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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지방 자치사'에 오점 남긴 반쪽 인사권 독립
“통영시의회 의장은 배도수를 지방공무원법 위반 혐의로 관할 수사기관에 수사의뢰하시기 바랍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의 단초가 된 ‘12·3 비상계엄’ 선포 일주일 전, 행정안전부가 공문을 통해 경남 통영시에 요구한 내용이다. 대통령 탄핵 사태가 대한민국 헌정사의 오점이라면 이는 지방 자치사에 기록될 오점이다.
시작은 넉 달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통영시는 7월 9·10일 자 인사에서 4급 이하 공무원 261명에 대한 승진·전보를 단행했다. 여기엔 시의회 사무국 소속 5급 1명, 6급 2명, 7명 1명에 대한 집행부 파견근무도 포함됐다. 집행부 자원과 맞교환하는 ‘상호 파견’ 형태로 기간은 1년이다.
그런데 이 중 6급 A 씨 등 2명은 집행부 근무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지방공무원 임용령(제27조의5 제4항)은 ‘인사교류를 하는 경우 본인 동의나 신청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앞선 행안부 질의를 통해 위법 소지를 인지한 사무국은 인사권자인 배도수 의장에게 ‘불가’ 의견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배 의장은 강행을 요구했고, 담당 팀장과 국장은 위법한 지시를 따를 수 없다며 집행부에 보낼 공문 결재를 거부했다. 그러자 배 의장은 직권으로 A 씨를 포함한 사무국 직원 4명 파견을 통보했다.
행안부는 “배도수 의장은 위법한 사실을 알고도 1인 단독으로 수기 결재하고 강제로 인사교류를 추진해 인사행정 신뢰를 저하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임용권자라는 직위를 이용해 고의로 인사발령을 하는 등 지방공무원법을 위반하였으므로 관련기관 수사가 필요하다”며 이례적으로 수사 의뢰까지 요구했다. 고의성이 다분한 만큼 형사적 책임도 따져봐야 한다는 의미다.
행안부에 앞서 경남도소청심사위원회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소청심사는 공무원 처분에 대해 부당함을 다투는 절차다. 소청위는 두 달여 심의 끝에 A 씨가 제기한 ‘파견발령 처분 취소 청구’를 인용했다. 이에 따라 A 씨 파견 명령이 포함된 인사명령은 무효화 됐고, A 씨는 지난달 29일 시의회 사무국으로 복귀했다.
이를 두고 예견된 사태라는 지적이 나온다. 2022년 1월 13일 시행된 지방자치법 전부 개정안에 따라 지방의회 의장은 의회 사무국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다. 전반기 의장을 지낸 김미옥 의원이 이를 근거로 자체 승진 인사를 예고하자 통영시가 발끈했다. 극단으로 치닫던 갈등은 지역구 국회의원 중재로 겨우 일단락됐다.
하지만 불과 1년 만인 올해 초 인사를 앞두고 비슷한 사태가 반복되며 통영시와 시의회 관계는 다시 살얼음판으로 변했다. 이 와중에 시장과 관계가 돈독한 배 의원이 후반기 의장에 당선되면서 사달이 났다. 배 의장은 의장단 선거 직후 A 씨 등을 전임 의장 측근이라며 보복 인사를 예고하더니 취임 직후 실행에 옮기는 무리수를 뒀다.
결국 설익은 인사권 독립이 불러온 후유증인 셈이다. 의장이 쥔 인사권은 사실 ‘예산편성권’과 ‘조직구성권’이 없는 반쪽짜리다. 인사권 독립은커녕 상호 감시와 견제조차 불가능한 구조다. 집행부와 의회 간 갈등 여파는 오롯이 시민이 떠안아야 한다. 지방자치 의미와 기능을 살리면서 부작용을 최소화할 보완책 마련을 서두르지 않는다면 일련의 사태는 두고두고 반복될 수밖에 없다.
2024-12-16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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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K-민주주의의 명령이다 "싹 다 잡아 들여!"
국민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대통령을 위한 자기 방어, 자기 연민의 분풀이식 비상계엄이었다. 5000만 국민의 일상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고, 공들여 쌓아 올린 한국의 위상과 경제도 순식간에 무너졌다. 언제 또 총칼과 군홧발에 소중한 사람을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함과 하룻밤 새 전쟁 희생양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오늘도 밤잠을 이룰 수 없게 하는데 대통령은 그저 ‘불편’을 끼쳐 송구스럽다고 했다. 북한 오물풍선 원점타격 지시로 국지전 유도 주장까지 나오는 마당에, ‘파리 목숨’을 붙들고 불안해 하는 국민들을 향해 많이 놀랐냐고 한다.
아울러 최고 사형까지 가능한 중대범죄 혐의자가 자신의 거취는 법적 권한이 있는 기관이 아닌 제 가족, ‘우리 당’이 결정하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국민이 ‘오케이’ 한 적도, 법이 허락한 적도 없는데 국민의힘 당 대표는 자신이 대통령 권리라도 부여 받은 양 ‘질서 있는 대통령 조기 퇴진’ 운운하며 그를 국정에서 배제하겠다고 했다. 정작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직무 배제를 할 수 있는 국회 탄핵 표결에선 꽁무니를 빼놓고, 카메라 앞에선 초법적 조치를 궤변으로 늘어놓으며 “오로지 국민만을 생각하겠다” 했다.
지난 주말 사이 펼쳐진 한 편의 국민 우롱쇼, 국민 기만쇼였다. 국민을 바보로 아는 것인가?
이렇게 국민은 대통령으로부터, 국민 대신 당의 이익을 택한 이들로부터 버려졌지만 서로가 서로를 버리지는 않았다. 시민들은 변곡점마다 국회 앞으로,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지난 3일 밤 비상계엄 직후 국회 앞에 모인 이들은 장갑차를 막아 세웠고, 누군가는 아들 같은 군인을 끌어안아 총을 막기도 했다. 언론마저 장악될 위기에서도 시민들은 현장을 생중계하며 SNS로 급박한 상황을 전했다.
이후 펼쳐진 탄핵 집회에서도 시민들은 이 블랙 코미디 같은 상황을 ‘유쾌’ 버전으로 맞받았다. 지난 주말 1020 젊은 세대로 가득했던 부산 서면 집회도 로제의 ‘아파트’뿐 아니라 윤수일의 ‘아파트’까지 나오며 전 세대를 아우르는 콘서트장으로 변했다. 이들은 쉽게 꺼지는 촛불 대신 끝까지 꺼지지 않을 아이돌 응원봉을 들고 나왔다. 집회에 못 나오는 이들은 커피 선결제로 마음을 보탰다. 온라인과 SNS 상에서는 ‘12·3 취했나 봄’(서울의 봄 패러디)과 “나 사랑 때문에 OO까지 해봤다?!-계엄” 등 각종 밈(온라인 유행 콘텐츠)이 돌며 풍자와 해학으로 연대를 표했다.
