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상호의 오픈 스페이스] 침묵을 깨는 여행자들, 그들의 귀환을 위하여
예술가는 끊임없는 생산과 창작을 통해 자신의 어법을 증명한다. 멈추면 예술가가 아니다. 침묵은 예술가의 언어가 아니다. 오히려 예술가는 침묵하는 세계를 소란스럽게 만드는 여행자들이다. 예술가들의 발걸음이 구석구석 세계를 누빌 때, 비로소 우리는 풍요롭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술이 없는 사회는 조용하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평화가 아니다. 죽어가는 사회다.
예술가는 있는 세계를 재현하는 존재가 아니다. 변형하고 변주하여 다른 세계를 생성시키는 존재다. 현실을 해체하고 재조립하여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세계를 눈앞에 들이민다. 그것이 창작이며 예술의 본질이다. 이 위치는 권력이나 제도가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산하는 자만이 그 자리에 서 있다.
여행은 일상의 바깥이면서 동시에 일상으로 회귀하는 과정이다. 그 왕복의 경험이 삶과 또 다른 세계 사이를 끊임없이 주시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의 삶은 여행과 다를 바 없다. 예술가는 언제나 낯선 경계, 탐험을 갈구한다. 바로 이 지점을 주목하자. 실질적으로 회귀할 목적지가 예술가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인이 여행에서 돌아올 집이 있다면, 예술가에게 그 집은 모호하다. 그래서 예술가들에게 실제적인 여행의 경험이 필요하다. 몸이 움직이는 여행, 낯선 땅을 밟는 여행, 이방인으로 서보는 경험. 그것이 예술가를 다시 예술가이게 만드는 힘이다.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예술가들에게 이 질문은 지극히 중요한 문제의식이다. 그것이 예술가 자의식의 지표이고 작업이 지니는 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돌아가는지를 보면, 그 작업이 무엇을 말하는지가 보인다. 귀환의 지점이 작품이다. 그 되돌아오는 표현이 어디인지를 살핌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속악한 현실을 만져볼 수 있다.
지금도 예술가들은 여행길에 올라 그들만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 얼마나 많은 침묵들이 도처에서 신음을 내지르고 있는지를 상상해 보라. 무의미하게 소멸하거나 자리를 잃고 낡아지기만 하는 사물들이 제 존재감을 빠른 속도로 잃어가고 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들, 이름조차 잊힌 것들, 시대의 변두리로 밀려난 것들이 매일 사라져간다. 여행자이자 예술가들은 이 침묵의 몸을 매만지기 위해 쉴 틈이 없다. 그들의 작업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최후의 증언이고, 잊히는 것들에 대한 가장 집요한 저항이다.
예술가들의 수다스러운 세계에 눈과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그들의 작업이 낯설고 불편하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더라도 그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예술은 언제나 시대보다 앞서 있고, 대중은 언제나 한발 늦게 도착한다. 그 간격을 좁히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예술가들은 귀환(歸還)하지 못한다. 돌아올 자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 사회는 예술을 소비하면서도 예술가를 홀대한다. 작품 앞에서 감동하면서도 작가의 생존에는 무관심하다. 지역 예술가들의 사정은 더욱 가혹하다. 지역이라는 지리적 변두리와 주류 미술시장이라는 제도적 변두리, 그 이중의 소외 속에서도 예술가들은 떠나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세계를 소란스럽게 만드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이 아픈 간격을 메우기 위한 귀중한 시도다. 예술가에게 창작공간을 제공하고, 이방인의 눈으로 세계를 다시 보게 하는 장치다. 국경을 넘어 다른 문화권의 예술가들이 한 공간에서 부대끼며 서로의 침묵을 들여다보는 경험, 그것이 부산다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확실한 방법이다. 외부에서 브랜드를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예술가들이 스스로 세계를 만들어가도록 돕는 것. 그것이 진짜 문화 행정이고, 도시를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다.
부산을 보라. 예술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얼마나 유지되고 있는지 꼽아보아도 한 손안이다. 도시 곳곳에 공가와 유휴시설은 늘어만 가는데, 십수 년째 활성화만 명분으로 내세울 뿐 실천이 없다. 민간 예술단체들의 작은 실천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공공과 행정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그들을 환대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이를테면 예술가의 집에서 머물고 예술가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신비로운 경험이 그 해답일 수 있다. 퐁피두 간판이 아니라 예술가의 숨결과 낡은 골목, 비린내 나는 새벽 항구의 향기가 부산의 본질일 것이다.
일단은, 그들이 비록 왕은 아니지만 귀환하고 있으니 최소한 환영이라도 해주는 작은 관심을 보이자. 손뼉을 치자마자 그들은 곧 떠나겠지만, 우선은 가볍게 포옹해 주는 일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예술가를 환영하는 도시가 살아 있는 도시다. 예술가를 외면하는 도시는 조용하다. 그 조용함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침묵을 소란으로 만드는 자들이 돌아오고 있다. 그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2026-07-30 [17:50]
-
[홍준성의 개념 쌓기] 손절 증후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익숙한 말이 된 ‘손절’은 본래 주식 용어였다. 추가적인 주가 하락에 따른 더 큰 ‘손’실을 막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서 보유 주식을 매도하는 것, 즉 끊어내듯 ‘절’단한다는 의미였다. 이 말이 주식 거래를 넘어서 우리들의 일상까지 들어온 것은 2010년대 중반 무렵일 터이다. 물론 이는 대대적으로 보급된 스마트폰을 통한 모바일 거래가 대중화되던 흐름과 겹쳐진다. 쉽게 추측할 수 있듯이, 손절의 확산된 용례는 인간관계의 끊어 냄이다. 마음이 맞지 않는 친구나 민폐만 끼치는 이웃 등 손해만 주는 관계를 단호히 끊어 낸다는 의미인 것이다.
2020년대부터는 가히 ‘대손절의 시대’가 열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인터넷 방송이나 연애 프로그램에서 손절은 이미 익숙한 표현이 된 지 오래다. 특히나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인간관계에 대한 처방으로서 손절은 무슨 심리적 특효약처럼 취급받고 있기도 하다. 손절이 인간관계가 주는 피로감과 고통으로부터의 즉각적인 탈출 버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진화적으로 90년생 이후의 인류부터는, 손해되는 것에 단호히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내면 근력이 튼튼해졌기 때문일까? 그럴 리가. 이미 한 세기 전 사회진화론이 사이비 과학으로 판명됐듯, 많은 경우 인간의 진화는 허상이다. 모든 인간은 한낱 인간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무리 동물적 속성에 집중하자면, 변화한 것은 관계의 조건이다. 옆집 이웃과 매일 얼굴을 보고 살아야만 하는 전근대의 시골에서 손절은 사실상 선택 불가능한 옵션이다. 또한 손절의 결과가 고립이라면, 그 홀로됨을 견딜 수 없어 하는 인간은 손절을 택할 수 없다. 이 말인즉 손절의 성립 조건은 절연한 공동체 외에도 대안이 될 다른 공동체들의 존재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른바 MZ라고 불리는 세대에서 손절이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 된 건 그리 놀랍지 않다. 스마트폰을 통해 24시간 언제 어디서나 접근 가능한 온라인 커뮤니티 어딘가에서 나와 맞는 사람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어지기 때문이다. 동시에 아르바이트나 파트타임을 맴도는 프리터족들의 오프라인에서 잦은 이직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국내인구이동통계에 따를 때 청년 4명 중 1명은 매년 이사를 할 정도이다.
그렇다면 관계의 기술로 자리잡은 손절은 우리들의 삶을 얼마나 개선했을까? 쉽게 추측되듯, 손절은 나에게 상처를 주거나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관계를 정리함으로써 스트레스를 줄여 줬다. 또한 부당한 대우에 대한 단호한 거부가 부조리한 문화 타파에 이바지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다.
한쪽에서 손절이 자존감의 참된 벗처럼 취급받을 때, 다른 쪽에서는 인간관계에서 상대방과 조금이라도 갈등이 형성되면 곧바로 잠적해버리는 것, 즉 이른바 ‘리셋’이 횡행하고 있다. 일본에서 먼저 포착된 이 리셋 증후군은 손절 문화의 형태로 한국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것인데, 여기에 물든 주체들은 마치 게임 캐릭터를 손쉽게 삭제하거나 새롭게 만들 듯 인간관계 또한 이렇게 리셋을 반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문제는 인간이 게임 캐릭터가 아니라는 데 있다.
