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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세계문학을 버리다
세계문학을 버렸다
수심에 잠긴 세에라자드도 덮고
햄릿이나 그레고르 잠자 같은 군상들은 노끈으로 묶어
폐지 장수에게 줘 보냈다
세계문학이라는 것도 별거 아니다
한때 그들이 사랑하고 미워하던 세상이 있었고
그들 따라 웃고 울던 무리들이 있었다
수십 년 동안 하드커버로 나를 장식해주었던
문학을 내다 버렸다
교산은 어린 길동을 달래 사천 외가로 보내고
불쌍한 아Q도 울며 집을 나간지 오래
그들은 세상에 버림받았고 혁명도 끝이 났으며
인간도 이전의 인간은 아니다
세계를 버렸다
이사업자들에게는 최악의 상대이며
비용 견적만 높이는 세계문학을 버렸다
나는 이미 세계인이 된지 오래되었고
많은 미래가 과거가 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아파트에는 세계가 들어갈 데가 없다
폐지 장수 리어카에 실려가는
조르바나 돈키호테 같은 이들이 나를 향하여
손가락질하며 분개했지만
세계는 변했고 나도 이전의 내가 아니므로
미련없이 그들을 버렸다
시집 〈나는 용서도 없이 살았다〉 (2025) 중에서
지금 세계는 자국의 이익을 위한 패권과 갈등으로 전쟁의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시대를 관통하는 진리와 가치가 담겨있는 고전이 더 이상 이 세계에 도움이 될 수 없는 걸까 생각해봅니다. 혁명 없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세계문학이 이사비용 견적만 높이는 천덕꾸러기가 되었다는 시인의 말과 나를 장식해주었던 문학이란 말을 곱씹게 됩니다. 급변하고 있는 세계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고전은 여전히 인간에 대한 이해를 돕는 훌륭한 지침서임을 확인해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6-03-31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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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생수
잘못 배달된 생수 몇 통이
며칠째 집 앞에 놓여 있다
엘리베이터에 안내문을 붙여놓아도
찾아가지 않는다
집을 잘못 찾은 꼬맹이들 같고
정신이 흐린 뉘 집 할머니 같다
쭈뼛쭈뼛 서 있고
쾅, 쾅 문을 두드리고
아무 대답도 없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 같다
아빠, 하고 부르는 것 같고
아범아, 하고 부른 것 같다
내 것이 아닌데 내 것 같은
잠시 잠깐 맡겨둔 것 같은
들일 수도
쫓을 수도 없는
저 투명하고 맑은 생면부지를
무어라 부를까
시집 〈숲속의 대성당〉(2025) 중에서
매년 3월 22일은 세계 물의 날입니다. 우리나라의 수돗물 정수 관리 수준이 세계 10위 안에 들 정도로 뛰어나다는데 수돗물에 비해 300배 이상 비싼데도 생수를 배달시켜 먹는 집들이 많습니다.
편하다는 이유로 깨끗한 이미지를 입힌 생수를 사서 먹는 우리의 현실에서 실은 생수 업계가 사용하는 프라스틱의 양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볼 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선 1976년에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위해 최초로 생수를 판매하기 시작했다는데 지금은 생수 시장 규모가 2025년 기준으로 3조원을 넘는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이 물이, 잘못 배달된 생수통들이 집 잘못 찾은 애 같고, 뉘 집 할머니 같다 하니 이 난감한 지경이 내게 벌어진 일만 같습니다.
신정민 시인
2026-03-24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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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두릅 순은 몇 번 꺾나
두 번만 꺾는 거다
더 꺾으면 힘이 다해 나무가 죽고 만다
한번 순 내기도 어려운 일인데
나오는 대로 뚝뚝 꺾어버리면
나무도 버티질 못한다
아무리 말이 없는 나무라지만
속에선 이렇게 피가 도는 법이다
사람도 좋다고 자꾸 잎사귀 내미는 대로
꺾어버리면 끝내 못 견디고 네게서 죽는 거란다
목마른 뿌리에 물도 주고 거름도 얹어라
그래 그 그늘 무성해졌을 때
그 아래 쉬었다 가는 거란다
-시집 〈그림자놀이 하던 날은 가고〉 (2026) 중에서
두릅은 봄철에 입맛을 돋워주는 산나물 중 하나입니다. 피로 해소나 노화 방지, 감기 예방을 위한 면역세포를 활성화시키는 영양소가 풍부하다 합니다.
