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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전재수TV' 생중계가 보고 싶다
2026년 6월은 8년 전과 묘하게 닮았다. 부산시청 2진 출입기자 시절 지방선거가 펼쳐졌고, 민주당으로 정권이 바뀌었다. 선거 직후 오거돈 당시 당선인의 인수위가 출범했다. 사무실은 지금과 같은 부산상수도사업본부 건물에 차려졌다. 1995년 민선 도입 이후 첫 지방 권력 교체에 너도나도 우왕좌왕했던 기억이 있다. 팩트 하나라도 더 건지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인수위 앞을 서성였지만, 별 수확은 없었다. 사무실 칸막이는 높기만 했고, 기자들은 ‘입구 컷’ 당하기 일쑤였다. 폐쇄적으로 운영된 인수위, 그리고 이후 펼쳐진 시정의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다. 초장부터 측근 실세가 시정을 좌지우지한다는 비판이 나왔고, 오 시장은 그와는 무관하게 부산 전체를 부끄럽게 만든 범죄로 낙마했다.
오 전 시장은 부산시 정무부시장과 행정부시장을 거쳐 해양수산부 장관과 대학 총장까지 두루 역임한 자타공인 행정 전문가였다. 하지만 정작 300만 시민의 염원을 받든 시장이 되고서는 일 잘한다고 평가하는 이를 보지 못했다. 임기를 다 채웠다 한들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오 전 시장에 비춰, 지방행정 경험이 전무한 전재수 당선인이 부산시를 잘 이끌 수 있을지 걱정하는 시선이 적지 않다. 4개월 남짓 해수부 장관직을 수행하며 이뤄낸 굵직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국정과 시정은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때론 중앙정부를 상대로, 때론 지역사회 안에서 복잡다단한 이해관계가 얽힌 난제를 ‘머리 굵은’ 관료들 손바닥에 놀아나지 않고 무탈하게 조율해 나갈 수 있을까.
전 당선인은 최근 시청 기자실을 찾아 “역대 부산시장 중 가장 자주 기자들과 만나겠다. 일 잘하는 공무원을 추천해 달라”고 당부했다. 시민 목소리를 대변하고, 시민을 대표해 질문하는 기자와 소통 기회를 늘리겠다는 생각은 훌륭하다. 그러나 너무 신뢰하지는 마시라. 기자도 사람인지라 순수한 의도로만 인재를 추천하리란 보장은 없다.
행정 초보로서 빠르게 시정을 파악하고 조직을 장악해, 당면 과제를 속도감 있게 추진할 방책은 뭘까. 시민을 대신해 시청과 구청 행정을 십수 년간 살펴본 경험을 바탕으로 제안 드린다. 부산시 업무보고와 주요 회의를 생중계하시라. 시민들은 이미 이재명 대통령 사례를 통해 그 효과를 알고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기획재정부에서 시작해 마지막 순서로 갓 부산 이전을 마친 해양수산부를 찾아 생중계로 업무보고를 진행했다. 이 밖에도 수석보좌관 회의, 타운홀 미팅 등 다양한 현장을 실시간으로 공개해 국민과의 접점을 늘렸다. 생중계 장면은 수많은 뉴스거리와 파생 동영상을 만들어 내며, 멀게만 느꼈던 국정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대통령의 질의에 진땀 흘리는 기관장, 막힘없이 답변하는 실무자 등을 지켜보며 ‘국민주권정부’의 효능감을 생생하게 맛봤다.
국정과 마찬가지로, 시정도 생중계 장점이 많다. 우선, 시민들의 관심도를 높일 수 있다. 둘째, 공무원의 실력을 가늠하는 자리가 된다. 셋째, 자연스럽게 공직사회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넷째, 행정 투명성과 시민 소통 강화라는 대의명분도 챙길 수 있다. 이미 라이브 효과를 알아채고 앞서나간 당선인이 여럿 있다. 가까이는 김상욱 울산시장 당선인이 대표적이다. 김 당선인은 선거 직후 ‘시내버스 개선 간담회’를 시작으로 울산시민과의 대화, 인수위 출범 이후 업무보고까지 꾸준히 생중계로 진행하고 있다. 담당 공무원의 비공개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는 장면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전재수 당선인은 공직사회의 친절함을 강조한다. 유능함과 겸손함을 겸비했을 때 친절이 나온다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그만의 철학이다. 유사하게, 20년 가까이 기자 생활을 하면서 몇 가지 경험칙이 생겼다. ‘기자에게 너무 잘해주는 사람을 경계하라’, 반대로 ‘기자를 너무 기피하는 이들도 의심하라’는 것이다. 전자는 ‘불가근불가원’이란 저널리즘 원칙과 맞닿아 있다. 후자의 대표적인 사례는 헌법기관이란 이유로 언론 감시마저 회피해 온 선거관리위원회이다. 부산시장이 기자를 만나 여론을 듣고 사안을 설명하는 자리를 자주 가질수록, 친절의 철학과 시정 비전에 공감하는 채널이 늘어날 것이다. 이에 더해 ‘대시민 보고회’로서 시정 생중계를 적극 활용한다면, 300만 시민의 눈과 귀를 등에 업을 수 있다. 소리 소문도 없이 추진한 이기대 퐁피두센터 분관, 100억짜리 부산오페라하우스 개관 공연 등 전임자의 폐쇄적인 행정을 시민들은 기억한다. 반면교사 나침반을 달고 닻을 올릴 ‘전재수호’의 순항을 기원한다.
2026-06-24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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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박완수 도정 2기에 거는 기대와 우려
선거가 끝났다. ‘경남대도약’을 내건 박완수 경남지사가 ‘경남대전환’을 내세운 상대 후보를 이기고 귀환했다. 이제 경남도정은 지난 4년의 기반을 바탕으로 도정 9기 출항을 앞두고 있다.
양측의 깃발은 다른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여야 후보 누가 당선됐더라도 지난 4년의 기반을 무시하거나 버릴 수는 없다. 이것은 도정의 연속성 때문이다. 박 지사는 '대도약'을 내걸었지만, 대도약은 '대전환'을 내포하고 있다.
박 지사는 선거 결과가 발표된 지난 4일 도청에서 주요 간부들과 티타임을 갖고 두 가지를 강조했다. 건전 재정 기반의 민생 행정이 그 첫째다. 미래 신산업 육성과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행정혁신도 강조됐다. 박 지사는 고물가와 경제적 어려움으로 힘든 서민과 취약계층을 위한 민생 안정 정책을 최우선 과제로 추진해 달라고 간부 공무원에게 주문했다.
박 지사의 ‘애민 정책’으로 맛난 불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밀양 시골에 있는 어머니는 박 지사가 8기 임기 막판에 지급을 결정한 ‘도민 생활지원금’과 정부의 고유가지원금을 합해 무려 25만 원이나 갖고 있었다. 어머니의 ‘턱’으로 염치없는 아들은 고기를 구웠다.
계산서가 두 자릿수 금액을 기록하자 식당 사장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생활지원금의 선순환 효과는 분명했다. 박 지사가 선거 직전 이른바 ‘표’를 노리고 이런 정책을 펴지는 않았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생활지원금 지급 결정의 파급력은 경남 전체를 들썩이게 했다. 어쩌면 그것은 8기 도정의 성과 덕분이었다. 박 지사의 건전 재정이 도의 곳간을 채웠고, 그 여유로움으로 차입 없이 2800억 원이 넘는 쓰임을 있게 했다. 그리고, 박 지사는 이제 다시 9기 도정을 책임지게 됐다.
그의 1호 공약이 ‘행복UP’으로 명명한 5대 복지 공약이다. 우선 도민 멤버십 카드 도입이다. 모바일 앱을 통해 18세 이상의 도민이 카드를 발급받아 교통, 문화, 의료 등 소비에서 할인과 포인트 적립 등이 가능하다. 4050세대를 위한 전용 복지포인트와 장애인 이동권 보장 확대 등 복지, 도민연금의 강화 등이다. 여기에 이 계획을 뒷받침하는 도민행복기금 조성까지 해서 5대 복지 공약이다.
민생과 권역별 경제 공약도 중요하게 발표했다. 골목상권 활성화 등 내수 경기 진작 시책과 광역버스(G버스) 도입 등 광역 교통망 확충, 피지컬 인공지능(AI), 우주항공복합도시 조성, 남해안권 발전 위한 특별법 제정 등도 박 지사의 도정 9기 주요 과제이다.
공무원부터 통합 창원시장, 국회의원, 공기업 사장을 역임하고 도지사직을 무난하게 수행하는 박 지사를 흔히 ‘행정의 달인’이라고 부른다. 공직사회에서 잔뼈를 굵힌 박 지사의 관록을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달인에게 나름의 한계가 있다면 그 중 하나는 집권 여당과 당적이 다른 것을 꼽을 수 있다.
박 지사는 사실 행정 전문가답게 야당의 고유 정치색을 극명하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차별 없는 전 도민 생활지원금 지원은 이재명 대통령의 전 국민 민생지원금 정책과 다른 점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그동안 야당은 급식, 복지 분야 등에서 ‘선별·차등 지원’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박 지사는 야당의 관성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 지방선거 출정식을 민주화의 성지 국립3·15민주묘지에서 했으며, 재선 출마선언 직후 첫 행보로 김해 봉하마을 고 노무현 대통령 묘소 참배를 하고 선거운동에 나섰다. 선거 기간이던 서거 17주기 추모식에는 혼자 아침 일찍 김해 봉하마을을 찾아 묘역을 참배하는 열린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야당 출신 박 지사’가 제시한 굵직굵직한 사업은 정부와의 협조나 이해가 필수적이다. 당장 남해안특별법도 그렇고, 광양만경제자유구역의 하동 지분을 별도로 분리하는 하동경제자유구역청 신설도 마찬가지이다.
