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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의 곰곰 생각] 의대 광풍 휩쓸면 반도체는 누가 만드나
지난 3일 대만을 엄습한 강진은 막대한 인명·재산 피해를 남겼다. 한데, 외신이 주목한 뉴스는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인 TSMC의 피해 여부였다. 내진 설계 덕분에 웨이퍼 팹(fab·반도체 생산공장)은 사흘 만에 복구됐다. 이 소식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린 곳도, 불안감이 더 커진 곳도 미국이다. 미국이 전 세계 AI(인공지능)·전기차·드론·인공위성·무기 체계 기술을 선도하지만 그 핵심인 반도체는 대만에 의존하고 있어서다.
미국 블룸버그통신의 5일 자 기사를 보면 반도체를 바라보는 미국의 속내가 가감 없이 드러난다. ‘이번 지진은 세계 경제가 얼마나 대만에 의존하는지 일깨운 사건이기도 했다. 이 작은 섬에서 전 세계 첨단 반도체의 80~90%가 생산된다.’ 이어 기사는 ‘TSMC 붕괴라는 재난이 끼칠 영향은 대공황과 유사할 것’이라는 전문가 전망으로 마무리된다. 여기서 언급된 대공황(Great Depression)은 1929~1939년 전 세계를 마비시킨 경기 침체를 말한다.
미국은 코로나19 시절 TSMC 공급 차질로 전기차 생산이 중단되는 악몽을 겪었다. 기술 강대국이지만 제조 약소국인 미국의 취약점이 노출된 사건이다. 그러니 중국이 대만을 공격하면 미국은 반도체 공장 때문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반도체를 ‘실리콘 방패(silicon shield)’에 비유한 까닭이다. 하지만 낙관은 금물이다. 미국은 지정학적 리스크를 회피하기 위해 TSMC에 대해 압박과 보조금 양면 전략으로 미국 애리조나주에 공장을 짓게 했다.
메모리 분야의 최강자 삼성전자와 HBM(고대역폭메모리) 선도 주자 SK하이닉스도 현재의 경쟁 우위에 안심할 처지가 아니다. 북한과 가까운 경기 남부권 8개 지역에 분산된 반도체 단지의 입지는 미국으로서는 지정학적 리스크다. 역시 미국 내 공장 투자를 대가로 거액 보조금 미끼를 내놓는 이유다.
미중 갈등의 시작은 무역 마찰이었지만 이내 기술 전쟁으로 비화됐다. 지금은 안보 패권으로 차원이 격상됐다. 그 최전선에 반도체가 있다. 미국은 중국이 반도체 분야에서 영원히 따라오지 못하게 만드는 게 목표다. 그래서 제조 장비를 중국에 수출하지 못하게 동맹국을 닦달한다. 동시에 반도체 내재화를 꾀한다. 생산 거점을 미국 영토로 옮기도록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미국의 왕따 전략에 맞서 중국은 과거 핵무장 때처럼 ‘거국 체제’에 돌입했다.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투입한다는 뜻이다. 국가반도체펀드 등 금전적 지원은 물론이다. 특히 공을 들이는 게 이공계 인재 육성이다. 통신·장비 업체 화웨이의 ‘천재 소년’ 프로젝트가 상징적인 사례다. ‘최고의 인재에 최고의 보수!’ 최대 200만 위안(우리 돈 약 3억 7600만 원)의 연봉을 걸고 기술 인재를 발굴한다.
미국 주도로 한국, 일본, 대만은 ‘칩4 동맹’을 형성했다. 명색이 동맹이라지만 가슴에 칼을 품은 채 악수를 한 꼴이다. 특히 일본은 1980년대 반도체 강국 시절로 되돌아가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일본 구마모토 TSMC 공장을 위해 유례 없는 세제·행정 지원에다 속도전 공사로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인재 육성에도 팔을 걷어붙였다. 일본은 올해부터 4년에 걸쳐 대학의 이공계 정원 1만 1000명을 증원하기로 했다. 3000억 엔(우리 돈 2조 6768억 원)의 기금도 만들었다. 한국과 대만을 꺾기 위해 사활을 걸었다.
국가 대항전으로 판이 커진 반도체 경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세계 각국은 유례 없는 파격 지원책과 함께 대대적인 기술 인재 육성에 나서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9일 ‘반도체 현안 점검회의’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반도체 경쟁은 산업 전쟁이자 국가 총력전”이라고 규정했다. 정확한 진단이다. 문제는 기술 인재 수급면에서 엇박자가 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이공계의 매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최근 조사에서 이공계 특성화대학 4곳(KAIST·포스텍·UNIST·GIST)의 재학생 중 10% 이상이 자퇴한 것으로 집계됐는데, 상당수가 의대 진학이 사유였다. 여기에 의대 2000명 증원이 기름을 끼얹었다. ‘수학 1등급 아니어도 도전해 볼 만’ ‘의대 보내려면 강원도로 이사 가세요’…. 사교육 광풍이 불고 상위권 연쇄 이동으로 이공계 재학생들이 들썩인다. 국가 예산과 세제·행정 지원은 정책 수단으로 결정하면 되지만 기술 인력 부족 사태는 단기간 회복될 수가 없다.
미국, 중국, 일본은 사생결단으로 한국의 반도체 경쟁력을 넘보고 있다. 반도체가 주권인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우수한 기술 인력이 훨씬 더 필요하다. 그 출발은 이공계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이공계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 지금 정신 차려 대비하지 않으면 한국은 반도체 주권국가 지위를 잃게 된다.
2024-04-11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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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의 곰곰 생각] '입틀막' 시대 유감
최근 한 라디오 생방송에 출연한 평론가가 ‘김건희 특검’을 언급하자 사색이 된 진행자가 황급히 ‘김건희 여사 특검’으로 정정하는 촌극이 빚어졌다. 앞서 선거방송심의위원회가 SBS 시사 프로에서 ‘여사’ 호칭이 생략됐다며 행정지도 중 권고를 의결한 뒤에 벌어진 일이다. 이후 방송사마다 ‘여사’ 누락 발언을 수정하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자기 검열로 입단속에 성공한 나쁜 사례다.
