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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우리 아이 괜찮은가요
어린이날 광안리해수욕장 근처에서 한 무리의 아이들을 보았다. 중2 또는 중3 정도로 보이는 또래끼리 환하게 웃으며 걸어가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공부는 잠시 내려놓고 친구와 함께 보낸 하루가 어떠했을까. 어린이가 아니지만 어린이날을 즐기는 그들의 얼굴에서 답을 읽을 수 있었다.
성인이 된 조카를 만났다. 초등학교 시절 와글와글 떠드는 아이들을 운동장으로 쫓아낸 담임 선생님 덕분에 신나게 축구를 즐겼다는 그의 이야기는 지금은 적용되지 않는다. 많은 학교에서 점심시간 축구는 금지됐고, 잠깐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아이들은 스마트폰만 붙들고 있다.
최근 한 통계는 방과 후 아이들이 희망하는 활동과 실제 활동의 차이를 보여줬다. 친구와 놀고 싶지만 현실은 학원에 가고 과외를 받아야 한다. 성장 과정에 공부도 꼭 필요하지만, 마음이 향하는 것과 반대되는 상황을 ‘매일 견뎌내고 있다는 것’은 어른이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뉴스를 통해 한국 아이들에 대한 우울한 보고서가 전해졌다. 유니세프 이노첸티 연구소가 발간한 ‘불평등한 기회: 아동과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제목의 리포트 카드이다. OECD 회원국을 대상으로 아동 웰빙 수준을 측정했는데 대한민국은 신체건강 30위, 마음건강 34위, 역량 3위를 차지했다. 여기서 역량은 학업 성취와 사회적 역량으로 구성된다. 다시 말하면 학업적 성취는 우수하지만 몸과 마음은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마음건강의 경우 4개 국가가 핵심 지표 누락으로 순위 산정에서 제외돼 ‘34위’라는 수치는 바닥에 더 가까운 상황이다.
아동 웰빙 국가 순위표에서 대한민국은 종합순위 27위에 머물렀다. 1~3위를 차지한 네덜란드, 덴마크, 프랑스가 3대 영역 모두에서 ‘상위 3분의 1’에 포함된 것과 달리 우리는 영역별 격차가 컸다. 특히 각 영역을 측정하는 기준을 보면 마음이 더 답답해진다. 신체건강은 아동 사망률과 과체중 비율, 마음건강은 삶의 만족도와 청소년 자살률을 지표로 삼는다. 삶에 만족하는 15세 아동의 비율은 65%로 하위 6위를 차지했다. 15~19세 청소년 10만 명당 자살률은 10.9명으로, 자살률이 높은 국가 5위에 올라 위기에 처한 마음건강의 현실을 보여줬다.
우리 사회 청소년 자살 문제의 심각성은 여러 데이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2023년 국가손상종합통계를 보면 소아·청소년의 사망원인 중 자해·자살이 53.9%로 가장 많았다. 2024년에는 10~19세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는 8명으로 10년 전에 비해 77.8%나 증가했다. 유니세프 보고서의 청소년 자살률을 10세까지 확대하면 더 충격적인 수치가 나올 것이다.
13일 발표된 ‘한국 아동·청소년 인권 실태’를 보면 전국 초중고 학생 8764명 중 27%가 최근 1년 동안 ‘죽고 싶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그런 생각을 가끔 하는 아이가 23%, 자주 하는 아이가 4%이며 10명 중 1명은 실제 자해를 시도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이들이 죽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를 보면 학업 문제가 가장 크고 미래·진로에 대한 불안이 다음을 차지한다. 성적과 성공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가 아이들을 얼마나 압박하는지를 보여준다. 학교를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무기력증과 번아웃을 호소하는 아이도 많다. 입시의 부담이 큰 만큼 고등학생의 35%가 학업 중단을 생각했다.
이렇게 정신적 위기에 내몰려 있지만 막상 아이들은 고민을 털어놓을 대화 상대가 없다고 말한다. 위기 상황이 와도 도움받을 사람이 없다고 답하는 비율도 9%에 달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초중고 학생 자살 사망자 수는 2023년 214명, 2024년 221명, 2025년 242명으로 늘어나고 있다. 벼랑 끝에 선 듯한 아이들의 마음이 너무나 위태롭다. 아이들의 마음건강에 들어온 빨간불은 긴박하게 깜빡이는 비상 경고이다.
아동·청소년의 마음건강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2024년 국내 정신질환 진료비 중 우울증과 불안장애 진료비가 1조를 넘었다. 젊은 층의 중독이나 자살이 증가하는 등 정신건강 문제가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정부는 지난 3월 제3차 정신건강복지기본계획을 발표하고 생애주기별 정신건강 위험 요인에 대한 지원 등 사회적 안전망 강화를 약속했다. 학교 전문상담인력 확보, 긴급지원팀 확충 등 지원책과 함께 내년부터는 성인 중심으로 진행하던 자살 심리부검을 청소년에도 시행할 예정이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려면 사회가 건강해야 한다. 아이들의 마음건강 문제는 가정, 학교, 사회가 함께 대응해야 하는 문제이다. 어른은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이 있다. 자살 위기 개입을 주제로 연구하는 성진 스님이 〈법보신문〉에 기고한 글 속 한 문장을 인용한다. “세상에는 너의 이야기를 들어줄 어른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2026-05-13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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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6·3 이후가 더 걱정인 이 대통령
6·3 지방선거는 전국 동시 선거라는 점에서 대한민국 구성원이라면 누구에게나 영향을 미친다.
개별 후보들에겐 자신의 ‘당락’이 생존과 직결된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입장에서도 ‘15 대 1’이냐 ‘13대 3’이냐에 따라 엄청난 후폭풍이 있을 것이다.(여기서 3이 어느 지역인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경북을 상수로 놓고 서울·부산·대구 등을 변수로 보면 될 듯하다)
문제는 대한민국 국정 전체를 큰 그림으로 놓고 보는 이재명 대통령이다. 지방선거 결과에 따라 잠시 좋고 나쁠 순 있지만 근본적인 고민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당이 바라는 최선의 지방선거 결과가 나왔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공 들였던 영남, 그것도 TK(대구·경북)까지 차지한다면 일단 이 대통령의 취임 1년 간 국정 운영이 긍정적으로 평가받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직후 벌어질 더불어민주당의 8월 전당대회는 선거승리의 공과를 어떻게 나눠먹는가에 대한 치열한 권력투쟁의 장이 될 것이다. 과거 여당의 역사를 되돌아봤을 때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으로서도 통제가 힘든 각축장이 펼쳐진다.
‘명-청(이재명-정청래) 대전’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이 대통령이 취임한 지 반 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우스개소리로 넘어가려는 필자의 귀를 붙들어둔 것은 한 여당 의원과의 사담이었다. ‘친명’으로 분류되는 수도권 의원이었다.
그는 친문(친문재인) 출신 정청래계 모 의원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최소 3번은 우리를 죽이려 했다’고 분을 감추지 않았다. 2022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불거진 대장동 문제, 이 대통령의 대표 시절 국회에서의 체포동의안 가결, ‘비명횡사-친명횡재’ 공천 때의 앙금 등이 그것이었다.
최근에도 양측의 갈등은 표면화됐다. ‘조국혁신당 합당 밀약설’과 ‘공소 취소 거래설’은 명청 대전의 큰 흐름에서 발발한 국지전이었다.
정청래 대표는 8월 전대에서 다시 대표 자리를 노릴 것이다.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서울만 패하지 않는다면 웬만해선 정 대표의 공을 깎아내리기는 힘들 것이다.
하정우 전 청와대 AI미래기획수석의 부산 북갑 보궐선거 차출은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이 대통령은 AI 수석의 공백으로 국가 미래전략의 큰 틀을 짜는 데 차질이 불가피하다. 하 전 수석을 대체할 만한 후임 인선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하 전 수석이 당선되면 여당을 위해 인재를 내줬다는 이 대통령의 희생보다는, 정 대표가 하 수석을 ‘삼고초려’한 과정이 더 크게 부각될 것이라는 말들이 벌써부터 나온다.
정 대표가 전대에서 다시 대표가 되면 양측은 지금보다 강하게 부딪힐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이 대통령이 갖고 있던 국정의 구심력을 여당 대표의 강력한 원심력이 나눠 갖는 형국이 될 수밖에 없다. 전대의 영향력은 다음 선거인 2028년 총선으로 이어진다. 친명이든 친청이든 자신의 공천 문제를 생각하면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될 것이다.
민주당이 전광석화처럼 밀어붙이던 ‘조작기소 특검’을 이 대통령이 일단 멈춰 세웠다. 선거에 역풍이 만만치 않다고 본 것이다. 여당이 추진했지만 ‘공소 취소’가 가능하다는 조항 때문에 여론의 비판은 이 대통령이 뒤집어쓸 가능성이 높은 이슈였다.
그렇다면 지방선거가 끝나면 여당은 특검법안을 재추진할까. 특검법 처리는 중도층의 민심 이반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정 대표가 굳이 무리수를 두면서 총대를 멜지 두고봐야 한다는 관측이 나온다.
당내에서는 특검의 ‘공소 취소’ 권한 삭제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일부 의원들은 “국정 과제에 집중해 그 성과로 국민들의 평가를 받으면 된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면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날 수 있다”며 괜한 정치적 부담을 뒤집어쓸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하지만 친명 쪽에서는 ‘순진한 발상’이라고 깎아내린다. 여당이 정권을 재창출하더라도 수많은 전직 대통령들이 자신의 후계자로부터 냉정한 비판(심할 경우엔 사법처리)을 받은 전례가 있다. 야당으로 정권교체라도 되면 말 할 것도 없다.
