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승현의 남북 MZ] 통일은 새로운 용기다
“그는 ‘조난자’인 동시에, 통일의 소원을 내던진 한반도의 ‘마지막 생존자’인지도 모른다.” 몇 년 전 필자가 출판한 책에 대한 한 잡지사의 서평 일부분이다. 고향을 떠나온 탈북인으로, 남북의 분단체제를 모두 살아 낸 경험자로, 한반도에 존재하는 수많은 조난자 중 한 명으로, 통일을 미래 출구로 상정한 MZ세대의 연구자로서 통일을 열망한다는 구구절절하고도 광의적 내용의 책이었다. 하지만 저 한 문장의 서평에 나는 비로소 오랜 미몽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이제는 통일이 ‘우리의 소원’이 아니며 북한과 연고가 있거나 분단과 인연을 가진 이들의 개별적 소원으로 터부시될 수 있는 환경에서 용기를 가져야 살 수 있음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북에서 어렸을 때 역사 선생님으로부터 광활한 대륙을 지배했던 강대한 고구려의 역사를 듣지 않았다면 영토 분단에 관한 관심이 훨씬 적었을 것이다. 군에 계셨던 부모님이 병사들에게서 회수해 온 남쪽 관련 책자와 노래 테이프를 집에 두지 않으셨다면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 크지 않았을 것이다. 비무장지대에서 군 복무를 하지 않았다면 민족 분단을 확인하고 한국을 동경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용기를 내어 한국으로 오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통일을 전공으로 삼아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는 숙명이나 진배없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수많은 개별적인 삶에는 그 숫자만큼이나 중요한 주문과 욕구가 증식을 거듭할 터이다.
생존 급한 대학가 통일 강의 여유 없어
한반도 분단 해소 여전히 중요한 일
청년세대 새로운 통일 논의 분출하길
지금 생각해 보면 아집과 이기심으로 단단히 무장한 모습으로 대학 강단에 섰던 것 같다. 이를테면 북한과 통일에 대한 수업을 통해서 민족문제에 이바지하겠다는 출발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복잡하고 가변적이다. 지방의 작은 대학이 북한 통일 관련 과목에 집중하는 교수의 수업을 이해할 만큼의 여유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깨우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학교 생존과 학생 모집은 학생의 졸업·취업과 연계되는 데 이에 부합되지 않는 교과 운영과 이를 바라보는 주변의 불편한 시선은 자조의 그늘이기도 했다. 이는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빈틈없는 자본주의국가에서 관심의 팔 할은 생존인 현실에서 나에게 생존의 팔 할은 용기인 셈이다.
한반도가 신냉전의 화약고니 적대적 공존의 모순 등을 떠들어도 하루하루가 바쁜 사람들에게는 실체가 불분명한 분단의 그림자일 뿐이다. 민족이니 통일이니 하는 미지근한 담론은 빈곤과 경쟁에서 살아남고 통일보다 어려운 정규직 취업에 성공해야 할 청년들에게 더는 우선순위가 아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분단 서사가 일상을 지배하고 분단 폭력이 난무했던 과거와 달리 분단체제의 일정한 자기 성찰적 부분에서 어린 시절 영혼 없이 불렀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억지로 부르지 않아도 될 자유와 다양성의 공간 확보이다.
희생으로 확보해 온 자유와 다양성의 공간은 향후 청년들에게도 중요하다. 언제 전쟁을 불러올지 모르는 분단 상황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생태계 및 심각한 저출생 등 복합적 위기에서 서로 연동된 병리적인 현상을 인식할 수 있는 성찰과 사고가 필요하다. 그러한 측면에서 일상과 생활에서 분단을 발견하고 나아가 한반도 전반을 휩쓰는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는 노력은 도전과 확장성이 될 것이다. 필자 또한 과거 필자의 교수 임명 조건이기도 했던 북한 통일 수업의 고집에서 벗어나 한반도 안에서 다양한 무늬들을 읽어내는 시도로 다양한 과목을 개발, 접목했다. 정치학과 경영학을 전공했던 터라 새로 선보인 한반도의 현대사나 한반도 미래의 기술창업 관련 수업에도 학생들은 예상외의 관심을 보였다.
통일포기론이 표가 되는 시대에 분단은 자연스럽고 또 일부는 나쁘지 않다고도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두 가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통일은 외면하면서도 한반도로 불리기를 원하는 모순처럼 우리는 대륙(북방)과 해양(남방) 세력이 교차하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존재한다. 한반도의 대통합을 통해서 우리가 웅비할 무한한 가능성을 간파했다면 주변 강대국들이 왜 통일을 반대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합구필분 분구필합(合久必分 分久必合, 천하가 오래되면 반드시 분열되고, 분열이 오래되면 언젠가 통합된다)’이라 했듯이 긴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영원한 분단도 없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래된 분단이 준 안일함과 복속에 안주해 다가오는 먹구름을 살피지 않으면 미래는 더 위태로울 수 있다. 어쩌면 분단과 통일에 감정적이지도 이념적이지도 않은 청년세대 앞에 미래를 향한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는 용기의 시대가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2024-11-19 [17:49]
-
[홍순연의 도시 공감] 우리 동네 거점 공간 활용서
11월이 되면 올해가 가기 전 친구, 가족들과 송년 모임을 기획한다. 어디서 만날지, 어떤 선물을 할지 기대와 설렘을 가지면서 한 해를 마무리할 준비를 한다. 그중 장소를 탐색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조용한 공간, 맛있는 공간, 아니면 우리만의 공간 등 모임의 성격과 취향에 따라 공간을 고민하게 된다. 가족 모임은 더더욱 그렇다. 밥 한 끼 먹기보다 각자의 성격에 따라 더 신경 써서 공간을 찾은 경험은 누구나 갖고 있다. 장소가 정해지면 그 동네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조건을 이야기하고 내가 선택한 장소가 맞는지 묻는다. 아니라면 다시 찾아주는 역할 또한 동네 친구의 몫이 된다. 사실 디지털매체를 활용하여 찾아 장소를 정할 수도 있지만 중요한 모임일수록 사람의 경험을 믿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추천한 공간은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다. 친구의 '찐' 정보 덕분에 낯선 공간도 믿고 찾아가게 된다. 결국 공간은 사람을 연결하는 중요한 수단이자 끊임없이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찾고 선택해야 하는 곳이다.
공간, 사람을 연결하는 중요한 수단
크레타, 비온후 등 동네서점 눈길
공공과 민간 공간 간 네트워크 필요
다양한 협업 프로젝트 자생적 활성화
얼마 전 부산진구생활문화센터장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부산진구생활문화센터는 지역 교육공동체가 운영하는 공간이다. 운영 초기에는 청소년 중심의 거점 공간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하였으나 현재는 10대부터 80대까지 모든 세대가 참여하는 공간으로 탈바꿈되었다. 이유는 이용자의 공간 활용이 결정적이었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 학생들이 방과 후 학원 가기 전 잠시 1시간 정도 기다리는 안심 공간, 어르신에게는 혹한기와 혹서기를 피할 수 있는 공간, 청소년들에게는 스터디 모임 공간, 동네 작은 동아리모임 공간 등 계절별 시간대별 이용자들이 활용도를 높여 지역 주민들의 대표적인 거점 공간이 되었다.
전포동에는 ‘크레타’라는 작은 서점이 있다. 이 서점의 힘은 만만치 않다. 일일 책방지기를 모집하고 작가와 관객이 만나는 북 토크를 진행하여 〈여행의 이유〉 김영하 작가와 손웅정 감독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2층에 위치하고 20평 남짓 작은 공간임에도 1년 365일 책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망미동의 ‘비온후’ 책방은 작은 갤러리 ‘보다’를 운영하여 지역의 작가들을 발굴하는 역할을 하며, 아침마다 동네 조찬모임 커뮤니티를 몇 년 동안 운영하고 있다. 동래의 ‘노프로그램’이라는 카페도 있다. 사람들은 금요일마다 독서에 집중하며 일상에 휴식을 즐기기 위해 책 한 권을 들고 카페에 모인다. '산책'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정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2시간 동안 조용히 각자 가지고 온 책만 읽고 간다. 상업 공간임에도 최소한의 시간과 공간을 활용하여 이미 다양한 활동을 지향하는 동네의 거점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운영자, 방문자들의 역할이 가장 크다.
거점 공간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활동의 근거가 되는 중요한 지점’을 말한다. 즉 사람의 활동을 위한 공간이다. 그간에 거점 공간이라고 하면 주민센터나 보건소처럼 공공기관에서 조성한 건축물이나 공원 같은 공공환경에 국한하고 기능적으로만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민간에서 운영하는 작은 거점 공간은 크기는 작지만, 활동과 경쟁력을 높이는 장소의 역할까지 하고 있다. 더불어 취향과 프로그램에 따라 시간대와 기능을 초월하는 공간으로 다양하게 변모하고 있다. 결국 거점 공간일지라도 공공과 민간의 활동력에는 차이가 나타나게 된다. 여전히 공공건축물은 기능적으로 공간을 분류하고 한정된 시간 안에 프로그램을 운영함에 따라 이러한 민간 운영자들의 활동력을 연결하기 어렵다. 그래서 공공 거점과 민간 중심의 거점 공간 간의 네트워크 구축이 더욱 필요하다. 그 효과는 이미 입증된 사례가 있다.
