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일기] 흘려들어선 안 될 진주 씨의 ‘악다구니’
김진주(가명) 씨를 처음 만난 건 2023년 봄, 부산 서면의 한 카페였다. 그는 트렌디한 패션에 관심이 많고, 대화를 경쾌하게 이끌어 나갈 줄 아는 스물여덟 살의 밝게 빛나는 청년 그 자체였다. 이런 진주 씨가 사회부 기자를 만나게 됐던 건 그가 바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부산일보〉의 단독 보도로 돌려차기 사건이 세상에 처음 알려졌고, 진주 씨는 “나도 모르는 내 이야기가 어떻게 기사로 나갔느냐”며 기자에게 먼저 연락을 해왔다.
첫 만남에서 유독 눈에 띄었던 건 그의 가방이었다. 웬만한 남성이 들기에도 버거워 보였던 진주 씨의 가방에는 형사소송법을 다루는 전문 서적과 사건 관련 서류들이 빼곡히 차 있었다. 포렌식 결과 등 1600쪽이 넘는 수사기록을 수시로 들고 다니며 홀로 사건을 파헤치고 있다고 했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그의 삶은 형사소송법이나 포렌식 수사 같은 말들과 너무나도 멀었다. 스스로도 “뉴스 같은 걸 지극히도 멀리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끔찍한 ‘강간 살인미수’ 사건의 피해자였던 진주 씨는 사건 직후 생업을 완전히 접고 실체 규명에 매달렸다. 수사기관의 문턱에서 악다구니를 썼지만 번번이 외면당했다. 진주 씨는 처음부터 성범죄를 의심했지만 경찰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폭행 혐의만 적용했다. 피해 당시 그가 입고 있었던 청바지 안쪽에는 가해 남성의 DNA가 묻어 있었지만, 경찰은 DNA 검사를 하고도 찾아내지 못했다. 가해자는 범행 직후 자신이 붙잡힐까 봐 ‘실시간 서면 강간미수’ ‘부전동 강간사건’을 검색했고 경찰도 포렌식을 통해 이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진주 씨는 검찰의 보완수사가 시작된 항소심에 이르러서야 이를 알게됐다. 검찰의 보완수사 덕분에 공소장은 변경됐고, 진주 씨는 ‘피해자의 알권리’를 주장하며 2023년 국정감사장의 스타로 등극하기도 했다.
3년이 지난 지금, 진주 씨는 정치권을 향해 모진 말을 내뱉으며 다시 악다구니를 쓰고 있다.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에게 “지옥에나 가라”며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벼랑 끝까지 내몰렸던 그를 구제한 검찰의 보완수사권이 폐지됐기 때문이다.
강력 사건의 피해자들은 늘 지옥에 살고 있다. 끔찍했던 폭력의 경험을 증언하는 순간마다 사건이 발생한 그날로 돌아간다. 모든 강력 사건 피해자들이 진주 씨처럼 생업을 접고 카메라 앞에 서서 목소리를 낼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될 일이다.
검찰의 수사를 무작정 옹호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이미 지옥에 갇혀 있는 피해자들이 마음 속 응어리를 풀 수 있는 마지막 기회는 살려 놓아야 한다. 일각에서는 보완수사 요구권을 남겨두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여기에 진주 씨는 “팔다리가 다 부러진 피해자들에게 ‘셀프바에 차려놨으니 알아서 가져가시라’고 하는 격”이라고 일갈했다.
요즘 진주 씨의 가방에는 전문 서적 대신 작은 배지가 달려 있다. 범죄 피해자들이 서로를 지지하고 연대한다는 의미다. 그들은 제각기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고 있다. “피해자가 억울하면 직접 나서라는 나라가 어딨느냐”고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를 정치권이 다시 한번 새겨야 한다.
2026-08-05 [18:23]
-
[기자일기] 미끄럼 ‘방치’ 포장이 되지 않으려면
‘비 오면 쭉 미끌린다’ ‘붉은색 미끄럼틀’ ‘비 오는 날 브레이크 밟아보세요, 진짜 욕 나옵니다.’
