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국에서] 877표에 담긴 부울경 통합의 정치경제학
“부산·울산 단체장이 행정통합을 하겠다고 나선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통합 절차를 시작할 생각이 있다.” 박완수 경남지사가 지난 6일 민선 9기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에서 부산과 울산에 결단을 촉구했지만, 전재수 부산시장은 “실현 불가능한 제안”이라고 맞받으며 경제협력 중심의 특별연합을 고수했다. 불과 한 달 전 부울경 3개 시도지사가 광역화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공동선언문까지 채택했지만, 통합 방식의 간극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같은 목표를 두고 왜 이처럼 해법이 엇갈릴까. 부울경 단체장간에 통합을 바라보는 절차와 정책적 철학이 다른 탓도 크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행정통합은 행정구역뿐 아니라 정치권력의 대대적 재편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부산·울산·경남의 광역단체장 세 자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로 줄고, 750만 명이 넘는 주민을 대표할 통합단체장을 새로 뽑아야 한다.
광주·전남은 지난 지방선거에서 통합특별시장을 선출했다. 양 지역 단체장과 지역 정치권 주류가 모두 민주당이어서 광역단체장 두 자리가 하나로 줄더라도 중앙당 차원에서 당내 교통정리가 가능한 구조였다. 대구·경북 역시 국민의힘 소속 단체장들이 통합 추진에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반면 부울경은 다르다. 부산과 울산은 민주당, 경남은 국민의힘이 지방권력을 차지하고 있다. 통합 시기와 방식에 따라 권력 지형이 달라질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여야의 유불리도 바뀐다.
지난 6·3 지방선거 결과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부산에서 민주당 전재수 후보는 국민의힘 박형준 후보를 4만 5941표 차로 이겼다. 반대로 경남에서는 국민의힘 박완수 후보가 민주당 김경수 후보를 4만 5064표 앞섰다. 두 지역 양당 후보의 표를 합치면 민주당 173만 8519표, 국민의힘 173만 7642표로 차이는 고작 877표다. 울산도 민주당 김상욱 후보가 국민의힘 김두겸 후보를 1만 7505표 차로 앞섰지만, 보수 계열 무소속 박맹우 후보가 3만 2363표를 얻은 것을 감안하면 정치적 균형은 팽팽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현재의 셈법도 엇갈린다. 민주당은 부산과 울산 두 시정권력을 갖고 있다. 특별연합을 택하면 두 시장직을 유지하면서 초광역 협력의 성과도 낼 수 있다. 반면 행정통합은 이미 가진 두 자리를 하나의 불확실한 통합단체장 자리와 바꾸는 일이다. 반대로 국민의힘은 경남 한 곳만 가지고 있지만, 통합 후 선거에서 승리하면 부울경 전체의 행정권을 확보할 수 있다.
단체장 개인의 정치적 시간표도 다르다. 전재수 부산시장과 김상욱 울산시장은 초선이다. 부산 민주당은 2021년 보궐선거에서 시장직을 내준 뒤 5년여 만에 시정권력을 되찾았고, 울산 민주당도 2022년 내줬던 시장직을 4년 만에 탈환했다. 두 시장에게는 시정 성과를 내고 지역 내 정치적 기반을 다지는 일이 우선일 수 있다. 반면 박완수 지사는 재선으로 도정의 연속성과 정치적 기반이 상대적으로 안정돼 있다.
결국 부울경은 통합 대상이면서 동시에 여야의 승부처다. 세 단체장이 같은 당이 된다면 통합 논의가 급속히 힘을 받을 수도 있지만, 지금처럼 여야가 갈리면 통합이 어느 한쪽의 권력 확대나 축소라는 정치공학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그러나 통합 논의가 정치공학에만 매몰돼서는 안 된다. 통합단체장이 탄생하면 부울경의 위상 자체가 달라진다. 부울경이 하나로 합쳐지면 인구 750만 명, 지역내총생산 366조 원 규모의 거대 광역정부가 탄생한다. 통합단체장은 중앙정치에서도 서울시장 못지않은 위상과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
경제적 유인도 분명해야 한다. 광주·전남 통합에 대규모 국가 지원과 반도체 클러스터라는 구체적 보상이 주어졌듯, 부울경도 가덕신공항과 해양항만, 광역철도, 조선·원전·수소·미래모빌리티·우주항공·방산을 하나의 성장전략으로 묶고 대규모 재정지원과 규제·세제 특례를 끌어내야 한다.
최종적으로 통합의 열쇠가 돼야 하는 것은 시민적 동의다. 부산에서는 통합 이후 재정 배분에서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우려가, 경남에서는 부산 중심 체제에 흡수될 수 있다는 걱정이, 울산에서는 거대 부산 중심 광역정부의 주변부로 밀릴 수 있다는 불안이 나올 수 있다. 이 지역별 손익계산을 넘어설 만큼 통합 편익이 분명해야 한다.
통합의 최종 판단에서 정치공학은 어디까지나 후순위여야 한다. 정치적 이해관계는 통합을 촉진하거나 늦추는 변수가 될 수 있지만, ‘꼬리’가 ‘몸통’을 흔들어서는 안 된다.
박태우 정치부장 wideneye@busan.com
2026-10-18 [18:13]
-
[편집국에서] 격차 해소라는 난제
우리나라 수출 실적이 사상 최대 기록을 쓰고 있지만, 이를 체감하는 국민은 많지 않다. 반도체 호황이라는 특정 산업에 기댄 탓이다. 경기가 나아졌다고 느낄 만한 신호는 ‘반도체 벨트’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선 감지되지 않는다. 일부 대기업에선 수억 원의 성과급을 받게 됐다지만, 대부분의 직장인들에겐 ‘딴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AI(인공지능) 대전환이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 ‘K자형 양극화’가 날로 심화되는 모양새다.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올해 1∼8월 대기업 생산지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2.9% 증가한 반면, 중소기업 생산지수는 0.8% 감소했다. 올 1∼8월 기준 대기업 생산지수는 2024년부터 3년 연속 오름세를 기록 중이지만, 중소기업은 2023년부터 4년째 내림세다. 수출 호조에 경제성장률 전망치가 상향 조정되고, 올해 1인당 국민총소득(GNI) 4만 달러 달성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음에도 대다수의 국민은 정작 쓸 돈이 없다고 느끼는 이유다.
격차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국가데이터처의 ‘2025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3월 말 기준 가구당 평균 순자산은 4억 7144만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5.0% 증가했다. 반면 소득 하위 20% 가구의 순자산은 같은 기간 4.9% 감소했다. 소득 수준에 따른 저축 여력의 차이에 더해 수도권 아파트를 중심으로 한 자산 가격 상승세가 상하위 격차를 더 벌려 놓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제는 부동산 경기마저 수도권과 지역을 철저하게 갈라 놓는 양상이다. 서울 집값은 87주 연속 오름세를 이어가며 문재인 정부 때 기록한 최장 상승 기간(85주)을 넘어섰다. 반면 지방 부동산은 미분양 아파트가 쌓이고, 전세 매물 찾기는 점점 더 힘들어지는 극심한 침체를 겪고 있다.
부동산 플랫폼 업체 직방이 올해 청약시장(1월 1일~9월 18일 모집공고 기준)을 분석한 결과 부산(0.6 대 1)과 울산(0.8 대 1)의 1순위 평균 경쟁률은 1 대 1을 밑돌았다. 반면 서울의 1순위 평균 경쟁률은 63.1 대 1을 기록했다. 아크로서초의 경우 일반공급 30세대에 3만 2973건이 접수돼 1100 대 1에 가까운 경쟁률을 보였다고 한다. 수도권과 지방에 대한 부동산 정책 차별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지만, 정부는 어떤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다.
지역 간 격차는 교육 격차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더불어민주당 한병도 의원이 최근 공개한 ‘서울대 신입생 지역별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26학년도 서울대 수시·정시 최종 등록자(3673명) 가운데 수도권 고교 출신이 전체의 68.2%(2504명)를 차지했다. 심지어 서울 강남구 한 곳에서 배출한 서울대 신입생 수가 부산 지역 전체 고교 출신보다 2.4배나 많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쯤 되면 ‘국립 서울대’의 위상이 ‘시·도립(서울·인천·경기) 서울대’로 격하됐다고 보는 게 낫지 않나 싶을 정도다.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 ‘교육 양극화’의 웃지 못할 단면이다. 부모의 자산과 거주 지역이 자녀의 대학과 미래를 결정 짓는 시대. 지방 출신의 가진 것 없는 청년들에게 교육과 취업, 자산 취득의 기회를 열어줄 정책을 국가도, 지방정부도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다행히 균형발전을 위해 정부가 추진 중인 ‘서울대 10개 만들기’와 지역 국립대 등록금 무상화 정책의 영향이 이 같은 양극화에 일부 균열을 내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민주당 백승아 의원이 교육부에서 받은 ‘지역거점 국립대 수도권 학생 지원 현황’ 자료에 따르면 최근 마감된 2027학년도 수시모집에서 9개 거점 국립대에 지원한 수도권 고교 출신은 5만 2000여 명에 이른다. 전년 대비 12%가 증가한 수치다.
이 같은 지역거점 국립대의 인기가 청년 인구 유입의 기회가 될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부산대 캠퍼스를 품고 있는 부산 금정구가 얼마 전 인구감소지역에 새로 편입돼 지역민들에게 충격을 준 바 있다. 특히 부산대 상권의 경우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도시철도역에서부터 젊음의거리로 불리는 정문 앞까지 10대, 20대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만큼 활기가 넘쳤던 곳이기에 격세지감을 느끼는 시민들이 많다.
