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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알았다
2024년 12월 3일 악몽의 시간은 거의 모든 사람을 침대에서 일으켜 세웠고, 그 이후의 시간을 혼몽의 시간으로 이끌었다. 이 땅에 사는 거의 모든 이들이 겪었던 고통이었기에, 그 충격에 대해서는 더 이상 부연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 기억해야 할 것은 제대로 말해지지 않는 것 같다.
묻고 싶다. 우리는 정말 몰랐을까. 그가 집권자의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걸맞은 자격을 근본적으로 겸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마지못해 비상계엄의 위법성과 탄핵 반대의 부당함을 인정하는 이들 중에는, 정말로 그가 그럴 줄 몰랐다는 변명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정말 몰랐을까. 숫자상으로만 보면 절반 이상의 사람이 그를 반대하지 않았으니, 이 변명은 그럴듯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검찰총장으로서 행보나 대선주자로서 그의 신념은 그가 시종일관 자격과 능력을 검증받은 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다시 몰랐다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런데도 몰랐느냐고.
많은 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만 모른 척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아마 그런 것쯤은 상관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대통령이 되고 당을 여당으로 만들고 자기 지위를 더욱 높여주고 평소 믿음을 더 강고하게 만들기만 한다면, 그다음에 벌어질 일쯤은 눈감아도 상관없다고 여긴 것은 아닐까.
진작부터 그와 그의 부인에게 향했던 의심과 불의의 눈초리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조금씩 권력에 접근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권한과 능력을 동원하여 의심의 눈초리를 무마하고 제거하여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도록 지워나갔다는 사실은 이를 더욱 확고하게 입증했다. 그런데도 그를 몰랐다고 할 수 있을까.
그가 차기 대권을 쥐어야 한다는 맹신에 가까운 믿음은 그에게 사전에 면죄부를 허락해 주었고, 그에게 향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다수의 힘으로 누를 수 있는 특권을 확보해 주었다. 대권을 쥐고 안 쥐고는 그다음이었고, 그를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은 사전에 면죄부부터 수여했다. 그렇다면 비상계엄으로 사람들의 안위와 권리까지 직접적으로 위협할 지를 몰랐다는 주장 역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역사적으로 보면, 적지 않은 대권 후보자가 사전에 면죄부를 발급받았다. 신통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일사불란하게 후보자를 향한 관용과 이해가 사전에 베풀어졌고, 집권 이후 실정이 반복되면 그때의 허락을 ‘설마 그가 그럴 줄 몰랐다’는 말로 바꾸었다. 게다가 그러한 일이 반복되면서, 그때는 몰랐기 때문에 용인할 수 있고 이제는 알았기 때문에 분노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생겨나 천연덕스럽게 유통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그 논리는 여전히 살아 있으며 지금도 진행 중이다. 전두환은 우리가 뽑지 않은 이라서 예외라 한다고 해도, 이명박이나 박근혜는 분명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알았다’는 논리로 선출되었다가 당연하다는 듯 처벌된 이들이다. 과거에 그들을 뽑기 위해 사전에 면죄부를 주었다가 이후 그들을 몰아세운 방식 그대로, 윤석열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면죄부와 특권을 허락한 바 있다. 그런데도 그때는 몰랐다고, 진짜 몰랐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분명 윤석열은 그 행위에 대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선택한 말로 ‘처단’될 수도 있다. 정작, 문제는 그다음이다. 우리는 미래는 모르겠고 지금은 괜찮다는 논리로 능력 없고 자격 없는 후보자에게 여전히 면죄부부터 수여하고, 집권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다시 그를 선출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또 다른 비상계엄과 네 번째 탄핵을 반복해야 할 수도 있다.
2024-12-1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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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어떤 고백
그는 몇 년간 아내를 간병하는 것으로 보냈는데, 아내가 희귀병에 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동안, 목덜미로 훈풍이 불어와도 봄을 느끼지 못했고, 산이 꽃으로 뒤덮여도 예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목련꽃 향기가 거리를 적실 때도 처음 그 향기를 맡았을 때의 설렘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한여름 소나기가 마른 땅을 때리며 먼지를 일으킬 때도 시원함을 느끼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천지가 붉은 빛깔로 물들어 산 위를 흐르는 바람조차도 빨갛게 물들어 적적하게 우는 가을이 되어도, 그는 들국화처럼 처연한 그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눈 덮인 하얀 산을 바라보아도, 북풍을 버티고 선 헐벗은 나목들을 보아도 그 담백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 간병 기간 동안, 그녀와 둘이서 차로, 비행기로, 기차로 수없이 서울로 다녔다고 했습니다. 그 길에, 구름이 한가롭게 떠다니는 가없는 하늘과, 게으른 소처럼 길게 누워 하품하는 산들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점점 여위어 가는 아내의 모습뿐이었다고 했습니다. 아내가 그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긴 한숨을 남기고 저세상으로 떠났을 때, 그는 세상을 잃어버린 것처럼 몸부림치며 울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참혹하도록 슬픈 모습이어서, 그가 정말 그 여인을 사랑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내의 죽음 후, 그는 생전에는 보지 못했던 아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의 아내가 처녀 때 찍은 사진들을 들추어 보면서, 그녀가 수줍음을 많이 타는 복스럽게 생긴 소녀였다거나, 그녀가 끄적거린 낙서장을 보면서 그녀가 생각보다도 훨씬 보수적이면서도 친구들을 몹시 좋아하는 사교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 등을 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녀가 없는 부엌을 기웃거리면서, 그녀의 부엌은 없는 것이 없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공간이었다는 사실, 집안 곳곳이 비상시를 대비하여 온갖 것들을 꼼꼼하게 숨겨 놓은 비밀 창고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그녀가 집이라는 공간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새삼 확인하는 일 등이었습니다.
그는, 그녀의 생전에는 그런 것들을 전혀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런 것들을 알아차려 가면서, 그녀의 삶이 그와 그 가족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지키는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눈물을 찔끔거리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내와 함께한 세월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들추며, 아련함과 슬픔,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그리움에 빠져들었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가 매우 센티멘탈한 남자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를 보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그만 빠져나오게! 세상은 이렇게 밝은데 자네는 뇌 속에 저장된 그 어두운 기억 속에서 헤매고 있네.”
그러나 그는 말했습니다. “아니! 그 사람에게 너무 미안해서 그렇게 할 수 없네!” “무엇이 그리 미안한데?” 그는 좋은 남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온전히 그녀를 사랑한 게 아니야! 사랑한 척한 거야! 온전히 집중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 나는 같이 밥을 먹으면서도 다른 상상을 하곤 했어. 마음에 다른 무엇을 상상하면서도 같이 밥 먹고 같이 자면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적당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던데, 내가 그랬던 거야! 적어도 함께 사는 동안은 그 한 사람이 전부여야 하는데, 나는 온전히 하나이지 못했어! 그녀는 내가 그녀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있는 줄 알았겠지, 내게 속은 거지…. 아니 어쩌면,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 속아 주었는지도 몰라. 그래서 너무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 그는 아내에게 사랑을 빚진 사람이었습니다.
