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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유학생
대학에는 외국인 유학생이 해마다 늘고 있다. 내가 속한 한국어문학과 학부와 대학원 모두에서 유학생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내 수업에서 그들을 만나는 일은 드물었다. 다양한 텍스트를 읽고 토론하며 글을 쓰는 수업이라, 한국 학생들에게도 쉽지 않은 까닭이다. 지난 학기, 처음으로 세 명의 석사과정 유학생이 수강 신청을 했다. 그 가운데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사비나’라는 학생이 있었다.
직장인 학생들이 있어 수업은 초저녁에 시작해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수업은 학생 스스로 주제를 정하고, 관련 도서를 읽어 집필 계획을 발표한 뒤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박사과정 학생이 많아 수업의 수위도 만만치 않았다. 유학생들이 끝까지 따라올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그 우려는 오래가지 않았다. 중간고사 무렵이 되자, 오히려 내가 놀라기 시작했다.
한국어문학 석사 과정 유학생
언어 서툴러도 깊은 사유 돋보여
책은 국경을 넘어 연결되는 매개
청춘의 독서 다시 배울 수 있어
저녁 일곱 시, 수업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학생들이 제출한 계획서를 하나씩 넘기다 사비나의 것에서 손이 멈췄다. 잭 런던의 〈마틴 에덴〉,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에밀 졸라의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아메리카의 비극〉. 젊은 날, 밤을 지새우며 탐독했던 작가와 작품들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발표 주제는 ‘사랑은 성장인가, 파멸인가’와 ‘성공이라는 이름의 속박’이었다. 제목만으로도 그가 어떤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수업이 늦은 밤까지 이어졌으나, 피로 대신 반가움이 먼저 밀려왔다. 밤공기를 맞으며 귀가하는 길, 가슴속에서 오래된 문장들이 다정하게 불을 밝혔다. 사람은 같은 노래, 같은 영화를 사랑한 이에게 쉽게 마음을 연다. 책도 마찬가지다. 같은 문장을 오래 붙들고 같은 인물을 깊이 생각했던 사람은 처음 만나도 낯설지 않다. 나는 이것을 ‘책연(冊緣)’이라 부른다. 같은 책을 사랑했다는 사실 하나로 스스럼없이 이어지는 인연이다. 사비나의 한국어는 유창하지 않았지만, 문장은 우아했다. 생각을 서두르지 않고 단어 하나를 오래 고르는 사람의 문장이었다. 드라이저의 작품은 영어 원서로 읽었다고 했다. 일본어와 중국어도 공부 중이며, 학기 중에는 통역 일을 맡게 되었다며 환하게 웃었다.
수줍음 많고 신중한 사비나는 좀처럼 먼저 말을 건네는 법이 없었다. 그런 그가 수업을 마치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복도에서, 내 책을 찾아 읽었다며 수줍게 한마디를 건넸다. “교수님, 책이 참 좋았습니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그래서 더 오래 잔상을 남겼다. 사비나가 들고 온 책에서 내 청춘의 감동을 되찾았듯, 그 역시 내 문장에서 무언가를 발견했을 것이다.
나는 그동안 가르치는 사람은 나이고, 배우는 사람은 학생이라는 구도에 익숙해져 있었다. 사비나가 건넨 목록과 나지막한 고백은 그 익숙한 구도를 흔들었다. 독서의 기쁨이 되살아났고, 사비나를 거쳐 온 오래된 책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책은 늘 국경을 가볍게 넘어왔다. 잭 런던, 피츠제럴드, 시어도어 드라이저, 에밀 졸라 등 서로 다른 언어로 남긴 문장들이 한국의 교수와 우즈베키스탄의 학생을 한 강의실에서 만나게 했다.
학기가 끝난 뒤 나는 우즈베키스탄에 관한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사비나의 나라가 품고 있을 낯선 지명과 오래된 이야기들을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그가 건넨 목록을 처음 읽던 밤의 설렘이 되살아났다. 〈마틴 에덴〉도 다시 펼쳐 들었다. 오래전 그 책을 읽으며 사랑과 성공을 생각했던 청춘의 시간이 떠올랐다. 그는 내게 한국어로 문학과 글쓰기를 배웠고, 나는 그에게 청춘의 독서를 다시 배웠다. 지난 학기, 내가 만난 가장 아름다운 책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사비나였다.
2026-09-20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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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전히 꿈이었다. 양손에 엄마가 좋아하는 노란 참외를 들고 들판을 가로질러 외딴집으로 달려갔다. 숨이 차고 땀방울이 솟고 머리는 헝클어지고 날벌레가 눈을 찔러도 나는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어떤 때는 참외가 팥빵이나 환타로 바뀌기도 했으나, 달음박질은 컴컴한 논두렁길이라도 무섭지 않고 진흙탕을 가로질러도 힘들지 않다.
꿈속 달리기는 오직 꿈에서 깨어났을 때만 멈출 수 있지만, 그 순간은 너무도 허무하고 허탈한 일이 되어버린다. 꿈에서는 찾아갈 고향 집과 기다리는 가족이 있기 때문일까. 한 번 떠난 그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데도 나는 무의식적으로 기다릴 때가 있다. 현관 앞에 서면 집안에 누가 있을 것만 같은 훈기, 통통통 도마소리 들리고 고등어구이나 미역국 냄새가 번져오고, 텔레비전 예능프로그램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사회자의 멘트, 그리고 복도까지 새어 나오는 한바탕 웃음소리. 그러나 철커덕, 자물쇠 풀리는 소리와 함께 환상은 걷힌다.
고향 집·가족 향해 달려가는 꿈
영화 '집으로' 와 겹쳐지는 풍경
전쟁같은 추석 귀향표 경쟁 여전
인간은 집으로 돌아가는 존재
그날의 영화도 내 꿈속의 아득한 달음박질과 닮아 있었다. 풍경 속에 집들이 지나갔다. 이층집, 붉은 대문을 단 집, 낮은 담장을 두른 집, 마당에 빨래가 널린 집, 수리 중인 집, 양철 지붕을 인 집, 염소가 매여 있는 집, 닭들이 종종걸음치는 집, 버려진 집, 허물어져 가는 집, 폐허가 된 집, 불이 꺼진 집, 담장이 무너진 집, 잡초만 무성한 집들. 영화는 말이 없다. 특별한 사건도 없고 극적인 반전도 없었다. 한 시간 내내 카메라만 라오스의 농촌 마을을 천천히 비출 뿐.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점점 그 풍경에 붙들렸다. 누군가는 집을 짓고 또 누군가는 집을 고치지만, 빈집 마당에도 오리가 제집인 양 거닐고 담벼락에 기댄 망고나무 가지가 한가롭게 흔들렸다. 문도 창문도 지붕도 그대로인데 사람이 살지 않는 집. 그 사이로 벌레 소리,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 양철판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까지 들리지만 자막은 없다. 내가 제대로 기억하는 것일까, 꿈과 상상을 겹쳐 영화를 보았을까. 차이밍량 감독은 ‘집으로’라는 소박한 제목을 화두처럼 던져둔 채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그도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걸까. 떠난 사람은 과연 돌아올 수 있을까.
이 쓸쓸하고도 아늑한 정취에서 나는 엉뚱하게도 오래전에 읽은 어느 수필가의 ‘장대 위로 돋는 달’이 떠올랐다. 그가 9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울역에 갔을 때, 당시 추석 귀성객들로 가득 찬 광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차표를 사기 위해 서로 밀치고 새치기가 난무하는 아비규환의 한복판, 무질서를 진압하려는 경찰의 호각 소리가 울리고 장대가 연거푸 휘둘러진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면서도 고향행 기차표를 쥐려는 손 포개짐은 멈추지 않았다. 그 역시 군중 속에 파묻혀 몇 시간 동안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차표 한 장을 얻기 위해 버텨낸다. 그런데 그 처절한 몸부림 위로 자신을 맞이할 어머니의 얼굴처럼 하얗고 둥근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가 매서운 장대매를 맞고 밀려나면서도 끝까지 버틴 이유는 돌아갈 곳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간에게 귀향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지중해를 떠돌던 오디세우스가 온갖 고난을 헤치며 나아갔던 유일한 목적지도 결국 아내와 아들이 기다리는 이타카의 고향 집이었다. 시대를 불문하고 인간이 이토록 집이라는 공간에 집착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문이 닫혀도 나를 위해 열려 있는 최후의 보루라는 믿음 때문일까. 여전히 내 꿈속 달리기가 지치지 않는 까닭인지도.