이 시는 이제 막 가지에 오른 어린 순을 몸에 좋다고 나오는대로 꺾는다면 나무가 버티질 못한단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릅에서 시작된 시는 사람에 대한 태도로 확장됩니다. 새순 같은 희망이나 이제 막 꿈틀거리는 꿈들을 꺾어버리는 실수가 사람들 사이에서도 왕왕 있다는 것을 각성하게 합니다.
가꾼다는 것, 보살핀다는 것은 살린다는 것입니다. 피가 돌고 있는 나무, 언젠가 생명에 대한 이런 작은 태도들이 무성한 잎으로 자라났을 때 우린 그 그늘 아래서 쉬었다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당장 눈앞의 것에 욕심내지 않고 조금 멀리 내다보는 안목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6-03-17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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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무한 루프
월요일엔
나보다 스무 살쯤 어린 스님에게
살면서 놀라지 말라는 말을 들었고
화요일엔 백일홍을 심었다
수요일엔 내가 말린 견과류 같다는 생각을 했고
목요일엔 비밀을 누설했다
금요일엔 칠 층 병실에서 창문처럼 흔들렸고
토요일엔 딴 생각을 하다 봄이 왔다
일요일엔 정물화처럼 앉아 밤을 샜다
그러므로 오늘은 다시 월요일
이 그저 그런 날들이 다 어디서 온 건지
나는 푸른빛으로 이 무한 루프 속을 행진한다
-시집 〈작약과 공터〉 (2025) 중에서
우리의 생활이 일련의 궤도를 무한히 반복하고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팍팍할까요. 반복되는 나의 일상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고민해봅니다.
그러나 어느 하루도 똑같은 날은 없는 것. 요일이 반복될 뿐 우리의 일상은 크든 작든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지루하고 시시한 반복들 틈 사이로 자신만의 시간을 새롭게 만들기도 합니다. 인생을 바꾸는 건 매일 반복되는 아주 작은 일들이니까요. 그래도 가끔 이 힘겨운 무한 루프에서 벗어나길 바란다면 일상에 작은 변화를 주어 반복의 연결 고리를 끊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매일 같은 날들 같지만 우리의 오늘은 어제와 다릅니다. 자신의 일상에 목적과 의미를 둔다면, 현재에 집중하면서 긍정적인 행동을 반복한다면 보다 더 가치 있는 인생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6-03-10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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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명분
자작나무에 미동 없이 앉은 직박구리 발가락이 얼어붙기 직전 꿈에서 깼다
아무것도 실행하지 않았는데 3월이었다
뜻이 돌돌 말린 포스트잇을 떼고 새것을 붙이자 벽이, 뜻깊어졌다
마침내, 할 일이 생각난 사람처럼 방을 나왔다
골목이 길어 각오가 오래, 뿌듯했다
잔설 위 햇빛 몇 가닥이 민들레를 건져올리고 있었다
살아 있었네!
좋은 말로 때리는 지인과 마주쳤다
사는 거…… 좋아하는구나, 나도
나에게 면이 섰다
-시집 〈우주를 따돌릴 것처럼 혼잣말〉 (2025) 중에서
벌써 3월입니다. 한 해를 시작하며 세웠던 계획들, 물오른 가지에 움트는 새순들처럼 언 땅을 녹이며 오르는 새싹들처럼 움직이고 있겠지요. 봄은 사계절 중에 유독 ‘새’라는 관형사가 붙습니다. 새봄! 이는 긴 겨울을 견디고 다시 태어나는 생명들을 위한 것입니다.
수많은 학교의 입학식처럼 새로운 시작이 가득한 3월은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명분이 되어줄 충분한 시절입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두고 반복되고 있는 묵은 마음일지라도 새롭게 단장해봅니다.
