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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평화가 곧 승리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난 19일 1000일째를 맞았다. 일상을 파괴하고 삶터를 폐허로 바꾸는 것이 전쟁이다. 인간 이성을 비웃는 듯, 전쟁의 불길은 지금 더욱 맹렬한 기세다. 최근 열흘 사이 이 전쟁의 양상은 전례 없을 만큼 급박해졌다.
무엇보다 무기의 체급이 달라졌음이 보인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7일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에이태큼스(ATACMS·육군 전술 미사일 체계)의 사용을 허용했다. 사거리 300km의 에이태큼스는 단 한 발로 축구장 3~4개 크기의 지역을 초토화한다. 우크라이나는 사용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러시아 본토를 타격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 개발한 스톰섀도도 등장했다. 레이더망을 피해 목표물을 정밀 타격하는 공대지 순항 미사일로 러시아 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서방 무기다. 우크라이나는 21일 북한군이 집결한 쿠르스크 지역으로 스톰섀도를 날렸다.
당연한 수순이겠는데, 러시아는 즉각 보복 조치를 다짐했다. 먼저 핵 교리(핵무기 사용 규정) 수정에 나섰다. ‘비핵보유국이 핵보유국 지원 아래 러시아를 공격하면 모두 핵 공격 대상으로 삼겠다’는 게 골자다. 실제로 러시아가 22일 우크라이나를 향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처음으로 발사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ICBM은 핵탄두 장착이 가능하다. 전 세계가 순식간에 ‘핵 공격’을 걱정해야 하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것이다.
느닷없는 확전의 기로에 선 이 전쟁의 내막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종전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싸움이라는 전문가들의 해석에 무게가 실린다. 미국의 결정으로 시작된 전쟁의 질적 변화는 러시아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대단히 위험천만한 방향으로 흐르는 모양새다.
이럴 때일수록 한국 정부는 신중해야 한다. 지난달 우크라이나에 대한 살상용 무기 지원과 군 참관단 파견 방침 등 대응책을 밝힌 바 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러시아가 25일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공급하면 양국 관계가 완전히 파괴될 수 있다”고 한국에 경고했고, ‘전쟁 종결’을 다짐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측도 한국의 대응 방식에 우려를 표명했다. 이런 마당에 확전에 개입하는 것은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것과 다름없다. 북한군이 파병됐다고 해서 우리가 움직일 이유 또한 없는 것이다. 한반도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이 곤경에 처한 국내의 시선을 외부로 옮기기 위한 노림수라는 분석도 있다. 사실이라면 잘못된 선택이다. 전쟁은 되도록이면 일어나지 않는 게 좋고, 개입하지 않는 게 유리하다. 대외 정책이 구체화할 때까지 냉정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2기 트럼프 시대의 대비에 집중하는 게 바람직하다. 대통령의 최우선 책무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데 있다. 평화가 곧 승리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현실적으로 가장 시급한 것은 외교·안보 진용의 재정비와 대외 정책에 대한 전면 재검토다. 한미일 중심에 초점을 둔 대외 정책으로는 다원주의 시대를 더는 견인할 수 없다. 대대적인 지각변동을 예고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모토는 주지하다시피 ‘미국 제일주의’다. 전통적인 동맹의 가치도 자국 이익 앞에서는 헌신짝이 될 신세다. 우리 역시 철저하게 국익과 실용의 관점에서 미래 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
대일 외교도 마찬가지다. 엊그제 일본 정부는 무성의한 사도광산 추도식으로 우리를 욕보였다. 결과적으로 무기력한 대일 정책의 민낯이 다 드러난 것이다. 일본의 상응 조치만 기다리는 외교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모욕을 여러 번 경험했다면 이제는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논어〉 ‘계시’ 편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은 상급이고, 배워서 아는 사람이 그다음이며, 곤란을 겪고 나서야 배우는 사람이 또 그다음이다. 곤란을 겪고 나서도 배우지 않는 것은 (백성들이 그러한데) 이는 하급이다.’
지혜와 어리석음의 수준을 빗대는 말인데, 네 번째 유형이 시선을 붙잡는다. 곤경을 경험하고도 고치지 않으며 잘못을 자꾸 되풀이한다? 그건 자신이 항상 잘하고 있다는 오만 탓이 크다. 어리석음의 ‘끝판왕’이라 할 만하다. 누군가 가르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상상하면 실로 끔찍하다. 한 번의 오판으로 나라 전체를 누란의 위기로 몰아넣는 분야가 외교·안보다. 일찍이 겪었으면 느껴야 하고, 느꼈으면 바꿔야 한다. 숱한 시행착오에도 개선되지 않는 불안한 정책에 나라를 맡길 수는 없다.
2024-11-26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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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법 위의 존재’ 만든 이 누구인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법치’ 개념의 정수를 담은 대한민국 헌법 11조 1항이 요즘처럼 허망하게 느껴진 적도 없다. 왜 그런가. 법 위에 군림하는 특수 계층이 있고, 권력 앞에서 순한 양이 되고 마는 사정기관이 있기 때문이다.
검찰이 지난 17일 김건희 여사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의혹 사건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김 여사의 증권 계좌가 주가 조작에 동원된 건 사실이지만 김 여사가 시세조종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이게 결론이다. 쉽게 수긍할 국민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사건을 4년 반 동안 방치하다 갑자기 불기소 결론을 내린 검찰의 행태는 온통 비상식적이다. 2020년 4월 사건이 고발된 뒤부터 2021년 윤석열 검찰총장 퇴임 때까지도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대선 국면에서도, 정권 교체 뒤에도 다르지 않았다. 검찰은 수사팀의 잦은 교체, 김 여사 출장 조사 같은 납득하기 힘든 조치로 눈총을 샀다. 그러다 지난 10·16 재보선 뒤 무혐의로 사건을 전격 종결한 것이다. 무슨 잘 짜인 각본을 보는 듯하다.
이번 사건에 김 여사가 연루됐음을 보여주는 정황은 여럿이다. 김 여사와 주가 조작 주범인 권오수 전 도이치모터스 회장은 20년 이상 이해관계를 유지해 온 사이다. 사건 관련자들은 이미 유죄 선고를 받았다. 김 여사가 주가 조작 관련자와 주고받은 수십 차례의 전화·문자 메시지, 김 여사를 공범으로 인식하는 사건 관련자들의 진술도 많다. 검찰은 이를 모두 외면했다.
