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일의 곰곰 생각] 대통령, '국가 원수'에서 내려와야
러시아, 헝가리, 튀르키예. 21세기 들어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권위주의 체제가 확립된 나라들이다.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 총리는 영구 집권을 위한 개헌까지 강행한 끝에 18년째 장기 독재 중이다. 그는 지극히 형용 모순적인 ‘비자유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라는 개념을 주창해서 국제적인 논란을 부른 장본인이다. 러시아와 튀르키예도 스트롱맨에 의한 종신 집권으로 가고 있다.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대통령은 총리를 거쳐 대통령에 거듭 당선되면서 21년째 권좌에 앉아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6선을 채우면 84세가 되는 2036년까지 집권이 확실시된다.
이들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3권 분립의 견제와 균형 원칙은 의미를 상실한다. 무소불위의 강력한 지도자에게 입법·사법부와의 건강한 긴장은 거추장스런 존재다. 이처럼 선거로 선출됐지만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체제를 대의 민주주의와 구별해서 ‘위임 민주주의’(delegate democracy)로 분류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은 정치 암흑의 긴 터널에서 벗어나 자유 민주주의를 구가하는 정치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로 국민적 자부심은 짓밟혔다. 12·3 비상계엄령은 대통령의 통치 행위라는 합법의 외피를 쓴 채 3권 분립을 무력화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이었다. 계엄군의 선관위 장악 시도는 22대 총선 부정 꼬투리를 잡아 국회를 불법화하고, 해산하려는 수순으로 읽힌다. 계엄이 계획대로 진행됐다면 한국은 권위주의 퇴행 국가 명단에 추가되는 불명예를 안았을 것이다.
어쩌다 한국 대통령은 내란 수괴로 전락했을까. 불온한 일탈의 전조는 대통령의 표리부동에서 나타난다. 검찰총장 윤석열을 보수 정당의 대선 후보로 밀어 올린 건 그가 쌓은 공정과 상식 이미지 덕분이다. 권력에 돌직구를 날리면서 원칙대로 수사를 밀어붙이는 모습에 국민은 ‘효능감’을 기대했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다짐은 불공정·불평등에 민감한 정서를 파고들었다.
윤 대통령의 밑천은 취임하자마자 바닥나기 시작했다. 영부인의 각종 의혹에 감싸기로 일관하면서 법 앞의 평등 원칙을 무색하게 했다. 수직적 당정 관계 고수도 국민의 눈높이를 한참 비켜 갔다. 대통령은 집권 여당에 충성을 강요하고, 친윤(친윤석열)계를 내리꽂아 쥐락펴락했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상징 자본이 무너지자 민심은 싸늘하게 돌아섰다.
국민이 대통령에 주문했던 것은 타협과 양보를 통한 민생 정치였다. 하지만 대통령은 국민을 바라보고 정치를 하지 않고 아집에 갇혔다. 야당과 이견을 좁히거나 협상을 통해 갈등을 중재하는 국민 통합의 역할도 철저히 외면했다. 국정 운영은 파행을 거듭할 뿐 성과가 날 리 없었다. 지지도는 폭락하고 특검과 탄핵 공세가 삼각파도처럼 몰아치는 한계 상황에서 끝내 폭주하게 된 것이다.
대통령이 헌정 파괴라는 극단적인 유혹에 빠지게 된 근저에 우리 헌법의 견제 기능 미흡을 지적할 수밖에 없는 점은 뼈아프다. 헌법은 대통령에 ‘국가 원수’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입법·사법부까지 통괄하는 ‘제왕적 대통령’ 노릇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 셈이다. 대통령의 권한은 입법·사법부를 압도한다. 의회를 우회해서 상당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고, 사법부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군주정의 국왕 혹은 권위주의 정권의 스트롱맨에 어울리는 ‘국가 원수’는 자유 민주주의가 정착된 나라에는 없는 특별한 지위다. 제헌 헌법에 없던 ‘국가 원수’ 지위는 유신헌법에서 처음 등장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2년 위헌적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무력으로 헌정을 중단시킨 것이다. 그러고는 헌법 개정 국민투표를 실시해 유신헌법을 통과시키면서 ‘국가 원수’ 조항을 슬쩍 넣었다. 대통령이 입법·사법·행정부를 초월해 국민과 국토를 통치하는 ‘대권’(大權)을 쥐게 된 것이다.
12·3 내란이 52년 전 유신 시대를 흘러간 과거가 아닌 오늘날의 현실로 소환한 대목은 참담하다. 절대 권력의 유혹에 빠진 스트롱맨이 권좌에 앉으면 언제든 헌정 중단 사태가 재발할 수 있다는 경각심이 필요하다. 목하 분권과 지역균형발전을 내용으로 한 개헌 논의가 한창이다. 이참에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도 손봐야 한다. 사생결단식의 정치 양극화도 ‘국가 원수’의 권능을 독차지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반대편을 처단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타협하는 정치 문법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대통령은 ‘국가 원수’의 지위에서 내려와야 한다.
2024-12-10 [18:00]
-
[김승일의 곰곰 생각] 정년 제도의 사용 연한
지난 4월 22대 총선에서 당선된 국회의원 300명의 평균 연령은 56.3세였다. 신중년(55~64세) 세대가 주축인 셈이다. 국회의 평균 연령은 임기 중인 3년 뒤에 일반 직장인의 법정 정년인 60세에 도달한다. 자정이 지나면 마법이 풀리는 신데렐라처럼, 예순이 되는 그날부터 갑자기 생산성이 뚝 떨어지기라도 하는 것일까. 국회의원이 60세에 접어들었다고 갑자기 활력을 잃지 않는 것처럼, 직장인들의 숙련도와 체력도 갑자기 떨어지지 않는다.
특정 나이에 이르렀다고 일자리를 떠나게 하는 제도는 합리적이지 않다. AI(인공지능)가 인간 노동을 대체하고, 수명이 늘어 100세 인생을 구가하는 시대라 더더욱 그렇다. 미국, 영국, 뉴질랜드가 정년 제도를 연령 차별로 규정하고 폐지한 이유다. 정년 제도의 사용 연한이 다했다는 인식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고령자 ‘계속고용’ 문제는 모든 선진국의 공통 현안이다. 일본에서는 ①정년 연장 ②정년 폐지 ③퇴직 후 재고용의 선택지를 줬다. 60세 정년 제도 자체는 유지한 채 자율에 맡긴 결과, ‘퇴직 후 재고용’으로 쏠렸다. 21인 이상 기업의 69.2%가 이른바 촉탁직 고용제를 도입했고, 아예 정년을 연장한 곳은 26.9%, 정년을 폐지한 기업은 3.9%로 나타났다.
