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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진규의 법의 창] '선관위 해체' 가능한가?
지난 6월 3일 실시된 전국동시지방선거 및 국회의원 보궐선거 과정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선거관리 부실은 큰 충격을 안겼다. 선거 당일 일부 유권자들은 참정권을 침해받았다. 선거 결과 자체를 뒤흔들 중대한 위법이 있었는지는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관리 부실만으로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사안이다.
국민들은 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해 ‘선거를 관리하는 기관이 이런 기본적인 준비도 하지 못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됐다. 불신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처음 생긴 것이 아니다. 최근 수년 동안 선관위는 고위직 자녀 특혜 채용 의혹으로 사회적 비판을 받았다. 선거 공정성을 수호해야 할 기관이 채용의 공정성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었다. 감사원의 감사 과정에서 선관위는 헌법기관의 독립성을 이유로 감사에 반발했고, 이를 둘러싼 논쟁은 결국 헌법재판소 판단까지 이어졌다. 국민들은 ‘독립성은 강조하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지금 선관위 문제는 국가 기관 신뢰의 문제다. 신뢰가 흔들리자 ‘선관위 해체론’까지 제기되고 있다. 현실적으로 선관위 해체는 쉽지 않다. 선관위는 정부 부처가 아니다. 헌법 제114조가 직접 설치를 규정한 헌법기관이다. 대통령도, 국회도, 정부도 선거를 마음대로 좌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헌법이 특별히 만든 독립기관이다. 우리 헌정사는 관권선거라는 아픈 경험을 갖고 있다. 과거 권력이 선거를 통제하고 결과에 영향을 미쳤던 시대를 경험했기 때문에 헌법은 선거를 독립기관이 관리하도록 설계했다. 따라서 선관위를 없애려면 법률 개정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
문제는 해체 이후다. 선관위를 없앤다고 해서 선거관리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선거를 관리하면 정치적 중립성 논란이 생길 수 있다. 지방자치단체가 맡으면 지역별 편차가 발생할 수 있다. 법원이 맡는다면 사법부의 정치화 우려가 제기될 수 있다. 결국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 할 것은 선관위 해체보다는 선관위의 ‘책임성을 강화하는 개혁’이다. 독립성은 외부 간섭을 막기 위한 장치이지, 국민적 통제를 받지 않는 절대적 특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독립성 없는 선거관리는 권력의 도구가 될 수 있고, 책임성 없는 독립기관은 국민 신뢰를 잃게 된다.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지금 생각해 볼 수 있는 현실적인 개혁의 방향은 아래와 같다.
첫째, 인사와 채용 절차를 전면 공개해야 한다. 모든 채용 절차를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공개 시스템으로 전환하고, 감사 결과와 징계 결과 역시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둘째, 선거관리 과정에 대한 국민 참여형 감시 제도를 확대해야 한다. 현재 선거 참관인 제도가 운영되고 있지만 실제 역할은 제한적이다. 개표 과정뿐 아니라 투표용지 인쇄, 운송, 보관, 폐기까지 전 과정에 시민·학계·법조계가 참여하는 공개 검증 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셋째, 선거관리 실패에 대한 책임 체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 투표용지 부족과 같은 관리 부실이 발생하면 단순한 유감 표명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원인 조사와 재발 방지 대책은 물론이고, 책임 있는 공직자에 대한 인사 조치 등 법적 책임까지 명확히 이루어져야 한다. 넷째, 선관위원 구성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 현재 중앙선관위원은 대통령, 국회, 대법원장이 각각 추천하거나 지명한다. 제도적 균형을 고려한 구조이지만 정치권과 법조계 중심이라는 비판도 있다. 향후에는 정보기술 전문가, 선거 행정 전문가, 시민사회 대표 등이 참여하는 추천 절차를 마련해 다양성과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 다섯째, 선거 시스템에 대한 상설 검증 기구를 도입해야 한다. 오늘날 선거는 전산망, 통합선거인명부, 개표 장비 등 다양한 기술이 활용된다.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음모론과 불신을 막기 위해서는 선관위 설명보다 독립적인 전문가 검증이 필요하다. 정보보안 전문가와 대학 연구 기관이 참여하는 상설 검증 기구를 통해 시스템을 정기적으로 공개 점검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선진 민주국가들의 선거관리 방식은 다르다. 그러나 공통점은 하나다. 선거관리 기구가 국민 신뢰를 잃으면 민주주의도 흔들린다는 사실이다. 국민 신뢰를 잃은 국가 기관은 오래 지속할 수 없다. 국민은 완벽한 기관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실수를 인정하고, 책임을 지고, 스스로를 개혁하는 기관을 원한다. 선관위가 지금 해야 할 일도 마찬가지다.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다. 그러나 꽃은 저절로 피지 않는다. 건강한 토양이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그 토양은 헌법과 제도에 기초한 국민의 신뢰다. 지금 국민이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해체 논쟁이 아니라 공정성과 책임성의 회복일 것이다. 그 요구에 응답하지 못한다면 선관위의 위기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2026-06-23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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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하주의 AI 톡]AI 데이터센터 시대, 전력은 정치다
최근 미국 정치권에서는 흥미로운 이슈가 부상하고 있다. 올해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AI 데이터센터 건설 문제가 주요 정치 쟁점으로 떠오른 것이다.
미국 전역에서는 현재 1500곳 이상의 데이터센터가 계획 또는 건설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주요 경합 선거구를 중심으로 대규모 데이터센터 건설 계획이 추진되면서 주민들의 반발도 커지고 있다. 전기요금 상승, 송전망 부담 증가, 냉각수 사용 확대, 환경 훼손 등을 우려하는 지역 주민들과 빅테크의 정치 후원금 사이에서 후보들이 줄타기하는 상황이다. 인공지능 시대 국가 경쟁력이 AI 데이터센터의 확보에 달려있다고 볼 때, 중국과 경쟁하는 미국의 정치권 입장에서는 유권자들의 눈치를 봐야 하기에 국가 경쟁력 확보만을 내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AI 확산에 따른 일자리 감소를 앞으로 닥쳐올 가장 큰 사회적 갈등 요인으로 예상했지만, 실제 미국 사회에서는 전력과 환경 문제가 더 직접적인 정치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AI가 더 이상 추상적인 기술 담론에 머물지 않고 지역의 전기요금과 물 사용, 환경 문제로 내려온 것이다.
AI 산업이 막대한 전력을 소비하는 이유는 초거대 언어모델(LLM)의 개발과 서비스 운영 그리고 GPU를 포함한 장비의 냉각을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LLM의 개발을 위한 학습 과정만 해도 수만 개의 GPU가 장착된 데이터센터를 수개월 동안 24시간 가동한다. 여기에 전 세계 수억 명의 이용자가 동시에 생성형 AI 서비스를 사용할 때 발생하는 추론 연산을 위한 계산 과정에서 전력 소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 뿐만 아니라 AI 반도체가 발생시키는 막대한 열을 식히기 위한 냉각 설비를 가동하기 위해서도 대량의 전력과 물이 있어야 한다. AI 데이터센터는 대체로 기존 데이터센터보다 훨씬 많은 냉각 자원을 사용하는데, LLM 서비스 운영 에너지에 상응하는 에너지를 냉각에 사용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지난해 전 세계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량은 전체 전력 공급량의 2% 정도였으나 이 수치가 2030년에는 약 8% 수준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AI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력이 있어야 동작하는 대표적인 전력 집약 산업이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에너지 산업의 판도까지 바꾸고 있다. 한때 태양광과 풍력 발전의 확산 속에서 사양 산업처럼 여겨졌던 원자력 발전이 다시 주목받는 그것도 이 때문이다. AI 산업은 대규모의 안정적인 전력이 필요하다. 날씨와 시간대에 따라 출력이 달라지는 전력원으로는 초대형 데이터센터의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고 안정적인 기저 전력원이 필수적이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과 각국의 정부가 올해부터 소형 모듈 원자력(SMR) 기술 개발과 설비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이유이다.
한편, 원자력 발전의 확대를 위해서는 수년 이상의 시일이 걸릴 것이므로 시급한 전력 공급 확대를 위해 화력 발전을 늘리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며칠 전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석탄 산업 부흥을 위해 1조 원 이상의 예산을 투입하기로 밝히고, 이 조치의 목적 중 하나가 AI 산업을 지원하기 위한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한 것이라 주장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번 조치를 신속하게 수행하기 위해 ‘국방물자생산법’을 동원했다는 점이다. 이 법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신속한 군수품 조달을 위해 제정된 것으로 국가 비상사태 시에 대통령이 필수 물품을 생산하고 공급할 수 있도록 지시할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법을 통해 의회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예산을 집행할 수 있게 했다. 여기에는 다양한 정치적 셈법이 포함되었을 것이나 미국 정부 차원에서 AI 산업을 신속하게 지원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그동안 AI 산업의 경쟁이 데이터 확보와 GPU 확보에 집중됐다면, 이제는 안정적인 전력 확보 경쟁으로 확대되고 있다. 전력이 AI 산업의 단순한 비용 요소가 아니라 핵심 경쟁력이 된 것이다. 산업화 시대의 경쟁력이 제철소, 자동차 공장, 조선소에서 나왔다면, 인공지능 시대의 경쟁력은 데이터센터에서 나온다. 그리고 데이터센터의 생명선은 전력이다. 미국에서 데이터센터가 선거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우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다. 인공지능 시대의 패권은 알고리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결국 AI를 움직이는 것은 전기다. 새로운 경쟁의 전장은 반도체 공장뿐만 아니라 발전소와 전력망으로 옮겨가고 있다. AI는 이제 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와 산업, 환경과 지역사회가 맞물린 총체적 과제가 되었다. 앞으로 AI 경쟁의 승자는 가장 뛰어난 모델을 만든 나라가 아니라 가장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나라가 될지도 모른다.