이에 비상계엄 초기 “K팝과 독재자, 한국의 두 얼굴”이라는 시선으로 한국을 바라봤던 외신들도 점차 한국의 K-민주주의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저자이자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제임스 로빈슨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한국의 비상계엄 사태와 관련, “포용적 제도를 착취적 방향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언제나 있다. 전혀 놀랍지 않다”면서 비상계엄 선포 이후의 철회 과정에 대해 “한국 사회가 민주주의를 지켜내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 굉장히 고무적이며 한국 민주주의의 재확인”이라고 평가했다.
K-민주주의에 화답해 이제 검·경 사정기관이 K-법치주의를 보여줄 때다. 내란, 군형사상 반란, 직권 남용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처벌을 요구한다.
대통령이 주요 정치인 체포를 지시하며 한 말이다.
"싹 다 잡아 들여."
2024-12-09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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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다시, 에어부산이다
시민공감 등 시민단체들이 2일 부산시의회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의 결단을 재차 촉구했다. 앞서 지역 상공계가 이례적으로 입장문을 발표한 것은 물론 가덕신공항추진범시민운동본부와 시민운동본부 등 시민단체들도 성명서를 잇따라 내고 정부 등을 규탄했다.
이는 국가 정책으로 인해 부산이 키운 지역 우량 기업을 눈앞에서 놓치게 생겼기 때문이다. 단순히 기업 하나를 잃는 데 그치지 않는다. 동남권 관문공항으로서 지역 경제 중추 역할을 할 가덕신공항 운영의 한 축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에어부산 얘기다.
지역민들의 ‘에어부산 지키기’에는 별다른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 지역민들이 함께 만든 지역 기업이기 때문이다. 부산시와 지역 기업들이 힘을 합쳐 2007년 공식 출범한 (주)부산국제항공을 모태로 한 에어부산은 지난해까지 10년 연속 김해공항 전체 이용객 점유율 1위를 유지하며 지역민과 호흡하는 지역의 상징이다. 모기업의 기업결합 이슈로 여러 위기를 겪으면서도 지난 3분기 매출액 2502억 원을 기록하며 역대 최대 실적(2305억 원)을 가뿐하게 뛰어넘었다.
이뿐만 아니다. 최근 부산상의가 발표한 ‘2023년 매출액 기준 전국 1000대 기업 중 부산기업 현황 보고서’에서 에어부산은 2022년 1202위에서 지난해 571위로 껑충 뛰어오르며 1000대 기업에 재진입하는 성과를 거뒀다.
지역 거점 항공사로서 역량이 입증된 에어부산이 가덕신공항 거점 항공사의 적임자로 꼽힌 것은 당연지사다. 지역 사회가 에어부산의 대내외 행보에 주목하고 에어부산의 ‘분리매각’을 천명한 것은 지역 공항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지역 항공사가 지역을 거점으로 관련 산업을 확장시킬 것이라는 믿음 덕분이다.
문제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기업 결합에 근본적인 책임이 있는 국토부와 산업은행이 말바꾸기 행태를 지속한 데 있다. 2020년 두 회사의 기업 결합을 추진하면서 국토부는 통합 LCC 거점을 지방 공항으로 하겠다고 밝혔고, 산은 역시 지방공항을 기반으로 한 제2 허브 구축 등을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지역 여론을 잠재웠다. 하지만 국토부와 산은은 약속을 저버리고 “민간 기업이 판단할 문제”라며 대한항공에 책임을 떠넘겼다.
득을 본 것은 대한항공이다. 대한항공은 국내 유일 대형항공사로서 독점적인 지위를 얻는 데 그치지 않고 진에어·에어부산·에어서울을 합친 통합 LCC 출범으로 국내 LCC 1위도 꿰차게 생겼다. 실제로 국토교통부 항공 통계에 따르면 지난 1~10월 국제선 기준 3사가 운송한 여객 수는 1058만 명으로, 아시아나항공(976만 명) 여객 수는 물론 LCC 1위인 제주항공(714만 명)과 2위 티웨이항공(544만 명)을 크게 웃돈다.
국가기간산업 경쟁력 강화 명분으로 8000억 원에 달하는 공적자금이 투입된 대한항공이 일개 ‘민간 기업’인가. 정부 정책 결정이 오너 일가의 이익을 대변해서는 안 될 말이다. 정부는 지금부터라도 당초 정책 방향대로 통합 LCC 거점을 지방 공항으로 하고 지방 공항을 기반으로 한 제2 허브 구축에 나서야 한다. 국가균형발전 차원에서 가덕신공항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대명제를 잊어선 안 된다. 지역 국회의원들은 물론 부산시, 부산시의회, 지역 상공계 역시 정부를 적극 설득하는 한편 대한항공이 에어부산 분리매각 등 전향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전방위적인 지원에 나서야 한다. 아직 시간은 남았다. 다시, 에어부산이다.
2024-12-0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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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이제 "국비 필요 없다"는 오륙도선… 작년에는 왜?
국회의 2025년도 예산안 심사가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부산 현안 사업 국비 확보를 위한 움직임이 분주하다. 부산지역 최대 사업인 가덕신공항 건설에서 해마다 반복되는 ‘하수관로 교체’까지 다양한 지역 현안이 국비 확보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올해 예산심사에서는 내년 국비 확보 대상에서 제외돼 눈길을 끄는 사업도 있다. 도시철도 오륙도선 건설 예산이 그 주인공이다.
부산시 남구 경성대·부경대역에서 이기대 어귀삼거리를 연결하는 도시철도 오륙도선 건설은 우여곡절이 많은 사업이다. 총연장 1.9㎞의 짧은 노선인 오륙도선은 전선 없이 일반도로 위를 달리는 ‘무가선 저상트램’의 실증 사업으로 추진됐다. 저상트램 기술 확보를 위한 실증 사업을 부산에 유치하는 방식으로 국비를 지원받겠다는 전략이었다.
오륙도선 건설은 그러나 사업비 증액으로 지난해 2월부터 타당성 재조사를 받고 있다. 내년 2월 타당성 재조사가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정치권 일각에서는 ‘사업 무산’ 가능성도 제기된다. 지역 정치권을 중심으로 부산시가 이 지역 교통 대책으로 오륙도선 대신 C베이~파크선을 선택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를 위해 오륙도선은 타당성 재조사 탈락 수순을 밟고 있다는 주장이다.
부산시는 공식적으로는 오륙도선 추진 의지를 유지하고 있다. 부산시는 최근 국민의힘 부산 의원들과의 예산정책협의회에서도 ‘도시철도 오륙도선 건설을 위한 타당성 재조사 통과’를 건의했다. 그러나 부산시는 국회 예산심사 과정에서 오륙도선 건설 관련 국비를 요청하지 않았다. 부산시 관계자는 2025년 국비 확보 대상 사업에 오륙도선이 제외된 데 대해 “내년 2월 타당성 재조사를 통과한다고 해도 이후 진행되는 설계비 등은 사업 추진 기관(철도기술연구원)이 확보한 자체 예산으로 충당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업이 계속 추진된다고 해도 내년에 국비 지원은 필요 없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부산시의 과거 행보와 어긋난다. 부산시는 2023년 12월 ‘주요 역점사업 정부예산안 대거 반영’ 보도자료를 통해 오륙도선 국비 확보 성과를 자랑했다. “도심 교통혼잡을 해소하고 대중교통 친화도시로 거듭나기 위한 (차원으로)도시철도 오륙도선 건설(30억 원) 등이 (정부 예산안에)반영됐다”는 설명이었다.
