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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내 데이터로 돈 버는 기업, 데이터 배당 어떤가
최근 미국 빅테크 기업 메타가 새로운 AI 모델 ‘뮤즈 스파크’를 발표했다. 메타는 뮤즈 스파크가 ‘개인 맞춤형 AI’를 지향한다고 밝혔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사용자의 사용 경험을 AI가 학습해 ‘개인화 경험’을 제공한다는 설명이다. 메타가 수집한 방대한 양의 사용자 정보가 AI 서비스에서도 수익화의 핵심 요소가 되는 셈이다.
메타는 올해 광고 수익이 처음으로 구글을 넘어설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AI 기반 맞춤형 추천 시스템으로 광고 효율을 높인 결과다. AI 추천 기능으로 메타의 숏폼 서비스인 릴스 시청시간도 30% 이상 증가했다. 이는 광고 노출 확대와 수익 증가로 이어졌다. 메타는 35억 명 이상의 1일 사용자를 확보하고 있다.
페이스북의 ‘좋아요’ ‘공유’ ‘댓글’에서 가입자 위치정보, 기기 정보 등은 메타의 ‘초정밀 개인 데이터’로 변한다. 메타는 이를 기반으로 ‘타깃 광고’를 판매 막대한 수익을 올린다. 구글도 가입자의 검색어, 유튜브 사용 행태, 지도 사용 행태 등을 분석해 타깃 광고를 판매한다. 아마존도 가입자의 구매 이력, 검색 기록, 장바구니 데이터, 배송 주소, 동영상 서비스(아마존 프라임) 시청 이력 등으로 구매 의도를 분석해 수익으로 전환한다. 아마존의 경우 실제 구매 행동 데이터라는 점에서 더 높은 광고 단가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플랫폼 기업 역시 마찬가지다. 검색어, 쇼핑, 지도, 블로그, 카페 등의 이용 데이터를 기반으로 개인화 검색·디스플레이 광고를 판매해 수익을 올린다.
빅테크 기업들이 수익화에 열을 올리는 개인 데이터는 실제로 어느 정도의 시장 가치가 있을까. 사이버보안 기업 프로톤(Proton)의 분석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미국 거주자의 개인 데이터는 구글과 메타(페이스북)에서만 연간 최소 700달러의 수익을 만든다.
빅테크 수익의 원천인 개인 데이터는 ‘브로커’를 통해 대규모로 거래되고 있다. 시장분석기관에 따르면 글로벌 데이터 브로커 시장 규모는 2024년 기준 약 2704억 달러로 평가됐다. 전 세계적으로 최대 5000개의 데이터 브로커가 활동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전체 데이터 브로커 시장에서 68%는 소비자 데이터라는 분석이 나온다.
국내에서도 데이터 거래는 거대 산업으로 성장했다. 한국데이터산업협회의 ‘2025 데이터산업 백서’에 따르면 국내 ‘데이터 판매 및 중개 서비스업’ 시장규모는 2024년 기준 3조 3818억 원으로 추산됐다.
이처럼 개인 데이터가 빅테크의 수익화 원천으로 활용되고 대규모로 거래되는 상황에서도 데이터의 주인인 개인은 자신의 데이터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빅테크 기업은 개인 데이터 수집과 활용의 대가로 자신들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SNS 등 서비스를 공짜로 제공하는 대신 개인 데이터를 사용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개인들이 자신과 관련된 수많은 정보를 팔아서 빅테크의 서비스를 이용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개인들이 자기 데이터의 시장 가치를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서비스 대가로 공짜로 주고 있다는 설명이다.
개인이 자기 데이터를 직접 판매해 수익을 창출하는 것은 현행 제도에서 불가능하다. 현재 정부 주도로 ‘마이데이터’ 제도가 시행되고 있지만 개인이 본인 정보 열람에 대한 권한을 일정 부분 행사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와 관련, 해외에선 개인에게 데이터 사용료를 직접 지불하는 여러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데이터 배당’(data dividend) 제도가 제안됐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개빈 뉴섬이 제안한 데이터 배당은 개인 데이터로 창출된 부를 기여자인 개인에게 배당금 형식으로 되돌려 주는 방식이다. 데이터 의존성에 따라 기업에 세금을 부과, 이를 재원으로 공공재에 투자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영국에서는 민간 기업이 운영하는 데이터 거래 플랫폼에 개인이 직접 참여하는 방식이 제안됐다. 개인이 자신의 금융, 의료, 신체활동, SNS 활동 등 정보를 직접 저장, 관리할 수 있고 데이터 수요처에 이런 데이터 사용을 허락하는 대신 보상을 받는 방식이다.
개인 데이터 수익화에 대한 개인 보상은 규제 방식으로 시행될 경우 자국 기업의 부담만 커지는 ‘역차별’을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때문에 개인이 자발적으로 데이터를 제공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민간 시장 육성이 중요하다. 이 경우 기업도 데이터 수집과 거래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정부가 태양광 산업에서 추진하는 ‘햇빛연금’처럼 개인 데이터 사용 대가에도 관심을 가진다면 데이터 배당도 현실화될 수 있다.
김종우 서울경제부 부장 kjongwoo@busan.com
2026-04-22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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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인간과 AI의 대결, 부산에서 하면 어떨까
2016년 3월 서울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바둑기사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AI)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의 대결은 단순한 바둑 승부를 넘어 AI 시대의 서막을 알린 사건이었다. 최고의 바둑 인간 실력자와 최고의 바둑 AI 프로그램의 대결로 주목받았고, 최종 결과는 알파고가 4승 1패로 승리했다. 당시 대국은 인간과 AI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의한 역사적 이벤트로 평가된다. 특히 알파고의 승리는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직관’과 ‘창의성’의 영역에서도 AI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줬다.
당시 대국은 전 세계로 생중계된 글로벌 이벤트였다. 국내에서는 공중파와 인터넷으로 실시간 중계됐고, 유튜브 등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해외에서도 시청 가능했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해설까지 별도로 제공돼 글로벌 시청자의 이목을 끌었다. 특히 알파고를 개발한 구글 딥마인드가 직접 유튜브 라이브 스트리밍을 하면서, AI에 관심 있는 전 세계 시청자들이 이날 대결을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대국이 열렸던 서울 포시즌스호텔은 대규모 국제행사를 치를 수 있는 보안·방송 인프라는 물론, VIP 동선 관리도 쉬운 환경 등을 고루 갖췄다는 점에서 구글 딥마인드가 찾던 대국 장소로 안성맞춤이었다. 행사를 무사히 치른 포시즌스호텔은 전 세계 생중계 화면에 자연스럽게 노출되며 ‘AI의 역사적 순간이 열린 도시’ 서울에서 역사적 이벤트와 결합한 브랜딩 효과를 거뒀다. 서울 포시즌스호텔은 많은 국내외 취재진이 몰려들었고 TV, 유튜브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대국이 생중계되며 최대 1000억 원 이상의 홍보 효과를 누렸다는 분석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인류사에 또 하나의 상징적인 대결이 예고됐다.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AI 기업 xAI의 차세대 모델 ‘그록5’와 세계 최고 e스포츠 팀 중 하나인 T1,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페이커의 맞대결이다. 바둑에서 시작된 ‘AI 대 인간’ 구도가 이제는 팀 기반의 복잡한 전략 게임인 리그오브레전드(LoL)로 확장되는 셈이다. 미국-이란 중동 전쟁 등의 국제적인 변수가 발생하며 이 이벤트 매치에 대한 구체적인 일정 등에 대한 논의가 지연되고 있지만, 이 대결이 현실화한다면 그 상징성과 파급력은 10년 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을 뛰어넘을 가능성이 크다. 바둑이 개인의 직관과 계산을 겨루는 경기였다면, LoL은 실시간 협력과 전략, 변수 대응이 결합된 고차원적 게임이기 때문이다. AI가 인간의 협력과 변수 대응 등의 영역에서 인간을 넘어설 수 있는지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 수밖에 없다.
만약 이 역사적 대결이 올해 올린다면, 그 장소는 부산이 됐으면 한다. 부산이 대결 장소로 최적인 당위성은 충분하다. 부산은 이미 국내 대표 게임 도시로 자리 잡았다. 매년 국제 게임 전시회인 ‘지스타’가 매년 11월 열린다. 2009년부터 부산에서 열린 지스타는 세계적인 게임 축제로 자리 잡았고, 전 세계 게임 기업과 유저들이 모이는 플랫폼이 됐다.
특히 부산은 국제 행사를 치를 수 있는 인프라를 충분히 갖췄다. 벡스코와 오디토리움에서는 대형 e스포츠 이벤트를 열 수 있다. APEC 누리마루와 서면 삼정타워에 있는 e스포츠 아레나도 최적의 장소다. 부산의 특급호텔들 역시 VIP 보안과 동선 확보, 중계 인프라를 갖춰 역사적 이벤트를 충분히 치러낼 수 있다. 해운대를 중심으로 한 숙박·관광 인프라는 대규모 방문객을 수용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다. 부산은 이미 APEC 정상회의와 국제기구 회의인 ITU 전권회의 등을 성공적으로 치렀고,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도 성공적으로 치러낸 검증된 도시다.
인간과 AI의 역사적 이벤트를 치를 무대가 부산이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지만,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선 부산시와 지역 정치권이 이를 어젠다로 이끌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단순한 ‘장소 제공’을 넘어 도시 차원의 전략적 접근도 필요하다. 부산시와 지역 정치권은 당리당략과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부산에 이벤트를 유치하기 위해 협력하고, 부산에서 왜 이번 대결이 이뤄져야 하는지 강점과 당위성을 정부에 충분히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글로벌 AI 기업과 방송사, 스폰서 등과 소통 창구를 직접 만들고 정부 차원의 외교적 지원과 정책적 뒷받침도 이끌어 내야 한다.