검찰이 내세운 근거는 ‘증거 불충분’. 증거가 정말로 없는 걸까, 아니면 증거를 찾을 의지가 없는 걸까. 앞서 조사 과정 자체를 보면 후자가 아닐까 의심이 든다. 아니, 숫제 김 여사 변호인이라 해도 부정하기 힘들 정도다. 최근 국정감사에서 거짓말까지 하다가 들통난 게 대표적이다. 검찰은 김 여사 휴대전화 등에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했지만 기각됐다고 법원 탓을 했다. 알고 보니 영장 청구 자체가 없었음이 밝혀졌다. 결국 검찰의 수사 의지가 없다는 뜻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 사건은 압수수색 한번 없이 의혹투성이인 채로 그렇게 마무리됐다.
이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보름여 전 검찰은 김 여사 명품백 수수 의혹 사건도 무혐의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김 여사에게 선물을 준 최재영 씨를 기소하라는 수사심의위원회의 권고는 무시됐다. 2018년 수심위 도입 이후 기소 권고를 수용하지 않는 첫 사례가 김 여사 면죄부를 위해 만들어졌다.
법 집행의 공정성은 건강한 사회의 지표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온 나라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사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법망을 빠져나갔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국가 운영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다. 법체계, 행정 체계가 무너지면 개인 간의 신뢰도 무너진다. 아무런 기준이 없는 나라에서는 각자도생만이 판을 치게 될 터이니, 곧 역사의 퇴행이다.
검찰 역사의 수치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도출한 무혐의 결론은 거대한 파장을 낳고 있다. 김 여사 주가 조작 의혹 사건의 경우 고발인들이 무혐의에 불복해 항고할 예정이고, 이와 별도로 시민단체가 불기소를 결정한 검찰 수사 지휘부를 공수처에 고발한 상태다. 명품백 수수 의혹 사건도 고발인들의 항고장이 제출됐다. 두 사건 모두 검찰 불기소 후 항고 절차와 공수처 재수사를 밟게 된다.
정권의 인사에 좌우되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조직이 검찰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법 앞에서 엄정해야 하는 것이 검찰의 책무이기도 하다. 이를 저버린 검찰이 국민의 신뢰를 잃는 것은 당연하다. 정권의 신뢰를 잃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국민한테 찍히는 것이다. 검찰이 존폐의 기로에 섰다는 말이 왜 나오는지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야 한다. 요즘 가장 많이 언급되는 말이 ‘해체 수준의 검찰 개혁’이다. 국민들은 절감하고 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가진 검찰이 개혁하지 않으면 민주주의의 위협이 될 뿐이라는 사실을.
시인 김지하가 현대사의 ‘오적(五賊)’을 신랄하게 발가벗겨 당대의 부패와 거짓을 조롱한 때가 1970년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바로 법 위에 군림한다는 것. 오적의 활개는 사정기관의 용인 혹은 부역 없이는 불가능하다. 지금 권력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검찰, 공익의 대변자이기를 포기한 검찰이 그때와 다르다 할 수 있나.
김 여사가 연루된 ‘명태균 사태’, 더 큰 태풍이 정국을 휘감는 요즘이다. 공천 개입 의혹 등 검찰이 당장 수사해야 할 사안이 한둘이 아니다. 국민들이 다시 묻는다. 그리고 검찰 역시 스스로 자문해야 한다. 김 여사는 ‘법 위의 존재’인가.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2024-10-22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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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대일 외교, 현실을 직시하자
윤석열 정부 대일 정책의 요체는 ‘양보 외교’다. 한일 양국의 민감한 사안에 대해 일본이 요구하기 전에 알아서 배려해 주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다면 윤 정부 전반기 동안 어떤 결실을 거두었나.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대부분의 정책이 국민 동의를 얻지 못한 채 논란과 갈등을 불렀다. 27일이면 일본의 새 총리를 뽑는 집권 자민당 총재 선거가 실시된다. 이와 맞물려 우리 정부의 대외 정책도 후반기에 접어든다. 대일 외교의 손익을 따져보고 이후의 길을 다시 점검해야 할 시점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일본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지난 2년 4개월 동안 정상회담을 열두 차례나 개최했다. 한일 관계 개선이라는 명분 아래 우리가 일방적으로 양보해서 얻은 결과다. 그러나 정부가 성과로 내세우는 ‘긴밀한’ 한일 관계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는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 2023년 3월 6일 윤 대통령은 일본 전범 기업을 대신해 한국 기업의 돈으로 만든 기금으로 배상금을 대납하는 ‘제3자 변제안’을 발표했다. 일본의 요구가 없는데도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내놓은 조처였다. 그러면서 대통령은 향후 한국이 구상권을 청구하지 않도록 하겠다며 일본 기업의 우려까지 덜어주는 배려를 실천했다.
그리고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출 문제. 주변국이 모두 반발했으나 우리 정부는 침묵했다. 아니 오염수 방출 전부터 일본을 감싸는 행보를 다방면에서 이어갔다. 대통령이 일본 정치인을 만나 수산물 수입 재개 요청을 받고 ‘한국 국민의 이해를 구해 나가겠다’고 언급한 내용이 일본 언론 보도로 공개됐고, 여당인 국민의힘 역시 자비를 들여 오염수 안전성을 홍보하는 데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장 최근의 양보 외교 사례는 일본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찬성이다. 일본은 사도광산 전체 역사를 반영한 전시물을 변방의 향토박물관으로 돌리고 ‘강제’라는 표현을 모호하게 처리했다. 그런데 한일 정부가 ‘강제노동’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기로 사전 합의했다는 일본 언론 보도가 나와 충격을 안겼다. 일본은 축제를 벌였고 우리는 국론분열에 빠졌다.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면 일본도 화답할 것이다. 윤 정부의 대일 정책 기조는 늘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우리 쪽의 일방적인 퍼주기에도 일본 정부의 성의 있는 호응이나 실질적 상응 조처는 없었다. 조선인 수천 명이 숨진 우키시마호 침몰 사고만 해도 그렇다. 일본 정부가 그렇게 발뺌하던 조선인 명부의 일부가 얼마 전 공개됐는데 그동안의 거짓말에 대해 사과 한마디가 없다. 다른 사안은 말해 무엇 할까.
