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성수의 과기세] 꿈으로 성공한 과학자들
지독히 더운 여름이 언제 끝날까? 아직도 낮 기온은 30도를 웃돌고 밤에는 열대야가 계속된다. 미래를 고려하면 올해 여름이 가장 시원하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더운 날씨로 깊이 잠들지 못하고 꿈도 자주 꾼다. 내친김에 꿈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꿈으로 성공한 과학자들에 관해서 말이다.
두 가닥의 실로 바느질하는 재봉틀을 개발한 사람은 19세기 미국의 기술자인 하우이다. 하우의 수입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아내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도왔다. 하우는 아내의 고생을 덜어주기 위해 바느질 기계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두 개의 실이 구멍을 통과하면서 함께 박히는 기계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하우, 꿈에서 재봉틀 발명 실마리 발견
멘델레예프, 영감 얻어 주기율표 완성
케쿨레, 벤젠 구조 발표 뒤 꿈 언급 논란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꿈에서 얻어졌다. “어찌 된 영문인지 나는 식인종들 앞에 끌려가 1시간 안에 재봉틀을 만들지 못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엄명을 받았다. 아무리 궁리했으나 그 기계의 발명이 쉽지 않아 나는 사형장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식인종이 창을 겨누며 다가왔다. 햇빛에 창끝이 반짝이고 있을 때, 나는 창끝의 조금 넓적한 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바로 이거야!’라고 외치면서 번쩍 정신을 차려 잠에서 깨어났다.”
하우가 주목한 것은 바늘구멍의 위치였다. 보통의 바늘에는 실을 꿰는 구멍이 뒤쪽에 있는데, 원주민의 창에서는 앞쪽에 구멍이 있었던 것이다. 하우는 원주민의 창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기술적으로 구현하는 방법을 고민했다. 결국 그는 바늘의 앞쪽에 구멍을 내고 거기에 윗실과 밑실을 꿰어 두 가닥의 실로 겹바느질을 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하우는 친구로부터 돈을 빌려 시제품을 만든 후 1846년에 재봉틀에 대한 특허를 받았다.
‘화학의 문법’으로 여겨지는 주기율표도 꿈의 산물로 알려져 있다. 19세기 러시아의 화학자인 멘델레예프는 당시에 알려진 63개의 원소를 카드로 만들어 그 이름과 성질을 기록했다. 이어 카드를 실험실의 벽에 핀으로 꽂아 놓고 자신이 모은 자료를 다시 검토했다. 그랬더니 원소의 성질이 놀랄 만큼 원자량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멘델레예프는 같은 성질을 갖는 원소가 주기적으로 나타난다고 확신한 후 원소의 성질을 원자량의 주기적인 함수라고 가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원소를 원자량의 순서대로 배열하여 하나의 일람표로 만들기 시작했다.
멘델레예프는 위대한 발견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점을 직감했지만, 그것을 정확히 집어내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는 “내 머릿속에는 모두 정리되어 있지만, 그것을 표현할 수가 없다”라고 불평하면서 깊은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1869년 2월 17일에 멘델레예프는 카드로 어질러진 책상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토록 갈망하던 주기율표를 꿈속에서 보았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꿈속에서 모든 원소가 정확히 있어야 할 위치에 자리 잡은 표를 보았다.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는 즉시 종이에 그것을 기록했다.”
하우와 멘델레예프의 사례는 유사한 패턴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자신이 당면한 문제를 풀려고 몰입하다가 그 실마리를 우연한 꿈에서 얻었다. 여기서 필자는 “천재는 99퍼센트의 노력과 1퍼센트의 영감”이라는 에디슨의 명언을 떠올린다. 99번을 노력해야 1번의 영감이 온다는 것이니, 영감의 순간은 엄청난 노력 끝에 주어지는 선물인 셈이다. 과학의 역사에는 꿈을 꾸다가 혹은 산책하던 중에 또는 휴가를 보내다가 영감의 순간을 맞이하는 일화들이 종종 등장한다.
꿈으로 대박 난 과학자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인물은 19세기 독일의 화학자인 케쿨레이다. 그는 1865년에 뱀에 관한 꿈을 꾸면서 벤젠의 구조를 규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꿈속에서 뱀이 몸을 꼬아 입으로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벤젠의 고리 구조에 착안했다는 것이다. 케쿨레의 꿈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요셉의 꿈 이래로 역사상 가장 중요한 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몇몇 과학사학자들은 케쿨레의 꿈에 의문을 제기한다. 케쿨레가 자신의 꿈을 처음 언급했던 시기는 벤젠의 구조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지 25년이 지난 후였다. 그동안 아무런 얘기도 없다가 갑자기 1890년에야 꿈을 거론했던 셈이다. 이 때문에 케쿨레가 실제로 뱀 꿈을 꾸지 않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그가 꿈을 꾸었는지 아닌지와는 무관하게 하필이면 왜 1890년에 꿈 얘기를 꺼냈을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그 실마리는 발견의 우선권에 관한 논쟁에서 찾을 수 있다. 케쿨레는 1890년까지 벤젠의 구조를 누가 먼저 발견했는가 하는 우선권 논쟁에 휘말려 있었는데, 1865년에 뱀 꿈을 꾸고 논문을 썼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2026-09-01 [18:02]
-
[김대래의 메타경제] 코스피 5000이 더 쉽다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가 단순하였던 조선시대에도 경제 정책의 실행은 결코 쉽지 않았다. 호랑이보다 세금이 무섭다는 말이 있듯이 조선시대 경제 정책의 중심에는 늘 세금 문제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격렬한 토론과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비로소 완전히 시행될 수 있었던 대동법(大同法)이 단연 눈에 들어온다.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대동법은 전세(田稅)보다 무거웠던 공물을 호(戶) 대신 토지에서 받는 조세 구조의 대전환이었다. 땅을 가진 사람들의 부담이 늘어나는 데 대한 저항이 없을 리 없었지만, 시대적 과제였기 때문에 치열한 논쟁은 있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정책 시행 여건의 미흡 등이 겹쳐 충청도에 대동법이 처음 시행되고 난 뒤, 전국으로 확산되기까지는 100년이 걸렸다.
조선 대동법 전면 시행 100년 걸려
다시 꺼낸 대출 규제·중과세만으로
순환 막힌 부동산 정책 성공 힘들어
조선시대 대동법에 견줄 만한 오늘날의 난제는 부동산이다. 돌이켜 보면 서울 강남에 신도시를 만드는 구상이 처음 등장한 지 60여 년이 흘렀다. 강북의 복잡함을 덜기 위해 만든 강남이 역으로 이제는 한국의 블랙홀이 된 지 오래다. 수많은 부동산 대책들이 반투기 정책의 이름을 달고 나왔지만 근본적인 해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집값 상승으로 내집 마련의 기회가 더욱 희박해지면서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망국적인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취임 이후 이례적으로 높았던 이재명 대통령 지지율이 최근 들어 눈에 띄게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한때 대통령의 지지율을 가파르게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던 주식시장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낙폭을 보이고 거의 투기장이 되어간 데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했다는 해석이 있다. 그와 함께 그동안 대통령이 자신감을 보여온 부동산 시장에서 이상신호가 감지되기 시작한 것도 주요한 원인으로 거론된다. 여기에는 젊은 세대의 광범위한 이탈이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기억을 떠올려 보면 대선 당시 이재명 후보는 주택과 관련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집값을 잡기 위해 조세정책을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며, 충분한 공급을 하겠다고 하였다. 지하철역이나 동사무소 같은 공공용지 위에 젊은이들을 위한 임대주택을 언급하였던 것도 그러한 공급 증대의 일환이었다고 기억한다. 아울러 당시 이재명 후보는 강남 집값을 인위적으로 낮추는 것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동안 몇 차례 발표된 부동산 정책은 대선 당시의 언급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대출 규제에 이어 비거주 1주택에 대한 세금 중과 등이 핵심 내용이다. 주택 구입과 전세 입주에 대한 대출을 규제하는 것은 주택 수요를 줄이는 수단이다. 비거주 주택에 대해 세금을 더 매기겠다는 것은 매각을 유도하는 방안이다.
그런데 시장은 집을 사려는 사람과 집 파는 사람만으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다. 복잡한 전월세가 얽혀있고 재개발 때문에 이사를 해야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대출 규제와 세금 중과로 전월세 시장이 요동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뒤늦게 공급 대책을 발표하면서 서두르겠다고 한 것은 이러한 혼란에 대한 응급조치이다.
지금 정부가 구상하고 있는 주택정책의 목표는 집값의 안정에 맞추어져 있다. 투기수요를 억제하면 집값은 낮아질 수 있다. 그런데 그 집을 누가 살 수 있는가? 대출을 억제한 상황에서 그 집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은 현금으로 몫돈을 가지고 있는 중상층들일 것이다. 이른바 영끌을 통해서라도 내집 마련을 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이 이재명 정부에 등을 돌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동법에서 보듯이 많은 집단의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부동산 정책의 완성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그래도 언젠가는 달성해야 할 과제이기 때문에 역시 결코 중단할 수 없는 정책이다. 대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을 제대로 잡는 것이다. 부동산 정책의 목적은 집값 특히 강남 집값의 안정이 아니라 주거 안정에 있다. 세계에서도 오고 싶어하는 강남의 집값을, 국가적 역량을 집중하여, 낮출 필요는 없다.
