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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절반의 시간, 함께 뛰는 이유
오는 11일부터 다음 달 19일까지 2026 FIFA 북중미 월드컵이 열린다. 월드컵은 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마지막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결과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명승부는 경기 막판에 만들어졌다. 전반전을 끌려가던 팀이 후반전에 흐름을 바꾸며 역전하기도 하고, 종료 직전 터진 한 골이 한 나라의 기억으로 남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2002년 한일 월드컵의 기억도 여전히 선명할 것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힘겨운 시간을 지나던 시절, 거리마다 붉은 물결이 이어졌고 사람들은 서로 모르는 이들과도 함께 응원하며 하나가 됐다. 함께 뛰고 함께 응원할 때 우리는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인했다.
축구계에는 이런 말이 있다. “후반전 45분이 진짜 축구다.” 체력이 떨어지고 변수가 많아지는 후반전에 결국 팀의 조직력과 방향, 서로에 대한 신뢰가 승부를 결정한다는 의미다.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서로 연결되고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때 비로소 변화와 성장도 가능해진다.
다음 달이면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장으로 취임한 지도 어느덧 1년 6개월, 임기의 절반을 지나게 된다. 최근 들어 유난히 ‘후반전’이라는 말을 자주 떠올리게 된다. 지나온 시간보다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채워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 역시 임기 반환점을 맞아 조직 체계를 다시 정비했다. 이달부터 시행된 이번 조직 개편을 통해 기존 2본부 4부 12과 체제를 2본부 1실 4부 14과 체제로 확대하고, 정원도 102명에서 110명으로 늘렸다. 특히 ‘혁신성장부’ 신설과 기업지원 체계 개편을 통해 기업의 투자 결정부터 성장, 후속 투자까지 보다 유기적으로 지원하는 현장 중심 행정을 강화하고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기업이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변화와 실행력을 만드는 일이다.
지난 시간은 현장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기업들의 이야기를 듣고 산업 현장의 변화를 살펴보면서 지금 지역에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현장에서 만나는 기업인들은 한결같이 ‘불확실성’을 이야기한다. 글로벌 공급망은 빠르게 재편되고 있고 산업 환경 역시 이전보다 훨씬 복잡해졌다. 이제 기업들은 단순히 공장 부지만 보고 투자하지 않는다. 물류와 인재, 정주환경, 행정 대응 속도까지 도시 전체의 경쟁력을 함께 본다.
세계는 이미 새로운 경쟁에 들어섰다. 미국과 유럽, 중국과 일본 모두 첨단산업과 공급망 확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산업 경쟁은 더 이상 기업만의 경쟁이 아니다. 물류와 기술, 인재, 행정이 함께 움직이는 종합 경쟁의 시대다.
지금 동남권 역시 중요한 전환점 위에 서 있다. 가덕신공항 건설과 진해신항 조성, 북극항로 가능성까지 거론되며 동북아 물류 환경 자체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변화의 흐름을 얼마나 먼저 읽고 준비하느냐다.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의 개발률은 이미 98%를 넘어섰다. 이제는 얼마나 넓게 개발하느냐보다 어떤 산업을 유치하고 어떤 기업과 함께 성장할 것인가가 더 중요해진 시점이다.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 역시 단순한 산업단지를 넘어 산업과 물류, 기술과 사람이 연결되는 플랫폼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새로운 기술 자체보다 기업이 체감할 수 있는 환경과 실행력을 만드는 일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수도권 집중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살아왔다. 많은 청년들이 기회를 찾아 지역을 떠났고, 지역은 인구 감소와 산업 침체라는 이중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지역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개발 논리가 아니라 산업과 일자리, 사람과 도시가 함께 연결되는 새로운 성장의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축구가 전반전 점수만으로 끝나지 않듯 행정 역시 지금까지의 성과보다 앞으로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느냐가 더 중요하다. 남은 시간 동안 기업과 산업, 청년과 지역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길을 만들기 위해 다시 현장으로 뛰고자 한다.
2026-06-07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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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가자지구, 인류의 양심이 시험받는 곳
지난달 22일 새벽 6시 24분,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입국장에 한 여성이 나타났다. 활동명 ‘해초’, 김아현 씨였다. 그의 얼굴에는 그동안의 억류 흔적이 역력했지만, 눈빛은 꺼지지 않았다. “구타를 당해 한 쪽 귀가 잘 안 들립니다.” 그 말 한마디가 지금 가자지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온몸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가자지구는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참혹한 인도주의 위기의 현장이다. 2023년 10월 이스라엘의 전면 군사 작전이 시작된 이후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4만 6000 명을 넘어섰고, 부상자는 10만 명을 훌쩍 넘었다. 인구 230만 명 가운데 대부분이 삶의 터전을 잃고 피난길에 올랐다. 병원과 학교, 주거지는 폭격 속에 무너졌고, 전력과 수도, 의약품 공급은 오랫동안 끊긴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가자지구 북부에서 실제 기근이 발생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어린아이들은 영양실조로 쓰러지고, 환자들은 마취제조차 부족한 수술대 위에 눕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한 전쟁의 부수 피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로 향하는 구호물자 트럭을 조직적으로 차단해 왔고, 공해상에서 구호 선박을 나포하며 인도주의 지원 자체를 봉쇄의 수단으로 삼아 왔다. 굶주림마저 전쟁의 무기로 사용되는 현실 앞에서 국제사회의 언어는 너무 느렸고, 너무 무력했다.
그 봉쇄의 벽 앞에서 세계 곳곳의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 나섰다. 약 40개국 430여 명의 민간 구호 활동가들이 선박 50여 척에 나눠 타고 가자지구를 향했다. 직업도, 국적도, 언어도 달랐지만, 이들이 배를 탄 이유는 하나였다. 죽어가는 사람들 곁에 있겠다는 것, 그리고 국제사회가 외면하는 자리를 자신의 몸으로 채우겠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국가의 지원도, 조직의 보호도 없이 오직 인류애 하나로 망망대해에 몸을 실었다. 그 용기와 헌신은 아무리 치하해도 지나치지 않다.
김아현 씨는 그중에서도 남다른 사람이다. 그녀는 이미 지난해 10월에도 같은 길을 나섰다가 이스라엘군에 체포된 뒤 석방됐다. 외교부는 그 일을 계기로 그녀의 여권을 무효화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다시 배를 탔다. 막혀도, 잡혀도, 구타를 당해 귀가 들리지 않아도 그녀는 “가자가 해방될 때까지 언제나 다시 갈 계획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민간 구호 활동의 진정한 의미다. 국가가 외면할 때, 외교가 침묵할 때, 한 사람의 양심이 그 자리를 채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선의조차 짓밟았다. 지난달 19일, 키프로스 인근 공해상에서 이스라엘군은 함대를 강제 나포했다. 유엔해양법협약이 명백히 금지하는 행위였다. 이스라엘 국가안보 장관 ‘이타마르 벤그비르’는 수감 시설을 직접 찾아가 손이 묶인 채 무릎을 꿇은 활동가들을 향해 국기를 흔들며 조롱했고, 그 장면을 SNS에 올렸다. “우리가 바로 이 땅의 주인”이라는 말과 함께. 한 나라의 장관이 무장도 하지 않은 민간 구호 활동가를 무릎 꿇리고 그것을 자랑으로 삼는 나라.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네타냐후 총리’에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국제사법재판소(ICJ)가 민간인 보호를 명령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가자지구의 하늘 아래에서 오늘도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다.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빵 한 조각을 가져다주려다 구타당하고 돌아온 김아현 씨는 다시 떠날 채비를 한다. 그녀와 함께 배를 탔던 40개국의 활동가들, 가자지구 안에서 목숨을 걸고 수술칼을 쥔 국경없는의사회 의료진, 법정에서 팔레스타인의 편에 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변호사들. 이들이 있어 인류의 양심은 아직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국제사회가 해야 할 일을, 이름 없는 개인들이 자신의 몸으로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은 그들의 용기를 기억하고,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일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침묵은 곧 공모다.
