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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내비게이터]음악사에 길이 남은 스카를라티의 고양이
“여기에 한 작은 깃털 친구가 누워 있네. 바보 같았지만, 참으로 사랑스러웠던 존재… 오, 이 글을 읽는 이여, 부디 눈물 한 방울 흘려주오.” 이 말은 모차르트가 키우던 찌르레기가 죽자, 뒷마당에 무덤을 만들고 직접 써서 읊은 시의 한 부분이다. 장난기 많은 천재의 모습 너머로, 작은 생명을 진심으로 사랑하던 한 인간의 다정한 면모를 볼 수 있다.
음악가는 유별나게 반려동물을 사랑했다. 베토벤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 베토벤의 환경은 최악이었다. 어머니는 몸이 약했고, 아버지는 난폭한 술꾼이었다. 맘 둘 곳 없이 외롭던 그는 한 마리 푸들을 키우며 정을 나누었는데 그만 이 푸들이 죽고 말았다. 그래서 만든 가곡이 ‘푸들의 죽음에 대한 애가’ (Elegie auf den Tod eines Pudels, WoO 110)였다. 사랑하던 강아지에 대한 아픔과 추억을 노래하다가 “너는 내 가슴 속에 살아있어, 언제나 행복한 기억을 가져다줄 테니…….”라며 끝맺는다. 베토벤 덕분에 푸들은 세계 최초로 자신을 위한 가곡을 가진 견종이 된 셈이다.
폐병으로 고생하던 쇼팽도 강아지를 무척 좋아했다. 쇼팽의 왈츠 작품64의 1번은 일명 ‘강아지 왈츠’로 불린다. 파리에서 조르주 상드를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던 쇼팽은 강아지가 자기 꼬리를 잡으려고 뱅뱅 도는 모습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왈츠 곡에 담았다. 시작 부분의 4마디 전주가 마치 강아지처럼 빙글빙글 도는 듯하다.
영국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는 아내 앨리스가 세상을 떠난 뒤 깊은 상실감에 힘들어했는데, 반려견 ‘미나’를 만나면서 다시 작곡을 시작할 수 있었다. 엘가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미나’라는 오케스트라 소품을 작곡해서 헌정하기도 했다.
좀 더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서 바로크 시대로 가보자. 이탈리아에 작곡가 도메니코 스카를라티(Domenico Scarlatti)가 있었다. 1685년에 태어나 이탈리아 최고의 쳄발로 연주자로 불리다가 1757년 7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스카를라티가 만든 곡 중에 ‘고양이 푸가’(Fuga del gatto)라고 불리는 곡이 있다. 스카를라티의 작품을 정리한 알레산드르 룽고의 목록 번호 499번으로 등재된 곡이다.
스카를라티가 직접 붙인 제목은 아니지만, 그가 이 작품을 쓰게 된 얘기가 전해지면서 ‘고양이 푸가’로 불리기 시작했다. 당시에 스카를라티는 ‘풀치넬라’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길렀는데, 이 고양이는 작곡에 빠진 스카를라티 곁에서 재롱을 부리다가 건반 위를 걸어가곤 했다. 스카를라티는 그 소리를 즉흥적으로 흉내 내어, 고양이의 걸음걸이를 연상케 하는 리듬으로 푸가를 만들었다. 곡이 너무 재미있어서 헨델이 그의 합주협주곡 6번에 이 푸가를 삽입하기도 했고, 19세기의 피아노 연주자들의 프로그램에 단골손님이기도 했다. 특히 리스트나 모셀레스가 자주 연주했다고 한다.
마하트마 간디의 어록 중에는 이런 말이 있다. “한 나라의 위대함과 도덕적 진보는 그 나라에서 동물을 어떻게 대우하는지로 가늠할 수 있다."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스카를라티, 베토벤, 쇼팽이 그러했듯이.
2026-07-23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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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로마의 소나무, 그 막강한 피날레
지금이야 하루 만에 비행기로 전 세계를 오갈 수 있지만, 과거에는 한 지역을 벗어나 활동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세상에는 열악한 환경을 사뿐히 뛰어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생의 3분의 1을 여행으로 보낸 모차르트가 그랬고, 전 유럽을 돌며 콘서트를 가진 파가니니와 리스트가 그랬다. 오토리노 레스피기(Ottorino Respighi) 역시 같은 부류의 음악가였다.
1879년 7월 9일에 태어난 레스피기는 이탈리아 볼로냐 음악학교를 거친 뒤, 1900년부터 1903년까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작곡을 배웠다. 이듬해에는 베를린으로 건너가 막스 브루흐를 사사했다. 그는 바이올린, 비올라, 피아노 연주에도 재능이 뛰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 오페라단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903년부터 1908년까지는 무젤리니 현악 4중주단의 멤버로도 활동했다. 1913년부터는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작곡과 교수가 되었으며, 1924년에는 원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작곡과 연주 활동에 주력하면서 유럽과 미국 등지를 여행했다.
행적으로만 보자면 진정한 코스모폴리탄이라 할 수 있지만, 레스피기의 정서적 고향은 항상 이탈리아 로마였다. 그중에서도 ‘로마 3부작’은 레스피기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린 대표작이다. ‘로마의 분수’(1914~16), ‘로마의 소나무’(1923~24), ‘로마의 축제’(1928)로 이어지는 로마 시리즈는 색채적 관현악법과 감각적인 화성이 돋보이는 명곡들이다. 마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림스키-코르사코프, 드뷔시의 음악을 한데 모아놓은 듯하다. 레스피기는 후기 낭만주의 전통에 서 있는 음악가였지만, 중세 이탈리아의 그레고리안 성가 형식에도 큰 관심을 보여 ‘교회의 유리창’, ‘류트를 위한 옛 아리아와 무곡’처럼 고풍스러운 작품들도 남겼다.
