혔다. 주지하듯이 대한제국은 이러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는데 해역 혹은 대양의 세계와 접촉하지 못한 원인이 크다. 일제가 지배하던 시기에 한국은 대양으로 나아갈 방도가 없었다. 제국의 바다에 갇힌 형국이었으니 그저 해협을 오가는 데 그쳤다. 소설가 이병주가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를 왕래하던 관부연락선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가 소설에서 말했듯이 영광과 굴욕이 함께 하는 자리였다.
그렇다면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찾아온 해방이 한국의 대양적 전환을 가능하게 했을까? 나라를 만들어야 하는 다급한 처지에서 그 외부를 제대로 살필 겨를이 충분하지 않았다. 형식 논리에서 해방이 해양의 해방이라 할 수 있으나 그 실제에서 대양으로의 길은 열리지 않았다. 태평양의 지배권을 가진 미국의 군정(GHQ)이 제약한 해양 한계선 안에 있던 한국이 대양을 접속할 여력은 없었으며 그나마 일제가 남긴 선박을 수습해 정부가 해운을 통합, 1949년 대한해운공사를 설립한 일이 다행스럽다. 극동해운 소속의 고려호가 고철을 싣고 1952년 10월 21일 부산항을 출항해 태평양을 건넌 일이 대양 항해의 시초이며 대한해운공사에 의한 대미 정기항로 개설은 1953년 동해호와 서해호를 미주항로에 취항한 데서 비롯한다. 이로부터 부산호, 마산호, 동해호, 서해호, 남해호, 천지호를 도입한 대한해운공사가 동남아와 미국 간 항로를 확대했으니 늦었으나 힘겨운 대양적 전환의 시동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의 대양적 전환은 한국전쟁이 만든 시공간에 하나의 역설로 가능했다. 임시수도 부산의 역사에서 대양적 전환은 결코 간과할 수 없이 중요한 사건이다. 물론 외부로부터 UN군이 들어오고 전쟁 물자가 수송되는 등의 과정으로 이뤄진 대양의 접속이라는 측면이 있다. 정부 수립 이후에 해사 행정 체계를 어느 정도 수립했으나 외항선의 현실이 거의 무질서에 가까웠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은 부산항의 역사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전쟁으로 인한 해운 부문의 파괴가 광범한 가운데 부산항을 중심으로 한일 항로를 통해 후방 운송 활동을 전개했으니 다른 한편으로 해방 이전 항로의 복원에 상응한다. 한동안 일본 선박이 부산항을 휘젓는 사태가 있었는데 1954년이 돼 모두 철수하는 형세였다. 그만큼 우리의 자주적인 대양 항해는 지체됐다.
일찍이 육당 최남선이 자유 대양의 중요성을 외쳤으나 식민 지배로 좌절된 일이 1950년대에 와서 실현됐다. 임시수도, 전시수도, 피란수도 등으로 불리는 말은 한국전쟁 시기 부산의 지위를 지시하는바, 그 의미의 많은 부분을 부산항에 돌려야 한다. 단지 천일 동안 수도 역할을 했다는 한시적 영광을 기념하는 일에 그치지 않아야 하는데, 부산항을 통해 한국이 대양적 전환을 이루었고 이로부터 자본주의 세계와 동행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부산항은 부산의 핵심에 그치지 않고 한국 사회의 중추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 우리 사회가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진행한 원양어선의 출항과 더불어 무수한 상선이 오가면서 근대화가 성취됐다. 그러므로 보상받아 얻을 해양의 수도라는 수사에 그칠 일이 아니라 부산은 한국 사회의 근본 모순인 서울 중심주의의 일극체제를 극복하고 아시아 지중해와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미래 한국의 대안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아시아 해역의 여러 나라 도시와 교류하고 다른 한편으로 환태평양의 국가와 연결하면서 세계와 함께하며 다문화주의를 실현하는 세계도시 싱가포르에 버금가는 네트워크 도시 부산이 되어야 한다.
2024-11-18 [18:03]
-
[중앙로365] 나무위키 규제에 반대하는 이유
전자사전은 학창 시절 인기 아이템 중 하나였다. 스마트폰은 개념조차 없던 시절, 형편이 괜찮은 친구들은 전자사전과 인터넷 강의를 넣은 PMP를 들고 다니며 공부에 참고했고 나머지 친구들도 종종 그것들을 빌려 쓰곤 했다. 전자사전엔 으레 메모장 기능이 탑재돼 있었다. 그런데 사실 남의 전자사전에 메모를 남긴다는 것은 마치 도서관 책에 밑줄을 긋는 것과 같아서 누구도 그 기능을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기계든 사람이든 버그(오류)는 생기게 마련. 누군가가 한 친구를 놀린다고 메모장에 그의 별명과 유래를 적어놓은 것이다. 유행의 시작을 알리는 한 줄이었다. 수능 공부로 지쳤던 우리는 수업 때마다 전자사전을 만지며 킥킥댔다. 메모장에는 선생님과 학생들의 별명, 유행어, 심지어 체육대회 결과까지 온갖 내용들이 담겼다.
어느덧 그 전자사전은 3학년 4반의 역사와 밈을 담은 하나의 백과사전이 되었다. A4 용지로 몇 페이지를 넘어설 만큼 방대한 분량이었다. 고3 시절 참여형 백과사전이라는 개념을 떠올렸다면 지금쯤 엄청난 부자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위키피디아 창립자 지미 웨일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제작과 편집이 불특정 다수에게 개방되는 오픈 소스 백과사전이 가능하다고 보고 2001년 위키피디아를 만들었다. 내용상의 오류는 집단지성에 의해 바로잡힐 거라 믿었다. 사전 내용 채운다고 돈을 주는 것도 아닌데 이용자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지미 웨일스는 지식을 나눔으로써 재미와 보람을 느끼는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 위키피디아가 있다면 우리나라엔 나무위키가 있다. 세계적으론 위키피디아가 대세일지 몰라도 우리나라에선 나무위키 접속량이 7배는 더 많다. 웹사이트 접속자 순위도 지난달 1일 기준 5위를 기록했다(시밀러웹). 구글·유튜브·네이버 같은 포털사이트를 제외하면 사실상 가장 많은 접속자를 기록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 최대 참여형 온라인 백과사전인 나무위키의 기원은 특이하게도 일본 애니메이션 ‘건담’이다. 2007년 한 건담 팬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위키피디아를 본뜬 백과사전을 운영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됐다. 이들은 애니메이션 정보나 인터넷 가십 등을 사전에 담았는데, 기존 백과사전은 외면하는 정보를 취급한다는 점에서 젊은 층으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사전은 이후 정치·경제·역사 등 기존 백과사전이 다루는 영역까지 확장했다. 그게 오늘날의 나무위키가 됐다.
나무위키의 최대 장점은 일상성이다. 나무위키에는 우리가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등재된다. 넷플릭스 프로그램 ‘흑백요리사’의 등장인물과 그들로부터 파생된 각종 유행어는 물론, 부산불꽃축제 감상 가능 지역 리스트까지 온갖 정보를 망라한다. 제22대 총선을 다루더라도 선거의 개요나 결과만 취급하는 게 아니라 선거 과정에서 발생한 에피소드나 논란의 전개 과정 등을 상세히 설명한다. 별도의 사실 확인이 필요하긴 하지만 흐름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신변잡기적인 정보까지 모두 기록되는 나무위키는 정치인들에게 불편한 존재다. 자신들의 과거 막말과 의혹 등이 고스란히 ‘박제’되는 이유에서다. 언론 보도는 금세 흘러가지만 나무위키에 등재된 정보는 두고두고 남는다. 허위 사실이 아니라면 지우기도 쉽지 않다. 정부 여당이 나무위키 규제를 추진하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김장겸 국민의힘 의원은 최근 “나무위키가 파라과이에 소재를 두고 있어 국내법을 무시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개인정보 침해, 허위 사실 유포 등이 바로잡히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역시 “경고 이후에도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전체 차단도 고려할 수 있다”고 화답했다.
표면적으론 법적 문제 때문인 듯하나 실상은 정치적 이유가 크다. 나무위키는 구조적으로 보수 정당에 불리하다. 이용자 대부분이 젊은 층이라서다. 나무위키는 논쟁적인 팩트(fact)에 관해선 이용자들의 토론을 거쳐 합의된 내용을 등재하도록 하고 있다. 이를 ‘고지전’이라고 부른다. 청년층 지지가 낮은 국민의힘 입장에선 이 토론에서 이겨 지식의 깃발을 꽂는 게 상대적으로 불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여론이 우호적이지 않다고 어떤 사이트를 차단하는 건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격에 지나지 않는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기 이전에 개인이 남기고 싶은 지식을 기록하는 메모와 일기의 총합이다. 어떠한 권위도 부여된 적 없지만 많은 사람이 쓰면서 절로 권위가 실렸다. 나무위키 접속을 차단해도 자신이 가진 지식을 기록하고, 알리고 싶은 개인의 욕구마저 막을 순 없다. 그 거대한 욕구 자체를 통제하는 게 아니라면, 나무위키 접속을 차단해도 새로운 나무위키들은 다시 등장할 것이다.