예수의 지적처럼 인간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잘 보지만, 정작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타자에게 이 들보를 지적받는 것은 전혀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불편함 자체를 곧 불필요한 감정 스트레스라고 취급하며 손절을 거듭하는 것은, 아집과 무지의 길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손절의 연쇄를 어떻게 해야 끊을 수 있을까? 물론 모범 답안은 내적 견고함이다. 단단히 자리 잡은 나무는 자신의 껍질이 약간 긁히는 데엔 개의치 않는다. 그것이 자신을 무너뜨릴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반대로 풍선은 조금의 균열도 허용할 수 없는데, 이는 자신의 속이 텅 비어 있기에 그 작은 갈라짐이 곧 존재의 소멸로 이어질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인간 역시 조금의 지적도 견딜 수 없다는 것은, 그 작은 균열로도 자기 자신이 무너질 만큼 존재의 기반이 얇다는 징후에 다름 아니다.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은 이 내적 건강함을 내적으로만 이해해선 곤란하다는 것이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관계 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존재의 강도는 관계의 신뢰에 기반한다. 지금의 실수로 나를 판단치 않고 내가 개선되는 과정을 묵묵히 지켜봐 줄 수 있는 가족이나 친구, 이들이 곧 내 자존감의 근원이다. 철학적 깨달음은 이 지점을 결코 대체할 수 없다. 되레 철학은 자신이 존재의 기반이 아님을 자각하기 위한 기술이다.
2026-07-23 [18:08]
-
[배학수의 문화풍경] 휴가, 삶의 방향을 다시 묻는 시간
매일 아침 눈을 떠 어제와 다름없이 일터로 향하는 지하철과 자동차에 몸을 싣는다. 치열하게 달려온 끝에 안정적 궤도에 올랐지만, 문득 고개를 들면 가슴을 짓누르는 지독한 권태와 마주하게 된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 그리고 오늘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을 내일.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무수한 중년이 겪는 방황은 대개 이 지독한 삶의 정체 상태에서 비롯된다. 더 이상 올라갈 목표도, 나아갈 방향도 잃어버린 채 삶의 의미는 희미해지고, 그 빈자리에는 깊은 실존적 공허만이 들어앉는다.
설상가상, 이 위험한 정체 상태를 아름답게 포장하고 정당화하는 위안의 이데올로기들이 일상의 공기처럼 우리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왜곡된 에피쿠로스주의다. 에피쿠로스는 무한한 야망을 좇는 대신, 소박한 공동체 안에서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욕구만을 충족할 때 마음의 평정인 ‘아타락시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오늘날 이 사상은 미디어가 앞다투어 부추기는 안락한 고립, 버림의 미학, 그리고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마케팅으로 변질된다. 물론 이것은 에피쿠로스 자신의 철학이라기보다 현대 소비사회가 그의 이름을 빌려 만들어낸 변형이다. 그러나 이 철학을 무비판적으로 삼키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에게 안이한 위안을 속삭인다. “방향을 잃고 정체되어도 마음만 편하면 그만”이라고 말이다. 진보를 향한 노력을 멈춤으로써 삶의 모든 마찰은 사라지지만, 동시에 우리 삶의 뜨거운 엔진도 꺼져버린다.
또 다른 강력한 마취제는 편협한 내세 사상이다. 많은 종교는 내세의 믿음을 교리에 포함한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현세의 노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기독교 전통은 내세의 희망을 약속하면서도,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개인의 노력을 요구한다. 칼뱅주의 신학은 신의 절대적 선택이 인간에게 책임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믿음은 현실의 일터에서 맹렬하게 일하게 만드는 동력원이 된다고 가르친다. 정작 문제는 내세의 믿음이 이 땅에서의 삶을 그저 묵묵히 버텨내야 할 ‘임시 대기실’ 정도로 격하시키는 안일한 타협으로 변질될 때 발생한다. 내세만을 바라보며 현실의 안정과 안락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태도야말로 경계해야 할 진짜 아편이다.
이 두 변질된 이데올로기는 독약과 같아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내면의 개척 본능을 마비시킨다. 그러나 그 기만적 안도의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아무리 “지금 이대로 정체된 삶도 좋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보아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문득문득 솟구치는 존재론적 텅 빔을 인간은 결코 속일 수 없다.
삶의 생생한 의미를 되찾고, 다시 한번 화산 같은 생명력의 에너지를 분출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중독적 위안의 철학들로부터 탈옥하는 것이다. 잘못된 사유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인간의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좋은 철학을 배워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란 편안히 머무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활동 속에서 완성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철학은 니체의 ‘초인’ 사상에 이르면 더욱 급진적 형태를 띤다. 그 사상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현재의 나를 초월하려는 처절한 투쟁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니체가 말한 초인은 TV 드라마에 나오는 초능력자나 영웅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초월’의 과정을 끊임없이 지속하는 존재, 즉 어제의 나에게 내일을 지배당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태도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이번 달에 방정식을 탐구하고 다음 달에 도형의 성질을 공부하며 지적 지평을 넓혀가는 중학생의 하루하루, 단 0.1초의 기록을 단축하기 위해 매일 자신의 한계를 부수는 운동선수의 땀방울 속에 초인의 삶이 있다.
자기 극복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혼란을 수반한다. 낡은 껍질을 찢고 나오는 고통 없이 진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참된 행복이란 정지된 평온이 아니라, 고통을 관통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경험되는 역동성이다. 중년의 위기는 우리 삶의 에너지가 고갈되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락이라는 이름의 타성과 편안한 루틴에 길들었기 때문에 찾아오는 경고음이다.
본격적 여름 휴가철이 다가오면, 많은 이들이 도심의 마찰을 피해 조용한 휴양지로 탈출을 감행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휴가는 안락한 선잠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드는 도피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타성에 젖어 돌아가던 일상의 트레드밀에서 잠시 내려와, 우리 영혼을 좀먹던 마취제를 털어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어제의 나를 넘어설 용기를 충전하는 깨어 있는 쉼표가 되어야 한다.
2026-07-17 [05:10]
-
[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부산, 바다의 도시
부산의 모든 길은 바다로 향한다.
금정산과 백양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온천천과 동천을 지나 바다를 만난다. 낙동강은 삼각주를 이루며 남해로 스며들고, 산비탈을 따라 난 골목길은 어느새 항구와 시장으로 이어진다. 도시의 길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바다 앞에 닿는다. 그러나 바다는 길의 끝이 아니다.
부산항을 떠난 배는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으로 향하고, 남중국해를 지나 동남아시아와 인도양으로 이어진다. 조선통신사는 그 길을 오갔다. 개항 이후에는 새로운 문물과 사상이 그 항로를 따라 들어왔다. 한국전쟁 때는 수많은 피란민이 이 항구를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오늘도 컨테이너선은 세계의 항만과 부산을 잇는다. 부산의 길은 육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바다가 되고, 그 바다는 다시 세계로 이어진다.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은 〈지중해〉에서 역사의 무대를 왕조나 국가보다 바다에서 읽어냈다. 그에게 지중해는 하나의 바다가 아니라 수많은 도시를 잇는 거대한 공간이었다. 바다는 영토를 가르는 경계가 아니라 사람과 물자, 언어와 기술, 사상과 생활 방식이 오가는 길이었다. 그렇게 서로 다른 도시들은 오랜 시간을 두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저마다의 문명을 쌓아갔다.
얼마 전 발간한 인문무크지 〈아크〉의 주제를 ‘바다’로 정하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열여덟 명의 필자는 모두 바다를 이야기했지만, 어느 누구도 같은 바다를 바라보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바다는 생업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유년의 기억이었다. 또 다른 이에게는 떠난 이를 기다리는 시간이었고, 생명의 기원을 사유하는 공간이었다. 같은 바다를 두고도 서로 다른 삶과 시간이 겹쳐 있었다.
도시도 그렇다. 같은 항구를 품고도 도시는 서로 다른 얼굴을 갖는다.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를 건너온 상인과 학자들이 모여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세웠고, 베네치아는 동방과 서방을 잇는 항로 위에서 유리와 직물, 건축 기술을 받아들이며 독자적인 도시 문화를 만들었다. 암스테르담은 운하를 도시의 기반시설이자 공공공간으로 발전시키며 상업과 금융의 중심이 되었다. 이 도시들이 남긴 것은 거대한 항만이 아니었다. 바다를 통해 축적된 시간이었다.