2022년 윤석열 대통령 방미 중에 나온 이른바 ‘바이든-날리면’을 보도한 방송사들이 무더기 제재를 받았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는 11일 MBC에 최고 수위인 과징금을, YTN과 OBS, JTBC에는 관계자 징계, 주의를 의결했다. 이는 법정 제재에 해당하는데 방송사 재허가·재승인 때 감점 사유가 되는 중징계다. 심의에 오른 방송사 9곳 대다수가 해당 인터넷 기사를 삭제, 비공개 처리 혹은 자막 수정으로 ‘성의’를 표해 제재 수위를 낮추려 노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1심 판결만 갖고 방송사를 압박해 백기 투항시킨 모양새가 되어 언론 재갈 물리기라는 비판이 터져 나왔다.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침해 논란을 빚는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경찰 수사로 번진 ‘가상으로 꾸며 본 윤 대통령 양심 고백’ 영상 소동은 ‘웃픈’ 경우다. 대통령실이 나서 “총선을 앞두고 허위 조작 영상이 확대 재생산되지 않도록”이라고 방향을 지시하고, 방심위는 국내는 물론 틱톡과 인스타그램 등 글로벌 플랫폼에서 해당 영상이 접속 차단되는 조치를 신속하게 취했다.
이 사건 초기에는 인공지능 딥러닝 기술로 만든 딥페이크인 것처럼 알려졌다. 선거법상 딥페이크 정보 유통은 불법이다. 하지만 이 영상물은 방송을 단순 짜깁기한 것으로 딥러닝과는 무관하다. 시쳇말로 웃자고 패러디 개그를 하는데 정색하고 다큐로 받은 꼴이 됐다. 소셜 플랫폼에 떠도는 수많은 동영상 ‘밈’까지 처벌할 건가? 가상을 전제하고 만든 풍자를 강제 수사한다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위헌적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이를 계기로 윤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tvN 예능 프로에 나와 “정치 풍자는 권리”라던 호언이 소환되면서 대통령을 풍자한 개그까지 등장했다.
권력과 비판적 언론 사이에 긴장감은 어느 시대나 있다. 한데, 요즘은 경계가 무너진 느낌이다. 윤 대통령의 경우는 대선 후보 때 검증 보도를 놓고 아직도 강제 수사가 진행 중이다. 명예훼손 사건이 촉발돼 지난해 9월 검찰에 ‘대선 개입 여론조작 사건’ 특별수사팀까지 구성됐다. 관련된 언론사와 기자에 대해 전방위적인 압수수색이 벌어졌고 기자들에 출국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유력 대선 후보를 검증하는 보도에 대대적인 강제 수사가 벌어진 건 유례가 없다.
국민의힘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2021년 한 기자가 소셜 플랫폼에 ‘해운대 엘시티 수사를 왜 그 모양으로 했대?’라고 쓴 글에 대해 1억 원 상당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가 최근 2심에서 패소했다. 권력과 언론의 건강한 긴장 관계에 대한 해답이 판결에 있다. ‘언론으로서는… 주요 수사 기관 고위공직자에게 충분히 의혹 제기를 할 수 있다.… 공직자인 한 위원장은 비판에 대해 해명과 재반박을 통해 극복해야 하며, 손해배상 소송을 통해 언론 감시와 비판을 제한하려고 하는 건 신중해야 한다.’
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가 7일 공개한 ‘민주주의 보고서 2024’를 읽다가 한국 대목에서 같은 문제의식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언론 자유와 독립성을 위축시키려는 정부의 시도는 언론인 괴롭히기(harassment of journalists)와 맞물리고… 그리스와 한국은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침해가 가혹한 독재 국가만의 일이 아님을 보여 준다.’ 이 연구소는 언론 자유 등을 조사해 1점 만점의 자유민주지수(LDI)를 산출하는데, 한국은 2021년 0.79(17위)에서 2023년 0.60(47위)으로 급락했다. 부연 설명은 낯뜨겁다. ‘(윤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통령 이전 수준으로 LDI를 되돌려 놓았다.… 이미 권력 남용(abuse of power)을 보여 주었다.’
여러 정황을 종합하면 지금 ‘입틀막(입 틀어 막기)’은 대통령 ‘심기’ 경호에만 한정되지 않고 전방위적이다. 강제 수사나, 소송, 제재 등은 자기 검열, 나아가 침묵을 강요하는 ‘입틀막’이다. ‘민주주의 보고서 2024’에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또 다른 수단은 언론의 자기 검열 수준을 높이는 것’이라 우려한 것도 같은 말이다. 물리적 ‘입틀막’이 임계치를 넘으면 ‘스스로 입틀막’이 일상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비판하고, 토론하고, 풍자하고, 웃고 살자. 알아서 입을 닫는 사회를 바라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2024-03-1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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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의 곰곰 생각] 중대재해법은 잘못이 없다
지난해 10월 철근을 생산하는 부산의 한 제철 공장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용광로 폐열을 활용해 과채류를 재배하는 공장 부설 스마트팜 견학이 목적이었는데, 시뻘건 쇳물을 다루는 현장치고는 지나치게 ‘질서정연’한 분위기에 눈길이 갔다.
왜 그런지 이유를 물었더니 “회사에서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이후 사고 예방에 특히 신경을 쓴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위험한 곳이라는 선입견을 가진 외부인 시선에 정돈된 작업 환경이 낯설게 비쳤던 모양이다. 기업이 안전을 최우선에 두면 현장 분위기가 확 바뀐다는 걸 실감한 사례다.
잊힌 기억을 되살린 건 한동안 우리 사회를 양극화시킨 중대재해처벌법 유예 논란이다. 2년의 유예 기간이 끝난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해 준비 부족과 경영 애로를 이유로 정부와 여당 그리고 사용자 단체가 유예 연장을 요구했으나 야권과 시민·노동단체는 예정대로 시행을 주장하며 팽팽하게 맞섰다.