일본에 대한 우리 정부의 절박한 기대가 사실상 ‘물거품’으로 끝났듯 앞으로의 바람 역시 허망한 결과로 이어질 게 뻔하다. 일본 정부는 최근 들어 위안부 문제를 교과서에서 지우고 독도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며 오히려 우경화의 길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양보 외교가 이런 결과를 낳았다면 이제 재고해야 할 때가 됐다.
대통령실의 한 핵심 인사는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이라는 말로 누구를 위한 해명인지 모를 해명을 한 바 있다. 외교안보 책임자의 표현이라기엔 참으로 기이한 측면이 있다. 상대의 마음을 얻으려면 배려나 양보가 중요한 요소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이는 인간 개인의 도덕적 자질이나 종교적 수행에 어울리는 덕목일 뿐, 철저히 실리에 따라 움직이는 냉혹한 국제관계에 적용될 수 있는 원칙이 절대 아니다. 특히 과거사가 얽힌 문제에서 가해국이 아닌 피해국이 먼저 머리를 숙이는 게 가당키나 한가. 또 다른 굴욕일 따름이다.
차기 일본 총리를 결정짓는 자민당 총재 선거가 코앞이다. 향후 한일 관계의 새로운 방향을 가늠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대한 시기다. 선거는 3파전 양상인데, 세 후보의 면면이 녹록지 않다. 세 사람 모두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자위대의 헌법 명기에도 적극적이다. 매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이도 있다. 한일 관계 개선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후보가 없다는 뜻인데, 누가 총리가 되든 향후 한일 관계는 험난한 길이 될 게 분명하다.
이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일본의 처분만 기다리는 외교로는 더 이상 얻을 것은 없다. 무엇보다 국민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책은 지속되지 못하는 법이다. 국내 정책도 그렇지만 외교 정책도 마찬가지다. 내년이면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다. 윤 정부가 이제부터라도 대일 정책 기조를 전면 전환해야 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치밀하고 섬세한 대일 정책 논리를 개발하지 않으면 결코 일본으로부터 실효적 결과물을 끌어낼 수 없다.
2024-09-24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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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아름다운 사람
‘내 이름을 딴 추모 공연이나 행사, 사업을 원치 않는다.’ 지난달 21일 별세한 김민기 학전 대표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스스로를 낮추었다. 저 유언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묵묵히 일해 온 일생의 지론과 온전히 겹친다. ‘(자신의) 발자취가 있다면 그저 시대의 기록 정도이길 바란다’는 뜻도 남겼다. 포용과 달관, 무욕의 수행자를 닮은 삶. 영혼의 깊은 화인 자국을 우리에게 남긴 채 그는 70여 년 인생을 마감했다.
그것을 가로지르는 열쇳말 두 개를 꼽는다면 ‘음악’과 ‘사람’일 것이다. 전자는 타의에 의해 ‘음지’의 삶을 살았던 생의 전반부와 관련되고, 후자는 학전 대표로 ‘뒷것’(뒤에서 남 돕는 일을 조용히 수행하는 사람)의 삶에 매진한 인생 후반부와 연관된다. 금지곡 가수로 낙인찍힌 음지에서의 삶은 의도한 것이 아니다. 불행한 시대가 그렇게 만들었다. ‘저항 가수의 비조’라는 칭호가 있었으나 그의 목소리는 격노나 적의와는 거리가 멀다. 노래 속에 세상을 바꾸려는 거대한 계획, 가열 찬 포부가 있었던가? 그렇지 않다. 낮은 땅 후미진 구석에서 숨죽이며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을 쓰다듬었을 뿐이다. 아니, 그 자신이 박해받고 고통받는 밑바닥 존재였다.
‘아침이슬’을 비롯한 포크 음악의 성취는 짧은 지면에서 거론할 주제가 못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부득이 한 가지를 들라면 ‘노랫말과 선율의 빈틈없는 직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가 직접 쓴 노랫말은 삶의 경험을 시적인 경지로 승화시켜 언어와 현실을 적실하게 엮는다. 여기에 아름답고 서정적인 멜로디가 완벽하게 조응한다. 낮게 읊조리는데도 청자의 가슴을 크게 울리는 이유다. 이게 김민기 음악의 탁월성이다.
1970년대까지도 국내 가요는 일본식 문화의 여파인 트로트와 미8군 출신의 스탠더드 팝이 주류였다. 이제 막 유입된 통기타 음악도 외국곡을 번안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김민기의 포크 음악은 서구의 음악 문법에서 벗어나 한국 대중음악의 ‘자아’를 일깨웠다는 데 의미가 있다. 직접 만들고 부르는 예술로서의 가요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모색한 거의 최초의 사례라 할 만하다.
이제 ‘사람’ 이야기로 넘어갈 차례다. 정권의 박해 속에 지하를 전전할 때도, 먹고 살기 위해 공장과 탄광에서 일할 때도, 머슴살이로 소작농으로 농사일을 할 때도, 그의 곁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말수가 적고 수줍음이 많았으나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기지촌 여성, 광부, 아이들과 부대끼고 어울렸다. 그 역시 투사나 영웅이 아니라 세상 속의 보통 사람이었단 뜻이다. 이는 곧 음악의 원천이기도 했다. 열일곱 나이에 죽은 친구의 부모에게 소식을 알리려고 기차 속에서 만든 ‘친구’, 군 복무 중에 정년퇴직 앞둔 선임하사의 푸념을 듣고 즉석에서 지은 ‘늙은 군인의 노래’, 결혼식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는 공장 노동자들을 위해 합동결혼식 축가로 만든 ‘상록수’ 등등이 그렇다.
시대가 바뀌고 곡절 끝에 양지로 나온 그는 극단 학전을 세운다. 가수·작곡가에서 뮤지컬 연출가·소극장 경영인으로의 변신이었다. 수많은 공연과 무대를 기획하고 가수·배우들을 길러내는 데 탁월한 안목을 지닌 그였으나 단 한 번도 자신을 내세운 적은 없다. 오로지 후배들의 앞길을 틔우는 데 혼신을 다했으니, 이는 사람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지난달 22~24일 마지막 길을 가는 고인의 빈소에 많은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고 한다. 영정 속 그 천진한 미소 앞에서 그들이 품었을 마음가짐은 무엇이려나. 감히 ‘존경’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사랑’과 함께 인간 의식 수준의 높은 자리에 위치한 것이 존경이다. 존경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터인데, 가장 중요한 척도는 내면의 깊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면의 깊이란 무엇인가. 나 아닌 다른 사람, 곧 타인에 대한 공감 나아가 아픔을 이해하려는 노력,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깊이 있는 사람인지는 어떻게 판단하나. 결국 땅에 발붙여 살아온 삶의 모습에 답이 있는 것이다. 고통에 빠진 사람의 아픔을 함께하고 그 고통을 덜기 위해 자신의 안락을 포기하는 이라면, 존경의 칭호에 값할 만하다. 김민기가 그런 사람이다. 그는 이념의 틀이나 진영을 나누는 논리로 가둘 수 없는 큰 사람이다.
