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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조선제일검' 한동훈의 존재감 증명
20일간 이어진 김승원 법무부장관 후보자 사퇴 정국은 검사 시절 ‘조선제일검’으로 불린 한동훈의 독무대였다. 김 후보자의 ‘신약 임상시험 승인 청탁 의혹’을 시작부터 끝까지 주도했고, 결국 낙마를 이끌어냈다. 여권 지도부와 스피커들의 십자포화는 물론 국민의힘 내부의 시기 어린 견제에도 홀로 맞섰다.
수사 기록 입수 과정의 불법성은 차차 진위가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자료가 있다고, 검사 출신이라고 해서 누구나 한 의원처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상대의 예상된 반격을 파훼하는 자료를 순차 공개해 결국 궁지로 모는 영리함, ‘메신저’를 공격하는 여권 인사들의 모순된 과거를 적시에 소환해 받아치는 기억력과 순발력은 여야 ‘저격수’ 중에서도 발군이라 할 만하다.
한 의원도 자신의 성취에 고무된 듯하다. ‘수사 기밀 유출’ 의혹을 제기하는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을 향해 “모두 상대해 줄 테니 나오라”고 호언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말도 거칠어졌다. “9억 받아 처먹지 않았나”, “브로커가 보고 싶어 흘리는 눈물이냐” 등. 표현이 심하다는 지적에는 “민주주의 적들과 혈혈단신으로 싸울 때 정치인의 품격은 진흙탕에 뛰어들어 진흙탕에 빠질 위기에 있는 국민을 구하는 것”이라고 받아쳤다. 제3자에겐 ‘자아 팽창’의 조짐이 보여 불편했지만, 열성 지지자들에게는 장판교에서 수십만 대군을 홀로 맞서는 조자룡의 현신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한 의원에게 ‘되치기’에 대한 두려움도 없는 것 같다. 잘 알려지다시피 그는 술을 먹지 않고, 집안이 부유해 돈에 대한 아쉬움도 없다. 정치인들을 종종 허방에 빠트리는 단골 시빗거리에서 원천적으로 자유롭다. 자신에게 열광하는 팬덤과의 관계도 불편한 일을 막기 위해 철저하게 거리 두기를 한다. 빈틈을 찾기 힘들다.
당권파들의 한 의원에 대한 공격이 힘도, 논리도 없어 보이는 이유다. 공익 목적이라는 청탁의 불법성을 부각하기 위해 사용한 ‘오빠’ 단어를 물고 늘어지고, ‘복당은 절대 없다’더니 이번에 자신들과 팀플레이를 하지 않았다고 탓하는 수준이다.
한 의원의 이번 저격수 데뷔는 장동혁 당권파를 향한 무력 시위로도 읽힌다. ‘잘 싸우는 사람으로 당을 채우겠다’며 한 의원을 비롯해 친한계를 몰아내고 있는데, 정작 당 밖 한동훈이 당내 100여 명 의원보다 더 잘 싸웠다는 평가가 나오니 말이다. 당권파로서는 꼬인 속이 더 꼬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런 엇나간 감정의 표출은 한 의원의 ‘핍박 서사’만 늘려줄 뿐이다.
그러나 좀 길게 생각하면 ‘저격수 한동훈’으로서의 존재감이 ‘대권주자 한동훈’에게 어떤 유익을 줄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김 후보자 낙마는 보수 진영 전체로 보면 대단한 전리품이지만, 친한계 일부를 제외하고는 한 의원의 성취에 대한 국민의힘 내부 반응은 시큰둥한 편이다. 당권파들은 시기·질투로 치부될 것을 알면서도 맹목적인 적개심을 감추지 않는다. 한 의원은 ‘윤 어게인’ 세력에 맞서 ‘윤 탄핵’에 앞장선 자신이 감당해야 할 업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탄핵에 찬성했던 의원들 중에도 한 의원의 복당 이후에 대한 염려를 표출하는 이가 적지 않다.
사실 한 의원과 비슷하다고 볼만한 유형의 정치 지도자가 있었다. 보수 진영에서는 홍준표 전 대구시장이 대표적이다. 정국을 꿰뚫는 촌철살인의 언변은 진보 진영에서도 한 수 접을 정도였다. 그러나 우군도 수틀리면 적으로 만드는 홍 전 시장은 주변과 불화가 끊이지 않았고, 결국 ‘당심’을 얻지 못해 대권가도에서 멀어졌다. 최근 친명계의 공적이 된 진보의 유시민 평론가도 있다. 발군의 토론 능력은 보수에서 맞상대를 꺼릴 정도였지만, ‘옳은 소리를 저토록 싸가지 없이 하는 재주’는 정치 인생 내내 발목을 잡았다.
사실 지금 여의도 정치에서 덕, 포용력 같은 지도자 자질을 거론한다는 게 어색하다. 조롱·혐오 표현까지 불사해 상대를 바닥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능력이 ‘엄지척’을 받는 시대다. 통합의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는 당위는 인정하면서, 거기로 가기까지는 극단적 진영 논리를 따라야 하는 거대한 모순. 그 속에서 리더를 꿈꾸는 사람들은 행로는 안갯속을 걷는 것 마냥 혼란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잘 싸우는 사람이 여의도 판을 쥐고 흔든 이후로 우리 정치가 한 걸음이라도 나아졌는지, 국격이 한 뼘이라도 커졌는지 정치권은 물론 유권자들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국회 등원한 지 이제 100여 일 지난 초선 의원 한동훈에게 너무 과도한 요구일 수 있겠다. 다만 많은 사람들에게 ‘잘난 건 인정하지만, 잘 되는 건 탐탁지 않은’ 이미지가 왜 만들어졌는지 한 의원도 성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결국 정치인에게 최종 승리는 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창훈 서울정치부장 jch@busan.com
2026-09-20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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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1인당 소득 4만 달러 시대의 명암
지난해 12월 베트남 까마우 앞바다에는 두 가지 색깔의 물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서쪽 해안 지역 바닷가 물색이 적갈색과 파란색으로 뚜렷하게 구분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 경제가 이 바다 풍경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쪽에서는 반도체 호황으로 인한 역대급 수출 실적 기록, 경제 성장률 상승,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전망 등의 ‘굿뉴스’가 연일 나오고 있지만 다른 한쪽으로는 중소기업 연체율과 파산 신청 증가, 청년 실업률 상승, 지방 미분양 증가 등의 ‘우울한 소식’이 올라오고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올해 한국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6%에서 3.3%로 상향 조정했다. 지난 5월 전망치에서 석 달 만에 0.7%포인트(p) 높였다. 지난달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발표한 한국의 경기선행지수(CLI)도 26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에 힘입어 2000년대 이후 가장 높은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지난 1일 산업통상부가 발표한 ‘8월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한국의 수출액은 전년 동월 대비 70.9% 증가한 1022억 5000만 달러였다. 한국의 월 수출액이 1000억 달러를 넘긴 것은 사상 최초다. 전 세계에선 독일과 중국, 미국에 이어 네 번째다.
우리나라는 올들어 지난 10일까지 누적 수출액이 7285억 6000만 달러로, 지난해 연간 수출액(7093억 달러)을 한참 넘어섰다. 정부는 오는 12월 초 1조 달러를 달성할 것으로 전망하면서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를 예고했다.
하지만 우리 경제의 이면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상반기 수출 10달러 중 4달러는 반도체 차지다. 반도체가 대략 40%의 경제를 견인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이클이 있다는 반도체의 실적이 내려간다면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다시 3만 달러, 2만 달러 대로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또한 국내 5대 은행의 지난 5월 말 중소기업 연체율은 평균 0.73%였다. 1%도 안 된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들 은행의 합산 수치가 확인되는 2020년 1월 이후 최고치다. 중소기업 연체율은 작년 말 0.50%에서 수개월 새 0.23%p 급등했다.
법인의 파산신청도 우려스럽다. 법원통계월보 등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전국 법원에 접수된 법인 파산 신청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7.7% 증가했다. 이는 2006년 통합도산법 도입 이후 상반기 기준 가장 많은 수준이다. 경기침체로 기업들의 매출과 영업이익이 줄어들고 있는 가운데 기존 대출의 상환 부담까지 겹치면서 상환 여력이 약화된 때문이다.
지방 부동산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부실 사업장도 늘고 있다. 국토교통부의 7월 말 집계를 보면 전국 미분양 주택 6만 8217가구 가운데 비수도권 물량은 4만 8758가구로 71%를 차지했다. 준공 후에도 팔리지 않은 ‘악성 미분양’은 비수도권 비중이 85%에 달했다. 분양가에서 몇억 원씩 할인하는 사태까지 빚고 있다.
고용 면에서도 양극화 현상을 보인다. 지난 9일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8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OECD 비교 기준인 15~64세 고용률은 70.4%로 0.5%p 올랐다. 8월 기준으로 15~64세 고용률이 70%를 넘어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지난달 15~29세 청년층 실업자는 19만 5000명으로, 전년보다 1만 1000명 늘었다. 청년층 실업률은 5.4%로 0.5%p 상승해 2022년 8월 이후 4년 만에 가장 높았다.
국민들은 혼란스럽다.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는데 내 삶은 결코 나아진게 없다”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대기업 취업도 바늘구멍인데, 이마저도 삼성전자·SK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업종 종사자와 기타 업종 종사자로 갈린다. 반도체 분야 종사자들이 성과급으로 5억~6억 원씩 받아가면서 그렇지 않은 이들의 상대적 박탈감도 커지고 있다.