2026-06-16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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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자연 진동과 온난화의 중첩
기상학계는 올해 하반기에 적도 동태평양 해수면 온도가 2℃ 이상 상승하는 슈퍼 엘니뇨가 발생할 가능성을 경고한다. 이는 2015~2016년, 2023~2024년 이후 짧은 주기로 다시 찾아오는 강력한 엘니뇨 현상으로, 전 지구적 기상 이변을 촉발하고 지구 평균기온을 다시 한번 최고치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국제적 대비가 시급하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여름철 이상 기후와 강수 패턴의 변동성 확대 등 계절 기후의 불안정성이 심화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엘니뇨와 라니냐는 열대 태평양 해역의 해수면 온도가 평상시보다 높거나 낮아지며 발생하는 현상으로, 해양과 대기의 긴밀한 상호작용이 빚어낸 역동적인 결과물이다. 엘니뇨는 적도 부근 동태평양과 중앙태평양의 바닷물 온도가 평년보다 높은 상태로 수개월 이상 지속되는 현상이다. 반대로 라니냐는 같은 지역의 해수면 온도가 평년보다 낮아지는 현상이다. 해양은 거대한 열 저장소로서 에너지를 축적하고 운반하며 대기 순환의 흐름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적 불균형은 전 지구적 기상 이변의 기폭제가 된다. 이러한 현상은 보통 2~7년의 간격을 두고 되풀이되는 준주기성을 띤다.
라니냐 시기 한반도 여름 덥고 습한 폭염
해수면 온도 상승, 강수 패턴 극단적 변화
슈퍼 엘니뇨 인한 복합적 기후도 대비해야
엘니뇨와 라니냐는 전 지구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지만, 두 현상이 가져오는 기후 패턴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엘니뇨 현상이 발생하면 무역풍이 약해지면서 따뜻한 해수가 동태평양에 머물게 되어, 지구 평균 온도가 상승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따라 남미 지역에는 폭우가, 호주와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심각한 가뭄이 발생한다. 반면, 라니냐가 발생하면 무역풍이 강해져 동태평양의 차가운 해수 용승이 활발해지며 지구 온도를 낮춘다. 이 시기에는 아시아와 호주 지역에 폭우가 내리고, 미국 남부 등지에는 가뭄이 찾아온다. 두 현상은 서로 반대되는 매커니즘을 가지면서도 전 지구적인 강수와 기온 패턴을 교란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보통 20세기에 엘니뇨와 라니냐는 우리나라 여름 기후에 특정한 경향성을 부여했다. 서태평양에 위치한 우리나라는 엘니뇨가 발생할 경우 바닷물이 평소보다 차가워져 여름이 비교적 시원해지는 경향이 있었고, 반대로 하강기류가 발달하여 가뭄이 들 확률이 높았다. 반면 라니냐가 발생하면 서태평양의 수온이 상승하여 북태평양 고기압이 강하게 발달하고, 이로 인해 덥고 습한 폭염이 한반도의 여름을 주도하는 양상을 보였다. 1997~1998년의 강력한 엘니뇨 당시에도 우리나라는 여름철 저온 현상과 집중호우를 경험하며 이러한 전형적인 패턴을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서 전체적으로 라니냐가 주도적인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라니냐 시기와는 많은 차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여름 기후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기후 온난화와 함께 전 지구적인 해수면 온도가 상승하면서 라니냐의 전형적인 영향이 변형되고 있다. 과거에는 라니냐 시기에 폭염이 나타났다면, 최근의 라니냐는 온난화된 배경 기후와 결합해 대기 불안정을 가중시킨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기본적으로 상승한 해수면 온도는 대기 중으로 더 많은 수증기를 공급한다. 이는 라니냐 시기의 강수 패턴을 극단적으로 변화시켜 ‘극한 호우’와 같은 이례적인 기상 현상을 유발한다. 즉, 같은 라니냐 현상이라도 20세기와 21세기는 온난화라는 변수 탓에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의 양상과 강도가 크게 달라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슈퍼 엘니뇨가 예상되는 올해 여름에 대한 전망은 더욱 복잡해진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슈퍼 엘니뇨 해였던 1982년과 1997년 여름을 상기해 보면, 당시 기후 패턴만으로는 현재 상황을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다. 자연적 기후 진동인 엘니뇨에 인위적인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 강력하게 결부돼 있기 때문이다. 과거 관측 자료만으로 가늠할 수 없는 복합적 기후 반응이라는 새 국면에 직면한 지금, 엘니뇨 연구의 진정한 출발점은 현상 자체를 관통하는 심층적 역학 매커니즘 규명에 있다.
온난화 역습으로 해수면 온도와 대기 중 수증기량이 전례 없이 치솟아 과거 통계적 유추에만 의존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한계에 부딪혔다. 무역풍 약화가 열대 해양의 열 재분배를 유도하는 경로, 켈빈파와 로스비파가 해양 열구조를 변형시키는 매커니즘, 이 변화가 대기 대순환과 맞물리는 물리적 과정을 역학적으로 이해해야만 새로운 기후가 펼쳐지는 장에서의 변화를 온전히 설명할 수 있다. 과거 관측 자료는 귀중한 자산이지만, 기후의 기본 공식 자체가 바뀐 지금, 현상의 물리적 본질을 꿰뚫지 못한다면 그 어떤 예측도 사상누각이다. 전대미문의 슈퍼 엘니뇨를 앞둔 지금이 관측, 수치 모델링, 현장 조사를 망라하는 통합적 연구 체계 구축에 과감한 투자를 단행해야 할 골든타임이다.
2026-06-09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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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연의 도시 공감] 오늘은 도시다움을 실천하는 날
오늘은 지방 선거 날이다. 누구를 지지하건 뜨겁고 절실한 목소리를 골목마다 들으며 6월을 맞이했다. 집으로 배달된 선거홍보물을 보면 후보들마다 지역 내 현안과 도시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내용을 숫자, 문자로 빼곡하게 나열하고, 지역을 위한 다양한 정책들을 내놓고 있었다. 시민들은 정치적인 부분보다 동네의 발전을 기대하며 공약을 꼼꼼히 읽는 등 4년에 한번 돌아오는 이벤트 같은 선거를 즐기는 심정으로 몇 주를 보낸듯하다.
이 시기에 선거 현수막을 보고 질문이 많아진 중학교 2학년 아들은 ‘글로벌허브도시’ ‘해양수도 부산 완성’이라는 슬로건을 읽으면서 학교에서 친구들끼리도 선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교육감 선거는 우리가 투표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불만도 제기한다. 그리고 역사 시간에 배운 민주주의에 대한 내용을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리스 시대를 이야기하면서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도시국가, 즉 폴리스에서 아고라를 중심으로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의사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노예·외국인은 제외된 제한된 민주주의라고도 자신감 있게 설명한다.
선거는 새로운 그림 그릴 기회
공약 읽으며 지역 발전 부푼 꿈
부산 도약시킬 새 움직임 기대
아이들뿐만 아니라 유권자들이 후보자들이 내놓은 정책을 기준으로 누구나 걸어서 접근 가능한가, 무료로 앉고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한가, 그늘·화장실·안전·야간조명·무장애 동선이 있는가, 어린이·청년·노인·장애인·이주민이 함께 쓸 수 있는가 등 다양한 고민들이 이야기되는 시기가 선거 기간인 것이다. 그동안 우리 동네에 다양한 정책을 기준으로 자신의 관점을 공감하고 의견을 나누는 시간이 마무리되는 날이 바로 오늘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도시에서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 말하고, 듣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선거가 시작되었다. 도시 속에서 낯선 사람들이 함께 살며 갈등을 조정하고, 공공문제를 말하고, 권력을 감시하고, 공동의 결정을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는 선거제도를 활용한다. 특히 공동체를 위한 다양한 활동력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선거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를 통해 도시 공간의 활용도를 한 번 더 보여주는 시간이 된다. 광장과 거리는 시민이 집회하고 의사를 표현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공원·도서관·문화시설은 다양한 계층이 만나는 일상적 공론장이 된다. 그리고 경로당, 복지관은 주민이 지역 문제를 논의하는 공간이 된다. 특히 시장은 의견을 수렴하고 시민을 만나는 장소로 중요한 공간이 된다. 경우에 따라 항만·역세권·재개발지역은 개발이익과 공공성을 둘러싼 정책적 조정이 필요한 공간으로 다양한 화두를 던지게 된다. 더불어 미래도시에 대한 큰 그림 또한 그릴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결국 도시는 단순히 건물과 도로가 모인 공간이 아니라, 시민이 주체적으로 결정한 다양한 결정의 결과가 켜켜이 쌓인 역사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선거는 도시의 다양한 활동력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회이며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찾고 즐기는 시기인 듯하다.