정 대표는 조작 기소 특검이 과연 자신의 전대 득표에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계산기를 두드릴 것이다. 최고권력자인 이 대통령이 지방선거 이후에 있을 여당의 전대와 조작기소 특검을 어떻게 다룰지가 벌써부터 흥미로워진다.
박석호 정치부 선임기자 psh21@busan.com
2026-05-1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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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우리는 그들의 외침을 듣지 않았다
최근 방영 중인 한 드라마에 ‘감정 워치’라는 가상의 장치가 등장한다. 심박수 등 사용자의 신체 신호를 측정해 현재의 감정 상태를 기쁨·불안 등의 단어로(혹은 색깔로) 치환해 보여주는 기계다. 얼마 전 경남 진주에서 50대 화물 노동자가 2.5t 화물차를 맨몸으로 막아서다 치어 사망한 소식을 접했을 때 왜 하필 드라마 속 감정 워치 따위가 떠올랐던 걸까.
사고는 지난달 20일 진주 CU 물류센터 앞에서 열린 화물연대의 집회 과정에서 발생했다. 노동자들은 대체 수송을 위해 물류센터를 빠져나오는 화물차를 정면으로 막아섰다. 이들 중 일부는 움직이는 차량에 매달렸고, 떨어졌다. 육중한 바퀴가 한 노동자를 삼킨 후에야 비로소 차는 멈췄고, 한 노동자의 삶도 멈췄다.
일부 호사가들은 달리는 차량 앞을 가로막고 나선 그들의 무모함을 탓하기도 했다. 그 무모함 속에 어떤 심정이 숨어 있는지 궁금해졌다. 어떤 마음이었길래 달리는 거대한 쇳덩이 앞을 맨몸뚱이 하나로 막아섰던 걸까. 만약 감정 워치가 실재한다면, 고인의 손목에 채워져 있었다면, 당시 그의 감정은 어떤 단어로 정의되었을까. 그들의 요구 사항을 검색했다. 고유가에 따른 운송료 인상, 과도한 업무 강도 개선…. 어느 단체교섭에서든 나올 법한, 지극히 당연한 요구였다.
그들은 CU를 운영하는 BGF로지스 진주센터 내 협력 운송사 12곳과 계약해 일하는 ‘특고’(특수고용직)다. 사실상 고용돼 일하고 있지만 일반적인 고용의 형태가 아니다. 겉으론 사업자 간의 계약 형태를 띈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그들을 노동자로 인정하는 데 인색하다.
대신 사회는 그들을 ‘사장님’이라 부른다. 기름값과 차량 수리비를 제 주머니에서 꺼내니 겉으로는 번듯한 자영업자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는 교묘한 언어적 위장이다. 기름값도, 차량 수리비도 본인이 부담하지만 배차는 원청이 결정하고 운임도 원청이 정한다. 고용 계약서가 없으니 해고가 아니라 ‘계약 종료’라는 매정한 단어로 잘려 나간다.
기업 입장에서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퇴직금이 사라지고, 4대 보험이 사라지고, 단체교섭 의무가 사라진다. 노동자는 남되 사용자는 증발한다.
법조차 그들을 보호하는 데 무기력하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노동자와 자영업자 사이에 엄격한 칼금을 긋는다. 그들은 그 칼금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경제적으로는 종속되지만 형식상으로는 독립적이다. 법원은 개별 사건마다 실질적 종속성을 따지지만, 그 판단이 나오기까지의 소송 비용과 시간은 노동자 개인이 오롯이 감당해야 한다. 권리를 얻기 위해 싸워야 하는 약자에게 그 싸움의 비용을 온전히 지우는 것, 이것이야말로 현행 법 체계가 특고에게 부과하는 가장 가혹한 조건이다.
정부는 어떠한가. 사태 초기 고용노동부는 “특고는 노란봉투법 대상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노란봉투법 시행 한 달 만의 정부 입장이다. 특고와의 교섭을 회피해 온 원청의 무책임한 행태에 면죄부를 준 셈이다. 이후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장관이 나와 재빠르게 말을 바꿨다. 원청 기업 역시 뒤늦게 지난달 30일 화물연대와의 합의서에 서명했다.
노란봉투법을 추진했던 진영에선 법 시행 이후 특고와 원청 간 첫 단체교섭 타결이라며 저마다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는 엄밀히 말해 법 제도의 성과가 아니다. 한 노동자의 생명과 맞바꾼 ‘목숨값’일 뿐이다. 법과 제도를 보완하지 않는 한, 비슷한 구조를 가진 다른 사업장에서도 언제나 같은 비극이 반복될 수 있다.
때문에 요구는 계속돼야 한다. 특고의 법적 지위를 명문화해야 한다. 실질적 종속 관계가 인정된다면 긴 소송을 거치지 않더라도 우선 노동자로 추정하는 규정이 필요하다. 영국은 ‘워커’(worker)라는 중간 범주를 법제화했고, 스페인은 플랫폼 노동자에 대한 추정 규정을 도입했다.
드라마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6화에서 주인공이 극한의 상황에 몰리자 감정 워치는 그의 감정을 끝내 정의하지 못한다. ‘알 수 없음’이라는 결과값에 이를 모니터링하던 워치 제조사는 며칠 후 주인공을 불러 묻는다. “이걸 무슨 감정이라고 해야 될까요?” ‘분노’와 ‘좌절’, 거기에 ‘간절함’까지 뒤엉킨 복잡한 감정이었다. 주인공은 당시를 회상하며 뭔가를 깨달은 듯 울먹인다. “도와줘, 도와달라는 거예요.”
고인이 맨몸으로 막아서려 했던 것은 달리는 트럭만이 아니다. 고인이 온몸으로 버티려 했던 것은 2.5t짜리 쇳덩이 이상으로 가파르고 단단한 이 사회의 편견이었을 테다. 그가 달려오는 거대한 괴물 앞에서 느꼈을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참을 수 없는 분노? 혹은 좌절감? 어쩌면 그것은 이 사회를 향해 ‘도와달라’고 외치는 간절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니, 듣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2026-05-1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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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은쪽이 남매
후배들을 보며 기자 초년병 때를 떠올린다. 몸도 마음도 혹독하게 담금질했던 시절. 가장 힘들었던 건 이른 새벽 출근도, 비리 사건 취재도, 어려운 기사 쓰기도 아니었다. 바로 ‘땟거리’라 부르는 기삿거리 찾기였다. 걱정을 덜어준 건 ‘현장’이다. 동행취재 혹은 현장르포 형식을 빌려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직접 체험하며 기사로 풀어냈다. 2009년 봄, 택시 기본요금 인상으로 수입이 반토막 난 현실을 알아보기 위해 조수석에 동승해 기사님과 손님들 얘기를 들었다. 장마철에는 아파트 수해 현장을 찾아 진흙투성이 지하주차장 복구 작업에 동참했다. 그해 여름 끝자락엔 119구조대의 24시를 동행취재한 기획기사도 기억에 남는다. 주변에서 “고생했다”며 칭찬을 건넸지만, 고백건대 전혀 고생스럽지 않았다. 기회만 된다면 ‘현장체험 전문기자’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장은 흥미진진했고, 보람도 컸다.
기자라면 현장 취재가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변명, 아니 해명하자면 요즘 후배들은 게을러서가 아니라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해 현장을 찾지 못한다. 하루를 오전 오후로 쪼개, 여러 건 기사를 써야 하는 기자들에게 현장 취재는 후순위로 밀리기 일쑤다. 경찰과 소방의 보고서를 참고해 전화로 추가 취재를 하다 보면 기사 마감이 코앞이다. 방송 기자는 정반대 고충이 있다. ‘그림’을 확보하기 위해 현장을 누비는 반면, 모자란 취재는 타 언론사 기사를 참고하곤 한다. 신문쟁이로서 방송계를 언급할 수 있는 건 방송뉴스를 제작해 본 경험이 있어서다. 종편채널에 부산지역 뉴스를 공급하는 역할을 1년 동안 맡아, 여느 방송 기자처럼 다양한 사건사고 현장을 다녔다. 변사 사건 현장에 남아 있던 시신 부패 흔적, 북극곰 축제를 취재하며 겨울 바다에 뛰어들었던 경험 등은 현장의 중요성을 더욱 일깨우는 기억으로 각인돼 있다.
돌이켜 보면 현장에 대한 관심은 기자로 첫발을 내딛기 한참 전부터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 같다. 학창 시절 기사를 읽거나 방송뉴스를 볼 때면 현장감 있는 소식에 더 눈길이 갔다. 각종 보고서나 통계자료가 나열된 기사를 접하면, 숫자 너머 현장의 목소리가 궁금했다. AI 시대에 레거시 미디어, 신문·방송의 미래는 있을까. 있다면 기자의 역할은 무엇일까. 끊임없는 자문 끝에 찾은 한가지 해답 역시 ‘현장’이다. 사람 대 사람으로 직접 얼굴을 맞대 묻고 답하며, 생생한 이야기를 길어 올리는 일만큼은 AI가 대체할 수 없는 사람 기자의 몫이다.