그 사례가 바로 지역 공공도서관과 동네서점이 공모한 ‘찾아가는 동네 책방 북 토크 프로그램’이다. 저녁 시간대 동네서점에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공공도서관에서 모집 및 행정적 지원을 해주는 사례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지역 공공도서관은 지역민들에게 밀접하게 관계 맺기가 가능하고 동네서점을 기반으로 시간과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사례이다. 이처럼 공공과 민간 거점 공간 간의 협업이 이루어진다면 기능과 시간의 자유로움과 더불어 프로그램의 다양성이 담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거점 시설과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기록하는 정보매체가 있었으면 한다. 우리 동네에서 발견된 장소, 키워드 프로그램과 운영시간 등이 온라인 정보가 아닌 현장에서 찾은 활동 정보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면 한다. 이렇게 사람과 프로그램까지 연결하다 보면 민간과 공공의 거점 공간은 공간과 공간,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다양한 협업 프로젝트가 자생적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2024-11-12 [17:56]
-
[유인권의 핵인싸] 당신의 관계는 안녕하십니까?
당신을 당신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름, 생김새, 성격, 학력, 기술, 재력 등 당신이 가진 수많은 특징들을 나열할 수는 있겠지만, 이 우주에서 당신만을 특정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예전에는 작은 공동체 마을에서의 쓰임새(직업), 누군가의 아들, 출신 지역 등으로 특정했었다면, 요즘엔 이른바 ‘아이디’라는 게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주민등록번호인데, 당신의 시공간의 유래를 담고 있다. 생년월일과 성별, 출신지역, 가족관계 등 호적상 기록을 숫자로 특정한 것이다. 일종의 고유한 양자수(Quantum Number)인 셈이다. 양자수란 물질의 특정 양자상태를 나타낸다. 우리 각자는 아주 복잡하지만 우주에 존재하는 특정 양자상태라고도 볼 수 있다. 결국 당신이 존재하는 시공간과 유래, 즉 관계가 당신의 존재를 특정한다.
당신이 너무 고독한 상황에서 “우주에는 오로지 나뿐이며 다른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아무리 소리치더라도, 당신이란 존재는 스스로가 아니라 당신이 유래한 관계로만 특정된다. 바로 당신은 우주를 관통하는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굳이 진화론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어느 누구도 아무 관계도 거치지 않고 그냥 뚝 떨어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종교가 ‘창조’와 ‘처녀 잉태’에 집착하는 아주 중요한 이유다.
모든 관계를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우주의 최초가 있다. 엄청난 에너지가 물질과 반물질로 바뀌던 빅뱅의 순간부터 시작됐다. 여기서 관계라는 것은 단순히 유래했다는 인연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작용(action)과 반작용(reaction)을 통해 상호작용(interaction)이라는 실질적인 소통관계를 뜻한다.
에너지·물질 등가원리(E=mc2)에 의해 생성된 물질과 반물질 점입자(기본입자) 쌍들은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운동하며 퍼진다. 무거운 입자들은 약한 상호작용(약력)에 의해 가벼운 점입자들로 붕괴하는 동시에, 색전하를 갖고 있던 점입자(쿼크)들은 강한 상호작용(강력)에 의해 뭉쳐지면서 100만 분의 1초도 안 되는 동안에 오늘날 원소들의 핵을 구성하는 양성자, 중성자와 같은 강입자들 안에 속박된다.
초기우주가 식어가면서 색전하를 갖고 있던 쿼크들은 결코 더 이상 따로 존재할 수 없다. 필연적인 관계가 이들을 양성자와 중성자안에 가둔 채 엄청난 속도로 강한 핵력이라는 소통을 지속시킨다. 그래서 이 쿼크들은 분리될 수 없다. 소통은 이들의 존재 근거이며, 변할 수는 있어도 없어지진 않는다. 이후 핵 안의 양성자 수만큼의 전자들이 결합하여 중성 원자들이 형성된다. 또다시 원자들은 전자들을 공유하면서 분자 먼지들이 되고, 마침내 중력(만유인력)을 통해 더 큰 덩어리로, 불덩어리로 진화해 별과 행성들이 조화롭게 운행하는 오늘날의 우주가 만들어졌다.
그때 그렇게 생긴 입자들 중에서 하필 지구라는 행성에 붙들린 입자들이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다. 우주 탄생 이래 새롭게 생기거나 없어진 것들은 없다. 단지 여러 가지 형태로 합쳐지고 분해되는 상호적인 소통관계를 통하여 피고 지는 것이 삼라만상이다. 각 입자들의 질량과 전하 등 고유의 성질에 따라 운동의 양상은 밀고 당기는 등 달라지지만, 모든 것들의 영속적인 상호작용이 우주의 정체성이다.
우리가 아무리 혼자만의 골방에 갇혀있다고 해도 부지불식간에 매 순간 한 움큼씩의 숨을 내뱉고 들이마시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다. 그 한 움큼의 공기 안에 유구한 시간 동안 다른 어떤 삼라만상의 내부에 들어갔다 나오지 않은 그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는 싫으나 좋으나 한 공간에서 같은 행성에서 동일한 공간과 시간을 숨 쉬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한 우리는 상호적인 소통작용을 멈출 수 없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아픈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제대로 된 소통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입맛에 맞는 것으로만 둘러싸인 자기만의 세계에 고립된 채,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한 일방적인 판단을 일반화하고 확신을 굳혀간다. 상호적이 아니다. 선택적인 상호작용이 일어난다고 해도 대단히 제한적이어서, 일방적으로 시작하고 일방적으로 끝난다. 그래서 이것은 실존하는 소통이 아니라 가짜 소통이다. 관계의 단절이다.
우리의 존재가 위협받는다.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됐을까. 상호적이어야 할 관계가 일방적이거나 고립적이 된 원인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자존감의 문제가 아닌가 한다. 오랫동안 가부장적인 권위적 체제 내에서 억압받아 강요가 내재된 순종이, 최근의 탈권위 시대에 도전과 반항으로 제각기 정반대 방향으로 도망쳐버린 상태. 오로지 돈과 권력, 상대적인 우위로 줄 세우는 사회가 자초한 것이다. 과연 우리들의 관계는 안녕한가.
2024-11-05 [18:06]
-
[김대래의 메타경제] 바다로부터의 시선
제법 오래전의 일이다. 부산에서 경제사를 가르치는 교수들이 모여 색다른 연구를 시도하였던 적이 있다. ‘부산이 잃어버린 10개의 기회’라는 주제를 가지고 1년여 동안 토론을 하였고 의견을 교환하였다. 출판이나 학술지 투고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기에, 결론을 내지는 않았지만 나름 부산을 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 가운데 ‘왜 부산은 깡통시장을 세계적 명소로 키우는데 실패했을까’라는 주제도 들어가 있었다. 물론 우리 경제가 발전하여 공산품의 자급이 이루어지면서 밀수품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던 것이 주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또한 무역자유화의 진전과 부산에 주둔하던 미군의 감소로 깡통시장에 들어오는 밀수품의 공급이 줄어든 탓도 있다.
그러나 명소는 가끔 이러한 경제적 논리와 관계없이 만들어진다. 밀수의 시대가 가더라도 세계의 깡통을 모두 모아 놓는 세계 유일의 시장으로 변신을 시도했다면 과거의 명성을 이어 가면서 지금쯤 유명한 관광 명소로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엉뚱한 기획이 혁신의 원동력일 수도 있다.
깡통시장을 채웠던 밀수상품 가운데 많은 것들은 일본으로부터 들어왔다. 5.16 군사정권 등장 이후 잠시 된서리를 맞기까지 우리나라 밀수의 중심은 대마도와 연계된 남해안이었는데, 특히 부산은 핵심적 밀수의 거점이었다. 이 시기 밀수를 주도했던 것은 이른바 특공대로 불렸던 작은 발동선으로 대마도에 가서 상품을 몰래 들여오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던 대마도의 이즈하라를 얼마 전 친구들과 함께 다녀왔다. 평지가 거의 없는 대마도의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시청이 있는 이즈하라 시내도 생각보다 많이 좁았다. 저녁을 먹고 나가 본 이즈하라의 도심은 어둡기까지 하였다. 그 어둠 속에서 특공대 밀수가 성행했을 때의 이즈하라항을 떠올려 보았다.
밀수의 전성기 시설, 수백 척의 특공대 배들이 이즈하라항에 일상처럼 드나들었고, 그러다 보니 이즈하라항은 밤에도 대낮같이 밝았다. 우리 정부가 대마도 밀수의 단속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도 일본 정부의 태도는 밀수를 무역의 한 형태로 보면서 방관하였기에 대마도에서 밀수는 근절되지 않았다.
한때 한일 간의 밀수 거점이었던 이즈하라를 방문하는 오늘날 한국인들의 손에는 밀수품이 아닌 면세품들이 들려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방적인 방문이 대세이긴 하지만 관광과 쇼핑이 부산과 대마도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로 역할 하면서 과거 밀수의 기억은 거의 잊힌 듯하였다. 그래서인지 약간의 긴장감을 가지고 방문했던 대마도의 인상은 좀 밋밋하였다.
그런 한편 부산에서 출항하고 다시 부산항으로 들어오면서 받은 인상이 오히려 좀 더 강렬하였다. 부산항대교를 타거나 영도에서 북항을 바라볼 기회는 있었지만 바다에서 배를 타고 부산항을 들여다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항상 육지에서 바다를 보던 시선에서 벗어나 바다에서 육지를 바라보는 느낌은 아주 달랐다.
바다에서 부산항을 들여다보는 익숙하지 않은 시선에 관한 기록들은 개항기 부산을 여행했던 서양인들의 여행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을 경유하여 부산항에 들어오는 외국인들의 시선에 가장 먼저 들어왔던 부산의 모습은 ‘황량함’이었다. 용두산을 제외한 모든 산이 민둥산이었고, 그래서 부산은 바위투성이의 검은빛으로 뇌리에 깊이 박히게 되었다.