부산의 거리를 걸으면 도시의 변화를 실감하게 된다. 광안리와 해운대만이 아니다. 초량의 골목과 영도의 흰여울, 기장의 해안 길, 가덕도의 작은 포구까지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필자의 사무실 근처인 자갈치시장에는 여행객과 상인이 뒤섞이고, 해 질 무렵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다양한 언어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거리에서 만나는 도시의 풍경은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바다는 지금도 새로운 사람들을 부산으로 이끌고 있다.
해 질 무렵 가덕도에서 거가대교와 부산 앞바다를 본 적이 있다. 그곳에서 본 바다는 하나의 거대한 항로가 되었다. 노을이 천천히 수평선 위로 번질 무렵 대만의 양밍해운 선박이 지나고, 프랑스 CMA CGM의 컨테이너선이 뒤를 이었다. 일본 ONE의 자주색 선박과 스위스 MSC의 초대형 선박도 같은 시간 같은 바다를 지나고 있었다. 국적도, 선사도 달랐지만 모두 부산 앞바다에서 만났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 문득 부산의 미래는 이미 바다 위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그 풍경을 석양이 아름다운 관광지로 기억할 것이다. 다른 누군가는 세계 물류가 교차하는 항로로 읽을 것이다. 건축을 하는 내게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하나의 공간에서 관광과 산업, 풍경과 경제, 시민의 일상과 세계의 흐름이 동시에 만나는 장면이었다. 좋은 건축은 건물을 드러내기보다 이런 풍경을 오래 머물게 한다. 자연과 사람이, 그리고 도시와 바다가 서로를 바라보도록 만드는 일이 건축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부산은 다시 바다를 중심에 놓기 시작했다. 새롭게 출범한 시정은 해양 관련 산업과 기관을 유치하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 북항 재개발과 해양관광을 중심으로 도시의 새로운 가능성도 모색하고 있다.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낸 시장이 시정을 맡으면서 해양은 더 이상 여러 정책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도시의 핵심 의제로 자리 잡았다. 부산이 오랫동안 품어온 해양수도의 구상이 한층 속도를 낼 것이라 기대한다.
해양수도는 해양산업의 규모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세계의 사람들이 찾아와 머무는 공간, 시민이 일상 속에서 바다를 누리는 수변, 오래된 항만의 기억과 새로운 도시의 시간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때 비로소 설득력을 얻는다. 해양도시는 바다를 가진 도시가 아니라, 바다를 삶 속으로 끌어안은 도시이기 때문이다. 부산은 오래전부터 바다를 통해 세계를 만났다. 그 바다는 오늘도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
2026-07-09 [18:03]
-
[김정화의 크로노토프]당 태종의 거울, 새 부산시정의 사명
7월의 태양이 솟아오르며 새로운 부산시정의 출범을 알렸다. 격렬했던 선거의 소용돌이를 넘어, 시정을 이끌 전재수 시장은 이제 신중히 부산의 미래로 발걸음을 떼야 할 때다. 승리의 환호에서 한 걸음 물러나, 행정의 무게를 차분히 살피는 시간이 필요하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찬양의 목소리다. 시간이 언제나 승자 편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선거의 시간은 짧지만, 시정의 시간은 길다. 그리고 문화의 시간은 그보다 더 오래 남는다.
권력이 교체된 직후의 정치는 종종 자기도취의 거울 앞에 선다. 공약집의 매끄러운 문장, 개발 조감도의 화려한 색채, 대중의 기대와 박수는 도시가 벌써 새로워진 듯한 환상을 낳는다. 그러나 문화는 찬란한 청사진 위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대형 축제와 국제행사, 외부 브랜드 유치와 거대한 시설이 도시의 얼굴을 잠시 빛나게 할 수는 있어도, 그것만으로 지역 예술인의 창작 환경이 개선되고 시민의 문화적 소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진짜 문화도시는 건물의 높이나 행사의 규모로 증명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삶을 기억하고, 배제되어 온 목소리를 제도 안으로 불러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조선 후기 문신 허목은 일찍이 〈악설〉에서 예술을 정치의 장식이 아니라, 잘 다스려진 세상의 질서를 비추는 거울로 보았다. 그에게 음악은 사회의 상태를 드러내는 가장 예민한 징후였다. 허목은 통치자가 오만에 빠져 민생을 돌보지 않으면 음악은 원망과 혼탁으로 기울고, 공동체의 질서 또한 무너진다고 경계했다. 이는 오늘의 문화정책에도 유효하다. 문화예술은 권력의 성과를 포장하는 장식품이 아니라, 도시가 어떤 삶을 존중하는지를 증명하는 윤리적 시험대이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을 행사의 배경음악이나 정치적 치장의 수단으로만 소비한다면, 이전과 별 다를 바 없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정관의 치’라는 태평성대를 이룬 당 태종은 나라를 다스리며 세 가지 거울을 곁에 두었다. 첫 번째는 자기 매무새를 바로잡는 ‘구리거울’이다. 새 부산시정 역시 문화예술 정책의 겉모양보다 그 안의 질서부터 살펴야 한다. 눈에 띄는 전시성 사업을 서둘러 내세우기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문화예술 생태계를 지탱하는 기초 행정을 정교하게 다듬어야 한다. 창작 지원의 기준, 예술인의 안전망, 공공 공연장의 운영 원칙, 문화기관의 전문성과 독립성, 시민의 생활문화 접근권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문화도시가 공허한 수사로 전락하지 않게 된다. 문화도시는 거창한 선언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며, 절차의 공정성과 지속 가능한 구조 속에서 그 품격을 드러내는 것이다.
부산이 지나온 과오와 도시정책의 한계를 냉정히 분별하는 ‘역사의 거울’ 또한 필요하다. 건물 중심의 문화 인프라 구축, 눈앞의 성과에 집착하는 축제 행정, 중앙과 외부 브랜드의 이름값에 기대는 문화적 의존은 반복하지 말아야 할 과거의 그림자다. 인구 절벽과 지역 소멸, 청년 예술인의 이탈과 문화 소비의 양극화가 중첩된 지금, 부산의 문화정책은 더 이상 보여주기식 정책에 머물 수 없다.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는 것은 전임 시정을 비난하는 정쟁이 아니라, 도시가 축적하지 못한 시간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성찰이다. 역사의 거울을 잃어버린 정치는 실패를 답습하고, 그 대가는 결국 도시의 ‘문화적 공동화’로 돌아올 뿐이다.
새 시정의 성패는 ‘사람의 거울’에도 달려있다. 당 태종은 고구려 원정에서 참패하자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이번 출정을 막았을 것”이라 탄식했다. 위징은 군주의 실책을 서슴없이 간언하던 강직한 신하였다. 권력 곁에는 오랜 기간 주변을 맴돌았던 익숙한 인맥이 아니라, 현장의 언어를 알고 불편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진짜 전문가와 시민들이 있어야 한다. 시장은 이들의 비판적 조언을 형식적으로 듣는 데 그치지 말고, 정책 결정 구조 안에서 실제로 작동하도록 보장해야 한다. 권력의 품격은 박수보다 반론을 견디는 힘에서 드러난다. 진짜 쇄신은 단순히 사람을 바꾸는 데서 끝나지 않고, 건강한 목소리가 제도화되는 열린 구조를 만드는 데서 시작된다.