레스피기의 이름을 가장 진하게 남긴 작품으로는 역시 ‘로마의 소나무(Pini di Roma)’를 꼽을 수 있다. 그가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교수 시절 작곡한 이 곡은 총 4부로 구성된 교향시이다. 제1부 ‘보르게제 저택의 소나무’, 제2부 ‘카타콤베 부근의 소나무’, 제3부 ‘자니콜로의 소나무’, 제4부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로 이어지는데, 특히 4부에서 묘사되는 로마 군단의 행진 장면이 유명하다.
안개 낀 새벽, 저 멀리서 로마 군단이 다가오는 듯 저음 현악기가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이 장면은 금관악기가 합세하면서 점점 선명해지고, 이어 오케스트라가 거대한 음향으로 확대된다. 곡의 길이는 5분 정도에 불과하지만, 듣고 있노라면 시간을 거슬러 그 대열에 끼어 함께 걷고 있는 듯한 판타지에 사로잡힌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노르웨이 축구 응원단에 섞여 함께 노를 젓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2026-07-09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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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파도 파도 끝없는 텔레만
“내가 음을 찾은 것이 아니다. 음이 나를 찾아왔다.”
바로크 시대 최고의 다작 작곡가로 불리는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 1681~1767)은 작곡의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바로크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인물이었다. 독학자였고, 사업가였으며, 출판인이었고, 시인이었고, 무엇보다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음악을 작곡한 사람이었다. 86세까지 장수하며 말년까지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 약 2000곡의 칸타타와 600개 이상의 기악곡을 작곡했으며, 그 외에도 30여 개의 극음악과 49개의 수난곡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음악을 창작했다. 유실된 작품까지 합하면 적어도 6000곡은 될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코렐리와 륄리는 마땅히 존경받아야 하지만, 텔레만은 찬양을 넘어선 존재다.”
당대 최고의 음악 이론가인 요한 마테존의 이 말은 당시 텔레만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살아 있을 때 바흐보다 유명했고, 비발디, 바흐, 헨델보다 훨씬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후대에 이어지지 못했다. 1911년까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는 텔레만에 관한 독립 항목조차 없었다. 그에 관한 연구가 본격화된 것은 1921년 텔레만 협회가 창립되면서부터였고, 1981년 텔레만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여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비로소 대중의 품으로 돌아왔다. 바흐가 1829년 ‘마태 수난곡’ 공연과 함께 부활했고, 비발디가 1950년대에 재평가된 것에 비해 텔레만은 더 늦게 재조명받은 인물이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생전에는 과대평가되었고, 19세기에는 과소평가되었으며, 오늘날에 와서야 진정한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텔레만은 독일 마그데부르크에서 대대로 개신교 목사직을 이어온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세에 오페라를 작곡했을 정도로 천재적인 소년이었지만, 집안의 반대로 독학으로 작곡을 익혔다. 1704년 라이프치히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고, 이후 조라우에 있는 프롬니츠 백작 궁정 악장으로 취임했다. 나중에는 함부르크에서 다섯 개 교회의 음악을 총괄하는 직책을 맡았다.
그는 여러 악기 중에서도 플루트를 특별히 사랑했다. 플루트를 위한 환상곡, 플루트와 리코더를 위한 이중 협주곡, 두 대의 플루트를 위한 협주곡 등 다양한 곡을 발표했다. 통주저음의 피치카토 위에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플루트 협주곡 D장조’의 라르고 악장은 언제 들어도 좋다. 이 곡이 마음에 든다면 ‘타펠무지크’, ‘비올라 협주곡 G장조’, ‘플루트를 위한 12개의 환상곡’, ‘파리 4중주곡’ 등으로 텔레만의 음악 세계를 넓혀가 보길 권한다. 좀 더 깊이 파고들다 보면 ‘개구리 협주곡’, ‘걸리버 모음곡’ 같은 재미있는 작품들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026-06-25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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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채동선의 '고향', 서리서리 얽힌 역사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운 고향은 아니러뇨”로 시작하는 ‘고향’이라는 오래된 시가 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정지용(1902~1950)이 1930년대 초에 쓴 시로 알려져 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 산꿩이 알을 품고 /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산꿩, 뻐꾸기, 흰점꽃, 풀피리 소리를 나열하며 잃어버린 옛 고향의 정서를 새겨놓은 명작이다. 당대의 작곡가 채동선(1901~1953)은 이 아름다운 시에 곡을 붙였다. 도쿄 독창회에서 처음 발표한 후, 1933년 ‘채동선 가곡집’에 수록했다.
채동선은 한국 근대 음악사에서 홍난파와 함께 초기 예술가곡의 기초를 세운 1세대 작곡가다. 특히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인 ‘고향’, ‘향수’, ‘그리워’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01년 6월 11일 전남 벌교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에서 바이올린과 음악 이론을 공부한 정통 유학파 출신이다. 1929년에 귀국하여 이화여전 등에서 교육 활동을 펼쳤고, 여러 차례 바이올린 독주회도 열었다.
시인 정지용은 한국전쟁 기간에 행방불명되어 소식이 끊어졌다. 이를 두고 미군 폭격 사망설, 납북 중 사망설 등이 제기되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문제는 전쟁 직후 정지용이 ‘월북·납북 작가’로 분류되면서 그의 시에 곡을 붙인 ‘고향’마저 금지곡이 될 처지에 놓인 것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출판사는 동요 작가 박화목에게 의뢰해 새 가사를 붙이고 ‘망향’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꽃피는 봄 사월 돌아오면~”으로 시작하는 그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도 많다.