정부 또한 속좁게 야당 출신 도지사를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겠지만, 국토의 균형발전이라는 큰 틀에서 정부와 지방정부의 엇박자가 없어야 박 지사가 정한 길이 원활하게 펼쳐진다.
제일 걱정되는 부분은 부울경 행정통합이다. 지역 균형발전과, 경남 대도약을 위해서는 행정통합이 우선돼야 한다. 여당 출신의 부산시장과 울산시장은 메가시티 건설이 공약이었고, 박 지사 또한 자치권이 충분히 주어지는 행정통합을 법 제정을 통해 실현하겠다고 약속했다.
지난 4월 발의한 ‘경남부산특별시 설치 특별법’이 국회에서 어떻게 다뤄질까? 박 지사의 계획대로라면 2028년 4월 총선 시기에 통합 단체장을 선출해야 한다. ‘행정의 달인’ 박 지사의 부울경 행정통합 행보가 궁금하다.
이재희 사회2부 선임기자 jaehee@busan.com
2026-06-2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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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10년 EU 떠난 영국과 지금의 부울경
딱 10년 전이다. 2016년 6월 24일 오전 7시 20분경 영국발 뉴스에 세계가 경악했다. EU(유럽연합) 탈퇴에 대한 국민투표 결과가 공식적으로 확정됐다. 탈퇴 51.9%, 잔류 48.1%. 설마가 현실이 된 결과였다. 3.8% 차이로 영국은 ‘브렉시트(Brexit)’를 결정했다.
투표를 강행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그날 바로 사임 의사를 밝혔다. 그는 원래 EU 잔류파였다. 탈퇴 논란을 아예 털고 가기 위해 국민투표를 밀어붙였는데, 결국 브렉시트 1등 공신으로 역사에 남게 됐다. 그만큼 투표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후임 총리는 탈퇴 지지자인 테리사 메이였다.
당시 EU는 회원국들의 더욱 강한 결속을 다지고 있었다. 미국에 이어 중국이 경제 패권 국가로 부상하고 있었다. 금융 통합을 강화해 유럽 내 경제 효율성을 높여야 했다. 유럽을 하나의 경제 블록으로 묶어, 외부 협상력을 높일 필요도 있었다. 대체로 유럽 안에선 지지를 받는 논리였다. 영국의 다수 경제학자들도 영국이 EU에서 빠지면 매우 곤란해질 것이라고 꾸준히 경고했다.
하지만 영국 안에선 EU에 법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종속되는 것에 불만이 커졌다. 나라 통제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게 핵심 주장이었다. 한때 세계 최강 국가였던 영국민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메시지였다. 경제보다 자존심을 선택한 투표 결과라는 평가도 있다.
10년이 지나면서, 영국의 경제는 더 추락했다. EU 탈퇴 시 제기됐던 여러 우려가 적잖게 현실이 됐다. 지금 영국에선 브렉시트를 후회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이어지고 있고, EU 재가입 논쟁도 불거졌다. 노동당 안에선 EU 재가입을 공약으로 내걸자는 주장도 공식적으로 나왔다. 2016년 6월의 3.8% 차이 대가는 꽤 무거웠다.
‘규모의 경제’는 규모가 커져야 경제적 효율성이 좋다는 의미로 쓰인다. 많이 만들어야 하나를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 줄고, 이익은 커진다. 시장이 커야 투자가 몰리고, 또 그 덕에 시장은 더 커지고, 성장의 선순환에 올라탈 수 있다. 영국은 큰 시장의 일부가 아닌 자신만의 시장을 만든 셈이다.
시장의 논리만으로 경제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도 살펴야 한다. 경제 활동은 정책과 행정의 불확실성에 노출돼 있다. 주변 EU 회원국들과 비교해, 영국만 관세와 행정 시스템이 다르면 영국의 경제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 등으로 시장 통합, 행정 통합, 경제 블록화 등이 불경기 타개책으로 자주 언급된다.
80년대, 90년대 명절이면 부산에서 조부모가 있는 경남 고성으로 갔다. 부산의 지근거리에 있는 곳이지만, 매번 지겨워서 힘들었다. 차가 막히면 4~5시간도 걸렸다. 지금은 우회도로가 많고, 길도 좋아져, 경상남도 저 멀리 구석구석까지 웬만하면 2시간 남짓이다. 교통 인프라 덕에 부울경은 물리적으로 가까워졌다.
나머지는 제자리다. 부울경이 정서적으로 딱히 가까워지고 멀어질 일도 없었다. NC다이노스의 탄생으로 롯데자이언츠 팬이라는 공통분모가 오히려 줄었다. 경제 교류도 마찬가지다. 부울경은 서로 붙어 있어 자연스레 교류가 많을 수밖에 없지만, 딱 그 수준이다. 경제적으로 협업하며 함께 성장하는 사이는 아니다.
유럽의 나라들이 EU를 강화하면서 했던 고민은 부울경에도 유효하다. EU는 미국, 중국 등으로부터 유럽의 경제를 지켜야 했다. 어떤 면에서 대한민국 수도권은 미국과 중국보다 더 위협적이다. 지난 수십 년간 서울공화국은 돈과 사람을 끌어당겼다. 이런 극단적인 불균형을 극복하려 나온 아이디어가 지역 통합이다.
부울경 경제 블록화, 부울경 행정통합, 부울경 메가시티 등 부울경이 뭉치자는 아이디어는 여러 이름으로 나왔다. 이번 6·3 지방선거에서도 정부 지원과 맞물려 꽤 큰 쟁점이 됐다. 안타깝게도 부울경 통합에 대한 관심은 금세 또 식고 있다. 부울경 단체장 당선인들의 정당이 달라, 통합 동력이 떨어졌다는 전망도 있다. 민주당은 메가시티, 국민의힘은 행정통합을 원하기 때문이다.
10년 전 브렉시티가 결정될 때, 이미 영국의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건 자명했다. 그럼에도 영국 국민은 경제보다 자존심을 우선시했다. 부울경이 경제 블록화를 달성해 시장을 키우고 행정 효율성을 높이면, 결국 경제가 좋아진다는 것도 자명하다. 다만 단체장의 당이 서로 달라 뭉치기 쉽지 않다는 게 서글프다. 당의 자존심을 지키는 게 먹고 사는 문제보다 중요하지는 않다면, 당선인들은 지금부터 머리를 맞대야 할 것이다. k103@busan.com
2026-06-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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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나동연 양산시장 4선 성공, 이제는 실천
6·3 지방선거는 낙동강 벨트 민심의 변화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줬다. 부울경 곳곳에서 정권 심판론과 지역 발전론이 맞부딪힌 가운데 경남 양산에서는 개표 초반 열세였던 국민의힘 나동연 시장이 막판 역전 드라마를 쓰며 4선 시장에 성공했다.
이번 결과는 단순한 정치적 선택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시민들은 지역 발전의 연속성과 안정성에 무게를 실었다. 민선 8기 동안 추진해 온 사업들을 마무리하고, 양산의 미래를 책임질 프로젝트를 완성해 달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나 시장은 당선 직후 “양산의 미래를 만들어갈 프로젝트를 차질 없이 진행하고, 시민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민선 9기 성패는 선거 과정에서 제시한 비전과 공약을 얼마나 현실로 만들어 내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양산은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다. 경남의 대표 도시로 성장했지만, 도시 인프라는 성장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부울경 중심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도 충분히 살리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앞으로 4년은 양산이 동남권 중심도시로 도약할 수 있을지를 결정할 중요한 시기다. 그런 점에서 이번 결과는 양산 발전에 긍정적 여건을 마련했다는 평가다.
다행히 민선 8기 사업들은 이미 본궤도에 올라 있다. 증산신도시 개발은 ‘도시와 자연, 사람이 공존하는 자족 복합도시’ 조성으로 서부양산의 새로운 성장축을 만들고 있다.
부산대 양산캠퍼스 유휴부지 활성화 사업도 정부의 공간혁신구역 선도사업 선정을 계기로 속도를 낼 전망이다. 부산대와 양산시, 경남도, 정치권이 협력해 실질적인 성과를 도출한다면 지역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회야강 르네상스 사업은 관광과 문화, 친수공간을 결합한 것으로 단계적으로 추진 중이다. 종합장사시설 건립과 자원회수시설 현대화 사업은 주민 수용성과 안전성을 확보하면서 사업을 완성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지만, 역시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동·서양산 간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광역교통망을 확충하는 천성산 터널 개설 사업도 지역 균형 발전과 도시 경쟁력 강화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민선 9기 공약 사업도 관심을 모은다. 부울경 광역철도 조기 착공과 동남권 순환 광역철도의 예비타당성 조사 통과는 양산의 미래를 좌우할 교통 분야 핵심 과제다. 부울경을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는 광역교통망 구축은 양산 발전의 필수 조건이다.