1971년에 만든 ‘아름다운 사람’이 귓가를 맴돈다. 슬픔을 이겨내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어루만지는 노래다. 가장 사람다울 때 가장 아름다운 법. 고인의 전 생애가 그랬다. 사람으로서 사람을 사랑했던 ‘아름다운 그이’. 이제 시대의 가인(歌人)에서 영원한 가인(佳人)으로 남았다.
2024-08-06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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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멈춰 선 1년
오는 19일은 채 상병 1주기다. 채 상병은 지난해 7월 수해 현장 실종자 수색에 안전 장비 없이 동원됐다가 급류에 휩쓸렸다. 안타까운 죽음 이후 1년이라는 세월은 정지된 시간이었다. 채 상병 어머니는 1주기를 앞두고 간곡한 마음을 담은 탄원서를 경찰에 보냈다. ‘아들이 희생된 원인과 진실이 꼭 밝혀져 이후에는 아들만 추모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 안일하게 대처한 군 지휘관이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도 덧붙였다.
그런데 이보다 먼저 탄원서를 제출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채 상병 순직 사건의 핵심 피의자로 꼽혔던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이다. 요지는 이렇다. ‘채 상병 순직 사건은 안타까운 사건이다. 하지만 군의 특수성을 고려해 그 사건으로 지휘관들을 처벌하는 건 문제가 있다.’ 언급한 ‘군의 특수성’에 대해서는 이런 설명이 뒤따랐다. ‘군인은 국가가 필요할 때 군말 없이 죽어주도록 훈련되는 존재들입니다.’
경찰은 결국 임 전 사단장의 주장 대부분을 수용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8일 경북경찰청이 발표한 최종 수사 결과는 피의자 9명 중 임 전 사단장과 하급 간부 2명은 검찰 송치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것. 임 전 사단장에 대해 무혐의 결론을 내린 것이다. ‘월권’은 맞지만 ‘직권남용’은 아니라는 논리였고, ‘업무상 과실치사’ 책임은 현장 지휘관들에게만 돌아갔다. 이를 납득할 만한 국민들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1년을 끌어온 경찰 수사가 끝내 면죄부로 마무리됐다”는 비판이 쏟아지는 이유다.
이제 모든 이목은 ‘채상병특검법’으로 향한다. 특검의 취지는 채 상병 순직 수사 과정에서 대통령실과 국방부 등이 진상 규명을 방해했다는 의혹을 밝히는 데 있다. 이 특검법은 21대 국회 막바지인 지난 5월 국회를 통과했으나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와 국회 재투표를 거쳐 폐기된 바 있다. 22대 국회가 열리자 다시 상정된 특검법은 지난 4일 표결 끝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예상대로 윤 대통령은 9일 또다시 거부권을 행사했다. 특검법이 국회에서 재의결되려면 출석의원 3분의 2(200명) 이상 동의가 필요한데 가능성은 높지 않은 편이다.
그렇다고 타협과 협상의 기대마저 버릴 순 없다. 열쇠는 윤 대통령이 쥐고 있다. 총선은 물론 각종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민심은 분명하다.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특검 찬성 응답률이 꾸준히 60~70%를 유지하고 있고, ‘수사 과정에 외압이 있었다고 생각한다’는 국민도 57%에 달한다. 지난달 20일부터 시작한 대통령 탄핵 국민청원은 이미 동의자 130만 명(8일 기준)을 넘어선 상황이다. 대통령이 특검에 ‘적반하장’ 식 태도로 일관한다면 국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질 것이다.
채 상병 특검의 취지는 단순하지만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간단하지 않다. 순직 사건의 진상 규명을 넘어 국가 운영 시스템에 사적 이익의 추구와 욕망이 개입된 위태로운 사태를 밝히는 일과 관련돼 있다는 뜻이다. 최근에는 임 전 사단장 지키기의 배후에 김건희 여사가 있다는 의혹까지 제기된 마당이다. 이번 경찰 수사 결과 역시 수사 외압 의혹 자체를 사전에 무력화하려는 의도의 산물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유로운 이익의 추구를 보장하는 체제다. 그러나 그 사적 이익이 정당한 명분을 지니려면 모두에게 공평한 여건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그 역할을 맡은 것이 국가다. 개인의 욕망이 빚는 갈등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에 빠지지 않도록 구성원의 욕망을 통제하고 타협의 지점을 찾는 일. 공공성 실현의 도구가 국가인 것이다. 그 맨 꼭대기 자리에 통치권자가 있다. 따라서 그는 앞장서서 공적 가치를 실현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일찍이 사마천은 〈사기〉 ‘화식열전’에서 이를 꿰뚫고 있다. 정치의 본질은 사람들의 욕망을 인정하고 그에 맞는 정책을 펼침으로써 이익을 잘 얻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인데, 부(재산)를 놓고 백성들과 다투는 것이야말로 가장 나쁜 정치라는 것이다. 여기서 통치자의 바람직한 자세를 읽을 수 있다. 개인의 이익이 전체의 이익에 어긋나지 않도록 공평무사의 원칙을 지키는 일이 그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 이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파다하다. 정치·경제·사회·문화·외교·국방 등 모든 분야가 뒷걸음질 치고 있다는 아우성, 공공 영역이 대거 축소되고 그 자리가 사적 이익의 장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는 한탄이다. 대통령으로서 견지해야 할 공적 잣대가 부부, 가족, 지인 같은 사적 인연 앞에서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방증은 아닌가. 채 상병 1주기, 국정 퇴행의 1년이 그렇게 묻고 있다.