청년 인구 유입과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으로 양질의 일자리가 꼽히는 만큼 조만간 있을 2차 공공기관 지방 이전, 메가특구 지정에 거는 기대도 크다. 이재명 정부가 내세우는 지방주도 성장의 핵심 전략이 될 이들 정책이 심화되는 양극화의 간극을 메울 마지막 기회라는 각오로 임해 주길 바란다. 나눠 먹기식 정책이나 생색 내기식 발표로는 지역도, 균형도, 발전도 없을 것이다.
2026-10-11 [18:11]
-
[편집국에서] 전재수의 시험대
최근 이재명 대통령과 전재수 부산시장을 보고 있자면, 안쓰러운 마음이 먼저 든다.
임기 2년 차인 이 대통령이나 취임 넉 달째인 전 시장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공약이나 정책, 개혁의 성공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고 있는 모양새다.
먼저 이 대통령부터 살펴보자. 지방선거 이후 급격한 지지율 하락을 겪었던 이 대통령은 30%대의 지지율로는 사실상 국정 개혁 동력을 크게 상실했다고 봐야 한다. 지지율 추락은 오세훈 서울시장이 당선되는 이변에서부터 시작됐다는 일부의 분석이 있으나, 시작이자 핵심은 진영 내 분열이 기인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듯하다.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선거부터 불거진 친명과 친청(친문) 대결 구도는 결국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라는 정치권의 오래 회자해 온 말을 떠올리게 한다.
급기야 이 대통령은 지난달 18일 기자회견 모두 발언에서 “우리는 모두 친문이고 친노이며 친김대중이며, 이재명의 동지들입니다”라는 말로 지지층의 결집을 꾀했다. 오죽하면 ‘모두의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자기 진영을 향해 호소하는 이례적인 모습을 보였겠는가. 지지율 급락이라는 위기 속에서 보여준 불가피한 읍소였다.
여기에다가 부동산 정책, ETF 레버리지, 장관 인사 등의 실패는 ‘일 잘하는 대통령’이라는 이 대통령의 최대 장점을 흔들리게 했다. 지지층 이탈과 더불어 중도층의 외면을 부추겼다.
한 번 추락한 지지율을 회복하기는 쉽지 않겠으나 해법은 분명하다. 좌고우면하지 말고, 자신의 국정 철학대로 개혁하고 민생 정책에 힘을 쏟아야 한다. 진영 내부 단속은 할 만큼 했다. 집권 2년 차부터 대통령을 흔드는 일부 세력에게 휘둘리는 것은, 국민이 바라는 대통령의 모습이 아니다. 초반의 실패를 거울삼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중도실용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다시 한번 지지율 반등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전 시장의 상황은 취임 초부터 더 만만치 않다. 자신을 둘러싼 정치적 환경이 척박하다. 이 대통령은 그래도 ‘여대야소’로 국회의 과반을 업고 국정을 끌고 갈 수 있다면, 전 시장은 ‘여소야대’라는 부산시의회의 현실과 처음부터 마주쳤다. 또 부산지역 국회의원조차 한동훈 의원이 재보선으로 당선되면서 민주당 의원은 단 한 명도 없다.
시작부터 삐걱댄다. 조직개편안에서부터 부산시와 부산시의회는 충돌했고, 다시 추경을 둘러싸고 시의회는 시의 예산안을 줄줄이 조정했다. 시의 민생정책 중 하나로 추진된 동백전 캐시백 확대 예산은 물론 소상공인과 노인일자리 등 민생 관련 사업 예산까지 삭감됐다.
국비 확보를 위해 국회의원의 지원이 절실한 상황에서 지난달 30일 열린 여야정 회의는 부산시와 국민의힘의 확연한 시각차를 부각할 뿐이었다. 향후 협치가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우려를 낳게 했다. 여기에 내부의 반발까지 거세다. 강서구 생곡소각장 조성과 풍산의 기장군 장안읍 이전을 두고 민주당 소속 기초단체장들이 잇따라 반기를 들고 있다.
인사청문회가 한창 진행 중인 부산시 산하 공공기관장 인사를 두고도 잡음이 나온다. 인재 풀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줬다. 시의회가 검증을 벼르고 있는 부산교통공사와 부산시설공단 등의 기관장 후보는 말할 것도 없이 여러 후보의 면면을 보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특히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지역의 주요 현안에 대해 지역 민심과 괴리돼 있다는 것이다. 시민사회는 물론 항만업계, 건설업계, 금융계 등 상공계는 정부의 4대 PA(항만공사) 통합 반대, 가덕신공항 공사비 현실화, 산업은행 부산 이전, 통합 LCC(저비용항공사) 본사 부산 유치 등을 주장하고 있지만, 전 시장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일단은 지켜본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집권당의 일원으로서 정부에 목소리를 크게 내기보다는 ‘정중동’의 스탠스를 보인다고는 하지만, 벌써부터 민감한 사안은 외면하고 부산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솔솔 나온다.
이제 겨우 취임 넉 달째를 맞는 시장에게 지나친 비판은 가혹할 수 있다. 조금 더 시간을 줘야 한다. 게다가 이 대통령에 대한 해법만큼 간단치도 않다.
하지만 부산이 처한 절박한 상황을 고려하면, 전 시장에게 많은 시간이 남은 것 같지는 않다. 특히 전 시장의 능력에 대한 검증이 아직 덜 된 만큼 그는 성과로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방선거 때 박형준 전 부산시장에 대해 ‘한 게 뭐 있노’라며 했던 공격은 바로 자신에게 부메랑이 돼 돌아올 수 있다.
그래도 할 말은 하는 시장, 유능한 시장으로 남을 것인가. 유약하고 무능한 시장으로 기억될 것인가. 전재수의 시험대다.
2026-10-04 [18:09]
-
[편집국에서] 국가 안보를 효율성으로 재지 마라
정부가 3개 사관학교를 통폐합한다고 한다. 서울과 창원(진해), 청주에 있는 육·해·공군 사관학교를 합쳐 대전 자운대에 ‘통합 국군사관학교’를 설치하는 방안이다. ‘통폐합’이라는 세 글자 뒤에는 언제나 ‘효율성’이라는 그럴싸한 분칠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효율성이 아무리 만능 치트키라지만, 국가 안보의 최후 보루인 사관학교 문턱까지 손쉽게 넘나드는 것은 아찔한 일이다.
정부가 제시한 이번 효율성의 핵심은 학령인구 감소 대응과 3군 합동성 강화다. 학령인구가 줄면 사관학교 지원자도 줄 거고 생도 수도 줄어들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논리다. 같은 이유로(학령인구가 줄어든다는 이유로) 병역 의무자가 줄어들테니 이들을 지휘할 장교 정원 역시 줄여야 한다는 논리도 한몫 거든다. 이처럼 생도 수가 줄어드는 마당에 3개 학교의 교수진, 행정 인력, 교육 시설을 통합 관리하면 비용을 대폭 절감할 수 있다는 취지다.
그러나 안보는 단순한 경제적 효율성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기회비용 6으로 10의 효과를 내는 A시스템과 기회비용 3으로 8의 효과를 내는 B시스템이 있다고 하자. 일반 시장이라면 당장 B시스템을 선택할 테다. 그것이 효율성이다. 하지만 국가 안보는 다르다. 안보 비용을 ‘최저가 비교 사이트’에서 가장 값싼 선택지를 검색하듯 판단해서는 안 된다. 다소 효율성이 떨어지더라도 10에 가까운 최상의 안보 태세를 만드는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 안보는 단 한 번의 실패로도 국가의 존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B시스템을 반복하면 되지 않냐고? 사회 시스템은 그런 게 아니다. 통합 사관학교를 두 개 만들자는 이야기를 할 순 없지 않나.
물론 정부 역시 단순한 비용 절감만을 강조하진 않는다. 통폐합 명분에는 ‘3군 합동성 강화’라는 취지도 포함된다. 확실히, 그리고 대체적으로, 현대전이 육·해·공 합동 작전 위주로 펼쳐진다는 점에서 합동성의 중요성은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3개 사관학교를 합친다고 실제 합동성이 향상될지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왜 현대전에 가장 최적화된 안보 선진국 미국과 영국 등은 여전히 각 군 사관학교의 독립성을 철저히 유지하고 있겠는가.
멀리 해외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답은 명확하다. 바다도 활주로도 없는 내륙 한가운데에서 해군과 공군의 전문성이 제대로 양성될 거라 생각하는 게 오히려 비상식적이다. 진해만의 짠바람을 맞으며 함상(艦上)의 감각을 몸에 익혀야 할 해군 생도를 내륙의 통합 캠퍼스에 고립시키는 순간 전문성에 대한 기대는 반쯤 접어야 한다. 합동성은 각 군의 전문성이 확립된 이후에야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전문성이 결여된 채 합동성만 추구하는 군대는 사상누각이다. 그런 군대를 두려워 할 적군 따위는 없다.
이는 또한 각 군의 사기와도 직결된다. 해군과 공군을 내륙에서 양성한다는 발상은 각 군의 전문성을 경시하는 동시에 그들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다. 해군 예비역들이나 해군 양성의 요람인 진해 지역사회가 분노하는 지점 또한 여기에 있다. 그들의 반발을 단순히 기득권 지키기나 지역 상권 위축에 대한 우려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오랜 세월 국방에 헌신해 온 이들이 느끼는 상실감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게다가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일각에서 제기하는 통폐합의 숨겨진 의도다. 합동성 따위는 명분일 뿐, 실제로는 지난 비상계엄(혹은 내란)에 가담한 군 지휘부가 대체로 육사 출신이라는 점에 상기해 이참에 육사 카르텔을 부수려 사관학교 통폐합을 추진한다는 것이 주장의 골자다.
