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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지방도시 잇는 국제선 직항이 늘어난다
전 세계 주요 항공사들이 ‘지방도시 직항’ 노선을 확대하고 있다. 미국에선 허브공항을 거치지 않고 유럽 휴양지를 직접 잇는 항로 개설이 활발하다. 아시아와 호주, 중동과 유럽을 연결하는 직항 노선도 늘었다. 지방도시 직항이 늘어나는 이유는 뭘까.
미국 유나이티드항공은 오는 12월부터 워싱턴D.C.~더블린, 암스테르담 노선에 취항한다. 스페인 이베리아항공은 하계 스케줄부터 마드리드~토론토 주 5회 운항을 시작했다. 캐나다항공은 2027년 여름부터 토론토와 오슬로(핀란드), 섀넌(아일랜드), 니스(프랑스)를 잇는 대서양 횡단 노선을 운항할 예정이다.
이들 노선은 에어버스의 최신 항공기인 A321XLR 기종을 활용한 중장거리 노선이다. A321XLR은 에어버스의 인기 기종인 A321neo를 개량한 장거리 협동체(narrow body) 항공기다. 협동체란 항공기 내부 복도가 1개인 소형항공기를 말한다. A321XLR은 최대 항속거리가 4700해리(8704㎞)에 달한다. 최대 항속거리가 3500해리였던 A321neo에 연료탱크를 추가하고 효율성을 높여 거리를 비약적으로 높인 것이 특징이다.
A321XLR처럼 장거리를 비행할 수 있는 소형항공기의 등장은 항공산업의 지형을 바꾸고 있다. 새로운 수익 노선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기존에 장거리 노선을 운항하던 광동체 항공기는 연료 소모량이 많고 공항 착륙료도 비싸서 운항 비용이 많이 든다. 300석에 달하는 좌석 가운데 편도당 200~250명의 승객을 태우지 못하면 적자 운항이 불가피한 구조다. 반면 A321XLR과 같은 장거리 협동체 기종은 광동체와 비교해서 운항 비용을 약 45% 적게 든다는 것이 항공업계의 분석이다. 100~180명의 승객만으로도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다.
장거리 협동체는 허브공항이 위치하지 않은 대도시나 지방도시를 연결하는 장거리 직항에 최적화된 항공기다. 300석까지는 채울 수 없지만 분명한 장거리 직항 수요가 있는 도시에 신규 노선을 개설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 셈이다. 이 때문에 A321XLR 제조사인 에어버스는 이 항공기를 ‘신규 노선 개척자(network opener)’라고 부른다.
계절에 따라 수요가 크게 변하는 ‘휴양지’ 노선에도 장거리 협동체가 변수가 될 수 있다. 기존에는 휴양지 장거리 직항은 광동체를 사용할 수밖에 없어 연중 운항이 불가능했다. 수요가 몰리는 기간에 대형항공기를 투입해 운항하고 비수기에는 운항을 하지 않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장거리 협동체를 투입하면 계절에 따라 수용 변동이 큰 노선도 연중 일정한 운항 스케줄을 유지할 수 있다. 이 경우 관광객은 항공 운항 일정에 따라 여행계획을 수정하지 않아도 되고 관광 도시도 비수기에 최소한의 관광 수요를 유지하게 돼 전반적인 관광산업 활성화가 가능해진다.
장거리 협동체는 허브공항을 중심으로 노선을 편성해 지방도시 여행자에게 환승을 강요하는 ‘허브 앤 스포크(Hub-and-spoke)’ 네트워크 전략을 일부 약화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승객은 직항을 선호하지만 대형 항공사들은 장거리 노선을 운항하는 데 필요한 광동체를 채울 승객을 한 곳에 모으기 위해 허브 앤 스포크 전략을 폈다. 장거리를 협동체를 운항할 수 있게 되면서 중소도시를 직접 연결하는 직항(Point-to-Point) 노선을 신설할 수 있게 됐다. 지방 도시를 향하는 승객은 허브공항에서 몇 시간씩 ‘환승 대기’를 하지 않아도 되고 허브공항의 병목 현상에 따른 지연도 피할 수 있다.
부산에서 출발하는 국제선 장거리 직항 확대 기대도 높아졌다. A321XLR의 제원상 항속거리를 적용하면 시애틀(8300㎞), 시드니(8300㎞), 이스탄불(8200㎞), 헬싱키(7400㎞) 등 장거리 직항도 가능하다. 다만 만석 승객, 수하물, 연료 여유분 등을 감안한 실용 항속거리를 감안하면 델리(4900㎞), 두바이(7000㎞), 호놀룰루(7200㎞) 등이 중거리 노선 개설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현재 김해공항은 야간운항 제한시간(커퓨타임) 문제로 항공사가 장거리 직항을 운항할 경우 경제성에 한계가 있다. 커퓨 안에서 왕복 운항 스케줄을 만들 경우 항공기가 현지에서 하루를 대기해야 하는데 이 경우 항공기의 ‘회전율’이 떨어져 항공사로서는 손해를 보게 된다.
김해공항은 슬롯(이착륙 횟수)도 여유가 없는 상황이어서 신규 노선 취항이 쉽지 않다. 결국 가덕신공항 개항으로 24시간 운영되는 공항이 확보되고 슬롯에 여유가 생겨야 중장거리 직항 확대가 본격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항공기술의 발전에 따른 노선 확대 효과를 제대로 누리기 위해선 가덕신공항의 조기 개항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김종우 서울경제부 부장 kjongwoo@busan.com
2026-09-07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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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2차 공공기관 이전과 '마지막 스퍼트'
정부의 2차 공공기관 이전안 발표를 앞두고 관가와 금융권이 술렁이고 있다. 정부 공식 발표에 앞서 지난 7월 중순과 지난달 중순, 약 한 달 간격으로 이전 기관 배치안이 담긴 이른바 ‘금융권 지라시’가 SNS를 통해 확산한 것이 발단이다. 국토교통부 실무진의 발언을 요약했다는 이 지라시에는 국토부가 이재명 대통령의 지시로 공공기관 이전에 속도를 내고 있으며, 9월 중 이전안 발표가 임박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한국은행·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 등 금융당국 유관기관은 세종으로, 한국투자공사(KIC)와 7대 공제회, NH투자증권 등 자산운용 관련은 전주로, 농협은행·농협생명·농협손해보험 등은 부산으로, 농협중앙회는 나주로 이전하는 방안이다.
금융권에서는 정부 원칙과 지자체 지역 논리, 정치권 이해관계를 잘 끼워 맞춘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라는 분석부터 여권이 향후 이전 로드맵에 대해 여론을 떠보기 위해 흘렸을 가능성, 국토부 실무진과 비공식 대화에서 나온 개인적 구상을 정리한 것이라는 추측까지 다양한 해석이 제기됐다.
정부는 곧 “결정된 바 없다”고 해명했다. 일부 언론이 지난달 말 국무회의에서 이전안 의결을 추진한다는 내용까지 보도하자, 정부는 공론화와 지자체·노조 등의 의견 수렴을 거쳐 오는 10~11월께 이전안을 확정하겠다고 밝혔다. 지라시 유통과 정부 해명으로 이전안 발표가 임박했다는 관측이 확산하면서 긴장감은 오히려 높아졌다.
지라시 내용은 미확인 정보로 남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길 일은 아니다. 내용의 진위와 별개로 공공기관 2차 이전을 둘러싼 지역 간 경쟁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정부가 앞으로 어떤 기준과 논리로 기관을 배치할 가능성이 있는지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이 내용을 접한 금융권과 관가에서도 기관별 산업 연관성과 지역 특성을 고려한 배치라는 점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갖춘 안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김윤덕 국토부 장관은 최근 공공기관을 혁신도시 중심으로 산업·기능 연관 효과에 따라 ‘집적과 집중’하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서울 잔류 기관을 최소화하겠다는 분명한 정부 원칙을 밝혔다. 이 원칙에 맞춰 부산시와 부산 정치권도 2차 이전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야 한다. ‘몇 개 기관을 유치하느냐’보다 부산에 어떤 기관을 집적해야 가장 큰 시너지와 이전 효과를 낼 수 있는지 따져, 이를 정부에 설득력 있게 제시할 논리와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금융권과 관가에서는 정부가 당초 이르면 8월 말이나 9월 초 공공기관 이전안을 발표하려 했지만, 이전 대상 기관 노조와 유치 희망 지자체의 반발이 이어지면서 발표 시기를 늦췄을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에 무게를 싣고 있다. 관가의 정책 결정 구조를 잘 아는 한 금융권 인사도 “극도로 비밀리에 진행된 배치 작업이 마무리되고 초안 공개가 임박했지만, 반발이 커지자 발표 시기를 늦췄을 가능성이 크다”며 “부산도 아직 남은 시간 동안 공공기관 유치를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부산은 2009년 서울과 함께 금융중심지로 지정된 이후 한국거래소·한국예탁결제원·한국주택금융공사·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기술보증기금 등 주요 금융 공공기관이 자리 잡았다. 금융산업 핵심 인프라가 집적된 만큼 추가 기관 이전에 따른 연관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고, 해수부 이전에 따른 해양금융을 비롯해 블록체인·디지털금융 등 미래 금융산업으로 확장할 기반도 갖췄다.
정주 여건도 강점이다. 최근 국토부 조사에서 부산은 1차 공공기관 이전 지역 10곳 중 이전 직원의 1인 가구·가족 동반 이주율이 80%를 넘으며 가장 높았다. 이전 대상 기관 내부에서 세종·전주보다 부산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스포츠 경기에서 흔히 쓰이는 ‘마지막 스퍼트’는 남은 시간과 자원을 모두 쏟아부어 최종 목표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뜻한다. 정부가 이전 원칙으로 ‘집적과 집중’을 내세운 지금, 부산은 그동안 시민들이 염원해 온 산업은행 부산 이전의 당위성을 정부의 이전안 퍼즐이 최종적으로 맞춰지기 전까지 끊임없이 설득해야 한다. 다른 국책은행도 마찬가지다.