2026-06-03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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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가덕도신공항이 아닌 '부산국제공항'으로
24년간 조종석에 앉아 세계 수십 개 도시의 공항을 드나들었다. 도쿄, 상하이, 싱가포르, 런던, 빈, 뉴욕… 그 어느 공항도 자신이 위치한 섬 이름이나 행정 지명을 내걸고 국제 항공로에 등장하는 곳은 없었다. 관제사가 교신할 때, 항공사가 스케줄을 편성할 때, 여행객이 항공권을 검색할 때, 공항은 언제나 도시의 이름으로 불린다.
2035년 개항을 목표로 부산 가덕도에 새 공항이 건설되고 있다. 800만 부산·울산·경남 시민이 수십 년간 염원해 온 동남권 관문공항이 마침내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이 아직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있다.
“이 공항의 이름을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현재 통용되는 ‘가덕도신공항’은 건설사업의 행정적 명칭일 뿐, 개항 후 세계를 향해 내걸 간판이 아니다. 그 이름은 마땅히 부산국제공항(Busan International Airport)이어야 한다. 항공 현장을 누빈 전문가로서, 부산의 도시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항공 기업인으로서 강력히 주장한다.
공항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인천국제공항이다. 1992년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된 명칭 공모에서 1위는 ‘세종공항’(101표), 2위는 ‘서울공항’(70표)이었으며, ‘인천공항’은 고작 8위(30표)에 머물렀다. 더 놀라운 것은 1995년 1월, 수도권신공항건설공단이 신공항의 이름을 ‘영종국제공항’으로 공식 결정해 버린 사실이다. 실제로 공항이 위치한 섬 영종도를 따른 것이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인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같은 해 4월, 인천YMCA 등 시민단체들은 ‘인천국제공항 명칭제정추진위원회’를 창립했다. 이어진 서명운동에는 당시 인천 인구 235만 명 중 60만 명, 즉 시민 4명 중 1명가량이 동참했다. 결국 1996년 3월 21일, 건설교통부는 공단의 결정을 뒤집고 이름을 ‘인천국제공항’으로 최종 확정했다. 오늘날 전 세계 항공권에 ‘ICN’-인천(Incheon)의 알파벳이 새겨진 것은 그 4년의 시민 분투 덕분이다.
이 교훈을 부산이 되새겨야 한다. 지금부터 ‘가덕도(Gadeokdo)’가 아닌 ‘부산(Busan)’을 세계에 알려야 한다.
항공 현장에서 공항은 도시의 이름으로 통한다. 관제 교신, 비행계획서, 항공권 예약 시스템에서 공항을 인식하는 기본 단위는 섬이나 지형이 아니라 도시다. 현재 김해국제공항의 국제 도시 코드는 ‘BUSAN’, IATA 코드는 ‘PUS’(부산의 옛 로마자 표기 ‘Pusan’에서 유래)이다. 세계의 항공 시스템은 이미 이 공항을 ‘부산’의 공항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현판에는 ‘김해국제공항’이 찍혀 있고, 곧 들어설 신공항에는 자칫 ‘가덕도신공항’이 달릴 수 있다는 건 역설적이다.
전 세계 749개 공항 중 741개가 행정구역명을 공항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행정구역 개편 이전의 지명을 그대로 쓰는 공항은 전 세계에서 김해공항과 김포공항 두 곳뿐이다. ‘부산’ 브랜드 가치를 활용해 얻는 이득이 명칭 변경 비용보다 훨씬 크며, 부산항 브랜드 가치(1조 2500억 원)에 빗대면 지난 24년간 약 3조 원 이상의 브랜드 가치를 놓쳤다고 추정된다.
홍콩국제공항, 오스트리아 빈공항, 싱가포르 창이공항 등 세계 주요 국제공항을 살펴보면 이 원칙은 더욱 명확해진다.
공항을 찾는 세계 여행객들은 ‘가덕도’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이 아는 것은 ‘부산’이다. 세계 2위 환적항만의 도시, 영화제의 도시, 해양 문화 수도의 이름. 이 강력한 브랜드를 공항 이름에 새기지 않는 것은, 스스로 세계 무대에서 자신의 얼굴을 지우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는 ‘가덕도’가 아닌 ‘부산’을 세계에 알려야 한다. 공항이 개항하는 2035년보다 지금부터 10년간의 건설 과정이 더 중요한 홍보 기간이다. 세계 언론이 이 공항을 처음 보도하는 그 순간부터 ‘부산국제공항’이라는 이름이 쓰야 한다.
2026-05-31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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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노란봉투법 시행, 원청 인사노무팀이 당장해야 할 네 가지
지난 3월 10일 노란봉투법 시행 이후 조선·물류·공공기관·금융 등 산업 전반에서 하청노조의 원청에 대한 교섭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 전체 접수 사건 가운데 많은 건이 취하되었으나, 노동위원회의 사용자성 판단 결정이 내려진 사건에서는 4월 19일 기준 약 90%(23건 중 21건)가 인정됐다. 다만 지금까지 인정된 사용자성은 주로 안전보건·인력배치 등 원청의 실질적 지휘·관리권이 분명한 분야에 집중되어 있으며, 임금·복리후생 전반에 대해 원청의 사용자성이 일반적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다. 노란봉투법에 따른 교섭요구 대상 인원이 14만 명을 넘는 것으로 집계된 가운데, 원·하청 모두 아래 네 가지 절차적 포인트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첫째, 교섭의제별로 창구 단일화 절차가 제대로 이행됐는지 확인하라.
하청노조가 원청에 단체교섭을 요구하려면 여러 하청노조 사이에서 대표를 정하는 창구 단일화 절차가 필요하다. 이 절차는 의제별로 달리 적용될 수 있다. 예컨대 안전 문제에서는 A조직이 대표가 되고, 복리후생 문제에서는 B조직이 대표가 될 수 있다. 절차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요구한 경우 원청은 공문으로 의제 특정이나 절차 이행을 요청할 수 있다. 다만 노동위원회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직권으로 절차 보완을 요구하고 사용자성 판단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으므로, 원·하청 모두 절차적 요건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
둘째, 교섭의제를 구체적으로 특정하라.
의제가 불분명하면 분쟁이 길어지고 해석상 혼선이 생긴다. 원청은 의제가 구체적이지 않으면 서면으로 의제 특정을 요청하는 것이 안전하다. 임금·수당 등은 원칙적으로 하청 내부의 사안으로 본다는 것이 고용노동부의 현재 입장이다. 따라서 하청노조는 임금·수당이 아닌 안전·근로조건·학자금 지원 등 원청의 실질적 지배력이 인정될 가능성이 큰 의제부터 교섭 의제로 제시하고, 단계적으로 요구 범위를 넓혀가는 전략을 취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셋째, 공고와 사용자성 인정은 별개다.