올 들어 유튜브 채널 운영을 다시 맡게 되면서 이 해답을 업무에 적용하고 있다. 〈부산일보TV〉를 눈여겨본 구독자라면 최근 변화를 눈치챘을 것이다. 생방송·생중계를 비롯해 현장르포 성격의 콘텐츠가 늘었다. 최근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심르포’라는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주요 전통시장을 찾아 상인들의 입을 통해 지역 민심을 들어보자는 취지다. 지방선거와 함께 국회의원 보궐선거까지 치르는 부산 북구 구포시장 일대는 전국구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시장 구석구석을 돌며 진행된 전재수 전 의원의 감사 인사와 하정우 전 AI수석의 첫 방문을 비롯해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와 박민식 전 장관이 마주친 구포초등학교 현장도 찾아 민심을 들었다. 관련 콘텐츠 조회수를 다 합하면 100만 회가 훌쩍 넘는다. 이에 더해 한 전 대표의 단독인터뷰는 일부러 만덕2동 전셋집이 있는 아파트단지에서 야외 생중계로 진행했다. 현장감과 호기심을 동시에 만족시키려는 의도였는데, 역시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이 같은 시도를 할 수 있는 건 사람 기자 덕분이다. 지난봄 TV방송국으로 발령 난 이은철·변은샘 두 기자가 일당백으로 뛰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름의 가운데 글자가 똑같아, 금쪽이 못지않게 소중한 ‘은쪽이’라 여기고 있다. 기자실 책상과 전화 취재가 익숙했을 후배들이 요즘 현장의 중요성을 자주 입에 올린다. 의견을 반영해 애초 4부작으로 기획한 ‘민심르포’를 확대 편성했다. 부산시장 후보들의 선거운동 무대 뒤편도 궁금한 세계다. 가능하다면 전재수·박형준 후보의 하루 일정을 따라다니며 생생한 장면을 전해보려 한다. 얼마나 날것의 현장이 담길지는 ‘은쪽이 남매’의 활약에 달렸다.
민주주의 축제가 끝나고 나면 어디서 땟거리를 찾아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기자는 기록하는 사람이기에, 결국 ‘기승전현장’이라 믿는다. 부산과 부울경을 넘어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이 되는 현안, 전국에 울림을 주는 지역 이슈를 찾아 부지런히 돌아다닐 것이다. 지역민의 눈과 귀, 독자의 입과 손발이 되겠다는 다짐을 담은 〈부산일보TV〉를 한번 믿고 지켜봐 주시라. 그러니 부디... ‘좋댓구알’!
2026-05-06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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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그림자 무사와 진짜 일꾼
오는 21일부터 6·3 지방선거의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다. 그러나 선거의 막이 오르기도 전에 전국 곳곳은 공천 잡음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중앙당의 밀실 공천, 특정 인맥에 기대는 사천 논란, 모호한 경선 기준은 지방자치의 본령을 훼손하며 유권자의 신뢰를 흔들고 있다. 1980년 일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세상에 내놓은 영화 ‘카게무샤’는 권력의 본질에 대한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보고서다. 다케다 신겐이라는 전설적인 맹장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 투입된 도둑 출신의 그림자 무사. 그는 주군의 목소리와 걸음걸이, 심지어 내밀한 버릇까지 복제하며 적들을 기만한다. 영화 속에서 그림자 무사는 잠시나마 다케다 가문의 영광을 연장하는 데 성공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승리는 철저히 ‘타인의 권위’를 빌려온 연극에 불과했다.
이 서사가 오늘날 한국 정치, 특히 6·3 지방선거를 앞둔 우리 사회에 던지는 경고는 서늘하다. 영화 속 카게무샤는 주군의 존재가 지워지는 순간, 혹은 그를 지탱하던 갑옷이 벗겨지는 순간 한낱 미천한 존재로 돌아간다. 지금 대한민국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방선거 공천 과정은 어떠한가. 우리는 지역을 위해 헌신할 ‘진짜 인물’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거대 정당이라는 붉고 푸른 갑옷을 입은 ‘그림자 무사’들의 행렬을 보고 있는가. 한국 정치사에서 ‘그림자’의 역사는 뿌리가 깊다. 군사정권 시절, 최고 권력자 눈에 들어 발탁된 이들은 스스로의 정책적 비전이나 철학보다는 ‘대통령의 뜻’을 전달하는 확성기 역할에 충실했다. 그들은 독자적인 대중 기반 없이 주군의 권위에 기생하며 권력을 누렸으나, 주군이 퇴장하는 순간 그들의 정치적 생명도 함께 증발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른바 ‘계파 정치’는 수많은 카게무샤를 양산했다. 특정 계파 수장의 사진을 명함에 박고, 그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지역구를 누비는 정치인들에게 독자적 비전은 사치였다. 그들에게 정치란 주민과의 소통이 아니라, 수장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공천장이라는 ‘대리 허가증’을 받아내는 기술에 가까웠다. 이러한 후광 정치는 정치인의 자생력을 앗아갔고, 한국 정치를 인물 중심의 대결이 아닌, 세력 간 진영 논리로 퇴행시켰다.
공천권이라는 막강한 칼자루를 쥔 중앙 정치권 앞에서 지방선거 후보들은 한 명의 독립된 주체가 아니라, 정당의 명령을 수행하는 병사로 전락한다. 현재의 공천 시스템은 후보자들에게 ‘지역사회와 소통’보다 ‘공천권자와 친분’을 강요한다. 지역 현안을 해결할 혁신적인 정책을 고민하기보다, 당내 파벌 싸움에서 어느 줄에 서야 살아남을지를 먼저 계산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 후보 개인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정당의 기호와 당색만 남는다. 유권자들은 후보 얼굴을 보기 전에 정당 로고를 먼저 보게 되며, 이는 결국 ‘사람’이 아닌 ‘그림자’를 선택하는 기형적인 투표로 이어진다.
영화 ‘카게무샤’의 클라이맥스는 그림자 무사가 전장에 나섰을 때다. 그는 주군의 위엄으로 군사들을 통솔하려 하지만, 실질적인 전술 역량이 요구되는 긴박한 순간에 그의 허상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지방자치 현장도 마찬가지다. 정당 공천이라는 갑옷을 입고 당선된 후보들은 임기 시작과 동시에 한계에 부딪힌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고령화 문제, 교육 격차, 지방 소멸 위기 등은 정당 구호나 중앙 정치 논리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스스로의 철학과 정책 비전 없이 당선된 ‘그림자 시장·군수·구청장’들은 중앙 정치 바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린다. 그들의 지지 기반은 지역 주민이 아니라 중앙당 지지율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당 인기가 떨어지면 그들은 방어 기제도 없이 몰락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지역 주민의 몫이 된다.
정당이라는 외피를 벗었을 때, 과연 지역을 이끌어갈 실질적인 역량이 있는지, 아니면 그저 권력을 좇는 텅 빈 갑옷에 불과한지 판별해야 한다. 영화의 마지막, 주군의 죽음이 탄로 나고 쫓겨난 그림자 무사는 다케다 가문의 깃발이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목격하며 절규한다. 그가 지키려 했던 것은 주군이었을까, 아니면 주군을 연기하며 누렸던 잠시의 권력이었을까. 교훈은 명확하다. 권력의 외피만으로는 체제를 유지할 수 없으며,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달은 태양이 나타나는 순간 사라진다. 이번 6·3 지방선거는 ‘그림자들 연극’이 아니라 ‘실체의 경연’이 돼야 한다. 이제 무대 위 가짜 주역들을 내려오게 하고, 진짜 일꾼을 세워야 할 시간이다. 지방자치 주인공인 유권자의 참여와 심판만이 그 열쇠다.
2026-05-04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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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한동훈·하정우는 왜 북구를 선택했을까
외지인들이 부산을 생각할 때 북구를 떠올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해운대 광안리만큼 화려하지도, 중구나 영도처럼 먹거리, 볼거리가 많지도 않다. YS(김영삼) 시절 부산 정치 1번지 대접을 받던 서구처럼 상징성이 있는 곳도 아니다. 400년 전통의 구포시장을 빼고 나면 북구를 소재로 뭔가 얘깃거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런 북구가 6·3 지방선거의 최고 ‘핫플레이스’가 떠올랐다. 수도권 언론들이 연일 구포시장을 찾고, 북구 민심을 가늠하는 기사가 쏟아진다. 북갑 보궐선거는 각 후보들의 미래를 넘어 선거 이후 여야 정치 지형을 뒤흔들 수 있는 승부처가 됐다. 북구 주민들조차 의아해 할 이 신드롬은 우연에 우연을 더한 결과일까?
시계를 되돌려보면 여권이 10여 년 전부터 ‘낙동강 벨트’를 전략지역화하면서 서부산 전역이 여야 접전지로 바뀌었지만, 그 중에서도 북구는 정치적 균형점을 향해 달려가는 부산 정치의 역동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줬다. 19대 총선부터 국민의힘 소속인 박민식 전 국가보훈부 장관과 더불어민주당 부산시장 후보인 전재수 전 의원이 네 번 맞붙어 첫 두 번은 박 전 장관이, 이후 두 번은 전 전 의원이 승리했다. 서부산 지역 지지층 분포가 ‘보수 6, 진보 4’ 정도라면, 때때로 달라지는 구도나 인물 경쟁력에 따라 정반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그야말로 부산 내 ‘스윙 스테이트’인 셈이다.
나는 북구의 이런 토양이 이번 역대급 대결의 촉매제가 됐다고 본다. 한 전 대표의 북갑행을 강력히 권유한 것으로 알려진 조갑제 씨는 1979년 부마항쟁과 1985년 ‘신민당 바람’을 일으킨 부산에 대해 “부산 시민들은 대의명분으로 연고주의를 극복, 역사를 바꾸는 화끈한 행동력으로 유명하다”고 말했다. 권력의 무도함이 임계점에 이를 때, 학연·지연 등에 좌고우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선 부산 사람들의 기질에 기대를 건 셈이다.
하 전 수석도 그냥 ‘배지’만 생각했다면 2년 뒤 총선에서 비례대표 상위권은 너끈히 받아냈을 것이다. 그의 도전은 험지이긴 하지만 구덕고 출신으로 강력한 지역 연고를 주장할 수 있는 고향에서 ‘전국구’인 한 전 대표와 붙어 승리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급격한 정치적 체급 상승을 고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 전 대표든 하 전 수석이든 ‘리스크 대비 리턴’에서 북구는 가장 매력적인 선택지였던 셈이다.