1964년 채동선 타계 12주기를 맞아 유족은 새 가사를 의뢰했다. 그렇게 태어난 곡이 이은상 작사의 ‘그리워’였다.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 그리운 내 님은 뵈지 않네~”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한동안 가장 많이 불린 가사였다. 이후 서울대학교 음대 교수였던 소프라노 이관옥이 “내 정든 고향을 떠나와서~”로 시작하는 ‘고향 그리워’라는 곡으로 바꾸어 부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8년 7월 19일 자로 정지용을 비롯한 김기림, 임화, 백석 등 이른바 ‘월북 작가’들의 작품이 해금되었다. 무려 네 개의 서로 다른 가사를 지녀야 했던 채동선의 곡은 그때서야 비로소 정지용의 원래 가사를 되찾아 불리기 시작했다. “좁쌀 한 톨에도 우주가 들어있다”라는 말처럼, 노래 한 곡에도 한국 현대사의 쓰디쓴 사연이 얽혀 있음을 증명하는 가곡이다.
2026-06-1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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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경계를 넘어선 명곡, 코른골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이 소년은 천재다. 그의 재능은 모차르트 수준이다.” 푸치니가 코른골트의 오페라 ‘죽음의 도시’를 듣고서 한 말이다.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도, 지휘자 브루노 발터도 그를 “의심할 수 없는 음악적 천재”로 평가했다.
에리히 코른골트(Erich Wolfgang Korngold, 1897~1957)는 1897년 5월 29일 체코 브르노에서 태어났다. 7세 때 작곡했다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눈사람’이나 13세에 작곡한 피아노 3중주 작품 1번을 들어보면 음악 거장들의 평가에 수긍이 간다. 20대 초반에 발표한 오페라 ‘죽음의 도시’는 그의 명성을 확실히 알려준 대표작이 되었다.
1930년대에 나치가 집권하자 유대인인 코른골트는 미국 할리우드로 갔고, 워너 브러더스 영화사의 요청으로 영화음악 작곡을 시작했다. 1936년에 만든 ‘앤서니 애드버스’의 영화음악으로 아카데미 작곡상을, 이어 ‘로빈 후드의 모험’으로 두 번째 작곡상을 받았다. 맥스 슈타이너, 드미트리 티옴킨, 알프레드 뉴먼 등으로 이어지는 할리우드 초기 영화음악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작성한 작곡가가 코른골트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독일 후기 낭만주의의 전통을 사랑한 작곡가였다. “영감, 형식, 선율, 아름다움을 포기한 무조성과 불협화음은 음악 예술의 재앙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가 현대음악의 실험장인 유럽을 떠나 할리우드에 몸을 담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선택이기도 하다. 코른골트는 말했다. “언젠가 영화는 오페라나 교향곡과 동등한 음악 형식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음악은 무대를 위한 것이든, 콘서트홀을 위한 것이든, 영화관을 위한 것이든 결국 음악이다.”
그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심포니 스타일의 영화음악을 확립한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가장 풍성한 영화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클래식 곡을 쓴 사람이기도 하다. 평론가들이 “현대 블록버스터 영화음악의 DNA는 코른골트에게서 시작된다”고 말한 바 있는데,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어보면 이유를 알 것 같다.
코른골트의 바이올린협주곡 D장조는 총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악장의 주제로 이전에 작곡한 영화음악 선율을 사용했다. 1악장 주제는 영화 ‘어나더 돈’(Another Dawn)과 ‘후아레즈’(Juarez)에서 가져왔다. 2악장 로맨스의 주제 선율은 ‘앤서니 애드버스’(Anthony Adverse)의 러브 테마를 사용했고, 3악장은 ‘왕자와 거지’(The Prince and the Pauper)의 주제 선율에서 따왔다. 초연의 협연자는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야샤 하이페츠였다. ‘할리우드 협주곡’이라고 깎아내린 사람도 있었지만, 클래식의 형식과 영화적 서사를 완벽하게 가로질렀다는 점 때문에 현대 바이올린 협주곡의 걸작이 되었다.
2026-05-28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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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숨겨진 보석, 파니의 녹턴
펠릭스 멘델스존의 누나인 파니(Fanny Mendelssohn, 1805~1847)는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의 한 명이자 뛰어난 작곡가였다. 그러나 당시의 여성은 사회생활보다 집안일에 충실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벽을 넘어설 수 없었다. 파니는 열다섯 살이 되면서 음악 수업을 그만둬야 했다. 아버지는 파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펠릭스에게 음악은 직업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러나 너에게 음악은 그저 장식품 정도일 뿐 삶의 중심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돼... 그러니 앞으로 분별 있게 처신하도록 해라. 그것이 여자다운 것이다. 여성스럽게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명예로운 일이다.”
아버지는 여성이 음악 작품을 출판하는 것이 적절치 못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파니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서 홀로 작곡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나중에 하나씩 알려진 사실이지만, 펠릭스의 작품 중에는 누나가 작곡한 것이 꽤 많이 들어 있었다. 한 예로 펠릭스가 빅토리아 여왕 앞에서 작품번호 8번인 ‘12개의 노래’를 연주했을 때, 여왕은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이 세 번째 곡 ‘이탈리안’이라고 했다. 이에 펠렉스는 그 곡을 누나 파니가 작곡한 것이라 밝혔다고 한다. 아버지가 말했다시피, 당시에는 여성이 작곡계에 발을 들여놓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동생의 이름으로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파니는 프로이센의 궁정화가 빌헬름 헨젤과 결혼해서 몇 번의 유산 끝에 힘겹게 낳은 첫아들의 이름을 제바스티안 루트비히 펠릭스로 지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음악가 세 명의 이름을 조합한 것이다. (바흐-베토벤-멘델스존) 이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다시 음악에 몰두했다. 1846년에 첫 작품집 ‘7개의 가곡’을 출판했고, 이어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그러나 1847년 5월 14일 동생이 발표할 ‘발푸르기스의 밤’을 반주하기 위해 연습하던 파니는 갑자기 손을 떨구며 쓰러졌다. 파니는 그날 밤에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소식을 들은 멘델스존은 너무나 절망하여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고 한다. 멘델스존은 자신의 마지막 현악 4중주에 ‘파니를 위한 레퀴엠’(Requiem For Fanny)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 후부터 시름시름 앓던 멘델스존은 누나의 사망으로부터 6개월도 지나지 않아 똑같이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봐도 파니의 음악 세계는 매우 다채롭다. C장조 서곡, 현악 4중주와 피아노 3중주,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판타지, 3개의 무언가, 피아노 모음곡 ‘일 년’(Das Jahr), 6개의 가곡 등을 남겨놓았다. 그중에서 ‘6개의 멜로디’ 3번 Db장조 녹턴 G단조를 듣는다. 파니가 남겨놓은 가장 아름다운 곡 중의 하나다.