한국과 같은 연공서열 임금 체계라서 고임금자를 정규직으로 유지하는 대신 비정규직으로 ‘계속고용’해서 일손 부족의 급한 불은 끄되 인건비 부담은 줄이려는 추세가 읽힌다. 반대로 영미권의 정년 폐지는 노동 유연성과 성과에 따른 연봉제가 뒷받침된 결과로 해석된다.
대통령 직속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는 최근 고령자 ‘계속고용’에 대한 합의안을 내년 초까지 도출한다고 밝혔다. 경사노위 산하 ‘인구구조 변화 대응 계속고용위원회’에서 60세 이후에 계속 일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정년 연장 혹은 폐지, 퇴직 후 재고용 등 3가지를 논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년 연장론은 법정 정년보다 훨씬 빠른 실제 퇴직 시점과 65세 연금 개시 사이에 5년 이상의 단절이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또 국민연금의 올해 월평균 급여가 59만 5520원에 불과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연금만으로는 생계난에 직면하는 현실을 외면할 수가 없다. 실제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 1970년대까지 연간 100만 명씩 태어나다가 최근년 4분의 1 이하로 떨어져 미래 세대의 노동 시장 유입이 급감하는 사정과도 겹친다. 2차 베이비붐 세대가 현장에 더 머물러야 부족한 일손이 보충되는 한편 노인 빈곤도 해결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실제 행정안전부와 대구시가 시설관리, 경비, 미화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직 근로자 정년을 65세까지 단계적으로 연장하기로 했다. 민간 부문에서는 현대자동차 노사가 기술직 사원의 촉탁 고용을 기존 1년에서 2년으로 연장하기로 올해 단체협약을 갱신했다.
하지만 정년 연장이 만능이 아니라는 논쟁적인 지적도 있다. 이철희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신간 〈일할 사람이 사라진다〉에서 인구 변화가 가져올 노동시장 불균형을 분석한 뒤 정년 연장의 효과에 의문을 제기한다. 사회복지서비스업, 운송업 등 수요가 급증할 업종과 부문은 정년의 의미가 없어진 반면, 청년 세대의 일자리가 기성세대와 달라 대체 효과가 없다는 의미에서다. 또 미래 청년 인구가 급감해도 대기업은 구인난을 겪지 않을뿐더러, 정년 연장으로 고령자까지 계속 고용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구인난에 시달리는 지방의 중소기업은 정년 연장의 혜택을 누리기 어려울 수 있다.
고령자 ‘계속노동’은 인구 추계와 일자리의 구조 변동, 노동 생산성 변화를 함께 분석할 때 해법이 도출될 테다. 또 ‘60세 이후’는 직장 내 연공서열형 임금 체계에 발목이 잡혀 있고, 사회적으로는 국민연금과 맞물려 있다. 업종, 부문별로 상황이 다른 점도 문제를 어렵게 한다. 과거처럼 일률적인 법 적용이 어려울 수 있다. 은퇴자를 내보내고 청년 신입사원을 뽑아야만 하는 사업장이 있는가 하면, 촉탁 재고용이 절실해진 업종이 있을 수 있다. 사회적 공론을 거치면서 업종과 부문별로 자율적인 시행착오가 불가피해 보인다.
1988년 국민연금 출범 때는 60세가 되면 연금 수급이 시작됐다. 당시 정년은 58세였다. 36년이 지난 지금도 정년 제도는 큰 틀에서는 동일하다. 고령자 ‘계속노동’의 해결책을 모색하는 과정에 꼭 필요한 질문이 있다. 정년 제도는 여전히 유용한가. 즉,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제도인가를 밝혀야 한다. 어쩌면 해결책은 ‘정년’ 바깥에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정년 제도의 쓸모를 밝히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2024-11-05 [18:06]
-
[김승일의 곰곰 생각] Z세대도 같은 뉴스를 읽는다는 착각
널린 게 뉴스인 세상이다. 반갑거나 도움이 되는 것만 있을 리가 없다. 때로는 지루하거나 귀찮고, 짜증과 화를 유발할 수도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올해 5~6월 20세 이상 3000명을 대상으로 ‘국민의 뉴스 이용과 뉴스 회피’에 관한 설문 조사를 실시했는데, 뉴스 이용자 72.1%가 뉴스가 보기 싫어 회피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국민 10명 중 7명 이상이 선택적 혹은 지속적으로 뉴스를 거부하는 현상은 저널리즘이 믿음과 쓸모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걸 드러낸다.
회피 경험자는 뉴스에 야박한 감정이 있다. 뉴스를 보면 ‘스트레스를 받는다’(49.3%)거나 ‘화가 난다’(45.7%) 또는 ‘피곤하다’(42%)는 식으로 부정적 반응 일색이다. ‘정치 편향’(57.4%)이거나 ‘너무 많고, 반복적’(51.5%)인 탓이다. 이 때문에 ‘뉴스를 회피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27.9%에 불과했다. 독자가 뉴스를 기다리던 호시절은 끝났다.
이번 언론재단 조사 결과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20대, 즉 Z세대가 열심히 뉴스를 읽고 있다고 응답한 것이다. ‘뉴스를 회피한다’는 응답은 30대 76.5%, 40대 76.7%, 50대 78.3%, 60대 77.5%, 70대 이상 72.6%로 전 연령대에서 70%대 후반이었는데 비해 유독 20대는 47.3%로 큰 격차를 보였다. 20대가 뉴스를 멀리할 것이라는 통념이 깨지는 결과다. 20대의 ‘회피하지 않는다’는 응답도 무려 52.7%로 다른 연령대의 배 이상이었다. 이른바 ‘디지털 원주민’으로 불리는 Z세대의 모순된 듯한 이 응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지점에서 필요한 질문이 ‘뉴스 회피’의 개념 중 뉴스를 어떻게 규정하느냐다. 예컨대 Z세대의 미디어 이용 습관을 질문하면서 레거시 미디어와 검색 포털에서 유통되는 기사만 기준으로 잡는다면 불일치가 발생할 수 있다. Z세대가 기성의 뉴스 생태계 속에 들어와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가 생각하는 ‘뉴스’는 SNS 친구의 인스타그램, 유튜브, 틱톡에 올라온 사진과 영상, 해시태그를 비롯해 게임 대화방의 코멘트일 수 있다. 떠도는 정보와 저널리즘이 뒤섞여 경계가 모호해진 게 특징이다. 이들의 주 서식지인 SNS 생태계에서 ‘친구’들이 공유해 주는 소식은 정론 매체의 뉴스보다 신뢰도가 높다. 흥미와 관심 기반의 알고리즘이 더해지면 내게 도움이 되는 솔깃한 소식은 차고 넘친다. ‘친구’가 전해주는 소식은 대체로 즐겁고 도움이 되는데 굳이 회피할 까닭이 없다. 이런 이유로 ‘뉴스를 외면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는데 다른 연령대와 같은 카테고리로 묶이면 곤란하다.