역사적으로 부산은 중앙의 문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 변방이 아니었다. 복천동의 독자적인 철기 문화가 그랬다. 피란수도 시절에는 전국의 예인들이 모여 한국 현대문화의 원형질을 발아시킨 도시였다. 바다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먼저 받아들이고, 부산의 방식으로 재창조했던 문화의 발원지이기도 했다. 새로 돛을 올린 전재수 시정은 바른 행정, 역사, 사람이라는 세 개의 거울 앞에 엄숙히 서야 한다. 새 부산시정이 감당해야 할 시대적 사명은 남의 이름을 빌린 위성도시가 아니라, 문화분권을 실현하고 스스로 문화를 생산하며 세계로 나아가는 도시를 여는 것이다. 진정한 해양 문화 수도의 원년을 열어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2026-07-02 [18:08]
-
[정훈의 생각의 빛] 부산항 북항을 바라보며
어김없이 ‘6·25’가 찾아왔다. 굳이 부연하지 않더라도 이날의 의미와 메시지는 우리 모두에게 비슷한 내용으로 다가온다. ‘전쟁’이 왜 일어나는지와 이를 끝내기 위해 필요한 조건과 상황에는 역사를 훑어보면 수없이 다양하고 복잡한 함수가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도 국민의 의지나 소망과는 관계 없이 때로는 돌발적으로, 때로는 상상하지도 못할 여러 변수로써 진행되었다. 다행히 이곳 부산은 비극적인 전쟁터로 휩쓸려 들어가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전쟁으로 전세가 불리해지고 피란민들이 부산항을 통해 마구 유입되어 폭발적으로 늘어난 사람들이 저마다 살기 위해 항구 주변과 산등성이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중앙동을 비롯하여 영주동 및 영도와 국제시장 주변에 산재해 있었던 수많은 피란민들에게 부산은 삶의 마지막 희망을 제공해 준 공간이자 장소였다. 이들의 급박했던 생활 현장은 지금도 여기저기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 40계단이나 영도다리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부산항 북항이 있다. 북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처음으로 개항한 항구다. 부산항의 이미지는 전후 복구기를 거쳐 1960~1980년대 한창 진행된 근대화와 산업화의 열기에 발맞춘 무역과 수출 현장으로 떠올리기 십상이다. 여기에 일제강점기 때부터 이곳을 소재로 창작된 수많은 대중가요가 지금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으며 아직도 많은 이들이 즐겨 부르곤 한다.
지금의 부산항 북항은 이전의 과포화 상태의 부두 기능을 신항으로 확장·이전하고 친수공간으로 탈바꿈 중이다. 숨 막힐 듯 밀집해 있었던 컨테이너 더미와 선박, 그리고 부산진 CY(컨테이너 야적장)와 부산역 일원의 철도시설 등이 새로운 북항 통합 개발사업 부지에 포함하게 되어 머지않은 미래 시민들의 여가 활동과 편의 및 각종 레저시설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하게 될 것이다.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사업 진행 과정에서 여러 잡음과 사업 진척을 둘러싼 얄궂은 소문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2022년 연말, 개항 이후 146년 동안 막혀 있었던 부두 일대를 말끔히 단장한 풍경으로 개방된 뒤 매립지를 가로지르는 도로와 충장로의 지하차도도 완공되어 이제는 어엿한 원도심의 ‘신세계’의 꼴을 갖추고 있다.
부산역 2층 대합실에서 북항 쪽으로 빠져나오는 공간인 ‘부산역 하늘공원광장’에서 바다를 보면 예전의 시원하고 청량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최근 깨달았다. 물론 코앞에서 복합환승센터 공사가 진행되고 있기에 어딘가 어수선해 보이고, 재개발로 매립된 면적이 넓기 때문에 그만큼 바다를 ‘잘라 먹어서’ 이전과 다른 느낌을 주는 게 사실이다. 수많은 국내·외 여행객들이 부산역을 빠져나와 각자의 목적지로 향하느라 붐비는 틈에도 어떤 여행객들은 바닷바람을 맞으며 북항 일대를 오랫동안 바라보는 모습도 보인다. 이들에게 부산은 바다나 항구, 혹은 갈매기로 상징되는 시원한 이미지로 다가올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부산이 우리 근·현대사에서 행했던 역동적인 기능과 역할을 떠올리면서 지금의 북항을 바라보면 어딘가 ‘바람 빠진 풍선’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기분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먹고살기 바쁜 때의 바다는 기회와 새로운 앞날을 예고하고 준비하는 발판이지만, 지금처럼 국가 경제의 규모가 커지고 생활 수준의 질이 놀라보게 달라지면서부터 바다는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보다 더욱 위축된 이곳 부산의 실상을 반영하는 것처럼 우중충해 보인다. 해양수산부가 시민의 염원으로 부산으로 이전되었으며, 북극항로 시대를 여는 주요 거점으로서 부산항의 의미와 가치가 높아졌는데도 나는 북항을 바라보면서 엉뚱한 생각이 든다.
결국 사람과 도시와 경제만을 ‘위한’ 바다라고만 생각할 땐 ‘바다’는 언제든 쥐어 짜낼 수밖에 없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곁에서 함께 ‘동고동락’했던 공간으로서 인식하는 바다는 효용과 가치만을 만들어 내는 대상이 아니라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먼 시간과 공간을 여행하는 든든한 길잡이일 수밖에 없다. 한국전쟁이라는 난리 통에서 부산항은 지칠 줄 모르고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거나 이 땅 위에서 자행되는 온갖 살육과 폭력의 상처를 꿰매고 아물게 했던 품이었다. 그런 부산항이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친수공간으로 바뀌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쾌적하고 포근한 공간이 되기를 바라고 또한 그리되겠지만, 한편으로 야성적이면서도 본래적인 바다의 ‘숭고함’이 사람들에게 미지와 신비를 간직한 풍경으로 다가오지 않는 점에 대한 아쉬움이 비단 나만의 낭만적인 생각인지는 모르겠다. 개발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고 싶다는 게 아니라 항구도시로서 부산의 역동성과 가능성까지 어우러진 부산항의 천진한 상태를 한번 생각해 본 것이다. 여기에 지금의 ‘살맛’과 미래의 ‘설렘’이 놓여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렇다.
2026-06-25 [18:05]
-
[서상호의 오픈 스페이스] 부산을 담아가게 하라!
대전발 0시 50분. 경부선과 호남선이 갈라지던 시절, 플랫폼에서 급하게 삼키던 가락국수 한 그릇의 추억은 온 국민의 향수를 자극하는 대전의 서사였다. 세월이 흘러 지금 대전에는 새로운 풍경이 자리를 잡았다. 성심당이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라. 성심당에 순수하게 빵만 사러 가는 사람은 없다. 전주 한옥마을에 초코파이를 사러 가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럼에도 성심당 앞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이 서 있고, 사람들은 양손 가득 빵 봉투를 들고나온다. 이유는 단 하나다. 언제 또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도쿄에 가면 평소 먹지도 않을 과자를 대형 할인점 ‘돈키호테’에서 쓸어 담는 심리, 이것이 바로 ‘셋업 코스트’(Setup Cost)다. 여행을 위해 이미 지불한 시간과 비용에 대한 최대한의 가치를 뽑아내겠다는 본능적 심리다. 결국 성심당의 빵은 대전이라는 도시의 경험을 소유하려는 가장 확실한 기념품이다. 대전은 빵 하나로 도시를 팔았다.
BTS 공연 때 외국인 관광객 20만 명 방문
도시 곳곳에 깃든 콘텐츠 엮어내지 못해
지역의 삶과 골목의 냄새 브랜딩 시도를
지난 12~13일 부산은 거대한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BTS 공연을 보기 위해 11만 명의 팬을 포함해 20만 명이 넘는 외국인이 부산을 찾았다. 제이홉이 무대 위에서 “오직 부산을 위해서!”를 외쳤을 때 5만 5000명의 관중석이 눈물바다가 됐다. 그런데 20만 명의 세계인은 부산에서 무엇을 가슴에 담아갔는가. 이것이 진짜 물음이다.
숫자만 보면 고무적이다. BC카드 분석에 따르면 공연 주간 외국인 결제액은 전년 동기 대비 73.3% 증가했고, 전통시장 결제액은 두 배 가까이 늘었다. 그러나 뒤에 가려진 다른 숫자를 보아야 한다. 공연 주간 숙박업 결제액은 전주 대비 227.8% 폭증했다. 탐욕스러운 숙박업소들이 평소의 수 배에서 많게는 10배에 달하는 요금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방을 구하지 못한 팬들은 인근 도시로 쫓겨나거나 서울에서 당일치기를 감행했다. 20만 명이 찾아왔지만 상당수는 부산을 통과했을 뿐, 소비하지 못했다. 도시의 탐욕이 셋업 코스트를 스스로 파괴해 버린 꼴이다. 만약 성심당이 유명세를 치렀다고 빵값을 10배로 올렸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 줄은 단 하룻밤 만에 사라졌을 것이다. 부산은 자명한 교훈을 너무나도 비싸게 배웠다.
