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물썰물] 나라현과 한일 관계
나라현은 일본 고대 문명의 심장이라 할 만하다. 특히 혼슈 중서부 오사카와 교토 사이에 자리한 나라시는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고대 문화의 도시로 우리가 경주를 떠올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 교토와 함께 손꼽히는 고도(古都)로 일본 초기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일본 나라 시대(710~794)의 수도로 일본 최초의 불교문화인 아스카(飛鳥) 문화를 꽃피웠던 곳이다.
나라 시대는 율령국가 체제가 완성되고 국제 교류가 매우 활발했던 시기다. 하지만 그 국제성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상당 부분이 한반도 도래인들의 기여에서 비롯됐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나라(奈良)라는 이름 자체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발음만 놓고 보면 우리말 나라와 겹친다. 또한 우리말 ‘나라(國)’, 곧 국가를 뜻하는 말로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이 일본에 정착하며 그 땅에 붙인 이름으로 해석된다. 이 어원에 대한 학문적 논의도 일찌감치 제기된 바 있다. 일본의 고어학자 마쓰오카 시즈오는 〈고어대사전〉(1937)에서 “‘나라(奈良)’는 한국어 ‘나라’에서 비롯됐으며, 상고시대 이 지역을 점거한 도래인들이 붙인 지명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나라는 일본 고대사 속에서 한반도와 깊이 얽혀 있다. 나라 시대를 상징하는 도다이지(東大寺)는 쇼무 천황이 국가의 안녕과 역병 퇴치를 기원하며 세운 거대 사찰로 당시 국력의 총체라 할 만하다. 높이 16m에 이르는 대불 주조와 대불전 건립을 총괄한 인물은 백제계 도래인의 후손이었다. 여기에 신라 승려 심상이 전한 화엄 사상이 더해지며 도다이지는 화엄종의 총본산이 됐다. 나라현의 호류사(法隆寺) 또한 일본 최초의 목조건축으로 꼽히지만 그 뿌리는 한반도 건축 기술에 닿아 있다. 사찰에 남은 백제관음상과 고구려 승려 담징의 금당 벽화는 나라와 한반도의 긴밀한 관계를 말해준다. 이런 흔적은 차고 넘친다. 그래서 나라를 이야기할 때 한일 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13일부터 1박 2일 일정으로 나라현에서 정상회담과 만찬을 갖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 깊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경주 APEC 당시 다카이치 총리에게 그의 고향이기도 한 나라현을 다음번 셔틀외교 장소로 제안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비록 일정은 짧지만 뜻 있는 만남이라 하겠다. 과거 나라에서 시작된 교류의 기억이 한일 양국의 갈등을 넘어 공존과 협력으로 다시 쓰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번 나라현 정상회담이 한일 관계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2026-01-12 [18:05]
-
[밀물썰물] 산복도로 계획도
부산 중구 영주동과 대청동 사이에 영선(營繕)고개가 있다. ‘영선’(營繕)은 ‘집을 짓거나 수리한다’는 뜻으로 신선을 뜻하는 영도구 ‘영선’(瀛仙)과는 다르다. 중구 영선고개는 동래부사 행렬을 그린 18세기 그림에 나온다. 1670년 무렵 동구 수정동에 있었던 ‘고관’으로 불리던 왜관은 용두산 일대로 옮겨 가게 됐다. 집채 기둥, 지붕, 짐을 용두산 왜관으로 옮기려는데 영선산이 가로막으면서 난관에 봉착했다. 급히 산길을 내기 위해 나무를 베었고, 괜찮은 나무는 왜관 신축건물 자재로 썼다. 영선고개는 조선 시대 동래에서 왜관으로 가는 국제 교류를 위한 유일한 길이었다고 한다. 350여 년의 역사를 품은 옛길인 영선고개는 오늘날 ‘부산 산복도로의 토대’가 되었던 셈이다.