실제 이번 조사에 응답한 20대는 인터뷰에서 “SNS나 유튜브를 통해 뉴스를 접한다”고 대답했다. 파편화된 뉴스 소비 환경에서 뉴스를 편식하고 있을 공산이 크다. 20대의 낮은 뉴스 회피율을 뒤집어 해석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의 토끼 굴에 빠진 것처럼 만화경이 펼쳐지는 SNS 생태계를 기존 미디어 환경과 동일한 잣대로 비교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어쩌면 ‘디지털 원주민’ 세대는 기성의 공론장을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떠나버렸다고 전제하는 것이 옳을지 모른다. 이른바 기성 담론의 바깥에 존재하는 ‘뉴스 아웃사이더’다. 이들은 기성 뉴스와 접점이 없지만, 자기네 세상에서는 다른 식으로 콘텐츠를 소비하면서 그것을 뉴스로 인식하고 있다. 공론장의 분절이다.
언론사 편집진의 견해가 담긴 뉴스를 소비하지 않거나 신뢰하지 않는 것을 회피의 범주에 넣어 해결책을 찾는 것도 당연히 필요하다. 서로 다른 견해가 경쟁하는 공론장을 통해 세상에 대한 소식을 얻지 못하는 국민이 늘어나면 여론 형성에 장애가 생기고 숙의민주주의 체제가 형해화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뉴스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20대와 어떻게 눈높이를 맞출 것인가의 과제가 추가된다. ‘뉴스 아웃사이더’가 실재하고, 또 점점 몸집이 커지고 있는 중이라면 이는 중대한 사회적 위협이다.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는 이야기에 벽을 치고 차단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딴 세상으로 떨어져 나가는 중이라면 방치해서는 안 된다.
우선 언론이 자초한 책임이 크다. 기존 문법과 구독자에 안주해서 미래 세대의 문법, 즉 ‘친구’의 화법으로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에 게을렀다. 사회적인 의제로도 다뤄야 한다. 젊은 세대의 공론장 이탈은 공동체 소속감, 연대감의 약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딴 세상에 가 있는 이들을 공론장 안으로 유인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기성세대가 미래 세대에 먼저 다가가야 할 책임이 있다.
2024-10-01 [17:58]
-
[김승일의 곰곰 생각] 늙어 가는 부산, 일은 누가 하나
인구 감소와 고령화는 선진국에서도 나타나는데, 유독 한국이 심각하게 비치는 까닭은 가공할 만한 속도 탓이다. 한국 인구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62년 2651만 명에서 올해 5175만 명으로 배 가까이 늘었지만 저출생 탓에 2072년 3622만 명까지 하락할 것으로 예상된다. '3622만 명'의 적정 규모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인구 구조 변화가 너무 빠르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부산의 '소멸' 속도는 우려스러운 수준이다. 한국고용정보원 연구에서 특별·광역시 중 최초로 소멸 단계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임신·출산 적령기(20∼39세) 여성을 65세 이상 인구로 나눈 소멸위험지수 값이 0.490에 그친 결과다. 이 지표의 분자인 65세 이상의 비중이 23%를 넘긴 점과 분모와 관련된 합계출산률이 0.66명으로 추락한 점은 동전의 양면이다. 신생아 감소와 노년층 증가가 동시에 이뤄져 소멸의 미끄럼틀에 갇힌 꼴이다. 여기에 매년 약 1만 명의 청년이 수도권으로 유출되는 것도 엎친 데 덮친 격이다.
통계청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2024년 부산 인구 326만 명은 2052년 245만 명으로 24.8% 감소한다. 이 추세라면 ‘2위 도시’를 인천(296만 명)에 추월당하는 건 정해진 수순이다. 부산 생산연령인구(15∼64세)도 현재 67.2%에서 28년 뒤 49.1%로 급감한다. 65세 이상도 43.6%로 늘어나 '늙은 도시'가 된다.
급격한 인구 구성비 변동은 사회 각 방면에서 불균형을 초래한다. 가장 큰 문제는 일자리 미스매치다. 일하는 사람이 주는 반면 부양받는 세대는 느는 방향으로 너무 빨리 이행하면 사회 구조가 송두리째 흔들린다. 인구 전문가들은 저출생과 고령화를 전제한 조건에서 지속 가능한 성장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1970년대까지 한 해 100만 명이 태어났지만 2023년 23만 명으로 추락했다. 경제활동인구의 패러다임 변화는 불가피하고, 이에 대비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부산은 청년 세대의 지역 이탈을 막는 게 우선이다.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고 지역에서 결혼과 출산을 꿈꿀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만드는 노력을 배가해야 한다. 다만 수도권 유출을 획기적으로 막거나, 부산으로 유턴·신규 유입으로 반전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주요한 대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이하인 고령자와 여성 고용률을 높이는 것이다. 노동 수급 불균형에 따른 빈 곳을 후세대가 채우지 못한다면 내부에서 대안을 찾아 소멸 가속도를 줄이고 충격파를 최소화해야 한다.
여기서 핵심 포인트는 노동 생산성이다. 생산 인구가 줄어도 생산성이 향상되면 사회는 지속 성장할 수 있다. 인공지능(AI)과 로봇 기술의 도입은 생산성 향상의 도구다. 전환 교육 등을 통해 고령자와 여성의 역할을 키워야 한다. 또 복지 서비스 확대로 관련 인력 수요가 늘어나는 등 산업 구조 변동에 따른 인력 수급의 부침에도 대비해야 한다.
최근 〈부산일보〉는 '구심점 잃은 신중년 고용' 기획 기사에서 신중년(50~64세)을 산업 현장에 계속 머물게 하기 위한 부산의 재고용 컨트롤타워 필요성을 제기했다. 여기서 신중년은 과거의 은퇴 세대와 구분된다. 고학력에다 해당 분야 숙련도가 높다. 체계적인 건강 관리 덕분에 과거처럼 생산 효율이 급격히 떨어지는 '노인'이 아니며 산업 현장에서 제 몫을 하는 일손으로 손색이 없다.
여성 고용률을 높이는 것도 필수적인 과제다. 우리나라 여성 취업은 꾸준히 늘었지만 여전히 남녀 고용률 격차는 OECD 회원 38개국 가운데 8번째로 크다. 주요 선진국에 비해 육아에 따른 경력 단절이 여전히 심하다. 외국인 인력에도 열린 사회가 돼야 한다.