셋업 코스트가 작동하려면 조건이 필요하다. 가져갈 콘텐츠가 명확해야 하고, 쉽게 가져갈 수 있어야 한다. 부산에는 밀면이 있다. 돼지국밥이 있다. 씨앗호떡이 있다. 광안리 바다와 감천문화마을의 골목이 있다. 서울에서도, 도쿄에서도 살 수 없는 오직 부산만의 것들이다. 문제는 20만 명이 몰려왔을 때 도시가 이것을 제대로 팔 줄 몰랐다는 점이다. 숙박이 없으면 저녁이 없고, 저녁이 없으면 야시장이 없으며, 새벽의 뜨끈한 돼지국밥도 없다. 당일치기 관광객에게 부산의 밤은 존재하지 않았다.
BTS 팬들에게 지민과 정국의 고향인 부산은 그 자체로 성지(聖地)다. 그들이 자란 동네, 다니던 학교, 걷던 길과 먹던 음식이 모두 세계적인 콘텐츠다. 멤버들이 어린 시절 찾던 떡볶이 골목 앞에 영어 안내판 하나만 제대로 세웠어도 전 세계 팬들의 셋업 코스트는 폭발적으로 작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산은 완벽한 성지순례 코스 하나 제대로 엮어내지 못했다. 있는 것을 팔 줄 몰랐다.
부산을 찾게 만드는 진짜 셋업 코스트는 무엇인가. 그것은 밀라노에서 수십억 원을 주고 라 스칼라의 ‘오텔로’를 수입해 오는 것이 아니다. 파리에서 1100억 원을 주고 퐁피두 분관 간판을 빌려오는 것도 아니다. 자갈치 새벽시장의 비릿한 사람 냄새이고, 감천마을 골목을 오르는 가파른 계단이고, 도시 구석구석에 깃든 삶의 궤적이다. 부산은 이미 그 자체로 세계적이다. 외국인 팬이 무인 카페에서 밤을 지새우며 부산의 새벽 부두를 보았다면, 그 새벽의 공기와 풍경을 브랜드로 담아갈 수 있게 해야 했다. 그것이 행정이 할 일이었다.
105억 원으로 라 스칼라를 사 오고, 1100억 원으로 퐁피두 간판을 임차하는 전시 행정에만 혈안이 돼 있었다. 정작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이틀 동안 20만 명이 오는 황금 같은 기회를 주었을 때, 부산 시정이 그들에게 돌려준 것은 바가지 요금과 암표, 차가운 노숙과 당일치기 기차표뿐이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부산에 성심당이 없어서가 아니다. 성심당이 되고도 남을 골목과 콘텐츠가 넘쳐나는데, 행정은 그것을 가꾸고 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겉멋 든 외제 간판을 빌려오는 데 눈이 멀어 진짜 시장(市場)의 논리를 몰랐던 것이다.
이제 부산은 화려한 껍데기 빌리기를 멈추고 자신의 골목을 돌아보아야 한다. 간판을 임차하는 행정이 아니라, 골목의 냄새를 브랜딩하는 진짜 정치가 필요한 때다. 세계가 열광하는 부산의 힘은 거창한 미술관 분관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있었던 부산의 삶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2026-06-18 [18:16]
-
[홍준성의 개념 쌓기] 텅 빈 쇼룸의 공포, 시스템이 멈춘 현실
최근 영화 ‘백룸’이 저예산 영화의 기적이라고 불리며 흥행 몰이 중이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우연히 미지의 공간을 발견하고, 그곳을 탐사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공포스러운 사건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서사의 문법을 따른다. 흥미로운 것은 그 서사의 소재이자 무대, 즉 백룸 그 자체다. 영어권에서 백룸(Backroom)은 통상 일반인은 못 들어가는 매장 내 뒷공간을 일컫는다. 고객 입장에서 이 백룸은 분명 자신의 눈에 보이는 공간과 이어져 있는 곳이고, 더 나아가 자신을 다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토대이기까지 하다. 다시 말해 백룸은 가시적 공간을 떠받치는 비가시적 공간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 백룸을 공포의 공간으로 변모시킨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탈바꿈시킬까? 먼저 주목할 점은 영화의 무대가 직원용 통로나 창고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무대는 대형 가구점에서 고객들이 이용하는 가시적 공간인 쇼룸이다. 침대와 소파, 조명 등을 배치해 실제 생활공간처럼 꾸며 놓은 바로 그 쇼룸 말이다. 그런데 영화는 이 쇼룸을 텅 비워버림으로써 백룸으로 전환한다. 몇몇 가구와 노란 단색 벽지, 윙윙거리는 형광등 등 익숙한 공간의 흔적은 남아 있지만, 완성된 인테리어는 철저히 사라져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쇼룸의 백룸화인가? 사실 우리는 일상에서 이와 비슷한 장면을 종종 마주한다. 이를테면 가구점에서 상품 진열을 바꾸기 위해 쇼룸을 모두 비워버리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때는 당연히 리뉴얼을 위해 가구점 문을 닫기 때문에 쇼룸이었던 곳 전체가 오로지 직원들만이 움직이는 백룸이 된다. 이삿짐이 들어가기 전의 아파트 역시 마찬가지다. 입주 전까지는 청소업체 직원이나 옵션 점검을 나온 관계자들만 출입하는 일종의 백룸 상태에 놓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결국 영화의 무대는 오픈을 준비하는 백룸화된 쇼룸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공간 대부분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이다. 설령 뭔가 있더라도, 뒤틀린 모습으로 존재할 뿐이다. 더 큰 문제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직원도, 고객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공간을 채워야 할 사람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낯선 공허함이 생겨나고, 바로 그 공허함이 공포의 근원이 된다.
여기서 느껴지는 공포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극단적인 무력감이다. 앞서 살펴봤듯 백룸의 주체는 고객이 아니라 직원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속 백룸은 노동자의 부재를 드러내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곧 비가시적 백룸이 떠받치고 있던 가시적 공간, 다시 말해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세계가 위태로워졌음을 의미한다. 식료품부터 의류, 안전, 의료, 심지어 커뮤니티까지 모든 것을 ‘구매’ 버튼 하나로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현실이 통째로 소거된다면? 백룸에 빠진 주인공, 좀 더 정확히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바로 상품화된 현실이 삭제된 세계이다. 가구점의 쇼룸이나 아파트 모델하우스가 사실상 현대인의 안방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오늘날 직접 집을 짓거나 가구를 만드는 사람은 극소수이며, 주거 역시 하나의 상품이 된 지 오래다. 화폐를 지불해 필요한 것을 얻는 방식을 제외하면 현대인은 자신의 의식주를 스스로 마련하고 유지하는 능력을 거의 갖추지 못했다. 결국 가장 사적인 공간인 안방에서조차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무력한 존재인 셈이다.
이제는 새삼스러운 이야기도 아니지만, 현대인은 소비를 통해 구성된 상품의 우주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집은 곧 쇼륨이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쇼룸은 언제든 백룸이 될 수 있는 공간이다. 상품은 생산과 유통을 담당하는 익명의 노동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상품들로 조립된 현실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상품의 부재는 현실의 부재며, 현실의 부재는 삶의 부재, 곧 죽음을 의미한다. 이보다 더 근원적인 공포가 있을까. 이런 맥락에서 영화 백룸의 소재가 된 ‘도시괴담’이 등장한 것은 2019년이지만, 이를 소재로 한 영상 시리즈가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시점이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2년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당시 전 세계는 대규모 셧다운과 사회적 고립을 경험했고, 그 과정에서 평소 당연하게 여겼던 공급망과 서비스, 그리고 일상의 시스템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놓여 있는지를 목격했다. 만일 익명의 노동에 의해 지탱해 온 세계가 갑자기 종결된다면 어떨까? 가도 가도 텅 빈 세계에 내던져지게 될 것이며, 여기서 굶어 죽게 될 것이란 불안감이 엄습한다.
결국 영화 백룸이 가시화한 공포의 본질은 미지의 괴물이 아니다. 그것은 소비라는 행위를 제외하면 생존에 필요한 그 어떤 것도 스스로 생산할 수 없게 된 현대인의 철저한 무능과 고립이다. 백룸 특유의 서늘함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유리성 같은 취약함에 대한 반작용인 것이다. 백룸의 흥행이 현대인이 당연하게 여겨온 현실의 기반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길 희망해 본다.
2026-06-11 [18:04]
-
[배학수의 문화풍경] 도그마의 몰락
얼마 전 서울에서 열린 구글 포 코리아 포럼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인공지능 신기원의 한 장을 축하했다. 2016년 3월 알파고가 바둑의 거장 이세돌을 꺾은 지 어느덧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대중은 이를 인간과 기계의 극적 대결로 기억하지만, 이 사건이 촉발한 변화는 훨씬 더 깊다. 그것은 수천 년간 이어져 온 도그마에 대한 공개 처형이었다.
