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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연말이면 '합창'을 연주하는 이유
흔히 ‘연말 3대 프로그램’이라 부르는 공연이 있다. 차이콥스키 ‘호두까기인형’, 헨델 ‘메시아’ 그리고 베토벤의 ‘합창’이다. 공연장 정보에 이런 레퍼토리가 나열되면 “아, 드디어 올해가 가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은 압도적이다. 1824년 5월 7일, 오스트리아 빈의 케른트너토어극장에서 초연된 후 딱 200년이 지났지만, 이 곡의 힘은 시간이 흐를수록 강해졌다. 올해도 서울시향, KBS교향악단, 인천시향, 강릉시향, 부천필하모닉 할 것 없이 너도나도 송년 공연으로 선택했다.
베토벤은 젊은 시절부터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를 좋아했다. 특히 ‘환희의 송가’(Ode An die Freude)를 좋아해서 언젠가 자신의 음악 속에 구현하려고 갈무리해 두었다. 마침내 1824년, 베토벤은 아홉 번째 교향곡을 무대에 올렸다. 청중은 당혹스러워했다. 당시의 기준에서 볼 때 작품이 터무니없이 길고 복잡했다. 악기 편성의 규모, 곡의 구조와 길이, 연주의 난이도가 모두 기준치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게다가 교향곡에 4중창과 합창까지 집어넣다니….
4악장 앞부분에서 폭풍 같은 관현악이 연주된 후, 바리톤이 일어나서 노래를 시작한다. “오, 벗들이여, 이런 소리가 아니지 않은가, 좀 더 환희에 찬 노래를 부르지 않겠는가!” 이 부분은 실러의 시가 아니라 베토벤이 직접 써넣은 것이다. 귀가 들리지 않은 채 혼자만의 세계에 칩거해 있던 베토벤은 세상에 말을 건네기 시작한다. 그 말에 오케스트라가 술렁이고, 네 사람의 앙상블이 이어지고, 마침내 합창이 가세한다. “환희여, 신의 아름다운 광채여, 낙원의 딸들이여….”
원래 교향곡은 악기의 교감을 극대화하려고 만든 장르였다. 그 방식으로 8개의 교향곡을 완성한 베토벤이 왜 마지막 교향곡에 사람의 목소리를 집어넣은 것일까? 슬픔과 분노를 넘어 자유와 환희의 세계로 나가기 위해서는 노랫소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악기만으로 응집한 차가운 순수의 세계가 아니라, 말과 음악을 통합한 세계가 필요했고, 그 철학적 결정체가 교향곡 9번 ‘합창’이 된 것이다.
“악한 현실이 갈라놓은 것을 결합하고” 마침내 “백만의 사람들이 서로 끌어안는” 세상이라니. 베토벤인들 그것이 불가능한 표현이란 걸 몰랐을까?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이념의 끈을 놓지 않았다. 베토벤은 실러의 시를 읽던 스무 살 시절부터 그런 메모를 남겨놓았다. “할 수 있는 한 선한 일을 하고, 자유를 모든 것보다 사랑하고, 왕 앞에 불려가서도 진리를 부인하지 말자.” 그 오랜 의지가 있었기에 교향곡 9번 이 나올 수 있었다. 2025년 12월, 한국 땅에서 ‘합창’을 다시 들어야 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다.
2024-12-1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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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신파의 힘, 푸치니 ‘그대의 찬 손’
1838년, 파리의 싸구려 방에 네 명의 젊은이가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직업은 시인, 철학자, 음악가, 화가다. 겨울이 되었는데 방세는 밀리고 난로에 넣을 땔감마저 다 떨어졌다. 그때 음악가가 레슨비를 벌었다며 신이 나서 들어온다. 어라, 돈이 생겼네, 집세는 무슨 집세, 술이나 마시러 가자! 너무나도 익숙한 청춘의 공식을 따라 그들은 술을 마시러 간다. 시인 지망생인 로돌포가 잠시 남아 있는데, 그때 운명적인 노크 소리가 들린다. 옆집에 사는 미미가 열쇠를 떨어트렸는데, 촛불이 없어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촛불 좀 빌려주세요.” 이 대목에서 오페라 ‘라보엠’은 음악사를 밝히는 불빛이 된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손이 맞닿는다. 로돌포는 미미의 손이 너무 차다면서 그 손을 잡고 녹여 주겠다고 한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너무나도 구태의연한 설정이지만, 이런 점이 ‘라보엠’의 매력 포인트다. 이 오페라에는 귀족도 없고 영웅도 없으며 악당도 나오지 않는다. 치정과 배신과 탐욕으로 죽고 죽이는 드라마가 아니라 서민들의 구질구질한 일상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자, 손을 잡았으니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이때 로돌포가 부르는 노래가 테너 역사에 남는 명곡 ‘그대의 찬 손’이다. “내가 누구냐고요? 나는 시인이에요. 뭘 하냐고요? 시를 쓰지요. 어떻게 사냐고요? 그냥 살아요.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백만장자랍니다.”라고 허세를 떨며 그동안 미미를 마음에 두었음을 얘기한다. “내 마음의 금고에 간직해 온 꿈들이 당신의 두 눈 때문에 모두 날아가 버렸어요. 대신 그곳에 달콤한 희망이 자리 잡았죠”라는 식의 유치 발랄한 고백을 한다.
만일 이것이 연극의 대사였다면 형편없는 장면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어설픈 고백은 대사가 아니라 막강한 오케스트라가 뒷받침하고 있는 푸치니의 아리아다. 그 찬란한 음악의 힘 때문에 청중은 꼼짝할 수가 없게 된다. 신파조의 가사는 멜로디를 타고 향기를 내뿜기 시작한다. 몽롱하게 시작된 노래는 점점 끓어오르다가 하이 C의 막강한 고음으로 불을 댕긴다. 이 노래가 끝나면 미미가 답가를 보내고, 마침내 사랑의 이중창을 부르면서 오페라의 1막이 끝난다.