지라시에 포함된 금융위원회의 세종 이전안 역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금융중심지에 금융위원회가 와야 한다는 논리만으로 부족하다면, 이미 자본시장 인프라와 주요 금융기관이 집적된 부산에 금융정책 총괄 기관인 금융위원회가 이전하는 것이 ‘집적과 집중’ 원칙에 더 부합한다는 논리도 충분히 가능하다.
공공기관 이전안 발표가 미뤄진 만큼 부산에는 다시 시간이 주어졌다. 부산시와 지역 정치권은 이 황금 같은 시간을 허투루 보내서는 안 된다.
2026-09-02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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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폭염의 한가운데를 지나며…
지난 8월 몰타에서 영국 버밍엄으로 향할 예정이던 라이언에어 항공편 기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여객기 출발 전 한 시간 넘게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찜통더위 속에서 기내는 거대한 가마솥으로 변했고, 무작정 대기해야 했던 승객들은 옷을 벗거나 일부는 어지럼증과 구토 증상을 보였다. 2명이 실신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여객기는 기체 결함 점검 후 출발했으며, 이륙한 뒤에야 에어컨이 가동됐다. 한여름 여객기에서 에어컨이 고장 나 겪게 되는 처절한(?) 풍경이다.
2022년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은 중동의 카타르에서 열렸다. 열사의 나라 중동에서 월드컵이 개최될 수 있었던 건 에어컨 시설이 큰 역할을 했다. 경기장 곳곳에 첨단 냉방시설이 설치됐기에 관중들은 뜨거운 중동에서도 쾌적하게 경기를 관람할 수 있었다.
에어컨이 등장한 건 124년 전이다. 1902년 미국의 엔지니어 윌리스 해빌랜드 캐리어가 발명했다. 코넬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캐리어는 졸업 후 뉴욕의 제조업체에서 일하다 한 인쇄공장로부터 여름철 습기 때문에 종이가 휘고 잉크가 번지는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의뢰를 맡게 된다.
고심하던 그는 기차역을 뒤덮은 안개를 보며 공기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장치(Air Conditioner), 즉 에어컨 발명의 단초를 얻는다. 온도와 습도의 상관관계를 깨달은 캐리어는 난방 코일 속에 차가운 물을 통과시켜 코일 주위의 공기를 냉각시킴으로써 기온을 떨어뜨리고 습기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인쇄공장 문제를 해결하려던 에어컨 기술은 이후 인간의 생활방식 자체를 완전히 바꿔 버린다.
1925년 뉴욕 타임스 스퀘어의 리볼리 극장에 캐리어의 에어컨 시스템이 설치되면서 영화산업은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이전까지 여름은 영화산업의 비수기였다. 덥고 습한 비좁은 공간에서 영화를 보는 건 고역이라, 여름엔 관객들이 극장을 거의 찾지 않았다. 하지만 시원한 에어컨이 들어서자 오히려 여름에 관객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영화산업의 계절적 한계는 사라지게 됐다.
에어컨은 정치환경도 바꿨다. 미국 의회 의사당에 에어컨이 설치된 1928년 이후 의원들은 무더운 여름에도 무리 없이 의정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 당초 선풍기에만 의존했던 터라 의사당 창문을 늘리려던 계획도 없던 일로 돌아갔다.
100층 넘는 초고층 빌딩, 마천루 건설도 에어컨이 있기에 가능했다. 에어컨은 높은 건물 안에서 창문을 열지 않고 사람이 일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대형 여객기나 초고층 빌딩은 물론 백화점, 병원, 호텔 등 현대 문명의 산물들은 에어컨 보급이 기반이 됐다.
사막 한가운데 들어선 라스베이거스 같은 도시도 에어컨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다. 싱가포르의 국부로 불리는 리콴유 전 총리는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은 에어컨”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그는 총리가 되자마자 공무원들이 일하는 공공건물에 에어컨을 달았고, 이를 통해 동남아 무더위를 극복하고 정부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다. 싱가포르 경제발전의 원동력 중 하나가 에어컨인 셈이다.
인공지능(AI) 시대를 떠받치는 반도체 산업과 데이터센터의 필수 설비도 에어컨이다. 반도체는 온·습도와 공기청정도를 정밀하게 관리해야 하고, 데이터센터는 서버가 내뿜는 막대한 열을 끊임없이 제거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고도의 청정과 항온 상태가 유지되어야 하는 의약, 화학, 섬유, 식품 가공 등 산업도 에어컨이 없었다면 발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과거 칭기즈칸은 세계 땅의 절반을 정복했다는데, 캐리어가 발명한 에어컨은 세계인의 생활무대를 정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이 더위를 극복하고 더 높은 곳, 더 뜨거운 곳으로 생활영역을 넓히게 한 동력이 에어컨이다.
하지만 에어컨 사용이 늘어날수록 과도한 전력 소비와 냉매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이란 환경 문제는 당면한 과제다. 몬트리올 의정서 협약에 따라 2030년 이후에는 온실가스 냉매의 사용을 대폭 감축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 냉각, 펠티어 냉각 등 실외기 없는 친환경 냉각 기술 개발이 국내에서 결실을 앞두고 있다는 건 반가운 소식이다.
올해 경남 양산은 기상 관측 이래 최고 기온인 42.5도를 찍었고, 유럽에선 역대급 폭염에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폭염이 일상이 된 시대, 이제 에어컨은 필수품이 됐다. 특히 어린이와 노인 등 취약자에겐 생존의 필수품이나 다름없다. 에어컨이 환경 문제를 유발하지만, 결국 기술력으로 이겨낼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됐다.
2026-08-3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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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지방에도 사람이 산다
잘못 돼도 한참 잘못 됐다. 오직 서울의 과열된 집값을 잡겠다며 처방한 해열제를, 미분양이 속출하는 지방 저체온 환자에게도 똑같이 투여하고 있으니. 숨 넘어가기 직전이라고, 이 약을 먹으면 다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는데도 정부의 시선은 여전히 서울과 수도권의 집값 그래프로만 향해 있다. 지방으로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수도권 과열을 막겠다는 명목으로 시행되는 규제 일변도의 조치들은 자생력이 약한 지방 부동산 시장의 사슬부터 끊어내고 있다. 이 같은 규제의 역설은 지금껏 반복돼 왔고, 지방민은 학습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 결과 정부 부동산 대책이 거듭되면 될수록, 자금력 있는 지방민은 너도나도 서울 똘똘한 한 채를 찾아 ‘자본 탈출’을 시도한다.
지난달 23일 열린 대통령 주재 부동산 국민 대토론회와 뒤이어 나온 8·3 부동산 세제개편안은 이러한 수도권 편향적 국정 프레임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토론회에서는 지방에선 넘볼 수조차 없는 30억 원대 주택을 두고 초고가 주택이 맞냐 아니냐 의견이 분분했는데,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고개를 갸웃하며 “지방과 수도권의 초고가 주택 기준에는 큰 차이가 있다”며 서울 사람 편에 섰다. 토론회 내내 국민 절반에 해당하는 지방민은 초대되지 않은 ‘그들만의 세상’에 온 것 같은 불편함과 소외감, 박탈감을 느껴야 했다. 지역 전문가의 발제나 발언 기회도 전혀 없었다.
토론회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세제 개편안에서 ‘지방 무시’는 더욱 노골화됐다. (대개) 서울에 있는 20억 원짜리 거주 1주택자에게는 종합부동산세를 아예 면제해주기로 하고 30억 원까지도 종부세를 줄여주기로 했지만, (대개) 지방에선 주택 3채를 다 합쳐 13억 원만 넘으면 종부세 폭탄을 맞게 됐다. 관련 정부 브리핑에선 한 기자가 지방과의 과세 형평성에 대해 묻자 정부 관계자가 “지방에는 종부세 많이 내는 분이 많이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해 부산에서만 주택분 종부세를 낸 다주택자가 1만 2205명에 이른다.
무엇보다 정부는 지방의 적체된 미분양 물량을 흡수해 임대 시장에 공급할 유동성의 주체가, 그나마 희망을 가져볼 수 있는 대상이 다주택자라는 점을 간과했다. 결국 지방 주택을 처분하고 서울의 똘똘한 한 채, 안 되면 서울 사람들 눈엔 ‘덜 똘똘한 한 채’라도 갈아타라는 정책적 신호는 지방 부동산 시장을 더욱 얼어붙게 만들었다. 정부 발표나 대통령 말 한마디만 나와도 은행 대출 심사가 하루 아침에 뒤바뀌기도 하니 지역 건설업계는 하루하루가 살얼음을 걷는 기분이라고 했다. 이미 부산의 경우 악성으로 분류되는 준공 후 미분양이 역대 최고 수준임은 물론, 악성 미분양 비율이 전체 미분양의 40%를 돌파하는 등 지방 시장은 이미 심각한 동맥경화 상태에 빠져 있다.
정부 지방 무시를 비판하는 본보 보도가 나간 뒤 부산은 물론 경남 창원, 경북 등에서도 본보로 응원과 정부 성토 메일, 전화가 쏟아졌다. 부산의 한 기관 수장은 “부동산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대한민국 서울과 지역의 초양극화가 갈수록 더 심화되고 있다”면서 “그보다 더 심각한 건 이번 토론회 사례에서 보듯, 서울 사람 눈에는 지역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게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라고 꼬집었다. 정부가 연일 지역 균형 발전을 강조하고, 2차 공공기관 이전까지 추진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우리가 던져주는 것만 먹어” 식의 시혜적 관점으로만 지방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경고했듯, 시장 실패보다 무서운 건 잘못된 제도 설계로 인한 ‘정부 실패’다. 서울과 수도권 시장이 규제 속에서도 글로벌 자본과 풍부한 대기 수요로 하방 압력을 견뎌내는 사이, 지방은 즉각적인 거래 절벽과 가격 폭락이라는 치명상을 입고 있다.