오륙도선은 지난해에도 타당성 재조사를 받고 있었고 재조사가 마무리되는 시점은 예측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하지만 부산시는 국회에 오륙도선 건설사업 국비를 요청했고 지역 국회의원들의 노력으로 국비를 확보했다. 타당성 재조사가 한창이던 지난해에는 필요하다던 다음해 국비가 재조사가 마무리될 것으로 올해는 필요없다는 게 부산시의 설명이다. 부산시는 2022년 연말에도 2023년 국비확보 보도자료를 통해 오륙도선 국비 확보 사실을 홍보했다.
오륙도선 국비는 타당성 재조사 영향으로 2년 연속 ‘불용’됐다. “내년 국비가 필요없다”는 부산시의 설명이 맞다면 지난 2년간 부산시는 필요 없는 국비를 국회를 통해 확보하고 홍보에 열을 올린 셈이 된다.
도시철도 건설은 건설비 상승, 교통환경 변화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변경될 수 있다. 그러나 변경이 불가피하다면 시민들에게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한다. 수년간 ‘역점 사업’이라며 국비를 확보했다고 홍보하다 갑자기 ‘국비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홍보만 하고 책임은 지지 않는 행태다.
2024-11-2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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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반구대암각화가 어디 울산만의 유산인가
“시장님은 2022년 당선인 시절 ‘문화재청이 전향적으로 안 나선다면 암각화 문제에서 발을 빼겠다. 암각화 보존 안 된다고 울산이 어떻게 되는 거 아니다’고 하셨는데 협상용으로 이해하면 되겠죠?”-더불어민주당 김성회 의원
“(세계유산 등재와 관련해) 지금까지 울산시가 문화재청에 구걸하듯 했습니다. (문화재청이) 여러 조건을 걸어서 ‘수위 낮춰라. 보존 계획 세워라’ 했는데… 문화재청에서 거꾸로 ‘우리가 등재할테니 너희들 물이 부족하다면 물을 확보해주겠다’ 이렇게 나와야 할 부분을 (중략) 업무 분장 확실히 하자는 겁니다.”-김두겸 울산시장
지난달 21일 울산시 국정감사에서 ‘자맥질 국보’ 반구대암각화가 도마 위에 올랐다. 7분간 이어진 문답에서 문화재청과 울산시의 불협화음이 튀어나왔다. 물길에 차오르는 침적물 같은 두 기관의 오랜 앙금이 김 시장 언성에서 느껴졌다.
반구대암각화는 올해 초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에 등재 신청서를 냈다. 국가유산청(옛 문화재청)이 ‘직권’으로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린 지 14년 만이다. 근데 이제 와 업무분장이라니. 무슨 말일까. 세계유산 등재는 굳이 약칭 세계유산법을 거론하지 않아도 국가유산청을 컨트롤타워로 지자체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반구대암각화가 사연댐 상류에서 60년 가까이 물고문을 당하는 상황에서다. 반구대 암각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각계각층의 지난한 노력을 김 시장이 모를 리 없다.
김 시장의 본심은 암각화 보존과 직결된 물 문제 해결에 있다. 반구대암각화 보존을 위해 식수원인 사연댐 수위를 조절할 수문 설치 작업은 속도를 내고 있으나, 맑은 물(9만t) 부족에 대한 정부 해법은 턱 없이 모자라고 그것마저 지지부진하다. 당연히 울산 입장에선 국가유산청이 남의 집 제사보듯 감 놔라, 배 놔라 한다는 불만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국보 반구대암각화가 어디 울산만의 유산인가. 정부가 국가적 과제라는 인식을 갖고 한층 진일보한 해법을 명확하게 제시해야 한다. 물 문제 사슬에 속한 지자체들이 더는 딴소리를 못 하도록. 암각화 보존과 맑은 물 공급은 순서의 문제도, 양자택일의 문제도 아니다. 둘 다 필요하다.
울산시 역시 국가유산청과 정부를 상대로 물 문제 해결을 강하게 지속해서 요구해야 한다. 자칫 울산시마저 방기한다는 인상을 준다면 이는 암각화 보존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다. “(피감기관) 업무보고에 반구대암각화에 대한 언급이 없어 아쉽다”는 김성회 의원 말은 민선 8기 들어 엑스트라로 전락한 반구대암각화의 곤궁한 처지를 일깨운다. 김 시장이 2022년 7월 취임 후 지금까지 한 40여 차례 기자회견 중 반구대암각화를 우대한 기억이 없다. 내년도 시정 향방을 가늠하는 울산시 예산안 발표에서도 이렇다 할 암각화 사업은 언급하지 않았다. 관심이 사그라든 탓인지 반구대암각화 방문객 수는 2022년 5만 4286명에서 지난해 4만 8223명, 올해는 3분기까지 4만 4850명으로 매년 줄고 있다.
반구대암각화는 “세계사적으로, 포경사적으로 의미가 매우 크다.” 김 시장은 박사학위 논문 ‘우리나라 고래산업의 현황과 과제-울산광역시의 사례를 중심으로(2013)’에서 반구대암각화를 자세하게 소개한다. 울산 장생포를 고래문화특구로 키운 김 시장의 정치 자산도 그 뿌리를 들여다보면 반구대암각화에서 자양분을 얻는다. 반구대암각화 보존과 세계유산 등재는 산업도시에서 나아가 문화도시 울산으로 가는 중대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2024-11-18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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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9개월이 지났다
지난 2월 정부가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발표했다. 9개월이 지났다. 전공의는 돌아오지 않았다. 교수는 개원가로 떠났다. 의대생은 수업을 거부했다. 그 사이 내년도 의대생을 뽑는 수능은 내일모레로 다가왔다. 재수생에 직장인들까지 의대 입시에 몰린다고 한다. 정작 의사국가고시 응시도 줄어 내년에 의사 배출은 급감할 전망이다. 의사를 늘리자고 시작했는데 의사는 없고 의사가 되려는 사람만 미어터진다.
필수 의료와 지역 의료를 살리겠다는 명분도 현장에서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부산 지역 수련 대학병원 전체의 하반기 전공의 지원자는 다섯 손가락도 채우지 못했다. 연간 2만 건이 넘게 수술을 하는 흉부외과에는 전국에 10여 명의 전공의만 남았다. 지난 9월에는 경남 거제의 50대 급성 복막염 환자가 수술실과 응급실 병원을 찾지 못해 ‘뺑뺑이’를 돌다가 7시간 만에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숨진 사건이 있었다.