설마 육사 카르텔을 없애자고 사관학교 시스템 전체를 흔드는 일까지 벌일까 싶기도 하지만, 이 정부가 정치적 응징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붙인 게 생판 없던 일도 아니다. 정치검사를 뿌리뽑겠다는 이유로 검찰 조직을 통째로 해체한 그들이다. 바뀐 사법체계의 부작용 따위는 검찰 해체라는 대명제 아래 아주 사소한 고민일 뿐이다. 아니, 사소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더 큰 목적을 위해 감수해야 할 불가피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불안하다. 그들에게 정치군인에 대한 인적쇄신은 정치검사에 대한 쇄신 못지 않게 중요하다.
독일의 시인 프리드리히 횔더린은 그의 시극 〈히페리온〉에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이곳을 천국으로 만들려는 인간들’이라고 했다. 자신들의 정책적 지향만이 절대선이라는 착각,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설익은 확증편향이 국가 안보의 정초(定礎)마저 흔들고 있다. 사관학교 통폐합 정책은 원점에서 다시 재검토돼야 한다. 효율성과 확증편향의 먹잇감이 되기엔, 사관학교가 짊어진 안보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다.
김종열 사회2부장 bell10@busan.com
2026-09-27 [18:17]
-
[편집국에서] '조선제일검' 한동훈의 존재감 증명
20일간 이어진 김승원 법무부장관 후보자 사퇴 정국은 검사 시절 ‘조선제일검’으로 불린 한동훈의 독무대였다. 김 후보자의 ‘신약 임상시험 승인 청탁 의혹’을 시작부터 끝까지 주도했고, 결국 낙마를 이끌어냈다. 여권 지도부와 스피커들의 십자포화는 물론 국민의힘 내부의 시기 어린 견제에도 홀로 맞섰다.
수사 기록 입수 과정의 불법성은 차차 진위가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자료가 있다고, 검사 출신이라고 해서 누구나 한 의원처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상대의 예상된 반격을 파훼하는 자료를 순차 공개해 결국 궁지로 모는 영리함, ‘메신저’를 공격하는 여권 인사들의 모순된 과거를 적시에 소환해 받아치는 기억력과 순발력은 여야 ‘저격수’ 중에서도 발군이라 할 만하다.
한 의원도 자신의 성취에 고무된 듯하다. ‘수사 기밀 유출’ 의혹을 제기하는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을 향해 “모두 상대해 줄 테니 나오라”고 호언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말도 거칠어졌다. “9억 받아 처먹지 않았나”, “브로커가 보고 싶어 흘리는 눈물이냐” 등. 표현이 심하다는 지적에는 “민주주의 적들과 혈혈단신으로 싸울 때 정치인의 품격은 진흙탕에 뛰어들어 진흙탕에 빠질 위기에 있는 국민을 구하는 것”이라고 받아쳤다. 제3자에겐 ‘자아 팽창’의 조짐이 보여 불편했지만, 열성 지지자들에게는 장판교에서 수십만 대군을 홀로 맞서는 조자룡의 현신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한 의원에게 ‘되치기’에 대한 두려움도 없는 것 같다. 잘 알려지다시피 그는 술을 먹지 않고, 집안이 부유해 돈에 대한 아쉬움도 없다. 정치인들을 종종 허방에 빠트리는 단골 시빗거리에서 원천적으로 자유롭다. 자신에게 열광하는 팬덤과의 관계도 불편한 일을 막기 위해 철저하게 거리 두기를 한다. 빈틈을 찾기 힘들다.
당권파들의 한 의원에 대한 공격이 힘도, 논리도 없어 보이는 이유다. 공익 목적이라는 청탁의 불법성을 부각하기 위해 사용한 ‘오빠’ 단어를 물고 늘어지고, ‘복당은 절대 없다’더니 이번에 자신들과 팀플레이를 하지 않았다고 탓하는 수준이다.
한 의원의 이번 저격수 데뷔는 장동혁 당권파를 향한 무력 시위로도 읽힌다. ‘잘 싸우는 사람으로 당을 채우겠다’며 한 의원을 비롯해 친한계를 몰아내고 있는데, 정작 당 밖 한동훈이 당내 100여 명 의원보다 더 잘 싸웠다는 평가가 나오니 말이다. 당권파로서는 꼬인 속이 더 꼬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런 엇나간 감정의 표출은 한 의원의 ‘핍박 서사’만 늘려줄 뿐이다.
그러나 좀 길게 생각하면 ‘저격수 한동훈’으로서의 존재감이 ‘대권주자 한동훈’에게 어떤 유익을 줄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김 후보자 낙마는 보수 진영 전체로 보면 대단한 전리품이지만, 친한계 일부를 제외하고는 한 의원의 성취에 대한 국민의힘 내부 반응은 시큰둥한 편이다. 당권파들은 시기·질투로 치부될 것을 알면서도 맹목적인 적개심을 감추지 않는다. 한 의원은 ‘윤 어게인’ 세력에 맞서 ‘윤 탄핵’에 앞장선 자신이 감당해야 할 업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탄핵에 찬성했던 의원들 중에도 한 의원의 복당 이후에 대한 염려를 표출하는 이가 적지 않다.
사실 한 의원과 비슷하다고 볼만한 유형의 정치 지도자가 있었다. 보수 진영에서는 홍준표 전 대구시장이 대표적이다. 정국을 꿰뚫는 촌철살인의 언변은 진보 진영에서도 한 수 접을 정도였다. 그러나 우군도 수틀리면 적으로 만드는 홍 전 시장은 주변과 불화가 끊이지 않았고, 결국 ‘당심’을 얻지 못해 대권가도에서 멀어졌다. 최근 친명계의 공적이 된 진보의 유시민 평론가도 있다. 발군의 토론 능력은 보수에서 맞상대를 꺼릴 정도였지만, ‘옳은 소리를 저토록 싸가지 없이 하는 재주’는 정치 인생 내내 발목을 잡았다.
사실 지금 여의도 정치에서 덕, 포용력 같은 지도자 자질을 거론한다는 게 어색하다. 조롱·혐오 표현까지 불사해 상대를 바닥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능력이 ‘엄지척’을 받는 시대다. 통합의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는 당위는 인정하면서, 거기로 가기까지는 극단적 진영 논리를 따라야 하는 거대한 모순. 그 속에서 리더를 꿈꾸는 사람들은 행로는 안갯속을 걷는 것 마냥 혼란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잘 싸우는 사람이 여의도 판을 쥐고 흔든 이후로 우리 정치가 한 걸음이라도 나아졌는지, 국격이 한 뼘이라도 커졌는지 정치권은 물론 유권자들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국회 등원한 지 이제 100여 일 지난 초선 의원 한동훈에게 너무 과도한 요구일 수 있겠다. 다만 많은 사람들에게 ‘잘난 건 인정하지만, 잘 되는 건 탐탁지 않은’ 이미지가 왜 만들어졌는지 한 의원도 성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결국 정치인에게 최종 승리는 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창훈 서울정치부장 jch@busan.com
2026-09-20 [18:17]
-
[편집국에서] 1인당 소득 4만 달러 시대의 명암
지난해 12월 베트남 까마우 앞바다에는 두 가지 색깔의 물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서쪽 해안 지역 바닷가 물색이 적갈색과 파란색으로 뚜렷하게 구분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 경제가 이 바다 풍경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쪽에서는 반도체 호황으로 인한 역대급 수출 실적 기록, 경제 성장률 상승,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전망 등의 ‘굿뉴스’가 연일 나오고 있지만 다른 한쪽으로는 중소기업 연체율과 파산 신청 증가, 청년 실업률 상승, 지방 미분양 증가 등의 ‘우울한 소식’이 올라오고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올해 한국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6%에서 3.3%로 상향 조정했다. 지난 5월 전망치에서 석 달 만에 0.7%포인트(p) 높였다. 지난달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발표한 한국의 경기선행지수(CLI)도 26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에 힘입어 2000년대 이후 가장 높은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지난 1일 산업통상부가 발표한 ‘8월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한국의 수출액은 전년 동월 대비 70.9% 증가한 1022억 5000만 달러였다. 한국의 월 수출액이 1000억 달러를 넘긴 것은 사상 최초다. 전 세계에선 독일과 중국, 미국에 이어 네 번째다.
우리나라는 올들어 지난 10일까지 누적 수출액이 7285억 6000만 달러로, 지난해 연간 수출액(7093억 달러)을 한참 넘어섰다. 정부는 오는 12월 초 1조 달러를 달성할 것으로 전망하면서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를 예고했다.
하지만 우리 경제의 이면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상반기 수출 10달러 중 4달러는 반도체 차지다. 반도체가 대략 40%의 경제를 견인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이클이 있다는 반도체의 실적이 내려간다면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다시 3만 달러, 2만 달러 대로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또한 국내 5대 은행의 지난 5월 말 중소기업 연체율은 평균 0.73%였다. 1%도 안 된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들 은행의 합산 수치가 확인되는 2020년 1월 이후 최고치다. 중소기업 연체율은 작년 말 0.50%에서 수개월 새 0.23%p 급등했다.
법인의 파산신청도 우려스럽다. 법원통계월보 등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전국 법원에 접수된 법인 파산 신청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7.7% 증가했다. 이는 2006년 통합도산법 도입 이후 상반기 기준 가장 많은 수준이다. 경기침체로 기업들의 매출과 영업이익이 줄어들고 있는 가운데 기존 대출의 상환 부담까지 겹치면서 상환 여력이 약화된 때문이다.
지방 부동산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부실 사업장도 늘고 있다. 국토교통부의 7월 말 집계를 보면 전국 미분양 주택 6만 8217가구 가운데 비수도권 물량은 4만 8758가구로 71%를 차지했다. 준공 후에도 팔리지 않은 ‘악성 미분양’은 비수도권 비중이 85%에 달했다. 분양가에서 몇억 원씩 할인하는 사태까지 빚고 있다.