특히 거래 절벽은 단순 자산 가치 하락의 문제를 넘어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거주 이전의 자유까지 뿌리째 뒤흔든다. 취업이나 이직, 자녀 교육 등을 위해 거주지를 옮기고 싶어도 집이 팔리지 않아 자신이 살던 지역에 묶여버린다. 평생을 모아 힘겹게 일군 집이라는 자산이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돕는 사다리가 아니라, 발목을 잡는 주거 락인(housing lock-in)의 사슬이 되어버린다.
열이 많이 나 링거를 맞아야 하는 서울보다 더 급한 환자는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지방 시장이다. 국민 절반이 사는 서울 공급 대책이 나올 때, 나머지 국민 절반이 사는 지방 수요 대책도 같이 나와야 한다. 둘은 전혀 다른 시장이다.
대통령 지지율이 취임 이후 또 최저치를 찍었다. 지지율 하락의 원인마저 오로지 부동산 관련 ‘서울 민심’에서만 찾고 있으니, 아직 멀어도 한참 멀었다. 지방에도 사람이 산다.
2026-08-26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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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간판 뒤의 얼굴들
“기자님은 대형마트 안 가세요? 시장에서만 장 보세요?”
2010년대 초반 3년간 유통업계를 취재했다. 대형마트와 SSM의 공세가 본격화되고, 골목상권은 고사 위기를 호소했다. 대형마트 심야영업을 제한하고 의무휴업일을 지정한 유통산업발전법의 탄생도 이때다. 버티다 못해 폐업 준비를 하는 슈퍼마켓, 대기업 식자재 매장에 비상이 걸린 도매시장 상인들을 만났고, 매장을 변칙 개점하거나 의무휴업일에도 배짱 영업을 하는 대형마트를 지적했다.
당시 부산 출점을 앞두고 서울에서 온 한 유통 대기업 담당자가 답답하다는 듯이 그렇게 물었다. 요즘 누가 전통시장을 가느냐, 당신도 대형마트에서 편리하게 사지 않느냐. 그런 뉘앙스의 힐난이었던 것 같다. 그 때로부터 십수 년, 지금은 지역 정치권과 시민단체가 홈플러스 지키기를 호소하고 나섰다. 홈플러스는 파산 문턱에서 가까스로 회생 기한을 받고 일부 점포에서 영업을 재개했다.
업계 2위 홈플러스가 파산 위기까지 간 원인은 복합적이다. 국내 최대 사모펀드 운용사 MBK파트너스는 2015년 영국 테스코로부터 홈플러스를 7조 원대에 인수한 이후 투자금 회수를 위해 자산 매각 중심의 구조조정에 나섰다. 점포와 물류센터를 줄줄이 매각했고, 일부는 판 뒤 다시 빌려 쓰는 방식으로 영업을 이어갔다. 점포는 줄고 비용은 늘었는데, 그 사이 대형마트 업황 자체가 악화됐다.
일각에서는 홈플러스 사태를 두고 골목상권을 지키려고 대형마트를 규제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말한다. 대형마트의 의무휴업일을 늘린다고 전통시장이 살아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쿠팡과 새벽배송으로 대표되는 온라인 유통업체만 키워준 결과였다는 논리다. 그러나 정책이 시대와 산업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것과 정책의 보호 대상과 명분이 잘못됐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지켜야 하는 것은 노동자와 지역 경제다. 2012년 유통법이 만들어질 때도 그랬고, 홈플러스 지키기를 말하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홈플러스가 문을 닫으면 전국 10만 명 노동자가 생계를 위협 받고 1800여 개 입점 업체와 협력 업체가 손해를 본다고 한다. 그런 현실을 두고 사모펀드의 경영 실패나 온라인 중심으로 완전히 재편된 소비 패턴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태평할 수는 없다.
기술의 변화가 유통 산업을 바꾸고 소비자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양상은 새롭지 않다. 대형마트와 편의점, 올리브영과 다이소가 골목마다 생겨나는 사이에 슈퍼마켓과 문방구, 화장품 가게와 철물점은 골목에서 점차 사라졌다. 새벽배송, 당일배송, 주말배송으로 쇼핑이 놀랄 만큼 편리해진 반면 물 한 병, 파 한 단을 사려고 해도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하는 ‘쇼핑 사막’, ‘식품 사막’도 늘고 있다.
정책은 변화에 취약한 대상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 비수도권도 대표적인 예다. 부산 홈플러스만 해도 이번 사태 전에 이미 폐점이 잇따랐고, 백화점도 롯데백화점 마산점에 이어 현대백화점 울산점 동구가 폐점 수순이다. KB금융 분석에 따르면 올해 3월 기준 점포당 월평균 매출액은 서울이 수도권 평균의 배, 비수도권의 3배였고, 방문객 수는 비수도권이 서울의 4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특히 유통업은 매출과 대비해 고용이 많은 산업이고, 농수산물부터 공산품까지 다양한 생산자에다 금융, 물류까지 연계되기 때문에 지역 경제에 미치는 파급력이 클 수밖에 없다. 지역의 전통적인 상권을 지키던 백화점의 폐점이 지역 경제 침체의 신호가 되는 이유다. 지방 소도시 핵심 상권에 ‘임대’를 붙이고 늘어서 빈 가게들이 지방소멸을 상징하는 장면인 것도 마찬가지다.
유통 대기업이 합리적인 경영 선택이라는 이유로 인구가 줄어드는 지방에 점포를 닫고, 수도권에만 투자를 한다면 쇼핑 사막은 무서운 속도로 번질 것이다. 새벽 배송으로 대다수가 편리해진다고 해서 골목 상권이 고사하도록 내버려둔다면 내 이웃들이 일자리를 잃고, 여러 가정이 흔들릴 것이다. 거대한 물류센터 바깥에서 거리가, 도시가 텅 비어간다면 그것을 혁신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요즘 세상에 누가 대형마트를 가느냐. 새벽 배송이 얼마나 편리한데 규제를 말하느냐. 이런 질문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유통업 정책이 지켜야 하는 것은 특정 기업이나 혁신 기술이 아니라 물건을 사고 파는 노동자와 소비자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불편해지고 가장 늦게 회복하는 취약한 사람들이다. 우리 이웃들이 걷고 만나고 밥 먹고 대화하는 거리이고, 내 가정을 지탱하게 하는 일터다.
간판이 하나씩 꺼질 때마다 그 뒤의 얼굴들도 함께 꺼진다. 매출의 숫자나 신기술이 아니라 그 얼굴들의 건강과 안전을 최우선에 두는 유통법 개정을 기대한다.
최혜규 경제부 부장 iwill@busan.com
2026-08-24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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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공공기관 이전 지원, 비용 아닌 투자
하반기 2차 공공기관 이전이 본격화한다. 전국의 지자체가 전시 태세다. 유치위원회를 꾸리고 정치권과 공조하며 이전 효과가 큰 기관을 한 군데라도 더 유치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부산이 경계해야 할 건 안이함이다. 해양수산부와 HMM 부산 이전이 급물살을 타면서 산하기관 이전을 당연한 부산 몫으로 여기는 자세가 만연해 있다. 제2의 도시이고 신공항과 항만을 갖췄으니 당연히 이리로 와야 하는 게 아니냐는 식이다. 그야말로 위험한 태도다.
나라를 병들게 하는 수도권 일극체제는 차도를 보이지 않는다. 인구와 기업, 자본과 일자리가 모두 서울에 몰려 있다. 수도권을 벗어나면 정글이라도 펼쳐지는 줄 아는 이가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이다. 이들의 눈에 부산은 서울에 대적할 만한 제2의 도시가 아니라, 수도권과 가장 멀리 떨어진 '외진 도시'일 뿐이다.
부산이 상대적 강점으로 여기는 광역시급 인프라도 이들 눈에는 도토리 키재기다. 부산이 경쟁 시도에 비해 우위에 있다는 생각은 부산 안에서나 통하는 이야기다.
공공기관 이전을 지역의 당연한 지분 찾기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투자로 봐야 할 시점이다. 100억 원을 쓰더라도 110억 원의 이익을 보겠다는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
당장 빠듯한 재정 상황에서 공공기관 유치 지원안에 투입되는 예산을 비용으로 보면 당연히 아깝다. 그러나 투자로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무실 하나가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수백 명의 고급 인력이 이동하고 가족이 정착한다. 소비가 늘고 후방 산업이 따라온다.
실제로 부산은 이미 공공기관 이전의 효과를 체감하고 있다. 해수부와 HMM 이전 결정 이후 분위기는 달라지고 있음을 느끼는 요즘이다. 온오프라인 할 것 없이 부산 전역을 짓누르던 패배주의가 옅어졌다. '부산은 뭘 해도 안 된다'는 식의 냉소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당장 눈치 빠른 입시 시장부터 이 같은 분위기를 읽어내고 있다. 1차 공공기관 이전으로 금융계 공기업이 뿌리를 내렸고 지역할당제까지 적용되며 부산대 상경 계열 학과의 입결이 개선됐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에는 해수부 이전 덕에 지역 대학가의 해양 관련 학과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지고 있다. 이들 대학이 하나둘씩 수도권 학생을 상대로 입시설명회에 나서고 있다.