중증 환자와 가족들의 두려움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김윤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최근 국정감사에서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중환자실에 입원한 환자의 사망률을 분석해 초과 사망자가 1700여 명이라고 밝혔다. 전공의 이탈로 시작된 의료 공백이 방치되지 않았다면 막거나 미룰 수 있었을 죽음의 숫자다. 대부분 심부전과 쇼크, 뇌 손상이나 암 환자 등 중증 환자의 진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들이다.
의정 갈등이 봉합되더라도 그 여파는 사회에 장기적인 영향을 남길 수 있다. 울산의대 박인숙 명예교수는 최근 페이스북에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이 촉발한 의료재앙 개념도’를 공개했다. 전공의 이탈, 의대생 동맹휴학으로 시작된 도미노가 의사 교육과 의료의 질을 저하시키고, 더 나아가 국가재정의 악화와 이공계 몰락, 지방 붕괴 가속화 등으로 연쇄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는 우려가 기우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의정 갈등 국면에서 의사라는 직역은 법정단체 지도부의 막말과 환자를 볼모 삼는 집단 이기주의로 민낯을 보였다. 그러나 책임을 따지자면 정부 몫이 더 무겁다. 막스 베버는 정치가 열정과 균형 감각을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뚫는 작업이라고 했다. 지금의 혼란은 역대급 균형 감각이 필요한 난제를 열정만 앞세워 송판 격파하듯 밀어붙인 결과다. 정부는 독단적이고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11일 정부와 의료계는 의대 증원 사태 이후 처음으로 한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전공의 없이 출발한 여·의·정 협의체는 연내 의미 있는 결과를 내고 국민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줄 수 있게 노력하겠다고 했다. 전공의들은 여전히 내년도 의대 증원 백지화를 주장하고 있다. 수능 다음 날인 15일에는 제적 위기에 놓인 전국 의대생들이 처음으로 총회를 갖는다.
의료 개혁은 정부의 핵심 정책인 4대 개혁 중에서도 1번이다. 시급한 과제인 이유는 국민의 생명과 건강에 직결된 문제라서다. 처음에는 국민적 지지도 받았다. 9개월이 지났다. 아직도 “과거 정권이 선거 때문에 하지 못한 일”, “어떤 저항이 있어도 반드시 완수할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면 거듭 외치는 ‘민생’이나 ‘개혁’의 메아리도 공허할 수밖에 없다.
2024-11-1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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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롯데 자이언츠를 위한 백가쟁명
지난달 28일 광주에서 KIA 타이거즈의 승리로 올해 한국시리즈가 막을 내렸다. 2017년 이후 7년 만에 정상을 탈환한 KIA는 한국 프로야구 통산 12번째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쌓았다. 같은 달 30일 미국 프로야구(MLB)의 한국시리즈 격인 월드시리즈에서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가 뉴욕에서 축배를 들었다. 다저스는 4년 만에 MLB 챔피언에 올랐으며, 1955년 이후 모두 8번 미국 야구를 호령했다. 기뻐하는 KIA와 다저스 선수들을 보며 남의 집 잔치에 기웃거리는 듯한 심경이었다.
부산 사직구장에 전시된 롯데 자이언츠의 1984년과 1992년 우승 트로피 수는 올해에도 변함이 없다. 사실 롯데 팬들은 우승 트로피를 하나 더 추가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포스트시즌에만 진출했어도 우승에 버금갈 정도로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롯데의 7년 연속 가을야구 진출 실패라는 ‘난세’가 여전하자 천하의 롯데 팬들은 개탄했다. 이들은 저마다 올 시즌 롯데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각자의 해결책을 내놓고 있다. 이쯤 되면 롯데를 위한 백가쟁명에 견줄 만하다.
부산 시민들이 롯데를 논할 때 보여주는 지식과 열정은 전문가 못지않다. 한 기관의 홍보 업무를 담당하는 A는 롯데 경기 분석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아 매번 기자에게 자신의 견해를 알리곤 한다. 그의 메시지를 읽다 보면 절로 감탄이 나온다. 그의 핵심 주장은 ‘1·2군 전력 불균형론’이다. 롯데의 선수층이 얇다 보니 주전이 부상을 입을 때마다 대체 자원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1군이 안주할 수 없도록 2군과의 주전 경쟁도 치열하게 전개돼 팀 전력을 끌어올려야 하는데, 이 또한 여의치 않다는 게 A의 판단이다.
기자의 고교 동창인 B는 올해 롯데의 가을야구 진출 가능성이 점점 희미해졌음에도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롯데의 ‘찐팬’이다. 뿐만 아니라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도 롯데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을 자주 과시하곤 했다. 그는 롯데의 정규리그 7위 마무리에 대해 ‘봄데 실패론’을 주장했다. 보통 봄에 무서운 기세를 보였던 롯데가 올해는 개막 직후 4연패에 빠졌고, 3~4월에 치른 30경기에서 꼴찌로 추락한 점을 지적한 것이다. B는 이 기간 동안 선발진의 불안정한 투구와 일부 선수들의 부상이 중위권 도약을 어렵게 했다고 분석했다.
흥미롭게도 A와 B는 공통적으로 ‘자유계약(FA) 폭망론’을 거론했다. 롯데가 2년 전 거액을 들여 FA로 영입한 노진혁, 유강남, 한현희의 부진이 롯데로서는 뼈아팠다는 게 그들의 일치된 견해다. A와 B는 또 2025년 FA 자격을 얻는 롯데 투수 김원중과 구승민에 대해 롯데가 무리해서 붙잡을 필요가 없다는, 이른바 ‘FA 선긋기론’도 펼쳤다. 이 두 선수가 롯데에 잔류한다면 좋은 일이지만, 막대한 비용을 치러야 한다면 오히려 손해라는 주장이다.
A와 B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기자가 들은 롯데의 올 시즌 분석을 모두 소개하자면 지면이 부족할 지경이다. 〈부산일보〉 롯데 담당 기자로서, 이렇게 백가쟁명식 의견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균형 잡힌 기사를 쓰는 일은 쉽지 않다. 자칫하면 섣부른 글로 비웃음을 피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 같은 현상은 롯데에 대한 팬들의 열망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롯데의 성적이 아무리 부진하더라도 팬들의 관심이 여전하니 롯데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팬들의 애정이 차디차게 식었던 2000년대 초반, 롯데의 암흑기를 돌이켜 보면 더욱 그렇다.
2024-11-04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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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피란 세대 유산' 부산 빈집, 이젠 비움의 공간으로
얼마 전 어릴 적 살던 곳으로 추억 여행을 떠났다. 유년 시절은 물론 학창 시절 대부분을 보냈던 곳이었던 만큼 발길이 닿는 곳마다 옛 추억이 아련했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법한 좁은 도로를 두고 양옆엔 지은 지 50년은 족히 된 듯한 4~5층짜리 집들이 건물 사이에 조금의 공간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듯 비집고 들어가 있었다. 구획 정리가 된 좁은 필지마다 들어선 건물은 하나같이 길쭉한 사각형이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빈집들은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집 앞에는 노인들이 나와 자리를 펴고 한적함을 달랬다.