북구의 이런 정치 지형은 소위 말하는 강경파 대신 중도 소구력이 좋은 후보에게 유리하다. 전 전 의원부터 그랬다. 그가 10년 의정활동을 하는 동안 정파적 어젠더에 깊이 개입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박 전 장관만 해도 검찰 선배 윤석열 전 대통령과 가까워지기 전만 해도 당파성이 옅은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 전 대표는 강성 지지층이나 당 주류에게는 배신자 취급을 받지만, 적어도 비상계엄과 ‘윤 어게인’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일반 국민의 상식에는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다. 하 전 수석 역시 보수 쪽과도 폭넓게 교류한 걸 보면 진영 색채가 강한 정치를 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전 전 의원과 부산시장 선거에서 맞붙은 박형준 시장도 자타가 공인하는 합리적 보수주의자다. 그런 점에서 이번 부산 선거에 지역을 넘어 보다 큰 의미를 부여해보고 싶다. 얼마 전 미국의 벤 세스 전 공화당 상원의원이 ‘숏폼 정치’에 매몰된 미국 의회를 향해 “거의 모든 정치인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내가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며 “우리는 확실히 옳고, 저들은 확실히 틀렸다는 파벌주의는 우리를 꽤 어리석게 만든다”고도 했다. 췌장암 말기로 곧 다가올 죽음 앞에 선 정치인의 마지막 고언이라는 점에서 큰 울림을 준다.
우리 정치에도 딱 들어맞는 비판이다. ‘우리는 무조건 옳다’는 극단적 진영 논리 속에 시시비비를 가리는 감각마저 무뎌졌다. 민주당이 기어이 추진하는 ‘조작기소 특검법’은 ‘누구도 자신의 사건에서 재판관이 될 수 없다”는 오랜 법언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진보 법조인들조차 이번 사태가 우리 법치주의에 미칠 심대한 폐해를 걱정한다. 계엄에 사과하고 ‘윤’과 단절하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길을 거부한 채 퇴행을 일삼던 국민의힘은 최후 기반인 영남마저 붕괴될 지경임에도 정적 제거에 더 목을 매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선거만 이기면 이런 행태가 다 용인될 것 같은 지금의 분위기가 못내 절망적이다. 내가 틀릴 수 있음을 말하지 않는 정치 속에서 우리는 이미 많이 망가졌고, 어리석어졌다.
전국의 시선이 쏠린 ‘부산 대전’에서 승리하는 사람은 그 이전과는 다른 정치적 리더로의 위상을 갖게 될 것이다. 부산에서 상식적인 정치의 회복이라는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쉽지 않겠지만, 가냘픈 희망을 품어본다.
2026-05-03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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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인공지능 바다에서 허우적거릴 당신에게
후배 기자들의 발표를 듣고 있었다. 불현듯 20세기 말, 세상의 변화에 당황하던 그 당시 아저씨들이 떠올랐다.
20세기 말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다이내믹 코리아’였다. 1997년 IMF 사태(외환위기)가 터졌고, 국내 첫 정권교체도 있었다. 정치와 경제 상황이 요동치는 동안, 일상에서도 혁명이 일어났다. 다음이 한메일넷이라는 웹메일 서비스를 내놓은 게 1997년이다. 1998년엔 케이블망을 통한 초고속 인터넷 사업이 시작됐고, 1999년 네이버가 설립됐다. 인터넷 바다가 일상을 삼키기 시작했다.
당시 10·20대였던 일명 ‘엑스세대’까지는 비교적 빠르게 변화에 적응했다. 만날 필요 없이 이메일로 자료를 주고받고, 도서관에 가지 않고 검색으로 자료를 찾았다. 다음 카페, 프리챌, 아이러브스쿨 등의 게시판에서 일상과 정보를 공유했다. PC방에서 세계인을 상대로 스타크래프트 대전을 벌였다. 인터넷 덕에 시간도 아끼고, 일상의 스케일도 커졌다.
아버지 세대들은 우리와 달랐다. 인터넷의 바다에서 종종 허우적거리는 것 같았다. 아날로그 방식에 익숙한 그들은 스타크래프트보다는 무조건 족구를 해야 하는 세대였다. 자료만 오가는 소통이 익숙할 리 없었다.
그럼에도 억지로 인터넷을 배워야 했다. 외환위기 뒤 정년보장이 무너졌다. 인터넷을 다룰 줄 아는 것은, 상당한 경쟁력이었다. 당시 어른들은 책을 사서 읽으며 인터넷을 공부했다. 안쓰러웠다. 인터넷에 접속해 하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것을, 굳이 저런 식으로 공부까지 해야 할까. 나이가 들면 뇌가 굳는 것인가라는 건방진 생각도 했다.
후배 기자들의 발표 주제는 ‘AI(인공지능) 활용법’이었다. AI와 각종 어플을 연동하니, 취재원과 주고받은 메일과 전화 통화 내용이 자동으로 데이터 처리가 됐다. 주요 기관장의 스케줄이 본인의 일정표와 연동되는 기술도 있었다. 국내외 주요 기사와 이슈를 AI가 개인별로 최적화해 분류하고 압축해 줬다. 후배 기자들은 AI로 취재 시간도 줄이고 취재 영역도 확장하고 있었다.
저런 작업을 시도할 생각도 못했다. 있다는 것 자체를 몰랐으니까. 그제서야 AI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몸이 무거워지며, ‘AI 바다’에서 가라앉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20세기 말, 인터넷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아저씨들이 생각났다. 다시 보니 2026년의 나였다.
AI 폭풍이 가장 먼저 덮친 분야가 프로 바둑의 세계다.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전 뒤, AI의 바둑은 정답지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 많은 프로들이 바둑에서 인간미가 사라졌다며 낙담했다. 하지만 젊은 프로들은 AI에게 바둑을 배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바둑의 재미를 잃은 이세돌은 떠났고, AI를 스승으로 삼은 신진서는 바둑의 황제가 됐다. 한때 엑스세대라고 불렸던 지금의 40·50대는 대부분 신진서보다 이세돌에게 감정이입이 될 것이다.
유료 AI에게 물었다. “AI 같은 기술 혁신에 뒤처지고 있다. 어떻게 적응해야 할까”. AI는 원리 파악보다 용도에 집중하라는 식의 조언을 했다. 너무 잘하려 하지 말고, 적당히 남들만큼 따라 하라는 거다.
어느새 처음 접한 인터넷에 당황하던 그 시절 아저씨들도 이제 60, 70대가 됐다. 주변을 보면 웬만한 어르신들도 온라인을 충분히 활용한다. 유튜브, SNS 등이 없으면 못 버티는 이들도 있다. AI도 비슷하게 흘러갈 것이다. 20여 년 뒤 미래엔 결국 나이와 상관 없이 누구나 필요한 만큼 AI를 비서처럼 활용하고 있을 듯하다. 적당히 시대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AI 활용법을 익힐 터이니, 스트레스 받지 말라는 AI의 진단이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어쩌면 후배들보다 AI를 잘 모른다는 게 본질적인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인터넷 바다에서 허우적대던 그 시절 40·50대들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들면서 호기심이 사라진 게 진짜 문제일 수 있다. 10대, 20대들은 호기심 때문에 인터넷과 AI를 익혔다. 그들에겐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다. 반면 열정과 호기심이 옅어진 기성세대에겐 같은 일이 과제 같은 것이 돼버렸다.
10대 말 PC방에서 처음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더블 클릭할 때가 있었다. 인터넷 세계가 열리기를 기다리며 들뜬 기분이었다. 오늘부터 호기심 가득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AI를 알아가려 한다. 벌써 AI가 무섭다기보다, 재미있어지는 기분이다. AI를 켜고 프롬프트에 첫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넌 누구냐?
2026-04-29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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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양산선, 부울경을 연결하는 미래의 길
오는 11월, 경남 양산 시민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양산도시철도(이하 양산선)가 마침내 개통한다. 애초 계획보다 6년이나 늦어졌다. 예비타당성 조사와 주민 공청회 등의 행정절차까지 포함하면 무려 16년 만에 맺은 결실이다. 사업 추진 과정에서 각종 인허가와 설계 변경, 예산 확보 등 복잡한 행정절차가 반복되면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대형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이 갖는 구조적 한계가 그대로 드러난 셈이다. 그만큼 시민들의 기대도 크다.
현재 양산선은 개통을 위한 마지막 단계에 들어섰다. 종합 시운전과 시설물 점검, 비상 대응 훈련, 운영 인력 교육 등 막바지 준비가 한창이다. 말 그대로 ‘개통 초읽기’에 돌입했다.
양산선은 부산 금정구 노포동 부산도시철도 1호선 종점역에서 양산 북정동을 잇는 노선이다. 부산과 양산을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는 핵심 교통축이다. 특히 부산도시철도 1·2호선이 양산선을 통해 이어진다는 것은 단순히 환승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양산 시민의 일상 이동 반경이 넓어지고, 부산 도심과의 시간적 거리는 획기적으로 줄어든다. 이는 도로 중심 교통체계에서 벗어나 철도 중심의 정시성과 안정성을 갖춘 구조로 전환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번 개통은 양산 교통체계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전환점이다. 그동안 양산은 고속도로와 국도 등 도로망 중심 구조에 의존해 왔다.
그러나 양산선이 본격 가동하면 철도·버스·도로가 입체적으로 연결되는 복합 교통체계가 구축된다. 향후 광역철도망까지 갖춰지면, 양산은 부울경을 잇는 동남권 교통 허브로 도약할 가능성이 크다.