올해는 자코모 푸치니(1858~1924)가 세상을 떠난 지 딱 100주년이 되는 해다. 푸치니의 오페라에는 멋진 장면이 산더미처럼 많지만, 그중에서 딱 하나만 고르라면 나는 ‘그대의 찬 손’을 가장 먼저 꼽을 수밖에 없다. 나로선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난생처음 본 오페라였으며, 테너의 위력을 체험한 첫 오페라였기 때문이다. 위대한 푸치니여, 편히 쉬시길!
푸치니 ‘라보엠’ 중 '그대의 찬 손'
2024-12-05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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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라벨의 '볼레로', 변화의 미학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했다. “당신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들일 수 없다”라고. 변화의 관점에서 보자면 세상은 단 한 치도 같은 것이 없고, 동일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어제나 오늘이나 다를 것이 없다. 카오스와 코스모스, 다양성과 동일성이라는 형이상학의 비밀을 음악은 너무나(?) 쉽게 풀어낸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 같은 작품이다.
정확히 104년 전 오늘, 라벨(1875~1937)의 ‘볼레로’가 초연되었다. 1927년 라벨은 당시에 발레리나로 유명하던 이다 루빈슈타인에게 무용 음악을 한 곡 의뢰받았다. 그 춤은 술집의 탁자 위에서 무용수가 춤을 추다가 점점 격렬해지는 리듬을 따라 손님들과 함께 춤을 춘다는 내용이었다. 라벨은 이듬해인 1928년에 그 음악을 발표하면서 스페인의 민속 무용인 ‘볼레로’라는 제목을 붙였다.
볼레로는 작은북의 반복적인 리듬 위에 두 개의 주제를 끈질기게 반복한다. 곡이 반복될 때마다 플루트, 클라리넷, 바순, 트럼펫, 색소폰 등이 더해지면서 음악을 점점 키워간다. 라벨은 이 집요한 반복을 통해 독특한 음향적 색채와 극도의 긴장감을 연출한다. 마침내 베이스 드럼과 심벌즈가 등장하면서 음악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라벨을 두고 왜 ‘오케스트레이션의 제왕’이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는 곡이다.
그는 정말 다양한 음악적 소재를 자유자재로 구사한 작곡가였다. 재즈, 폭스트롯, 찰스턴 등 다양한 대중음악 양식도 다루었고, 스페인의 민속 음악에도 폭넓게 관심을 보였다. ‘스페인 랩소디’ ‘스페인의 한때’처럼 이국적인 상상력이 풍부한 작품들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관현악법에 능통했던 그는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비롯한 숱한 명곡을 편곡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30년엔 전쟁 중 오른손을 잃은 오스트리아의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완성했고, 이어 ‘피아노 협주곡 G장조’를 완성했다. 그러나 자동차 사고로 인해 머리를 심하게 다친 후 뇌 질환으로 폐인의 삶을 살다가 1937년 세상을 떠났다.
‘볼레로’는 라벨이 살아 있을 때 이미 대성공을 거뒀다. 라벨 자신은 그저 실험 삼아서 만든 곡이었는데, 너무나 인기를 끌게 되자 오히려 당황했다고 한다. 이 곡은 현재에도 가장 자주 연주되는 클래식 레퍼토리 중 하나다. 모리스 베자르 발레단의 안무 이후, 무용계에서도 안무가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최고의 작품이 되었다. 변화의 원리를 이처럼 재미있고도 명확하게 들려준 음악을 찾기는 힘들다.
2024-11-21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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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겨울의 길목에서 듣는 '콜드송'
며칠 사이에 기온이 뚝 떨어졌다. ‘자, 이렇게 겨울이 시작되는구나’하고 마음을 다잡으며 겨울의 음악, 퍼셀(Henry Purcell, 1659~1695)의 ‘콜드송’(cold song)을 들어본다. 원래의 제목은 ‘너는 어떤 힘이냐’(what power are thou)이지만 ‘콜드송’이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1691년 초연한 세미 오페라 ‘아서왕’ 3막에 나오는 아리아다. 이 곡은 오페라 ‘디도와 아이네아스’ 중에 나오는 ‘내가 땅에 묻힐 때’, ‘오이디푸스’에 나오는 ‘음악은 잠시 동안’과 함께 퍼셀의 가장 유명한 아리아로 꼽힌다.
“너는 대체 어떤 힘이냐? 저 땅 밑의 영원한 눈밭에서 날 억지로 일어서게 만드는가. 너는 보지 못하는가? 내 몸이 늙고 경직되어서 혹심한 추위를 견딜 수 없다는 것을. 내가 거의 움직일 수 없으며, 숨쉬기조차 힘들다는 것을. 날, 나를 얼어붙게 해 다오. 나를 얼려서 다시 죽게 해 다오.”
색슨족 마법사가 영국을 얼음 나라로 만들었는데, 사랑의 신 큐피드가 나타나서 얼어붙은 대지를 풀어놓으려 한다. 이때 잠에서 깨어난 겨울의 신이 부르는 노래다. 꽁꽁 얼려 두었던 마음이 깨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감정을 드라마틱하게 포착해 놓았다. 카운터 테너의 목소리로도 자주 들을 수 있지만, 역시 베이스 바리톤이 불러야 제맛이 난다. 비발디 ‘사계’의 겨울 1악장을 연상시키는 오케스트라 반주도 멋있다. 그래서 영화나 광고의 배경으로도 자주 사용된다. 영화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의 정부’에선 편곡 버전으로 흘러나왔고, 앤서니 홉킨스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영화 ‘더 파더’에도 삽입되었다.