2024-11-13 [17:53]
-
[중앙로365] 트럼프와 비트코인이 열 부산의 새로운 기회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4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시장 전문가들은 "대통령 당선 직후의 시장 반응이 향후 정책 방향을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라고 분석한다. 실제로 당선 후 비트코인은 급등했고, 미국 최대 가상자산 거래소인 코인베이스의 주가는 30% 이상 상승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에 이어 미 의회 지형도 가상화폐에 우호적으로 바뀌면서 업계에서는 '가상화폐 르네상스', '가상화폐 황금기'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대장주' 비트코인 가격이 사상 최초로 8만 달러를 넘어서는 등 가상화폐 가격이 일제히 강세를 보이고 있으며 연말까지 추가 상승이 예상된다는 전망도 나온다. 실제로 '마이크로스트래티지'와 '마라', '허트8' 등 비트코인 관련 기업의 주가도 가파르게 올랐다. 이는 시장이 트럼프의 비트코인 정책을 강력히 지지한다는 신호다. 트럼프는 이미 선거 운동 과정에서 "미국을 세계 디지털자산의 중심지로 만들겠다" "미국을 가상자산의 수도로 만들겠다" "비트코인을 전략자산으로 비축하겠다" 등의 발언을 내놨고 가상화폐 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는 '친(親)비트코인 대통령', '가상화폐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약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규제 완화와 'Made in USA 비트코인' 정책으로 자국 내 채굴 산업을 육성하겠다고 약속했다.
왜 트럼프는 비트코인에 주목하는 걸까? 그 해답은 미국의 재정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의 국가 부채는 지속적으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으며, 그 증가 속도가 가파르다.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의 위상 덕분에 아직 버티고 있지만, 이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디지털자산은 이러한 상황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엘살바도르는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채택한 이후 관광 수입이 크게 증가했고, 몇몇 개발도상국도 디지털자산을 활용한 경제 성장을 모색하고 있다. 트럼프의 비트코인 정책은 단순한 산업 정책을 넘어 국가 경제 전략의 일환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대한민국 유일의 블록체인 특구인 부산은 이 새로운 물결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첫째, 규제 샌드박스의 과감한 확대가 필요하다. 현재 부산 블록체인 특구의 정책은 공간 제공과 인건비 지원 등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반면 싱가포르는 명확한 법적 근거를 바탕으로 디지털자산 기업에게 사업 인가를 신속하게 처리해 주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그 결과 주요 글로벌 기업이 싱가포르를 아시아 거점으로 선택하고 있다.
둘째, 친환경 에너지와 연계한 채굴 산업 육성이 시급하다. 부산은 해상 풍력 발전의 최적지로 꼽힌다. 미국 텍사스주는 잉여 풍력에너지를 채굴 기업에게 공급하며 새로운 채굴 허브로 떠오르고 있다. 주목할 점은 채굴 인프라가 AI(인공지능) 산업 인프라와 높은 호환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글로벌 채굴 기업들은 이미 이러한 인프라를 AI 연산에도 활용하며 새로운 수익모델을 창출하고 있다.
셋째, 디지털자산 기술 개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두바이는 적극적인 기술 개발 지원 정책을 통해 많은 암호화폐 기업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대다수 기업이 실제 사업을 개시하며 지역 경제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넷째, 부산디지털자산거래소를 중심으로 한 종합 생태계 구축이 필요하다. 홍콩은 최근 디지털자산 산업 육성책을 발표하고 적극적으로 글로벌 기업을 유치하고 있다. HSBC, 스탠다드차타드 등 대형 은행의 참여로 전통 금융과 디지털자산의 융합도 가속화되는 추세다. 다섯째, 국제 협력 네트워크 구축이다. 홍콩, 두바이, 싱가포르는 디지털자산 허브를 목표로 정책을 공조하고 기술 표준화를 추진하고 있다. 부산도 이러한 국제 협력 네트워크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미국이 트럼프의 리더십 아래 디지털자산의 새로운 중심지로 도약하려는 이때야말로, 부산이 아시아의 디지털자산 허브로 발돋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부산항이 한때 대한민국 경제 성장의 관문이었듯이, 이제 부산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관문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구체적인 목표와 실행 계획을 담은 ‘부산 디지털자산 허브’ 정책이 시급하다. 블록체인 기업에 대한 기초적인 지원을 넘어, 규제 샌드박스 확대와 에너지 정책 지원을 통해 디지털자산 생태계를 키워나가야 한다. 싱가포르처럼 전통 금융기관과 디지털자산 기업의 협력을 촉진하고, 두바이처럼 실질적인 기술 개발 지원을 제공한다면 양질의 일자리도 자연스럽게 창출될 것이다. 트럼프 시대의 디지털자산 혁명에서 부산이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부산시의 과감한 정책 전환과 대한민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2024-11-11 [17:57]
-
[중앙로365] 우리의 상식은 건강한가
한글은 참으로 축복과도 같은 문자다. 배우기도 쉽고 쓰기도 쉽다. 과학적인 원리도 숨어 있다. 창제자가 분명하다는 사실도 자랑거리 중 하나다. 물론 의문스러운 대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우리글이 모든 소리를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한글의 표음 능력은 그렇게 뛰어나다고 할 수 없다. 영어 표기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과일에 붙는 ‘berry’와 ‘아주’라는 뜻을 가진 ‘very’는 한글로 모두 ‘베리’라고 표기되고, ‘디스’라고 했을 때도 남을 깎아내린다는 뜻인지 ‘이것’이라는 뜻인지 구분할 수 없다. 일본어의 경우도 같은 글자를 ‘카’나 ‘까’로 초성에 올 때는 모두 ‘가’로 표기한다. 중국어의 경우도 권설음처럼 한글로 표기할 수 없는 소리가 있다. 한글이 모든 소리를 표기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이상한 일이 아닌가. 〈훈민정음〉 서문에서는 분명히 모든 소리를 표기할 수 있다고 했다.
다음으로 현재 우리가 쓰는 한글 자모의 순서가 세종대왕이 편찬하신 〈훈민정음〉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도 그냥 넘길 수 없다. 〈훈민정음〉에서는 자음을 ㄱ, ㄲ, ㅋ, ㆁ, ㄷ·ㄸ, ㅌ, ㄴ 등의 순서로 배열하였고 모음은 ·, ㅡ, ㅣ, ㅗ, ㅏ, ㅜ, ㅓ, ㅛ, ㅑ, ㅠ, ㅕ로 배열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배열 순서와는 전혀 다르다.
특히 〈훈민정음〉에서 하늘을 뜻하는 아래 아(·)는 다른 모음을 만드는 기본 글자이고 땅(ㅡ)과 사람(ㅣ)에 붙여 ㅗ나 ㅏ 등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한글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왜 한글과 〈훈민정음〉의 배열 순서는 이렇게 전혀 다른가.
한편 한글의 자음에는 기역, 니은, 디귿 등의 이름이 붙어 있는데, 왜 기윽, 디읃, 시읏이 아니고 기역, 디귿, 시옷일까. 더군다나 이 이름은 〈훈민정음〉과 다르다. 〈훈민정음〉 언해본을 보면 ‘ㄱ난’이라고 되어 있고, 이름이 ‘가’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쓰는 한글 자모의 이름은 〈훈몽자회〉라는 책의 범례에 붙어 있는 ‘언문 자모’라는 자료에서 한자로 기역(其役), 디귿(池末), 시옷(時衣)이라고 나타낸 것을 따르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이런 문제의 발단은 〈세종실록〉에 기록된 사실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에서는 세종께서 언문을 친제하셨고, 언문으로 한자와 우리말을 모두 쓸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말미에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한다고 단서를 달았다(1443년). ‘훈민정음’은 그로부터 3년 뒤에 완성되었다(1446년). 우리가 알고 있는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한자를 가지고 물 흐르듯이 통할 수 없다”는 서문은 〈훈민정음〉의 서문이다. 그 사이에 최만리가 언문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1444년). 그런데 우리의 상식은 다르다. 세종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셨는데, 사대주의에 골몰한 양반 사대부들이 이를 폄하하여 언문이라고 불렀다고 여기고 있다.
언문이라는 말은 우리글이 생긴 이래로 계속 사용되어 왔고, 심지어 세종 자신도 최만리가 상소한 내용에 대해서 나무랄 때 자신이 창제한 글을 언문이라고 하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렇다. 언문은 우리말을 나타내는 글이라는 뜻이 들어있지만, 훈민정음은 ‘바른 소리’라는 뜻인데 무엇이 바른 소리라는 것인가.
거기다가 ‘훈민(訓民)’이라고 표현했다. 만약 지금까지 없던 우리글을 만들어 백성에 가르치고자 하였다면 당연히 ‘교민(敎民)’이라고 해야 한다. 훈육(訓育)과 교육(敎育)이 다른 말인 것처럼 훈민정음의 함의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훈’은 이미 배웠는데 잘하지 못하거나, 잘할 때까지 반복훈련을 한다는 뜻이 들어있다. 한편 교민은 성군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왜 세종대왕은 ‘교민’이라는 유교적인 덕목을 버리고 굳이 훈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을까.
