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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오늘 하루만
딱 오늘 하루만 살자
아침 해에 실눈으로 잠시
간밤의 꿈을 되새기고
오늘 하루만 살자
어제는 이제 그림자가 되었다
돈을 벌고 번 돈을 다 쓰고
빚을 내서 어제의 빚을 갚고
오늘 하루만 살자
일렁이는 가슴을 숨기지 말고
저물녘에 슬픔이 밀려온대도
오늘 하루만 살자
걸으면서 꿈을 다시 꾸고
씨 뿌리듯 노래를 듣고
보리를 한 줌 넣은 쌀을 안치고
흩어진 일을 조금 더 간추려놓고
오늘 하루만 살자
가난과 기도와 투쟁과 함께
오늘 하루만, 더도 말고
떠나야 할 시간 앞에서
아픈 손가락을 한 번 더 만져주고
햇볕에 빨래를 널고 쓰레기를 버리고
오늘 하루도 애를 태우며
오늘 하루 더 땀을 흘리며
-시집 〈뒤로 걷는 길〉 (2025) 중에서
우린 항상 현재를 살아가는 중이고, 현재에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는 오직 ‘지금 여기’뿐입니다. 세월의 바퀴가 생에 닿는 순간도 한 점이듯, 오늘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우리에게 절박하고도 단단한 시인의 다짐은 새삼 비장해집니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보자는 각오이자 주문.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듯 오늘 하루만 살자는 마음일 때 사소한 일상들은 더 소중해지고 특별해질 것입니다. 오지 않은 미래의 목표 대신 오늘 해놔야 할 일에만 집중하는 것. 내가 이룰 수 있는 실현 가능한 생활을 살아내는 것. 하루만 버텨보자는 짧은 목표가 아니라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긍정적인 태도로 삶에 진정한 힘을 불어넣어보자는 마음을 가져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6-06-02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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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여름은 어떻게 오는가
말갛던 앵두알에 핑 도는 붉은빛과
연두에서 보라나 연분홍빛의 수국 숭어리들과
빨강에서 검정 보라로 익어가는 오디들과
오디를 감춘 뽕잎에 미끄러지는 바람과
시시덕대며 깨금발 치며
굴렁쇠 들고 채집망도 들고
징검다리 건너오는 아이들 같이
더러는 징검돌 하나쯤은 건너뛰어 달려오는
뒤에 강아지도 한 마리 안고 오는 아이도 있고
동생을 업은 언니도 웃으면서
여러 빛깔을 건너 뛰어오는
감나무 이파리를 타고 감꽃 하나씩 던지며
오는 저 초여름 별 좀 봐
두 볼이 바알갛게 상기된 채
숨이 차 말도 못하는
저 발간 오월 볕 좀 봐
시집 〈그림자놀이 하던 날은 가고〉 (2025) 중에서
선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 자연의 정기와 사람의 온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 시절이 성큼성큼 오가는 것만 알았지, 이미 온 것 같기도 하고 아직 오지 않은 것 같기도 한 여름이 어떻게 오고 있는지 시인의 시선을 따라 가봅니다. 바쁘게만 살다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있음을 새삼 반성해봅니다.
여름을 불러오는 저 작고 여린 생명들의 에너지를 하나씩 음미해봅니다. 삶의 구석으로 밀려나 있는 존재들이 계절이라는 궤도를 이끄는 수레였음을 알겠습니다. 우리가 스쳐 지나친 것들에게 보내는 안부 같기도 합니다. 사람과 자연과 뭇 생명이 교감하는 시원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여름. 당신의 여름은 어떻게 오고 있는지요.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시인의 여름을 따라가며 나의 여름은 어떻게 오고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몹시 더울 거라 예상되는 올여름도 잘 살아낼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6-05-26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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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사인용 식탁
어느 날처럼 침묵을 두르고
밥을 먹으며 생각했다
외로움은 일 인분의 식사가 아니라
사인용 식탁의 빈자리들이다
그리움은 인간을 본뜬 석고를
보며 그린 소묘를
또다시 베끼는 일이다
그걸 베끼고 또 베끼다 보면
언젠가는
추상적인 동그라미 몇 개만 남게 될 것이다
식기를 치우면
책상이 되기도 하는
식탁 앞에 앉아
닫힌 창문을 보며 창밖을 그렸다
그릇을 씻고 덜 마른 손에
동그라미가 번져서
무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시집 〈자꾸만 꿈만 꾸자〉 (2025) 중에서
최근 우리나라 1인 가구 수가 8백만이나 되고, 그중 약 70%가 ‘혼밥’을 한다는 조사결과가 있었습니다. ‘혼밥’은 균형 잡힌 식사가 어려워 건강에 좋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혼자서 4명의 테이블을 차지하기도 한다 해서 혼밥하는 사람을 반기지 않는 식당도 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혼자 음식 해 먹기 싫거나 인스턴트에 지친 사람들이 모여 밥을 같이 먹는 ‘소셜 다이닝’이란 모임도 있다 합니다.