고용 면에서도 양극화 현상을 보인다. 지난 9일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8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OECD 비교 기준인 15~64세 고용률은 70.4%로 0.5%p 올랐다. 8월 기준으로 15~64세 고용률이 70%를 넘어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지난달 15~29세 청년층 실업자는 19만 5000명으로, 전년보다 1만 1000명 늘었다. 청년층 실업률은 5.4%로 0.5%p 상승해 2022년 8월 이후 4년 만에 가장 높았다.
국민들은 혼란스럽다.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는데 내 삶은 결코 나아진게 없다”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대기업 취업도 바늘구멍인데, 이마저도 삼성전자·SK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업종 종사자와 기타 업종 종사자로 갈린다. 반도체 분야 종사자들이 성과급으로 5억~6억 원씩 받아가면서 그렇지 않은 이들의 상대적 박탈감도 커지고 있다.
정부는 이처럼 우리 경제에 만연해있는 경제 불균형에 대한 원인 분석과 처방을 고민해야 할 때다. 청년 실업을 해소하는 방안이 무엇인지, 왜 중소기업들이 빚을 못 갚고 있는지, 지방 미분양은 어떻게 하면 해소할지 등에 대한 분야별 해법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이보다는 ‘선거표’를 의식한 정책 발표로 오히려 갈등만 키우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반도체 호황으로 대기업 법인세가 수십조 원이 더 걷히는 상황인데도 고가 주택 소유자에 대한 보유세를 확대하고, 반도체 단지 추가 건설을 놓고 다수의 후보지에 대한 여론 수렴이나 전문가 평가 없이 특정 지역에 대해 정부 주도로 진행하는 식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지지율이 최근 30%대로 떨어졌다. 이제라도 ‘경제의 균형을 잡는’ 정부로 거듭났으면 한다.
2026-09-13 [18:01]
-
[편집국에서]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얻은 부산의 숙제
문화유산과 전통문화를 소개하는 자리라고 하면 흔히 정형화된 공간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온갖 볼거리가 넘쳐나는 요즘, 이런 공간이 아이들에게 ‘또 가고 싶은 곳’이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즐거움과 유익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공간을 최근 만났다. 지난 7월 19일부터 29일까지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기간 마련됐던 공식 전시관 ‘대한민국관’이다.
아이와 함께 찾은 대한민국관은 그야말로 ‘K헤리티지의 집약체’였다. 미디어아트와 인터랙티브 콘텐츠로 유산을 접하게 한 전시 방식은 아이에게 문화유산의 문턱을 한층 낮춰줬다.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담아낸 ‘나의 유산: 살아온, 살아가는, 살아갈’은 물론 이미 지정된 우리나라 곳곳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전시관들은 아이에게 뜻밖의 자긍심을 심어줬다. 국가유산진흥원이 선보인 ‘헤리티지: 타임리스 타임’, 전통 나전을 활용한 미디어아트 ‘윤슬의 시간’ 등에서는 긴 줄도 아깝지 않을 만큼 아이가 눈을 떼지 못했다. 장인들의 시연과 밀양아리랑 공연 역시 뜨거운 울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개인적인 경험을 넘어 한국서 처음 열린 이번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부산에 주어진 특별한 열흘이기도 했다. 특히 회의에서 채택된 ‘부산 선언’은 세계를 향해 무력분쟁과 기후변화라는 시대의 복합 위기 앞에서 인류가 어떻게 함께 유산을 지켜낼 것인가를 묻는 문서였다.
부산은 그 물음에 답할 준비가 돼 있다.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에 실마리가 있다. 경무대(현 임시수도기념관), 임시중앙청(현 동아대 석당박물관), 국립중앙관상대, 미국대사관 겸 미국공보원(현 부산근대역사관), 부산항 제1부두, 재한유엔기념공원, 하야리아기지(현 부산시민공원), 아미동 비석 피란주거지, 우암동 소막 피란주거지, 영도다리, 복병산배수지. 이들 11곳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지켜낸 공간이자 인구 40만 명이던 부산이 100만 명에 이르는 피란민을 품어낸 도시 실험의 흔적이다. 원도심 한복판의 근현대 유산이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국내 첫 사례라는 사실만으로도 유산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잠정목록에 오르기까지 과정은 순탄하지 못했다. 2018년 1월 8곳이 조건부 잠정목록에 올랐다가 2022년 12월 9곳으로 재조정을 거쳐 정식 잠정목록에 이름을 올렸고, 2025년 11월에는 11곳으로 확대됐다. 국내 잠정목록 12건 가운데 단 2건뿐인 유네스코 세계유산 우선등재목록에 선정되기까지 꼬박 9년이 걸린 셈이다. 게다가 등재 목표 시점은 당초 2028년에서 2030년으로 두 해 늦춰졌다. 도심 개발 압력 속에서 유산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지금도 주민이 살아가는 공간의 지속가능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아직 완전히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계유산위원회가 성황리에 막을 내린 지금, 부산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뚜렷해졌다. 부산 선언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피란수도 유산을 관광 자원으로만 소비해선 안 될 것이다. 이른바 ‘부산병’을 앓는 관광객들이 재차 부산을 찾는 이유는 바다만이 아니라 도시가 품고 있는 이야기의 밀도 덕분이다. 유산을 스쳐가는 포토존이 아니라 걷고 보고 느끼는 서사로 만들 콘텐츠 설계가 무엇보다 시급하다. 우암동과 아미동처럼 주민이 실제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해서는 주거권과 유산 보전이 충돌하지 않는 방식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오랜 유적과 주택가, 시장, 카페 등이 조화를 이루며 역사와 삶이 어우러지도록 한 포르투갈의 ‘포르투 역사 지구, 루이스 1세 다리 및 세라 두 필라르 수도원’이 한 예다.
2030년 등재를 목표로 한 국제 비교연구와 예비평가 대응 등에 행정력과 시민사회의 역량을 집중할 필요성도 있다. 앞서 이야기한 대한민국관은 부산의 역량을 세계에 알린 기회가 됐다. 특히 부산이 독자적으로 꾸린 부산관은 해양수도 부산의 면모와 함께 피란수도 부산유산의 서사를 국내외 관람객에게 직접 전하면서 4만 명이 넘는 국내외 관람객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열흘간의 경험은 부산이 세계와 통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예행연습이었다. 이를 계기로 국제기구 인사, 심사위원, 학계 네트워크와의 활발한 상시 교류를 이끌어낼 수 있다.
부산은 이번 세계유산위원회를 통해 ‘피란수도’라는 정체성이 지역의 특수한 상처가 아니라 세계사적 보편성을 지닌 자산임을 확인했다. 전쟁과 냉전, 국제원조와 인도주의라는 20세기 인류 공통의 경험이 도시의 골목마다 새겨져 있다는 사실은 향후 부산이 세계와 대화하는 언어가 될 수 있다. 부산이 이번 회의의 열기를 일회성 이벤트로 흘려보내지 않기를 바란다. 피란수도의 기억을 미래도시의 설계도로 바꾸는 일, 그것이 지금 부산에 주어진 진짜 숙제다.
윤여진 편집부장 onlypen@busan.com
2026-09-06 [18:08]
-
[편집국에서] '좌초' 부산항 북항 환승센터 해법 서둘러야
일본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각인돼 있는 도쿄 신주쿠의 ‘스크램블 교차로’. 신호등 녹색 불이 켜지면 6개의 횡단보도에서 사람들이 동시에 쏟아져나와 교차로 중간에서 한데 엉켰다 흩어지는 장면을 모르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곳은 인파 만큼이나 혼잡한 교통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기존 신주쿠역 주변에는 100여 개가 넘는 고속·시내외 버스 회사의 정류장 19곳이 역 광장과 도로변, 인근 골목 등에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다. 이 때문에 처음 신주쿠를 찾은 방문객들은 길을 찾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고, 일대 도로는 승객을 태우려는 버스와 택시의 도로변 이중 주정차로 인해 만성 체증에 시달렸다. 또 철도에서 내려 고속버스로 갈아타려면 도보로 10~15분 이상 길거리를 헤매야 하는 단절 문제를 안고 있었고, 좁은 인도 위에 수많은 보행자와 대중교통 이용 승객이 엉키며 크고작은 사고 위험도 높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국토교통성은 2000년부터 신주쿠 남측에 복합환승센터를 세우기로 했다. 새로운 부지를 확보하기 어려웠던 도심지 공간 제한을 감안해, 운행 중인 JR 철도 노선들 위로 인공 지반을 얹고 건물을 지어 올리는 고난도 공사를 15년 이상 진행한 끝에 2016년 4월 ‘바스타 신주쿠’가 완공됐다.
1층은 철도가 지나가고 2층에는 개찰구와 보행자 광장이, 3층은 고속버스 도착 승강장, 택시 승강장, 관광 안내소가 있으며 4층에는 고속버스 출발 승강장과 통합 매표소, 대합실이 위치하는 입체적 건물이다. 택시 승강장과 관광안내소, 수하물 보관소, 외화 환전소 등을 한 층에 모아 해외 및 외지 방문객의 편의성을 대폭 끌어올렸으며, 환승센터 내 쇼핑몰과 오피스타워 등을 동시 개발해 단순 교통 거점이 아닌 유동 인구가 체류하는 상업·문화·경제 거점으로 도약시켰다. 복잡한 도심 내 다양한 교통 수단을 연결해 시민들의 편의를 높이는 복합 환승센터의 성공 사례 중 하나다.
시간과 장소를 옮겨 2026년 부산. 경부선 KTX 종착역과 도시철도, 버스와 택시 승하차장을 한데 연결하는 부산항 북항 환승센터 건립 공사는 민간사업자와 부산항만공사가 지구단위계획 지침 위반 논란으로 3개월째 갈등을 이어가고 있다. 부산항 북항 재개발 1단계 사업 부지를 조성한 부산항만공사는 지난 6월 초 사업자가 지침을 어기고 부산역 보행로와 환승센터 연결부에 3.3m의 단차를 발생시켰다며 원상복구 확약서를 요구했으나 응하지 않자 토지매매계약 해제를 통보했다. 곧바로 법원에 공사중지 가처분 신청을 내면서 갈등은 법정 다툼으로 번졌다.