2026-09-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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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부정의 복싱
세상을 걷다 보면, 타성과 무심한 고개 끄덕임, 이런 것들을 종종 만난다. 한 번 두 번 넘어가다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도저히 넘어가지 않을 때가 온다. 그럴 때는 어렵게 잽(jab)을 날려 타진한다. “그건 아니지 않나요? 그동안 그렇게 해왔다고 다 맞는 건 아니잖아요. 상황에 따라 방법을 바꿔야 되는 것 아닌가요?”
이렇게 툭 툭 부정의 잽을 날리면, 어김없이 한 체급 높은 선수가 링 안으로 등장한다. 등장해서 부드러운 척 코너로 몰아간다. “사람이 좀 긍정적이어야지. 그리 삐딱 선을 타면 될 일도 안 돼. 일이 진도가 안 나가잖아. 마음에 안 들어도, 어? 두루뭉술하게 좀 맞추고, 어?”
긍정은 잽(jab) 없는 복싱
'나는 하지 않는 편 택하겠습니다'
가끔 부정의 잽(jab) 날리자
코너에 몰려 가드(guard)를 잔뜩 올리고 있으면, 내가 날린 잽에 동조의 눈빛을 보내던 동료들도 슬그머니 눈을 돌리기가 십상이다. 돌아서는 눈빛들을 확인한 체급 높은 선수는 더욱더 힘을 내어 훅을 날린다. “어이구, 세상 저만 잘났다.”
한숨 쉬며 떠나는 체급 높은 선수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텅 빈 링 위에 홀로 서 있으면 외로움과 자책이 밀려온다. ‘그냥 참았어야 했나? 애초에 가능한 일이기는 했었나? 내가 뭐라도 된다고 착각했나?’ 뒤를 이어 부스러지는 허무가 내려앉는다. ‘그냥 참자. 다들 참고 사는데, 카드 결제일도 곧 다가오고, 나라고 뭐 어쩌겠어.’
터벅터벅 링을 내려오다 보면, 뒤통수에서 버섯 처럼 짜증이 자라난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 그리고 뒤따라 바틀비(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의 말이 볼록볼록 돋아난다.
‘나는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
19세기 미국 월가의 한 변호사는 필경사(원지에 철필로 글씨를 쓰는 직업) 바틀비를 고용한다. 창백한 얼굴로 조용하고 충실하게 글을 옮겨 적던 바틀비는, 변호사의 서류 검토 요구에 조용한 목소리로 자신의 선택을 밝힌다. ‘하겠다, 못하겠다’가 아니라, 하지 않는 선택을 알린다. 그리고 자기 책상을 지키기 위해 같은 선언을 반복하며 버틴다. 다수가 만든 상식을 믿음으로 섬기는 세계에서, 외롭고 고독한 싸움을 이어간다. 그 후로 바틀비의 선언은 몇 가지 더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로 이어지고, 종국에는 ‘먹지 않는 것’을 선택함으로 죽음마저도 자기의 선택사항으로 만든다.
바틀비를 알게 된 이후로, 가끔 바틀비의 선언을 소리 내어 말해본다. 내가 날린 잽이 외로움과 허무로 돌아올 때면, ‘나는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중얼거린다. 그러고 나면, 저 멀리 오래된 우주에서 내 편이 같이 중얼거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든든하다. 그 든든함과 함께 의지가 슬거머니 되살아나서 다시 잽을 날릴 수 있는 힘이 된다.
나도 안다. 바쁜 현대사회에 매사 툭 툭 잽만 날리며 살 순 없다. 열심히 잽을 날린다고 월급이 오를 리도, 드라마틱하게 올곧은 상사의 눈에 띄어 진급을 할 리도 만무하다. 오히려 삐딱선 탄 질풍노도의 시기에 멈춘 어른아이 취급 받기가 십상이다. 하지만, 잽 없는 세상을 상상하면 박제된 미래가 떠올라 답답하다. 불편하고 피곤해도 꾸준히 잽을 뻗으면 세계가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 우리의 선배와 조상도 그렇게 조금씩 세계를 바꿔왔을 테니, 이 세계를 누리려면 가끔이라도 잽을 날리는 걸 택하는 게, 선배들에 대한 적절한 응대(應對)이지 않을까? 어쩌면 후배에 대한 배려가 될 수도.
그러니, 가끔은 잽을 날리자. 세계에 무심한 긍정은 잽 없는 복싱 같다. 아무것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밤새 내린 눈처럼 하얗게 덮어버리고 감추기만 한다. 하지만 부정은, 언제나 의지를 품고 잽을 날린다. 손을 뻗으며 상황을 타진한다. 방향과 노정(路程)을 점검하고, 여차하면 회심의 어퍼컷을 날려 전복의 기회를 노린다. 바틀비처럼, 불편한 모양새일 때가 많겠지만, 적어도 어떤 것을 일으킨다. 새로운 것을 상상하게 하고 변화하게 한다.
2026-09-06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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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버릴 수 없는 마음
‘적은 소유로 기품 있게’ 살자고 다짐했었는데, 작은 액자에 끼워놓은 그 글귀가 오히려 스스로를 낯부끄럽게 만들 때가 많다. 특히 이사를 앞두고 물건들을 정리할 때면 더 그렇다. 먼지 쌓인 책들이 겹겹으로 놓인 책장 앞에 서서도, 언제나 카오스 상태인 부엌 서랍장을 열어보는 순간에도, 베란다 창고 속에 유령처럼 머물던 짐 더미들을 꺼내면서도, 이걸 다 어쩌나 싶어 한숨만 푹푹 나온다. 이삿짐들을 일일이 박스에 싸두어야 했던 옛날과는 달리, 요즘이야 업체에서 다 알아서 해주니 그리 힘들 것은 없지만 그래도 대강 정리를 해두지 않으면 쓰레기까지 고스란히 새 집에 옮겨다주기 때문에 그러지 않으려면 미리 품을 좀 들여야 하는 것이다.
우선 책장의 수용 한계를 넘어서버린 책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정기적으로 배송되는 문예지부터 저자들이 보내주는 책들, 내가 글을 발표한 각종 지면들과 출간 도서, 그리고 직접 구매한 책들. 이런저런 이유로 책은 빠르게 늘어나는데 잘 버리지를 못하다보니 책장은 언제나 한계 초과 상태다. 책을 살 때도 무척 고심하지만 버릴 때는 더욱 신중해진다. 꺼냈다가 넣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지 모른다. 아무리 낡았어도 그 시절의 추억이 깃든 책이 있고, 다시 읽을 것 같지 않았는데 책장에서 꺼내 표지를 보면 또 읽고 싶어지는 책도 있다. 결국 추리고 추려낸 책들 중에 중고서점에 판매할 수 있는 책은 팔고 지인에게 줄 만한 책은 주고 그럴 수 없는 책들은 재활용 배출일에 내놓으려고 붉은 노끈으로 묶었다. 곧 버려질 책들의 더미를 보니 마치 키우던 생명체를 유기하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아 마음이 울적해졌다.
책장 다음으로 시급한 곳은 베란다 창고. 그곳은 아무래도 기묘한 공간이다. 한 평 남짓 되는 좁은 창고에서 뭔가가 끝도 없이 나왔다. 불필요한 물건들 중에 중고거래 사이트에 팔거나 나 나눌 수 있는 것들은 사진을 찍어 올렸다.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쓸 만한 물건들을 쓰레기통에 바로 넣을 수는 없었다. 상태가 좋지 않거나 낡은 물건들을 버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창고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다보면 그것이 환기시키는 과거의 기억에 빠져들 때도 자주 있다. 그러니까 조심해야 한다. 때때로 이런저런 감상에 젖어들었다가 결국 꺼냈던 물건들을 고스란히 그 자리에 돌려놓는 경우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쓰지 않지만 언젠가 필요할 것 같아서 버리지 못하는 것들도 많다. 오래 전에 사놓았던 수첩과 노트들은 여전히 너무 예뻤고 나중에 독서 노트나 필사 노트로 쓰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피리와 태평소도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관악기에는 소질이 없다는 걸 일찌감치 파악했는데도 아직까지 미련이 남아 있나보다. 공죽, 버나, 저글링 공은 가족들의 반대로 버리지 못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연습을 할 거라고 했다. “나중에 언제?”라고 묻기에는 나부터도 떳떳하지가 않았다. 수채물감과 팔레트, 파스텔 같은 미술 도구들도 다시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 하게 될지 모르겠으나 그림그리기는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다.