우리에겐 편안히 밥을 먹고 싶은 권리가 있습니다. 사람이 그리운 식사에 공감하면서도 ‘혼밥’이 나를 돌보는 식사가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해봅니다. 정성스럽게 식탁에 올린 밥을 수고한 자신에게 선물하는 시간, 혼자여서 더 소중한 시간으로 만들어보는 것. 가끔은 고립감을 느끼겠지만 내면에 집중하는 홀로서기의 시간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6-05-1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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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엄마가 있다
여자는 방금 장례식장에서 어린 딸을 고이 보냈다 묵주만 자꾸 굴리면서 입성이고 뭐고 추레해져서 여자는 누군가를 간신히 부른다 딸의 이름은 아니지만, 귀 기울이며 여자는 엄마 엄마를 되풀이한다 바짝 말라버린 하천을 맨발로 뛰어가면서 미간을 찡그리고 엄마를 부른다 딸아이가 자신을 부르는 것처럼 엄마 엄마, 입찬소리를 되풀이한다 엄마 속에 여자의 딸과 여자의 엄마와 딸의 엄마가 번갈아 나타난다 붙잡거나 저미거나 어루만지며 사무치던 엄마가 오롯이 이름을 부르고 있다
-시집 <습이거나 스페인> (2025) 중에서
슬픔은 어디까지 가서 엄마를 불러오는 걸까요. 딸을 떠나보낸 엄마가 부르는 엄마. 딸의 이름이 아닌 엄마를 부르는 딸. 누군가 간절히 필요할 때 터져 나오는 이름. 엄마의 딸이었고 딸이 있는 엄마가 되어보니 슬픔을 붙잡고 있는 저 울부짖음이 무언지 알 것만 같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비유될 수 없는 상실 앞에서 어린 딸이 되어버린 엄마. 엄마 속에 여자의 딸과 여자의 엄마와 딸의 엄마가 번갈아 나타난다는 문장이 마음을 사무치게 합니다. 엄마가 되어서도 딸인 엄마. 말라버린 하천을 맨발로 뛰어가는 또 하나의 모정이 시리도록 아픕니다. 딸이 불러주었고 그래서 엄마였던 엄마가 자신을 대신 불러보는 것.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 합니다.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불렀던 엄마, 셀 수 없이 불렀던 엄마를 처음인 듯 불러봅니다.
2026-05-12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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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어린이날에
일본에서 크는 어린 손녀를 생각하며
일력(日曆)에다
이렇게 써넣었습니다
-시연이가 행복한 날이길
느낌표를 찍으려다 말고 손녀 이름 곁에
끼움 표시를 하고
몇 자 더 적었습니다
-시연이와 그의 친구들
모두!
내 손녀가 행복하려면
내 손녀와 함께 살아갈
지구 위의
어린이가
전부 다
행복해야 한다는 것을 하마터면
잊을 뻔했습니다.
시집 〈스물다섯살을 반성함〉 (2025) 중에서
‘4세 고시’란 말이 있습니다. 만 4세 전후의 아이들이 영어유치원에 가기 위해 치른다는 시험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를 통해 무조건적인 사랑과 일상의 행복을 경험하지만 이 시대의 아이들은 과연 행복할까요. 어떤 사랑은 때로 폭력이기도 합니다. 돌봄과 보호가 필요한 우리의 미래. 어린이의 첫 번째 행복은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라 합니다.