10년 전 서울에서 시작된 인공지능 시대의 상징적 장면이 또 한 번 펼쳐질 기회가 눈앞에 와 있다. 6·3 지방선거도 코앞으로 다가왔다. 차기 부산시장과 지역 정치권이 이벤트 유치를 통해 부산의 도시 위상을 한 단계 더 높일 수 있는 어젠다를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종횡무진 활약하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길 기대한다.
2026-04-20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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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늘 피가 모자라
얼마 전 ‘헌혈의 집’ 문을 두드렸다. 기자가 헌혈하기 위해 팔을 걷은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10년도 더 전 일이라 기억에서 가물가물했다.
기자가 헌혈에 나선 건 해군작전사령부 이현주 하사 취재 때문이다. 이 하사는 올해 2월 헌혈 100회 달성 기록으로 ‘헌혈 명예장’을 수상했다. 30대 초반의 나이임에도 벌써 100번째 헌혈을 기록한 게 예사롭지 않았다. 기사를 쓰면서 나 스스로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매년 동절기가 되면 혈액이 부족하다는 뉴스가 신문과 방송에서 나온다. 그런 뉴스를 접하고, 또 생산하는 언론사에 근무하면서 애써 헌혈을 외면해 왔던 게 사실이다. “헌혈이 가능한 만 69세까지 생명을 나누고 싶다”는 이 하사의 말은 기자에게 작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나 스스로 팔을 걷어붙이고 싶었고, 늦었지만 그 첫걸음을 뗐다.
혈액은 인공적으로 만들 수 없어 대체할 물질도 없다. 오직 건강한 사람의 자발적인 헌혈만이 수혈이 필요한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몸 밖으로 나온 혈액은 유효기간이 최대 35일로 짧다. 특히 혈소판의 유효기간은 단 5일에 그쳐 장기 보관이 불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선 하루 평균 5000~7000명의 환자가 수혈을 필요로 한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헌혈 참여율은 인구 대비 5%도 안 된다. 대한적십자사 통계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국내 헌혈 실인원이 126만 4525명인데, 이는 헌혈가능인구(16~69세) 대비 3.27%에 불과한 참여율이다.
보통 수혈은 대형 교통사고 등 중증 외상 응급환자에게 시급하나, 실제 통계를 보면 암 환자(약 40%)와 일반 수술 환자(약 30%)에게도 많이 쓰인다. 조산아와 미숙아를 살리는 데도 혈액은 필수적이다. 헌혈은 어쩌다 발생하는 사고에 대비하는 것을 넘어, 평범한 이웃들이 병원에서 온전히 치료받고 삶을 지탱하게 해 주는 가장 필수적인 ‘의료 인프라’라 할 수 있다.
혈액은 겨울철에 특히 부족하다. 유행성 독감 등 호흡기 질환이 돌면서 헌혈 적격자가 크게 줄어드는 탓이다. 헌혈 인구의 불균형 문제도 크다. 과거 단체 헌혈 위주로 혈액 사업이 진행된 영향으로, 현재 헌혈자의 60~70%가 10·20대 학생과 군인·경찰·회사 등 단체에 집중돼 있다. 학교가 방학에 들어가면 혈액 보유량이 뚝 떨어지는 현상이 매번 반복된다.
여기에 저출산 고령화가 가속화되면서 청년 인구는 줄어드는 반면, 수혈이 더 필요한 고령층 인구는 가파르게 늘고 있다. 헌혈과 수혈의 ‘미스매치’가 가속화되는 것도 고령 사회가 직면한 문제다.
혈액의 적정 보유량은 5일분이라고 한다. 겨울철에는 ‘주의’ 단계인 3일분 미만으로 떨어지는 날들이 잦다. 하지만 겨울이 지난 지금도 적정 혈액 보유량을 채우는 날이 많지 않다는 게 혈액원 관계자의 얘기다. 겨울철뿐만 아니라 사계절 내내 피가 모자라는 게 현실이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혈액 수급 최전선에 있는 실무자들은 한 팩의 피라도 더 구하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지난 2월 부산혈액원에선 헌혈자에게 ‘두바이 쫀득 쿠키(두쫀쿠)’ 증정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다. 지역 카페 사장님들도 핼액원을 돕고자 두쫀쿠 기부에 나섰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이 덕분에 이벤트 기간 헌혈 인원이 평소보다 두 배가량 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이벤트에 불과하다. 혈액 부족은 모두가 함께 책임져야 할 사회적 과제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혈액 보유 현황판을 볼 수 있다. 매일 혈액 보유 현황이 업그레이드된다. 기사를 쓰는 14일도 적정 보유량인 5일에 못 미치는 것(3.6일)으로 나온다. 5일 이상의 안정적인 보유량을 확보할 있도록 적극적인 개인 헌혈 참여가 필요하다. 특히 30대 이상 중장년층의 참여가 절실하다.
“한 번의 헌혈로 세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란 말이 있다. 전혈(적혈구·백혈구·혈장·혈소판 등 혈액의 전체 성분) 헌혈을 하면 혈장, 혈소판, 적혈구 등 혈액 제재로 분리돼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이렇게 보면 헌혈은 가장 ‘가성비’ 좋은 나눔 방식인 셈이다.
최근 헌혈 200회라는 대기록을 달성해 ‘명예대장’에 이름을 올린 김형찬 씨는 “습관이 되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고귀한 실천이 헌혈”이라며 많은 이들의 동참을 당부하기도 했다. 만약 당신이 10~15분 정도만 시간을 내 팔을 걷어붙인다면 누군가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
2026-04-15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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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20년 묵은 부산 야구장 신축 논의
벌써 20년이다. ‘구도 부산’에 새 야구장을 짓자는 논의가 정치권에서 등장한 기간이다. 그동안 부산시장은 4명이나 바뀌었지만, 부산 야구장 신축 공사는 착공은 커녕 첫 삽조차 뜨지 못했다. 부산 정치권의 야구장 신축 논의가 지지부진한 사이, 그동안 한국에는 6개 구장이 새로 지어졌다. 새 구장이 들어선 지역에서도 지방선거가 치러졌다. 그 지자체와 부산이 달랐던 건 공약이 아니라 실행 여부였다.
부산에서 야구장을 새로 짓자는 논의가 처음 시작된 것은 2006년이다. 당시 한나라당 부산시장 후보 경선에 나선 고 권철현 국회의원이 북항 재개발 지역에 해변 야구장을 짓자는 공약을 세운 것이다. 당시 북항 야구장 추진은 권 의원이 당내 경선에서 탈락하며 소문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1985년 개장한 사직야구장을 재건축하자는 제안이 2010년에 본격화됐다. 당시 3선 부산시장이 된 허남식 시장이 사직야구장을 돔구장으로 짓겠다고 언급했다. 허 시장은 여러차례 돔구장을 언급했지만 구체적인 행정 추진은 없었다. 비슷한 시기 풍산그룹이 해운대구 반여동 해운대사업장에 돔구장을 짓겠다며 기본 설계까지 진행했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지지부진하던 야구장 신축 사업에 다시 불이 붙은 것은 2015년 서병수 시장 때다. 서 시장은 롯데 자이언츠 구단주 신동빈 롯데 회장과 만나 북항 야구장을 짓기로 했다. 부산시와 롯데그룹 간 실무진 협의도 진행됐다. 이듬해인 2018년 부산시는 사직야구장 부지에 개폐형 돔구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계획 발표 3개월 뒤 서 시장이 부산시장 선거에서 낙선하며 야구장 신축은 동력을 잃었다.
새롭게 부산시장이 된 오거돈 시장은 서 시장의 사직구장 돔구장 계획을 전면 백지화했다. 대신 북항에 개방형 야구장을 짓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하지만 오 시장은 시장 취임 이듬해에 야구장 신축 사업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기로 했다. 야구장 사업이 재검토에 들어간 사이, 최종 결정권자인 오 시장은 개인의 성추행 사태로 부산시청을 떠났다.
2021년 부산시장이 된 박형준 부산시장은 다시 사직야구장을 돔구장이 아닌 개방형 야구장으로 짓기로 방향을 정했다. 박 시장은 두 번째 도전 만에 정부 공모사업을 통해 국비를 확보했고, 사직야구장을 대체할 구장까지 지정했다. 야구장 신축 논의가 진행된 이후 가장 진전된 모습이었다. 이런 사이 부산은 오는 6월 또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다.
이번 부산시장 선거에 나선 두 후보는 모두 북항 야구장 신축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박형준 현 시장은 북항 야구장 신축에 부정적이지만 최근 입장을 바꿨다. 북항에 야구장을 짓고 프로야구단까지 유치하겠다는 공약을 세웠다. 전재수 의원은 자신이 대표 발의한 항만공사법 개정안을 바탕으로 북항 돔구장 건설을 추진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20년째 이어진 부산 야구장 신축 논의의 흐름을 정리해본다. 역대 부산시장들은 ‘노후 문제 제기→지방 선거 공약 발표→당선 후 용역→재원 마련·롯데 구단 협의 난항→시장 교체 후 무산’의 패턴을 반복했다. 20년간 지방선거는 부산 야구장 신축 계획을 일으킨 기폭제이기도, 계획을 뒤엎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부산시장 선거에서 북항 야구장, 돔구장, 사직야구장 재건축 등은 당시 부산시장으로 나선 여야 후보들의 선거 공약 중 대표 공약이었다.