미끄럼방지포장을 지칭하는 오명과 냉소 섞인 시민들의 반응들이다. 이름은 ‘미끄럼 방지’이지만 ‘미끄럼 방치’ 포장이라는 비아냥까지 나온다. 비가 오면 더욱 미끄럽다는 경험이 반복되면서 도로 안전에 대한 위험과 불신이 쌓인 결과다. 사고를 막기 위해 설치한 도로가 시민들에게 조롱을 듣는 현실은 행정과 관리의 실패를 보여준다.
“이거 몇십 년을 써온건데요”. 취재 과정에서 들었던 부산 한 구청 건설과 직원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오래 써왔다면 그 자체로 문제가 없을까. 수십 년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랜 기간 사용해 왔음에도 유지·관리 체계가 비어있다는 의미로 들렸다.
미끄럼방지포장은 본래 사고를 줄이기 위해 설치하는 시설이지만 제때 점검·관리가 되지 않으면서 오히려 사고를 위험을 키우는 요소가 됐다.
지난 3월 부산 북구 만덕동에서는 노후된 미끄럼방지포장 내리막길에서 25인승 유치원 통학버스가 빗길에 미끄러져 사람이 다치는 일이 발생했다.
비슷한 사고는 되풀이 된다. 2024년 9월 서울 남산 둘레길에서도 미끄러짐 사고가 발생해 마을버스가 전복됐다. 당시 언론의 관심 속 미끄럼방지포장의 위험성이 공론화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작 핵심이었던 유지·관리 문제는 흐려졌다. 무관심 속 대책 없이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변화가 생겼다. <부산일보>가 부산 16개 구·군 관리 실태를 전수 취재하면서 변화가 생겼다. 대부분 지자체가 최초 설치 시점도 몰랐고, 관리 기준도 없어 사실상 방치되고 있었다. 보도 이후 국토교통부는 관련 지침(행정규칙) 개정에 착수했고 부산시도 처음으로 전수조사와 관리체계 마련에 나섰다.
예상치 못한 부작용도 나타났다. 보도 직후 부산의 한 미끄럼방지포장 시공업체 대표는 기자에게 “구청들이 공사 발주를 꺼린다”고 토로했다. 며칠 뒤 수도권 업체 대표도 “서울시와 구청, 사업소들이 국토부 지침이 개정될 때까지 신규 발주를 모두 미루고 있다”고 전했다.
관리 기준 부재가 낳은 문제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현장 혼선은 불가피해 보인다. 다만 이 혼선을 장기화해서는 안 된다.
국토부는 오는 10월까지 관련 지침 개정을 완료하겠다고 약속했다. 관청이 사무 처리의 근거로 삼는 지침에 유지·관리 기준이 구체성있게 담겨야 현장의 변화도 시작될 수 있다. 점검 주기와 보수·재포장 기준, 관리 주체와 책임 범위를 명확히 해 ‘설치 후 방치’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시공업계 역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부실 시공을 막고 품질을 높여야 한다. 발주기관은 품질 확보를 위해 단순히 서류·사진 접수로 준공검사를 끝낼 것이 아니라 현장 확인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설치부터 유지관리까지 모든 과정의 검증이 강화돼야 한다.
중요한 것은 붉은색 포장을 새로 덧칠하는 게 아니다. 보여주기식 정비가 아니라 설치 이후 관리의 빈틈을 메우는 체계가 뒤따라야 한다.
그동안 미끄럼방지포장은 위험한 시설이 아니라, 위험하게 방치된 시설이다. 이번에야말로 ‘붉은색 미끄럼틀’이라는 오명을 벗겨야 한다.
2026-07-29 [18:40]
-
[기자일기] ‘박쥐 국적’ 논란 쿠팡, 유리할 때만 한국 기업?