오랜만에 바다에서 바라보는 북항에서는 오페라하우스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많은 곳이 아직은 대부분 빈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북항재개발지에 인접한 곳에 우뚝 솟은 주거 건축들이 가장 먼저 시선을 빼앗아 갔다. 약간 더 떨어진 곳에도 높은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었다. 앞으로 북항에 들어설 랜드마크 건축물들이 어떤 모습으로 가려줄지는 몰라도, 주변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높은 키의 건물들은 북항의 풍치를 갉아먹고 있었다.
가을이 되면서 부산의 문화와 예술 행사가 잇따르고 각종 세미나도 열리고 있다. 원도심이 가지고 있는 문화 자산을 살려야 하고 부산의 정체성을 담은 콘텐츠를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세미나에서 강조되고 있었다. 그러나 어렵게 만든 공공의 공간을 여전히 아파트가 둘러싸는 익숙한 일들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 이를 핑계로 산복도로의 나지막한 집들도 조망권을 주장하며 높이를 올려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바다에서 보는 미래 부산항의 모습이, 높은 시멘트 건물로 포위되면서, 또 다른 황량함으로 비치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개항 150년이 되어 가는 시점에서도 우리는 아직 바다로부터의 시선에 익숙하지 않다.
2024-10-29 [17:55]
-
[조소영의 법의 창] 무책임한 국회의 직무 유기, 무엇이 중한가
지난 14일 헌법재판소의 이례적인 한 결정을 두고, ‘아쉽다’ ‘환영한다’는 여야 대변인의 다른 논평이 있었다. 헌법재판소 ‘10월 공백설’ ‘기능 마비설’의 우려가 현실화하기 바로 직전의 결정이었다. 헌법재판소는 9인의 재판관으로 구성되어 운영되는데, 그중 10월 17일 퇴임을 앞두었던 3인 재판관의 후임 재판관 인선 절차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합의체 결정 기관인 헌법재판소가 헌법재판 사건의 심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헌법재판소법상 재판관 7인 이상의 참석을 필요로 한다. 그 때문에 재판관 2인 이상이 궐위되거나 사고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심리 정족수 미달로 헌법재판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3인 재판관의 퇴임으로 6인만이 남은 헌법재판소가 심판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될 상황이 문제였던 것이다.
헌재 재판관 인선 지연 국민 권리 침해
정치 셈법으로 좌지우지할 사안 아냐
헌법 제도 무용지물 엄중히 책임 물어야
그런데 헌법재판소가 헌법재판소법 심리 정족수 규정의 효력을 정지하는 가처분 결정이라는 미봉책을 통해 일단은 응급 상황을 모면했다. 14일의 결정으로 6인의 재판관만으로 심리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후임 재판관 선출 지연으로 헌법재판 공백이 발생한 사례는 이전에도 13번이나 있었다. 그 공백을 만들어 낸 것은 항상 국회였다.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모두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3인은 국회에서 선출한 자를, 3인은 대법원장이 지명한 자를 임명한다. 그런데 국회에서 선출하는 3인 재판관 선출 방식 규정은 없어서 국회 내에서 결정해 왔고, 늘 그 정치적 과정이 근본적인 문젯거리였다.
국회 선출 3인 재판관 추천 방식은 국회 상황에 따라 달랐다. 1기 재판부는 3당이 1인씩 추천했고, 2기는 여당 2인·야당 1인 추천이었으며, 3~5기는 여당과 야당이 1인씩 추천하고 나머지 1인은 여야 합의로 추천했다. 현재의 6기는 여야가 1인씩 추천하고 원내 3당인 제2야당이 1인을 추천했다. 그런데 22대 국회 상황은 제3당인 조국혁신당이 원내교섭단체가 아니어서 교섭단체별로 1인씩 후보자를 추천하는 방안은 취할 수 없고, 결국 여당과 야당이 1인씩 추천하고 남은 1인을 여야 간 합의로 할 것인지 거대 야당 추천으로 할 것인지 여야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1987년 헌법이 다시 복원해 낸 헌법재판소는 위헌법률심판·헌법소원심판·탄핵심판·정당해산심판·권한쟁의심판을 통해 헌법 보호·기본권 보호·권력 통제 기관으로 헌법 실현의 마지막 보루로서 헌법적 책무를 수행하는 헌법기관이다. 1988년 9월 19일부터 활동을 시작한 이래 현재까지 처리한 헌법재판 사건 수 5만 579건, 그중 무려 2168건의 위헌결정을 내린 통계치가 보여주듯이, 활성화한 헌법재판은 국민 속에 살아 있는 헌법의 의미를 확인하고 선언해 왔다. 재판관 인선 지연으로 인한 공백이 헌정 질서의 위기가 될 수 있는 이유다.
헌법재판소법은 국회의 후임 재판관 선출 시한에 관해 재판관 임기가 만료되는 경우에는 임기 만료일까지 후임 재판관을 선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선출권은 국회의 권한인 동시에 의무인 것이다. 또한 국회가 퇴임 재판관의 후임 재판관을 법정기간 내에 선출하지 않아서 장기간 재판관 공백 사태를 빚는다면 궁극적으로는 국민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된다.
헌법이 헌법재판소를 9인의 재판관으로 구성한 것은, 다양한 가치관·헌법관을 가진 9인의 재판관으로 구성된 합의체가 헌법재판을 담당함으로써 헌법재판에서 헌법 해석에 관한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그 견해 간의 경쟁 기능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국회는 국민의 공정한 헌법재판을 받을 권리의 보장을 위해 후임 재판관을 선출해야 할 구체적 작위의무를 부담한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 상황은 국회의 직무 유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무책임한 국회의 직무 유기적 상황!
물론 재판관 공백 발생은 입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 헌법위원회를 둔 프랑스는 헌법 위원의 사직을 후임 위원의 임명 시에 할 수 있도록 하고 있고, 독일은 연방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임기가 만료된 경우 후임자가 임명될 때까지 직무를 계속 수행하도록 하고 있으며, 오스트리아는 예비재판관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도 헌법재판소 초기부터 이러한 대비책의 필요성과 입법적 해결 도입을 논의해 왔다. 하지만 현재 가장 좋은 방안은 국회의 신속한 재판관 선출 의무 이행이다.
헌법재판관 선출은 여야 간의 정쟁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적 셈법으로 좌지우지하는 사안이 될 수 없다. 9인의 재판관으로 구성된 재판부의 심판을 받을 권리는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그래서 국민의 대표라는 국회가 정작 국민을 위한 헌법 제도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이 상황을 우리 국민은 엄중히 바라보고 그 책임을 물어야만 한다.
2024-10-22 [17:53]
-
[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기후 재앙의 전조 현상들
운칠기삼. 일의 성패는 노력보다 운에 달렸다는 뜻이다. 사실 최선을 다해도 운이 나쁘면 실패할 수 있다. 적절한 때에 좋은 사람을 만나야 성공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를 조율할 수 없다.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 운이다. 사람들은 운 좋은 일들을 보고는 말한다. 곧 성공하려고 좋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반대로, 가장 무섭고 나쁜 일 또한 여러 가지 안 좋은 일들의 연속선상에서 일어나곤 한다. 공포영화의 핵심은 클라이맥스를 향하면서 나타나는 음울한 전조 현상들이다. 안 좋은 일들이 주인공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공포의 순간이 임박했음을 느끼고, 그래서 긴장한다.
올해 여름 기상기후 뉴스는 공포영화의 시작 부분과 비슷하였다.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뜨거운 바다가 촉발한 대형 태풍과 허리케인이 북반구 동쪽 해안을 강타했다. 관측이 시작된 이래 가장 높은 기온을 기록하였으며 9월이 한참 지나서도 30도를 웃도는 한여름철의 기온을 기록하였다.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까지 소환하여도 9월 기온이 여름처럼 더웠던 순간이 떠오르지 않는다. 며칠 전 허리케인 밀턴이 24시간 만에 ‘카테고리 5’로 성장하면서 중심기압이 900mb 밑으로 내려갔다. 미국의 베테랑 기상 캐스터가 울먹이며 10시간 만에 중심기압이 50mb 감소한 상황을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묘사한 방송이 아직까지 기억에 생생하다. 공포영화 혹은 재난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예고한 듯한 전조 현상들이 줄지어 일어나는 것 같다.
기후온난화가 진행되면서 학계는 우리의 기후 시스템이 티핑 포인트에 가까워져 재앙 같은 상황이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한다. 티핑 포인트는 시스템의 안정도가 깨지는 지점으로 작은 자극에도 급격한 변화를 보일 가능성이 커진다. 안정도가 약해지므로 하나하나의 이벤트들이 시스템의 전체를 흔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재앙이 오기 전에 이를 미리 알 수 있을까. 즉, 공포영화의 전조들처럼 재앙을 예견할 수 있는 일련의 사건들이 존재해서 이를 통해서 재앙을 미리 알고 예측할 수 있을까.
몇년 전 스웨덴 스톡홀름의 연구실에서 박사 과정 학생과 이 문제를 논의했다. 불규칙적인 진동에 영향을 받는 시스템이 급격한 변화를 겪을 때 불규칙한 진동들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의문을 품었다. 우리는 시스템의 급격한 변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불규칙적인 진동들이 우연히 규칙성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만약에 당신이 1주일 후까지 10억 원이란 돈을 벌어야 한다면 보통 사람들에게는 거의 가능성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할 수 있다. 어떻게 해야만 그래도 가장 가능성이 큰 일련의 방법들을 선택할 수 있는가. 복권 당첨 혹은 은행에서 빌린 돈으로 파생상품에 적극 투자하기 등 많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지만 아마도 여러 방안들 중 다른 것과 비교해서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할 것이다.