교섭요구 사실을 공고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사용자성이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공고가 진행되는 시점부터 관련 절차가 본격화되므로, 원청은 교섭단위 분리 신청 가능성, 의제별 사용자성 쟁점, 기본 대응 방향을 미리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하청노조 역시 공고가 모든 의제에 대한 교섭 의무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실제로 교섭이 가능한 쟁점을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노동위원회 결정 흐름을 계속 지켜봐야 한다. 현재 노사 양측은 노동위원회의 판단을 보며 대응 방향을 조정하고 있다. 원청은 불복과 소송을 검토하고, 하청노조는 신청 취하 후 보완해 다시 제기하는 방식으로 유리한 판단을 모색하는 경우가 있다. 일부 사건에서는 처리 지연도 나타나고 있어, 원·하청 모두 사건 진행 상황을 꾸준히 확인하고 유사 사례를 참고해 대응 전략을 세울 필요가 있다.
끝으로 정부의 원·하청 상생교섭 매뉴얼은 참고할 만한 기준이지만, 노동위원회와 법원의 판단은 별도로 전개될 수 있다. 노동부 해석만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노동위원회와 법원의 판단 흐름을 함께 살피면서 충분한 법리 검토를 거쳐 차분하게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2026-05-31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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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사유’를 멈추면 주권도 사라진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울리는 선거 문자와 SNS의 자극적인 영상, 실현 가능성보다 눈길부터 끄는 공약들이 뉴스를 도배하고 있다. 정치가 우리 삶을 보듬는 대안의 장이 아니라, 마치 누가 더 자극적인가를 겨루는 쇼윈도가 된 듯한 기분이다. 소음에 지친 유권자들은 “정치는 다 똑같다”며 고개를 돌리지만, 정치를 외면하는 바로 그 순간 민주주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최근 선거판을 보면 클릭베이트(Clickbait) 공약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표를 얻기 위해 예산이나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일단 던지고 보는 공약들을 의미한다. 이런 공약들은 유권자의 깊은 고민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찰나의 순간 스마트폰 화면에서 눈길을 사로잡고, 당장의 이득을 약속하며 유권자를 유혹한다. 당장은 입에 달콤하지만 공동체의 미래에 아무런 영양가가 없는 공약들이다. 정책이 국가의 백년대계가 아닌 ‘클릭 수’를 높이는 마케팅 도구가 될 때, 유권자의 주권은 미끼를 기다리는 물고기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정교한 AI 알고리즘은 이런 미끼에 쉽게 걸려들게 만든다. AI는 우리가 클릭한 혐오 콘텐츠나 특정 진영의 주장만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필터 버블 현상을 유발한다. 유권자가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에 약한지 데이터로 분석해, 딱 입맛에 맞는 선동적인 문자나 네거티브 정보를 보낸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는 환경 속에서, 유권자는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보다 진영 논리에 갇힌 조건반사적 반응을 보이게 된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과거 끔찍한 학살을 저질렀던 이들은 괴물이 아니라,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일했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짚어냈다.
오늘날의 유권자에게 요구되는 윤리도 이와 다르지 않다. 쏟아지는 문자 메시지와 SNS 공세 속에서 비판적인 사유를 멈추는 것, 네거티브 정보에 무작정 동조하거나 혹은 귀찮다고 투표를 포기하는 것은 현대판 사유의 정지라 할 수 있다. 생각을 멈추고 시스템이 던져주는 정보에만 몸을 맡길 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나쁜 정치를 돕는 방관자가 되고 만다.
“나 하나 투표 안 한다고 세상이 바뀌겠어?”라는 생각은 책임감을 분산시키고, 결국 정치를 선동가들의 놀이터로 만든다. 하지만 방관은 결코 중립이 아니다. 유권자가 눈을 감으면 정치는 더 자극적인 네거티브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이제 구경꾼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때다. 미끼처럼 던져지는 공약 뒤에 숨은 실체를 따져 묻고, 알고리즘이 배달하는 증오의 언어를 이성의 힘으로 거부해야 한다. 내 주권을 알고리즘과 선동가들에게 약탈당하지 않겠다는 지적인 저항이 필요하다.
투표는 단순히 선거일에 도장을 찍는 행위가 아니다. 수많은 거짓과 비난 속에서 무엇이 진짜 우리를 위한 길인지 찾아내는 지적인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청년 유권자부터 전 세대에 이르기까지 비난의 말들에 속지 말고,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주인이 되어야 한다. 유권자가 정책을 따지고 진실을 찾으려 노력할 때, 비로소 정치는 시민을 두려워하고 시민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유하는 시민만이 알고리즘의 노예가 되지 않고 민주주의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다.
2026-05-27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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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공급망 파도, 친환경 선대 구축으로 넘어야
아침에 카페에 들러 향긋한 커피를 사고, 해외에서 마음에 드는 소파를 구매하며, 자동차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 이처럼 평범한 일상이 바다 덕분이라는 것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가 인지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바다를 터전으로 살고 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수출입 물동량의 99.7%를 해상 운송에 의존한다. 바닷길이 막히면 식료품 가격이 폭등하고 공장이 멈춘다. 이란 전쟁에 따른 호르무즈 해협 봉쇄 장기화 등 먼 나라의 해상 위기가 우리의 일상과 경제를 직접적으로 흔드는 셈이다.
많은 이들에게 바다는 휴식과 여유의 공간이겠지만, 한국해양진흥공사(KOBC)가 바라보는 바다는 국가 경제의 생존이 걸린 치열한 전장이다. 최근의 지정학적 갈등을 비롯해 보호무역주의, 탄소중립 규제 강화, 팬데믹(감염병 대유행) 이후의 물류 대란은 우리에게 한 가지 사실을 극명하게 일깨워줬다. 바로 해상 공급망을 지배하는 국가가 미래 경제를 주도한다는 점이다.
중국이 세계 1위 해운국으로 등극하는 등 아시아로 해운 패권이 이동하는 격변기 속에서, 공급망은 단순한 물류 문제를 넘어 국가안보와 산업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전략 자산이 됐다. 대한민국은 글로벌 4위 해운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외형적 성과의 이면에는 구조적 한계에 따른 선대 경쟁력 저하라는 그늘이 짙다.
가장 큰 문제는 선대의 고령화다. 우리 선대의 평균 선령은 22.3년으로 일본(16.2년), 중국(14.6년) 등 경쟁국에 비해 노후화가 심각하다. 과거 해운 불황기 이후 선가(船價) 급등과 연료 전환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신조(신규 선박) 투자가 위축돼 미래에 대한 준비가 필요한 상황이다. 수출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의 규모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현재보다 20% 이상의 선복을 확충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미 글로벌 화주들은 친환경·고효율 선박을 선호하고 있어, 탄소 배출 규제가 강화될수록 노후 선박의 시장 경쟁력은 전방위로 약화할 수밖에 없다.
결국 향후 해운 경쟁력은 ‘얼마나 신속하게 많은 친환경 신조선을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 국제해사기구(IMO)의 탄소중립 목표에 따라 글로벌 해운시장은 액화천연가스(LNG)·메탄올·암모니아 기반 선박 중심으로 급속히 재편되고 있다. 세계 신조 발주의 절반가량이 친환경 연료 기반으로 전환됐으며, 유럽 주요국들은 미래 친환경 선복 확보 경쟁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스크러버 보급 등 일부 분야에서는 세계 최상위권 경쟁력을 확보했다. 그러나 차세대 연료 기반의 신조선 발주 비중은 경쟁국 대비 현저히 낮다. 우리의 현주소를 냉정하게 짚어보아야 한다. 한국은 현존선 기준 차세대 연료 추진선 비중이 적재용량(DWT) 기준 세계 5위 수준이다. 그러나 오더북(발주 잔량)을 포함한 미래 선복 기준으로는 11.3%에 그쳐 글로벌 평균인 17.8%를 밑돈다. 향후 한국의 차세대 연료 추진선 보유량은 프랑스·이탈리아 등 유럽 선진국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발주 잔량 내 친환경 선박의 비중이 낮다는 점은 향후 현재의 입지마저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가장 우려되는 대목이다.