2024-12-12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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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깃발이 아니다
사람들 생각은 참 다양하다. 생각이 다르니 가치관도 다르고 행동도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배척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한데, 나와 이해관계가 깊은 상태라면 말이 달라진다. 아주 답답하고 불쾌할 수 있다. 이때 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먼저, 이견을 인정하고 적정선에서 타협하는 방식이 있다. 두 번째는 내 주장을 끝내 관철하는 선택이다. 당연하게도 사회에서 발생하는 대부분 갈등과 폭력이 이 과정에서 생긴다. 사회는 이런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여러 대응책을 마련한다. 법질서를 강조한다면 좀 더 세밀해진 법의 판결로 대응할 터이다. 이성(理性)과 사유(思惟)의 저력을 믿는 사회라면 인문(人文)과 토론의 역량을 길러 줄 것이다.
하지만 문제라는 것은 뭐든 예상을 뛰어넘기 마련이다. 제도와 사회 시스템으로 거르지 못하는 난감한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이를테면 최근 뉴스에 올랐던 모 여대 건도 그렇다. 한쪽은 공학 전환을 반대하며 학교 시설물에 스프레이를 뿌렸다. 또 한편에서는 적법한 절차를 거쳐 협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갈등과 반대는 어디서든 생겨날 수 있다. 문제는 그 방식과 과정이다. 한쪽이 현저히 불리한 입장이라고 해서 그 과정의 평가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민주적이라는 이름으로 거수투표를 시행하고, 동참하지 않는 학생의 수업을 방해하기도 하는 행위를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고개 끄덕일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내가 주시한 것은 ‘민주’라는 깃발을 내걸고 비민주적 행위를 하거나, 인권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타인의 인권을 짓밟는 현상이다.
사실, 이런 비슷한 광경을 많이 목격했었다. 파업한 어떤 단체에선 파업에 불참하는 개인에게 강압적인 힘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 폭력의 근거는 바로 정의였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학대하는 뉴스를 심심찮게 볼 수 있으며,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차이를 인정하지 않기도 한다. 가치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하고, 심지어 법의 권위를 내세우며 불법을 저지르기도 했었다.
왜 이렇게 되었느냐 하는 논의는 필자의 능력을 벗어난 부분이다. 다만, 지금까지 목격한 사례와 맞물려 오히려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질문이 생겼다. 우리는 왜 민주, 사랑, 인권, 평등 같은 단어 뒤에 숨어서 목청을 높일까? 그 단어들은 오히려 우리가 만든 것인데 말이다. 사는 것이 너무 팍팍해서일까? 개인들 간의 문제는 주변인 혹은 사회 시스템으로 대부분 조정될 터이다. 진정 두려운 것은 이해관계에 따라 세력을 형성한 집단이 들고 흔드는 깃발들이다.
언제부턴가 민주, 평등, 인권, 정의, 사랑, 행복 등등의 단어를 깃발처럼 휘둘러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광경을 자주 목격하게 되었다. 그래서 ‘정의’라는 단어에 폭력이 숨어 있고, 사랑이라는 단어엔 이기적 욕정이, 민주라는 단어에는 익명에 숨은 군중심리가 섞일 수 있음을 알아버렸다. 이제는 과거 사람들이 그런 숭고한 단어를 처음 입에 올렸을 때의 의미와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단어는 시대가 흐름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어쩌면,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 국어사전에 ‘정의’에 대해 이렇게 바뀌어 수록될지 모른다. “정의(正義) 1. 명사: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2. 명사:폭력으로 원하는 바를 얻으려 할 때 내세우는 근거. 단어는 깃발이 아니다. 단어는 사람이 인식한 의미를 표현한 최적의 형상일 뿐이다.
2024-12-05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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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아파트 아파트
잊고 싶은 게 많은 건지 그저 기억력이 안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지나간 일들을 세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어떤 사건들은 굳이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당시의 감정선까지 선명하게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마치 현미경으로 나뭇잎의 잎맥을 들여다보듯 그 당시의 마음이 고배율로 확대되는 것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는데, 학교에서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라고 한 적이 있다. 수신인이 왜 미국 대통령이어야 했는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무것도 모른 채 선생님이 쓰라고 하니까 그냥 썼다. 그때도 나는 쓰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고 수업 대신에 글을 쓰라고 하니까 신이 났을 뿐. 레이건 대통령께, 라고 시작했지만 수신인과 관계없이 내 이야기를 썼던 것 같다. 그 편지로 나는 상을 받았고, 내 글은 교내 게시판에 전시되었다. 당시에는 어린애답게 마냥 기뻤다.
부끄러운 마음이 든 것은 한참 뒤의 일인데, 그건 내가 몰랐던 여러 사실들을 알게 된 후였다. 나는 편지의 본론에 들어가기 전, 서두에 우리나라를 소개했다. 그때 나는 사계절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줄 알았기에, 각 계절의 풍경을 정성 들여 묘사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88올림픽이 열릴 거라는 이야기도 자랑스럽게 덧붙였다. 우리나라의 대통령 이름도 소개했다. 학살자의 이름인 줄도 모르고 천진하게. 어리긴 했지만 그때의 내가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더라면 편지는 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독재 정권과 치열하게 싸운 이들, 경제개발의 미명 아래 고통받는 약자들. 아마 그런 이야기를 편지에 썼다면 자동 탈락되거나 교장실에 불려 갔겠지만 말이다.
최근에 내 아이는 교육 앱을 통해 화상 영어 회화 수업을 시작했다. 짧은 영어로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하나 싶어 가끔 엿듣는데, 하루는 플로리다에 살고 있는 미국인 선생님이 아이에게 물었다. “너 부산에 산다고 했지? 부산이라는 도시 이름은 들어봤는데, 거기 사는 사람은 처음 봤어. 부산이 어떤 도시인지 나에게 설명해 줄래?” 어떤 대답이 나올지 궁금했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아이는 고향을 어떻게 설명할까. 아이가 대답했다. “바다가 가까워요.” 그렇지, 부산은 바다지. 나는 아이의 마음속에 있을 부산의 바다를 그려보았다. 선생님이 다시 물었다. “오, 그렇구나. 좀 더 말해봐. 부산은 또 어떤 특징이 있는 도시야?” 아이는 음, 하고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아름다운 아파트가 많아요.”
아름다운 아파트라니…. 푸른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하얀 바닷새들과 작은 등대의 이미지가 내 머릿속에서 와르르 무너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어린 시절의 나와는 달리 아이는 부끄러운 누군가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소개하지 않았다는 점이랄까. 그래, 네가 태어난 이 도시에서 가장 많이 본 것은 아파트였구나. 아이의 말을 듣고 창밖을 보니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아파트였다. 높고 거대한 건물들에 가려진 작고 연약한 것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당연하게도 그 이야기들은 그 대상의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아는 만큼만, 보는 만큼만, 생각하는 만큼만 말하고 쓸 수 있다. 때로는 그 생각들마저도 적절하게 표현이 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언어적 한계는 차치하더라도 무언가를 제대로 알고 똑바로 보고 깊게 생각하려는 태도는 삶에 대한 진정성이며 각자에게 맡겨진 계율일 것이다. 오래전 내가 미국 대통령에게 쓴 편지 속 무지의 부끄러움에 대해서는 어렸으니까 그만큼밖에 몰랐다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이제 더 이상 그렇게 둘러댈 수는 없다. 세상을 제대로 보는 일에 게을러지지 않는 것, 글을 쓰고 말을 하기 전에 더 애써야 할 일이다.