2026-05-14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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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드보르자크, 날아오르다!
122년 전인 1904년 5월 1일, 체코의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자크가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드보르자크는 넬라호제베스라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도축업자였고 아들에게 가업을 잇고 싶어 했다. 실제로 드보르자크는 도축업 시험까지 통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음악을 하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마을을 떠나 수도인 프라하로 와서 오르간 학교에 입학했는데, 이후 프라하 국민극장 부속 관현악단에 들어가 비올라를 연주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1875년에 국비 장학생이 되어 한숨을 돌리게 되었는데, 그때 심사위원이던 평론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가 드보르자크에게 브람스를 찾아가 보라고 조언했다. 이듬해 빈으로 찾아간 드보르자크는 브람스를 만나서 앞으로의 음악 활동에 관해 상담했다.
브람스는 이 시골 청년의 순수한 열정과 재능을 파악하고선 여러 곳에 소개했다. 특히 당시 최고의 출판사 중 하나인 짐로크 출판사를 연결해 주며 “음악가가 가질 수 있는 최상의 것들을 드보르자크는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그를 소개했다. 이어 그가 무척 가난하다는 점을 특별히 참작해 달라며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점까지 보태서 설명했다.
짐로크 출판사는 반신반의하면서 드보르자크에게 브람스의 히트작인 ‘헝가리 무곡’과 비슷한 곡을 써보라고 권했다. 이에 드보르자크는 슬라브 지역의 정서를 포착하여 네 손을 위한 피아노곡을 썼는데 이것이 작품 46의 ‘슬라브 무곡’ 여덟 곡이다. 슬라브 무곡은 체코의 민속적 리듬을 살리면서 강한 대중성을 갖고 있었다. 형식은 친숙하지만, 내용은 신선해서 아마추어부터 전문 연주자들에까지 폭넓은 교재로 활용되었다.
곡을 들은 ‘나치오날차이퉁’지의 평론가 루이스 엘레르트는 기쁨에 겨워 말했다. “우리 앞에 놓인 것은 민요 가락 조각을 얼기설기 이어 붙인 작품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벽한 경지에 다다른 예술이다. 길거리에서 보석을 주운 사람은 그걸 신고해야 할 의무가 있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바로 그러한 신고를 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드보르자크 슬라브 무곡은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출판사가 후편을 내달라고 요청해 1886년에 두 번째 슬라브 무곡집인 작품 72의 여덟 곡을 더 작곡했는데, 두 번째 무곡집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사이에 작곡한 실내악이나 종교음악도 꾸준히 팔렸다. 작곡 생활을 이어가던 끝에 드보르자크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고, 프라하 음악원에서 작곡가 교수 직위도 받게 되었다. 무명의 작곡가는 이렇게 클래식 역사에 우뚝 서게 되었다.
2026-04-30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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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내비게이터] ‘외로운 양치기’, 그 시절엔 말이야...
무척 오래된 얘기지만, 음악을 좀 듣는다는 집이라면 경음악단 연주를 담은 카세트 한두 개쯤은 꼭 있던 시절이 있었다. 현악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는 ‘캐스캐이딩 스트링스’로 유명한 만토바니 오케스트라를 비롯하여 제임스 라스트(James Last), 폴 모리아, 프랑크 푸르셀, 레이몽 르페브르 등 이른바 ‘팝스 오케스트라’의 전성시대가 있었다. 그들은 클래식 명곡, 오페라 아리아, 왈츠, 뮤지컬, 영화음악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너무 심각하지 않은 음악으로 프로그래밍해서 대중의 취향을 저격했다.
19세기 후반부터 시민층이 확대되면서 교양은 갖추되 어렵지 않은 음악을 감상하려는 콘서트가 많아졌다. 특히 20세기 들어 라디오와 가정용 오디오가 보급되면서 팝스 오케스트라의 붐이 일었다. 제임스 라스트 오케스트라도 그 시절의 산물이다.
1929년 4월 17일 독일 브레멘에서 태어난 제임스 라스트의 본명은 한스 라스트였다. 젊은 시절에는 재즈밴드의 베이시스트로 유명했고, 방송국에서는 편곡자 겸 작곡가로도 활동했다. 1960년대 중반에 ‘논스톱 댄싱’ 음반으로 성공하자 본격적으로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제임스 라스트의 음악은 한국에서도 라디오 프로그램의 시그널, 방송국 캠페인 배경음악, 각종 광고음악 등으로 흘러넘쳤다.
그의 음반에는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 리샤르 클레드망 등 유명한 게스트 연주자들이 참여했는데, 그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사람으로 루마니아의 작곡가이자 팬플루트 연주자인 게오르그 잠피르(Gheorghe Zamfir)가 있었다. 1941년생으로 올해 85세의 나이가 되었다. 제임스 라스트는 1977년에 작곡한 ‘외로운 양치기’라는 곡의 솔로를 잠피르에게 맡겼고, 이 녹음으로 잠피르는 세계 곳곳에 ‘팬플루트의 거장’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최초로 비발디의 ‘사계’를 팬플루트로 녹음했고, 클래식, 재즈, 영화음악에 다양하게 참여했다.
팝스오케스트라 열풍은 보스턴 팝스오케스트라, 아서 피들러 오케스트라 등으로 이어져 1980년대 초까지 레코드 산업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후엔 더욱 강렬하고 직접적인 대중음악이 늘어나면서 중간 영역에 서 있던 팝스오케스트라의 인기도 시들어갔다.
