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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절망과 희망 사이
“이제 한국의 모든 세대가 비상계엄을 경험한 시대가 됐다.”
최근 지인이 한 말이다.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온 국민을 혼란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역사 속에 박제된 유물로만 여겼던 비상계엄이 45년 만에 현실화했다. 이 기습계엄은 6시간 만에 해제됐지만, 민주주의를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위기감과 일상의 불안을 안겨주었다. 지난 14일 국회에서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됐고, 내란죄 혐의를 받는 윤 대통령의 진퇴는 헌법재판소의 손으로 넘어갔다.
2024년 12월은 절망과 부끄러움, 희망과 자긍심이 교차한 시간이었다. 45년 만의 비상계엄 선포는 절망과 부끄러움 그 자체였다. 비상계엄 후폭풍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던 지난 10일(현지 시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시상식이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한국인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는 한강의 모습은 많은 국민들에게 자긍심과 희망을 전했다. 한강은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비극을 다루고 국가 폭력의 참상을 고발한 작품들을 써왔다.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장편 소설들이다. 한강은 지난 6일 스톡홀름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소년이 온다〉를 쓰기 위해 1979년 말부터 진행됐던 계엄 상황에 관해 공부를 했었다. 2024년에 다시 계엄 상황이 전개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국과 스웨덴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참 아이러니했다.
스웨덴 한림원 종신회원으로 올해 노벨문학상 심사를 맡은 노벨위원회 엘렌 맛손 위원도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그는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금은 참 기묘한 상황이다. 우리가 한강의 책을 읽은 뒤,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를 보고 있지 않나. 얼마간 책의 내용이 현실이 된 셈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론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힘을 보여주는 모습에 희망을 느꼈다. 노벨문학상이 정치적인 상은 아니지만, 한강의 글은 정치적 경험과 역사를 다룬다. 희망하건대 (한강의) 이번 수상이 한국에 힘을 주는 일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2024년은 K컬처의 위상을 전 세계적으로 드높인 해였다. 현대음악 작곡가 진은숙은 지난 1월 ‘클래식 음악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을 아시아인 최초로 거머쥐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지난 10월 ‘클래식 음반의 오스카’로 불리는 세계적인 권위의 시상식인 ‘그라모폰 클래식 뮤직 어워즈’에서 첫 스튜디오 앨범 ‘쇼팽: 에튀드’로 피아노 부문과 특별상인 ‘젊은 예술가’ 부문 등 2관왕을 차지했다. 한국 피아니스트가 이 상을 받은 것 역시 처음이다. 블랙핑크 로제의 ‘아파트(APT.)’는 최근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 100’과 영국 오피셜 싱글 차트 ‘톱 100’에서 최상위권을 기록하며 K팝의 위용을 이어갔다.
여기에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K문학의 빛나는 쾌거로 K컬처의 세계적 확장을 가속한 사례였다. 이에 앞서 2020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4관왕(최우수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극영화상) 수상, 2021년 영화 ‘미나리’에 출연한 배우 윤여정의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 수상, 2022년 영화 ‘헤어질 결심’으로 박찬욱 감독의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 2021년 황동혁 감독의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세계 83개국(넷플릭스 서비스 기준) 시청률 1위 기록 등은 K영화와 K드라마의 빼어난 경쟁력을 증명했다.
이러한 K컬처의 자산은 비상계엄 사태와 내란·탄핵 정국에서 평화로운 ‘K집회’를 이끌어내는 동력이 됐다고 본다. 지난 14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을 앞두고 국회의사당 인근에 20만 명의 인파가 몰렸지만, 별다른 충돌이나 사고 없이 질서 있게 집회가 마무리됐다. 특히 시민들은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등 K팝을 부르고 응원봉을 흔들며 새로운 시위 문화를 보여줬다. 특히 MZ세대들은 ‘민주주의의 회복’을 외치며 적극적으로 참여해 집회 문화의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외신 반응도 뜨거웠다. 로이터통신은 “시민들이 시위에 들고나온 응원봉이 기존의 촛불을 대체하며 비폭력과 연대의 상징으로 떠올랐다”고 전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차세대형 민주주의의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비상계엄에 따른 탄핵 정국으로 국가적 혼란과 경제적 타격이 심각하다. 국가 안보를 챙겨야 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소비 위축과 저성장도 극복해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 2기 출범에 따른 대응책도 마련해야 한다. K컬처와 융합한 K집회가 한국 민주주의의 높은 회복 탄력성을 보여준 만큼, 이제는 정치권이 화답할 차례다.
2024-12-18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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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내일이 있는 그림책
스웨덴 동화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과 한국 소설가 한강. 노벨상 시상식을 위해 스웨덴에 간 한강 작가는 ‘말괄량이 삐삐’로 유명한 린드그렌이 생전에 거주한 아파트를 방문했다. 한 작가는 스웨덴 한림원과의 인터뷰에서 어렸을 때 린드그렌의 장편 동화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좋아했다고 밝힌 바 있다. 성장기에 깊은 인상을 남긴 책. 누군가의 시작에 함께할 특별한 책이 한자리에 모였다. 2024 부산국제아동도서전이 지난 11월 28일부터 12월 1일까지 열렸다. 어린이책 전문 전시회를 처음 접한 것은 10년 전이다. 후쿠오카아시아미술관에서 열린 도서전 ‘그림책 뮤지엄’에 갔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그림책을 즐기는 모습을 보며 한국에도 이런 행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부산에 국내 첫 대규모 아동도서전이 열린다는 소식이 반가웠던 이유다.
‘어린이 그림책을 소개하고 교류하는 플랫폼인 동시에 아동을 위한 책 축제를 만들자.’ 아시아 대표 아동 콘텐츠 플랫폼을 목표로 출범한 부산국제아동도서전은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6개국 193개 단체가 참여한 도서전은 인파로 북적였다. 각 출판사 부스에서 책을 고르고, 작가 사인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선 사람들. 마임이스트의 책 읽어주기 퍼포먼스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이들. 강연, 북토크, 체험 프로그램이 이어졌고 폐막이 가까운 시간까지 책의 바다를 항해 중인 아이들도 볼 수 있었다.
한국 그림책의 성장이 눈부시다. “볼로냐 아동도서전에서 한국 그림책의 기세를 느꼈다.”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유럽과 미국 독자를 사로잡고 있다.” “한국 그림책은 역동적이고 에너지가 넘친다.” 해외 출판 관계자들의 말이다. 기자가 그림책 수집을 시작한 10년 전과 비교해도 확연히 다르다. 다양한 주제와 새로운 표현으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K그림책이 쏟아진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 백희나 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이수지 작가 등 세계적 그림책상 수상 소식도 이어진다. 일본에서는 한국어 공부하는 사람들의 그림책 읽기 모임도 생겼다. 도쿄 신주쿠 한국어다독회, 아이치현 한국어그림책다독회에서는 소정의 회비를 낸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한국어로 된 그림책을 읽는다. 꾸준히 한국 그림책을 접한 이들에게서 ‘한국 그림책은 어른까지 독자로 의식하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한국 그림책에는 독창적 세계관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K문학 활동가인 한 일본인은 한국에는 그림책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꾸준히 새로운 작가가 육성되는 토양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현지 언론인도 최근 일본 출판사들이 한국 그림책에 주목하고 있다고 전했다.
부산국제아동도서전 마지막날 ‘그림책이 사회를 담아내는 방법’을 주제로 한 세미나가 열렸다. 권윤덕 작가와 김지은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가 연사로 참여했다. 권 작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꽃할머니〉를 시작으로 〈나무 도장〉 〈씩스틴〉 〈용맹호〉 등 전쟁과 폭력, 가해와 피해의 문제를 그림책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회나 정치에 관심이 많아 매일 1시간 이상 신문을 본다는 권 작가는 2022년부터 2년 동안 진행한 민주인권그림책프로젝트의 총감독을 맡았다.
새벽배송과 유아돌봄 사이 노동의 순환 과정을 소개하고, 일상 속 폭력을 고뇌하는 아이를 보여주고, 유기견 문제를 이야기하는 민주인권 시리즈를 보면 그림책이 어른에게 가르침을 준다는 생각이 든다. 김지은 평론가는 미래를 알려면 아동문학·그림책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 어린이는 지금으로부터 가장 멀리 떠날 사람이고, 현실의 문제를 가장 마지막까지 바꿀 사람이기에 어린이 당사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사회를 이야기한다고 무겁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낮게 핀 민들레를 통해 자신을 긍정하는 힘을 키우고, 일하는 엄마·아빠를 통해 가족을 이해하고, 친구와의 갈등을 통해 사회적으로 성장한다. 펑크 난 타이어에서 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찾고, 이별에 슬퍼하는 이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그림책도 있다. “그림책은 인간 공통의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어서 누구든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림책테라피스트 오카다 다쓰노부는 그래서 그림책은 문화와 역사가 서로 다른 나라에서도 통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지난여름 ‘그림책 문화의 현재와 미래’ 포럼에서 그림책 만드는 사람들이 느끼는 위기감에 대한 언급이 나왔다. 출판인쇄 산업에 대한 예산 삭감의 영향이다. 한국 그림책의 위상은 높아졌지만, 그림책을 만들고 파는 출판사는 어려움을 호소한다. 2025년은 책의 해 추진단이 정한 ‘그림책의 해’이다. 생산·유통·판매·독서까지 그림책 생태계 개선으로 K그림책이 큰 나무처럼 단단하게 자라기를 바란다. 바다 건너 누군가의 마음에 한국 그림책이 깊은 인상을 남기는 날을 기대한다. 우리는 모두 그림책 독자가 될 수 있다.