나아가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60쪽에 이르는 순전한 한문으로 기록된 책이라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백성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왜 그렇게 방대한 책을 만들었을까. 어떤 사람은 한자를 아는 양반들이 배워서 백성에게 가르치려고 한 것이라고 말한다. 어림도 없는 소리다. 최만리의 반대 상소는 최만리 혼자서 한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 한자 식자층의 한결같은 심정임이 분명하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유명한 책이지만, 그 책을 직접 읽어보거나 펼쳐 본 시민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직접 해례본을 펼쳐 들고 읽어보려고 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우리의 상식이 굳건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통용되는 상식은 늘 검증되어야 한다. 검증되지 않은 상식이 오래 통용되면 그 사회는 결국 편견에 빠지게 될 것이고 건강함을 유지할 수 없다.
2024-11-06 [18:06]
-
[중앙로365] 녹취록, 지금도 우리의 대화는 녹음되고 있다
재판은 증거 싸움이다. 민사, 형사, 이혼 등 모든 소송에서 당사자의 육성이 담긴 통화 녹음 파일은 결정적 증거가 되다 보니, 의뢰인에게도 통화 녹음 기능을 이용해서 증거를 확보하라고 주문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당사자가 계약서, 확인서 등 형태로 일목요연하게 서명 날인을 받아두었다면 좋겠지만, 사실을 입증할 그 어떤 처분 문서도 없을 때는 의뢰인이 현재 쓰고 있는 휴대폰은 물론 예전에 썼던 휴대폰까지 뒤져가며 통화 녹음 파일을 찾기도 하고, 그것마저 없을 때는 상대방에게 전화를 걸거나 만나서 예전에 했던 대화를 유도해서 녹음을 시도하라고 한다. 그러면 간혹 상대방 몰래 녹음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
통신비밀보호법은 누구든지 공개되지 아니한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하거나 전자장치 또는 기계적 수단을 이용하여 청취할 수 없다고 정하고 있다. 따라서 타인 간의 대화가 아닌, 대화 당사자로서 그 대화를 녹음하는 것은 상대방의 동의를 받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러한 국내법 규정과 달리 해외에서는 대화 당사자라고 하더라도 상대방 동의가 없는 녹음을 금지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특히 ‘사생활 보호’를 중시하는 프랑스, 독일 등 일부 유럽 국가에서 통화 녹음을 규제하고 있는데, 프랑스의 경우 공익 차원의 녹음 및 보도에 활용하는 경우 외에는 상대방의 동의 없는 대화·통화 녹음 뿐아니라 녹음 파일 소지만으로도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통화 녹음 파일, 재판 결정적 증거
‘억울한 일 안 당하려면 녹음 필수’
직장 내 괴롭힘, 성범죄 소송에 활용
당사자 간 대화 녹음 얼마든지 가능
대통령 대화 녹취록 공개로 일파만파
내 편 네 편 관계없이 대화 신중해야
독일도 대화 상대방의 동의 없는 대화·통화 녹음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으며, 동의를 받을 때 ‘계약 관련 사항을 녹음하겠다’라고 하는 등 이유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 미국은 50개 주 중 37개 주에서는 합법이지만, 캘리포니아 등 13개 주에서는 대화·통화 녹음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일본이나 영국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동의 없는 대화·통화 녹음은 합법이지만, 제3자에게 공유하는 것은 금지하고 있다.
이처럼 해외에서는 대화 당사자 간의 대화가 불법인 경우가 있다 보니, 통신 IT업계에서도 휴대폰에 통화 녹음 기능을 탑재할 것인지에 대하여 논란이 있었다. 그동안 통화 녹음 기능을 제공하지 않던 일부 제조사에서는 최근 운영체제를 업데이트 하면서 통화 녹음 기능을 적용하기 시작했는데, 상대방에게 ‘이 통화는 녹음됩니다’라는 음성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대화 당사자들이 대화를 시작할 때 흠칫하게 만드는 불편함이 있다고는 하는데, 프랑스나 독일의 경우 당사자 간 통화 녹음이 불법인 만큼, 녹음을 허용하되 사전 고지를 하자는 취지로 보인다. 통화 녹음을 넘어서 통화 녹음 공유로 인해 명예훼손 등 각종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데, 최근 통신사에서는 그 대응책으로 통화 녹음 공유 기능 절차를 다소 복잡하게 하는 방식으로 제동을 거는 움직임도 보인다.
2년 전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이 대화 참여자 전원의 동의 없이 대화를 녹음하는 것을 금지하는 통신비밀보호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발의하자, 거센 반발 여론이 불거졌고 여론이 악화되자 윤상현 의원은 “사회적 공감대를 충분히 얻지 못했다”면서 해당 법안을 철회하기도 했다. 그동안 직장 내 괴롭힘, 성범죄 및 각종 무고 등 다양한 사건에서 대화·통화 녹음을 증거로 제출해서 피해자들이 억울함을 벗은 사례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억울한 일 안 당하려면 녹음해야 한다’라는 인식이 팽배해졌고, 이제는 시대를 거슬러 당사자 간 대화 녹음을 불법으로 다스려 막을 수는 없다. 따라서 내가 지금 하는 모든 말들은 녹음되고 있고, 언젠가는, 또 누군가는 이 대화를 전해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특히나 공직자, 정치인 그리고 어떤 일에 막대한 책임을 지는 사람은 더더욱 대화 상대방이 아군이든, 적군이든 그 대화에 무게를 둬야 한다. 연예인들이 사적으로 나눈 대화가 유출되어서 하루아침에 방송 업계에서 퇴출당하는 경우도 여럿 있었고, 각종 대기업 일가의 갑질 사건도 녹취록 공개로 세상에 드러났었다. 우리는 최순실의 대화 녹취록으로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도 겪었다. 일반인들은 물론 법조인들은 특히 대화 녹취록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 면에서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대통령 대화 녹취록이 또 얼마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전체 맥락을 알 수 없는 일부 녹취가 세상에 돌고, 녹음 파일 공유로 인한 음성권 침해와 사생활 침해가 되는 세상, 녹음이 녹음을 낳는 불신사회가 조성되는 것에 경종도 필요하다. 유용하게 쓰고 있는 대화 녹음 기능이 언젠가 나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깨닫고, 대화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요즘이다.
2024-11-04 [18:01]
-
[2030 칼럼] 책 사러 서점에 ‘오픈런’
서점 ‘오픈런’을 보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픈런은 물건을 구매하려는 유효수요가 과다할 때 상점이 문을 열기 전 아침 일찍부터 수요자들이 물건을 사고자 줄을 서서 기다리는 현상을 일컫는다. 젊은 세대에게 오픈런은 생소하지 않다. 예컨대 인기 브랜드의 한정판이 출시되는 날이면 새벽부터 매장 앞에서 기다리는 모습은 유행에 앞서가는 ‘트렌드 세터’의 덕목 중 하나일 것이다. 과거 백화점에서 근무했던 필자에게도 오픈런은 전혀 생소하지 않다. 백화점의 일부 명품매장은 높은 수요로 상시 물량 부족을 겪는 탓에 오픈런을 해야만 원하는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아마도 누가 책을 사기 위해 서점에 달려가는 오픈런을 상상해 본 적이 있겠는가!
사실 판매자의 입장에서는 오픈런이 매우 반가운 일이다. 오픈런 줄을 선 사람들은 대다수가 구매를 확정한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살지 말지 모르겠는데 일단 구경만 하려고 새벽부터 매장에 줄을 서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준비하고 나온 마음가짐에는 기필코 내 손에 넣겠다는 결연한 의지 같은 것이 있다. 그래서 오픈런으로 이뤄지는 판매는 매장의 분위기나 직원들의 응대 서비스보다도 일단 고객이 원하는 물건의 재고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다음날 일부 대형서점들은 작가의 작품을 구입하기 위해 영업시작 전부터 길게 줄지어 선 오픈런을 마주했다. 이에 대해 교보문고 종로점 문학파트장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입사 이래 오픈런은 처음”이라고 놀라움을 표했다. 개점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서 재고가 순식간에 동이 났고 서점들은 ‘품귀’ 현상에 추가 재고를 퀵으로 긴급배송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 주 주말 파주출판단지의 인쇄소들은 평소보다 50배 넘는 주문 물량을 맞추기 위해 철야 근무에 돌입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근래 출판업계에 이렇게 활기가 돌던 때가 있었던가. 매년 독서인구는 감소세를 겪어왔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의 국민 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의 연간 종합 독서량은 3.9권이며 성인 10명 중 6명은 일 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다고 답했다. 올해만큼은 노벨상을 계기로 적어도 한강 작가의 작품은 몇 편이라도 읽게 될 것 같아 평균이 수직 상승할 듯하다. 오랜 불황으로 침체했던 도서 시장에 가뭄의 단비와 같은 소식이다. 동시에 영상매체 소비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오랜만에 활자를 읽는 새삼스러운 시간이 독서활동을 기억하고 환기하는 의미로서도 무엇보다 소중할 것 같다.
이미 젊은 세대에게는 지난해부터 독서와 관련한 트렌드가 불어오고 있었다. 글자(Text)와 ‘힙하다’(Hip)의 합성어인 ‘텍스트힙’은 독서를 즐기는 모습을 멋지다고 생각하는 트렌드로 SNS를 통해 자신이 읽는 책을 소개하거나 좋았던 책의 일부 구절을 필사하거나 독서모임에 참여한 경험을 공유하는 활동들로 이뤄진다. 또한 손에 든 책으로 패션을 완성하는, 책(Book)과 ‘세련된’(Chic)의 합성어인 ‘북시크’ 트렌드도 생겨나고 있었다. 자극적인 쾌락의 도파민을 추구하는 대신에 독서를 통해 즐거움을 찾는, 독서와 도파민을 합친 ‘독(讀)파민’ 트렌드까지 더해져 제대로 독서 붐이 일고 있다.