부산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도시이다. 1979년 부마민주항쟁은 유신 체제에 저항한 대표적 도시민주화 운동이라고 말을 한다. 부산과 마산 지역의 항쟁 이후 10·26 사건과 유신체제 종말로 이어지는 역사적 전환점이 된 장소가 바로 부산이다. 그래서 민주, 시민이라는 이름을 붙인 상징적인 공간이 있다. 대청동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는 민주공원은 부산 시민이 주도한 근현대 민주화 운동 전체를 기리는 전국 유일의 상징적 공원이며 민주 항쟁 기념관은 이러한 민주화의 기억을 보존하고 시민교육의 장으로 구축된 공간이다. 회오리 경사로를 중심으로 각 실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중앙부에 위치한 기념관 중앙에 우뚝 솟은 상징 조형물 ‘민주의 횃불’ 구조물은 하늘을 향해 힘 있게 상승하는 모습으로 공간을 압도하고 있다. 민주공원은 역사적 교육장과 함께 생태환경, 생활커뮤니티에 대한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시민공원도 마찬가지이다. 근현대사 100년 동안 외세에 빼앗겼다가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이 땅은 평화와 치유의 상징이자, 부산 최대의 도심 속 공원이다. 과거 일제강점기 일본군 기지 및 경마장, 해방 후 미군 하야리아 캠프로 쓰였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공간이지만 축구장 60여 개 크기(약 47만㎡)의 대규모 평지 공원으로 재탄생돼 역사의 회복과 시민들의 활동력을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제 시민공원은 피크닉, 놀이터, 문화예술 공연장, 아이들의 여름 물놀이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딱딱한 역사가 아닌 어쩌면 도시에서 자유롭게 방문하고 즐길 수 있는 장소로 민주, 시민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있다.
오늘은 민주, 시민이라는 단어가 상징하는 ‘자연스러움’을 토대로 새로운 움직임을 기대하는 날이다. 부산이 실천하는 도시로 지역마다 다양함을 담을 수 있는 시작이 바로 오늘이다.
2026-06-02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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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성수의 과기세] 플라스틱 시대의 명암
미국 침공으로 시작된 이란 전쟁 때문에 고유가 행진이 계속되고 있다. 인류가 얼마나 석유에 의존하며 살고 있는지 새삼스레 느꼈다. 쓰레기 종량제 봉투를 사재기하는 움직임도 있었고, 플라스틱 물약 통의 공급이 달리는 소동도 벌어졌다. 플라스틱의 원료인 나프타가 석유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비닐은 얇고 유연한 플라스틱 필름을 뜻하므로 플라스틱의 한 형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플라스틱은 가소성을 가진 고분자 물질로 정의된다. 가소성은 어떤 물체가 외부로부터 힘을 받아 형태가 바뀐 뒤 그 힘이 없어져도 본래의 모양으로 복구되지 않는 성질을 의미한다. ‘성형수술’(plastic surgery)의 영어 표현에 플라스틱이 포함된 것도 흥미롭다. 오늘날의 플라스틱은 대부분 화학적으로 합성된 플라스틱으로 합성수지와 거의 동일한 외연을 갖는다. 합성수지는 합성된 고분자 물질 가운데 합성섬유와 합성고무를 제외한 것을 총칭한다.
플라스틱 산업의 시대를 연 것은 1907년 발명된 베이클라이트였다. 벨기에 출신의 미국 엔지니어인 레오 베이클랜드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플라스틱이었다. 베이클라이트로 처음 만든 제품은 당구공이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너무 딱딱해서 탄력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이클라이트의 용도는 무궁무진했다. 절연체, 주물용 틀, 건물 바닥 판, 건축용 타일, 전화기 몸통, 축음기 디스크, 배전기 뚜껑, 라디오 덮개 등이 베이클라이트로 만들어졌다. 급기야 1924년 9월 22일에는 〈타임〉이 베이클랜드를 표지 인물로 선정했다.
베이클라이트 이후에도 ‘폴리’(poly)로 시작되는 여러 플라스틱이 등장했다. 폴리에틸렌(PE), 폴리프로필렌(PP), 폴리스티렌(PS), 폴리염화비닐(PVC), 폴리우레탄(PUR) 등이 그것이다. 폴리에틸렌은 비닐봉투, 랩, 지퍼백 등과 같은 포장재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폴리프로필렌은 자동차와 가전제품의 소재로, 폴리스티렌은 요구르트와 인스턴트식품의 용기로 사용되고 있다. PVC는 파이프, 전선 피복, 케이블 등에 적용되고 있고, 폴리우레탄은 바닥재 매트릭스에서 자주 접할 수 있다.
1950년 전 세계에서 생산된 플라스틱의 양은 200만 톤 내외로 집계된다. 이후에 플라스틱 생산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해 2002년 2억 톤, 2012년에는 3억 톤을 넘어섰고, 2022년에는 4억 30만 톤을 기록했다. 1950년 이후에 제조된 모든 플라스틱의 양을 합치면 100억 톤이 넘는다고 하니, 전 세계의 모든 사람이 각자 1톤 넘게 사용한 셈이 된다. 게다가 플라스틱의 대부분은 미생물이 분해할 수 없는 화학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여전히 지구 어딘가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1997년에 찰스 무어 선장은 하와이에서 캘리포니아로 가던 중에 거대한 플라스틱 섬을 발견했다. “갑판에서 해수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지없이 맑고 깨끗해야 할 그곳에 플라스틱 쓰레기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겠지만, 정말 플라스틱 없이 비어 있는 곳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어 선장이 발견한 이 거대한 플라스틱 섬은 ‘태평양 거대 쓰레기 지대’로 명명되고 있으며, 그 면적은 독일 국토 면적의 약 4.5배인 160만㎢에 달한다.
최근에는 미세플라스틱이 바다로 유출되는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인간이 쓰고 버린 각종 플라스틱 제품이 자외선을 받아 잘게 분해되면서 만들어진 미세플라스틱이 바다에 대량으로 떠다니고 있다. 물고기가 미세플라스틱을 먹고 이 물고기를 인간이 먹고 있다. 플라스틱은 유기물을 쉽게 흡착하므로 각종 독성물질을 농축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우려스럽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 계속된다면, 2050년에는 바다에 떠다니는 미세플라스틱의 무게가 전 세계 물고기의 무게를 넘어설 것이라고 한다.
인간이 플라스틱의 편리함에 묻혀 지내는 동안 ‘플라스틱 오염’이라는 부메랑이 돌아오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응하여 일회용 플라스틱 제품의 규제, 플라스틱 재활용의 촉진, 쓰레기 처리 시설의 확충, 생분해성 플라스틱의 개발 등과 같은 여러 대책이 강구되고 있다. 이와 함께 플라스틱 제품의 사용을 의식적으로 줄이면서 살아가자는 ‘플라스틱 다이어트’ 운동도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가령 에코백과 텀블러가 친환경의 징표로 여겨지고 있지만, 그것을 꾸준히 사용하지 않으면 오히려 환경을 해칠 수 있다. 에코백은 131회 이상을 사용해야 일회용 비닐을 대체하는 효과를 가지며, 플라스틱 텀블러는 50회, 스테인리스 텀블러는 220회 이상 사용하지 않으면 일회용 종이컵보다 환경에 더욱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2026-05-26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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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욱의 글로벌 산책] 미국 의존도를 줄이자는 목소리
최근 국제정세의 핵심 키워드는 단연 ‘불확실성’이다. 특히 아이러니한 점은 냉전 이후 국제 질서를 설계하고 유지해 온 미국이 이제는 국제사회의 가장 큰 불확실성 변수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국제사회의 핵심 화두는 중국 공급망 의존 문제였다. 코로나19 팬데믹과 미중 전략경쟁 심화 과정에서 미국, 유럽연합(EU), 일본은 모두 중국 중심 공급망 구조의 위험성을 체감하였다. 희토류, 배터리, 반도체, 핵심 광물 등 전략 산업에서 중국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우려가 확산되었고, 이에 따라 ‘디리스킹(De-risking)’ 전략이 본격화했다.
그러나 2026년 현재 국제사회의 고민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제는 중국 뿐만 아니라 미국 의존 리스크 자체가 새로운 글로벌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은 동맹국들에 대해서조차 예측 불가능한 통상·안보 압박을 반복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EU산 자동차 관세 문제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이후 미국의 중동 파병 협조에 비협조적인 유럽산 자동차에 대한 관세를 기존 15% 수준에서 25%까지 인상하겠다고 발표하며 유럽 자동차 산업을 강하게 압박하였다. EU 자동차 업계는 큰 충격에 빠졌고, 유럽 내부에서는 “동맹국에게도 언제든 경제적 압박이 가능하다”는 위기의식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더 나아가 미국은 독일의 중동 및 대미 안보 협력 태도를 문제 삼으며 독일 주둔 미군 5000명 감축 방침까지 검토·발표하면서 유럽 안보 지형에도 충격을 주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정책의 예측 가능성이 크게 약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정부는 관세 인상을 강하게 발표했다가도 다시 시행 시점을 7월 4일까지 연기하는 등 매우 변덕스러운 모습을 반복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 입장에서는 단순히 높은 관세 자체보다도 “내일 어떤 결정이 나올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이 훨씬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결국 글로벌 기업들은 특정 국가 의존보다 ‘정책 리스크 분산’ 자체를 새로운 생존 전략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최근 중동 상황 역시 미국 중심 안보 질서의 한계를 보여준다. 본래 안전 보장을 위해 운영되던 중동지역 내 미군 기지들이 오히려 공격 목표물이 되면서 미군기지를 유치한 국가의 무고한 민간인 희생이 확대되는 역설적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과거에는 미군 기지가 안정의 상징이었다면, 이제는 지정학적 충돌 시 가장 먼저 공격받는 전략 시설로 인식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주요 국가들은 비교적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EU는 감정적 대응보다는 전략적 자율성(strategic autonomy) 강화에 집중하고 있다. 미국과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에너지·방산·첨단산업 분야에서 독자적 역량 확보를 추진하고 있다. 러시아는 장기 제재 체제 속에서도 중국·인도·중동과의 협력을 확대하며 새로운 경제 네트워크를 구축 중이다. 중국은 미국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면서도 공급망·희토류·배터리·AI 경쟁력을 장기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일본 역시 방위력 증강과 함께 경제안보 차원의 공급망 다변화를 조용히 추진하고 있다.