오금아 콘텐츠관리팀 선임기자 chris@busan.com
2024-12-16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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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경제 태클 거는 정치권 어떡하나
“가뜩이나 힘든데 정치권까지 경제계에 태클을 거네요.”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파동과 야당의 탄핵몰이로 온나라가 떠들썩한 상황에서 한 재계 인사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라고 했다. 기업들마다 실적 감소로 울상인데 정치권은 민생이나 경제는 아랑곳않고 계엄에 탄핵을 외쳐대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제 상황으로 인한 영향은 기업으로서 감내해야 할 몫이지만 국가 내부의 정치 갈등으로 인한 피해는 기업 입장에서는 억울한 측면이 없지 않다.
최근 빚어진 계엄과 탄핵의 여파는 경제계가 고스란히 맞으면서 곳곳에 피멍이 들고있다. ‘트럼프 2기 출범’과 수출 둔화로 위기감이 고조된 상태에서 모든 수치들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고, 대응 조치도 제대로 먹히지 않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들은 “한국 경제가 정치적 리스크까지 추가로 안게 됐다”며 내년 한국에 대한 투자 의견과 성장률 전망치를 줄줄이 하향 조정하고 있다. 이미 내년과 2026년 모두 1%대 저성장을 예측하고 있다.
금융 관련 정부 부처와 금융지주들은 연일 치솟는 환율과 추락하는 주가를 걱정하고 있다. 금융 관련 업종 종사자들은 올 하반기 접어들 때까지만 해도 수익성이 좋았지만 갑작스런 비상 상황에 송년회를 전면 취소한 채 연일 비상회의에 나서고 있다.
일부 기업들은 해외 주요 국가 정상들과 기업인들의 방문이 잇따라 취소되면서 주요 계약건이 미뤄지게 됐다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이다.
한국은 GDP 세계 10위의 강대국이지만 무역의존도가 75%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다. 외국과의 교역 없이는 생존하기 힘든데, 이 같은 엄중한 상황을 한국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박근혜 전 대통령 때도 탄핵 사례가 빚어졌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다르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최근 ‘짧은 계엄령 사태의 여파’ 보고서를 통해 “2004년과 2016년 탄핵 사태때의 정치적 혼란은 당시 경제성장률에 큰 영향을 미치진 않았지만 이번엔 영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당시와 달리 한국 경제의 버팀목인 ‘수출’ 환경이 악화된 때문이다. “앞선 (탄핵 정국에서) 한국 경제는 2000년 중반의 중국 경기 호황과 2016년 반도체 사이클의 강한 상승세에 따른 외부 순풍에 힘입어 성장했지만 내년엔 한국 수출에 영향을 미치는 중국의 경기 둔화와 미국 무역 정책의 불확실성으로 오히려 외부 역풍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한국은 후진적 정치 속에서도 경제가 신기하리만치 잘 버텨줬다. 조그마한 나라에서 반도체, 가전,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 등에서 글로벌 기술력을 과시하며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고, 그 덕분에 선진국 반열에 들었다. 하지만 최근 정치적 상황은 그동안의 성과들을 화산의 용암처럼 다 먹고들어갈 기세다. 여러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주요 야당 정치인들은 ‘자기 생존’을 위해 ‘탄핵판’을 키우기에 여념이 없고, 계엄 사태의 주인공인 대통령은 소동만 일으키고 뒤로 나 앉은 모양새다.
아시아권에서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국가는 태국과 일본이 대표적이다. 한때 ‘아시아의 디트로이트’라 불릴 만큼 탄탄한 제조 기반을 자랑했던 태국은 2006년 이후 20년 가까이 정치 혼란을 겪고 있다. 친탁신-반탁신의 분열과 갈등 속에 두차례 쿠데타와 세 번의 헌법 개정, 그리고 연이은 헌법재판소의 정당해산 판결로 정국은 혼돈 속이다. 그런 가운데 경제는 천천히 무너졌고, 인도와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이 약진하는 사이 태국만 병들어가고 있다.
이에 삼성전자와 현대차, 포스코 등 한국 기업들도 태국 대신 베트남을 투자처로 선택하고 있다. 베트남은 공산당 일당 체제이지만 정치적으로 안정된 때문이다.
이웃 일본도 1980년대를 전후로 한 고도성장 이후 더딘 경제발전으로 ‘잃어버린 30년’이 된 데는 자민당의 세습정치가 주된 요인이라는 얘기가 많다. 베네수엘라도 전 세계에서 가장 석유 매장량이 많은 국가 중에 하나이지만 정치적 혼란으로 수십년째 빈곤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도 태국이나 일본, 베네수엘라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정치적 갈등은 어느나라에 있다. 하지만 정치권의 자정 능력이 없는 나라들은 이처럼 경제도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어서다. 이 대목에서 우리나라가 살려면 대통령이든 야당 대표든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죄를 지은 정치인은 퇴출돼야 한다. 그래야 투자자들도 한국을 찾고 한국경제도 살 수 있다.
2024-12-11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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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제2의 '보수 괴멸' 초래할 진짜 이유는
충격과 공포가 휩쓴 ‘비상계엄의 밤’, 군과 경찰에 막힌 국회 앞에서 불 켜진 본회의장을 바라보면서 오직 한 가지 생각만 떠올랐다. ‘유혈사태만은 안 된다’. 혹여 총성이라도 울리면 어쩌나 싶어 극도로 마음을 졸였다. 놀란 가슴을 안고 그 곳에 모인 1000여 명의 시민들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혼돈은 빠르게 정리됐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무모했던 계엄 세력들의 허술함, 불의한 명령에 동원됐음을 자각한 ‘MZ 군인’들의 성숙함, 여기에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며 추운 겨울밤을 지새운 시민들의 간절함이 만든 결과였다.
‘6시간’ 만에 사태는 종결됐지만, 그 짧은 시간 안에 나라의 운명을 가를 고비가 수 차례 지나갔다. 만약 그날 용산 상공의 비행 허가가 빨리 떨어져 특전사 헬기가 40분 일찍 국회에 도착했다면, 경찰의 출입 봉쇄가 더 빨랐다면, 대치 과정에서 계엄군과 보좌진·당직자 간 유혈 충돌이 일어났다면…, 이 가정 중 하나라도 작동했다면 그 밤을 지새운 국민들은 그 이전과 전혀 다른 세상에서 아침을 맞이했을지 모른다.
분명히 해두자. 이건 ‘친위 쿠데타’다. 전시도, 사변도, 국가 비상사태도 아닌,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이 지속되던 평화롭던 밤에 대통령이 야당이, 반대 세력이 마음에 안 든다고 군을 동원했다. 대통령은 이번 계엄으로 과연 어떤 대한민국을 만들려 했을까. 국회에 진입한 계엄군들은 “의원들 모두 끌어내라”는 지시를 받았다. 국회의장과 여야 대표, 야당 중진들을 체포하려고 했다. 선거관리위원회 시설을 점령한 계엄군들은 부정선거 증거를 찾아다녔다. 정권에 비판적인 방송인과 시민활동가를 잡아들이려 했다. 부정선거를 기정사실화해 야당을 일거에 무력화하고, 비판 언론의 입을 틀어막아 정권의 입맛대로 권력을 휘두르려던 것 아닌가? 검열과 체포, 구금이 난무했던 군사정권 시대가 2024년 대한민국에 재연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그야말로 모골이 송연하다.
대통령이 국정에서 즉시 손을 떼야 한다는 건 자명하다. 그러나 가장 빠른 길인 탄핵소추안은 국민의힘의 표결 불참으로 폐기됐다. ‘탄핵은 이재명에게 정권을 헌납하는 자폭 행위’라는 말이 모든 명분과 논리를 앞섰다. 15가지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이 대표가 의혹을 주렁주렁 몸에 단 채 재판과 대선의 시차를 이용해 손쉽게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는 건 누구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민주당이 이 대표 ‘방탄’을 위해 오랫동안 지켜왔던 입법·사법 시스템을 얼마나 흔들었는지 수 년 간 진저리 나게 지켜봤다.
그러나 비상계엄이라는 초대형 ‘자살폭탄’이 터진 이 시점에서 여당 인사들이 “이재명만은 안 돼”부터 외치는 건 염치가 없는 일이다. 계엄 이후 여당 내 반응을 보면 민심의 극한 분노가 좀체 와 닿지 않는 것 같다. “대통령이 오죽하면 그랬을까”라는 의원이 있는가 하면 “민주당이 얼마나 무도한지 제대로 알리지 못해서 발생한 일”이라며 울먹인 최고위원도 있었다. 오죽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고, 아무리 미워도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는 것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 국민이 계엄 해제 표결만 초조하게 기다리는 그 밤, 국민의힘 당사에 머무른 50여명의 의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 긴박한 순간 ‘빨리 해제해야 한다’는 것 외에 어떤 고려가 필요했을까. 설마 윤 대통령의 망상이 이뤄진 세상에서 얻을 정치적 이익을 셈한 것일까. 그 정도로 바닥은 아니라고 보지만, 혹시라도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들었다면 ‘괴물’이 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봤으면 한다.