결국 유예 법안이 통과되지 않았고 지난달 27일부터 전국 83만 곳의 사업장까지 확대 시행에 들어갔다. 혼란을 최소화하면서 제도 안착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의무가 정부 당국과 기업, 근로자 모두에 주어졌다.
하지만, 논란을 부추긴 이면에 도사린 오해와 무지, 무책임은 우리 사회가 되새김질해야 할 숙제로 남았다.
이 법의 확대 시행을 앞두고 이른바 ‘공포 마케팅’이 넘쳐났다. ‘빵집·식당·카페도 중대재해법 처벌’ ‘사장 구속되면 줄폐업, 해고’…. 정부의 주장을 확대 재생산한 보도가 이어졌다.
장관이 동네 가게를 방문하는 모습을 TV가 비췄고, 급기야 ‘영세 사업자들이 예비 범법자가 된다’는 논리까지 횡행했다. ‘먹고 살기 바쁜데 어떻게 대기업처럼 안전 인력을 두느냐’ 등의 애로 호소도 단골 소재로 등장했다.
반면 법 시행 초기부터 대상 확대를 주장한 노동계의 목소리는 공론장에서 과소 반영됐다. 중대재해법 유예를 둘러싼 논쟁은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닥치고 유예’로 쏠렸다. 그 과정에 계도와 컨설팅 등 사전 준비 작업을 게을리한 정부의 무책임은 가려졌다.
중대재해처벌법 이전에 산업안전보건법이 있다. 모든 산업 현장에 재해가 발생하면 먼저 산업안전법에 따른다.
예컨대 사망 사고는 산업안전법의 과실치사 규정으로 우선 따지게 되어 있다. 중대재해법은 안전 의무에 소홀한 사업주 책임을 분명히 한 것으로 산업안전법에서 한 걸음 나아갔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법 시행 2년 동안 사망 사고라도 중대재해법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50인 미만 사업장도 유예 여부와 상관없이 우선 산업안전법의 적용을 받는다. 안전과 보건 인력도 산업안전법 규정이지 중대재해법에서 신설된 것이 아니다. 중대재해법 확대 탓에 영세 기업이 망하고 ‘예비 범법자’로 전락한다는 건 지나친 비약이라는 지적을 받는 이유다.
또 빵집·식당·카페 사장님을 콕 찍어 피해자 프레임을 씌우는 것 역시 억지다.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2022년 산재 사망자 644명 중 제조·건설 현장이 512명(80.9%)으로 절대 다수다. 숙박·음식점업에서 발생한 경우는 1%가 안 된다.
여기서 문제는 2년 유예 중인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과반이 넘는 388명(60.2%)의 산재 사망자가 나왔다는 대목이다. ‘공포 마케팅’의 논리대로라면 동네 가게 사장님 중에 산업안전법으로 처벌받은 전과자가 수두룩이 나왔어야 한다.
중대재해법은 2018년 당시 24세이던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가 발전소에서 숨진 사건이 발단이 됐다. 더 이상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사회적 합의가 모인 법이다.
그런데 이 법이 소규모 사업장으로 확대 시행된 지 6일 만에 부산 기장의 폐알루미늄 업체, 강원도 평창 태양광 패널 공사 현장, 또 경기도 포천의 금속 공장에서 각각 안타까운 사망 사고가 발생했다.
안전 장구를 제대로 갖추고 규정을 잘 따른 덕분에 가벼운 부상에 그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우리의 경각심은 아직 부족하다. 일하는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자는 중대재해법이 우리 사회에 아직 필요하다는 점을 아프게 일깨우는 사례다.
‘빵집에서 일하다 사망’은 과장된 표현이 분명하지만, 실제 그런 사고가 난다면 처벌된다는 게 법의 취지다. 중대재해법이 잘못된 게 아니라 안전에 둔감한 의식과 관행이 잘못이다. 우리는 선진 사회로 가는 성장통을 겪고 있는 중이다.
2024-02-06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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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의 곰곰 생각] 맨발의 도시 부산
‘발은 공학의 걸작이자 예술 작품이다.’ 발의 해부학적 구조와 운동역학을 연구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정의다. 발바닥활(arch)과 아킬레스건은 착지 충격을 흡수하고 반작용으로 내닫게 돕는다. 다빈치는 발의 움직임과 균형을 기계역학으로 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도 강조했다.
직립 주행은 인류 진화의 원인이자 결과다. 두 발로 뛰어 사냥을 할 수 있게 되면서 단백질을 획득한 덕분에 두뇌가 폭발 성장했다. 발이 뇌 신경을 키운 덕분에 유인원과 결별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걸작품이 신발 속에 갇혀 있다!” 맨발 예찬론자들은 두 발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이른바 발바닥 접지(接地·Earthing)론이다. 오장육부 신경 자극으로 맨발 걷기가 건강에 좋다는 속설에만 그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구두와 운동화를 벗고 맨살로 땅에 내딛는 행위는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맥락으로 확장된다.
부산 수영만요트경기장에 10년 넘게 정박해 있던 ‘맨발호’ 이재호 선장은 맨발 기행의 끝판왕이었다. 그는 십수 년을 신발과 담을 쌓고 살았다. 시내버스와 도시철도는 물론 잦은 해외 출입국 때도 맨발을 고집했다. 등산화를 신지 않은 지리산 완등도 수십 차례. “신을 벗고 나서 자유를 만끽했다”는 게 이유다.
발바닥활 체형이 특이한지, 용불용설에 의한 것인지 물었더니 “반반인 것 같다”며 웃었다. “진흙길과 풀밭을 걸을 때 가장 행복했고, 아스팔트가 가장 힘들었다.”
포장된 도로는 딱딱해서 착지 충격이 무릎에 고스란히 전해져 고통스럽다. 즉, 바퀴를 위해 뻗은 길은 ‘걸작품’과 태생이 다르다. 달리 말하면 도시의 발전은 맨발의 자유도에 반비례한다.