기자가 살았던 마을은 부산의 대표적인 정책 이주 지역이었다. 마을을 떠났던 20여 년 전과 비교해보면, 놀이터가 사라지고 도로가 생긴 것 외에는 달라진 게 없었다. 그새 도시철도가 뚫렸고, 도시재생사업이 진행되기도 했다. 아파트 건립 사업이 추진되다 사업성 등을 이유로 중단됐다는 소식도 들렸다. 하지만 그렇게 다시 그곳의 시간은 멈췄다.
최근 부산의 빈집 문제를 기획 취재해 보도했다. 이 같은 개인적 경험의 발로이기도 했지만, 원도심과 정책 이주지를 중심으로 심각한 빈집 문제에 직면한 부산의 현실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빈집 문제를 취재하면서 느낀 점은 빈집 문제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골든 타임을 정부와 부산시가 이미 놓쳐버렸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제 겨우 인구 소멸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인 빈집 문제에 대해선 빈집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무허가 빈집은 제외하는 등 제대로 된 통계도 갖고 있지 않았다. 실태 파악이 제대로 돼 있지 않다 보니 빈집 문제 대응에 필요한 예산도, 대책도 턱없이 부족했다. 재정난에 시달리는 부산의 일선 지자체들은 급증하는 빈집에 속수무책이다.
부산의 빈집 문제는 우리 근현대사와 떼어놓고 얘기할 수 없다. 한국전쟁과 피란 등 굴곡진 역사를 짊어진 부산은 구릉지와 산복도로 주변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인구가 몰려들며 주거지가 형성됐다. 이는 현재 인구 소멸에 따라 빈집 문제로 부메랑이 돼 돌아오고 있다. 부산은 이러한 특수성으로 전국에서 빈집 문제가 가장 심각한 대도시가 됐다. 정부가 부산을 ‘빈집 특별재난구역’으로 지정하거나, 관련 특별법을 만들어 대응해야 한다는 한 전문가의 메시지에 정부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선제 대응의 골든 타임을 놓쳤다고 해서 마냥 두고 볼 순 없는 일이다. 급증하는 빈집이 ‘쓰나미급’ 폐해를 가져오며 부산의 도시 성장에 아킬레스건이 될 날이 머지않았기 때문이다.
빈집 문제는 난제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미래 세대를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다. 문제 해결을 위한 시작은 어찌보면 간단하다. 짧은 기간 무계획적이고 급속하게 응축됐던 역사의 공간을 이제 하나둘 비워 나가는 것이다. 인구 소멸로 더 이상 사람이 들어와 살 수 없다면, 지형이 가파르고 기반 시설이 열악해 사업성이 부족하거나 개발이 힘든 곳이라면, 빈집을 공원으로, 녹지로, 마당으로, 때론 길로 비워 나가야 한다. 한 도시재생 전문가가 오랜 시간과 경험에서 얻은 답도 그랬다. “빈집을 리모델링하기도 하고 철거해서 다양한 시설도 만들어봤지만, 결국은 누군가가 다시 들어와서 살아야 의미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2024-10-28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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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채식주의자가 불편한 사람들
왜 사람들은 흑백요리사에 열광할까? 그 이면에는 약자인 ‘흑수저’가 강자인 ‘백수저’를 이길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자리하고 있다. 흔히 ‘언더독’이라 불리는 실력 있는 무명 요리사들이 기존 사회에서 인정받는 금수저 요리사들을 이기는 이야기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서사이다.
이 스토리는 ‘다윗과 골리앗’의 서사와 매우 유사하다. 다윗과 골리앗은 전형적인 흑수저 스토리로, 인류사 최고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다. 3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끊임없이 대중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약자인 다윗이 거인 병사이자 최고 강자인 골리앗을 물리친다는 점이다. 골리앗은 사회 질서, 규범 그리고 권력을 대변하는 캐릭터이다. 다윗이라는 개인이 사회의 구조적 압박과 불합리한 규범에 도전하고 그것을 무너뜨리는 상징적인 이야기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흑백요리사와 같은 이야기에서 단순한 ‘언더독의 승리’를 넘어, 기득권에 대한 도전을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개인이 태어날 때부터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질서, 규범 그리고 제도는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을까? 여기에 대한 힌트를 찾는다면 미셀 푸코가 가장 가까이 있을 것이다. 푸코는 사람들이 의심 없이 따르는 규범이 실제로는 ‘권력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다윗은 우리에게 묻는다. ‘개인은 사회 구조의 부속품으로서 비판 없이 따라야만 하는가’라고.
얼마 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대표작인 ‘채식주의자’ 역시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와 유사한 맥락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사회적 규범과 억압된 가치관을 거부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찾으려는 약자의 투쟁을 그린다.
주인공 영혜는 한국 사회의 전통적인 가부장제와 가족 중심의 규범에 저항하며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으로 삶의 변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그녀의 선택은 가족과 사회로부터 폭력적으로 거부당한다. 그럼에도 영혜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회의 압박을 뚫고 나아간다. 이는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이면서, 동시에 개인의 목소리를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열광케한 설국열차나 오징어게임 같은 작품도 다윗과 골리앗 서사와 맞닿아 있다.
이 모든 이야기는 ‘도전’보다는 ‘변화’의 의미를 담고 있다. 변화는 ‘기존 사회의 전복’이 아니라 ‘좀 더 나은 사회로의 성장’을 의미한다. 흑수저의 열정과 도전은 기존 기득권이 지배하는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가능성을 보여주며, 사람들은 그 점에 공감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저항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사회가 소수의 의견이나 새로운 가치를 외면하거나 억압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채식주의자 등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이 익숙한 가치관과 질서를 벗어나기를 두려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시대가 AI(인공지능)로 변해가고 있는데 여전히 4비트 컴퓨터를 고집하는 것처럼 말이다.
개인이 기존 질서에 맞서는 것은 너무 힘들다. 사실 자기만의 생각을 고수하고 기존 질서를 따르는 것이 가장 쉽다. 자신과 다른 시선을 놓고 고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공동체 속에서 살고 있다. 다양한 생각과 시선이 존재하는 공동체 속에서, 기존의 권력과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시선을 함께 바라보는 노력이야말로 자유가 아닐까.
2024-10-21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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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어민의 눈물, 언제까지 남의 일일까?
“올해가 당신이 경험하는 가장 시원한 여름이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 소속 과학자 피터 칼무스가 지난해 SNS를 통해 전 세계인들에게 알린 섬뜩한 경고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한술 더 떠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 시대는 끝났다. 지구 열대화(global boiling) 시대가 도래했다”고 단언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올여름 한국을 비롯한 지구촌 곳곳은 지금껏 경험한 적 없는 불볕더위에 허덕였다. ‘역대급 폭염’ 기사는 이제 일상이 됐다. 바다는 아예 펄펄 끓었다. 해양수산부는 지난 7월 24일 올해 첫 고수온 특보를 발령한 이후 이달 2일 해제했다. 지속 기간은 무려 71일로 2017년 고수온 특보 체계가 만들어진 이후 가장 길었다.