계엄 이후 여당 인사들은 한결같이 ‘탄핵 트라우마’를 주문처럼 되뇐다. ‘박근혜 탄핵’으로 보수가 괴멸됐다고 한다. 지금 비판 여론은 1년만 지나면 수그러들 것이라고 한다. 사실이 그렇더라도 이 시점에서 그런 얘기를 버젓이 할 수 있는 그 무신경이 무섭다. 이번 사태 이후 보수가 몰락하다면 그건 ‘이재명 때문’이 아니라 보수세력의 ‘공감력 제로’가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 탄핵 때문에 보수가 괴멸된 게 아니다. 국정농단 때문이었다. 이번 사태는 누구의 표현대로 국정농단보다 10배는 중한 일이다.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괴멸했다는 보수는 5년 만에 대선 승리로 부활했다. 민심은 가변적이고, 또 현명하다. 섣부른 정치공학으로 분노한 민심을 함부로 재단하려다 한 뼘 남은 보수의 존립 근거마저 상실할 수 있다. ‘탄핵=보수 괴멸’을 외치는 인사들의 진짜 걱정은 보수의 미래가 아니라 자신의 미래 아닌가.
지금 국민의힘이 집중해야 하는 건 하나다. 신속하게 윤 대통령이 대통령직에서 완전히 손을 떼도록 하는 일이다. 다른 건 그 이후 얘기다. 윤 대통령의 어처구니없는 계엄 폭탄으로 여당은 이미 국민 마음 속에서 심판 됐다. 그 폐허 위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각오 없이 그 어떤 수습책도 그저 어설픈 권력 연장 시도일 뿐이다. 그러면 보수의 ‘2차 괴멸’은 예고된 수순이다.
전창훈 서울정치부장 jch@busan.com
2024-12-09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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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아주 보통의 하루
2025년의 트렌드 키워드 중 하나로 ‘아보하(아주 보통의 하루)’가 꼽힌다. 2018년 트렌드 키워드였던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도 이젠 사치가 돼 버린 모양이다. 치열한 경쟁에 지친 현대인들은 작은 행복이 아닌, 그저 평안한 하루에 감사할 따름이다. 아주 행복하지도 않고, 너무 불행하지도 않은 무난한 일상에 가치를 두는 태도가 ‘아보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지금보다 행복해질 것 같지 않다는 젊은 세대의 좌절이 반영된 트렌드로 분석되기도 한다.
경제가 어렵고 사는 게 팍팍해도 큰 탈 없이 올 한 해를 잘 버텼다는 사실에 안도하던 12월의 어느 밤. 믿기 힘든 뉴스 속보가 전해졌다. 처음엔 기자들도 가짜 뉴스가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다. 3일 오후 10시 30분께 갑작스럽게 전해진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소식은 국민들의 평온한 일상을 뒤흔들어 놨다.
가족과 지인의 안부를 묻는 전화 통화와 SNS 메시지가 쏟아졌고, 불안한 마음에 귀가를 서두르는 시민들도 생겨났다. 혼란 속에 뉴스나 게시물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늘면서 포털 사이트와 온라인 커뮤니티는 한때 접속 오류를 빚기도 했다. 1979년 이후 45년 만의 계엄 선포에 대다수 시민들은 ‘1970년대로 돌아간 거냐’ ‘황당하다’ ‘무섭다’는 반응을 보였다. 천만 영화 ‘서울의 봄’을 떠올리는 사람도 많았다.
뉴스를 통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무장한 계엄군이 진입하는 모습을 지켜본 이들은 ‘이게 과연 2024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일이 맞나’ 하고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계엄군과 국회 관계자, 시민들의 대치를 지켜보며 자칫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마음을 졸였다. 직장인과 학부모들은 출근과 등교는 어떻게 되는 건가 밤잠을 설쳐야 했다.
계엄 선포 후 원화 가치와 비트코인이 급락하는 등 금융 시장도 요동쳤다. 야간 거래에서 원·달러 환율이 한때 1440원을 돌파했고, 코스피 200 야간선물옵션도 5% 이상 하락했다. 코인에 투자한 한 지인은 “그렇지 않아도 경제난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도대체 정부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거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4일 오전 1시께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가결되고, 행정이 정상화 수순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온라인 기사를 쏟아내던 기자들도 한숨을 돌렸다. 부산시는 비상소집을 해제했고, 부산시교육청도 교육부로부터 학사 일정 정상 운영 통보를 받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윤 대통령의 계엄 해제 발표는 이날 오전 4시 30분께야 이뤄졌다.
시민들은 비록 하룻밤이었지만 각자의 소중한 일상을 빼앗겼다. 계엄 선포 후 편의점에서는 통조림, 봉지면, 생수와 햇반 같은 생필품 매출이 급증했다고 한다. 전쟁이나 자연재해 때나 볼 법한 사재기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사상 초유의 계엄령 사태는 연말 분위기를 한순간에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뉴스를 보느라 거의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는 또 다른 지인은 “밤새 불안에 시달리다 출근길 새벽배송 기사님을 보고 서야 ‘아, 별일 없는 하루가 시작됐구나’ 하고 안심할 수 있었다”며 “계엄령에 놀란 가슴을 새벽배송으로 위안 받을 줄 몰랐다”고 말했다.
그 어느 해보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의 마지막 달, 여전히 ‘보통의 하루’를 되찾지 못한 사람들을 떠올린다. 135금성호 침몰 사고 후 시신조차 거두지 못한 10명의 실종자, 중대재해로 스러져 끝내 귀가하지 못한 수많은 노동자, 이들의 가족과 주변인의 한숨과 절망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국가배상소송을 진행 중인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최근 법무부가 항소심 판결에 불복해 상고하면서 올해도 결국 소송을 마무리하지 못하게 됐다고 한다. 재판 결과를 확인하지 못하고 지병 등의 이유로 숨진 형제복지원 피해자가 최근 1년 사이 6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의 평온한 일상을 지키는 것, 그것이 정부의 존재 이유이자 의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정부는 그 역할을 다 하고 있는 걸까. 난데없는 계엄령 선포에도 깨어있는 시민들이 있었기에 민주주의의 보루인 국회가 그나마 제 기능을 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극한에 달한 여야 대립에 지쳐 그동안 정치에 무관심 했던 일부 국민들도 밤새 SNS로 뉴스와 의견을 공유하며 혹시 있을지 모를 언론 통제 시도에 맞섰다. 비상계엄이 뭔지 공부해 가며 절차적 문제점을 꼬집고 나선 사람, 한밤중 국회로 달려가 계엄군을 막아선 시민들도 있었다. 권력에 대한 시민 견제와 감시, 정치 참여 없이는 민주주의도, 평범한 일상도 지킬 수 없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한 6시간의 계엄 사태. 아주 보통의 하루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었다.
2024-12-04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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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남편’ 아닌 ‘대통령’이어야 한다 [데스크칼럼]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 씨가 지난달 자전적 에세이를 냈다. 현철 씨는 문민정부 시절 ‘소통령’으로 불리며 국정개입·뇌물수수 등의 의혹을 받다 현직 대통령의 아들로서 헌정사상 처음으로 구속됐다. 그는 에세이에 이렇게 썼다.
"언제나 여론을 듣고 국민들의 마음을 듣고자 했던 아버지는 자식에게는 매정했다. 한보 사건에 책임이 없음에도 수사 중단을 지시하지 않았다. 검찰이 별건 수사를 통해 제물로 삼겠다고 해도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한보 사건(한보그룹의 부도를 계기로 드러난 권력형 금융 부정과 특혜 대출 비리)과의 무관함을 자신한 현철 씨는 1997년 5월 검찰 조사를 받으러 갈 때 “이틀 정도 조사받으면 될 것”이라고 YS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검찰은 한보 사건과 관련한 혐의를 찾지 못하자 대선자금 문제로 그를 구속했다. 현철 씨의 당시 심정이다.
"그래도 아버지가 끝까지 지켜 주실 거라고 생각했다. 엄밀히 말하면 대선 자금 문제는 나의 책임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검찰총장까지 교체하면서 엄중한 수사를 지시하고 결국 사법처리까지 이르렀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솔직히 아버지에게 배신감까지 들 정도였다. 아버지는 나를 면회하러 간다는 어머니까지 말리셨다."
현철 씨가 보석으로 풀려났을 때 YS가 했다는 말도 소개했다. “그래 고생했고 정말 할 말이 없다. 내가 잘 몰랐고 힘이 없어서 그랬다”.
YS의 후임인 김대중(DJ) 전 대통령도 자신의 두 아들이 비리에 연루돼 재임 중 구속되는 아픔을 겪었다. DJ는 자서전을 통해 당시를 회상했다. ‘봄날, 몸이 아팠다’라고 소제목을 달았다.
"둘째 아들 홍업과 막내 홍걸에 대한 비리 연루 의혹이 연일 언론에 보도되었다. 나는 아들의 결백을 믿었다. 내가 아는 홍걸이는 얼마나 착한 아이였는가."
홍걸 씨가 사업가로부터 청탁과 함께 거액의 주식을 받았다는 보고를 받은 DJ는 “죄가 있으면 벌을 받으라”면서 미국에 있던 홍걸 씨를 귀국시켰다. 그는 귀국 이틀 만인 2002년 5월 18일 구속됐다.
"나는 발밑이 꺼지는 듯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아내는 구토까지 했다. 아내마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봄꽃이 지고 푸른 잎들이 돋아났건만 청와대 뜰에는 정적만 고였다. 아내와 나는 서로 말을 하지 않고 몇 시간 동안 앉아 있는 경우도 있었다."
한 달 쯤 지난 6월 21일엔 둘째 홍업 씨가 구속됐다.
"아들 둘을 감옥에 보낸 아버지가 있었던가. 국민 볼 낯이 없었다."