할 일이 생각난 사람처럼 세상 밖으로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것 아닐런지요. 봄이 매번 새롭게 오듯 내 생활의 모든 순간들도 매번 새롭다는 것. 무엇보다 시간과 대화하면서 나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이 봄의 기적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6-03-03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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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가방
나는 이 가방을 오래 메고 다녔어
가방 속엔
바닷가와 흰 목덜미의 파도
재수록한 시
그날의 마지막 석양빛
이별의 낙수落水 소리
백합과 접힌 나비
건강한 해바라기
맞은편에 마른 잎
어제의 귀띔
나를 부축하던 약속
희락의 첫 눈송이
물풍선 같은 슬픔
오늘은 당신이 메고 가는군
해변을 걸어가는군
가방 속에
파도치는 나를 넣고서
-시집 〈풀의 탄생〉 (2025) 중에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그 사람의 가방에 담긴 것을 보면 된다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시인의 가방 속을 들여다보면서 사람이야말로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가방이란 생각이 듭니다.
삶에 필요한 것들, 나를 살게 하는 것들이 담겨있는 가방. 그 가방을 오늘도 누군가 메고 갑니다. 파도치는 시인까지 담아서 가는 뒷모습을 바라봅니다. 지금 내 가방 속엔 무엇이 들어있는지 살펴봅니다.
아버지가 남겨놓은 나침반, 걸어왔던 길들의 이정표들, 어릴 적 친구들의 웃음소리와 멀리 떠나고 있던 성당의 종소리, 높고 높은 산들이 한때 깊은 바다였다던 메모와 내 머리 위를 맴돌고 있는 구름들. 나는 오랫동안 내가 메고 다닌 가방이었습니다. 오늘의 나까지 담아 걸어가고 있는 나, 나를 살게 해준 것들을 가만히 불러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6-02-24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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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물의 종착지
물에게는 낮은 쪽이 앞이다. 물의 감각은 오직 높낮이다.
물은 혼자서 또 집단으로 묻힐 곳을 찾는다. 물은 서로를
불러모아 충만한 부피이면서 때로 바닥을 들어내면서, 조금
더 낮은 수위를 찾아 먼 쪽으로 우회하면서 굽이를 만들기도
한다
강은 곡선을 사랑한다. 물이 사라지는 곳은 기존의 물이
새로 들어오는 물을 몸으로 끌어안는 바다 깊이다.
바다 깊이에서 하늘 구름으로 머물다 다시 땅을 찾는 큰
동그라미를 물은 그린다. 사람이 보는 것은 언제나 물 행보
의 한 단면이다. 물은 태양처럼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물은
언제나 운동 중이다. 시간처럼 정지할 줄 모른다
시집 〈별빛 탄생〉 (2025) 중에서
노자의 도덕경에 보면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 온갖 것을 섬길 뿐 그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해 흐를 뿐이라 했지요. 만물을 이롭게 하는 물. 그래서 물은 도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도 물은 그 공로를 인정받자거나 그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습니다. 만물을 이롭게 하고 있다는 것마저 의식하지 않습니다. 이 시를 읽는 동안에도 물은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며 순환하고 있겠지요. 곡선을 사랑하며 움직이는 물. 구름이 되기 위해 움직이는 바다. 물이 물을 온몸으로 끌어안는 바다가 가까이에 있어 좋습니다. 물의 종착지는 어디일까요. 사람의 눈물은 어디쯤일까요. 물처럼, 물처럼 되라는 말씀을 되뇌이게 됩니다. 신정민 시인
2026-02-10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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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핑계
어떤 사람이
눈이나 꽃처럼
거저 오는 걸 좋아하면 가난하다는 것이고
가난하면 세상에 미안한 일이 적다
어떤 이는
사람이 살려고
너무 애쓰는 일을 재앙이라고도 했는데
가난하면 사랑하는 자식들이 다툴 일이 없고
세상 떠날 때도 소풍 가듯 가벼워서 좋다
가난은 언제 어디서나 혼자가 아니다
그래서 힘이 세고
가난은 비싸다
사랑과 가난은 감출 수도 없지만
사람들이 대부분 가난하게 사는 데는
다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시집 〈나는 용서도 없이 살았다〉 (2025) 중에서