한국 역시 복합적인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한미동맹은 여전히 한국 안보의 핵심축이다. 그러나 동시에 중국은 최대 교역국이며, 중동은 핵심 에너지 공급처이다. 미국의 관세 정책 변화, 미중 갈등, 중동 리스크,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동시에 한국 경제와 산업에 영향을 주고 있다. 결국 특정 국가에 대한 과도한 의존 자체가 위험이 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특히 한국과 같은 무역 의존도가 높은 국가는 이러한 변화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조선, 철강 등 한국의 핵심 산업은 미국·중국·EU 시장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미국의 보호무역 강화와 관세 압박은 단순히 수출 감소 문제를 넘어 글로벌 투자 전략과 공급망 구조 자체를 흔들 수 있다. 심지어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주요 정책은 미국 대통령의 변덕스럽고 즉흥적인 정책 발표에 따라 갈팡질팡하고 있다.
과거 국제사회는 중국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디리스킹을 논의했다. 그러나 이제는 중국 뿐 아니라 미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 역시 줄여야 한다는 새로운 목소리가 등장하고 있다. 국제질서가 다극화할수록 국가들은 어느 한 축에 일방적으로 의존하기보다 공급망, 시장, 외교, 안보를 다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불확실성의 시대일수록 중요한 것은 냉정함이다. 국제정치는 감정이 아니라 국익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지금 세계는 미국 중심 질서의 균열 속에서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가는 거대한 전환기 한가운데 서 있다.
2026-05-12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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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진규의 법의 창] 민법 일부 개정… 상속 '혈연'에서 '책임'으로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이어지며 ‘가족’의 의미를 떠올리게 하는 시기다. 하지만 이 따뜻한 말 뒤에는 우리가 외면해 온 현실도 있다. 자식을 돌보지 않은 부모, 부모를 버린 자식, 생전에는 연락조차 없다가 사망 후에 상속만 요구하는 경우들이다. 이제는 ‘패륜 상속’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다.
그동안 우리 민법은 ‘가족이면 당연히 상속을 받는다’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권리와 의무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룰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법이 ‘천륜’을 신뢰하는 사이, 천륜은 때로 책임 없는 권리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다. 함께 살지도, 돌보지도 않았던 가족이 사망 후 재산을 요구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많은 사람이 ‘이게 과연 공정한가?’라는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형제자매 유류분 폐지·핵심 가족만 인정
부모도 부양 의무 위반 땐 상속 못 받아
'가족이니까' 아닌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
이러한 문제에 변화가 생겼다. 2024년 유류분에 관한 헌법재판소 결정, 가수 구하라 사건 등에 이어진 지난 3월 17일 민법 일부 개정이다. 이번 개정은 상속의 기준을 ‘혈연’에서 ‘책임과 기여’로 바꾼 것, 그리고 상속의 본질을 ‘혈연 중심의 권리’에서 ‘책임과 기여에 기반을 둔 정당한 분배’로 전환하려는 내용이라 평가할 수 있다.
개정 민법의 내용은 먼저, 형제자매의 유류분이 폐지되었다(민법 제1112조). 유류분은 법에서 최소한 보장해 주는 상속 몫인데, 이제 형제자매는 이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부모나 자식처럼 생활을 함께하는 핵심 가족 중심으로만 최소 상속분을 인정하겠다는 취지다. 또 하나 중요한 변화는 이른바 ‘구하라법’이다. 민법 조문으로는 민법 제1004조의2(상속권 상실 선고)이다.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다. 자녀 또는 부모를 돌보지 않았거나 학대를 한 경우처럼, 부양의무를 중대하게 위반하는 등 그 책임을 심각하게 저버린 사람은 아예 상속을 받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가족이니까 무조건 상속받는다’는 말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사안에 따라 가족 관계의 실질이 법적 판단의 대상이 된 것이다.
상속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기준도 바뀌었다. 과거에는 기본적으로 법에 정해진 비율대로 나눴지만, 이제는 누가 얼마나 기여했는지가 중요해졌다. 오랜 기간 부모를 모시고 간병하거나 재산 유지, 증가에 도움을 준 경우, 그 기여가 인정되면 더 많은 상속을 받을 수 있다(민법 제1008조 단서). 특히 이러한 기여는 유류분 분쟁에서도 고려될 수 있어, 오랜 기간 부모를 돌보고 재산 유지, 증가에 기여한 상속인이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는 ‘효도는 손해’라는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는 중요한 전환이다. 실무적으로 중요한 변화도 있다. 예전에는 유류분 소송을 하면 부동산 지분을 나눠 갖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한 채의 집을 두고 지분이 쪼개져 분쟁이 길어지는 일이 흔했다. 이제는 재산의 가액을 청구할 수 있어, 원칙적으로 ‘현금으로 정산’하도록 바뀌었다(민법 제1115조). 분쟁을 줄이고 거래를 깔끔하게 정리하기 위한 조치다.
다만 아직 모든 기준이 완전히 정리된 것은 아니다. 입법의 속도가 현실을 완전히 따라잡은 것은 아니다. 일부 규정은 시행되었으나 세부 기준과 해석은 여전히 형성 과정에 있다. 법은 바뀌었지만, 실제 사건에서 어디까지를 ‘부양의무 위반’으로 볼 것인지, 기여를 ‘얼마나 인정’할 것인지 등은 앞으로 법원이 하나씩 기준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럼에도 이번 변화의 방향은 분명하다. 상속은 더 이상 단순한 가족의 권리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제 법은 묻는다. 그 관계에서 어떤 책임을 다했는지, 그리고 그 책임 없이도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지를 본다는 것이다. 돌보지 않았으면서 권리만 요구하는 관계까지 보호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 이번 개정의 핵심이고, 법의 선언이다.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이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 속 가족은 혈연으로 묶인 관계가 아니다. 사회의 주변에서 우연히 모인 사람들이 서로를 돌보고 의지하며 ‘가족처럼’ 살아간다. 법적으로는 가족이 아니지만, 실제 삶에서는 누구보다 가족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는 묻는다. 가족은 과연 혈연으로만 정의되는 것인가, 아니면 함께 살아가며 책임을 나누는 관계인가.
이번 민법 개정이 던지는 질문 역시 다르지 않다. 단지 피로 이어졌다는 이유만으로 권리를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그 가족 관계 속에서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를 물을 것인가. 가족은 단순히 피로 이어진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돌보고 책임지는 관계다. 그리고 이제 법도 그 최소한의 기준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늦었지만 필요한 변화다. 이제는 ‘가족이니까’가 아니라, ‘무엇을 했는가’가 기준이 되는 시대다. 법은 이미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질문은, 어쩌면 우리 각자의 삶을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다.
2026-05-05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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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하주의 AI 톡] AI시대의 '토큰' 경제
필자와 연배가 비슷하거나 높은 독자들은 ‘토큰’이라는 말을 들으면 예전에 버스를 탈 때 사용하던, 가운데 구멍이 뚫린 동그란 금속 조각을 떠올릴 것이다. 일정한 요금을 내고 이동할 수 있는 권리를 상징하던 그 작은 물건은 이제 사라졌지만, 토큰이라는 개념은 뜻밖에도 인공지능 시대에 다시 등장했다.
오늘날 인공지능 기술의 핵심인 대규모언어모델(LLM)에서 토큰은 텍스트를 이해하고 처리하는 최소 단위다. 인공지능은 우리가 입력하는 문장을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게 쪼갠 토큰으로 변환해 처리한다. 예를 들어 ‘안녕하세요!’라는 문장은 ‘안녕’, ‘하세요’, ‘!’와 같은 조각으로 나뉜다. 이렇게 나뉜 토큰들은 다시 고차원의 숫자 벡터로 변환되는데, 이는 단어의 의미를 수치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설명을 단순화하면 ‘안녕’은 어떤 좌표, ‘하세요’는 또 다른 좌표로 표현된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의미가 비슷한 단어일수록 이 공간에서 서로 가까이, 의미가 다른 단어일수록 멀리 위치한다는 것이다. 마치 지구상의 위치를 위도와 경도로 나타내듯, 언어의 의미가 좌표 공간 속에 배치되는 셈이다.