내가 가진 많은 물건들. 그 중에는 현재 나에게 필요한 것도 있지만, 미래의 어느 날을 상상하게 되거나 어떤 가능성으로 남아 있는 것, 혹은 과거로부터 되살아나는 기억들도 많았다. 잠시 시도했다가 훗날로 유예해 둔 꿈, 희미해진 줄 알았는데 선명히 남아 있는 시간.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이 이미 실패일지도 모르지만, 아직 버릴 수 없는 마음의 한 구석에는 오랜 시간 응축된 사랑이 동그랗게 맺혀 있다. 그 조약돌 같은 마음이 남아 있는 한, 그 무엇도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들이 시간을 거슬러 내 공간에 존재하는 것만 같다. 착각일 수도 희망일 수도 있는 그 마음에 사로잡혀, 오늘도 짐 정리는 지지부진하고 애틋하다.
2026-08-30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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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주인으로 산다는 것
동네 작은 아파트 옆에는 우리 내외가 오래 다닌 마트가 하나 있다. 낮 시간제로 일하는 한 여성이 늘 그 자리를 지킨다. 손님이 들어서면 마치 자신의 마트인 듯 반갑게 맞이하고, 좋은 물건이 들어오면 먼저 권하곤 한다. 아내와 나는 이 마트가 소중하여, 가격이 조금 비싸도 산책 삼아 들러 장을 본다.
언젠가 아내가 사과 한 봉지를 고르고 있을 때였다. 일하던 여성이 슬며시 다가와 봉지 하나를 바꿔주며 말했다. “이건 며칠 지나면 물러질 거예요. 저쪽 게 더 나아요.” 그 한마디에 우리는 마트를 깊이 신뢰하게 되었다. 손님이 없을 때면 진열대를 정리하고, 시든 채소를 골라내며, 물건 하나하나 제자리를 챙겼다. 시간만 채우면 될 일인데, 저 여성은 왜 저토록 마음을 다하는 것일까. 마트 사장도 아니고 누가 지켜보는 것도 아닌데, 늘 주인의 마음으로 일하는 듯했다.
어느 늦가을, 수업을 마치고 나오던 길이었다. 강의실 복도에서 한 학생이 친구에게 하는 말을 우연히 들었다. “알바는 어차피 받은 만큼만 하는 거야. 너무 마음 쓰지 마.” 첫 출근을 앞둔 친구를 걱정해 주는 말 같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계약은 계약이고 시급은 시급이며, 더 마음을 쏟는다고 세상의 셈법이 달라지지도 않는다. 그것이 이 시대의 지혜로운 처세임을 알면서도, 그 조언 뒤에 남는 서글픈 셈법이 한동안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나 역시 여러 대학을 전전하던 시간강사 시절이 있었다. 당시 내 직업은 행정상 ‘일용잡급직’으로 분류되었다. 시간당 강의료만 생각하면 수업에 그토록 마음을 쏟을 까닭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방학이면 다음 학기 강의안을 새로 짜고, 수업 준비를 위해 읽었던 책도 밑줄을 그으며 다시 읽었다. 어느 해 겨울, 그렇게 두 달을 꼬박 매달려 새 강의안을 완성했을 때였다. 개강을 코앞에 두고 다음 학기 수업이 없다는 사실을 다른 경로로 전해 들었다. 강단에 서 있는 동안만큼은 그 자리가 내 자리라 믿고 싶었던 마음이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졌다. 주인으로 서겠다는 다짐과 나를 주인으로 대접하지 않는 세상 사이의 거리. 그 아득한 간극이 그해 겨울 내가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였다.
그처럼 삶의 자리가 휘청일 때마다 가만히 마음속으로 읊조리던 문장이 있다. 당나라 선사 임제의 법문을 모은 〈임제록〉에 나오는 구절이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어디에 있든 그 자리의 주인이 되면 그곳이 곧 참된 삶의 자리가 된다는 뜻이다. 임제 선사는 이 말을 꺼내기 전 “큰 그릇은 남에게 미혹되지 않는다”고 일갈한 바 있다. 임제에게 주인이 된다는 것은 특별한 자리를 얻는 일이 아니라, 어떤 자리에 있든 그 자리의 조건에 삶을 맡기지 않는 일이었다. 남의 시선이나 세간의 박한 통념에 휘둘리지 않고,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온전히 내 삶의 주체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임제가 말한 주인 됨의 조건이었다.
손님은 스쳐 지나가지만, 주인은 그 자리를 지킨다. 그렇다고 모든 이에게 주인으로 살라 요구할 수는 없다. 삶의 자리가 주는 서러움이 엄연하고, 세상의 셈법 또한 한없이 야박한 탓이다. 그 마트의 여성도, 시간강사 시절의 나도, 돌아보면 세속의 셈을 따지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저 멀리 다른 목표를 바라볼지라도 오늘 내게 주어진 자리에 진심을 다하는 것. 세상의 셈법이 아무리 박할지라도 내 삶을 향한 정직함만큼은 놓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세상이 정해준 자리에 매이지 않고,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이다.
오늘도 그 마트 앞을 지나며 다시 임제의 말을 떠올린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삶을 바꾸는 것은 자리가 아니라, 그 자리에 서는 마음이다. 그때마다 나는 같은 질문 앞에 선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나는 손님인가 아니면 주인인가.
2026-08-23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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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밀빵 냄새 피어오르는
동네 차고지 옆에 대형 베이커리 카페가 생겼다. 이제나저제나 기회만 엿보던 나도 마침 시간이 넉넉한 백수 친구를 앞세워 유혹의 진원지에 입성했다. 입구부터 벽면 한쪽이 보드라운 빵으로 둘러싸였다. 시그니처 메뉴라는 무화과 캄파뉴와 생딸기 쿠키슈, 팽오쇼콜라, 버터 크루아상, 유자 스콘 등등. 빵 이름 외우기는 언제나 어렵지만, 친절하게도 저마다 이름표를 달고 있으니 눈으로 한 바퀴 훑어보고 나면 입안까지 달달해진다. 주식이 밥인 나라에서 언제부터 이렇게 빵들을 좋아했었나.
하기야 나도 어릴 때, 엄마가 비 오는 날이면 굵은 양대콩을 넣고 쪄주던 술빵부터 일터에서 새참으로 받은 팥빵을 갖다주었을 때면 얼마나 행복했던가. 엄마가 모 심다가 쓰러졌을 때도 일복 속에 박하사탕 몇 알과 곰보빵 한 개가 들어 있었다. 그것이 생전에 어린 자식에게 당신 몫을 남겨 준 마지막 먹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우툴두툴한 껍질을 얹은 소보루빵을 나는 늘 눈물빵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즈음에 국내 유명기업에서 만든 샌드위치 빠다빵이 인기였다. 읍내 점방 앞을 지날 때면, 진열장 한켠에서 네모 빵 사이로 두툼한 빠다를 듬뿍 내비치며 군침을 돌게 하였으나, 시골 아이들에게는 언감생심 선망의 대상이었다. 세월은 빠다를 버터로 바꾸었지만, 내 추억의 번역만큼은 절대로 버터빵이 되지 못했다.
점심으로 녹차 물에 공깃밥 한 그릇 말아 보리굴비 푸짐히 뜯고도, 기어코 아이스커피에다 촉촉한 빵까지 골고루 고른다. 다이어트는 다시 내일로 미루고 뱃살과는 잠시 휴전을 청하며, 최근 판정받은 당뇨 전 단계라는 경고도 슬그머니 뒷전으로 밀쳐둔다. 인간이 만오천 년 동안 먹었던 밀인데 하루아침에 뚝딱 끊을 수도 없는 일, 분명 한의학의 ‘본초서’에서도 소맥이 부인들의 히스테리를 진정시키는 곡물로 소개되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빵 조각 앞에서 수다를 떠는 시간도 나름의 약효를 누리는 셈이다.