제임스 라스트의 마지막 공연은 2015년 4월 26일, 쾰른에서 열렸다. 그는 이 공연을 진행하고서 두 달도 안되어 세상을 떠났다. 사는 동안 세계적으로 약 2억 장의 음반을 판매했으며, 그중에는 200장의 골드디스크와 14장의 플래티넘 디스크가 포함되어 있다.
오늘, 어쩌다가 제임스 라스트-게오르그 잠피르의 ‘외로운 양치기’를 다시 듣게 되었다. 듣자마자 풍경이 몇십 년 전으로 타임슬립한다. 어머니가 이 곡을 무척 좋아하던 기억도 난다. ‘클래식’이라는 단어가 오랜 세월 동안 검증된 작품에 붙이는 것이라면, ‘외로운 양치기’는 슬며시 클래식의 반열에 올려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2026-04-16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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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내비게이터] 유칼리, 도달할 수 없는 낙원에 대하여
“나는 한 가지 스타일에 속하지 않는다. 나는 시대에 속한다.”
쿠르트 바일(Kurt Weill)은 세계 대전으로 황폐한 독일 무대에서 이렇게 외쳤다. 1900년 독일 데사우에서 태어나 베를린음악원에서 공부했으며, 훔퍼딩크, 부소니에게 작곡을 배웠다. 1926년에 배우이자 가수인 로테 레냐와 결혼했고, 오페라 ‘주연 배우’를 성공시키면서 주목을 받았다.
그의 인생은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만나면서 변곡점을 이루었다. 1927년에 두 사람은 노래극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를 통해 자본주의의 문제를 통렬히 고발했다. 그리고 1928년 ‘서푼짜리 오페라’(Die Dreigroschenoper)로 대성공을 거뒀다. 이 오페라는 바로크 시대인 1782년에 존 게이가 완성한 ‘거지 오페라’를 1920년대 누추하고 소란스러운 독일의 뒷골목으로 옮겨온 작품이다. 음악적으로는 기존 오페라에 트로트, 재즈, 발라드 등 대중음악을 결합한 형태였다. 아리아는 대중적 창법의 노래로 대체되었고, 오케스트라보다는 금관악기와 타악기를 중심으로 한 밴드로 반주를 했다. 대중성과 정치적 풍자를 결합한 혁신적 음악극으로 소문나면서 1933년까지 1만 회 이상 공연을 기록했고 18개국 언어로 번역되는 대성공을 거뒀다.
브레히트와 바일은 이후에도 ‘해피 엔드’, ‘7가지 죄악’ 등의 문제작을 발표하다가, 결국 사상적인 문제로 결별하게 된다. 바일이 음악을 통해 대중에게 더욱 다가가려 했다면, 브레히트는 그 대중을 다시 거리로 밀어내어 비판하고 사유하게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다.
1933년에 나치가 정권을 잡게 되자 유대인 출신인 바일은 이른바 ‘퇴폐음악의 온상’으로 분류되었다. 그래서 바일은 프랑스를 거쳐 미국 미국으로 망명하게 되고, 이후 브로드웨이와 헐리우드에서 활동하다가 1950년 4월 3일, 50세로 세상을 떠났다.
바일의 노래 중에선 ‘서푼짜리 오페라’에 등장하는 ‘칼잡이 맥’(Mack The Knife)이 가장 유명하겠지만, 오늘은 그보다 더 서정적인 곡 ‘유칼리’(YouKali)를 소개한다. 바일이 프랑스로 망명한 직후에 ‘마리 갈랑트’라는 연극에 삽입한 곡이다.
“유칼리, 그곳은 소망의 땅/ 유칼리, 그것은 행복이고 기쁨이지/ 모든 근심을 내려놓는 그곳/ 어두운 밤에 번쩍이는 한줄기 빛/ ... 그러나, 아아, 그것은 꿈, 어리석은 환상/ 유칼리는 존재하지 않아/ 인생은 우리를 질리게 이끌지, 꿈도 사랑도 없이 흘러가 버리지.”
노래의 제목인 유칼리는 실제 지명이 아니라 상상의 섬이다. 평화와 자유와 사랑이 있는 곳이지만 사는 동안은 갈 수 없는 곳, 그곳에 대한 그리움을 탱고와 하바네라 리듬 속에 넣었다. 이름다움과 허무함이 공존하는 노래. 망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음악가 쿠르트 바일이 남긴 ‘슬픈 낙원’이 여기 있다.
2026-04-02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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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글라주노프의 색소폰 협주곡을 아시나요?
흔히들 색소폰은 재즈를 위해 만들어진 악기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색소폰은 1840년대에 발명되었으며 재즈는 20세기 초에 등장했다. 즉 재즈보다 약 70년 먼저 존재한 악기다. 벨기에의 악기 제작자 아돌프 삭스(Adolphe Sax, 1814~1894)가 목관악기의 유연함과 금관악기의 강한 음량을 합친 악기를 고안하다가 만든 것으로 1846년에 특허가 등록됐다.
여기서 잠깐. 또 하나의 흔한 오해가 금속으로 만들어졌으니 색소폰을 금관악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색소폰은 재질은 금속이지만 원리는 클라리넷과 동일하다. 클라리넷처럼 마우스피스와 싱글 리드를 사용하는 ‘목관악기’다.
불행히도 색소폰은 현대 오케스트라 편성이 정착된 이후에 발명된 악기라서 오케스트라 체계에 들어가지 못했다. 비록 표준 편성에는 없지만, 여러 작곡가가 특수한 색채를 위해 사용했다. 가령 비제 ‘아를의 여인 모음곡’, 라벨 ‘볼레로’, 쇼스타코비치 ‘왈츠 2번’, 라흐마니노프 ‘교향적 무곡’ 등에서 색소폰이 사용됐다.