대신 주거 안정을 위한, 후보 시절에 이야기 했던, 파격적인 대책들이 나와야 한다. 대출 규제는 주택 수요도 줄이지만 주택 시장의 순환도 방해하기 때문에 시장의 움직임을 살펴가면서 보완해 가야 한다. 나아가 무엇보다 주택정책의 완성은 지역 균형발전 위에서만 달성될 수 있다. 부동산정책이 제대로 완성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런 점에서 부동산 정책은 차분하게 긴 호흡으로 접근해야 한다. 주거 안정 정책은 계곡 평상 치우듯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선 공약 '코스피 지수 5000 달성'보다 주거 안정이 훨씬 더 어렵다. 규제로 시장을 잡으려다 실패한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2026-08-25 [18:05]
-
[안상욱의 글로벌 산책] 캐나다 잠수함 선택과 '유사입장국'
지난달 캐나다 정부는 최대 12척의 차기 잠수함 사업 우선협상대상자로 독일 TKMS의 Type 212CD를 선정했다. 마지막까지 경쟁했던 상대는 한국 한화오션의 KSS-III였다. 한국으로서는 아쉬운 결과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기술 경쟁의 결과로만 이해한다면 더 중요한 메시지를 놓치게 된다.
캐나다 정부는 두 제안 모두 자국 해군이 요구한 능력을 충족했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마크 카니 총리는 독일 잠수함의 북극해 작전능력과 ‘NATO와의 완전한 상호운용성’을 강조했다. Type 212CD는 독일과 노르웨이가 공동 개발하는 플랫폼으로, 캐나다는 이를 통해 NATO의 훈련·정비·군수 네트워크에 더욱 깊숙이 결합할 수 있다.
결국 캐나다가 선택한 것은 잠수함만이 아니다.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누구와 함께 안보를 만들어갈 것인가라는 전략적 판단이 포함돼 있었다. 이번 결정은 한국 잠수함의 패배라기보다 캐나다의 ‘NATO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2002년 한국의 차기전투기 사업에서 미국 보잉의 F-15K와 프랑스 다소의 라팔이 경쟁했다. 특히 1단계 평가에서는 비록 차이가 3% 이내였지만 라팔이 F-15K보다 높은 점수를 받은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2단계에서는 군사동맹과 상호운용성, 국가안보 등 전략적 요소가 고려됐고 결국 한국은 F-15K를 선택했다.
두 사례를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공통점이 있다. 첨단 무기체계를 도입한다는 것은 가장 좋은 제품을 구매하는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 누구와 함께 훈련하고, 정비하고, 정보를 공유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행위다. 수십 년간 운용되는 전략무기의 선택은 장기적인 안보 파트너의 선택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캐나다의 결정을 둘러싼 국내 일각의 반응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일부 유튜브의 이른바 ‘국뽕’ 콘텐츠에서는 캐나다가 한국을 ‘배신했다’거나 잘못된 선택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적 접근은 국제정치와 방산사업의 현실을 단순화한다.
캐나다는 한국과의 의리 때문에 잠수함을 구매하는 국가가 아니다. 한국 역시 2002년 프랑스와의 우호관계 때문에 라팔을 선택할 의무가 없었다. 한국이 한미동맹과 상호운용성을 고려해 F-15K를 선택했다면 NATO 회원국인 캐나다가 NATO와의 상호운용성을 중시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최근 확대되는 ‘유사입장국들(like-minded partners)’의 네트워크다. 과거 국제안보가 미국 중심의 수직적 동맹에 의존했다면 오늘날에는 기존 동맹을 유지하면서 중견국 사이의 수평적 협력이 증가하고 있다. 우리는 캐나다, 일본, 호주, 영국 및 체코, 폴란드, 프랑스, 독일과 같은 EU회원국과 글로벌 공급망, 핵심광물, 에너지, AI, 해양안보 등 다방면에서 협력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중요성이 감소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국제질서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하나의 강대국이나 동맹만으로 모든 위험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것이다. 중견국 외교가 ‘중재의 외교’에서 ‘네트워크의 외교’로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한국도 이러한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 한미동맹과 한미일 협력은 중요하지만 여기에만 외교안보 공간을 한정할 필요는 없다. NATO와 EU회원국 등 유사입장국들과 방산·에너지·공급망·핵심광물·AI·해양안보를 연결하는 협력망을 구축해야 한다.
한국 방산 역시 ‘제품의 수출’에서 ‘네트워크의 수출’로 발전해야 한다. 한국 무기를 사용하는 국가들이 훈련과 정비, 부품조달, 기술개발을 함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산업 경쟁력을 중견국 협력의 플랫폼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런 점에서 캐나다의 잠수함 사업은 실패가 아니라 학습의 기회다. “우리 잠수함이 더 좋은데 왜 한국을 선택하지 않았느냐”고 분노하기보다 “독일은 어떤 네트워크를 제공했고, 한국은 앞으로 어떤 네트워크를 제공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한국 잠수함이 열등해서 패배했다고 단순화해서도, 반대로 한국 잠수함이 무조건 우수한데 캐나다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주장해서도 안 된다. 캐나다가 판단한 것은 기술과 가격뿐 아니라 동맹과 제도, 상호운용성, 신뢰와 네트워크의 힘이었다.
좋은 무기를 만드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시대다. 누구와 함께 그 무기를 운용할 것인지가 때로는 무기 자체보다 중요하다. 캐나다의 선택에서 읽어야 할 것은 한국 방산의 패배도, 캐나다의 배신도 아니다. 한국은 한미동맹을 유지하면서 우리의 유사입장국들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그것이 이번 선택에서 얻어야 할 진짜 교훈이다.
2026-08-18 [18:01]
-
[백진규의 법의 창] 위자료와 재산분할
연일 35도를 넘나드는 폭염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올여름 사람들의 관심을 가장 뜨겁게 달군 것은 날씨만이 아니었다. 최근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 파기환송심 판결은 수천억 원에 이르는 재산분할 규모로 큰 화제가 됐다. 대부분의 언론은 ‘9000억 원대 재산분할’이라는 금액에 주목했고, 사람들은 “이혼하면 저렇게 큰돈을 받는 것이냐” “위자료도 저만큼 받는 것이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우리에게 준 의미는 금액의 크기만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혼동하는 ‘위자료’와 ‘재산분할’은 법적 성격과 청구권의 근거가 서로 다른 제도라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가사사건을 상담하다 보면 자주 듣는 질문이 있다. “배우자가 외도를 했으니 재산도 못 가져가는 것 아닌가요?” 또는 “위자료를 많이 받으면 재산분할도 많이 받는 것 아닌가요?”라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는 않다.
최태원·노소영 이혼소송으로 관심
‘잘못에 대한 책임’ ‘결실 공평한 분배’
법적 성격·청구권의 근거 서로 달라
이혼과 관련해 법원이 인정하는 대표적인 재산상 청구에는 위자료와 재산분할이 있다. 그러나 두 제도는 비슷한 내용으로 생각되지만 법적 성격과 판단 기준이 서로 다르다. 위자료는 상대방의 잘못으로 입은 정신적 고통에 대한 손해배상이다. 배우자의 외도나 폭력 등으로 혼인이 파탄에 이르렀다면 그 책임을 금전으로 배상하는 제도다. 따라서 혼인 관계가 누구의 책임으로 파탄에 이르렀는지가 중요한 판단 요소가 된다. 반면 재산분할은 손해배상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혼인 생활 동안 부부가 함께 모은 재산을 청산하고, 공평하게 나누는 제도다. 여기서는 잘잘못보다 재산 형성에 얼마나 기여했는지가 중요하다. 여기서 기여는 경제활동은 물론 가사 노동과 자녀 양육, 배우자의 경제활동을 뒷받침한 노력, 재산의 유지·관리 등에 대한 기여도 함께 고려된다. 쉽게 말하면 위자료는 ‘잘못에 대한 책임’이고, 재산분할은 ‘함께 이룬 결실의 청산과 공평한 분배’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래서 혼인 파탄의 책임이 인정되더라도 재산분할을 받을 권리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혼인 파탄의 책임이 없다고 해서 거액의 재산분할을 받는 것도 아니다. 법원은 위자료와 재산분할을 각각 다른 기준으로 판단한다. 실제로 대법원은 ‘혼인 관계 파탄의 책임이 있는 유책배우자라고 하더라도 혼인 중 쌍방의 협력으로 형성한 재산이 있다면 재산분할을 청구할 수 있다’고 판시해 왔다.
최태원·노소영 사건도 이를 잘 보여준다. 대법원은 지난해 10월 위자료 20억 원 부분은 상고기각하여 확정하면서 재산분할 부분만 파기환송했다. 이에 따라 서울고법은 파기환송심에서 분할 대상 재산과 양측의 기여도 등을 다시 심리했고, 지난 7월 24일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9440억 원을 재산 분할금으로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같은 이혼소송에서도 두 제도가 서로 다른 법리에 따라 판단된 대표적인 사례다.
이러한 원칙은 우리나라만의 특징이 아니다. 일본 민법 제768조 역시 이혼 후 부부 사이의 재산상 형평을 위해 혼인 중 취득·유지한 재산과 각자의 기여 정도 등을 고려하여 재산분할을 정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은 대부분의 주에서 혼인 중 형성된 재산을 공정하게 나누는 ‘형평분배’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독일은 혼인 중 증가한 재산을 비교해 차액을 정산하는 ‘이익증가분 정산 제도’를 두고 있다. 영국 역시 판례를 통해 경제적 기여뿐 아니라 가사와 자녀 양육 등 비경제적 기여도 재산분할에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을 발전시켜 왔다. 국가마다 제도는 서로 다르지만, 공통된 원칙은 같다. 재산분할은 배우자의 잘못을 두고 보상하거나 처벌하는 제도가 아니라, 혼인이라는 공동생활을 통해 형성된 재산관계를 청산하는 제도로서의 기능이 강하다. 즉 혼인 파탄의 책임과 재산 형성에 대한 기여는 서로 다른 법적 질문이다.