핵심은 저출생 고령화로 인한 인구 구조의 급격한 변화를 인정하는 것이다. 부산이라는 도시를 지탱하는 적정 인구 규모와 생산 인구를 재설계하고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 '부산 인구 245만 명'이 왜소하다고 걱정만 해서는 안된다. 젊은 일손의 부족은 이미 정해진 미래다. 신중년과 여성, 외국인의 생산 인구 편입으로 어떤 산업 부문에서 대체 효과가 있고, 또 없는지 따져 보고 대안을 만들어야 된다. 한정된 재원의 효율적 배분을 위해 필수적이다. 인구와 노동의 급격한 변화가 예상되는 미래는 전인미답의 시련으로 가득 차 있다. 익숙한 것을 되풀이하는 '경로 의존'으로는 길을 잃기 십상이다. 지금까지는 없었던 혁신적 사고와 접근법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래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2024-08-27 [18:29]
-
[김승일의 곰곰 생각] '87년 체제', 이제 역사로 보내자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Cincinnati)시는 로마 정치인이자 군인 킨키나투스(Cincinnatus)의 이름에서 따왔다. 기원전 460년 로마 공화정은 외침을 당해 위기에 처한다. 원로원에서 은퇴하고 농사를 짓던 킨키나투스는 원로원의 구원 요청을 받자 즉시 독재관(dictator)직을 수락한다. 침략을 물리치고 개선장군으로 돌아온 그는 독재관 지위를 내려놓고 표표히 농장으로 돌아갔다. 원로원의 집단 지도 체제가 복귀됐고, 민회는 행정관을 선출했다.
미합중국 설계자들은 로마 공화정을 이상적으로 여겼다. 원로원과 민회를 본뜬 상원, 하원이 예다. 독립전쟁을 이끈 뒤 낙향해 농사를 짓던 조지 워싱턴을 소환한 것도 닮았다. 워싱턴은 공직을 거부하며 완강히 버텼지만 집요한 설득을 이기지 못해 초대 대통령이 된다. 4년 단임 후 낙향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세상에 없던 삼권분립 제도의 신산함이 그를 놓아주지 않은 것. 연임 횟수에 제한이 없었지만 두 번의 임기를 마친 워싱턴은 퇴임을 결행했다. "능력 부족을 절감"했고 "무능에 연유한 과오가 잊히기를 바란다"는 겸양 가득한 고별사를 남긴 채 그 역시 표표히 떠났다.
미국에서 고안된 프레지던트(president)는 일본 메이지유신 시절 대통령(大統領)으로 번역된다. 대만 총통(總統)도 같은 맥락이다. 모두 '크게 거느리고, 다스린다'는 뜻이다. 하지만 president는 '회의를 주재하다' '의장석에 앉다'는 의미이지 통치, 군림과 동떨어져 있다. 단적인 예로 EU(유럽연합)에는 수많은 president가 있다. EU의 각료 이사회(정상회의), 의회, 집행위원회, 중앙은행, 사법재판소, 감사원의 대표 직함은 모두 president인데, 이를 한국어로 표기하면 의장, 위원장, 은행장, 재판소장, 감사원장이 된다.
어감의 차이는 이 단어가 동아시아에 유입될 때 '왕이 통치하지 않는 나라'를 상상할 수 없었던 시대적 한계 때문이다. 워싱턴 고별사의 시작을 보자. '행정부를 관리할 한 시민을 선출할 시기가 머지않았는데….' 삼권분립 체제에서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일 뿐이라는 관념이 뚜렷하다. 애당초 제왕적일 수가 없는데 태평양을 건너오면서 왕에 버금가는 권력자로 변질된 것이다.
미 대통령은 국방과 외교 권한을 갖고 있으나 개전과 종전 권한은 의회에 있고, 조약 체결도 상원 동의가 필수다. 장관과 대법관 지명도 상원을 통과해야 한다. 의회는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고 예산 승인을 미뤄 정부를 폐쇄(셧다운)할 수도 있다.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절인 2018~2019년 연말연시에 민주당 다수 의회는 무려 35일이나 행정부를 마비시킨 적이 있다. 의회가 견제하면 대통령은 옴짝달싹 못한다. 영국의 왕에 맞서 독립을 쟁취했으니 제왕의 나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장치인 셈이다.
한국은 제헌의회 때부터 미국식 대통령제를 도입했지만 부침을 겪었다. 쿠데타로 헌정이 중단되고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만들어 장기 독재를 펼쳤다. 국민이 대통령을 선출하지 못하고 체육관에서 간접선거로 뽑은 시절도 있었다. 대통령 중심제가 오용된 탓에 입법·사법부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국민은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1987년 6월 간선제 헌법을 유지하려는 정권을 규탄하는 '호헌 철폐' 시위가 벌어졌다. 6월 항쟁의 결과 직선제 헌법 개정이 이뤄져 6공화국이 열렸다. 헌법 개정을 주도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들은 각자의 정치적 야망을 헌법에 새겼다. 중임제와 정·부통령제가 부상했으나, 5년 단임 대통령제로 낙착된 것은 대권을 쥐려는 각자의 셈법이 절충된 결과다. 결국 6공화국 헌법을 주도한 이들은 순차적으로 대통령직에 올랐다.
이른바 '87년 체제'로 불리는 6공화국 출범 이후 37년이 흘렀다.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문턱에 진입한 그 세월에 무수한 개헌 논의가 있었지만 번번이 좌절됐다. 그 결과가 작금의 정치 양극화다. 대통령과 의회 사이에 탄핵 엄포와 법안 거부 무한 도돌이표, 국회에서의 여야 극한 대치가 그것이다. 연금·노동개혁 등 나라의 미래를 좌우할 민생은 실종되고 22대 국회는 개원식도 열지 못한 채 꽉 막혀 있다.
해결책은 권력의 분산과 협치 구조다. 대통령은 유신헌법에서 도입된 '국가 원수'에서 내려와 행정부 수반으로 돌아가고 국방·외교 이외 상당수 기능을 지방 정부로 이양하는 권력 분산이 필요하다.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줄이면서 지방을 살리는 이른바 분권형 개헌이다. '87년 체제'는 쓰임새를 다했다. 분권형 협치 국가인 제7공화국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댈 때가 됐다.
2024-07-23 [18:07]
-
[김승일의 곰곰 생각] 전문가 집단의 배신
독일의 사상가 칼 마르크스는 경제적 토대 위에 법과 제도, 문화 등 상부 구조가 서 있는 사회 체제를 상정했다. 마르크스가 물질적 조건에서 사회 변화의 원동력을 찾았다면 독일의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말의 씨줄과 날줄에 주목했다. 공론장에서 의사소통 행위가 이루어지고 사회 변동이 추동된다는 것이다.