마침 내일이 러시아 작곡가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Alexander Glazunov, 1865~1936)의 90번째 기일이기도 하니 그가 남긴 색소폰 협주곡을 소개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원장으로 있던 글라주노프는 1928년에 빈에서 열리는 콩쿠르의 심사위원으로 참가하기 위해 러시아를 떠났다. 그러나 행사를 마치고도 귀국하지 않은 채 계속 유럽을 돌아다녔다. 본국에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못 돌아간다고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정치적 망명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파리 근교에 정착하여 활동하다가 끝내 고국으로 가지 않고 1936년 3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파리에 있을 당시, 글라주노프는 독일 출신의 색소폰 연주자 지구르트 라셔로부터 알토 색소폰을 위한 협주곡을 작곡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는다. 라셔는 색소폰을 클래식 독주 악기로 정착시키려 했던 선구적 연주자였다. 글라주노프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낭만적 선율과 고전적 형식을 결합한 협주곡을 완성한다. 1934년에 완성하여 그해 11월, 스웨덴에서 초연했다. 이상하게도 글라주노프의 1932년작 색소폰 4중주와 색소폰 협주곡의 작품번호가 같은 109번으로 표기되어 있다. 아마도 두 작품 성격이 같은 선상에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처리한 듯하다.
약 15분 정도의 단악장으로 된 곡이지만 구조는 4개의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빠른 제시부를 거쳐 짧은 전개부, 그리고 느린 재현부를 거쳐 푸가토의 결말을 갖는다.
연주자에게 만만한 곡은 아니다. 넓은 음역과 긴 프레이징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음악적으로 노래 부를 수 있는 서정성이 중요한 곡이기 때문이다. 색소폰의 시대를 내다본 망명객 글라주노프의 심정과 파리의 정취가 어우러진 명곡이다.
2026-03-19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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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코다이 무반주 첼로소나타, 영화 ‘퐁네프의 연인’에 나오던 그 곡!
영화는 때때로 한 곡의 음악을 통해 우리의 감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스크린 속 인물의 표정과 도시의 풍경까지도 한순간 음악으로 재구성된다. 그 음악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감정의 또 다른 주인공이 된다. 백 마디 말보다 강한 선율, 나에게 코다이의 첼로소나타는 바로 그런 체험이었다.
이 곡이 처음 가슴에 들어온 순간을 기억한다. 프랑스 배우 드니 라방과 쥘리에트 비노슈가 출연한 1991년 영화 ‘퐁네프의 연인’에서였다. 영화의 시작 부분부터 이 음악의 1악장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지하도에서 미셀과 알렉스가 필사적으로 뛰어가던 장면에서 어떤 대사보다 강렬하게 두 사람의 마음을 표현해 주었다. 영화가 끝난 후 나는 곧장 음반 가게로 가서 야노스 슈타커가 연주한 코다이 무반주 첼로 소나타 음반을 품에 안고 돌아왔다.
체코의 근대 음악에 스메타나, 드보르자크, 야나체크가 있었다면, 헝가리의 근대 음악엔 코다이(Zoltan Kodaly, 1897~1967)와 버르토크라는 두 개의 기둥이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이 민속 음악을 채집하고 연구했지만 정작 버르토크는 “가장 완벽하게 헝가리 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작품을 쓴 작곡가를 꼽으라면 단연 코다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코다이는 오페라 ‘하리 야노슈’, 관현악곡 ‘갈란타 춤곡’, 교회음악 ‘스타바트 마테르’ 등 멋진 작품을 많이 남겼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청각 경험을 선사하는 곡은 무반주 첼로 소나타 B단조다.
그는 33세 젊은 시절인 1915년에 이 곡을 썼는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초연을 미루고 있다가 1918년 5월 부다페스트에서 예뇌 케르페이의 연주로 초연했다. 코다이 자신도 작품에 만족해서 이렇게 말했다. “25년쯤 지나면 이 소나타를 연주하지 않고서는 첼리스트로 인정받을 수 없을 것이야.”
1악장은 매우 정열적이다. 격렬한 리듬과 복잡한 화성이 교차하며 거대한 강물을 이룬다. 2악장은 슬픈 민요를 부르는 것 같다. 첼로의 저음과 고음이 대비를 이루면서 환상 속을 더듬는다. 그리고 3악장은 가장 화려한 부분이다. 민속 춤곡의 색채에 더하여 더블스톱, 트리플스톱, 왼손 피치카토, 스코르다투라 같은 화려한 첼로 주법을 총동원하여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그 모든 드라마를 피아노도, 오케스트라도 없이 첼로 한 대만으로 이루어낸다. 이건 작곡가건 연주자건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화성도, 리듬도, 선율도 오직 한 악기가 책임져야 하니 도무지 숨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그만큼 솔직하고 내면적이라 할 수 있다. 첼로는 독백이나 한숨같이 들리기도 하고 절규처럼 울리기도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첼로라는 악기로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를 증명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바흐에서 시작된 무반주 첼로의 전통을 20세기적으로 계승하고 확장한 작곡가, 졸탄 코다이는 오늘로부터 딱 59년 전인 1967년 3월 6일에 세상을 떠났다.
2026-03-05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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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세비야의 이발사, 이토록 낙천적인 세상
오늘로부터 딱 210년 전인 1816년 2월 20일, 조아키노 로시니(Gioacchino Rossini, 1792~1868)는 로마에서 ‘세비야의 이발사’를 초연했다. 당시 스물한 살의 젊은 작곡가 로시니의 이름은 이때부터 이탈리아 전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가히 작곡계의 아이돌 스타라고 할 만했다. 그 후로 서른일곱 살이 되던 1829년에 돌연 은퇴 선언을 하기까지 로시니는 유럽 전역을 돌며 총 38개의 오페라를 발표했다. 그중에서도 ‘세비야의 이발사’는 현재까지 가장 인기 있는 레퍼토리다.