바둑의 고수들은 대를 이어 정수와 정석이라는 전술의 표준을 정교하게 다듬어 왔다. 명문 도장들의 두터운 권위와 프로 9단들의 절대적인 영향력은 이러한 표준들을 철저히 수호했다. 그리하여 인간은 이 수백 년 묵은 제도적 합의를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로 착각하기에 이르렀다.
10년 전 알파고 승리의 함의는
권위 향한 자발적 순종에 경종
독립적 사유 권리 널리 확산되길
그러던 제2국, 이른바 ‘정수’의 세계를 뒤흔든 ‘37번째 수’가 등장했다. 알파고는 5선에 돌을 툭 떨어뜨렸다. 바둑책이 하수의 떡수라고 치부하던 모호하고 낯선 자리였다. 해설자들은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는 프로그램 오류를 의심했다. 그러나 수십 수의 돌이 깔린 후, 그 외롭던 돌은 판 전체로 영향력을 뻗쳐나가며 이세돌의 전략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알파고의 창의적 일탈은 우리가 그토록 칭송하던 ‘정수’가 사실은 심리적 타성이며, 관습에 안주하려는 두려움의 산물이었음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이러한 자발적 순종은 일시적 실수가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 성향에 깊이 뿌리박힌 구조적 질환이다. 우리는 왜 이토록 전통적 권위 앞에 수동적이며 무비판적인가? 우선, 권위를 따르는 것은 안전하다. 기성 도그마를 그대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집단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는 안전을 보장받는다. 나아가, 순종은 책임이라는 무게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훌륭한 정서적 방패가 된다. 매뉴얼대로 하다가 실패하면 “지시대로 했을 뿐”이라는 확실한 핑계가 생기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관습 거역의 공포에서 벗어나 지성을 온전히 발휘할 용기가 있었다면, 알파고가 보여준 혁신적인 수들은 진즉 인간의 머리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의 위험 대신 군중의 안전을 선택해 왔다.
이러한 무비판적 수용의 문화는 철학의 고전, 특히 『노자』를 해석하는 방식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우리는 역대 권위자들이 내놓은 모순되고 혼란스러운 주석을 ‘정답의 바이블’로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왔다. 예컨대 소위 전문가들은 노자가 ‘무위(無爲)’의 원리를 인간에게 권장했다며, 이를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 혹은 ‘인위적으로 행하지 않는 것’이라는 모호한 말로 포장해 왔다. 그러나 이 정의는 지나치게 막연하다. 숙제를 하기 싫은 초등학생이 당장 마음에 이끌리는 대로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이 노자가 말한 ‘자연스러운’ 행동인가?
실마리는 가장 오래된 판본인 ‘곽점 초간본’이 발굴되면서 풀렸다. 무위는 개인의 처세술이나 신하의 행동 지침이 아니라, 오직 왕을 위해 고안된 국가 통치술이다. 세금을 걷고, 성곽을 쌓고, 전쟁을 치르는 실무는 관리와 장수들의 몫이다. 반면 왕은 통치에 직접적 개입을 삼가는 ‘무위’를 실천해야 한다. 대신 왕은 신하들을 감시하고 평가하는, 인사와 상벌의 권력만을 쥐고 군림한다. 만약 백성이 무위하면 가정은 굶주릴 것이고, 신하가 무위하면 국가는 파탄 난다. 이것은 우리가 비판적인 독해력만 발휘했다면 진작에 도달했을 지극히 상식적인 결론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당연한 이치를 뒤로한 채, 이른바 노자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모호한 신비주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했다.
우리는 이 관습적 굴종의 고리를 어떻게 끊어내고, 독립적 사유에 필요한 심리적 용기를 길러낼 수 있을까? 그 해법은 단순히 “비판적으로 생각하자”는 식의 유약한 다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교육 시스템 자체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쳐, 안전한 순종 대신 지적 일탈과 반란을 권장해야 한다. 초등학교에 ‘어린이를 위한 철학’(P4C)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것은 이러한 지적 전환을 위한 강력한 청사진이 될 수 있다. 교실을 탐구 공동체로 전환하여,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전제를 의심하고, 근거를 평가하며, 권위에 건설적으로 도전하는 법을 배운다면, 무비판적인 복종의 문화를 근본적으로 걷어낼 수 있다.
2016년의 대국이 남긴 진정한 가치는 우리가 얼마나 안락하게 눈을 감고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폭로한 데 있다. 우리가 이 편안한 무지의 선잠에서 깨어나 나와 세상을 똑바로 마주하기로 결심했다면, 그 깨어남이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이제는 수천 년 묵은 도그마나 자칭 전문가들이 세워둔 제단에 절하는 짓을 멈춰야 한다. 우리의 과제는 알파고가 시각적으로 증명해 보인 그 거침없고 자유로운 지적 용기를 체득하여, 마땅히 우리 것이었어야 할 독립된 사유의 권리를 마침내 되찾아오는 일이다.
2026-06-04 [18:06]
-
[허동윤의 비욘드 야크] 우리는 어떠한 도시를 꿈꾸는가
흔히 도시를 건물과 도로, 산업과 인구가 밀집한 물리적 공간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사실 도시는 한 사회가 어떤 삶을 꿈꾸는지를 드러내는 집단적 상상력의 결과물에 가깝다. 도시에는 시대의 욕망이 압축되어 인간이 무엇을 두려워하며 무엇을 갈망하는지가 공간의 형태로 새겨져 있다.
고대의 성벽 도시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생존의 구조였다면, 근대의 산업도시는 생산과 속도를 중심으로 설계되었다. 오늘날의 글로벌 도시는 자본과 정보, 이동과 소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재편된다. 도시의 형태는 결국 인간 존재 방식의 변화를 반영한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거주하는 존재’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거주란 단순히 집을 소유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고 시간을 축적하며 삶의 의미를 형성해 나가는 방식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도시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도시의 구조가 시민들의 삶의 태도와 감각, 관계의 방식까지 결정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늘날 많은 도시들이 더 이상 ‘거주의 공간’이 아니라 ‘경쟁의 공간’으로 바뀌면서 몰개성하게 서로 닮아간다는 점이다. 도시들은 앞다투어 더 높은 빌딩을 세우고 더 화려한 야경을 만들지만, 정작 그 안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의 삶은 점점 더 피로해진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도시를 단순한 행정구역이 아니라 ‘삶이 생산되는 공간’으로 보았다. 경제 논리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 경험의 총체라는 의미다. 그는 시민들에게 ‘도시에 대한 권리’를 주창했다. 이는 단순히 도시를 이용할 권리를 넘어 도시의 방향과 의미를 함께 결정할 권리다. 도시를 누가 만들고 누구를 위해 운영할 것인가의 문제는 결국 민주주의의 본질과 직결된다.
인간 경험의 총체로서 도시를 고민할 때 부산은 이러한 도시의 본질적 질문과 생존 전략이 가장 첨예하게 교차하는 도시다. 부산은 한국전쟁 시기 피란수도였고, 산업화 시대에는 항만과 조선, 수출의 전진기지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지탱해 왔다. 그러나 산업구조의 변화 이후 청년 유출과 고령화, 지역경제 침체라는 구조적 위기를 겪으며 ‘지역 소멸’이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 서 있다. 그렇기에 이번 부산시장 선거에서 등장한 도시 공약들은 부산이라는 도시가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점은 박형준 후보와 전재수 후보의 공약이 겉으로는 다른 길을 말하는 듯하면서도 도시의 생존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한 접점을 가진다는 것이다. 양측 모두 AI와 데이터 산업을 부산의 미래 먹거리로 제시한다. 청년 일자리와 산업 생태계 복원을 핵심 과제로 내세우는 점도 같다. 그러나 도시의 미래를 설계하는 철학에서는 명확한 시각 차이가 드러난다.