사랑받을 때 가장 크게 성장한다는 아이들. 시인의 마음처럼 모든 아이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일 때 내 아이도 건강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아이가 행복해서 부모도 행복하고, 부모가 행복해서 아이도 행복한 세상을 바라봅니다. 사랑받아야 할 권리가 있는 아이들. 지구 위의 모든 어린이가 다 행복하기를 바라는 시인의 마음에 제 마음도 보태어봅니다. 아이의 손을 잡고 산책하는 모습이 거리에 더 많아졌음 좋겠습니다. 신정민 시인
2026-05-05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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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수선
봄밤에 옷을 맡기러 간다
아침에 보지 못한 소파가 길가에 있다
이름을 쓰고 지웠다
옷을 맡기러 봄밤에 간다
셔츠 세 벌
소매 단추를 풀고,
바람에 흔들리는 셔츠를 한 손에 들고,
주황색 소파를 지나,
거미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애인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꽃이 다 내린 봄밤에
세탁소 불빛이 눈먼 목련처럼
내 얼굴을 덮는다
시집 〈우리의 파안〉 (2025) 중에서
봄밤에 수선해야 할 옷을 맡기러 집을 나서는 이유가 어쩌면 애인이 어디쯤 가고 있는지 그 애인을 생각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희미한 세탁소 불빛이 눈먼 목련으로 보이는 고요. 그 어두운 길의 고요가 인간 내면의 균열과 서정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절망과 희망의 경계가 재배치되는 세계. 문득 애인이라는 것도 실은 사랑하는 사람에겐 또 하나의 옷이 아닐런지요.
짧은 봄을 놓치듯 수선해야 할 옷을 미루다 보면 입지 못하는 봄옷들처럼 사람의 마음을 정리해보는 일도 필요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불빛이 희미할지라도 우린 그 불빛을 향해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 세계 안에서 살아나가고자 하는 의지로 다가옵니다. 거리의 소파처럼 내 것이라고 썼으나 버려야 했던 이름들. 어느새 떠나고 있는 봄의 뒷모습을 보여줍니다. 신정민 시인
2026-04-28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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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곡우
계절이라는 말이 인연의 뒷모습을 닮아갑니다 당신과 차나무 밭을 처음 보았던 날 가지 뒤에 숨어 피는 꽃들도, 피고 지는 풀빛 무수한 시간들이 동그랗고 단단하게 묻히는 모습도 보았지만 나는 그런 것에 대해 들려줄 줄도 몰랐습니다 추억하기 위해서도, 뜨거운 마음들 돌아 돌아 더 짙어지기 위해서도, 시든 이파리 위를 더 힘줘 걸어야 할 봄도 있었기에 나는 오래 미뤄야 할 안부에 대해 궁리했습니다 아무리 부쳐도 읽히지 않을 편지처럼 그냥 계속 말하고픈 때가 내게도 오게 마련이었나 봅니다 당신이 좋아하던 계절을 먼저 떠올리듯 풍향을 바꾸는 한낮, 살아 한 번 더 보고 싶단 말조차 전할 수 없어 다행이던 뒷모습이 흰 봉오리처럼 아른거립니다
-시집 〈산 위의 미술관〉 (2025) 중에서
곡우는 24절기 중 봄철에 있는 6번째 절기입니다. 매년 4월 20일을 기준으로 봄비가 내려 모든 곡식을 기름지게 한다는 때입니다.
곡우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는 말이 있어 농가에서는 비를 기다리기도 하는 때입니다.
새싹과 새순이 돋아나고, 곡물 재배가 성한 시기인 봄철을 맞아 농사 시기를 본격적으로 알리는 절기.
모판에 볍씨를 담그고, 못자리를 깔고, 그 어느 때보다 품질 좋은 찻잎을 따는 때. 살찐 숭어떼들이 산란기를 맞는 무렵. 그리고 나무에 물이 가장 많이 오른다는 곡우.
살아 한 번 더 보고 싶단 말조차 전할 수 없는 안부가 왜 다행인지 자꾸만 되물어보지만 비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시든 이파리 위를 걸어야 할 봄도 있다는 말에 괜히 홀로 마음을 적시게 됩니다.
신정민 시인
2026-04-21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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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내가 아는 폭력
내가 아는 폭력과 네가 아는 폭력이 이렇게 다를 줄 몰랐어.
뜨거운 모래를 밟고 선 두 발, 나체에 숄만 두른 소녀가 걸어서는 갈 수 없는 예루살렘을 생각하네.