하지만 2026년 오늘의 모습은 냉혹하다. 이미 사용 중인 6개 야구장은 차치한다. 서울 잠실야구장은 올 시즌을 끝으로 철거돼 2032년 돔구장으로 바뀐다. 인천은 2028년 시즌부터 지금 한창 공사 중인 새 돔구장에서 경기를 시작한다. 부산은 신축 야구장이 없는 유일한 프로야구 도시가 된다.
20년이라는 긴 세월이 말해준다. 부산의 야구장 신축 문제는 어느 한 시장의 의지나 공약 하나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야구장 신축은 재원 조달, 구단과의 협의, 사업 구조 설계까지 풀어야 할 복잡한 프로젝트다. 물론 새 야구장을 바라는 부산 시민의 열망은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야구장 공약 하나로 다가오는 차기 부산시장 선거에서 후보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
부산은 지금 해양수도로의 도약이라는 거대한 과제 앞에 있다. 북항 재개발, 인구 감소, 부울경 메가시티, 가덕신공항 건설. 차기 부산시장이 풀어야 할 과제는 이미 차고 넘친다. 야구장은 그 큰 그림 안에서 함께 풀어야 할 하나의 퍼즐일 뿐이다. 지난 20년, 야구장 공약이 선거를 달굴수록 실현은 오히려 더 멀어졌다. 유권자들이 더 집중하고 살펴야 할 것은 공약의 화려함이 아니라, 후보의 실천 역량이다.
2026-04-13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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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지방을 위한 부동산 정책은 없다
언젠가 이런 글을 쓸 날이 올 줄 알았다. 십수 년 전, 결혼하던 당시 기자는 1억짜리 전셋집에 들어가기 위해 몇천만 원 빚을 내면서도 ‘벌벌’ 떨었는데 주변에선 3억 원 가까이 되는 집을, 무려 2억 원 넘는 빚을 내 사라고 했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 당시 30%대 ‘살인적인’ 이자에 눌려 부모님이 평생 일군 것들이 단기간에 사라지는 걸 본 뒤로는 빚이 무서웠다. 맞벌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고, 그만큼 집값이 오를 것이라는 조언을 뒤로 하고, 전셋집에 들어갔다. “집은 우리만 살기 좋으면 되지.” “집값에 베팅하는 거, 그거 투기야.”
몇 년 뒤 전셋집 바로 옆 동 집을 샀다. 전세가 싼 아파트였던 만큼, 집값도 비싸지 않았다. 학교, 교통, 신축, 아파트 브랜드는 고려 요소가 아니었다. “나만 좋으면 되지.” 그 뒤로 여러 번 집을 사 이사를 했지만, 한번도 차익을 남기진 못했다. 내내 팔리지 않아 10년 전 분양 받은 가격에서 몇 천 만원 더 싸게 팔고 나온 집도 있었다. 그 뒤로 회사에서는 ‘마이너스의 손’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집 하나 선택의 차이가 십수 년 뒤 자산 가치를 얼마나 벌려 놓았는지 보게 됐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국에 사는 평범한 직장인들에게 집은 단순한 집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많은 사람들이 집을 사기 전에 부동산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임장’을 다니고, 책과 전문가 조언을 구하고, 몇 년간 시세 흐름을 살피는가 하면 주변 공급 상황과 대출 조건, 세금, 특별공급 혜택 등 부동산 정책에 대해서도 꼼꼼히 따지며 생애 주기별 계획을 세웠다. 주택은 개인이 평생에 걸쳐 구입하는 물건 중 가장 비싼 것이고,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자산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영혼까지 끌어다 넣는다고 할까. 당장 팔 것도 아닌데, 주택 가격의 오르고 내림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택은 의·식·주에 나오는 거주 공간, 즉 필수 소비재이면서 동시에 자산이기도 하고, 요즘에는 주택연금을 통해 은퇴 후 삶을 지탱해줄 노후 연금이기도 하다. 주택은 주거 공간을 소비 대상으로 해 임대차될 수도 있고, 자산으로서의 기능을 하며 매매될 수도 있다. 전자의 가격은 임대료가 되고, 후자의 가격은 매매 가격이 된다. 정부 부동산 정책이 어려운 이유는 사유재와 공공재 개념 사이에서 집 가진 사람과 집 없는 사람 양쪽을 모두 만족시키며 적정 임대, 매매 가격을 유지하고, 이를 위해 공급까지 조절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다주택자들이 전세라는 한국만의 독특한 제도를 통해 사실상의 임대주택 공급자 역할을 해왔지만 부작용이 많아지면서 임대주택 정책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정부가 필수 소비재라는 관점에만 함몰돼 시장 원리와 대척점에 선 단편적인 주택 정책을 펼치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한 개인으로서 기자가 겪은 ‘좌충우돌기’를 털어놨다. 물론 필수 소비재 관점에서 커뮤니티 시설을 충분히 갖춘, 질 좋은 공공 임대주택을 저렴하게 공급하는 정책은 필수적이다.
서울과 지방의 집값 불균형 심화 또한 이재명 정부가 풀어내야 할 과제다. 부동산지인 김영학 본부장과 동아대 강정규 부동산학과 교수의 최근 분석에 의하면, 10년 전 2배 정도 되던 부산-서울의 집값 차이가 2026년 3월에는 4배로 껑충 뛰었다고 한다. 이 비정상적인 상황 앞에서 지방민이 느끼는 박탈감과 자산 불평등, 또 다른 지방 소외에 대한 서러움을 어루만지려면 ‘지방 미분양 해소’ 이상의 지방 부동산 대책이 필요하다. 부산에서는 ‘워케이션’이나 ‘세컨하우스’ ‘공유주택’ 관련 주택 수요들도 있다. 독일 등의 사례를 참고해 취득세, 양도세에 관한 세제 혜택이나 대출 규제를 지방 정부가 시장 상황이나 지역 여건에 맞게 탄력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부동산 자치권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실제 정부의 ‘대출 규제’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같은 대책이 서울을 겨냥한다지만, 지역에서는 어떤 여파가 미칠까 노심초사하며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 수도권의 과열을 막기 위해 쳐 놓은 그물이 부산 같은 지방의 주택 시장을 질식시키는 부작용을 수없이 목격해왔기 때문이다.
일본의 사회학자 마스다 히로야는 저서 〈지방소멸〉에서 젊은층이 지방을 떠나는 것은 일자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방에 남아도 집과 토지의 자산 가치가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이 작용한다고 짚었다. 10년 전 서울 집 팔고 부산 왔더니 결국 자산 가치에서 손해를 봤다며 한탄하는 공공기관 직원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서는 2차 공공기관 이전도 힘들어질 수 밖에 없다.
정부는 두 배, 세 배가 아닌 제곱, 세제곱 단위로 벌어지는 서울-지방 간 집값 격차, 불평등 해소를 국가적 책무로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그 정책의 근간은 수도권 집중 완화가 핵심이어야 한다.
2026-04-08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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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다시 보자, 제조업
‘공급망 위기’라는 말이 뉴스에 연일 등장한다. 석유부터 주사기까지, 알루미늄부터 종량제 봉투까지 엮여 나오는 품목들도 다종다양하다. 위기의 원인은 미국과 이란 간 전쟁이다. 앞서 코로나19 사태에서 사람들은 물류나 통상 정책에서나 등장하던 ‘공급망’을 피부로 체감했다. 이 풍요와 번영의 시대에 마스크 한 장 구하지 못해 패닉에 빠졌던 사람들은 정부가 아무리 재고량이 충분하다고 해도 쓰레기봉투를 일단 사고 본다. 소셜미디어에는 나이든 고양이에게 하루 세 번 경구 투여 주사기로 약을 줘야 하는데, 전쟁으로 자재 공급이 달려 주사기 주문이 취소됐다는 호소가 올라왔다.
공급망 위기는 기업과 산업뿐 아니라 소비자 모두의 문제다. 원재료 조달부터 제조, 물류와 최종 배송에 이르는 공급망 중 어느 한 단계라도 구멍이 생기면 제품은 생산과 운송에 차질을 빚고, 사람들은 매일같이 쓰는 물건을 구하기 어려워진다. 국가와 세계 경제의 문제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이미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를 경고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야 우리는 클릭 한 번이면 문 앞에 도착하던 물건의 생애를 새삼 들여다보게 된다. 제조업의 발견이다.
“제조업은 하수처리 시스템처럼 변질되어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하지만 일이 잘못되기 전에는 인식되지 않는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제조업연구소 소장이자 제조공학자 팀 민셜은 〈우리의 삶은 제조된다〉에서 이렇게 쓴다. 일이 잘못됐을 때 먼저 드러나는 것은 제조업의 취약성이다. 평균 폭 55km 규모 호르무즈해협을 닫았을 뿐인데 전 세계 석유와 액화천연가스(LNG)의 약 20%가 막혔다. 중동에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아시아는 타격이 더 크다.
문제는 이번 위기가 봉합된다고 해도 취약성은 언제든 불거질 수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정부가 물러나고 미국과 이란이 전쟁을 끝내도 자원과 기술을 둘러싼 각국의 패권 경쟁과 보호주의 확대 기조는 계속된다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또 다른 팬데믹이 언제 다시 인류를 덮칠지도 알 수 없다. 기후 변화도 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폭염이나 가뭄은 원자재 수급부터 생산성 저하, 물류 경로 변동까지 글로벌 공급망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제조업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과거에는 저비용 고품질 제품을 빠르게 제공하려면 재고와 여분의 공급업체 같은 모든 ‘낭비’를 최대한 줄여야 했다. 그러다 보니 공급망 차질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졌다. 위 책에서는 이를 “저비용과 즉시성만 쫓다가 플랜 B가 없는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요약한다. 실제로 코로나 팬데믹 이후 많은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적시생산(JIT, 저스트인타임)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대비생산(JIC, 저스트인케이스)으로 전환했거나 두 방식을 병행하는 추세다.