바로크 시대의 영국에는 천재적인 작곡가가 많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퍼셀은 36세라는 짧은 기간에 정말 대단한 업적을 쌓았다. ‘디도와 아이네아스’, ‘아서왕’, ‘요정의 여왕’, ‘메리 여왕의 장송 음악’ 등 그야말로 ‘영국의 오르페우스’라고 불릴 만한 작품을 쏟아냈다. 그런데 문제는 술. 술을 너무 좋아해서 밤늦게 취해 들어오는 일이 잦았다. 일설에 의하면 어느 날 이를 지겨워하던 부인이 문을 닫고 열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술에 취해 밖에서 잠든 퍼셀은 추위에 몸을 상했고, 결국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게 329년 전인 1695년 11월 21일이었다.
퍼셀의 기일에 맞춰 부산문화회관에서 ‘아서왕’을 콘서트오페라 형식으로 공연할 예정이다. 장진규가 연출을 맡았으며, 이태영(아서왕), 박현진(큐피드), 이수정(비너스), 강태경(요정) 등이 출연한다. 이성훈이 지휘하는 드림문화오케스트라와 르보야즈 보칼레 앙상블이 연주와 합창을 맡았다. 퍼셀의 ‘콜드송’을 제대로 들어볼 기회가 될 것 같다.
2024-11-07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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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카르멘과 돈 호세, 오페라가 만든 불멸의 캐릭터
남자의 심장을 겨눈 여인들이 있다. 역사의 시련 때문이거나, 타고난 미모 때문이거나, 자유로운 영혼 때문이거나, 아무튼 이 여인은 사랑하는 남자를 위험에 빠트린다. 이른바 팜므 파탈이라는 ‘치명적인 여인’들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데아, 구약성서에 나오는 델릴라와 살로메 같은 여인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신화나 성서의 인물이 아닌, 현실 세계를 기반으로 태어난 나쁜 여인의 전형은 비제의 ‘카르멘’에서 시작되었다.
10월 25일은 프랑스 작곡가 조르주 비제(1838~1875)가 태어난 날이다. 비제는 1875년 파리 오페라코미크극장에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여주인공을 선보였다. 그녀가 나타나기 이전까지 오페라 무대를 장식한 여주인공은 대부분 청순가련형의 여인이었다. 남자 때문에 슬퍼하며 울고 방황하다 실의에 빠져 죽어가곤 했다. 그런데 카르멘은 달랐다. 그녀는 신화 속에서 온 것도 아니고 성경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공주나 귀부인도 아니었고, 이상과 야심에 불타는 사람도 아니었다. 유럽의 오지나 다름없는 스페인의 남쪽 끝 안달루시아 지방, 거기서도 이방인이자 최하층 집단인 집시 여인이었다.
카르멘은 “자유롭게 태어났고 자유롭게 죽겠다”라고 노래하면서 기존의 가치관을 뒤집어놓는다. 이때부터 오페라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예전처럼 호락호락하지 않게 된다.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역할에서 벗어나서 남자를 쥐락펴락하다 못해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자, 여기에 카르멘을 도와주다가 감옥신세를 지고 풀려난 남자 돈 호세가 있다. 그는 카르멘을 찾아와 간직해 두었던 꽃을 꺼내 보인다. 그 꽃은 1막에서 카르멘이 자신을 유혹하면서 던진 꽃이다.
“당신이 내게 던져준 꽃을 감옥에서도 간직하고 있었소… 당신을 미워하고 저주하고, 내 운명이 왜 당신과 나를 만나게 했는지 묻기도 했소. 그러나 당신을 욕한 걸 후회했소. 내 유일한 욕망, 유일한 희망은 당신을 다시 본다는 것이었소. 오, 카르멘, 그렇소, 당신을 다시 보리라는 희망 말이요. 오, 나의 카르멘, 나는 당신 것이오, 카르멘, 당신을 사랑하오!”
멀쩡하던 남자가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을까 궁금해진다. 지질하고 구차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게 사랑이다. 사랑은 원래 맨정신으로 하는 게 아니다. 당시의 프랑스 청중은 너무나 이질적인 캐릭터와 스토리에 당황했고 불쾌해했다. 결국, 오페라는 3개월 만에 막을 내렸고, 그 충격 때문에 건강이 나빠진 비제는 초연한 지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상하게도 비제가 죽자마자 카르멘의 인기는 치솟기 시작했고, 이후 수많은 ‘치명적인 여인’의 원조가 되었다.
2024-10-24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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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브루크너 9번, 느리고 깊은 곳으로
올해는 브루크너(Anton Bruckner, 1824~1896)가 태어난 지 꼭 200년 되는 해이다. 탄생 200주년을 맞아 빈 필하모닉은 1월 1일 신년 음악회에서 이례적으로 브루크너의 곡을 연주했고, 2020년부터 시작한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 녹음도 마무리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2월에 부천 필하모닉이 교향곡 6번을 연주한 것을 시작으로 KBS교향악단, 서울시향, 대구시향, 광주시향 등이 모두 브루크너 교향곡을 레퍼토리에 넣었다. 부산시향도 10월 1일에 홍석원의 지휘로 교향곡 4번을 연주했다. 11월에 내한하는 사이먼 래틀 지휘의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도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을 가지고 온다.