철도가 도시를 어떻게 바꾸는지 양산 시민들은 이미 경험했다. 부산도시철도 2호선 양산 연장선은 양산신도시 분양 시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교통 접근성 개선은 곧 주거 선호도 상승으로 이어졌고, 이는 인구 유입과 도시 확장을 견인했다. 양산선 역시 사송신도시의 가치 상승과 정주 여건 개선에 핵심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철도는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도시의 미래를 설계하는 기반 시설이다. 따라서 양산시는 개통에 맞춰 연계 교통망 정비를 서둘러야 한다. 각 역을 중심으로 환승 체계를 촘촘히 구축해 접근성을 높이고, 도시 전역을 유기적으로 연결해야 한다. 철도와 버스가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사통팔달’ 교통망이 완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기대만큼 우려도 존재한다. 가장 큰 문제는 단선 구조다. 양산선은 복선이 아닌 단선으로 건설됐다.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다. 향후 수송 능력과 운행 효율성에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경제성을 고려한 선택이지만, 장기적인 도시 성장과 교통 수요 증가를 감안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장기적으로 복선화를 고려해 최소한 터널 구간만이라도 복선화에 대비하는 설계를 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여전히 설득력을 갖는다.
역세권 인프라도 과제로 남아 있다. 각 역마다 주차장 확보를 위한 용역까지 진행됐지만, 일부 역은 부지 문제 등으로 충분한 주차 공간을 확보하지 못했다. 철도 이용의 출발점인 ‘접근성’이 흔들릴 수 있는 대목이다. 환승 편의성을 강조하면서도 실제 이용자가 체감할 기반 시설이 부족하다면 이용률 저하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양산선은 하나의 노선에 그치지 않는다. 향후 부울경 광역철도와 동남권 순환 광역철도 구축과 연계되며 동남권 교통망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게 된다. 부울경을 하나로 잇는 광역철도망이 완성되면 양산은 단순한 경유지를 넘어 중심 거점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다. 최근 본격화하는 부울경 행정 통합 논의와 맞물려 보면, 양산선의 전략적 가치는 더욱 커진다. 행정 통합은 제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람과 물류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물리적 기반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런 점에서 양산선은 부울경을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는 ‘마중물’을 역할을 할 수 있다. 사통팔달 교통망이 곧 광역 경제권 형성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결국 관건은 개통 이후다. 늦어진 시간을 만회하려면 운영의 완성도는 높여야 한다. 단선 구조의 한계를 보완할 운행 전략과 부족한 주차시설 확충, 연계 버스망의 효율적인 재편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분명하다. 개통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시민이 얼마나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느냐다. 양산선은 이제 출발선에 섰다. 16년 기다림 끝에 맞이하는 개통이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으려면 냉정한 점검과 지속적인 보완이 필요하다. 이번 개통이 양산 교통망을 사통팔달로 한층 더 업그레이드하는 계기를 넘어 부울경 지역 전체를 연결하는 핵심 인프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2026-04-27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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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내 데이터로 돈 버는 기업, 데이터 배당 어떤가
최근 미국 빅테크 기업 메타가 새로운 AI 모델 ‘뮤즈 스파크’를 발표했다. 메타는 뮤즈 스파크가 ‘개인 맞춤형 AI’를 지향한다고 밝혔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사용자의 사용 경험을 AI가 학습해 ‘개인화 경험’을 제공한다는 설명이다. 메타가 수집한 방대한 양의 사용자 정보가 AI 서비스에서도 수익화의 핵심 요소가 되는 셈이다.
메타는 올해 광고 수익이 처음으로 구글을 넘어설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AI 기반 맞춤형 추천 시스템으로 광고 효율을 높인 결과다. AI 추천 기능으로 메타의 숏폼 서비스인 릴스 시청시간도 30% 이상 증가했다. 이는 광고 노출 확대와 수익 증가로 이어졌다. 메타는 35억 명 이상의 1일 사용자를 확보하고 있다.
페이스북의 ‘좋아요’ ‘공유’ ‘댓글’에서 가입자 위치정보, 기기 정보 등은 메타의 ‘초정밀 개인 데이터’로 변한다. 메타는 이를 기반으로 ‘타깃 광고’를 판매 막대한 수익을 올린다. 구글도 가입자의 검색어, 유튜브 사용 행태, 지도 사용 행태 등을 분석해 타깃 광고를 판매한다. 아마존도 가입자의 구매 이력, 검색 기록, 장바구니 데이터, 배송 주소, 동영상 서비스(아마존 프라임) 시청 이력 등으로 구매 의도를 분석해 수익으로 전환한다. 아마존의 경우 실제 구매 행동 데이터라는 점에서 더 높은 광고 단가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플랫폼 기업 역시 마찬가지다. 검색어, 쇼핑, 지도, 블로그, 카페 등의 이용 데이터를 기반으로 개인화 검색·디스플레이 광고를 판매해 수익을 올린다.
빅테크 기업들이 수익화에 열을 올리는 개인 데이터는 실제로 어느 정도의 시장 가치가 있을까. 사이버보안 기업 프로톤(Proton)의 분석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미국 거주자의 개인 데이터는 구글과 메타(페이스북)에서만 연간 최소 700달러의 수익을 만든다.
빅테크 수익의 원천인 개인 데이터는 ‘브로커’를 통해 대규모로 거래되고 있다. 시장분석기관에 따르면 글로벌 데이터 브로커 시장 규모는 2024년 기준 약 2704억 달러로 평가됐다. 전 세계적으로 최대 5000개의 데이터 브로커가 활동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전체 데이터 브로커 시장에서 68%는 소비자 데이터라는 분석이 나온다.
국내에서도 데이터 거래는 거대 산업으로 성장했다. 한국데이터산업협회의 ‘2025 데이터산업 백서’에 따르면 국내 ‘데이터 판매 및 중개 서비스업’ 시장규모는 2024년 기준 3조 3818억 원으로 추산됐다.
이처럼 개인 데이터가 빅테크의 수익화 원천으로 활용되고 대규모로 거래되는 상황에서도 데이터의 주인인 개인은 자신의 데이터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빅테크 기업은 개인 데이터 수집과 활용의 대가로 자신들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SNS 등 서비스를 공짜로 제공하는 대신 개인 데이터를 사용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개인들이 자신과 관련된 수많은 정보를 팔아서 빅테크의 서비스를 이용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개인들이 자기 데이터의 시장 가치를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서비스 대가로 공짜로 주고 있다는 설명이다.
개인이 자기 데이터를 직접 판매해 수익을 창출하는 것은 현행 제도에서 불가능하다. 현재 정부 주도로 ‘마이데이터’ 제도가 시행되고 있지만 개인이 본인 정보 열람에 대한 권한을 일정 부분 행사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와 관련, 해외에선 개인에게 데이터 사용료를 직접 지불하는 여러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데이터 배당’(data dividend) 제도가 제안됐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개빈 뉴섬이 제안한 데이터 배당은 개인 데이터로 창출된 부를 기여자인 개인에게 배당금 형식으로 되돌려 주는 방식이다. 데이터 의존성에 따라 기업에 세금을 부과, 이를 재원으로 공공재에 투자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영국에서는 민간 기업이 운영하는 데이터 거래 플랫폼에 개인이 직접 참여하는 방식이 제안됐다. 개인이 자신의 금융, 의료, 신체활동, SNS 활동 등 정보를 직접 저장, 관리할 수 있고 데이터 수요처에 이런 데이터 사용을 허락하는 대신 보상을 받는 방식이다.
개인 데이터 수익화에 대한 개인 보상은 규제 방식으로 시행될 경우 자국 기업의 부담만 커지는 ‘역차별’을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때문에 개인이 자발적으로 데이터를 제공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민간 시장 육성이 중요하다. 이 경우 기업도 데이터 수집과 거래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정부가 태양광 산업에서 추진하는 ‘햇빛연금’처럼 개인 데이터 사용 대가에도 관심을 가진다면 데이터 배당도 현실화될 수 있다.
김종우 서울경제부 부장 kjongwoo@busan.com
2026-04-22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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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인간과 AI의 대결, 부산에서 하면 어떨까
2016년 3월 서울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바둑기사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AI)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의 대결은 단순한 바둑 승부를 넘어 AI 시대의 서막을 알린 사건이었다. 최고의 바둑 인간 실력자와 최고의 바둑 AI 프로그램의 대결로 주목받았고, 최종 결과는 알파고가 4승 1패로 승리했다. 당시 대국은 인간과 AI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의한 역사적 이벤트로 평가된다. 특히 알파고의 승리는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직관’과 ‘창의성’의 영역에서도 AI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줬다.
당시 대국은 전 세계로 생중계된 글로벌 이벤트였다. 국내에서는 공중파와 인터넷으로 실시간 중계됐고, 유튜브 등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해외에서도 시청 가능했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해설까지 별도로 제공돼 글로벌 시청자의 이목을 끌었다. 특히 알파고를 개발한 구글 딥마인드가 직접 유튜브 라이브 스트리밍을 하면서, AI에 관심 있는 전 세계 시청자들이 이날 대결을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대국이 열렸던 서울 포시즌스호텔은 대규모 국제행사를 치를 수 있는 보안·방송 인프라는 물론, VIP 동선 관리도 쉬운 환경 등을 고루 갖췄다는 점에서 구글 딥마인드가 찾던 대국 장소로 안성맞춤이었다. 행사를 무사히 치른 포시즌스호텔은 전 세계 생중계 화면에 자연스럽게 노출되며 ‘AI의 역사적 순간이 열린 도시’ 서울에서 역사적 이벤트와 결합한 브랜딩 효과를 거뒀다. 서울 포시즌스호텔은 많은 국내외 취재진이 몰려들었고 TV, 유튜브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대국이 생중계되며 최대 1000억 원 이상의 홍보 효과를 누렸다는 분석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인류사에 또 하나의 상징적인 대결이 예고됐다.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AI 기업 xAI의 차세대 모델 ‘그록5’와 세계 최고 e스포츠 팀 중 하나인 T1,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페이커의 맞대결이다. 바둑에서 시작된 ‘AI 대 인간’ 구도가 이제는 팀 기반의 복잡한 전략 게임인 리그오브레전드(LoL)로 확장되는 셈이다. 미국-이란 중동 전쟁 등의 국제적인 변수가 발생하며 이 이벤트 매치에 대한 구체적인 일정 등에 대한 논의가 지연되고 있지만, 이 대결이 현실화한다면 그 상징성과 파급력은 10년 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을 뛰어넘을 가능성이 크다. 바둑이 개인의 직관과 계산을 겨루는 경기였다면, LoL은 실시간 협력과 전략, 변수 대응이 결합된 고차원적 게임이기 때문이다. AI가 인간의 협력과 변수 대응 등의 영역에서 인간을 넘어설 수 있는지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 수밖에 없다.