친환경 전환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다. 기존 선박의 개조를 넘어 LNG, 메탄올, 암모니아 추진선 등 차세대 친환경 선박 확보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급변하는 글로벌 공급망 위기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국적선사들이 적기에 선박을 공급받을 수 있는 환경 조성이 필수적이다. 특히 고가의 친환경 연료 선박 확대를 위해서는 해양진흥공사와 정책금융기관의 체계적인 친환경 금융 지원 프로그램이 긴밀하게 연계돼 공급돼야 한다.
공급망 위기라는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지금, 바다는 단순한 수출입 통로가 아니다. 우리의 미래 생존과 성장동력을 좌우할 전략적 보루로 인식하고, 친환경 선대 전환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향해 원팀으로 나아가야 할 때다.
2026-05-24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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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AI 시대 대학, 인간과 AI 공존하는 혁신 플랫폼으로
최근 한국대학신문은 생성형 AI를 비롯한 신기술이 대학 경쟁력과 교육의 풍경을 빠르게 바꾸고 있다고 진단했다. 대학들은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수업 혁신, 학생 맞춤형 학습, 취업 역량 강화, 사회문제 해결형 프로젝트까지 AI 활용 범위를 넓혀가는 추세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교육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대학 존재 이유 자체를 다시 묻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제 AI는 일부 전공자만의 기술이 아니라 대학 교육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문명의 전환점이 되고 있다.
과거 대학은 많은 지식을 전달하는 기관이었다. 그러나 이제 정보 검색과 분석, 문서 작성까지 AI가 인간보다 더 빠르게 수행한다. 단순 암기와 반복적 학습은 더 이상 대학 경쟁력이 될 수 없다. 결국 대학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보다 ‘어떤 인재를 길러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시대를 맞고 있다.
AI 시대 대학의 생존 전략은 결국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데 있다. 창의력과 공감 능력, 윤리의식, 융합적 사고, 문제 해결력 같은 인간 고유의 능력이 핵심 경쟁력이 된다. AI가 정답을 찾는 시대라면, 인간은 새로운 질문을 만드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교수의 역할도 크게 달라지고 있다.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강의 방식은 한계에 이르고 있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사고를 확장시키는 학습 설계자이자 코디네이터 역할을 해야 한다. 생성형 AI를 활용한 프로젝트 수업, 산업체 연계형 문제 해결 교육, 융합형 교육과정 확대는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고 있다.
학생들에게 요구되는 역량도 변하고 있다. AI 활용 능력과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이다. AI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다양한 분야를 연결하는 융합적 사고도 필요하다. 즉, 네트워킹의 중요성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중심의 윤리의식과 공동체 가치에 대한 이해다. AI는 계산할 수는 있지만 책임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대학은 기존의 학과 중심의 구조에 변화를 줘야 한다. 지역 산업과 연계하고 세계와 협력하는 개방형 혁신 플랫폼으로 변해야 한다. 부산의 경우 해양·물류·관광·영상 산업과 AI를 결합한다면 충분히 세계적인 도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부산의 대학 역시 지역 특성화와 AI 융합 전략을 통해 글로벌 대학으로 도약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최근 동의대학교는 AI 기반 교육혁신과 전교생 AI 역량 강화 체계를 구축하며 교육의 대전환에 나서고 있다. 특히 라이즈사업단이 부산KBS와 진행하고 있는 ‘지금 AI’ 프로그램 등을 통해 지역사회와 AI 교육 방향을 공유하며 대학의 새로운 역할을 제시하고 있다. 대학이 지역과 함께 AI 시대 미래를 설계하는 플랫폼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AI는 대학의 위기이면서 동시에 가장 큰 기회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대학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AI를 인간 가치와 연결하고 교육 혁신으로 확장하는 대학은 새로운 미래를 선도하게 될 것이다.
결국 살아남는 대학은 단순히 유명한 대학이 아니다. 인간다움을 지키면서 AI 시대를 가장 창의적으로 준비하는 대학이다. 이제 대학은 지식을 전달하는 공간을 넘어 인간과 기술의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혁신 플랫폼으로 완전히 새롭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
2026-05-24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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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부산·울산·양산 원헬스의 빈칸, 함께 채울 시간
매슬로우는 안전을 인간의 기본 욕구 중 하나로 보았다. 먹고사는 문제 다음에 오는 삶의 토대, 곧 내 가족과 이웃이 예측 가능한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믿음이다. 안전은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무너지는 순간 일상의 모든 질서가 흔들린다. 그런데 부산이 과연 그 믿음의 도시인가를 묻는다면, 우리는 한 가지 빈칸을 직시해야 한다. 사람과 환경, 동물의 건강을 하나로 보는 원헬스의 시대에 부산·울산·양산권(부울양권)에는 수의과대학이 없다.
이 문제는 대학의 이해나 어느 한 기관의 요구로만 볼 일이 아니다. 부울양은 500만에 가까운 시민이 생활권을 공유하는 동남권 핵심 축이다. 항만과 공항, 산업단지, 대학병원과 연구기관, 해양바이오와 반려동물 문화가 겹친 지역이기도 하다. 이만한 생활권에 수의학 교육·연구·방역 인력 양성의 거점이 없다는 것은 원헬스 안전망의 분명한 빈칸이다. 시민의 삶 가까이에 있는 안전 인프라가 지역 안에서 충분히 갖추어져 있는지 이제는 물어야 한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불편한 교훈을 남겼다. 감염병은 행정구역을 묻지 않고, 인간의 병은 인간 사회 안에서만 시작되고 끝나지 않는다. 인간과 동물, 환경의 건강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감염병 대응 역시 이 세 영역을 함께 보아야 한다. 이제 방역은 병원이 문을 연 뒤의 치료만이 아니라, 항만과 공항, 축산과 반려동물, 야생동물과 환경 데이터가 함께 움직이는 과학이어야 한다. 원헬스는 먼 미래의 구호가 아니라 이미 우리 도시가 준비해야 할 현실의 안전 전략이다.
수의과대학은 동물병원을 늘리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첫째, 지역 학생들이 수의학을 배우기 위해 외지로 떠나야 하는 현실을 줄일 수 있다. 청년에게 교육 기회의 지역 격차는 곧 지역의 미래 격차다. 부울양권에 수의학 교육의 길이 열리지 않는다면, 이 분야의 인재는 계속 외부로 빠져나가고 지역은 필요한 전문성을 외부에 의존하게 된다. 지역에서 배우고, 연구하고, 일할 수 있는 사다리를 만드는 것은 청년을 붙잡는 가장 기본적인 정책이기도 하다.