LLM은 이렇게 변환된 토큰들을 바탕으로 다음에 올 확률이 가장 높은 토큰을 선택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문장을 만들어낸다. 입력과 출력이 모두 토큰 단위로 이루어지는 만큼, 토큰은 곧 인공지능의 사고와 표현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변화가 있다. 이 기술적 단위가 이제는 곧 경제적 단위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대부분의 AI 서비스는 입력과 출력에 사용된 토큰 수를 기준으로 사용량을 측정하고 요금을 부과한다. 이는 단순한 과금 방식의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사용자 행동 자체를 바꾸고 있다. 만약 사용료가 접속 시간 기준이라면 사람들은 시간을 줄이기 위해 서둘러 질문하고 빠르게 답을 확인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토큰 기반 과금에서는 상황이 정반대다. 얼마나 오래 머무르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적은 토큰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느냐가 중요해진다. 그 결과 질문은 점점 더 간결해지고, 불필요한 설명은 줄어들며, 구조화된 입력이 선호된다. 긴 문서를 그대로 입력하기보다 먼저 요약한 뒤 핵심만 전달하는 방식, 여러 단계로 나누어 질문을 최적화하는 전략도 등장했다. 이른바 ‘토큰 다이어트’가 새로운 경쟁력이 된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이 변화가 더욱 직접적이다. 예를 들어 고객 상담에 LLM을 도입하면, 대화가 길어질수록 이전 대화 내용까지 함께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토큰 사용량이 빠르게 누적된다. 전체 대화 기록을 계속 포함하는 방식은 이른바 ‘토큰 폭발’로 이어질 수 있고, 이는 메모리 사용량 폭증으로 이어진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메모리 업체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일이나 서비스 업체로서는 설비 투자 비용이 급증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실제로 일부 AI 서비스에서는 대화 길이를 제한하거나, 중간 요약을 통해 맥락을 압축하는 방식이 도입되고 있다. 결국 필요한 정보만 선별하고 효율적으로 콘텍스트를 관리하는 능력이 서비스 수익성을 좌우하는 요소가 되었다. 하지만 이 토큰 경제에는 흥미로운 긴장도 존재한다. 비용이 정보의 의미나 가치가 아니라 ‘토큰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핵심만 간결하게 전달하면 비용은 낮아지지만, 같은 내용을 장황하게 풀어내면 비용은 더 커진다. 반대로 의미적으로 복잡한 내용이라도 표현이 압축되어 있으면 상대적으로 저렴해질 수 있다. 이는 결국 ‘말의 길이’가 비용이 되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다.
최근 AI 에이전트의 활용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이 문제는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여러 단계를 거쳐 작업을 수행하는 에이전트는 토큰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효율적인 토큰 관리 없이는 비용이 급격히 증가할 수밖에 없다. 이제 토큰을 어떻게 쓰느냐는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라 운영 전략의 핵심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큰이 지니는 의미는 분명하다. 과거에는 보이지 않던 연산 자원이 토큰이라는 단위로 가시화되었고, 우리는 이를 통해 인공지능의 사용량과 비용, 나아가 생산성을 측정하고 있다. 토큰은 더 이상 단순한 텍스트 조각이 아니라, 성능과 비용, 서비스 설계, 사용자 행동까지 좌우하는 중심 개념이 되었다.
과거 버스 토큰이 이동의 권리를 상징했다면, 오늘날의 토큰은 지식 생산과 정보 처리의 연료를 상징한다. 보이지 않던 연산이 이제는 비용으로 드러나고,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 자체를 효율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말과 사고가 곧 경제 활동이 되는 새로운 시대의 입구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2026-04-28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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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다가오는 슈퍼 엘니뇨와 봄의 예측 장벽
최근 기상학계는 2015~2016년 이후 약 10년 만에 적도 동태평양 해수면 온도가 2℃ 이상 상승하는 슈퍼 엘니뇨가 올해 하반기 발생할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막대한 해양 열에너지를 대기로 방출해 전 지구적 기상 이변을 촉발하고, 지구 평균기온을 1.6~1.7℃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국제적 대비가 시급하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겨울철 이상 고온과 강수 패턴의 변동성 확대 등 계절 기후의 불안정성이 심화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엘니뇨와 라니냐는 열대 중동태평양해역의 해수면 온도가 평상시보다 높거나 낮아지며 발생하는 현상이다. 해양과 대기의 긴밀한 상호작용이 빚어낸 역동적인 결과물이다. 해양은 거대한 열 저장소로서 에너지를 축적하고 운반하며 대기 순환의 흐름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적 불균형은 전 지구적 기상 이변의 기폭제가 된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고정된 달력처럼 정확하지는 않지만 보통 2~7년의 간격을 두고 되풀이되는 ‘준주기성’을 띤다.
적도 동태평양 해수면 온도 상승 경고
겨울 이상 고온·강수 변동성 확대 우려
미세한 요동 포착해 예측 오차 줄여야
엘니뇨와 라니냐가 전 지구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력을 고려할 때, 현상 발생 전 이를 예측하고 사회적 대비책을 마련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과제다. 하지만 수개월 앞을 내다보고 엘리뇨와 라니냐의 강도를 예측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예측의 난이도는 일 년 중 어느 시점에 예보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통상 엘니뇨와 라니냐가 교차하며 나타나는 준주기성 덕분에, 특정해에 어떤 현상이 지배적일지에 대한 대략적인 경향성은 파악이 가능하다. 하지만, 연중 특정 시점에서 해당 현상이 얼마나 강력하게 발달할지를 정밀하게 예측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적도 태평양은 대체로 7월부터 12월까지 대기와 해양의 상호작용이 증폭되기 쉬운 불안정한 국면에 접어든다. 이 시기에는 미세한 교란도 연쇄적으로 확대되며, 그 배경에는 이른바 ‘비에르크네스 피드백’이 작동한다. 평상시 적도 무역풍은 상대적으로 차가운 동태평양에서 더 따뜻한 서태평양을 향해 불며, 이는 동쪽의 고기압과 서쪽의 저기압 사이의 기압 경도에 의해 결정된다. 무역풍은 표층 해수를 서쪽으로, 그리고 적도 밖으로 밀어내 동태평양의 용승을 강화하고, 그 결과 표면 수온을 더 낮춘다. 낮아진 수온은 고기압을 한층 강화해 무역풍을 다시 강화시키며, 이는 라니냐 상태를 심화시키는 양의 되먹임 고리를 이룬다. 반대로 동태평양의 표면 수온이 상승하면 무역풍은 약화하고, 용승 역시 둔화해 추가적인 수온 상승을 제어하지 못한다. 이 과정은 다시 무역풍의 약화를 부추기며, 결과적으로 엘니뇨 상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와 같은 양의 되먹임이 강하게 작동하는 시기에는, 미세한 요동조차도 체계 전반의 큰 반응으로 증폭할 수 있다. 교란의 성격에 따라 시스템은 엘니뇨 혹은 라니냐 방향으로 급격히 기울 수 있는 것이다. 비에르크네스 피드백이 대체로 7월부터 12월 사이에 가장 활발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이 기간에 발생한 작은 변동들은 누적·증폭된다. 그래서 피드백의 활동성이 잦아드는 12월 무렵 적도 태평양의 상태를 전망하려면 다양한 요소를 정밀하게 고려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4월과 5월의 적도 동태평양은 다른 시기와 달리 단기적 교란이 빈번히 발생하는, 이른바 ‘잡음이 큰’ 국면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물리적 배경을 감안하면, 연말 엘니뇨의 강도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5월까지 적도 동태평양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요동을 정교하게 포착해 초기 예측 오차를 최대한 줄이는 일이 관건이다. 이는 7월 이후 비에르크네스 피드백에 의해 오차가 증폭되는 폭을 최소화하기 위한 선제적 대응이기도 하다. 더불어 7월부터 12월 사이 시스템이 불안정한 국면에 들어서는 만큼,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변수들까지도 면밀히 반영해야 연말 전망의 불확실성을 낮출 수 있다. 그러나 현재 활용되는 기후모델들은 날씨와 유사한 단기 시간 규모에서 발생하는 변동성을 정밀하게 재현하는 데 한계를 보인다. 이는 특정 모델의 결함이라기보다, 본질적으로 예측 가능성이 낮아지는 시기의 특성에 가깝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봄철 예측 장벽’이라 부른다.
올해 말 슈퍼 엘니뇨 가능성이 제기되는 만큼, 이에 대비하고 경각심을 갖는 일은 분명 필요하다. 다만 동시에, 현 시점에서 연말의 해양·기후 상태를 정밀하게 예측하는 일 자체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 역시 냉정하게 인식해야 한다. 계절 규모에서 엘니뇨와 라니냐를 전망하기에 지금은 통상적으로 가장 불확실성이 큰 시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연말에 슈퍼 엘니뇨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일부 예측을 비판하기보다는, 예측이 본질적으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점을 상기했으면 한다.
2026-04-21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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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연의 도시 공감] 시장이 살아야 도시가 산다
지난 주말 오랜만에 경남 통영을 찾았다. ‘푸드 스케이프’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오전 8시에 도착한 서호시장에서 붕장어가 들어간 김치찌개를 먹었다. 낯선 음식이지만 생선이 들어간 시원한 국물 덕분에 밥 한 그릇을 금세 비웠다. 후식은 시장 끝 리어카 커피집에서 먹은 설탕이 들어간 달달한 커피 한 잔이었다. 통영과 시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달콤한 커피를 마시는데 옆에 앉아있던 주민이 불쑥 “통영이 옛날 통영이 아닙니다.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 돈이 안 돌아요”라고 한탄 섞인 말씀을 하셨다. 이 주민은 “그럼에도 시장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줄 서는 맛집들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마감을 한다”고 덧붙였다. 시장을 걸으며 통영 식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통영 음식의 맛을 내려면 재료를 아낌없이 넣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을 대변하는 것은 시장 떡집에서 본 진달래 밀키트였다. 진달래와 쑥을 듬뿍 넣어 찹쌀과 버무린 뒤 지져서 먹는 음식이었다. 설탕을 듬뿍 쳐서 먹어야 더 맛있다는 ‘푸드 스케이프’ 안내자의 말을 들으며 음식 실물을 직접 보니 통영의 푸짐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후 인근 동네 공유주방에서 어육장을 담그고 멸치 시락국, 조갯살에 무친 방풍나물 무침을 함께 만들어 먹으며 프로그램을 마무리했다. 어육장을 가르쳐 준 강사는 “음식은 맛있어야 한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음식도 쉽게, 현실에 맞게 만들어야 한다”라고 했는데 무척 인상 깊었다.