30도를 웃도는 고수온에 어민은 역대 최악의 여름을 보냈다. 해수부 자료를 보면 지난 7월부터 이달 초까지 접수된 양식 어류 폐사 피해 신고 규모는 4850만여 마리다. 이 중 절반이 넘는 2672만 3000여 마리가 경남 앞바다에서 떼죽음했다. 여기에 멍게 4777줄, 미더덕 614줄, 피조개 374ha, 전복 60만 6000여 마리가 고수온에 녹아 내렸다. 현재까지 집계된 피해액은 594억 원 상당으로, 역대 최악이라던 지난해(1466만여 마리, 207억 원) 갑절 수준이다.
특히 멍게는 통영과 거제 앞바다에 있는 양식장 800여ha 대부분이 ‘궤멸 수준’이다. 남해안 멍게는 국내산 멍게 유통량의 70%가량을 차지한다. 통상 여름을 지나면 10~20% 정도 폐사하는데, 올해는 생존율이 10%에도 못 미칠 전망이다.
굴도 유탄을 맞았다. 굴은 딱딱한 껍데기가 알맹이를 보호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수온 변화에 둔감하다. 올해는 긴 장마로 육지에 있던 각종 영양분이 바다로 다량 유입돼 성장 환경은 더 좋아 작황이 나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다. 일부 해역에서 ‘산소부족물덩어리’(빈산소수괴) 피해로 추정되는 폐사가 일부 확인됐지만 평년보다 심한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딴판이었다. 경남 전체 굴 양식장 3분의 1에 해당하는 1130ha가 직격탄을 맞았다. 평균 폐사율은 60%, 심한 곳은 90%를 웃돈다. 두 달 넘게 이어진 고수온에다 빈산소수괴까지 덮치면서 뒤늦게 폐사를 유발했다는 게 어민들 판단이다.
어선업 역시 예외가 아니다. 대형기선저인망수협이 내년 감척사업 수요를 조사했더니 소속 어선 136척 중 절반이 넘는 74척이 참여를 희망했다. 2년 전과 작년 수요 조사에선 각각 6척, 15척에 불과했다. 최근 인건비, 유류비 등 고정비용이 치솟아 가뜩이나 경영난이 심화하는 가운데 고수온 후유증에 생산성마저 곤두박질치자 결국 백기를 들었다.
수온 1도 변화는 육상 기온 5도 이상에 맞먹을 만큼 해양 생물에겐 치명적인 충격이다. 올여름 폭염은 올겨울 역대급 한파의 예고편일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당장 피해는 어민들이 떠안겠지만 다음은 누가 될지, 또 얼마나 심각할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언제까지 남 일일순 없다는 얘기다. 진정 올여름이 가장 시원하다면 앞으로 마주할 여름은 어떨지 상상하는 것조차 아찔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 하나 정도는 고민해야겠다.
2024-10-14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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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벤치는 권리다
누군가 스웨덴에 1년간 살며 뭐가 가장 좋았냐고 물어오면, 기자는 망설임 없이 ‘벤치’라고 답한다. 해질녘이면 매일 다른 빛 조합으로 오로라 못지 않은 영롱함을 빛내던 하늘도, 폐를 뚫어낼 듯한 깨끗한 공기도, 맑은 물도 벤치에는 비할 바가 못 됐다.
언젠가 스톡홀름에서 경치 좋은 곳을 발견하고는 ‘아, 잠시 앉아 풍경을 만끽하고 싶다’는 생각에 두리번거렸는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눈 앞에 벤치가 놓여 있었다. 이 경험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감탄을 자아내는 풍경 뒤로는 편안한 등받이가 있는 벤치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 같았으면 틀림없이 좋은 경치를 만끽하기 위한 자릿값을 내러 카페나 식당에 들어갔어야 할 상황이었다.
기자는 반복된 경험을 통해 스웨덴의 ‘벤치’를 권리로 이해했다. 좋은 풍광과 자연 자원은 누구든 누려야 할 공공의 자산인 만큼, 주요 스폿(spot)에는 카페가 아닌 벤치가 있었다. 자연은, 그리고 경관은 모두의 것이기 때문에 경관을 누리기 위해 자릿값을 내야 할 필요가 없었다.
벤치는 시민들의 당연한 권리였다. 나아가 도심 곳곳, 심지어는 쇼핑몰과 백화점 등에도 곳곳에 벤치가 있어 누구든 돈을 내지 않고도 쉬어갈 수 있었다. 벤치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나 혼자 나와 햇볕을 쫴야 하는 사람,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이들을 어딘가로 숨어들지 않게 했다.
공원 벤치에서는 생일 파티나 피크닉 파티도 자주 열렸다. 공원 벤치와 나무 사이에 가랜드와 풍선을 달고 피자 3~4판을 사오면 파티 준비가 끝이 났다. 강가, 해변가 벤치는 수영을 즐기는 이들의 공짜 휴식처였다. 벤치는 거의 모든 장소에 넉넉하게 있었다.
땅 가진 사람, 아파트 가진 사람이 멋진 풍광을 독점하는 게 당연시되는, 경관의 사유화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부산에 살다 보니 ‘작지만 공적인 시설물’ 벤치가 더욱 그리워진다.
다행히 이기대 앞 아파트 허가 과정의 문제점을 짚으며, 또 아파트 계획이 철회되는 과정을 보며 부산 시민이 경관을 공공의 자산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인상을 깊이 받았다. 그동안 부산의 해안가 경관은 아파트와 빌딩에 점령 당하며 개인의 부동산 가치를 올려주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우리가 이 경관을 독점하기 위해 이만한 돈을 주고 샀으니, 너네도 그에 상응하는 돈을 내야 해”에 개인은 저항할 수 없었다. 경관 또한 돈 있는 이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 시민들은 경관을 누릴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경관을 가리는 건물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영국 내셔널 트러스트가 보존 가치가 높은 해안선을 사 모은다는 얘기가 더 이상 먼 나라 얘기로 들리지 않는다.
경관은 시각적 요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산의 경관은 부산 사람의 삶과 문화, 역사가 응축된 집합물로,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자산이다. 또한 앞으로 부산의 경쟁력과 관광의 가치는 경관에서 판가름이 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산의 가장 경치 좋은 곳에도 가장 높은 빌딩이 아닌, 가장 낮은 시설물 벤치가 세워지길 바라본다.
2024-10-07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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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부산은 왜 '빌바오'가 될 수 없을까
전쟁에 관심이 많은 아이 덕분에 ‘전쟁의 아픔과 기억’이라는 테마로 최근 베를린과 바르샤바, 크라쿠프 등을 다녀왔다. 도시의 역사성과 건축물의 상징성은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특히 뇌리에 맴돈 것은 ‘빌바오 효과’였다. 랜드마크 건축물이 해당 지역의 경쟁력을 견인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1980년대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다가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을 세우면서 세계적인 관광지로 변모한 스페인 북부도시 빌바오에서 유래됐다. 빌바오 효과를 두고 말들이 많지만, 뛰어난 디자인의 건축물이 지역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분명 크다. 2001년 완공된 독일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은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등과 함께 통일 이후 베를린의 파급력을 높이는 선두 주자 역할을 하고 있다. 빌바오 효과는 아니더라도 관광객을 불러모으며 지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는 건축물들은 폴란드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폴란드 크라쿠프의 바벨성을 중심으로 한 구시가지와 현대 건축물의 조화는 관광객 재방문의 일등 공신이었다.