브루크너는 모든 면에서 느리고 늦은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린츠의 성 플로리안 수도원에서 연주했고 인생 중반까지 수도사 같은 삶을 살았다. 그가 빈으로 나와 본격적인 작곡 활동을 한 것은 나이 43세나 되어서였다. 그러나 발표하는 곡마다 혹평이 따랐다. 흔히 음악에는 주제 선율이 있는데, 브루크너의 음악은 뚜렷한 선율 대신 복잡한 음향과 화성의 연속이다. 게다가 길기까지 하다. 한마디로 “어렵고 지루하다”라는 것이다. 음악계는 그를 시골뜨기 취급했고, 빈 필하모닉이 연주를 거부한 적도 있다. 그가 청중의 인정을 받은 것은 나이 60세가 넘어 교향곡 7번을 발표할 때쯤이었다.
브루크너는 1896년 10월 11일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총 11개의 교향곡을 남겼는데, 앞의 두 곡은 스스로 습작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해서 번호를 매기지 않았고, 번호로는 9번 교향곡까지 작곡했다. 그나마 마지막 곡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작곡 중에 두 가지 말을 남겼다. 하나는 “이 작품은 사랑하는 신에게 바친다(Dem lieben Gott)”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혹시나 내가 마지막 악장을 완성하지 못하면, 3악장 뒤에 나의 ‘테 데움’을 이어 연주하라”라는 것이었다. 마치 이 곡을 완성하지 못할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결국 4악장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오늘 세상을 떠났다. 신기하게도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인 9번 교향곡과 같은 D단조로 되어 있다.
마지막 교향곡의 3악장 아다지오는 바그너의 오페라를 연상시키는 극적인 상승으로 시작한다. ‘느리고 장중하게(Langsam, feierlich)’라는 지시어처럼, 곡은 끝을 알 수 없는 깊이로 천천히 천천히 흘러간다. 그는 이 악장을 ‘인생에 대한 작별 인사’라고 표현했다. 브루크너를 특별히 사랑하던 카라얀 지휘로 1978년 빈 무지크페라인에서의 영상을 다시 본다.
2024-10-10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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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아랑훼즈' 2악장
이제나저제나 바뀔까 하던 날씨가 하룻밤 사이에 달라졌다. 며칠 전까지 에어컨 없이 잠들기 힘들었는데, 이젠 이불 한 장은 덮어야 할 것 같다. 날씨가 달라지니 더위 때문에 미뤄뒀던 여행 욕구가 슬슬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바보는 방황하고 현명한 자는 여행을 한다”라는 말이 있다. ‘지금’과 ‘여기’를 떠나서 익명이 보장되는 어딘가로 이동하면 훨씬 겸손하게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거리를 두고 보면 그토록 심란하던 일도, 복잡하던 사건도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는 법이다.
듣고 있으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는 음악이 있다. 아무런 가사도 없지만, 왠지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이름 없는 도시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음악. 내게 있어선 로드리고의 ‘아랑훼즈 협주곡’ 2악장이 그런 음악이다. 이 곡은 스페인의 작곡가 호아킨 로드리고(Joaquin Rodrigo, 1901~1999)의 출세작이자 명실상부한 기타 협주곡 역사상 최고의 히트곡이다. 특히 1악장과 3악장 사이에 있는 느린 2악장은 ‘20세기 최고의 멜로디’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유명하다.
로드리고는 세 살 때 디프테리아에 걸려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게 되었다. 앞이 안 보이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음악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터키 출신의 피아니스트 빅토리아 카미를 만나서 사랑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결혼하고자 했지만, 카미의 부모가 완강하게 반대했다. 부모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앞을 못 보는 데다 가난하기까지 한 음악가라니….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너무나 확고했고 결국 카미의 부모도 손을 들게 했다.
결혼한 후에 로드리고는 장학금을 받게 되어 생활이 조금씩 나아졌고, 카미는 첫아들을 임신했다. 그러나 기다리던 아이는 유산되었고, 두 사람은 아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부부가 선택한 여행지는 스페인의 옛 왕궁이 있는 아랑훼즈였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경주나 부여 같은 곳이다. 카미는 앞이 보이지 않는 로드리고의 눈이 되어서 옛 왕궁의 화려한 풍경을 설명해 주었다. 로드리고는 카미의 손을 잡고 벽을 더듬어가며 마음에 담아놓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부인에 대한 사랑과 상상으로 떠올린 왕궁의 이미지를 엮어 만든 곡이 바로 ‘아랑훼즈 협주곡’이다. 1940년에 스페인의 기타리스트 사인스 데 라 마사가 초연했다. 이듬해 첫딸 세실리아가 태어났고, ‘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 ‘안달루시아 협주곡’ 등을 발표하며 로드리고는 유럽 음악계에서 인정받는 작곡가의 반열에 올랐다. 두 사람은 정말 오래도록 정답게 살았다. 부인 카미는 1997년 92세, 로드리고는 1999년 98세에 세상을 떠났다.
2024-09-26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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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위대한 연인, 클라라의녹턴
작곡가들 사이엔 수많은 사랑 이야기가 있다. 모차르트와 콘스탄체, 베토벤과 ‘불멸의 연인’, 쇼팽과 조르주 상드, 말러와 알마, 드뷔시와 엠마 바르다크 등 저마다의 열정과 스캔들로 음악사를 흥미롭게 만들어 놓았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사랑의 테마는 아마도 슈만, 클라라, 브람스를 둘러싼 이야기일 것이다.