가난은 ‘간난’(艱難)이라는 한자에서 온 말인데, ‘난’이라는 글자는 진흙밭에 새가 빠져 있는 모습, 즉 힘들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옛말에 가난은 돈 주고 살 수 없단 말이 있고, 가난이 가장 훌륭한 유산이란 말도 있습니다. 모두들 힘든 요즘에 위로가 되는 말일지 모르겠습니다. 잘 살고 싶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을 자처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잘 사는 것이 세상에 미안한 일이란 시인의 문장을 되뇌이게 됩니다. 가진 게 없어 잃을 게 없는 가난. 생각해보면 우린 절대적 빈곤보다 상대적 빈곤을 살고 있습니다. 이미 잘살고 있는데도 뭔가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느낌은 스스로를 가난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합니다. 물질적인 것 이외에도 건강한 정신 같은 값진 가치들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길, 잘할 수 있는 길을 걸으면 행복해지고 결코 가난하지 않다는 것 생각해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6-02-03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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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탄피
하늘에 박힌 총알 하나
별 사이를 뚫고 떨어진 약속의 파편
가끔 흔들려
빈 땅에 도착해 철컥거리다
금속 비명을 낸다
누가 걸쇠를 걸었을까
동그랗고 노란 총알
차가운 숨결 속
장전되는 총구
명중이어야 해
숨을 멈추고 기다리는 순간
방아쇠를 당긴다
탕!
떨어지는 탄피
몇억 광년의 빛
나를 뚫고
빛을 삼킨 어둠 속
너는 빛을 꿰뚫는다
시집 〈지구에 붙은 컵은 책상 위에서 떨어지지 않아〉(2025) 중에서
겨울은 사계절 중에서도 별을 보기 가장 좋은 계절입니다. 은하수 서쪽으로 기우는 별들이 유난히 또렷한 건 차가워진 대기 때문입니다. 오리온자리. 큰개자리. 황소자리. 쌍둥이자리. 안드로메다와 오리온도 맨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왜 빛나는 별 하나를 하늘에 박혀 있는 총알로 보았을까요. 별빛은 왜 떨어지고 있는 탄피로 보았을까요. 한때 백령도에서 군인들의 심리상담을 했던 시인의 독특한 이력이 이 시의 출발지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봅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것들 중에는 우주쓰레기도 많다는데, 이 시를 읽는 동안 겨누었지만 빗나가던 일상들, 얼어붙은 삶의 추위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들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쇠붙이보다 차가운 겨울 올려다보며 내가 쏘아올린 별은 어디서 빛나고 있는지, 무엇을 향해 살고 있는지도 함께 생각해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6-01-27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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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꽃길만 걸어요
꽃길만 걸으라는
편지를 받았어요
비단길만 걸어요
꽃 글씨를 받았어요
어찌 나 혼자
꽃잎 살결과 비단 날개에
발자국을 찍을 수 있겠어요
당신이 올 때까지
꽃길과 비단길은 피하며 걷겠다고
길바닥에 박힌 돌부리를 캐내고 있겠다고
편지를 써요
비단을 수놓던 바늘쌈으로
누군가의 발바닥에 박힌
가시를 파내는 사람이 되겠다고
답장을 썼다가 지워요
그러다가 결국
당신 편지를 베껴 써요
당신도 꽃길만 걸어요
당신도 비단길만 걸어요
시집 〈그럴 때가 있다〉 (2022) 중에서
덕담은 단순한 격려의 말을 넘어 심리적 안정을 주고 공동체 의식을 갖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살면서 꽃길만 비단길만 걸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힘든 길 말고 좋은 길 함께 걷자, 마음을 주고받습니다. 그러나 피하고 싶은 삶의 고통 혹은 불행이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긍정적인 계기가 되어주기도 한다는 것.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잃지 않는 태도로 살다 보면, 힘겨움도 삶의 일부임을 받아들일 줄 아는 힘이 생긴다는 것. 그래서 우린 서로에게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는 응원과 축복을 전합니다. 상생의 연대를 이룰 수 있는 이타(利他), 좋은 말은 좋은 일을 이끈다는 걸 생각하게 됩니다. 신정민 시인
2026-01-20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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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친구
시골의 초등학교 2학년 때 지각을 할 것 같아
열심히 달리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팔과 무릎이 까져 아파서 울려고 하는데
뒤따라 달려오던 아이도 내 옆에 넘어졌다
그러자 울음 대신 웃음이 절로 터져나왔다
우리는 서로 손잡고 벌떡 일어나 함께 달렸다
40년 뒤 내가 친구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때 고마웠어”
“뭐가?”
