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물썰물] 호르무즈 ATM
기원전 3000년 수메르 지역 도시국가들은 서로 국경을 건널 때 세금을 매겼다. 이것이 통행세의 기원이다. 수메르 지역에는 세계 최초의 조세·회계 제도가 존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메르 점토판에 ‘세금 징수원’이란 직업이 등장할 정도니 설득력 있다. 기원전 1700년 만들어진 바빌로니아 왕국의 함무라비법전에도 상인이 육로나 해상을 통해 국경을 넘을 때 세금 부과 근거를 명시했다고 한다. 고대 로마제국은 세계 최초로 체계적인 도로망을 구축한 국가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여기서 비롯했다. 로마제국도 항구, 국경, 주요 도로 진입로 등 관문을 드나드는 상품에 대해 통행세를 징수했다. 통행세는 재정에 상당한 기여를 했으며, 제국의 지리적 관문 지배와 막강한 권력을 상징했다.
통행세는 중세 시대 유럽 상업의 핵심 수로였던 라인강에도 이어졌다. 라인강을 관리하던 신성로마제국이 13세기 들어 쇠퇴하자 중세 유럽 영주들은 저마다 강변에 성이나 탑을 세우고 ‘통행세’를 걷었다. 심지어 상선 한 척이 라인강을 통과하려면 여러 차례 통행세를 내야 했다. 영주들은 불법적으로 과도한 세금을 요구했으며, 돈을 내지 않으면 공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강도 귀족’이란 말은 이때 생겼다.
미국과 이란이 2주간 휴전에 합의했지만, ‘통행세 리스크’가 부상하고 있다. 이란은 전쟁 기간 호르무즈 해협 통과 선박에 대한 통행료 부과를 추진해 왔다. 이란이 미국에 제시한 종전안에도 오만과 함께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에서 통행료를 징수하고, 이 돈을 재건에 사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8일(현지시간) ABC방송에 호르무즈 해협을 다니는 선박들에 대한 통행료 부과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통행료 징수에 관해 “이란과 ‘공동 사업’을 추진할 수도 있다”고 했다. 미국과 이란 모두 ‘호르무즈 톨게이트’를 공식화할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글로벌 해운·에너지 업계가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통행료 징수가 국제협약 위반이라는 논란도 만만찮다. 호르무즈 해협은 자연 해협으로 ‘유엔해양법협약’(UNCLOS)에 따라 선박이 멈추지 않고 통과할 권리인 ‘통과통항권’이 인정되는 구간이다. 인공 수로인 수에즈운하처럼 시설 유지와 관리 비용을 근거로 통행료를 받을 수 없다고 한다. 호르무즈 해협을 새로운 ATM(현금자동입출금기)으로 활용해 각자 잇속을 챙기려는 미국과 이란의 모습에서 중세 ‘강도 귀족’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2026-04-09 [18:10]
-
[밀물썰물] 공곶이 수선화
경남 거제시 일운면은 수선화 관광 명소다. 일운면 공곶이 수목원은 봄이면 노란 수선화 군락을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공곶이 수목원은 고 강명식 씨와 아내 지상악 씨가 일군 공간이다. 부부는 1968년부터 거제 바닷가 어느 곳에나 있을 법한 비탈진 황무지에 수선화와 종려나무, 동백 등을 심어 수목원을 조성했다. 호미와 삽, 곡괭이만으로 14만 8761㎡에 달하는 공간을 개간했다고 한다.
공곶이 수목원으로 가는 길은 예구마을에서 시작한다. 주차장에서 수목원까지 걸어서 20~30여 분 정도 걸리는 산책로도 무척 아름답다. 초입에서 경사로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시원하게 펼쳐진 남해 바다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이후 숲길을 지나 동백나무 터널과 200여m 길이의 돌계단을 통과하면 공곶이 수목원을 만날 수 있다. 수선화 군락지 인근엔 몽돌 해변도 자리 잡고 있다. 바다 너머 작은 섬, 내도가 이국적 정취를 더한다. 예구마을과 수목원 일원에서는 2024년부터 수선화 축제도 열린다. 지난달 21~22일 열린 올해 축제에도 4만여 명이 방문했다.