평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 방법으로 혹은 루트로 이루어진다. 오전 9시까지 직장에 출근하는 방법은 수없이 존재할 것이다. 지하철을 타서 음악을 들으면서 갈 수 있으며, 급하게 택시를 타고 갈 수도 있고, 건강을 위해서 일찍 조깅으로 출근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확률이 적은 대박과도 같은 일은 단 하나의 최적의 경로가 존재한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에서 주인공 이단이 불가능해 보이는 방법을 고안해 내면서 “이 방법밖에 없다”라고 팀원한테 말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박사 학생과 함께한 연구는 논문으로 출판되었고 중요한 메시지를 남겼다. 시스템이 극단적인 변동을 보이려면 불규칙한 진동, 즉 확률적인 요소들이 특정한 패턴과 크기로 시스템에 영향을 주어야만 한다. 가장 최적의 경로는 질서정연하게 일어나야 하는 우연적인 요소들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큰 성공을 하려면 좋은 일들이 적절한 타이밍에 일어나야 하듯이 물리적인 시스템도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비정상적인 변화를 겪으려면 불규칙적인 진동들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되는 운이 필요한 것이다.
복잡하고 거대한 지구 시스템의 비정상적인 변화를 연구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다. 솔직히 과학적으로 전조 현상들은 어떤 것들이 있으며 이들이 가지는 전체 변화에서의 역할을 밝히는 것은 도전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지구촌의 기상기후 뉴스들을 접하고 나면 그런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불규칙적으로 일어나는 기상재해들이 현재 기후 재앙을 일으키기 위해서 일련의 규칙을 쌓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설마”라고 되뇌면서 ‘그렇지는 않겠지라’고 믿으면서도 하나씩 맞추어 보는 로또 번호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2024-10-15 [17:52]
-
[주승현의 남북 MZ] 북한 MZ와 한류 너머의 꿈
지난해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 196명 중 MZ세대가 절반이 넘는 99명이었다. 정부는 한류 등의 영향으로 인한 북한 내 MZ세대의 인식 변화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추정했다.
필자는 지난 몇 년간 입국한 북한군 출신 탈북민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러시아와 중동 등 해외에 현역으로 파견되었다가 경험한 자유세계와 한국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정보가 한국행을 부추겼다고 했다. 입대 전에는 USB, 외장하드, 손전화(핸드폰) SD카드나 스마트칩으로 한국의 영상을 접했다며 북한에서 본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 십수 편의 제목을 줄줄이 말하는데 나도 알지 못하는 드라마도 꽤 있었다.
전방에서 군인으로 근무하다 한국에 온 경험이 있는 필자가 그들의 말에서 놀랐던 것은 북한 MZ세대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예상을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다. 배급제 붕괴 후 확산한 장마당을 친숙한 생활 공간으로 삼고 성장했던 필자가 외부 정보를 접했던 경로는 ‘곽 테이프’(VTR), CD, DVD 정도였는데 장마당에서 진화한 시장 세대는 기술 발전에 힘입어 유통 매체의 다양화와 비약적으로 증가한 한류 콘텐츠 유통량의 기반에서 성장한 것이다.
해외에 파견되어서는 인터넷과 유튜브를 통해서 한국의 정보를 접하느라 영화나 드라마는 북한에 있을 때보다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다고 할 정도이니 북한 내 MZ세대의 인식 변화와 정보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강했다.
북한에 한국 콘텐츠가 퍼지기 시작한 건 1990년대 ‘고난의 행군’으로 배급제가 붕괴하고 장마당이 급증하면서다. 처음에는 한류보다는 외국의 콘텐츠가 많았는데 북중, 북러 접경지대가 고리가 돼 한국 것보다 검열과 처벌이 덜한 외국 문물이 유통되었고, 한국의 콘텐츠는 출처가 모호한 상태로 유통됐다.
필자가 비무장 부대 훈련소에 입소하여 열렸던 오락회 시간에서 한 훈련병이 ‘이등병의 편지’를 부르다가 보위장교에게 추궁당한 일이 있었다. 당황한 훈련병이 적공국(적군와해공작국)에서 개사한 노래라고 얼버무렸는데 다음 날 그는 보병부대로 쫓겨갔다. 당시만 해도 훈련병 대부분이 그 노래가 한국 노래라기보다 북한에서 한국군을 대상으로 만든 심리전 노래로 알고 있었다.
훈련소를 마치고 비무장 부대에 들어온 후 동기생들은 남쪽의 대북 확성기 방송에서 울렸던 ‘이등병의 편지’를 듣고 철렁했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북한에 한류가 공공연히 유통되면서 ‘이등병의 편지’는 ‘떠나는 날의 맹세’라는 제목으로 북한 청년들이 군에 입대할 때 흔히 부르는 노래로 자리했다.
사회보다도 더 철저하게 통제되는 북한군에서조차 장교와 군인 등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한류를 접하다가 단속된 사례는 북한 당국의 발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주민과 청년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북한의 기성세대가 한류를 통해서 한국의 발전상과 자본주의 실체를 접한다면 장마당 세대는 동경을 넘어서 한국과 같은 삶을 꿈꾼다는 데 있다. 서울말과 패션이 유행되고 한국의 문화를 일상에서 구현하며 최근에는 한국행을 원하는 장마당 세대가 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가 된다.
결국, 체제를 흔드는 뇌관이 될 수 있는 MZ세대를 정조준하여 북한은 서슬 퍼런 칼날을 빼고 나섰다. 이른바 반동사상문화배격법(2020년), 청년교양보장법(2021년), 평양문화어보호법(2023) 등으로 불리는 ‘혐한 3법’ 제정인데 사형을 포함한 가장 가혹한 처벌로 북한 주민들을 옥죄고 나선 것이다.
‘고난의 행군’ 시기 대량 아사 사태를 고통으로 겪으며 장마당을 처음 만들어간 지금의 4050세대나 “날 키운 건 노동당이 아닌 장마당”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하며 시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2030세대는 이제는 모두 체제의 지속성과 생존에 믿기 어려운 존재가 되고 있다.
북한 스스로 이미 인정한 것처럼 중동에서 ‘아랍의 봄’을 통한 정권 교체가 일어난 것은 청년 세대의 성장 환경이 이전 세대들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북한이 두려워하는 것은 통제를 강화하면 할수록 K콘텐츠를 열망하는 북한 주민들의 욕구 너머에는 한국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북한의 동족 지우기와 반민족, 반통일 선언은 이와 무관치 않다. 이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민족도 통일도 무관심해진 한국에서 언제인가 분출될 북한 주민들의 목소리에 과연 누가 어떻게 화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2024-10-08 [17:54]
-
[홍순연의 도시 공감] 강한 소상공인, 함께 성장 프로젝트
부산의 10월은 축제와 행사의 계절이다. 부산국제영화제, 부산국제록페스티벌을 비롯하여 자갈치축제, 영도다리축제, 구포나루축제, 전포커피축제 등 크고 작은 축제들이 부산 전역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이러한 축제는 주변 상인들에게도 모처럼 활기를 찾는 기회이기도 하다. 당연히 축제에는 사람들이 모이니 상인들의 기대는 높을 수밖에 없다. 부산의 10월은 바로 대목 시즌이 시작되는 시간인 셈이다.
얼마 전 명절 준비로 부평시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시장통은 추석 하루 전이라 사람들이 붐볐으나 정작 시장 상인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상인들 대부분 이렇게 손님이 없는 건 처음이라고 하였다. 이제는 명절 대목이라는 말이 무색해진 시대인 것이다. 굳이 시장에서 구매하지 않아도 빠른 배송 서비스로 24시간 안에 원하는 제품들이 집 앞까지 배달되는 시대이다. 품질 좋은 제품을 온라인에서 가격까지 비교하면서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손님을 기다리는 시대가 아니므로 더욱 소상공인들도 변화가 필요한 시기이다. 이제는 일반상품을 파는 시대가 아닌 자기만의 색깔과 스토리로 승부를 걸어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중기부, 고도화 자금 최대 1억 원 지원
9000여 개 업체 신청해 부산 4개 선정
자기만의 색깔과 스토리로 승부해야
100년 기업 도약 위해 지속 지원 절실
지난해부터 중소벤처기업부는 지역의 소상공인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프로젝트인 ‘강한 소상공인 성장 지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사업은 생활문화 기반의 유망 소상공인을 발굴, 스타트업과 협업을 통해 독특한 제품·서비스를 개발하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를 통해 지역 소상공인들이 기업으로 성장하고 차별화된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는 것을 도와 경쟁력 있는 소상공인으로 육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올해는 전국에서 9137개의 업체가 신청해 1~2차 오디션을 거쳐 최종적으로 60개 기업이 선정됐다. 이들 업체에는 최대 1억 원의 사업 고도화 자금을 지원한다.
부산기업 중에는 신안 지역의 땅콩을 활용하여 오일과 버터를 제조하는 크레이지피넛과 다도문화 디저트 카페인 비비비당이 로컬브랜드 분야에서 선정됐다. 라이프스타일 분야에서는 상처 치료시 피부보호와 통증 감소를 위한 리무버스프레이를 제조하는 유주케어와 화학첨가물을 최소화한 비건식품 제조사인 온유어사이드가 최종 선발됐다. 부산시도 부산경제진흥원과 함께 스타 소상공인 프로젝트를 통해 소상공인들의 성장을 도와주고 있다. 2022년부터 시작한 스타 소상공인 사업은 부산 지역의 작은 메밀소바집부터 미국 아마존에서 즉석 떡볶이를 파는 대표들까지 다양한 영역의 기업이 참여하고 있다. 올해는 팥 하나로 승부를 걸고 있는 백로앙금을 비롯하여 10개 사가 지원을 받았다.