버터 향이 달콤한 브리오슈가 옛날 보름달빵을 그대로 닮았다. 왜 인간은 밀가루빵에 달 이름을 얹어 놓았을까. 빵 이전에는 달떡이라는 이름도 있었지. 달나라를 다녀온 우주비행사들의 인터뷰가 생각났다. 그들은 직접 고른 평소의 음식을 달까지 가져갔지만, 한결같이 가족이 모인 지구의 식탁이 그리웠다고 했다. 옛사람들이 둥근 빵에 ‘달’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달처럼 둥글게 앉아 먹던 두레 밥상의 풍경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일까.
그나저나 우주인들의 금지 식품 중에 빵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에는 적잖이 맥이 풀렸다. 무중력의 공간에서는 가루가 가라앉지 않고 사방으로 둥둥 떠다니기 때문에 대참사가 일어나는 까닭이란다. 빵 부스러기가 우주인의 눈에 들어가거나 우주선의 정밀한 기계 틈새로 스며들어 고장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은 어느 공간에 있든 하나쯤은 포기해야 하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아무리 우주여행이라지만 빵 없이 무슨 재미로 사나. 역시 지구는 밀빵 냄새 피어오르는 사랑스러운 별이다.
얼마 전, 벽에 적힌 낙서를 하나 보았다.
“차라리 빵으로 태어날 걸.”
웃음이 나면서도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낙서의 장본인이야 빵을 향한 애정을 익살스럽게 드러낸 표현이겠지만, 빵은 이미 사랑받을 운명을 타고났다. 색이 희든 검든, 주근깨가 촘촘히 박혀 있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달콤함과 고소함과 따뜻함만으로도 사람들의 마음을 충분히 움직이게 하니까. 세상에는 존재만으로도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2026-08-16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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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어떤 미안
한동안, 월요일 아침마다 도시 외곽으로 강의 가는 아내를 태워줬다. 매주 그러다 보니 강의 끝나기를 기다려 점심을 먹고 귀가하는 패턴이 만들어졌다. 덕분에 월요일 아침마다 두 시간을 낯선 동네에서 홀로 보냈다. 주로 차에 앉아 책을 읽거나 근처 골목을 산책 삼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이 골목 저 골목을 다니며 때 묻은 대문이나 이끼, 담벼락 위의 고양이와 화분들을 구경했다.
가끔은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평일 오전 열 시쯤의 골목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주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다. 자잘한 살림을 하거나 둘 셋 모여 담소를 나누다가 내가 지나가면 빤히 쳐다본다. 덩치 크고 비교적 젊은 남자 인간이 이 시각 이 골목에 도대체 왜 있냐? 고 눈빛으로 묻는다. 구경 온 사람은 나인데, 졸지에 구경거리가 된다. 대부분 내가 고개를 슬쩍 숙이고 그 앞을 지나치는 것으로 상황이 끝났다. 하지만 나의 반복된 산책이 어떤 오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 동네 골목을 세 번째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 대문 열린 집 마당에서 파를 다듬고 있던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누고? 재석이 아들이가? 아부지한테 왔나.
예? 아, 아닙니다.
글마 누고?
할머니는 내가 잠깐 당황한 사이, 갑자기 실존에 대한 증명을 요구했다.
아… 그냥 동네 구경하고 있습니다.
구경? 요 동네 볼 끼 뭐 있다꼬.
아, 예, 그냥…
며칠 전에도 안 왔나? 참말로 재석이 아들 아이가?
예, 아닙니다.
둥글둥글한 기, 영판인데?
허허 아닙니다.
민망한 웃음을 흘리고 서둘러 골목을 꺾어 지났다. 휘적휘적 동네를 돌아 돌아오니 주민센터 옆에 한 할머니가 무언가를 휘젓고 있었다. 붉고 초록의 꽃무늬가 잔뜩 그려진 원피스를 입고, 그 위에 ‘노인 일자리사업’이 새겨진 형광색 조끼를 걸쳤다. 도대체 뭘 하고 있나 지켜보니 쓰레기 집게로 주민센터 경계에 심긴 대나무를 툭툭 치고 있다. 대나무 두세 그루가 튀어나온 건물 난간에 갇혀 하늘로 머리를 뻗지 못하고 구부러져 있다. 할머니는 그게 안쓰러웠나 보다. 그런데 휘젓는 집게에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내가 슥 끼어들어 대나무를 밀어 머리를 난간 바깥쪽으로 냈다.
그래, 그라이 됐다. 아이고, 고맙소. 내가 힘이 없어가.
아입니다.
야도 고개가 얼매나 불편컷노. 내 가마이 보이 안 되겠어. 심은 사람들도 참, 잘 보고 안 하고, 고개가 얼매나 불편애. 내 오늘 대나무에 적선했다.
예…
근데, 가마이 보자, 재석이 아들이가?
예? 아닌데예.
아부지한테 왔나?
진짜 아인데예.
아인가? 내 눈이 어둡아가.
허허.
웃음을 흘리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이 동네를 더 어슬렁거리다가는 진짜 재석이 아들이 될 판이다. 걸으며 생각했다. ‘재석이 아들은 나를 닮았구나. 그리고 아버지를 잘 보러 오지 않는구나. 뭔가 사연이 있나? 짜슥, 그래도 자주 좀 오지.’ 하고 허공에 지청구를 날리고 보니, 열없다는 깨달음이 왔다. 그리고 오해가 생길 수도 있겠다 싶다. 나의 반복된 이 동네 산책이 ‘아버지를 보러 와서 매번 망설이다 돌아가는 재석이 아들’로 소문이 난다면, 그 소문을 들은 재석 씨는 어떤 마음이 들까…
그렇게 생각하니, 일면식도 없는 재석 씨와 그 아들에게도 미안해졌다. 동시에 미안함 뒤로 부아가 슬쩍 일었다. 지금 이게 내가 미안할 일인가? 이 상황은 재석 씨 아들의 격조함 탓인 것 같은데, 동네 사람들의 오지랖도 더해진 것 같고. 아닌가? 둥글둥글한 내 살집 탓인가? 거 참, 미안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왠지 미안해지는 이런 상황은… 근데 재석 씨 아들은 왜 격조하지? 부자간에 기구한 사연이라도 있나? 아니 근데, 그게 왜 내가 미안할 일이냐고! 하고 보니, 도돌이표다. 쩝.
차를 향해 걸으며 다짐했다. 둥글둥글한 몸피를 좀 줄이자. 그리고 한 동네를 여러 번 산책하지는 말자고.
2026-08-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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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생맥주 한 잔 주세요
요즘 같은 날씨에는 한낮에 밖으로 나갈 일이 있으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턱턱 막히고 땀이 줄줄 흐르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정수리에선 압력밥솥의 뜨거운 증기가 뿜어져 나올 것만 같다. 에어컨의 시원한 냉기가 절실하다. 당장 실내로 들어갈 수 없을 경우 주위에 나무 그늘 하나라도 있다면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차가운 잔에 가득 담긴 생맥주 한 잔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잔은 손잡이가 없이 슬림한 형태여서 내 손바닥으로 감싸쥘 수 있는 것이 좋고, 맥주를 따르기 직전까지 냉장고에 넣어놓아서 잔의 겉면에 하얗게 서리가 앉아 있어야 하며, 맥주의 윗면에는 생크림을 얹은 것처럼 부드럽고 하얀 거품이 적당한 두께로 올라가 있어야 한다. 회식이나 이런저런 모임에서 가끔 술을 마실 일이 생기기는 하지만 병맥주는 생맥주에 비해 살짝 아쉬운 면이 있다. 술자리가 이어질 경우 2차로 생맥주집에 가기도 하는데, 그 때는 이미 생맥주에 대한 갈급함이 가라앉았을 시점이라 그렇게까지 감동이 없다.