정부는 이처럼 우리 경제에 만연해있는 경제 불균형에 대한 원인 분석과 처방을 고민해야 할 때다. 청년 실업을 해소하는 방안이 무엇인지, 왜 중소기업들이 빚을 못 갚고 있는지, 지방 미분양은 어떻게 하면 해소할지 등에 대한 분야별 해법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이보다는 ‘선거표’를 의식한 정책 발표로 오히려 갈등만 키우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반도체 호황으로 대기업 법인세가 수십조 원이 더 걷히는 상황인데도 고가 주택 소유자에 대한 보유세를 확대하고, 반도체 단지 추가 건설을 놓고 다수의 후보지에 대한 여론 수렴이나 전문가 평가 없이 특정 지역에 대해 정부 주도로 진행하는 식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지지율이 최근 30%대로 떨어졌다. 이제라도 ‘경제의 균형을 잡는’ 정부로 거듭났으면 한다.
2026-09-13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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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얻은 부산의 숙제
문화유산과 전통문화를 소개하는 자리라고 하면 흔히 정형화된 공간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온갖 볼거리가 넘쳐나는 요즘, 이런 공간이 아이들에게 ‘또 가고 싶은 곳’이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즐거움과 유익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공간을 최근 만났다. 지난 7월 19일부터 29일까지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기간 마련됐던 공식 전시관 ‘대한민국관’이다.
아이와 함께 찾은 대한민국관은 그야말로 ‘K헤리티지의 집약체’였다. 미디어아트와 인터랙티브 콘텐츠로 유산을 접하게 한 전시 방식은 아이에게 문화유산의 문턱을 한층 낮춰줬다.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담아낸 ‘나의 유산: 살아온, 살아가는, 살아갈’은 물론 이미 지정된 우리나라 곳곳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전시관들은 아이에게 뜻밖의 자긍심을 심어줬다. 국가유산진흥원이 선보인 ‘헤리티지: 타임리스 타임’, 전통 나전을 활용한 미디어아트 ‘윤슬의 시간’ 등에서는 긴 줄도 아깝지 않을 만큼 아이가 눈을 떼지 못했다. 장인들의 시연과 밀양아리랑 공연 역시 뜨거운 울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개인적인 경험을 넘어 한국서 처음 열린 이번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부산에 주어진 특별한 열흘이기도 했다. 특히 회의에서 채택된 ‘부산 선언’은 세계를 향해 무력분쟁과 기후변화라는 시대의 복합 위기 앞에서 인류가 어떻게 함께 유산을 지켜낼 것인가를 묻는 문서였다.
부산은 그 물음에 답할 준비가 돼 있다.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에 실마리가 있다. 경무대(현 임시수도기념관), 임시중앙청(현 동아대 석당박물관), 국립중앙관상대, 미국대사관 겸 미국공보원(현 부산근대역사관), 부산항 제1부두, 재한유엔기념공원, 하야리아기지(현 부산시민공원), 아미동 비석 피란주거지, 우암동 소막 피란주거지, 영도다리, 복병산배수지. 이들 11곳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지켜낸 공간이자 인구 40만 명이던 부산이 100만 명에 이르는 피란민을 품어낸 도시 실험의 흔적이다. 원도심 한복판의 근현대 유산이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국내 첫 사례라는 사실만으로도 유산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잠정목록에 오르기까지 과정은 순탄하지 못했다. 2018년 1월 8곳이 조건부 잠정목록에 올랐다가 2022년 12월 9곳으로 재조정을 거쳐 정식 잠정목록에 이름을 올렸고, 2025년 11월에는 11곳으로 확대됐다. 국내 잠정목록 12건 가운데 단 2건뿐인 유네스코 세계유산 우선등재목록에 선정되기까지 꼬박 9년이 걸린 셈이다. 게다가 등재 목표 시점은 당초 2028년에서 2030년으로 두 해 늦춰졌다. 도심 개발 압력 속에서 유산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지금도 주민이 살아가는 공간의 지속가능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아직 완전히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계유산위원회가 성황리에 막을 내린 지금, 부산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뚜렷해졌다. 부산 선언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피란수도 유산을 관광 자원으로만 소비해선 안 될 것이다. 이른바 ‘부산병’을 앓는 관광객들이 재차 부산을 찾는 이유는 바다만이 아니라 도시가 품고 있는 이야기의 밀도 덕분이다. 유산을 스쳐가는 포토존이 아니라 걷고 보고 느끼는 서사로 만들 콘텐츠 설계가 무엇보다 시급하다. 우암동과 아미동처럼 주민이 실제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해서는 주거권과 유산 보전이 충돌하지 않는 방식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오랜 유적과 주택가, 시장, 카페 등이 조화를 이루며 역사와 삶이 어우러지도록 한 포르투갈의 ‘포르투 역사 지구, 루이스 1세 다리 및 세라 두 필라르 수도원’이 한 예다.
2030년 등재를 목표로 한 국제 비교연구와 예비평가 대응 등에 행정력과 시민사회의 역량을 집중할 필요성도 있다. 앞서 이야기한 대한민국관은 부산의 역량을 세계에 알린 기회가 됐다. 특히 부산이 독자적으로 꾸린 부산관은 해양수도 부산의 면모와 함께 피란수도 부산유산의 서사를 국내외 관람객에게 직접 전하면서 4만 명이 넘는 국내외 관람객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열흘간의 경험은 부산이 세계와 통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예행연습이었다. 이를 계기로 국제기구 인사, 심사위원, 학계 네트워크와의 활발한 상시 교류를 이끌어낼 수 있다.
부산은 이번 세계유산위원회를 통해 ‘피란수도’라는 정체성이 지역의 특수한 상처가 아니라 세계사적 보편성을 지닌 자산임을 확인했다. 전쟁과 냉전, 국제원조와 인도주의라는 20세기 인류 공통의 경험이 도시의 골목마다 새겨져 있다는 사실은 향후 부산이 세계와 대화하는 언어가 될 수 있다. 부산이 이번 회의의 열기를 일회성 이벤트로 흘려보내지 않기를 바란다. 피란수도의 기억을 미래도시의 설계도로 바꾸는 일, 그것이 지금 부산에 주어진 진짜 숙제다.
윤여진 편집부장 onlypen@busan.com
2026-09-0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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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좌초' 부산항 북항 환승센터 해법 서둘러야
일본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각인돼 있는 도쿄 신주쿠의 ‘스크램블 교차로’. 신호등 녹색 불이 켜지면 6개의 횡단보도에서 사람들이 동시에 쏟아져나와 교차로 중간에서 한데 엉켰다 흩어지는 장면을 모르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곳은 인파 만큼이나 혼잡한 교통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기존 신주쿠역 주변에는 100여 개가 넘는 고속·시내외 버스 회사의 정류장 19곳이 역 광장과 도로변, 인근 골목 등에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다. 이 때문에 처음 신주쿠를 찾은 방문객들은 길을 찾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고, 일대 도로는 승객을 태우려는 버스와 택시의 도로변 이중 주정차로 인해 만성 체증에 시달렸다. 또 철도에서 내려 고속버스로 갈아타려면 도보로 10~15분 이상 길거리를 헤매야 하는 단절 문제를 안고 있었고, 좁은 인도 위에 수많은 보행자와 대중교통 이용 승객이 엉키며 크고작은 사고 위험도 높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국토교통성은 2000년부터 신주쿠 남측에 복합환승센터를 세우기로 했다. 새로운 부지를 확보하기 어려웠던 도심지 공간 제한을 감안해, 운행 중인 JR 철도 노선들 위로 인공 지반을 얹고 건물을 지어 올리는 고난도 공사를 15년 이상 진행한 끝에 2016년 4월 ‘바스타 신주쿠’가 완공됐다.
1층은 철도가 지나가고 2층에는 개찰구와 보행자 광장이, 3층은 고속버스 도착 승강장, 택시 승강장, 관광 안내소가 있으며 4층에는 고속버스 출발 승강장과 통합 매표소, 대합실이 위치하는 입체적 건물이다. 택시 승강장과 관광안내소, 수하물 보관소, 외화 환전소 등을 한 층에 모아 해외 및 외지 방문객의 편의성을 대폭 끌어올렸으며, 환승센터 내 쇼핑몰과 오피스타워 등을 동시 개발해 단순 교통 거점이 아닌 유동 인구가 체류하는 상업·문화·경제 거점으로 도약시켰다. 복잡한 도심 내 다양한 교통 수단을 연결해 시민들의 편의를 높이는 복합 환승센터의 성공 사례 중 하나다.
시간과 장소를 옮겨 2026년 부산. 경부선 KTX 종착역과 도시철도, 버스와 택시 승하차장을 한데 연결하는 부산항 북항 환승센터 건립 공사는 민간사업자와 부산항만공사가 지구단위계획 지침 위반 논란으로 3개월째 갈등을 이어가고 있다. 부산항 북항 재개발 1단계 사업 부지를 조성한 부산항만공사는 지난 6월 초 사업자가 지침을 어기고 부산역 보행로와 환승센터 연결부에 3.3m의 단차를 발생시켰다며 원상복구 확약서를 요구했으나 응하지 않자 토지매매계약 해제를 통보했다. 곧바로 법원에 공사중지 가처분 신청을 내면서 갈등은 법정 다툼으로 번졌다.