DJ는 이날 오후 대국민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지난 몇 달 동안 저는 자식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책임을 통절하게 느껴 왔으며, 국민 여러분께 마음의 상처를 드린 데 대해 부끄럽고 죄송한 심정으로 살아왔습니다. 평생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렇게 참담한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모두가 저의 부족과 불찰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YS와 DJ는 아들이 구속된 이후 ‘식물 대통령’으로 불렸다. 임기가 몇 개월 남지 않은데다 가족의 비리로 민심이 완전히 돌아섰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자식을 감옥에 보낸 두 전직 대통령의 결단은 높게 평가받고 있다. YS와 DJ는 죽을 때까지 아들들이 감옥에 갈 만큼 큰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난 민심은 대통령의 아들을 벌줘야 한다고 아우성 쳤고, 두 사람은 국가적 위기와 국민 분열을 막기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참았다. 그런 정치적 선택으로 인해 그들의 가족을 겨냥한 더이상의 정치보복은 없었다.
당시 YS와 DJ는 아들들로부터 원망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 현철 씨는 “‘아버지’가 아닌 ‘정치인’으로 결단을 내렸다”고 우러러본다. 홍업·홍걸 씨도 자신들의 구속을 지켜만 본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다.
YS와 DJ를 ‘실패한 대통령’이나 ‘무정한 아버지’로 비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집권 후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대부분 김건희 여사로부터 비롯됐다. 윤 대통령은 김 여사가 특검이나 검찰의 수사 대상이 될 만한 혐의가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누구보다 민심을 잘 읽었던 YS와 DJ가 ‘죄의 유무’를 떠나 자식들에게 가혹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돌아봐야 한다.
윤 대통령에게도 아직 기회는 있다. 후세는 국가를 위해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린 대통령으로 평가할 수 있다. 김 여사도 훗날 ‘남편’을 원망하기보다는 ‘대통령’으로서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자부할 것이다.
2024-12-0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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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지구 자전축과 대한민국 성장축
지구가 둥글고 23.5도로 기울어진 채 하루에 한 바퀴씩 돈다는 것은 직관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개념이다. 하지만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인류는 현재와 같은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자전축이 기울어지지 않았다면 지구 어디서든 밤낮의 길이가 12시간으로 똑같았을 것이다. 계절 변화도 없어 적도 지역은 지금보다 훨씬 뜨겁고 북극과 남극은 혹독하게 추운 기후가 되었을 것이다. 중위도 역시 따뜻한 봄과 서늘한 가을은 없어지고 길고 극심한 여름과 겨울만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영화 ‘설국열차’나 ‘매드맥스’와 같은 아비규환 속 디스토피아가 펼쳐졌을 것이다. 지구가 적절하게 기울어져 있기에 지구상 인류가 저마다 특색 있는 환경 속에서 고루 잘 살 수 있는 최적의 기후조건을 갖추게 된 셈이다.
반면 지구에 비유하자면 현재의 대한민국은 성장축이 수직으로 꼿꼿이 선 채 요지부동한 모양새다. 서울을 정점으로 한 수도권에는 과하다 싶을 만큼 태양광이 내리쬐는 반면, 반대편의 비수도권은 싸늘한 냉기가 감돈다. 수도권 시민들은 내성 한계를 향해 치닫는 뜨거운 열기에 녹초가 돼 가고, 비수도권 지역민들은 추위에 몸서리치다 온기를 찾아 수도권으로 몰려간다. 국가 성장축을 적절히 조정하지 않고 자본과 경제 논리에 맡겨둔 탓에 망국적인 수도권 일극주의에 잠식된 대한민국의 현재 모습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상황이 이토록 나쁘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수도 서울과 수출기지 부산이라는 양대 거점이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경부축을 형성해 대한민국 성장 엔진을 맹렬하게 돌렸다. 미국과 일본으로의 수출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부산항을 중심으로 남동임해공업단지가 들어서고, 삼성 LG 등 대한민국 대기업의 모태가 발아되면서 부산은 산업화를 이끌었다. 명실공히 제2도시 부산은 국토균형발전을 떠받치는 굳건한 보루였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72년부터 부산은 성장억제도시로 묶였다. 급격한 도시화로 인한 사회문제 해소를 명분으로, 발전에서 소외된 호남 민심을 달래기 위한 조치였는데, 부산에서 법인을 설립하거나 공장을 지으려면 다른 지역보다 취·등록세를 5배나 더 내야만 했다. 전두환 정부 때인 1982년에는 아예 성장억제 및 관리도시로 못 박아 기업들의 역외 이전을 부채질했다.
이렇게 기업 환경을 옥죄는 와중에 1980년대 중반 이후 주력 산업인 신발과 섬유 산업이 쇠퇴하고 중공업이나 첨단산업으로의 산업구조 재편에도 실패하면서 부산 경제는 하락세를 걷기 시작했다. 삼화고무나 동명그룹, 국제그룹 같은 부산 대표 기업들도 정치의 희생양이 돼 공중분해 되면서 부산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반면 영호남 균형발전을 위해 정책적으로 투자가 이뤄졌던 호남축은 기대한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부산과 같은 입지 조건과 인적·물적 인프라를 갖추지 못한 까닭에 성장에 한계가 있었다.
경부축이 무너지고, 호남축이 뻗지 못하는 사이 대한민국은 수도권 일극체제가 급속히 고착화돼 갔다. 부산을 위시한 지역이 경제 침체와 인구 감소, 인재 유출로 소멸 위기로 치닫는 사이 수도권은 거대한 블랙홀이 돼 자본과 인재를 빨아들였다.
박형준 부산시장이 시청을 비워둔 채 27일 국회 앞에서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의 조속 처리를 촉구하는 철야 농성에 들어갔다. 특별법은 부산을 세계적인 물류, 금융, 첨단산업 중심지로 도약시켜 수도권에 대응하는 새로운 성장축이자, 남부권의 거점으로 조성하기 위한 특례를 담고 있다. 고령화와 일자리 감소로 소멸을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인 부산으로서는 옛 영화를 되찾기 위한 마지막 기회라 할 수 있다. 2029년 가덕신공항 개항을 통한 육해공 복합물류체계 구축 등 재도약을 위한 성장 잠재력도 충분히 갖췄다.
하지만 특별법은 민주당의 무관심과 무성의 속에 연내 처리가 물 건너가는 분위기다. 민주당은 다른 지역과의 형평성을 내세우고 있지만, 확고한 지역적 기반이 된 수도권 일극체제를 이대로 공고화하겠다는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온건한 합리주의자 이미지의 박 시장이 국회 농성이라는 극한 방식을 택한 이면에는 330만 부산 시민의 염원과 울분이 있다. 특별법 제정은 단순히 한 지역의 발전을 위한 특혜를 만드는 작업이 아니다. 수도권 일극화를 완화하고 대한민국 경제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자는 국가균형발전 전략이다. 50년 전 잘못 내려진 정책 과오를 바로잡고, 대한민국 균형축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놓는 출발점이다.
이대로 특별법이 정쟁의 늪에 빠져 유야무야된다면 비수도권 지역민들에게 있어 대한민국은 혹독한 빙하기의 연속일 뿐이다. 박태우 사회부 차장 wideneye@busan.com
2024-11-27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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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5000원 기부 어떠세요?
사람은 남들에게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좋아한다. 이 명제는 과연 사실일까.
나를 되돌아보면 명백한 사실처럼 보인다. 주변을 봐도 거의 틀린 말은 아닐 듯하다. 이성적으로 판단해도 남으로부터 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욕심이 없는 사람도 없다. 5000만 원이 있다면 어떻게 1억 원을 모을지 생각하지, 이걸 누구에게 줄지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주변을 살펴보면 아무런 대가 없이, 아무런 바람 없이 남들에게 주는 것을 즐기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이웃의 마음마저 환하게 만든다. 그리고 여유가 크게 없으면서 남들에게 주지 못해 안달을 피우는 더 이상한(?) 사람도 있다.
연말을 맞아 그 이상하고 더 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지난달 장애인 단체 행사에서 만난 한 봉사자가 있었다. 그는 평생 몸이 불편한 사람을 가족처럼 돌봐왔다. 그의 어머니도 그와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한다. 정말 신이 내린 특별한 재능이 없거나 평소 자신 삶의 지켜온 신념이 없다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부산 부산진구 서면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한 분은 지난 추석 때 식당 주변을 수년째 맴돌며 종이상자를 모으는 80대 할머니에게 작은 봉투를 전했다. 그런데 이 할머니가 한사코 거절했다고 한다. 사연인즉슨, 그 할머니는 이미 수년 전부터 다른 분으로부터 명절 촌지를 받고 있다고 했단다. 식당 사장님은 매년 촌지를 주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그와 한사코 거절하는 할머니 모습에서 ‘천사의 얼굴’을 봤다고 했다.
마음은 나누면 따듯한 난로가 된다. 나누는 마음에는 따스한 기운이 흐르고 온정의 꽃이 핀다. 그렇지 않은가? 돈은 쓰면 사라지지만 따뜻한 마음은 돌고 돌아 온 세상을 데우는 불씨가 된다.
그런 사람들은 날개 없는 천사다. 좋은 마음의 향기는 오래오래 간다. 배려 혹은 감사의 마음이 곳곳에 배어 있다.
사람들은 어려움을 겪을 때 위안받고 싶고 위로받고 싶어 한다. 극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지금까지 봉사단체와 기부단체를 취재해 오면서 느낀 것이 많다.