‘맨발의 기봉이’ 사례도 있었지만, 러닝화를 거부한 마라토너도 제법 된다. 맨발 달리기를 진화론적으로 해석하는데, 발바닥활과 아킬레스건의 조응이 뇌를 각성하는 과정이어서 원시적이면서 가장 인간다운 몸짓이라고 믿는다.
등산 담당 기자 시절 전국 방방곡곡의 산길에서 마주치던 시그널(산행 리본) ‘맨발산악회’를 보고 대단한 조직이 있나 싶었다. 궁금해서 수소문한 끝에 부산 기장에 사는 등산 애호가를 만날 수 있었다. 개성 넘치는 산 사나이 단체로 알고 갔는데 실은 평생을 나홀로 산행한 분이었다.
외부 노출을 극히 꺼렸지만 간청한 끝에 달음산 동반 산행에 나섰다. 입산 후 묵언수행하듯 걷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맨발’을 내세운 까닭이 궁금했다. 그의 지론이 ‘인생은 빈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 내려놓은 홀가분한 발걸음을 표현하기에 맨발만큼 적확한 단어가 있을까 싶었다.
‘맨발의 디바’ 가수 이은미처럼 영국의 팝 스타 아델도 공연 중 구두를 벗고 무대에 오르는 것으로 유명하다. 공식 설명은 “노래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구두를 벗은 채 수천 수만의 관객이 지켜보는 무대에 홀로 서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는 모습은 장관이다. 유튜브로 보노라면 마치 그 공연장에 빨려들어가 현장에서 환호하고 있는 듯한 몰입감을 만드는 매력이 있다.
이처럼 탈(脫) 신발은 단지 가죽이나 고무, 플라스틱을 몸에서 걷어 낸 물리적인 상태만을 일컫지 않는다. 그래서 다양한 상상력을 자극하고 사람 사이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연전에 부산 회동수원지 둘레길을 바장이다가 땅뫼산 황토숲길에 이르러 트레킹화를 손에 들고 바지를 걷은 차림의 거대한 인파에 놀란 적이 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토록 즐거워하는 모습이란! 한결같이 “기분이 너무 좋다”며 신이 났다.
그사이 맨발 걷기 풍경은 해운대해수욕장 등 부산 곳곳으로 번졌다. 기초지자체들은 조례까지 제정해서 체계적인 관리와 시설 확충에 나서려 한다. 부산은 ‘맨발의 성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지금까지 맨발은 기인, 예인, 철인의 전유물이었다. 실내에서도 신을 신는 서구에서 족저근막염이 많다는 맨발 예찬론자들의 주장에 수긍하면서도 일반인들이 엄두를 내기란 쉽지 않았다. 저러다 다치면 어떡하나, 혹은 감염 우려는 없을까 찜찜해서다. 그 높은 문턱이 허물어지고 있어 다행스럽고 반갑다.
맨발의 부산! 이 구호는 부산의 매력에 남다른 강점을 보탠다. 안전하고 즐겁고 이색적인 추억을 쌓을 수 있는 도시! 끊임없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킬러 콘텐츠다.
맨발 축제, 맨발 운동회, 맨발 문학회, 맨발 가요제…. 소소하게 맨발 줄넘기나 맨발 닭싸움도 좋다. 맨발 도시 부산! 시민 삶의 질을 높이고 관광자원 활용에 효과적인 새로운 부산의 미래 지향점이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2023-11-23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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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의 디지털 광장] 부족주의 뉴스 서비스
정치적 양극화, 의식의 극단화는 부족화(tribalization) 현상으로 설명된다. 소위 정치적 부족주의다. 정치 신념에 따른 정파성보다는 소속 집단의 이익을 지키는 당파성을 우위에 두는 행동양식을 일컫는다. 쉽게 말해 ‘우리가 남이가’ 혹은 ‘우리끼리’를 잣대로 이합집산하는 것이다.
부족화는 실생활에도 널리 퍼져 있다. 끼리끼리 뭉치는 응집력의 강화는 특히 온라인 공간에서 대세다.
마케팅에서 이를 놓칠 리 없다. 이른바 ‘부족 마케팅(tribal marketing)’이다. 관심사와 가치를 공유하는 소수 집단에 초점을 맞추는 전략이다.
예컨대 브랜드 커뮤니티 내의 고객 집단 중 미덕, 관심사, 문화적 요소 등을 기반으로 하위 집단을 소그룹으로 나눠 제품과 서비스를 홍보하는 식이다. 취향이 다른 각 부족마다 서로 다른 ‘가치 제안’ 전략을 구사해서 경쟁력을 확보해야 시장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는 시대가 됐다.
뉴스와 콘텐츠의 유통에서도 부족화는 성패를 가르는 요소가 됐다.
레거시 미디어(전통적인 신문, 방송)는 대체로 독자와 시청자를 세분화해서 대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모바일 플랫폼이 대세가 되면서 개인화된 맞춤형 뉴스 서비스가 성장하고 있다. 그 대표 주자가 뉴스레터다. 기존 신문과 방송이 발빠르게 대응하지 못해 뉴미디어 분야에서 뒤처지게 된 대목이기도 하다.
뉴스레터를 내놓아 성공하는 경우는 대체로 미디어 스타트업이다. 이들은 창업 단계에서 목표 독자층을 분명히 설정한다. 예컨대 ‘20대 직장 여성’ ‘가상화폐 투자자’ 등을 겨냥한다.
이 새로운 뉴스 서비스는 부족화된 구독자와 교감하면서 동반 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즉, 구독자는 해당 뉴스레터의 콘텐츠와 제작 방침에 수긍하면서 동질감, 소속감을 갖게 되고 나아가 연대 의식을 형성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이는 오늘날 일반화된 구독 모델의 작동 기제다. 유료화된 서비스라면 구독자 그룹의 부족화 응집력이 강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부산일보〉는 지난해 9월 뉴스레터 ‘브레드(B-read)’ 발행을 시작했다. 매일 생산되는 수백 건의 기사 중 핵심만 정제한 뉴스 종합판이다. 매일 오전 7시께 구독자들의 메일 수신함에 따끈따끈한 ‘브레드’를 보내기 위해 선임기자급 에디터는 그날의 뉴스를 고르고 또 고른다.