선정된 대부분의 강한 소상공인들은 지역을 막론하고 자기만의 스토리와 창의적인 아이템을 가지고 있다. 기성품을 파는 상인이 아닌 자기만의 색깔을 갖추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아이디어에서 그치지 않고 제품을 위해 무수히 많은 실험과 노력을 통해 시제품을 완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비즈니스 모델까지 구축했다. 더욱이 대기업처럼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움직이기보다는 ‘체험 삶의 현장’같이 현장에서 부딪혀서 얻은 노하우를 가진 경험 중심형 기업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지역에서 막 성장을 시작하는 예비창업자들에게는 롤모델이 될 수 있고, 같은 소상공인들에게는 새롭게 도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사람자산’으로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이들의 장점을 인정하고 지원하는 연속적인 프로그램이 만들어졌으면 한다.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성장 그래프를 구축할 수 있도록 지원도 계속 이루어졌으면 한다. 앞으로 강한 소상공인으로 선정된 팀은 라이콘 기업으로 또 한 번의 성장을 준비해야 한다. 라이콘(Licorn)은 라이프와 로컬에서 혁신을 통해 새로운 콘텐츠를 창출하는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 원 이상 비상장기업)을 일컫는다. 그래서 지역에서는 지속적인 지원 프로그램이 더욱더 필요하다.
예를 들면 법적 문제를 찾아가는 해결사 프로그램, 직접적인 노하우를 전수받고 싶은 기업 방문 1:1쿠폰, 라이콘 기업 맞춤형 인력 지원 매칭 프로그램, 전문가 인력 파견 등 강한 소상공인들이 라이콘으로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사안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창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강한 소상공인 성장 전담팀’이 구성돼 소상공인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역할이 필요하다. 만약 그중 성공 모델이 나온다면 자연스럽게 지역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모델이 구축된다면 강한 소상공인들은 지역을 떠나지 않고 부산에 정착하여 100년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 라이콘 기업들이 부산에서 성장·정착하여 일자리 창출까지 이어진다면 부산은 1년 365일이 대목이 되지 않을까.
2024-10-01 [17:58]
-
[유인권의 핵인싸] 빛과 어둠, 앞이 보이지 않는 암흑의 시대
비가 갠 하늘, 햇빛의 반대쪽에 나타나는 형형색색의 무지개는 ‘무(無)’에서 창출되는 ‘유(有)’를 경험하기에 충분하다. 허공에 난데없이 나타난 총천연색이라니.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이 투명해 보이지만, 우리의 일상은 ‘모든 색’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이것을 눈과 영상에 담아 빛나는 색깔로 간직하는 것과, 이것을 사진으로 인쇄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전자가 순수한 빛의 직접적인 경험이라면, 후자는 순수한 빛이 인쇄된 면에 반사(反射)된 효과를 보는 것이다. 색의 반사는 나머지 색이 모두 흡수됨으로써 나타난다. 즉, 모든 색이 합쳐진 투명한 빛으로부터 그 물체의 색을 제외한 모든 색이 ‘빠진’ 현상을 보는 것이다.
모니터나 스마트폰의 액정화면을 보면, 빨강-초록-파랑(Red-Green-Blue, R-G-B)의 조합으로 모든 색이 표현되고 있지만, 정작 프린터의 잉크나 토너에는 그런 색들이 없다. 그 대신 잉크나 토너에는 우리가 하늘색이라고 부르는 색에 가까운 시안(Cyan), 분홍색에 가까운 마젠타(Magenta) 그리고 물감으로는 어떤 색을 섞어도 만들어낼 수 없는 노란색(Yellow)으로 이루어진 하늘-분홍-노랑(C-M-Y)이 있다.
컴퓨터의 그림판에 들어가서 색깔을 한번 만들어보자. 거기서 R-G-B 패널을 각각 0에서 255까지 총 256가지씩, 총 1600만 8000가지의 조합으로 우리가 화면에서 보는 모든 색을 만들어낸다. 모두 최대로 해서 합치면 우리가 보는 ‘무색(백색광)’이 된다. 흔히 우리가 어려서 배운, ‘빛의 삼원색을 모두 합치면 흰색이 된다’는 그것이다. 모든 색을 다 갖고 있어서 그 ‘어떤 색’도 아니다. R-G-B를 모두 합친 그 백색광에서 특정색(R, G, B 중 어느 하나)을 0으로 만들어 하나씩 빼 보라. 그러면 만나게 되는 색깔이 바로 C-M-Y이다. 그래서 C-M-Y는 각각 R-G-B의 반(反·anti)색체계이며, 감산(빼기)의 색체계라고도 한다. C-M-Y를 합치면 백색광의 정반대인 ‘검정’이 되는데, 이것은 동시에 아무런 빛이 없는 ‘암흑’의 상태다.
“오롯한 ‘암흑(검정)’을 본 적이 있는가?” 교수님의 난데없는 질문에 블랙홀 이야기를 하시려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면도날을 여러 개 겹쳐서 앞에서 보라는 것이었다. 즉, ‘들어가는 빛은 있는데 날카로운 날 때문에 빛이 안쪽으로만 반사되어 도무지 눈으로 되돌아오는 빛이 없다(!)’는 것이다.
어렸을 적, 건물들이 있는 풍경화를 그리는데, 건물들의 창문을 온통 창에 비친 하늘과 구름처럼 희뿌옇게 그린 적이 있었다. “모든 창이 실제 그렇게 보이더냐”는 미술 선생님의 지적에 비로소 있는 그대로 쳐다본 건물의 창들은 눈을 의심할 정도로 검었다. 대낮 건물들 대부분의 창은 빛을 반사시키는 게 아니라, 들어간 빛을 그대로 모두 먹어버린 검은빛이다. 우린 얼마나 어설픈 선입견으로 왜곡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낮에 밖에서 보는 건물 대부분의 창문은 검은 반면, 안에서 보는 창문은 없는 듯 투명하다. 같은 창문도 언제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르다.
‘빅뱅’의 순간, 아무것도 없어 보였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에너지로 가득 차 있던 우주는 순식간에 물질과 반(反)물질로 가득했다. 초기우주는 방금 생성된 물질과 반물질들의 엄청난 에너지로 들끓는 용광로와 같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캄캄했다. 전하를 가진 소립자들의 엄청난 상호작용 때문에 빛조차도 뚫고 지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주는 원자와 같은 중성입자들이 구성되기 전까지 약 40만 년 동안 불투명했으며, 이후 실제 핵융합으로 ‘별’이 형성되기 전까지 약 10억 년 동안 실제 광원이 없는 암흑이었다.
이후 투명해진 우주를 통해 우리는 많은 지식의 지평을 넓혀왔지만, 아직도 현대 인류는 중력을 통해 우주에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물질 총량의 불과 5%만을 파악하고 있다. 우리에게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우주의 나머지를 암흑물질이라고 부른다. 심지어 최근 우주의 가속팽창이 관측되면서 암흑물질보다도 더 많은 암흑 에너지가 있다고 하는데, 솔직히 아직도 설만 무성할 뿐 아무런 실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다. 과연 어린 시절의 만화 주제가만큼이나 우주는 미지의 암흑세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셈이다.
너무 많은 소통들이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아우성이 돼버린 탓인지, 역설적으로 양극화된 불통의 아성에 갇혀 눈도 귀도 모두 닫힌 탓인지, 더욱더 늘어가는 분쟁과 심화되는 기후위기 속에서 답답하게도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은 사회나 우주나 매한가지인 것 같다.
2024-09-24 [18:16]
-
[김대래의 메타경제] 문제는 우선순위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미군들이 남긴 기록을 보다가 눈물이 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한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참혹한 전쟁 중에서도 한국의 맑고 높은 가을 하늘을 넋을 빼고 보았다는 기록에서 눈물이 나기도 하고, 시골 어디를 가나 초등학교가 있다는 기록에서 크게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기록은 한국의 농촌 어디를 가든 큰 건물을 보거든 초등학교로 생각하면 틀림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상황에서도 한국은 초등교육에 투자를 하고 있는 것에 그들은 큰 놀라움을 나타내었다. 물론 많은 초등학교들은 일제강점기에 이미 세워진 것이었을 게다. 그렇지만 재정 사정이 형편없었던 시절에도 초등학교 문을 닫지 않았던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하겠다.
사회간접자본이라고 하면 으레 고속도로나 철도를 떠올리겠지만 의외로 우리 주변 곳곳에 사회간접자본이 널리 깔려 있다. 일자리 안내와 시민들이 쉴 수 있는 공간, 그리고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정보를 얻는 기관은 물론 다양한 복지 시설에 이르기까지 정말로 찾아보면 곳곳에 사회간접자본이 넘쳐나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정말로 필요한 사회간접자본을 제대로 공급하고 있는 것일까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른 아침 온천천에 가끔 나간다. 약간은 어두운 시간인데도 온천천 양변은 사람들로 붐빈다. 부산에서 온천천만큼 접근하기 쉽고 걷기 좋은 곳도 없다. 이른 시간 온천천 양변을 꽉 메운 사람들은 모두 나이 든 사람들이다. 노인의 도시 부산을 정말로 백배 느끼게 되는 시간이다.