부산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부산의 랜드마크 건축물이 뭐냐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을 내놓을 수 없다. 후보들은 꽤 있지만 대부분 공사 중이거나 논의 단계 또는 논란의 중심에 머문 탓이다.
‘글로벌 허브도시’ 부산의 핵심으로 꼽히는 부산항 북항이 대표적이다.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십수년째 기대만 모으고 있다. 주요 시설 중 하나인 오페라하우스는 설계 공법 적정성 논란 등으로 1년여 간 건설이 멈췄다가 우여곡절 끝에 지난 5월 공사가 재개됐다. 공사 지연과 사업비 증액에 대한 책임 규명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1단계 사업에서 가장 규모가 큰 랜드마크 부지(11만 3286㎡)는 나대지로 남아 이름값을 못하고 있다. 지역 상공계에선 2029년 개항을 목표로 하는 가덕신공항과 연계해 쇼핑과 관광, 마이스를 아우른 북항 복합리조트 유치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 제정 움직임이 가속화하고 ‘카지노=사행 산업’이라는 인식이 점차 옅어지면서 북항 복합리조트 재추진 움직임에 힘이 실리고 있다. 산업 재편 차원에서 설득력 있는 해법이지만 반대 여론을 의식한 소극적인 행정으로 가야 할 길은 멀다.
남구 이기대 일대 프랑스 미술관 퐁피두 센터 분관 유치도 화두다. 막대한 유치·운영 비용부담 우려와 문화클러스터 구축 필요성이 팽팽하게 맞선다. 이번엔 시민 여론을 제대로 수렴하지 않은 밀어붙이기 행정으로 여기저기서 논란이다.
단순 건축물에 머무는 랜드마크는 도시의 생명력에 별 도움이 안 된다. 도시의 잠재력을 끌어올리고 산업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도시 경쟁력을 강화하는 중심에 서야 한다. 빌바오시가 구겐하임 미술관 유치로 도시를 탈바꿈하는 데 성공한 것은 도시 산업 재편의 큰 그림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 자금 조달 및 운영 등에 대한 촘촘한 세부 계획과 수십년에 걸친 지역 연계 개발, 민간 협력도 뒷받침됐다.
거대 복합리조트를 중심으로 금융까지 거머쥐면서 빌바오 효과의 대표 주자로 등극한 싱가포르의 사례는 결코 남 얘기가 아니다. 부산의 산업구조를 바꾸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복합리조트와 같은 건축물이 랜드마크인 부산항 북항에 들어서면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부산만의 모습을 세계인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을 것이다. 시민들은 물론 주요 경제 주체들의 요구를 적극 반영한 랜드마크 구축은 부산의 전환점이 되기 충분하다. ‘부산 효과’라는 용어가 탄생할지 누가 알겠는가.
2024-09-30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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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부산 '성장 동력' 인천이 선점한다
최근 통계청이 지역소득통계를 개편한 결과 2022년에 인천이 부산의 지역내총생산(GRDP, 실질 기준)을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내총소득(GRNI)에서는 2021년 인천이 부산을 추월했다. 인천은 수도권 확장에 따른 신도시 개발과 인천공항을 앞세운 물류(운수·창고업) 호황, 초대형 복합리조트 유치 효과까지 누리는 모습이다. 이 가운데 물류와 복합리조트 등은 부산과 직접 경쟁하는 분야여서 향후 두 도시의 경제력 격차가 더 커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통계청이 발표한 ‘지역소득통계 2020년 기준년 개편 결과’에 따르면 부산은 2022년 GRDP 증가율(전년 대비)이 2.6%였으나 개편 후 1.7%로 떨어졌다. 반면 인천은 개편 전 6.0%에서 개편 후 6.8%로 GRDP 증가율이 상승했다. 인천의 2022년 GRDP 증가율은 전국 최고치다. 통계 개편 후 기준으로 부산의 GRDP는 2021년 100조 원으로 인천(99조 원)에 앞섰다. 그러나 2022년에는 부산 GRDP가 102조 원으로 인천(106조 원)에 뒤졌다.
2022년 부산과 인천의 GRDP 증가율을 가른 핵심 요인은 건설업 경기였다. 부산은 건설업 GRDP가 전년 대비 10.6% 감소한 반면 인천은 7.3% 증가했다. 제조업 GRDP에서 부산에 10조 원 이상 앞선 인천은 서비스업에서도 격차를 좁히고 있다. 2021년 13조 원 규모였던 두 도시의 서비스업 GRDP 격차는 2022년 10조 원으로 줄었다. 인천은 특히 물류와 관광 등 인프라가 확대되고 있어 향후 서비스업 생산이 상승세를 이어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물류의 경우 인천은 2022년 운수·창고업 GRDP가 전년 대비 무려 41%나 증가했다. 인천공항을 중심으로 ‘물류센터’ 투자가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물류 관련 산업이 호황을 맞은 결과다.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합병 효과도 인천에 집중될 전망이다. 대한항공은 지난 5월 인천시와 영종하늘도시 특별계획구역 33만㎡에 대한항공 본사를 유치하고 대규모 주거·문화시설 등을 조성하는 프로젝트의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인천에는 ‘외국인 전용 카지노’를 갖춘 복합리조트가 연이어 개장해 관광 경쟁력도 높아졌다. 특히 올해 영종도에 개장한 미국계 자본의 인스파이어 리조트는 총 7조 원 이상이 투입되는 초대형 복합리조트다. 특히 인스파이어 리조트에는 국내 최대 규모(전용영업장 면적 1만 4372㎡) 외국인 전용 카지노가 들어섰다. 인천의 카지노(파라다이스시티, 인스파이어) 전용면적은 2만 3098.8㎡로 부산 카지노(세븐럭카지노 부산롯데점, 파라다이스카지노 부산지점, 3067.39㎡)의 7.5배다.
부산이 성장동력으로 추진하는 공항 기반 물류 산업 성장, 복합리조트 기반 서비스 산업 성장이 이미 인천에서 현실화되고 있다. 부산과 대비되는 인천의 성장에 대해선 ‘수도권 집중화’의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가 수도권 팽창을 허용하면서 물류와 서비스업 핵심 기능이 수도권 지자체로 몰린 결과라는 분석이다. 결국 부산이 물류 도시의 위상을 회복하고 복합리조트 등으로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선 규제완화와 특별법 제정 등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2024-09-23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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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테러 경각심과 우리사회의 병폐
‘쾅!’ 8월 19일 오후 3시 울산공항 대합실에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사람이 죽고 다쳤다.” 신고를 받은 경찰, 소방관들이 화재 진압과 인명 구조에 나섰다. 긴박한 상황을 인지한 국정원과 유관기관이 대테러합동조사에 착수했다.