클라라 슈만(1819~1896)은 1819년 9월 13일,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훗날 남편이 되는 로베르트 슈만보다는 아홉 살이 적다. 슈만(이하 로베르트 슈만)이 음악을 배우기 위해 클라라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에게 찾아갔을 때 슈만은 스무 살 청년이었고 비크의 딸 클라라는 꼬마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할 때였다. 그 후 클라라의 성장은 눈부셨다. 파가니니와 리스트마저도 클라라의 연주에 찬사를 보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자면 애지중지 길러온 천재적인 딸을 가난한 음악가에게 보내기 싫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자식을 이길 수 있는 부모는 흔치 않은 법이다. 결국 슈만과 클라라는 아버지와 법정 소송까지 해서 1840년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 후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잘 알려진 대로 슈만은 1854년 라인강에 뛰어들었다. 정신병원에 들어간 후 나오지 못한 채 2년 후에 세상을 떠났고, 의리인지, 존경인지, 사랑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혼자된 클라라의 곁을 항상 브람스가 지켰다. 클라라는 아이들을 보살피며 틈틈이 작곡과 연주회를 이어갔다. 슈만과의 결혼 생활은 총 16년이었다. 클라라는 그 기간에 계속되는 임신, 출산, 육아를 고스란히 감당했고 남편의 우울증까지 보살펴 가면서 슈만 작품의 편곡, 초연, 출판을 맡았다.
그녀는 1891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마지막 연주회를 가질 때까지 60여 년간 무려 1300여 회 음악회를 열었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누나 난네를이나 멘델스존의 누나 파니처럼 재능을 드러내지 못한 채 사라진 여성 연주자들에 비하면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작곡가로서의 재능을 발휘할 수 없었던 점은 무척 아쉽다. 그나마 오늘 소개하는 녹턴 작품6-2번 같은 곡이 남아 있어 그녀의 천재성을 짐작하게 만든다.
이 곡은 1836년 출판된 ‘6개의 피아노 소품집’에 수록된 곡이다. 작곡 시점은 그보다 1, 2년 전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불과 15~16세 때 만든 작품인데, 그 서정적인 기품이 놀랍다. 이즈음에 클라라의 눈에 비친 슈만은 아저씨가 아니라 사랑스러운 오빠로 변했고, 슈만 역시 어린애가 아니라 여인으로 클라라를 바라보기 시작할 때였다. 그 들뜬 마음이 음악 속에 이렇게나 오롯이 스며 있다.
2024-09-1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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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달빛에 묻어나는 장미꽃 향기
여름에 덥다고 투덜거리면 어머니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처서는 지나야 해.” 살아온 경험치로 미루어 보건대, 아마도 그러리라 생각한다. 머잖아 바람이 불 것이고, 들녘의 색깔이 변할 것이며, 장롱 속에 넣어둔 긴소매 옷을 주섬주섬 입게 될 것이고, 마침내 겨울이 오고 한 해가 저물 것이다. 내년에도 여름은 또 오겠지만, 다시 오는 여름은 올해의 여름과 다르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짧은 여름의 기억을 붙잡아 두고 싶어서 이 음악을 골랐다.
베를리오즈(Louis Hector Berlioz, 1803~1869)의 연가곡 〈여름밤〉에 나오는 ‘장미의 정령’이다. 베를리오즈가 시인이자 친구이기도 한 테오필 고티에의 시집 〈죽음의 연극〉에서 6편의 시를 가사로 뽑아 곡을 붙인 것이다. 원래 피아노 반주로 된 노래였으나 곡에 대한 인기가 올라가자 관현악 반주 버전을 다시 만들었는데, 이 작품이 관현악 반주로 발표된 최초의 연가곡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프랑스 예술가곡에 약한 편이라 무대에서 들을 기회가 적은 곡이지만 숨어 있는 명곡이라 할 수 있다.
작품 구성을 보자면 1곡은 ‘빌라넬라’ 즉 목가(牧歌)다. 2곡은 ‘장미의 정령’, 3곡 ‘호수에서’, 4곡 ‘부재’. 5곡 ‘묘지에서-달빛’, 6곡 ‘미지의 섬’으로 이어진다. 특히 사랑받는 곡은 2곡 ‘장미의 정령’이다.
어떤 소녀가 무도회에 가면서 장미 한 송이를 꺾어 드레스에 꽂았다. 소녀가 무도회를 마치고 돌아와서 잠이 들자 낮에 꺾은 장미의 정령이 나타나서 얘기한다.
“... 오, 그대, 나를 꺾어버린 사람아, 그대는 나를 버리지 못할지니, 매일 밤 장미의 정령이 그대 베개 곁에서 춤을 출 것이에요. 그러나 두려워 말아요. 나는 미사도 애도가도 요구하지 않아요. 이 오묘한 향기는 나의 영혼, 나는 천국에서 온 것이므로….”
얼마나 몽환적인 노래인가. 한여름 밤의 꽃향기가 달빛에 묻어나는 듯하다.
당시 베를리오즈는 연극배우 해리엇 스미스슨과 결혼해서 살던 때였다. 거의 스토커 수준으로 따라다니며 얻어낸 결혼 생활이지만 달콤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해리엇은 알코올 중독에 빠졌고 베를리오즈는 또 다른 여인, 소프라노 마리 레치오에게 빠졌다. ‘여름밤’은 이즈음에 작곡한 사랑 노래이며, 대상은 새로운 연인 마리 레치오인 듯하다. 곡이 출판되고 1년 후쯤에 베를리오즈는 해리엇과 공식적인 별거에 들어갔고,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레치오와 결혼했다. 사랑의 계절은 그렇게 지나간다. 한 시절의 여름이 지나고 다른 여름이 시작된 것이다.
2024-08-15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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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위대한 광대, 카루소를 기리며
흔히 천재적인 테너가 새로 등장할 때면, ‘파바로티의 환생’이라는 식으로 칭찬하곤 한다. 그러나 파바로티 이전의 테너에게 최고의 찬사는 ‘카루소의 환생’이라는 표현이었다. 그만큼 카루소(Enrico Caruso, 1873~1921)란 이름은 20세기 성악의 대명사였다.