건축허가를 내준 관할 지자체 동구청은 단차 발생 사실을 사업자가 수정 제출한 건축계획 도면에서 확인하지 못한 실수는 제쳐두고, 사업자가 현재 건축법을 위반해 공사를 하고 있다며 지난 21일 공사중지 시정명령을 내린 상태다. 현장은 지금 멈춰섰다. 북항 환승센터 건립 사업이 이처럼 계속 공전할 경우, 환승 인프라 구축이 미뤄지는 것은 불보듯 뻔하다. 당장 공사 현장의 하도급 업체에 대한 피해보상 문제가 불거질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주변 트램 사업 및 북항 1단계 재개발 전체가 흔들리는 결과가 예상된다. 결국 부산의 사회·경제적 손실이자 시민과 방문객 불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북항 환승센터는 원도심과 북항을 잇는 핵심시설이다. KTX 부산역에서 내려 북항 친수공원과 오페라하우스, 국제여객터미널 등으로 이동하는 보행과 교통의 중심축이다. 환승센터는 또 통합 입체 교통 허브의 역할을 해야 한다. KTX와 도시철도, 버스, 택시, 해상 교통은 물론 향후 부산형 급행철도(BuTX)와 도심항공교통(UAM) 등 미래형 모빌리티(MaaS)까지 연계되는 거점으로 구상됐고, 환승센터 역할에 부합되도록 설계돼야 한다. 공공성 면에서 부산역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공공 보행로를 단차 없이 평탄하게 연결해 시민들이 막힘 없이 부산항 조망을 누리며 북항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하는 연결성을 확보하는 것 또한 필수적이다.
현 시점, 환승센터 사업 관계기관들은 법원의 공사중지 가처분 결과만 기다리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부산시, 동구청, BPA, 사업자, 시민단체, 도시·교통 전문가 등이 함께 머리를 맞대 투명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논의하는 게 절실하다. 이후 사업 과정에서 행정 절차가 불필요하게 지연되지 않도록 하는 조속한 완공을 위한 지원 방안도 함께 마련한다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스마트하고 편리한 교통 환승 시스템을 집약시키고, 백화점, 영화관, 아쿠아리움 등 상업·문화 시설을 함께 배치해 사람이 모이게 하는 부산의 대표 ‘모빌리티 허브’(Mobility Hub)로 부산항 북항 환승센터를 구축할 방법을 찾아야 할 때다.
2026-08-30 [18:05]
-
[편집국에서] 인생경기
1시간여 운동을 다녀와 TV를 다시 켰다. 마침 7회 롯데의 공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0-8. 1회 0-2로 뒤지고 있던 경기가 어느새 8점 차로 벌어져 있었다. ‘오늘도 글렀구나’ 생각하면서도 채널을 돌리진 않았다. 볼넷과 상대 실책, 안타가 이어지면서 타자들이 계속 누상에 나갔고, 차곡차곡 점수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루가 됐다. 4번 타자 한동희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런데 한참 높은 공에 방망이가 나갔다. ‘저런 공에 왜 휘두르나’ 한탄한 것도 잠시, 타구는 그대로 외야 관중석을 강타했다. 만루홈런이었다. 7-8. 순식간에 한 점 차가 됐다.
두 타자가 연달아 아웃되면서 7회 말 공격이 이대로 끝나는가 싶었다. 하지만 롯데의 방망이는 다시 불을 뿜었다. 전민재를 시작으로 장두성, 손성빈, 황성빈, 나승엽, 레이예스, 한동희, 고승민까지 8연속 안타가 이어졌다. 7회 말에만 무려 18명의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11개의 안타와 3개의 볼넷을 묶어 13점을 뽑았다. 0-8이 13-8로 뒤집혔다. 이후 키움이 솔로홈런 두 방으로 추격했지만 롯데도 손성빈의 투런홈런으로 응수했다. 결국 경기는 15-10, 롯데의 승리로 끝났다.
이렇게 큰 점수 차로 뒤지던 경기를 한 이닝에 뒤집는 장면은 처음 봤다. 경기 후에도 한동희의 만루홈런 장면을 몇 번이나 다시 봤다. 볼 때마다 짜릿했다. 야구라는 스포츠가 주는 쾌감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문화스포츠부에 온 올해 모처럼 롯데 경기를 챙겨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롯데의 지난 세월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프로야구 원년 멤버인 롯데는 1984년과 1992년 고작 두 차례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그 뒤로 우승 트로피는 더 이상 부산으로 오지 않았다. 우승은커녕 이제는 가을야구에 진출하는 것 자체가 오랜 숙제가 됐다.
마지막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것은 2017년이다. 2000년대 초반 8-8-8-8-5-7-7위라는 암흑기를 보낸 이후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순위는 7-10-7-8-8-7-7-7위였다. 더 긴 터널 속을 헤매고 있다. 올해도 별 다르지 않다. 그 경기를 기점으로 최근 연승을 달린 롯데는 순위를 끌어올리긴 했지만 포스트시즌 마지노선인 5위와 격차는 상당하다. 아직 산술적으로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가을야구를 바라보기에는 갈 길이 멀다.
시즌 초부터 팬들의 마음을 답답하게 한 장면도 많았다. 투타에서 잦은 실수가 이어졌다. 투수가 버티면 타선이 침묵했고, 타선이 살아나면 마운드가 흔들렸다. 이기고 있는 경기를 놓치는가 하면, 잡을 수 있는 경기를 허무하게 내주기도 했다. 최근 순위가 말해주듯이 좋은 날보다 힘든 날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도 롯데 팬들은 야구를 끊지 못한다. 잘해서 계속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가끔 보여주는 말도 안 되는 장면 때문에 또 보게 된다. 0-8이 15-10이 되는 경기처럼 말이다. 모두가 포기한 경기에서 기적처럼 살아나는 순간, 야구가 얼마나 짜릿한지를 보여주는 그런 순간을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팬들이 마냥 기다려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이 훌쩍 넘은 기다림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가을야구와 우승에 대한 갈증이 커질수록 구단의 책임도 커진다. ‘응원하는 팬들이 있으니 괜찮다’는 식으로 팬들의 인내를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올해 사직야구장 관중 수가 예년만 못한 것은 시즌 초반부터 줄곧 하위권을 전전한 팀 성적의 영향이 절대적일 것이다. 야구장에서 팬들의 함성은 공짜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팬들은 시간을 내고 돈을 쓰고, 때로는 먼 길을 찾아 야구장을 찾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반드시 승리만은 아닐 것이다. 지더라도 다음 경기를 기대하게 만드는 팀, 어제보다 오늘이 나아지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팀을 보고 싶은 것이다.
좋은 선수들을 길러내고, 선수층을 두껍게 만들고, 경쟁력 있는 팀을 만드는 것은 결국 구단의 몫이다. 한두 명의 선수에게 기대거나 매년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긴 시간 꾸준히 경쟁할 수 있는 팀을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야 팬들도 ‘언젠가는 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올해는 정말 해볼 만하다’는 마음으로 시즌을 기다릴 수 있다. 팬들이 원하는 것은 기적만이 아니다. 오히려 매년 기적에 기대지 않아도 되는 팀을 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도 역대급으로 덥고 짜증났던 이번 여름, 며칠 전 ‘인생 경기’ 하나는 시원하게 잘 봤다. 젊은 선수들이 주축이 된 롯데의 더 나은 활약을 기대한다. 어린 선수들이 더 성장하고 팀이 더 단단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
2026-08-23 [18:02]
-
[편집국에서] 형사소송법 개정, 숙제는 시작됐다
“경찰이 수사를 제대로 안 해줘요. 집 근처 경찰서에 갔더니 부산경찰청으로 가라 하고, 부산경찰청에서는 울산으로 가라 하고….”
얼마 전 60대 사기 피해자가 사회부로 찾아왔다. 사회부에는 경찰 수사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종종 찾아온다. 수사 불만을 토로하는 전화도 수시로 걸려온다. 이런 제보가 들어오면 실제 피해 여부, 사회적 파급력과 공익성, 취재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기사화 여부를 결정한다. 심각한 피해에도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제보자의 답답함에 공감하면서도 기준에 못 미쳐 기사로 쓰지 못한 때도 있었다.
지난달 31일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동안 만났던 제보자와 범죄 피해자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억울함이 생겨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제보가 더 늘어나겠다는 씁쓸한 전망도 함께 들었다.
일거리가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은 법조계에서도 나온다. 변호사들은 범죄 피해자들이 피해 입증을 위해 이전보다 더 많이 찾아올 것이라 예상한다. 검사의 수사권이 사라지면서 그 공백을 이제 범죄 피해자가 변호사 도움을 받아 메우는 구조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2021년 문재인 정부의 검경 수사권 조정, 이른바 ‘검수완박(검찰의 수사권 완전 박탈)’이후 벌어진 일들만 봐도 알 수 있다. 검찰의 직접 수사 범위가 대폭 축소되면서 현장에서는 수사 지연이라는 부작용이 심각하게 나타났다.
검찰의 직접 수사 대상이 줄어든 만큼 수사가 경찰로 몰리면서 수사 지연이 늘어났다. 여기에 검찰의 수사지휘권마저 폐지되면서 두 기관이 서로 사건을 떠미는 현상까지 겹쳤다. 그 사이에서 고통받는 것은 결국 범죄 피해자들이다.
