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물썰물] 올리브 가지 보였는데
영어에서 ‘올리브 가지(olive branch)’는 화해나 평화의 신호로 해석된다. 국제회의나 외교 기사에서 ‘올리브 가지를 내밀다’라는 표현은 분쟁을 멈추고 협상의 가능성을 타진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올리브 나무는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버티는 특성 덕분에 오래전부터 시련을 견디는 존재로 여겨졌고 지중해 지역에서는 ‘영생과 부활’, ‘화해와 평화’의 상징이 됐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전쟁을 멈추고 협상을 청할 때 올리브 가지를 드는 전통도 그 상징성에서 비롯됐다. 성서 속 장면 역시 유명하다. 구약성서 창세기의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서 노아가 날린 비둘기가 올리브 가지를 물고 돌아오자 육지가 가까움을 알았다는 대목이다. 올리브 가지는 곧 희망과 평화의 메시지였다.
미국 독립사에도 올리브 가지가 등장한다. 1775년 북미 식민지 대표들은 영국 국왕 조지 3세에게 무력 충돌을 피하자는 ‘올리브 가지 청원’을 보냈지만 거절당했고 전쟁은 현실이 됐다. 미국 대문장(the Great Seal)에도 올리브 가지가 있다. 흰머리수리가 한쪽 발에 올리브 가지, 다른 쪽 발에 화살을 쥔 모습은 의회의 독점 권한인 평화와 전쟁을 상징한다. 오늘날 국제연합 깃발 역시 세계지도를 올리브 가지가 감싸안는다. 갈등을 넘어 공존과 평화를 지향하겠다는 뜻이다. 2021년 미국 팝가수 레이디 가가는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에서 국가를 부르며 올리브 가지를 문 금빛 비둘기 브로치를 착용했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 화합하길 바란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과거나 지금이나 이처럼 올리브 가지는 여전히 평화나 화합, 화해의 표상으로 받아들여진다.
최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무인기 비행과 관련해 북측에 유감을 표명하고 9·19 남북 군사합의 복원 등 긴장 완화 조치를 언급했다. 북측에 ‘올리브 가지’를 내민 셈이다. 다음날 북한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이를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같은 날 북한은 개량형 600㎜ 초대형 방사포 50문을 공개했다. 대화와 무력, 두 카드를 동시에 꺼내 든 모습이다. 이런 북측 행보는 대화와 단절 사이에서 계산이 진행 중임을 시사한다. 어쩌면 두 개의 카드로 우리 정부의 의도를 가늠하고 있을지 모른다.
올리브 가지는 절대 나약함의 표식이 아니다. 먼저 손을 내미는 용기이며 상대의 응답을 기다리는 인내다. 내민 올리브 가지에 대한 북측의 응답이 긴장이 아닌 대화의 문을 여는 신호였으면 한다.
2026-02-22 [18:22]
-
[밀물썰물] '전후 일본'의 종언
‘천황을 국가원수로, 국방군 창설, 긴급사태 대응….’ 일본 자유민주당(자민당)이 2012년 총선 때 공개한 헌법 개정 초안은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 지향이 분명했다. 선거 결과는 자민당 압승. 개헌 발의가 가능한 중의원 3분의 2를 넘는 의석을 얻은 아베 신조 2차 내각이 출범했다. 하지만 헌법 개정안은 국민투표는커녕 국회에 제출되지도 못했다. 여전히 일본 국민은 평화헌법을 지지했고, 자민당 파벌과 연정 파트너 공명당의 이견 때문이었다.
일본은 헌법에서 전쟁을 포기했고, 천황을 정치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으며, 군의 통치를 차단했다. ‘평화 국가’로 국제사회에 복귀해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 사이 보수파는 ‘정상 국가’ 전환 시도를 멈추지 않았고, 번번이 좌절했다. 아베 전 총리조차 총선 승리 이후 안보법으로 집단자위권 행사 해석을 바꿨지만, 개헌에는 실패했다.
1955년 보수 세력 합당으로 탄생한 자민당 주도의 ‘55년 체제’는 ‘1과 2분의 1 체제’, 즉 집권 자민당의 독주에 맞서지 못하는 ‘꼬마 야당’의 시대였다. 지난 8일 총선은 극단적인 ‘1과 2분의 1 체제’를 초래했다. 자민당이 중의원 465석 중 316석을 얻어 개헌선인 3분의 2(310석)를 넘겼고, 개헌 지지 정당 의석은 모두 394석에 달한다. 보수 압승을 넘어선 국가 체제 변화의 분기점으로 해석되는 사건이다.