건축허가를 내준 관할 지자체 동구청은 단차 발생 사실을 사업자가 수정 제출한 건축계획 도면에서 확인하지 못한 실수는 제쳐두고, 사업자가 현재 건축법을 위반해 공사를 하고 있다며 지난 21일 공사중지 시정명령을 내린 상태다. 현장은 지금 멈춰섰다. 북항 환승센터 건립 사업이 이처럼 계속 공전할 경우, 환승 인프라 구축이 미뤄지는 것은 불보듯 뻔하다. 당장 공사 현장의 하도급 업체에 대한 피해보상 문제가 불거질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주변 트램 사업 및 북항 1단계 재개발 전체가 흔들리는 결과가 예상된다. 결국 부산의 사회·경제적 손실이자 시민과 방문객 불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북항 환승센터는 원도심과 북항을 잇는 핵심시설이다. KTX 부산역에서 내려 북항 친수공원과 오페라하우스, 국제여객터미널 등으로 이동하는 보행과 교통의 중심축이다. 환승센터는 또 통합 입체 교통 허브의 역할을 해야 한다. KTX와 도시철도, 버스, 택시, 해상 교통은 물론 향후 부산형 급행철도(BuTX)와 도심항공교통(UAM) 등 미래형 모빌리티(MaaS)까지 연계되는 거점으로 구상됐고, 환승센터 역할에 부합되도록 설계돼야 한다. 공공성 면에서 부산역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공공 보행로를 단차 없이 평탄하게 연결해 시민들이 막힘 없이 부산항 조망을 누리며 북항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하는 연결성을 확보하는 것 또한 필수적이다.
현 시점, 환승센터 사업 관계기관들은 법원의 공사중지 가처분 결과만 기다리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부산시, 동구청, BPA, 사업자, 시민단체, 도시·교통 전문가 등이 함께 머리를 맞대 투명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논의하는 게 절실하다. 이후 사업 과정에서 행정 절차가 불필요하게 지연되지 않도록 하는 조속한 완공을 위한 지원 방안도 함께 마련한다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스마트하고 편리한 교통 환승 시스템을 집약시키고, 백화점, 영화관, 아쿠아리움 등 상업·문화 시설을 함께 배치해 사람이 모이게 하는 부산의 대표 ‘모빌리티 허브’(Mobility Hub)로 부산항 북항 환승센터를 구축할 방법을 찾아야 할 때다.
2026-08-30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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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인생경기
1시간여 운동을 다녀와 TV를 다시 켰다. 마침 7회 롯데의 공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0-8. 1회 0-2로 뒤지고 있던 경기가 어느새 8점 차로 벌어져 있었다. ‘오늘도 글렀구나’ 생각하면서도 채널을 돌리진 않았다. 볼넷과 상대 실책, 안타가 이어지면서 타자들이 계속 누상에 나갔고, 차곡차곡 점수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루가 됐다. 4번 타자 한동희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런데 한참 높은 공에 방망이가 나갔다. ‘저런 공에 왜 휘두르나’ 한탄한 것도 잠시, 타구는 그대로 외야 관중석을 강타했다. 만루홈런이었다. 7-8. 순식간에 한 점 차가 됐다.
두 타자가 연달아 아웃되면서 7회 말 공격이 이대로 끝나는가 싶었다. 하지만 롯데의 방망이는 다시 불을 뿜었다. 전민재를 시작으로 장두성, 손성빈, 황성빈, 나승엽, 레이예스, 한동희, 고승민까지 8연속 안타가 이어졌다. 7회 말에만 무려 18명의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11개의 안타와 3개의 볼넷을 묶어 13점을 뽑았다. 0-8이 13-8로 뒤집혔다. 이후 키움이 솔로홈런 두 방으로 추격했지만 롯데도 손성빈의 투런홈런으로 응수했다. 결국 경기는 15-10, 롯데의 승리로 끝났다.
이렇게 큰 점수 차로 뒤지던 경기를 한 이닝에 뒤집는 장면은 처음 봤다. 경기 후에도 한동희의 만루홈런 장면을 몇 번이나 다시 봤다. 볼 때마다 짜릿했다. 야구라는 스포츠가 주는 쾌감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문화스포츠부에 온 올해 모처럼 롯데 경기를 챙겨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롯데의 지난 세월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프로야구 원년 멤버인 롯데는 1984년과 1992년 고작 두 차례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그 뒤로 우승 트로피는 더 이상 부산으로 오지 않았다. 우승은커녕 이제는 가을야구에 진출하는 것 자체가 오랜 숙제가 됐다.
마지막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것은 2017년이다. 2000년대 초반 8-8-8-8-5-7-7위라는 암흑기를 보낸 이후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순위는 7-10-7-8-8-7-7-7위였다. 더 긴 터널 속을 헤매고 있다. 올해도 별 다르지 않다. 그 경기를 기점으로 최근 연승을 달린 롯데는 순위를 끌어올리긴 했지만 포스트시즌 마지노선인 5위와 격차는 상당하다. 아직 산술적으로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가을야구를 바라보기에는 갈 길이 멀다.
시즌 초부터 팬들의 마음을 답답하게 한 장면도 많았다. 투타에서 잦은 실수가 이어졌다. 투수가 버티면 타선이 침묵했고, 타선이 살아나면 마운드가 흔들렸다. 이기고 있는 경기를 놓치는가 하면, 잡을 수 있는 경기를 허무하게 내주기도 했다. 최근 순위가 말해주듯이 좋은 날보다 힘든 날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도 롯데 팬들은 야구를 끊지 못한다. 잘해서 계속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가끔 보여주는 말도 안 되는 장면 때문에 또 보게 된다. 0-8이 15-10이 되는 경기처럼 말이다. 모두가 포기한 경기에서 기적처럼 살아나는 순간, 야구가 얼마나 짜릿한지를 보여주는 그런 순간을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팬들이 마냥 기다려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이 훌쩍 넘은 기다림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가을야구와 우승에 대한 갈증이 커질수록 구단의 책임도 커진다. ‘응원하는 팬들이 있으니 괜찮다’는 식으로 팬들의 인내를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올해 사직야구장 관중 수가 예년만 못한 것은 시즌 초반부터 줄곧 하위권을 전전한 팀 성적의 영향이 절대적일 것이다. 야구장에서 팬들의 함성은 공짜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팬들은 시간을 내고 돈을 쓰고, 때로는 먼 길을 찾아 야구장을 찾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반드시 승리만은 아닐 것이다. 지더라도 다음 경기를 기대하게 만드는 팀, 어제보다 오늘이 나아지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팀을 보고 싶은 것이다.
좋은 선수들을 길러내고, 선수층을 두껍게 만들고, 경쟁력 있는 팀을 만드는 것은 결국 구단의 몫이다. 한두 명의 선수에게 기대거나 매년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긴 시간 꾸준히 경쟁할 수 있는 팀을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야 팬들도 ‘언젠가는 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올해는 정말 해볼 만하다’는 마음으로 시즌을 기다릴 수 있다. 팬들이 원하는 것은 기적만이 아니다. 오히려 매년 기적에 기대지 않아도 되는 팀을 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도 역대급으로 덥고 짜증났던 이번 여름, 며칠 전 ‘인생 경기’ 하나는 시원하게 잘 봤다. 젊은 선수들이 주축이 된 롯데의 더 나은 활약을 기대한다. 어린 선수들이 더 성장하고 팀이 더 단단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
2026-08-23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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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형사소송법 개정, 숙제는 시작됐다
“경찰이 수사를 제대로 안 해줘요. 집 근처 경찰서에 갔더니 부산경찰청으로 가라 하고, 부산경찰청에서는 울산으로 가라 하고….”
얼마 전 60대 사기 피해자가 사회부로 찾아왔다. 사회부에는 경찰 수사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종종 찾아온다. 수사 불만을 토로하는 전화도 수시로 걸려온다. 이런 제보가 들어오면 실제 피해 여부, 사회적 파급력과 공익성, 취재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기사화 여부를 결정한다. 심각한 피해에도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제보자의 답답함에 공감하면서도 기준에 못 미쳐 기사로 쓰지 못한 때도 있었다.
지난달 31일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동안 만났던 제보자와 범죄 피해자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억울함이 생겨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제보가 더 늘어나겠다는 씁쓸한 전망도 함께 들었다.
일거리가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은 법조계에서도 나온다. 변호사들은 범죄 피해자들이 피해 입증을 위해 이전보다 더 많이 찾아올 것이라 예상한다. 검사의 수사권이 사라지면서 그 공백을 이제 범죄 피해자가 변호사 도움을 받아 메우는 구조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2021년 문재인 정부의 검경 수사권 조정, 이른바 ‘검수완박(검찰의 수사권 완전 박탈)’이후 벌어진 일들만 봐도 알 수 있다. 검찰의 직접 수사 범위가 대폭 축소되면서 현장에서는 수사 지연이라는 부작용이 심각하게 나타났다.
검찰의 직접 수사 대상이 줄어든 만큼 수사가 경찰로 몰리면서 수사 지연이 늘어났다. 여기에 검찰의 수사지휘권마저 폐지되면서 두 기관이 서로 사건을 떠미는 현상까지 겹쳤다. 그 사이에서 고통받는 것은 결국 범죄 피해자들이다.
수사 지연은 범죄 피해자의 사법 비용 증가로도 이어진다. 수사가 진척되지 않으니 피해자들이 변호사를 고용해 직접 증거를 모으고 경찰에 수사를 독려하는 일이 잦아졌다. 지역의 한 변호사는 “경찰서에서 수사 여력이 없으니 증거를 직접 찾아오라는 답을 듣고 변호사를 찾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고 전했다. 예컨대 사기 사건의 경우 가해자의 자금 흐름을 추적해 경찰에 넘겨줘야 사건 처리가 빨라지기 때문에, 변호사를 통해 민사 소송을 먼저 진행한 뒤 그 결과를 바탕으로 형사 고소를 이어가는 식이다.