“어릴 때 니가 내 옆에 일부러 넘어져준 거”
“짜식, 뭐 그런 걸 아직도 하하하......”
-시집 〈악의 평범성〉(2025) 중에서
친구는 옛 친구가 좋다는 속담이 있지요. 단순히 가깝고 오래된 사이를 넘어 서로 존중하고, 믿음이 있는 사람. 어려울 때 곁에 있고, 몸이든 마음이든 아플 때 언제나 내 편인 사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인정해주는 사람. 힘들 때 의지할 수 있고 슬픔도 나눌 수 있는 사람.
나의 잘못을 내 편에 서서 고민해주는 사람.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자발적이고 평등한 사람. 가장 편하게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람.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사람.
그렇게 내 삶에 활력과 행복을 더해주는 사람. 이처럼 진정한 친구가 한 사람만 있어도 잘 살아온 것이라 합니다.
내 친구는 누구인지, 난 누구의 친구인지 생각해봅니다. 누군가 다가오길 기다리기보다 먼저 마음을 열고 그 사람의 친구가 되어보는 건 어떨런지요. 신정민 시인
2026-01-13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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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새해는 그대 차지
천지는 또 한 번 새로워졌어라
가슴마다 약속도 새로 새로워져라
기적은 땀과 함께
행운도 땀과 함께
믿으며 믿으며 기쁜 땀 흘려지고
땀방울 모여 강물이 되면
강물처럼 우리도 커지고 깊어지고
땀방울 마침내 바다 이루면
바다처럼 우리도 넓어지고 푸르러지리니
가슴아,
땀을 믿는 뜨거운 가슴아
사랑과 건강과 행운을 약속하는
금년 새해에도
기적은 그대 차지
-시집 〈둥근 세모꼴〉 (2011) 중에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기적이자 축복입니다. 가능성이 희박해서 기대조차 하기 힘든 소원이지만 우리가 흘리는 땀방울들이 모여 강이 되고 바다가 되는 그 기적을 이룰 수 있노라, 희망을 가져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중에는 기적이 없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것과 모든 것이 기적이라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있다 합니다. 자신과의 약속, 뜻하는 일들이 이뤄지길 기원하는 시인의 응원에 힘이 생깁니다.
소소한 일상이지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바라던 기적은 오고야 말 것입니다. 삶의 이유를 찾는 동안 흘리게 될 땀방울들을 믿어보기로 합니다.
2026년 붉은 말의 해, 올 한 해 모든 분들이 만사형통의 기적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신정민 시인
2026-01-0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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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안부
북쪽에 눈이 오는지요?
저녁은 끓였는지요?
게사니들 대가리 주억거리듯
처마 끝에 청천벽력 눈이 오는지요?
양들에게 먹이 주듯 한밤중에 새끼 받듯
그 새끼에게 젖 물리듯 눈이 오는지요?
큰 산 벼랑에도 눈이 치는지요?
눈을 퍼서 가마솥에 끓이는지요?
마당귀 그 솥 안에도 캄캄하게 눈이 오는지요?
-시집 〈쓸데없이 눈부신 게 세상에는 있어요〉 (2025) 중에서
누구에게나 그리운 사람이 있습니다. 전하지 못한 마음이 있습니다. 거위가 고개를 끄덕거리듯 양들이 새끼에게 젖을 물리듯 눈이 오는 날, 텅 빈 하늘이 하얗게 꿈틀거리는 날이면 더 깊어지는 그리움.