근대 국가는 공론장의 진화에 조응하며 발전했다. 공론장이 집단 지성의 산실이 되어 공동체를 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조건 중 하나가 지식과 경험에서 권위를 가진 전문가의 존재다. 전문가는 의제 설정과 심층 분석, 해결 방안을 제시한다. 그 과정에서 신뢰가 싹트는데 이는 공론장이 건설적인 토론과 합의의 장이 될 수 있게 하는 요소가 된다.
‘짐이 곧 국가’인 군주제나 군부 독재, 공산당 일당 체제에서는 통치자의 하명이 일방통행으로 전달될 뿐 상호 소통은 생략된다. 이런 나라에서 전문가 집단의 존재감은 미약하기 그지없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공론장이 가동되는지 여부로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국가는 간단히 구별된다.
근대 국가 초입에 다양한 전문가 조직이 ‘협회’의 이름으로 태동했다. 정치 국가는 시민 사회에서 움트는 전문가 집단을 관리·통제하기 위한 제도를 고안했다. 대학에 정규 교육을 맡기고, 국가 자격증 혹은 면허 체계에 연계시켰다. 전문직은 해당 분야의 배타적 독점권을 누리는 조건으로 정치 국가에 포섭된다. 전문직주의(프로페셔널리즘) 탄생의 과정이다.
하버마스는 전문가 집단의 권위주의화를 우려했다. 조력자 역할을 뛰어넘어 공동체를 쥐락펴락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독선으로 치달으면 ‘입틀막’(입 틀어 막기)이 나타난다. 과거 육군사관학교 출신 군사 엘리트 집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헌정을 중단시키고 군부 독재를 실시했던 게 최악의 사례다.
이처럼 전문가의 조직적 일탈은 드물지 않다. 사회 전체의 이익, 즉 공공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집단 이기에 빠지는 ‘소셜 딜레마’ 현상이다. 최근 서울 주요 대학 음대 교수들의 입시 비리도 마찬가지다. 교수들은 자신들에게 불법 고액 레슨을 받은 수험생에 실기 전형에서 높은 점수를 매겨 합격시켰다. 전문성을 돈벌이에 악용한 집단적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다. 그 결과, 입시의 공정성은 훼손되고 다수의 학생들이 피해자로 전락했다.
전문직의 대표 주자는 법조·의료계다. 문학·철학과 함께 사각모의 네 모서리를 각각 대표하는 법학·의학이 학문의 틀에서 나와 가장 먼저 국가 공인 전문직 지위를 얻었다. 법조와 의료 분야의 전문직주의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권 보호 취지로 강력한 법적 보호를 받는 공통점이 있다. 무면허 의료 행위나 자격 없는 법률 대리는 엄벌에 처해지는 식이다. 문제는 오늘날 이 두 직역이 한국 사회의 신뢰 기반을 뒤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명분 없는 집단 휴진에 나선 일부 의사와 ‘법 기술자’로 불리는 일부 정치 검사는 직역 이기주의라는 지탄을 자초했다.
의대 교수들은 집단 휴진을 선언하면서 환자를 외면한 단체 행동을 ‘연휴’에 비유하고 의대 증원 백지화와 전공의 면책까지 요구했다. 상식과 동떨어진 인식의 괴리에 어안이 벙벙하다. 의대생과 전공의도 법을 대놓고 무시한다. 유급과 처벌 면제의 특혜가 되풀이된 탓이다.
빗나간 우월 의식의 폭주는 검찰에서도 발견된다. ‘고발 사주’ 사건은 검찰의 신뢰에 결정타였다. 21대 총선 직전 민주당 정치인들을 고발해 달라며 고발장을 작성해 당시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에 전달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당시 대검 수사정보정책관에 대해 1심 법원은 유죄를 인정하고 실형을 선고했다. ‘검사가 지켜야 할 핵심 가치인 정치적 중립 위반’이라는 판결처럼 검사의 선거 개입은 국가 기강을 무너뜨리는 행위다. 또 22대 총선 민심을 요동치게 만든 요인에 검찰이 수행한 사법 잣대의 공정성에 대한 물음표가 있었던 점을 검찰은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전문가의 일탈은 일반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부작용을 낳는다. 한 사회가 축적한 무형의 신뢰 자산을 허물어뜨리는 범죄적 행위다. 신뢰가 훼손되면 소통이 잦아들고 결국 공론장은 피폐해진다. 이해관계에 따른 이합집산이 횡행하면 ‘정글의 법칙’만 남는다. 목소리 센 사람이 이기는 세상에서 갈등이 걷잡을 수 없게 커진다.
‘의사 불패’, ‘검사는 처벌받지 않는다’라는 인식이 공공연한 사회는 퇴행적이다. 소시오패스적인 행위에도 반성 없이 ‘정신 승리’를 구가하며 반복하는 식이다. 공동체를 배신하고 군림하려는 전문가 집단은 단죄돼야 한다. 그게 공동체가 사는 길이다.
2024-06-18 [18:00]
-
[김승일의 곰곰 생각] 연금·핵폐기물 '폭탄 돌리기' 끝내야
지금 한국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시한폭탄에 둘러싸인 위험 사회로 가고 있다. 인구와 기후 폭탄은 오래된 미래다. 제도적으로 볼 때 국민연금 고갈과 사용후핵연료(고준위폐기물) 포화는 미래 세대에 물려줘선 안 되는 가공할 폭탄이다. 이 둘은 현세대가 온갖 혜택을 다 누려 놓고 후손에 뒤치다꺼리를 전가하는 식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게 공통점이다.
국민연금은 2040년부터 적자가 누적되다가 2055년께 고갈된다. 국회 연금개혁특위 공론화위원회가 시민대표단 설문 끝에 ‘더 내고 더 받자’는 개선안을 냈지만 즉각 반론에 휩싸였다. 보험료율(소득 대비 납부액 비율)을 9%에서 13%로 올리되 소득대체율(소득 대비 수령액 비율)을 40%에서 50%로 상향하는 안이다. 여야 협상으로 보험료율은 13%에 근접했으나 소득대체율은 더불어민주당 45%, 국민의힘 44%로 맞서면서 합의는 무산됐다.
연금 개혁 논쟁을 복기하면 겉으로는 여당의 ‘재정 안정’과 야당의 ‘소득 보장’의 대립 구도로 비치지만 어느 쪽이나 기금 고갈 이후 미래 세대 등골 빼먹기 수순은 오십보백보다. 여야가 소득대체율 44.5%로 타협해도 해결은 요원하다. 2063~2064년 기금 고갈은 피할 수 없어서다.