사람은 꼭 경제적 여유가 있다고 해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도 아니고, 여유가 없다고 해서 지갑을 닫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산 16개 구군에 얼굴없는 기부자의 선행이 줄을 이어가고 있다.
1억 원을 기부하며 가입하는 사랑의열매 ‘아너 소사이어티’라는 클럽이 있다. 그런데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세상을 먼저 떠난 부모님의 이름으로 기부하거나 자녀의 이름으로 기부하는 사람이 많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이상한(?) 선물이 아닐까.
올 11월 현재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 수가 부산에서 369명을 넘어섰다. 부산은 인구가 4배 많은 경기도를 제치고 서울에 이어 전국에서 2번째로 많은 회원을 보유한 ‘나눔명문도시’다.
아너 소사이어티는 사랑의 열매가 만든 고액 기부자 클럽으로 1억 원 이상 기부 또는 1년에 2000만 원씩 5년간 기부를 약정할 경우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다. 부산 아너소사이어티 회원 가운데도 이름을 밝히지 않은 기부자가 44명이나 된다.
왜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고 주려고 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많을까. 많은 논문은 ‘인간의 뇌를 분석한 결과 남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때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낀다’고 말한다.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행위가 바로 배려와 나눔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부산 시민에게 행복해질 수 있는, 한 가지 제안을 해보고 싶다.
330만 부산 시민 가운데 10만 명만 한 달에 5000원씩 자동이체로 기부하면 어떨까? 매월 5억 원이라는 돈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될 것이다. 지역 경제가 최악이지만, 그래도 매월 5000원 후원하겠다고 좋은 마음 내어보면 어떨까. 10만 명, 20만 명, 30만 명이 되는 날이 온다면 부산 대부분 시민이 받아서 행복하고 나눠서 행복한 날이 오지 않을까.
사회가 급속히 각박해지고 메말라지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따뜻한 정이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이 기부의 불씨를 살리고 키워서 ‘부산발 배려와 나눔’이 대한민국 전역의 한 겨울 추위를 날려버리길 기원한다.
강성할 독자여론부장 shgang@busan.com
2024-11-25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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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취재가 시작되자
“배 째”를 외치며 그냥 버티는 이들이 있다. 배 째와 비슷한 종류로 “어쩌라고” “네가 그래서 무엇을 할 수 있는데” 등이 있을 것 같다. 종종 이런 류의 사람을 만난 이들은 대항할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때로는 정말 법은 멀리 있다. 답답함이 극에 달하면 언론사에 제보를 하거나 커뮤니티에 글이라도 남긴다. 종종 이러한 사실을 알아챈 언론사에서 취재를 시작하면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다.
최근 서울로 1박 2일 워크숍을 떠난 강원도 정선군청 공무원 40명이 단체 예약을 해놓고 노쇼(예약 부도)를 했다는 이야기가 자영업자들의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됐다. 노쇼를 당한 업주는 커뮤니티에 ‘정선군청에서 40명 단체 예약을 해놓고 예약한 적이 없다고 발뺌한다’며 ‘녹음파일을 들려주니 그때서야 인정했다’고 글을 썼다. 이 업주는 피해보상을 받고자 정선군청에도 연락했으나 “보상은 힘들다”는 답변을 받았다. 하지만 ‘취재가 시작되자’ 정선군청은 행사를 맡긴 위탁 업체 측의 실수로 인해 노쇼 사태가 일어났고 업주에게 최대한 보상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부산을 대표하는 절경이자 시민 휴식 공간인 이기대에 아이에스동서(주)가 고층 아파트 신축을 추진했다. 경관이 훼손된다는 우려에도 해당 관청인 남구청은 “법적 절차를 따랐을 뿐”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하지만 부산일보의 ‘취재가 시작되자’ 지역 여론이 들끓었다. 결국 여론 악화와 부산 시민 반발, 시민 정서에 배치된다는 점에 부담을 느낀 아이에스동서는 아파트 건설 포기라는 전향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사례들이 쌓이며 커뮤니티에는 ‘취재가 시작되자를 당해야겠네’와 같은 밈도 유행하고 있다. ‘취재가 시작되자’라는 말은 어디서,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취재가 시작되자’를 풀이하면 논란이나 사건사고가 발생했을 때 해결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던 이들이 언론의 취재가 시작되거나 보도가 진행되어 사건이 공론화되자 황급히 상황을 수습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 때문에 배 째를 외치는 이들의 태세를 바꾸게 하는 마법의 단어로 인식되기도 한다. 커뮤니티에서는 게시글 1개보다 민원 1건이 낫고, 민원 1건보다 취재 1회가 문제 해결에 더 용이하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다.
‘취재가 시작되자’가 왜 마법의 단어가 됐냐를 두고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어떤 이슈가 터져 시끄러워지면 당사자만 손해를 보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남의 시선이 중요한 한국 사회의 특성상 취재를 당한다는 것 자체가 불미스러운 일이라는 분석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취재가 시작되자’는 언론의 순기능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우리나라의 언론 신뢰도는 낮은 편이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지난 6월 발표한 ‘2024 디지털뉴스보고서’ 조사 결과 ‘뉴스를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답한 한국인은 31%에 그쳤다. 한국이 처음 조사에 참여한 2016년(22%) 이후 성적에 비춰보면 지난해 28%보다도 3%포인트 높아 역대 두 번째로 높은 수치긴 하다. 다만 조사국 평균 신뢰도(40%)보다 9%포인트 낮았고 아시아·태평양 11개 국가·지역 중에서는 최하점이었다.
언론의 힘은 ‘신뢰’다. 신뢰도가 낮다는 것은 그만큼 언론의 힘이 약하다는 뜻이다. 언론에 대해 혐오와 불신이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밈은 언론사들에게 힘을 주고 있다. ‘취재가 시작되자’ 같은 코너를 신설한 언론사들도 있다. 개인적으로도 커뮤니티에서 ‘취재가 시작되자 당해야겠네’라는 밈을 보면 괜히 기분이 좋다. 여전히 취재의 힘을 믿어주시는 독자들이 많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플랫폼에서는 클릭 수만큼이나 PIS(Post Interaction Score) 지표가 중요하다. 이는 좋아요, 댓글, 공유 등을 지수로 합산한 수치로 쉽게 말해 사람들이 페이지 게시물에 얼마나 참여했는지 알 수 있는 숫자다. 언론사로서는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예전 같으면 부산일보로 전화가 온 숫자, 격려나 반론를 담은 편지의 숫자, 편집국을 찾아와 감사 인사나 고성을 지른 숫자 정도가 될 듯하다. 그래서 ‘취재가 시작되자’의 마법이 발휘된 기사는 늘 PIS 지표가 상위권이다. 독자들이 원하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소위 먹히는 콘텐츠인 셈이다.
앞으로도 ‘취재가 시작되자’가 마법의 단어로 남기 위해서 언론사의 노력만큼이나 독자분들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다양한 플랫폼에서 접하는 부산일보의 콘텐츠에 댓글, 좋아요 등으로 콘텐츠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중요한 키가 되어 주시길 바란다. 아울러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취재를 위해 많은 제보도 부탁드린다. 부산일보 제보 전화 051-461-4131, 또는 유튜브나 인스타 부산일보 채널은 ‘취재를 시작하기’ 위해 항상 열려있다. 장병진 디지털총괄부장 joyful@busan.com
2024-11-2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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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초고령 사회와 디지털 금융의 딜레마
최근 지역 금융기관 관계자들과 만나 디지털 금융과 날로 발전하는 핀테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인터넷 뱅킹의 등장 이후 치열해진 경쟁 속에서 지역 금융기관들은 생존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소비자 편의 측면에서 디지털화를 더욱 고도화하겠다는 그들의 계획을 들었다. 이에 자동적으로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3%를 넘겨 초고령 사회로 달려가는 부산의 현실이 머리를 스쳤다. 디지털 기기 사용이 익숙하지 않은 노인들이 이 과정에서 소외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앞섰다. 그들 또한 어두운 표정으로 이 문제가 그들에게도 ‘딜레마’라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대화 중 떠오른 장면이 있었다. 몇 년 전 지역화폐인 동백전이 출시됐을 때였다. 2019년 12월 30일에 첫 선을 보인 동백전 카드를 온오프라인에서 신청 가능했다. 기자는 자연스럽게 앱을 내려받아 실물 카드를 신청했고, 며칠 후 카드를 받았다. 하지만 어머니가 동백전의 10% 캐시백 혜택에 관심을 보이며 대신 신청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일이 꼬였다. 평소 부모님께 잘 해드리지 못한 아들이었기에 어머니를 위해 동백전 카드를 기꺼이 신청해 드리기로 했다. 어머니의 스마트폰에 앱을 설치하고 여러 정보를 입력했지만, 결국 공인인증서의 장벽에 막혀 카드 신청은 실패로 끝났다. 답답함에 은행에 직접 가서 발급받으시라 말씀드렸던 그날의 상황이 여전히 마음에 걸린다.
부산의 인구 구조를 생각하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할 것이다. 길거리에서 은행 점포가 하나둘씩 사라지며 노인들의 금융 서비스 이용이 더욱 불편해지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2021년 9월 발표한 ‘국내은행 점포 운영현황’에 따르면 그해 6월 말 기준 국내은행 점포 수는 총 6326개로 전년 말 대비 79개 줄었다. 이는 모바일뱅킹 등 비대면 거래의 확산과 점포 효율화의 결과다. 주목할 점은 인구가 많은 수도권과 주요 대도시가 전체 점포 감소의 77.2%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산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부산의 금융기관 점포 수는 지난해 말 기준 1898개로 2022년보다 29개가 줄었다.