2024-11-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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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간절함이 사라진 시대에 영화 찾기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극장에서 개봉 영화를 보거나 시간이 지나 텔레비전에서 보는 방법 정도였다. 주말과 연휴에는 텔레비전 정규 방송에 지난 영화를 몰아 상영하는 시간대가 포함되어 있었고, 많은 시청자들이 이 시간을 고대하며 밀린 영화를 보곤 했다. 명절이나 긴 연휴가 시작되면, 신문에서 편성표를 찾아 밑줄을 치고 같은 시간에 상연되는 영화를 어떻게 다 볼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도 했다.
이후 영화를 재생하는 비디오테이프가 나왔고, 사람들은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밀린 영화를 보곤 했다. 극장에서 개봉 영화를 보고 밀린 영화를 텔레비전에서 보는 방식이 존재했지만, 그 사이에 영화에 대한 갈증을 채워주는 비디오테이프와 그 대여점은 일상의 중요한 부분이 되기도 했다.
시간이 더 지나면, CD나 DVD에 영화를 담는 방법이 나왔고, 사람들은 이러한 콘텐츠를 활용하여 컴퓨터에 영화를 보는 방식을 추가했다. 다시 시간이 지나자, 이제는 컴퓨터에 시디나 디브디를 넣는 장치 자체가 사라졌다. 이제는 USB를 통해 파일을 전송하거나 재생하는 방법이 선호되고 있고, 원하는 영화는 인터넷을 통해 시청하거나 관람할 방법도 보편화되고 있다.
OTT 서비스가 시작된 시점은 아마도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이러한 서비스가 과연 효과적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점차 안방에서 그리고 거실에서 혹은 자기 침대나 스마트폰에서 영화를 고르고 시청하고 멈추고 때로는 다시 보는 활동은 막을 수 없는 일상이 되었다.
지난 30~40년 동안, 영화는 변화하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그만큼 변모해야 했다. ‘시청자’라는 표현이 더 적합한 ‘관객’ 앞에 등장하는 방식을 고민해야 했다. 그런데 그 고민을 반추하는 심경은 그렇게 유쾌하지만은 않다. 시대가 바뀌고 변화가 엄습하고 많은 것들이 바뀌어야 했으니 영화 역시 바뀌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면서도, 영화가 지닌 본질적 의미마저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지울 길이 없기 때문이다.
OTT 세상을 열면 그 안에 온갖 콘텐츠가 들어 있다. 너무 많아서 놀랄 정도이고,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흘러가듯 본 콘텐츠를 다시 발견하는 즐거움도 생각보다 쏠쏠하다. 하지만 그 많은 콘텐츠가 모두 유용한 것은 아니다. 사소하지만 영화 한 편이라도 작심하고 관람하고, 귀해서 아껴가며 보는 즐거움이 없다. 슬쩍 보고, 대충 살피고, 아니다 싶으면 버리는 일이 다반사이다. 계속 보고 버려도 콘텐츠는 얼마든지 있고, 이것이 아니면 다른 것을 고르면 그만이라는 심리도 한몫 거든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와 콘텐츠의 완성도 역시 예전만 못해 보인다. 쓰고 버리는 상품처럼, 늘 새로운 것을 채워 넣어야 하는 상점처럼, 그렇게 영화와 어느새 미디어 콘텐츠가 된 많은 것들이 거기에 그냥 전시되어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특별한 선택이 아닌 우발적인 재미를 따지게 되었고, 지치고 재미없으면 그만 보는 일을 반복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달갑지 않다. 영화나 콘텐츠가 일회용으로 쓰고 버려지는 것 같아 안타깝기 때문이다. 작정하고 만들고 꼼꼼하게 관람하면서, 귀한 콘텐츠를 아껴가며 시청해야 했던 시절의 향수가 살아나는 것도 부인하지 못하겠다. 실제로 급하게 만들고 마구 소모해 버리는 콘텐츠 중에는 다시 돌아볼 만한 것이 드물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상품으로서 영화일 수도 있겠지만, 오래된 삶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은 토요명화의 주제 음악이나 명화극장의 이미지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우리를 가벼운 흥분으로 몰아넣던 그 시절의 음악에는 지금보다 영화에 대한 간절함이 더 깊게 담겨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학생들에게 가르칠 영화를 OTT로 찾다가 든 생각이었다.
2024-11-21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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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어머니와 사단(四端)
조선 중기, 50세가 넘은 노학자 퇴계(退溪)와 갓 출사한 30대의 기대승은, 이른바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벌였습니다. 논쟁의 핵심은 인간 본연의 심성인 사단(四端)은 리(理)에서 발현하는 것이지만, 감정적 요소인 칠정(七情)은 리(理)에서 발현되는 것이냐, 아니면 기(氣)에서 발현되는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현상(現象)이 발현(發現)된 근본에 관한 시비였습니다. 어떻게 사단에 따라 행동하고 칠정을 다스릴까 하는, 실천적 문제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그 발현처가 하늘이냐 땅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리에서 기로 발현된 현상계에서 살고 있으므로, 이 논쟁은 어떤 결론에 도달하더라도 현실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지극히 형이상학적인 담론이었을 것입니다. 대체, 현상의 발현처가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기에 이런 논쟁에 열중하였을까요? 고담준론을 즐기던 선비들은 이를 대단한 논쟁으로 여기어 토론했고, 학당에는 지금에도 회자합니다. 그러나 이 논쟁은 나중에 정치적 파당(派黨)을 만드는데 기여했을 뿐이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쯤이었을 것입니다. 하교하고 무심히 집에 들어서던 나는 깜짝 놀라 밖으로 다시 뛰쳐나갔습니다. 우리 집 대청에 어떤 문둥이가 앉아, 상에 차려진 밥을 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문둥이는 사람을 잡아서 간을 빼먹는다는 무서운 소문도 있었고, 그 추한 모습 때문에 집에 들이기를 모두 꺼렸습니다. 그런데 그 문둥이가 우리집 대청에 앉아 멀쩡히 차려진 밥상을 받아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가만히 집안을 살펴보니, 어머니는 이쪽 마루 끝에 앉아 식사 중인 문둥이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나병환자가 집을 나갔겠다고 짐작되는 무렵에 집으로 들어갔더니, 어머니는 마당에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앉아 재로 그릇을 닦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그릇들이 어머니가 나병환자에게 차려준 밥상에 올랐던 그릇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어머니에게 “왜 문둥이를 왜 집에 들이어 밥을 차려주느냐?”며 화를 내며 항의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는 어머니는 그릇 닦던 손을 내려놓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는 게 아니다! 배고픈 사람이 찾아왔는데 어찌 그냥 내쫓나? 그 사람인들 그런 병에 걸리고 싶어 걸렸겠나, 어쩌다 운수가 나빠 그런 것이지…. 사람 팔자는 알 수 없는 것이니 사람 업신여기면 못쓴다.” 어머니 말씀이 하도 무겁게 들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방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는 밥을 빌려 오는 사람들, 우리가 거지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축담 아래 서서 밥을 주기를 기다렸습니다. 어머니는 꼭 그들의 그릇을 채워 보냈습니다.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밥이 없어 굶는 사람들에게는, 그래서 허기가 진 사람들에게는 밥 한 그릇이 하나님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야 그날 어머니가 그 불결한 문둥병 환자를 대청마루에 앉혀 놓고 밥상을 차려준 행동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집에 들이지 않아 허기가 진 문둥이가 찾아오자, 어머니에게는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먹여 보내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청으로 불러올려 밥을 대접했던 것입니다. 아직 어렸던 나는 그런 어머니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문둥병 환자에게는 따뜻한 밥 한 그릇이, 불쌍히 여기는 사람의 정이, 유일한 필요였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 선비들은 높은 관을 쓰고 사단칠정을 논쟁했지만, 사단(四端)이 대체 무슨 말인지조차 모르시는 어머니는, 그 사단을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연민을 가슴에 안고 사셨던 것입니다.