가까운 곳에서 물건을 생산할 수 있는 ‘현지 생산 능력’과 국가적인 ‘제조 역량’도 재평가를 받고 있다. 책에 소개된 ‘인공호흡기 챌린지’는 단적인 사례다. 코로나19 당시 영국 정부는 하루 생산량 5대에 불과하던 인공호흡기의 수요가 폭증하자 여러 분야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인공호흡기 설계안을 공모했는데, 그 결과 불과 3개월 만에 영국에서 인공호흡기 1만 4000대가 더 제조됐다. 같은 맥락에서 제3세계로 이전한 공장을 다시 자국이나 인근 지역으로 옮겨오는 ‘리쇼어링’도 현재진행형이다.
이제 부산 제조업을 다시 볼 차례다. 부산은 산업화 시대 대표 제조업 도시였지만, 전국 매출 100대 기업에서 부산 기업은 실종된 지 오래다. 한때 지역내총생산(GRDP)의 30% 이상을 차지하던 제조업 비중은 2023년 17.4% 수준으로 줄었다. 지난해 부산의 제조업 성장률은 17대 시도 중 꼴찌였다. 자동차와 철강 등 주력 산업은 미국 관세 압박에 중동 사태가 겹쳐 신음한다. 2024년 부산상공회의소가 낸 보고서를 보면 부산 제조업은 기술수준으로 볼 때도 고위기술군 비중(6.1%)이 전국 평균(24.0%)보다 한참 낮다.
그럼에도 제조업은 부산의 경쟁력이다. 하버드대 교수인 게리 피사노와 윌리 시가 미국 경제를 두고 지적한 “현재의 저부가가치 제조업은 미래의 혁신적 신제품을 위한 씨앗을 품고 있다”는 말은 부산에도 적용된다. 기계·부품 중심의 탄탄한 제조업 기반을 인공지능(AI), 로봇 기술과 결합해 디지털로 전환하고, 항만과 해양이라는 자산과 연계한다면 부산은 제조업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연관된 서비스업의 고용 창출까지 이끌 수 있다.
부산이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을 통해 도약하려는 모델인 싱가포르도 금융 중심지의 저변에는 첨단 산업 중심의 제조업 육성 정책이 있었다. 다가오는 지방선거에서도 돔 구장이나 테마파크 유치 공약만큼이나 부산 제조업 육성 방안을 약속하는 후보가 필요하다.
2026-04-06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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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그 2년은 무엇이었을까
사람을 믿지 마라, 상황을 믿어라. 작은 유혹과 풍파에도 바뀌는 사람 마음을 이만큼 잘 표현한 말은 없다. 언제나 원치 않는 상황은 사람을 본심과 다른 방향으로 끌고간다.
사람이 상황에 끌려가는 부조리함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게 선거다. 조변석개하는 선거철이면 유권자는 그간의 서사와 인연을 망치는 낯선 진심을 마주한다. 야당 텃밭이던 부산의 마음을 돌리려 연일 러브콜을 보내던 여당의 진심이 그랬다.
후끈 달아오른 여당발 '5극3특' 이슈는 얼어붙은 부산의 마음을 녹였던 게 사실이다. 남부권에서 부산과 울산, 경남을 묶어 수도권과 대등한 경제 축으로 성장시키자고 했다. 그 주장에 누가 토를 달 수 있을까.
연초부터는 청와대가 조기 행정통합을 강공 일변도로 밀어붙였다. 그만한 명분이 있으리라 믿었다. 거기에 여당은 20조 원의 달콤한 인센티브까지 내놓겠다고 제안했던 터다.
그러나 러브콜이 이어지는 그 순간에도 5극3특과 궤를 같이하는 글로벌허브도시 특별법은 국회 표류 중이었다. 2년 넘게 이어진 부산시의 호소에도 상임위 소위원회에 상정조차 되지 못한 것이다. 그 상황은 부산을 향한 여당의 진심을 의심하기 충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산 출신 윤건영 의원의 법안심사소위가 2년 넘게 멀쩡한 법안을 미아 신세로 만들어 놓았다.
특별법이 발의됐던 2024년 1월만 해도 수도권과 중앙 부처의 반발은 충분히 예상했다. 하지만 여당이 상임위에서 법안 하나를 붙들고 놔주지 않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미상정 이유는 철마다 바뀌어서 일일이 기억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법안 설명을 야당에서 제대로 안 했다'라고 몇 달을 버티더니 그 뒤에는 '부산 외 다른 지역 발전을 위한 법안과 같이 심사해야 한다'라고 했다.
결국 지난달 11일 입법 공청회가 열리면서 법안 심사는 물꼬를 텄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일부 여당 의원은 '지방선거 전에는 법안을 처리하면 안 된다'라며 어깃장을 놨단다. 이쯤 되면 더는 갖다 붙일 변명도, 진심을 숨기고 싶은 마음도 없다는 소리다.
6·3 지방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출마를 고심하던 여당의 전재수 의원이 2일 출사표를 던진다. 선거에 발을 담갔으니 당시 공동으로 법안을 발의한 전 의원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분위기는 묘하게 바뀌었다.
전 의원이 지난달 24일 당 원내대표단을 찾아 특별법의 조속한 통과를 요청했다. 여당 원내대표단은 "부산을 글로벌 허브도시로 키우는데 앞장서겠다"라고 호응했다. 2년간 표류하던 법안은 전 의원의 한 마디에 하루 만에 소위를 통과했다.
맥락 없이 보자면 전 의원은 부산의 구세주다. 17명의 국힘 의원들로도 중과부적이었던 민원을 단숨에 해결한 것이다. 그러나 전 의원의 '17대 1' 무용담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이전까지 보여준 여당의 행태 때문이다. 야당 시장이 제안했다는 이유로 갖은 트집을 잡던 특별법 법안이 하루아침에 소위를 통과했으니 그 진심을 누가 그대로 믿어줄까. 진심이 아니라 상황을 믿을 수 밖에 없는 꼴이다.
'낙선 전문'이라는 달갑지 않은 수식어에도 굴하지 않고 전 의원은 자전거로 북구의 바닥 민심을 다졌다. 그 스토리는 당시 북구를 출입하던 초년병 기자에게 큰 울림을 줬던 기억이 난다. 부산의 정서를 살피고 거친 언사도 자제하던 모습이 부산에서 민주당 3선 의원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그의 큰 무기였다.
그런 전 의원이 이제 와서 정치공학 운운하며 이런 모욕적인 판을 짰으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만으로도 그는 시장 선거에 충분한 경쟁력을 확보한 후보다.
전 의원의 활약에도 글로벌허브도시 특별법이 또다시 지난달 30일 법사위에서 제동이 걸린 모양이다. 다음 날에는 대통령 입에서 "부산만 어떻게 특별법을 만들어 주느냐"는 말까지 나왔다. 재차 전 의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몰아주려는 계산이라면 지금이라도 그만둬야 한다. 그건 여당 프리미엄이 아니라 여당 페널티가 될테니 말이다.
그것보다는 누구라도 납득할만한 여당 프리미엄을 전 의원은 제시해야 한다. 해수부와 HMM 등 그가 꺼내들 카드는 이미 차고도 남는다.
여당 지도부도 마찬가지다. 지금이라도 글로벌허브도시 특별법의 통과에 초당적 지원을 해야 한다. 그게 지난 2년간 겪은 부산의 설움을 달래고, 부산에 '진심'을 내보이는 길이란 걸 알아야 한다.
2026-04-0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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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너의 이름은
부산은 다리의 도시다. 산·강·바다를 모두 품은 삼포지향(三抱之鄕)의 부산 지형은 아름답지만 살아가기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480개가 넘는 다리가 도시 곳곳을 연결하고 있다. 부산은 거가대교에서 시작해 가덕대교~신호대교~을숙도대교~남항대교~부산항대교~광안대교까지 7개 다리가 이어진 총 52㎞의 해안순환도로망을 자랑한다.
부산의 다리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길이로 따지면 동서고가로는 전국에서 가장 긴 다리 2위, 광안대교는 3위다. 오래전부터 부산을 상징했던 영도다리는 애잔하다. 6·25 전쟁 당시 피란민들에게 영도다리는 혹시 헤어지면 만나기로 한 최후의 약속 장소였다. 예전 아이들은 자라면서 ‘영도다리에서 주워 왔다’라는 소리를 한 번쯤은 들었다. 전쟁 통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영도다리 주변에 그렇게 많았던 탓이다.
광안대교는 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다리다. 화려한 야경을 자랑하는 광안대교는 최근 처음 출전한 야간 경관 국제 어워드에서 당당히 세계 2위에 올랐다. 그동안 유럽에서 독식해 오던 도시조명상 수상을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광안대교가 이뤄낸 것이다. 부산항대교는 무서운 다리로 통한다. 부산시티투어버스가 부산항대교 진입 램프에 들어서면 “롤러코스터 타실 준비 되셨나요”라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모르고 진입했다가 운전자가 무서워서 차를 세우는 바람에 119 구조대가 램프를 걸어서 올라가 대신 운전해 주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크루즈선이 지나갈 수 있도록 아파트 20층 높이에 세워진 부산항대교의 나선형 램프는 부산의 또 다른 매력이 되고 있다.