2024-07-0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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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오물과 전단, 부끄러운 한반도
북한이 지난달 28일부터 대남 오물 풍선을 대거 살포했다. 최근 10여 일 간 전국에서 1000개 넘는 풍선이 발견됐는데, 개수와 규모 등에서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역대급이다. 정부는 즉각 대응에 나섰다. 4일 9·19 남북 군사합의의 효력을 전면 정지시키고 북한의 적대행위에 상응하는 군사행동 의지를 곧추세웠다. 이어 6일 탈북단체가 대북 전단 20만 장을 북한 지역에 살포했다. 9일에는 북한이 그토록 싫어하는 대북 확성기 방송도 재개됐다. 이에 북한도 대남 확성기 방송으로 맞불을 놓을 태세다.
불과 열흘 사이 몸집을 불린 이번 사태는 너무나 급작스럽다. 지금 남북 양쪽은 군사적 충돌까지 불사하겠다는 듯 격앙돼 있다. 군사합의 효력 정지로 최소한의 완충장치조차 사라졌으니 우려가 현실이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과거 남쪽에서 보낸 대북 전단에 북한이 고사포를 발사해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간 적도 있다.
이번 사태의 발단은 북한의 오물 풍선 살포다. 저급하고 치졸하며 비인도적인 행위임이 분명하다. 우리 국민들에게 큰 혼란과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용납하기 힘들다. 미사일 발사 같은 고강도 무력시위에 치중하던 북한이 어째서 저강도 도발에 나선 것일까.
일단 남쪽 정부와 국민의 관심을 환기하려는 저의가 있는 듯하다. 그동안 계속된 무력 도발은 생각만큼 큰 이슈로 떠오르지 못했다. 한편, 북한은 대북 전단을 문제 삼는다. 오물 풍선을 보낸 직접적 원인을 대북 전단으로 돌리고 있다. 속임수 같지는 않다. 북한 정권은 치를 떤다는 표현이 모자랄 정도로 대북 전단에 민감하다. 2020년 전단 살포를 이유로 남북 공동연락사무소까지 폭파한 바 있다.
제3자는 이번 남북 갈등 상황을 어떻게 볼까.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객관적 시각’이 중요하단 뜻이다. 우리는 북한의 풍선 살포 행위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며 국민 안전을 위협한다고 규탄한다. 풍선이 남쪽으로 넘어왔고 그 안에 각종 오물이 담겨 있으므로 당연한 비판이다. 그런데 이는 북한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북쪽으로 살포된 대북 전단 뭉치는 정권 타도와 주민 봉기를 촉구하는 적대적이고 위협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어떤 명분에서도 역외 혹은 국경을 무단으로 침범하는 행위는 국제법과 정전협정에 위배된다. 국제법의 토대인 유엔 헌장에는 모든 회원국의 주권평등 원칙이 명시돼 있다. 상대방 영토와 영공에 전단이나 오물을 보내는 것 자체가 주권 침해일 수 있다. 국가 간 상호 주권 존중은 국제 규범의 기본 원칙이다. 마찬가지로 상호 비방이나 중상도 국제법으로 금지된 사항이다. 그러니 제3자가 보기에, 남북이 모두 잘못이고 국제법 위반인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국제법 준수가 사태 해결의 열쇠라는 의미가 된다. 국제 규범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는 상식의 문제다. 양쪽 모두 자제해야 옳다.
사실 오물 풍선을 막는 길은 간명하다. 대북 전단이 북으로 날아가지 않도록 하면 된다. 정부는 대북 전단 살포를 통제할 수 있는데도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는다. 민간 단체의 전단 살포를 제지하지 못하는 근거로 드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이다. 헌재는 지난해 9월 대북 전단 살포를 금지한 남북관계발전법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취지로 위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이 결정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이해가 요구된다. 접경 지역 주민의 안전 보장을 위해 현행 ‘경찰관 직무집행법’을 통해서도 전단 살포의 제지가 가능하다는 점, 살포 전 관계 기관 신고 의무화 같은 대체 입법 조치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 함께 포함돼 있다. 헌재는 대북 전단 살포를 표현의 자유라고 규정했지만 당국이 이를 제지할 수 있다는 점도 함께 명시한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표현의 자유’만 강조해 대북 전단 관리에 손을 놓고 있다. 의도적으로 방기하고 있다거나 아예 충돌을 유도하는 것은 아니냐는 등의 의혹이 나오는 이유다.
오물 풍선은 어쩌면 북한이 우리를 얕잡아 보고 던져 놓은 덫 혹은 미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목적은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는 데 있다. 우리가 여기에 말려들 이유가 없다. 오히려 오물 풍선 같은 저급한 심리전에 기대는 북한의 처지를 측은히 여겨야 한다. 역사적으로 북한이 대결을 부추겼지만 우리는 의연히 대화를 주도해 왔음을 기억하자. 힘에 의존하는 압박을 고집해서 얻을 이득은 별로 없다. 감정을 자극하는 적대행위가 쌓이면 위험한 상황으로 갈 뿐이다. 만일 불필요한 갈등과 충돌이 계속된다면 그건 정부의 무능을 뜻한다. 세상에 부끄러운 일이다.
2024-06-11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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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홍세화, 그리고 진보정당의 길
지난 부산 총선 현장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지역을 꼽을 때 연제구를 빼놓기 힘들다. 노정현 후보의 선전은 소수정당인 진보당의 기치 아래 거둔 결실이라는 점에서 놀라운 것이었다. 노 후보는 여론조사 때마다 오차범위 밖 우세로 1위를 달리면서 한때 2위 국민의힘 후보와의 격차를 20%P 가까이 벌리기도 했는데, 부산에서는 말 그대로 전대미문의 이변이라 할 만했다. 야권 단일화 경선 승리가 주효했다는 분석, 결국 개인의 역량이 일궈낸 성과라는 진단 등이 나왔다. 어쨌든 노 후보는 이를 동력 삼아 내처 당선의 문턱까지 내달렸던 것이다.
물론 총선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보수 표심의 막판 결집 때문인지 노 후보는 8.83%P(1만 1109표) 차이로 낙선했다. 부산에서 진보정당의 첫 국회 진출을 기대했던 사람들도 낙담했다. 행정·사법 기관이 몰려 있고 중산층이 많이 거주하는 연제구는 1996년부터 2012년까지 보수정당이 승리한 지역이다. 기존 진보정당들이 기반으로 삼았던 곳과 정치 지형이 사뭇 다르다. 여기서 진보정당의 이름으로 절반 가까운 표를 얻었으니 당락을 떠나 역사적 사건임에 분명하다.