웅상출장소의 동부청사 승격 역시 지역 주민들의 오랜 숙원이다. 인구 10만 명을 가진 동부양산의 행정 수요를 감안하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만 20세 청년들에게 5000만 원 규모의 출발 자본을 지원하겠다는 공약도 주목된다. 지방소멸 위기 시대에 청년 정착 유도와 출산율 제고를 위한 적극적인 시도라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정치적 여건도 나쁘지 않다. 박완수 경남지사가 재선에 성공하면서 양산시와 경남도의 정책 공조는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
현재 국정 운영 주체는 더불어민주당이지만, 양산의 국회의원인 국민의힘 윤영석·김태호 의원은 나란히 4선 중진이다. 국회와 중앙부처를 상대로 한 국비 예산 확보와 현안 해결 과정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여야를 떠나 지역 발전이라는 공동 목표 아래 협력 체계를 구축하다면 양산의 핵심 사업 추진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변수도 있다. 낙동강협의회다. 지방선거 전까지 참여 단체장(7개 자치단체) 모두가 국민의힘 소속이어서 비교적 일사불란한 대응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번 선거 이후 부산지역 4개 자치단체와 김해시가 민주당으로 넘어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기존 협력 체계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낙동강 문제는 특정 정당의 문제가 아니라 주민 생존권과 직결된 사안이라는 점에서 정치 논리를 넘어선 초당적 협력이 절실하다.
나동연 시장의 4선 성공은 선거 승리 자체보다 민선 8기 사업의 연속성을 확보하고, 민선 9기 새로운 비전을 실현할 기회를 얻었다는 데 있다.
나 시장은 “모든 문제의 답은 시민들의 이야기에 속에 있었고, 현장에 있었다”고 말했다.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 앞으로 4년의 과제다.
양산의 미래를 좌우할 과제들은 결코 만만치 않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적·행정적 여건은 어느 때보다 우호적이다. 민선 9기 성공 여부는 ‘현장에서 답을 찾겠다’는 초심을 얼마나 끝까지 지켜내느냐에 달려 있다. 시민들이 나 시장에게 부여한 4년은 ‘양산의 미래를 완성하라’는 엄중한 책임의 시간이다.
김태권 동부경남울산본부장 ktg660@busan.com
2026-06-15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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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부산 외국인 관광객, 국제선 공급만큼 늘었다
최근 부산을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이 늘었다. 해운대, 광안리 등 관광지는 어디라도 외국인 관광객 증가를 체감할 수 있다. 외국인 관광객은 얼마나 늘어난 걸까. 다른 지역에 비해 유난히 부산의 인기가 올라간 걸까.
부산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통계는 기관별로 차이가 난다. 집계 방식이 달라서다. 부산시 발표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 4월까지 부산을 찾은 외국 관광객은 147만 5889명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9% 늘어난 수치다. 부산시는 부산항과 김해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외국인에 '타지역 경유자'를 더해 통계를 낸다.
한국관광공사가 집계한 올해 1~4월 부산 방문 외국인 수는 534만 2009명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372만 6065명)에 비해 43% 늘어났다. 한국관광공사 데이터렙은 SK텔레콤 가입자 정보를 이용해 하루 2시간 이상 부산에 체류한 외국인 방문자를 집계한다. 하루 방문자에 체류일이 곱해져 부산시 통계보다 수치가 크다.
두 기관이 공통적으로 제시한 부산 외국인 관광객 40% 증가는 이례적인 수치다. 한국을 찾은 전체 외국인 관광객 증가와 비교하면 차이가 분명하다. 부산시 자료에 따르면 1~4월 한국 전체의 외국인 관광객은 전년 동기 대비 21% 늘었다. 부산 외국인 관광객 증가율의 절반 수준이다. 한국관광공사 데이터랩도 1~4월 전체 외국인 관광객이 24% 늘었다고 밝혔다. 이 역시 부산 외국인 관광객 증가 폭이 절반 정도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부산을 방문하는 비율도 독보적인 상승세를 보인다. 한국관광공사 통계에서 지난 1~4월 전체 외국인 관광객 가운데 부산 방문자 비율은 9.5%였다. 전년 동기 대비 1.4%포인트(P) 늘어난 수치다. 부산 방문 비율 증가는 전국 최고로 서울(1%P 증가)보다 높다. 전년 동기 대비 외국인 관광객의 지역 방문 비율이 늘어난 광역지자체는 부산, 서울, 제주(0.7%P 증가), 인천(0.1%P 증가)뿐이다. 경기도는 같은 기간 외국인 관광객의 방문 비율이 1.2%P 줄었다.
부산시 통계에서도 외국인 관광객의 부산 방문 비율은 늘었다. 지난 1~4월 전체 외국인 관광객의 22%가 부산을 방문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는 전체 외국인 관광객의 19%만 부산을 찾아 3%P 증가했다. 외국인 관광객에게 부산의 인기가 올라간 사실이 수치로 확인된다.
외국인 관광객의 부산 방문과 관련해 주목할 사실은 항공 이용객 비율 증가다. 부산시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부산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가운데 김해공항을 이용한 비율은 40%였다. 올해는 공항 이용 비율이 42%로 2%P 늘었다. 외국인 관광객의 부산 방문 비율이 약 2%P 오른 것과 일치한다. 반면 타지를 경유해 KTX 등으로 부산을 찾은 비율은 44%로 지난해와 같았다. 항만을 이용한 비율은 2%P 줄었다(16%→14%).
묘하게 일치하는 수치가 하나 더 있다. 지난 1~4월 우리나라 국제선 좌석 공급량 가운데 김해공항 국제선 좌석이 차지하는 비율은 12.1%를 차지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는 10.7%였다. 김해공항 국제선이 전체 국제선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4%P 증가한 셈이다. 이는 한국관광공사 통계에서 지난 1~4월 외국인 관광객의 부산 방문 비율 증가폭(1.4%P)과 정확히 일치한다. 2년 전과 비교해도 수치는 마찬가지다. 1~4월 한국의 국제선 공급에서 김해공항 비율은 2년 전에 비해 2.5%P 늘었다. 이 기간 외국인 관광객의 부산 방문 비율은 2.4%P 늘었다.
이 수치만으로 김해공항 국제선 확대가 외국인의 부산 방문 비율 확대를 이끈 원인인지는 알 수 없다. 원인과 결과를 바꿔도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김해공항 국제선 확대가 외국인 방문객 비율 확대에 선행한 것은 확인할 수 있다.
코로나19 이후 '인천공항 일원화' 영향으로 국제선 운항이 크게 줄었던 김해공항은 2022년부터 국제선 좌석 공급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2022년 우리나라 전체 국제선 항공 공급량(좌석)의 5.9% 수준이던 김해공항 국제선은 2023년 9.2% 2024년 9.9% 2025년 11.2%로 늘었다. 한국관광공사 통계 기준 외국인 관광객의 부산 방문 비율은 2022년 6.1%에서 2023년 7.3% 2024년 7.7% 2025년 8.6%로 서서히 늘었다. 국제선 공급 비율이 먼저 늘어나고 외국인 방문 비율이 뒤따라 늘면서 두 수치의 간격이 줄어드는 모습이다. 내국인 해외 관광을 위해 확대한 국제선 노선이 외국인 국내 관광을 이끈 셈이다. 국제선 노선 등 항공 서비스 확대는 지역의 관광 산업이 성장하기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다.
김종우 서울경제부 부장 kjongwoo@busan.com
2026-06-1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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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열일곱 살' 금융 중심지 부산
지방선거가 끝났다. 여당이 대체로 승리했다는 평가 속에 지방 권력까지 상당수 움켜쥐면서 여권은 그동안 지방 정부와 국민 눈치를 살피며 미뤄왔던 각종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 것으로 보인다. 부산과 관련이 깊은 금융 정책도 그렇다.
우선 한국거래소의 지주사 전환과 코스닥 분리가 속도를 낼 가능성이 크다. 이재명 대통령이 여러 차례 회의에서 이를 언급하며 추진 의지가 확인됐다. 부산에 본사를 둔 거래소의 코스닥 시장 관련 기능이 서울로 더 분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여전하다.
부산 남구 금융 자율형사립고 논의도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거래소가 수행한 용역이 거의 마무리됐지만 선거 이후 지방 권력과 협의가 필요한 만큼 미뤄뒀던 논의의 빗장이 곧 풀릴 듯하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금융 중심지 부산의 위상에 영향을 끼칠 금융 정책은 정부와 여당이 추진 중인 제3 금융 중심지 지정이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증시 활황에 전북 전주에 본사를 둔 국민연금공단이 막대한 자금을 운용하며 글로벌 금융 시장에서 큰손으로 떠올랐고, 이에 글로벌 자산운용사와 투자은행, 국내 금융지주사들이 잇따라 전주로 몰려들면서 제3 금융 중심지 논의가 재점화됐다. 대통령은 전주의 사례를 성과로 추켜세웠다. 지난 대선에선 제3 금융 중심지 지정을 약속하기도 했다. 전주 지역에서도 지금이 적기라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정부의 지방 균형발전 전략인 ‘5극 3특’ 기조에 관련 논의가 더 속도를 내는 분위기다.
부산시와 부산 시민단체는 ‘나눠 먹기식’ 금융 중심지 정책은 그간 어려운 상황에서 축적해 온 부산의 인프라와 기능을 통째로 흔들 수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이에 전주 지역 상공계 등은 부산이 금융 중심지 추가 지정을 지역 간 제로섬 게임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부산이 정부의 국가균형발전 정책에 반하고 있다며 ‘실망’과 ‘분노’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지방 소멸의 시대, 팽창하는 수도권에 맞선 전주의 외침이 십분 이해된다. 하지만 국토 면적과 금융시장 규모를 감안할 때 금융 중심지를 세 곳까지 분산 지정하는 것이 과연 국가 경쟁력 측면에서 바람직한지는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 금융 중심지 부산의 초라한 현실까지 새겨본다면, 추가 지정 논의가 국가균형발전이라는 명분만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 되묻게 된다.