공곶이 수목원이 처음부터 유명했던 것은 아니다. 초기엔 우연히 이곳에 들린 여행객들이 “거제엔 비밀의 화원이 있다”는 입소문을 내며 서서히 유명해졌다. 2005년 영화 ‘종려나무 숲’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관람객이 대거 몰려들었다. 한 해 관람객은 40만 명에 달한다. 거제시도 2007년 거제 9경 중의 하나로 지정했다. 노부부의 노력 덕분에 공곶이가 12월엔 동백꽃, 3~4월엔 수선화, 가을에는 노랑코스모스 등 연중 다양한 꽃을 즐기는 공식 지역 명소로 발돋움한 것이다. 더욱이 공곶이 수목원은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하지만 공곶이 수목원은 2023년 5월 고 강명식 씨의 별세로 위기를 맞았다. 남은 가족들이 운영하기엔 너무 벅차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다행히 당시 거제시는 공곶이가 사유지이지만 전국적 인지도를 감안, 지원을 결정했다. 수선화 7만 포기를 새로 식재하는 등 적극적 노력을 기울이면서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다. 문제는 3년의 지원 기간이 오는 7월 끝난다는 것이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지역 주민 등이 공곶이가 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 등을 설명하며 시에 도움을 요청했다. 시도 고심 끝에 최근 지원 연장을 결정했다고 한다. 노부부의 땀과 열정이 깃든 기적같은 공간이 오랫동안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6-04-08 [18:07]
-
[밀물썰물] '빨간 구두' 연대
‘솔솔솔 오솔길에 빨간 구두 아가씨/ 똑똑똑 구두소리 어딜 가시나….’ 1963년 매력적인 중저음으로 뭇사람을 설레게 했던 가수 남일해의 노래 ‘빨간 구두 아가씨’는 발표와 동시에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경쾌한 리듬과 낭만적인 이미지 속에서 ‘빨간 구두’는 세련됨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당시 여성들 사이에선 빨간 구두를 신지 않으면 시대에 뒤처진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고, 심지어 빨간 구두 품절 현상까지 일어났다.
가톨릭에서 빨간 구두는 권위와 신성을 상징한다. 금 십자가 목걸이와 레이스가 달린 사제복과 함께 교황을 떠올리게 하는 표식이다. 그 기원은 고대 로마와 비잔틴제국에 닿아 있다. 당시 붉은색은 황제와 황후, 교황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사라진 뒤 그 상징성은 교황에게 남았다. 이후 교황 비오 5세는 과도한 권위 이미지를 덜기 위해 상징색을 붉은색에서 흰색으로 모두 바꿨다. 그 변화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은 것이 바로 교황의 빨간 구두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 구두〉에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빨간 구두가 등장한다. 가난한 구두장이 노파가 카렌에게 준 투박한 구두와 공주처럼 화려한 구두다. 전자는 나눔과 돌봄, 후자는 소유의 욕망을 상징한다. 특히 카렌이 어머니의 장례식 날 받은 빨간 구두는 가장 외로운 순간에도 그녀가 혼자가 아님을 전하는 따뜻한 표식이다.
2009년 멕시코 예술가 엘리나 차우베트는 시우다드후아레스 거리 위에 빨간 신발을 늘어놓는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사람 없이 남겨진 신발들은 가정폭력으로 희생된 여성들을 추모하고 약자와의 연대를 호소하는 절박한 외침이었다. 그것은 “더는 침묵하지 말라” “보이지 않는 폭력을 드러내라”는 촉구였다. 이후 붉은 신발은 전 세계 가정폭력과 여성폭력 반대의 상징으로 확산됐다. 최근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아테니움 콘서트홀 계단에도 이런 추모의 빨간 구두가 놓였다. 이 나라에서는 매주 여성 1명이 가정폭력으로 숨질 만큼 상황이 심각하다. 이제 가정폭력은 특정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대구 ‘캐리어 시신’ 사건에서도 피해 여성이 한 달 가까이 폭행을 당하고도 치료받지 못한 사실이 드러났다. 가정폭력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피해자가 사회나 가정적으로 약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살펴야 한다. 곧 가정의 달 5월이다.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지금 우리 사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
2026-04-07 [1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