만약 이 역사적 대결이 올해 올린다면, 그 장소는 부산이 됐으면 한다. 부산이 대결 장소로 최적인 당위성은 충분하다. 부산은 이미 국내 대표 게임 도시로 자리 잡았다. 매년 국제 게임 전시회인 ‘지스타’가 매년 11월 열린다. 2009년부터 부산에서 열린 지스타는 세계적인 게임 축제로 자리 잡았고, 전 세계 게임 기업과 유저들이 모이는 플랫폼이 됐다.
특히 부산은 국제 행사를 치를 수 있는 인프라를 충분히 갖췄다. 벡스코와 오디토리움에서는 대형 e스포츠 이벤트를 열 수 있다. APEC 누리마루와 서면 삼정타워에 있는 e스포츠 아레나도 최적의 장소다. 부산의 특급호텔들 역시 VIP 보안과 동선 확보, 중계 인프라를 갖춰 역사적 이벤트를 충분히 치러낼 수 있다. 해운대를 중심으로 한 숙박·관광 인프라는 대규모 방문객을 수용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다. 부산은 이미 APEC 정상회의와 국제기구 회의인 ITU 전권회의 등을 성공적으로 치렀고,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도 성공적으로 치러낸 검증된 도시다.
인간과 AI의 역사적 이벤트를 치를 무대가 부산이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지만,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선 부산시와 지역 정치권이 이를 어젠다로 이끌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단순한 ‘장소 제공’을 넘어 도시 차원의 전략적 접근도 필요하다. 부산시와 지역 정치권은 당리당략과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부산에 이벤트를 유치하기 위해 협력하고, 부산에서 왜 이번 대결이 이뤄져야 하는지 강점과 당위성을 정부에 충분히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글로벌 AI 기업과 방송사, 스폰서 등과 소통 창구를 직접 만들고 정부 차원의 외교적 지원과 정책적 뒷받침도 이끌어 내야 한다.
10년 전 서울에서 시작된 인공지능 시대의 상징적 장면이 또 한 번 펼쳐질 기회가 눈앞에 와 있다. 6·3 지방선거도 코앞으로 다가왔다. 차기 부산시장과 지역 정치권이 이벤트 유치를 통해 부산의 도시 위상을 한 단계 더 높일 수 있는 어젠다를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종횡무진 활약하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길 기대한다.
2026-04-20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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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늘 피가 모자라
얼마 전 ‘헌혈의 집’ 문을 두드렸다. 기자가 헌혈하기 위해 팔을 걷은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10년도 더 전 일이라 기억에서 가물가물했다.
기자가 헌혈에 나선 건 해군작전사령부 이현주 하사 취재 때문이다. 이 하사는 올해 2월 헌혈 100회 달성 기록으로 ‘헌혈 명예장’을 수상했다. 30대 초반의 나이임에도 벌써 100번째 헌혈을 기록한 게 예사롭지 않았다. 기사를 쓰면서 나 스스로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매년 동절기가 되면 혈액이 부족하다는 뉴스가 신문과 방송에서 나온다. 그런 뉴스를 접하고, 또 생산하는 언론사에 근무하면서 애써 헌혈을 외면해 왔던 게 사실이다. “헌혈이 가능한 만 69세까지 생명을 나누고 싶다”는 이 하사의 말은 기자에게 작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나 스스로 팔을 걷어붙이고 싶었고, 늦었지만 그 첫걸음을 뗐다.
혈액은 인공적으로 만들 수 없어 대체할 물질도 없다. 오직 건강한 사람의 자발적인 헌혈만이 수혈이 필요한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몸 밖으로 나온 혈액은 유효기간이 최대 35일로 짧다. 특히 혈소판의 유효기간은 단 5일에 그쳐 장기 보관이 불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선 하루 평균 5000~7000명의 환자가 수혈을 필요로 한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헌혈 참여율은 인구 대비 5%도 안 된다. 대한적십자사 통계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국내 헌혈 실인원이 126만 4525명인데, 이는 헌혈가능인구(16~69세) 대비 3.27%에 불과한 참여율이다.
보통 수혈은 대형 교통사고 등 중증 외상 응급환자에게 시급하나, 실제 통계를 보면 암 환자(약 40%)와 일반 수술 환자(약 30%)에게도 많이 쓰인다. 조산아와 미숙아를 살리는 데도 혈액은 필수적이다. 헌혈은 어쩌다 발생하는 사고에 대비하는 것을 넘어, 평범한 이웃들이 병원에서 온전히 치료받고 삶을 지탱하게 해 주는 가장 필수적인 ‘의료 인프라’라 할 수 있다.
혈액은 겨울철에 특히 부족하다. 유행성 독감 등 호흡기 질환이 돌면서 헌혈 적격자가 크게 줄어드는 탓이다. 헌혈 인구의 불균형 문제도 크다. 과거 단체 헌혈 위주로 혈액 사업이 진행된 영향으로, 현재 헌혈자의 60~70%가 10·20대 학생과 군인·경찰·회사 등 단체에 집중돼 있다. 학교가 방학에 들어가면 혈액 보유량이 뚝 떨어지는 현상이 매번 반복된다.
여기에 저출산 고령화가 가속화되면서 청년 인구는 줄어드는 반면, 수혈이 더 필요한 고령층 인구는 가파르게 늘고 있다. 헌혈과 수혈의 ‘미스매치’가 가속화되는 것도 고령 사회가 직면한 문제다.
혈액의 적정 보유량은 5일분이라고 한다. 겨울철에는 ‘주의’ 단계인 3일분 미만으로 떨어지는 날들이 잦다. 하지만 겨울이 지난 지금도 적정 혈액 보유량을 채우는 날이 많지 않다는 게 혈액원 관계자의 얘기다. 겨울철뿐만 아니라 사계절 내내 피가 모자라는 게 현실이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혈액 수급 최전선에 있는 실무자들은 한 팩의 피라도 더 구하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지난 2월 부산혈액원에선 헌혈자에게 ‘두바이 쫀득 쿠키(두쫀쿠)’ 증정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다. 지역 카페 사장님들도 핼액원을 돕고자 두쫀쿠 기부에 나섰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이 덕분에 이벤트 기간 헌혈 인원이 평소보다 두 배가량 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이벤트에 불과하다. 혈액 부족은 모두가 함께 책임져야 할 사회적 과제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혈액 보유 현황판을 볼 수 있다. 매일 혈액 보유 현황이 업그레이드된다. 기사를 쓰는 14일도 적정 보유량인 5일에 못 미치는 것(3.6일)으로 나온다. 5일 이상의 안정적인 보유량을 확보할 있도록 적극적인 개인 헌혈 참여가 필요하다. 특히 30대 이상 중장년층의 참여가 절실하다.
“한 번의 헌혈로 세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란 말이 있다. 전혈(적혈구·백혈구·혈장·혈소판 등 혈액의 전체 성분) 헌혈을 하면 혈장, 혈소판, 적혈구 등 혈액 제재로 분리돼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이렇게 보면 헌혈은 가장 ‘가성비’ 좋은 나눔 방식인 셈이다.
최근 헌혈 200회라는 대기록을 달성해 ‘명예대장’에 이름을 올린 김형찬 씨는 “습관이 되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고귀한 실천이 헌혈”이라며 많은 이들의 동참을 당부하기도 했다. 만약 당신이 10~15분 정도만 시간을 내 팔을 걷어붙인다면 누군가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
2026-04-15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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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20년 묵은 부산 야구장 신축 논의
벌써 20년이다. ‘구도 부산’에 새 야구장을 짓자는 논의가 정치권에서 등장한 기간이다. 그동안 부산시장은 4명이나 바뀌었지만, 부산 야구장 신축 공사는 착공은 커녕 첫 삽조차 뜨지 못했다. 부산 정치권의 야구장 신축 논의가 지지부진한 사이, 그동안 한국에는 6개 구장이 새로 지어졌다. 새 구장이 들어선 지역에서도 지방선거가 치러졌다. 그 지자체와 부산이 달랐던 건 공약이 아니라 실행 여부였다.
부산에서 야구장을 새로 짓자는 논의가 처음 시작된 것은 2006년이다. 당시 한나라당 부산시장 후보 경선에 나선 고 권철현 국회의원이 북항 재개발 지역에 해변 야구장을 짓자는 공약을 세운 것이다. 당시 북항 야구장 추진은 권 의원이 당내 경선에서 탈락하며 소문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1985년 개장한 사직야구장을 재건축하자는 제안이 2010년에 본격화됐다. 당시 3선 부산시장이 된 허남식 시장이 사직야구장을 돔구장으로 짓겠다고 언급했다. 허 시장은 여러차례 돔구장을 언급했지만 구체적인 행정 추진은 없었다. 비슷한 시기 풍산그룹이 해운대구 반여동 해운대사업장에 돔구장을 짓겠다며 기본 설계까지 진행했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지지부진하던 야구장 신축 사업에 다시 불이 붙은 것은 2015년 서병수 시장 때다. 서 시장은 롯데 자이언츠 구단주 신동빈 롯데 회장과 만나 북항 야구장을 짓기로 했다. 부산시와 롯데그룹 간 실무진 협의도 진행됐다. 이듬해인 2018년 부산시는 사직야구장 부지에 개폐형 돔구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계획 발표 3개월 뒤 서 시장이 부산시장 선거에서 낙선하며 야구장 신축은 동력을 잃었다.