이솝 우화 속 박쥐는 날짐승과 들짐승 사이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편을 바꾸며 연명한다. 최근 우리 국민들이 쿠팡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와 다르지 않다. 사업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운영하기 때문에 ‘한국 기업’이라고 주장하던 쿠팡이 규제와 책임의 칼날 앞에서는 ‘미국 기업’으로 둔갑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발생한 개인정보 유출 사태로 우리 정부와 정치권의 압박이 거세지자 쿠팡은 미국에 SOS를 보냈다. 미 연방 상원의 로비 공개법 보고서에 따르면 쿠팡의 모회사 쿠팡Inc는 올해 1분기 로비 자금으로 109만 달러(약 16억 원)를 썼다. 로비 대상은 미국 상·하원 등 의회를 비롯해 국무부와 재무부, 상무부, 무역대표부 등 정부 기관이다.
로비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미국 공화당 연구위원회 소속 하원의원 54명은 최근 강경화 주미대사에게 한국에서 사업하는 미국 기업에 대한 차별적 규제를 중단하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앞서 미국 연방 하원은 한국 정부의 규제가 미국 기업에 대한 차별인지 들여다보는 청문회까지 열었다. 이들의 주장에서 주목할 부분은 ‘쿠팡은 미국 기업’이라는 점이다. 쿠팡이 로비를 통해 미국 기업이라는 점을 강조했을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7년 전으로 시계를 되돌려 보자. 2019년 7월 17일, 쿠팡은 자신들의 뉴스룸에 ‘쿠팡에 대한 거짓 소문에 대해 알려드립니다’라는 게시글을 올렸다. 일본 소프트뱅크의 투자로 “일본 기업이 아니냐”는 의혹에 대한 공식 해명에 나선 것이다.
쿠팡 측은 당시 “쿠팡은 자랑스러운 한국 기업”이라며 “쿠팡은 우리나라에서 설립돼 성장했고, 사업의 대부분을 한국 내에서 운영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근거 없는 비난에 현혹되지 말라”고 했다.
그렇다면 쿠팡은 어느 나라 기업일까. 쿠팡 Inc는 홈페이지를 통해 “쿠팡은 글로벌 커머스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미국 기술기업이자 포춘 150대 기업”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쿠팡이 ‘미국 기업’이라는 점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사회적 책임이다. 쿠팡이 한국에서 국내 소비자들을 통해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면 그에 걸맞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
필요할 때만 한국 기업이고, 불리할 때 미국 기업으로 바뀌는 행태가 계속된다면 한국 소비자는 머지않아 등을 돌릴 것이다.
2026-04-28 [18:20]
-
[기자일기] 고려아연, 긴 분쟁 끝내고 부울경 성원에 화답해야
고려아연을 둘러싼 현 경영진 최윤범 회장과 영풍·MBK파트너스의 경영권 분쟁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양측의 분쟁은 1년 3개월간 이어지고 있다. 최근 고려아연이 미국 정부와 함께 현지에 11조 원 규모의 핵심광물 생산 제련소 건설 프로젝트를 발표하자 공방이 가열됐다.
핵심 쟁점은 유상증자를 통해 미국 정부가 가져갈 고려아연 지분 10%다. 최 회장은 미국 정부가 든든한 우군으로 나서며 현재 44 대 32로 열세인 지분 싸움에 반전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이 때문에 영풍·MBK는 ‘백기사’를 동원하기 위한 ‘꼼수’라고 반발한다. 반면 최 회장 측은 미국 정부의 일반적인 투자 방식일 뿐이라며 제기된 의혹을 일축하고 있다.
최대주주인 영풍·MBK가 의결권이 줄어드는 결정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사업에 제동을 걸어 예상되는 고려아연의 사업적 피해 역시 고려해야 한다. 권리를 주장하기 전에 그동안 기업가치와 일반 주주의 권리를 위해 책임을 다했는지 되묻고 싶다.
경영 능력도 의구심이 커진다. 영풍은 수년째 적자를 기록하고, 경북 봉화 석포제련소에서 1300만 영남 시민의 젖줄인 낙동강 오염의 원인을 제공했다. MBK 역시 올해만 ‘홈플러스 법정관리 사태’와 ‘롯데카드 개인정보 유출’ 등 대형사고 2건으로 경영 방식에 문제점을 드러냈다. MBK가 대주주인 홈플러스는 부울경에서 대규모 희망퇴직과 줄폐점, 점포 부지 매각 등으로 지역 경제에 상처를 남겼다.