말주변이 없어 어떻게 인사를 건네야할지 미루다 놓치기 쉬운 안부. 인사치레 같고 때론 형식적인 것 같아 주저하게 되는 안부. 섣불리 건네기 머쓱한 안부.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하고 넘기기 쉬운 안부.
그러나 그곳의 날씨는 어떤지 혹은 밥은 먹었는지와 같은 가벼운 안부 속엔 꾹꾹 눌러 담은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한겨울 추위 잘 지내시길 바라는 기별.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오늘, 살아있는 모든것들에게 이 시를 빌어 평안하시길 전합니다. 안부를 받지 못한 누군가에게도 따듯한 마음 대신 전해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5-12-30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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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오늘 별이 뜨는 이유에 대해
늙은 할머니 앞에서 느리게 걷고 있는 늙은 개
할머니가 멈추고
줄의 곡선이 펴지기도 전에
늙은 개는 멈춰선다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는 시간
흘러가는 시간을 흘러가게 그냥 두는 것
애초에 거기 있었던 마음처럼
할머니가 걸음을 떼자
늙은 개는 동시에 걷기 시작한다
둘은 그렇게 끝까지 곡선이다
왼발은 왼발
오른발은 오른발
구름을 밟고
물 위를 걷듯
나는 조용히 구령을 붙여본다
오늘은 참 많은 별이 뜨겠구나
-시집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2024) 중에서
시를 쓰면 자신의 베란다에서 키우는 꽃들에게 제일 먼저 읽어준다는 시인. 언젠가 자신의 부음을 생전에 좋아하던 채송화가 제일 먼저 받아보았으면 좋겠다는 시인. 문상객으로 기르던 식물들이 와준다면 행복하겠다는 시인에게 오늘 별이 뜨는 이유가 저렇듯 선명합니다.
흘러가는 시간을 흘러가게 그냥 두는 할머니와 늙은 개의 동행. 구름 밟듯 물 위를 걷듯 쉬엄쉬엄 지나가는 모습으로 걷는다는 것.
오늘 나의 별들은 어떤 이유로 반짝일까 생각해봅니다. 바쁘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인 줄 알고 그렇게 사느라 사람들과의 거리를 미쳐 헤아리지 못했던 실수, 팽팽하게 잡아당긴 관계들이 떠오릅니다.
오늘은 앞만 보고 달리느라 뒤처진 영혼이 따라올 수 있게 가만히 기다려주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합니다. 신정민 시인
2025-12-23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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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밈
여러 번 소리 내 부르면 가운데가 텅 비는 이름
우스꽝스럽게 눈 모으고 혀 내민
들여다볼수록 더 모르겠는 얼굴이 거기
우리가 알고 있는 그가 정말 그였는지
각자의 기억에서 그는 오리너구리거나
종이비행기거나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누구로도 완성되지 않는
어느 날 도시 한복판에 뜬 오로라였던
처음엔 상상이었지만 나중엔 정말 그렇게 믿은
모두의 첫사랑이자
모두의 사기꾼
우리가 말없이 공유했던 거짓은 무엇이었을까
저마다의 상실감은 저마다의 몫
원양어선을 탔는지 선교사로 오지를 떠돌았는지
어느새 기별 없이 완전히 사라진
우리 다 죽고 없는 저기 뜬소문처럼
단 하나의 빛으로 살아남은
-시집 〈제너레이션〉(2025) 중에서
시는 대상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상상력이 이끄는 낯설고 모호한 움직임입니다. 판단이 아니라 일종의 모험입니다.
이 시는 이질적인 것들의 혼합, 혼돈, 모호함의 언어 마술, 그 매혹을 보여줍니다. 밈(meme)은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는 생각, 행동, 스타일 등의 문화적 요소를 의미합니다.
스스로를 복제하며 퍼져나가고 모방되고 변형되며 확산되는 것들. 무수히 많은 방향이 동시에 움직이는 시와 밈이 닮았단 생각이 듭니다. 상상으로 시작했으나 믿게 된 일들. 단 하나의 빛으로 살아남은 뜬소문일지도 모릅니다.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되는 것들. 빛의 속도로 복제되고 확산되는 현상들 속에서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거짓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신정민 시인
2025-12-16 [1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