부산이 금융 중심지로 지정된 건 2009년 1월이다. 17년이 넘는 긴 세월이 지났지만 부산은 지정 초기와 별반 달라진 게 없는 유아기 수준의 금융 중심지에 머물러 있다. 금융산업 주요 인프라 기관들만 집중돼 자본시장을 지탱하는 골격만 갖췄을 뿐, 피와 살이 되는 민간 자본과 인력은 서울에 몰려 있다. 부산을 파생금융 중심지로 특화하려고 했던 정부 계획도 절반의 실패다. 실제 운용·트레이딩 인력과 의사 결정 기능은 대부분 서울에 있기 때문이다.
이전 공공기관의 수장들과 주요 임직원들은 여전히 일주일에 3~4일 서울에 머문다. 서울이 본사인지 부산이 본사인지 아직도 헷갈린다. 직원들 역시 많은 인원이 서울에 배치돼 있다. 서울에 60% 가까운 조직과 인력이 남아 있는 기관도 있다. 부산 금융 중심지는 서울 금융 중심지 ‘블랙홀’에 그 기능을 더 이상 빼앗기지 않기 위해 용을 쓰며 명맥만 유지하는 꼴이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4월 금융 중심지 추가 지정 타당성 검토 용역에 착수했다. 용역은 오는 10월 마무리된다고 한다. 연내 추가 지정 여부가 가려지는 수순이다. 앞서 전주는 2019년과 2022년 두 차례 금융 중심지 지정이 무산된 바 있다. 당시 용역에서는 전주가 금융 거점지로는 적합하지만 국제금융 중심지로는 맞지 않고, 추가 지정은 기존 금융 중심지 두 곳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또 기존 금융 중심지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내실화 노력에 지속적으로 집중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전주가 금융 중심지로서 위상을 가질 만한 금융회사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유일한 상황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긴 세월 동안 정부의 부산 금융 중심지 내실화 노력은 부족했다. 그 사이 서울의 금융 기능은 철옹성처럼 더 굳건해졌다. 전주 역시 국민연금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금융 구조를 예나 지금이나 한계로 짚어봐야 할 부분이다. 증시 활황에 돈과 인력을 끌어들이고 있지만, 증시 침체 시 지속 가능한 금융 중심지로 기능을 할 수 있을지 의문 부호가 남는다.
정부는 금융 중심지 추가 지정 논의를 기회로 금융 중심지 정책을 다시 찬찬히 따져봐야 한다. 여당 출신 새 부산시장도 정부 정책에 맞서 부산 금융 중심지의 기능과 역할을 어떻게 지켜내고 경쟁력을 키울 것인지에 대한 치밀한 전략과 대응이 필요하다. nmaker@busan.com
2026-06-08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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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삼절사와 기억해야 할 역사
5월 가정의 달이 가고 맞이한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6월엔 의병의 날(6월 1일)과 현충일(6월 6일), 한국전쟁(6월 25일) 등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희생을 기리는 날이 이어진다.
그중 6월 1일 의병의 날은 국난의 위기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 나라를 지킨 의병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국가기념일이다. 의병의 날이 6월 1일로 지정된 건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곽재우가 경남 의령에서 처음 거병한 날이기 때문이다.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짜가 6월 1일이다.
곽재우는 임진왜란 초기 자신의 전재산을 털어 의병을 모집했다. 붉은 갑옷을 입고 전장을 누벼 ‘홍의장군’이라 불렸고, 왜군들은 그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했을 정도였다. 그는 정암진 전투 등에서 왜군의 북상을 막아내며 조선군이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 곽재우 부대와 함께 싸운 의병 가운데 양통한이란 인물이 있다. 부산 출신의 양통한은 왜군의 침략에 동래성이 무너지자 의병으로 나서 경주, 대구 등지에서 활약했고, 정유재란 때 곽재우와 함께 화왕산성에서 왜군에 맞서 싸우다 순절했다. 이때 그의 두 아들 양의와 양숙 또한 아버지와 함께 싸우다 전사하는 비운을 당했다.
앞서 양통한의 형 양조한은 동래성 전투에서 순절했다. 동래향교 유생이었던 양조한은 왜군이 동래성을 공격하자 향교의 성현 위패를 정원루로 옮겨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 그의 아들 양홍 역시 아버지와 마지막을 함께했다. 한집안의 두 부자(父子)가 모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다.
양조한과 양통한 형제는 남원 양 씨 가문이다. 이 가문의 일가인 양지는 임진왜란 당시 경기도 삭녕(현 연천)군수로 재직 중이었다. 그 또한 북상하는 왜군에 맞서 성을 사수하다 목숨을 잃고 말았다. 양지는 후일 이조판서에 증직되며 충민공이란 시호를 받았고, 양조한은 호조정랑, 양통한은 호조좌랑에 봉해졌다.
남원 양 씨 가문 3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해운대구 반송동에 자리한 삼절사(三節祠)다. 삼절사는 1839년 동래부사 이명적이 세 충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
반송동 주택가 사이에 자리한 삼절사는 약 400평(1320㎡) 규모의 대지 위에 세워져 다. 제향을 지내는 세한당과 모현관, 반송재 3개 동으로 구성돼 있으며 1986년엔 부산시 문화재자료 1호로 지정된 바 있다. 세한당의 세한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와 같은 논어 구절에서 따왔다. ‘날이 추워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不彫)’란 뜻이다.
일본에 맞선 충신을 모신 사당인지라 삼절사는 일제강점기에 큰 수난을 겪는다. 당시 일제는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사우와 향사를 경계하며 탄압했다. 이에 후손들은 삼절사 위패의 훼손을 피하기 위해 몰래 민가에 옮겨 봉안했고, 제향도 한밤중에 조용히 치렀다. 일제가 사당을 철거하려 하자 창고라고 둘러대며 가까스로 건물을 지켜냈다고도 한다. 현판과 문서 상당수가 사라졌지만, 후손들은 끝까지 삼절사를 지켜냈다.
남원 양 씨 가문과 관련해 흥미로운 이야기도 전해진다. 양조한의 손자이자 양홍의 아들인 양부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순국한 동래성 전투 현장에 함께 있었다. 당시 열두 살이던 그는 포로가 돼 일본으로 끌려갔다. 석 달 만에 일본어를 익힌 양부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이 됐고, 명나라 사신으로 일본에 온 심유경과 공모해 독이 든 환약을 도요토미가 먹도록 해 그의 죽음에 관여했다고 한다. 이 얘기는 조선 후기 문헌 〈연려실기술〉과 〈성호사설〉에 기록돼 있다.
‘병역 명문가’란 말이 있다. 여러 세대에 걸쳐 병역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국가에 헌신한 가문을 일컫는다. 그런 의미에서 임진왜란의 국난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가가 목숨을 바친 남원 양 씨 가문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호국 명문가’라 할 만하다.
반송동은 집단이주촌으로 알려져 있다. 1960~1970년대 부산 도심의 불량주택 철거에 따라 반송동에 대규모 정책이주가 이뤄진 탓이다. 하지만 정책이주 이전에 반송동엔 남원 양 씨 가문이 400여 년간 대대로 터를 잡고 있다. 후손들은 여전히 삼절사를 지키며 세 선조의 제향을 모시고 있다.
집단이주란 이미지를 한꺼풀 벗겨내면 반송은 달리 보인다. 숨은 역사가 숨쉬는 곳.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 재조명된 엄흥도처럼 늦었지만 삼절사와 세 위인의 이름도 기억해야 할 역사다. 우리 주변엔 여전히 알려지지 않거나 잊힌 역사가 적지 않다.
정광용 독자여론팀장 kyjeong@busan.com
2026-06-04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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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그 거친 입을 다물라
“우리는 지금 극단적인 나르시시즘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워싱턴의 지도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의 패’를 마치 자신이 타고난 ‘천재성’ 덕분인 양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지금 워싱턴을 이끄는 지도층은 ‘공감하는 것’이 곧 ‘약한 것’이라고 믿는 듯합니다.”
지난달 28일 미국 유명 코미디언 코난 오브라이언이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한 연설이 화제다. 코난 오브라이언은 날카로운 풍자와 유머로 30년 넘게 미국 심야 토크쇼를 지배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워싱턴을 이끌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공감 능력을 잃은 권력’으로 정의했다.
이날 하버드대 졸업생들과 시민들은 마가(MAGA)를 내세우며 관세 전쟁에서 동맹국을 무시하고, 이란을 일방적으로 압박하고, 자신의 정책을 반대하는 대학에 지원금을 끊은 트럼프에 대한 일갈에 환호했다. 20분간 이어진 그의 연설은 폭소로 채워졌다. 그의 한마디에는 말의 무게가 느껴졌다.
오브라이언의 진단은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공감 능력을 잃어버린 일부 권력자들이 내뱉는 거친 언어와 판단에 한국 국민들도 고통받고 있다. 6·3 지방선거를 하루 앞둔 대한민국 정치가 바로 그 현장이다.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터져나온 한국 정치인들의 말실수는 너무 많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당대표는 지난달 3일 부산 북구 구포시장에서 유세 도중 한 초등 1학년 학생을 만난 자리에서 40대 후반인 하정우 후보에게 “정우 오빠” “오빠 해봐요”라고 부르도록 유도해 비판을 받았다. 교육·여성 단체들은 아동학대 혐의로 정 대표를 검찰에 고발하기도 했다. 정 대표와 하 후보는 “상처받았을 아이와 부모님께 송구하다”며 사건 당일 밤 SNS에 사과했다. 대한민국 집권 여당이자 국회 의석을 3분의 2 가까이 가진 거대 정당의 대표의 언행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에 터진 ‘5·18 탱크데이’ 사태에 대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의 발언 역시 공감 능력이 있는 발언으로 보기엔 어렵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민주화 역사를 부정하는 듯한 마케팅을 벌인 스타벅스에 항의했다. 국민들은 스타벅스 불매 운동에 나서며 강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달랐다. 장 대표는 ‘커피 한 잔의 여유’가 적힌 붉은 앞치마를 하고 선거 운동에 나섰다. 그는 “우리의 소소한 일상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이재명과 민주당을 심판하자”고 호소했다.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인증샷을 SNS에 올리기도 했다. 장 대표를 포함한 국민의힘 소속 정치인들의 언행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의 유가족과 시민을 향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찾아볼 수 없다.