이는 그간 부산시의 갖은 정성에도 겉돌던 청년의 마음이 더는 흔들리지 않게 됐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부산에서도 기회는 찾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조금씩 커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부산연구원의 발표에 따르면 시 청년 정책 예산은 2019년부터 2025년까지 4배 이상 증가했다. 그러나 직접적인 현금이나 주거 지원을 제외하면 상당수 청년들은 정책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청년 정책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는 '청년의 마음'을 붙드느라 쓰는 비용보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사람과 기관에 대한 이전 투자가 훨씬 더 효과를 내고 있다는 말이다.
정책 간 우선순위를 조정하고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해수부 산하기관 등 공공기관 이전 지원에 전향적인 자세로 나서야 한다. 해수부가 부산으로 왔으니 나머지 산하기관도 줄줄이 따라와야 한다는 식의 접근은 순진하다.
결국 공공기관 이전도 투자 싸움이다. 사람의 이동에 투자하고, 조직의 이동에 투자해야 한다. 지금 하반기 시작되는 2차 공공기관 이전에서 어떻게 처신하느냐가 부산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
이와 병행해 중앙 관가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는 반발을 잠재워야 할 시점이기도 하다. '효과도 없는 공공기관 이전으로 이산가족만 양산한다'라는 볼멘소리가 가득하다. 이를 반박할 논리와 백데이터부터 제시해야 한다. 이전의 효과를 눈앞에서 보여주고 반발을 잠재우지 못하면 향후 이전 정책의 지속성도 담보할 수 없다.
수십 년 묵은 망국병을 치료하는 큰 싸움을 부산 혼자서만 감당하려 해서는 안 된다. 3명의 시도지사가 지역별로 이전을 희망하는 기관을 사전에 조율하는 식으로 공동전선을 펼쳐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공공기관 이전은 지역에 대한 시혜가 아니다. 수도권 일극체제를 완화하기 위한 국가 전략이다. 부산 역시 이를 당연한 몫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지금 부산에 필요한 것은 비용을 아끼는 계산이 아니라 미래를 사는 계산이다.
2026-08-19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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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민주주의, 그게 다 뭐랍니까
영화 호프, 스파이더맨, 오디세이를 차례로 봤다. 영화광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피서지로 극장만 한 곳이 없어서였다. 참고삼아 한 줄 평을 하자면 스파이더맨은 이 나이에 볼 영화는 아니었다. 오디세이는 인간은 다들 힘들게 사는 존재라는 생각에 괜히 짠했다. 호프는 누가 뭐라든 간에 재밌었다. 한국에서 이런 SF영화까지 나온다는 게 뿌듯했다.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리고 있지만, 직접 보고 나서 평가하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문득 전직 대통령 윤석열의 12·3 내란이 성공했으면 한국 영화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게 됐다. 한국 영화는 1990년대 중반 헌법재판소의 사전심의 위헌 결정으로 검열 제도가 폐지되고, 표현의 자유를 얻은 이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비상계엄 당시 계엄사령부 포고령 제1호는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였다. 시나리오 단계부터 철저한 사전 검열이 이루어져 정치 비판, 사회 고발물, 부조리한 공권력을 다룬 작품은 제작이 금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누적 관객 1312만 명이 든 ‘서울의 봄’ 같은 영화 제작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한다.
12·12군사반란을 다룬 ‘서울의 봄’이 인기를 끌자, 당시 국방부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국방부는 2023년 12월 12일 “과거와 같은 군사 반란은 절대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다. 군은 정치적 중립을 유지한 가운데, 국민의 힘으로 지켜온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며 국가와 국민의 안녕을 위한 소임을 다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일 년도 못 되어 12·3 내란이 났다. 계엄의 성공은 한국 영화까지 나락으로 보냈을 게 뻔했다. 기억에서 희미해진 부마민주항쟁 이야기를 하고 싶다. 10·26 사건과 12·12군사반란, 5·18 민주화운동이 모두 부마에서 비롯됐다. 부마민주항쟁은 4·19 혁명 정신을 이어 5·18 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으로 연결하는 민주화 대장정의 큰 역할을 했지만, 오랫동안 다른 민주화운동보다 조명받지 못해 안타까웠다.
올해 들어 반갑게도 부마민주항쟁을 다룬 책들이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부산대에서 선언문을 작성해서 뿌리는 등 학내 시위를 주도한 정광민 부마민주항쟁사업회 이사장은 〈열흘의 혁명〉을 통해 당시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부산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인 30명은 역사적 의미에 비해 문학적 재현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부마민주항쟁을 시집 〈아직 다 말해지지 않은 목소리들〉을 내고 기렸다. 여기에 최근 철학자 김용옥까지 〈도올이 본 부마 시민혁명〉을 내놓으며 가세했다. 도올은 부마항쟁을 우리 역사 최초의 근대적 시민혁명이라고 정의 내린 뒤, 직접 부산과 마산의 격전지를 찾아다니고 있다.
이 글의 제목 ‘민주주의, 그게 다 뭐랍니까’는 이번 부마민주항쟁 기림시집에 참여한 김곳 시인이 쓴 시의 제목에서 가져왔다. 김 시인은 부마민주항쟁에 참여했다가 갖은 고문을 받았던 한 구술자의 말에서 따왔다고 한다. 어떤 심정에서 이런 말이 나왔을지 짐작이 된다. 이 시집에서 두 명의 시인이 기리고 있는 서회인 씨 이야기가 특히 눈에 들어왔다. 서 씨는 동주여상 야간부 2학년에 다니다 중구 대청동 인근 육교에서 경찰이 쏜 소형 최루탄인 사과탄 파편에 얼굴을 맞았다. 그 뒤 오랫동안 폐질환을 앓다 서른아홉에 유명을 달리했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억울했을까.
이재명 정부는 지난 5월 부마민주항쟁과 5·18민주화운동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 등을 담은 헌법 개정안을 국회 본회의에 상정했으나 국민의힘 의원들이 전원 불참하면서 투표 불성립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들은 충분한 여야 합의나 국민적 공감대 형성 없이 급하게 처리되는 졸속 개헌이라고 비판했다. 이러니 스타벅스의 ‘탱크 데이’ 나 이진숙 의원이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폄훼하는 토론회를 국회에서 여는 일이 벌어진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해도 남의 상처를 건드리는 이야기를 함부로 하면 안 되고, 모든 주장이 학술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5·18이나 부마를 강성 보수 주도권 싸움에 이용하려는 시도가 더 이상 용납되어선 안 된다.
현행 헌법은 1972년 유신헌법 이후 대통령 직선제를 박탈했던 제5공화국 헌법에 맞서 6월 항쟁을 통해 온 국민이 민주화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내면서 나왔다. 1987년에 만들어졌으니 벌써 4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다. 이 낡은 헌법 곳곳에 도사린 허점을 윤석열이 불법 계엄을 자행하는 데 악용한 바 있다. 주관적 판단에 따라 정치적 위기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한 목적 등 자의적으로 비상계엄을 확장 해석할 여지가 여전히 남아 있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개헌 의지 재천명이 활발한 개헌 논의 재점화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영화 보고, 별 걱정 없이 글을 쓰는 것도 다 민주주의 덕분이다. nleader@busan.com
2026-08-17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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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지필공’과 부산대병원
오는 20일 국립대학병원 소관 부처가 기존 교육부에서 보건복지부로 변경된다. 그동안 국립대병원의 관리·감독은 교육부가, 지역·필수의료 정책은 복지부가 맡았다. 11일 국무회의에서 국립대학병원 설치법 시행령과 국립대학치과병원 설치법 시행령 일부개정령안이 의결됐다. 소관 부처 이관으로 복지부는 국립대병원과 보건의료 정책의 연계성을 강화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지역 국립대병원이 교육기관으로서 자율성은 유지하면서 지역·필수·공공의료 핵심 거점병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정부는 국정과제 ‘지역·필수·공공의료 강화’를 위한 국립대병원 종합적 육성방향을 지난 6월 밝힌 바 있다. 국립대병원을 지역 내 최고 수준의 의료기관으로 육성해 위기에 빠진 지역의료를 살리겠다는 것이다. 수도권 대형병원으로 찾아가는 지역 환자들의 ‘상경진료’ 비용이 연 4.6조 원에 달한다. 수도권 의료 쏠림과 지역 의료 인프라 약화가 맞물려 돌아가며 지역의료의 위기는 더 심화한다.
지역의료 중심축 역할을 하는 국립대병원도 마찬가지다. 정부 발표 자료를 보면 지역 국립대병원은 전문의 수·첨단의료기기·연구실적 등에서 수도권 대형병원과 큰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국립대병원 임상·연구·교육·시설 등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결과이다. 복지부는 지역 국립대병원이 시설·장비 노후화, R&D 인프라·인력 부족, 만성적 인력난과 필수의료 인력 단절에 시달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정부는 국립대병원이 주도하는 지역 완결적 의료체계와 지역 의료 안전망을 구축해 지역 주도 성장을 이끌겠다고 공언했다. 우수한 의료 인력이 국립대병원에 정착할 수 있도록 총인건비와 채용제도를 개편하고, 중증·고난도 진료역량 강화를 위한 시설·장비의 첨단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또 응급·모자·심뇌·외상·어린이 등 필수의료센터를 국립대병원 중심으로 확대하겠다는 방안도 내놓았다. 지역 의료 인재 양성을 위해 국립대병원 교육·수련 인프라를 확충하고, 권역단위 수련거점 기능 강화에도 나설 계획이다.
