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독서휴가제를 권한다
독서는 사람 변화시키는 과정
삶을 새롭게 읽는 힘으로 연결
휴가는 자신을 다시 채우는 시간
이국환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여름휴가는 쉼을 위해 떠난다. 그러나 우리는 비슷한 시기 비슷한 곳으로 몰려간다. 긴 정체를 지나 돌아오면 몸은 쉬었다기보다 더 지쳐 있다. “쉬고 왔는데 더 피곤하네.”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이유다. 휴가는 다녀왔지만 마음은 일상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했다. 사람에게는 일을 멈추는 시간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신을 다시 채우는 시간이 필요하다.
기업은 사람을 ‘인적 자원(Human Resource)’이라 부른다. ‘자원’이라는 말에는 사람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활용해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 있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쓰면 닳고, 쉬면 회복하며, 읽으면 다시 깊어진다. 그런데도 많은 조직은 성과를 관리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사람을 다시 채우는 일에는 인색하다. 회의와 보고는 하루를 가득 채우지만, 생각은 일정표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사람을 오래 성장시키는 것은 더 많은 업무가 아니라,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이 오래된 지혜를 육백 년 전 세종에게서 찾을 수 있다. 세종은 신하들에게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명했다. 일정 기간 업무에서 벗어나 독서와 사유에만 전념하도록 한 제도였다. 처음에는 집에서 책을 읽게 했으나, 찾아오는 손님들 때문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조용한 산사에서 읽도록 했다. 훗날 성종은 사가독서를 명하며 독서당이라는 전용 공간을 따로 마련해주었다. 그 비용은 나라가 전담했으니, 사람을 키우는 일에는 아낌없이 투자하겠다는 뜻이었다. 세종은 사람을 오래 성장시키는 길이 깊이 읽고 생각하는 시간을 마련하는 데 있음을 알았다. 그 시간을 거친 학자들은 조선의 학문과 제도를 세웠다. 오늘의 조직이 다시 배워도 좋을 제도다.
독서는 지식을 쌓는 일을 넘어 사람을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오랫동안 교실과 강연 현장에서 독서의 의미를 이야기하며 느꼈다. 사람들은 예전보다 훨씬 빨리 답을 찾는다. 그러나 한 권의 책을 붙들고 오래 사유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한다. 머문 시간이 짧으니 읽은 것은 삶에 닿지 못한 채 머릿속 정보로만 남는다. 조선 후기의 학자 박지원은 이런 읽기를 경계했다. 그는 읽은 바를 현실에 능히 쓰는 사람을 ‘선독서자(善讀書者)’라 불렀다. 선독서자는 읽은 것을 삶 속에서 되살려 현실을 새롭게 읽는 사람이다. 많이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새롭게 읽는 힘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살아 있는 독서가 된다.
AI는 정보를 정리하고 문장을 만들어내는 데 뛰어나다. 그러나 질문을 만들고 의미를 찾는 사유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책은 사유의 마중물이다. 좋은 책은 멈춰 있던 생각을 움직이고, 흩어진 생각을 하나로 이어 준다. 독서는 타인의 사색을 만나 자신의 질문을 키우는 일이다. 사람은 그렇게 읽고 사유하며 성장한다.
조직은 늘 더 빠른 결정을 요구한다. 회의와 보고가 하루를 채우다 보면 한 권의 책을 오래 붙들 시간은 좀처럼 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사람은 새로운 질문보다 익숙한 답에 기대게 된다. 독서휴가제는 그 흐름을 잠시 멈추자는 제안이다. 읽고 사유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사람의 판단은 깊어지고, 그 깊이는 결국 조직의 힘이 된다. 사람을 성장시키는 조직은 구성원이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좋은 휴가는 단지 일을 멈추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을 다시 채우는 시간이다. 속도의 시대일수록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빠른 답이 아니라 더 깊은 사유와 판단이다. 그 시간을 개인의 의지에만 맡길 수는 없다. 이제는 조직이 마련해야 한다. 그것은 가장 오래 남는 투자이며, 사람을 생각하는 존재로 대하는 최소한의 예의다. 그래서 나는 독서휴가제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