어쩌면 누군가는 오픈런을 보고 유난스럽다고 혹은 청년들의 허세 부림이라고 가볍게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보여주려는 욕구만 너무 앞선다면 문제겠지만 개인적으로 냉소보다는 이러한 문화를 오히려 포용하고 옹호하고 싶다. 지적 허영을 아끼는 마음 때문이다. 실속이 없고 필요 이상의 호사라는 뜻을 지닌 ‘허영’은 단번에 부정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허영은 무지했던 혹은 변화하는 다양한 가치와 문화, 지식에 관심을 가지고 추구하기에 배움의 열정을 갖게 한다. 화학분석이 공부하는 마음에도 가능하다면 지적 허영심을 조금씩은 검출할 수 있을 것이다.
영예로운 노벨상 수상작이 궁금해서 책장을 펼쳐보고 자신만의 감상을 가져보는 것과 무관심한 채로 지나치는 것 사이에는 문화적 경험의 폭에서 큰 차이가 있다. 이러한 태도의 누적은 곧 개인의 인문학적 교양으로 나타난다. 교양은 허영보다는 품위에 가까워 보인다. 사회생활과 문화 전반에 걸친 취향과 소양을 갖추는 과정이다. 이는 타인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기준과 기대를 통해 우리를 성장하는 존재로 이끌며 삶을 윤택하게 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지적 허영을 채우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다름 아닌 독서다. 감사하게도 이번 가을 한국은 한껏 높아진 자부심과 함께 지적 낭만을 만끽하는 아름다운 계절을 보내고 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문학작품을 원서로 읽는 축복의 여운이 서점가에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2024-10-30 [18:06]
-
[중앙로365] ‘제1회 국제 소월 시 낭송대회’의 의미
세계인이 한자리에 모여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시인 김소월의 시를 낭독하고 기리는 국제대회가 11월 1일 부산에서 열린다. 이번 대회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며 체육진흥공단이 후원한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2024년 작고 문인 선양사업’ 대상 문인으로 시 부문에 김소월을, 소설 부문에 염상섭을 지정하고 올해 7월 전국 5개 기관을 선양사업 추진기관으로 선정했다. 시는 부산의 국제소월협회와 서울의 (사)한국작가회의가 맡았다.
‘시의 날’에 맞추어 11월 1일 오후 1시에 부산역 유라시아플랫폼에서 열리는 ‘외국인 및 다문화 가정 대상의 제1회 국제 소월 시 낭송대회’는 소월 시인의 시와 정신을 세계에 널리 알려 한류의 고급화와 세계문화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취지로 기획되었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다중문화 사회에 잘 적응하여 지역공동체의 문화 간 소통능력을 높여 보자는 의도도 담고 있다. 이번 대회는 낭송자가 무대에 직접 서는 ‘직접 참여형’과 영상으로 지원하는 ‘영상 공모형’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짧은 홍보 기간과 첫 대회임에도 불구하고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몽골,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 파키스탄, 튀르키예, 가나, 시리아, 중국 등 지구촌 각처에서 참가신청서를 냈다. 응모자가 19개국 104명이나 된다. 본선에서는 이 가운데 15명이 참가하여 각자의 솜씨를 겨룬다. 부대 행사도 다채롭게 준비되어 있다. 소월의 시에 인공지능과 챗GPT가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작곡하는 ‘AI 소월 전시회’를 비롯하여 소월 전문 앙상블의 연주와 가곡 공연, 오카리나 합주단의 소월곡 연주로 구성된 ‘작은 음악회’, 소월의 시로 아름다운 한글 서체를 써보는 ‘손글씨 체험’, 소월 시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내는 ‘하늘 편지 코너’ 등이 그것이다.
부산이 국내 유일의 정부 지정 ‘국제 관광도시’인 만큼, 이런 열기가 내년과 내후년에도 계속 이어져서 중앙 정부의 도움 없이 우리 힘으로 대회를 이어가길 희망한다. 혹자는 “소월이 부산에서 태어나고 부산에서 활동한 지역 문인이 아닌데 왜 부산에서 그의 문학을 기리느냐”고 반문한다. 한마디로, 너무 좁은 의견이다. 한강이든 백석이든 윤동주든, 아니면 우리 동네 가게의 아주머니나 아저씨든,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소월 시인에게 나름의 빚을 지고 있다. 전국에 120여 개 문학관이 있지만, 제대로 된 소월 문학관은 한 군데도 없고 줄곧 소월을 소홀히 대해 왔으니 말이다.
굳이 따진다면 소월도 부산과 연고가 아예 없지는 않다. 3·1 운동으로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가 폐교되어 서울의 배재학교로 편입한 소월은 1923년 3월 부산을 거쳐 일본 도쿄상과대학으로 유학을 갔고, 6개월 만에 관동대지진을 만나 할아버지의 독촉으로 귀국했다. 당시는 도일 증명서를 끊고 관부연락선에 오르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시절이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제1 부두와 초량 근처에는 아마도 여기저기 싼 숙소를 기웃거리며 남긴 그의 발자취가 수없이 남아있을 것이다.
소월은 달의 시인이지만 바다의 시인이기도 하다. 평안북도 곽산의 진달래봉 아래에서 태어난 소월은 높다란 계단 위의 자기 집에서 멀리 내려다보이는 서해를 유별나게 사랑하였다. 소월에게 바다는 자유의 거친 물결, 해방의 피안이었다. 그 바다 사랑의 끝에서 ‘바다’ ‘어인(어부)’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밭 된다고’ ‘바닷가의 밤’ 등 10여 편의 시가 탄생하였다. 그는 바다를 메워 농지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작은 에피소드가 두 번 다시 나오기 힘든 한반도의 대시인 소월에게 무슨 의미를 지니겠는가. 소월은 그런 작은 틀, 좁은 지역성에 가둘 수 없는 민족의 대시인이다. 그는 모든 남북한 인민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며, 우리의 정신이고 혼이다. 한국 근대문학을 열어간 개창자를 넘어 인류 보편의 선한 감정을 노래한 세계의 대시인이며, 노벨상 수상 작가 한강의 발원지다. 그러니까 단 며칠 사이에 19개국에서 100명이 넘는 세계인이 소월의 시를 달달 외워서 음성 파일과 영상을 앞다투어 보내오지 않았을까.
소월 사랑에서 부산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아무쪼록 이번에 부산에서 열리는 ‘국제 소월 시 낭송대회’에 시민과 언론의 관심이 많이 쏠렸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너무 대중문화 중심으로 흘러가는 한류 콘텐츠가 소월 문학으로 질적으로 보완되길, 부산에서 출발하는 대륙 기차가 언젠가 소월의 시를 싣고 소월의 고향을 지나 시베리아와 유라시아 평원으로 달리길 기대한다.
2024-10-28 [18:06]
-
[중앙로365] 한국과 일본의 노벨상 수상이 던지는 메시지
올해는 한국과 일본에서 나란히 노벨상을 받게 됐다. 인류의 평화와 복지에 기여한 사람이나 단체에 수여하는 세계에서 최고로 권위 있는 상을 받게 된 것은 뜻깊고 기쁜 일이다. 노벨위원회는 10월 10일 한국의 소설가 한강을 노벨문학상, 다음 날인 11일 일본 원자폭탄 피해자 전국 시민단체인 ‘일본 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피단협)를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각각 선정했다. 물론 한국과 일본은 노벨상 수상이 처음은 아니다. 한국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24년 전인 2000년 10월 한국과 동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한 점을 평가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일본은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가 50년 전인 1974년 ‘비핵 3원칙’(핵무기를 제조하지도, 보유하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 외교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김대중 대통령과 사토 총리가 평화 실현에 공헌한 점을 평가받았다고 한다면, 이번의 한강과 피단협은 위협받는 평화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에 대한 격려라고 하겠다.