소녀는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단언하는 내가 폭력적이라고 너는 말했어. 말문이 막혔지만 화를 내거나 울진 않았어. 그럴 일은 아닌 것 같아서.
행복하고 싶어. 너랑 오래 함께 행복하고 싶어. 나는 네게 무엇도 휘두르지 않고 너는 나에게 어떤 멸칭도 붙이지 않은 채. 폭력과 가장 먼 곳에서 웃고 싶어.
그런 웃고 싶은 욕망이 매일 저지르는 가장 큰 폭력.
나체에 숄만 두른 소녀는 마른 몸을 가졌을 것이며 슬픈 표정으로 먼 곳을 응시할 뿐이라고
너와 내가 생각해버리곤 하지
시집 〈오해와 오후의 해〉 (2025) 중에서
4월, 하면 제주 4·3사건과 4·19혁명이 먼저 떠오릅니다. 독재 정치 획책에 저항한 시민들의 역사. 생명이 소생하는 봄의 활기 속에서 회복 불가능한 고통의 현실은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하루종일 공습 대피 사이렌이 울리고 있는 중동뿐 아니라 온갖 폭력으로 치닫는 세계 정세를 보면서 이 비극적인 현실은 암담하기만 합니다. ‘평화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예루살렘. 그저 행복하고 싶을 뿐인 우리가 나도 몰래 저지르는 폭력이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6-04-14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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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꽃잎 이소회(1974~)
푸른 트럭 지나간다
분홍, 분홍, 연분홍, 돼지들 싣고
진흙 한 점 없는 보오얀 등에, 붉은 도장
코를 모아 서로 향기 맡는다
유명(幽明)의 경계에 부신 향 진동한다
온몸이 통으로 꽃인, 온 생이 통으로 꽃인
꽃들 지러 간다
아니고 아니고 아니다 아니다
꽃은 염불이 되고
벚꽃 지는 날
아스팔트 하얗게 뒤덮는 꽃잎들 모두 어디로 가니
-시집 〈오오〉 (2024) 중에서
짧기만 한 시절이 푸른 트럭에 실려 지나갑니다. 분홍 살빛을 가진 벌거숭이 돼지들,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코를 모아 서로의 향기를 맡습니다.
아직 살아있다는 것. 피었다 싶은데 벌써 지고 있는 봄날의 꽃잎들. 공존하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흩어지고 있는 벚꽃들. 닥쳐올 위험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디론가 실려 가는 돼지들에게서 삶과 죽음을 생각해봅니다.
시인의 말처럼 생은 꽃일까요. 피었다 지는 목숨들 모두 꽃이라면, 바람 부는 날 휘날리는 봄처럼 생은 무상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은 소중한 것, 아니고 아니고 아니다 아니다 되뇌일수록 서러워집니다. “아름다웠던 세상 소풍 끝내고 돌아가는 날, 가서 아름다웠노라” 노래했던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란 싯귀가 맴돕니다.
신정민 시인
2026-04-07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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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세계문학을 버리다
세계문학을 버렸다
수심에 잠긴 세에라자드도 덮고
햄릿이나 그레고르 잠자 같은 군상들은 노끈으로 묶어
폐지 장수에게 줘 보냈다
세계문학이라는 것도 별거 아니다
한때 그들이 사랑하고 미워하던 세상이 있었고
그들 따라 웃고 울던 무리들이 있었다
수십 년 동안 하드커버로 나를 장식해주었던
문학을 내다 버렸다
교산은 어린 길동을 달래 사천 외가로 보내고
불쌍한 아Q도 울며 집을 나간지 오래
그들은 세상에 버림받았고 혁명도 끝이 났으며
인간도 이전의 인간은 아니다
세계를 버렸다
이사업자들에게는 최악의 상대이며
비용 견적만 높이는 세계문학을 버렸다
나는 이미 세계인이 된지 오래되었고
많은 미래가 과거가 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아파트에는 세계가 들어갈 데가 없다
폐지 장수 리어카에 실려가는
조르바나 돈키호테 같은 이들이 나를 향하여
손가락질하며 분개했지만
세계는 변했고 나도 이전의 내가 아니므로
미련없이 그들을 버렸다
시집 〈나는 용서도 없이 살았다〉 (2025) 중에서