뉴스레터 서비스는 확장을 거듭했다. 구독자들의 다양한 관심사에 맞추기 위해 영상 전문 ‘경건한 주말’이 추가됐고, 주말 여행·레저 정보가 담긴 ‘Week & Joy+’, 심층 분석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까지 차림새가 화려해졌다.
〈부산일보〉 뉴스레터는 발행 1년 남짓만인 지난 10월 구독자 2만 명을 돌파했다. 무료 서비스이긴 하나 성장 속도가 이례적으로 빠르다. 그 비결은 구독자들의 뉴스레터 회신에서 짐작할 수 있다.
“안녕하세요, 서울 사람입니다. 부산일보 뉴스레터에서 어떤 느낌을 받느냐 하면 ‘솔직하다’ 입니다. 네이버에 있는 수많은 인터넷 신문기사와 확연히 다른 결이 느껴집니다.”
“지역에 보험자병원이 한 곳도 없다는 뉴스레터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부산 지역의 현안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어 관심 있게 보게 됩니다.”
뉴스레터 구독자들의 의견과 주문에는 일관된 공통점이 있다. 구독자들은 ‘부산에 진심인 뉴스레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부산시민이건, 출향 인사이건, 아니면 부산에 연고가 없는 독자라도 ‘브레드’를 수신하는 이유는 지금 이 순간의 살아 펄떡이는 부산과 마주하고 싶은 것이다.
이를 부족화 현상에 빗대어 보자면, ‘브레드’ 구독자들은 ‘부산 부족원’인 셈이다. 그러니 뉴스레터 에디터들은 그날의 사건과 이슈 중에 부산에 가장 중요한 우선 순위를 매기는 데 진력한다. 부족원들의 의견과 제안에 귀를 활짝 열어 놓는 것은 기본이다.
2만 독자 시대를 맞은 ‘브레드’는 한층 더 부산에 집중하리라 다짐한다. 부산의 사건과 이슈, 중요한 정보에 천착하며 지역 사회 참여를 촉진하는 역할도 자임한다. 뉴스레터 ‘브레드’의 성장이 구독자의 성장이고, 나아가 부산의 미래라는 각오를 되새긴다. 소통과 참여가 핵심 관건이다.
부산 부족의 문호는 활짝 열려 있다. 부산닷컴(www.busan.com)에 방문하거나 앱을 설치한 뒤 회원에 가입하고, 뉴스레터 수신에 동의하면 된다. 부산 부족주의를 지향하는 뉴스레터 ‘브레드’와 함께 부산의 미래를 만들어 가는 출발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
2023-10-3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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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의 디지털 광장] 플랫폼 시프트 그 후의 저널리즘
모바일 서비스 사용 습관을 보면 세대 차이가 단박에 드러난다.
네이버 앱을 열어 습관적으로 오른쪽으로 스와이프(손가락으로 밀어 화면 이동)한다면 중장년층 쪽에 가깝다. 그곳에는 뉴스 채널이 있다. 반대로 왼쪽 ‘쇼핑’ 쪽으로 손가락이 먼저 움직이면 십중팔구 M(밀레니얼) 세대(1981년 이후 출생)나 Z 세대(1995~2010년 출생)다. 네이버 앱 스와이프 기능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신 분들은 모바일 서비스를 적극 활용하지 않는 노년층일 개연성이 있다.
한국에서 뉴스 트래픽을 압도하던 검색 플랫폼 네이버의 뉴스 유통량은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반면 구글과 소셜미디어는 상승세다.
뉴스 트래픽의 변화에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스마트폰에 기본 장착된 구글이나 크롬 브라우저를 통한 뉴스 유통의 성장이다. 안드로이드 운영 체제에 붙박이로 들어 있는 구글 퀵서치(검색)와 디스커버(추천 뉴스)는 모바일 온리 환경에 힘입어 뉴스 통로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부산일보 뉴스 사이트 부산닷컴(www.busan.com)의 모바일 유입 경로에서 구글은 30% 비중으로 성장했다. 팬데믹 전 한 자리 수와 비교하면 비약적이다.
상대적으로 네이버, 다음, 페이스북(메타) 유입량은 쪼그라들었다. 특히 페이스북 유입은 현저하게 감소했다. 플랫폼을 통한 뉴스 소비의 지각변동은 부산닷컴 트래픽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젊은 세대가 웹 사이트를 떠나 틱톡이나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로 옮겨간 뒤에도 그곳에서 뉴스를 소비하지만 유독 페이스북에서 뉴스 유통이 미미해지고 있다.
그 까닭은 보상과 관련이 있다. Z 세대는 보상에 민감한데 페이스북은 크리에이터에 대한 보상책이 미약하다. 틱톡은 ‘크리에이터 마켓플레이스’에서 광고주와 직접 콜라보를 연결해서 수익을 보장해 준다. 틱톡이 뜨거워진 비결이고 페이스북이 고령화되고 활기를 잃은 배경이다.
따라서 페이스북 사용 여부로도 쉽게 세대가 갈린다. 다른 모바일 플랫폼에 비해 페이스북에 오래 머물며 장문의 글을 읽고 있다면 ‘아재 세대’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릴스(reels), 모먼트(moment), 쇼츠(shorts)…. 이들 용어가 낯설면 ‘모바일 원주민’이 아니다. 소셜미디어의 대세는 숏폼, 즉 짧은 동영상이다. 숏폼은 스마트폰에 특화되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 열성 사용자가 Z 세대다.