이탈리아 나폴리 빈민가에서 일곱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난 카루소는 열 살이 되던 해부터 공장에 나가서 막일하며 밥벌이했다. 저녁 시간을 틈타서 성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1895년 나폴리에서 데뷔한 후 급성장해 1903년부터 미국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올라 1920년 마지막 공연을 할 때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특히 오페라 ‘팔리아치’에서 광대 옷을 입고 ‘의상을 입어라’를 부르는 모습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사람들은 그를 ‘영원한 광대’ 또는 ‘위대한 광대’라고 불렀다.
카루소가 뮌헨 국립극장에서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을 공연할 때 일이다. 갑자기 무대장치가 쓰러지면서 카루소의 머리를 때렸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어서 공연은 계속되었는데, 안도의 한숨을 쉬는 극장장에게 한 직원이 다가와서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극장장님, 만약 카루소가 불구의 몸이 되었다면, 차라리 때려죽여 버리는 편이 나았을 거예요. 그 종신 연금을 우리가 어떻게 지급할 수 있겠습니까?” 웃자고 한 말이겠지만 그만큼 카루소의 인기가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와 계약하려면 일단 백지수표를 들고 가는 게 기본이었다는 말도 있다.
카루소는 초기 레코드 산업의 주인공이었다. 1902년 뉴욕 그라모폰 녹음실에서 ‘의상을 입어라’를 녹음했는데, 이 음반은 세계 최초의 밀리언셀러 음반이 되었고, 그로 인해 음반 산업이 급속도로 성장하게 되었다. 사는 동안 약 250개의 음반을 남긴 카루소는 1921년 8월 2일, 48세라는 한창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오늘 세상을 떠난 카루소를 생각하며 이탈리아 작곡가 루치오 달라가 지은 칸초네 ‘카루소’를 듣는다. 달라는 카루소가 말년에 투병하면서 머무르던 나폴리의 호텔에 묵으면서 이 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비롯하여 안드레아 보첼리, 셀린 디옹, 라라 파비앙, 안나 옥사 등 많은 가수가 녹음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당연히 파바로티 버전이다. 누구보다 화려하던 사랑과 영광의 세월을 반추하면서 부르는, ‘백조의 노래’ 같은 곡이다.
“불빛 반짝이는 밤바다, 바람은 몰아치고, 소렌토가 보이는 낡은 테라스에서, 한 남자가 여인을 껴안고 흐느끼네…. 당신을 정말 사랑해.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거야. 내겐 이 사랑이 사슬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내 혈관 속 피를 녹여내는 사슬….”
음악평론가
2024-08-0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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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쇼스타코비치, '타임'지 표지에 등장하다!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소련의 전쟁으로 번졌다. 1941년 6월 22일부터 독일군은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해 9월부터 시작해서 총 871일 동안 독일군은 레닌그라드를 포위한 채 모든 음식과 연료 공급을 차단했다. 10만 회가 넘는 공중 폭격을 했고, 15만 발의 포탄을 레닌그라드에 쏟아부었다. 폭격과 추위와 굶주림으로 100만여 명의 러시아인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러시아군은 쥐를 잡아먹어 가면서까지 악착같이 버텼다.
쇼스타코비치(Dmitri Dmitriyevich Shostakovich, 1906~1975)는 그 소식을 듣고 곧바로 군에 자원했다. 근시가 너무 심해서 일반 군인으로는 복무할 수 없었기에 시민군에 들어가서 소방수로 일했다. 그는 전쟁의 참상을 지켜보면서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를 작곡했다. 1942년 2월에 볼쇼이극장 오케스트라가 초연했으며, 10월엔 전투 중인 레닌그라드에서도 연주되었다. 초연 후에 이 작품은 나치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곡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고, 쇼스타코비치는 일약 국가 영웅이 되었다.
7번 교향곡의 악보는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서방 세계에 전달되었다. 1942년 6월 22일에 영국 런던에서 초연했고, 마침내 7월 19일에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NBC심포니가 미국 초연을 했다. 공연은 미국 전역으로 방송되었고, 이튿날 ‘타임’지는 소방수 모자를 쓰고 있는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을 표지에 게재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악명 높은 ‘즈다노프 선언’이 발표되면서 쇼스타코비치는 사회주의를 좀먹은 ‘최악의 형식주의자’로 몰려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때부터 쇼스타코비치는 두려움에 떨며 지내야 했다. 매일 밤 중앙위원회에서 보낸 요원들이 그를 감시했고 호시탐탐 끌고 갈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1953년 스탈린이 죽었고, 다행히 쇼스타코비치는 죽음의 길에서 생환할 수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는 7번 교향곡의 네 개 악장이 각각 ‘전쟁’ ‘추억’ ‘광활한 조국’ ‘승리’를 상징한다고 했다. 긴박한 1악장은 “우리를 위해 죽은 영웅들을 위한 레퀴엠”이라고 설명했다. 2악장은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간주곡”이며, 길고 느린 3악장은 “다가올 승리의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표현했다. 행진곡풍의 4악장은 최후의 승리를 상징한다.
음악을 통해 전쟁의 폭력성과 참상을 고발하던 그가 살아 있다면, 지금의 러시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오늘도 여전히 어지러운 우크라이나의 전쟁 소식을 마주하며, 쇼스타코비치의 7번 교향곡을 들으니 만감이 교차한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4악장-hr심포니, 클라우스 매켈라(지휘).