둘째, 수의학은 다른 보건의료·생명과학 분야와 결합할 때 더 큰 힘을 낸다. 의학, 간호학, 약학, 치의학, 한의학, 생명과학, 환경공학, 해양바이오 분야가 수의학과 만나면 감염병 예방, 식품안전, 동물복지, 재난관리, 바이오산업까지 이어지는 융합 교육과 연구가 가능하다. 이는 한 대학의 경쟁력만이 아니라 지역 교육과 연구 생태계 전체의 경쟁력을 높이는 일이다. 특히 동남권이 미래 먹거리로 삼고 있는 바이오헬스, 해양바이오, 스마트 방역 분야와도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
셋째, 국제도시 부산의 신뢰를 높인다. 부산은 이미 수많은 관광객과 물류, 인적 교류가 오가는 개방형 도시다. 앞으로 가덕도 신공항이 들어서고 글로벌 중심도시의 비전이 구체화될수록 부산의 관문 기능은 더 커질 것이다. 그러나 개방성은 안전망 없이는 위험이 될 수 있다. 항만과 공항, 도시 방역과 동물 감염병 대응을 함께 설계할 수 있는 원헬스 기반은 국제도시가 갖추어야 할 기본 조건이다. 세계와 더 많이 연결될수록, 지역 안의 방역과 연구 역량은 더 단단해야 한다.
지방선거가 다가오면 많은 공약이 나온다. 도로와 철도, 산업단지와 개발사업도 중요하다. 그러나 6월 3일의 선택이 단순한 개발 경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시민의 안전, 청년의 교육 기회, 도시의 국제적 신뢰를 함께 높이는 과제가 의제로 올라야 한다. 부울양권의 수의학 교육·연구·방역 거점 구축은 어느 한 정당의 깃발 아래 놓일 사안이 아니다. 부산시와 울산, 양산의 행정, 지역 대학과 산업계, 시민사회, 그리고 여야 정치권이 중앙정부를 향해 초당적·초정파적으로 요구해야 할 생활안전 의제다.
사람만 건강한 도시는 없다. 동물이 아프고 환경이 흔들리면 사람의 안전도 흔들린다. 부울양이 진정한 국제해양수도권을 꿈꾼다면 원헬스의 마지막 퍼즐을 채워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경쟁의 언어가 아니라 공동의 언어다. 어느 기관이 앞에 서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500만에 가까운 시민의 안전을 위해 이 지역에 반드시 필요한 기반을 함께 만드는 일이다. 부울양 원헬스의 빈칸을 이제는 함께 채워야 한다.
2026-05-20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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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음악은 끝났지만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지난 2일 토요일, 부산콘서트홀에서는 제15회 부산사람 이태석기념음악회가 많은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 속에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객석을 떠나지 못한 관객들의 표정에는 깊은 울림과 여운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한 편의 훌륭한 음악회를 본 감동이 아니라, 한 사람의 숭고한 삶과 정신을 함께 기억했다는 감동이었을 것이다.
고 이태석 신부는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에서 평생을 가난하고 병든 이웃들과 함께하며 사랑과 봉사의 삶을 실천한 인물이다. 의사이자 사제였던 그는 의료와 교육, 그리고 음악을 통해 절망 속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했다. 우리는 흔히 그를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으로 기억하지만, 그의 삶은 단순한 미담이나 다큐멘터리로만 남기에는 너무도 깊고 크다.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했던 삶,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며 희망을 전했던 정신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이태석기념음악회는 바로 그러한 정신을 기억하고 이어가기 위해 시작되었다. 15년 전 부산사람이태석기념사업회 이장호 이사장의 제안으로 출발한 이 음악회는 “이태석 정신을 널리 전파하자”는 뜻 아래 지역 예술인들의 자발적인 재능기부와 동참으로 이어져 왔다.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자는 마음으로 시작된 음악회가 어느덧 15회를 맞이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이 15년의 시간을 한결같이 지켜오며 음악회의 중심을 잡아온 인물이 있다. 바로 오충근 지휘자이다. 오 지휘자는 단순히 무대를 이끄는 음악감독의 역할을 넘어, 이 신부의 정신을 음악으로 구현하고 시민들과 나누는 데 큰 역할을 해 왔다. 매년 이어지는 공연을 준비하며 수많은 예술인들과 호흡을 맞추고, 음악회의 방향성과 품격을 지켜온 그의 헌신은 결코 가볍지 않다. 무엇보다 상업성과 화려함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음악’이라는 본질을 지켜왔다는 점에서 그의 역할은 더욱 뜻깊다.
이날 무대에 오른 출연진의 진정성 있는 연주는 음악회의 의미를 더욱 빛나게 했다. 수준 높은 연주와 노래는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했으며, 무대 위의 음악은 화려한 기교보다 진심이 앞섰다. 출연자 모두가 이 신부의 정신을 음악으로 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무대에 올랐고, 그 진심은 객석에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공연이 끝난 뒤 오랫동안 이어진 박수는 찬사를 넘어 감사와 존경의 표현이었다.
기념음악회는 초기에는 협의의 목적에서 출발하지만, 시간이 축적되면서 도시의 문화적 자산으로 확장된다. 이제 15회를 맞은 이태석기념음악회 역시 부산을 대표하는 문화 콘텐츠로 자리매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이번 음악회가 15회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지역사회의 따뜻한 관심과 후원이 있었다. 특히 특별후원에 나선 BNK부산은행은 지역을 대표하는 금융기관으로서 부산의 문화예술과 사회적 가치를 함께 지켜나가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지속적인 공연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재정적 기반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부산 공연예술계에서 장기적으로 이어지는 음악회는 예술인들에게 단비 같은 존재다. 단순히 한 번의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들에게 창작과 활동의 기회를 제공하고, 시민들에게는 문화적 자긍심을 심어주는 역할을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경제적 풍요 속에서도 마음의 빈곤과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이 신부가 남긴 삶의 가치는 더욱 소중하다. 그리고 그 정신을 음악으로 기억하고 이어가는 이태석기념음악회의 존재는 우리 사회를 더욱 따뜻하게 만드는 힘이 된다.
제15회 이태석기념음악회는 끝났지만, 그날의 감동과 메시지는 오래 남을 것이다. 음악은 끝났지만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2026-05-17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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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즐거움도 권리다, 유희의 공정성(Play Equity)
필자는 어린 시절 서울의 좁다란 골목에서 해가 질 때까지 마음껏 뛰어놀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리고 학교와 동네 놀이터에서 또래들과 어울리던 시간은 단순한 놀이를 넘어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뿌리가 되었다. 네덜란드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즉 유희하는 존재(놀이하는 인간)라 정의하고 유희는 인간다운 삶을 증명하는 가장 본질적인 방식이라 강조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장애인 정책은 여전히 ‘생존’과 ‘보호’에 치중해 있다. 최근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장애인의 82.2%가 주된 여가 활동으로 ‘TV 시청 및 휴식’을 꼽았다. 반면 문화예술 관람(4.8%)이나 여행(5.5%) 비율은 처참하다. 특히 중증장애인 10명 중 1.5명은 외출조차 불가능하다. 필자가 서울 골목에서 누렸던 당연한 ‘뛰어놀 권리’가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거대한 장벽 너머의 이야기인 셈이다.