이번 개정안의 가장 큰 쟁점은 보완수사권이었다. ‘장윤기 사건’이나 ‘돌려차기 사건’처럼 경찰 수사가 부실했을 경우 이를 바로잡을 장치가 있느냐는 것이다. 여당은 범죄 피해자가 경찰 수사에 이의신청을 할 수 있고, 이 경우 경찰이 사건을 검사에게 송치하기 때문에 보완수사권 폐지로 인한 피해자 불이익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이의신청 과정에서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또 이의신청으로 사건이 검사에게 송치되더라도, 검사가 할 수 있는 일은 경찰에 보완수사나 재수사를 요구하는 것뿐이다. 결국 이의신청을 하더라도 수사는 다시 경찰의 손으로 돌아가는 구조다.
개정 형소법에 따르면 검사는 경찰의 부실·불공정 수사가 우려될 경우 상급 관서로 사건을 재지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절차의 한계도 뚜렷하다. 법에 명시된 ‘현저하게 부실’한 수사의 기준이 모호한 데다, 검사가 직접 수사를 못하는 이상 부실 여부 판단은 경찰이 작성한 서면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의도적인 부실 수사일수록 서류는 부실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수사기관을 재지정하는 과정에서 사건 처리는 또 한 번 지연될 여지가 크다.
기존 형소법이 완벽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존 법체제에 맞춰 돌아가던 시스템을 흔들었다면, 뻔히 예상되는 부작용에는 면밀히 대응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7월 9일 김한규 의원의 대표 발의를 시작으로 법안 통과까지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부작용 최소화를 위한 숙의 과정을 거치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었다. 형소법 개정이 여당 당대표 선출을 한 달여 앞둔 시점에 발의되면서, 지지세력 결집과 정체성 검증의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형소법 개정 후 여당의 한 의원은 “숙제가 끝났다”고 했지만,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돈 없는 범죄 피해자 구제는 어떤 식으로 할지, 경찰의 부실 수사를 어떻게 보완할지, 경찰의 비대해진 권한을 견제할 장치는 무엇인지 논의는 계속돼야 한다. 국민 다수가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번 개정안의 성패는 결국 후속 조치를 얼마나 촘촘히 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 숙제를 제대로 해냈는지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2년 뒤 총선에서 이뤄질 것이다.
2026-08-16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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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국민보다 당원 뜻이 위에 있는 나라
정치가 복잡할수록 질문은 단순해져야 한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가 재판관 발언을 인용해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쿠이 보노(Cui bono)’, 즉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가’라는 질문이다. 요즘 한국 정치를 보고 있으면 이 질문의 의미가 어느 때보다 무겁게 다가온다. 국민의 뜻이 우선인가, 당원의 뜻이 우선인가. 지금 여야는 모두가 ‘당원이 주인’이라고 외친다. 당원 참여 확대 자체는 정당 민주주의의 발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심이 민심을 넘어서는 순간 문제가 된다. 민주당은 강성 당원의 ‘팬덤’을 등에 업고 국민 여론과 동떨어진 검찰 보완수사권 폐지를 밀어붙였고, 국민의힘은 강성 지지층이 호응하는 부정선거론을 앞세워 당 대표의 ‘정치적 생명줄’로 삼고 있다.
민주당의 보완수사권 폐지는 특히 전당대회와 맞물리면서 어느새 ‘절대선’이 됐다. 당대표 후보들이 강성 당원들의 표심을 의식해 경쟁적으로 폐지론을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더 강하게 검찰개혁을 주장하는지가 당원들에게 자신의 정통성과 개혁 선명성을 입증하는 기준이 된 셈이다.
문제는 그 선명성 경쟁이 국민 여론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한국갤럽의 지난달 14~16일 조사에서 보완수사권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은 61%로, ‘폐지해야 한다’는 23%를 크게 앞섰다. 지난 3일 개혁신당 조사에서도 이재명 대통령이 형사소송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응답이 59.6%였고, 시행 이후 범죄 수사 여건이 나빠질 것이라는 응답은 64%였다.
검찰의 과도한 권한을 개혁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검찰을 개혁하는 것과 검찰의 수사와 견제 기능을 없애는 것은 다른 문제다. 민주당은 보완수사권 폐지 명분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름을 소환한다. 검찰개혁은 노무현의 오랜 유지고, 보완수사권 폐지는 ‘미완의 검찰개혁의 완성’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정작 노 전 대통령의 사위인 곽상언 민주당 의원은 당론을 거스르고 폐지에 반대표를 던졌다.
여기서 다시 ‘쿠이 보노’를 묻는다. 보완수사권 폐지로 누가 가장 이익을 보는가. 민주당은 국민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에게 입증해야 한다. 검찰의 견제 장치를 없애는 것이 왜 국민에게 더 안전한지, ‘장윤기 사건’이나 ‘부산 돌려차기 사건’에서처럼 경찰 수사가 잘못됐을 때 누가 바로잡을 것인지 설명해야 한다. 특히 권력형 비리 수사에서 핵심 역할을 해온 검찰의 수사권을 무력화함으로써 ‘여권의 유력 인사들이 자신들을 겨누던 검찰이라는 눈엣가시를 없애고, 재집권 기반을 공고히 하려 한다’는 국민의 의구심을 민주당은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 답해야 한다.
국민의힘에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부정선거 의혹은 공정 선거라는 차원에서 사실관계를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실제 선관위 조사 과정에서 중간 투표율을 임의로 허위 입력한 사실 등 선거관리의 부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중간 투표율을 임의로 조정한 것과 실제 후보들의 득표 결과까지 조작한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현재까지 선관위가 투표율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부실·편의적 처리가 있었다는 사실은 드러났지만, 그것이 전체 득표율을 조작했다는 정황까지 확인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둘을 하나로 묶어 ‘부정선거’로 확대하는 강성 당원들의 주장이 당 지도부와 노선 유지의 주요 동력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쿠이 보노’를 물어야 한다. 부정선거론을 확대재생산할 때 누가 이익을 보는가. 국민인가. 아니면 당권을 유지하려는 장동혁 지도부와 그의 기반이 되는 강성 당원들인가.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서로를 극단적이라고 공격하지만, 이 점에서는 닮았다. 당심이 민심보다 위에 올라선 것이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은 기업을 생각해보자. 회사의 미래에 자신의 자산을 투자해 경영 실패의 위험까지 감수하는 ‘회사의 진짜 주인’은 주주다. 하지만 임직원들이 자신들이 회사의 주인이라는 오만과 착각 속에 지금처럼 일반 직장인의 10년치 연봉을 웃도는 과도한 성과급을 요구하고, 미래 투자나 주주 환원 등을 등한시한다면 회사가 종국에는 상장사로서 존속 이유를 잃게 될 것이다.
정당도 다르지 않다. 당원은 정당을 움직이는 사람들일 수 있지만, 국민은 정당의 존립을 결정한다. 당원은 당 대표를 뽑지만,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국민들이 뽑는다. 당원은 당론을 만들지만, 국민은 그 결과를 삶으로 감당한다. 당원은 지도부를 지켜줄 수 있지만, 선거에서 국민의 표를 대신할 수는 없다. 당원 민주주의는 필요하지만 당원 주권이 국민 주권보다 앞설 수는 없다. 그래서 정치가 복잡해질 때마다 다시 ‘쿠이 보노’를 묻게 된다. 그러나 여야가 공당으로서 존속 이유를 가지려면 질문이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 이익이 되어야 하는가. 답은 당원도, 정치인도 아니다. 국민이다.
2026-08-09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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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부산 관광, 질적 성장 고민할 때
한때 ‘노인과 바다’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도시. 그랬던 부산에 최근 들어 활기가 넘친다. 부산을 찾는 국내외 관광객이 급증하면서 장기간 침체됐던 지역 상권에도 온기가 돈다. 특히 외국인 관광객이 눈에 띄게 늘었다. 부산역, 서면, 해운대, 광안리, 남포동, 기장까지 도시 곳곳에서 외국인 관광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제는 부산을 ‘노인과 바다 그리고 외국인’으로 불러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마저 나올 정도다.
지난해 부산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수는 364만여 명으로, 전에 없던 기록을 세웠다. 올해는 그보다 많은 400만 명 이상이 부산을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올 상반기에만 외국인 관광객 242만여 명이 부산을 찾아 이미 목표치의 60%를 넘어선 상황이다. 게다가 상반기 전체 방한 외국인이 1070만여 명인 점을 감안하면, 네다섯 중 한 명은 부산을 찾은 셈이다.
대만과 중국 등 중화권 관광객을 중심으로는 ‘부산병’이 유행 중이다. 부산 특유의 감성과 풍경을 잊지 못해 그리움을 느끼며 재방문을 갈망하는 ‘여행 후유증’을 뜻하는 말이 부산병이다. 이에 앞서 ‘서울병’이 한 차례 이미 유행하기도 했으니, 이 인기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상대적으로 관광산업 의존도가 높은 부산의 경제적 특성을 고려하면, 이들의 발길을 붙잡아 둘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실제 관광객 유치로 인한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올 1분기 부산 전체 상가 공실률은 높아졌지만, 관광객이 자주 찾는 서면·전포 일대와 남포동의 중대형 상가 공실률은 오히려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많은 외국인들이 부산을 찾는 이유로는 K컬처의 세계적 인기가 꼽힌다. 지난 6월에는 BTS 부산 공연을 즐기기 위해 국내외 아미(BTS 팬덤명)들이 부산에 몰려 들었다. BC카드가 부산 지역 가맹점 매출 데이터를 기반으로 외국인 관광객 총 5만 4700여 명의 주간(6월 7~13일) 소비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전통시장 결제액이 직전 주간보다 99.8% 증가해 눈길을 끌었다. 아미들이 해운대시장과 국제시장 등에서 ‘먹방’을 즐긴 것이 원인으로 분석된다.