이 장면은 이번 총선의 또 다른 안타까운 장면과 교차하면서 부딪친다. 진보정당 최초로 5선에 도전했던 심상정 의원의 총선 패배와 정계 은퇴 선언. 정의당은 녹색당과 합당해 새로운 길을 모색했으나 단 1석도 얻지 못한 채 20년 만에 제도권 바깥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거대 양당의 거센 대립 구도를 감안한다 해도 충격적인 성적표가 아닐 수 없다. 녹색정의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진보정당의 몰락은 이번 총선 결과가 만든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진보당이 지역구 1석을 획득한 것이 전부다.
얼마 전 타계한 홍세화 선생을 떠올리는 건 그래서 자연스럽다. 이념과 진영의 오른쪽은 물론이고 민주 세력 나아가 진보 좌파에 대해서도 엄정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던 고인의 생애가 겹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 ‘똘레랑스’(관용) 개념을 전했던 작가이자 언론인·사회운동가로서의 삶 자체가 자유와 평등을 향한 여정이었다. 그는 나이·경력·권위 따위를 내세우지 않았고 학연·지연에서 자유로웠다. 2011년 진보신당 당대표에 출마할 때 진보정당을 상징하는 노회찬 의원 등 핵심 인물들의 탈당을 매섭게 질타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에게 똘레랑스는 무조건적 관용을 뜻하지 않는다. 똘레랑스 안에 기본적으로 비판적 정신이 내재돼 있다는 의미다.
살아생전 그가 귀히 여긴 또 하나의 덕목은 ‘실천’이다. 무수한 강연과 대화에서 그는 설파했다. “행동으로 증명되지 못한 도덕적 우월감은 위선이자 도덕의 개념을 타락시키는 죄악이다.” 입으로는 진보를 말하면서 소유와 권력의 욕망에 사로잡힌 ‘586 세대’의 타락을 아프게 꼬집은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이성과 계몽의 힘을 신뢰하면서도 이론적 사유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몸으로 직접 실행에 옮기는 실천가. 이게 그의 진면목이었다.
생의 끝자락에 이르러 마지막 남긴 한 마디는 ‘겸허함’이었다고 한다. 냉철한 비판도 중요하고 철저한 실천도 소중하지만, 인간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의 핵심은 겸손이어야 한다는 것. 자신을 낮추고 스스로를 성찰하면서 세상을 헤아렸던 고인의 삶이 바로 그랬다. ‘오늘날 좌우 진영이 공히 겸손을 모르는 오만함에 빠져 있는 건 아닌가.’ 돌아보면 그의 삶과 죽음이 온통 그런 경종으로 들린다.
대한민국의 진보정치가 소멸의 위기에 내몰렸다는 우려 섞인 전망이 파다하다. 거대 양당의 완고한 대립 구도라는 외적 요인의 영향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정체성을 제대로 세우지 않고 구현해 내지 못한 내부적 요인도 크다. 삶의 현장에서 다양한 가치를 의제로 만들어내야 하는 진보정치의 소임은 여전히 막중하다. 노조 바깥의 영세 기업 노동자들이 있고, 심화하는 사회 양극화로 소외되고 차별받는 계층이 존재한다. 진보정당이 있어야 할 곳은 이런 자리다. 보다 낮은 곳에서 공동체의 그늘과 약자들의 아픔을 챙겨야 한다. 국회 의석을 못 얻었다고 해서 진보정당이 설 자리를 잃었다는 건 잘못된 시각이다. 특정 계층과 이슈를 대변하는 정책 정당으로서의 가능성은 흔들림 없이 타진돼야 한다.
지금 거대 양당의 극단적 대립으로 인한 폐해는 실로 심각하다. 고착화하는 양당 독점 구도를 깨고 다양성이 대변되는 사회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진보정당의 길은 다시 열려야 한다. 이 시점에서 이탈리아 철학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통찰을 되새길 필요가 있겠다. 생전에 홍세화 선생도 곧잘 언급했던 말이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2024-05-02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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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겸손과 반성 vs 아집과 교만
쉬이 제 몸을 드러내지 않는 봄이다. 터지지 않는 꽃망울, 그 망설임의 연유를 한낱 인간이 알 길은 없다. 꽃 축제를 연기해야 한다는 전갈, 그래서 전국의 지자체들이 골머리를 앓는다는 뉴스가 봄소식을 앞지를 뿐이다.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다. 봄의 더딘 걸음은 어쩌면 인간의 조급함을 시험하기 위한 건 아닐까. 지긋이 기다리면 될 일, 어찌 그리 안절부절못하느냐는 대자연의 귀띔 아닐까.
조급과 미숙의 난장으로 치자면, 지금의 대한민국 총선 현장만 한 곳을 찾기 힘들다. 선거가 불과 일주일 앞인데, 제대로 된 정책 경쟁은 실종 상태다. 대신 무분별한 선심성 공약과 허술하고 어설픈 정책, 상대를 낮추보는 막말·욕설이 난무한다. 실력으로 딱히 내세울 게 없으니 네거티브로 반사이익을 취하겠다는 혐의가 짙다. 민생을 말하지 않는 역대 최악의 공허한 선거라는 진단까지 나오는 마당이다.
이번 총선 구도는 ‘정권 심판론’과 ‘정권 지지론’의 대결이라고 한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총선 판도는 야권의 대체적인 열세로 분석됐다. 앞서 친명(친이재명계) 위주로 이뤄진 더불어민주당의 공천 부조리가 국민들의 공분을 부른 터였다. 그런데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 짧은 시간 야당이 특별히 잘한 게 없는데도 야권의 상당한 우세로 판도가 기울었다. 여기에는 부산·경남의 요동치는 민심도 포함된다. 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그 원인을 윤석열 대통령의 고집스러운 국정운영에서 찾는 사람이 많다. 이른바 ‘이종섭·황상무 논란’이 대표적이다. 특히 이종섭 호주대사 사태는 모든 게 의문투성이다. 피의자 신분, 출국금지 상태에서 임명돼 논란을 빚은 지 25일이나 흐른 뒤에야 사퇴가 결정됐다. 잘못 끼운 첫 단추를 서둘러 바로잡지 않고 고집을 부리다 수렁에 빠진 케이스다. 국민 눈높이에서 한참을 벗어난 ‘측근 감싸기’였음은 물론이다.