디지털화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 이미 많은 식당에서 키오스크로 주문을 받는 것이 일상화됐다. 하지만 금융 업무는 단순한 편의가 아닌, 노인의 생활 안정과 직결된 문제이기에 상황이 더 심각하다. 앱을 통한 금융 업무는 계좌 이체, 잔액 조회, 대출 관리 등 필수 기능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밀번호, 인증서, 보안 절차 등 복잡한 과정도 거쳐야 해 노인들에게 심리적 부담과 혼란을 주는 것은 자명하다. 금융 서비스 접근의 어려움은 키오스크로 음식을 주문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생활에 큰 지장을 초래하는 셈이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여러 방안이 필요하다. 우선 점포 폐쇄에 앞서 사전 영향 평가의 내실화가 필수적이다. 지난해 4월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은행연합회가 펴낸 ‘은행 점포 폐쇄 내실화 방안’을 보면 점포의 문을 닫기 전에 고령층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고, 이를 점포 폐쇄 결정 과정에 반영해 이들의 불편을 사전에 예방할 것을 주문했다. 이를 위해 은행은 사전 의견 수렴 절차를 강화하고 평가 항목에서 고객 불편 요소의 비중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기관은 또 점포 폐쇄 때 무인기기(ATM) 대신 계좌 개설 등 주요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고기능 자동화 기기(STM) 등의 대체수단 도입 필요성도 강조했다.
점포 폐쇄가 불가피하면 폐쇄 사유와 대체 수단, 도움 받을 연락처를 충분히 제공해 소비자의 알 권리를 보장하면서 사후 평가 절차를 통해 불편을 최소화하는 필요성도 제기됐다. 이 밖에도 고령층의 디지털 역량을 끌어올리기 위한 교육도 중요하다. 모바일·인터넷 뱅킹, 키오스크 사용법 교육을 정기적으로 제공해 고령층이 디지털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아울러 직관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UI)를 개발해 노인들의 사용 편의성을 높여야 한다.
수년 전 기자가 어머니의 동백전 카드 발급에 실패했던 경험은 단순히 자식의 도리를 다했는지 여부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는 고령층이 경제적 자립과 사회적 참여를 이어갈 수 있도록 포용적인 금융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디지털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지만, 그 과정에서 노인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모두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를 통해 진정한 사회적 포용과 안정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2024-11-18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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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단풍 아니고, 소나무재선충병입니다"
단풍의 계절이다. 완연한 가을을 넘어 초겨울에 접어드는 시점인 만큼, 전국의 산이 온통 붉게 물들고 있다.
등산객은 물론 고속도로와 국도를 운행하는 차량에서도 창밖으로 단풍 든 산을 바라볼 수 있다. 최근 경남 창원과 대구시를 연결하는 중부내륙고속도로와 창원~밀양을 연결하는 25호선 국도를 달리다보면 주변 야산이 온통 붉게 변했다. 완연한 가을인 만큼, 단풍이 곱게 물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착각이다. 단풍인가 하고 자세히 보면 소나무가 죄다 재선충병에 걸려 죽어 있다. 상록수인 소나무 군락지에서 활엽수처럼 단풍이 들 수는 없는 일이다.
소나무는 우리나라 산림의 상징이자 민족의 정신이 담겨 2022년 ‘국민 선호나무’ 조사 결과 37.9%가 좋아하는 1위 수종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유독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자 재선충병으로 인한 소나무 고사 소식이 끊이지 않고 있다. 2050년에는 남한 지역 소나무 55%가 고사한다는 연구결과도 제시됐다.
재선충이 창궐하는 원인으로는 기후변화가 꼽힌다. 재선충은 식물에 기생하는 선충의 일종이다. 재선충병은 1mm 안팎의 재선충이 북방수염하늘소·솔수염하늘소 등을 매개로 소나무류에 침투, 양분 이동을 막아 나무를 고사시킨다. 재선충병에 감염된 소나무가 지난달 기준으로 경남에만 79만 2000그루로 집계됐다. 산림청은 올해 재선충병 피해가 심한 경남 밀양시와 경북 경주·포항·안동·고령·성주, 대구 달성 등 전국 7곳(4만 4878.6ha)을 특별방제구역으로 지정했다. 특별방제구역은 소나무재선충병 피해가 급증해 전량 방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역이다.
재선충병의 빠른 감염 확산과 달리 방제를 위한 지방자치단체의 전문 인력과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다. 밀양은 경남에서 유일하게 특별방제구역으로 지정됐지만 예찰과 방제를 위한 전담인력은 담당자 1명뿐이다. 보다 못한 경남도는 최근 재선충병 전담 TF팀(3명) 신설을 밀양시에 요청했다.
방제 예산 상황은 더 심각하다. 밀양시는 2022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3년간 353억 1800만 원을 투입해 34만 327그루에 대한 방제 작업을 벌였다. 한 그루 방제에 설계·시공·감리 비용까지 포함해 15만 원(국비 70%, 도비 9%, 시비 21%)이 투입되지만, 올해 확보된 방제 예산은 20% 수준인 92억 원에 불과하다. 올해 상반기까지 10만 7000그루를 벌목하고 훈증·파쇄했지만, 나머지 40만 그루는 방치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인근 양산시도 예산 부족으로 지난달 말까지 피해 고사목 5만 2000그루 중 52%인 2만 7000그루만 제거할 방침이다. 백신도 없는 상태여서 감염된 소나무는 100% 고사한다. 특히 재선충 번식력은 암수 한 쌍이 20일 후 20만 마리로 불어난다. 감염 속도가 고속도로라면 방제는 비포장도로인 셈이다. 피해목을 빨리 제거해 확산의 연결고리를 끊어내야 하지만 예산과 인력 부족으로 잠재적 피해 규모를 키우고 있는 형국이다.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해 애만 태우고 있는 지방자치단체들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경남도는 최근 재선충병을 국가 재난 차원에서 대응해 줄 것을 정부에 건의했다. 현행 특별방제구역만이라도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울산시도 국가 재난 차원으로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관련 법령 개정과 재난안전특별교부세 지원 등을 건의했다.
특별재난지역은 사고나 자연재해 등으로 피해를 입은 지역의 긴급한 복구 지원을 위해 대통령이 선포하는 곳이다. 특별재난지역은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에 따라 자연·사회 재난을 당한 지역에서 지방자치단체 능력만으로 수습하기 곤란해 국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지정할 수 있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지역, 2000년 동해안의 고성·삼척·강릉·동해·울진 등에 발생한 사상 최대 산불피해지역 등이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바 있다.
하지만 정부는 산림병해충인 재선충병을 전염병 등 국가가 관리하는 재난으로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지정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소나무 재선충을 이대로 방치할 경우, 사람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다. 수분이 빠진 소나무는 지탱하는 힘을 잃어 외부 충격에 약하다. 따라서 길가나 민가, 문화재 인근의 소나무가 쓰러지면 언제든 사람이나 문화재가 다칠 위험성이 있다. 특히 재선충에 감염된 나무는 잔뜩 마른 탓에 휘발성이 강해 산불을 확산시킬 수도 있다. 장마철 산사태 위험도 키운다. 이젠 재선충병은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 차원의 방제 대책 마련과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아열대 산림 수종 전환 사업이 시급하다.
2024-11-1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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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한반도, 뱃사람 없이는 성장도 없다
사실 우리나라는 섬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삼면이 바다이고 북쪽은 아예 막혀있다. 어쩌면 섬보다 더 고립된 땅일 수도 있다. 이념으로 남북이 갈라지기 전, 먼 과거로 가더라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때부터 이미 한반도 교역 중심은 해상이었고, 육로 비중은 작았다. 춥고 척박한 북쪽 땅을 건너는 것보다 우리에겐 바다를 오가는 게 훨씬 유리하고 익숙했다.
과거에는 한 국가의 경제력이 해상 무역 능력에 따라 좌우되기도 했다. 신라의 수도 경주에선 페르시아 유리잔이 나왔다. 인도의 왕족이 가야로 건너와 교류하기도 했다. 모두 바닷길을 통해 사람과 물건이 오간 결과로, 당시 해상무역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북쪽의 고구려도 땅을 건너는 것보다 평양과 원산에서 배를 띄워 중국과 교류했다.
만일 그때 한민족이 바다로 나아가지 못했다면, 우리는 대륙의 귀퉁이에서 고립돼 지내왔을 것이다. 고립된 문명은 발전이 느리고 국력이 허약해진다. 한민족이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남기고, 정체성을 유지하며 한반도를 지키는 데 뱃사람들이 크게 기여를 한 셈이다.
산업화 이후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원양어선, 원양상선, 해외취업선 등 바다로 나간 선원들의 선상노동은 외화소득에 크게 기여했고, 6·25 전쟁 뒤 산업경제를 일으키는 단초가 됐다. 대한민국이 무역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컨테이너를 실어 나르는 배들이 있어 가능했다. 예나 지금이나 한민족은 뱃사람들이 없이 성장하기 힘든 땅에 살고 있다.
그러나 뱃사람들의 공헌이 제대로 인정받는 시대는 없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에 나서는 건 목숨을 담보로 하고, 선원들의 용맹함은 미덕으로 인정받아야 했다. 불행히도 예부터 위험한 일은 천한 이들의 몫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뱃사람들의 고된 노동과 열악한 환경 등이 묘사돼 있다. 조선 시대의 궁중 일기인 승정원일기에도 선원들의 고충과 함께 부족한 보상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귀한 사람은 험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오랜 관념 탓에, 선원들은 금전적으로도 제대로 보상받지 못했고, 사회적으로도 저평가됐다.