2024-11-14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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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기억하는 잠
나는 밤의 고요함을 좋아한다. 그것도 분주했던 일상의 기운이 가라앉은 깊은 밤을 좋아한다. 나에게 밤은 하루의 마무리가 아니다. 먼지 낀 아스팔트에서 호젓한 오솔길로 접어드는 순간이다. 그래서 뒤늦게 뭔가를 쓰겠다며 지금처럼 꾸물대며 시간을 보낸다. 한마디로 저녁형 인간이다. 그 때문인지 아침엔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다.
내 관점으로 아침형 인간은 신기한 종족이다. 나와 함께 사는 이는 새벽 5시 전에 일어난다. 굳이 그 시간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데 항상 이른 시간에 깨어난다. 어찌 그렇게 일찍 일어날 수 있을까. 한번은 아침형 인간이자 가끔 나를 외계인 취급하는 아내에게 물어봤다. 아내는 새벽의 고요함이 좋다고 대답했다. 그냥 눈이 떠지고, 눈이 떠지면 누워 있을 수가 없다고 했다. 새벽의 고요함? 한밤의 고요함과 많이 다른가?
아무튼, 고요함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냥 눈이 떠진다는 건 신비한 현상이다. 나는 잠에서 깨어나도 비몽사몽으로 한참을 꿈틀대고 있으니 말이다. 자책까지는 하지 않는다. 잠을 자는 사람은 계속 자려고 하고, 깨어 있는 사람은 계속 깨어 있으려 한다는, 잠의 관성 법칙이 있다는 것을 본 적 있기 때문이다.
한데, 잠은 왜 자야 할까? 삶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기간을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있어야 하는 셈이다. 게다가 잠을 못 자는 것이 음식을 못 먹는 것보다 더 치명적으로 작용해 사망하기까지 한다. 이만큼 대단한 리스크를 감수하며 잠을 자야 할 중대한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명확한 결론은 없지만 여러 가설이 있다. 뇌와 신체의 휴식이라는 설이 있고, 노폐물을 제거함과 동시에 기억의 찌꺼기를 정리하는 과정이라는 말이 있다. 그 외에도 많다. 한데, 휴식을 위해 잠을 자야 한다는 주장엔 솔직히 100% 수긍이 안 된다. 심장은 평생을 쉬지 않는다. 잠잘 때라도 쉬지 않고 뛰고 있지 않은가.
나는 기억과 관련한 어떤 과정이라는 가설에 한 표를 주고 싶다. 기억은 생명체가 남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유산이지 않은가. 즉, 기억은 생명체만이 가진 유일한 능력이며 진화의 토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데, 기억을 남겨 둘 방법이 없다. 대부분 동물은 기록할 문자조차 없으며, 인간조차도 그 기록을 후대에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엉뚱한 가설을 세웠다. 물론 나만의 가설이다. 생명체는 살아 있는 동안의 기억을 몸 안에 저장하기 위해서 잠을 잔다. 그 몸이라는 것이, 유전자일 수도 있고 혹은, 차원조차 다른 특별한 곳일 수도 있다. 그래서 잠을 자는 생명체는 그 자체로 기억을 생성하는 창조자이자 기억의 저장고이기도 하다. 그리고 각인된 기억은 대를 이어 전승된다.
제왕나비는 때가 되면 월동하는 장소를 찾아 대륙을 넘어 날아간다. 자신의 기억이 아닌 수만 년간 누적된 조상의 기억에 따라서이다. 본능, 본성이라 부르기도 하는 그것에 따라 기러기는 수천 킬로를 이동하고, 인간은 불가능에 도전한다. 그럴듯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다. 지금 내 기억은 후대의 재능, 열정이 되고 호기심이 될 것이다. 한데, 후대를 변모시킬 내 기억이 뭔가 있나? 한참 생각해 봐도 속절없이 머리만 긁게 된다. 한심하게도 나는 내 몸에 새겨진 선조의 기억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 같다.
자기변명에 능숙한 나는 이내 생각을 바꿨다. 내 삶에 더럽고 고약하고, 악독한 기억을 만들어 후대에 남기지만 말자. 뭐…보태주지는 못해도 방해하는 기억이 없는 것만 해도 어딘가. 오늘은 이것만 기억하고 잠이나 자자. 잠 잘 자는 기억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
2024-11-07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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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다시 오지 않을 순간
오르골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태엽을 감으면 아침 공기에 어울리는 청량하고 맑은소리가 흘러나온다. 연주되는 선율은 ‘일상으로의 초대’(신해철)의 한 부분이다. ‘내게로 와 줘. 내 생활 속으로. 너와 같이 함께라면 모든 게 새로울 거야.’ 가사 없는 멜로디이지만 어떤 때는 꼭 가사가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딱 저 구절만큼의 선율이 반복되는데, 뒤로 갈수록 음악은 조금씩 느려지고, 오르골의 청량하고 맑은소리는 그렇게 지연되는 시간만큼 점차 아련하게 멀어지다가 마침내 멈춘다. 멈추는 시점이 매번 바뀌기에, 어디에서 멈추느냐에 따라 그것을 듣는 내 마음도 조금씩 달라진다. 특히 한 구절이 완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멈춰질 때는 알 수 없는 쓸쓸함과 슬픔이 마음속에 어룽거린다. 그렇게 단순하게 반복되는 것 같은 오르골 선율도 들을 때마다 매번 느낌이 조금씩 다르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우리 삶에서 늘 똑같이 반복되는 일들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여름 개봉했던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한 남자의 반복적인 일상을 통해, 동일해 보이지만 조금씩 달라지는 매일의 삶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주인공 히라야마는 도쿄의 공공화장실 청소부이다. 그의 일상은 얼핏 보면 단조롭고 지루할 정도로 똑같아 보인다. 매일 아침 캔커피를 마시고 카세트테이프로 올드팝을 들으며 출근해 정성을 들여 공공화장실을 청소하고 공원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는다. 필름 카메라로 나무에 비치는 햇살을 찍고 단골 술집에서 반주를 즐기며 목욕탕에 가서 하루의 피로를 풀고 좋아하는 소설을 읽다 잠든다. 다이내믹한 변화나 눈에 띄는 발전 없이 매일 똑같이 반복되기만 하는 것 같은 그의 생활이 스크린에서 한참 동안 펼쳐진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완전히 똑같은 하루는 없다는 것을.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인공 히라야마의 일상에는 늘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코모레비)’의 모습이 시시각각 바뀌는 것처럼 말이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에서, ‘반복’은 동일성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로 나아가는 과정임을 강조했다. 이 세상에 완전하게 똑같은 것은 없으며, 우리가 ‘같다’라고 말하는 것은 서로 다른 요소들을 제거해 버린 추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가령 어제도 비가 왔고 오늘도 비가 왔으며 내일도 비가 왔다고 치자. 그 사흘간의 비를 그저 똑같은 ‘비’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제의 비는 소나기이고 오늘의 비는 보슬비이며 내일의 비는 가랑비라는 차이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은 그 각각의 단어로도 그날 내린 비의 다양한 모습을 전부 표현할 수는 없다. 순간순간 내리는 비의 모습과 양과 질감은 다를 테니까. 그 모든 순간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추상적으로 한데 뭉쳐 ‘사흘 내내 비가 온다’며 지루한 반복으로만 인식할 때 삶은 지리멸렬해진다. 유사해 보이는 현상 속에서 동일성만을 볼 것인지, 그 안에서도 미세한 차이를 찾아 그 다양성을 누리며 도약할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그 안에서의 작은 차이들을 세심하게 느끼고 기쁨의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심이 든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하루하루 정성과 최선을 다하고 그렇게 어떤 경지에 도달해 가는 사람들과 오래도록 함께 걸어가고 싶다.