부산에서는 부산대학교병원이 국립대병원 육성 정책의 시행 대상이 된다. 부산대병원은 1956년 부산대학교 의대 부속병원으로 개원했다. 1979년 본관 개관을 기준으로 잡아도 50년 가까이 되어 시설 노후화가 심각하다. 과거에는 청진기만 있으면 환자를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특수 영상장비부터 최첨단 로봇수술·암 치료 장비까지 도입하려면 공간 확보는 필수다. 전문진료센터를 건립하려 해도 현재 상태로는 지을 공간이 없다는 것이 현장의 이야기다. 실제 부산대병원을 이용해 보면 영상 촬영을 위해 건물 이곳저곳을 복잡하게 이동하고 병동 밖으로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에 부산대병원은 2023년부터 ‘지역완결형 글로벌 허브 메디컬센터 구축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권역책임의료기관으로 제 역할을 하기 위해 심각한 공간 협소·인프라 노후화 문제 해결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현재 행정·사무공간으로 사용하는 S동을 재건축하는 1단계, 본관 지하와 도시철도 토성역을 바로 연결하고 외래연결동을 증축하는 2단계, 나머지 병동을 현대화하는 3단계로 진행된다. 지난 3일 예비타당성조사 재정투자평가 분과위원회 종합평가가 완료돼, 부산대병원은 이달 말로 예정된 결과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사업이 계획대로 추진되면 기존 재활의학센터·통합암케어센터·융복합연구센터·국제진료센터 강화에 더해, 24시간 소아응급 진료가 가능한 어린이 통합진료센터·고령화 시대에 맞춘 노인전문질환센터·최첨단 시뮬레이션센터까지 새로 들어서게 된다. 특히 시뮬레이션센터는 의사·간호사 등 지역 의료인 육성의 장으로 활용되는 동시에 공공보건의료와 중·소형 의료기관 교육의 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다. 또 중환자와 보호자들이 입퇴원마다 치르는 주차장 전쟁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지역·필수·공공의료 살리기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다. 그만큼 ‘지필공’ 의료 위기가 심각하다는 의미다. 지난달 부산 상급종합병원 필수의료과 의사 인력 부족을 취재하며 마주한 지역·필수의료 현장은 ‘버티고 있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지역완결형 의료 체계 구축의 시작점은 의사와 환자가 남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글로벌 허브 메디컬센터 사업은 지역 국립대병원 육성이라는 정부 정책과 연결되는 지점이 많다. 단순히 한 병원을 위한 사업으로 치부하거나 경제성만을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수도권과 지역의 의료 격차를 줄이기 위한 첫 단추로 생각해야 한다. 국민이 어디에 살든 골든타임 안에 수준 높은 진료를 받도록 하겠다는 정부의 선언이 구체적인 실천으로 지역에서 구현되기를 기대한다.
2026-08-12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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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레일에 T를 더하면
‘50TH WEDDING ANNIVERSARY, JUNE 8 1996’(50번째 결혼기념일, 1996년 6월 8일). 미국 미주리주에 있는 소도시 컬럼비아의 한 벤치에 적힌 문구다. 사연의 주인공은 마을의 토박이 리드(Reid) 할아버지·할머니 부부. 해외연수 중이던 지난해 어느 봄날, 낡은 나무 벤치 등받이에 쓰인 글귀를 만났다. 그 아래엔 더 선명한 한 줄이 추가돼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70주년, 2016년 6월 8일’. 미국판 백년해로 사연만큼이나 눈길을 끈 건 벤치가 설치된 장소 ‘MKT 트레일’이다. 컬럼비아 주민들이 매일같이 이용하는 이 산책로는 원래 같은 이름의 철도회사가 운영하던 기찻길이었다.
컬럼비아의 자랑 MKT 트레일은 미국에서 폐선 철로를 산책로와 자전거길로 전환하는 정책, 이른바 ‘레일스 투 트레일스(Rails to Trails)’의 선도 프로젝트로 추진됐다. 이름과 달리 이 프로젝트는 ‘레일(Rail)’에 알파벳 ‘T’ 하나 더하는 것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1978년 MKT 철로가 폐선하자 컬럼비아시는 토지 소유주를 상대로 지난한 협상과 법적 분쟁을 이어가며 철도 길을 조금씩 사들였다. 1982년 우선 일부 구간만 산책로를 개통했고, 이후 10년이 흘러 지금의 MKT 트레일이 완성됐다. 지구 반대편 미국의 산책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내 고장의 모습이 눈에 밟혀서다. 부산에는 한 세기 넘도록 도시 한가운데를 단절시킨 철길이 있다. 1905년 개통한 ‘경부선’이다. 최근 닻을 올린 민선 9기 전재수호는 인수위 백서에 93개 추진과제 중 하나로 ‘경부선 지하화 및 지상부 그린웨이 조성’ 공약을 담았다. 기존 철로를 지하화하고 상부를 공원화하는 내용이 골자다. 과연 100년 묵은 잿빛 기찻길이 녹색 산책길로 변신할 수 있을까.
경부선 지하화 공약은 8년 전, 민선 7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오거돈 당선인 인수위는 일명 ‘철도재생 뉴딜사업’라는 이름으로 부산진역부터 구포역까지 경부선 13.1km 구간을 땅속으로 집어넣겠다는 청사진을 내놨다. 철도 지하화로 생긴 지상 공간은 공원으로 조성하고, 철길 주변 낙후 지역은 광범위한 도시재생 사업을 추진한다는 복안이었다. 2027년까지 사업을 완공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이후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몇 차례 수정을 거쳤다. 그러다 박형준 시장 시절인 지난해, 부산역과 부산진역 사이 2.8km 구간이 국토부 ‘철도 지하화 통합개발 선도사업’에 선정되며 비로소 추진 동력이 생겼다. 하지만 계획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지하화’라 부르기 힘든 수준이다. 기존 철도 위에 인공지반을 조성해 지붕처럼 덮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에 이번 민선 9기 인수위는 ‘무늬만 지하화’인 인공지반 방식이 또 다른 장벽이 될 수 있다며 사업 방향 재검토를 제안했다. 아울러 부산진역부터 가야역까지 4.6km 구간에 대한 지하화 계획을 추가로 담았다.
전재수 시장은 8년 전 밑그림에 그쳤던 계획의 첫 삽을 뜰 수 있을까. 가장 큰 걸림돌은 막대한 사업비다. 철도 지하화를 통한 도시재생 성공 사례로 꼽히는 서울 ‘경의선 숲길’의 경우 가좌역과 용산역 사이 6.3km 구간을 지하화하는 데만 국비 4500억 원이 들어갔다. 주머니 사정이 훨씬 열악한 부산으로선 국가 지원 없이 사업 추진이 불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국비 확보를 위해 지금부터 시민 목소리를 하나로 모아내고, 면밀한 실행 전략을 세워야 하는 이유다. 수 km에 달하는 철로를 걷어내고 공원으로 재탄생시킨다는 계획은 일견 북항 돔구장보다 더 먼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디서나 살기 좋은 균형성장 도시’ ‘모두가 건강한 시민행복 도시’ ‘미래를 열어가는 혁신경제 도시’ 등 민선 9기의 도시 목표를 고려하면 최우선 순위로 놓아 마땅한 과제다.
앞서 소개한 MKT 트레일은 반세기 가까이 도시의 핏줄 역할을 해오고 있다. 트레일 양쪽, 모세혈관처럼 뻗은 샛길을 통해 시민들은 앞마당처럼 산책로를 오간다. 걷는 이, 뛰는 이, 페달을 밟는 이가 뿜은 땀과 노폐물을 떠안고, 신선한 산소와 에너지를 불어 넣는 ‘정맥’이다. 공교롭게도 부산역에서 구포역까지 경부선 길이가 MKT 트레일과 비슷하다. 고작 인구 13만 도시의 산책로를 300만 부산 시민이 못 가질 이유가 없다. 철로를 걷어낸 자리에 얼마를 들여 무엇으로 채울지는 시민과 함께 고민하면 된다. MKT 트레일처럼 자연의 흙길로 비워둔 채, 간간이 쉬어갈 의자와 음수대 정도면 족하다. 리드 할아버지·할머니 같은 시민 기부금으로 시설물을 갖추면 예산 절감과 참여 행정이란 ‘왕복 티켓’을 잡을 수 있다. 단절에서 연결의 길로 거듭나는 경부선. 그 길 위를 걸으며 백년해로한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 BTS 지민·정국의 인사말이 담긴 벤치를 보고 싶다.
2026-08-10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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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인디언식 기우제'라도 지내라고?
부울경은 현재 용광로다. 오죽하면 슈퍼급 태풍을 고대할까. 우리나라 122년 기상 관측 사상 하루 최고 기온이 3회나 갱신됐다. 양산시 상황이다. 양산시 일 최고기온은 지난달 31일 41.4도로 122년 만에 일 최고기온 기록을 세운 뒤, 지난 1일에는 41.6도로 그 기록을 갈아치웠고, 다음날인 2일은 42.5도로 신기록을 세웠다. 전국 최고의 기록을 세웠다면 ‘자랑’이란 단어가 먼저 떠올라야 정상이다. 하지만, 양산시는 울상이다.
기상청과 양산시는 혹시나 자동기상관측장비(AWS)가 고장났을까 봐 긴급 점검을 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양산시에서 관측된 역대 최고기온 기록이 신뢰할 만한 기록인지 확인하고, 관측자료의 정확성과 장비의 정상 작동 여부를 최근 확인한 것이다. 아쉽게도 기계는 정상적으로 잘 작동하고 있었다.