지금도 크게 다를 바 없다. 물론 신분과 직업을 연결 짓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은 옅어졌다. 배를 타면 육상에서 같은 일을 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받는다. 그럼에도 고되고 위험한 생활에 대한 보상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다면 경제적 부족분을 채울 수 있겠지만, 우리 사회에 선원을 존경하는 풍토는 아직 없다.
선원에 대한 대우가 열악하다는 건 심각한 ‘선원 부족’ 현상이 입증한다. 바다로 나가겠다는 젊은 사람들은 점점 줄고 있다. 2021년 기준 육상 근로자 최저임금은 월 191만 4000원, 선원 최저임금은 월 236만 3000원이었다. 선원의 최저 월급이 23% 정도 더 많다. 배 위에서 겪어야 할 낮은 복리후생, 불완전한 가족 관계, 고립된 생활 등을 감내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규모다.
이미 전체 선원의 절반 가까이 외국인으로 채워진 배경이다. 2030년 국적 선박 3분의 1에 한국인 해기사 배치가 불가능해지고, 2050년이 되면 한국인 해기사가 4000명 이상 부족할 것으로 전망된다. 자칫 대다수 대한민국 배들을 외국인 손에 맡겨야 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해운수산 업계는 군 면제 확대 등 젊은이를 바다로 유인할 파격적인 대책을 정부에 요구한다. 선원 부족이 업계의 문제를 넘어 국가의 위기라는 측면에서 파격적인 대책이 시급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디지털과 해운이 결합하고 있는 시대적 추세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업계 자체의 문제도 크다. 기존 선원 조직들은 기득권화되고 있다. 선사들은 세련된 작업 환경을 만들기보다 투박한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업계가 스스로 변화며 진취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미래를 걸고 승선하는 젊은이들이 하나둘 늘어날 것이다.
육상의 평범한 시민도 바다에 나간 이들에게 종종 고마움 을 표하면 좋겠다. 뱃사람들이 경제적 목적을 위해 배에 탔다고 하더라도, 거친 바다를 가르는 일에 누군가 나서주었기에 대한민국 경제가 움직이고 있다는 건 인정해야 한다.
지난 8일 부산 선적 대형 선망어선 135 금성호가 침몰해, 14명의 선원이 숨졌거나 실종 상태에 있다. 삼면이 바다인 대한민국에서 가장 치열하고 급박한 최전선 산업 현장에 투입된 이들이다. 최대한 사고 수습에 집중하고, 모두가 희생자들에 대한 충분한 존경심과 애도를 보여주었으면 한다. 선원들을 합당하게 대우하지 않고 해양 강국을 운운하는 건 비겁한 행위다.
김백상 해양수산부장 k103@busan.com
2024-11-11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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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막말과 민주주의
일본 영화 ‘웰컴 미스터 맥도널드’는 말의 힘을 보여주는 웰메이드 코미디다. 평범한 주부가 쓴 각본이 라디오 드라마로 바뀌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막말 대소동이 일품이다.
원래 각본은 일본 어촌을 배경으로 애틋한 사랑을 그렸다. 그러나 여주인공을 맡은 퇴물 성우의 고집이 상황을 꼬이게 만든다. 주부 배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자신을 변호사로 소개하는 등 안하무인으로 연기한 것. 오로지 소리로만 연출하는 생방송 라디오 드라마이기에 가능한 ‘아무말 대잔치’다.
막말의 뒷수습은 상대 배우와 제작진의 몫이다. 줏대 없는 제작진이 여주인공의 기분을 맞춰주려고 부화뇌동하면서 삽시간에 드라마 배경은 일본 어촌에서 미국 시카고로 바뀐다. 그리고 드라마는 산으로 간다. 여주인공의 막말에 상대라고 가만히 있었을까. 화가 난 남자 주인공은 ‘나는 어부가 아니라 미국인 파일럿 도날드 맥도날드’라고 질러버린다. 어촌에서 싹튼 작은 사랑의 드라마는 급기야 우주공간을 배경으로 한 스펙터클 대서사시로 돌변한다.
이처럼 입을 떠난 순간 말은 하나의 현상이 된다. 코미디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는 대선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 여야를 넘나드는 막말 대소동이 벌어졌다. 발단은 지난달 27일 뉴욕 공화당 유세에서 불거진 한 코미디언의 발언. 찬조 연설자로 유세장에 나선 코미디언 토니 힌치클리프는 미국령 푸에르토리코를 ‘떠다니는 쓰레기 섬’이라고 비하했다. 미국 내 푸에르토리코 출신은 6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심전심 히스패닉 유권자까지 덩달아 발끈하면서 미 대선 막판 최대 사건으로 비화했다.
상승세가 꺾였던 민주당은 공화당 지지자의 막말 한 마디가 얼마나 반가웠을까. 카멀라 해리스 캠프는 이 발언 영상을 광고로 만들고, 경합주의 푸에르토리코 출신 유권자들에게 문자 메시지로 대량 발송했다.
그러나 막말이 가져다준 호재는 잠시였다. 다음날 조 바이든 대통령의 눈치 없는 한 마디가 막말에 막말을 보탰다. 취재진이 전날 쓰레기 발언에 대한 입장을 묻자 “내가 보기에 유일한 쓰레기는 트럼프의 지지자들”이라고 답하고야 말았다. 말 한마디가 전세계가 주목하는 미 대선 판도를 흔든 꼴이 됐다.
추억의 미국 프로레슬링은 40~50대 남성이라면 누구나 익숙하다. 그 무대에서 ‘진짜 부동산 재벌이 맞느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마이크 하나 들고 종횡무진하던 게 트럼프 전 대통령이다. 벼랑 끝에서 호재를 만난 그는 환경미화원 복장을 하고 쓰레기 수거차까지 모는 퍼포먼스를 하며 해리스 부통령을 몰아붙였다.
이런 포복절도할 만한 시추에이션이 강 건너 불구경이었으면 좋으련만. 비슷한 시기 한국의 국정감사 현장에서는 ‘X발 사람 죽이네, 죽여’가 나오고 ‘법관 주제에’가 터져나왔다. 불구경하다 돌아보니 우리 집은 전소 단계가 아닌가 말이다.
잘못 뱉은 말 한마디에 많은 이들이 명성과 기회를 잃고, 다들 그것을 당연히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의 무거움에 다들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극단의 매체인 SNS가 덩치를 키우면서 말은 그 가치가 달라졌다. 배설하듯 내지르는 저열한 ‘사이다 발언’에만 열광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독버섯 같은 정치 팬덤이 SNS를 장악한 탓이 크다. 내가 지지하는 진영이라면 뭐든 옳고, 반대하는 진영이라면 뭐든 혐오스럽다는 유아적인 행태는 정제된 언어를 거부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말의 환경이 열악해지니 이를 나무라기는커녕 악용하는 잡배까지 날뛰는 중이다. ‘공공장소에서 할 소리인가?’ 싶을 정도의 막말을 내뱉어도 사회적으로 아무런 제재가 가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정치 팬덤의 눈에 드는 순간 한순간에 말 주인은 ‘정치 셀럽’이 된다. 경륜과 인품에 대한 검증은 건너뛰고 악다구니 한 번이면 정치권 중심으로 가는 추잡한 지름길이 열리는 것이다. 충성심으로 포장된 막말을 내뱉는 시정잡배와 이를 SNS로 확대 재생산하는 악성 정치 팬덤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미국도 이번 대선 이후에는 ‘두 개의 미국’을 마주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 대선에서 의회 의사당 폭동이 일어날 정도로 정치 지형이 양극화된 미국이다. 그 저변에는 막말과 정치 팬덤이 있다. 민주주의를 한발 앞서 받아들인 미국에서마저 이럴진대 한국도 민주주의가 효용 한계에 도달했다는 푸념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
말은 사람을 죽이고 살린다. 말 속에 힘이 있는 까닭이다. 말이 빚어낸 현상과 그 결과는 오롯이 그 주인의 몫이다. 정제되지 않고 뱉어내는 공인의 막말에는 가혹할 정도의 사회적 철퇴가 내려져야 한다. 정치인의 막말에 관대했던 시절은 동서고금 어디에도 없었다. 권상국 정치부 차장 ksk@busan.com
2024-11-06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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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지역 예타 사업, 언제까지 정부만 봐야 하나
“동남권 순환 광역철도가 기획재정부 ‘예비 타당성 조사 대상 사업’(이하 예타)에 포함됐다 하니 환영할 일입니다. 예타 결과 발표가 늦어지고 있는 부울경 광역철도를 보면 비슷한 길을 갈까 봐 걱정이 앞섭니다. 필요한 지방 국책사업은 예타 면제와 국가 시행이 이뤄져야 합니다. 관련 법 제정이나 개정이 필요합니다.”
경남 양산시의 한 간부가 며칠 전 동남권 광역철도의 예타 포함 사실을 접한 뒤 본 기자에게 건넨 푸념이다.
〈부산일보〉와 지역 정치권 취재를 종합하면 부산~양산 웅상~울산을 잇는 부울경 광역철도는 지난해 5월 기재부 예타에 포함됐다. 결과 발표가 올해 6월 예정이었으나 9월로 늦춰졌다가 다시 12월로 연기되더니 결국 내년 상반기까지 밀렸다.