그러면서 돌아보니 온천천 전체가 어르신들의 운동기구로 꽉 차 있다. 온천천 가까운 곳에 오랫동안 살면서 온천천의 관리 주체인 동래구와 연제구가 다투어 공사를 하는 것을 수없이 보아 왔다.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양쪽 어디에서인가 무엇인가 뜯어내고 새로 세우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런데 아주 기이하게도 어린이들을 위한 시설은 별로 없었다. 유아들을 위한 놀이시설이 있었다는 기억은 전혀 없다. 부산과 한국이 직면한 문제 중에 고령화와 저출산이 가장 심각한데, 그 문제에 대한 부산의 시선이 얼마나 편중되어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 주는 사례이다. 저출산 때문에 도시와 나라의 존립이 위태로운데도 아직 우리의 인식은 그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비단 이것은 온천천만의 문제가 아니라 부산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올 여름에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다녀왔다고 한다. 가까운 나라들로 많이 갔지만 배울 게 있는 선진국들로도 많은 사람들이 다녀왔을 것이다. 어디를 가든 어린이들이 놀 곳이 있고, 놀이터마다 그 지역의 문화적 콘텐츠가 스며 있는 창의적인 놀이기구와 시설들을 보면서 조금은 놀라는 경험도 있었을 것이다.
정말로 아이가 귀하고 그들이 우리의 미래라면 어르신의 운동기구를 만드는 만큼 아이들이 나와서 놀 수 있는 놀이시설도 만드는 데 진심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투표권이 있는 어른의 시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 정말로 필요한 사회간접자본이 무엇인지 고민하여야 하는 것이다.
아이를 낳지 않고 젊은이들은 떠나고 고령화된 어르신들이 돌아가시면서, 부산은 빈집이라는 또 다른 사회적이면서도 경제적인 문제와 맞닥뜨리고 있다. 사실 이것도 오래된 문제이지만 최근 들어 갑자기 부각되고 있다. 사람이 없어 비어가는 집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는 매우 어렵다. 재생도 사람이 있을 때 효과가 있지, 사람이 떠나면 아무런 효과가 없다.
빈집에 대한 가장 미래지향적인 대응은 공공이 매입하는 것이다. 공공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이 많을수록 도시계획을 세우고 정책을 수립하기가 좋다. 언젠가 도시가 필요한 건물을 짓고 시설을 확보하고 또 도시의 미관을 살릴 수 있는 디자인을 강제할 수 있으려면 공공이 일정 부분 소유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부산시가 나서서 빈집을 사들이는 것이 최선인데 아마 돈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다. 사실 부산시의 예산을 이리저리 따져 보면 여윳돈을 찾아내는 것은 매우 어렵다. 재정은 언제나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여유가 없다면 앞으로는 더욱 여유가 없다. 오랫동안의 정체 속에서도 부산 경제는 여전히 성장을 하고 있고, 그로 인해 부산시의 예산도 매년 최고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다시 돌아보자. 미국의 원조 자금으로 재정을 어렵게 꾸리던 힘든 시절에도 초등학교는 문을 닫지 않았다. 돈이 없는 것은 맞지만 문제는 우선순위이다. 그게 또 재정이다.
2024-09-10 [18:00]
-
[조소영의 법의 창] 초연결사회에 필요한 디지털 쉼표 법제화
아침에 눈뜨면서 카톡을 확인하고, 관심 있는 동영상을 보며 출근 준비를 한다. 출근길에는 인스타그램에서 지인들의 스토리와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른다. 근무 중 인터넷 검색을 하고, 점심 식사는 블로그 추천 맛집에 간다. 텔레그램으로 전달된 업무 지시도 이행하고, 귀갓길에는 좋아하는 유튜버 방송을 청취한다. 앱으로 주문한 저녁 식사 후엔 게임하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하다가 잠이 든다. 우리의 흔한 하루 모습이다.
우리는 지금, 초연결사회에 살고 있다. 초연결사회란 사람, 사물, 공간 등 모든 것들(Things)이 인터넷(Internet)으로 서로 연결되어, 모든 것에 대한 정보가 생성·수집되고 공유·활용되는 사회를 말한다. 초연결사회는 우리의 생활 전반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고, 이 변화는 긍정적이기도 부정적이기도 하다.
게다가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디지털이 사람을 돕고 보완하는 것을 넘어, 사람과 함께 공존하는 디지털 심화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디지털 세계의 확장은 초연결사회를 더욱 강화한다. 디지털 중독을 고민하게 된 우리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디지털 쉼표를 찾고 만들어가야 하는 현실적 이유다.
디지털 쉼표 제도 중 대표적인 것이 소위 ‘연결을 끊을 권리(right to disconnect)’의 법제화다. 기기의 전원을 끄지 못하는 현대 직장인들에게, 더 나은 휴식을 취하고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해 퇴근 후 직장으로부터의 연락과 연결을 끊을 수 있는 법적 권리를 인정하는 내용이다. 물론 비상 상황이나 직책, 업종별 차이 등 예외는 인정된다.
‘연결을 끊을 권리’ 보장법은 프랑스, 독일 등 20여 개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고, 8월 26일부터 시행된 호주법이 가장 강력한 처벌 규정(최대 8460만 원 벌금 부과)을 두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근로자의 사생활 보장을 위해 지난 8년 동안 ‘퇴근 후 업무 카톡 금지’ 법안을 논의했지만, 아직 성사되지 못했다.
디지털 기기로 인한 수면장애, 몸을 움직이지 않는 생활 방식, 신체 활동 부족, 과체중과 비만, 시각에 미치는 직간접의 부정적 영향 등은 여러 조사 결과를 통해 확인된 바 있다. 그래서 특히 미성년자의 휴대전화 사용 문제는 우리를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논쟁 대상이 되어 왔다. 독일은 공립학교에서 교육 외 목적의 교실 내 휴대전화 사용을 제한하며, 영국도 수업 시간 휴대전화 사용 금지 지침을 발표했다.
프랑스는 9월부터 중학교 대상의 ‘등교 후 스마트폰 금지’ 정책을 시범 도입했다. 이미 2018년 초·중학교 내 휴대전화 소지 허용 및 사용 금지법을 시행했지만 강제성이 없어서 잘 지켜지지 않았고, 결국 물리적으로 사용을 막기로 한 것이다. 이제는 우리도 언론에 보도된 교실에서의 문제적 상황 때문이 아니라 디지털 쉼표 차원에서의 재고가 필요하다.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온라인 활동 중 중요한 개인정보가 노출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초연결사회에서 자신이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관련된 정보가 계속 노출되는 괴로움은 심각한 사생활 침해가 된다. 여기에 ‘잊힐 권리(right to be forgotten)’의 출발점이 있다.
잊힐 권리는 정보 주체가 온라인상 자신과 관련된 정보에 대한 삭제 및 확산 방지를 요구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이다.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행동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해 주자는 의미다. 물론 이 권리의 인정 여부나 범위에 대해서는 국가마다 입장이 다르다. 상대방의 알권리 보장이나 기술적 실효성 등 어려움이 병존해서다.
지난해부터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어릴 적 무심코 올린 개인정보가 포함된 온라인 게시물에 대해 삭제나 블라인드 처리 등을 도와주는, 이른바 ‘지우개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다. 19세 미만 아동·청소년 시기에 본인이 온라인에 글·사진·영상 등 개인정보를 포함한 게시물을 게시했지만, 지금은 삭제를 희망하는 경우 정부가 대신 접근 배제를 요청하는 디지털 잊힐 권리 서비스다. 2023년 4월 시작 후 올해 7월까지 신청된 2만 896건 중 총 2만 272건이 처리 완료되었고, 신청 건수가 더 증가하는 추세다.
우리는 선택했든 선택하지 않았든 일상에 아주 많은 것들과 ‘연결’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거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디지털 부작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기술이 미래를 변화시키는 것에 저항하는 매우 특이한 공동체인 아미시(Amish)처럼 지낼 수는 없다.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법제 마련이나 개인적 노력도 필요하지만, 그 안에는 연결의 가치와 더불어 비연결의 가치도 함께 담아야만 한다.
2024-09-03 [17:58]
-
[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혼돈과 질서, 기후 시스템의 양면
1961년 미국 MIT 연구실에서 갓 부임한 교수가 기온 분포를 예보할 수 있는 간단한 예측 모델을 시험하고 있었다. 이 모델은 날씨의 비선형적인 특성을 포함하고 있었다. 교수는 기본값을 설정하고, 당시 컴퓨터를 이용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온도 값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이후 비슷한 기본값들을 설정하여 모델을 반복 실행하면서 여러 기온 데이터 세트를 만들었다. 비슷한 초기 조건에서 생성된 데이터이기 때문에 그는 시간에 따라 변하는 비슷한 값을 지닌 데이터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와 크게 달랐다. 거의 동일한 초기 조건에서 시작된 온도 값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를 보였던 것이다.
구식 컴퓨터의 오작동으로 치부될 뻔한 이 테스트는 한 젊은 교수의 집념 덕에 물리학의 중요한 이론으로 발전했다. 이 이론이 바로 카오스 이론이며, 이를 시작한 교수가 에드워드 로렌츠(Edward Lorenz)이다. 거의 모든 자연계 시스템은 비선형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중 가장 독특한 성질이 바로 카오스다. 비슷한 초기 조건에서 시작한 동일한 시스템이 시간이 지나면서 완전히 다른 결과를 보일 수 있는데, 이를 카오스 이론에서 ‘초기 조건의 민감성’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마트에서 줄을 설 때 나와 앞 사람의 순서 차이는 매우 작은 찰나의 순간에 결정되지만, 그 결과로 누군가는 1만 번째 고객 경품 냉장고를 얻는 큰 행운을 얻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비선형 시스템의 고유한 특성으로, 오늘날 현대 물리학의 중요한 이론으로 자리 잡았다.