지난달 26일 3명이 숨진 서소문 고가차도 붕괴 사고마저 선거 홍보 수단으로 이용한 이들도 있다. 국민의힘 소속 서울 마포구청장 후보는 “우리 마포는 4년 동안 단 한 건의 큰 안전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다”고 내뱉었다. 한 가정의 가장 3명이 숨진 안타까운 사고조차 자신의 정치에 악용하는 모습에 국민들은 절망해야만 했다.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소속 서울시장 후보 지지자들이 ‘이번 사고는 선거에 호재다’라는 비정한 글을 올려 논란을 샀다.
오브라이언은 정치인들이 스스로 착각하는 정치인으로서의 천재성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 착각이 공감 능력을 죽인다고 설명했다. 이어 공감을 잃은 권력이 언어를 더욱 타락시킨다고 진단했다.
이 진단은 대한민국 정치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국가, 국회, 지방정부·의회에서 권력을 갖는 과정에는 본인의 능력만큼이나 시대적 흐름과 상대의 실책 등 엄청난 운이 작용한다. 권력은 국민이 잠시 맡긴 것일 뿐, 전유물이 아니다. 그 권력에 취하는 순간 참사 앞에서 치적 자랑을 늘어놓고, 역사적 비극 앞에서 커피 한 잔을 들이밀고, 아이에게 부적절한 호칭을 강요하는 정치인들의 잘못된 말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정치인의 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들의 말은 법이 되고 예산이 되고 누군가의 삶이 된다. 그들의 말 한마디로 민심은 돌아선다. 공동체는 반쪽으로 갈라진다. 당리당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정치인의 숙명이라고들 하지만 그들의 입이 무거워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대중을 향한 정치인들의 언어에는 성찰이 있어야 한다. 성찰 없는 정치인의 말은 국민들에게 고통일 뿐이다. 선거 무대의 주인공은 함부로 말을 뱉는 정치인이 아니다. 시민들이다. 그러니 정치인들은 이젠 그 거친 입을 다물라.
2026-06-0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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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자본 탈출
전문직에 종사하는 동생 A가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잘 지내?” “응.” “아직 부산에 살고 있나 해서.” “당연하지. 부산일보 다니는데 어딜 가.”
몇 번의 문자가 더 오간 뒤, A는 해운대 마린시티 아파트를 팔고 서울 아파트를 샀다고 했다. “지금 안 갈아타면, 진짜 서울 집 못 살 거 같아서. 좀 서둘렀어.”
부산에 살고 있냐는 말이, 몸이 부산에 있느냐를 묻는 말이 아니었다. 몸과 영혼을 나누듯, 사는 집과 자본을 나눈다면 너의 자본이 부산에 아직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영혼과도 같은’ 자본을 ‘상급지’ 서울로 옮긴 분투기를 듣고서야, ‘아직’ 부산에 살고 있느냐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A는 주식에 ‘젬병’이었던 기자에게 미국 주식 시장이 꽤 괜찮은 투자처란 걸 처음 알려줄 때처럼, 최대한 기분이 나쁘지 않도록 돌려 말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A의 자본은 ‘유출’이 아니라 부산을 ‘탈출’했다.
‘돈깨나 있는’ 시니어층 사이에서도 건물을 팔고, 회사를 팔고 자식들 있는 서울에 집을 사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수십 억 건물을 부산에 놔둬 봐야 오르지도 않고 공실과 임대 관리로 골치만 아픈데 서울 ‘똘똘한 한 채’를 사 눌러 앉으면 걱정도 사라지고, 자식 손주도 더 자주 볼 수 있으니 ‘돈 싸들고’ 서울로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서울에 자리 잡은 자녀들이 가업을 승계할 마음이 없으니, 회사를 매각한 뒤 자금을 챙겨, 자산 가치가 보장되는 서울로 향한다고 했다. 지역에서 창출된 부는 더 이상 지역 재투자나 소비로 이어지지 않고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수도권 자본 시장으로, 무서운 속도로 탈출하고 있다.
‘청년’뿐 아니라 ‘자본’도 서울로 빨려 들어가면서 지역은행들은 지역에서 빌려줄 돈이 모자라 수도권에서 고리로 자금을 끌어오기도 한다. 이처럼 곳곳에서 자본 탈출이 일상화되고 있고, 이를 다시 끌어오기 위한 노력은 눈물겹다. 지방의 자본 탈출은 지역 경기 침체와 투자 감소, 다시 인구 유출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지탱한다.
자본이 스스로의 증식을 위해 더 넓고 비옥한 땅으로 떠나는 것이 자본주의 생리라지만, 자본이 떠난 지역의 경제는 쪼그라들고, 일자리는 더 사라지게 된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그의 저서 〈21세기 자본〉에서 자본 수익률(r)이 경제 성장률(g)을 앞설 때 자산 불평등이 심화된다고 했다. 성장률이 하락하면, 자연스럽게 소득보다 과거에 축적했던 부가 더 큰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매년 성실히 일해 번 근로 소득과 사업 소득은 서울에 사둔 아파트 한 채 가격 상승분을 절대로 따라잡지 못하는 현실이 됐다. 부산의 산업 성장이 정체된 사이, 서울의 부동산과 주식 등 자본 자산의 가치는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새로 생겨난 ‘반도체 계급’과 ‘돈 복사기’로 불리는 삼전닉스 등의 주식 호황은 수도권으로 자본을 더 불어넣는 역할을 하고 있다.
A가 “지금 안 갈아타면 영영 못 갈 것 같다”고 서두른 이유도 바로 이 r과 g의 격차를 몸소 체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웬만한 자본 수익률쯤은 가뿐히 뛰어넘을 것 같은 전문직 A의 소득으로도 r과 g의 격차를 체감하고 서두를 정도면, 다른 직업군은 말해 무엇하랴.
실제로 지난해 상위 20%의 순자산이 7.9% 늘어나는 동안 하위 20%는 오히려 4.9% 감소하며 자산 격차가 7.82배까지 벌어졌고,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순자산 지니계수는 역대 최악인 0.625를 기록했다. 한국은 OECD 주요 선진국 18개국 중 5번째로 불평등한 나라로 꼽힌다.
한국은행 이슈노트에 따르면 지역 격차의 확대는 세대간 경제력 대물림에도 영향을 미친다. 부모 자산 4분위(상위 25%)의 자녀는 1분위(하위 25%) 자녀에 비해 수도권 이주 확률이 43%포인트 높고, 이런 상황에서 수도권 이주를 통한 계층 상승의 기회는 부모 경제력이 뒷받침된 자녀들에게만 집중된다. 자본 탈출은 수도권에서의 자녀 계급 상승을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 될 수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의 대가가 결국 경제 시스템 전체의 효율성을 저해한다고 경고했다. 불평등이 심해지면 교육 의욕, 노동 의욕이 떨어져 인적 자본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지속가능한 성장이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자본에 대고 애향심을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강제로 발을 묶어둘 수도 없다. 그보다 자본이 지역에 남는 편이 더 합리적일 수 있도록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 세금이 가볍고, 유동성이 좋으며, 가격 상승 기대가 클수록 자본은 부산에 남을 수밖에 없다. 6·3선거에서 부산시민의 선택을 받을 시장은 부산을 청년, 기업이 머물고 싶은 도시뿐 아니라 자본이 머물고 싶은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
2026-05-27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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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성과와 보상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보다 ‘삼전닉스’가 더 화제다. 두세 명만 모여도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이야기가 빠지는 법이 없다. 주가 이야기를 할 때는 주식을 전혀 모르던 사람조차 텐배거(10배 이상 수익률)니 하는 말에 솔깃할 수 있었는데 이어나온 억대 성과급 뉴스에는 그만 허탈해지는 분위기다. 특히 비수도권 월급쟁이들에게는 로또 당첨이 아니면 상상하기 힘든, 제 연봉보다 몇 배는 많은 반도체 대기업의 성과급은 박탈감조차 들먹이기 어려울 정도로 ‘딴 나라 이야기’다.
“마음이 무겁다.” 어렵게 노사협상이 타결되고 노조 투표 중인 삼성전자 성과급과 관련해 중소기업중앙회가 낸 논평이 그나마 가까운 감상이다. 중기중앙회는 “삼성전자 노사협상을 지켜본 중소기업 근로자와 사업주는 마음이 무겁다”며 “수억 원에 달하는 성과급 논쟁에서 협력 중소기업에 정당한 대가와 보상이 이뤄졌는지 의문”이라고 밝혔다.
임금 격차는 그렇지 않아도 갈수록 확대되는 추세다. 지난해 사업체노동력조사를 분석해보면 반도체 업종이 포함된 전자부품·컴퓨터·영상·음향 및 통신장비 제조업에서 300인 이상 상용근로자는 월 942만 원, 300인 미만 임시일용근로자는 월 176만 원을 받아 사업장 규모나 고용 형태에 따라 다섯 배 넘게 차이가 났다. 삼전닉스의 대규모 성과급 사태로 이 격차는 더욱 벌어질 전망이다.