결과 발표가 늦어지면서 ‘노선을 단축한다’ ‘단선으로 건설한다’ ‘사업이 물 건너갔다’ 등의 소문도 나돈다. 이 사업은 예타 신청 때 트램에서 경전철로, 웅상시가지 지하 건설로 사업비가 1조 600억 원에서 3조 400억 원으로 급증하면서 경제성 논란을 예고했고, 결국 발표도 지연되고 있다.
KTX 울산역~양산 상·하북~김해 진영을 잇는 동남권 광역철도도 국토교통부의 ‘사전 예비타당성 조사’(이하 사타)에서 10개월 이상 결과 발표가 늦어져 예타 통과 역시 장담할 수 없다. 양산시가지 지하 건설 이야기가 나오면서 사업비(1조 9345억 원)가 사타 때보다 증액돼 경제성 문제가 불거질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경제성 확보를 위해 노선 변경, 역사 수 축소 등의 계획 변경과 이로 인한 결과 발표가 늦어지는 등 부울경 광역철도와 비슷한 길을 갈 가능성이 점쳐진다.
사업 시행 여부를 결정짓는 예타는 1999년 예산 낭비를 줄이는 차원에서 도입됐다. 예타는 인구나 경제력이 집중된 곳일수록 높게 나오는데 돈과 사람이 몰려 있는 수도권이 비수도권보다 유리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도입 20년이 지나면서 인구소멸 위기 등 시대 변화도 반영하지 못한다. 예타가 수도권 일극 주의를 심화시킨 결과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잇따른 이유다. 정부는 ‘예산 낭비, 선심성 사업’이라는 시민단체 등의 지적에도 일부 사업에 대해 예타를 면제해 주지만, 그 혜택을 받지 못하는 지방 사업이 훨씬 많다.
어렵게 예타를 통과하더라도 지방 현안 사업들은 시행률도 떨어진다. 결국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수도권 인프라만 계속 확충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실제 윤영석(양산갑) 의원이 국토부 등으로 받은 국정감사 자료에서 이런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윤 의원이 ‘1~4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2006~2030년)’과 ‘광역교통 시행계획’ ‘도시철도법상 도시철도망 구축·완공 노선(공사 중 포함)’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수도권은 계획 노선 67개 중 45%인 30개가 완공됐지만, 비수도권은 계획 노선 75개 중 완공된 것은 19개(25.3%)에 불과했다.
철도 건설에 투입된 사업비도 수도권은 106조 원을 계획해 45조 원이, 비수도권은 82조 원을 계획해 22조 원이 각각 투입됐다. 항공 정책 사업비도 인천국제공항은 지난 10년간 10조 원이 투자됐지만, 김해국제공항을 포함한 지방공항은 8400억 원에 그쳤다. 최근 5년간 광역교통 개선 대책 집행 현황도 수도권에 4조 8000억 원이 투입됐지만, 비수도권에는 380억 원이 들어갔다.
국회에서는 이런 문제 해결을 위해 개별 사업을 지정해 예타 면제 등을 규정한 특별법을 발의하고 있지만, 통과가 여의찮다. 윤영석·김태호(양산을) 의원이 최근 각각 동남권 광역철도와 부울경 광역철도의 예타 면제 등을 규정한 ‘특별법’을 발의했다. 나아가 윤 의원은 부울경을 하나의 특별시로 만들어 독자적인 재정·행정권을 행사하는 가칭 ‘부울경특별시’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방 개별 사업마다 예타 면제와 국가 시행을 규정하는 특별법을 매번 발의할 수는 없다. 행정이 공공 복리를 증진하기 위해 조성하는 ‘조장 행정’을 하듯이 ‘지방 국책사업 중 필요한 사업에 한해 예타 면제와 국가가 신속하게 시행’하는 관련 법 제정이나 개정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때다.
부울경 광역철도와 동남권 광역철도는 765만 명이 거주하는 부울경을 하나의 교통망으로 연결하면서 1시간 생활권을 현실화한다. 인적·물류 교류 활성화로 경제공동체 구축에 도움이 되고, 시도민 교통 불편 해소로 인구 유출을 방지하는 효과도 기대되는 등 ‘조장 행정’이 필요한 사업이다.
정부 역시 수도권이 갈수록 모든 것을 빨아들이면서 저출생 야기는 물론 국가 경쟁력마저 떨어뜨리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만큼 국가 미래를 위한 적극적인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할 것이다.
김태권 동부경남울산본부장 ktg660@busan.com
2024-11-04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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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아파트 아파트
1983년 단독주택에 살다가 부모님을 따라 동래구에 있는 높은 건물로 이사했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이름, ‘아파트’였다. 그때만 해도 부산에는 아파트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국민학교 반 친구들은 대부분 단독주택에 살았다. 공동주택이라면 기껏해야 다세대 연립주택 정도였다. 골목에는 아이들이 뛰놀고, 이웃에 누가 사는지 다 알았다. 산이 많은 부산이라 평평하고 너른 느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답답하지도 않았다. 사방을 둘러보면 나즈막한 집들 너머로 푸른 산, 하늘이 보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아파트는 단독주택을 점점 밀어냈다. 아니 정확히는 지워버렸다. 아파트는 그렇게 서민들에게 내 집 마련과 재산 증식의 꿈이자 애증의 보금자리가 됐다. 제조업 호황에 취해 산업 혁신 노력을 게을리하는 사이에 빈 땅, 주택이 밀집한 지역, 바다가 보이는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40년이 지난 2024년, 부산은 아파트만 가득한 도시가 되어 버렸다. 길을 걸어도, 차를 타고 보아도 높은 아파트들이 산과 하늘을 가린다.
2006년 국토교통부 주거실태조사에서는 주거지 중 아파트가 서울 36.8%, 부산 43.9%였다. 2014년에 서울 42.6%, 부산 51.5%로 부산의 경우 절반을 넘어섰다. 2022년에 서울 43.5%, 부산 57.3%로 서울에 비해 부산의 아파트 점유율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아파트는 우리 사회의 아킬레스건인 양극화 현상도 극명하게 드러낸다. 2022년 대한민국 광역시의 아파트에 사는 저소득층이 40.69%에 그친 반면 중소득층 69.96%, 고소득층은 83.87%에 달했다.
지난 18일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라며 중독성 강한 가사를 반복하는 노래 ‘아파트(APT.)’가 세상에 나왔다. 제2의 ‘강남스타일’이라며 세계적인 신드롬이 일고 있다. 블랙핑크 멤버 로제와 팝스타 브루노 마스가 협업한 이 한국적인 노래는 지난 29일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8위, 각국 음원 차트를 휩쓰는 등 K팝 여성 가수로서 각종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노래 ‘아파트’를 접한 외국인들은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도대체 아파트가 뭐냐”고 궁금해했다. 아파트는 영어 Apartment를 한국식으로 부른 일종의 콩글리시다. 미국에서 아파트는 대체로 건물 소유주에게 월세를 내는 임대아파트를 뜻한다. 개별 소유자가 가진 아파트형 혹은 빌라형 주거 공간은 콘도라 부른다. 우리나라처럼 전세와 월세, 자가가 뒤섞인 드높은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선 형태는 찾아보기 힘들다. 고층 닭장과 같은 구조물 속에 대다수 인구가 사는 나라 역시 몇 되질 않는다.
25층 높이 아파트인 집으로 미국인 친구들을 몇 번 초대한 적이 있다. 이들은 미국과 달리 생활편의 시설 등이 가까이 밀집한 ‘콤팩트 시티’ 부산을 놀라워했다. 마당도 없이 높이 쌓아 올린 아파트 속 아래위층 사이에서 살아가는 모습에 복잡미묘한 경이로움을 표현했다. 학교나 수용소처럼 관리사무소의 안내 방송이 집 안에 쩌렁쩌렁 울릴 때 더욱 그랬다. 바닷가 드높은 건물들이 오피스 빌딩이 아니라 대부분 아파트라는 사실에도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노래 ‘아파트’의 소재는 손을 쌓아 올리면서 특정 숫자에 걸린 이가 술을 마시거나 벌칙을 수행하며 분위기를 띄우는 즐거운 놀이다. 청년들이 대학 엠티 등 술자리에서 즐기는 게임이라는 점 역시 씁쓸한 현실을 반영한다. 아파트에서 태어나 아파트만 보고 자랐으니 당연히 놀이의 소재가 된 것이다.
요즘 K문화의 확산으로 한국을 찾는 외국인이 부쩍 늘고 있다.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에 따르면 올해 9월까지 외국인 입국자는 1260만 9633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57.5%나 증가했다. 지난 9월 부산의 등록 외국인도 5만 3353명으로 지난해에 비해 11.8%가 늘었다. 이들이 한국인의 애환이 서린 아파트의 역사를 속속들이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일지 궁금하다.
과거 부산시 등 지자체가 처음에 세웠던 숱한 도시계획, 지구단위계획에는 분명 이상적인 공간 배치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상업 지역, 사무 공간이 결국 아파트로 채워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시간을 20~30년 전으로 되돌려 부산 바닷가 아파트 중 3분의 1이라도 글로벌 기업의 한국 캠퍼스 등 일자리가 많은 오피스 건물로 채워 나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랬다면 청년들이 지금처럼 번듯한 일자리가 없어 정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마주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축소 도시’를 고민하는 부산에 지금이라도 미래를 내다보는 도시 비전을 만들고 실천해야 우리 아들딸들이 터를 잡고 살 수 있다. 저출생과 인구 감소, 초고령 도시의 원인을 다른 데서 찾아서는 안 된다.
2024-10-30 [1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