이혼은 이제 특별한 일이 아니라 법적으로 정리해야 할 삶의 한 과정이 되었다. 그럴수록 정확한 법률 지식이 중요하다. 인터넷 정보나 주변의 경험만 믿고 자신의 권리를 오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감정은 억울할 수 있지만 법은 원칙으로 판단한다.
무더운 여름은 지나가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혼소송도 시간이 지나면 잊힐 것이다. 그러나 법의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위자료는 책임을 묻는 제도이고, 재산분할은 함께 살아온 시간과 노력의 가치를 기여에 따라 공평하게 나누는 제도다. 둘 다 돈으로 지급되는 경우라도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법은 감정을 외면하지 않는다. 다만 감정을 원칙으로 다스릴 뿐이다. 분노에는 책임을 묻고, 헌신에는 정당한 몫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법이 공정을 실현하는 방식이다. 이혼은 관계의 끝일 수 있지만 법의 끝은 아니다. 관계가 끝나는 순간에도 법은 책임을 묻고, 기여를 평가하며, 각자의 새로운 출발을 위한 공정한 기준을 세운다.
2026-08-11 [18:02]
-
[송하주의 AI 톡] 정답을 AI가 주면 생각은 누가 하나
과제는 거의 완벽했다. 문장은 매끄러웠고 논리는 빈틈이 없었다. 프로그램도 오류 없이 작동했다. 그런데 교수가 학생에게 “이 부분을 왜 이렇게 작성했나요?”라고 묻자 뜻밖의 침묵이 돌아왔다. 교수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이 제출한 답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학생의 과제는 훌륭했지만 정작 그의 머릿속에는 그 과제가 없었던 셈이다. 최근 대학가에서는 시험과 과제에 생성형 인공지능을 사용한 부정행위가 자주 논란이 된다. 학생 절반 이상이 AI로 프로그램 과제를 작성해 제출했다거나, 온라인 시험에서 챗GPT로 문제를 풀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대학들도 F학점과 정학 등의 징계로 대응하고 있다. 수업계획서에 AI 사용 금지 또는 허용 범위를 명시하고, 별도의 ‘AI 활용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학습을 위한 활용이고 어디부터가 부정행위인지를 명확히 가리기는 쉽지 않다. 교수와 학생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이유다.
필자 역시 수업에서 문제 풀이와 프로그램 개발 과제를 자주 낸다. 최근에는 예전보다 훨씬 완성도 높은 답안이 제출된다. 학생들의 실력이 크게 향상된 결과라면 더없이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제출한 내용을 직접 설명해 보라고 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문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자신이 작성했다는 프로그램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지 못하는 학생이 적지 않다. 단순 암기형 시험은 AI에게 너무 쉬운 문제다. 여기에 스마트 안경과 같은 기기까지 결합한다면, 학생은 눈앞에 나타나는 답을 그대로 옮겨 적을 수도 있다. 수학 문제 풀이, 글쓰기, 번역, 보고서 작성, 프로그램 개발도 이제 AI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학생이 몇 시간을 고민하는 대신 몇 초 만에 답을 내놓는 AI를 사용하고 싶어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그러나 과제와 시험의 목적은 정답 한 줄을 얻는 데 있지 않다. 문제를 이해하고, 여러 방법을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생각하는 과정에서 지식과 사고력이 자란다. 고민 없이 결과만 얻으면 머릿속에 남는 것이 거의 없다. 내비게이션만으로 자주 가는 길은 혼자 찾아가기 어렵다. 다른 사람이 나 대신 운동해 준다고 내 근육이 발달하지 않는 것처럼, AI가 생각을 대신해 준다고 내 사고력이 자라지는 않는다. 생각하는 힘도 쓰지 않으면 약해진다.
그렇다고 모든 학습 과정에서 AI를 금지할 수는 없다. 계산기가 등장했다고 수학을 배우지 않게 된 것이 아니고, 인터넷 검색이 가능하다고 역사교육이 필요 없어진 것도 아니다. AI 역시 앞으로 학생들이 살아가며 반드시 사용해야 할 도구다. 중요한 것은 AI를 사용했느냐가 아니라, AI를 어떻게 사용했느냐이다. AI는 더 좋은 답을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더 깊은 생각까지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교육은 AI를 학생 대신 생각하는 도구가 아니라, 학생이 더 잘 생각하도록 돕는 도구로 활용해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과제의 결과뿐 아니라 과정도 평가할 필요가 있다. 완성된 보고서만 평가할 것이 아니라, AI에게 어떤 질문을 했는지, 답변 가운데 무엇을 수정했는지, 어떤 내용은 왜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설명하게 하는 것이다. 학생이 ‘AI를 사용했는가’를 감시하기보다, AI의 답을 판단할 수 있는가를 평가하는 방식이다.
짧은 구두 설명도 도움이 된다. 자신이 제출한 보고서나 프로그램의 핵심을 학생 자신의 말로 설명하게 하면 실제 이해 여부가 쉽게 드러난다.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학생은 아무리 정돈된 과제를 제출했더라도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 어렵다. AI의 오류를 찾게 하는 과제도 가능하다. 교사가 AI가 작성한 답변을 제시하고, 학생에게 틀린 내용이나 논리적 허점을 찾아 수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학생은 AI가 만들어 준 답을 그대로 받아 적는 소비자에서, 답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판단자로 바뀐다.
때로는 AI 없이 생각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처음 10분 동안은 학생 혼자 문제를 분석하고 답을 작성하게 한 뒤, 그다음 AI의 답과 비교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자신의 생각이 먼저 있어야 AI의 답이 무엇을 보완했고, 무엇을 놓쳤는지 판단할 수 있다. 처음부터 AI의 답을 보면 학생의 생각과 AI의 생각을 구분하기 어렵다.
이미 AI는 인간보다 훨씬 많은 답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교육이 길러야 할 능력은 정답을 빠르게 만들어 내는 기술이 아니다. AI의 답에 질문을 던지고, 다른 답과 비교하며, 틀린 부분을 의심하고, 자신의 말로 설명하는 능력이다. AI가 답을 대신해 주는 시대일수록 교육은 생각하는 힘을 더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 미래의 경쟁력은 답을 많이 외우는 데 있지 않다. 수많은 답 가운데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하는 힘에 있다.
2026-08-04 [17:57]
-
[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과학적 지혜로 여는 새로운 항로
최근 대한민국 해양수도 부산을 중심으로 북극항로 개척을 향한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해양수산부는 부산으로 청사를 이전하며 북극항로추진본부를 신설했고, 2026년 9월에는 국내 민간 선사를 통해 부산에서 네덜란드 로테르담까지 3000TEU급 컨테이너선을 투입하는 시범운항을 계획하고 있다. 부산시 역시 울산, 경남과 함께 ‘북극항로 허브도시’ 조성을 위한 4대 추진 전략을 발표하며 선제적 대응에 나섰다. 수에즈 운하를 거치는 남방항로보다 운항 거리를 약 7000km, 시간을 10일 이상 단축할 수 있는 북극항로는 글로벌 물류 패러다임을 바꿀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대한민국의 해양 경제 영토를 넓히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북극항로 개척의 핵심 무대인 북극해와 시베리아 연안은 여전히 인류에게 척박하고 가혹한 환경이다. 전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낮고 아직 온전히 개척되지 않은 이 지역은 기후변화로 인해 해빙이 급격히 녹고 다시 어는 변화무쌍한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극심한 추위와 예측하기 어려운 날씨, 험난한 파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유빙의 위협은 항해자들에게 거대한 장벽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자연의 맹위는 북극항로 상용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위험 요소이자 우리가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류는 언제나 험난한 자연을 뚫고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 왔다. 15세기 대항해 시대, 유럽의 항해자들은 거친 파도와 괴혈병, 끝을 알 수 없는 미지의 바다라는 공포와 맞서 싸우며 희망봉을 돌고 신대륙에 닿았다. 마젤란의 세계일주나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은 수많은 희생과 위험을 수반한 험난한 여정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거친 바다를 가르며 나아갔고, 그 결과 세계의 지리적 경계를 넓히고 글로벌 교역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오늘날 북극항로 개척 역시 대항해 시대 선구자들이 마주했던 것과 같은 위험과 도전의 연장선에 있다.
대항해 시대의 항해자들이 험난한 자연을 극복하고 항로를 개척할 수 있었던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당시 새롭게 축적된 지구과학적 지식과 항해술의 발전 덕분이었다. 나침반의 도입과 천문 항법의 발달, 그리고 해류와 바람의 방향에 대한 이해는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나침반이 되었다. 이처럼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무기는 바로 자연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과학적 지식이다. 새로운 지식의 발견은 단순한 학문적 성취를 넘어, 인류가 자연의 한계를 극복하고 생존과 번영을 이어가는 데 필수적인 원동력이었다.