2024-07-18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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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엘레지, 슬픈 노래의 힘
초등학교 시절, 당시에는 ‘전축’이라 부르던 물건이 집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가족을 모아 놓고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레코드를 올렸다. 몇 장 안 되는 레코드 중에서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던 것은 이미자의 음반이었고, 표지에는 ‘엘리지의 여왕’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처연한 노랫가락이 아버지의 담배 연기 사이로 번져 나오던 풍경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엘레지’는 그리스어의 ‘엘레게이아’에서 유래된 말로 비가(悲歌), 애가(哀歌)로 번역된다. 죽은 이를 기리는 내용이 많았고, 죽음만큼이나 슬픈 이별과 아픔에 대해서도 엘레지라는 제목으로 시가를 만들었다. 문학에는 괴테 〈로마 엘레지〉, 셸리 〈아도니스〉, 릴케 〈두이노의 비가〉 등이 유명하고, 비슷한 정서를 지닌 음악에도 같은 용어를 사용했다. 마스네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엘레지’, 포레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엘레지’, 비외탕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엘레지’ 등 수없이 많은 엘레지가 남아 있다.
7월 6일은 러시아의 작곡가 안톤 아렌스키(Anton Arensky, 1861~1906)가 태어난 날이다. 그래서 그가 남긴 엘레지 한 곡을 듣는다. 아렌스키는 9세 때부터 가곡과 피아노 소품을 작곡할 정도로 음악적 재능이 출중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작곡을 배웠다. 21세 되던 1882년 음악원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곧바로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임용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라흐마니노프와 스크랴빈이 모두 아렌스키에게 작곡을 배운 적 있다. 그러나 술과 도박에 빠져 건강을 해쳐 45세 한창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100곡이 넘는 피아노곡을 포함해 무려 250곡에 이르는 작품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아렌스키의 음악은 별로 알려지지 못했다. 그러나 피아노 3중주 1번 작품32만은 자주 무대에 오른다. 1894년 발표한 이 곡은 세상을 떠난 첼리스트이며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장을 지낸 카를 다비도프를 추억하며 쓴 곡이다.
이 시기에 비슷한 정서의 곡이 많이 눈에 띈다. 선배인 차이콥스키는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 죽자 ‘위대한 예술가를 추억하며’라는 부제를 붙여 피아노 3중주 A단조를 썼고, 후배인 라흐마니노프는 차이콥스키의 죽음을 애도하며 피아노 3중주 2번을 썼다. 그래서 시기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를 이어주는 연결점과 같은 곡이다. 특히 ‘엘레지’라 이름 붙은 3악장 아다지오가 유명하다. 지난날에 대한 회상과 한숨과 애도의 감정이 심금을 울린다.
2024-07-04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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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인테르메조, 연결과 전환의 테크닉
달력을 보다가 새삼스레 놀랐다. 아! 벌써 한 해의 절반이 지나버렸구나. 이제 장마와 불볕더위와 씨름하다 보면 금방 여름이 지나갈 것이고, 찬바람이 부는 듯하면 어느새 한 해가 저물 것이다. 시간이란 항상 야속하게 흘러가는 법, 이쯤에서 올 한 해 세웠던 계획을 중간 점검하면서 환기할 필요가 있다.
음악에도 이와 비슷한 생각으로 만들어 놓은 장치가 있다. 인테르메조(intermezzo)라는 음악 용어다. 우리말로는 간주곡(間奏曲)이라 한다. 오페라나 드라마에서 쓰는 막간 음악으로, 곡의 중간에 이야기를 전환하고 청중의 감정을 유도하기 위해 사용되는 곡이다.
음악사에는 꼭 들어봐야 할 간주곡이 많다. 슈베르트 ‘로자문데’ 간주곡, 비제 ‘카르멘’ 간주곡, 그라나도스 ‘고예스카스’ 간주곡 등이 모두 명곡이다. 그러나 모든 간주곡 중에서 딱 한 곡을 고르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이 곡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을 고르겠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이탈리아의 작곡가 피에트로 마스카니가 1890년 로마에서 초연한 단막 오페라다. 1887년 손초뇨 출판사가 주최한 창작 오페라 공모전에서 최우수작으로 선정되었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라는 말은 ‘시골 기사’를 의미하는데, 우리 식으로 하자면 ‘향토 예비군’ 정도 되겠다. 제대하고 돌아온 청년 투리두는 옛 애인 롤라를 잊지 못하지만, 그녀는 이미 알피오의 아내가 되어 있다. 자괴감과 질투로 괴로워하던 투리두는 결국 알피오와 결투를 벌이다가 허무하게 죽는다는 내용이다.
무척 간단한 스토리지만, 이 오페라에는 어떤 신화적 인물이나 영웅도 등장하지 않는다. 평범한 서민들이 겪는 질투와 분노의 감정을 날 것 그대로 묘사해 놓았다. 그래서 이탈리아 ‘베리스모’(사실주의)의 시작을 알렸다는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가진 평범하다 못해 지질한 본성, 성급한 분노, 후회 등의 감정을 미화하거나 승화시키지 않고 드러낸다. 그러나 이 현실적인 막장 드라마를 너무나 멋진 아리아, 합창, 간주곡으로 수놓았다.
마치 폭풍전야의 풍경처럼 드라마틱한 간주곡은 영화나 CF에서 배경음악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성난 황소’의 오프닝신,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 ‘대부3’의 라스트신 등에서 이 곡이 흘러나왔다. 시간의 흐름에 부대낄 때, 시간의 흔적을 더듬고 싶을 때, 이 곡만큼 배경음악으로 어울리는 곡도 찾기 힘들 것이다. 지나간 시간이 밀물처럼 들이치는 곡이다.
2024-06-20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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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봄 바다에서 듣는 차이콥스키의 '뱃노래'
친구와 함께 기장의 포구로 놀러 나갔다. 바다는 잔잔했다. 바다의 풍경 속에는 배가 있어야 한다. 아련히 멀리 있어 유람선인지 고기잡이배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배가 한두 척 떠 있어 줘야 바다의 공식이 완성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배에 탄 어부든 손님이든 누군가는 모종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을 거라는 상상을 곁들인다. 그 상상을 입력하여 만든 노래나 기악곡을 우리는 ‘뱃노래(Barcarolle)’라고 부른다.