인구 구조를 보면 현세대가 미래 세대에 폭탄을 던지는 실상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1970년대까지는 한해 출생아 100만 명이 유지됐지만 지난해 23만 명으로 4분의 1토막 이하로 떨어졌다. 2023년 출생자가 왕성하게 경제 활동을 하게 될 2060년 이후에는 소득의 30% 이상을 부모 세대의 국민·노령연금으로 충당해야 한다. 소수가 다수를 부양하는 체제다. 지속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세대 간 갈등이 폭발할 게 뻔하다. 오죽했으면 젊은 층에서 구연금·신연금 완전 분리 주장이 나오겠는가.
국민연금 재정의 난맥은 ‘덜 내고 더 받는’ 구조에 기인한다. 기존 보험료율 9%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8.2%의 절반에 그친다. 산업화 세대는 적게 내고 많이 받는 혜택을 받았다. ‘더 내고 더 받는’ 방식이 기득권 유지를 위한 개악이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해결책은 덧셈, 뺄셈의 영역이다. ‘더 내고 덜 받는’ 방법 아니면 적자를 탈피할 수 없다. 기존 세대가 보험료를 더 부담해서 기금 재정을 안정화 추세로 반전시키고 미래 세대의 짐을 덜어주는 방안이 있다. 세대 간 연대, 사회적 대타협의 길이다. 그렇지 않으면 젊은 세대가 요구하는 구연금·신연금 분리를 거부할 명분이 없다. 부모의 부채를 상속하지 않겠다는 자녀의 선택을 탓할 수 없는 이치다.
사용후핵연료는 정부의 신뢰 실추 탓에 꼬여 있다. 국내에는 1만 년 이상 식지 않고 고열과 방사능을 뿜어 내는 사용후핵연료를 영구히, 안전하게 보관할 곳이 없다. 핵폐기물은 원전 부지 내에 쌓인 채 포화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영구처분장을 짓자는 데 이견이 없지만 기존 원전 내 임시 저장소 추진에 물음표가 붙어 있다.
고준위 특별법은 원전 부지 내에 건식 저장 시설을 지어 사용후핵연료를 보관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임시 저장의 기한이 분명치 않았다. 이에 대해 원전 인근 주민과 환경단체는 영구처분장이 기약이 없는 상황에서 원전 부지가 자칫 영구처분장이 될 수 있다고 의심한다. 수도권에서 사용하는 전력을 생산하는 지역의 원전이 주민 동의 절차도 생략된 채 자칫 핵폐기장이 될 수도 있으니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서울 언론에서 ‘고준위 특별법은 민생’ 운운하며 21대 국회 막바지 통과를 재촉하는 주장을 펴고 있으나 이는 핵폐기물이 보관될 지역 정서를 외면한 것이다.
1978년 고리원전 1호기 가동 이래 46년이 흐르는 동안 정부는 고준위폐기물 영구처분장을 마련하지 않는 직무유기를 저질렀다. 지금 시작해도 37년 이상 걸린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우리 세대는 이미 후손들에게 폭탄을 던진 셈이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신규 원전이나 사용 연장을 논의하기 전에 영구처분장 계획을 분명히 밝히고 추진에 나서는 한편 원전 내 임시 시설에 대한 지역민 동의를 얻는 게 순리다.
연금 고갈과 핵폐기물 포화로 인한 부담은 이미 상당 부분 미래 세대에 떠넘겨지고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꾸준히 진행됐어야 할 국정 과제가 땜질이나 조삼모사, 눈치보기로 일관된 탓이다. 이제 공은 3년 차 윤석열 정부와 22대 국회로 넘어간다. 정치의 실패가 반복되면 미래 세대에 더 많은 빚을 떠넘기게 될 것이다. 후손에 폭탄 돌리는 짓은 당장 멈춰야 한다.
2024-05-23 [18:07]
-
[김승일의 곰곰 생각] 의대 광풍 휩쓸면 반도체는 누가 만드나
지난 3일 대만을 엄습한 강진은 막대한 인명·재산 피해를 남겼다. 한데, 외신이 주목한 뉴스는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인 TSMC의 피해 여부였다. 내진 설계 덕분에 웨이퍼 팹(fab·반도체 생산공장)은 사흘 만에 복구됐다. 이 소식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린 곳도, 불안감이 더 커진 곳도 미국이다. 미국이 전 세계 AI(인공지능)·전기차·드론·인공위성·무기 체계 기술을 선도하지만 그 핵심인 반도체는 대만에 의존하고 있어서다.
미국 블룸버그통신의 5일 자 기사를 보면 반도체를 바라보는 미국의 속내가 가감 없이 드러난다. ‘이번 지진은 세계 경제가 얼마나 대만에 의존하는지 일깨운 사건이기도 했다. 이 작은 섬에서 전 세계 첨단 반도체의 80~90%가 생산된다.’ 이어 기사는 ‘TSMC 붕괴라는 재난이 끼칠 영향은 대공황과 유사할 것’이라는 전문가 전망으로 마무리된다. 여기서 언급된 대공황(Great Depression)은 1929~1939년 전 세계를 마비시킨 경기 침체를 말한다.
미국은 코로나19 시절 TSMC 공급 차질로 전기차 생산이 중단되는 악몽을 겪었다. 기술 강대국이지만 제조 약소국인 미국의 취약점이 노출된 사건이다. 그러니 중국이 대만을 공격하면 미국은 반도체 공장 때문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반도체를 ‘실리콘 방패(silicon shield)’에 비유한 까닭이다. 하지만 낙관은 금물이다. 미국은 지정학적 리스크를 회피하기 위해 TSMC에 대해 압박과 보조금 양면 전략으로 미국 애리조나주에 공장을 짓게 했다.
메모리 분야의 최강자 삼성전자와 HBM(고대역폭메모리) 선도 주자 SK하이닉스도 현재의 경쟁 우위에 안심할 처지가 아니다. 북한과 가까운 경기 남부권 8개 지역에 분산된 반도체 단지의 입지는 미국으로서는 지정학적 리스크다. 역시 미국 내 공장 투자를 대가로 거액 보조금 미끼를 내놓는 이유다.