점검 결과 장비의 설치 기준인 지면에서 1.2~2m 높이를 잘 지키고 있었고, 운영 기준도 준수해 관측자료의 신뢰성은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도로의 열기를 식히기 위한 살수차가 동원됐다. 양산시가 도로 살수를 시작하자, 인근 밀양시 주민들도 마음이 급했다. “우리도 더운데, 왜 없냐”란 주민들의 원성에 밀양시도 살수차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사실 경남 무더위의 대명사는 밀양이었다. 영화 ‘밀양’으로 전국에 알려진 밀양은 한때 경남에서도 기온이 높기로 소문이 나 한자어 그대로 ‘볕이 빽빽한 고장’으로 읽히기도 했다. 그 더위의 대명사를 이번에 ‘양프리카’(양산이 덥다고 아프리카에 빗댄 표현)에 뺏긴 밀양의 마음이 시원할지 섭섭할지 궁금하다.
더위가 특정 고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울경 대부분이 폭염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18개 시군 가운데 14개 시군이 폭염중대경보가 발령될 정도로 뜨겁다. 폭염중대경보는 하필 올해부터 기상청이 도입한 폭염특보의 최상위 경고 단계이다. 기상청은 기후변화에 따른 극한 폭염에 대응하여 국민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지난 6월부터 이 제도를 적용했다. 기존 폭염경보가 내려진 상태에서 일 체감온도가 38도 이상이거나, 일 최고기온이 39도 이상이 되는 조건 중 하나라도 하루 이상 예상될 때 폭염중대경보가 내려진다.
폭염경보는 일 체감온도가 35도 이상이 이틀 이상 지속할 때 발령하는데 그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다. 폭염중대경보에 밀양도 예외는 아니어서 연일 어르신들의 외출 자제를 당부하는 동장의 안내 방송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 시골집 오래된 에어컨이 고장 났다. 찬 바람이 나왔다 안 나왔다 하는 상태라고 했다. 노모는 혹 실외기가 폭염에 뜨거워서 그런지 모르겠다며 마대로 그늘까지 만들어 주었으나 상태는 영 시원찮았다. 이대로 여름을 나겠다고 교체를 마다했지만, 신형 에어컨을 잽싸게 온라인 구매했다. 이틀 만에 설치된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는데 설치가 하루 미뤄졌다. 처음엔 이대로 여름을 지내겠다고 고집했지만, 배송이 하루 늦어지자 불같이 화를 내는 모습이 완전 이해됐다.
폭염의 지속에는 가뭄이 한몫하고 있다. 대지의 열기는 비로 식혀야 하는데 비가 도무지 오지 않는 것이다. 가물어도 너무 가물다. 통계도 가뭄을 이야기 하고 있다. 올해 경남의 누적 강수량은 최근 6개월 동안 556mm였다. 최근 5년간 같은 기간 평년 강수량은 853.8mm여서 평년의 65.1% 수준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옛사람의 방식이라도 따라야 했던 모양이다. 지자체 곳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시작은 창녕군에서 했다. 지난달 28일 창녕사직단에서 성낙인 창녕군수가 초헌관, 창녕군의회 박재홍 의장이 아헌관으로 하늘에 비를 구하는 기우제를 지냈다. 폭염 대명사가 된 양산시도 이에 질세라 지난달 30일 가야진사에서 나동연 양산시장이 기우제를 지냈다. 기우제 이후 양산은 단 10분간이지만, 비가 왔다고 한다. 조금만 더 주시지. 지난 3일 차석호 함안군수도 함안 충의공원 당산유적에서 기우제를 올렸다. 그래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라도 지내자 ‘인디언식 기우제’는 비가 내릴 때까지 지낸다고 하니.
다행인 것은 경남의 상수도 상황은 아직은 건재하다. 낙동강이라는 천혜의 자원이 있고, 도서 지방도 수차례의 가뭄에 대비가 잘 돼 있기 때문이다. 산간 지방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물차가 출동하고, 연일 폭염과 가뭄 대책 회의가 진행되지만, 하늘은 좀체 비를 내려 주지 않는다. 오존경보, 녹조경보도 일상화 됐다. 전 세계적인 기후위기 현상이다. 지난 지방선거 기간 경남기후위기비상행동은 다양한 기후공약을 제안했지만, 지차제장 후보의 기후공약 제시 비율은 30%에 불과했다. 낙제점이다. 탄소다배출 지역인 경남의 획기적인 기후 대응 정책은 토건성 개발 공약에 밀렸다. 하늘은 이 사실을 다 안다. 폭염에 따른 이 고통은 그래서 우리 탓이다.
2026-08-05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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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우리가 끓는 물 속의 개구리?
“이 아이들이 크면, 뭘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AI 때문에 자녀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가 늘고 있다. 10년 혹은 20년 뒤의 미래가 상상이 안 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자격증이 있는 직업을 구하면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도 있다. 미래 세상에선 의사나 법조인도 AI로 대체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세상에선 어떤 직업을 가져야 잘 살 수 있을까. AI의 파급력을 예측할 수 없기에, 아무도 명쾌한 답을 하지 못할 것이다.
2016년 3월,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이 벌어졌다. 인류는 알파고의 위력에 충격을 받았지만, 당장의 큰 변화는 없었다. 대중들도 AI가 대단한 기술이라는 걸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일상은 그대로였다. 그러다 챗GPT가 나오면서 AI와 대화하는 사람들이 늘고, AI를 응용한 각종 서비스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0년 뒤 2026년 지금은 세상의 중심에 AI가 있다. 여름 휴가 스케줄을 짤 때도 AI와 의논하는 게 일상이다. AI 때문에 전력 부족 우려, 메모리 쇼티지 등이 발생하고 주식시장과 관련 산업이 요동친다. 미국과 이란 전쟁에서 확인되듯 AI는 타깃을 추적하고, 침투 계획을 세우는 등 전쟁의 일부가 됐다. AI와 무관한 산업을 찾아보기 힘든 지경이다.
돌아보면 특정 기간 AI가 가져온 변화의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지난 10년간 꾸준히 AI는 일상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지만, 우리는 변화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AI 시대가 된 것이다.
지난 2일 경남 양산 낮 최고기온이 2일 42.5도까지 치솟았다. 기상 관측 122년 역사상 가장 높은 기온이라고 한다. 숨을 쉬기 힘든 더위다. 영남 지방은 장마도 사라져, 무더위가 더 치명적인 것 같다. 가뭄에 무더위에 농작물 피해도 심각하다.
올해만 이런 것이 아니다. 지난해도, 그전 해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무더위는 심했다. “올여름이 남은 여름 중 가장 시원한 여름”이라는 말도 생겼다. 장마다운 장마가 사라진 것도 오래전 일이다. 아열대성 스콜이 일상이 됐다. 극단적인 추위가 오기도 한다. 겨울엔 북극이 따뜻해지며 기류 변화가 생긴다. 이때 북쪽의 찬 공기가 한반도까지 내려와 이상 한파가 발생하는 날들이 잦아지고 있다.
우리나라만 이런 것이 아니다. 유럽은 여름마다 거대한 찜통이 되는데, 매년 찜통의 온도가 조금씩 올라가는 추세이다. 미국, 캐나다, 호주 등에서는 심각한 산불이 더 자주 더 크게 일어나고 있다. 원인은 분명하다. 지구온난화로, 기후가 이상해졌다. 온난화의 영향이 계속 누적되다 보니, 이상한 기후가 더 자주 더 격렬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 30일 헝가리 유일의 팍스 원자력 발전소가 멈췄다. 가뭄과 폭염으로 다뉴브강의 수위가 떨어져, 원전을 식힐 냉각수 흡입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원전들도 해수면 기온 상승으로 냉각수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논란이 있다. 태양광도 너무 더우면 발전 효율이 떨어진다. 이상기후로 바람이 줄면, 풍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원전과 신재생에너지 등은 탄소 배출이 없다는 게 장점인데,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면 대안 에너지의 효율성도 떨어진다.
돌아보면 온난화는 산업화 때부터 매년 기후의 안전성에 ‘실금’을 추가하고 있다. 처음엔 금이 가는 줄 몰랐고, 금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는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여겼다. 이상기후도 때를 넘기면 다시 살 만한 계절이 돌아오니, 문제의 심각성을 금세 잊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장마는 사라졌고, 양산은 42.5도를 찍고, 낙동강은 녹조로 뒤덮이는 세상이 왔다. 계속 실금이 더해지면 그릇이 깨질 수 있다는 불안감도 든다.
AI가 그러했던 것처럼, 특정 시점만 놓고 보면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알 수 없다. 작은 변화가 누적돼 체감이 가능해질 때, 그제야 세상이 뒤집혔다는 걸 알게 되는 듯하다. 기후위기, 지구온난화도 비슷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인류는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기 시작할 때, 그제야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한다는 걸 실감할지 모른다. 늦지 않기를 바란다.
분명한 건 이 추세라면, 10년 뒤 혹은 20년 뒤 지구온난화는 AI보다 더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AI는 삶의 질과 관련됐지만, 지구온난화는 생존과 연계돼 있기 때문이다. 이상기후가 극단화되면, AI도 없다. 그래서 이런 질문도 종종 해본다. “이 아이들이 컸을 때, 지구와 인류는 안녕할까?”
2026-08-03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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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동남권 순환철도, 또 전철 밟나
“지방에서 대형 국책사업을 추진할 때마다 시민들이 서명운동에 나서고 정치권은 정부를 찾아다니며 사업 필요성을 읍소해야 하는 것이 과연 정상입니까?”
최근 경남 양산의 한 기업가에게서 들은 푸념이다. 그는 동남권 순환 광역철도(이하 동남권 광역철도)의 예비타당성조사(예타) 통과를 위해 직원들에게 서명지를 나눠주며 참여를 독려했다고 한다. 회사 경영에 전념해야 할 기업인마저 국가사업의 필요성을 증명하기 위해 서명운동에 나서는 현실은 씁쓸하기만 하다.