고려아연은 부울경 경제를 지탱하는 핵심 기업이다. 주력사업지인 울산 온산제련소는 3000여 명의 노동자와 100여 개의 협력업체가 일한다. 노동자 상당수는 인근 부산과 경남에 거주하거나 생활권을 공유한다. 협력업체 대다수도 부산·경남에 있다. 기업의 명운이 부울경 전체에 파장을 미친다. 불확실성을 키우는 경영권 분쟁을 하루 빨리 마무리해야 할 가장 큰 이유다.
미국 제련소 건설은 고려아연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중국 위주의 전략광물 공급망을 재편하는 한미 양국 안보 전략의 중추 역할을 맡은 것이다. 최근 온산제련소에 1조 5000억 원 규모의 대규모 투자와 채용도 약속했다. 미국 진출에 따른 국내 사업 위축 우려를 일축한 것이다. 계속되는 지역경제의 위기 속 반가운 소식이다. 남은 과제는 성실한 약속 이행이다. 긴 경영권 다툼을 끝내고, 그동안 힘을 보탠 부울경의 성원에 화답할 차례다.
2025-12-23 [18:31]
-
[기자일기] 균형발전 걷어찬 현대건설이 ‘지역사회공헌’ 자화자찬
현대건설은 지난 21일 지역사회공헌 인정기업으로 3년 연속 최고 등급을 달성했다는 내용의 홍보용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보건복지부와 한국사회복지협의회가 공동 주관하는 ‘지역사회공헌 인정제’에서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받았다”고 자평했다. 경로당 노후 시설 개선, 임직원 봉사 활동, 독거노인 대상 생활 물품 지원 등이 현대건설이 올해 내세운 핵심 성과다.
국토균형발전의 핵심이자 동남권 지역민의 30년 숙원 사업인 가덕신공항 건립 사업을 6년이나 지연시킨 건설사가 적어도 ‘지역사회공헌’을 타이틀로 자화자찬할 일은 아니다. 컨소시엄 대표사였던 현대건설이 불참 선언만 하지 않았더라도 상황이 이렇게 뒷걸음질치지는 않았을 테다.
현대건설은 지난 5월 컨소시엄 불참을 선언하면서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공기 확보가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안전한 공항을 짓자는 데 반대할 이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현대건설이 내세운 안전이라는 구호는 지나치게 편의적이고 자가당착적이다.
현대건설은 가덕신공항의 앞선 3차례 입찰 참여를 통해 84개월이라는 공사 기간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는 전문가들이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산출한 기간이고, 31차례 자문회의와 16차례 업계 간담회를 거친 합의의 결과물이다. 현대건설도 이를 기본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입찰에 참여했다.
10조 원이 넘는 국가적 프로젝트에, 그것도 컨소시엄 대표사로 참여하면서 건설 공사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공기에 안전을 이유로 몽니를 놓는 행위는 이해하기 힘들다. 국내 2위의 건설 대기업이 입찰 안내서에 적힌 공기를 손바닥 뒤집듯 바꾸려는 행태는 발주처인 국토부를 어느 지방의 조그만 재개발 조합을 상대하는 것쯤으로 여긴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이런 선례를 가만히 놔두면 앞으로 국책사업이 제대로 이뤄지겠나.
가덕신공항이 뒤로 밀려난 자리에는 또다시 지역 감정과 정치 논리가 뒤엉키고 있다. 정부가 약속한 국책사업을 지연시킨 쪽은 따로 있는데, ‘고추나 말리게 될 공항은 왜 짓냐’는 식의 조롱과 비난이 난무한다. 케케묵은 갈등을 또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려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킨 데에 현대건설의 책임도 분명하다. 현재 국토부는 현대건설의 계약 불이행 여부와 관련해 법제처에 국가계약법 해석을 공식 의뢰한 상태다. 지역사회를 뒷걸음질시키고 갈등을 조장한 책임은 반드시 물어야 한다.
2025-11-25 [18: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