미중 갈등의 시작은 무역 마찰이었지만 이내 기술 전쟁으로 비화됐다. 지금은 안보 패권으로 차원이 격상됐다. 그 최전선에 반도체가 있다. 미국은 중국이 반도체 분야에서 영원히 따라오지 못하게 만드는 게 목표다. 그래서 제조 장비를 중국에 수출하지 못하게 동맹국을 닦달한다. 동시에 반도체 내재화를 꾀한다. 생산 거점을 미국 영토로 옮기도록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미국의 왕따 전략에 맞서 중국은 과거 핵무장 때처럼 ‘거국 체제’에 돌입했다.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투입한다는 뜻이다. 국가반도체펀드 등 금전적 지원은 물론이다. 특히 공을 들이는 게 이공계 인재 육성이다. 통신·장비 업체 화웨이의 ‘천재 소년’ 프로젝트가 상징적인 사례다. ‘최고의 인재에 최고의 보수!’ 최대 200만 위안(우리 돈 약 3억 7600만 원)의 연봉을 걸고 기술 인재를 발굴한다.
미국 주도로 한국, 일본, 대만은 ‘칩4 동맹’을 형성했다. 명색이 동맹이라지만 가슴에 칼을 품은 채 악수를 한 꼴이다. 특히 일본은 1980년대 반도체 강국 시절로 되돌아가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일본 구마모토 TSMC 공장을 위해 유례 없는 세제·행정 지원에다 속도전 공사로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인재 육성에도 팔을 걷어붙였다. 일본은 올해부터 4년에 걸쳐 대학의 이공계 정원 1만 1000명을 증원하기로 했다. 3000억 엔(우리 돈 2조 6768억 원)의 기금도 만들었다. 한국과 대만을 꺾기 위해 사활을 걸었다.
국가 대항전으로 판이 커진 반도체 경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세계 각국은 유례 없는 파격 지원책과 함께 대대적인 기술 인재 육성에 나서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9일 ‘반도체 현안 점검회의’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반도체 경쟁은 산업 전쟁이자 국가 총력전”이라고 규정했다. 정확한 진단이다. 문제는 기술 인재 수급면에서 엇박자가 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이공계의 매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최근 조사에서 이공계 특성화대학 4곳(KAIST·포스텍·UNIST·GIST)의 재학생 중 10% 이상이 자퇴한 것으로 집계됐는데, 상당수가 의대 진학이 사유였다. 여기에 의대 2000명 증원이 기름을 끼얹었다. ‘수학 1등급 아니어도 도전해 볼 만’ ‘의대 보내려면 강원도로 이사 가세요’…. 사교육 광풍이 불고 상위권 연쇄 이동으로 이공계 재학생들이 들썩인다. 국가 예산과 세제·행정 지원은 정책 수단으로 결정하면 되지만 기술 인력 부족 사태는 단기간 회복될 수가 없다.
미국, 중국, 일본은 사생결단으로 한국의 반도체 경쟁력을 넘보고 있다. 반도체가 주권인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우수한 기술 인력이 훨씬 더 필요하다. 그 출발은 이공계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이공계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 지금 정신 차려 대비하지 않으면 한국은 반도체 주권국가 지위를 잃게 된다.
2024-04-11 [18:26]
-
[김승일의 곰곰 생각] '입틀막' 시대 유감
최근 한 라디오 생방송에 출연한 평론가가 ‘김건희 특검’을 언급하자 사색이 된 진행자가 황급히 ‘김건희 여사 특검’으로 정정하는 촌극이 빚어졌다. 앞서 선거방송심의위원회가 SBS 시사 프로에서 ‘여사’ 호칭이 생략됐다며 행정지도 중 권고를 의결한 뒤에 벌어진 일이다. 이후 방송사마다 ‘여사’ 누락 발언을 수정하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자기 검열로 입단속에 성공한 나쁜 사례다.
2022년 윤석열 대통령 방미 중에 나온 이른바 ‘바이든-날리면’을 보도한 방송사들이 무더기 제재를 받았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는 11일 MBC에 최고 수위인 과징금을, YTN과 OBS, JTBC에는 관계자 징계, 주의를 의결했다. 이는 법정 제재에 해당하는데 방송사 재허가·재승인 때 감점 사유가 되는 중징계다. 심의에 오른 방송사 9곳 대다수가 해당 인터넷 기사를 삭제, 비공개 처리 혹은 자막 수정으로 ‘성의’를 표해 제재 수위를 낮추려 노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1심 판결만 갖고 방송사를 압박해 백기 투항시킨 모양새가 되어 언론 재갈 물리기라는 비판이 터져 나왔다.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침해 논란을 빚는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경찰 수사로 번진 ‘가상으로 꾸며 본 윤 대통령 양심 고백’ 영상 소동은 ‘웃픈’ 경우다. 대통령실이 나서 “총선을 앞두고 허위 조작 영상이 확대 재생산되지 않도록”이라고 방향을 지시하고, 방심위는 국내는 물론 틱톡과 인스타그램 등 글로벌 플랫폼에서 해당 영상이 접속 차단되는 조치를 신속하게 취했다.
이 사건 초기에는 인공지능 딥러닝 기술로 만든 딥페이크인 것처럼 알려졌다. 선거법상 딥페이크 정보 유통은 불법이다. 하지만 이 영상물은 방송을 단순 짜깁기한 것으로 딥러닝과는 무관하다. 시쳇말로 웃자고 패러디 개그를 하는데 정색하고 다큐로 받은 꼴이 됐다. 소셜 플랫폼에 떠도는 수많은 동영상 ‘밈’까지 처벌할 건가? 가상을 전제하고 만든 풍자를 강제 수사한다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위헌적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이를 계기로 윤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tvN 예능 프로에 나와 “정치 풍자는 권리”라던 호언이 소환되면서 대통령을 풍자한 개그까지 등장했다.
권력과 비판적 언론 사이에 긴장감은 어느 시대나 있다. 한데, 요즘은 경계가 무너진 느낌이다. 윤 대통령의 경우는 대선 후보 때 검증 보도를 놓고 아직도 강제 수사가 진행 중이다. 명예훼손 사건이 촉발돼 지난해 9월 검찰에 ‘대선 개입 여론조작 사건’ 특별수사팀까지 구성됐다. 관련된 언론사와 기자에 대해 전방위적인 압수수색이 벌어졌고 기자들에 출국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유력 대선 후보를 검증하는 보도에 대대적인 강제 수사가 벌어진 건 유례가 없다.
국민의힘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2021년 한 기자가 소셜 플랫폼에 ‘해운대 엘시티 수사를 왜 그 모양으로 했대?’라고 쓴 글에 대해 1억 원 상당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가 최근 2심에서 패소했다. 권력과 언론의 건강한 긴장 관계에 대한 해답이 판결에 있다. ‘언론으로서는… 주요 수사 기관 고위공직자에게 충분히 의혹 제기를 할 수 있다.… 공직자인 한 위원장은 비판에 대해 해명과 재반박을 통해 극복해야 하며, 손해배상 소송을 통해 언론 감시와 비판을 제한하려고 하는 건 신중해야 한다.’