이미 서울 등 수도권은 변화하고 있다. 2016년 ‘꿈틀 놀이터’를 시작으로 시 차원의 가이드라인을 배포하고 민간 기업들이 동참하고 있다. 동작구를 시작으로 자치구별로 ‘통합놀이터’를 명시한 조례를 제·개정하여 장애·비장애 아동이 어우러지는 공간을 체계적으로 확충하고 있다. 반면 우리 부산은 어떠한가. 2024년 ‘부산광역시 아동의 놀 권리 증진에 관한 조례’가 마련되었다. 조례의 기본 원칙으로 통합 놀이공간 조성이 언급되어 있고 일부 공원에 무장애 시설이 도입되긴 했으나, 그 수조차 적을 뿐더러 위치가 외지거나 연계 이동 수단이 부족해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기존 놀이터에 휠체어 전용 기구 한두 개를 얹는 식의 산발적인 정비로는 결코 ‘통합의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 필자는 이를 ‘유희의 공정성(Play Equity)’이라 부르고자 한다. 장애 유무와 관계없이 누구나 놀이와 여가를 공정하게 경험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대한민국이 비준한 유엔 장애인권리협약(CRPD) 제30조는 장애인의 동등한 여가 활동 참여 권리를 명시한다. 필자는 이를 위해 과거 지역 유휴 부지 활용 논의 과정에서 ‘달팽이 놀이터’를 제안한 바 있다. 휠체어와 유아차 나선형 경사로를 따라 정상을 향하고 느리지만 안전한 모두의 공간이다. 유럽의 무장애 놀이기구 전문 기업들이 강조하는 “놀이에는 한계가 없다(Play has no limitations)”라는 선언처럼, 신체적 조건이 즐거움의 장벽이 되지 않는 공간이 부산에도 절실하다. 비록 당시의 논의는 행정의 시간 속에서 잠시 멈춰 서 있지만, 그 철학만큼은 부산이 지향해야 할 유니버설 디자인의 이정표다. 이제는 멈춰버린 이 상상력을 깨워 부산만의 특화된 거점형 유니버설 통합놀이터를 구축해야 할 때다. 부산 지역 기업의 사회공헌(CSR)과 연계된 부산형 민관협력 모델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장애인의 날과 가족의 달을 맞아 스스로에게 묻는다. 필자가 골목길에서 누렸던 유년의 즐거움이, 지금 부산의 누군가에게는 장애라는 이유로 차단되어 있지는 않은가. 즐거움은 특권이 아니라 보편적 권리이며, 그 권리는 누구에게나 공정해야 한다. 한때 함께 꿈꿨던 ‘달팽이 놀이터’의 가치가 부산의 지형적 특성을 살린 통합 공간으로 부활하여, 모든 시민 가족의 즐거움으로 자리매김하길 간절히 기대한다.
2026-05-13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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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해공항과 가덕신공항의 공존이 필요하다
언제나 4월이면 짭잘이 토마토 수확하는 것을 보면서 한 해의 농사를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게 도와준 땅과 하늘에 감사한다. 김해의 비옥한 땅은 토마토를 살찌우고 따스한 햇살은 토마토를 빛나게 한다. 게다가 김해국제공항 주변에는 나쁘게 보면 항공기 소음이지만 좋게 생각하면 토마토를 춤추게 하는 항공기 음악소리도 꾸준하다. 오랜기간 김해공항 소음대책위원회 위원과 주민협의회장을 맡아보니 어느새 항공기 소음도 토마토 농사와 함께하는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김해공항은 우리나라에서 인천국제공항 다음으로 국제선이 많고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어 지난해 국제여객이 1000만 명을 넘어섰다. 농가에 일손을 돕는 베트남이나 우즈베키스탄 인력도 김해공항으로 오고, 수많은 관광객도 김해공항으로 오고 있기에 지역과 국가 차원에서 김해공항이 성장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덕신공항이 건설되면 지금의 김해공항은 어떤 역할을 하게 될 것인가? 일각에서는 가덕신공항은 국제선을 맡고, 김해공항에는 국내선만 남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소음이 줄어든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70여 년 동안 김해공항의 성장과 함께해 온 지역민의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크다. 2001년 인천공항 개항 이후 국제선 기능이 인천공항으로 집중되며 동남권 주민들은 국제선을 이용하기 위해 장거리 이동과 시간·비용 부담을 감수해 온 경험이 있어서 더욱 그렇다.
지금은 일본·중국 등 단거리 해외노선은 김해공항을 통해 이용할 수 있지만, 비교적 먼 거리에 위치한 가덕신공항으로 국제선 기능이 이전될 경우 이러한 접근성마저 약화되고 추가적인 이동 부담이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역민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공항 간 역할 구분이 아니라, 어느 공항에서든 일관된 서비스와 편리한 이용 환경을 제공받는 일이다. 국내선과 국제선을 이분화해 운영하는 방식이 과연 지역민의 이동 편의를 높이는 방향인지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김해공항과 가덕신공항이 서로의 기능을 보완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고, 장기적으로 항공 수요 분산과 소음 완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최근 한국공항공사, 가덕도신공항건설공단, 인천국제공항공사를 합친다는 얘기가 들리고 있다. 3개 공항건설운영 기관이 통합된다면 인천에 집중된 항공 네트워크를 효율적으로 재편하고 김해공항과 향후 건설될 가덕신공항에 중장거리 국제노선을 확보해 동남권 주민들이 유럽이나 미주를 가기 위해 인천까지 이동하며 시간과 비용을 허비하지 않고 내 집 앞 공항에서 출발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를 되찾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지역민의 이동 편의성을 확보하고 지역균형발전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서 통합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통합 관리 체계에서는 김해공항과 가덕신공항이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김해공항은 단거리와 비즈니스 특화로, 가덕신공항은 중장거리 대형 여객 및 물류 특화로 역할을 분담하는 등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정부에서 추진하는 가덕신공항 건설의 성공을 바라는 만큼 김해공항의 발전도 함께 바라며, 두 공항의 공존을 기원한다.
2026-05-10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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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부산권 조선해양기술 R&D 허브, 더는 미룰 수 없다
최근 북극항로와 미 함정 MRO 시장 참여 관련 부산권의 중심적 역할에 대하여 다양한 의견들이 매체를 통해 보도되고 있다. 필자는 지난해 11월 국회에서 통과된 ‘부산 해양수도 이전기관 지원에 관란 특별법(이하 해양수도 특별법)’과 지난해 12월 부산으로 이전한 해양수산부의 역할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북극항로와 해양수도 그리고 해양방위기술 시대를 맞아 부산권이 해야 되는 일에 대해 피력하고자 한다.
올해 1월 1일 해수부가 부산청사에서 본격적인 업무를 개시한 것은 단순히 중앙행정기관이 이전된 의미를 훌쩍 넘어선다. 해수부는 부산 이전과 함께 북극항로추진본부를 새롭게 출범시켰고, 하반기에는 부산~로테르담 북극항로 시범운항을 추진하는 등 쇄빙선 건조비용 지원, 항만시설사용료 감면 등 다양한 인센티브 제도를 함께 제시하였다. 필자가 보기에 우리 역사상 유례 없는 정부부처의 지방 이전과 북극항로 정책은 미국의 1960년대 ‘달착륙 프로젝트’에 비견될 획기적인 국가정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책 방향을 지속 가능한 확고한 동력으로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필자는 이를 위해서 부산권에서 해수부를 강력한 정책 축으로 하여 R&D-기술-정책-산업이 하나로 결합된 거점 모델의 적용을 제안한다. 부산은 북극항로와 해양방위기술을 화두로 해 조선해양 분야 R&D와 기술·산업이 타 지역에 비해 상당한 수준으로 확보되어 있고, 해수부의 이전과 해양수도 특별법으로 국가정책 및 금융부문이 획기적으로 강화되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안이다.
북극항로는 단순한 신규 항로 개척이 아닌 대한민국 해양물류 체계의 재편을 요구하는 국가 메가 프로젝트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미 부산항만공사, 한국해양수산개발원, 극지연구소,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 4개 기관은 올해 2월 친환경 북극항로 업무 협의체를 결성해 관련 기관간 협력을 천명한 바 있다. 실무적으로 이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부산권을 중심으로 단기적으로는 북극항로 시범운항에 대한 기술지원과 데이터 플랫폼을 구축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상업운항 핵심기술과 핵심기자재의 자립이 관건이다.