국가폭력·전쟁으로 희생당한 사람들
한강, 그들의 아픔에 대한 공감 요구
피단협, 핵무기 위험 지속적으로 알려
평화 지키려는 노력에 대한 격려의 상
북한 등 국가 공공연히 “핵 사용” 언급
더는 인간의 생명 위협받는 일 없어야
먼저, 노벨위원회는 1980년 5·18 당시 계엄군 총탄에 맞아 숨진 광주상고 1학년 문재학 열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가 “역사의 트라우마에 맞서는 동시에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시적인 산문”이라 평했다. 또 소설가 한강에 대해서는 “육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의 연결에 대해 독특한 인식을 가지고, 시적이고 실험적인 스타일로 현대 산문의 혁신가가 되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소설의 내용이 난해하고 잔혹하며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적 견해도 있다. 그러나 한국인 최초, 아시아 여성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은 ‘전쟁으로 사람들이 많이 죽어 나가는 지구촌 상황’을 이유로 축하연 개최를 거절했다. 한마디로,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우리에게 세계 곳곳에서 국가폭력에 의해 발생하는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한 공감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 노벨위원회는 피단협이 노벨평화상 수상 단체로 선정된 이유에 대해 “핵무기 없는 세상 실현과 핵무기가 두 번 다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목격자 증언을 통해 끊임없이 제시해 왔기 때문”이라며 “(원폭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과 비참한 기억을 평화를 위한 희망과 실현을 위해 사용해 온 모든 생존자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 나아가 “역사를 목격한 피해자는 사라지지만, 새로운 세대가 메시지를 계승하고 있다”고 전했다. 피단협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폭자를 중심으로 1956년 결성된 이래 70년 가까이 원폭 피해를 고발하고 반핵 평화운동을 해 왔다. 하지만 피단협이 전쟁 발발의 책임을 일본 측에는 묻지 않으며, 일본인 피폭자 중심이라는 비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상 소식을 접한 다나카 테루미(92) 피단협 대표위원의 “핵무기가 어떤 무기이며, 어떠한 피해를 초래하는지를 새삼스럽게 많은 사람에게 알리게 돼 매우 기쁘다”는 발언이 상징하듯 피단협은 확산일로에 있는 핵무기의 위험성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알리고 있다.
지금부터 약 80년 전인 1945년 8월 6일에는 일본 히로시마에, 사흘 뒤인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제2차 세계대전 주축국인 이탈리아가 1943년 9월, 독일이 1945년 5월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억 옥쇄’를 외치며 결사적으로 항전하던 일본을 항복시키기 위해 미국이 원자폭탄을 인류 최초로 사용한 것이다. 약 1주일 뒤인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그러나 원자폭탄으로 인해 21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15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피폭자가 되었다(사망자 중 4만 명이, 피폭자 중 3만 명이 조선인이었다). 물론 일본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원죄가 있으며 전쟁이 장기화했다면 더 많은 미군과 일본군 그리고 민간인이 희생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원자폭탄 사용은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살상을 금지하고 있는 국제법 위반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이후 핵무기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경쟁적으로 제조되고, 기술 향상에 의해 파괴력도 증대됐다. 현재 핵보유국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인정된 5개국(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에 실질적 핵보유국인 파키스탄, 인도, 이스라엘, 북한을 더한 총 9개국이다. 이들 국가 중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이스라엘은 이란, 그리고 북한은 한국에 대해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언급하는 등 핵무기 위협을 고조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한강과 피단협의 노벨상 수상은 단지 국가안보라는 이유만으로 인간의 존엄과 생명이 위협받고 희생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강력한 호소인 것이다.
2024-10-23 [17:52]
-
[중앙로365] 외발자전거 같은 부산의 블록체인 산업
부산이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된 지도 벌써 5년이 넘었다. 그동안 가시적인 성과를 찾기 어렵게 되자 부산시는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부산디지털자산거래소가 연내 출범을 앞두고 있고 특구 지정기간도 연장되면서 한숨을 돌린 상태다. 부산시가 주도적으로 특구 관련 정책을 추진하고 부산이 블록체인 허브도시로 발전하기 위해 노력해 왔기에 모든 관심과 비판이 부산시를 향했던 게 사실이고 이는 불가피했다.
그런데 모든 정책이 그러하듯 정부 정책도 어젠다 제시만으로 실현되진 않는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지방자치 시대를 맞은 지방정부의 정책이라면 해당 지역의 민간 분야에서도 손을 맞춰줘야 성과를 낼 수 있다. 개발도상국 시절의 낙후된 경제 체제하에서는 민간의 역할이 제한적이고 최소화되어야 큰 효과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우리나라는 더 이상 정부의 힘만으로는 정책적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 모든 정책이 경제나 금융과 밀접히 연계돼 있는 현실에서는 금융기관의 역할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 지정 5년여
부산시 향한 관심과 비판 불가피해
상당수 정책서 금융기관 역할 중요
지역 금융, 커스터디 분야 투자 등 없어
이런 소극적인 태도 도저히 납득 안 돼
시 비전은 ‘파트너’ 찾는 데서 시작해야
이러한 관점에서 부산의 블록체인 산업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블록체인 산업 분야에서 국내 은행들의 활동과 부산 지역 은행의 모습을 비교하면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시중은행들 가운데 KB국민은행, 신한은행, 우리은행 등은 일찌감치 커스터디(custody, 수탁) 분야에 지분 투자 형식으로 진출했고, 하나은행을 필두로 한 하나금융그룹은 부산디지털자산거래소와 커스터디 분야에 지분 투자를 했다. 신한은행, NH농협은행과 케이뱅크, 카카오뱅크 등은 가상자산 거래소들과 독점적으로 실명계좌를 제공해 신규 고객 유치 등 신사업 진출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이는 지방은행들도 마찬가지이다. 호남 지역의 대표적인 지방은행인 전북은행도 가상자산 거래소 한 곳에 실명계좌 서비스를 제공해 주고 있고, 대구·경북 지역 대표 은행인 아이엠뱅크(구 대구은행)도 커스터디 분야에 지분 투자를 했다. 그러나 BNK금융그룹이 이들 은행과 같은 투자를 진행했다거나 협력 사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은 없다. 부산시가 그동안 공들여 추진해 온 부산디지털자산거래소에도 BNK금융그룹의 지분 투자나 공동 사업은 없다.
시중은행, 인터넷은행 및 지방은행들이 디지털자산 업체에 지분 투자를 하거나 사업상 협력 관계를 구축한 것은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정책이나 어젠다에 따른 것이 아니다. 이는 블록체인 산업 분야에서 금융기업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찾고 미래 먹거리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실제로 디지털자산 커스터디 사업은 디지털자산에 있어서 은행과 같은 역할을 하는 중요한 인프라 서비스라 할 수 있는데, 유럽과 북미에서는 은행권을 중심으로 사업 진출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디지털자산을 새로운 자산 유형으로 보고, 실물자산 기반의 토큰인 RWA(실물 연계 자산) 또는 토큰증권 분야에도 엄청난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BNK금융그룹은 부산시의 시 금고 역할을 할 만큼 시 행정에 주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으며, 부산·경남 지역에서는 경제적으로 시중은행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부산시가 중요 정책 분야로 보고 있는 블록체인 내지 디지털자산 분야에서 가장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추측하건대,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먼저 부산시는 블록체인 정책과 관련해 시 내에서조차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를 너무 잘 알다 보면 이미 형성된 선입견에 따라 설득이 더 어려운 경우가 있다. 어떤 기업의 대표가 아무리 좋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고안하더라도 내부 직원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하고 “그게 되겠어”라는 식의 의심부터 갖게 된다면 제대로 진행될 리 없다. 다른 하나는 국내 여타의 은행들과 달리 BNK금융그룹은 애당초 블록체인이나 디지털자산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필자가 그동안 여러 담당자를 만나면서 느낀 바도 이와 유사하다. 고금리 상황에서 수년간 조 단위 수익을 올려온 BNK금융그룹의 입장에서는 나름의 합리적인 판단에 따른 방향성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블록체인을 꼭 해야 하나요?”, “비트코인을 해 본 적이 없어 잘 모른다”, “자료를 제공해 주면 공부해 보겠다” 등의 발언을 하는 것을 보면, 두 번째 이유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필자는 앞선 칼럼에서 블록체인 산업 활성화를 위해서 펀드 조성과 같은 금융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부산시의 블록체인 비전은 오히려 그 비전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적합한 금융 파트너를 찾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2024-10-21 [18:11]
-
[2030 칼럼] 당신의 세상은 평온한가요
초등학교에 전학해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아이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아이에게는 학교의 모든 것이 낯설고 생경했다. 얼마 가지 않아 이 아이는 학급에서 일어나는 일에 불만이 생겼다. 이 학급의 청소 당번은 ‘자원제’로 운영되었는데, 이 때문에 힘 있는 친구들이 약한 친구들을 압박해 자원하게끔 했다. 아이도 얼마 못 가 떠밀려 청소를 도맡아 하게 됐다. 아이는 청소 당번을 자원제로 정하는 이 시스템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고, 2학기가 되어 학급회장에 출마했다. 아이와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들이 힘을 실어주었고, 아이는 청소 당번 ‘순번제’ 시스템을 도입했다.
아이는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모든 학생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았다. 사실 해당 학급에는 몸이 불편한 친구가 있었다. 1학기 회장은 청소 당번 자원제를 도입해 청소를 잘하거나 좋아하는 학우에게 맡기고, 몸이 불편한 친구는 다른 일을 자원하게끔 했던 것이다. 좋은 시스템을 악용하는 학우들이 문제였고, 그것을 바로잡지 않은 게 문제였다. 결국 청소 당번이 순번제로 돌아가는 탓에, 몸이 불편한 친구는 자기 차례가 돌아올 때마다 매번 배려를 당해야 하는 불편한 상황이 벌어졌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시스템 중 어떤 것이 완벽하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모두가 100% 만족할 만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초등학교의 학급으로 예를 들어보았지만, 사회 전체는 비슷하게 흘러간다. 어떤 규칙을 만들어도 예외가 있고, 모든 사람들을 다 아우르는 시스템은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도 시스템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수밖에 없다. 청소 당번 순번제를 도입한 아이는 어떤 시스템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보완해야 할 것이다. 불만을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면 본인이 만든 시스템의 좋은 점만 생각하고 만족감에 빠지게 된다. 불편하겠지만 계속해서 불만의 목소리를 듣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100% 만족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당신의 세상은 평온한가? 모든 사람은 안정적이고 평온한 세상을 소망하지만, 그런 유토피아적인 세상에 당도하기란 어렵다. 만일 세상이 평온하게만 느껴진다면 당장 신문 1면을 펼쳐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매일같이 어렵고 힘든 뉴스들은 쏟아진다. 이 뉴스들은 다수가 마주하기 싫고 외면하고 싶은 진실들을 담고 있다. 세상이 평온하고 아름답다는 것, 어쩌면 보지 않고 듣지 않는 부분이 많다는 것일지 모른다. 특히 정치인들이 자신이 펼친 정책에 대한 만족감만 느낀다면, 계속해서 서민들이 공감하기 어려운 정책들만 난무할 것이라 생각한다.