양산을 시작으로 울산과 김해, 창원까지 동남권 광역철도 예타 통과를 촉구하는 범시민 서명운동이 확산하고 있다. 지자체와 정치권, 경제계도 한목소리로 예타 통과를 촉구한다. 정치권은 정부 여러 부처를 찾아 사업 필요성을 설명하고, 시민들은 서명으로 힘을 보태고 있다.
지방의회도 가세했다. 최근 경남도의회는 동남권 광역철도 예타 통과와 적기 개통을 촉구하는 대정부 건의안을 지난해에 이어 다시 발의했다. 예타의 조속한 통과는 물론 기본계획 수립과 안정적인 재원 확보까지 정부에 요구했다. 지방의회마저 같은 사업을 두고 거듭 정부에 건의해야 하는 현실은 국가균형발전 추진 시스템의 한계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낯설지 않다. 불과 1년 전 부울경 광역철도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당시 부울경 지역 단체장과 국회의원들이 기획재정부와 국토교통부, 한국개발연구원을 잇달아 찾아 사업의 필요성을 호소했고, 경제계와 지역 언론도 힘을 보탰다.
부울경 광역철도는 사전타당성조사(사타)에서 사업성을 인정받았지만, 예타 과정에서 사업비가 크게 늘면서 경제성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과 발표도 1년 넘게 미뤄졌고, 노선 축소와 사업 무산설까지 나돌았다. 결국 경제성뿐 아니라 지역 균형발전이라는 정책적 가치(?)가 반영되면서 예타를 통과할 수 있었다.
부울경 광역철도에 이어 동남권 광역철도도 예타 문턱에 서 있다. 동남권 광역철도는 울산 KTX역과 양산 북정, 김해 진영을 연결하는 총연장 54.6km, 사업비 3조 원 규모의 대형 국책사업이다. 부산~양산 웅상~울산 광역철도와 부전~마산 복선전철, 양산도시철도를 잇는 마지막 순환축으로 ‘부울경 1시간 생활권’을 완성할 핵심 교통망이다.
특히 양산에는 의미가 크다. 오는 12월 양산도시철도가 개통하고, 앞으로 부울경 광역철도와 동남권 광역철도까지 연결되면 부산과 울산, 김해를 연결하는 동남권 광역 교통의 중심축으로 도약하게 된다. 산업과 물류, 관광은 물론 정주 여건까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이미 부울경은 하나의 생활권으로 재편되고 있다. 시민들은 도시 경계를 넘어 출퇴근하고 기업들은 행정구역이 아닌 교통 접근성을 기준으로 투자와 입지를 결정한다. 반면 철도망은 이런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광역철도는 주민 편의를 넘어 지역 경쟁력을 좌우하는 필수 기반 시설이다.
그러나 상황은 또다시 부울경 광역철도를 떠올리게 한다. 동남권 광역철도 역시 사타에서 부울경 광역철도보다 높은 경제성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공사비 상승 등으로 예타 통과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상반기로 예정됐던 결과 발표도 연말로 미뤄졌다. 결국 시민들은 서명에 나서고 지자체는 캠페인을 벌인다. 지방의회는 거듭 정부에 건의하고 정치권은 또다시 정부를 설득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부울경 광역철도가 겪었던 과정이 동남권 광역철도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예타 제도다. 경제성만으로 국가 기반 시설을 평가한다면 수도권은 더 성장하고 지방은 더 뒤처질 수밖에 없다. 정부가 내세운 ‘5극 3특’ 국가균형발전도 이를 뒷받침할 광역 교통망이 구축되지 않는다면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동남권 광역철도는 단순히 철도를 놓는 사업이 아니다. 부울경 800만 시도민을 하나의 생활권과 경제권으로 연결하고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축을 만드는 국가 기간 교통망이다.
예타는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과제는 부울경 광역철도 때처럼 시민들이 나서고 지방의회가 건의하고, 정치권이 정부를 설득해야만 국가사업이 추진되는 구조를 언제까지 반복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지역 발전은 정부의 ‘배려’가 아니라 국가의 ‘책임’이다. 정부는 답해야 한다. 동남권 광역철도 역시 부울경 광역철도의 전철을 밟게 할 것인가. 국가균형발전은 지역의 절박한 호소가 아니라 국가의 책임 있는 결정으로 완성된다.
2026-07-29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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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권력의 칼
대통령, 고위 공직자, 정치인 등 권력의 말과 정책은 칼이다. 그 칼은 국민을 지키는 방패가 될 수 있고 반대로 국민의 삶을 베어버리는 날카로운 무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권력의 칼은 무거워야 한다. 칼집에서 쉽게 나온 칼은 국민의 삶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사회 권력층의 칼은 가볍다. 그들은 칼을 쉽게 꺼낼 줄만 알지, 부작용이 생겼을 때 성숙하게 거두거나 책임지는 법은 모른다. 처음에는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처럼 호언장담하지만, 막상 실패의 그림자가 드리우면 변명을 늘어놓거나 발 빼기 일쑤다. 늘 그런 식이다.
최근 불거진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 사태가 대표적이다. 칼의 가벼움이 불러온 ‘참사’다. 레버리지 ETF는 하루 수익률, 하루 변동률의 2배를 추정하는 상품으로 매매 변동성 확대 등 각종 부작용이 예견된 바 있다.
그러나 정부는 충분한 검증 없이 속도전으로 고위험 상품을 허용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불과 한 달 반 만에 8조 원이 넘는 자금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수익률도 암담했다. 한 상품은 40% 이상 폭락하기도 했다. 이러한 막대한 손실을 떠안은 건 대다수 개인 투자자들이었다. 해외 언론마저 “정부의 대표적 정책 실패”라며 조명했다.
그러나 정작 속전속결 출시를 주도했던 고위 공직자는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없이 ‘어쩔 수 없다’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금융감독원장도 “그때 드러누워서라도 막았어야 했나 후회한다”라고 면피성 발언만 내놨다. 레버리지 ETF로 인해 국내 증시가 ‘투기판’으로 전락하고 피해액만 수조 원에 이른다. ‘롤러코스터’와 같은 국내 증시에 매일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투자자 처지에선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며 태도이다.
부동산 정책도 마찬가지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부동산 정책과 관련한 글을 연일 개인 SNS에 올렸다. 언론이나 비판론자들과 거침없이 설전을 벌였다. 무겁고 신중하게 다뤄져야 할 정책적 메시지를 가볍게 다뤄도 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시장을 이기는 정부도 없지만, 정부를 이기는 시장도 없다” “부동산 정상화는 코스피 5000피, 계곡 정비보다 쉽다” “망국적 부동산 투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겠다”며 거침없이 공언했다.
그 칼들은 오만이었을까? 가벼움이었을까? 아니 자신감이었을까?
시장이 즉각 반응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대통령의 공언대로 부동산 시장이 정상화되길 기대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서울 집값은 급등했고 신고가를 경신했다. 풍선 효과가 수도권을 중심으로 확산했다. 전월세 부담 등으로 실수요자 주거 불안으로 이어졌으며 무엇보다 이 대통령 자택 매각 과정에서의 ‘17억 근저당 설정’ 논란으로 정책 신뢰도 하락 문제도 제기됐다. 이 대통령이 가벼운 태도로 시장을 상대하다, 과거 문재인 정권의 실책을 되풀이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사법 개혁을 내건 보완수사권 폐지 사태는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는 권력의 칼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준다. 거대 여당은 검찰의 보완수사권을 폐지해 ‘검수완박’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경찰의 부실·은폐 수사 의혹이 드러난 ‘장윤기 사건’이 터졌다. 그 사건은 견제 없는 경찰의 수사가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줬다. 특히 보완수사권이라는 최소한의 안전 장치가 왜 필요한지 증명했다.
그럼에도 거대 여당은 ‘보완수사권 유지’라는 국민 여론을 외면하며 강성 지지층의 압력에 갇혀 보완수사권 전면 폐지를 강행하고 있다.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권력이 강성 당원들 눈치를 보느라 엉뚱한 곳을 겨누고 있는 셈이다. 제2, 3의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처럼 한국 권력층의 말과 정책이 가벼운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한국 정치와 행정 시스템을 가장 큰 문제로 꼽는다. 실패를 평가하고 책임지게 만드는 시스템이 권력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공직자들은 정책의 장점만 부각하고 성공만 귀가 아프도록 홍보한다. 그러나 실패의 원인을 복기하고 책임자를 가려내는 과정은 늘 어물쩍 넘어가기 일쑤다. 이런 정책 실패의 후폭풍과 막대한 비용은 오롯이 국민이 감당한다. 국민은 공직자의 가벼운 칼에 피 같은 세금이 낭비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공직자가 가져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책임 윤리’를 꼽았다. 자신이 내린 정책 결정이 가져올 부작용과 결과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지는 태도다. 그것이 최소한의 염치이다. 칼을 칼집에서 꺼낸 자, 그 칼이 가져온 결과에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국민이 맡긴 권력의 무거운 무게다.
김형 편집부 차장 moon@busan.com
2026-07-27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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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내 검색 자료로 AI 교육하는 빅테크
구글이 지난달 ‘검색 서비스 설정’ 관리 방식을 ‘업데이트’했다. 구글은 “검색 서비스 기록에 사용자의 설정에 따라 사용자의 상호작용에서 나온 미디어(이미지, 오디오 등)가 포함될 수 있다”면서 “서비스를 제공, 개발, 개선(예: 생성형 AI 모델 학습시키기)하고 인적 검토자의 도움을 받아 구글, 사용자, 일반 대중을 보호하는 용도로도 사용자의 기록을 사용한다”고 밝혔다. 무슨 말일까.