전재수 후보의 비전은 부산의 장소성과 역사성에 무게를 둔다. 부산항과 해양 산업, 해사법원 설립, 부울경 연합 같은 구상은 부산을 ‘바다를 중심으로 한 문명권’으로 재정의하려는 시도다. 여기에 해양 AI 데이터센터와 자율운항 선박, 해상풍력 같은 미래 산업을 접목해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이는 도시가 오랜 시간 축적해 온 기억과 자산 위에서 미래를 만들어가려는 ‘축적의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박형준 후보는 글로벌허브도시 특별법, 가덕도신공항, 산업은행 이전, AI 및 데이터 기술 생태계 구축 등을 통해 부산을 세계 도시 네트워크 속에서 경쟁 가능한 플랫폼으로 바꾸려 한다. 그의 비전은 부산을 글로벌 자본과 인재, 기술의 흐름 속으로 과감하게 재배치하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는 도시의 체질 자체를 바꾸어 새로운 성장 구조를 만들려는 ‘전환의 전략’에 가깝다.
건축과 도시계획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두 가지 시선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도시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가능성이 어떻게 공존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 도시들이 추구하는 ‘스마트시티’의 본질 역시 기술이라는 효율적 수단을 통해 시민의 인간적인 삶과 공동체를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선거가 며칠 남지 않았다. 그러나 선거의 진정한 가치는 승패가 갈리는 그날 밤이 아니라, 그 이후에 시작된다. 선거 과정에서는 서로 다른 비전이 충돌할 수밖에 없지만, 선거 이후의 정치는 결국 그 비전들을 하나의 도시 미래로 통합해 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부산이라는 도시가 앞으로 어떤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어떤 시간을 다음 세대에 남길 것인가 하는 것이다. 도시란 인간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내는 가장 거대한 삶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2026-05-28 [18:06]
-
[김정화의 크로노토프] 오페라하우스와 지역순환경제
국적 선사 HMM 본사의 부산 이전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국내 최대 컨테이너 선사의 주소지가 바뀌는 것은 단순한 기업 이전을 넘어 ‘해양수도 부산’이라는 퍼즐 조각을 맞추는 상징적 사건이다. 항만과 물류, 금융과 인재가 한 도시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분권은 구호가 아닌 구조가 된다. 다만 경제와 산업의 물길이 바뀌는 역사적 길목에서, 정작 도시의 영혼을 채워야 할 문화예술 분권이 얼마나 낯설고 허술한지 뼈아프게 목격하고 있다.
산업의 분권만큼 문화적 자생력도 중요하다. 해프닝처럼 지나간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지방 이전 논의 또한 분권의 본질을 비껴가기는 마찬가지다. 애초에 한예종은 학위 수여가 목적이 아닌 실기 중심의 전문 예술인 양성을 위해 설립된 독자적 교육기관이었다. 수능과 학점이라는 기존 틀을 깨고 현장형 인재를 키우던 학교가, 이제 와서 박사학위 과정 신설과 건물 이전에 목매는 것은 스스로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이다. 예술가에게 필요한 것은 박사 가운이 아니라 마음껏 기량을 펼칠 무대와 정당한 노동의 대가다. 학교를 옮길 궁리보다 졸업생들의 일자리를 먼저 고민하고 해결해야 한다.
부산오페라하우스 개관 공연을 둘러싼 예산 논란은 우리 안의 뿌리 깊은 ‘문화 사대주의’를 여실히 드러낸다. 운영 주체는 라 스칼라 초청에 총사업비 105억 원을 투입하는 명분으로 “글로벌 스탠더드를 경험하고 극장 운영 노하우를 전수받는 과정”이라고 미디어를 통해 강조했다. 하지만 100억 원이 넘는 예산을 단 며칠의 박수와 함께 해외로 송금하는 구조는 문화 투자가 아니라 명백한 ‘문화 식민주의’의 산물이다. 이미 세계 주요 극장의 무대와 백스테이지에서 한국인 공연예술 종사자들이 충분히 실력을 증명해 왔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한국 예술현장이 지닌 힘이다. 이처럼 엄연한 증거를 두고도, 우리 인력을 ‘모자란 존재’로 규정하며 서구의 권위를 빌려와야만 개관의 위신이 선다는 발상이 부끄럽지 않은가. 우리가 모자란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성장시킬 예산과 구조가 빈약한 것이 본질이다.
고 황한식 교수를 필두로 한 지방분권화 운동은 지역이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겠다는 ‘존엄의 투쟁’이었다. 긴 세월 동안 우리는 분권을 외쳤지만, 문화예술을 지역 경제의 혈맥인 ‘지역순환경제’ 관점에서 사유하는 데는 실패했다. 부산문화회관의 1년 치 운영비를 넘는 금액, 연간 지역 오페라 지원 예산의 약 50배에 달하는 혈세를 단 며칠의 갈채와 맞바꾸는 행위는 지역경제 순환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오페라하우스는 랜드마크를 넘어 관련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구조여야 한다. 지역의 문화산업은 지역 내에서 기획되고 인력이 투입되며, 그 경험과 수익이 다시 지역에서 다음 창작으로 이어져야 한다.
극장은 본래 모든 예술이 만나는 ‘종합예술의 산실’이다. 불세출의 기획자 디아길레프는 20세기 초 파리를 뒤흔든 ‘발레 뤼스’를 통해 스트라빈스키와 드뷔시의 음악, 피카소와 마티스의 미술, 니진스키의 춤, 샤넬의 의상 등을 결합해 세계 문화사를 새로 썼다. 완성된 공연을 사 오는 ‘하청’에 머물지 않고, 예술가들이 치열하게 협업하며 스스로 새로운 ‘명성’을 창조해 냈다. 수십 년 전문성을 닦은 지역 예술가들이 갈 곳이 없어 고향을 등지는 현실에서 부산오페라하우스는 일방적인 패키지형 수입처가 되기를 자처해서는 안 될 일이다. 지역 인재들이 ‘직업인’으로서 정착해 부산만의 작품을 직조해 내고, 이를 시민들이 고르게 누리는 진정한 향유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부산은 클래식 전용극장이 차례로 들어서며 도시의 예술 지형이 바뀌고 있다. 하지만 건물만으로는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그 공간을 채울 사람들의 시간과 노동에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지역 예술인을 무대 밖 들러리로 세우지 말고 세계적 수준과 대등하게 부딪히며 실질적인 내공을 쌓는 경로를 설계해야 한다. 사대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나, 그 이름이 지나간 자리에 부산의 역량이 남고 다양한 계층의 예술가들이 이 도시를 일터로 삼을 수 있는 촘촘한 구조를 짜야 한다.
선거를 앞두고 있다. 다들 더 큰 건물과 유명한 행사 유치만 외친다. 공연예술을 도시의 순환경제로 이해하는 관점의 공약은 잘 보이지 않는다. 분권은 단순한 권리 이양만이 아니다. 분권을 통해 지방에 가치가 쌓여야 한다. 며칠간의 사치보다 다음 세대 예술가들이 이 도시에서 연습하고, 일하며, 창작하고, 관객을 만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삶의 구조를 설계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진정한 해양수도라면 문화를 ‘소비하는 도시’가 아니라 ‘창조하는 도시’라야 한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부산시 문화정책이 순간의 허영을 걷어내고 도시의 미래를 채울 축적의 길을 밝히는 지혜의 등불이 되기를 서원한다.
2026-05-21 [18:09]
-
[정훈의 생각의 빛] 폭풍의 계절에 읽는 한 권의 세계
이사한 동네에 오래된 미장원이 있다. 들어보니 40년가량 영업을 해오셨다. 한창 젊었을 적 개업한 모양으로 일흔을 넘긴 듯한 주인에게 미장원 상호와 똑같은 이름의 목욕탕이 마주하고 있어서 그 ‘선후관계’가 어찌 되냐 물으니, 목욕탕이 먼저라 한다. 미장원 맞은편에 2층 주택을 리모델링한 듯 1층에는 맥줏집이, 목욕탕은 2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직 한 번도 이용하지 않았지만 그 목욕탕은 시내에 있는 큰 규모의 대형 목욕 및 사우나 시설과는 비교할 수도 없게 조그맣다. 앙증맞은 크기의 목욕탕과 미장원을 사이에 둔 골목을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재잘거리면서 지나간다. 문구점, 안경점, 미장원, 분식점, 편의점 등의 가게들이 오밀조밀 밀집해 있는 골목을 지나면 더러 30여 년 전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봄도 한복판이 거의 지나 이제 여름 초입에 들어선 이때, 최근 1~2년 사이에 우리가 경험한 세계를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하루도 쉴 새 없이 숨 가쁘게 들썩였던 나날이었다. 잊을 만하면 터지곤 하는 대형 사고를 비롯하여 진영 간 끝없는 모략과 비난으로 잠잠할 날이 없는 정치권, 기득권 세력의 만연한 탈세 및 불법행위와 계층·지역·신분·성별·세대에 따른 배타주의가 여전한 요즘이다. 게다가 선거가 다음 달 초에 예정되어 있어서인지 오전부터 교차로나 인파가 붐비는 공간에서 선거에 입후보한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공약과 정책을 호소하는 풍경까지 더해 시내 곳곳은 어수선함과 괜한 흥분으로 가득 차 있다. 부쩍 늘어난 외국인 관광객들로 붐비는 국제시장을 비롯하여 자갈치시장이나 부평깡통시장 등의 되살아난 활기도 한몫해서인지, 눈뜨고 집을 나서면서부터 밤에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의 ‘세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방불케 한다.