위 초등학생의 예화는 나의 경험담을 재구성한 이야기다. 안타깝게도 나는 내가 만든 시스템이 완벽하고 더 나은 것이라고 여겼다. 시스템의 이면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만족감과 확신이 생기자 학교 다니는 것이 즐거웠고 나의 영향력을 더 넓혀가고 싶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때 작은 불만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자세가 필요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불편함과 마주하고 계속해서 시스템을 보완해 나가는 시도가 필요했다.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 본질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의 만족을 이루는 사람이 되는 것이 성장의 밑거름이 아니었을까 회고해 본다.
작은 학급에서 일어난 이 일은 우리 사회의 정치와도 다르지 않다. 정책을 기획하고 집행하는 정치인뿐만 아니라 조직을 만들어가는 사람 역시 계속해서 불만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좋은 점만 바라본다면 민생의 목소리와 멀어질 수밖에 없다. 회사의 수장이라면 신입사원의 불만에 귀를 기울이고, 동장이라면 동에 접수되는 작은 민원 한 건에도 귀를 기울였으면 한다. 그런 불만들을 최대한 많이 수용하고 방향성을 고민하는 태도가 좀 더 나은 시스템을 만들어 갈 수 있다. 특히 최근 저출생이나 집값 정책같이 서민들의 삶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민생 정책을 만드는 정치인일수록 이와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
나는 세상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평온하고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기에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과제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더 많은 영향력을 지닌, 더 많은 힘을 가진 사람이 자신이 가진 것을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게 각 사회의 역할이자 책임이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평온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불만과 불편에 목소리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아마 귀를 열고 눈을 뜨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건 어렵지만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2024-10-16 [18:10]
-
[중앙로365] 여성의 서사, 새로운 K콘텐츠의 원동력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으로 주말 동안 서점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시아 여성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원서로 읽겠다는 열풍이 한국어를 모국어로 삼은 많은 이들을 들뜨게 했다. 칸영화제 그랑프리 수상, K팝 빌보드 차트 1위로 한국의 영화, 음악이 세계적 수준임이 증명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한국문학 역시 세계적 수준의 정점에 올랐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한국문학의 부흥과 세계화를 꿈꾸는 희망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세계적 성취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은 번역 예산이나 문화예술 분야의 심각한 예산 삭감 문제가 언급되기도 한다. 모쪼록 장기적 전망으로 더 나은 변화를 기대한다.
한편 많은 언론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뒤늦게 깜짝 놀랐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예상하거나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 시기마다 해외 베팅업체에서 수상 후보로 점찍었던 시인의 집 앞에 기자들이 몰려가던 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해외 언론 역시 이러한 현상에 주목했다. 뉴욕타임스는 ‘한 여성이 한국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것은 많은 것을 말해 준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가장 획기적이고 도발적인 한국 현대문학의 대부분은 여성 소설가들에 의해 쓰이고 있지만 언론과 문학계는 나이 든 남성 작가를 가장 유력한 후보로 여겨 왔다”고 꼬집었다. 더불어 “여성들이 정치, 경제, 뉴스 미디어에서 차별받는 한국 현실에서 한국 여성 작가들이 보여 주는 글쓰기는 여전히 매우 가부장적이고, 때로는 여성 혐오적인 한국 문화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라고 보도했다.
여성이 쓰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는 그가 페미니스트이든 아니든 필연적으로 가부장제나 여성 혐오에 대한 인식과 저항이 깔려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저항의 한 형태로서의 글쓰기가 가장 빛나는 세계적 성취로 인정되었다는 점은 여러 면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를 성찰하게 한다. 그간 성차별이나 여성 혐오에 대한 문제 제기는 오히려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지목되거나,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며 외면당하는 골칫덩이로 취급되어 왔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의 경우 ‘페미 묻은 소설’이라며 비난하거나 책 인증을 한 여자 아이돌을 저격하는 일조차 있었다. 그러나 2022년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조사한 결과 지난 5년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한국문학은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이었다. 전 세계 18개 국가에 번역되었으며, 일본에서는 20만 부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중국과 대만에서도 선풍적 인기를 끌어 동아시아 여성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공감대를 끌어냈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또 하나 생각해 볼 지점은 그동안 한국의 노벨문학상 후보에게 큰 기대를 걸어왔던 모습과는 달리 한국의 언론과 문학계가 여성작가에게는 기대조차 하지 않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혜순 시인은 시집 〈날개 환상통〉으로 한국인 최초로 2024년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하며 또 하나의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정작 국내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생각보다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바리스타 전주연 씨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전주연 씨는 세계 최고의 월드바리스타대회에서 한국인 최초, 여성으로서는 역대 두 번째로 우승컵을 거머쥐었지만 부산이 낳은 이 세계적 바리스타의 이름은 생각보다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여성 바리스타가 왜 많이 없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말을 고르며 “아직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에게 요구하는 역할이 명확하니까요”라고 답했다. 최근 가장 재미있게 본 요리 경연 프로그램인 ‘흑백요리사’에서 일부 출연자들이 여성 셰프에게 ‘이모님’ ‘어머님’이라고 칭하는 장면을 보며, 어떤 인식의 한계가 여성들에게 여전히 덧씌워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와 같았다.
더 나아가 ‘젠더갈등’이라는 이름으로 여성 문제를 왜곡 축소하는 사회나, 7개월째 여성가족부 장관을 임명하지 않고 있는 정부나, 딥페이크 성범죄의 규모가 과장되었다며 사태의 심각성을 축소하려는 정치인들 역시 낡은 인식의 한계 속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마주하고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보다는 한국 여성의 목소리와 서사가 미래의 성장동력이며 강력한 K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이제는 필요하지 않을까. 세계는 여성의 체험과 감정이 갖는 보편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 체험과 감정의 서사로부터 익숙한 과거와 결별하는 새로운 문화의 가능성을 보려 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서사는 개별적이거나 사적인 무엇이 아닌, 보편적 정서와 미래의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 무궁무진한 여성의 역사가 깃든 우리 부산에서도 이러한 여성의 서사를 기꺼이 새로운 미래의 콘텐츠로 환대하길 바란다.
2024-10-14 [17:57]
-
[중앙로365] AI와 관광 일자리의 행복한 공생
얼마 전 가을비가 내리고 날이 선선해지면서 여기저기 행사에 참여할 일이 잦아졌다. 오랜만에 찾은 광안리해수욕장과 국제시장에서 많은 외국인이 부산을 구경하고 있음에 깜짝 놀랐다. 스마트폰과 관광 지도를 들고 음식점이나 상점, 특정 거리나 장소를 돌아보며 사진을 찍고 한국 음식을 먹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우리 영산대학에도 외국인 학생이 전체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특정 수업은 100%가 외국인 학생들인 경우도 많다. 외국인 학생들이 처음 들어왔을 때는 한국 학생들이 주인이고 외국인 학생들은 손님인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외국인 학생들이 후배도 생기고 커뮤니티도 생기니, 이제는 캠퍼스의 주인공으로 각종 학교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부산 관광지 곳곳 외국인 여행객 급증
영산대 외국인 학생이 60% 이상 차지
스마트폰 AI 번역 앱이 관광·학업 도움
관광 일자리도 AI·로봇과 공유 시대
항공업계 체크인 시스템 이미 무인화
과거 고집보다 기술 변화에 적응해야
올해 학기 초 학생들의 진로 설계와 취업 지원, 생활 멘토링을 해주는 18개의 부스가 설치된 행사가 교내 광장에서 열렸다. 참여한 외국인 학생들은 모두 스마트폰 번역 앱을 활용해 이 행사를 제대로 만끽하고 있었다. AI(인공지능) 기능이 강화된 번역기는 자동으로 언어를 감지하고 원하는 언어로 실시간 번역을 해준다. 학생들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캠퍼스 안뿐만 아니라 부산과 인근 지역, 서울과 해외까지도 마음껏 여행을 다닌다. 국제시장과 광안리를 즐기던 그 관광객들도 아마 번역 앱에 의지하며 부산 시내를 돌아다닐 것이다. 세상이 변해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외국인 관광객 유입은 점점 많아질 텐데 관광 일자리는 어떻게 될까? 호텔 경영 전공인 우리 학과에도 한국 학생 비율이 급격히 줄면서, 늘어나는 관광 일자리에 보낼 한국 학생은 조만간 한계를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외국인들에 대한 비자 제도가 개선되고 외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업 연계 장기현장실습 사업도 시범적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정부나 산업 쪽에서도 이러한 인구 변화에 따라 경제 인구 구성을 변화시켜야 함을 느끼고 있다는 증빙이다.