새롭게 부산시장이 된 오거돈 시장은 서 시장의 사직구장 돔구장 계획을 전면 백지화했다. 대신 북항에 개방형 야구장을 짓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하지만 오 시장은 시장 취임 이듬해에 야구장 신축 사업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기로 했다. 야구장 사업이 재검토에 들어간 사이, 최종 결정권자인 오 시장은 개인의 성추행 사태로 부산시청을 떠났다.
2021년 부산시장이 된 박형준 부산시장은 다시 사직야구장을 돔구장이 아닌 개방형 야구장으로 짓기로 방향을 정했다. 박 시장은 두 번째 도전 만에 정부 공모사업을 통해 국비를 확보했고, 사직야구장을 대체할 구장까지 지정했다. 야구장 신축 논의가 진행된 이후 가장 진전된 모습이었다. 이런 사이 부산은 오는 6월 또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다.
이번 부산시장 선거에 나선 두 후보는 모두 북항 야구장 신축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박형준 현 시장은 북항 야구장 신축에 부정적이지만 최근 입장을 바꿨다. 북항에 야구장을 짓고 프로야구단까지 유치하겠다는 공약을 세웠다. 전재수 의원은 자신이 대표 발의한 항만공사법 개정안을 바탕으로 북항 돔구장 건설을 추진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20년째 이어진 부산 야구장 신축 논의의 흐름을 정리해본다. 역대 부산시장들은 ‘노후 문제 제기→지방 선거 공약 발표→당선 후 용역→재원 마련·롯데 구단 협의 난항→시장 교체 후 무산’의 패턴을 반복했다. 20년간 지방선거는 부산 야구장 신축 계획을 일으킨 기폭제이기도, 계획을 뒤엎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부산시장 선거에서 북항 야구장, 돔구장, 사직야구장 재건축 등은 당시 부산시장으로 나선 여야 후보들의 선거 공약 중 대표 공약이었다.
하지만 2026년 오늘의 모습은 냉혹하다. 이미 사용 중인 6개 야구장은 차치한다. 서울 잠실야구장은 올 시즌을 끝으로 철거돼 2032년 돔구장으로 바뀐다. 인천은 2028년 시즌부터 지금 한창 공사 중인 새 돔구장에서 경기를 시작한다. 부산은 신축 야구장이 없는 유일한 프로야구 도시가 된다.
20년이라는 긴 세월이 말해준다. 부산의 야구장 신축 문제는 어느 한 시장의 의지나 공약 하나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야구장 신축은 재원 조달, 구단과의 협의, 사업 구조 설계까지 풀어야 할 복잡한 프로젝트다. 물론 새 야구장을 바라는 부산 시민의 열망은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야구장 공약 하나로 다가오는 차기 부산시장 선거에서 후보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
부산은 지금 해양수도로의 도약이라는 거대한 과제 앞에 있다. 북항 재개발, 인구 감소, 부울경 메가시티, 가덕신공항 건설. 차기 부산시장이 풀어야 할 과제는 이미 차고 넘친다. 야구장은 그 큰 그림 안에서 함께 풀어야 할 하나의 퍼즐일 뿐이다. 지난 20년, 야구장 공약이 선거를 달굴수록 실현은 오히려 더 멀어졌다. 유권자들이 더 집중하고 살펴야 할 것은 공약의 화려함이 아니라, 후보의 실천 역량이다.
2026-04-13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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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지방을 위한 부동산 정책은 없다
언젠가 이런 글을 쓸 날이 올 줄 알았다. 십수 년 전, 결혼하던 당시 기자는 1억짜리 전셋집에 들어가기 위해 몇천만 원 빚을 내면서도 ‘벌벌’ 떨었는데 주변에선 3억 원 가까이 되는 집을, 무려 2억 원 넘는 빚을 내 사라고 했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 당시 30%대 ‘살인적인’ 이자에 눌려 부모님이 평생 일군 것들이 단기간에 사라지는 걸 본 뒤로는 빚이 무서웠다. 맞벌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고, 그만큼 집값이 오를 것이라는 조언을 뒤로 하고, 전셋집에 들어갔다. “집은 우리만 살기 좋으면 되지.” “집값에 베팅하는 거, 그거 투기야.”
몇 년 뒤 전셋집 바로 옆 동 집을 샀다. 전세가 싼 아파트였던 만큼, 집값도 비싸지 않았다. 학교, 교통, 신축, 아파트 브랜드는 고려 요소가 아니었다. “나만 좋으면 되지.” 그 뒤로 여러 번 집을 사 이사를 했지만, 한번도 차익을 남기진 못했다. 내내 팔리지 않아 10년 전 분양 받은 가격에서 몇 천 만원 더 싸게 팔고 나온 집도 있었다. 그 뒤로 회사에서는 ‘마이너스의 손’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집 하나 선택의 차이가 십수 년 뒤 자산 가치를 얼마나 벌려 놓았는지 보게 됐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국에 사는 평범한 직장인들에게 집은 단순한 집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많은 사람들이 집을 사기 전에 부동산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임장’을 다니고, 책과 전문가 조언을 구하고, 몇 년간 시세 흐름을 살피는가 하면 주변 공급 상황과 대출 조건, 세금, 특별공급 혜택 등 부동산 정책에 대해서도 꼼꼼히 따지며 생애 주기별 계획을 세웠다. 주택은 개인이 평생에 걸쳐 구입하는 물건 중 가장 비싼 것이고,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자산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영혼까지 끌어다 넣는다고 할까. 당장 팔 것도 아닌데, 주택 가격의 오르고 내림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택은 의·식·주에 나오는 거주 공간, 즉 필수 소비재이면서 동시에 자산이기도 하고, 요즘에는 주택연금을 통해 은퇴 후 삶을 지탱해줄 노후 연금이기도 하다. 주택은 주거 공간을 소비 대상으로 해 임대차될 수도 있고, 자산으로서의 기능을 하며 매매될 수도 있다. 전자의 가격은 임대료가 되고, 후자의 가격은 매매 가격이 된다. 정부 부동산 정책이 어려운 이유는 사유재와 공공재 개념 사이에서 집 가진 사람과 집 없는 사람 양쪽을 모두 만족시키며 적정 임대, 매매 가격을 유지하고, 이를 위해 공급까지 조절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다주택자들이 전세라는 한국만의 독특한 제도를 통해 사실상의 임대주택 공급자 역할을 해왔지만 부작용이 많아지면서 임대주택 정책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정부가 필수 소비재라는 관점에만 함몰돼 시장 원리와 대척점에 선 단편적인 주택 정책을 펼치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한 개인으로서 기자가 겪은 ‘좌충우돌기’를 털어놨다. 물론 필수 소비재 관점에서 커뮤니티 시설을 충분히 갖춘, 질 좋은 공공 임대주택을 저렴하게 공급하는 정책은 필수적이다.
서울과 지방의 집값 불균형 심화 또한 이재명 정부가 풀어내야 할 과제다. 부동산지인 김영학 본부장과 동아대 강정규 부동산학과 교수의 최근 분석에 의하면, 10년 전 2배 정도 되던 부산-서울의 집값 차이가 2026년 3월에는 4배로 껑충 뛰었다고 한다. 이 비정상적인 상황 앞에서 지방민이 느끼는 박탈감과 자산 불평등, 또 다른 지방 소외에 대한 서러움을 어루만지려면 ‘지방 미분양 해소’ 이상의 지방 부동산 대책이 필요하다. 부산에서는 ‘워케이션’이나 ‘세컨하우스’ ‘공유주택’ 관련 주택 수요들도 있다. 독일 등의 사례를 참고해 취득세, 양도세에 관한 세제 혜택이나 대출 규제를 지방 정부가 시장 상황이나 지역 여건에 맞게 탄력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부동산 자치권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실제 정부의 ‘대출 규제’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같은 대책이 서울을 겨냥한다지만, 지역에서는 어떤 여파가 미칠까 노심초사하며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 수도권의 과열을 막기 위해 쳐 놓은 그물이 부산 같은 지방의 주택 시장을 질식시키는 부작용을 수없이 목격해왔기 때문이다.
일본의 사회학자 마스다 히로야는 저서 〈지방소멸〉에서 젊은층이 지방을 떠나는 것은 일자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방에 남아도 집과 토지의 자산 가치가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이 작용한다고 짚었다. 10년 전 서울 집 팔고 부산 왔더니 결국 자산 가치에서 손해를 봤다며 한탄하는 공공기관 직원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서는 2차 공공기관 이전도 힘들어질 수 밖에 없다.
정부는 두 배, 세 배가 아닌 제곱, 세제곱 단위로 벌어지는 서울-지방 간 집값 격차, 불평등 해소를 국가적 책무로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그 정책의 근간은 수도권 집중 완화가 핵심이어야 한다.
2026-04-08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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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다시 보자, 제조업
‘공급망 위기’라는 말이 뉴스에 연일 등장한다. 석유부터 주사기까지, 알루미늄부터 종량제 봉투까지 엮여 나오는 품목들도 다종다양하다. 위기의 원인은 미국과 이란 간 전쟁이다. 앞서 코로나19 사태에서 사람들은 물류나 통상 정책에서나 등장하던 ‘공급망’을 피부로 체감했다. 이 풍요와 번영의 시대에 마스크 한 장 구하지 못해 패닉에 빠졌던 사람들은 정부가 아무리 재고량이 충분하다고 해도 쓰레기봉투를 일단 사고 본다. 소셜미디어에는 나이든 고양이에게 하루 세 번 경구 투여 주사기로 약을 줘야 하는데, 전쟁으로 자재 공급이 달려 주사기 주문이 취소됐다는 호소가 올라왔다.