날씨는 카오스 성질 자연 현상
단기 예보 한계 어쩔 수 없어도
장기 시간대에는 규칙성 보여
예측 가능성 최대한 활용해야
카오스 이론을 바탕으로 보면, 우리가 매일 접하는 일기 예보의 신뢰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날씨는 카오스의 성질을 가진 자연계의 대표적인 시스템이다. 기상 예보 모델이 실제와 약간 다른 경곗값이나 초기 조건을 가질 경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예측 결과가 실제와 크게 달라질 수 있는데, 이는 모델의 한계가 아니라 자연계의 본질적인 특성 때문이다. 물론, 더 정교한 모델을 개발하면 예측이 개선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기후 변화로 인한 지구 곳곳의 이상기후 현상은 신뢰할 수 있는 예보를 더 일찍 제공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아쉽지만 카오스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요구이다. 날씨는 본질적으로 예측이 어려운 비선형적인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단기 예보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다행인 것은 한 사람의 인격이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듯이, 기상과 기후 시스템도 카오스라는 단일한 특성만이 적용되진 않는다. 기후 시스템은 약 3일 이내와 같은 단기 시간대에서는 카오스의 성질을 지니지만, 이와는 달리 2주 이상의 장기적인 시간대에서는 규칙성도 갖는다. 2014년 〈사이언스〉지에 발표된 한 연구는 남반구 중위도 강수량의 총량이 약 25일의 주기성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남반구 중위도에 비가 많이 내리는 기간이 존재하면 약 12일 후 비가 적게 내리는 날들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주기성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특징으로, 카오스의 특성과는 대조적이다. 즉 정확한 날씨에 대한 예보는 3일 정도의 단기 예측에서는 불확실하지만 2주 정도의 장기 예측에서는 규칙성을 보일 수 있다.
오전 9시까지 출근하는 직장인은 직장에 도착하기까지 다양한 변수를 마주하게 된다. 가령 집을 나서자마자 중요한 서류를 잊고 다시 돌아가야 할 수도 있고, 갑작스러운 도로 위 사고로 교통 체증에 걸릴 수도 있다. 신호등을 기다리지 않는 행운으로 운 좋게 바로 출발하려는 버스에 승차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한 변수 때문에 시시각각 직장인의 정확한 위치와 상황을 예측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직장인은 대체로 9시 무렵에는 직장에 도착한다. 출근길 직장인의 정확한 위치를 분 단위로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만, 9시 언저리에 회사에 도착할 것이라는 예상은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
최근 연구는 중위도 제트 기류와 이의 불안정성에 의해 발생하는 저기압이 상호작용하면서 25일 주기의 패턴이 형성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 주기성을 고려한 예보는, 마치 책임감 있는 직장인이 9시 무렵에 도착하는 것처럼, 약 2주 후의 날씨를 대략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비록 날씨의 카오스적인 성질이 단기 예보의 한계를 드러내지만, 이와 더불어 기상기후 시스템이 지닌 예측 가능한 성질은 신뢰할 수 있는 중장기 예보가 가능하다는 희망 또한 제공한다. 기후 변화로 극한 기상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신뢰성 있는 중장기 예보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앞으로의 예보는 이러한 예측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2024-08-27 [18:28]
-
[주승현의 남북 MZ] 탈주, 자유를 향한 경계 넘기
영화 ‘탈주’가 올여름 개봉작 중 처음으로 관객 수 255만 명을 넘기며 장기 흥행 모드에 들어갔다. 북한·분단을 소재로 한 작품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질 즈음 모두의 예상을 깨고 다시금 관객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것은 남북 대결이 휴전선을 중심으로 위태롭게 흘러가고 있는 점과 무관치 않다. 하지만 영화의 흥행을 보장하는 데 남북의 대결 구도나 탈출자의 스토리는 그리 함량이 높은 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귀순 병사의 뻔한 탈출기가 아닌, 실패하더라도 꿈과 자유를 얻기 위해 ‘탈주’를 선택한 전개를 통해 한국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복잡한 상황과 오버랩되며 관객의 흥미를 자극한다. 영화 ‘탈주’는 통제된 북한 비무장지대(DMZ) 부대에서 10년 만기 제대를 앞둔 규남(이제훈 분)의 실패할 자유가 있는 내일(한국)을 향한 질주와 오늘(북한)을 지키기 위한 보위부 장교 현상(구교환 분)의 목숨 건 추격전을 그린 작품이다.
영화는 북한군과 비무장지대 상황과 다소 어긋난다는 지적도 끊임없이 받아 왔는데 이를테면 자동차를 통한 탈북 과정과 추격 총격전, 고압선과 지뢰밭, 가수 자이언티의 노래 ‘양화대교’를 듣는 북한군과 한국어에 가까운 북한말 등 현실성이 낮다는 의견이 분분했고 감독도 인정했다. 하지만 감독을 포함하여 우리는 모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분단 상황을 간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몇 년 전 판문점을 통한 귀순 병사는 군용차를 몰고 공동경비구역(JSA)의 군사분계선(MDL) 10m 앞까지 왔고 차가 배수로에 빠진 뒤 남쪽으로 향하자 북한군은 AK소총 등으로 40여 발의 총격을 가해 몸 5곳에 총상을 입은 후 가까스로 귀순에 성공했다. 휴전선을 넘어온 필자 역시 3중의 고압선과 수백m의 지뢰밭을 뚫고서야 한국에 올 수 있었고 DMZ 내 근무지에서는 몰래 라디오 주파수를 돌려가며 뉴스를 청취했다. 한때 북한의 MZ세대가 서울 말투뿐 아니라 용어까지 따라 하는 유행이 일었는데 이를 막기 위해 북한 당국은 ‘평양문화어보호법’을 제정하였으며 그 MZ들이 현재 북한군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 북한 오물 풍선 살포에 대응해 휴전선 일대에서 재개한 대북확성기의 방송 내용에는 북한군 46사단 전방 DMZ 안에서 귀순을 시도하려는 북한군이 포박돼 압송당했다는 내용도 들어있는데 영화가 아닌 현실이다.
그런데 영화 ‘탈주’가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북한과 탈출자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제목이 말해주듯이 탈북도, 탈출도, 귀순도, 월경도 아닌 ‘탈주’다. 탈주의 사전적 의미는 ‘감금된 곳에서 몸을 빼어 달아남’이다. 분단은 한민족의 대결 상태를 뜻하므로 영화 ‘탈주’는 분단 현실에 갇혀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로 향하고 투영된다. 태어나 보니 분단국가인 나라의 MZ세대가 평소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군에 입대해서야 긴장된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상황이나, 분단으로 사방이 꽉 막힌 섬나라에서 청년들이 마주한 끊임없는 경쟁과 필사적인 도전은 마냥 남 일이 아니다. 영화는 더 이상의 안주가 보장되지 않는 작금의 현실과 미래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국과 북한의 분단선은 통일을 원하든 아니든 잘못된 ‘민족의 분단선’으로서 그 불편함과 불안함에서 해방될 수 없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북에서 탈주에 성공한 이들이 한국에 와서 겪게 되는 차별과 편견 속에서도 악착같이 더 나은 자유와 꿈을 위한 의지를 불태우는 스토리는 덤덤하지만 납득되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사실 북한군 신분으로 군사분계선을 통과해 온 필자 또한 목숨을 건 지독한 탈주 끝에 한국에 왔지만 만만치 않은 탈주의 여정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녹록지 않은 도전 끝에 교수라는 신분도 얻었지만, 무수한 좌충우돌 끝에 지금은 비무장과 멀리 떨어진 최남단에 있는 섬에서 살고 있지만 여기까지 쫓아오는 사회적 편견과 현실의 핍진함은 여전히 극복해야만 할 벽이다. 하지만 돌아보면 희망의 도착점은 늘 도전의 시작점이었고 자유와 의지는 절박한 삶에서 ‘탈주’를 선택할 수 있는 동력이었다. 그래서 아슬했던 휴전선 탈주 경험과 비빌 언덕 하나 없었던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의 도전을 학생들과 공유한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 세상으로의 탈주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섬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축적한 후 대륙을 횡단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아직 포기하지 않는 절박한 꿈도 갖고 있다. 분단을 딛고 통일이 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내달음이라면 한 번 더 목숨을 걸만한 성취라고 믿고 있다.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껏 선택하고 실패라도 해보기 위해서 간다”라고 했던 영화 속 주인공이 던진 대사의 의미를 여러 환경적 이유로 불안전한 현재에 사는 우리는 이미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2024-08-20 [17:48]
-
[홍순연의 도시 공감] 퐁피두, 공감의 도시문화로 전환하기
세계인의 축제인 파리 올림픽이 끝났다. 이번 올림픽은 문화 다양성과 탄소발자국, 지속 가능성 등의 키워드를 통해 과제와 가능성을 던진 대회로 평가되고 있다. 새롭게 건축하지 않고 기존의 공간을 활용해 서양 건축사 시간에 배웠던 르네상스 시대의 앵발리드 탑을 양궁 경기 내내 볼 수 있었다. 근대5종 경기에서는 베르사유 궁전 모습을 감상하면서 아이들에게 역사를 설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적인 장소뿐만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파리라는 도시를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대적 정신을 담아냈다. 파리가 세계적인 이벤트로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것처럼 부산의 도시 공간에서도 파리의 도시 정책과 거점 활용에 대한 내용이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15분 도시 퐁피두센터일 것이다.
15분 도시의 경우 여가, 쇼핑, 교육, 문화, 휴식, 공유 및 재사용 등 다양한 기능을 복합적으로 누릴 수 있는 자립적인 생활권으로 재편성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공공 공간인 도로와 광장, 학교를 주민을 위한 삶의 공간으로 전환하는 동시에 주민 중심 문화와 소통을 강조한다. 파리의 경우 일상에서 문화를 연결하는 플랫폼 형식으로 재편성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과 유사하게 소생활권 개념의 '부산형 n분 도시 사업'이 진행 중이다.