어느새 11월이다. 매년 오는 11월이지만 다시 오지 않을 11월이다. 매일 맞이하는 아침이지만 오늘만의 고유함이 있는 단 한 번뿐인 아침이다. 나에게 유일한 이 순간이 너무도 아름답고 아쉬워서, 기쁘게 눈물이 고인다.
2024-10-31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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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처음부터 끝까지
노벨상 수상 열기가 독서 열풍으로 이어졌다는 소식이 들린다. 반가우면서도 우려스러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기억으로는 아마도 맨부커상(Booker Prize) 때도 비슷한 소식이 들렸는데 다시 같은 소식이 들리는 것을 보니, 한강의 책을 읽다 만 것인지 아니면 다시 사서 읽기로 한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이런 식의 독서 열풍은 우려스럽다. 젊은 세대에게는 더욱 우려스러운 현상이다. 10년 전만 해도 어떠한 계기든 어떠한 책이든, 읽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책을 잘 읽지 않는 한국인의 특성상, 그 책이 무엇이든 읽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어떻게 읽느냐도 중요하지만, 왜 읽느냐도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가끔 묻는다. 왜, 책을 읽느냐고? 아니 물을 때는 거꾸로 물어야 했다. 왜 책을 읽지 않느냐고? 수업 교재조차 읽지 않으려는 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이 의문은 필연적이다. 대부분은 우물쭈물 넘어가려고만 한다. 책을 읽지 않는 이유를 자신들도 정확하게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노벨상 수상 열기로 독서 인기
과거와 현재 독서방식 달라져
"책을 왜 읽는지 생각해야"
이미지와 영상의 세례를 받고 태어난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컴퓨터가 이미 존재했었다. 한 사회학자는 유년 시절이 지난 이후 컴퓨터가 상용화된 세대와 애초부터 컴퓨터가 있었던 세대는 사고방식에서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사실로 판단된다. 독서와 관련하여 생각한다면, 그 덕분에 글을 읽고 문자 체계를 이해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글을 전체적으로 그리고 순차적으로 읽고 또 쓰기 위하여 노력했다. 원고지에 쓸 때는 상당한 파지를 각오해야 했는데, 그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사고로 쓰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자연스럽게도 이렇게 쓰인 글을 읽을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며 글쓴이의 사고와 생각의 흐름을 존중하려 애썼다. 시작부터 일정한 전제가 깔리고 접근 방식이 설명되어야 했고, 문장을 통해 차례로 생각의 터널이 뚫리면서, 끝에서는 글과 책이라는 전체 사유가 이해와 기억의 영역 속으로 들어와야 했다.
모니터와 컴퓨터는 독서 습관을 바꾸었다. 필요한 부분만 바로 찾아볼 수 있었고, 전체를 건너뛰고 부분만 읽을 수도 있었다. 글 쓰는 습관도 바뀌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흐름으로 책을 쓰는 것이 아니고, 부분부분 써서 조합하기도 했고, 일부만 써서 확대하기도 했다. 독서의 측면에서 보면, 일관된 흐름이나 전체적 조감보다는 필요한 대목을 찾고 필요한 방식으로 요약하면 그만인 읽기가 상용화되었다.
대학 강의 수강 시에도, 학생들은 개조식 노트 필기나 PPT를 더 강하게 원한다. 빨리 읽을 수 있고, 간단하게 외울 수 있고, 그래서 쓰고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과목을 공부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무엇을 읽는다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풍조도 은근히 만연한 상태이다. 한강의 소설도 어쩌면 그러한 운명에 빠져들 수 있다. 한강의 소설을 통해 소설과 문학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의도는 희미하고, 유명하고 유행하는 정보를 재빨리 얻으려는 시도가 반짝이고 있다.
이러한 독서 방식은 곧 사그라질 것이다. 요점만 얻고자 하고 그것도 빨리 얻고자 하고 유행하는 무언가를 다시 쫓고자 하는 의도라면, 천천히 흐르는 서사의 줄기나 유장하게 지나는 시간의 사유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길 성의 있는 독자가 많이 탄생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 생각이 틀렸기를 바란다. 하지만 만일 이 우려가 틀리지 않는다면, 노벨문학상 수상은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칠 수도 있다. 다른 수상자가 탄생할 때까지, 한국 문학을 향한 열기는 다시 바닥에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
2024-10-24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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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객지(客地)에서의 장례
어느 해 늦가을, 나는 낯설기 짝이 없는 산과 들로 둘러싸인, 서울에서도 한참이나 북쪽에 있는, 마른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는 어느 산 아래 서 있었습니다. 바람이 얼마나 거세게 불어오는지, 늙은 버드나무가 바짝 마른 나뭇잎을 바람에 날리며 부러질 듯이 휘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은 산과 들 뿐만 아니라, 바람조차 낯선 곳이었습니다.
그 이틀 전, 형님으로부터 “고모가 돌아가셨다!”라는 간단한 부고를 접했을 때, 나는 고모님이 당연히 고향에 매장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서울 장례식장에서 마주한 고종형님은, 장지가 포천 어느 교회 묘지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엄마는 고향에서 묻히고 싶다며, 외가집 밭에 묻어 달라고 했다. 그렇지만 자주 찾아보기 위해 서울에서 가까운 교회 묘지에 모시기로 했다. 엄마 말을 어기는 마지막 불효를 하기로 했다.”
순간 나는 가슴이 먹먹해 왔습니다. 고모님은 친정과 친정 조카들을 좋아했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고모님 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으므로, 고모님을 가족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모님을 낯선 먼 객지에 매장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고, 낯선 객지에서 잠들어야 하는 고모님의 마지막 길이 서글프기까지 했습니다.
고향 집에서의 어느 여름이 생각났습니다. 그 보름 동안, 우리 집 대청에는 늙은 두 여인, 어머니와 고모님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부처님을 머리에 이고 사는 분이라, 틈만 나면 관세음보살과 나무아미타불을 입에 달고 사셨습니다. 그러나 고모님은 오랫동안 기독 신앙에 젖어 사신 분이라 매일 아침 혼자서도 예배를 보는 분이었습니다.
고모님은 육십이 넘도록 고향에서 사시다가, 늘그막에 아들이 서울로 삶터를 옮기는 바람에 서울로 이사했습니다. 고모님 댁이 우리 집과 바로 이웃이라, 날만 새면 보던 어머니와 고모는 서로 그리워했고, 그래서 어느 해 여름 고모님은 우리 집에 머물며 회포를 풀게 되었습니다. 고모님은 ‘물도 씻어 먹는다’고 소문이 날 만큼 깔끔한 분이었고, 어머니는 너무 깔끔 떨면 복 나간다며 대강대강 살림하였으므로, 서로가 대조적이었습니다.