수사 지연은 범죄 피해자의 사법 비용 증가로도 이어진다. 수사가 진척되지 않으니 피해자들이 변호사를 고용해 직접 증거를 모으고 경찰에 수사를 독려하는 일이 잦아졌다. 지역의 한 변호사는 “경찰서에서 수사 여력이 없으니 증거를 직접 찾아오라는 답을 듣고 변호사를 찾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고 전했다. 예컨대 사기 사건의 경우 가해자의 자금 흐름을 추적해 경찰에 넘겨줘야 사건 처리가 빨라지기 때문에, 변호사를 통해 민사 소송을 먼저 진행한 뒤 그 결과를 바탕으로 형사 고소를 이어가는 식이다.
이번 개정안의 가장 큰 쟁점은 보완수사권이었다. ‘장윤기 사건’이나 ‘돌려차기 사건’처럼 경찰 수사가 부실했을 경우 이를 바로잡을 장치가 있느냐는 것이다. 여당은 범죄 피해자가 경찰 수사에 이의신청을 할 수 있고, 이 경우 경찰이 사건을 검사에게 송치하기 때문에 보완수사권 폐지로 인한 피해자 불이익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이의신청 과정에서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또 이의신청으로 사건이 검사에게 송치되더라도, 검사가 할 수 있는 일은 경찰에 보완수사나 재수사를 요구하는 것뿐이다. 결국 이의신청을 하더라도 수사는 다시 경찰의 손으로 돌아가는 구조다.
개정 형소법에 따르면 검사는 경찰의 부실·불공정 수사가 우려될 경우 상급 관서로 사건을 재지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절차의 한계도 뚜렷하다. 법에 명시된 ‘현저하게 부실’한 수사의 기준이 모호한 데다, 검사가 직접 수사를 못하는 이상 부실 여부 판단은 경찰이 작성한 서면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의도적인 부실 수사일수록 서류는 부실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수사기관을 재지정하는 과정에서 사건 처리는 또 한 번 지연될 여지가 크다.
기존 형소법이 완벽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존 법체제에 맞춰 돌아가던 시스템을 흔들었다면, 뻔히 예상되는 부작용에는 면밀히 대응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7월 9일 김한규 의원의 대표 발의를 시작으로 법안 통과까지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부작용 최소화를 위한 숙의 과정을 거치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었다. 형소법 개정이 여당 당대표 선출을 한 달여 앞둔 시점에 발의되면서, 지지세력 결집과 정체성 검증의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형소법 개정 후 여당의 한 의원은 “숙제가 끝났다”고 했지만,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돈 없는 범죄 피해자 구제는 어떤 식으로 할지, 경찰의 부실 수사를 어떻게 보완할지, 경찰의 비대해진 권한을 견제할 장치는 무엇인지 논의는 계속돼야 한다. 국민 다수가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번 개정안의 성패는 결국 후속 조치를 얼마나 촘촘히 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 숙제를 제대로 해냈는지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2년 뒤 총선에서 이뤄질 것이다.
2026-08-16 [18:18]
-
[편집국에서] 국민보다 당원 뜻이 위에 있는 나라
정치가 복잡할수록 질문은 단순해져야 한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가 재판관 발언을 인용해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쿠이 보노(Cui bono)’, 즉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가’라는 질문이다. 요즘 한국 정치를 보고 있으면 이 질문의 의미가 어느 때보다 무겁게 다가온다. 국민의 뜻이 우선인가, 당원의 뜻이 우선인가. 지금 여야는 모두가 ‘당원이 주인’이라고 외친다. 당원 참여 확대 자체는 정당 민주주의의 발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심이 민심을 넘어서는 순간 문제가 된다. 민주당은 강성 당원의 ‘팬덤’을 등에 업고 국민 여론과 동떨어진 검찰 보완수사권 폐지를 밀어붙였고, 국민의힘은 강성 지지층이 호응하는 부정선거론을 앞세워 당 대표의 ‘정치적 생명줄’로 삼고 있다.
민주당의 보완수사권 폐지는 특히 전당대회와 맞물리면서 어느새 ‘절대선’이 됐다. 당대표 후보들이 강성 당원들의 표심을 의식해 경쟁적으로 폐지론을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더 강하게 검찰개혁을 주장하는지가 당원들에게 자신의 정통성과 개혁 선명성을 입증하는 기준이 된 셈이다.
문제는 그 선명성 경쟁이 국민 여론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한국갤럽의 지난달 14~16일 조사에서 보완수사권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은 61%로, ‘폐지해야 한다’는 23%를 크게 앞섰다. 지난 3일 개혁신당 조사에서도 이재명 대통령이 형사소송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응답이 59.6%였고, 시행 이후 범죄 수사 여건이 나빠질 것이라는 응답은 64%였다.
검찰의 과도한 권한을 개혁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검찰을 개혁하는 것과 검찰의 수사와 견제 기능을 없애는 것은 다른 문제다. 민주당은 보완수사권 폐지 명분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름을 소환한다. 검찰개혁은 노무현의 오랜 유지고, 보완수사권 폐지는 ‘미완의 검찰개혁의 완성’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정작 노 전 대통령의 사위인 곽상언 민주당 의원은 당론을 거스르고 폐지에 반대표를 던졌다.
여기서 다시 ‘쿠이 보노’를 묻는다. 보완수사권 폐지로 누가 가장 이익을 보는가. 민주당은 국민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에게 입증해야 한다. 검찰의 견제 장치를 없애는 것이 왜 국민에게 더 안전한지, ‘장윤기 사건’이나 ‘부산 돌려차기 사건’에서처럼 경찰 수사가 잘못됐을 때 누가 바로잡을 것인지 설명해야 한다. 특히 권력형 비리 수사에서 핵심 역할을 해온 검찰의 수사권을 무력화함으로써 ‘여권의 유력 인사들이 자신들을 겨누던 검찰이라는 눈엣가시를 없애고, 재집권 기반을 공고히 하려 한다’는 국민의 의구심을 민주당은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 답해야 한다.
국민의힘에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부정선거 의혹은 공정 선거라는 차원에서 사실관계를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실제 선관위 조사 과정에서 중간 투표율을 임의로 허위 입력한 사실 등 선거관리의 부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중간 투표율을 임의로 조정한 것과 실제 후보들의 득표 결과까지 조작한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현재까지 선관위가 투표율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부실·편의적 처리가 있었다는 사실은 드러났지만, 그것이 전체 득표율을 조작했다는 정황까지 확인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둘을 하나로 묶어 ‘부정선거’로 확대하는 강성 당원들의 주장이 당 지도부와 노선 유지의 주요 동력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쿠이 보노’를 물어야 한다. 부정선거론을 확대재생산할 때 누가 이익을 보는가. 국민인가. 아니면 당권을 유지하려는 장동혁 지도부와 그의 기반이 되는 강성 당원들인가.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서로를 극단적이라고 공격하지만, 이 점에서는 닮았다. 당심이 민심보다 위에 올라선 것이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은 기업을 생각해보자. 회사의 미래에 자신의 자산을 투자해 경영 실패의 위험까지 감수하는 ‘회사의 진짜 주인’은 주주다. 하지만 임직원들이 자신들이 회사의 주인이라는 오만과 착각 속에 지금처럼 일반 직장인의 10년치 연봉을 웃도는 과도한 성과급을 요구하고, 미래 투자나 주주 환원 등을 등한시한다면 회사가 종국에는 상장사로서 존속 이유를 잃게 될 것이다.
정당도 다르지 않다. 당원은 정당을 움직이는 사람들일 수 있지만, 국민은 정당의 존립을 결정한다. 당원은 당 대표를 뽑지만,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국민들이 뽑는다. 당원은 당론을 만들지만, 국민은 그 결과를 삶으로 감당한다. 당원은 지도부를 지켜줄 수 있지만, 선거에서 국민의 표를 대신할 수는 없다. 당원 민주주의는 필요하지만 당원 주권이 국민 주권보다 앞설 수는 없다. 그래서 정치가 복잡해질 때마다 다시 ‘쿠이 보노’를 묻게 된다. 그러나 여야가 공당으로서 존속 이유를 가지려면 질문이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 이익이 되어야 하는가. 답은 당원도, 정치인도 아니다. 국민이다.
2026-08-09 [18:05]
-
[편집국에서] 부산 관광, 질적 성장 고민할 때
한때 ‘노인과 바다’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도시. 그랬던 부산에 최근 들어 활기가 넘친다. 부산을 찾는 국내외 관광객이 급증하면서 장기간 침체됐던 지역 상권에도 온기가 돈다. 특히 외국인 관광객이 눈에 띄게 늘었다. 부산역, 서면, 해운대, 광안리, 남포동, 기장까지 도시 곳곳에서 외국인 관광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제는 부산을 ‘노인과 바다 그리고 외국인’으로 불러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마저 나올 정도다.
지난해 부산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수는 364만여 명으로, 전에 없던 기록을 세웠다. 올해는 그보다 많은 400만 명 이상이 부산을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올 상반기에만 외국인 관광객 242만여 명이 부산을 찾아 이미 목표치의 60%를 넘어선 상황이다. 게다가 상반기 전체 방한 외국인이 1070만여 명인 점을 감안하면, 네다섯 중 한 명은 부산을 찾은 셈이다.