기존 양극화와 다른 점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구분을 넘어 극소수 대기업에 이익이 쏠리는 구조다. 1분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합산 영업이익은 국내 상장사 전체 영업이익의 60%를 넘겼다. 같은 기간 수출에서도 상위 10개 기업이 처음으로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의 50% 이상을 차지했다. 전체 수출 기업 6만 7531개 중 단 0.015%가 국내 수출 절반을 책임지고 있다는 의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기업군에서 상대적으로 더 큰 박탈감을 호소한다. 삼성전자처럼 한 기업 내에서도 사업 부문에 따라 성과급이 갈리는 합의안에 노노갈등이 불거지기도 한다. 같은 명문대를 나와 삼성전자에 간 동기들을 보면서 씁쓸해하는 다른 대기업 직원, 메모리사업부의 성과는 산업 특성과 구조적 요인 덕분이지 직원들의 노력이 달랐던 건 아니라는 삼성전자 직원의 이야기도 보도됐다.
이와 같은 반응은 2020년 인천국제공항공사 보안요원 정규직 전환, 소위 ‘인국공’ 사태를 전후해 대두된 공정과 능력주의 논란을 떠올리게 한다. 그 때의 ‘공정’ 담론이 시험을 불변의 잣대로 보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불공정이라고 비판했다면, 이제는 인공지능(AI) 시대와 반도체 초호황이라는 구조적인 변수가 기존의 잣대를 뒤흔들고 있다. 이대로라면 극단적인 양극화와 산업 편중, 끝없는 비교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불행한 미래가 될 수도 있다.
삼성전자 노조 조합원의 합의안 투표는 27일까지다. 정부까지 중재에 나서고 글로벌 공급망이 숨죽인 논란은 기업 차원에서는 일단락될 것이다. 그 중심에는 ‘기업의 성과는 누구의 것이고, 투명한 보상 체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있었다. 삼성전자 노사는 나름의 답을 찾았고, 협력업체 동반성장, 지역사회 공헌, 산업안전 등을 위한 재원 조성과 운영계획 등 상생방안도 내놓기로 합의했다.
다음은 국가의 차례다. AI 시대에 사회가 산업의 성과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기준으로 보상 또는 배분할지 물어야 한다. 반도체 산업의 성과는 기업의 성과인 동시에 정부의 세액 공제와 지역사회 자원을 토대로 성장한 국가전략산업의 성과다. 청와대 김용범 정책실장이 반도체 기업의 역대급 이익으로 인해 발생할 초과 세수를 격차 완화와 미래 사회 안전망의 재원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한 배경이다.
‘국민배당금’이라는 표현 때문에 논란이 됐지만, 올해 국가 전체의 법인세수 목표치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기업만으로 채워지는 상황에서 세수 활용 방안을 고민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김 실장은 구체적으로 청년 창업 자산, 농어촌 기본소득, 노령연금 강화, 예술인 지원, 인공지능 시대 전환 교육 계좌 등을 들면서 “백가쟁명식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정교화해야 할 문제”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이 과정에서 지역 격차 완화는 재정투자의 주요 기준이 되어야 한다. 지역 격차는 여러 구조적인 불평등의 가장 강력한 요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태어나고 살고 있는지에 따라 일자리와 임금이 달라지고, AI 활용과 생산성까지 차이가 난다면 정부는 그 격차를 메우는 데 재정을 투입할 의무가 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직장에 들어가 보지도 못해 실업을 당할 기회조차”(국립부경대 홍장표 명예교수, 〈한겨레〉 인터뷰) 없는 청년들도 자부심을 갖고 성과를 내고 제대로 된 보상을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026-05-25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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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재논의할 개헌이라면 재정 분권부터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행정통합 논의가 자취를 감췄다. 부울경을 집어삼킬 듯 달아올랐던 행정통합이란 화두가 정작 선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논의 자체가 묻혀버린 것이다. 통합의 시기와 절차를 놓고 여야가 벌인 날 선 공방이 그저 샅바싸움에 불과했다는 허탈감만 감돈다.
행정통합 논의는 사라졌지만 그 과정에서 던져진 질문만큼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방분권, 특히나 재정분권은 대체 왜 이뤄지지 않으며 대체 언제쯤 실현되는가. 이 문제를 유권자가 찬찬히 들여다보게 된 점은 분명한 성과다.
행정 서비스가 고도화되면서 지방정부가 떠맡아야 하는 부담도 날로 커지고 있다. 하지만 이를 추진할 재정권은 중앙부처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당장 지방세 비중은 국세와 비교하면 턱없이 낮다. 2024년 기준 국세와 지방세 비율은 75%대 25%이다. 지난 1월부터 국무조정실 주도로 범정부 재정분권 TF가 가동 중이다. 연내 70% 대 30%까지 지방세 비율이 올라갈 것이라는 관측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지역 관가에서는 여전히 멀었다는 평가다. 국가 예산의 60% 이상이 지방에서 최종적으로 지출되는 까닭이다. 행정 서비스와 국가사업의 절반 이상이 지방에서 이뤄지지만 돈줄은 중앙부처에서 쥐고 놓아줄 뜻을 보이지 않는다. 이 기형적인 구조는 건국 이래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중앙부처는 사업성을 앞세워 지역을 옥죄어올 것이 자명하다.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에 몰려 있고, 수도권과 지방의 인구 격차는 날로 벌어진다. 예산의 효율성이라는 잣대로 놓고 봤을 때 수도권을 이겨낼 수 있는 지방은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당장 수도권에서는 자다깨면 새로 추진되는 게 GTX 노선이다. 중앙부처 구성원이 수혜를 직접 누리는 GTX 노선은 수도권 곳곳으로 뻗어나간다. 이제는 수도권의 범주를 충청권까지 확장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
중앙정부가 재정 권한 이양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중앙부처가 권한을 틀어쥔 구조로는 지방 경쟁력을 키우는 데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조세법률주의 원칙에 따라 지방정부는 임의로 세금을 만들거나 세율을 정할 수 없다. 지방정부는 중앙부처가 정해준 틀 안에서만 움직일 수밖에 없다.
부산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외국인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 상반기가 끝나기도 전에 외국인 관광객 100만 명이 다녀갔다. 그러나 노다지 같은 이 흐름을 공공 인프라를 위한 세원으로 끌어들일 방안이 전무하다.
관광세나 숙박세 등으로 공공 재원을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된 세계 주요 도시들과는 큰 차이점이다. 독자적인 과세권이 없는 지방은 뻔히 물 들어오는 게 눈에 보이는 데도 노를 젓지 못하는 셈이다.
중앙부처가 움켜쥔 재정권은 세입에만 그치지 않고 세출까지 이어진다. 중앙부처에서 지원받은 예산 상당 수에는 딱지처럼 용처가 세세히 지정되어 있다. 지역 실정에 맞게 유연하게 집행하기 힘든 이른바 '경직성 예산'이다. 부산 뿐만 아니라 전국 지자체에서 포괄보조금을 확대해 달라고 애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방정부를 중앙정부 산하 기관 정도로 여기는 인식을 바꾸고 진정한 지방분권을 이루기 위해 재정분권 논의부터 시작해야 한다. 결국, 권한과 조직보다 중요한 건 돈이다.
사실 행정통합 논의와 더불어 재정분권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공직 사회에서는 회의적인 시선이 적지 않았다. 늘 지방분권은 중앙 정치권의 수사였다. 섣부른 기대는 배신감만 낳았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8일 광주를 찾아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겠다며 개헌 재추진 의사를 밝혔단다. 지방선거와 동시에 추진하려던 개헌 논의가 무산되자 선거 이후 이를 다시 정국 의제로 올리겠다는 것이다.
개헌 논의가 다시 시작된다면 지방분권은 그 어떤 의제보다 무게감 있게 다뤄져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재정분권이 있어야 한다. 지방정부가 스스로 세입 기반을 마련하고 지역 상황에 맞게 재정을 운영할 수 있는 구조를 고민할 시기가 됐다.
지방이 살아야 국가 경쟁력도 살아난다는 말은 이제 지겹다. 비대해진 수도권이 버겁다면서도 재정과 권한을 절대 놓지 않는 그 모순을 중앙 부처는 돌아봐야 한다.
재추진될 개헌이 진정 국가 시스템의 미래를 고민하는 논의라면 답은 분명하다. 지방분권, 그 가운데서도 재정분권부터 시작해야 한다.
권상국 사회부 차장 ksk@busan.com
2026-05-20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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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뜨거운 재보선 냉담한 지선의 결과
세 사람이 얼마 전 tvN ‘유퀴즈’ 프로그램에 나온 이덕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덕화는 칠십 대인데도 여전히 멋이 있었다. 다들 한 번씩 따라 했던 ‘트라이’ 광고에 나왔을 때와 비교해도 크게 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이덕화는 자신을 젊게 보이게 만드는 한 제품의 광고 모델을 수십 년째 이어오고 있다고 했다.
때가 선거철인 만큼 이야기가 갑자기 부산 북갑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한동훈으로 튀었다. 한 사람이 “한동훈이 부산에 뼈를 묻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부산을 알리는 광고 모델이라도 해주면 좋겠다”라고 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한동훈과 맞붙는 후보가 누구냐”라고 물었다. 국민의힘 후보는 결정되기 전이어서 하정우라고 말해줬다. “영화배우 하정우?”라고 다시 묻기에 ‘하GPT’라고 답하니 그제야 알아듣는가 싶었다. 그다음 말이 걸작이었다. “우리 동네(동래구)에도 이번에 선거해?”라고 묻는 게 아닌가.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라고 했다. 그는 이번 지방선거가 심하게 주객전도되었다고 깨우쳐 주는 스승이었다.