이처럼 다리는 부산 관광의 아이콘이 되었지만 이들 대부분이 차량 위주라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다리는 원래 사람이 지나가라고 만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이 차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만 것이다. 이달 초 개통한 부산의 첫 보행교 수영강 휴먼브리지는 그래서 더 반갑다. 수영구와 해운대구 APEC나루공원·영화의전당을 잇는 이 다리는 벌써부터 사람들로 북적인다. 수영강에 놓인 다리는 15개에 달한다. 수영강의 여러 다리를 많이 걸어 봤지만 보행교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벚꽃까지 만발한 수영강 일대를 걸으며 금상첨화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다 좋은데 ‘휴먼브리지’라는 다리 이름이 불만이다. 수영강에는 이미 민락교·수영교·좌수영교·과정교 같은 이름의 다리들이 있다. 이처럼 다리 이름은 그 장소의 역사나 지리적 특징을 담아 다른 곳과 구별되게 짓는다. 휴먼브리지는 국내외 어디에 있는지 모를 특색 없는 이름이다. 좋은 우리말 이름 놔두고 왜 정체불명의 영어 이름인가. 원래 휴먼브리지는 건축이나 도시 설계 분야에서 보행자 전용 교량을 뜻하는 용어다. 정식 이름을 정하기 전에 임시로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서울 서초구 몽마르뜨공원과 서리풀공원을 연결하는 보행교도 처음엔 휴먼브리지로 불렀다. 정식 개통을 하면서 서초(瑞草)의 옛 지명을 살린 ‘서리풀 다리’라는 이름으로 정해져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가평 자라섬에 설치된 보행교도 처음엔 자라섬 휴먼브리지로 추진되다 지금은 ‘자라섬 출렁다리’로 불리고 있다. 휴먼브리지는 기껏 근사한 공원을 짓고 이름을 ‘동네 공원’이라고 부르는 격이다. 누가 나를 볼 때마다 “이 사람아!”라고 부르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사람을 위한 다리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지은 이름이 역설적으로 사람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당신이 한번 아이디어를 내어보라”라고 한다면 ‘영화 도시’ 부산 영화의 전당으로 이어진다는 의미를 살려서 ‘영화교’로 부르자고 제안하고 싶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이 다리를 걸어 보자는 의미다. ‘부귀영화’할 때의 영화(榮華)나 ‘다리를 걸으면 젊어진다(Young)’라는 중의적인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아름다운 다리에 이런 의미까지 더해지면 더 많은 사람이 찾아오지 않을까.
역사적으로 부산을 대표하는 인물의 이름을 가져와도 좋을 것 같다. 안용복은 조선 숙종 시절, 미관말직의 수군이었지만 목숨을 걸고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현재 수영구 수영동에 있던 경상좌수영 소속이었으니 수영강과도 인연이 깊다. 수영강에 세운 다리에 이름을 붙이기에 손색이 없어 보인다.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면 더 좋은 이름이 나올 것이다.
다리 이름은 한번 정해지면 수십 년, 수백 년간 불리게 된다. 아무리 시민 명칭 공모를 통해 결정된 이름이라도, 시민 다수가 아니라고 하면 바꿔야 한다.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줘야 존재는 비로소 생명을 얻고, 본연의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
박종호 문화스포츠부 선임기자 nleader@busan.com
2026-03-30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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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갈급하다
‘목이 마른 듯이 몹시 조급하다. 속이 마를 지경으로 몹시 바라다.’
〈표준국어대사전〉과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에 나오는 ‘갈급하다’의 뜻이다. 지난주 한 시민단체 대표와의 통화에서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이 단어가 귀에 콕 박혔다.
1991년 페놀, 1994년 벤젠·톨루엔, 2006년 퍼클로레이트, 2009년 1, 4 다이옥산, 2018년 녹조 대발생과 과불화화합물. 지난 20일 오후 부산맑은물범시민대책위원회 회원들은 낙동강 수질 문제 이슈가 새겨진 검은색 조끼를 입고 벡스코 오디토리움 복도에 서 있었다. 2026 세계 물의 날 기념식 참석을 위해 부산을 찾은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에게 성명서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최소남 상임대표는 기후부 장관에게 “우리 부산 엄마들이 정말 갈급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부산 엄마들이 얼마나 갈급한지 이해를 해달라”라고 말했다. 부산 물 문제를 지자체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떠넘기지 말고, 국가와 기후부가 주도해서 해결해 주길 바란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최 상임대표는 한 마디로 ‘쌩쇼’를 했다고 표현했다.
부산 시민단체가 맑은 물 확보에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요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작년 여름에는 114개 시민사회단체가 정부서울청사 국정기획위원회 앞에서 낙동강 수질 개선과 취수원 다변화 사업의 국정과제 채택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부산 시민이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물의 안정적 확보를 간절하게 바라기 때문이다.
낙동강은 1300만 영남권 주민의 식수원이지만 거의 매년 수질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녹조와 산업폐수라는 두 가지 문제가 상존해 지난 30년간의 수질 개선 노력에도 주요 수질지표는 한강에 못 미친다. 2021년 부산 환경단체가 페놀 유출 사건 30주년을 맞아 발표한 성명서 제목에 ‘낙동강은 신음한다. 아직도!’라는 문구가 들어있을 정도다.
시민단체가 기후부 장관에게 성명서를 전달한 날에 하루 앞서 부산시가 주최한 세계 물의 날 기념행사가 열렸다. 기념행사를 마친 뒤 300명의 참석자들은 벡스코 야외광장에서 맑은 물 염원 퍼포먼스도 펼쳤다. 뒤이어 열린 맑은 물 확보를 주제로 한 토론회의 분위기는 정말 뜨거웠다.
“부산은 물로 차별받는 대한민국의 도시이다.” 부산시민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주제 발표자 겸 토론자로 참석한 환경공학 전문가의 발언은 물 문제에 있어서 부산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대변했다. 이 발언은 특히 올해 세계 물의 날을 맞아 대한민국이 선택한 주제 ‘모두를 이롭게 세상을 품는 생명의 물’과 너무 비교됐다. 행사장에 앉아 있는 내내 기분이 씁쓸했다.
현재 낙동강 물 문제 해결을 위해 취수원 다변화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낙동강유역 하류에서 하루 90만 톤의 복류수·강변여과수를 취수해 부산에 42만 톤, 동부 경남에 48만 톤을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2021년 첫발을 내디딘 이 사업은 부산과 경남이 머리를 맞대고 조율 중이지만, 주민 반발과 예산 등의 문제로 흐르다가 멈추기를 반복하고 있는 상황이다.
토론회에서 먹는 물 문제에 있어 지방정부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취수원 다변화를 국가 핵심사업으로 격상해달라” “국가 차원의 협력이 절실하다” “시민이 체감할 수 있는 대안을 끌어낼 신속한 의사결정이 필요하다” “역사적 결단을 내린다는 생각으로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쏟아진 수많은 이야기의 끝은 결국 정부가 나서서 낙동강 물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민단체는 성명서를 전달받은 김 장관이 부산 물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전했다. 김 장관이 같은 날 부산상공회의소 초청간담회 자리에서도 시민 숙원사업인 낙동강 취수원 다변화에 대해 부산 지역도 맑은 물을 확보할 수 있도록 열심히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니 그 약속이 어떻게 지켜질지 두고 볼 일이다. 시민의 생존권이 달린 맑은 물 확보는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약속이고 정의라는 시민들의 외침을 절대 가벼이 들어서는 안 된다.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갈급한 이들이 많다. 출마를 준비하는 여야 정치인, 선거 결과에 따라 희비가 엇갈릴 정당, 수치로 확인되는 민심의 성적표를 기다리는 정부까지. 모두 국민 한 명 한 명의 마음 잡기에 갈급할 것이다.
지방선거에서 승리하려면 지역 발전에 필요한 것, 지역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여러 이슈 속에서 지역과 지역민에게 가장 갈급한 것을 제대로 파악하고 응답하는 일이 유권자 표심 잡기의 출발점이다. 맑은 물을 향한 부산·경남 지역민의 갈증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낙동강 물 문제를 미래 세대에게까지 물려줄 수 없다고 다짐한 유권자들이 지켜보고 있다.
2026-03-25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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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뉴이재명은 ‘보수’인가
2004년 5월 29일 저녁 청와대 영빈관에서 1980년대 운동권 가요인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노무현 대통령과 여당(열린우리당) 17대 총선 당선자의 만찬에서 80년대 학번 운동권 출신 당선자 30여 명이 이 노래를 선창하자 노무현과 다른 참석자들도 모두 따라 불렀다.
보수 진영에서는 난리가 났다. 급진적인 개혁과 국가 체제의 혼선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이어졌고, 어르신들은 나라에 ‘망조’가 들었다고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지금은 국가가 주관하는 5·18 기념식에서 제창하는 노래지만 그때는 파격이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정책들은 보수세력의 걱정만큼 급발진하지 않았다. 이라크 전쟁 파병을 결정했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오히려 진보 진영으로부터 욕을 먹었다. 방사성 폐기물 처리시설을 둘러싼 ‘부안 사태’는 진보를 내세운 노무현 정부의 생채기가 됐다.
152석의 과반 의석에도 불구하고 국회에서 개혁 정책을 관철시키는 것은 녹록지 않았다. ‘백팔번뇌’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여당 초선의원 108명의 진보 정체성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때가 덜 묻었던 원리주의자들은 실용 노선을 걸으려고 했던 노무현을 임기 내내 괴롭혔다. 그 때문인지 진보 지지층 내에서 발생한 균열로 노무현 국정수행 지지율은 집권 5년 차에 27%까지 폭락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때 자신이 ‘중도 보수’라고 주장했다. 외연 확장을 위한 선거 전략의 하나로 이해됐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둔 지금까지는 실용주의 정책 노선을 추구하고 있는 건 분명하다.