구글이 틱톡과 경쟁하기 위해 내놓은 것이 유튜브 쇼츠다. 릴스는 인스타그램에서 제공하는 숏폼 서비스다. 이에 질세라 네이버도 블로그에 업로드할 수 있게끔 동영상 편집 서비스 모먼트를 내놨다.
이들의 공통점은 스마트폰에서 촬영한 영상을 간단하게 편집하여 공유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핵심은 TV 같은 16:9 가로 형식이 아닌 9:16의 세로 영상이라는 데에 있다. 스마트폰에서 가로 사진을 띄우면 위아래가 잘리거나 작고 답답하게 보인다.
Z 세대는 9:16 숏폼 문법을 구사하는 원어민이다. 틱톡과 인스타그램, 유튜브로 종횡무진하면서 원 소스 멀티 유즈로 활용한다. 뉴스와 정보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전 세대와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플랫폼 시프트(platform shift)’, 즉 디지털 플랫폼의 대전환은 이미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뉴스 서비스를 모든 플랫폼에서 두루두루 잘할 수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플랫폼 별 세대 분화가 선명해지면서 주 독자층을 겨냥하기도 어려워졌다.
이 상황은 한국 언론에 심각한 도전이다. 그런데도 레거시 미디어(전통 신문이나 방송)는 소극적이었다. 소셜미디어로 떠나버린 Z 세대를 ‘뉴스 회피자’로 규정하고 방치했을 뿐 적극적으로 눈높이 서비스를 제공한 언론이 있었던가.
그날 발생한 사건을 보도와 논평으로 제공함으로써 사회 구성원들이 세상에 대한 견해를 갖게 하는 것이 저널리즘의 기능이다. 사회 갈등은 보도를 통해 순치되고 타협점을 찾는다. 이것이 사회를 통합하는 언론의 역할이다.
목하 플랫폼 전환기에 언론이 다시 길을 잃어서는 안 된다. 외부 플랫폼 의존을 극복하는 것, ‘뉴스 회피자’로 방치했던 Z 세대까지 뉴스 권역으로 아우르는 서비스 혁신이 필요하다. 언론사 뉴스 사이트의 로그인 회원, 독자에 고품질 콘텐츠를 제공하면서 높은 수준의 서비스로 관계를 맺는 것이 출발점이다. 이는 저널리즘이 사회 통합의 책임을 자처한다면 꼭 풀어야 할 숙제다.
2023-09-21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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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의 디지털 광장] 가짜 뉴스를 이기는 법
뉴스를 생산하는 언론 입장에서 ‘가짜 뉴스’는 불편하고 거북스러운 표현이다. ‘가짜 뉴스’가 호명되면 될수록 ‘뉴스’에 대한 비호감이 커지기 때문이다.
언론사에게 신뢰가 생명인데, ‘가짜’라는 이미지가 덧칠되니 억울하기까지 하다. 언론이야말로 가짜 뉴스의 가장 큰 피해자다.
가짜 뉴스는 용어 자체에 문제가 있다. 우선 형용모순이다. 뉴스는 가짜일 수가 없고, 가짜는 뉴스가 될 수 없어서다.
전통 언론에서 뉴스는 취재와 데스킹을 거쳐 나온다. 그 과정에 팩트 체크는 필수다. 진실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뉴스가 가짜일 수가 없는 까닭이다.
만약 고의로 거짓이 담긴 기사를 작성해서 유통했다면 그건 애초부터 뉴스의 범주에 속할 수 없다. 그래서 ‘가짜 뉴스’라는 용어는 탄생하지 말았어야 했다.
요즘 정치권에서 가짜 뉴스라는 말이 자주 들린다. 가짜 뉴스로 지목되는 사례들은 과거에는 유언비어, 프로파간다(정치 선전), 허위·조작 정보로 구분해서 불렸다. 아니면 뭉뚱그려 거짓말로 칭했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거짓이 가짜 뉴스로 포장되고 있다. 그 과정에는 진영 논리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물론 뉴스는 100% 진실만 담고 있다고 전제하지 않는다. 뉴스가 세상에 나오는 그 순간까지 확인된 사실을 전달할 수밖에 없어서다.
진실은 추구되어야 하는 가치이며 그 바탕에는 합리적 의심이 깔려 있다. 이것이 공론장의 원칙이다.
가짜 뉴스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것은 인터넷의 전파력이 눈부시게 발달한 덕분에 누구나 정보를 손쉽게 생산해서 널리 유통시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팩트 체크가 불충분한 정보나 일방적인 주장도 널리 퍼뜨릴 수 있게 된 탓에 나타난 부작용인 것이다.
일본에서는 언론이 앞장서서 온라인 상에서 가짜 뉴스를 걸러 내는 시도를 하고 있다. 언론사 스스로 디지털 공간에서의 뉴스 신뢰를 지키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일본의 주요 신문, 방송, 포털 야후재팬 등 27개사는 공동으로 ‘발신자 프로파일(Originator Profile)’이라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 기술은 지폐의 워터마크처럼 온라인에 유통되는 기사 페이지에 식별자를 넣어 정보의 출처를 밝히는 것이다.
사용자가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어 기사를 읽을 때 클릭 한번으로 발신자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방식이다. 출처를 인증하는 이 기술은 기사가 소셜 미디어로 공유되더라도 작동된다. 일본 측은 이 기술을 브라우저 표준 사양으로 채택되게끔 노력하는 중이다.
한국에서는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할까.
한국의 뉴스 트래픽은 언론사 자체 사이트가 아닌 포털과 소셜에 쏠려 있다. 외부 플랫폼이 사용자에 편리한 서비스와 기술을 제공하면서 진화하는 사이 한국 언론사들은 디지털 뉴스 분야에서 지체됐다.
그 결과 한국은 언론사가 아닌 외부 사이트에서 뉴스를 이용하는 비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곳은 팩트 체크가 부실하거나 의도적으로 조작된 정보가 넘치는 곳이다.
여기서 전통 매체가 생산한 뉴스도 뒤섞여 유통되다 보니 도매금으로 욕을 듣는 게 드물지 않다. 언론으로서는 억울한 일이다.