지금 세계는 자국의 이익을 위한 패권과 갈등으로 전쟁의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시대를 관통하는 진리와 가치가 담겨있는 고전이 더 이상 이 세계에 도움이 될 수 없는 걸까 생각해봅니다. 혁명 없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세계문학이 이사비용 견적만 높이는 천덕꾸러기가 되었다는 시인의 말과 나를 장식해주었던 문학이란 말을 곱씹게 됩니다. 급변하고 있는 세계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고전은 여전히 인간에 대한 이해를 돕는 훌륭한 지침서임을 확인해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6-03-31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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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생수
잘못 배달된 생수 몇 통이
며칠째 집 앞에 놓여 있다
엘리베이터에 안내문을 붙여놓아도
찾아가지 않는다
집을 잘못 찾은 꼬맹이들 같고
정신이 흐린 뉘 집 할머니 같다
쭈뼛쭈뼛 서 있고
쾅, 쾅 문을 두드리고
아무 대답도 없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 같다
아빠, 하고 부르는 것 같고
아범아, 하고 부른 것 같다
내 것이 아닌데 내 것 같은
잠시 잠깐 맡겨둔 것 같은
들일 수도
쫓을 수도 없는
저 투명하고 맑은 생면부지를
무어라 부를까
시집 〈숲속의 대성당〉(2025) 중에서
매년 3월 22일은 세계 물의 날입니다. 우리나라의 수돗물 정수 관리 수준이 세계 10위 안에 들 정도로 뛰어나다는데 수돗물에 비해 300배 이상 비싼데도 생수를 배달시켜 먹는 집들이 많습니다.
편하다는 이유로 깨끗한 이미지를 입힌 생수를 사서 먹는 우리의 현실에서 실은 생수 업계가 사용하는 프라스틱의 양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볼 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선 1976년에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위해 최초로 생수를 판매하기 시작했다는데 지금은 생수 시장 규모가 2025년 기준으로 3조원을 넘는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이 물이, 잘못 배달된 생수통들이 집 잘못 찾은 애 같고, 뉘 집 할머니 같다 하니 이 난감한 지경이 내게 벌어진 일만 같습니다.
신정민 시인
2026-03-24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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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두릅 순은 몇 번 꺾나
두 번만 꺾는 거다
더 꺾으면 힘이 다해 나무가 죽고 만다
한번 순 내기도 어려운 일인데
나오는 대로 뚝뚝 꺾어버리면
나무도 버티질 못한다
아무리 말이 없는 나무라지만
속에선 이렇게 피가 도는 법이다
사람도 좋다고 자꾸 잎사귀 내미는 대로
꺾어버리면 끝내 못 견디고 네게서 죽는 거란다
목마른 뿌리에 물도 주고 거름도 얹어라
그래 그 그늘 무성해졌을 때
그 아래 쉬었다 가는 거란다
-시집 〈그림자놀이 하던 날은 가고〉 (2026) 중에서
두릅은 봄철에 입맛을 돋워주는 산나물 중 하나입니다. 피로 해소나 노화 방지, 감기 예방을 위한 면역세포를 활성화시키는 영양소가 풍부하다 합니다.
이 시는 이제 막 가지에 오른 어린 순을 몸에 좋다고 나오는대로 꺾는다면 나무가 버티질 못한단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릅에서 시작된 시는 사람에 대한 태도로 확장됩니다. 새순 같은 희망이나 이제 막 꿈틀거리는 꿈들을 꺾어버리는 실수가 사람들 사이에서도 왕왕 있다는 것을 각성하게 합니다.
가꾼다는 것, 보살핀다는 것은 살린다는 것입니다. 피가 돌고 있는 나무, 언젠가 생명에 대한 이런 작은 태도들이 무성한 잎으로 자라났을 때 우린 그 그늘 아래서 쉬었다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당장 눈앞의 것에 욕심내지 않고 조금 멀리 내다보는 안목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6-03-17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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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무한 루프
월요일엔
나보다 스무 살쯤 어린 스님에게
살면서 놀라지 말라는 말을 들었고
화요일엔 백일홍을 심었다
수요일엔 내가 말린 견과류 같다는 생각을 했고
목요일엔 비밀을 누설했다
금요일엔 칠 층 병실에서 창문처럼 흔들렸고
토요일엔 딴 생각을 하다 봄이 왔다
일요일엔 정물화처럼 앉아 밤을 샜다
그러므로 오늘은 다시 월요일
이 그저 그런 날들이 다 어디서 온 건지
나는 푸른빛으로 이 무한 루프 속을 행진한다
-시집 〈작약과 공터〉 (2025) 중에서
우리의 생활이 일련의 궤도를 무한히 반복하고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팍팍할까요. 반복되는 나의 일상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고민해봅니다.