관광시장의 AI 인력 대체 문제가 언급된 것은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이었다. 식당에서는 테이블마다 마련된 미니 키오스크에서 주문하고 결제까지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었다. 로봇이 뜨거운 음식을 고객에게 주의까지 요청하며 테이블에 배달해 준다. 외식 산업체들은 높아진 시급 대신 자동화로 인건비 감축을 시도했고 드라마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키오스크를 이용하는 모습과 초등학생에게서 사용법을 배워 이용하는 모습을 보여 줄 정도로 이제는 전 국민이 어렵지 않게 키오스크를 이용하고 있다.
항공업계는 이미 팬데믹 이전부터 체크인 시스템을 키오스크화하고 안면 인식이나 지문인식을 통해 체크인 수속을 대행하고 있다. 항공을 비롯한 여행산업과 외식산업에는 기술 서비스가 자리 잡고 있지만, 아직 호텔산업은 숙박 예약이나 홍보, 일부 부대시설 외에는 크게 AI 기술 서비스가 느껴지는 부분은 없다. 최고의 인적 서비스가 호텔 객실과 함께 상품으로 판매되는 호텔시장은 편리함만을 강조한 AI 기능으로 인간이 주는 감동 서비스를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AI 로봇이 발전한다면 어떨까?
2018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AI 로봇 소피아는 언뜻 보아도 로봇 같은 느낌이 많았지만, 2021년 소개된 소피아는 그동안 많은 발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표정과 표현이 세련되어져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가장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AI인 ChatGPT를 사용해 보아도 알 수 있다. 명령자가 하는 실수나 오타를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고 답을 해주고 제안까지 하며 선택을 요구한다. 통계학에서도 2018년은 아직 형상 분석에 대한 부분 연구가 미흡했지만, 지금은 AI 덕분에 형상 분석 분야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2021년 소피아는 눈빛과 표정이 인간만큼이나 다양해졌고, 모두 형상 분석에 의한 인간의 감정에 따른 표정으로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소피아가 호텔 종사자가 된다면 호텔산업에서도 AI를 통한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언어의 장벽을 없애고 더 이상 수급이 어려운 한국인 서비스맨을 고집하지 않고 외국인 서비스맨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물론, 업무 분장에서는 좀 더 철저히 구분되지 않을까 싶다.
이제 조만간 관광 서비스의 형태도 많이 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그 변화에 우리도 점점 익숙해질 것이다. 요즘은 과거만 고집해서 될 일이 아님을 사회적 변화를 통해 절감하고 있다.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태어난 세대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아날로그 세대는 불평보다는 이들과 어떻게 행복하게 공생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이 행복한 공생에는 AI 로봇도 함께할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024-10-09 [18:03]
-
[구모룡 칼럼] 부산문화를 보는 다중 스케일
세계적인 미술관 퐁피두센터 부산 유치를 둘러싸고 논란이 적지 않다. 대체로 지역문화 현실과 거리가 있고 충분할 만큼 토론 과정이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혹자는 ‘지역문화진흥법’이 명시한 협의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고 따진다. 차제에 부산시립미술관이나 현대미술관을 더 지원해 지역 미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마침 서울 63빌딩에 한화그룹이 2025년 ‘퐁피두센터 한화 서울’을 운영하기로 하였는데 부산이 불필요한 투자를 하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퐁피두센터 한화 서울이 한시적으로 끝나는 시점에서 부산이 이어받게 되므로 이는 잘못된 지적이다. 한편 인천은 유치에 나섰다가 한화와 부산에 밀린 일로 당국이 시민사회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보다 찬반양론으로 단순화하는 과정은 크게 우려할 일이다. 더 많은 토론이 필요한데 질문을 더하고 구체적인 답을 구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가령 퐁피두센터 부산 유치를 지역문화진흥법으로 접근하는 경우를 들 수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 범주 착오를 노정하고 있다. 이 법이 국가 스케일에서 각 지역의 문화를 진흥하기 위한 법적 장치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을 터이다. 하지만 퐁피두센터 부산은 글로벌 스케일에서 추진되는 네트워크 사업이다. 이를 통해 서울 중심의 일극 문화집중을 극복하고 부산 스스로 세계 속에 위치하려는 정책 의지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부산시립미술관과 현대미술관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로컬 스케일의 요구와도 다른 맥락이다. 더 나아가 지역 미술인의 낮은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부양책이 급선무라는 로컬주의와 논리의 층위를 달리한다.
퐁피두센터 부산 유치 둘러싸고 논란
지역문화진흥법 차원 접근은 범주 착오
글로벌 규모 네트워크 사업으로 봐야
일극의 국가 체제 극복할 대안으로
세계로 나아가는 진취적 기상 필요
단일 아닌 여러 시선으로 지역 이해를
우리는 부산문화를 로컬 스케일, 국가 스케일, 동아시아 지역 스케일, 세계 스케일이라는 다중의 눈으로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영도문화도시’ 사업은 로컬 스케일에서 발전시켜 가야 할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다. 부산문학관이나 부산시립박물관은 로컬의 문화기반시설이다. 그렇다면 로컬리티를 발현하는 데 주안점을 둘 필요가 있다. 다중 스케일의 관점에서 근현대역사관이 동아시아 혹은 아시아라는 지역주의를 표방하면 어떨까 제안해 본다. 부산이 제국의 통로였고 아시아 지중해의 네트워크 도시이며 동아시아 평화의 증인이라는 점에서 시립박물관과 역할 분담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또한 국립해양박물관은 해항 부산을 기반으로 하면서 연안을 넘어 대양을 접속하는 거점이므로 로컬에서 아시아의 바다를 경유해 세계에 이르는 중층의 해양문화를 두루 아우를 수 있는 중추기관이다.
물론 로컬 스케일에 기반한 장르 단위의 문화시설이 로컬주의를 표방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언제든지 아시아와 세계를 호흡할 수 있는데, 그 토대가 로컬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각하지 않아야 한다. 범주 착오나 과잉 의욕에서 비롯한 각 스케일 간의 중첩과 갈등은 협의와 조정을 통해 해소해야 한다. 그러니까 앞으로 조성할 부산문학관의 규모를 줄이면서 퐁피두센터 부산을 유치하려 하는가라는 형태의 질문은 오류를 낳는다. 부산비엔날레를 더욱 육성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해서 퐁피두센터 부산을 유치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영국에서 ‘리버풀 효과’를 만든 계기는 비틀스라는 세계적 문화 상징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역 문화예술의 생산력은 그만큼 문화예술인의 노력을 요청한다.
2030 부산엑스포 유치 실패가 남긴 상실감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를 계기로 한 부산의 도약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서울 중심 혹은 수도권 일극체제의 폐단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물론 서울과 수도권에도 강남과 같은 ‘중심의 중심’이 있어서 로컬이 왜곡되는 모순이 적지 않다. 국가 스케일에서 일극체제를 극복할 거처는 모든 로컬의 활성화이지만 지역소멸이 운위되는 현실이 힘겹다. 여기에서 서울 일극을 향한 힘의 움직임에 부산을 맞세우는 일이 중요한데 메가시티와 글로벌 허브가 그동안 대안으로 떠오른 셈이다. 아시아와 세계를 연결하는 글로벌 허브의 대안은 연안을 넘어 대양과 만나고 있는 부산의 미래 전망으로 절실하다. 글로벌 시티로 가는 일은 경제와 문화, 교육과 산업의 모든 영역에서 추진되어야 한다. 한편으로 로컬을 두텁게 인식하고 이를 책임지는 시민의식이 선행되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일극의 국가 체제를 극복할 대안을 찾으면서 아시아와 세계로 나아가는 진취적인 기상이 요구된다. 자기중심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로컬의 가능성을 단순화하는 일이 없어야겠다. 다중 스케일로 여러 겹의 시선으로 지역을 이해하는 가운데 생산적인 출구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나는 2030 부산엑스포를 기대하였고 가덕도 국제공항 건립을 찬동하였듯이 퐁피두센터 부산 유치를 희망한다.
2024-10-07 [17:56]
-
[중앙로365] 자기 지역구에 살지 않는 정치인들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을 지역구에서 3선 국회의원을 지낸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아파트가 두 채 있었다. 자신의 지역구에 하나, 서울 서초구 반포에 하나. 문재인 정부는 수십 차례 부동산 정책을 발표하면서 고위공직자들에게 1주택을 권고했다. 대통령 최측근인 노 비서실장도 정부 정책 기조에 맞추어 보유 중이던 아파트 두 채 중 한 채를 팔았다. 청주에 있던 걸로. 그 아파트는 134.88㎡(신고액 1억 5600만 원)짜리 널찍한 아파트였고 반포 아파트는 45.72㎡(신고액 5억 9000만 원)짜리 좁은 아파트였지만 네 가족이 부대끼며 살더라도 강남 아파트를 지키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 이시종 충북지사와 대전 서갑을 지역구로 둔 박병석 국회의장도 서울 송파·서초에 있는 집 대신 자기 지역에 있는 아파트를 처분했다. 그들은 ‘권불십년’ 그리고 ‘강남 불패’라는 세간의 믿음을 몸소 실천한 것뿐이겠지만 손꼽히는 고위공직자들마저 자기 지역구를 버리고 강남을 선택하는 현실은 씁쓸했다. ‘똘똘한 한 채’ 앞에 정치적 도의나 지역 유권자들에 대한 예의는 없었다.