뱃노래는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어업 노동요로서의 뱃노래다. “어기 여차~” 하면서 노를 젓거나 그물을 당기고 고기를 잡는 풍경을 묘사한 노래다. 경기 민요인 ‘자진 뱃노래’, 조두남 작곡의 가곡 ‘뱃노래’, 러시아 민요 ‘볼가강의 뱃노래’ 같은 곡이다.
둘째는 강이나 바다에서 배를 띄워 놓고 즐기는 정취를 담은 음악이다. 우리나라의 ‘진도 아리랑’에 나오는 것처럼, “만경창파(萬頃蒼波)에 두둥둥 배 띄워 놓고, 저 달이 떴다 지도록 놀다 가세”라는 생각은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꿈꾸는 최고의 휴식이다. 서양 음악에서의 뱃노래도 주로 이런 마음을 담고 있다.
대표적으로 ‘베네치아의 뱃노래’가 있다. 마치 곤돌라를 저어가는 것처럼 여유 있는 템포와 단조롭게 흔들리는 듯한 ‘강약약’의 리듬으로 편안한 정서를 표현한다. 오펜바흐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 중에 나오는 뱃노래와 베르디 ‘가면무도회’의 뱃노래 장면 등이 있다. 기악에선 멘델스존이 ‘무언가’에 삽입한 3개의 뱃노래가 잘 알려져 있으며, 그 외에도 포레, 알캉, 발라키레프, 글라주노프 등이 피아노곡으로 뱃노래를 썼다.
오늘 기장 해변에서 들은 곡은 차이콥스키의 뱃노래다. 1876년, 당시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있던 차이콥스키는 〈누벨리스트〉라는 음악 월간지에 짧은 피아노곡을 연재하게 되었다. 잡지에는 차이콥스키의 음악과 어울리는 짧은 시도 곁들여 수록하기로 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사계(seasons)’인데, 비발디의 작품과는 달리 네 계절이 아니라 열두 달을 다루고 있다. 모든 곡이 다 좋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6월 ‘뱃노래’와 10월 ‘가을의 노래’가 유명하다.
“해변으로 나가자, 거긴 파도가 우리의 다리에 입 맞추리라. 비밀스러운 슬픔을 담아, 별들이 우리를 비춰 주리니.” 알렉세이 플레세예프의 시와 차이콥스키의 서정적인 멜로디를 같이 음미할 수 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회색 풍경마저도 일순간 푸른 바다로 바꿔 버리는 마법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2024-06-06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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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5월의 꿈, 시인의 사랑
5월이 되면 반드시 듣게 되는 음악이 있다. 일단 팝송 중에서 추억의 그룹 비지스가 부른 ‘5월 1일(First of May)’을 들어야 한다. 그건 5월을 맞이하는 개인적인 회고 의식과도 같다. 비지스를 듣고 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슈만(R.Schumann, 1810~1856)으로 간다. 그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Dichterliebe op. 48)을 벗어날 수 없다. 테너 프리츠 분덜리히의 음반을 다시 꺼내 든다. 첫 곡, ‘놀랍도록 아름다운 5월에’가 울려 퍼지면, 그제야 봄이 왔음을 제대로 인지하게 된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5월에, 온갖 꽃봉오리가 피어날 때
그때 내 가슴 속에도, 사랑이 움터 올랐지.
놀랍도록 아름다운 5월, 온갖 새들 노래할 때
그때 나 그녀에게 고백했네, 내 그리움, 내 갈망을.
가사는 하이네의 시집 〈노래의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곡을 만든 1840년에 슈만은 우여곡절 끝에 클라라와 결혼하게 되는데, 그 한 해 동안 무려 169곡의 가곡을 썼다. 〈시인의 사랑〉 외에도 〈미르테의 꽃〉 〈여인의 사랑과 생애〉처럼 독일 가곡사에 한 획을 긋는 작품들을 쏟아냈다. 클라라에게 보낸 편지에 슈만은 이렇게 썼다. “나는 가곡을 작곡할 때 늘 당신과 함께 있었습니다. 당신 같은 여인이 없었다면 절대 그런 음악을 만들 수 없었을 겁니다.”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스치는 장미꽃도 예사롭지 않고, 지나가는 새도 내 사정을 묻는 듯하다. 〈시인의 사랑〉은 사랑에 빠진 남자의 모든 감정, 그리움과 기쁨에서 시작하여 이별의 감지, 탄식, 질투, 자조, 절망, 회상으로 진행되는 사랑의 여정을 노래로 수놓았다.
제1곡 ‘놀랍도록 아름다운 5월에’에선 설레는 가슴으로 사랑의 시작을 얘기한다. 그 설렘은 이내 고독이 된다. 제6곡 ‘거룩한 라인강에서’부터는 이별의 불안감이 느껴진다. ‘나는 울지 않으리’라고 중얼거려보지만, 슬픔만 깊어진다. ‘꽃이라도 이 마음을 안다면’ 거기에 대고 하소연하고 싶어진다. 제10곡 사랑하던 사람이 부르던 ‘그 노래가 들려오면’ 심장이 미어지는 듯하다.
제12곡 ‘맑게 갠 여름 아침에’ 다시 옛 생각을 한다. 자는 중에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내가 울고 있었다’. 그래서 시인은 마지막 16곡 ‘옛날의 쓰라린 노래’에서 ‘하이델베르크의 술통’보다도 더 큰 관을 짜서 거기에 추억을 묻어야겠다고 말하며 긴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무려 2분에 걸친 피아노의 후주가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연가곡이 끝난다. 더불어 봄날의 짧은 사랑 이야기도 끝난다.
2024-05-23 [1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