대만과 중국 등 중화권 관광객을 중심으로는 ‘부산병’이 유행 중이다. 부산 특유의 감성과 풍경을 잊지 못해 그리움을 느끼며 재방문을 갈망하는 ‘여행 후유증’을 뜻하는 말이 부산병이다. 이에 앞서 ‘서울병’이 한 차례 이미 유행하기도 했으니, 이 인기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상대적으로 관광산업 의존도가 높은 부산의 경제적 특성을 고려하면, 이들의 발길을 붙잡아 둘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실제 관광객 유치로 인한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올 1분기 부산 전체 상가 공실률은 높아졌지만, 관광객이 자주 찾는 서면·전포 일대와 남포동의 중대형 상가 공실률은 오히려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많은 외국인들이 부산을 찾는 이유로는 K컬처의 세계적 인기가 꼽힌다. 지난 6월에는 BTS 부산 공연을 즐기기 위해 국내외 아미(BTS 팬덤명)들이 부산에 몰려 들었다. BC카드가 부산 지역 가맹점 매출 데이터를 기반으로 외국인 관광객 총 5만 4700여 명의 주간(6월 7~13일) 소비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전통시장 결제액이 직전 주간보다 99.8% 증가해 눈길을 끌었다. 아미들이 해운대시장과 국제시장 등에서 ‘먹방’을 즐긴 것이 원인으로 분석된다.
최근에는 미쉐린 가이드에 선정된 식당이 늘면서 지역 먹거리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의 화려한 야경, 제주와 같은 자연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다채로운 매력도 부산의 강점이다. 원화 약세와 중일 관계 악화로 인한 반사 이익도 누리고 있다.
이제는 부산 관광의 양적 성장을 넘어 질적 성장을 고민할 때다. 단순히 많이 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들이 지역에서 오래 머무르며 지갑을 더 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난해 부산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수는 늘었지만, 체류 기간과 소비 규모는 오히려 전년에 비해 줄었다는 통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부산시 조사에 따르면 외국인 관광객의 평균 체류 기간은 2024년 6.2일에서 지난해 4.8일로 1.4일 줄었다. 1인당 평균 여행 경비도 같은 기간 828.4달러(한화 약 120만 원)에서 710.6달러(약 103만 원)로 감소했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로 부산이 경유지에 그치는 한계를 꼽는다. 현재 부산을 찾는 유럽, 미국 관광객들의 경우 인천공항으로 들어와 서울에 머무르며 KTX를 타고 다른 지역 도시들을 경유하는 방식으로 여행하는 경우가 많다. 장거리 직항노선이 부족한 부산이 경유지에 그치다 보니, 상대적으로 짧게 머무르고 적게 소비하는 여행 패턴을 보인다는 분석이 나온다.
부산이 참고해야 할 모델로는 일본의 오사카와 같은 관광 허브가 꼽힌다. 부산을 거점으로 울산, 경남을 여행하며 장기간 체류할 수 있도록 동남권 광역관광 전략을 세워야 한다. 오사카를 찾은 관광객들이 교토, 고베, 나라 등 인근 도시를 함께 여행하는 것처럼 부산을 찾은 관광객들이 울산과 경남 곳곳까지 두루 편리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광역관광 인프라를 확충해야 한다. 부울경 행정 통합과 가덕신공항 조기 개항이 함께 추진된다면 시너지가 날 것이다.
외국인 관광객들의 ‘부산병’이 쉽게 치유되지 않고, 이들의 ‘N차 방문’까지 이끌어 내게 하려면 부산이 가진 특유의 지역색과 매력을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외국인 관광객도 현지인들의 일상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로컬 체험을 선호한다. 감천문화마을이 수년째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다른 곳에선 찾아볼 수 없는 마을 고유의 색채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만약 광안리 해변의 주요 상권이나 남포동 상권 등이 모두 비슷비슷한 인형뽑기 가게 등으로 채워진다면 무슨 매력이 있을까. 임대료 상승 탓에 기존 상인과 원주민이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둥지내몰림) 현상으로 인한 상권 획일화를 막으려면 각 지자체의 세심한 정책 마련도 필요하다.
2026-08-02 [17:59]
-
[편집국에서] 부울경 통합, 기싸움을 멈춰라
“주민 투표를 거쳐 2028년 4월을 목표로 부산·경남 행정통합을 추진하겠다는 뜻에 변함이 없다.”(박완수 경남지사)
“행정통합도 좋지만, 당장 내년과 내후년 부산·울산·경남의 공통사업 예산 확보 방안을 먼저 고민하는 게 이치다.”(전재수 부산시장)
지난 1일 출범한 민선 9기의 부울경 광역지자체장들은 저마다의 시·도정 방향 수립과 조직 개편에 여념이 없다. 각 지자체의 굵직한 현안에 대해 방향성을 정하고 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한때 뜨겁게 달궈졌던 부산·경남 행정통합은 소외되고 있다. 마치 누가 먼저 말을 꺼낸다는 것이 불편한 모양새다.
박완수 경남도지사가 기자간담회에서 예정된 대로 부산·경남 행정통합을 추진하겠다고 밝히자, 전재수 부산시장은 내년과 내후년은 부울경의 공통사업 예산 확보부터 하자고 맞받았다. 전 시장의 부울경 메가시티와 박 지사의 부산·경남 행정통합 정책 방향이 부딪히는 순간이다. 서로 자신의 공약을 관철시키기 위해 상대방에게 잽을 던지면서 기싸움을 벌인 셈이다. 이미 예상했던 갈등이다. 물론 벌써 갈등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갈 길이 멀기에, 일단은 가벼운 의견 교환 정도로 해두자.
김상욱 울산시장도 초광역 협력체계 복원과 공동사업 추진 등을 통해 행정통합 논의를 단계적으로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에, 이번 지방선거를 계기를 부산·경남 통합을 넘어 부울경 통합이라는 더 큰 판이 형성됐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현실적으로 다음 지방선거 전까지는 추가 행정통합이 불가능하다. 이미 선출된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의 임기를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듯이, 사실상 부울경 통합은 각 정당의 대립과 지자체장 개인의 정치적 이익 등 각종 셈법이 동반되기에 쉽지 않은 길이다.
이는 과거 추진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부울경 통합이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은 2021년 부울경 광역지자체 간 합의로 ‘부울경 메가시티’ 구축 계획이 발표되면서다. 메가시티는 행정통합의 전 단계 정도로, 부울경 광역특별연합을 설립해 초광역적으로 공동의 정책을 개발, 집행하자는 것이다. 당시 부울경 광역단체장이 모두 더불어민주당 소속이었기에 가능했다.
이후 2022년 지방선거에서 부울경 광역단체장이 국민의힘 소속으로 전부 바뀌면서 메가시티는 사실상 물건너갔다. 여론을 의식해 ‘부울경 경제동맹’ 결성을 내세웠지만, 정책의 집행력과 일관성 부족 등 결속력이 떨어진 형식적인 동맹으로 흘러갔다.
통합론에 다시 불을 지핀 것은 지난해 12월 이 대통령이 대전·충남 통합을 언급하면서였다. 부울경을 비롯한 전국은 광역행정통합이라는 거센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당시 김두겸 전 울산시장은 통합을 반대하며 일찌감치 발을 뺐고, 박형준 전 부산시장과 박완수 지사는 주민의 동의가 먼저라는 미명하에 당장의 통합 대신 2028년 4월 통합에 합의했다. 당시에도 주민투표를 거칠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대통령과 다른 정당 소속, 개인의 정치적 이해관계 등으로 미뤘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부산시장과 울산시장이 바뀌고, 그마저도 부울경 지자체장이 민주당과 국힘 양당으로 갈리면서 부울경 통합은 차질이 불가피해졌고, 셈법은 더욱 복잡해졌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올해 주민 찬반 투표를 거쳐 내년 통합특별법을 만들고, 2028년 4월 총선 때 통합단체장을 선출하는 방안이었으나, 힘들게 선거에서 이겼는데 2년도 채 안 돼 직을 버린다는 용단을 내릴 정치인은 많지 않다. 물론 이것 또한 행정통합을 2028년으로 한다는 합의를 할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결과였다.
그렇다면 향후 부울경 통합은 현실적으로 어떠한 길을 가야 할까.
통합 명칭, 청사, 주민 수용성, 권한 배분 등 해결해야 할 쟁점이 많다. 통합TF팀을 구성해 지속적으로 논의함으로써 갈등을 하나씩 없애 나가야 한다. 호남·충청권은 반도체, AI 등 첨단산업 유치로 생존의 길이 열린 반면, 부울경은 통합으로써 규모의 경제를 만들어 성장 동력을 창출해야 한다.
어영부영 시간을 끌지 말아야 한다. 전 시장과 김 시장의 선 메가시티, 후 행정통합이든 박 지사의 선 행정통합이든 방식은 중요하지 않다. 결국 부울경 행정통합으로 이르는 길은 세 명이 조속히 만나 머리를 맞대야 한다. 각자의 정치적 욕심을 버리고, 부울경의 발전과 시민, 도민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부울경 통합은 생존의 문제다. 지자체장 간의 기싸움으로, 정치적 셈법으로 더 늦춰진다면, 시·도민의 분노를 걱정해야 할 수 있다.
cornie@busan.com
2026-07-26 [17:56]
-
[편집국에서] 강물이 흘러야 녹색 눈물이 멈춘다
한여름이 되면 낙동강이 비명을 지른다. 올해도 다르지 않다. 기후에너지환경부 물환경정보시스템 기준으로 지난 16일 현재 낙동강 해평, 강정·고령, 칠서, 물금·매리, 화명 등 5개 지점에 녹조로 인한 조류 경보가 발령 중이다. 특히 강정·고령, 칠서, 물금·매리 지점은 이달 들어 ‘경계’ 경보가 지속되고 있다. ‘경계’ 경보는 유해 남조류가 2회 연속으로 1만 세포/ml 이상일 때 발령되는 경보로, ‘대발령’ 다음으로 높은 심각한 단계다.
고통은 강에 머물지 않는다. 얼마 전 강 본류를 뒤덮은 짙은 녹조가 인근 들녘의 농수로와 양수장으로까지 번졌다는 〈부산일보〉 기사를 봤다. 유해 남세균은 농업용수 공급시설을 점령했고, 인간의 먹거리 안전은 물론 생태계까지 위협하고 있다. “이 독한 물로 농사를 지으면 어떤 작물이 제대로 자라겠느냐.” 농민들의 절규가 처절하다.
