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소금밭이 있던 자리
김정화 수필가
소금밭의 자리다. 한때 조선의 소금을 구워냈던 모래펄, 부산의 가장 큰 염전이 수백 년 이상 버티고 있었던 곳, 바닷물을 담는 넓은 그릇 모양의 염전 갯벌이니 분개라 불렸던 땅이다. 분개의 ‘분(盆)’이 화분을 가리키니 소금을 굽는 가마라는 뜻이겠고 ‘개’는 갯가, 개펄, 갯바위, 갯낚시에서 알 수 있듯이 포구의 순우리말이므로 염전이 있는 갯벌이라는 의미를 담았겠다.
분개소금이 맛있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 소금밭을 상상하려고 포구 주변을 어슬렁거려본다. 소금 마을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말소리와 짭조름한 염전 바람 풍경까지 그려지는 곳이다. 염전마을 아낙들은 소금 광주리를 이고 동래장과 구포장으로 소금을 팔러 다녔고, 장정들은 하루 삯이 쌀 한 되 반 정도인 일급제 염전 일을 하였으며 판매가 부진할 때는 소금을 품삯 대신 받아 각자 팔아 생활했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그러나 옛 염부들의 터전 너머 광안대교가 바다를 가로지르고 반대편 아파트 군락지의 위상이 하늘을 찌른다.
부산 가장 큰 염전, 분개소금 마을
맛으로 유명, 동래·구포장서 판매
매립 후 아파트, 상가 등 번화가로
부산 소금밭 아는 이 드문 요즘
내가 수필집을 내었을 때, 신안이 고향인 문우가 친정에서 농사지었다던 천일염 한 포대를 선물로 부쳐왔다. 난생처음 소금을 선물로 받았다는 사실이 특별했고, 문우의 늙은 어머니 손길이 닿은 것이라 과분하였으며, 내가 평생 먹어도 남을 양에 깜짝 놀랐다. 간수를 뺀 소금은 달콤 짭조름하여 입에 착착 감겼다. 내 솜씨 없는 나물 맛도 이 소금만 넣으면 딱딱 간이 맞고, 생선을 구울 때도 뱃살에 칼집을 내어 툭툭 왕소금 몇 가닥 뿌리면 탱글하고 고소한 구이가 된다.
그러고 보니 소금 맛을 좀 아는 자들이 음식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김치와 젓갈과 장아찌류 등의 염장 식품은 제외하고라도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핫한 카페에 가 보시라. 소금커피와 소금빵이 대세라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아직도 감히 커피에 소금을 넣어? 라고 한다면 당신은 꼰대 소리를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나 한입 소금커피 맛을 본 사람은 커피와 소금이 찰떡궁합이라는 사실을 재빠르게 수긍하게 될 터이다. 소금빵 역시 빵의 표면에 소금을 발라 버터의 고소한 풍미를 간간짭짤하게 돋우었다. 아마 동남아 여행 중 수박이나 멜론을 소금에 찍어 먹는 것을 경험했다면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일이다.
하지만 음식도 유행을 타듯 영원한 것은 없다. 깨금깨금 염전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소금이 온다”고 외치던 염부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인부 구하기도 어렵게 되고 여름 태풍까지 남녘의 소금밭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후 갯골은 매축이 되면서 넘실대던 바닷물과 반짝이던 소금밭을 밀어내고 말았다. 소금땅 위에 콘크리트가 뒤덮이고 매립 주택이 지어지고 학교와 아파트가 생겼으며 먼지 나던 황톳길 대신 반듯한 신작로가 만들어졌다. 포구 끝 쪽 염전 자리에는 소금꽃 대신 밤마다 상가 불빛이 반짝인다.
지나간 것은 모두 그립다. 민가도 없는 바닷가 갯벌에 소금 굽는 동이만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옛 풍경을 상상해본다. 이스라엘의 사해 소금호수와 미국의 그레이트 솔트레이크와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이 여행지로서 인기가 있고, 우리나라에도 신안 소금밭과 곰소염전 등이 유명하지만, 부산의 분개소금 마을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하기야 어찌 처음부터 염전이었을까. 갯벌이었고 바다였고 섬이었고 또 아득한 옛날에는 무성한 원시림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인간이 만들고 또 인간이 무너뜨려 소멸되는 것을. 그때의 소금밭이 지금의 번화가가 되었듯이 먼 훗날 이곳 포구에 다시 소금 마을이 생겨날지도 모르는 법. 그러니 우뚝한 빌딩 숲을 올려다보다가도 인간이 허물어버린 소금밭도 종종 기억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