공항 밖에선 드론 여러 대가 공중을 활보하며 패닉에 빠진 시민들에게 독가스를 뿌렸다. 울산화학재난합동방제센터 탐지 결과 독일 나치가 유대인 학살에 사용한 살인 도구, ‘염소가스’였다. 특수 제독차량이 투입됐고, 경찰은 정부 비상령 중 최고 단계인 갑호비상을 건의했다. 한쪽에선 테러범들이 인질을 잡고 경찰과 대치했다. 당국의 위기협상팀이 고심 끝에 협상 결렬을 결심한 순간, 경찰특공대가 들이닥치며 테러범을 일거에 진압했다. 오후 3시 45분 상황 종료.
스릴러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련의 장면은 실제 상황을 가정한 경찰청 주관 ‘제1회 국내 테러사건대책본부 훈련’에서 연출한 모습이다. 테러범을 잡기 위해 헬기에서 패스트로프로 하강하는 경찰특공대도 멋지지만, 훈련의 요체는 국가 핵심 기관들이 만들어내는 ‘협업 시스템’에 있다. 경찰과 소방, 국정원 등 11개 기관 367명이 각자 역할에 충실하며 빈틈없는 대비 태세를 구축하는 것이다.
경찰이 울산의 한 작은 공항을 낙점해 대테러훈련의 새 이정표를 세운 건 우연이 아니다. 훈련을 자청한 울산 경찰의 적극적 의지가 주효했는데, 무엇보다 원전과 공단 등 국가 중요시설이 즐비해 테러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울산의 장소성이 깊이 고려됐다고 본다.
‘우리나라는 과연 테러로부터 안전한가.’ 이번 훈련을 보고 자연스레 떠오른 물음이다. 국가정보원이 올해 4월 발간한 ‘2023년 테러정세와 2024년 전망’에 따르면 국내에서 테러단체가 개입한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으나, 국내 거주 외국인들의 테러단체 지원 사례가 지속 적발됐다. 과도하게 불안해할 필요는 없지만, 마냥 안심할 처지도 아니라는 얘기다.
2023년 울산의 한 복지시설에서 발생한 대만발 독극물 의심 소포 사건은 전국을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으며 테러 공포에 취약한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들춰냈다. 전국적으로 관공서나 학교를 대상으로 테러 예고 메일이 발견돼 한바탕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주변에선 ‘에이 설마…’ ‘그러면 그렇지’ 하고 넘어가기 일쑤다.
테러는 이런 안이한 틈을 비집고 들어가 일상의 평온을 파괴하고 공포와 불안을 심는다. 최근 독일 축제현장에서 3명의 목숨을 앗아간 극단주의 이슬람세력의 묻지마 테러가 대표적이다. 미국 9·11의 악몽이 어김없이 생각나는 요즘 그저 남의 나라 얘기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경찰 대테러 훈련에서 규정한 ‘가상의 적’, 그 실체는 무엇일까. 남쪽으로 오물 풍선을 날려 보내는 북한일까. 극단주의 무장단체일까. 혹시, 우리 내부의 편견과 혐오, 차별로 점철된 고질적 병폐가 있는 건 아닐까. 편가르기식 진영 논리는 각종 정치 테러로 이어지며 위험 수위를 넘어선 지 오래다. 빠른 속도로 악화하는 경제적 불평등은 어떤가. 젠더 갈등, 노사 갈등, 최근의 의정 갈등까지…. 갈등공화국의 어두운 그림자는 곳곳에 깔려 있다. 무더위에 열린 대테러훈련이 잠자던 경각심을 깨우고 우리 사회 양극화를 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2024-09-0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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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이것이 왜 국가 재난이 아닌가?
어떤 뉴스는 읽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 딥페이크 성착취 텔레그램방이 개설됐다는 전국 대학과 중고등학교의 위치가 한반도 지도를 촘촘히 채울 때, 드러나는 ‘지인 능욕’ 텔레그램방 규모가 22만 명, 40만 명 식으로 불어날 때, 불법 합성 성착취물을 만들고 공유한 가해자들이 수사 기관을 비웃고 급기야 관련 기사를 쓴 기자를 ‘능욕’하는 방까지 개설될 때 분노와 참담함에 차라리 눈을 돌리고 싶었다.
딥페이크 집단 성범죄 사건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 온라인 공간에서 무리를 이루어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한 불법 콘텐츠를 돌려보는 디지털 성범죄의 역사는 인터넷의 역사와 시간대가 크게 다르지 않다. ‘○○ 비디오’가 있었고, 소라넷이 있었고,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있었다. 대부분 가해자와 피해자가 뚜렷하게 성별로 구분되는 젠더 범죄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것이 있다면 기술의 위력이다. 합성 기술의 보급으로 누구나 사진 한 장으로 가상의 성착취물을 손쉽게 만들고, 그것을 추적이 힘든 암호 화폐로 사고팔 수 있다. 텔레그램의 강력한 보안 기술은 성인 인증이나 개인 정보 공개도, 적발의 두려움도 없이 불법 콘텐츠에 무제한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일상 사진이나 프로필 사진만으로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것 또한 무한히 연결되는 소셜미디어의 등장 때문이다.
딥페이크 집단 성범죄를 부추긴 게 기술만은 아니다. 과거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소극적인 수사와 가벼운 처벌, 부실한 대책이 이번 사건을 배양했다. 사건의 시발점인 서울대 딥페이크 사건도 피해자가 직접 나서서 노력한 끝에 수사와 기소를 이끌어냈다. 소라넷도 n번방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2년 전 법무부 디지털성범죄 TF는 갑자기 해체됐고, 당시 이미 구체화된 대책은 서랍 속에 묻혔다.
더 근원에는 여성 혐오와 성차별이 있다.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는 사회라면 여성을 ‘능욕’하는 콘텐츠가 적어도 10대들의 놀이 문화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성평등이 국가적 의제였다면 외신이 이번 사건을 두고 “만연한 성희롱 문화 속에서 기술 발전이 디지털 성범죄의 폭발적 증가를 불러왔다”고 분석할 때 국내 정치인의 일성이 “과잉 규제가 우려된다”, “급발진 젠더 팔이, 그만할 때도 됐다”일 수도 없을 것이다.
딥페이크 집단 성범죄 사건은 징후가 아니라 무수한 경고음을 방치한 끝에 10대들까지 파고든 파국이다. 더 두려운 것은 이것이 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온라인에서 세를 키운 여성 혐오는 이미 현실의 여성 대상 폭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변의 지인이나 동료에 의해 성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은 사회에 대한 신뢰의 근간을 허문다. 그 결말은 공동체의 실패고 국가의 위기다.
“동료 시민에 대한 집단적 모욕과 멸시가 용인되고 학습되는 사회는 존속할 수 있는가? 존속해도 되는가? 이는 국가 위기 상태이다.” 한국여성민우회의 성명이다. “국가적 재난 상황임을 선포하고 시급히 대안을 마련하라.” n번방 사건을 처음 공론화한 박지현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촉구다. 필요한 것은 국가의 의지다. 늦었지만 더 늦어서는 안 된다.
2024-09-02 [1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