한여름에 내가 갈망하는 술이란, 불볕더위가 나의 온 몸을 습격한 최고조의 순간에 최상의 시원함으로 무장한 생맥주를 안주 없이 단숨에 들이키는 것이다. 한낮에 길을 걷다 지치면 별 고민 없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수혈하는 것처럼 아이스 생맥주 한 잔을 주문해 그 자리에서 빠르게 마시고 힘을 내서 목적지까지 즐겁게 당도한다는 상상. 숙취도 후회도 없이 깔끔하고 정갈한 한 잔일 것이다. 물론 얼굴은 더 빨갛게 달아오르겠지만.
이렇게 상상을 하고 문장으로 묘사를 하다 보니, 시원한 실내에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데도 생맥주에 대한 갈망이 샘솟는다. 어디서 보니까 갈망은 중독이나 의존의 증거라던데. 투명한 맥주잔을 통해 그대로 보이는 연갈색 액체 속 동그란 탄산방울들, 첫 한 모금을 들이켰을 때 목을 타고 내려가는 차갑고 청량한 느낌, 그런 감각의 기억들이 갈망을 부추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나의 갈망은 술이라는 물질 자체에 대한 걸까, 아니면 한여름 생맥주를 마시던 순간의 경험과 감각에 대한 그리움일까. 물론 물질이 있어야 경험과 감각도 생기는 것이니 그 둘을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겠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과거 어떤 경험의 기쁨, 그 좋았던 순간의 신체적 감각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은 욕망이 아닐까 싶다. 다시 한 번 그 순간의 재현을 기대하며 고조되는 감정, 그것을 간단히 말해버리자면 중독이나 의존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언가에 의존한다는 것이 반드시 나쁜가. 물론 그로 인해 타인에게 해를 입히게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의존이라는 말에는 부정적 평가가 내포되어 있는 느낌이지만 실상 우리는 때때로 어딘가에 기대어 살아가지 않나. 누군가는 생맥주 한 잔에, 누군가는 커피 한 잔에, 또 누군가는 책에, 운동에, 종교에, 사람에 기대어 고된 하루를 버틴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사람이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가 싶기까지 하다. 의존 자체보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이 무엇에 의존하고 있는지,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는, 즉 사유의 회피 아닐까.
우리는 어떤 것을 반복적으로 원하고, 그 욕망과 해소의 충족감 속에서 작은 기쁨을 누리며 살아간다. 그것을 단순히 ‘의존’이라는 어휘 하나로만 뭉뚱그릴 수는 없다. 욕망과 기다림과 충족감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삶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음악을 다시 듣고 싶고, 바쁜 와중에도 책을 다시 꺼내고, 누군가를 다시 만나고, 기쁨의 순간을 다시 누리고 싶어 하는 마음. 중요한 것은 반복의 노예가 되지 않고, 주체적으로 반복을 선택하는 태도에 있다. 그러니 시원한 생맥주든 또 다른 무엇이든, 그 기쁨에 잠시 기댄다면 이 뜨거운 여름 더위도 제법 견뎌볼만 할 것이다.
2026-08-02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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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독서휴가제를 권한다
여름휴가는 쉼을 위해 떠난다. 그러나 우리는 비슷한 시기 비슷한 곳으로 몰려간다. 긴 정체를 지나 돌아오면 몸은 쉬었다기보다 더 지쳐 있다. “쉬고 왔는데 더 피곤하네.”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이유다. 휴가는 다녀왔지만 마음은 일상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했다. 사람에게는 일을 멈추는 시간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신을 다시 채우는 시간이 필요하다.
기업은 사람을 ‘인적 자원(Human Resource)’이라 부른다. ‘자원’이라는 말에는 사람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활용해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 있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쓰면 닳고, 쉬면 회복하며, 읽으면 다시 깊어진다. 그런데도 많은 조직은 성과를 관리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사람을 다시 채우는 일에는 인색하다. 회의와 보고는 하루를 가득 채우지만, 생각은 일정표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사람을 오래 성장시키는 것은 더 많은 업무가 아니라,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이 오래된 지혜를 육백 년 전 세종에게서 찾을 수 있다. 세종은 신하들에게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명했다. 일정 기간 업무에서 벗어나 독서와 사유에만 전념하도록 한 제도였다. 처음에는 집에서 책을 읽게 했으나, 찾아오는 손님들 때문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조용한 산사에서 읽도록 했다. 훗날 성종은 사가독서를 명하며 독서당이라는 전용 공간을 따로 마련해주었다. 그 비용은 나라가 전담했으니, 사람을 키우는 일에는 아낌없이 투자하겠다는 뜻이었다. 세종은 사람을 오래 성장시키는 길이 깊이 읽고 생각하는 시간을 마련하는 데 있음을 알았다. 그 시간을 거친 학자들은 조선의 학문과 제도를 세웠다. 오늘의 조직이 다시 배워도 좋을 제도다.
독서는 지식을 쌓는 일을 넘어 사람을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오랫동안 교실과 강연 현장에서 독서의 의미를 이야기하며 느꼈다. 사람들은 예전보다 훨씬 빨리 답을 찾는다. 그러나 한 권의 책을 붙들고 오래 사유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한다. 머문 시간이 짧으니 읽은 것은 삶에 닿지 못한 채 머릿속 정보로만 남는다. 조선 후기의 학자 박지원은 이런 읽기를 경계했다. 그는 읽은 바를 현실에 능히 쓰는 사람을 ‘선독서자(善讀書者)’라 불렀다. 선독서자는 읽은 것을 삶 속에서 되살려 현실을 새롭게 읽는 사람이다. 많이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새롭게 읽는 힘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살아 있는 독서가 된다.
AI는 정보를 정리하고 문장을 만들어내는 데 뛰어나다. 그러나 질문을 만들고 의미를 찾는 사유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책은 사유의 마중물이다. 좋은 책은 멈춰 있던 생각을 움직이고, 흩어진 생각을 하나로 이어 준다. 독서는 타인의 사색을 만나 자신의 질문을 키우는 일이다. 사람은 그렇게 읽고 사유하며 성장한다.
조직은 늘 더 빠른 결정을 요구한다. 회의와 보고가 하루를 채우다 보면 한 권의 책을 오래 붙들 시간은 좀처럼 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사람은 새로운 질문보다 익숙한 답에 기대게 된다. 독서휴가제는 그 흐름을 잠시 멈추자는 제안이다. 읽고 사유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사람의 판단은 깊어지고, 그 깊이는 결국 조직의 힘이 된다. 사람을 성장시키는 조직은 구성원이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좋은 휴가는 단지 일을 멈추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을 다시 채우는 시간이다. 속도의 시대일수록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빠른 답이 아니라 더 깊은 사유와 판단이다. 그 시간을 개인의 의지에만 맡길 수는 없다. 이제는 조직이 마련해야 한다. 그것은 가장 오래 남는 투자이며, 사람을 생각하는 존재로 대하는 최소한의 예의다. 그래서 나는 독서휴가제를 권한다.
2026-07-26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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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동굴에서 동굴로
선뜻 동굴로 가는 길은 나오지 않는다. 자신 있게 찾을 줄만 알았는데 이리저리 곱창 골목만 배회하고 있다. 한때 인기 있던 영화를 이곳에서 촬영했던 덕분인지 어느 곱창집 간판에도 그 유명한 영화 제목이 당당히 얹혀 있다. 처음 왔을 때의 섬뜩한 기운과 습하고 어두운 그늘과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물소리조차 거대한 소음으로 들렸던 분위기가 남아 있을까. 구부러진 곱창 골목길과 주택 사이에 자그마한 산언덕이 끼어 있었으며 동굴 인근 몇 발자국 전부터 서늘한 기운이 휘돌았는데.
움집 이전에 인간이 거처한 최초의 집은 동굴이었을 터. 터널 같은 깜깜한 세상이 이어지던 원시시대에도 인간은 굴을 파고 그곳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아 길렀으리라. 원시인들에게 동굴은 단테의 지옥편이 상징하는 것처럼 천벌을 받은 인간이나 사탄이 머무르는 부정적인 장소가 아닐 것이며, 내가 기억하는 고립과 고독의 이미지와도 거리가 멀며, 결코 괴괴하거나 침침한 터널로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가진 몽환의 장소, 아침이면 멀리서 하얀 섬광이 들어오고 밤이면 흥건히 달빛이 내려앉는 자리. 계절마다 꽃바람과 풀 향이 골바람을 타고 와서 온몸을 적시는 곳. 그들에게 동굴은 아늑하고 안전한, 그리고 창조의 신비가 시작되는 가장 거룩한 성소였을 테다.