공급망 위기는 기업과 산업뿐 아니라 소비자 모두의 문제다. 원재료 조달부터 제조, 물류와 최종 배송에 이르는 공급망 중 어느 한 단계라도 구멍이 생기면 제품은 생산과 운송에 차질을 빚고, 사람들은 매일같이 쓰는 물건을 구하기 어려워진다. 국가와 세계 경제의 문제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이미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를 경고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야 우리는 클릭 한 번이면 문 앞에 도착하던 물건의 생애를 새삼 들여다보게 된다. 제조업의 발견이다.
“제조업은 하수처리 시스템처럼 변질되어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하지만 일이 잘못되기 전에는 인식되지 않는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제조업연구소 소장이자 제조공학자 팀 민셜은 〈우리의 삶은 제조된다〉에서 이렇게 쓴다. 일이 잘못됐을 때 먼저 드러나는 것은 제조업의 취약성이다. 평균 폭 55km 규모 호르무즈해협을 닫았을 뿐인데 전 세계 석유와 액화천연가스(LNG)의 약 20%가 막혔다. 중동에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아시아는 타격이 더 크다.
문제는 이번 위기가 봉합된다고 해도 취약성은 언제든 불거질 수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정부가 물러나고 미국과 이란이 전쟁을 끝내도 자원과 기술을 둘러싼 각국의 패권 경쟁과 보호주의 확대 기조는 계속된다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또 다른 팬데믹이 언제 다시 인류를 덮칠지도 알 수 없다. 기후 변화도 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폭염이나 가뭄은 원자재 수급부터 생산성 저하, 물류 경로 변동까지 글로벌 공급망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제조업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과거에는 저비용 고품질 제품을 빠르게 제공하려면 재고와 여분의 공급업체 같은 모든 ‘낭비’를 최대한 줄여야 했다. 그러다 보니 공급망 차질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졌다. 위 책에서는 이를 “저비용과 즉시성만 쫓다가 플랜 B가 없는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요약한다. 실제로 코로나 팬데믹 이후 많은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적시생산(JIT, 저스트인타임)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대비생산(JIC, 저스트인케이스)으로 전환했거나 두 방식을 병행하는 추세다.
가까운 곳에서 물건을 생산할 수 있는 ‘현지 생산 능력’과 국가적인 ‘제조 역량’도 재평가를 받고 있다. 책에 소개된 ‘인공호흡기 챌린지’는 단적인 사례다. 코로나19 당시 영국 정부는 하루 생산량 5대에 불과하던 인공호흡기의 수요가 폭증하자 여러 분야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인공호흡기 설계안을 공모했는데, 그 결과 불과 3개월 만에 영국에서 인공호흡기 1만 4000대가 더 제조됐다. 같은 맥락에서 제3세계로 이전한 공장을 다시 자국이나 인근 지역으로 옮겨오는 ‘리쇼어링’도 현재진행형이다.
이제 부산 제조업을 다시 볼 차례다. 부산은 산업화 시대 대표 제조업 도시였지만, 전국 매출 100대 기업에서 부산 기업은 실종된 지 오래다. 한때 지역내총생산(GRDP)의 30% 이상을 차지하던 제조업 비중은 2023년 17.4% 수준으로 줄었다. 지난해 부산의 제조업 성장률은 17대 시도 중 꼴찌였다. 자동차와 철강 등 주력 산업은 미국 관세 압박에 중동 사태가 겹쳐 신음한다. 2024년 부산상공회의소가 낸 보고서를 보면 부산 제조업은 기술수준으로 볼 때도 고위기술군 비중(6.1%)이 전국 평균(24.0%)보다 한참 낮다.
그럼에도 제조업은 부산의 경쟁력이다. 하버드대 교수인 게리 피사노와 윌리 시가 미국 경제를 두고 지적한 “현재의 저부가가치 제조업은 미래의 혁신적 신제품을 위한 씨앗을 품고 있다”는 말은 부산에도 적용된다. 기계·부품 중심의 탄탄한 제조업 기반을 인공지능(AI), 로봇 기술과 결합해 디지털로 전환하고, 항만과 해양이라는 자산과 연계한다면 부산은 제조업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연관된 서비스업의 고용 창출까지 이끌 수 있다.
부산이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을 통해 도약하려는 모델인 싱가포르도 금융 중심지의 저변에는 첨단 산업 중심의 제조업 육성 정책이 있었다. 다가오는 지방선거에서도 돔 구장이나 테마파크 유치 공약만큼이나 부산 제조업 육성 방안을 약속하는 후보가 필요하다.
2026-04-06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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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그 2년은 무엇이었을까
사람을 믿지 마라, 상황을 믿어라. 작은 유혹과 풍파에도 바뀌는 사람 마음을 이만큼 잘 표현한 말은 없다. 언제나 원치 않는 상황은 사람을 본심과 다른 방향으로 끌고간다.
사람이 상황에 끌려가는 부조리함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게 선거다. 조변석개하는 선거철이면 유권자는 그간의 서사와 인연을 망치는 낯선 진심을 마주한다. 야당 텃밭이던 부산의 마음을 돌리려 연일 러브콜을 보내던 여당의 진심이 그랬다.
후끈 달아오른 여당발 '5극3특' 이슈는 얼어붙은 부산의 마음을 녹였던 게 사실이다. 남부권에서 부산과 울산, 경남을 묶어 수도권과 대등한 경제 축으로 성장시키자고 했다. 그 주장에 누가 토를 달 수 있을까.
연초부터는 청와대가 조기 행정통합을 강공 일변도로 밀어붙였다. 그만한 명분이 있으리라 믿었다. 거기에 여당은 20조 원의 달콤한 인센티브까지 내놓겠다고 제안했던 터다.
그러나 러브콜이 이어지는 그 순간에도 5극3특과 궤를 같이하는 글로벌허브도시 특별법은 국회 표류 중이었다. 2년 넘게 이어진 부산시의 호소에도 상임위 소위원회에 상정조차 되지 못한 것이다. 그 상황은 부산을 향한 여당의 진심을 의심하기 충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산 출신 윤건영 의원의 법안심사소위가 2년 넘게 멀쩡한 법안을 미아 신세로 만들어 놓았다.
특별법이 발의됐던 2024년 1월만 해도 수도권과 중앙 부처의 반발은 충분히 예상했다. 하지만 여당이 상임위에서 법안 하나를 붙들고 놔주지 않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미상정 이유는 철마다 바뀌어서 일일이 기억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법안 설명을 야당에서 제대로 안 했다'라고 몇 달을 버티더니 그 뒤에는 '부산 외 다른 지역 발전을 위한 법안과 같이 심사해야 한다'라고 했다.
결국 지난달 11일 입법 공청회가 열리면서 법안 심사는 물꼬를 텄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일부 여당 의원은 '지방선거 전에는 법안을 처리하면 안 된다'라며 어깃장을 놨단다. 이쯤 되면 더는 갖다 붙일 변명도, 진심을 숨기고 싶은 마음도 없다는 소리다.
6·3 지방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출마를 고심하던 여당의 전재수 의원이 2일 출사표를 던진다. 선거에 발을 담갔으니 당시 공동으로 법안을 발의한 전 의원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분위기는 묘하게 바뀌었다.
전 의원이 지난달 24일 당 원내대표단을 찾아 특별법의 조속한 통과를 요청했다. 여당 원내대표단은 "부산을 글로벌 허브도시로 키우는데 앞장서겠다"라고 호응했다. 2년간 표류하던 법안은 전 의원의 한 마디에 하루 만에 소위를 통과했다.
맥락 없이 보자면 전 의원은 부산의 구세주다. 17명의 국힘 의원들로도 중과부적이었던 민원을 단숨에 해결한 것이다. 그러나 전 의원의 '17대 1' 무용담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이전까지 보여준 여당의 행태 때문이다. 야당 시장이 제안했다는 이유로 갖은 트집을 잡던 특별법 법안이 하루아침에 소위를 통과했으니 그 진심을 누가 그대로 믿어줄까. 진심이 아니라 상황을 믿을 수 밖에 없는 꼴이다.
'낙선 전문'이라는 달갑지 않은 수식어에도 굴하지 않고 전 의원은 자전거로 북구의 바닥 민심을 다졌다. 그 스토리는 당시 북구를 출입하던 초년병 기자에게 큰 울림을 줬던 기억이 난다. 부산의 정서를 살피고 거친 언사도 자제하던 모습이 부산에서 민주당 3선 의원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그의 큰 무기였다.
그런 전 의원이 이제 와서 정치공학 운운하며 이런 모욕적인 판을 짰으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만으로도 그는 시장 선거에 충분한 경쟁력을 확보한 후보다.
전 의원의 활약에도 글로벌허브도시 특별법이 또다시 지난달 30일 법사위에서 제동이 걸린 모양이다. 다음 날에는 대통령 입에서 "부산만 어떻게 특별법을 만들어 주느냐"는 말까지 나왔다. 재차 전 의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몰아주려는 계산이라면 지금이라도 그만둬야 한다. 그건 여당 프리미엄이 아니라 여당 페널티가 될테니 말이다.
그것보다는 누구라도 납득할만한 여당 프리미엄을 전 의원은 제시해야 한다. 해수부와 HMM 등 그가 꺼내들 카드는 이미 차고도 남는다.
여당 지도부도 마찬가지다. 지금이라도 글로벌허브도시 특별법의 통과에 초당적 지원을 해야 한다. 그게 지난 2년간 겪은 부산의 설움을 달래고, 부산에 '진심'을 내보이는 길이란 걸 알아야 한다.
2026-04-01 [1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