돌아보면 유사한 사례가 한둘이 아니었다. 김건희 여사 명품 가방 의혹, 연구·개발(R&D) 예산 삭감과 ‘입틀막’ 사건, 채모 상병 사망 수사 외압 의혹, 최근의 의·정 갈등까지. 한때는 지지율에 연연하지 않는 대통령의 모습이 우직, 대범, 뚝심으로 비치기도 했다. 지금은 독선과 불통의 산물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최근의 의료 사태를 대하는 태도도 그렇다. 미리 정답을 정해놓고 밀어붙이니 반발을 부를 수밖에 없다. 방향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섬세한 디테일과 유연한 리더십으로 뜻한 바를 이룰 수 있는 정치적 조정 능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대파 한 단 값 875원’은 24차례의 민생토론회가 얼마나 허망한 자리였는지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다. 정치 지도자라면 보다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조언 듣기를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이를 외면하는 것을 오만이라 한다.
대통령의 행보를 제어해 바른길로 이끌지 못한 집권여당도 문제다. 줄곧 논란이 됐던 당정 관계의 회복이 성공한 것 같지도 않고, 선거 국면에서의 리더십도 별 성과를 내지 못하는 듯하다. 게다가 선거가 막판으로 치닫자 흠집내기식 막말이 늘어나는 형국이다. “쓰레기” “개 같은”을 내뱉는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험한 입은 자충수에 가깝다. 조급함 속에서는 좋은 정책이 나오기도 힘들다. 그래서인지 공약 중에는 재원 마련 방안이 없거나 세수 펑크가 우려되는 것들이 많다. 선심성 포퓰리즘 공약으로 표심을 노리는 건 유권자에 대한 기만이다.
그렇다면 야당은 잘해서 지지율 반전의 덕을 본 걸까. 결코 그렇지 않다. 대통령과 여당의 헛발질이 심하다 보니 나라의 장래를 걱정한 국민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지가 됐다는 분석이 중론을 이룬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언설과 행동은 이미 교만의 온상, 막말의 발원지라는 비판을 받은 지 오래다. ‘대장동 재판’이나 ‘비명횡사’ 공천 등 당 안팎의 첨예한 사안에 대해 개인 혹은 당 대표로서 이렇다 할 반성과 사과의 메시지를 내놓은 적이 없다. ‘2찍’이나 ‘강원도 폄하’ 발언은 특히 실망스럽다. 지역감정 타파는 민주당 정체성의 뿌리를 이루는 상징과도 같다. 국민과 특정 지역을 우습게 보는 태도는 절대 용납될 수 없다.
민심 이반은 그 어떤 특별하고 거대한 사안 때문에 일어나는 게 아니다. 사람 마음 밑바닥의 이런 오만과 불손에서 비롯한다. 대통령이든 여당 대표든 야당 대표든 지금까지 ‘미안하다’거나 ‘반성한다’고 진심 어린 말을 하는 걸 보지 못했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낮은 자세로 민의에 따라 받들어 수행하는 것. 여기에 국민의 마음을 얻는 길이 있다. 이번 총선 구도는 ‘정권 심판’ 대 ‘정권 지지’라기보다는 ‘겸손·반성’ 대 ‘아집·교만’으로 보는 게 옳다. 최종 판세는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
2024-04-02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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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생명 다루는 의사들이 그럴 리 없다
대동강물이 풀린다는 우수가 한참 지났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천지만물이 기운생동하는 절기. 동토를 견딘 풀과 나무들이 볕 좋은 뒷산 언덕에서 싹 틔우는 소리 들리는 듯하다. 봄이 한창 몸 풀 채비에 분주하니, 온 세상은 이내 울긋불긋 꽃 천지로 흐드러질 테다.
봄 기지개가 이리 반가운 이들이 한둘이겠냐만, 겨우내 병을 앓은 사람들만 할까. 만물이 깨어나는 이즈음은 육신의 고통으로 서러웠던 환자들이 회복과 치유의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시즌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의료 현장은 꽁꽁 얼어붙어 아직도 차갑고 혹독한 겨울이다. 의사들의 집단행동으로 의료 공백이 장기화할 우려가 커지면서 국민의 건강권이 위기에 처했다는 답답한 소식이 봄의 길목을 가로막는다.
안타까운 마음에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찾아본다. 의료인이 지켜야 할 이 윤리강령은 고대로부터 전승돼 오다 1948년 세계의사협회의 ‘제네바 선언’으로 확립된 이래 여러 차례 수정돼 지금에 이른다. 그중 가장 눈길 끄는 대목. ‘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이런 내용도 있다. ‘나는 인종·종교·국적·정당·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해 오직 환자에 대한 의무를 지키겠노라.’ 의사의 본분은 생명을 최우선시하는 고귀한 뜻에 있다는 것. 이는 의료가 돈이나 명예를 넘어선 초월적 숭고함의 영역임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의사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의료 현장을 떠나는 집단행동에는 그럴 만한 뜻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 사례로부터 그것을 살필 수 있다. 의약분업 정책에 맞선 2000년, 원격 의료에 반대한 2014년, 코로나19 사태 때 의대 정원 확대를 막은 2020년. 그때마다 의료계는 단체적으로 저항했는데, 국민들은 그 연유를 따져 묻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의사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이 그것이다. 의사들은 그렇게 의료계 내부 모순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국민들에게 각성의 계기를 제공했다. 소중한 공로다.
현재 전국에 번진 의료 공백 사태는 전공의들이 앞장선 4년 전과 많이 닮았다. 당장 3월에는 전임의와 교수들마저 병원을 떠날 가능성이 점쳐진다. 환자들의 피해 확산과 의료 대란의 격화는 예정된 수순이다. 하지만 의사들은 이번 사태 속에서도 역설의 진리를 드러내는 데 기여한다. 2024년 의대 정원은 35년 전과 비슷한 규모인데 그 기간 한국의 인구는 21.9% 증가했다는 점, 노인 인구가 5배 늘어나는 동안 의사 인력은 동결됐다는 점, 인구 1000명당 의사 수가 한국은 2.6명으로 일본(2.6명)이나 미국(2.7명)과 비슷하다는 의사단체의 설명은 알고 보면 한의사까지 포함한 것으로, 한의사를 제외하면 의사 수는 2.18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제일 적다는 점 등등. 의사들이 집단행동으로 강경하게 이슈화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사실들이다.