언론 보도가 불신과 기피의 대상이 되면 건강한 여론 형성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언론 스스로 신뢰 회복에 나서야 할 것이지만 한국 언론은 무기력할 뿐이다.
가짜 뉴스로 인한 폐해는 현재적이다. 하지만 규제와 단속이 만능은 아니다. 사전 검열이나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을 어쩔 것인가.
바람직한 방법은 가짜 뉴스가 활개칠 수 없는 디지털 뉴스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언론은 적극 나서야 할 책임이 있다.
지금까지 한국 언론이 실패한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한국 언론은 디지털 독자와 접점을 찾고 소통하면서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작업을 외면해 왔다.
포털이나 소셜 미디어에 떠넘겼던 일을 이제 직접 해야 한다. 미디어가 이용자와 직접 신뢰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의미다.
신뢰하는 사이에서는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언론사와 독자 사이에 필요한 관계다.
그러면 '가짜 뉴스'는 발붙일 곳이 사라지게 된다. 그 대신 거짓말이라는 본래 이름을 돌려주면 된다.
이것이 가짜 뉴스를 이기는 방법이다.
2023-08-10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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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의 디지털 광장] AI 가짜 뉴스, 저널리즘에 마지막 기회
가짜가 더 근사해 보이고, 거짓이 더 빨리 퍼지는 세상이다. 소셜 미디어의 전파력이 더해진 결과다. 여기에 생성 AI(인공지능)가 가세하면서 온라인 뉴스 생태계는 시계 제로의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
생성 AI를 이용하면 누구나 손쉽게 뉴스로 포장한 메시지를 발신할 수 있다. 문제는 허위, 조작 정보를 퍼뜨리는 도구로 악용되기 쉽다는 데 있다.
AI발 가짜 뉴스 탓에 미국 주식시장이 요동친 최근 사례는 시작에 불과하다. 특정인을 모방하는 딥페이크 기술이 사칭 범죄로 나타나는 건 시간 문제다.
뉴스의 정거장 역할을 해온 검색 플랫폼(포털)에도 생성 AI가 대세다.
구글은 검색 결과를 요약본으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검색 생성 경험(Search Generative Experience)’이다. 뉴스를 이미 학습한 AI는 뉴스를 재가공해 사용자의 궁금증을 풀어 준다. 사용자는 굳이 뉴스 링크까지 따라가는 불편을 겪지 않아도 된다.
AI의 ‘친절한 대답’이 뉴스 트래픽을 잠식할 것이란 전망은 우려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뉴스 구독 모델까지 위축시킬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검색 로봇이 허위, 조작 정보를 학습했다면 어떡하나. 사용자들이 추가로 뉴스 링크를 검색하지 않으면 틀린 대답을 사실로 믿을 수밖에 없다. 네이버와 다음 검색 서비스도 유사 방식으로 바뀐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숙의 민주주의의 기반인 뉴스는 AI 시대를 맞아 변곡점을 만났다. 여론 형성 흐름에 적지 않은 변화가 불가피해서다. 우리가 익숙했던 공론장은 구조 변동을 앞두고 있다.
이 문제 의식 때문일 텐데 올해 열린 ‘세계뉴스미디어총회(WNMC)’의 화두는 단연 인공지능이었다. 지난달 28~30일 타이페이 총회는 AI로 시작해 AI로 끝났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불과 1년 전 블록체인과 메타버스가 장밋빛 미래로 각광 받던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전 세계 뉴스룸은 시간과 비용의 효율성 때문에 적극적으로 AI 기술을 도입한다.
스웨덴 미디어 그룹 쉽스테드 계열 인랩은 기사를 랩으로 바꾸는 서비스를 도입했다. 텍스트를 노래로 바꾸는 AI 기술을 사용한 것이다. 이른바 ‘뉴스 외부자’인 Z세대(1995년생 이후)에 다가가기 위해 그 세대에 친숙한 뉴스 포맷을 찾고 여기에 AI 기술을 입힌 것이다.
프랑스 르몽드지는 프랑스어 기사를 영어로 번역하는 AI를 사용한다. 영어권으로 독자층을 확장하기 위해서다. 언어 자동 번역 서비스는 각 언어권으로 확산 중이다.
WNMC에서 일대일 대담에 참석한 조셉 칸 뉴욕타임스(NYT) 편집인은 “방대한 데이터 분석, 언어 자동 번역 AI가 시간을 단축하고 저널리즘을 향상시킨다”면서도 “AI를 (뉴스) 완제품에 적용할 때까지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시각 콘텐츠의 경우라면 그 출처를 두 번, 세 번 확인해야 한다”면서 신중론의 이유를 설명했다. AI를 도구로 적극 활용하되 저널리즘의 신뢰를 지키는 것을 우선하겠다는 의미다.
일본에서는 인터넷 콘텐츠의 출처를 검증하는 기술까지 개발됐다. 요미우리신문 마에키 리이치로 편집국장은 총회에서 일본 언론, 광고, IT 업계 27개사가 개발한 발신자 프로필(Originator Profile) 기술을 소개했다. 사용자가 가짜 뉴스로 의심되면 팩트 체크 버튼을 눌러 발신자를 확인하는 시스템이다.
저널리즘의 기준으로 ‘87% 정확한 기사’는 기사가 아니다. 정론을 추구하면서 부정확하거나 팩트 체크가 미진한 기사를 일부러 배포하는 언론사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생성 AI로 기사를 제작하지 않습니다”를 내 건 언론사가 늘고 있다.
숙련된 언론인의 검증 과정을 거친 뉴스를 세상에 내놓는 게 지금까지 레거시 미디어(신문, 방송)의 원칙이었다. 그래야 사실 보도가 이뤄지고 저널리즘이 추구된다. AI는 뉴스를 재가공하지만 스스로 뉴스를 찾을 수 없다. 저널리즘은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말이다.