고작 2년짜리 국회의원 재보선에 가려 지방선거 의제와 후보가 잘 보이지 않는다. 평택을 국회의원을 뽑는 재선거가 이번 전국 선거에서 경쟁이 가장 치열하다. 민주당 김용남·국민의힘 유의동·조국혁신당 조국·진보당 김재연·자유와혁신 황교안 후보가 출마해 그야말로 용쟁호투의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러니 평택 국회의원 후보는 훤히 꿰고 있어도 평택 시장에 누가 나왔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1400만 명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경기도지사 선거조차 평택을에 가려 별 관심을 못 받고 있다.
뜨거운 부산 북갑 국회의원 보궐선거 때문에 부산시장이나 교육감 선거까지도 시들하게 비치고 있다. 이번 지방선거에는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해 함께 치러지는 국회의원 보선 지역이 모두 5곳이나 된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축제인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지는 전국 14곳의 국회의원 재보선은 주인공을 들러리로 전락시키는 심한 ‘민폐 하객’인 셈이다.
지난달 전남 순천 송광사에 갔다가 삼청교 중심에서 여의주를 문 용머리 돌을 만났는데 이름이 ‘공복’이었다. ‘용생구자(龍生九子)’, 용의 아홉 자식 중에 물을 좋아하는 ‘공복’이 다리가 무너지지 않게 지켜주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사실 개천에서 용이 나도 여의주를 물고 승천해 버리면 용만 좋지, 개천은 뭐가 좋나 싶다. ‘용꿈’이 나쁘다기보다 지역에는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공복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많은 문제가 서울 집중 때문에 생겨났다. 모든 권력이 중앙정부에 집중되면 지역이 무시되기 쉽다. 지방선거는 중앙 권력을 지방으로 나누어 지역 스스로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치른다. 지역 권력을 감시하고 지난 4년간의 행정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일이기도 하다.
지방선거의 주인공은 지방이다. 지금처럼 국회의원 재보선이 지방선거의 이슈를 잡아먹으면 풀뿌리 민주주의가 흔들리게 된다. 유권자들이 국회의원 재보선에만 관심이 쏠려 우리 동네 구청장·시의원·구의원 후보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 후보는 후보대로 답답해서 아우성이다. 힘들게 쌓아 올린 한국 민주주의가 개인의 정치적 체급 올리기 때문에 흔들려서야 안 될 일이다.
걱정되는 지점이 또 하나 있다. 이번에 선출되는 구청장이나 광역의원들이 중간에 사퇴하고 2028년에 치러질 총선에 나설 때 말릴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다. 특히나 구청장은 지역 조직·생활 민원·예산을 직접 다루기 때문에 국회의원 후보로 성장하기 좋은 자리다. 총선에 한번 나왔던 사람이 구청장이 되어 인지도가 높아지면 다시 국회의원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 쉽다. 이번 재보선처럼 국회의원 사퇴하고 광역단체장 나가는 건 놔두면서 기초단체장들이 총선 못 나가게 막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선출직 공무원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 사직할 권리가 인정된다. 하지만 법적으로 자유롭다고 해도 정치적으로는 유권자와의 약속 위반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임기 도중에 그만두면 추진하던 사업이나 정책의 연속성이 끊어지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중도 사퇴로 인해 발생하는 재보궐선거 비용도 전액 세금으로 충당된다.
앞으로는 외국처럼 ‘중도 사퇴 시 일정 기간 출마 제한’이나 ‘사퇴 시 선거비용 부담’ 같은 예방 장치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보름 앞으로 다가온 이번 지선에서도 후보들은 임기를 끝까지 채운다고 약속하고, 늦었지만 공약에도 집어넣어야 한다. 유권자에 대해 책임지는 정치를 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지방선거의 주인공은 지방이다.
2026-05-18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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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우리 아이 괜찮은가요
어린이날 광안리해수욕장 근처에서 한 무리의 아이들을 보았다. 중2 또는 중3 정도로 보이는 또래끼리 환하게 웃으며 걸어가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공부는 잠시 내려놓고 친구와 함께 보낸 하루가 어떠했을까. 어린이가 아니지만 어린이날을 즐기는 그들의 얼굴에서 답을 읽을 수 있었다.
성인이 된 조카를 만났다. 초등학교 시절 와글와글 떠드는 아이들을 운동장으로 쫓아낸 담임 선생님 덕분에 신나게 축구를 즐겼다는 그의 이야기는 지금은 적용되지 않는다. 많은 학교에서 점심시간 축구는 금지됐고, 잠깐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아이들은 스마트폰만 붙들고 있다.
최근 한 통계는 방과 후 아이들이 희망하는 활동과 실제 활동의 차이를 보여줬다. 친구와 놀고 싶지만 현실은 학원에 가고 과외를 받아야 한다. 성장 과정에 공부도 꼭 필요하지만, 마음이 향하는 것과 반대되는 상황을 ‘매일 견뎌내고 있다는 것’은 어른이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뉴스를 통해 한국 아이들에 대한 우울한 보고서가 전해졌다. 유니세프 이노첸티 연구소가 발간한 ‘불평등한 기회: 아동과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제목의 리포트 카드이다. OECD 회원국을 대상으로 아동 웰빙 수준을 측정했는데 대한민국은 신체건강 30위, 마음건강 34위, 역량 3위를 차지했다. 여기서 역량은 학업 성취와 사회적 역량으로 구성된다. 다시 말하면 학업적 성취는 우수하지만 몸과 마음은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마음건강의 경우 4개 국가가 핵심 지표 누락으로 순위 산정에서 제외돼 ‘34위’라는 수치는 바닥에 더 가까운 상황이다.
아동 웰빙 국가 순위표에서 대한민국은 종합순위 27위에 머물렀다. 1~3위를 차지한 네덜란드, 덴마크, 프랑스가 3대 영역 모두에서 ‘상위 3분의 1’에 포함된 것과 달리 우리는 영역별 격차가 컸다. 특히 각 영역을 측정하는 기준을 보면 마음이 더 답답해진다. 신체건강은 아동 사망률과 과체중 비율, 마음건강은 삶의 만족도와 청소년 자살률을 지표로 삼는다. 삶에 만족하는 15세 아동의 비율은 65%로 하위 6위를 차지했다. 15~19세 청소년 10만 명당 자살률은 10.9명으로, 자살률이 높은 국가 5위에 올라 위기에 처한 마음건강의 현실을 보여줬다.
우리 사회 청소년 자살 문제의 심각성은 여러 데이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2023년 국가손상종합통계를 보면 소아·청소년의 사망원인 중 자해·자살이 53.9%로 가장 많았다. 2024년에는 10~19세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는 8명으로 10년 전에 비해 77.8%나 증가했다. 유니세프 보고서의 청소년 자살률을 10세까지 확대하면 더 충격적인 수치가 나올 것이다.
13일 발표된 ‘한국 아동·청소년 인권 실태’를 보면 전국 초중고 학생 8764명 중 27%가 최근 1년 동안 ‘죽고 싶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그런 생각을 가끔 하는 아이가 23%, 자주 하는 아이가 4%이며 10명 중 1명은 실제 자해를 시도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이들이 죽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를 보면 학업 문제가 가장 크고 미래·진로에 대한 불안이 다음을 차지한다. 성적과 성공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가 아이들을 얼마나 압박하는지를 보여준다. 학교를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무기력증과 번아웃을 호소하는 아이도 많다. 입시의 부담이 큰 만큼 고등학생의 35%가 학업 중단을 생각했다.
이렇게 정신적 위기에 내몰려 있지만 막상 아이들은 고민을 털어놓을 대화 상대가 없다고 말한다. 위기 상황이 와도 도움받을 사람이 없다고 답하는 비율도 9%에 달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초중고 학생 자살 사망자 수는 2023년 214명, 2024년 221명, 2025년 242명으로 늘어나고 있다. 벼랑 끝에 선 듯한 아이들의 마음이 너무나 위태롭다. 아이들의 마음건강에 들어온 빨간불은 긴박하게 깜빡이는 비상 경고이다.
아동·청소년의 마음건강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2024년 국내 정신질환 진료비 중 우울증과 불안장애 진료비가 1조를 넘었다. 젊은 층의 중독이나 자살이 증가하는 등 정신건강 문제가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정부는 지난 3월 제3차 정신건강복지기본계획을 발표하고 생애주기별 정신건강 위험 요인에 대한 지원 등 사회적 안전망 강화를 약속했다. 학교 전문상담인력 확보, 긴급지원팀 확충 등 지원책과 함께 내년부터는 성인 중심으로 진행하던 자살 심리부검을 청소년에도 시행할 예정이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려면 사회가 건강해야 한다. 아이들의 마음건강 문제는 가정, 학교, 사회가 함께 대응해야 하는 문제이다. 어른은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이 있다. 자살 위기 개입을 주제로 연구하는 성진 스님이 〈법보신문〉에 기고한 글 속 한 문장을 인용한다. “세상에는 너의 이야기를 들어줄 어른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2026-05-13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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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6·3 이후가 더 걱정인 이 대통령
6·3 지방선거는 전국 동시 선거라는 점에서 대한민국 구성원이라면 누구에게나 영향을 미친다.
개별 후보들에겐 자신의 ‘당락’이 생존과 직결된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입장에서도 ‘15 대 1’이냐 ‘13대 3’이냐에 따라 엄청난 후폭풍이 있을 것이다.(여기서 3이 어느 지역인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경북을 상수로 놓고 서울·부산·대구 등을 변수로 보면 될 듯하다)
문제는 대한민국 국정 전체를 큰 그림으로 놓고 보는 이재명 대통령이다. 지방선거 결과에 따라 잠시 좋고 나쁠 순 있지만 근본적인 고민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당이 바라는 최선의 지방선거 결과가 나왔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공 들였던 영남, 그것도 TK(대구·경북)까지 차지한다면 일단 이 대통령의 취임 1년 간 국정 운영이 긍정적으로 평가받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직후 벌어질 더불어민주당의 8월 전당대회는 선거승리의 공과를 어떻게 나눠먹는가에 대한 치열한 권력투쟁의 장이 될 것이다. 과거 여당의 역사를 되돌아봤을 때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으로서도 통제가 힘든 각축장이 펼쳐진다.