최근에는 미쉐린 가이드에 선정된 식당이 늘면서 지역 먹거리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의 화려한 야경, 제주와 같은 자연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다채로운 매력도 부산의 강점이다. 원화 약세와 중일 관계 악화로 인한 반사 이익도 누리고 있다.
이제는 부산 관광의 양적 성장을 넘어 질적 성장을 고민할 때다. 단순히 많이 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들이 지역에서 오래 머무르며 지갑을 더 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난해 부산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수는 늘었지만, 체류 기간과 소비 규모는 오히려 전년에 비해 줄었다는 통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부산시 조사에 따르면 외국인 관광객의 평균 체류 기간은 2024년 6.2일에서 지난해 4.8일로 1.4일 줄었다. 1인당 평균 여행 경비도 같은 기간 828.4달러(한화 약 120만 원)에서 710.6달러(약 103만 원)로 감소했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로 부산이 경유지에 그치는 한계를 꼽는다. 현재 부산을 찾는 유럽, 미국 관광객들의 경우 인천공항으로 들어와 서울에 머무르며 KTX를 타고 다른 지역 도시들을 경유하는 방식으로 여행하는 경우가 많다. 장거리 직항노선이 부족한 부산이 경유지에 그치다 보니, 상대적으로 짧게 머무르고 적게 소비하는 여행 패턴을 보인다는 분석이 나온다.
부산이 참고해야 할 모델로는 일본의 오사카와 같은 관광 허브가 꼽힌다. 부산을 거점으로 울산, 경남을 여행하며 장기간 체류할 수 있도록 동남권 광역관광 전략을 세워야 한다. 오사카를 찾은 관광객들이 교토, 고베, 나라 등 인근 도시를 함께 여행하는 것처럼 부산을 찾은 관광객들이 울산과 경남 곳곳까지 두루 편리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광역관광 인프라를 확충해야 한다. 부울경 행정 통합과 가덕신공항 조기 개항이 함께 추진된다면 시너지가 날 것이다.
외국인 관광객들의 ‘부산병’이 쉽게 치유되지 않고, 이들의 ‘N차 방문’까지 이끌어 내게 하려면 부산이 가진 특유의 지역색과 매력을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외국인 관광객도 현지인들의 일상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로컬 체험을 선호한다. 감천문화마을이 수년째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다른 곳에선 찾아볼 수 없는 마을 고유의 색채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만약 광안리 해변의 주요 상권이나 남포동 상권 등이 모두 비슷비슷한 인형뽑기 가게 등으로 채워진다면 무슨 매력이 있을까. 임대료 상승 탓에 기존 상인과 원주민이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둥지내몰림) 현상으로 인한 상권 획일화를 막으려면 각 지자체의 세심한 정책 마련도 필요하다.
2026-08-02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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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부울경 통합, 기싸움을 멈춰라
“주민 투표를 거쳐 2028년 4월을 목표로 부산·경남 행정통합을 추진하겠다는 뜻에 변함이 없다.”(박완수 경남지사)
“행정통합도 좋지만, 당장 내년과 내후년 부산·울산·경남의 공통사업 예산 확보 방안을 먼저 고민하는 게 이치다.”(전재수 부산시장)
지난 1일 출범한 민선 9기의 부울경 광역지자체장들은 저마다의 시·도정 방향 수립과 조직 개편에 여념이 없다. 각 지자체의 굵직한 현안에 대해 방향성을 정하고 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한때 뜨겁게 달궈졌던 부산·경남 행정통합은 소외되고 있다. 마치 누가 먼저 말을 꺼낸다는 것이 불편한 모양새다.
박완수 경남도지사가 기자간담회에서 예정된 대로 부산·경남 행정통합을 추진하겠다고 밝히자, 전재수 부산시장은 내년과 내후년은 부울경의 공통사업 예산 확보부터 하자고 맞받았다. 전 시장의 부울경 메가시티와 박 지사의 부산·경남 행정통합 정책 방향이 부딪히는 순간이다. 서로 자신의 공약을 관철시키기 위해 상대방에게 잽을 던지면서 기싸움을 벌인 셈이다. 이미 예상했던 갈등이다. 물론 벌써 갈등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갈 길이 멀기에, 일단은 가벼운 의견 교환 정도로 해두자.
김상욱 울산시장도 초광역 협력체계 복원과 공동사업 추진 등을 통해 행정통합 논의를 단계적으로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에, 이번 지방선거를 계기를 부산·경남 통합을 넘어 부울경 통합이라는 더 큰 판이 형성됐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현실적으로 다음 지방선거 전까지는 추가 행정통합이 불가능하다. 이미 선출된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의 임기를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듯이, 사실상 부울경 통합은 각 정당의 대립과 지자체장 개인의 정치적 이익 등 각종 셈법이 동반되기에 쉽지 않은 길이다.
이는 과거 추진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부울경 통합이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은 2021년 부울경 광역지자체 간 합의로 ‘부울경 메가시티’ 구축 계획이 발표되면서다. 메가시티는 행정통합의 전 단계 정도로, 부울경 광역특별연합을 설립해 초광역적으로 공동의 정책을 개발, 집행하자는 것이다. 당시 부울경 광역단체장이 모두 더불어민주당 소속이었기에 가능했다.
이후 2022년 지방선거에서 부울경 광역단체장이 국민의힘 소속으로 전부 바뀌면서 메가시티는 사실상 물건너갔다. 여론을 의식해 ‘부울경 경제동맹’ 결성을 내세웠지만, 정책의 집행력과 일관성 부족 등 결속력이 떨어진 형식적인 동맹으로 흘러갔다.
통합론에 다시 불을 지핀 것은 지난해 12월 이 대통령이 대전·충남 통합을 언급하면서였다. 부울경을 비롯한 전국은 광역행정통합이라는 거센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당시 김두겸 전 울산시장은 통합을 반대하며 일찌감치 발을 뺐고, 박형준 전 부산시장과 박완수 지사는 주민의 동의가 먼저라는 미명하에 당장의 통합 대신 2028년 4월 통합에 합의했다. 당시에도 주민투표를 거칠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대통령과 다른 정당 소속, 개인의 정치적 이해관계 등으로 미뤘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부산시장과 울산시장이 바뀌고, 그마저도 부울경 지자체장이 민주당과 국힘 양당으로 갈리면서 부울경 통합은 차질이 불가피해졌고, 셈법은 더욱 복잡해졌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올해 주민 찬반 투표를 거쳐 내년 통합특별법을 만들고, 2028년 4월 총선 때 통합단체장을 선출하는 방안이었으나, 힘들게 선거에서 이겼는데 2년도 채 안 돼 직을 버린다는 용단을 내릴 정치인은 많지 않다. 물론 이것 또한 행정통합을 2028년으로 한다는 합의를 할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결과였다.
그렇다면 향후 부울경 통합은 현실적으로 어떠한 길을 가야 할까.
통합 명칭, 청사, 주민 수용성, 권한 배분 등 해결해야 할 쟁점이 많다. 통합TF팀을 구성해 지속적으로 논의함으로써 갈등을 하나씩 없애 나가야 한다. 호남·충청권은 반도체, AI 등 첨단산업 유치로 생존의 길이 열린 반면, 부울경은 통합으로써 규모의 경제를 만들어 성장 동력을 창출해야 한다.
어영부영 시간을 끌지 말아야 한다. 전 시장과 김 시장의 선 메가시티, 후 행정통합이든 박 지사의 선 행정통합이든 방식은 중요하지 않다. 결국 부울경 행정통합으로 이르는 길은 세 명이 조속히 만나 머리를 맞대야 한다. 각자의 정치적 욕심을 버리고, 부울경의 발전과 시민, 도민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부울경 통합은 생존의 문제다. 지자체장 간의 기싸움으로, 정치적 셈법으로 더 늦춰진다면, 시·도민의 분노를 걱정해야 할 수 있다.
cornie@busan.com
2026-07-26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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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강물이 흘러야 녹색 눈물이 멈춘다
한여름이 되면 낙동강이 비명을 지른다. 올해도 다르지 않다. 기후에너지환경부 물환경정보시스템 기준으로 지난 16일 현재 낙동강 해평, 강정·고령, 칠서, 물금·매리, 화명 등 5개 지점에 녹조로 인한 조류 경보가 발령 중이다. 특히 강정·고령, 칠서, 물금·매리 지점은 이달 들어 ‘경계’ 경보가 지속되고 있다. ‘경계’ 경보는 유해 남조류가 2회 연속으로 1만 세포/ml 이상일 때 발령되는 경보로, ‘대발령’ 다음으로 높은 심각한 단계다.
고통은 강에 머물지 않는다. 얼마 전 강 본류를 뒤덮은 짙은 녹조가 인근 들녘의 농수로와 양수장으로까지 번졌다는 〈부산일보〉 기사를 봤다. 유해 남세균은 농업용수 공급시설을 점령했고, 인간의 먹거리 안전은 물론 생태계까지 위협하고 있다. “이 독한 물로 농사를 지으면 어떤 작물이 제대로 자라겠느냐.” 농민들의 절규가 처절하다.
강의 고통은 대체로 빠르게 흐르지 못하는 물길 때문이다. 흐르지 않고 고이면 썩기 마련이다. 환경단체는 녹조로 썩어가는 낙동강의 8개 보 수문을 즉각 열어 물길을 빠르게 하고 탁한 녹색 물빛을 맑게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부는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올 여름 녹조가 유독 심하긴 해도, 사실 올 여름만의 문제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낙동강 수문 개방을 두고 벌어지는 환경단체와 정부 간의 실랑이 역시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매년 녹조로 고통 받는 강을 생각하면 수문 몇 개쯤은 통 크게 열어줘도 될 것 같지만(수문 개방에 뭐 그리 큰 돈이 들어갈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라 한다.