오페라 부파(희극 오페라)의 종합선물세트나 다름없는 작품으로, 이야기 구조도 흥미롭지만, 서곡부터 피날레에 이르는 음악이 어느 한 곳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멋지다. 더하여, 연주가 점차 강하고 빨라지는 ‘로시니 크레센도’, 베이스가 종래의 무거운 역할이 아니라 코믹한 역할을 맡는 데서 나온 ‘바소 부포’, 현대의 랩 가사처럼 정신없이 쏟아내는 ‘파를란도’ 등 로시니만 줄 수 있는 화려한 장치로 가득 차 있다.
‘내 이름을 알고 싶으시다면’(Se il mio nome saper)은 막이 열리고 얼마 안 되어 알마비바 백작이 로지나의 창가에서 부르는 카바티나다. 자신을 린도로라는 가난한 학생으로 속이고서 그녀에게 접근한다.
“내 이름을 알기를 원한다면 이 노래에서 내 이름을 들어봐요. 내 이름은 린도로,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당신을 신부로 맞고 싶어요. 밤낮으로 당신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소망해요.” 그러자 로지나가 창틈으로 내다보면서 계속 노래해달라고 말한다. 알마비바는 노래를 이어간다. “나는 부자가 아니라서 보물을 드릴 순 없지만, 대신에 나의 온 마음을 바칩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에 밤낮으로 한숨 쉬고 있어요.”
고전적인 방법으로 구애하고 있는 알마비바와 이를 내다보면서 가슴 설레하는 로지나의 모습이 교차한다. 듣고 있으면 그저 빙그레 웃게 된다. 그래서 나는 로시니의 오페라를 좋아한다. 기존의 희극 오페라가 혼돈으로 우왕좌왕 허둥대는 식의 구성이라면, 로시니는 보다 따뜻하고 인간적인 면을 강조한다. 알마비바 백작, 피가로, 체네렌톨라 등이 모두 이탈리아적인 낙천주의를 배경으로 먹고, 사랑하고, 노래한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결국 되는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안되는 것도 없다. 인물의 측면에서 보면 딱히 나쁜 놈도 없고 명확하게 좋은 놈도 없다. 결말에는 모든 사람이 얻는 만큼 잃고, 잃는 만큼 얻는다. 그리하여 적당히 용서되고, 모두가 머리를 긁적이며 화해하는 것이 로시니의 방식이다. 세상이 좀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좋지 않을까?
2026-02-19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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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라
‘사랑의 꿈’(Liebestraume)은 원래 1845년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가 34세 때에 발표한 가곡이다. 불같이 뜨겁게 사랑했던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 결별하고서 이리저리 연주회를 다니던 시기였다. 가곡은 모두 3곡으로 이루어졌는데, 1번의 원곡은 독일 낭만주의 시인 루트비히 울란트의 시에 곡을 붙인 ‘고귀한 사랑’, 2번도 역시 울란트의 시 ‘가장 행복한 죽음’, 3번은 프라일리그라트의 시에 곡을 붙인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라’이다. 3번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오 사랑하라, 사랑할 수 있는 한! 오 사랑하라, 사랑할 힘이 남아 있을 때까지! 시간이 오리니. 시간이 오리니, 그대가 무덤 옆에서 슬퍼할 시간이 오리니….”
1850년에 리스트는 이 가곡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해서 당시에 사랑하던 카롤린 자인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 앞에서 연주했다. 그녀는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가장 넓은 토지를 소유한 재력가의 딸이었다. 열일곱 살에 비트겐슈타인 공작과 결혼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과의 사이가 냉랭해져서 적적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리스트의 연주를 듣고, 그만 가슴에 큐피드의 화살을 맞게 되었다.
둘은 바이마르에 집을 얻어서 동거에 들어갔다. 그러나 불행히도 비트겐슈타인 공작이 이혼을 거부해 무려 10년 넘도록 지루한 소송을 했는데, 결국 이혼에 실패하여 리스트와 맺어질 수 없었다. 리스트는 마치 앞으로 일어날 어려움을 예견한 듯, 이 짧은 곡에 사랑의 열정과 추억과 회한을 모두 담아놓았다.
나는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Claudio Arrau, 1903~1991)의 연주를 좋아했다. 아라우는 1903년 2월 6일 칠레에서 태어났다. 4세에 악보를 보기 시작했고, 5세에 첫 공개 연주회를 가진 천재였다. 칠레 국가장학생 자격으로 독일 유학길에 오른 게 8세 때였다. 베를린에서 리스트의 제자인 마르틴 크라우제에게 작곡을 배웠고, 1927년 제네바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녹음도 많이 남겨놓았는데, 특히 베토벤, 쇼팽, 리스트 등 낭만주의 음악에서 놀라운 음반을 남겨놓았다.
‘사랑의 꿈’에 대해선 “백발의 노인마저도 이 곡을 들으면 추억에 빠져든다”라는 말이 있고 “젊은 사람이 연주하면 고백이 되지만, 나이 든 사람이 치면 회상이 된다”라는 식의 표현도 있다. 그만큼 여러 가지 감정이 서사적으로 얽혀있기 때문에, 연주자에 따른 표현의 특징을 비교해보기에 좋은 곡이다. 루빈스타인, 호로비츠, 아르헤리치, 임윤찬, 손열음 등이 저마다의 감정을 이 곡에 실어놓았다. 아라우가 해석한 ‘사랑의 꿈’은 숨 가쁘거나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사랑이 주는 무게를 인정하고서 덤덤히 지고 가는 뒷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2026-02-05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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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카페와 공연장 사이에서, 쇤필드의 '카페 뮤직'
카페나 레스토랑에 들어갔다가 음악이 너무 시끄러워서 그냥 나와버린 적 있다. 카페에서 듣고 싶은 음악이라는 게 사람마다 모두 다르겠지만 나로선 너무 무겁지 않은 음악이며 너무 번잡스럽지도 않은 음악이었으면 한다. 창밖의 풍경이 좋은 카페에선 음악이 아예 없었으면 하고 여길 때도 많다.