세계의 수많은 신화와 전설에도 동굴이 등장하지 않는가. 우리의 건국신화에도 입굴백일의 주문을 받고 곰이 인고의 시간을 보낸 곳이며, 부안군의 적벽강 절벽 위에서 칠산바다를 지킨다는 대모신 개양할미 역시 동굴에서 나왔고, 원효가 해골 물을 마신 곳도 바위굴로 전해진다. 그런데 나는 왜 그동안 동굴 속이 눅눅하고 어둡다고만 생각한 것일까. 웨딩아치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꽃 터널과 나무 터널도 많았는데. 벚꽃 터널, 동백 터널, 장미 터널, 이팝꽃 터널도 걸어보았고 산비탈의 무성한 녹음 터널도 올려보았으며, 단풍 터널의 계절을 지나 설국의 황홀한 눈 터널도 만나보았다. 오랫동안 갇히고 싶은, 벗어나고 싶지 않은 눈부신 동굴들이었지.
그렇게 생각하니 세상에 동굴 아닌 것이 없다. 주꾸미는 소라껍질 동굴에서 살고, 꺽지와 버들치는 강이라는 수굴에서, 문어와 개복치는 해저의 굴에서 숨 쉬며, 지렁이는 땅굴을 파고, 펭귄은 모래 굴 속에서, 참새와 개똥지빠귀는 허공이라는 굴에 산다. 직장인들은 사무실이라는 동굴 문을 열고, 드라이버들은 승용차라는 굴속으로, 반지하 세입자들은 폭우도 막지 못하는 지하동굴에 파묻힌다. 럭키아파트, 벽산아파트, 푸르지오, 무슨 무슨 팰리스에 사는 사람들도 한결같이 엘리베이터라는 수직 동굴에 갇혔다가, 현관문을 지나 중문을 닫고 자기만의 동굴에 들어앉는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궁이라는 동굴에서 태어나서 무덤이라는 동굴로 돌아간다. 물론 일부는 불의 동굴을 거쳐 수목이나 심해 동굴로 침잠하지만, 한번 갇힌 죽음이라는 터널을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다.
내 안의 동굴은 어떠한가. 안전한지, 혹시 침수나 낙석의 위험은 없는지. 굴을 파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깊게 만드는 일인 것을. 아직도 나는 내 굴의 끝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가끔은 섬광 같은 푸른 빛에 눈을 떨기도 하고 정신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오는 맑은 종소리 같은 것을 듣기도 한다. 그것이 헛것이나 환청이라 할지라도 내가 존재하는 한 내 굴을 보듬을 수밖에 없다.
주위가 서늘해졌다. 분명 동굴이다. 그때처럼 입구는 여전히 자물쇠로 채워졌으니 깨금발하고 동굴 속을 들여다본다. 검은 동굴 하나가 구불구불 몸을 펼쳐낸다. 다행히 떨어지는 물소리 청량하다.
2026-07-19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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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여름 갈치구이
원고 마감을 열 시간쯤 넘긴 아침. 시끄럽던 새벽 새소리도 어느새 사라지고, 뻑뻑한 눈동자 따라 끔뻑끔뻑 점멸하는 문장들과, 마침표 하나 제대로 못 찍는 손가락 위로, 여름 햇볕이 슥 내려앉았다. 유리창 뚫고 들어온 열기에 손가락이 따끔따끔하다가, 갑갑하다가, 점점 더워졌다.
‘이 더위는 마감 때문인가? 마감을 품은 여름 때문인가? 아닌가? 여름을 마감이 품은 건가? 그건 그렇고, 여긴 어디인가? 정신을 좀 차려야 될 것 같은데… 그래, 마감이고 나발이고 일단 뭘 좀 먹을까? 어차피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뇌로 포도당을 보내면 마침내, 마침표가 둥실 떠오를 수도 있잖아?’라고, 생각 아닌 생각이 마구 뻗치다가, 오돌돌 생선구이 집이 떠올랐다. 에어컨을 너무 빵빵하게 틀어서 오돌돌 닭살이 돋는. 나는 벌떡 일어나서 때 이른 점심을 먹으러 갔다. 들어서니 첫 손님이다. 앉으니 역시 오돌돌 닭살이 돋는다. 언젠가, ‘여기는 지구에 해로운 가게야’라고 말하며 고갈비를 야무지게 뜯던 시인을 떠올리며, 고등어구이 정식을 시켰다.
놓아 지는 밑반찬과 에어컨 송풍구에 송송 맺힌 물방울들을 번갈아 보며 묵직한 눈꺼풀을 끔뻑거리고 있을 때, 자동문이 스르륵 열렸다. 백발의 할머니와 반백의 아저씨가 들어왔다. 미간의 간격과 코의 모양이 똑같다. 할머니는 근처 병원의 환자복을 입었다. 할머니가 창가 자리를 향해 간다. 아들이 뒤따르며 툭 내뱉는다.
“거는 해 든다 아이요. 더분데 안으로 앉지.”
할머니는 못 들은 척 창가 자리에 가서 햇볕에 달은 의자에 손을 대 본다. 앉으며 말한다.
“어 뜨시다. 바닥은 뜨시고 공기는 칼칼하이, 이런 호사가 따로 없다. 욜로 앉아라.”
아들은 뭐라 입을 떼려다가 말고 마주 앉는다. 할머니가 내 테이블에 놓이는 고등어구이를 빤히 쳐다보다가 갈치구이 정식을 시킨다. 이내 적당히 익어 적당히 반짝이는 갈치 토막이 놓인다. 고등어구이를 먹으며 끔뻑끔뻑 모자를 구경했다. 할머니가 갈치 가시를 반듯하게 발라내며 말한다.
“요를 요래 갈라가 살살 띠마, 깨끔케 돼. 요래가 가운데 꺼는 새끼 주고, 요 옆에 꺼는 어매가 묵는 기라.”
그러며 아들 밥에 가운데 살을 올린다.
“됐어요. 엄마나 잡솨.”
“칼치는 요래 무야 맛나는 기라. 니도 얼라들 한테 요래 발카가 주라.”
“시대가 어떤 시댄데… 그라고 얼라들 다 컸어요. 고마 엄마나 잡솨.”
뜬금없이 시대 타령이 튀어나온 아들의 눈알이 붉어진다.
“그래, 묵자.”
할머니의 백발에, 노랗게 구워진 갈치 등에 내려앉은 햇볕이 눈 부시다.
“등더리 피고!”
반백의 아들은 말없이 등을 편다. 나도 덩달아 등을 편다. 펴다 보니 등이 아프다. 뒤따라 아들의 척추 사이로 잔소리가 피어오른다.
“앞만 보고 살마 등더리가 꾸부러지. 사람이 뒤에를 너무 안 보고 살마, 치받고만 사는 기라.”
아들은 말없이 미역국을 뜬다. 내 척추 사이에서도 뭔가가 스물스물 기어 나온다.
‘내 뒤는 어떤 모양이었더라… 마감하지 못한 내 원고도 구부러져 있을까? 뒤돌아보면 펴질까. 마감이 열 시간, 아니 이제 열한 시간 지났는데, 뒤돌아봐도 될까. 뒤돌아보지 않는다면, 아! 그렇게 되면, 불쌍하다, 내 원고. 그리고 내 척추. 그 사이에 스민 전설들.’
젓가락을 놓았다. 밥값을 내며 생각한다.
‘아메리카노에 샷을 추가하자. 별수 없다. 등더리를 펴자.’
하고 뒤돌아보니, 반백의 아들이 벌건 눈으로 미역국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 있다.