수문을 열면 강의 수위가 낮아지는데, 이때 인근 취수장과 양수장 기능에 비상이 걸린다. 4대강 사업 이후 대부분의 취수 시설이 높게 유지된 수위를 기준으로 설계된 까닭에 수위가 크게 떨어지면 취수구가 수면 위로 드러나 물을 끌어오는 기능 자체가 마비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영남권 수백만 명의 식수 공급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농업용수 역시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정부는 수문 개방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문제의 본질에는 수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취·양수장 개선 사업에 있다. 물론 더 거슬러 4대강 사업을 원망할 수도 있을 테지만, 사후약방문이라 넘어가기로 한다. 어쨌든, 보의 수문을 열더라도 식수와 농업용수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려면 낮은 수위에서도 취수가 가능하도록 취수구를 하천 바닥 쪽으로 낮추거나 대형 펌프를 보강하는 공사가 절실한데, 그것이 취·양수장 개선 사업이다. 그러나 해당 사업의 속도는 막힌 낙동강 물길만큼 더디다.
왜 더딘가. 4대강 사업을 바라보는 정무적 판단이 정권마다 달랐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일찌감치 취·양수장 개선 사업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2021년부터 2026년까지 한강과 낙동강 유역의 취·양수장을 대대적으로 개선하겠다는 계획도 있었다. 그러나 정권 교체 이후 4대강 사업의 실책을 인정하기 싫은 새 정부의 정책 기조가 바뀌면서 사업은 속도를 잃었다. 녹조 문제가 다시 심각해지자 사업은 재개됐지만 완공 목표는 2028년으로 늦춰졌다. 현재 개선이 완료된 곳은 전체 대상 171개소 가운데 15개소에 불과하다. 완료율은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150곳이 넘는 현장은 여전히 설계 단계에 머물러 있다.
비효율적인 행정력도 문제다. 생활·공업용수를 맡은 환경부와 농업용수를 담당하는 농림축산식품부의 일정이 엇갈렸고, 사업을 맡은 지방자치단체는 예산과 전문인력이 부족했다. 하천점용허가와 환경영향평가 등 복잡한 인허가 절차도 착공을 늦췄다. 정밀 설계가 끝나야 예산을 집행할 수 있는 구조까지 겹치면서 사업은 제자리걸음을 반복했다.
더이상 미룰 순 없다. 수문 개방으로 물길을 빠르게 하는 것만큼이나 취·양수장 개선 사업의 속도를 빠르게 하는 것이 절실하다. 중앙정부가 예산과 행정 지원을 과감하게 확대하고, 직접 교부와 전문기관 위수탁 같은 제도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사업을 국가 재난 예방 사업으로 격상하는 방법도 고민해 볼만 하다.
낙동강은 영남의 식수와 농업, 생태계를 함께 떠받치는 생명의 강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으로 쌓은 둑이 물길을 막았고, 강이 녹색 눈물로 고통을 호소하는 데도 여전히 인간의 필요에 의해 그 물길을 쉽사리 열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강의 눈물은 어민들의 눈물로, 농부의 눈물로 번지고, 영남권 시민들의 눈물로 번질 태세다. 이제는 정말 강의 눈물을 멈춰야 할 때다. 그러기 위해선 하루 빨리 취·양수장 인프라를 새롭게 갖춰, 필요할 때 주저없이 강물을 흘릴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2026-07-19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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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버티는 장동혁에 속수무책… '웰빙 본색’ 국힘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6·3 지방선거 결과를 두고 자신이 ‘혼신을 다해’ 이룬 선전으로 포장하는 건 염치 없는 짓이다. 4년 전 12석이던 당의 광역단체장 의석은 이번에 4석으로 쪼그라들었다. 장 대표가 선거 전 스스로 승부처로 꼽은 두 곳 중 부산시장은 졌고, 서울시장은 반(反)장동혁을 표방한 후보가 승리했다. 이것만 해도 장 대표는 별로 할 말이 없어야 한다.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면 이번 선거 민심은 장 대표를 ‘정밀 타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거운동 기간 장 대표가 가장 열심히 지원 사격을 했던 충청권 광역단체장은 전패했고, 무소속 한동훈 후보 떨어뜨리기에 당력을 쏟아부은 부산 북갑에서는 한 후보가 보란 듯이 승리했다. 장 대표는 자신의 사퇴를 촉구하는 이성권(부산 사하갑) 의원의 지방선거 ‘성적표’를 거론했지만, 정작 이 지역은 국민의힘이 광역·기초의원을 석권한 반면 장 대표야말로 지역구에서 12년 동안 당 소속이던 서천군수는 물론 도의원 2석까지 민주당에 모두 뺏긴 것으로 나타났다. 장 대표를 멀리한 후보는 살아남았고, 장 대표가 지원한 후보는 낙선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당권파가 과거 선거를 ‘선택적 비교’해 성과를 부풀리는 것도 궁색하다. 이번 선거는 보수 대통령 탄핵 후 1년여 만에 치르는 지방선거라는 점에서 2018년과 유사한 환경이었지만, 당시에는 투표 하루 전 ‘북미 정상회담’이라는 메가톤급 변수가 있었고, 이번에는 오히려 ‘공소 취소 특검’이라는 야당의 호재가 등장했다. 국민의힘이 대선 패배 이후 1년 동안만이라도 반성과 쇄신으로 내부 정비를 했다면 선거 환경은 여야가 대등했거나, 오히려 야당이 우세했을 수 있었다. 최악의 상황을 자초해놓고 그보다 조금 나은 결과가 나왔다고 자화자찬하는 모습에 실소가 나온다.
아무리 ‘데이터’를 들여다봐도 유구무언이어야 할 것 같은 장 대표는 스스로 책임지기는커녕 ‘징계 정치’를 재가동해 반대파에게 책임을 씌우려 한다. 상식을 완력으로 뒤집으려는 꼴이다. 그런데 이 또한 명분이 없어 우왕좌왕하는 꼴이다. 무소속 후보를 찾아가 치킨 회동을 한 의원들을 징계한다? 그렇다면 지난 대선 때 당 소속 김문수 후보를 한덕수 전 국무총리로 무리하게 교체하려다 선거판을 꼬이게 만든 구주류 의원들은 어떤 징계를 받았나. 치킨 회동이 아니라 대놓고 무소속 후보 지원 연설을 한 당권파 인사는 어쩔 건가. 이 또한 ‘선택적 징계’로 돌파할 건지 묻고 싶다.
오히려 장 대표가 나홀로 매달리는 ‘전국 재선거’ 주장이야말로 해당 행위라고 할 만하다. 당권파와 가까운 구주류 의원들조차 전국 재선거와 거리를 두는 것은 현실성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침묵하지만, ‘투표 용지 부족’과 무관한 압도적 다수의 유권자들에게 재선거 강요는 더 큰 공정성 훼손을 부를 수 밖에 없다. 조금만 생각해도 전면 재선거는 안 했을 때보다 비교할 수 없이 많은 부작용을 낳을 것이 자명하다. 2030의 분노를 정치권이 끌어안는 방법은 공감하되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지, 책임지지도 못할 주장으로 그들을 현혹하는 게 아니다. 그게 취약한 입지를 지키겠다는 얕은 셈법이라면 공당의 신뢰도만 좀먹는 중대한 해당 행위다.
장 대표는 정치 문화의 저급화에도 책임이 크다. 공식회의에서 현직 대통령을 ‘이재명’으로 부르는 것도 모자라 ‘재명아’ 팻말을 꺼내든 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장 대표를 비판하는 어떤 의원들도 반말로 조롱하는 ‘저렴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국가 원수에 대한 막가는 조롱이 진영 간 적대감만 북돋을 뿐 어떤 정치적 효용이 있겠나. 장 대표를 떠받드는 광장의 소수만 열광할 뿐, 상식 있는 다수는 그 품격 없음에 탄식이 절로 날 뿐이다.
장 대표의 비상식적 독주로 인한 가장 큰 해악은 제1 야당의 견제 기능이 무력화된다는 것이다. 여권 외에는 대다수가 반대하는 검찰 보완수사권 폐지를 민주당이 마구 밀어붙일 수 있는 배경에는 야당의 비판이 전혀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파묘’(과거사 캐기) 논란까지 부른 이전투구 당권 경쟁, 투기장이 된 주식 시장, 다시 급등하는 부동산 등 여당의 악재가 수두룩하지만 당 지지율은 오히려 국민의힘이 빠지는 추세다. 국정의 균형을 위해 존재감 있는 야당이 얼마나 필요한지 장 대표의 국민의힘이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당이 벼랑 끝으로 걸어가는 형국이지만 당사자인 장 대표는 “사퇴는 없다”를 고수하고, 당내에는 “대표가 버티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넋두리만 가득하다. ‘웰빙 정당’ 국민의힘의 현실이다. 일부 의원들은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하지만, 이대로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이 당은 가망이 없다’고 확신하는 국민들이 늘어날 것 같다.
2026-07-12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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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일류 기업과 삼류 정치
“우리나라 기업은 이류, 행정은 삼류인데, 정치는 사류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1995년 4월 국내 언론사 베이징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한 발언이 요즘 세간에 자주 오르내린다. 기업은 제 몫을 다해 주고 있는데 반해 우리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수준이하라는 얘기다.