미국과 일본을 중시하는 외교 노선, 검찰 개혁 과정에서 불거진 강경파들의 주장을 ‘외과 시술적 교정이 유용하다’는 논리로 뚫어 나가고 있다.
이 대통령은 “필요한 개혁을 하더라도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며 모두를 개혁 대상으로 몰아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결과가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며 “검찰 개혁이든 노동·경제 개혁이든 언론 개혁이든 법원 개혁이든 그 무슨 개혁이든 그래야 한다는 게 제 생각”(3월 9일 X 메시지)이라고 했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화두로 들고나왔다. 이 대통령은 지난 6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마약범죄·공직부패·보이스피싱·부동산 불법 행위·고액 악성 세금체납·주가조작·중대재해 등을 ‘7대 비정상’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비정상적인 요소를 정상화하는 노력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했다.
지난 10일 국무회의에서는 “국가정상화위원회라든지 일종의 팀을 만들어 ‘비정상의 정상화’ 사업을 각 부처 단위로 주요 과제를 뽑아 종합해서 한번 해보면 어떨지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사실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말을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취임 후 첫 여름휴가를 다녀온 직후인 2013년 8월이었다. 당시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실은 모든 정부 부처에 비정상 사례를 수집해 보고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박 전 대통령은 그해 광복절 경축사와 이듬해 신년사를 통해 거듭 ‘비정상의 정상화’를 국정운영의 기조로 천명하면서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다. 다만 2014년 세월호 참사와 2016년 총선 패배,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등으로 국정의 구심력을 잃고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빛이 바랬다.
‘비정상의 정상화’는 누가 봐도 보수의 용어다. 진보 입장에서 비정상은 청산해야 할 적폐이지, 정상화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사람은 고쳐 쓰는게 아니다’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의 성향이나 습관을 바꾸긴 쉽지 않기 때문에 아예 교체해야 맞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굳이 개혁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심정적인 저항감을 유발할 필요가 없다”, “실제 상황을 바꾸면 되는 것이고 결과가 중요하다”(3월 10일 국무회의)고 말한다.
여권 내부에서는 이 대통령의 이런 실용주의적 노선을 추종하는 ‘뉴이재명’ 그룹이 태동하고 있다. 이 대통령이 임기 말까지 이 노선을 추구한다면, 뉴이재명 세력은 그때까지 든든한 지원군으로 남을 전망이다.
이 대통령이 취임한 지 아직 1년이 되지 않았다. 이 대통령이 진짜 보수인지 실용적 진보인지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 명확해질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대통령의 진의가 드러나기 전까지 보수정당임을 내세우는 국민의힘이 설 자리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박석호 정치부 선임기자 psh21@busan.com
2026-03-23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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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음모론이 가장 쉬웠어요
사하구 장림동으로 기억한다. 제보 전화를 받고 달려갔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진지했다. “국정원으로부터 감시당하고 있습니다. 집안 곳곳에 도청 장치가 있어요.” 지금이라면 한 귀로 듣고 흘렸을 테지만 사회부 막내 기자 시절엔 지나칠 수 없었다. 좁다란 골목길을 헤맨 끝에 제보자 주소지에 도착했다. 그러고 현관으로 들어서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걸 직감했다. 잔뜩 어지럽혀진 집안 어둠 속에서, 덥수룩한 머리와 때 묻은 운동복 차림의 남성이 나타났다. 그는 안쪽 방으로 잡아끌더니 벽지와 천장에 묻은 검은 점을 가리키며 감시 카메라라고 설명했다. TV도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한다며, 24시간 감시당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충분히 이야기를 들어드린 뒤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는 따라 나오지 않고 어둠 속에서 배웅했다.
옛날 기억을 장황하게 떠올린 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진 이들이 겹쳐 보여서다. 지난달 27일 한 유튜브 방송에서 ‘부정선거, 음모론인가’를 주제로 끝장토론이 진행됐다. 18일 저녁 기준 해당 동영상은 무려 624만 조회수를 기록 중이다. 댓글도 4만여 개가 달렸다. 중복 클릭을 감안하더라도 어림잡아 대한민국 성인 10명 중 1~2명은 시청한 것으로 추산된다. 안 보신 분들에게는 권하지 않겠다. 날짜를 넘겨 7시간 넘게 이어진 토론을 끝까지 보고 나서 허무함과 후회가 밀려왔다.
양측 주장은 내내 평행선을 달렸다. 전한길 대표(전한길뉴스)와 이영돈 PD, 박주현 변호사, 김미영 대표(VON뉴스)가 의심스러운 물증을 제시하면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부정선거가 아니라 부실 관리 사례라며 맞받았다. 뒤로 갈수록 이 대표가 힘겨워 보였다. 홀로 4명을 상대한 탓도 있지만, 경찰 수사가 아닌 토론회에서 사실관계를 명명백백 가리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전 세계 과학자들이 비밀리에 핵 개발에 참여한 ‘맨해튼 프로젝트급’ 운운하며 대법원 판결마저 선거 조작의 일부라 여기는 이들 앞에서, 이 대표는 토론 결과를 예상 못 했을까.
음모론의 힘은 그럴듯함에서 나온다. 이는 확증 편향과 강하게 연결된다.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공통된 편향이 있다. 자신이 지지하는 진영이 당선돼야 마땅하다는 확신이다. 빨간 안경으로 보면 온통 ‘빨간당’ 세상인데, ‘파란당’의 승리를 납득할 리 만무하다. 상대 진영이라고 다르지 않다. 9년 전에는 영화 ‘더 플랜’을 만든 김어준과 그 지지 세력이 그랬다. 선거 결과가 조작됐다고 결론 내리는 순간, 수많은 정황이 부정선거의 증거로 보인다. 선거인명부에 등재된 197세 유권자, 배춧잎·일장기 투표지, 화웨이 와이파이, 회송용 봉투 배송경로 오류 등 선관위의 관리 부실과 실수가 거대한 세력의 선거 조작으로 귀결된다.
음모론을 만들기는 쉽지만, 깨부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허위 여부를 밝히려면 지난한 팩트체킹을 거쳐야 한다. AI 프로그램으로 단 몇 초 만에 ‘전쟁 영상’을 만들 수 있지만, 허위 판독에는 몇 배 몇십 배의 시간과 품이 들어간다. 거짓으로 판명돼도 외려 가짜뉴스라며 외면하는 이들도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끝장토론 이후 제기된 36가지 의혹을 정리해 20쪽 분량의 해명자료를 냈다. 이도 모자라 주요 쟁점만 따로 떼어내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럼에도 음모론은 끄떡없다. 한국판 맨해튼 프로젝트의 당사자가 내놓은 자료를 누가 믿겠는가.
음모론의 초기 대처법은 간단하다. 무관심과 무대응이다.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에 굳이 대응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부정선거 주장을 공론장으로 끌어낸 이준석 대표는 음모론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 17년 전 장림동 제보자의 이야기를 기사로 다룬 셈이다. 조명해야 할 건 제보자 주장이 아니라,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정신적·사회적 고립이다. 벽지를 새로 바른다고, TV를 신형으로 바꾼다고 망상이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니, 장림동 아저씨가 현관 밖으로 나와 세상과 소통하게끔 도왔어야 했다.
뒤늦은 반성과 함께, 골방에 틀어박혀 곰곰이 생각해 본다. 결과적으로 파란당을 키워준다는 점에서 전한길 대표는 빨간당에 해로운 세력이다. 그의 주장과 행동이 황당할수록 민주당에는 호재다. 혹시 맨해튼 프로젝트급 비밀 세력으로부터 ‘X맨 활동’ 지령을 받은 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처음엔 계엄을 비판하다 정반대로 돌아섰다. 생각하면 할수록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연 수십억 원씩 벌던 일타강사가 본업을 내팽개치다니. 분명 지령과 함께 거액의 활동비도 받았을 것이다. 어떤가. 그럴듯하지 않나. 음모론 만들기가 이렇게 쉽다. 거짓이라면 어디 한번 증명해 보라.
djrhee@busan.com
2026-03-18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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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뺑덕 어멈과 행정통합, 그리고 정주영 정신
“삐쭉하면 빼쭉하고~~~, 빼쭉하면 삐쭉하고~~~.” 이렇듯 판소리 심청가 속 뺑덕 어멈의 변명은 끝이 없다. 그녀는 늘 “내 잘못이 아니오”라는 말로 책임을 떠넘기고 억지와 거짓으로 상황을 모면한다. 관객은 그 억지스러운 말에 웃음을 터뜨리지만, 그 웃음 뒤에는 씁쓸한 교훈이 남는다. 공동체 속에서 신뢰를 잃은 사람이 어떤 말로를 맞게 되는지, 뺑덕 어멈은 풍자로 보여준다. 그런데 이 풍자는 단지 옛 이야기 속에만 머무는 것일까. 오늘날 수도권 과밀화 해소와 지역 균형발전을 위해 시작된 광역자치단체 간 행정통합 논의를 들여다보면, 뺑덕 어멈의 그림자가 여전히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 광역단체 간 행정통합 논의는 2009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김태호 전 경남도지사는 부산·울산·경남을 통합해 메가시티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그는 “동남권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행정구역 개편을 포함한 실질적인 대통합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17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부울경 메가시티 논의는 제자리걸음을 반복하고 있다. 메가시티 형태가 행정연합이냐, 행정통합이냐를 두고 ‘옥상옥’ 논란을 빚었다. 조직이 비대해지고 권한이 중복돼 비효율이 생긴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마치 뺑덕 어멈이 “그건 다 심청이 탓이지”라며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과 닮았다. 실제로는 권한 조정과 제도 설계를 통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임에도, ‘옥상옥’이라는 말은 편리한 핑계처럼 소비된다. 문제 해결 의지보다는 현상 유지를 위한 변명에 가깝다.