산복도로는 ‘산의 배(腹)를 연결한 도로’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의 비극과 부산의 산업화라는 근현대사 질곡을 담고 있다. 산복도로 주변 산동네는 일제강점기 1910~1930년대 부두와 방직 노동자들의 거주지였고, 1945년 해방 후에는 귀환 동포들이 정착했던 곳이다. 1950년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정착했고, 1960~1970년대 산업화 시절엔 부산으로 몰려든 이주민들이 터를 잡았다. 1964년 10월 20일 부산의 첫 산복도로 ‘망양로’가 개통했다. 1967년 동구 수정동 방면으로 500m가량 연장됐고, 1971년 3월까지 연장 공사가 진행돼 지금의 동구 범천교차로에서 서구 서대신교차로까지 길이 8.9㎞의 모습을 갖췄다. 현재 부산의 산복도로 길이는 30㎞가 넘는다고 한다. 부산진구·동구·중구·서구·사하구·사상구·영도구 등 산지를 따라 조성돼 있다.
일제가 1937년 부산에 최초로 수립한 도시계획인 부산도시계획도면이 최근 복원됐다고 한다. 근대도시 부산의 초기 구상을 담은 평면도에는 북항 매립, 택지, 주요 교차로와 터널, 현재의 산복도로와 유사한 도로 계획 흔적이 나온다. 특히 범일·수정동 경계부에서 시작해 대청공원(현 중앙공원)을 거쳐 대신동에 이르는 산복도로가 계획됐음을 보여준다. 부산이 대도시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된 산복도로는 역사적, 지역적, 생활사적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이다. 외국인 관광객들도 요즘은 K컬처 영향으로 부산의 산복도로와 원도심 등 역사성을 품은 장소를 더 선호한다고 한다. 영선고개가 국제 교류의 물꼬를 튼 길이었던 만큼, 산복도로가 350여 년의 간극을 뛰어넘어 역사적 명맥을 이어갈 지 지켜볼 일이다.
2026-01-11 [18:18]
-
[밀물썰물] 패권에서 다극화로
미국은 도대체 왜 저럴까. 요즘 국제뉴스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미국은 글로벌 경찰국가를 자처하던 유일 패권국이자, 겉으로나마 민주주의나 표현의 자유 같은 근원적 가치를 수호하는 것으로 보이려 애썼던 나라다. 지금은 굳이 속내를 숨기지 않는다.
베네수엘라 석유, 그린란드 희토류와 북극. 자원이 있는 서반구와 북극까지 노골적으로 군침을 흘리고 있다.
이유가 많겠지만 결국 나라 살림이 팍팍해진 탓이 클 것이다. 미국은 지난해 1000조 원 넘는 국방비보다 나라 빚 이자를 더 많이 지출하는 나라가 되었다. ‘퍼거슨의 법칙’에 따르면 쇠퇴가 본격화된 것이다. 세계 최대 자원 보유국인 러시아 국력을 소모시키려 나토 동진으로 충동질한 우크라이나 전쟁도 소득 없이 패전만 기다리고 있다.
전쟁 후 과거 유럽으로 향하던 러시아 자원은 중국과 인도로 방향을 틀었다. G7 국가 대부분이 휘청대는 사이 중국은 이미 2010년대 중반 이후 IMF(국제통화기금) 평가 구매력(PPP) 기준 세계 1위다. 인도는 지난 연말 명목GDP 기준 일본을 추월한 세계 4위 국가가 됐다. 러시아 역시 2022년 PPP기준 GDP 유럽 1위, 세계 4~5위권으로 평가됐다.
사우디아라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브라질, 이집트, 인도네시아, 베트남, 아랍에미리트연합(UAE) 같은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은 미·중·러와의 관계를 적절히 관리하면서 자국의 성장을 도모하고 있다.
국제정치 전문가들은 미국이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 다극화 질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본다. 패권 시대의 허울을 유지할 여력이 없다는 얘기다. 200년 전 대통령의 아메리카대륙 세력권 유지 정책(먼로주의)이 다시 회자되는 것도, 이제 유라시아까지 관여할 힘이 없어진 현실의 완곡한 표현이다.
목하 다극화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문제는 견제와 균형으로 다자질서가 자리잡을지, 더 복잡해진 이해관계 속에 혼돈 속으로 빠져들지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이 혼란 속에 한국은 또 어떻게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을까. 미국의 퇴조가 한반도의 소통 가능성을 높인다는 사실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의 재회를 고대한다. 러시아와도 관계 정상화를 꾀한다. 멀리 있는 여러 적을 동시에 상대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1월 중간선거 전 반전을 꾀하려면 4월 중국 방문 전후가 골든타임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뚜렷한 원칙과 유연한 외교, 다양한 국가와의 네트워크가 절실하다.
이호진 선임기자 jiny@
2026-01-08 [1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