2026-07-1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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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예고된 파국
싱크대 배수구에 물 내려가는 게 좀 시원찮다 싶었는데 한동안 집안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방치해 두었더니 어느 순간 꽉 막혀 버렸다. 난감하고 당황스러웠다. 계속 그렇게 방치해두면 언젠가 문제가 터질 거란 예상을 못한 건 아니었지만 그 순간이 그렇게 빨리 닥쳐올 줄은 몰랐다. 주말이어서 배관업체에 연락이 어려울 것 같기도 했고 일단은 하는 데까지 해보자 싶어서 뜨거운 물도 부어보고 집에 있던 플라스틱 와이어로 이물질을 빼내려고도 해보았지만 도무지 진전이 없었다. 아무래도 아래쪽 배관이 막힌 것 같아 싱크대 아래 가림판을 열고 배관 연결 부위를 풀어 호스의 끝을 대야에 갖다 댔다. 호스의 중간 부분이 잔뜩 막힌 건지 싱크대에 고인 물은 여전히 흘러나오지 않았다. 한참동안 막막한 마음으로 배관 호스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는데 호스 끝에서 갑자기 왈칵 하고 갈색 덩어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싱크대에 고여 있던 물이 호스를 통해 주르륵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받쳐둔 대야는 너무 작았고, 뭘 어찌해볼 틈도 없이 대야 밖으로 흘러넘친 더러운 물로 바닥이 흥건하게 젖어버렸다. 얼른 수습해 보았지만 오랫동안 축적되어 있다가 한 순간에 밖으로 분출된 이물질의 악취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 작은 이물질들이 쌓이고 쌓여 커다란 덩어리로 굳어버린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사건이 터진 이후에야 비로소 원인을 살핀다. 파국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데 우리가 그 암시들을 민감하게 감지하지 못하고 놓칠 뿐이다. 그러니까 진짜 문제는 배수구가 막혀 물이 내려가지 않는다는 결과론적인 사건 하나가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축적되었던, 매우 사소하고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들이다.
얼마 전에 장 뤽 고다르의 영화 〈경멸〉을 보았다. 극작가인 폴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시나리오 각본 일을 맡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자본가인 제작자의 요구에 따라 조금씩 타협해가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에서 중요한 장면 중 하나로, 폴이 자신의 아내 카미유를 제작자의 자동차에 태워 보내는 장면이 있는데 그 이후로 카미유는 폴을 ‘경멸’한다고 말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과연 카미유가 그 일 하나만으로 폴을 경멸하게 되었을까. 관계의 파국은 단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단 한 번의 실망으로 누군가를 경멸하게 되지는 않는다. 누적된 사건들, 침전된 감정들,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였다가 어느 순간 터져버린다. 싱크대가 완전히 막혀버렸던 이유가, 커다란 음식물 하나를 갑자기 버려서가 아니라 매일매일 조금씩 흘려보냈던 작은 이물질들이 뭉쳐졌기 때문이었던 것처럼.
그렇지만 우리는 대체로 파국의 마지막 순간만을 기억한다. 막혔다가 터져버린 물이 바닥을 흥건히 적셔 난장판이 되어버린 장면만을 선명하게 기억할 뿐, 수백 번의 설거지 속에서 무심코 흘려보낸 기름 한 방울들과 작은 음식물 찌꺼기들은 기억하지 못한다. 폴이 카미유를 제작자의 차에 태워 보낸 일은 ‘경멸’의 단 한 가지 원인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진행되고 있던 마음의 균열이 수면 위로 드러난 사건에 불과하다.
막힌 배관을 뚫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지만 그보다 더 어렵고 중요한 일은, 배관이 완전히 막히기 전에 평소와 달라진 사소한 변화들을 알아채는 일일 것이다. 싱크대 배수구의 물이 예전보다 조금씩 느리게 내려갈 때, 누군가와의 대화 사이에 침묵이 조금 길어질 때, 상대의 눈빛에 작은 슬픔이 담겨 있을 때, 파국은 그런 미세한 신호 속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 배관에 하나둘 쌓인 이물질은 언젠가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그런 덩어리가 싱크대 아래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2026-07-05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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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우리는 은유 안에 산다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내 마음은 호수’라는 표현으로 은유법을 배웠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으로 마음을 호수에 비유하는 법을 배우고, 직유와의 차이를 익히며 은유가 그저 언어의 수사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문득 내 마음이 호수라면 누군가는 노를 저어 내게 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과서에서 눈을 들어 창밖을 바라보자,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는 배가 보이는 것 같았다. 은유가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사실 우리는 일상에서도 늘 은유를 쓰며 산다. 어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생각하며 아침에 일어나 ‘마음이 무겁다’거나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하지만 마음에는 무게가 없고, 시간은 물처럼 흐를 수 없다. 그 느낌을 달리 전할 길이 없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은유를 선택한다. 은유는 단지 언어의 장식이 아니라, 언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닿으려는 인간의 오래된 길이자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 오래된 길의 어원을 찾아가면 그리스어 ‘메타포라(metaphora)’, 즉 ‘옮김’이나 ‘전이’라는 뜻과 만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은유를 뛰어난 언어 기법으로 보았지만, 철학자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은유를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자체라고 보았다. 그는 어떤 개념으로도 완전히 대체할 수 없는 ‘절대적 은유’가 인간 사유의 깊은 층에 자리한다고 설명했다. 개념이 닿지 못하는 자리에서, 은유는 먼저 길을 낸다.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마크 존슨과의 공저 〈삶으로서의 은유〉에서 인간의 개념 체계가 근본적으로 은유적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폴리티컬 마인드〉에서 특정 은유를 반복해 접하면 그것이 신경 경로를 활성화해 강력한 ‘프레임’으로 자리 잡는다고 주장한다. 언어로 프레임을 선점하는 정치가가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이듯, 우리가 어떤 언어 환경에 노출되느냐는 사고방식의 형성에도 깊이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토론은 전쟁이다’라는 은유 안에 사는 사람은 상대를 이기고 무너뜨리려 하지만, ‘토론은 춤이다’라는 은유를 선택하면 서로의 생각을 조율하며 어우러진다.
이러한 은유의 힘은 개인의 사고를 바꾼 뒤, 필연적으로 집단의 인식과 사회 정책의 방향까지 바꾸어 놓는다. ‘범죄는 맹수다’라는 은유가 자리 잡은 사회는 색출과 검거를 최우선으로 삼고, ‘범죄는 바이러스다’라는 은유가 자리 잡은 사회는 빈곤 등 근본 원인 제거와 예방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은유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에 머물지 않고, 우리가 현실에 개입하는 방식을 바꾸어 놓는다. 결국 어떤 은유를 받아들이느냐는, 어떤 세계를 선택하느냐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이러한 변화를 한 개인의 차원에서 보여주는 작품이 마이클 래드포드 감독의 영화 〈일 포스티노〉다. 직접적인 언어에 머물렀던 우편배달부 마리오는 시인 파블로 네루다에게 은유를 배우며 세상을 다르게 인식하기 시작한다. 은유를 배우기 전과 후, 섬도 바다도 짝사랑하는 여인도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대상이 아니라, 그것들을 엮어 의미로 만드는 방식이었다. 은유를 얻기 전의 마리오는 세계에 압도되었고, 은유를 얻은 후의 마리오는 세계와 대화했다. 세계에 압도되는 삶과 세계와 대화하는 삶, 그 차이를 블루멘베르크는 은유가 만든다고 했다.
어떤 은유 안에 있는지를 의식하지 못하면, 그 은유가 우리의 사고를 조용히 이끈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말 속에서 여유로운 오후는 낭비가 되고, ‘인생은 전쟁터다’라는 말 속에서 일상은 생존의 싸움이 된다. 이 은유들이 공기처럼 퍼질 때, 우리는 그것을 선택했다기보다 어느새 그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한다. 그래서 쉬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고, 타인을 물리쳐야 할 적으로 받아들인다. 은유는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조건이다. 우리는 은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2026-06-28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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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빙글빙글 옥상 아마존
어느 날, 소설가 두 마리가 만나 같이 살게 되었다. 소설가 한 마리가 시집오면서 늙은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왔다. 다른 소설가 한 마리도 장가오면서 늙은 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 그리하여, 소설가 두 마리와 늙은 고양이 두 마리가 같이 살게 되었다.