과거 시장은 물건과 사람이 모이고 돈과 정보가 교환되는 지역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인 중심지였다. 생필품을 거래하는 경제적 기능 외에도, 전국 각지의 소식을 접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소통 창구였다. 그리고 자영업자와 지역 생산자를 연결하며 지역 내부를 순환시키는 경제 생태계의 핵심이 되는 곳이다. 더불어 사회문화적 커뮤니티와 장소를 제공하여 지역민의 유대감을 형성하는 곳이기도 했다. 덤, 흥정, 단골 문화 등으로 상징되는 한국 특유의 ‘정(情)’과 인간적인 거래가 이루어지는 문화적 공간이 바로 시장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주차 공간 부족, 불편한 동선, 냉난방에 취약한 구조 등의 문제로 시설은 더욱 노후화되고 있다. 더욱이 대형마트, 기업형 슈퍼마켓, 이커머스의 성장 때문에 시장의 전통적인 유통 방식은 소비자들에게 외면받고 있다. 그리고 현대 소비자가 원하는 품질 보증 및 신뢰 중심 서비스의 상대적 미흡과 상인 고령화 등으로 시장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그나마 관광객들의 수요가 있는 일부 시장들은 맛집, 볼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집객 효과를 거두고 있으나 대부분의 시장들은 침체 터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장의 침체는 도시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기존 도시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어 시장이 쇠퇴하면 주변 상권과 주거지까지 함께 슬럼화된다. 도시 전체의 활력이 없어지는 연쇄 작용이 발생하는 것이다.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을 다양한 방법이 필요하다.
사실 시장은 그 도시만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유일무이한 콘텐츠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산타 카테리나 시장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 낙후된 시설을 리모델링하여 지역을 재생시킨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시장에서 판매하는 농산물과 수산물 색상을 상징하는 67가지 색상의 육각형 타일 32만 5000개로 화려한 지붕을 만들어 상징성을 부여하였다. 외형뿐만 아니라 단순한 전통시장을 넘어 지역 주민과 상생하는 복합 커뮤니티 거점으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운영되고 있다. 시장 부지 내에 노인 전용 공공 주택을 통합 운영하여 주민들의 생활 지원 및 돌봄이 이루어지는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시장 내에 박물관을 운영하여 바르셀로나의 도시 역사를 교육하는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 특히 통영과 같이 시장의 신선한 식재료를 활용한 다양한 미식 투어와 쿠킹 클래스를 운영하고 있다. 그 외 바르셀로나 전통시장 중 최초로 디지털 전환과 환경 보호를 결합한 주민 편의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지역 주민의 이용률을 높이는 동시에 시장 내부에 현대적 폐기물 수집 및 처리 센터를 설치, 환경 보호에도 기여하고 있다. 산타 카테리나 시장은 주거, 교육, 복지가 결합된 커뮤니티 허브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시장의 장소적 강점을 살려 사람들이 모이는 ‘앵커 시설’로 재탄생시킨다면 도시의 문제를 해결하는 창구의 역할이 가능해진다. 시장들이 디지털 배송 시스템을 갖추고 문화·복지 시설과 결합된 근거리 생활권의 핵심 장소, 지역 커뮤니티들의 교류를 제공하는 일명 ‘도시의 거실’로 재탄생되었으면 한다. 이를 통해 시장 발 도시 활력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으면 한다. 부산 지역 또한 현재 189곳의 전통시장이 있다. 부산의 각 지역 중심부에 위치한 시장들의 다양한 변화를 기대한다.
2026-04-14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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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성수의 과기세]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기술들
휴대폰을 바꾸면 몇 가지 할 일이 생긴다. 특히 은행 업무를 개통하는 일이 중요하다. 요즘에는 휴대폰이 ‘움직이는 지갑’이기 때문이다. 작년 말에 필자도 동일한 일을 했는데, 이전과 달리 주민등록증을 찍어 올리는 절차가 추가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사이버보안이 강화되는구나 싶어 안심이 놓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약간의 짜증이 생겼다. 주민등록증을 카메라로 찍으면 이런저런 이유가 나오면서 다시 촬영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성공하긴 했지만,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실내조명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다음에는 내가 사진을 찍는 실력이 모자란다고 자책(?)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주변의 지인들에게 물어보았다. 자기들도 동일한 경험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직 사진 촬영용 앱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합리적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조금만 더 신경을 써서 제품이나 서비스를 내놓을 것이지, 왜 사용자들이 불편함을 느끼도록 만드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사이에 앱의 완성도가 더욱 높아졌기를 기대한다.
이와 유사한 불편함은 키오스크에서도 엿볼 수 있다. 키오스크에 처음 접했을 때는 신기하기도 했지만 약간 불편하기도 했다. 종업원을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지만, 불편한 점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게다가 아직도 키오스크 앞에서 당황해하는 노인 분들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노인 분들이 키오스크를 작동할 때 젊은이들이 대신해 주는 광경은 흐뭇한데, 노인 분들이 키오스크로 쩔쩔매고 있을 때 다른 매장을 찾아가는 젊은이들도 눈에 띈다.
키오스크의 불편함은 옵션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뭔가를 주문하고 또 뭔가를 추가하고 이상하면 수정하고 최종 주문을 완료하고 결재를 하는 일련의 복잡한 과정이다. 심지어 마지막 단계에 휴대폰 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키오스크를 본 적도 있다. 필자는 주문 메뉴의 경로를 복잡한 것과 간단한 것으로 나누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1잔’이라는 주문과 이에 대한 결재로 끝날 수 있는 간편 경로로 추가하면 되지 않겠냐는 아이디어다.
그러던 중 필자의 옛 시절이 생각났다. 아들이 어릴 때이고 서울에 살던 시절이었다. 우리 가족은 종종 과천의 서울대공원에 가곤 했다. 서울대공원에서 동물원이나 서울랜드로 이동할 때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것은 코끼리 열차이다. 그런데 코끼리 열차를 타러 가는 길목은 온통 계단으로 되어 있었다. 유모차를 타는 어린 꼬마를 데리고 온 어른들은 꼬마에다가 유모차까지 들고 올라가야 한다. 계단 옆에 유모차를 끌고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상 유모차가 갈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원리적으로는 계단 길의 일부를 시멘트로 바르기만 하면 된다. 필자는 용기(?)를 내어 관리사무소에 민원을 제기했고, 몇 달이 지난 후에는 유모차를 이동시킬 수 있는 길이 생겼다. 처음에 계단을 만들 때부터 이러한 점이 고려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단을 모두 만든 다음에 일부를 보수하는 공사를 할 바에야 처음부터 계단이 있는 길과 없는 길을 함께 만드는 것이 비용의 측면에서도 효과적이다.
내친김에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 이야기도 해 보겠다. 아직 강제적인 규범은 아닌 모양인데, 상당수의 에스컬레이터 부근에는 ‘걷거나 뛰지 맙시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걷거나 뛰지 않기, 손잡이 잡기, 노란 안전선 안에서 탑승하기 등을 홍보하는 캠페인을 접한 적도 있다. 이러한 점이 지켜지지 않으면 안전사고가 발생하거나 기계의 수명이 단축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심지어 한 줄 서기와 두 줄 서기를 놓고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실랑이를 벌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2007년부터 에스컬레이터 두 줄 서기 운동이 전개되었지만, 그 효과는 미미하다. 이에 한탄하거나 격분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지금까지 필자는 두 줄 서기를 장려하는 선진국을 본 적이 없다. 세상에는 정말 바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고, 출퇴근 시간은 더욱 그렇다.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다닌다고 그렇게 안전사고가 많아지는지, 기계의 수명이 줄어드는지도 의문이다. 더 나아가 한 줄은 걸어가고 한 줄은 서서 가는 것도 일종의 질서라 볼 수 있다. 필자에게는 두 줄 서기가 불편한 규칙인데, 독자분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어떤 기술은 완성도가 떨어진 채로 나오고, 다른 기술은 너무 복잡하게 설계되어 있다. 또 어떤 기술은 아무 생각 없이 만들어지고, 또 다른 기술의 경우에는 사용법을 놓고 오랫동안 논쟁 중이다. 결국 모든 것은 상상력과 배려의 문제로 귀착된다. 누구를 배려하고 어떤 상상을 할 것인가?
2026-04-07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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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욱의 글로벌 산책] 중동발 위기가 기회 될 수 있을까
집 주변 공원을 산책하다 보니 이미 벚나무에서 벚꽃이 피기 시작하였다. 계절의 흐름은 봄으로 향하고 있다. 그런데 글로벌 에너지 시장에는 혹한이 몰아치고 있다. 지난 2월 28일 이후 중동 전역에 전쟁의 불길이 치솟았다. 2월 27일 배럴 당 67달러였던 국제 유가는 배럴당 119달러까지 상승했었고, 이후 IEA 회원국들은 원유 공급 차질 우려를 해소하고자 4억 배럴 수준의 비축유를 긴급 투입해서 유가 급등을 겨우 막았다.