반도체에선 인공지능(AI) 바람과 함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분기별로 수십조 원의 영업이익을 내며 글로벌 메모리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고, 방산과 조선, 배터리, 초고압 변압기, 정유화학 등의 제조 분야에서도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특정 분야에 강점이 있는 선진국들과 달리 한국은 첨단 기술로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외국 경제학자들은 ‘저렇게 작은 나라에서 지금 글로벌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주요 제조 분야를 경쟁력 있게 유지하고 있을 수 있는 나라가 있을까’하며 감탄하고 있다.
이 같은 제조기업들의 활약 덕분에 최근 코스피 지수도 9000을 넘나들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올해 초만 해도 한국 경제는 ‘1%대 저성장’이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졌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글로벌 투자은행과 경제연구기관들은 한국의 3~4% 성장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정부·여당은 최근 경제성장과 주가 상승은 자기들이 정치를 잘 한 덕분이라며 자화자찬하기 바쁘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AI 바람을 타고 관련 종목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수요가 폭발한 탓”이라며 정부·여당과 다른 분석을 내놓고 있다.
오히려 여론 수렴 없이 이뤄지는 정책 발표와 실패로 인해 국민들의 실망만 늘어가는 분위기다.
대표적인 게 부동산 정책이다. 다주택자 압박에 수도권 위주로 전세난, 월세 상승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당 지지도가 높았던 20~40대는 마음을 바꾸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2022년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 시절 “국정 운영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과학적 근거에 의한 판단과 정책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최근 기업을 규제하는 법안을 마련하면서 야당이나 경제주체 등 이해당사자와의 협의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노조에게 파업 책임을 묻지 못하는 ‘노란봉투법’까지 도입하면서 기업인들사이에선 “못해먹겠다”는 얘기가 절로 나온다.
최근 1000조 원 이상이 드는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사업을 놓고도 후보지도 없이 ‘호남’이라는 특정 지역을 막무가내식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영남은 왜 안되냐”고 질문하면 대통령은 “그동안 영남은 한 게 뭐 있냐”는 식으로 답한다.
국책사업도 아니고 기업이 자율적으로 정해야 하는 대규모 투자 사업에 현 정부가 나서서 추진하는 모양새도 좋지 않다. ‘외압이 아니냐’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번 결정에 앞서 청와대와 여당은 수개월 전부터 반도체 기업 초과 이익의 사회환원을 언급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압박했다. 정부·여당 인사들은 공산당식으로 “나눠 갖자”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외압이라는 지적에 여당 측 인사들은 “삼성이 어떤 기업인데 우리가 하라한다고 하겠냐”는 식의 대응논리를 펴고 있다.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재명 대통령 임기 내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건설을 마치겠다”고 했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의 경우 부지 선정과 검토에 보통 5~7년이 걸린다. 현재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는 군공항 부지는 부지 특성상 시간이 더 많이 걸릴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또 올초만해도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추진 얘기가 없다가 2개월전에야 급부상했고, 지난달 29일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가 주내용인 ‘메가 프로젝트’ 발표가 이뤄졌다.
이 대통령은 메가 프로젝트를 두고 “제가 지금까지 해낸 일 가운데 가장 큰 국민적·역사적 성과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야권은 곧바로 ‘직권남용’이라며 반발했고, 이 대통령은 ‘언제까지나 행정지도’라고 눙쳤다. 그간 역대 대통령중에 무리하게 일을 추진하다가 ‘영어(囹圄)의 몸’이 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사태가 그랬다. 이번 사안도 그에 못지 않게 ‘위험한 일’로 여겨진다.
참여연대 출신의 김경률 회계사는 한 유튜브에 출연해 “삼성전자의 최근 수년간 사업보고서 어디에도 호남 반도체 투자에 대한 얘기가 없다. 대규모 투자는 이사회를 거쳐야 하는 사안인데 과연 통과할 수 있을까”하며 의문을 제기했다. 삼성의 모 반도체 임원은 “이번 호남 반도체 투자는 자발적 투자가 아니다”고 했다. 삼류 정치가 계속되면 일류 기업도 결국 이류 기업이 된다. 아직도 정치가 기업 발목을 잡는 나라,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2026-07-0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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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브랜드가 없다고? 문제는 '연결'이다
너무 쉽게 생각했다. 이슈가 된 지 좀 지났으니 빵을 쉽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착각이었다. 오전 7시도 안 된 이른 시각, 계절 한정 케이크를 사기 위한 행렬은 이미 여러 블록을 지나 끝 모르게 이어졌다. 대기 줄은 한낮에도 줄지 않았고, 골목골목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성심광역시’라는 신조어까지 만든 성심당 얘기다. 밀가루 두 포대로 시작해 70년을 시민들과 함께 한 성심당은 대전이라는 도시의 브랜드가 됐고, 낙수 효과는 지역 상권으로 널리 퍼졌다.
이처럼 브랜드 파워가 도시의 운명을 바꾼 사례는 대전에 국한되지 않는다. 스타벅스의 출발지인 미국 시애틀은 ‘커피 도시’라는 정체성과 함께 흐린 날씨와 독서 문화, 커피를 결합한 ‘지적인 도시’ 이미지 구축에도 성공했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는 매년 8월 세계 최대 공연예술 축제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개최 도시이자 해리포터 신드롬을 일으킨 조앤 롤링을 중심으로 한 ‘영감의 도시’로 명성을 드높이고 있다. 일본 구마모토현은 공식 마스코트인 쿠마몬으로 도시의 인지도를 끌어올렸다.
이쯤에서 부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안타깝게도, 언젠가부터 부산은 ‘노인과 바다’라는 자조 섞인 별칭에 갇혔다. 고령화와 청년 유출, 산업 생태계 변화가 겹치면서 제2 도시의 위상마저 흔들린다는 상실감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부산이 가진 압도적인 자산을 간과한 결과다. 부산은 강·산·바다가 한 도시 안에 공존하는 리우데자네이루나 케이프타운을 능가하는 지리적 잠재력을 가졌다. 무엇보다 우리에겐 ‘피란수도 부산’이라는 독보적인 무형 자산이 있다.
6·25 전쟁 발발 직후 1023일간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였던 부산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회복 탄력성’의 원형이자 나라를 지탱한 마지막 보루였다. 임시수도기념관과 정부청사, 유엔기념공원은 그 생생한 현장이다. 절망 속에서도 나라를 지키고 삶을 이어간 사람들의 생존 기록이자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부산만의 이야기’ 역시 유효하다. 전쟁 기간 부산으로 집결했던 수많은 예술가들은 지역 예술가들과 함께 부산의 예술지형을 바꾸고 한국 문화예술의 토대를 지켜냈다. 피란수도의 고단한 일상이 만들어낸 산물인 밀면과 돼지국밥 등은 지역 대표 음식으로 성장했다.
문제는 ‘연결’이다. 대전이나 에든버러, 시애틀 등과 달리 부산은 도시가 가진 자산들을 브랜드로 꿰어내지 못했다. 전쟁 폐허 위에 재건된 구시가지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고 ‘불사조의 도시’로 자리매김한 폴란드 바르샤바처럼 부산도 파편화된 자산을 ‘피란수도’라는 하나의 서사로 엮어내야 한다. 전쟁의 상흔 위에서 피어난 문화예술, 피란의 기억이 담긴 음식과 골목, 우리나라 최고의 물류·산업 도시로 이끈 역동성까지…. 이 모든 것이 ‘피란수도’라는 브랜드 아래 하나로 결집될 때 부산은 ‘생존과 부활, 회복’의 도시로 세계 무대에 설 수 있다.
피란수도 유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국가 전략으로 격상할 필요도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는 세계가 공인한 ‘브랜드 인증서’다. 이는 부산을 찾는 외국인들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에 참전한 22개국 후손들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들 국가를 중심으로 한 ‘추모 관광’은 부산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 지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부산시는 물론 정부도 지원에 적극 나서야 하는 이유다.
피란수도 서사를 담은 콘텐츠 발굴과 경제 생태계도 촘촘히 짜야 한다. 성심당이 대전의 대표 브랜드가 된 데는 스토리가 결정적인 힘이 됐다. 빵 탄생 배경을 전시하고 관광객이 그 일부가 되도록 한 것이 핵심이다. 독일 베를린은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등 전쟁의 기억을 도심에 배치해 도시의 정체성을 확립했고 미국 보스턴은 ‘프리덤 트레일’을 조성해 역사적인 명소를 한데 묶고 관광객을 모은다. 부산 역시 야간 문화행사를 확장해 부산항 제1부두에서 임시수도 정부청사, 아미동 비석마을, 우암동 소막마을, 유엔기념공원 등을 잇는 ‘피란수도 기억의 길’을 설정하고 도보 투어 등을 진행하는 건 어떨까. 부산국제영화제 등 세계적인 행사와 연계하고 AI 기술을 도입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상시 이벤트를 마련하는 것도 방법이겠다. 강력한 미식 콘텐츠가 된 밀면과 돼지국밥 스토리에도 힘을 싣고 유통 경로를 다변화한다면 관련 기업들 역시 부산의 얼굴이 될 것이다.
지역의 가치를 높이는 로컬 브랜드와 역사의 생명력을 결합한 ‘부산 브랜딩’, 도시를 먹여 살리는 핵심이다. 부산의 미래는 피란의 기억이 빚어낸 거대한 도시 브랜딩의 결과물이었으면 한다. 자조의 언어를 걷어내고 ‘생존과 부활, 회복’의 DNA를 입은 부산으로 나아간다면, 브랜드가 도시를 바꾼 사례에 부산도 언급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한다.