몇 해 지나, 그 네 마리는 아파트 생활을 접고 산 아래 주택으로 이사했다. 주택으로 이사 온 기념으로 옥상에 밭을 만들었다. 물탱크 잘라 만들고 시멘트 벽돌 쌓아 만들고 자잘한 화분을 모아 만들었다. 소설가 한 마리는 태생이 시골이라, 풀 키우는 흉내는 얼추 낼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만만치 않았다. 첫해에 마사토에 배양토를 섞어 만든 밭은 도통 땅심이 없었다. 부랴부랴 시골 사는 지인 밭에 가서 흙 몇 부대 파오고, 한적한 국도변의 빈 땅에서 몇 부대 퍼와서 섞었다. 음식 찌꺼기와 쌀뜨물도 계속 넣었다. 한 해 지나, 흙 따라온 지렁이가 많이 늘고 흙에 찰기가 생겼다. 찰기가 생기자 풀이 잘 자라기 시작했다.
그해 봄부터 볕 드는 자리 따라 모종을 심었다. 꽃샘추위를 견디는 감자, 상추, 케일, 쑥갓, 방풍 심고, 보름 지나 청명(淸明) 즈음에 토마토와 고추, 들깨, 가지 심었다. 다시 보름 지나 곡우(穀雨)쯤에 오이와 호박 바질 방아 심고, 입하(立夏) 즈음 수박 심으면 옥상이 가득 찼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게 사실이지만, 가끔은 안 심어도 났다. 흙 따라 바람 따라 굴러온 결명자가 자라고 댑싸리가 자랐다. 도마뱀이 자라고 박각시나방 호랑나비 애벌레가 자랐다. 자라면 자라게 두었다.
풀들이 잘 자라기 시작하자, 식구가 늘었다. 옥상 댁이라고, 동네에서 인기가 채털리 부인(1928년 작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주인공) 급이었던 암컷 고양이가 있었다. 그 옥상 댁이 두 해에 걸쳐 옥상 밭에 새끼를 심어 놓고 사라졌다. 새끼들은 밭에서 똥 누고 오줌 누다가 자리 잡았다. 첫해에 거둔 놈들이 세 놈이다. 둘째 해에 거둔 놈들이 두 놈이다. 그리하여, 소설가 두 마리와 늙고 젊은 고양이 일곱 마리가 같이 살게 되었다. 그 아홉 마리가 같이 살게 되자, 바람 잘 날이 없기 시작했다.
젊은 고양이 다섯 마리가 무럭무럭 자라나자, 사냥이 시작되었다. 뒷산 가서 개구리 들쥐 새 도마뱀 매미 나비 나방 풍뎅이 잠자리 잡아 왔다. 죽여서 잡아 오고 살려서도 잡아 왔다. 완전 아마존이다. 다리 떼어낸 메뚜기같이, 꼬리 떼어낸 잠자리같이, 함부로 먹고 함부로 먹혔다. 생명을 먹고 가지고 놀고 선물도 했다.
그때마다 소설가 두 마리는 난감했다. 산 것들은 뒷산으로 돌려보내고, 죽은 것들은 옥상 밭에 심었다. 그냥 심기 미안해서 제문처럼 웅얼웅얼 읊으며 심었다. 너는 토마토가 되어라. 너는 오디가, 대추가, 호박이, 다래가, 살구나무가, 복숭아나무가, 유자나무가 되어라. 그러면 신기하게도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흙이 그렇게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들은, 소설가 두 마리가 먹었다. 토마토를 따 먹으며, 오디를 대추를 호박을 다래를 먹으며 생각했다. 언젠가 우리도 아마존이 되겠지. 다리 떨어진 메뚜기같이 꼬리 떨어진 도마뱀같이 좋은 거름 되어야지. 봄에는 보리가 되어야지, 연초록 들판으로 바람 따라 흔들거려야지. 오월에는 잘 생긴 오동나무 되어야지. 보라색 꽃도 피워야지. 여름엔 수박이 되어야지. 자외선 듬뿍 먹고 달달하게 익어야지. 가을엔 감나무 되어야지. 가지 끝에 달린 빨간 홍시 되어야지. 그 홍시 먹은 까치 되어 깍깍거리며 가을 하늘 날아 봐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지구가 빙글빙글 돌아 다음 계절로 간다. 매년 간다. 뽀글뽀글 파마에 동그란 선글라스 쓰고 빙글빙글 노래하던 나미(1967년부터 1992년까지 활동한 대중가요 가수) 누님처럼 간다.
2026-06-14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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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소중함과 불안함 사이
예능계의 인류학자로 일컬어지는 코미디언 이수지의 유튜브 영상을 가끔 본다. 그녀가 연기하는 캐릭터의 디테일에 빠져들어 피식피식 웃다보면 어느 순간 현실의 희비극이 겹쳐진다. 최근에는 유치원 교사의 고된 현실에 대한 영상이 이슈였다. 물론 대사나 연기에 극적 과장이 섞여 있긴 하지만 상황 자체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유치원 교사로 분한 그녀가 야외 수업 중 아이들에게 달리기를 시키는데, 도착점에 가장 먼저 들어온 아이에게도 “1등!”, 두 번째로 들어온 아이에게도 “1등!”, 마지막으로 들어온 아이에게도 “1등!”, 결국 “모두가 1등!”이라며 아이들에게 칭찬 세례를 퍼붓다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원에서는요, 학부모님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게 정서 돌봄이에요. 그래서 정서 보호 차원에서, 승패를 나누지 않고 모두가 우승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실제로 요즘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의 운동회에서 경기의 승패를 가르지 않는 추세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점수나 등수를 드러내는 것을 지양하고 경쟁을 최소화하며 모두가 잘했다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과거의 지나친 경쟁적 분위기와 서열적 평가로 인한 스트레스를 아이들에게 안겨 주지 않고 모두의 자존감을 높여주겠다는 의도 자체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런 운동 경기에서 패배를 경험하지 않게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아이들의 정서를 위한 일인지는 의구심이 든다. 달리기에서 등수를 감추고 모두가 1등이라고 말해주면 순간적인 속상함이나 좌절감은 줄어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아이들은 자신의 부족함이나 실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경험도, 부정적 감정을 견뎌내며 건강하게 털어내는 경험도 하지 못하게 된다.
심리학에서 회복탄력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인생에서 커다란 역경이나 비극적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 상황 자체에 압도되어 무너져 내리지 않고, 오히려 배우고 성장하며 결국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를 회복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회복탄력성은 개인이 타고난 부분도 있겠지만, 성장 과정에서 적절한 좌절을 겪어가며 이를 극복하는 경험을 통해 키워지기도 한다. 그런데 작은 실패나 패배의 경험 없이 무균실 같은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이라면? 그들이 처음으로 마주하는 좌절이 입시나 취업, 혹은 중요한 인간관계에서의 문제 등 중대한 일들이라면 아이들은 그것을 감당하고 극복하는 힘을 기르기도 전에 무너져 내릴 수 있다. 아이들의 정서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운동 경기에서의 패배 같은 작은 좌절의 경험마저 회피하게 한다면 아이들은 회복탄력성을 기를 기회도 잃어버리게 된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처럼 공교육에서는 비교 자체를 터부시하면서 사교육에서는 정반대의 논리가 펼쳐진다는 점이다. 학원에서 아이들은 레벨 테스트로 반이 나뉘고, 점수에 따라 끊임없이 평가받는다. 학부모들은 이와 같은 구조를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경쟁적 분위기에 대해 전혀 불만이 없다. 이는 위선이라기보다는 불안에 가깝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내 아이가 밀려날까봐 두려운 것이고, 그 밀려남으로 상처를 받을까봐 걱정스러운 것이다. 아이의 마음을 보호해 주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시장 경쟁에서는 살아남게 해야 한다는 강박이, 한국의 부모들에게 이중 잣대를 가지게 만든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가 1등이다.’라는 현실 부정도, 미래의 경쟁에서 어떻게든 패배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물밑 작전도 아니다. 앞으로 펼쳐질 수많은 경쟁과 실패 경험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힘, 그리고 승패와 무관하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식하는 능력, 그런 내면의 힘을 키워주는 것이야말로 달리기에서 등수를 지우는 일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2026-06-07 [1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