강의 고통은 대체로 빠르게 흐르지 못하는 물길 때문이다. 흐르지 않고 고이면 썩기 마련이다. 환경단체는 녹조로 썩어가는 낙동강의 8개 보 수문을 즉각 열어 물길을 빠르게 하고 탁한 녹색 물빛을 맑게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부는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올 여름 녹조가 유독 심하긴 해도, 사실 올 여름만의 문제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낙동강 수문 개방을 두고 벌어지는 환경단체와 정부 간의 실랑이 역시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매년 녹조로 고통 받는 강을 생각하면 수문 몇 개쯤은 통 크게 열어줘도 될 것 같지만(수문 개방에 뭐 그리 큰 돈이 들어갈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라 한다.
수문을 열면 강의 수위가 낮아지는데, 이때 인근 취수장과 양수장 기능에 비상이 걸린다. 4대강 사업 이후 대부분의 취수 시설이 높게 유지된 수위를 기준으로 설계된 까닭에 수위가 크게 떨어지면 취수구가 수면 위로 드러나 물을 끌어오는 기능 자체가 마비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영남권 수백만 명의 식수 공급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농업용수 역시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정부는 수문 개방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문제의 본질에는 수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취·양수장 개선 사업에 있다. 물론 더 거슬러 4대강 사업을 원망할 수도 있을 테지만, 사후약방문이라 넘어가기로 한다. 어쨌든, 보의 수문을 열더라도 식수와 농업용수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려면 낮은 수위에서도 취수가 가능하도록 취수구를 하천 바닥 쪽으로 낮추거나 대형 펌프를 보강하는 공사가 절실한데, 그것이 취·양수장 개선 사업이다. 그러나 해당 사업의 속도는 막힌 낙동강 물길만큼 더디다.
왜 더딘가. 4대강 사업을 바라보는 정무적 판단이 정권마다 달랐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일찌감치 취·양수장 개선 사업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2021년부터 2026년까지 한강과 낙동강 유역의 취·양수장을 대대적으로 개선하겠다는 계획도 있었다. 그러나 정권 교체 이후 4대강 사업의 실책을 인정하기 싫은 새 정부의 정책 기조가 바뀌면서 사업은 속도를 잃었다. 녹조 문제가 다시 심각해지자 사업은 재개됐지만 완공 목표는 2028년으로 늦춰졌다. 현재 개선이 완료된 곳은 전체 대상 171개소 가운데 15개소에 불과하다. 완료율은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150곳이 넘는 현장은 여전히 설계 단계에 머물러 있다.
비효율적인 행정력도 문제다. 생활·공업용수를 맡은 환경부와 농업용수를 담당하는 농림축산식품부의 일정이 엇갈렸고, 사업을 맡은 지방자치단체는 예산과 전문인력이 부족했다. 하천점용허가와 환경영향평가 등 복잡한 인허가 절차도 착공을 늦췄다. 정밀 설계가 끝나야 예산을 집행할 수 있는 구조까지 겹치면서 사업은 제자리걸음을 반복했다.
더이상 미룰 순 없다. 수문 개방으로 물길을 빠르게 하는 것만큼이나 취·양수장 개선 사업의 속도를 빠르게 하는 것이 절실하다. 중앙정부가 예산과 행정 지원을 과감하게 확대하고, 직접 교부와 전문기관 위수탁 같은 제도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사업을 국가 재난 예방 사업으로 격상하는 방법도 고민해 볼만 하다.
낙동강은 영남의 식수와 농업, 생태계를 함께 떠받치는 생명의 강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으로 쌓은 둑이 물길을 막았고, 강이 녹색 눈물로 고통을 호소하는 데도 여전히 인간의 필요에 의해 그 물길을 쉽사리 열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강의 눈물은 어민들의 눈물로, 농부의 눈물로 번지고, 영남권 시민들의 눈물로 번질 태세다. 이제는 정말 강의 눈물을 멈춰야 할 때다. 그러기 위해선 하루 빨리 취·양수장 인프라를 새롭게 갖춰, 필요할 때 주저없이 강물을 흘릴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2026-07-19 [17:54]
-
[편집국에서] 버티는 장동혁에 속수무책… '웰빙 본색’ 국힘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6·3 지방선거 결과를 두고 자신이 ‘혼신을 다해’ 이룬 선전으로 포장하는 건 염치 없는 짓이다. 4년 전 12석이던 당의 광역단체장 의석은 이번에 4석으로 쪼그라들었다. 장 대표가 선거 전 스스로 승부처로 꼽은 두 곳 중 부산시장은 졌고, 서울시장은 반(反)장동혁을 표방한 후보가 승리했다. 이것만 해도 장 대표는 별로 할 말이 없어야 한다.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면 이번 선거 민심은 장 대표를 ‘정밀 타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거운동 기간 장 대표가 가장 열심히 지원 사격을 했던 충청권 광역단체장은 전패했고, 무소속 한동훈 후보 떨어뜨리기에 당력을 쏟아부은 부산 북갑에서는 한 후보가 보란 듯이 승리했다. 장 대표는 자신의 사퇴를 촉구하는 이성권(부산 사하갑) 의원의 지방선거 ‘성적표’를 거론했지만, 정작 이 지역은 국민의힘이 광역·기초의원을 석권한 반면 장 대표야말로 지역구에서 12년 동안 당 소속이던 서천군수는 물론 도의원 2석까지 민주당에 모두 뺏긴 것으로 나타났다. 장 대표를 멀리한 후보는 살아남았고, 장 대표가 지원한 후보는 낙선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당권파가 과거 선거를 ‘선택적 비교’해 성과를 부풀리는 것도 궁색하다. 이번 선거는 보수 대통령 탄핵 후 1년여 만에 치르는 지방선거라는 점에서 2018년과 유사한 환경이었지만, 당시에는 투표 하루 전 ‘북미 정상회담’이라는 메가톤급 변수가 있었고, 이번에는 오히려 ‘공소 취소 특검’이라는 야당의 호재가 등장했다. 국민의힘이 대선 패배 이후 1년 동안만이라도 반성과 쇄신으로 내부 정비를 했다면 선거 환경은 여야가 대등했거나, 오히려 야당이 우세했을 수 있었다. 최악의 상황을 자초해놓고 그보다 조금 나은 결과가 나왔다고 자화자찬하는 모습에 실소가 나온다.
아무리 ‘데이터’를 들여다봐도 유구무언이어야 할 것 같은 장 대표는 스스로 책임지기는커녕 ‘징계 정치’를 재가동해 반대파에게 책임을 씌우려 한다. 상식을 완력으로 뒤집으려는 꼴이다. 그런데 이 또한 명분이 없어 우왕좌왕하는 꼴이다. 무소속 후보를 찾아가 치킨 회동을 한 의원들을 징계한다? 그렇다면 지난 대선 때 당 소속 김문수 후보를 한덕수 전 국무총리로 무리하게 교체하려다 선거판을 꼬이게 만든 구주류 의원들은 어떤 징계를 받았나. 치킨 회동이 아니라 대놓고 무소속 후보 지원 연설을 한 당권파 인사는 어쩔 건가. 이 또한 ‘선택적 징계’로 돌파할 건지 묻고 싶다.
오히려 장 대표가 나홀로 매달리는 ‘전국 재선거’ 주장이야말로 해당 행위라고 할 만하다. 당권파와 가까운 구주류 의원들조차 전국 재선거와 거리를 두는 것은 현실성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침묵하지만, ‘투표 용지 부족’과 무관한 압도적 다수의 유권자들에게 재선거 강요는 더 큰 공정성 훼손을 부를 수 밖에 없다. 조금만 생각해도 전면 재선거는 안 했을 때보다 비교할 수 없이 많은 부작용을 낳을 것이 자명하다. 2030의 분노를 정치권이 끌어안는 방법은 공감하되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지, 책임지지도 못할 주장으로 그들을 현혹하는 게 아니다. 그게 취약한 입지를 지키겠다는 얕은 셈법이라면 공당의 신뢰도만 좀먹는 중대한 해당 행위다.
장 대표는 정치 문화의 저급화에도 책임이 크다. 공식회의에서 현직 대통령을 ‘이재명’으로 부르는 것도 모자라 ‘재명아’ 팻말을 꺼내든 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장 대표를 비판하는 어떤 의원들도 반말로 조롱하는 ‘저렴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국가 원수에 대한 막가는 조롱이 진영 간 적대감만 북돋을 뿐 어떤 정치적 효용이 있겠나. 장 대표를 떠받드는 광장의 소수만 열광할 뿐, 상식 있는 다수는 그 품격 없음에 탄식이 절로 날 뿐이다.
장 대표의 비상식적 독주로 인한 가장 큰 해악은 제1 야당의 견제 기능이 무력화된다는 것이다. 여권 외에는 대다수가 반대하는 검찰 보완수사권 폐지를 민주당이 마구 밀어붙일 수 있는 배경에는 야당의 비판이 전혀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파묘’(과거사 캐기) 논란까지 부른 이전투구 당권 경쟁, 투기장이 된 주식 시장, 다시 급등하는 부동산 등 여당의 악재가 수두룩하지만 당 지지율은 오히려 국민의힘이 빠지는 추세다. 국정의 균형을 위해 존재감 있는 야당이 얼마나 필요한지 장 대표의 국민의힘이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당이 벼랑 끝으로 걸어가는 형국이지만 당사자인 장 대표는 “사퇴는 없다”를 고수하고, 당내에는 “대표가 버티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넋두리만 가득하다. ‘웰빙 정당’ 국민의힘의 현실이다. 일부 의원들은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하지만, 이대로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이 당은 가망이 없다’고 확신하는 국민들이 늘어날 것 같다.
2026-07-12 [1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