고모님은 매일 아침 머리를 빗질하고 옷을 가지런히 한 다음, 우리 집 대청에 앉아 혼자 예배를 보았는데,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는 절차가 교회에서 하는 예배 절차와 똑같았습니다. 고모님이 예배를 진행하는 동안, 어머니는 방에서 열심히 관세음보살과 아미타불을 염송했으므로, 그 보름 동안 우리 집 아침은 찬송가와 염불로 채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보름이, 어머니와 고모님이 이승에서 함께한 마지막 날들이었습니다.
고모님을 그 마른 바람이 휘몰아치듯 불어오는 낯선 객지에 묻고 돌아오면서, 나는 손수건이 젖도록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토록 고향과 친정을 좋아했던 고모님을, 그 거친 바람이 불어오는 낯선 땅에 버렸다는 생각과, 그 낯선 땅에 홀로 남겨져 쓸쓸해하시는 고모님의 모습이 자꾸 눈에 어른거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모님보다 더 오래 사셨던 어머니는 햇살이 눌러앉는 대청에 앉으면 고모님을 생각하며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그 간 곳이 어디길래 한 번 가면 다시 못 올까? 무덤이라도 그 객지에 쓰지 말고 여기에 쓰지, 이리 보고 싶은데….”
젊은 시절, 유독 탈속한 삶을 동경했던 나는, 정은 과거에 얽매인 기억으로,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떠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슴 아픈 정이 없다면 삶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는 것을, 그 아픈 정 때문에 이 모순에 가득 찬 세상을 견딘다는 것을, 그 정 때문에 이 무의미한 삶이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나이가 많아진 이즈음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2024-10-17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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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비틀어질 테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신기할 때가 있었다. 좋고 싫음의 구분만으로 뭐든 맛보고, 만지고, 느껴보려 했었다. 처음 접해본다는 것만으로도, 그 대수롭지 않은 체험에도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했을 때가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이 낯설어 빛났던 유년 시절이다.
낯섦의 이면을 알게 되는 두 번째 시기가 있다. 무턱대고 달려들다 상처받고 위험에 빠지기도 했었다. 자의든 타의든 모든 낯선 것들이 도전으로 덮쳐오고,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했었다. 그런 경험으로 무모함이 뭔지 알게도 되었다. 조금 창피할 뿐인 실패를 세상이 무너지는 실패로 받아들여 미래를 속단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낯섦은 여전히 나를 매혹하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이른바 소년과 청년의 시절이었다.
다음에는 협상의 시기라고 이름 붙이겠다. 낯섦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두려운 영역이 있으며 동시에 엄청난 가능성이 깃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가능성을 얻기 위해선 그만한 대가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이중성을 알기에,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낯섦만 즐겼다.
어쩌다 용기를 내어 낯섦에 도전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도전이 반복될수록 낯섦에 치르는 비용은 줄어들었다. 오히려 낯섦의 대가로 빈털터리가 될까 싶어 몸을 사렸다. 대신에 책을 읽거나 여행을 떠나고, 새로운 취미에 눈을 돌리기도 했다. 가끔은, 가진 걸 포기하고 미지의 공간에 몸을 던지는 사람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심으론 낯섦의 가능성은 랜덤 박스처럼 운이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그다음 시기는 잘 모르겠다. 뭔가 다음 단계가 있을 것 같다. 실토하자면, 아무래도 내가 다음 단계에 발을 디딘 것 같다. 일단, 웬만한 것은 다 심드렁하다. 주말에 낄낄거리며 봤던 코미디 프로가 재미없고, 가슴 졸이는 공포 영화를 보고도 주인공은 결국 살아남을 거라며 콧방귀를 뀐다. 세상엔 새로운 것도 특별한 것도 없으며, 결국은 힘의 논리이며, 결국은 원자들의 집합일 뿐이라는 괴상한 논리를 중얼거리기도 한다.
변명하자면, 내 탓만은 아니다. 각종 매체에선 앞다투어 세계 곳곳의 명소와 이색 지역을 소개한다. 전문 정보들이 떠먹여 주듯 넘실거리고, 온갖 극한 직업과 기인, 지구촌 소식과 사건 사고가 눈만 뜨면 보인다. 이런 걸 매일 접하다 보니 가보지 않아도 가본 것 같고 먹어보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한데, 이런 익숙함이 의외로 고약했다. 마치, 의욕, 식욕 다 잃은 무기력증 환자가 된 기분이다. 나도 한때는 오지를 탐험하고, 세상 끝까지 걸어가 그곳의 별을 보고 싶었었다. 이득을 얻고자 함도, 철없는 호승심도 아니었다. 그 순수한 호기심과 욕구는 분명 삶의 열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음 단계는 낯섦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 시기인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새삼스럽게 낯섦을 찾아다녀야 하나? 찾는다고 해서 그 낯섦을 감당이나 할 수 있을까? 심드렁해서 더 삐딱해진 눈으로 둘러보니 그럴듯한 낯섦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그러니까 늘 보는 것이지만, 거꾸로 돌리거나 비틀어보면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들 말이다.
갯바위만 보는 것이 아니라, 갯바위 바닥 틈에 우글거리는 고둥과 게를 발견하는 것처럼, 길 걷는 사람 뒷모습만 보는 것이 아니라, 걸을 때마다 보였다 사라지는 신발 바닥 무늬를 보는 것처럼, 눈으로 보고도 미처 몰랐던 광경이 주변에 널려 있었다. 세상을 꼭 정면으로 보라는 법이 있나? 돌려서 보고, 비틀어서 보니 낯선 것이 지천이었다. 까짓것 어디 한번 비틀어서 보자. 어차피, 죽음이라는 최고의 낯섦을 겪기까지 끊임없이 낯섦을 즐겨야 할 운명이 아닌가.
2024-10-10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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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이상한 시험공부
며칠 전 아이가 중학교에서의 공식적인 첫 시험을 치렀다. 시험을 치른 것은 아이인데 공부는 내가 더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국어의 품사 분류 연습문제를 만들고(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정말이지 그런 식으로 소설을 읽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김유정 소설의 시점과 서술자의 특징과 대사에 담긴 인물의 심리 같은 것을 제대로 숙지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자기 주도적 학습이 중요하다는 것을 나도 물론 잘 알고 있다. 말 그대로 사교육과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목표를 세우고 학습하는 것이 핵심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능력을 키우기 위한 사교육 시장이 오히려 늘어났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러나 혈육에 대한 본능적 편애와 이상적 기대를 접어두고 냉철한 이성으로 판단했을 때, 내 아이는 아직 자기 주도적 학습 능력이 부족했고, 여전히 친구들과 노는 게 제일 좋다는 천진난만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다만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뿐이다. 나도 평소 공부에 대해 그리 닦달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당장 시험이 코앞인데 아이 스스로 메타 인지가 생길 때까지 기다려줄 대범함이나 인내심까지는 없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 속에서 엄마 주도적 학습이라도 시켜야 했다. 물질적 보상 같은 외재적 동기보다 과제 자체에 대한 흥미나 성취감 같은 내재적 동기 유발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교육학 이론들이 내 머릿속에 잔뜩 있었지만, 형이상학적 지식 같은 건 고이 접어두고 용돈이나 선물이라도 걸어야 했다.