AI발 허위, 조작 정보가 사회에 미칠 폐해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이 가짜 뉴스 부작용이 되레 뉴스의 옥석을 가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기자가 발품, 손품 팔아서 작성한 뉴스가 여전히 사회 공공재로서의 가치가 있는가. 언론사는 스스로 존재 가치를 입증해야 하는 시험대에 올랐다.
인터넷의 확산과 모바일 전환, 이 두 번의 큰 파도에 휩쓸려 길을 잃었던 언론 앞에 이제 세 번째 AI 쓰나미가 닥쳐왔다. 위험과 기회의 교차로에 섰다. 레거시 미디어에게는 마지막 선택지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23 세계 뉴스 미디어총회 참가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2023-07-04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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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의 디지털 광장] 확률적 앵무새 죽이기
생성형 AI(인공지능)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다. 웹3.0(블록체인·NFT)과 메타버스(AR·VR·XR)가 장밋빛 미래로 그려지는 것과 대비된다는 의미에서다.
우려와 반론, 심지어 무시하는 의견까지 맞선다. AI 개발을 6개월 멈추고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자는 전문가들의 제안은 초반 주목 받았으나 군비 경쟁에 맞먹는 전 세계 IT 기업 간 격전을 막지 못했다.
미국 SF 작가 테드 창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인공지능이라는 명명이 틀렸다며 ‘응용 통계(applied statistics)’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계에 의식이 없기 때문인데, 이 이유로 ‘기계 학습(머신 러닝)’이라는 표현도 반대했다. 배우고 가르치는 건 의식과 의식 간에 이뤄져서다.
동일한 문제 의식에서 생성 AI는 ‘확률적 앵무새(stochastic parrots)’에 비유된다. 수집한 문장 중 통계적으로 가능성이 높은 문맥을 재구성해서 보여 주는 기계일 뿐이라는 관점이다. 생성 AI가 흉내를 낼 뿐 인간 고유의 창작을 할 수 없다는 비아냥이 들어 있다.
하지만 사용자들은 '앵무새? 그래서 어쩌라고!' 식이다. 생성형 AI를 편리한 도구 혹은 기능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그 점이 메타버스, 블록체인, NFT 보급과 다른 양상이다.
대화형 챗GPT가 첫선을 보인 이래 반년을 넘긴 지금 구글 '바드'와 MS '코파일럿', 네이버 '서치GPT' 등 헤아릴 수 없는 서비스가 출시됐거나 나올 예정이다. 이들은 지식과 정보, 아이디어를 자연스러운 대화체로 제공하고, 여행 스케줄을 짜 주고, 영어 회화를 도우며 그림과 동영상은 물론 코딩 작업까지 대신해 준다. 우리의 생활과 업무 깊숙이 들어와 버린 것이다.
지능(의식)이 있건 없건, 사용자에겐 유용한 도구 혹은 유능한 비서일 뿐이다. 그런데 일자리의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씁쓸한 대목도 있다.
'과장 좀 보태면 연봉 5천 신입보다 월 20달러 GPT가 나음.'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인 '블라인드'에 한 IT 업체 직원이 올린 챗GPT 사용 후기다. 신입 직원에 요령을 가르쳐 가면서 일을 시키는 것보다 AI로 얻은 코딩 결과가 낫다는 것이다. 도제식으로 가르쳐 개념이 잡히는 시간과 노력보다 좋은 프롬프트를 찾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는 말이다.
다른 커뮤니티에도 유사한 글이 넘쳐난다.
'하루 만에 내 일을 사랑하게 만들었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동영상 생성 서비스 '미드저니'의 도입 이후 3차원 그래픽 모델 '창작자'에서 프롬프트 '입력자'로 전락하자 자괴감에 빠졌다는 하소연이다. 아티스트로서의 자부심은 사라지고 '미드저니'가 쏟아 내는 캐릭터 뒤치다꺼리 신세다. 물론 그 덕분에 회사는 작업 시간과 인력을 대폭 절약했다.
직업 현장에서 위 사례가 확산되면 신입을 뽑을 필요가 없게 되고 고착화되면 탈숙련화로 가게 된다. 숙련의 과정을 AI가 대체하면 저숙련 일자리가 대체되고 저임금화 수순이 뻔하다. 학습과 경험의 쓸모가 퇴색되고, 프로페셜널리즘(전문직주의) 기반 위에 서 있던 공인 교육과 자격증 체제 균열로 이어질 것이다.
AI가 일으킨 쓰나미는 일자리를 넘어 전방위적으로 진격 중이다. 사회 체제의 골격을 뒤흔들 수준이라는 의미다.
그렇기 때문에 생성 AI의 허점과 문제점, 그로 인한 부작용은 사회적 의제로 진지하게 다뤄야 한다.
AI로 인한 정보 집중과 남용, 종속을 예방할 수 있는 사회적 통제 장치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AI의 윤리적 책임 기준은? 일자리 소멸에 대응한 '로봇세' 도입은? 인터넷에 딥 페이크 조작 영상 혹은 AI가 무분별하게 베껴 쓴 뉴스가 범람한다면? 저작권과 프라이버시 침해는?
이처럼 AI의 부상에 신중론이 무성하지만 옹호론도 만만치 않다. 양측은 팽팽한 논쟁 중인데, 이는 AI가 안착할 때까지 필수불가결한 긴장감이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디스토피아적 전망과 낙관적 기대 밖에 있다. 작금의 변화를 회피하려는 자세다. 예컨대 일자리는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AI를 잘 다루는 사람들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식일 것이다. 또 AI 혁신에 성공한 기업이 경쟁 우위를 가질 것이다.
작금의 AI 혁명은 일회성 유행이 아니다. '확률적 앵무새'라고 무시해도 없앨 수 있기는커녕 스스로 뒤쳐질 뿐이다. 돌이킬 수 없는 사회 변동으로 급물살을 타 버렸다. 산업화, 정보화에 이은 AI 시대의 도전에 미래가 걸려 있다.
2023-06-06 [1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