또 다른 단골 핑계는 “주민투표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민주적 정당성 확보는 중요하다. 그러나 때로는 이 말이 시간을 미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지방선거가 가까워지면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가 등장한다. 주민들에게 충분한 정보와 토론의 기회는 제공하지 않으면서, 주민투표를 핑계로 결정을 미루는 모습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변명을 이어가는 뺑덕 어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수도권 과밀화는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수도권에는 인구와 산업이 과도하게 집중되면서 교통·주거·환경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 반면 지방은 인구 감소와 산업 공동화로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균형발전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국가적 과제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광주·전남을 제외하면 지방의 광역자치단체들은 서로의 이해관계에 묶여 행정통합 논의를 쉽게 진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중앙정부 지원이 불확실하다”는 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지원을 요구하면서도 구체적인 설계와 결단을 미루는 태도 역시 또 다른 변명처럼 들린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다. 그는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도전 정신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인물로 평가받는다. 울산 조선소 건설을 위해 영국 은행을 설득할 때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 지폐를 꺼내 보이며 “우리는 이미 오래전 철갑선을 만든 민족”이라고 말했던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작은 이해관계에 머물지 않고 더 큰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다.
행정통합은 그 과정에 늘 난관이 따른다. 지역마다 이해관계가 다르고, 정치권은 표 계산에 민감하며, 주민들은 정체성 문제로 반발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이런 복잡한 현실 속에서 지도자의 결단과 추진력이 요구된다. 정주영의 정신은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핑계로 시간을 허비할 것인지, 아니면 비전을 향해 나아갈 것인지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뺑덕 어멈의 변명은 결국 공동체 속에서 신뢰를 잃고 고립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행정통합 논의도 마찬가지다. 변명과 핑계로 시간을 허비한다면 주민들은 행정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고, 지역 발전의 기회도 사라진다. 중요한 것은 핑계가 아니라 해결이다. 지금까지의 행정통합 논의는 마치 판소리 한 대목처럼 반복과 변주를 이어왔다. “효율성이 의문이다”라는 대목이 나오면 곧이어 “주민 동의가 필요하다”는 후렴이 이어지고, 다시 “중앙정부 지원이 불확실하다”는 변주가 반복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문제 해결의 노래라기보다 책임 회피의 변명에 가깝다.
결국 정치가 뺑덕 어멈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행정통합은 또다시 제자리걸음을 할 것이다. 지도자 결단과 비전이 없는 곳에서는 주민의 신뢰도, 지역 발전의 기회도 사라진다. 수도권 과밀화 해소와 지역 균형발전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앞에 두고, 지역 정치인들이 뺑덕 어멈의 변명 대신 정주영의 도전 정신을 배워야 할 때다. 그렇지 않다면 행정통합 논의는 끝없는 변명 속에서 표류할 수밖에 없다. 6·3 지방선거 후보들의 공약을 꼼꼼하게 챙겨봐야할 이유다.
2026-03-1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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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AI로 무장한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
미군의 ‘베네수엘라 마두로 대통령 체포 작전’은 완벽에 가까운 성공이었다. 1월 3일 오전 2시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항구와 주요 군사시설에 공습이 이뤄진다. 사이버공격으로 정전도 발생한다. 혼란을 틈타 미군 헬기가 마두로 대통령의 안전가옥으로 향한다. 안전가옥은 여러 채이지만, 헬기는 정확한 은신처로 향한다. 엄호를 받고 특수부대 델타포스팀이 헬기에서 내린다.
마두로 대통령의 침실 옆엔 이런 날을 위해 만든 튼튼한 대피소가 있었다. 총소리에 놀란 마두로는 대피소로 달려가지만, 철문을 닫기 직전 붙잡힌다. 그만큼 속전속결로 침투가 이뤄졌다. 미군은 중상자도 없었다. 모든 걸 꿰뚫어 보고 가장 효율적인 경로로 짜인 체포 작전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놀랍게도 작전의 설계자는 사실상 AI로 지목된다. 앤트로픽사의 ‘클로드’와 ‘팔란티어 테크놀로지’는 전략적 파트너십으로 미 국방부에 AI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AI는 위성 영상·감청 데이터·드론의 실시간 스트리밍 등 방대한 정보를 초 단위로 분석해, 마두로 대통령의 위치를 파악했다. 최적의 시뮬레이션 과정을 통해 가장 효과적인 공습 후보지와 침투 경로를 뽑아냈다. 사람이 설계를 전담했으면, 단기간에 수립하기 어려운 작전이었다.
두 달이 안돼,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습했다.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를 비롯해 국방장관, 총사령관 등 이란의 주요 인물들이 무더기로 피살됐다. 하메네이 사망으로부터 5거래일 만에 팔란티어 주가는 14% 올랐다. 자본시장도 알고 있다. 적중률 높은 공습은 AI 결과였고, 당연히 AI 방산회사들에게 큰 호재였다. 이미 팔란티어 시총은 전통 방산업체 록히드마틴의 3배 정도다. 지금 전장은 AI 능력이 재래식 무기보다 더 중요하다는 게 자본의 평가인 셈이다.
2022년 본격화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AI는 활약하고 있다. AI 기반 표적시스템 덕에 드론 명중률이 몇 배가 올라갔다. 특히 이 전쟁에선 유난히 드론 시점에서의 공격 영상이 많이 공개됐는데, 상당히 실감이 난다. 자폭드론은 망설임 없이 표적을 향해 날아간다. 굶주려 앙상한 젊은 병사들이 살려고 도망치거나, 벙커에 숨어도, 자폭드론은 귀신같이 쫓아가 임무를 완수한다.
거기에 비하면 조종사가 폭탄을 직접 떨어뜨리는 수동 드론은 인간적이다. 드론을 본 어떤 병사들은 살려 달라고 두 손 모아 애원하고, 어떤 이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성호를 긋는다. 그들은 폭탄의 희생자가 되기도 하고, 살아서 포로가 되기도 한다.
AI가 전쟁 수행 능력을 끌어올리는 건 명백하다. 효율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길을 제시해 준다. AI가 대신 판단해주면, 군인도 살상에 따른 책임이나 양심적 가책을 덜 수 있다. 아마도 전쟁은 더 잔인해질 것이다. 이런 우려 탓에, 대량 살상 무기에 자신의 기술 활용을 금지할 것을 공식화하는 AI 기업들도 나오고 있다. 인간이 판단하는 게 AI보다 더 인간적이고 덜 잔인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믿음이기도 하다.
2월 28일 미국의 공습이 한창일 때, 이란 호르모즈간주 ‘샤자레 타예베’ 여자 초등학교에 폭탄이 떨어졌다. 여러 정황상 미군의 오폭이 확실시 된다. 사망자 180여 명 대다수는 7~12세 여자 아이였다. 전쟁과는 아무 상관없는 아이들이었다. 시신 훼손이 심해, 부모들은 얼굴이 아닌 팔찌나 옷문양으로 자식의 신원을 확인했다.
유례없는 비극이지만, 묘한 건 이후 반응이다. 이란을 제외하면 어느 나라도 딱히 초등학생들의 희생을 크게 문제를 삼지 않고 있다. 미국 안에서도 전쟁 중 발생한 안타까운 참사 정도로 다뤄지는 분위기다. 우리나라에선 전쟁 중 크고 작은 사건 정도로 보도됐다. 주변에 주가 폭락으로 전쟁에 분개하는 이는 많지만, 초등학생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는 드물다. 아니, 없다. 대부분 기억에서 지운듯하다.
베트남전 당시 ‘네이팜 소녀’ 사진이 반전 여론에 불을 지폈다.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 울부짖으며 달려오는 9살 소녀의 모습에 인류가 분노했다. 비슷한 사진이 지금 찍힌들, 큰 변화가 있을까. 사실 마두로 체포 작전에서도 베네수엘라에서 민간인을 포함해 80여 명이 숨졌다. 관심이 없기에, 이들의 죽음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이제 전쟁에서마저 인간은 밀려가고 있고, 인간적인 갈등 없는 살상은 늘어날 것이다. 더 무서운 건 인간마저 인간미를 잃어가는 거다. 아픔을 공감하는 우리의 능력이 퇴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쟁이 잔인해지는 것 이상으로 우리도 무서워지고 있는 듯하다.
2026-03-1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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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다시 떠오른 양산 '행정 관할 일원화'
최근 양산시와 시민들의 시선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쏠렸다. 창원지법 김해지원과 양산지원 설치 법안 처리 여부 때문이었다. 희비가 엇갈렸다. 김해지원 설치 법안은 법사위를 통과·본회의에서 확정됐지만 양산지원 설치 법안은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김해지원 설치 법안은 2012년 처음 발의된 이후 14년 만에 결실을 맺었다. 인구 50만 대도시 중 유일하게 법원 지원이 없던 김해시는 이번 법안 통과로 ‘사법 접근성 향상’이라는 오랜 현안을 해결하게 됐다.