그러나 어느 하루도 똑같은 날은 없는 것. 요일이 반복될 뿐 우리의 일상은 크든 작든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지루하고 시시한 반복들 틈 사이로 자신만의 시간을 새롭게 만들기도 합니다. 인생을 바꾸는 건 매일 반복되는 아주 작은 일들이니까요. 그래도 가끔 이 힘겨운 무한 루프에서 벗어나길 바란다면 일상에 작은 변화를 주어 반복의 연결 고리를 끊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매일 같은 날들 같지만 우리의 오늘은 어제와 다릅니다. 자신의 일상에 목적과 의미를 둔다면, 현재에 집중하면서 긍정적인 행동을 반복한다면 보다 더 가치 있는 인생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6-03-10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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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명분
자작나무에 미동 없이 앉은 직박구리 발가락이 얼어붙기 직전 꿈에서 깼다
아무것도 실행하지 않았는데 3월이었다
뜻이 돌돌 말린 포스트잇을 떼고 새것을 붙이자 벽이, 뜻깊어졌다
마침내, 할 일이 생각난 사람처럼 방을 나왔다
골목이 길어 각오가 오래, 뿌듯했다
잔설 위 햇빛 몇 가닥이 민들레를 건져올리고 있었다
살아 있었네!
좋은 말로 때리는 지인과 마주쳤다
사는 거…… 좋아하는구나, 나도
나에게 면이 섰다
-시집 〈우주를 따돌릴 것처럼 혼잣말〉 (2025) 중에서
벌써 3월입니다. 한 해를 시작하며 세웠던 계획들, 물오른 가지에 움트는 새순들처럼 언 땅을 녹이며 오르는 새싹들처럼 움직이고 있겠지요. 봄은 사계절 중에 유독 ‘새’라는 관형사가 붙습니다. 새봄! 이는 긴 겨울을 견디고 다시 태어나는 생명들을 위한 것입니다.
수많은 학교의 입학식처럼 새로운 시작이 가득한 3월은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명분이 되어줄 충분한 시절입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두고 반복되고 있는 묵은 마음일지라도 새롭게 단장해봅니다.
할 일이 생각난 사람처럼 세상 밖으로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것 아닐런지요. 봄이 매번 새롭게 오듯 내 생활의 모든 순간들도 매번 새롭다는 것. 무엇보다 시간과 대화하면서 나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이 봄의 기적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6-03-03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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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가방
나는 이 가방을 오래 메고 다녔어
가방 속엔
바닷가와 흰 목덜미의 파도
재수록한 시
그날의 마지막 석양빛
이별의 낙수落水 소리
백합과 접힌 나비
건강한 해바라기
맞은편에 마른 잎
어제의 귀띔
나를 부축하던 약속
희락의 첫 눈송이
물풍선 같은 슬픔
오늘은 당신이 메고 가는군
해변을 걸어가는군
가방 속에
파도치는 나를 넣고서
-시집 〈풀의 탄생〉 (2025) 중에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그 사람의 가방에 담긴 것을 보면 된다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시인의 가방 속을 들여다보면서 사람이야말로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가방이란 생각이 듭니다.
삶에 필요한 것들, 나를 살게 하는 것들이 담겨있는 가방. 그 가방을 오늘도 누군가 메고 갑니다. 파도치는 시인까지 담아서 가는 뒷모습을 바라봅니다. 지금 내 가방 속엔 무엇이 들어있는지 살펴봅니다.
아버지가 남겨놓은 나침반, 걸어왔던 길들의 이정표들, 어릴 적 친구들의 웃음소리와 멀리 떠나고 있던 성당의 종소리, 높고 높은 산들이 한때 깊은 바다였다던 메모와 내 머리 위를 맴돌고 있는 구름들. 나는 오랫동안 내가 메고 다닌 가방이었습니다. 오늘의 나까지 담아 걸어가고 있는 나, 나를 살게 해준 것들을 가만히 불러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6-02-24 [1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