시간이 지나야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그걸 깨닫게 해 준 기여도 있다. 우리나라 응급·필수 의료체계를 떠받치는 전공의 체제가 그것이다. 전공의는 집단행동 때마다 반복되는 의료 공백의 장본인이다. 극심한 노동 강도에 시달리면서도 의대 정원 확대에 앞장서서 반대하는 모순적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나중에 전문의가 돼 개원하면 고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형적 의료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사태의 근본적 해결은 난망하다. 이렇게 한국 의료의 민낯이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은 전공의들이 근무지 이탈을 통해 직접 몸으로 증명한 덕분이다.
의사는 우리 사회의 엘리트다. 생각 없이 집단행동에 나설 리가 없다. 끝내 파국의 길을 걷고자 원할 리도 없다. 부조리한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스스로 반면교사의 사례가 되고, 국민들에게 그 심각성을 각인하려는 큰 뜻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일부는 소중한 일터까지 과감히 포기했으니 그야말로 ‘살신성인’이다. 의료인들의 숭고한 의지, 헌신과 공로를 잊어선 안 되겠다.
한 가지 부연하고자 한다. 집단행동 같은 극단적 수단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려는 의사들이 있는 반면, 어떤 일이 있어도 의료 현장을 떠나지 않는 의사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생명과 목숨을 최우선 가치로 받들라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묵묵히 실천하는 의사들. 이들이 의사의 대다수를 차지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다면 이들이야말로 대한민국 의사들의 의중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대화를 통해 공감대를 넓히는 방향으로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야 할 때다. 현장을 떠난 의사들은 더 늦기 전에 복귀하는 게 옳다. 집단행동으로 보여준 의사들의 참뜻은 이미 국민에게 다 전달됐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2024-02-27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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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행복한 대통령의 길
2020년 출간된 〈한국의 불행한 대통령들〉은 우리나라에서 박수받고 퇴임하는 대통령이 드문 이유를 살핀 책이다. 역대 대통령들을 국내 정책·외교·언론·리더십 같은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한 결과가 그 근거다. ‘대권’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한국의 대통령제는 ‘제왕적’인데, 최고 통치권자가 무소불위의 힘으로 자기 생각을 밀어붙이는 행태야말로 불행의 주된 원인이라는 게 책의 요지다.
이 책의 화두가 지금 눈길을 끄는 이유는 22대 총선이 불과 두 달 반 앞으로 바싹 다가와서다. 한국의 정치 구조상 대통령과 총선의 역학관계는 정권의 명운을 좌우하는 중대 요소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현재 대통령실과 정부·여당의 움직임이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한 것도 그런 이유다.
이즈음 윤석열 대통령의 행보는 두 개의 키워드로 요약된다. ‘법률안 거부권’과 ‘선심성 정책’이 그것이다. 그런데 거부권은 정치 공세에 대한 정당한 행사로 인식되고, 선심성 정책은 ‘민생’을 위한 것으로 포장된다.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지금까지 여덟 차례를 기록 중이다. 양곡법, 간호법, 노란봉투법, 방송3법(방송법·방송문화진흥회법·한국교육방송공사법)과 이른바 ‘쌍특검법’(김건희 여사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의혹 특검법·대장동 50억 클럽 특검법)이 그 목록이다. 현재 고심 중인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대한 거부까지 더해지면 9회가 된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역대 대통령(이승만 43회, 박정희 7회, 노태우 7회, 노무현 6회, 이명박·박근혜 각 1회)의 사례와 비교해도 한참 과하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제외하면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단연 최다다. 아직 대통령 임기가 절반 이상 남아 있는데도 말이다. 거부권은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 고유 권한이지만 위헌 혹은 국익 침해 등 헌법적으로 정당한 사유가 있어야 한다. 거부권이 ‘전가의 보도’가 된 이 상황이 과연 정상적인지 의문이다.
특히 ‘김건희 특검법’ 반대는 거부권 논란의 핵심을 이룬다. 모든 의혹을 털어낼 기회를 대통령 스스로 저버렸다는 점에서 그렇다. 무엇보다 국민 70% 이상이 이 법안을 찬성하고 65% 이상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반대한다. ‘김건희 리스크’는 최근 명품 가방 수수 의혹까지 겹쳐 윤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정면충돌로 번진 상황이다.
결국 거부권 남용은 자신과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독단’의 의미로 읽힐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국민 여론이나 민심의 자장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는 의미다.
거부권 행사의 반대쪽에 ‘선심성 정책’이 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보인다. 지난 한 달여 사이 쏟아진 감세·현금성 지원 관련 정책이 20여 건에 이른다.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증권거래세 인하,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 비과세 한도 대폭 상향, 상장기업의 기업 승계를 돕는 상속세 완화 시사 등등. 이전에 수시로 발표한 세금·전기요금·은행 이자 인하 등 대책까지 합치면 단순 나열하기에도 숨이 벅차다.
문제는 ‘민생 안정’이라는 당위만 있지 치밀한 준비 끝에 나온 정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체계적이고 일관된 정책 결정 과정보다는 일시적 성격의 행사에서 즉흥적으로 발표되는 일이 잦다. 대통령실에서 모든 정책을 결정하고 총리를 비롯한 각 부처 장관은 하달된 정책의 집행 기구에 불과하다는 의혹이 여기서 나온다. 그렇지 않다면 주무 부처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정책 혹은 갑자기 기조가 바뀌는 정책이 나오는 이유를 설명할 길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선심성 정책 안에 아무런 재원 대책이 없다는 데 있다. 세수 규모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는 대목에 대해서도 별다른 설명이 없다. 대부분 법 개정이 필요한 사안이라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결국 총선을 앞둔 ‘포퓰리즘’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책 〈한국의 불행한 대통령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규정된 임기 안에서 한시적 권한을 위임받은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과거의 업적을 이어받아 좋은 점은 더욱 발전시키고, 다른 한편 잘못된 점은 시정하는 것이 원칙이어야 한다.’ 그동안 한국 대통령의 말로가 불행했던 건 저 원칙을 도외시했기 때문이다. 대개 자기편 잘못은 감싸고 상대편은 악(惡)으로 여겨 타격했다. 그 틈새로 측근들의 호가호위, 계파 정치, 연고·학벌주의가 판을 쳤다. 윤 대통령과 현 정부의 잦은 거부권 행사와 설익은 선심성 정책이 이런 폐해를 가리기 위한 방편이 아니길 바란다. 대통령의 불행은 나라와 국민의 불행이다. 불행은 겪을 만큼 겪었다. 민심과 국정을 외면한 채 불행의 길로 들어서는 대통령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2024-01-23 [1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