‘명-청(이재명-정청래) 대전’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이 대통령이 취임한 지 반 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우스개소리로 넘어가려는 필자의 귀를 붙들어둔 것은 한 여당 의원과의 사담이었다. ‘친명’으로 분류되는 수도권 의원이었다.
그는 친문(친문재인) 출신 정청래계 모 의원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최소 3번은 우리를 죽이려 했다’고 분을 감추지 않았다. 2022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불거진 대장동 문제, 이 대통령의 대표 시절 국회에서의 체포동의안 가결, ‘비명횡사-친명횡재’ 공천 때의 앙금 등이 그것이었다.
최근에도 양측의 갈등은 표면화됐다. ‘조국혁신당 합당 밀약설’과 ‘공소 취소 거래설’은 명청 대전의 큰 흐름에서 발발한 국지전이었다.
정청래 대표는 8월 전대에서 다시 대표 자리를 노릴 것이다.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서울만 패하지 않는다면 웬만해선 정 대표의 공을 깎아내리기는 힘들 것이다.
하정우 전 청와대 AI미래기획수석의 부산 북갑 보궐선거 차출은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이 대통령은 AI 수석의 공백으로 국가 미래전략의 큰 틀을 짜는 데 차질이 불가피하다. 하 전 수석을 대체할 만한 후임 인선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하 전 수석이 당선되면 여당을 위해 인재를 내줬다는 이 대통령의 희생보다는, 정 대표가 하 수석을 ‘삼고초려’한 과정이 더 크게 부각될 것이라는 말들이 벌써부터 나온다.
정 대표가 전대에서 다시 대표가 되면 양측은 지금보다 강하게 부딪힐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이 대통령이 갖고 있던 국정의 구심력을 여당 대표의 강력한 원심력이 나눠 갖는 형국이 될 수밖에 없다. 전대의 영향력은 다음 선거인 2028년 총선으로 이어진다. 친명이든 친청이든 자신의 공천 문제를 생각하면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될 것이다.
민주당이 전광석화처럼 밀어붙이던 ‘조작기소 특검’을 이 대통령이 일단 멈춰 세웠다. 선거에 역풍이 만만치 않다고 본 것이다. 여당이 추진했지만 ‘공소 취소’가 가능하다는 조항 때문에 여론의 비판은 이 대통령이 뒤집어쓸 가능성이 높은 이슈였다.
그렇다면 지방선거가 끝나면 여당은 특검법안을 재추진할까. 특검법 처리는 중도층의 민심 이반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정 대표가 굳이 무리수를 두면서 총대를 멜지 두고봐야 한다는 관측이 나온다.
당내에서는 특검의 ‘공소 취소’ 권한 삭제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일부 의원들은 “국정 과제에 집중해 그 성과로 국민들의 평가를 받으면 된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면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날 수 있다”며 괜한 정치적 부담을 뒤집어쓸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하지만 친명 쪽에서는 ‘순진한 발상’이라고 깎아내린다. 여당이 정권을 재창출하더라도 수많은 전직 대통령들이 자신의 후계자로부터 냉정한 비판(심할 경우엔 사법처리)을 받은 전례가 있다. 야당으로 정권교체라도 되면 말 할 것도 없다.
정 대표는 조작 기소 특검이 과연 자신의 전대 득표에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계산기를 두드릴 것이다. 최고권력자인 이 대통령이 지방선거 이후에 있을 여당의 전대와 조작기소 특검을 어떻게 다룰지가 벌써부터 흥미로워진다.
박석호 정치부 선임기자 psh21@busan.com
2026-05-1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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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우리는 그들의 외침을 듣지 않았다
최근 방영 중인 한 드라마에 ‘감정 워치’라는 가상의 장치가 등장한다. 심박수 등 사용자의 신체 신호를 측정해 현재의 감정 상태를 기쁨·불안 등의 단어로(혹은 색깔로) 치환해 보여주는 기계다. 얼마 전 경남 진주에서 50대 화물 노동자가 2.5t 화물차를 맨몸으로 막아서다 치어 사망한 소식을 접했을 때 왜 하필 드라마 속 감정 워치 따위가 떠올랐던 걸까.
사고는 지난달 20일 진주 CU 물류센터 앞에서 열린 화물연대의 집회 과정에서 발생했다. 노동자들은 대체 수송을 위해 물류센터를 빠져나오는 화물차를 정면으로 막아섰다. 이들 중 일부는 움직이는 차량에 매달렸고, 떨어졌다. 육중한 바퀴가 한 노동자를 삼킨 후에야 비로소 차는 멈췄고, 한 노동자의 삶도 멈췄다.
일부 호사가들은 달리는 차량 앞을 가로막고 나선 그들의 무모함을 탓하기도 했다. 그 무모함 속에 어떤 심정이 숨어 있는지 궁금해졌다. 어떤 마음이었길래 달리는 거대한 쇳덩이 앞을 맨몸뚱이 하나로 막아섰던 걸까. 만약 감정 워치가 실재한다면, 고인의 손목에 채워져 있었다면, 당시 그의 감정은 어떤 단어로 정의되었을까. 그들의 요구 사항을 검색했다. 고유가에 따른 운송료 인상, 과도한 업무 강도 개선…. 어느 단체교섭에서든 나올 법한, 지극히 당연한 요구였다.
그들은 CU를 운영하는 BGF로지스 진주센터 내 협력 운송사 12곳과 계약해 일하는 ‘특고’(특수고용직)다. 사실상 고용돼 일하고 있지만 일반적인 고용의 형태가 아니다. 겉으론 사업자 간의 계약 형태를 띈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그들을 노동자로 인정하는 데 인색하다.
대신 사회는 그들을 ‘사장님’이라 부른다. 기름값과 차량 수리비를 제 주머니에서 꺼내니 겉으로는 번듯한 자영업자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는 교묘한 언어적 위장이다. 기름값도, 차량 수리비도 본인이 부담하지만 배차는 원청이 결정하고 운임도 원청이 정한다. 고용 계약서가 없으니 해고가 아니라 ‘계약 종료’라는 매정한 단어로 잘려 나간다.
기업 입장에서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퇴직금이 사라지고, 4대 보험이 사라지고, 단체교섭 의무가 사라진다. 노동자는 남되 사용자는 증발한다.
법조차 그들을 보호하는 데 무기력하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노동자와 자영업자 사이에 엄격한 칼금을 긋는다. 그들은 그 칼금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경제적으로는 종속되지만 형식상으로는 독립적이다. 법원은 개별 사건마다 실질적 종속성을 따지지만, 그 판단이 나오기까지의 소송 비용과 시간은 노동자 개인이 오롯이 감당해야 한다. 권리를 얻기 위해 싸워야 하는 약자에게 그 싸움의 비용을 온전히 지우는 것, 이것이야말로 현행 법 체계가 특고에게 부과하는 가장 가혹한 조건이다.
정부는 어떠한가. 사태 초기 고용노동부는 “특고는 노란봉투법 대상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노란봉투법 시행 한 달 만의 정부 입장이다. 특고와의 교섭을 회피해 온 원청의 무책임한 행태에 면죄부를 준 셈이다. 이후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장관이 나와 재빠르게 말을 바꿨다. 원청 기업 역시 뒤늦게 지난달 30일 화물연대와의 합의서에 서명했다.
노란봉투법을 추진했던 진영에선 법 시행 이후 특고와 원청 간 첫 단체교섭 타결이라며 저마다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는 엄밀히 말해 법 제도의 성과가 아니다. 한 노동자의 생명과 맞바꾼 ‘목숨값’일 뿐이다. 법과 제도를 보완하지 않는 한, 비슷한 구조를 가진 다른 사업장에서도 언제나 같은 비극이 반복될 수 있다.
때문에 요구는 계속돼야 한다. 특고의 법적 지위를 명문화해야 한다. 실질적 종속 관계가 인정된다면 긴 소송을 거치지 않더라도 우선 노동자로 추정하는 규정이 필요하다. 영국은 ‘워커’(worker)라는 중간 범주를 법제화했고, 스페인은 플랫폼 노동자에 대한 추정 규정을 도입했다.
드라마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6화에서 주인공이 극한의 상황에 몰리자 감정 워치는 그의 감정을 끝내 정의하지 못한다. ‘알 수 없음’이라는 결과값에 이를 모니터링하던 워치 제조사는 며칠 후 주인공을 불러 묻는다. “이걸 무슨 감정이라고 해야 될까요?” ‘분노’와 ‘좌절’, 거기에 ‘간절함’까지 뒤엉킨 복잡한 감정이었다. 주인공은 당시를 회상하며 뭔가를 깨달은 듯 울먹인다. “도와줘, 도와달라는 거예요.”
고인이 맨몸으로 막아서려 했던 것은 달리는 트럭만이 아니다. 고인이 온몸으로 버티려 했던 것은 2.5t짜리 쇳덩이 이상으로 가파르고 단단한 이 사회의 편견이었을 테다. 그가 달려오는 거대한 괴물 앞에서 느꼈을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참을 수 없는 분노? 혹은 좌절감? 어쩌면 그것은 이 사회를 향해 ‘도와달라’고 외치는 간절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니, 듣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2026-05-10 [1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