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가 7일 공개한 ‘민주주의 보고서 2024’를 읽다가 한국 대목에서 같은 문제의식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언론 자유와 독립성을 위축시키려는 정부의 시도는 언론인 괴롭히기(harassment of journalists)와 맞물리고… 그리스와 한국은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침해가 가혹한 독재 국가만의 일이 아님을 보여 준다.’ 이 연구소는 언론 자유 등을 조사해 1점 만점의 자유민주지수(LDI)를 산출하는데, 한국은 2021년 0.79(17위)에서 2023년 0.60(47위)으로 급락했다. 부연 설명은 낯뜨겁다. ‘(윤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통령 이전 수준으로 LDI를 되돌려 놓았다.… 이미 권력 남용(abuse of power)을 보여 주었다.’
여러 정황을 종합하면 지금 ‘입틀막(입 틀어 막기)’은 대통령 ‘심기’ 경호에만 한정되지 않고 전방위적이다. 강제 수사나, 소송, 제재 등은 자기 검열, 나아가 침묵을 강요하는 ‘입틀막’이다. ‘민주주의 보고서 2024’에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또 다른 수단은 언론의 자기 검열 수준을 높이는 것’이라 우려한 것도 같은 말이다. 물리적 ‘입틀막’이 임계치를 넘으면 ‘스스로 입틀막’이 일상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비판하고, 토론하고, 풍자하고, 웃고 살자. 알아서 입을 닫는 사회를 바라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2024-03-12 [18:03]
-
[김승일의 곰곰 생각] 중대재해법은 잘못이 없다
지난해 10월 철근을 생산하는 부산의 한 제철 공장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용광로 폐열을 활용해 과채류를 재배하는 공장 부설 스마트팜 견학이 목적이었는데, 시뻘건 쇳물을 다루는 현장치고는 지나치게 ‘질서정연’한 분위기에 눈길이 갔다.
왜 그런지 이유를 물었더니 “회사에서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이후 사고 예방에 특히 신경을 쓴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위험한 곳이라는 선입견을 가진 외부인 시선에 정돈된 작업 환경이 낯설게 비쳤던 모양이다. 기업이 안전을 최우선에 두면 현장 분위기가 확 바뀐다는 걸 실감한 사례다.
잊힌 기억을 되살린 건 한동안 우리 사회를 양극화시킨 중대재해처벌법 유예 논란이다. 2년의 유예 기간이 끝난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해 준비 부족과 경영 애로를 이유로 정부와 여당 그리고 사용자 단체가 유예 연장을 요구했으나 야권과 시민·노동단체는 예정대로 시행을 주장하며 팽팽하게 맞섰다.
결국 유예 법안이 통과되지 않았고 지난달 27일부터 전국 83만 곳의 사업장까지 확대 시행에 들어갔다. 혼란을 최소화하면서 제도 안착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의무가 정부 당국과 기업, 근로자 모두에 주어졌다.
하지만, 논란을 부추긴 이면에 도사린 오해와 무지, 무책임은 우리 사회가 되새김질해야 할 숙제로 남았다.
이 법의 확대 시행을 앞두고 이른바 ‘공포 마케팅’이 넘쳐났다. ‘빵집·식당·카페도 중대재해법 처벌’ ‘사장 구속되면 줄폐업, 해고’…. 정부의 주장을 확대 재생산한 보도가 이어졌다.
장관이 동네 가게를 방문하는 모습을 TV가 비췄고, 급기야 ‘영세 사업자들이 예비 범법자가 된다’는 논리까지 횡행했다. ‘먹고 살기 바쁜데 어떻게 대기업처럼 안전 인력을 두느냐’ 등의 애로 호소도 단골 소재로 등장했다.
반면 법 시행 초기부터 대상 확대를 주장한 노동계의 목소리는 공론장에서 과소 반영됐다. 중대재해법 유예를 둘러싼 논쟁은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닥치고 유예’로 쏠렸다. 그 과정에 계도와 컨설팅 등 사전 준비 작업을 게을리한 정부의 무책임은 가려졌다.
중대재해처벌법 이전에 산업안전보건법이 있다. 모든 산업 현장에 재해가 발생하면 먼저 산업안전법에 따른다.
예컨대 사망 사고는 산업안전법의 과실치사 규정으로 우선 따지게 되어 있다. 중대재해법은 안전 의무에 소홀한 사업주 책임을 분명히 한 것으로 산업안전법에서 한 걸음 나아갔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법 시행 2년 동안 사망 사고라도 중대재해법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50인 미만 사업장도 유예 여부와 상관없이 우선 산업안전법의 적용을 받는다. 안전과 보건 인력도 산업안전법 규정이지 중대재해법에서 신설된 것이 아니다. 중대재해법 확대 탓에 영세 기업이 망하고 ‘예비 범법자’로 전락한다는 건 지나친 비약이라는 지적을 받는 이유다.
또 빵집·식당·카페 사장님을 콕 찍어 피해자 프레임을 씌우는 것 역시 억지다.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2022년 산재 사망자 644명 중 제조·건설 현장이 512명(80.9%)으로 절대 다수다. 숙박·음식점업에서 발생한 경우는 1%가 안 된다.
여기서 문제는 2년 유예 중인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과반이 넘는 388명(60.2%)의 산재 사망자가 나왔다는 대목이다. ‘공포 마케팅’의 논리대로라면 동네 가게 사장님 중에 산업안전법으로 처벌받은 전과자가 수두룩이 나왔어야 한다.
중대재해법은 2018년 당시 24세이던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가 발전소에서 숨진 사건이 발단이 됐다. 더 이상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사회적 합의가 모인 법이다.
그런데 이 법이 소규모 사업장으로 확대 시행된 지 6일 만에 부산 기장의 폐알루미늄 업체, 강원도 평창 태양광 패널 공사 현장, 또 경기도 포천의 금속 공장에서 각각 안타까운 사망 사고가 발생했다.
안전 장구를 제대로 갖추고 규정을 잘 따른 덕분에 가벼운 부상에 그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우리의 경각심은 아직 부족하다. 일하는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자는 중대재해법이 우리 사회에 아직 필요하다는 점을 아프게 일깨우는 사례다.
‘빵집에서 일하다 사망’은 과장된 표현이 분명하지만, 실제 그런 사고가 난다면 처벌된다는 게 법의 취지다. 중대재해법이 잘못된 게 아니라 안전에 둔감한 의식과 관행이 잘못이다. 우리는 선진 사회로 가는 성장통을 겪고 있는 중이다.
2024-02-06 [1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