반면 양산지원 설치는 국회 논의조차 시작하지 못했다. 지역 정치권은 “계속 추진하겠다”라는 입장이지만 김해 사례를 보면 쉽지 않아 보인다. 이번 무산은 단순히 지역 현안을 넘어 양산시의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고질적 문제인 ‘행정기관 관할 불일치’를 다시 떠올리게 했다.
양산의 행정 관할은 한마디로 ‘뿔뿔이’ 흩어져 있다. 행정구역은 경남이지만 법원과 검찰, 보훈 업무는 울산 관할이다. 경남 소속 경찰이 울산검찰의 수사 지휘를 받고, 시민들은 재판과 보훈 업무를 보기 위해 울산지법·울산보훈지청으로 가야 한다.
방송권역은 부산과 울산, 창원으로 갈라져 있다. 경남도 등이 2023년 KBS·KNN은 경남 방송국 채널로 시청권역을 통일하고, MBC는 부산과 경남 채널을 동시에 시청할 수 있도록 방안을 마련했지만, 시민 불편은 해소되지 않았다. 세무 행정은 2018년 양산세무서 신설로 해결됐으나 한 도시 안에 세 개의 행정 구조가 공존하는 것은 여전하다.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1990년대 신도시 개발로 인구가 급증하면서 시민 불편이 시작됐다. 2000년 초 시민들이 중앙정부에 민원을 제기했고, 2006년 이후에는 양산시 차원의 공식 건의도 이어졌다. 선거철이면 단골 공약으로 등장했고 ‘추진하겠다’라는 약속도 반복됐다.
하지만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도록 실질적 변화는 거의 없다. 양산세무서 신설이 일부 성과로 꼽히지만, 법원과 검찰, 보훈 등 핵심 영역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관할 불일치는 단순한 이동 거리 문제만은 아니다. 시민들은 행정 서비스 이용을 위해 시간과 비용을 반복적으로 부담해야 한다. 행정기관 간 협조 과정에서도 비효율이 발생하고, 기업 역시 법적 절차를 위해 권역을 넘나들어야 한다.
행정 체계 분산은 책임 소재를 모호하게 만들고 지역 정체성은 물론 소속감에도 영향을 미친다. 나아가 도시의 소속감과 정체성을 악화시킨다. 이 때문에 양산 시민들은 수시로 ‘경남 홀대론’을 제기하고 선거철마다 부산·울산 편입 이야기가 등장한다. 행정의 경계가 심리적 경계로 이어지고 있다.
김해지원 설치 과정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해 역시 처음에는 창원지법 기능 축소 우려로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인구 규모와 사건 수요, 시민 불편에 따른 사회·경제적 손실 등을 수치로 제시하며 설득에 나섰고 결국 입법 문턱을 넘었다. 지역 숙원을 ‘논리와 데이터’로 풀어낸 결과다.
양산은 인구와 산업 규모에서 뒤지지 않지만, 지원 설치 논의조차 하지 못했다. 부산과 울산, 창원 등 3개 권역 법원이 인접해 있다는 지리적 특수성이 걸림돌로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이는 행정 편의를 중심으로 한 논리일 뿐 시민 편익을 기준으로 보면 아쉬운 대목이다.
행정기관 관할 일원화는 단지 기관을 옮기는 문제가 아니다. 시민들이 행정 서비스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는 일이다. 경남도 역시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 박완수 경남도지사가 공개 석상에서 양산시의 관할 불일치 문제를 언급했고, 2023년 1월에는 경남도와 양산시, 경남연구원이 함께하는 TF팀도 구성했다.
TF팀은 양산지원 설치와 양산·김해·밀양을 관할하는 보훈지청 신설, 방송권역 통일, 법기수원지 관리 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검토하기로 했다. 30여 년 만에 공식 논의가 시작되자, 시민 기대감도 컸다. 그러나 방송권역 일부 조정에 그쳤고, 기대했던 양산지원 설치는 무산되면서 실망감도 커졌다.
행정기관 관할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법 개정과 예산 확보, 관계 기관 협의가 필요하고, 이해관계도 복잡하다. 그렇다고 해서 30년을 미룰 이유는 되지 못한다. 이제는 경남도와 중앙정부, 정치권이 함께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경남도의 TF팀 구성처럼 일회성 선언에 그쳐서는 안 된다. 구체적인 로드맵과 입법 추진 전략이 필요하다. 행정기관 관할 일원화는 선택이 아닌 시민 기본권을 온전히 보장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이제는 답을 내놓아야 할 시간이다.
2026-03-09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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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흡수통합만 바라보는 에어부산의 내핍경영
에어부산의 노사 갈등이 지난달 25~27일 조합원 투표에서 합의안 찬성으로 일단락됐다. 에어부산 노사는 임금 인상폭을 놓고 충돌했지만 이면에는 ‘흡수통합’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진에어에 통합되는 에어부산의 직원들은 ‘차별’에 대한 우려로 ‘동일 처우’ 확약을 요구하며 사측과 충돌했다. 흡수합병으로 사라지는 에어부산의 ‘마지막’이 다가오면서 그 후폭풍이 점차 구체화되는 모습이다.
2027년 1분기로 예고된 에어부산과 진에어의 합병에 대해선 에어부산 직원을 비롯해 주주, 항공 소비자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에어부산이 흡수통합을 앞두고 수년째 ‘내핍경영’으로 기업 가치를 축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지역 거점 항공사 공중 분해’에 대한 우려도 높다.
에어부산 노조의 한 관계자는 “이번 노사 갈등의 핵심은 통합 이후 동일 처우에 대한 보장 문제”라고 밝혔다. 통합 이후 하나의 회사가 되지만 피인수기업 직원에 대한 임금, 경력산정 등의 차별 우려가 높다는 주장이다. 노조 관계자는 “피인수기업 직원이 임금이나 경력 산정에서 불이익을 받았던 사례가 실제 있었다”고 지적했다.
에어부산 노조는 사측에 통합 이후 동일 처우를 확약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회사 측은 피인수기업 입장에서 인수합병 이후 처우를 약속할 수 없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노조는 인수합병의 실질적 주체인 대한항공이 동일 처우를 약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습이다. 이 때문에 이번 노사 갈등 과정에서도 에어부산 사측은 “합병 이후에 직원들 처우에 차별이 없도록 노력하겠다”는 원론적 입장에 머물렀다.
흡수 합병에 대한 불만은 에어부산 주주도 마찬가지다. 에어부산 등 아시아나항공 계열사는 합병이 이뤄지기 전부터 ‘인수 기업’인 대한항공이 사실상 경영을 장악한 상태다. 송보영 아시아나항공 사장, 김중호 에어서울 사장, 정병섭 에어부산 사장은 모두 대한항공 출신이다.
대한항공 출신인 에어부산 경영진 입장에선 흡수 합병을 앞두고 회사 가치를 높일 ‘인센티브’가 없다. 실제로 에어부산은 2020년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통합 방침이 발표된 이후 항공기 확보 경쟁에서 뒤처지는 등 내핍경영을 계속하고 있다.
국토교통부 항공통계에 따르면 2026년 1월 전년 동월 대비 ‘탑승률’이 하락한 주요 국내 항공사(월간 4000회 이상 운항)는 에어부산(-2.2%), 아시아나항공(-0.1%)뿐이다. 코로나19 이후 항공업계가 ‘공급 경쟁’에 나서면서 기단 확대, 노선 확대에 나선 상태지만 에어부산은 통합 대비에 집중하면서 시장 지배력을 잃어가고 있다.
내핍경영이 계속되면서 ‘지역 거점 항공사’인 에어부산이 김해공항 운항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줄었다.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과 비교하면 2025년 에어부산의 김해공항 운항은 22%, 승객은 16% 줄었다. 반면 같은 기간 에어부산 경쟁사인 티웨이항공은 김해공항 운항이 43%, 승객이 68% 늘었다. 에어부산의 ‘빈자리’를 노리는 이스타항공도 같은 기간 김해공항 운항이 74%, 승객이 83% 늘었다.
대한항공 계열에서는 에어부산을 흡수합병 하는 진에어가 김해공항 운항을 79% 늘리면서 승객도 89% 늘었다. 그러나 대한항공 계열 3사(대한항공+진에어+에어부산)를 모두 합해도 2019년 대비 2025년 김해공항 운항은 7810편이나 줄었다. 이 때문에 티웨이항공, 이스타항공의 증편 운항에도 불구하고 2019년 대비 2025년 김해공항의 ‘국적사’ 운항은 3087편 줄었다.
에어부산의 내핍 경영은 주가 하락 등 기업가치 축소로 이어지고 있다. 합병 방침이 발표된 2020년 11월 16일 7610원이던 에어부산 주가는 2026년 3월 4일에는 1700원대로 떨어졌다. 저비용항공사(LCC)들의 주가 하락 추세를 감안하더라도 경쟁사인 티웨이항공의 주가(2478원→1200원대)와 비교하면 하락폭이 크다.
에어부산이 내핍 경영에 따른 기업가치 하락이 개정된 상법 위반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에어부산 기업가치 하락이 인수 주체가 되는 지배주주(대한항공 계열)에게는 이익이지만 소액주주 등 일반주주에게는 손해가 되기 때문이다.
개정 상법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했다. 기업 인수, 합병에서 지배주주와 일반주주 간 이익이 충돌할 때 일반주주 권리 침해가 없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 진에어와 에어부산 합병은 지배주주와 일반주주의 이익이 충돌하는 사례로 볼 수 있어 합병 시점에서 주식교환비율을 놓고 주주들의 반발이 발생할 수 있다.
김종우 서울경제부 부장 kjongwoo@busan.com
2026-03-04 [1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