부산권의 또 다른 핵심 역할은 미 함정 MRO 시장 참여이며, 크게 보면 해양방위기술 문제이다. MRO는 유지·보수·정비를 의미하는데, 최근 HJ중공업이 미 함정에 대한 MRO사업을 진행 중에 있으며, 정부 예산으로 부산권 중소중견 조선소를 기반으로 한 ‘함정 MRO 특화거점’ 구축사업이 착수된 바 있다. 아울러 부산 가덕도 천성항 인근에 함정 접안·정비를 할 수 있는 환경과 단지를 조성하고자 하는 계획이 진행 중에 있다. 그러나 설계 등 지식 기반이 부재해 자칫 사상누각이 될 수 있어 전문가들의 우려 목소리가 높다. 따라서 국내 해양방위기술의 질적 수준을 높일 수 있는 연구개발 인프라를 기반으로 한 부산권에 해양방위기술 R&D 허브 전략 추진이 요구된다. 북극항로와 해양방위기술 관련 핵심연구시설 구축은 부산권에 클러스터화를 추진해 집적효과를 봐야 한다.
실무적으로는 위의 국가 전략과제를 안정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권역 내 기관 간의 ‘개방형 혁신 생태계’로 재편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목구멍이 포도청’이 되어 정부사업 수주만을 위해서 기관들이 무지성으로 경쟁하는 방식으로는 국가의 대사를 중장기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부산권에는 조선해양 유관 대학이 국내에서 가장 밀집한 도시인 만큼 국가적으로 필요한 인재 양성의 보고가 될 수 있고, 연구개발·기술·산업의 연계 생태계를 구축한다면 최고 수준의 글로벌 리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이 모든 것이 부산만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고, 각 지자체와 전략적으로 협력해 목포-여수-창원-부산-울산으로 이어지는 상생 가능한 초광역권 조선해양 혁신클러스터를 확대 조성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으로는 이번 논의에 따라 부산권만의 발전이 아니라 국가의 지속 가능한 혁신적인 개조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이러한 방향으로 한 걸음씩 나아간다면 자칫 망국의 길로 치달을 수 있는 수도권 일극체제의 극복이 먼 미래의 얘기가 아닐 것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하나씩 실행하는 것이 첫 출발점이 될 것이다.
2026-05-10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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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정량 평가의 시대는 끝났다
얼마 전 편입학 서류를 검토할 기회가 있었다. 지원자들의 학점은 하나같이 4.5에 가까웠고, 지원 동기와 학업 계획서는 마치 같은 틀에서 찍어낸 듯 구성과 문체가 엇비슷했다. 어딘가 매끄럽지만, 어딘가 공허한 그 문장들 앞에서, 나는 우리가 사람을 평가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AI가 다듬어준 문서를 평가하고 있는 것인지 끝내 확신하지 못한 채 서류를 덮었다.
AI 기술이 일상과 업무 현장을 빠르게 재편하고 있다. 법률 문서 작성, 의학적 진단 보조, 코드 작성, 논문 초안까지 AI가 수행하는 시대에, 많은 직장인의 실질적인 업무는 AI가 생산한 결과물을 검토하고 판단하는 일로 옮겨가고 있다. 지적 노동의 무게중심이 ‘생산’에서 ‘판단’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 변화는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 우리가 사람을 평가하는 방식은 과연 사람을 평가하고 있는가.
대학 현장은 이 질문의 현실성을 잘 보여준다. 지난해 서울 소재 어느 대학에서는 600명 규모 중간고사에서 AI를 활용한 대규모 부정행위 정황이 적발됐고, 수강생 익명 투표에서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AI로 시험을 쳤다’고 답했다. 대학생 대상 설문에서도 10명 중 7명이 AI를 활용한다고 답했으며, 일부는 “AI 탐지에 걸리지 않게 만들어 달라”고 지시한 뒤 과제를 제출한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그 결과물에 매긴 점수가 과연 학생의 무엇을 측정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정량의 세계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다. 수능은 객관식 수치로 모든 것을 가르고, 취업 시장에서는 어학 성적과 학점이 서류 통과의 열쇠다. 교수의 역량은 논문 편수와 피인용 지수로, 교사의 역량은 학생 성취도 수치로 환산된다. 정성 평가를 도입했다는 대학기관평가나 교원업적평가조차 실상은 항목별 배점과 등급 기준표로 정교하게 수치화 된다. 형식은 바뀌었지만, 평가의 철학은 바뀌지 않은 셈이다.
그렇다면 정성 평가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는 오랫동안 하나의 준거가 되어 왔다. 단순히 주관식이라는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학생이 하나의 철학적 명제 앞에서 스스로 사유하고 논증하는 과정 자체를 평가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최근 주목받는 포트폴리오 평가나 프로젝트 기반 학습도 같은 맥락이다. 정해진 답을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찾아내는가가 아니라, 불확실한 문제 앞에서 어떻게 사고하고, 협력하고, 의미를 만들어내는가를 본다. 이것이야말로 AI가 대신할 수 없는, 그리고 AI 시대에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인간의 역량이다.
여기서 한 가지 역설이 생긴다. 정성 평가의 필요성을 가장 강하게 제기하는 것이 바로 AI라는 사실이다. AI가 점수를 만들어내는 시대에 점수는 더 이상 사람의 것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AI의 등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이제 인간을 인간답게 평가하라는 요청일 수 있다. AI가 흉내 낼 수 없는 것, 즉 맥락을 읽는 감각,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공감, 윤리적 판단의 무게를 감당하는 책임감, 그것을 평가의 중심에 놓아야 할 때가 왔다.
정성 평가가 뿌리내리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전문가 집단과 제도적 기관에 대한 신뢰, 즉 사회적 자본을 충분히 축적하지 못했다. 입시 비리, 채용 청탁, 논문 표절. 공정해야 할 평가의 자리에서 반복된 이 사건들은 “사람이 개입하면 부정이 생긴다”는 집단적 학습을 사회 깊숙이 새겨 놓았고, 그 불신이 우리를 정량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왔다. 수능이 바칼로레아식 논술 체제로 전환되지 못하는 것도 이 구조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정성 평가로의 전환은 평가 방식만의 문제가 아니라, 무너진 신뢰를 복원하는 사회적 과제와 맞닿아 있다. 그 첫걸음은 외부에서 강제될 수 없다. 교수, 교사, 의사, 법조인 등 전문가 집단 스스로가 엄격한 윤리 기준을 세우고 자정의 선례를 쌓아가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평가자가 신뢰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정성 평가는 공정성의 대안이 아니라 또 다른 특권의 통로로 전락할 뿐이다.
AI가 점수를 대신 만들어주는 시대에, 점수로 사람을 가르는 일은 이미 시효를 다했다. 정량 평가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우리가 묻지 않으면 안 될 질문은 단 하나다. 그 이후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2026-05-06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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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지방선거, 선거보도의 패러다임 전환할 때
6월 3일 실시되는 지방선거가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지역의 일꾼을 뽑는 지방선거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근간이지만, 역설적으로 대선이나 총선에 비해 유권자의 관심도가 낮고 정보의 비대칭성이 심각하다. 이 지점에서 언론의 역할은 어느 때보다 막중하다. 하지만 언론의 선거보도가 의제 설정, 유권자의 알 권리 충족, 권력 감시, 정치 참여 유도 같은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이를 통해서 유권자에게 민주주의의 나침반이 되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선뜻 긍정하기 어렵다.