오늘날에도 북극해는 여전히 인류에게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다. 그린란드의 거대한 육빙이 녹아내리며 해수면 상승과 해류 변화에 미치는 영향 등 북극권의 자연 현상은 매우 복잡하고 역동적이다. 우리는 아직 북극의 얼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날씨가 어떻게 급변하는지, 그리고 바다 밑의 지형이 어떠한지에 대해 완벽하게 알지 못한다. 이러한 지식의 공백은 안전한 항해를 위협하는 잠재적 위험 요소로 남아 있다.
따라서 성공적인 북극항로 개척을 위해서는 과거의 역사가 증명하듯, 미지의 지역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이를 활용하는 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북극해와 시베리아 지역의 기후, 해류, 지형 등에 대한 지구과학적 지식을 지속적으로 축적해야 한다. 현대의 발달한 인공지능, 위성 관측, 쇄빙 기술 등을 총동원하여 기상 이변과 유빙의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무모한 도전이 아닌, 발달한 과학 기술과 깊이 있는 지식을 기반으로 자연과 공존하며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현명한 개척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대항해 시대, 산업 구조의 변화 속에서 일자리를 잃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미지의 세계로 나아갔던 수많은 젊은이들의 용기가 새로운 항로를 열고 세계사를 바꾸었다. 지금 우리 앞에는 ‘북극해’라는 새로운 대양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대한민국의 해양수도 부산의 젊은 세대들이 과거 대항해 시대의 청년들처럼 진취적인 기상과 도전 정신을 품고 이 미지의 바다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 도전이 진정으로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북극해와 시베리아 주변 지역에 대한 지구과학적 지식을 끊임없이 쌓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해빙의 이동 경로와 기상 변화, 해저 지형과 해류의 흐름을 정밀하게 파악하는 것은 단순한 학문적 탐구를 넘어, 바다로 나아가는 젊은이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패가 된다.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하고 두려움 없이 북극항로를 개척해 나갈 때, 우리는 부산을 넘어 대한민국의 새로운 도약과 번영을 이끄는 위대한 역사를 다시 한번 써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2026-07-28 [18:11]
-
[홍순연의 도시 공감] 보존과 활용의 완충지대, 부산
대한민국 부산에서 제48차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위원회가 진행 중이다. 유네스코는 1945년 11월 16일, 연합국 교육장관들이 영국 런던에 모여 교육 재건과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기구 창설에 뜻을 모으며 유네스코 본부를 통해 공식 설립하였다. 지금까지 세계의 고대 고분군부터 중세의 성곽에 이르기까지, 지역의 가치를 기반으로 문화유산을 지정하고 보존하는 데 앞장서 왔다.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유산은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를 지닌 자산으로, 크게 세계유산, 인류무형문화유산, 세계기록유산으로 분류되어 지정된다.
세계유산은 문화유산, 자연유산, 복합유산의 세 가지 하위 범주로 나뉘며, 전 세계적으로 총 1248건이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그중 우리나라는 현재 총 17건의 세계유산(문화유산 15건, 자연유산 2건)을 보유하고 있으며 1995년 지정된 석굴암·불국사를 비롯하여 2025년 반구천의 암각화까지 등재되어 있다. 부산은 인류무형문화유산인 수영야류와 세계기록유산인 조선통신사 기록물이 등재되어 있으며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은 202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공식 등록되었으며, ‘우선등재목록’에 선정되어 2030년 정식 등재를 목표로 준비 중에 있다. 경무대(임시수도대통령관저), 임시중앙청(동아대석당박물관), 국립중앙관상대(부산측후소), 복병산 배수지,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인 재한 유엔기념공원, 부산항 제1부두, 캠프 하야리아, 아미동 비석 피란주거지, 우암동 소막 피란주거지, 영도다리 등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고 있는 건축물과 구조물, 마을이 대상이다.
'피란 유산' 유네스코 등재 준비
비극의 역사 '평화와 공존' 승화
20C 유산 보존 모범도시 도약을
세계유산으로 보존한다는 것은 도시의 자긍심을 가질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도시의 발전에 저해된다는 인식도 함께 가지고 있다. 특히 장엄한 사찰은 역사성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지만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피란 유산 같은 20세기 건축이나 산업유산들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는 ‘진정성’ 관점에서 본다면 가치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다. 그리고 피란 유산은 이미 시대를 거쳐 변형되어 활용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훼손된 거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고대 유적은 대개 도심과 떨어진 곳에 보존되어 있지만, 20세기 유산은 사람들이 현재 치열하게 살아가는 도심 한복판이나 주요 산업지대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개발 압력에 직면하면서 경제적 효율성과 재개발 요구, 교통 변화나 도시 기능을 어떻게 수용해 나갈 것인지 또는 선정되기 힘들지 않나라는 생각도 든다. 선정되더라고 과연 유지될까라는 의문도 드는 게 사실이다.
과거 영국의 리버풀의 경우 18~19세기 세계 무역의 중심지였던 근대 항구 시설과 건축 경관을 인정받아 2004년 등재되었다. 그러나 대규모 부두 재개발(초고층 빌딩 건설)과 에버턴 FC의 대형 축구장 건설을 강행하여 역사적 스카이라인과 경관이 회복 불가능하게 훼손되어 등재가 철회된 사례도 있다. 결국 우리가 추진하고자 하는 피란 유산은 보존과 개발이라는 양극의 문제 속에 어떻게 공존할 것인지가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이는 우리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유네스코 또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세기 유산을 인류가 함께 기억해야 할 ‘탁월한 보편적 가치’로 인정하고 있으며 박물관처럼 박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도시의 지속 가능한 발전과 조화를 이루며 ‘사용하면서 보존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다.
20세기 중반, 한국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형성된 ‘피란수도 부산 유산’은 유네스코가 고민하는 모든 의제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품고 있다. 부산의 유산들은 화려한 건축미를 뽐내지는 않지만,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생존하고 회복했는지를 보여주는 강인한 ‘회복력’의 증거이다. 또한, 박제된 유적이 아니라 현재까지 시민들의 삶과 공존하며 도심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역동적 유산’으로 도시의 공존을 보여주는 유산이다. 단순한 비극의 역사를 갈등이 아닌 ‘인류의 평화와 공존’이라는 보편적 가치로 승화시킨 스토리텔링도 가지고 있다. 그간 조사 및 기초 데이터 구축과 스토리텔링을 위한 연구 활동을 진행하였으며 시민참여를 이끌기 위한 투어프로그램을 기획하여 운영해왔다. 이제는 통합 관리 기구 및 법적 보호 체계 구축, 역사문화마을 마스터플랜 수립, 시민 펀딩 등 지역공동체 활동 강화를 위한 실무적인 계획을 통해 공감대 형성과 활동력을 구체화하기 위한 방법을 찾았으면 한다.
이번 대회는 유네스코의 고민인 20세기 유산에 대한 가치를 확인하는 자리이다. 이러한 활동이 전문가들의 참여에서 그치지 않고 시민들의 참여와 함께 ‘피란수도 부산’의 가치를 이해하고 제안함으로서 단순한 홍보를 하는 장이 아닌 20세기 근현대 유산 보존의 패러다임을 이끄는 완충도시 부산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2026-07-21 [18:10]
-
[송성수의 과기세] 지역과학기술혁신법과 부산
오늘날 과학기술은 권위 있는 지식 체계의 일종이자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하는 원천으로서 인간의 삶과 사회의 변화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특히 과학기술의 혁신은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고 기존 산업의 부가가치를 높이며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원동력으로 여겨지고 있다. 세계 각국은 과학기술정책에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있으며, 모든 정책에 과학기술이 스며드는 경향도 점점 강화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정책은 1967년에 과학기술진흥법이 제정되고 과학기술처(현재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설립되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과학기술정책은 2001년에 제정된 과학기술기본법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5개년 단위로 과학기술기본계획이 수립되어 추진되고 있다. 과학기술기본법의 제7조는 과학기술기본계획이 다루어야 할 주제를 열거하고 있는데, 그중에는 ‘지방과학기술의 진흥’도 포함되어 있다.
2015년 조례 제정 BISTEP 설립
하지만 시 연구비 서울 11.8%
예산 늘리고 사업 실효성 높여야
주목할 만한 지표로는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2009년부터 매년 발표하는 지역과학기술혁신역량지수(R-COSTII)를 들 수 있다. 부산광역시는 17개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2021년 9위, 2022년 7위, 2023년 9위, 2024년 9위, 2025년 8위를 기록했다. 안타깝게도 1위 경기, 2위 서울, 3위 대전은 거의 고정되어 있으며, 4위 이하는 1위 대비 절반도 되지 않는 평점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개선하기 위해 최근 정부는 ‘지역주도 과학기술혁신 촉진에 관한 법률(약칭 지역과학기술혁신법)’을 마련했다. 이 법은 올해 5월 19일에 제정되었으며, 내년 1월 1일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지역과학기술혁신법 제6조는 지역과학기술혁신계획을, 제9조는 지역과학기술 중장기 투자혁신전략을 5년 단위로 수립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제10조는 지역의 과학기술자문회의에 관한 사항을, 제11조는 지역별 과학기술 전담기관에 관한 사항을 담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부산의 경우에는 이러한 제도적 기반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2015년에는 부산광역시 과학기술진흥조례가 제정되면서 부산광역시 과학기술진흥위원회가 설치되는 가운데 부산과학기술기획평가원(BISTEP)이 설립되었다. 2017년에는 제1차 부산과학기술진흥종합계획, 2022년에는 제2차 부산과학기술진흥종합계획이 수립되었고, 2023년에는 제1차 부산 연구개발 중장기 투자전략이 마련되었다. 외향적인 측면에서는 부산의 과학기술정책 시스템이 전국적인 모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과학기술진흥위원회는 초창기를 제외하면 매년 1~2회 개최되는 것에 머물러 있고, 위원장인 부산광역시장의 발걸음도 거의 없다. BISTEP의 명칭이 2018년 부산산업과학혁신원, 2024년 부산과학기술고등교육진흥원으로 바뀌는 등 과학기술 전담기관의 기능과 역할도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이제는 부산의 과학기술정책이 형식적 제도화를 넘어 실질적 성과를 축적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
2024년을 기준으로 부산은 국비 전체의 4.2%인 1조 1100억 원을 유치했다. 서울, 경기, 대전, 경남에 이어 전국 5위이다. 부산의 국비 유치액에서 정부부처가 차지하는 비중은 해양수산부 30.1%, 산업통상자원부 21.1%, 과학기술정보통신부 18.8% 등으로 조사된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 전체 연구개발 예산에서 부처별 비중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33.7%, 산업통상자원부 18.2%, 해양수산부 2.8% 등으로 집계된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산시가 직접 투자하는 연구개발예산이다. 2023년을 기준으로 부산시는 국비 매칭으로 687억 7700만 원, 자체 연구개발비로 167억 1400만 원을 포함하여 854억 9100만 원을 투자했다. 그중에서 자체 연구개발비는 전국 8위를 기록했는데, 1위인 서울은 1413억 7400만 원을 기록했다. 부산의 인구는 서울의 3분의 1 정도이지만 부산의 자체 연구개발비는 서울의 11.8%에 불과한 셈이다.