자민당은 파벌 경쟁 대신 선명 보수·개헌 노선의 구심력이 강해져 내부 걸림돌이 사라진 상태다. 18일 2기 내각을 출범시킨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강한 일본’을 내걸고 헌법 개정과 핵무기 규정 변경, 무기 수출 등에서 속도전을 펼칠 태세다. 미국발 세계 질서 재편기를 놓칠 리가 없다. 러-우 전쟁과 대만 사태 우려, 북핵 위협은 보수파의 염원을 실현할 좋은 명분이 된다.
1947년 미군정 하에서 일본 헌법이 제정된 이후 79년이 흘렀다. 이 ‘전후 일본’은 시간적 범주에 그치지 않고 전쟁 전과 단절하겠다는 약속이 담긴 국가 정체성의 표현이기도 했다. ‘평화 국가’에서 ‘안보 국가’로. 지금 일본은 ‘전후 일본’과 헤어질 결심을 하고 있다. 일본 역사를 통틀어 가장 짧은 ‘부전(不戰)의 결의’ 시대의 종언이다. 한 해 1000만 명의 한국인이 방문하는 익숙한 이웃의 변신 예고가 예사로울 리 없다. ‘전쟁을 할 수 있는 일본’으로 동북아 질서는 변곡점을 맞는다. 일본은 어디로 가나. 우리의 안보 미래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성찰해야 할 질문이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
2026-02-19 [18:31]
-
[밀물썰물] 그 시절 '로또' 백색전화
130년 전만 해도 한국은 전화라는 존재도 모르던 나라였다. 1896년 10월 덕수궁에 3대를 비롯해 정부 부처에 7대, 평양과 인천에 각 1대의 전화가 설치된 게 국내 최초다. 호칭은 영어 ‘텔레폰’을 음역해 ‘덕률풍(德律風)’이라 불렀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1941년에 1만 7000여 명까지 전화 가입자 수가 늘었지만 일본인이나 부유층을 제외하고는 가입이 힘든 사치품에 속했다.
6·25전쟁으로 시설 대부분이 파괴되면서 전화 설비는 1957년께에 이르러서야 복구가 완료됐다. 이후 국민 생활이 향상되면서 주택용 전화 수요가 급증했으나 공급은 턱없이 부족했다. 전화 가입 신청을 하고서도 1년 넘게 기다려야 하는 일이 일상화했다.
전화 공급 적체가 심각해지면서 청약 경쟁 과열로 인한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자 정부는 1970년 전기통신법을 개정하기에 이른다. 전화 가입권을 양도 가능한 재산권이 아니라 전화국에서 빌려 쓰는 사용권 개념으로 바꾼 것이다. 하지만 법을 소급 적용할 수 없었기에 이미 양도 가능한 전화를 소유한 사람들까지 규제할 순 없었다. 법 개정 전에 보급된 전화는 신청서가 흰색이어서 사고 팔 수 있는 전화의 이름은 ‘백색전화’로 불렸다. 반면 법 개정 이후 보급된 임대형 전화는 신청서 색깔이 파란색이어서 ‘청색전화’가 됐다.
이 같은 조치 이후 백색전화 값은 하루가 멀다 하고 뛰어올랐다. 1970년대 중반 전화 신청 대기자만 무려 60만 명에 이르면서 백색전화 한 대 값은 260만 원까지 치솟았다. 당시 서울 시내 50평 집값이 230만 원 안팎이었으니 전화가 바로 로또가 된 셈이다.
1970년대 ‘로또’ 백색전화의 거품은 1978년이 돼서야 비로소 꺼지기 시작했다. 세계 10번째로 국내에서 자체 개발한 디지털식 전자교환기가 도입되면서 회선 적체가 한방에 해소돼서였다. 그렇게 백색전화 거품이 꺼지고 나서야 전화는 서민 통신수단으로 거듭나게 됐다. 이후 유선전화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1000만 회선을 돌파하면서 집집마다 전화를 구비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올해는 전화라는 문명의 이기가 인류 앞에 등장한 지 150년이 되는 해다. 1876년 2월 14일 미국 특허청에 전화 관련 특허 신청이 접수됐으니 설 명절 직전 딱 150년이 됐다. 그 사이 전화는 휴대전화가 보편화하면서 가정용 유선전화가 불필요한 지경으로까지 발전했으니 격세지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2026-02-18 [1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