선거 국면에서 언론은 단순한 정보 전달자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미디어 선거 시대에 유권자는 언론이 설정한 의제를 통해 후보자를 인식하고 정치적 우선순위를 판단한다. 이렇게 언론은 유권자가 정치적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인지적 지도를 그려주는 역할을 한다. 특히 지역 밀착형 공약이 중요한 지방선거에서 언론의 보도는 부적격 후보를 걸러내는 필수적인 여과 장치로 기능한다.
하지만 우리 언론 선거보도의 현주소를 보면 여전히 구태의연한 관행으로 여러 면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가장 고질적인 문제는 여론조사 결과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마식 보도 경향이다. 후보자의 공약보다는 지지율의 미세한 등락에 천착한 승리지상주의식 보도가 지면과 화면을 가득 채운다.
여기에 후보자의 정치적 수사를 직접 받아 그대로 옮겨 적는 따옴표 보도도 성행한다. 후보들 간의 비방과 폭로를 검증 없이 받아쓰는 행태는 정치를 불신과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유권자의 확증 편향을 심화시켜서 결과적으로 정당과 후보자의 정책은 실종되고 진영 논리만 남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6·3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언론이 관행에서 벗어나 선거보도의 패러다임을 전환하기 위한 세 가지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이슈 중심 보도로의 전환이다. 지역의 현안과 난제가 무엇인지 언론이 먼저 발굴하는 의제 설정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예컨대 지역 10대 의제를 제시하고, 후보들에게 해법을 묻는 방식의 선거보도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 언론이 유권자들을 대신하여 4년 후 지역의 청사진을 먼저 그려 제시해야 한다. 후보들 간의 단순한 지지율 비교 보도가 아니라 후보별 공약을 비교하여 현실성과 예산 확보 가능성을 데이터로 증명하는 분석 보도가 우선되어야 한다.
둘째, 후보자 자질과 공약의 검증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 언론은 선거 국면에서 허무맹랑한 주장이나 흑색선전이 유권자를 현혹하지 않도록 후보자의 자질을 이력 분석을 통해 다각도로 검증하여야 한다. 후보자의 주장과 발언은 직접 인용을 지양하고, 사실 확인 과정을 거친 후 중립적인 표현으로 보도해야 한다. 공약 검증은 단순 팩트체크를 넘어 근거를 제시하는 해석적 보도를 통해서 공익에 부합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유권자가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를 위해 해당분야 취재원을 적극 발굴하여 각계 각층의 전문가의 견해가 반영되도록 하여야 한다.
셋째, 사후 검증의 상설화다. 선거 시기에만 집중하는 반짝 보도 관행을 버려야 한다. 선거 이후 당선인의 공약 이행 여부나 당선인의 행보를 추적하는 연속적 감시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선거 공약이 실제 예산 편성과 조례 제정으로 이어지는지 지속적인 추적 보도를 통해서 선거보도의 시계를 선거 당일 이후로 확장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 유권자가 투표의 효능감을 느끼고 선거 참여 의욕을 가질 수 있도록 언론이 노력해야 한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축제이자 학습의 장이다. 선거를 대하는 언론의 태도가 단순한 관찰자나 메신저에 머문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유권자에게 돌아간다. 언론이 선거보도의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서 대의민주주의의 나침반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2026-05-03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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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부산이 낳은 평화교육 선구자, 이경태를 기억하다
1911년 지금의 부산 구포에서 태어난 이경태(李慶泰). 가정형편이 어려워 서울로 이주하던 가운데 8살 때 눈앞에서 3·1운동을 목격했고, 중학생 때는 원산항에서 일본으로 실려 가는 수많은 소 떼를 보며 조선이 힘을 기르려면 교육밖에 없다고 다짐했던 소년은 이후 오사카에서 재일동포 교육의 큰 등대가 되었다.
고베에서 해방을 맞이한 조규훈(曺圭訓)은 성공한 실업가였다. 그는 언젠가는 꼭 돌아갈 고국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 남게 된 조선인을 위한 학교 설립을 위해 교육전문가를 수소문하여 이경태를 찾아낸다.
두 사람은 징용되어 온 조선인 젊은이들과 함께 백두동지회(白頭同志會)를 정식으로 설립하고 1946년 3월 조선건국공업학교와 조선건국고등여학교을 창학한다. “해방 직후에 학생 200명, 교직원 16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본 학원을 만들었다는 것도 그야말로 참말로 36년간 일제 압박하에 있다가 해방의 선물로 된 거지.” 법학을 전공하고 일본에서 정규학교 교사 경험이 있던 그는 처음부터 일본 정부의 정식 인가를 목표로 했다. 후대를 우리 손으로, 일본인보다 나은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일본학교와 동등한 자격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 결과 1948년 일본 문부성의 조선인 학교 폐쇄라는 부당한 과정에서도 1949년 정규사립학교로 인가받는다. 1985년 금강학원이 인가받기까지 40년간 백두학원은 조선학교와 재일한국학교를 아울러 유일하게 대학 진학이 가능한 학교였다. 졸업생 중 1기부터 20기까지만 해도 박사학위 취득자가 23명에 달한다.
이경태는 새로운 시대에 맞춰 과거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담아 어떠한 인재를 육성할 것인가에 대한 교육 이념을 교훈으로 만들었다. 자주(自主), 상애(相愛), 근검(勤儉), 정상(精詳), 강건(剛健)은 놀랍게도 한국의 2022 개정 교육과정이 추구하는 인간상과 일치한다. 80년이 지난 지금도 미래 교육의 방향으로 손색이 없다.
무엇보다 이경태의 진정한 위대함은 평화교육에 있다. 1948년 남북 각각의 정부 수립, 1950년 한국전쟁으로 재일동포 사회마저 갈라섰을 때도 백두학원은 유일한 남북공학이었다. “조국은 남이고 북이고 내 조국이며, 장래 통일이 될 것을 어찌하여 우리가 두 동강으로 나눌 수 있는가!” 분단 이후 태극기를 다시 올리지 않은 것은 조국 통일을 염원하는 증거였다. 만약 조국이 통일되었다면 그 어느 곳보다도 높이 국기를 게양하고 그 누구보다도 크게 국가를 불렀을 것이다. 한국에서 멸공, 반공을 외치던 시절, 이경태는 자주·평화·통일교육을 실천했다. 한국에서 통일교육이 시작된 것은 1972년이다.
2015년 부산MBC는 백두학원 전통예술부의 활동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이바라키의 여름’을 제작, 호평을 받았다. 최근 나라(奈良)에서의 한일정상회담 중 재일동포 간담 행사에서 백두학원 전통예술부가 문화 공연을 펼쳤다. 이경태가 창학한 백두학원은 지금도 한일 문화 교류의 주역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경태는 조총련계로 왜곡됐다. 필자의 학술 연구를 통해 그는 자주·평화·통일이라는 명확한 국가관 아래 교육의 자주성과 학원의 자율성에 근거해 평화교육을 실천했음이 밝혀졌다. 이러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도 관련 기록을 수정했다.
이제 우리는 바로잡는 데서 멈출 것이 아니라 그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2026년 백두학원 건학 80주년을 앞두고 부산이 먼저 나서야 한다. 부산 출신 평화교육 선구자 자이니치 이경태를 기억하고 그가 남긴 숭고한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미래세대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이자 평화의 시작이다.
2026-04-29 [1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