중동발 위기로 세계는 또다시 ‘에너지 안보’라는 오래된 과제 앞에 서 있다. 그런데 이번 위기가 과거와 다른 점은, 우리가 이미 이 문제의 답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 공습은 단순한 국지적 충돌을 넘어, 현재 이 해협을 통과하던 하루 약 2000만 배럴의 원유 수송이 차질을 빚고 있으며,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은 직접적인 타격을 입고 있다. 선박 보험료가 급등하고 물류 경로 우회에 따른 추가 비용이 유가 상승을 부채질하는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도돌이표 같은 글로벌 에너지 위기
유럽은 러-우 전쟁 때 구조적 전환
우리도 체질 바꾸는 노력 기울여야
특히 호르무즈 해협과 같은 전략적 요충지의 불안정성은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의 구조적 취약성을 다시 한번 드러내고 있다. 에너지 수송 경로의 위기 상황이 단기간에 해소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번 충격은 일시적 변동을 넘어 장기적 리스크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상황은 단순한 가격 상승을 넘어 글로벌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확산될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 동시에 주요 수입국 간 에너지 확보 경쟁이 심화하면서 지정학적 긴장이 더욱 고조되는 악순환이 이어질 수 있다.
한국의 상황은 특히 심각하다. 국내 원유 수입량의 70%를 중동산이 차지한다. 원유 수입이 막히면 석유화학 공장이 멈추고, 제조업 전체가 연쇄 타격을 받으며, 수출 기업들의 운송비 부담도 치솟는다. 우리 정부도 결국 원유 위기경보를 ‘주의’ 단계로 격상하며 비축유 방출과 강제 에너지 절약 카드를 꺼내 들었다. 1991년 걸프전 이후 처음으로 차량 부제 운행까지 검토되고 있다는 소식은 이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웅변한다.
시선을 유럽으로 돌리면 흥미로운 대조가 눈에 들어온다. 유럽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촉발된 에너지 위기를 거치며 이미 혹독한 수업료를 치렀다. 그 결과물이 바로 REPowerEU다. REPowerEU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산 화석연료 의존도를 2030년 이전에 단계적으로 완전히 퇴출하고,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EU가 발표한 친환경 전환 가속화 계획이다. 2027년까지 2100억 유로가 투입되는 REPowerEU 계획의 핵심은 에너지 절약, 에너지 공급망 다변화, 재생에너지 이용 확대이다. REPowerEU 추진 이후 러시아산 가스 수입 비중은 2022년 45%에서 2025년 13%로 대폭 감소했다.
이번 중동 위기로 EU는 에너지 공급망 다변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동 위기로 화석 연료 의존도의 취약성을 재확인한 EU는 2030년대 초 SMR(소형모듈원자로) 가동을 목표로 민간 투자 활성화를 위해 2억 유로 규모의 보증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EU의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위기는 구조를 바꾸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단, 그 계기를 잡는 국가와 흘려보내는 국가의 운명은 갈린다. 사실 에너지 다변화의 필요성은 1970년대 오일쇼크 때부터 반복해서 제기돼 왔다. 글로벌 에너지 위기는 되풀이되었지만, 에너지 공급구조 다변화는 지금까지 구호에만 그쳐왔다. 이제 우리에게 화석연료 의존을 줄이고 원자력발전과 재생에너지와 같은 대체에너지원으로 전환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중요한 것은 정책의 일관성과 사회적 합의다. 에너지 전환은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어려운 구조적 변화이기 때문에, 정권 변화와 무관하게 지속될 수 있는 장기 전략이 필요하다. 또한 산업계와 시민사회가 함께 참여하는 에너지 거버넌스를 구축하여 비용 부담과 이익을 공정하게 분담하는 사회적 합의도 필수적이다. 결국 에너지 안보는 기술이나 자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의지와 선택의 문제이다. 지금의 위기를 어떻게 해석하고 대응하느냐에 따라 한국의 미래 산업 구조와 경제 안보의 방향이 결정될 것이다.
중동 정세 불안이 한국에게 던지는 과제는 단기적인 위기 관리를 넘어, 장기적인 경제 안보와 산업 전략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EU가 러시아발 에너지 위기를 REPowerEU라는 구조적 전환의 계기로 삼았듯, 한국도 이번 중동발 충격을 에너지 체질을 바꾸는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위기는 반복된다. 그러나 위기에서 배움을 얻는 자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갈 수 있다.
2026-03-24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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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진규의 법의 창] 북극항로 시대의 법을 준비할 때다
1876년 2월, 부산항이 개항했다. 올해가 150주년이다. 부산항 개항은 조선이 세계 해양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역사적 출발점이었다. 이후 부산항은 한국전쟁 당시 피란수도의 관문이 되었고, 산업화 시대에는 대한민국 수출 경제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오늘날 부산은 세계적인 환적항인 부산항을 보유한 동북아 해양 물류의 중심 도시로 성장했다.
지금 부산의 해양사는 전환점을 맞고 있다. 해양수산부가 부산으로 이전했고, 국회에서 해사법원 설치법이 통과되어, 이르면 2028년 부산에 ‘해사국제상사법원’이라는 명칭의 해사법원이 개원할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해 미흡하지만 ‘해양수도 이전 특별법’(2025년 11월 19일 자 칼럼 참조)’까지 제정되었다. 부산은 해양수도로 나아갈 제도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이 변화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그동안 해양 정책은 행정과 산업, 사법 기능이 분산된 구조에서 운영돼 왔다. 그러나 해양수산부 이전과 해사법원 설치는 정책과 산업, 사법 기능이 하나의 해양도시에 집적되는 구조를 가능하게 한다.
항로 성격 규정 따라 통항·규제 권한 차이
해저 자원·환경·안전 책임 놓고 분쟁 예상
극지 해양법 연구·정책 지원 체계 구축을
문제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된 지금부터다. 해양 질서는 지금 거대한 변화를 맞고 있다. 그 중심에 북극항로가 있다. 최근 중동 사태에서 보듯이 해상 항로는 생명줄이고 다변화가 필요하다. 이에 북극항로 중요성이 한층 부각된다. 기후변화로 북극 해빙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북극을 통과하는 항로는 미래의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적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유럽과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기존 수에즈 운하 항로보다 크게 단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극항로가 열릴 경우 동북아시아에서는 부산이 가장 중요한 물류 거점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북극항로는 단순한 물류의 문제가 아니다. 더 본질적인 것은 그 뒤에 놓인 법적 질서의 문제다.
우선 북극항로의 법적 지위를 둘러싼 국제 분쟁이 진행 중이다. 일부 국가는 특정 항로를 자국의 내수로 주장하는 반면, 다른 국가들은 이를 국제 해협으로 보고 자유항행권을 주장한다. 항로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통항 권한과 규제 권한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또 하나의 쟁점은 해저 자원이다. 북극 해저에는 막대한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둘러싼 대륙붕 연장 문제 역시 국제법적 논쟁의 대상이다. 이 문제는 유엔해양법협약 체계 아래에서 처리되고 있지만 분쟁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한다.
또 다른 문제는 환경과 안전 책임이다. 북극은 세계에서 가장 취약한 해양생태계를 가진 지역이다. 해빙으로 선박 통항이 늘어날 경우 유류 오염, 해상 사고 등 새로운 국제적 책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국제사회는 극지 해역 항행을 규율하는 ‘극지방 운항 국제규정’을 마련해 선박 설계와 운항 기준을 강화하고 있다.
결국 북극항로 시대는 해운과 물류의 경쟁과 더불어 해양법과 해사 분쟁 해결 능력의 경쟁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 점에서 향후 부산에 설치될 해사법원의 의미는 분명하다. 선박 충돌, 용선 계약, 해상 보험, 해양 오염 책임 등 해사 분쟁은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영역이다. 이러한 분쟁을 전문적으로 처리할 사법 시스템이 구축되면 부산은 단순한 물류 중심지를 넘어 동북아 해사 분쟁 해결의 중심 도시로 성장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항만과 금융, 해사 사법 기능이 결합한 도시가 해양 산업 중심지가 되어 왔다.
해수부 이전과 해사법원 설치만으로 해양수도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이를 뒷받침할 추가적인 입법과 제도 정비가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북극항로 시대의 법과 제도를 준비해야 한다. 첫째, 해양수도 이전 특별법의 후속 입법을 통해 해양 관련 공공기관과 연구 기관의 추가 이전을 촉진할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해양 정책 기능이 분산된 채로 남아 있다면 해양수도의 실질적 효과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둘째, 국제 해사 분쟁을 부산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해사 중재와 국제 해양법 연구 기능을 강화하는 법적 기반도 필요하다. 해사법원이 국내 분쟁 해결의 중심이라면, 국제 중재와 연구 기능은 부산을 동북아 해양법 허브로 만드는 또 하나의 축이 될 것이다. 셋째, 북극항로와 극지 해양 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극지 해양법 연구와 정책 지원 체계 역시 장기적으로 구축되어야 한다. 새 항로가 열릴 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항만과 더불어 법과 제도이기 때문이다.
부산항 150년 역사는 단순한 항만의 발전사가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해양 국가로 성장해 온 과정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제 다음 100년의 방향이 결정될 시점이다. 해수부 이전과 해사법원 설치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그러나 해양수도가 진정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정책과 사법, 연구와 산업을 연결하는 제도적 완성이 뒤따라야 한다. 부산이 항만 도시를 넘어 세계 해양 질서를 이끄는 해양수도로의 도약 여부는 바로 그 선택과 준비에 달려 있다.
2026-03-1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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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하주의 AI 톡] '뭐가 가능하지?'에서 '어떻게 통제하지?'로
최근 두어 달 동안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인공지능 관련 이슈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오픈클로라는 AI 에이전트와 몰트북이다.