특히, 퐁피두센터는 1977년에 오픈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지역재생 중에서 문화적 재생 사례의 성지로서 거점을 통한 지역 활성화를 모태로 건축과 도시를 전공하는 학생들이라면 무조건 방문해야 하는 코스 중에 하나이다. ‘대중을 위한 문화의 장소’로 건립된 퐁피두센터는 생마르탱 거리와 보부르 거리 사이에 경사진 광장을 지나다 보면 외관이 파이프로 노출된 괴상하게 생긴 건축물이다. 배낭여행으로 찾았던 퐁피두센터는 광장과 건축물을 따라 들어서다가 선명한 색채에 감탄하며, 공간 내부를 오르다 보면 자연스럽게 앙리 마티스, 마르셀 뒤샹, 잭슨 폴록의 작품들을 감상하고 개방형 도서관과 디자인 전시 및 관련된 서적들을 볼 수 있었다.
한참을 내부와 외부 공간을 보면서 건축이 가진 힘과 관계성에 대한 내용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건축학도의 로망이었던 퐁피두센터가 ‘세계적인 미술관’ 계획 아래 부산에도 유치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상지는 부산의 대표적인 자연경관지역으로 지역 주민들이 사랑하는 트래킹 장소인 부산 남구 이기대라는 뉴스를 접했다. 사업 초기에는 북항에서, 이제는 이기대로 장소가 변경되었으며 3차례에 걸쳐 계획이 수립 중이라고 한다. 중간에 모 기업에서 유치 경쟁에 끼어들어 이미 서울 63빌딩에 퐁피두센터 분관이 유치됨에 따라 사업의 힘이 빠졌으나, 2025년부터 퐁피두 분관 서울 4년간 유치 후 2030년부터 유치하는 계획 변경을 통해 추진 중이다.
시민단체에서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첫 번째가 부산의 메가 이벤트가 대부분 동부산권역에 집중된 점에서 문화 불균형이다. 그리고 건설비를 포함한 로열티, 관리·운영 비용 문제, 인근 지역 대형주거지 인허가에 따른 공공성 훼손 문제 등 난개발 우려까지 제기했다. 세계적인 미술관이란 대표성을 가진 퐁피두센터가 오히려 시민의 공감대를 형성해야 함에도 과정의 투명성 문제와 대상지 주변의 이슈까지 겹치면서 논란이 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사업 타당성에 대한 의문까지 제기되고 말았다.
아마도 사업 초기에 입지타당성 및 다양한 장단점을 고려하여 계획을 수립했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과정 속에 시민들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적극적인 소통이 있었다면 세계적인 미술관이 부산 시민들에게 환영받지 않았을까. 건축계획각론에는 기획-계획-설계-시공이라는 단계적 추진 과정이 있다. 그중 기획은 예전에는 ‘초기 검토 정도’ 단계였으나, 현재는 하드웨어적 내용과 함께 사회·경제적 요소와 통계적 수치를 활용한 지속 가능성까지 반영하도록 한다. 그리고 사회적 실험을 통해 니즈와 가능성까지도 고려하여 기획 단계에서 했던 다양한 고민을 계획단계에 최대한 반영해야 한다.
퐁피두센터 본원이 지어진 지 약 50년 가까이 되어간다. 당시 퐁피두센터를 비롯하여 오르세미술관, 라빌레트 공원 등을 건립한 파리 전체가 문화 공간이자 창작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위한 활동이었다면 2024년 이후의 퐁피두센터는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향후 50년 동안 세계적인 미술관으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지역이 가진 다양한 문화 요소와 결합하는 방법과 부산만의 도시의 방향성에 따른 마스터플랜 아래 퐁피두의 역할을 제안해야 하지 않을까? 법적 프로세스와 하드웨어적 검토가 아닌 도시문화로서 내용을 채울 방법과 퐁피두센터가 결합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2024-08-13 [18:09]
-
[유인권의 핵인싸] 망원경과 가속기
외국에서 태어난 딸아이가 하루는 한국말이 어렵다며 울상을 지었다. 학교에서 ‘별을 관측하기에 적당한 도구’를 묻는 질문에 망원경·현미경·돋보기가 예시로 나왔단다. 망원경도 현미경도 돋보기도 모두 ‘작은 것을 크게 보는 것’인데, 도대체 무엇이 다르냐는 푸념이었다. 당시 열 살이던 딸아이 덕분에 필자도 우리말의 어려움을 새삼 알게 됐다.
망원경·돋보기·현미경은 모두 작은 것을 크게 보는 원리지만, 각각의 용도에 맞도록 달리 제작된 도구다. 특히 멀리 있는 것을 당겨서 보기 위해 제작된 망원경과, 작은 것을 크게 확대하는 기능만 최대화한 현미경은 큰 차이가 있다. 빛을 모으는 볼록렌즈는 작은 것을 크게 보이게 하는 반면, 빛을 퍼뜨리는 성질이 있는 오목렌즈는 광각을 크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흔히 이런 광학기기의 경우 자세히 볼 수 있는 분해능에만 관심이 있을 수 있으나, 실은 어두운 것을 밝게 볼 수 있게 하는 집광력도 광학기기의 아주 중요한 성능이다.
망원경은 멀리 있는 것을 크게 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천체 관측의 중요한 도구가 됐는데, 멀리 있는 천체란 결국 빛이 그만큼 먼 거리를 달려와야 한다는 점에서 멀리 있는 별의 관측은 과거의 우주를 눈으로 관측하는 셈이 된다. 그래서 우주의 나이만큼이나 멀리 있는 별은 초기우주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래서 원리적으로만 보면 ‘우주 최초의 상태를 알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유감스럽게도 초기우주는 빛이 아무 장애 없이 통과될 만큼 투명하지 않았다. 전기적으로 중성인 안정된 원자들이 형성되기 이전, 전자·핵·양성자·쿼크 등 하전된 입자들이 우주를 가득 채워 우주가 불투명했을 때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장치가 필요하다. 그게 바로 가속기다.
흔히 입자를 가속시킨다고 알려져 있는 가속기는 하전된 입자만 전기장을 통해서 가속시킨다. 음전하를 띠는 전자가 음극과는 밀치고 양극에는 당겨지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건전지의 음극과 양극을 따로 전선을 연결해서 두 판을 마주 보게 하면 가장 기본적인 가속장치가 되는데, 공기 입자가 방해하지 않도록 진공으로 만든다. 보통 음극을 뜨겁게 만들면 전자가 음극에서 방출되는데, 그래서 음극선관(Cathode-Ray Tube, CRT) 모니터는 그 자체로 작은 가속기다.
입자를 가속시키는 가속기가 초기우주 탐구를 가능하게 한 비결에는 두 가지 물리학적 이유가 있다. 입자는 빨라질수록 커다란 것은 통과해 버리고 점점 더 작은 것들과 반응하는 양자적 성질이 있다. 오늘날 세계 최대인 27km 가속기에서 가속된 양성자는 1아토미터(100경 분의 1m)의 미시세계까지 볼 수 있게 해 준다. 동시에 이 작은 공간에 집약된 엄청난 에너지는 아인슈타인의 ‘에너지와 물질의 등가원리’(E=mc²)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무거운 입자들을 생성시킨다. 좁쌀끼리 충돌시켰는데 마술처럼 수박과 호박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10여 년 전 표준모형의 화룡점정이 된 힉스 입자도 양성자보다 약 125배 무겁다. 이렇듯 가속기는 빠른 입자를 통해 미시세계를 볼 수 있게 해 줄 뿐만이 아니라, 지금 우주엔 존재하지 않지만 최초의 우주에나 존재했을 법한 무거운 입자들을 생성시켜 우주 최초의 상태들에 대한 연구를 가능하게 해 준다.
약 400년 전 거의 동시에 발명된 망원경과 현미경이 인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듯이, 약 100년 전 개발된 가속기는 우주와 물질의 근원에 대한 탐구에 완전히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거의 예외 없이 노벨상의 업적이 됐다. 미국과 러시아(옛 소련), 유럽은 경쟁적으로 고에너지의 가속기를 개발해 왔으며 일본도 예외가 아니었다. 30년 전 우리나라도 가속된 전자를 통해 고에너지의 빛(X선)을 만들어내는 포항 방사광가속기를 시작으로 최근 중이온(희귀동위원소) 가속기(RAON)를 완공하고 첫 충돌실험을 눈앞에 두고 있다.
우주를 이해하려는 인간의 노정은 당장의 편리와 재화를 창출하는 일과 자못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첨단기술 개발의 동인이 됨은 물론 세상을 보는 우리의 눈과 생각을 변화시킨다. 중국과 유럽은 최근 100km에 달하는 초대형 가속기 건설 추진을 선언하고 나섰다. 사실 현재의 우리 지식으로는 그 새로운 도구가 우리를 어떤 경지로 데려다 줄지 아직 모른다. 현미경과 망원경을 처음 만들었던 이들이 질병의 원인이 되는 세균 관찰과 우주여행까지 꿈꾸었을 리 만무하다. 답답하고 아슬아슬해 보이는 국내외 정세와 기후변화를 실감하는 무더위 속에서도 과학자들의 호기심과 끈기는 그래서 더 위대해 보인다.
“인류의 도약은 새로운 개념보다는 새로운 도구의 발명에서 기인한 바가 훨씬 크다.”(프리먼 다이슨)
2024-08-06 [1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