오래전 바로크 시대에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래서 생겨난 음악을 ‘타펠무지크’(Tafelmusik)라고 불렀다. 독일어로 ‘식탁’(Tafel)과 ‘음악’(Musik)의 합성어이니 말 그대로 ‘식탁의 음악’을 뜻한다. 궁정이나 귀족 저택의 연회 때 분위기를 조성해 줄 수 있는 편안한 음악이다. 대표적으로 텔레만의 기악 모음곡 ‘타펠무지크’를 들 수 있다.
현대에 와서도 비슷한 생각을 한 작곡가가 있었다. 폴 쇤필드(Paul Schoenfield)라는 작곡가가 있다. 1947년 1월 23일에 미국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6세부터 피아노를 배웠는데 그다음 해부터 작곡을 시작했다는 자료가 있는 걸 보면 만만찮은 음악적 천재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팝, 라틴음악, 유대교 음악 등을 클래식과 자유롭게 결합하여 새로운 미국적 음악을 만들어냈다. 2003년에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한 쇤필드는 미시간대학의 작곡과 교수로 있다가 2024년에 세상을 떠났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고, 수학자이며 탈무드에 정통한 신학자이기도 했다.
쇤필드는 젊은 시절이던 1985년에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머리스 레스토랑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생활한 적 있는데,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레스토랑에서 연주해도 좋을 법한 ‘하이 클래스 디너 뮤직’을 구상했다. 이듬해에 ‘카페 뮤직’이라는 제목으로 피아노 3중주곡을 발표했고, 이 곡은 지금까지 쇤필드의 대표작으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음악이 심각함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고급스러운 유희’가 되기를 원다면서 “20세기 초의 미국풍, 빈풍, 경음악풍, 집시풍, 브로드웨이풍 음악을 모두 넣었고, 아름다운 유대교 하시드 멜로디도 빌렸다”라고 설명했는데, 들어 보면 말 그대로 각종 음악 재료들이 섞여서 초롱초롱 빛난다는 느낌이 든다.
총 3악장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1악장에선 래그타임, 스트라이드 피아노 등 초기 재즈 요소들을 빌렸다. 2악장은 블루스와 유대교의 클레츠머 음악과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서정성을 담았다. 3악장은 왈츠, 집시 음악에 빠른 스윙재즈를 혼합해서 강력한 에너지를 뿜으며 마무리한다.
무조성과 각종 실험적 음향 때문에 현대음악을 힘들어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경쾌하고 나긋나긋한 곡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2026-01-22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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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풍경이 보이는 음악, 드뷔시의 '판화'
자료를 찾다보니 1월 9일에 초연된 곡이 꽤 많다. 차이콥스키 발레곡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교향시 ‘죽음과 변용’이 1890년 오늘, 러시아와 독일에서 각각 초연되었다. 생상스 피아노협주곡 5번이 1896년 파리에서 초연되었으며, 라벨 ‘밤의 가스파르’와 쇤베르크 현악4중주 2번은 1909년에, 본 윌리엄스의 ‘토머스 탤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은 1910년 오늘 초연되었다. 그리고 드뷔시의 피아노 모음곡 ‘판화’(Estampes)가 1903년 오늘 파리국립음악원에서 피아니스트 리카르도 비네스의 연주로 초연되었다.
드뷔시는 당시의 인상주의 미술이 시간 속에 변화하는 이미지를 포착하려 한 것처럼, 음색이 가진 미묘한 인상에 주목했다. ‘달빛’ ‘아라베스크’ ‘판화 같은 드뷔시의 피아노곡은 그 자체로 ‘귀로 듣는 그림’이라 하겠다.
제1곡 ‘탑’(Pagodes)은 동양의 사원에서 보이는 탑이 물에 비친 모습을 그리고 있다. 1889년 파리만국박람회에서 처음 듣게 된 인도네시아 자바의 가믈란 음악과 아시아 5음 음계의 영향을 잘 보여준다.
제2곡 ‘그라나다의 저녁’(La soiree dans Grenade)은 하바네라 리듬과 반음계 장식을 써서 스페인의 정취를 나타내고 있다. 드뷔시는 ‘판화’를 작곡할 때까지 인도네시아나 스페인을 가본 적 없었다. 오직 상상의 세계에서 썼다. 이 곡을 들은 작곡가 마누엘 데 파야는 “어쩌면 민요 한 소절도 갖다 쓰지 않고서 이렇게나 훌륭하게 스페인을 그려냈는가”라고 탄복했다.
제3곡은 ‘비 오는 정원’(Jardins sous la pluie)이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노르망디의 마을에 있는 정원을 묘사했다. “나뭇잎에 떨어진 빗방울이 반사되면 얼굴이 초록빛으로 물든다”라는 화가 블랑슈의 말에 영감을 받아 쓴 곡이라고 한다. 프랑스 동요 선율을 인용했다.
세 곡이 모두 무척 시각적인 이미지를 제공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정한 그림을 보고 쓴 작품은 아니다. 그림에서 나온 음악이 아니라 음악이 곧 그림처럼 펼쳐지는 작품이다.
정말 많은 연주자가 ‘판화’를 사랑해서 무대에 올렸지만, 오늘은 메나헴 프레슬러(Menahem Pressler)의 영상을 골랐다. 1923년 독일에서 태어나서 2023년으로 딱 100년을 살다간 피아니스트다. 전설적인 ‘보자르 트리오’를 창단하여 무려 53년의 세월을 같이했으며, 트리오를 해체한 후에도 90대까지 연주 활동을 계속했다. 영상은 2011년, 88세 되던 해 도쿄 산토리홀에서 가진 연주회의 한 부분이다. “이젠 나이가 들어서….”라고 엄살 부리고 싶을 때 이런 영상을 보면 낯이 부끄러워진다.
2026-01-08 [1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