국어 과목이야 전공이니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과목들을 봐주려면 나도 예습이 필요했다. 내 일을 끝내놓고 중학교 공부까지 하려니 피곤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30년 전쯤 했던 공부를 배경지식이 달라진 상태에서 다시 해보니 은근한 재미도 있었다. 아이에게 필요한 내재적 동기는 오히려 내게 촉발된 것 같았다. 이런 식이라면 몇 년 뒤엔 수능을 다시 쳐봐도 되겠다는 쓸데없는 용기까지 생겼다.
과학 시험 범위는 힘에 관련된 단원이었다. 문제집을 아이에게 풀게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내용 확인차 읽어 보았다. 물체의 모양이나 운동 방향, 빠르기를 변하게 하는 원인과 원리에 대해 이해하고 응용문제를 풀어야 했다. 문제집의 개념 설명 페이지에 과학에서 정의하는 힘에 대해 나와 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글씨로 참고 사항이 적혀 있었다. ‘과학에서의 힘이 아닌 예:아는 것이 힘이다. 강아지 키우기가 힘들다. 식사를 하고 나니 힘이 난다. 선생님 말씀이 힘이 되었다.’ 뭐 이렇게 당연한 걸 적어놓았나 싶어서 처음엔 피식 웃었다가, 나중에는 힘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나는 어떤 종류의 힘을 얼마만큼이나 가지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힘은 능력이기도 하고 자신감이나 용기이기도 하고 도움이나 의지처이기도 할 것인데 나는 과연 내면에 힘이 있는 사람일까, 누군가에게 그 힘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일까, 그런 생각들.
문제집의 설명에 따르면 중력은 끌어당기는 힘이고 탄성력은 되돌아가려는 힘이며 부력은 밀어 올리는 힘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을 설명한 과학의 언어였지만 실은 우리의 마음에도 끌어당기는 힘과 되돌아가는 힘과 밀어 올려주는 힘 같은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들었던 나는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내가 학창 시절에 나름대로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으면서도 기대만큼 좋은 성적을 받지는 못했던 이유를. 책상 앞에 계속 앉아서 교과서를 보고 있긴 했지만 의식의 흐름은 자주 그런 식으로 흘러갔던 것이다. 아무래도 수능을 다시 치는 건 곤란하겠다는 결론을 내리며, 아이에게 문제집을 내밀었다. 아이가 입을 앙다물고 문제를 푸는 동안 여전히 내 머릿속에는 내가 가진 힘과 타인이 가진 힘, 그리고 우리가 나눌 수 있는 힘에 대한 생각들이 무수히 가지를 치며 뻗어나가고 있었다.
2024-10-03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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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옛 텔레비전드라마를 다시 보다
일이 있어 30년도 더 지난 텔레비전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나의 의지는 무관하게 보게 된 것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1991년 대입학력고사를 볼 즈음에 시작한 드라마였다. 나는 이듬해 대학생이 되었고 대학 생활 틈틈이 보는 둥 마는 둥 그렇게 흘깃흘깃 넘겨 보아야 했던 드라마이기도 했다.
이 드라마는 1997년 중국으로 수출되었고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신문은 시청 가능한 중국 인구 9억 명 중 4.2%에 해당하는 3900만 명이 이 드라마를 보았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의외였고, 중국으로서도 신기한 일이었다. 한국 신문도 이 드라마의 성과에 자랑스럽다는 듯한 인상을 내보이곤 했다. 그래도 그때는 그냥 의외였고, 별일에 불과했지만, 훗날 이 드라마의 파장은 한류의 시작을 알리는 일종의 예광탄으로 자리 매김되었다. 그러자 이 드라마는 연구 논문 속에서 살아나기 시작했고, 각종 한류 서적에 그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평소 나 역시 이 드라마가 한국 내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을 뿐만 아니라 드라마 수출 역사에서도 중요한 이정표로 남는다는 주장을 덧붙이곤 했다. 하지만 정작 55부작에 이르는 이 드라마를 다시 볼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추석 연휴는 길었고, 더 이상 미룰 수 없었기에, 용기를 내서 그 시작을 다시 경험하기로 했다. 긴 연휴도 그 끝을 드러내면서 당연하다는 듯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드라마 시청은 이어졌다. 그만큼 재미있었다. 그 시절 그 드라마와 함께 떠났던 MT도 생각났고, 한껏 비웃으며 이 작품을 은근히 폄하했던 기억도 드문드문 떠올랐다.
개인적인 추억을 논외로 친다고 해도, 이 드라마가 가진 매력을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어 보인다. 이 드라마에는 삶에 대한 명료한 발언이 담겨 있었다. 과거 재래식 ‘한국인’의 삶과 미래 ‘도시인’의 삶이 고루 담겨 있었고, 지나가 잊힌 것에 대한 미련과 함께 새롭게 찾아올 미래에 대한 우려 역시 함께 담겨 있었다. 그래서 이 작품은 과거의 작품이기도 했지만, 현재의 작품도 될 수 있었다. 억지로 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30년도 더 된 이 드라마 안에 지금-이 시대의 문제도 함께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의 격차로 인해, 우리가 걸어왔던 지난 30년의 모습이 어쩌면 이 드라마의 깊이를 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밤을 새기 시작했다. 55부작을 다 보기 위해서는 며칠을 더 보내야 할지도 몰랐지만,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작품을 보고 써야 할 연구 논문과 저술도 잠시 잊기로 했다. 그 시절, 그때, 우리들이 보고 그 세대의 또 다른 우리들이 구상했던 이 작품은 확실히 지금 작품과 달랐다. 지금처럼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어조로 그 시절과 그 이후의 시절, 그리고 그 이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자세와 의지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 대해 분명한 어조로 무언가를 주장하고자 하는 태도는 인상 깊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의 서로 다른 기호를 맞추어야 했던 주말 연속극이 분명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사실 이 드라마는 중국인이 좋아한 이야기가 아니라, 중국인마저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던 셈이다.
한때 1980~1990년대 풍조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유행에 둔감하기 때문에 지금도 그 풍조가 남아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러한 유행이 필요했다면 나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용기가 아니었을까. 신중함과 점잖음을 핑계로 지나치게 머뭇거리지 않고,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을 과감하게 실행할 수 있었던 용기는 그 시절 더욱 분명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이 시점에서 그리운 것은 아니었을까. 문득, 오래된 옛날 텔레비전드라마를 다시 보다가 든 생각이었다.
2024-09-26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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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주막(酒幕)
집사람은 안마기에 발을 넣고 소파에서 쉬고 있었다. 항암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집사람은 마치 전장(戰場)에서 거친 전투를 치르고 빈사 상태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병사처럼 지쳐 있었다. 집사람의 코가 저렇게 길었었나 라고 생각할 만큼 코가 길어 보였으므로, 내게는 그런 집사람이 생소했다. 집사람은 광대뼈와 볼이 두툼해서 코가 작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항암 치료는 두툼하던 집사람을 마른나무 막대기처럼 만들어 놓았다. 앙상해진 어깨는 생명이 도망쳐 나간 흔적처럼 보였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소리는 이야기꾼의 이야기 소리처럼 조곤조곤하게 들렸다. 창밖을 내다보던 집사람이 무언가 말을 했는데, 잘 듣지 못한 나는, 집사람이 요양병원으로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는 말을 한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의중을 확인하기 위하여 집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집사람이 응시하고 있는 것은 창밖의 비였고,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 앞에 암담히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슬픔과 언짢음, 그리고 가슴벽이 바늘로 찔린 듯한 지독한 아픔이 밀려왔다.