전문가들은 “일반 사용자의 검색 내용이 구글의 AI를 학습시키는 역할을 하는 셈”이라고 분석했다. 구글 렌즈로 이미지를 검색하거나 음성, 영상을 업로드해 구글 서비스를 사용하는 행동이 구글의 자사 AI 학습 자료로 사용된다는 설명이다. 특히 이런 설정은 사용자가 직접 변경하지 않으면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구조여서 논란이 되고 있다.
구글의 개인 검색 정보 활용에 대해선 빅테크 기업의 AI 경쟁이 심화된 영향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동안 온라인 자료나 출판 자료 등을 통해 AI를 학습시켰던 빅테크 기업은 AI 기술력의 차별화를 위해 자사 서비스 이용자가 생산하는 개인 데이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을 운영하는 메타도 개인 사용자의 데이터를 AI 학습에 사용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아마존의 음성 AI 서비스 알렉사의 경우 ‘음성 녹음 전송 안 함’ 옵션이 제외돼 개인정보 보호 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AP는 아마존 알렉사가 지난해 3월부터 사용자의 음성 녹음을 클라우드에 전송하지 않는 옵션을 삭제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워싱턴포스트는 “아마존의 이런 결정은 데이터의 무분별한 수집을 허용하는 잘못된 방향”이라고 비판했다.
국내에서는 네이버가 AI탭의 대화 내용을 AI 학습에 사용한다. 네이버는 ‘검색 고객센터’의 ‘AI탭 서비스 개인정보 처리 안내’를 통해 “회사는 이용자가 AI탭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입력하는 내용(질의, 문서 또는 이미지, 음성, 영상 파일 등)과 서비스에서 생성된 답변(검색 결과, 정보, 자료, 이미지, 음성, 영상 등)을 ‘대화 내용’으로 수집해 서비스 개발·제공 및 향상, 사용 경험과 관심사에 맞는 답변 제공, 인공지능 기술 적용 등에 이용한다”고 밝혔다. 네이버는 “AI탭 ‘대화에서 메모리 저장’ 설정이 활성화된 경우, 메모리에는 이용자가 대화를 통해 직접 입력한 가족구성, 기념일, 관심사, 선호도 등이 포함된다”고 밝혔다.
반면 카카오톡은 대화내용을 AI 학습에 사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카카오톡은 ‘카톡사용 설명서’ Q&A에서 ‘내(사용자) 대화를 저장해서 보고, 학습하는 데 활용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개인 디바이스에 있는 대화 내용만을 이용하며, 이용된 데이터는 기능 제공 목적으로만 활용되고, 저장이나 학습, 제3자에게 제공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일부 빅테크 기업이 사용자의 데이터를 AI 학습에 활용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일부 사용자들은 개인정보 보호에 특화된 ‘대체 서비스’로 옮겨가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미국 IT매체인 테크크런치는 개인정보 보호를 내세운 검색엔진 덕덕고(DuckDuckGo) 가입자가 구글의 검색서비스 설정 변경 이후 크게 늘었다고 보도했다. 덕덕고는 검색 기록을 보관하지 않고 광고도 차단해 이용자 개인정보 보호를 강조하는 서비스다. 덕덕고는 자체 AI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는데 다른 서비스와 달리 계정을 만들지 않아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고 사용자와의 대화 내용도 30일 내에 자동 삭제된다고 강조한다.
사용자 데이터의 AI 학습에 대해 정부는 규제 완화로 방향을 잡은 모습이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지난 3일 발표한 ‘제3차 개인정보 보호 기본계획(2027~2029년)에서 “AI 환경을 유연하게 반영하는 개인정보 규율체계로 전환”하겠다면서 “안전조치를 전제로 AI 학습에 불가피한 개인정보 원본 활용을 허용하는 AI 특례를 도입”하는 방침을 밝혔다.
현행 개인정보보호법은 개인정보처리자에 대해 “통계작성, 과학적 연구, 공익적 기록보존 등을 위해 정보 주체의 동의 없이 가명정보를 처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AI 학습이 ‘과학적 연구’에 해당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가운데 정부가 별도의 AI 특례 도입 의도를 밝히면서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모습이다.
AI 무한 경쟁 시대에 사용자 데이터 활용을 모두 막을 경우 부작용이 크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개인이 내 정보 활용에 대해 스스로 결정하게 하고, 산출된 가치를 정보주체에게 돌려주는 가치환원 체계 수립·확산”하겠다는 정부의 ‘개인정보 보호 기본계획’ 취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사용자의 데이터 통제권과 데이터 사용 보상 방안도 함께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026-07-22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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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토큰증권, 스테이블코인 그리고 북항 돔구장
“스테이블코인(Stablecoin)이나 토큰증권(ST)을 시민, 야구팬들에게 발행하면 어떨까요. 국민참여형성장펀드 활용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얼마 전 금융권의 고위 인사가 북항 돔구장과 관련해 이런 아이디어를 낸 적이 있다. 그는 “사계절 복합시설로 개발하려면 많은 예산이 필요한 만큼, 그 재원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부산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돼,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자산 거래·결제 등 다양한 실증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북항 돔구장 복합개발이라는 지역 부흥 청사진을 내건 현 시점에서 스테이블코인과 토큰증권을 활용한 시민 참여형 금융은 디지털금융 도시 부산의 강점을 활용하는 실현 가능한 재원 조달 모델이다.
토큰증권(ST)은 부동산, 건물, 미술품 등 실물자산의 소유권이나 수익권을 블록체인 기반의 디지털증권으로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는 금융상품이다. 투자자는 이를 소액 단위로 매입해 고가의 실물자산에도 부담 없이 투자하는 조각투자가 가능하다. 북항 돔구장 개발에 접목하면 사업 시행자는 돔구장과 함께 들어설 호텔, 쇼핑몰 등의 미래 임대·운영수익을 바탕으로 토큰증권을 발행해 투자금을 모을 수 있다. 투자자는 지분에 따라 수익을 받는다.
스테이블코인은 원화나 달러 등 법정화폐 가치에 연동돼 가격 변동을 최소화한 디지털 화폐다. 이 역시 북항 돔구장에 적용해 볼 수 있다. 관람객들은 경기 티켓과 공연 입장권, 식음료, 굿즈, 주차요금 등을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으로 결제할 수 있다. 나아가 주변 호텔과 상업시설, 관광지까지 동일한 결제체계를 구축하면 지역 내 소비와 자금 순환을 촉진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멤버십, 할인 혜택과 연계해 팬과 관광객의 재방문을 유도할 수도 있다.
북항 돔구장 개발이 가능하기 위해선 막대한 자금 조달과 건립 이후 안정적인 수익 구조, 운영 기반이 필요하다. 토큰증권은 전자, 스테이블코인은 후자에 활용 가치가 큰 디지털금융이다. 건설 단계에서는 토큰증권을 통해 시민과 야구팬, 기관투자자로부터 투자금을 유치하고, 완공 이후에는 스테이블코인을 결제 수단으로 활용해 돔구장과 북항 일대의 안정적인 소비 생태계와 운영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
때마침 국내 최초 조각투자 유통 전담 장외거래소가 부산에서 출범을 앞두고 있다. 한국거래소와 부산디지털자산거래소, BNK금융 등이 참여하는 플랫폼이 본인가를 받으면 북항 돔구장과 같은 대형 개발사업을 토큰증권으로 유동화하는 기반이 마련될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 역시 현재 은행권이 제도화에 맞춰 원화 발행을 준비 중인 상황에서 블록체인 특구 부산이 스테이블코인 실증사업으로 서비스 모델을 선도할 수 있다.
북항 돔구장은 그동안 막대한 사업비 조달이 걸림돌로 꼽히며 실현 가능성이 낮게 평가됐다. 하지만 전재수 부산시장 취임과 함께 다시 동력을 얻으며 사업 범위가 복합개발로 확대됐고, 사업비도 기존 1조 3000억 원에서 약 3조 원 규모로 커졌다.
불어난 예산에도 시민들은 단순한 야구장 이상의 의미와 부산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북항 돔구장에서 찾고 있다. 해양수산부 이전과 해양 관련 기관·기업의 집적은 부산 발전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지만, 떠나는 청년들의 발길을 붙잡기에는 한계가 있다. 반면 다른 지역은 대규모 반도체 공장과 첨단산업 클러스터를 앞세워 기대에 부풀어 있다. 부산에도 도시의 경쟁력을 끌어올릴 상징적인 프로젝트가 절실한 이유다.
부산의 달라진 관광 경쟁력은 북항 복합개발의 가능성을 한층 높이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이 꾸준히 증가하고 글로벌 관광도시로서 위상도 강화되면서 호텔과 공연, 문화·상업시설을 결합한 복합개발의 사업성 역시 이전보다 높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투자를 타진하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국내 유수의 호텔·리조트 기업과 대기업, 세계적인 공연 기획사 등이 관심이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대형 투자 물꼬가 트인다면 토큰증권과 스테이블코인이 부족한 사업비를 보완하고, 안정적인 운영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큰 보탬이 될 수 있다. 국민참여형성장펀드도 힘을 보탤 수 있다. 현 제도상 지역 개발사업에 직접 투자하는 구조는 아니지만, 부산시와 정치권이 나서 북항 돔구장을 국가 차원의 핵심 성장 프로젝트로 인정받아 투자 대상에 포함시킨다면 정부 재정과 민간 자본을 보완하는 새로운 재원 조달 방안으로 활용할 여지가 있다.
중요한 것은 컨트롤타워와 실행력이다. 부산시는 투자 의향을 보이는 기업들이 실제 투자자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디지털금융을 활용한 재원 조달과 운영 기반 구축 등 흩어진 아이디어를 하나의 전략으로 엮어내는 것도 부산시의 몫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이대성 경제부 차장 nmaker@busan.com
2026-07-20 [1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