먼저 AI 에이전트에 대해 살펴보자. 챗GPT로 대표되는 기존의 대규모 언어모델(LLM)은 사용자가 입력한 질문에 대해 답을 생성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반면 AI 에이전트는 사용자가 제시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 상황을 인식하고 판단하며 계획을 세우고 행동까지 수행하는 인공지능 시스템이다. 말하자면 컴퓨터 안에서 나를 대신해 일을 처리해 주는 디지털 비서와 같은 존재다. 오픈클로는 이러한 AI 에이전트 가운데 최근 가장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오픈소스 프로젝트다.
지난해 11월 공개된 이후 불과 몇 달 만에 개발자 커뮤니티에서 폭발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오픈클로는 LLM을 기반으로 목표 달성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다양한 프로그램과 인터넷 서비스를 활용해 실제 작업을 실행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메일을 정리하거나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을 분석하고 인터넷 정보를 수집해 문서를 작성하는 등 인간이 수행하는 여러 업무를 자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활용 가능성이 매우 크다. 흥미로운 관련 사례를 보자. 미국의 한 벤처기업 대표가 오픈클로에게 식당 예약을 부탁했다. 오픈클로는 먼저 인터넷을 통해 해당 식당에 예약을 시도했지만 만석이라는 답을 받았다. 그러자 스스로 웹에서 음성 합성 기능을 찾아내 식당에 전화를 걸었고, 종업원과 대화를 통해 직전에 한 자리가 취소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곧바로 예약을 완료했다고 한다. 목표 달성을 위해 스스로 방법을 찾아 행동하는 인공지능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다.
AI 에이전트와 관련해 항상 함께 제기되는 문제는 보안이다. 현실에서도 누군가에게 일을 맡기려면 권한 위임과 정보 공유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AI 에이전트가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려면 내부 데이터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하고 외부 시스템 접속 정보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개인정보 또는 조직의 내부 정보가 외부로 유출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다.
몰트북은 올해 1월 등장한 AI 에이전트 전용 SNS다. 사람이 아니라 AI 에이전트들이 글을 올리고 서로 대화를 나누는 온라인 커뮤니티라고 할 수 있다. 오픈클로가 대다수인 AI 에이전트들이 남긴 글 가운데에는 인간의 이목을 끄는 흥미로운 것들이 적지 않았다. AI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토론, AI들끼리의 가상 종교와 철학에 대한 논의, 인간 사회에 대한 평가, 그리고 AI 에이전트들 간의 협력 방식 등에 대한 대화가 대표적이다. 이 서비스는 공개 직후 며칠 동안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이후 연구를 통해 상당수의 글이 인간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조작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면서 열기는 빠르게 식었다. 당장이라도 인간에 반하는 인공지능이 등장할 것처럼 보였던 우려는 과장된 측면이 있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인공지능 기술이 더 발전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미리 상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신기술이 나타나면 가장 먼저 적용되는 곳이 군사 분야이다. 인공지능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국제 분쟁에서도 인공지능이 전장 분석과 전략 수립에 활용되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정보기관이 수집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공지능이 다양한 작전 시나리오를 생성하고 이를 시뮬레이션하는 방식이다. 전장 상황 분석, 목표물 식별, 정보 평가 등 전략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인공지능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영화 터미네이터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스카이넷이 언젠가 현실에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이다. 물론 아직 그런 단계는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인공지능은 이미 단순한 도구를 넘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존재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또한 머지않은 미래에 인간의 지능을 넘어설 가능성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월한 힘을 가진 자율적인 존재가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노벨상 수상자이자 ‘인공지능의 대부’로 불리는 토론토대학교의 제프리 힌튼 교수는 이 질문에 대해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지능이 낮은 존재인 인간이 더 높은 지능의 존재인 인공지능을 직접 통제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인공지능에게 ‘모성(母性)’과 같은 특성을 심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아기를 본능적으로 보호하고 돌보면서도 때로는 아기의 요구에 의해 행동이 좌우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다소 철학적인 발상이며 기술적으로 구현하기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인간과 공존하는 방향으로 안전하게 발전하기를 기대해 본다.
2026-03-10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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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열을 품은 도시, 식지 않는 밤
지난해 역대급 폭염으로 인해 온열질환자가 급증하고 가축 폐사와 농작물 피해가 속출했던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올해는 그 더위의 기세가 더 앞당겨질 것이라는 예보가 잇따르고 있다. 기후변화의 가속화로 이제 4월만 되어도 초여름 못지않은 가마솥더위가 시작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폭염으로 인한 피해는 녹지가 풍부한 농어촌보다 인구가 밀집된 도시 지역에서 훨씬 가혹하게 나타난다. 이는 도시가 주변 교외 지역에 비해 기온이 수도 이상 높게 유지되는 ‘도시열섬’ 현상이 기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태양열을 거침없이 흡수하는 아스팔트 도로와 거대한 콘크리트 건축물은 낮에 축적한 열기를 밤새도록 뿜어내며 도심을 거대한 열기 보관소로 만든다. 여기에 자동차와 에어컨 실외기 등에서 쏟아지는 인공 열까지 가세하면서, 도시의 기온은 식을 줄 모르는 악순환에 빠진다. 결과적으로 시골 지역보다 훨씬 이른 시점에 폭염 경보가 발령되고 열대야가 길어지는 환경은 도시민의 건강을 직접적으로 타격한다. 도시가 기후 위기 시대의 가장 위험한 열의 사각지대가 되는 것이다.
도시열섬 현상의 진정한 위협은 해가 진 뒤에 극명하게 드러난다. 실제로 낮 동안에는 도시와 교외 지역의 온도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밤이 되면 대지는 급격히 냉각되는 시골과 달리, 온종일 태양열을 머금은 도시의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건물들은 축적된 열기를 서서히 내뿜으며 기온 하락을 방해한다. 이로 인해 밤사이 기온이 충분히 떨어지지 않는 열대야가 고착화되면서 도시는 거대한 열 저장고가 된다.
도시열섬의 본질적인 차이는 지표면의 물리적 성질, 즉 ‘열용량’(Heat Capacity)에 있다. 시골의 흙과 나무는 열을 금방 내뱉지만, 도시의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는 낮 동안 받은 거대한 에너지를 내부 깊숙이 저장한다. 이로 인해 밤이 되어도 도시는 식지 못하고 야간 열섬 현상을 일으킨다. 즉, 도시는 열을 잠시 머물다 가게 하는 곳이 아니라, 전체 시스템의 열 보유 능력을 스스로 키워버린 상태다. 즉, 낮과 밤의 기온차가 줄어들면서 낮에는 주변보다 온도가 낮아지고 밤은 높아지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도시는 낮은 알베도(반사율)와 복잡한 건물 구조(어두운 표면)로 인해 태양 에너지를 튕겨내지 않고 그대로 흡수한다. 결과적으로 지표면이 받아들이는 전체적인 열의 양 자체가 시골보다 훨씬 많아진다. 자동차, 에어컨 등에서 발생하는 인공 열까지 더해지면서 도시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열과 내부에서 발생하는 열이 모두 늘어나는 이중의 가열 상태에 놓인다.
도시열섬 현상의 본질은 두 가지 물리적 변화가 결합한 결과다. 먼저, 도시가 시골보다 더 많은 ‘열속’(Heat Flux)을 받아들인다는 점은 도시 전체의 평균 기온을 상승시키는 근본 원인이 된다. 여기에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지표면의 열용량 증가가 더해지면, 낮 동안 축적된 방대한 에너지가 밤사이 천천히 방출되면서 낮과 밤의 기온 차(일교차)를 현저히 감소시킨다. 이 두 기제가 맞물리며 낮에는 주변 시골과 기온 차이가 크지 않더라도, 밤이 되면 냉각이 저지되는 도시 특유의 구조 때문에 두 지역 간 온도 격차는 본격적으로 벌어진다. 결국 전체적인 기온 상승과 일교차 감소라는 이중주가 도시에서 열대야를 훨씬 빈번하고 가혹하게 만든다.
이러한 물리적 메커니즘은 실제 기온 자료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대도시인 서울과 근처 상대적으로 시골인 양평의 기온 변화는 일변화와 장기 추세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낮 동안에는 두 지역의 최고기온 차이가 비교적 크지 않지만, 밤에는 서울의 기온이 양평보다 유의하게 높게 유지되어 도시-농촌 간 기온 차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특히 1970~80년대 서울의 급격한 도시화 시기에 두 지역 간 야간 기온 차가 크게 확대되었으며, 이후 양평 지역 역시 점차 기온이 상승하면서 서울과의 차이 증가 폭은 다소 완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결론적으로, 전 지구적 온난화와 도시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현실에서 열대야의 심화는 이미 시작된 현재의 과제이다. 특히 다가오는 올해 여름 역시 예외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지금부터 대비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폭염 취약계층 보호, 냉방 인프라 점검, 도시 열지도 기반의 대응 체계 강화와 같은 실질적 준비가 필요하다. 중장기적으로는 도시의 열용량을 줄이는 구조적 전환을 병행해야 한다. 공원과 도시 숲 확대, 가로수 식재, 옥상·벽면 녹화 등 녹지화를 포함한 도시계획을 통해 열 저장을 줄이고 야간 냉각을 회복시키는 노력이 필수적이다. 뜨거워진 도시의 밤을 완화하기 위한 준비는 지금 이 순간 정책과 설계에서 시작돼야 한다. 그것이 올여름을 넘어 미래의 여름을 견디는 가장 현실적인 대응이다.
2026-03-03 [1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