2026-06-28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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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전재수호’ 해양수산 청사진에 거는 기대
지난 3일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부산 시민의 선택을 받은 전재수 부산시장 당선인. 아마도 당선이 확정된 순간부터 새로운 민선 9기 부산시정을 그가 과연 어떻게 그려나갈지 많은 이들의 관심사가 됐을 것이다.
그의 시정인수위원회 ‘다시 뛰는 부산 위원회’는 핵심 공약인 ‘해양수도 부산 완성’을 실현하기 위해 관련 분야 정책 구상에 연일 활발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단순히 그가 이재명 정부의 초대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는 점 뿐만 아니라, 부산의 미래성장동력이 바다에 있다는 점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자신의 행정력과 능력치를 온통 부산의 새로운 도약에 쏟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인수위는 우선 체계적인 해양 정책 설계를 위해 ‘해양수도완성 부산비전분과’를 별도로 두고, 주력산업 고도화와 미래 신산업 육성을 긴밀히 검토 중이다. 인수위 부위원장으로 40대 여성 해양·물류 전문가를 선임한 것은 물론이고 지역의 해양수산 전문가를 다수 포진시켜 단순히 ‘보여주기’식이 아닌 글로벌 해양수도 전략을 뒷받침할 실무형 젊은 인재 중심으로 분과를 꾸렸다.
지자체 최초 해양(경제)부시장 신설도 특별히 눈에 띄는 정책이다. ‘해양수도’라는 정체성을 부산시청 조직에 이식하기 위한 것인데, 부산과 같은 광역시 부시장은 2명으로 인원이 제한돼 있어, 기존 ‘미래부시장’의 명칭과 기능을 ‘해양부시장’으로 바꿀 것이라는 가능성이 점쳐진다. 해양수산 분야 행정과 정무 경험을 두루 갖춘 인사를 발탁하겠다는 원칙을 밝히면서 이에 부합할 인물이 누가 될지, 관련한 조직은 어떻게 개편될지도 함께 궁금해진다.
그간 부산시청 조직 중에 해양수산 부서는 3급 국장을 두는 단일 조직으로 국한돼왔다. 그마저도 최근에는 해양농수산국으로 두고, 산하에 해양수도정책과, 해운항만과, 수산정책과, 수산진흥과에 농축산유통과를 합쳐 주요 부서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앞으로는 크게 도시혁신균형실, 환경물정책실로 이뤄진 기존 조직을 뒤엎고 해양 관련 부서를 2급 실장이 주도하도록 해 전면에 내세울 가능성이 크다. 현재 타 부서에 포함돼 있는 해양 경제, 해양 관광, 해양 문화, 공항, 물류 등의 조직을 이관해 힘을 실을 수도 있다.
더불어 인수위는 해양수산 현장의 목소리를 골고루 청취 중이다. 선거 기간 이미 부산의 해양수산 관련 단체와 노조는 당시 전재수 후보에 대해 지지선언을 이어왔는데, 이들의 정책적 의견은 물론이고 한국해양진흥공사, 부산항만공사, 연구기관인 한국해양수산개발원과 한국조선해양기자재연구원, 국내 유일의 선박 검사기관인 한국선급 등을 잇달아 방문해 실무 의견을 청취하고 관련 산업 육성과 정책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해양수산부 북극항로추진본부도 만났다. 이재명 정부의 국정과제이자 전재수 당선인의 핵심 공약인 ‘북극항로 개척’은 올 9월 상업화 가능성을 여는 컨테이너선 시범운항이라는 첫 발을 뗄 계획이다. 부산의 해운선사가 시범운항 참여에 도전장을 내민 만큼 해수부와 함께 민선 9기 부산시도 내빙 선박 확보에 대한 금융 지원 등 지역 해양 산업계에 활력을 불어넣을 실행 방안과 정책 발굴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전 당선인이 선거 과정에서 가칭 '북극항로 추진본부'를 시정에도 신설해, 부산시의 해양 기능을 일원화하고 해양수산부와 협업 체계를 구축하겠다고 밝힌 점도 주목된다.
이밖에도 지난해 전 당선인이 해수부 장관 시절 주도했던 ‘해수부 전체 부산 연내 이전’의 성과를 바탕으로 HMM 본사 부산 이전과 해사법원 유치를 일군 데 이어, 해수부 산하 공공기관 이전과 동남권투자공사 설립까지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응원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게 된다. 여기에 선거기간 가장 뜨거웠던 북항 야구장 건립 공약도 귀추가 주목된다. 지난 18일 항만공사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고 법사위에 계류된 항만개발법도 곧 국회 문턱을 넘으면, 장관 시절부터 추진해 온 북항 돔구장 건립을 위한 부산항만공사와의 본격적인 협의 및 사업비 조달 논의도 시동을 걸 수 있을 것이다.
전 당선인은 시민들로부터 부산시장이라는 소중한 기회를 아주 어렵게 얻었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4년 임기 동안 지금의 약속과 의지만큼 시정이 역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일하는 시장’을 갈망하며 그를 선택한 시민들을 늘 먼저 생각해주길 바란다. 바다의 가능성과 부산의 저력을 일깨워 명실상부 ‘대한민국 해양수도’로 변모시키겠다는 ‘전재수호’의 변화와 혁신에 기대를 보낸다.
2026-06-2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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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월드컵의 추억
지난 12일 북중미 월드컵 개막식 무대에서 세계적인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와 함께 노래하는 가수 이재를 보며 4년 전 카타르 월드컵이 떠올랐다. 2022 월드컵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가운데 하나는 BTS 정국의 개막식 공연이었다. 정국은 월드컵 공식 주제가 ‘Dreamers’를 카타르 가수 파하드 알쿠바이시와 함께 선보이며 세계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춤과 노래를 완벽하게 소화하는 모습에 감탄하며 영상을 여러 차례 반복해 봤던 기억이 난다. 세계 최대 스포츠 축제의 무대 한가운데 한국 가수가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적잖은 감동이 있었다.
4년이 흐른 이번 월드컵 개막식에서도 한국 가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OST를 부른 이재는 월드컵 공식 주제곡 ‘DNA’를 부르며 한국어 가사도 선보였다. 미국 개막 경기에서는 블랙핑크 리사가 월드컵 주제가 ‘GOALS’를 불렀고, 다음 달 결승전 하프타임쇼는 BTS가 장식할 예정이다. 월드컵 무대에서 K팝 스타를 보는 일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시대가 됐다.
하지만 월드컵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여전히 2002년 한일 월드컵이다. 당시 갓 입사한 사회부 기자였던 나는 한국 경기가 열릴 때마다 서면 거리응원 현장으로 향했다. 옛 마리포사 앞 광장은 부산의 대표적인 응원 장소였다. 경기 시작 전부터 시민들이 모여들었고, 붉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대~한민국”을 외쳤다. 모르는 사람끼리 어깨동무를 하고 응원가를 불렀다. 지금 생각해도 뜨겁고 열정적인 풍경이었다.
한국 대표팀은 폴란드를 꺾고, 포르투갈을 잡으며 사상 첫 16강에 진출했다. 이후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차례로 넘고 4강 신화를 썼다. 한국이 승리할 때마다 시민들은 중앙대로로 쏟아져 나갔고 새벽까지 축제를 이어갔다. 취재를 위해 현장에 있었지만 어느 순간 나 역시 그 축제의 일부가 돼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열기는 단순히 축구 때문만은 아니었다. IMF 외환위기의 상처를 딛고 다시 일어서던 시기였다. 경제는 회복세를 보였고 사회 전체에 자신감이 넘쳤다. 일본과 함께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을 개최했다는 사실 자체가 자부심이었다. 세계가 한국을 주목했고, 우리는 스스로를 새롭게 발견했다. 거리응원은 단순한 응원을 넘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집단적 자신감의 표현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2002 월드컵은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를 넘어 하나의 시대적 기억으로 남았다. 지금도 2002 월드컵을 떠올리면 경기 결과보다 거리의 함성과 붉은 물결이 먼저 생각난다.
그 이후에도 월드컵은 계속됐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 나는 스포츠부에 있었다. 당시 야구 등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축구 담당 선배가 현지 취재를 가면서 국내에서 경기 결과를 챙겼다. 한국은 조별리그를 통과하며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비록 우루과이에 아쉽게 패했지만 한국 축구의 또 다른 이정표였다.
사실 이제 월드컵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예전 같지 않다. 월드컵이 더 이상 4년에 한 번 찾아오는 아주 특별한 이벤트만은 아니게 된 영향도 있을 것이다. 유럽 축구를 실시간으로 시청할 수 있고, 스포츠를 비롯한 다양한 콘텐츠가 쏟아지는 시대가 됐다. 월드컵의 희소성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월드컵은 다른 이벤트보다는 힘을 갖고 있다. 한국이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역전승을 거두고 기분 좋은 출발을 하면서 이번 월드컵에 대한 관심도 조금 높아지고 있다. 경기 내용도 나쁘지 않았다. 대표팀은 2010 남아공 월드컵 이후 16년 만에 조별리그 1차전 승리를 거두며 기대를 키우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대회는 손흥민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사실상 마지막 월드컵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 축구의 상징이었던 손흥민은 누구보다 많은 부담을 짊어지고 대표팀을 이끌어 왔다. 월드컵 무대에서 후회 없는 마무리를 하기를 바라는 팬들이 많다. 반대로 새로운 세대에게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첫 경기에서 역전골을 터뜨린 오현규를 비롯해 젊은 선수들은 이번 대회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이번 월드컵은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손흥민의 화려한 라스트 댄스일 수도 있고, 새로운 스트라이커의 탄생일 수도 있다. BTS가 장식할 결승전 하프타임쇼일 수도 있다. 어쩌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대한민국 파이팅이다.
2026-06-14 [17: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