이와 같은 간단한 통계만 보더라도 부산의 과학기술정책이 안고 있는 숙제는 분명해진다. 부산시의 자체 연구개발비가 큰 폭으로 증가해야 하고 해양수산부 이외의 다른 부처로부터 연구개발 예산을 더 많아 유치해야 하는 것이다.
BISTEP과 같은 과학기술 전담기관은 단순히 연구개발 과제를 지원하고 관리하는 기관이 아니다. 부산시의 과학기술 활동을 분석하고 평가하면서 더욱 바람직한 발전 방향을 기획하는 것이 일차적인 임무이다. 그런 과정에서 부산시가 주관하는 과학기술 사업의 실효성이 높아질 수 있을 것이고, 부산이 주도적으로 중앙정부의 역(逆)매칭을 제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정부의 연구개발에 관한 포괄보조금이 자리를 잡으면 과학기술 전담기관의 기능은 더욱 확대될 것이다. 과학기술로 다시 뛰는 부산을 기대한다.
2026-07-14 [18:13]
-
[안상욱의 글로벌 산책] 외면하는 사이 훅 다가온 재앙, 기후변화
6월 말이 생일인 필자의 기억 속 생일은 언제나 장맛비와 함께였다. 생일 아침 미역국을 먹고 우산을 쓴 채 학교로 향했다. 신발 속으로 빗물이 스며들고 교복 바짓단이 금세 젖곤 했던 게 6월 말의 당연한 풍경이었다.
올해는 달랐다. 한반도에서는 예년보다 장마가 늦어졌고, 7월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될 것이라는 전망이 이어지고 있다. 예년 같으면 습하고 무더웠을 6월 말이 오히려 건조하고 맑은 날씨 속에 지나가고 있다. 물론 잠시 쾌적한 날씨를 반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결코 반가운 현상이 아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계절의 질서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반면 같은 시기 서유럽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스페인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는 기온이 40도를 넘는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고 있다. 학교가 휴교하고 철도 운행이 차질을 빚고 있으며, 도로와 활주로가 열을 견디지 못해 시설 점검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미 폭염으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보도도 이어지고 있다.
우리 역시 안전지대가 아니다. 지난해 우리나라는 기록적 폭염을 경험하였다.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최고 체감온도가 40도 안팎까지 치솟았고, 열대야가 장기간 이어졌다. 철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레일 온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자 안전을 위해 KTX와 일반열차는 감속 운행을 실시하였고, 연착이 크게 늘어났다. 기후변화는 이제 휴가철 불편을 넘어 사회 기반시설과 국가 운영 시스템까지 흔들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외면하려고 하여도 기후위기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이미 우리의 삶을 하나씩 바꾸고 있다.
기후변화는 단순히 날씨가 조금 달라지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식탁과 산업, 그리고 국가 경제의 구조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다. 제주도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감귤은 이제 남해안과 전남 지역까지 재배지가 확대되고 있으며, 사과의 주산지도 점차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반대로 고랭지에서 재배되던 일부 농산물은 생산이 어려워지고 있다.
바다의 변화는 더욱 심각하다. 수온 상승으로 동해에서 흔히 잡히던 오징어는 어획량이 급감하였고, 국민 생선이었던 명태는 사실상 국내 바다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여름철 고수온 현상은 광어와 굴 양식에도 큰 피해를 주고 있다. 특히 굴은 적정 수온을 벗어나면서 폐사가 늘어나고 있으며, 양식 어민들은 매년 반복되는 피해에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 바다는 기후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공간이 되었고, 그 피해는 결국 어민과 소비자 모두에게 돌아오고 있다.
기후위기는 이제 지정학적 문제와도 연결되고 있다. 동해에서 명태가 사라지면서 현재 우리가 소비하는 명태와 명란 대부분은 러시아산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국제정세는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냈다. 미국의 대러시아 제재로 인해 미국 시장에 명란젓을 수출하는 우리 기업들은 러시아산 명태알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미국에 수출하려면, 훨씬 비싼 알래스카산 원료를 사용해야 하고, 이는 생산비 상승과 기업 경쟁력 약화로 이어진다. 기후변화가 바다의 생태계를 바꾸고, 지정학이 공급망을 흔들면서 우리의 식탁과 수출 산업이 동시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기후위기와 지정학은 더 이상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의 위기가 다른 위기를 증폭시키며 서로 연결되고 있다.
그럼에도 세계의 일부 유력 정치인들은 여전히 기후변화를 부정하거나 과장된 문제로 치부한다. 당장의 성장률과 선거를 의식한 정치적 계산은 과학자들의 경고보다 앞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자연은 정치 일정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북극의 빙하는 계속 줄어들고, 해수면은 조금씩 상승하며, 이상기후는 해마다 새로운 기록을 만들어내고 있다. 기후위기는 찬성과 반대로 선택할 수 있는 정치적 의제가 아니라 이미 우리 앞에 닥친 현실이다.
이제 기후위기는 환경정책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식량안보와 에너지안보, 공급망과 국제무역, 국가안보를 모두 아우르는 핵심 의제가 되었다. 기후정책은 곧 경제정책이며 산업정책이고 외교안보정책이다. 앞으로 국가의 경쟁력은 얼마나 빠르게 변화에 적응하고 새로운 산업을 육성하며 국제협력을 확대하느냐에 달려 있다.
올해 생일을 맞으며 문득 깨닫는다. 예전에는 달력을 보며 계절을 기억했다. 그러나 이제는 변해버린 기후가 달력을 다시 쓰고 있다. 늦어진 장마는 단순한 계절의 변덕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가 보내는 분명한 경고다.
이제 필요한 것은 무의미한 논쟁이 아니라, 과학에 기반한 정책과 국제협력, 그리고 우리 모두의 실천이다. 늦어진 장마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2026-06-30 [17:59]
-
[백진규의 법의 창] '선관위 해체' 가능한가?
지난 6월 3일 실시된 전국동시지방선거 및 국회의원 보궐선거 과정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선거관리 부실은 큰 충격을 안겼다. 선거 당일 일부 유권자들은 참정권을 침해받았다. 선거 결과 자체를 뒤흔들 중대한 위법이 있었는지는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관리 부실만으로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사안이다.
국민들은 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해 ‘선거를 관리하는 기관이 이런 기본적인 준비도 하지 못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됐다. 불신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처음 생긴 것이 아니다. 최근 수년 동안 선관위는 고위직 자녀 특혜 채용 의혹으로 사회적 비판을 받았다. 선거 공정성을 수호해야 할 기관이 채용의 공정성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었다. 감사원의 감사 과정에서 선관위는 헌법기관의 독립성을 이유로 감사에 반발했고, 이를 둘러싼 논쟁은 결국 헌법재판소 판단까지 이어졌다. 국민들은 ‘독립성은 강조하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지금 선관위 문제는 국가 기관 신뢰의 문제다. 신뢰가 흔들리자 ‘선관위 해체론’까지 제기되고 있다. 현실적으로 선관위 해체는 쉽지 않다. 선관위는 정부 부처가 아니다. 헌법 제114조가 직접 설치를 규정한 헌법기관이다. 대통령도, 국회도, 정부도 선거를 마음대로 좌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헌법이 특별히 만든 독립기관이다. 우리 헌정사는 관권선거라는 아픈 경험을 갖고 있다. 과거 권력이 선거를 통제하고 결과에 영향을 미쳤던 시대를 경험했기 때문에 헌법은 선거를 독립기관이 관리하도록 설계했다. 따라서 선관위를 없애려면 법률 개정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
문제는 해체 이후다. 선관위를 없앤다고 해서 선거관리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선거를 관리하면 정치적 중립성 논란이 생길 수 있다. 지방자치단체가 맡으면 지역별 편차가 발생할 수 있다. 법원이 맡는다면 사법부의 정치화 우려가 제기될 수 있다. 결국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 할 것은 선관위 해체보다는 선관위의 ‘책임성을 강화하는 개혁’이다. 독립성은 외부 간섭을 막기 위한 장치이지, 국민적 통제를 받지 않는 절대적 특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독립성 없는 선거관리는 권력의 도구가 될 수 있고, 책임성 없는 독립기관은 국민 신뢰를 잃게 된다.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지금 생각해 볼 수 있는 현실적인 개혁의 방향은 아래와 같다.