무슨 말을 했는지 묻고 있는 내 얼굴에, 그녀는 아주 조그맣게 말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요?” 항암 치료를 시작한 지가 2년이 넘었지만, 집사람은 단 한 번도 죽음을 입에 담은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 말은 의외였다. 그렇지만, 그런 의외의 것이 우리에게도 다가올지 모른다.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생각했다.
사람들은 경험해 보지 않은 것들은 알 수가 없고, 그래서 경험 이외의 것들은 믿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대개 의문 속에서, 의문을 묻어 둔 채 그냥 살아간다. 죽음이 그런 것일 것이다. 정말 궁금하지만 경험할 수가 없으므로 어떤 것인지 궁금해하며 살아간다. 어릴 때, 평상에 누워 바라보던 하늘을 떠울렸다. 수많은 별들이 빛나는 보석처럼 뿌려져 있었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 그 별들이 이 지구처럼 가없는 우주를 떠도는 또 다른 지구라는 것을 알았다.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있는 이유를 알아? 그곳은 전부 이 지구처럼, 사람의 실체(實體)인 영혼들이 저 끝없는 우주를 여행하다 쉬고 싶을 때 쉬어가는 곳이야. 사람의 영혼은 우주를 여행하는 나그네거든! 우리도 이 우주를 여행하는 나그네야. 우리는 어느 날 이 지구별을 지나다가, 마치 여행객이 쉬어갈 주막(酒幕)에 들리듯이 이 지구에서 행장을 푼 거야. 지구별에서는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하므로 우리는 각각 너와 내가 된 거야!”
“이 지구별에서 우리의 일생은 저 우주의 하룻밤과 같아. 그래서 너무 짧은 하룻밤인데, 우리는 이 짧은 밤에 긴 인생의 꿈을 꾸는 거지. 뜨거운 사랑을 하고, 미워도 하고, 배신도 해 보고, 의리 때문에 목숨을 버려보기도 하고, 가슴이 아려 녹아내리는 헤어짐의 아픔을 겪기도 하고…. 그리고 마침내 이 몸이 죽으면, 그때 우리의 실체인 영혼은 꿈을 깨는 거야! 그래서 우리 삶이 꿈일걸 알게 되지. 우리는 지금 꿈을 꾸면서도 꿈인 걸 몰라. 왜 그런지 알아? 이 인생의 꿈이 너무도 실감이 나거든!”
“우리가 지난밤 꿈을 꿀 때, 우리는 그것이 꿈인 줄 몰랐지만, 깨어보면 그것은 재미난 꿈이었지. 당신과 나는 지금까지 이 지구별에서 재미난 한편의 꿈을 꾼 거야! 이 꿈에서 깨어나면, 당신은 이번의 우리 인생에서 얻은 정서를 바탕으로, 다른 별에서, 그 주막에서 새 생활인 또 다른 꿈을 꾸게 될 거야. 그리고 우리가 함께한 이 삶은 다만 작은 이야깃거리가 될 거야.” 창밖에는 슬픔처럼 지독한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2024-09-1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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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기억이 만든 기억
사람의 생각과 판단의 근간은 모두 기억이 아닐까 싶다. 당장 뭔가를 떠올려 봐도 그렇다. 어떤 모습, 대화, 단어, 현상, 뜬금없는 계획…. 무엇을 상상하든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떠올려진다.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도 결국은 오랫동안 쌓아온 기억의 결과가 아닌가. 그래서 개개인이 가진 기억은 삶의 방향을 정하기도 하고, 삶 자체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까마득히 오래된 기억이 있다. 아마도 가장 오래된 기억일 것이다. 그래서 스틸사진처럼 순간의 장면만 떠오른다. 나는 엄마의 등에 업혀 있었고 막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그때 보았던 것은 초가의 처마와 창이 뚫린 낮은 황토벽이었다. 그리고 벽 안쪽에서 소의 나지막한 울음을 들었다. 기억의 영상은 그것이 전부다. 하지만, 그 영상에는 또 다른 감각들, 이를테면 삭은 짚 더미 냄새와 뜨끈한 여물통에서 피어나는 증기가 뒤섞인 형언할 수 없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내가 몇 살 때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의 정황으로 그곳이 외갓집의 어느 장소였음은 분명하다. 그래서 지금도 이끼 낀 시골의 오랜 담벼락을 보면 왠지 삭은 짚 더미 냄새가 느껴지기도 한다. 엄마의 친정, 즉 외갓집의 풍경은 내 유년의 기억에 크게 자리 잡고 있다. 나지막한 산 앞에 앉은 외갓집 앞에는 이삭을 피우기 시작하는 벼가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다.
바람에 일렁이는 초록 물결은 구불구불 가로지른 개울둑에 막혀 되돌아오고, 그보다 더 까마득한 지평엔 기적을 울리며 나타나 어린 시선을 사로잡고 마는 동해남부선 기차의 행렬이 있었다. 어렸던 나는 외갓집 대청마루에 앉아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내 기억의 바닥을 차지할지 모르고 마냥 바라보기만 했었다.
여름밤, 대나무 평상에서 외할머니 무릎을 베고 칭얼거리다가 문득, 숨 막힐 정도로 황홀한 밤하늘의 은하수를 목격했었다. 처음 보는 그 장관에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런 은하수의 현기증을 두 번 다시 느끼지 못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저 침묵으로 하늘의 끝과 끝을 더듬었었다.
기억의 단편은 뒤죽박죽이다. 바닷가에서 고둥을 줍다가 발견해 내 손바닥 위에 올린 성게의 보일 듯 말 듯 한 움직임. 그리고 따갑지도 간지럽지도 않은 아슬아슬한 손바닥의 느낌을 기억하고 있다. 무심코 휘둘렀던 내 잠자리채에 부딪혀 죽어 가던 제비의 까만 눈. 밤마실 가는 외할머니 따라 농로를 걷다가 내 옷에 앉은 반딧불이의 깜박이는 불빛. 그렇다. 그것들은 모두 일종의 신호였었다.
무엇을 뜻하는 신호인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신호에 따라 평범했던 사건이 전혀 다른 의미의 기억으로 변하기도 했었다. 또 그런 신호에 따라 불쾌했던 사건이 망각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기억이 그다지 정확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기억은 언제나 기억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기억이 쉽지 않았던 만큼, 망각 또한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쁜 기억은 지우려 문지를수록 더욱 선명해지고, 영원히 간직하고픈 기억은 나도 모르게 구멍이 숭숭 뚫린다. 기억이란 본디 그런 것이긴 하던데, 똑같이 체험하더라도 개인마다 다른 신호에 따라 다른 의미를 만들고 전혀 다른 기억으로 저장되는 것 또한 기억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진 내면의 기억들이 궁금하다. 언제, 어떻게 나타나 지금 겪고 있는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고, 현실을 채색해줄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지금도 무심코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골목길 아래의 무성한 이끼에 눈길을 던지곤 한다. 그리고 늘, 초록의 물결을 그리워한다.
2024-09-12 [1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