지방대학이 ‘벚꽃 피는 순서대로 망한다’는 말이 나온 지는 오래됐다. 이젠 아파트도 그런 시대에 접어들고 있는 듯하다. 인구 감소 충격은 전국적으로 고르게 다가오지 않는다. 서울 아파트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지만 서울 밖에서는 ‘악성 미분양’이라고 할 수 있는 준공 후 미분양이 속출하고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6월 말 기준 악성 미분양 주택은 전국에 1만 4856호 있었는데 그중 1만 1965호가 비수도권 주택이었다. 80.5%다. 일본도 인구 감소와 젊은 층의 도심 회귀 여파로 도쿄 인근 위성도시들이 유령 도시화한 전례가 있다. 도쿄 도심에서 약 30㎞ 떨어져 있는 다마(多摩) 뉴타운이 대표적이다. 이름은 뉴타운이지만 노인이 많아 ‘올드타운’이 된 다마 뉴타운은 우리나라 많은 도시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인구가 줄고 덩달아 주택 수요도 줄면 빈집이 는다. 지역 경제의 활력은 떨어진다. 사람들은 더 나은 주거 환경을 찾아, ‘똘똘한 한 채’를 찾아 큰 도시로 떠난다. 그 정점에 서울이 있고 강남이 있다. 지역구를 둔 정치인이라면 이런 시대에 서울 강남에 맞서 제 지역을 어떻게 살릴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요즘 정치인들은 지역구에 말뚝 박고 그곳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대신, 월세살이로 대충 사는 시늉이나 하면서 권력자에 줄 잘 서서 다음 공천을 받으려고 한다. 전체 지역구 초선 의원 89명 중 41.6%에 해당하는 37명이 서울 강남 3구(서초·강남·송파)를 비롯한 부동산 규제 지역에 아파트 등을 소유한 채, 정작 자기 지역구에선 셋방살이하고 있다는 뉴스가 그걸 방증한다.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똘똘 뭉쳐 있어도 모자랄 초선부터 이 모양이라면 우리 정치의 미래는 암담할 따름이다.
전남 영광군수 재선거를 놓고 치열하게 다투고 있는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은 때아닌 호텔 논쟁을 벌였다. 조국혁신당 관계자가 먼저 자신들은 영광의 아파트를 빌려 ‘한달살이’ 선거운동을 펴고 있는데 한준호 민주당 최고위원은 호텔에 머물며 호화롭게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저격한 것이다. 이에 한 최고위원은 하루 6만 원대 3성급 호텔에 머문다며 반격했다. 선거를 도우러 온 사람들이 호텔에서 지내든, 아파트에서 지내든 무슨 상관이랴. 눈길을 사로잡은 건 정작 군수 후보로 나선 이도 영광에서 월세살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장현 조국혁신당 영광군수 후보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영광에선 아무런 주택도 소유하거나 임차하고 있지 않다고 신고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8월 말 우리나라의 고질병인 부동산 문제 해결을 위해 “서울대 등 주요 대학이 학생을 선발할 때 지역할당제를 적용하자”고 제안했다. 대학 진학에 경제력과 거주 지역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고 그게 수도권 인구 집중과 집값 상승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는 만큼 인위적으로라도 지역 안배를 해 해소하자는 것이다. 이 총재의 주장은 극심한 서울 집중과 지역소멸로 골병들고 있는 우리 사회가 고민해 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윗물이 더러운데 아랫물이 맑을 수는 없다. 지역구 국회의원부터가 강남으로 향하는데 어찌 국민에게 그러지 말라고 할 수 있겠나. 이참에 출마 지역에 살지 않거나 강남 아파트같이 딴 주머니 차고 있는 정치인들은 공천부터 배제하는 방안을 논의해 보면 어떨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꼴이라면 유권자들이 나서서 그런 걸 중점으로 살펴봐도 좋겠다. 예로부터 돈이든 권력이든 하나만 가지라고 했다.
2024-10-02 [17:48]
-
[중앙로365] 부산글로벌허브특별법 제정에 동참을!
‘부산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 특별법’(글로벌특별법)이 국회에서 발의되었다. 국가균형발전을 위해 부산을 글로벌 혁신도시, 대한민국 남부권 거점도시, 국제적 기준이 적용되는 글로벌 허브도시로 조성하기 위해 부산 전역을 규제 혁신과 특례 부여를 위한 법적 근거를 만들겠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글로벌특별법은 왜 필요한가? 부산으로 기업과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서이다. 기업을 만나 부산에서 사업을 해 보라고 권유하면, 서울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부산이 가진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도시 인프라만으로는 부족하다. 사업 전망은 밝지만, 서울에서는 규제 때문에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는 비즈니스가 부산에서는 가능해야 기업과 자본, 사람이 부산으로 온다. 현재까지는 부산시가 기업이 원하는 규제 완화와 특례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와 협의해야 한다. 시간이 걸리고, 지원 여부도 불투명하다. 기업 입장에서 시간은 돈이다. 부산이 중앙정부와 협의하는 동안, 시간은 흐르고, 기업과 자본은 다른 도시를 찾아 떠난다. 이렇게 부산시가 유치한 기업은 떠나고, 일자리는 사라진다. 그리고 부산 청년들도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고, 인구는 줄어든다.
현재 부산의 상황을 살펴보자. 부산시는 가덕신공항 조기 개항을 추진하고 있으나, 신공항 부지 공사 계약은 4차례 유찰되면서 사업자 선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결국 수의계약을 통해 사업자를 선정하기로 하고, 관련 절차를 준비 중이다. 부산시의 핵심 사업이지만 중요한 의사 결정은 중앙정부에 의해 이뤄진다. 이런 무기력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부산시를 위한 특별법이 필요하다. 글로벌특별법이 필요한 이유다.
윤석열 대통령이 공약으로 약속하고 추진한 ‘산업은행 부산 이전’ 역시 불투명하다. 산업은행 본점을 부산으로 이전하기 위해서는 관련 법률(한국산업은행법)을 개정해야 하는데, 여야 대치로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차선책으로 산업은행의 남부권 조직 신설을 통해서 부산 이전을 시도했지만, 산업은행 노조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산업은행 직원들은 국가 금융 경쟁력 훼손을 막기 위해 부산 이전을 반대한다고 하지만, 진짜 반대 이유는 생활 기반 때문이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산업은행 직원들도 한 가정의 가장이다 보니, 가족을 더 나은 환경에서 지내게 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가 간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부산을 서울 못지않은 교육·의료·문화 환경을 갖춘 도시로 만드는 것뿐이다. 이런 현실 인식을 기반으로 글로벌특별법은 기업과 자본 유치를 위한 제도 기반 시설뿐만 아니라 생활 인프라를 글로벌 허브도시 수준으로 조성하여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주거 환경을 만들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부산 디지털자산거래소를 비롯한 블록체인 특구의 다양한 사업을 위해 필요한 제도적 지원 역시 중앙정부의 금융위원회와 협의가 필요하다. 부산시가 아무리 기업을 유치하려고 노력해도 기업의 요청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와 협의해야 한다. 부산시가 블록체인 특구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규제를 완화하고, 제도적·행정적 지원을 하고 싶어도 중앙정부와의 협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부산시가 지방 도시로서 가진 한계점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와의 협의가 없어도 규제 완화 및 제도적 지원을 할 수 있는 글로벌특별법이 필요하다.
글로벌특별법이 제정되면 규제 자율화, 개발사업에 대한 행정규제 예외 및 완화 적용, 행정절차의 신속성 확보, 인센티브 지원을 부산시가 기업에 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만 된다면 부산시는 현재 벽에 부딪혀 있는 가덕신공항, 산업은행 본점 이전뿐만 아니라 부산 디지털자산거래소를 비롯한 부산 블록체인 특구의 핵심사업도 빠르게 추진할 법적 근거와 힘을 가질 수 있다.
부산시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글로벌특별법 제정을 위해서는 부산 시민의 지지와 국민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부산시 주도로 서명운동이 진행돼 100만 명을 넘었다. 국가적 관심을 불러서 일으키기에는 모자라는 숫자다. 글로벌특별법의 혜택을 보는 것은 부산 시민, 특히 부산 청년이다. 부산 청년은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가지 말고, 기업들이 부산으로 와서 부산 청년을 채용하도록 해야 한다. 글로벌특별법이 바로 서울 기업이 부산으로 올 수 있도록 지원하는 법이다. 부산 시민의 조직화된 힘이 필요한 시점이다. 부산 시민은 단결된 힘으로 글로벌특별법 범시민 운동을 전개하자. 부산시가 대한민국의 특별한 도시로서 기업에 인센티브를 지원하고 기업과 자본, 사람을 부산으로 모을 수 있도록 부산시에 실질적인 힘을 주자. 부산이 잘 되는 것이 대한민국이 잘 되는 길이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다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2024-09-30 [1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