첫째, 인사와 채용 절차를 전면 공개해야 한다. 모든 채용 절차를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공개 시스템으로 전환하고, 감사 결과와 징계 결과 역시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둘째, 선거관리 과정에 대한 국민 참여형 감시 제도를 확대해야 한다. 현재 선거 참관인 제도가 운영되고 있지만 실제 역할은 제한적이다. 개표 과정뿐 아니라 투표용지 인쇄, 운송, 보관, 폐기까지 전 과정에 시민·학계·법조계가 참여하는 공개 검증 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셋째, 선거관리 실패에 대한 책임 체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 투표용지 부족과 같은 관리 부실이 발생하면 단순한 유감 표명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원인 조사와 재발 방지 대책은 물론이고, 책임 있는 공직자에 대한 인사 조치 등 법적 책임까지 명확히 이루어져야 한다. 넷째, 선관위원 구성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 현재 중앙선관위원은 대통령, 국회, 대법원장이 각각 추천하거나 지명한다. 제도적 균형을 고려한 구조이지만 정치권과 법조계 중심이라는 비판도 있다. 향후에는 정보기술 전문가, 선거 행정 전문가, 시민사회 대표 등이 참여하는 추천 절차를 마련해 다양성과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 다섯째, 선거 시스템에 대한 상설 검증 기구를 도입해야 한다. 오늘날 선거는 전산망, 통합선거인명부, 개표 장비 등 다양한 기술이 활용된다.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음모론과 불신을 막기 위해서는 선관위 설명보다 독립적인 전문가 검증이 필요하다. 정보보안 전문가와 대학 연구 기관이 참여하는 상설 검증 기구를 통해 시스템을 정기적으로 공개 점검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선진 민주국가들의 선거관리 방식은 다르다. 그러나 공통점은 하나다. 선거관리 기구가 국민 신뢰를 잃으면 민주주의도 흔들린다는 사실이다. 국민 신뢰를 잃은 국가 기관은 오래 지속할 수 없다. 국민은 완벽한 기관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실수를 인정하고, 책임을 지고, 스스로를 개혁하는 기관을 원한다. 선관위가 지금 해야 할 일도 마찬가지다.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다. 그러나 꽃은 저절로 피지 않는다. 건강한 토양이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그 토양은 헌법과 제도에 기초한 국민의 신뢰다. 지금 국민이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해체 논쟁이 아니라 공정성과 책임성의 회복일 것이다. 그 요구에 응답하지 못한다면 선관위의 위기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2026-06-23 [18:04]
-
[송하주의 AI 톡]AI 데이터센터 시대, 전력은 정치다
최근 미국 정치권에서는 흥미로운 이슈가 부상하고 있다. 올해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AI 데이터센터 건설 문제가 주요 정치 쟁점으로 떠오른 것이다.
미국 전역에서는 현재 1500곳 이상의 데이터센터가 계획 또는 건설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주요 경합 선거구를 중심으로 대규모 데이터센터 건설 계획이 추진되면서 주민들의 반발도 커지고 있다. 전기요금 상승, 송전망 부담 증가, 냉각수 사용 확대, 환경 훼손 등을 우려하는 지역 주민들과 빅테크의 정치 후원금 사이에서 후보들이 줄타기하는 상황이다. 인공지능 시대 국가 경쟁력이 AI 데이터센터의 확보에 달려있다고 볼 때, 중국과 경쟁하는 미국의 정치권 입장에서는 유권자들의 눈치를 봐야 하기에 국가 경쟁력 확보만을 내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AI 확산에 따른 일자리 감소를 앞으로 닥쳐올 가장 큰 사회적 갈등 요인으로 예상했지만, 실제 미국 사회에서는 전력과 환경 문제가 더 직접적인 정치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AI가 더 이상 추상적인 기술 담론에 머물지 않고 지역의 전기요금과 물 사용, 환경 문제로 내려온 것이다.
AI 산업이 막대한 전력을 소비하는 이유는 초거대 언어모델(LLM)의 개발과 서비스 운영 그리고 GPU를 포함한 장비의 냉각을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LLM의 개발을 위한 학습 과정만 해도 수만 개의 GPU가 장착된 데이터센터를 수개월 동안 24시간 가동한다. 여기에 전 세계 수억 명의 이용자가 동시에 생성형 AI 서비스를 사용할 때 발생하는 추론 연산을 위한 계산 과정에서 전력 소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 뿐만 아니라 AI 반도체가 발생시키는 막대한 열을 식히기 위한 냉각 설비를 가동하기 위해서도 대량의 전력과 물이 있어야 한다. AI 데이터센터는 대체로 기존 데이터센터보다 훨씬 많은 냉각 자원을 사용하는데, LLM 서비스 운영 에너지에 상응하는 에너지를 냉각에 사용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지난해 전 세계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량은 전체 전력 공급량의 2% 정도였으나 이 수치가 2030년에는 약 8% 수준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AI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력이 있어야 동작하는 대표적인 전력 집약 산업이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에너지 산업의 판도까지 바꾸고 있다. 한때 태양광과 풍력 발전의 확산 속에서 사양 산업처럼 여겨졌던 원자력 발전이 다시 주목받는 그것도 이 때문이다. AI 산업은 대규모의 안정적인 전력이 필요하다. 날씨와 시간대에 따라 출력이 달라지는 전력원으로는 초대형 데이터센터의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고 안정적인 기저 전력원이 필수적이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과 각국의 정부가 올해부터 소형 모듈 원자력(SMR) 기술 개발과 설비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이유이다.
한편, 원자력 발전의 확대를 위해서는 수년 이상의 시일이 걸릴 것이므로 시급한 전력 공급 확대를 위해 화력 발전을 늘리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며칠 전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석탄 산업 부흥을 위해 1조 원 이상의 예산을 투입하기로 밝히고, 이 조치의 목적 중 하나가 AI 산업을 지원하기 위한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한 것이라 주장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번 조치를 신속하게 수행하기 위해 ‘국방물자생산법’을 동원했다는 점이다. 이 법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신속한 군수품 조달을 위해 제정된 것으로 국가 비상사태 시에 대통령이 필수 물품을 생산하고 공급할 수 있도록 지시할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법을 통해 의회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예산을 집행할 수 있게 했다. 여기에는 다양한 정치적 셈법이 포함되었을 것이나 미국 정부 차원에서 AI 산업을 신속하게 지원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그동안 AI 산업의 경쟁이 데이터 확보와 GPU 확보에 집중됐다면, 이제는 안정적인 전력 확보 경쟁으로 확대되고 있다. 전력이 AI 산업의 단순한 비용 요소가 아니라 핵심 경쟁력이 된 것이다. 산업화 시대의 경쟁력이 제철소, 자동차 공장, 조선소에서 나왔다면, 인공지능 시대의 경쟁력은 데이터센터에서 나온다. 그리고 데이터센터의 생명선은 전력이다. 미국에서 데이터센터가 선거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우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다. 인공지능 시대의 패권은 알고리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결국 AI를 움직이는 것은 전기다. 새로운 경쟁의 전장은 반도체 공장뿐만 아니라 발전소와 전력망으로 옮겨가고 있다. AI는 이제 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와 산업, 환경과 지역사회가 맞물린 총체적 과제가 되었다. 앞으로 AI 경쟁의 승자는 가장 뛰어난 모델을 만든 나라가 아니라 가장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나라가 될지도 모른다.
2026-06-16 [18:17]
-
[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자연 진동과 온난화의 중첩
기상학계는 올해 하반기에 적도 동태평양 해수면 온도가 2℃ 이상 상승하는 슈퍼 엘니뇨가 발생할 가능성을 경고한다. 이는 2015~2016년, 2023~2024년 이후 짧은 주기로 다시 찾아오는 강력한 엘니뇨 현상으로, 전 지구적 기상 이변을 촉발하고 지구 평균기온을 다시 한번 최고치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국제적 대비가 시급하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여름철 이상 기후와 강수 패턴의 변동성 확대 등 계절 기후의 불안정성이 심화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엘니뇨와 라니냐는 열대 태평양 해역의 해수면 온도가 평상시보다 높거나 낮아지며 발생하는 현상으로, 해양과 대기의 긴밀한 상호작용이 빚어낸 역동적인 결과물이다. 엘니뇨는 적도 부근 동태평양과 중앙태평양의 바닷물 온도가 평년보다 높은 상태로 수개월 이상 지속되는 현상이다. 반대로 라니냐는 같은 지역의 해수면 온도가 평년보다 낮아지는 현상이다. 해양은 거대한 열 저장소로서 에너지를 축적하고 운반하며 대기 순환의 흐름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적 불균형은 전 지구적 기상 이변의 기폭제가 된다. 이러한 현상은 보통 2~7년의 간격을 두고 되풀이되는 준주기성을 띤다.
라니냐 시기 한반도 여름 덥고 습한 폭염
해수면 온도 상승, 강수 패턴 극단적 변화
슈퍼 엘니뇨 인한 복합적 기후도 대비해야
엘니뇨와 라니냐는 전 지구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지만, 두 현상이 가져오는 기후 패턴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엘니뇨 현상이 발생하면 무역풍이 약해지면서 따뜻한 해수가 동태평양에 머물게 되어, 지구 평균 온도가 상승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따라 남미 지역에는 폭우가, 호주와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심각한 가뭄이 발생한다. 반면, 라니냐가 발생하면 무역풍이 강해져 동태평양의 차가운 해수 용승이 활발해지며 지구 온도를 낮춘다. 이 시기에는 아시아와 호주 지역에 폭우가 내리고, 미국 남부 등지에는 가뭄이 찾아온다. 두 현상은 서로 반대되는 매커니즘을 가지면서도 전 지구적인 강수와 기온 패턴을 교란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보통 20세기에 엘니뇨와 라니냐는 우리나라 여름 기후에 특정한 경향성을 부여했다. 서태평양에 위치한 우리나라는 엘니뇨가 발생할 경우 바닷물이 평소보다 차가워져 여름이 비교적 시원해지는 경향이 있었고, 반대로 하강기류가 발달하여 가뭄이 들 확률이 높았다. 반면 라니냐가 발생하면 서태평양의 수온이 상승하여 북태평양 고기압이 강하게 발달하고, 이로 인해 덥고 습한 폭염이 한반도의 여름을 주도하는 양상을 보였다. 1997~1998년의 강력한 엘니뇨 당시에도 우리나라는 여름철 저온 현상과 집중호우를 경험하며 이러한 전형적인 패턴을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서 전체적으로 라니냐가 주도적인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라니냐 시기와는 많은 차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여름 기후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기후 온난화와 함께 전 지구적인 해수면 온도가 상승하면서 라니냐의 전형적인 영향이 변형되고 있다. 과거에는 라니냐 시기에 폭염이 나타났다면, 최근의 라니냐는 온난화된 배경 기후와 결합해 대기 불안정을 가중시킨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기본적으로 상승한 해수면 온도는 대기 중으로 더 많은 수증기를 공급한다. 이는 라니냐 시기의 강수 패턴을 극단적으로 변화시켜 ‘극한 호우’와 같은 이례적인 기상 현상을 유발한다. 즉, 같은 라니냐 현상이라도 20세기와 21세기는 온난화라는 변수 탓에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의 양상과 강도가 크게 달라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슈퍼 엘니뇨가 예상되는 올해 여름에 대한 전망은 더욱 복잡해진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슈퍼 엘니뇨 해였던 1982년과 1997년 여름을 상기해 보면, 당시 기후 패턴만으로는 현재 상황을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다. 자연적 기후 진동인 엘니뇨에 인위적인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 강력하게 결부돼 있기 때문이다. 과거 관측 자료만으로 가늠할 수 없는 복합적 기후 반응이라는 새 국면에 직면한 지금, 엘니뇨 연구의 진정한 출발점은 현상 자체를 관통하는 심층적 역학 매커니즘 규명에 있다.
온난화 역습으로 해수면 온도와 대기 중 수증기량이 전례 없이 치솟아 과거 통계적 유추에만 의존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한계에 부딪혔다. 무역풍 약화가 열대 해양의 열 재분배를 유도하는 경로, 켈빈파와 로스비파가 해양 열구조를 변형시키는 매커니즘, 이 변화가 대기 대순환과 맞물리는 물리적 과정을 역학적으로 이해해야만 새로운 기후가 펼쳐지는 장에서의 변화를 온전히 설명할 수 있다. 과거 관측 자료는 귀중한 자산이지만, 기후의 기본 공식 자체가 바뀐 지금, 현상의 물리적 본질을 꿰뚫지 못한다면 그 어떤 예측도 사상누각이다. 전대미문의 슈퍼 엘니뇨를 앞둔 지금이 관측, 수치 모델링, 현장 조사를 망라하는 통합적 연구 체계 구축에 과감한 투자를 단행해야 할 골든타임이다.
2026-06-09 [18:21]
-
[홍순연의 도시 공감] 오늘은 도시다움을 실천하는 날
오늘은 지방 선거 날이다. 누구를 지지하건 뜨겁고 절실한 목소리를 골목마다 들으며 6월을 맞이했다. 집으로 배달된 선거홍보물을 보면 후보들마다 지역 내 현안과 도시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내용을 숫자, 문자로 빼곡하게 나열하고, 지역을 위한 다양한 정책들을 내놓고 있었다. 시민들은 정치적인 부분보다 동네의 발전을 기대하며 공약을 꼼꼼히 읽는 등 4년에 한번 돌아오는 이벤트 같은 선거를 즐기는 심정으로 몇 주를 보낸듯하다.
이 시기에 선거 현수막을 보고 질문이 많아진 중학교 2학년 아들은 ‘글로벌허브도시’ ‘해양수도 부산 완성’이라는 슬로건을 읽으면서 학교에서 친구들끼리도 선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교육감 선거는 우리가 투표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불만도 제기한다. 그리고 역사 시간에 배운 민주주의에 대한 내용을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리스 시대를 이야기하면서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도시국가, 즉 폴리스에서 아고라를 중심으로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의사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노예·외국인은 제외된 제한된 민주주의라고도 자신감 있게 설명한다.
선거는 새로운 그림 그릴 기회
공약 읽으며 지역 발전 부푼 꿈
부산 도약시킬 새 움직임 기대
아이들뿐만 아니라 유권자들이 후보자들이 내놓은 정책을 기준으로 누구나 걸어서 접근 가능한가, 무료로 앉고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한가, 그늘·화장실·안전·야간조명·무장애 동선이 있는가, 어린이·청년·노인·장애인·이주민이 함께 쓸 수 있는가 등 다양한 고민들이 이야기되는 시기가 선거 기간인 것이다. 그동안 우리 동네에 다양한 정책을 기준으로 자신의 관점을 공감하고 의견을 나누는 시간이 마무리되는 날이 바로 오늘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도시에서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 말하고, 듣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선거가 시작되었다. 도시 속에서 낯선 사람들이 함께 살며 갈등을 조정하고, 공공문제를 말하고, 권력을 감시하고, 공동의 결정을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는 선거제도를 활용한다. 특히 공동체를 위한 다양한 활동력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선거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를 통해 도시 공간의 활용도를 한 번 더 보여주는 시간이 된다. 광장과 거리는 시민이 집회하고 의사를 표현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공원·도서관·문화시설은 다양한 계층이 만나는 일상적 공론장이 된다. 그리고 경로당, 복지관은 주민이 지역 문제를 논의하는 공간이 된다. 특히 시장은 의견을 수렴하고 시민을 만나는 장소로 중요한 공간이 된다. 경우에 따라 항만·역세권·재개발지역은 개발이익과 공공성을 둘러싼 정책적 조정이 필요한 공간으로 다양한 화두를 던지게 된다. 더불어 미래도시에 대한 큰 그림 또한 그릴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결국 도시는 단순히 건물과 도로가 모인 공간이 아니라, 시민이 주체적으로 결정한 다양한 결정의 결과가 켜켜이 쌓인 역사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선거는 도시의 다양한 활동력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회이며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찾고 즐기는 시기인 듯하다.
부산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도시이다. 1979년 부마민주항쟁은 유신 체제에 저항한 대표적 도시민주화 운동이라고 말을 한다. 부산과 마산 지역의 항쟁 이후 10·26 사건과 유신체제 종말로 이어지는 역사적 전환점이 된 장소가 바로 부산이다. 그래서 민주, 시민이라는 이름을 붙인 상징적인 공간이 있다. 대청동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는 민주공원은 부산 시민이 주도한 근현대 민주화 운동 전체를 기리는 전국 유일의 상징적 공원이며 민주 항쟁 기념관은 이러한 민주화의 기억을 보존하고 시민교육의 장으로 구축된 공간이다. 회오리 경사로를 중심으로 각 실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중앙부에 위치한 기념관 중앙에 우뚝 솟은 상징 조형물 ‘민주의 횃불’ 구조물은 하늘을 향해 힘 있게 상승하는 모습으로 공간을 압도하고 있다. 민주공원은 역사적 교육장과 함께 생태환경, 생활커뮤니티에 대한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시민공원도 마찬가지이다. 근현대사 100년 동안 외세에 빼앗겼다가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이 땅은 평화와 치유의 상징이자, 부산 최대의 도심 속 공원이다. 과거 일제강점기 일본군 기지 및 경마장, 해방 후 미군 하야리아 캠프로 쓰였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공간이지만 축구장 60여 개 크기(약 47만㎡)의 대규모 평지 공원으로 재탄생돼 역사의 회복과 시민들의 활동력을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제 시민공원은 피크닉, 놀이터, 문화예술 공연장, 아이들의 여름 물놀이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딱딱한 역사가 아닌 어쩌면 도시에서 자유롭게 방문하고 즐길 수 있는 장소로 민주, 시민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있다.
오늘은 민주, 시민이라는 단어가 상징하는 ‘자연스러움’을 토대로 새로운 움직임을 기대하는 날이다. 부산이 실천하는 도시로 지역마다 다양함을 담을 수 있는 시작이 바로 오늘이다.
2026-06-02 [18:01]
-
[송성수의 과기세] 플라스틱 시대의 명암
미국 침공으로 시작된 이란 전쟁 때문에 고유가 행진이 계속되고 있다. 인류가 얼마나 석유에 의존하며 살고 있는지 새삼스레 느꼈다. 쓰레기 종량제 봉투를 사재기하는 움직임도 있었고, 플라스틱 물약 통의 공급이 달리는 소동도 벌어졌다. 플라스틱의 원료인 나프타가 석유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비닐은 얇고 유연한 플라스틱 필름을 뜻하므로 플라스틱의 한 형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플라스틱은 가소성을 가진 고분자 물질로 정의된다. 가소성은 어떤 물체가 외부로부터 힘을 받아 형태가 바뀐 뒤 그 힘이 없어져도 본래의 모양으로 복구되지 않는 성질을 의미한다. ‘성형수술’(plastic surgery)의 영어 표현에 플라스틱이 포함된 것도 흥미롭다. 오늘날의 플라스틱은 대부분 화학적으로 합성된 플라스틱으로 합성수지와 거의 동일한 외연을 갖는다. 합성수지는 합성된 고분자 물질 가운데 합성섬유와 합성고무를 제외한 것을 총칭한다.
플라스틱 산업의 시대를 연 것은 1907년 발명된 베이클라이트였다. 벨기에 출신의 미국 엔지니어인 레오 베이클랜드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플라스틱이었다. 베이클라이트로 처음 만든 제품은 당구공이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너무 딱딱해서 탄력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이클라이트의 용도는 무궁무진했다. 절연체, 주물용 틀, 건물 바닥 판, 건축용 타일, 전화기 몸통, 축음기 디스크, 배전기 뚜껑, 라디오 덮개 등이 베이클라이트로 만들어졌다. 급기야 1924년 9월 22일에는 〈타임〉이 베이클랜드를 표지 인물로 선정했다.
베이클라이트 이후에도 ‘폴리’(poly)로 시작되는 여러 플라스틱이 등장했다. 폴리에틸렌(PE), 폴리프로필렌(PP), 폴리스티렌(PS), 폴리염화비닐(PVC), 폴리우레탄(PUR) 등이 그것이다. 폴리에틸렌은 비닐봉투, 랩, 지퍼백 등과 같은 포장재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폴리프로필렌은 자동차와 가전제품의 소재로, 폴리스티렌은 요구르트와 인스턴트식품의 용기로 사용되고 있다. PVC는 파이프, 전선 피복, 케이블 등에 적용되고 있고, 폴리우레탄은 바닥재 매트릭스에서 자주 접할 수 있다.
1950년 전 세계에서 생산된 플라스틱의 양은 200만 톤 내외로 집계된다. 이후에 플라스틱 생산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해 2002년 2억 톤, 2012년에는 3억 톤을 넘어섰고, 2022년에는 4억 30만 톤을 기록했다. 1950년 이후에 제조된 모든 플라스틱의 양을 합치면 100억 톤이 넘는다고 하니, 전 세계의 모든 사람이 각자 1톤 넘게 사용한 셈이 된다. 게다가 플라스틱의 대부분은 미생물이 분해할 수 없는 화학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여전히 지구 어딘가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1997년에 찰스 무어 선장은 하와이에서 캘리포니아로 가던 중에 거대한 플라스틱 섬을 발견했다. “갑판에서 해수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지없이 맑고 깨끗해야 할 그곳에 플라스틱 쓰레기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겠지만, 정말 플라스틱 없이 비어 있는 곳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어 선장이 발견한 이 거대한 플라스틱 섬은 ‘태평양 거대 쓰레기 지대’로 명명되고 있으며, 그 면적은 독일 국토 면적의 약 4.5배인 160만㎢에 달한다.
최근에는 미세플라스틱이 바다로 유출되는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인간이 쓰고 버린 각종 플라스틱 제품이 자외선을 받아 잘게 분해되면서 만들어진 미세플라스틱이 바다에 대량으로 떠다니고 있다. 물고기가 미세플라스틱을 먹고 이 물고기를 인간이 먹고 있다. 플라스틱은 유기물을 쉽게 흡착하므로 각종 독성물질을 농축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우려스럽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 계속된다면, 2050년에는 바다에 떠다니는 미세플라스틱의 무게가 전 세계 물고기의 무게를 넘어설 것이라고 한다.
인간이 플라스틱의 편리함에 묻혀 지내는 동안 ‘플라스틱 오염’이라는 부메랑이 돌아오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응하여 일회용 플라스틱 제품의 규제, 플라스틱 재활용의 촉진, 쓰레기 처리 시설의 확충, 생분해성 플라스틱의 개발 등과 같은 여러 대책이 강구되고 있다. 이와 함께 플라스틱 제품의 사용을 의식적으로 줄이면서 살아가자는 ‘플라스틱 다이어트’ 운동도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가령 에코백과 텀블러가 친환경의 징표로 여겨지고 있지만, 그것을 꾸준히 사용하지 않으면 오히려 환경을 해칠 수 있다. 에코백은 131회 이상을 사용해야 일회용 비닐을 대체하는 효과를 가지며, 플라스틱 텀블러는 50회, 스테인리스 텀블러는 220회 이상 사용하지 않으면 일회용 종이컵보다 환경에 더욱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2026-05-26 [18:03]
-
[안상욱의 글로벌 산책] 미국 의존도를 줄이자는 목소리
최근 국제정세의 핵심 키워드는 단연 ‘불확실성’이다. 특히 아이러니한 점은 냉전 이후 국제 질서를 설계하고 유지해 온 미국이 이제는 국제사회의 가장 큰 불확실성 변수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국제사회의 핵심 화두는 중국 공급망 의존 문제였다. 코로나19 팬데믹과 미중 전략경쟁 심화 과정에서 미국, 유럽연합(EU), 일본은 모두 중국 중심 공급망 구조의 위험성을 체감하였다. 희토류, 배터리, 반도체, 핵심 광물 등 전략 산업에서 중국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우려가 확산되었고, 이에 따라 ‘디리스킹(De-risking)’ 전략이 본격화했다.
그러나 2026년 현재 국제사회의 고민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제는 중국 뿐만 아니라 미국 의존 리스크 자체가 새로운 글로벌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은 동맹국들에 대해서조차 예측 불가능한 통상·안보 압박을 반복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EU산 자동차 관세 문제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이후 미국의 중동 파병 협조에 비협조적인 유럽산 자동차에 대한 관세를 기존 15% 수준에서 25%까지 인상하겠다고 발표하며 유럽 자동차 산업을 강하게 압박하였다. EU 자동차 업계는 큰 충격에 빠졌고, 유럽 내부에서는 “동맹국에게도 언제든 경제적 압박이 가능하다”는 위기의식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더 나아가 미국은 독일의 중동 및 대미 안보 협력 태도를 문제 삼으며 독일 주둔 미군 5000명 감축 방침까지 검토·발표하면서 유럽 안보 지형에도 충격을 주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정책의 예측 가능성이 크게 약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정부는 관세 인상을 강하게 발표했다가도 다시 시행 시점을 7월 4일까지 연기하는 등 매우 변덕스러운 모습을 반복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 입장에서는 단순히 높은 관세 자체보다도 “내일 어떤 결정이 나올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이 훨씬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결국 글로벌 기업들은 특정 국가 의존보다 ‘정책 리스크 분산’ 자체를 새로운 생존 전략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최근 중동 상황 역시 미국 중심 안보 질서의 한계를 보여준다. 본래 안전 보장을 위해 운영되던 중동지역 내 미군 기지들이 오히려 공격 목표물이 되면서 미군기지를 유치한 국가의 무고한 민간인 희생이 확대되는 역설적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과거에는 미군 기지가 안정의 상징이었다면, 이제는 지정학적 충돌 시 가장 먼저 공격받는 전략 시설로 인식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주요 국가들은 비교적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EU는 감정적 대응보다는 전략적 자율성(strategic autonomy) 강화에 집중하고 있다. 미국과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에너지·방산·첨단산업 분야에서 독자적 역량 확보를 추진하고 있다. 러시아는 장기 제재 체제 속에서도 중국·인도·중동과의 협력을 확대하며 새로운 경제 네트워크를 구축 중이다. 중국은 미국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면서도 공급망·희토류·배터리·AI 경쟁력을 장기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일본 역시 방위력 증강과 함께 경제안보 차원의 공급망 다변화를 조용히 추진하고 있다.
한국 역시 복합적인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한미동맹은 여전히 한국 안보의 핵심축이다. 그러나 동시에 중국은 최대 교역국이며, 중동은 핵심 에너지 공급처이다. 미국의 관세 정책 변화, 미중 갈등, 중동 리스크,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동시에 한국 경제와 산업에 영향을 주고 있다. 결국 특정 국가에 대한 과도한 의존 자체가 위험이 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특히 한국과 같은 무역 의존도가 높은 국가는 이러한 변화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조선, 철강 등 한국의 핵심 산업은 미국·중국·EU 시장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미국의 보호무역 강화와 관세 압박은 단순히 수출 감소 문제를 넘어 글로벌 투자 전략과 공급망 구조 자체를 흔들 수 있다. 심지어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주요 정책은 미국 대통령의 변덕스럽고 즉흥적인 정책 발표에 따라 갈팡질팡하고 있다.
과거 국제사회는 중국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디리스킹을 논의했다. 그러나 이제는 중국 뿐 아니라 미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 역시 줄여야 한다는 새로운 목소리가 등장하고 있다. 국제질서가 다극화할수록 국가들은 어느 한 축에 일방적으로 의존하기보다 공급망, 시장, 외교, 안보를 다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불확실성의 시대일수록 중요한 것은 냉정함이다. 국제정치는 감정이 아니라 국익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지금 세계는 미국 중심 질서의 균열 속에서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가는 거대한 전환기 한가운데 서 있다.
2026-05-12 [1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