이렇게 왁자지껄한 도심에서 사람들과 얽혀 살아가는 일은 여러 체험을 할 수 있어서 삶의 공부가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백척간두에 놓인 듯 언제 진창 같은 세계의 바닥으로 추락하거나 휩쓸릴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게 사실이다. 먼 나라에서 진행 중인 여러 전쟁 소식과 이에 영향을 받아 기름값이 치솟는 현실에 정부의 대책과 위정자들의 낙관적인 호소에도 마냥 안심할 수 없는 듯한 시민들의 표정이 봄바람에 떨어지는 시든 꽃잎처럼 그을려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내 주식 시세가 올라야 한다, 몇 번을 찍어야 한다, 그 집 돼지국밥이 제일 맛있더라, 어느 병원에 가면 싸게 진료받을 수 있다, 그 사람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다,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등등.
한없이 가볍고, 재빠르고, 요령을 부리면서 잇속을 챙기고, 티 나지 않게 생활하면서 은근히 자금을 불리고, 집값과 주식에 몰두하면서 교양을 두르려 하고, 온 데 간 데 모르는 마음이면서 확신과 맹신을 일삼고, 모자란 게 없는데도 욕심을 내면서 타인을 질시하고 스스로를 높인다. 편리해진 기술의 사용에 여가 시간을 송두리째 빼앗기면서 마음의 평화와 고요를 견디지 못하는 우리 자화상을 떠올린다. 그러다 보면 하루가 다르게 지나가 버린 시간이 옛날이야기처럼 여겨질 때가 잦다. 언제 우리가 그런 시간을 거쳤는지 까마득하게 멀어진 세계를 뒤로한 채 아직 오지 않은 시간 속의 불안과 기대에 온 정신을 내맡기기 일쑤다. 이런 모든 게 변화와 격동의 세월을 보내면서 익숙해지고 단련된 현대인의 마음 풍속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태는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몸에 각인된 면역체계처럼 환경과 시대조류에 관계없이 그 맷집을 유지할 것이다.
일과가 끝나 어스름이 질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생각한다. 나와 한 버스를 탄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방향과 목적으로 혼란스러운 이 세계 모퉁이에서 무늬를 그리고 있는지 말이다. 뜬구름 같은 말인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한없이 가볍고 힘겨운 마음으로 걸어가는 이 길 위에서도 아름다움은 곳곳에 스며 있다.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대체로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하면서 평온함을 지속적으로 불어 넣는 것은 바다와 산과 강과 도시와 길과 골목과 사람이 예전부터 뒤척거리고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잃어버리지 않고 지키려 했던 ‘항상심(恒常心)’이라는 이름의 선물 때문이지 않을까. 변하는 속에서도 꾸준히 간직하면서 지키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의지는, 요즘처럼 급변하는 세태 속에서 든든하면서도 은은한 등불처럼 늘 꿈과 용기를 안긴다. 오랜 항구를 낀 바다와 발전소를 지나, 마치 시간이 멈춰 선 듯한 우리 동네에 내리면서 올라가는 골목을 들여다보면 책을 읽듯 담벼락이나 길바닥에 흘러 지나갔던 시간의 글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혼란스럽고 시끌벅적한 이 시대에도 언제든 돌아가서 뒤적거리면서 배워야 할 진실이 있는 손때묻은 책처럼, 새로운 ‘한 권의 세계’는 사실 바로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계절이다.
2026-05-14 [18:04]
-
[서상호의 오픈 스페이스] '세계적'이라는 주문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중략)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피천득의 시 ‘오월’이다. 계절의 여왕 오월에는 어김없이 가족이 가운데 자리한다. 가정의 달의 거창한 형식보다 “사랑합니다” 한마디가 더 묵직한 계절.그러나 오월, 부산에서는 그 온기를 비집고 불편한 진실이 고개를 든다.
부산시청 집무실 어딘가에는 아마도 이런 지도가 걸려 있을 것이다. 오페라하우스, 퐁피두 분관, 라 스칼라 공연. 점점이 찍힌 세계 지도 위에서 부산은 이미 뉴욕과 밀라노와 파리 사이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박형준 시장에게 문화는 브랜드다. ‘세계적’이라는 형용사는 그의 통치 언어에서 가장 자주 소환되는 주문(呪文)이고, 그 주문이 통할 때마다 시민 혈세는 대서양 너머로 흘러간다. 지금 부산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문화 행정의 성취가 아니다. 문화 이해의 빈곤을 드러내는 연속극이다.
부산오페라하우스 개관 공연으로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오페라 ‘오텔로’를 세 차례 올리기 위한 업무협약 동의안을 부산시의회가 심의 중이다. 1778년 개관해 24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라 스칼라. 그 이름만으로도 개관 첫날의 포스터는 완성된다. 부산시장 입장에서 이보다 완벽한 홍보 그림도 없을 것이다.
화려한 그림의 이면을 보라. 이 공연 하나를 위해 라 스칼라 측에 지불해야 할 금액은 105억 원으로 추산된다. 반면 올해 부산소극장오페라축제와 창작오페라 지원사업에 대한 시비 지원은 2억 2000만 원에 불과하다. 세계 정상급 오페라단 초청에는 100억 원을 쾌척하면서, 그 무대의 씨앗이 될 지역 예술 생태계에는 2억 원을 쥐여준다. 이것이 이 행정의 민낯이다.
오텔로는 공연되고, 객석은 환호하고, 국제 언론은 짧게 보도할 것이다. 그리고 밀라노의 예술단은 유유히 돌아가고, 부산에는 105억 원의 공백과 여전히 무대를 갖지 못한 지역 오페라 가수들만 남는다. 이것은 개관이 아니다. 전시(展示)다.
오페라하우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퐁피두센터 부산 분관 유치는 민선 8기 핵심 공약이다. 부산시는 총 1099억 원을 투입해 남구 이기대 예술공원 일대에 미술관을 건립할 예정이다. 숫자가 말해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연간 예상 수입은 약 50억 원, 총지출은 약 125억 원이다. 매년 75억 원의 적자를 시민 세금으로 고스란히 메워야 한다. 그것도 사업비와 일반 운영비의 ‘전시’ 항목에 브랜드 사용료만 연간 65억 원이 들어갈 것으로 확인됐다. 요컨대, 부산 시민은 매년 65억 원을 내고 ‘퐁피두’라는 프랑스 미술관의 이름을 임차하는 셈이다. 도시의 문화적 자존심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외국 브랜드의 하청 문화 기지가 되겠다는 선언 아닌가! 절차적 문제도 심각하다. 시민단체는 지방재정법상 투자 심사와 타당성 조사 의무를 어겼다며 감사원에 공익 감사를 청구했다. 업무협약(MOU)은 비공개다. 시민의 돈으로 시민이 알 수 없는 계약을 밀실에서 맺는다. 이것이 민주적 문화 행정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독선의 문법, ‘세계적’이라는 면죄부! 작금의 문화 행정에는 일관된 문법이 있다. 세계 최고 브랜드를 유치하면 나머지 논란은 자동으로 봉합된다는 논리다. 라 스칼라가 오면 오페라하우스의 정당성이 증명되고, 퐁피두가 들어서면 부산은 문화도시가 된다는 식이다. 이 논리 안에서 지역 예술인의 소외, 시민 의견 수렴 부재, 천문학적 적자는 모두 ‘보완할 과제’로 가볍게 축소된다.
문화는 수입(輸入)되지 않는다. 비스마르크가 군함을 사들였다고 독일 해군의 전통이 하루아침에 탄생하지 않은 것처럼, 라 스칼라가 북항을 한 번 다녀간다고 부산에 오페라 문화가 뿌리내리지 않는다. 진짜 문화도시는 외부에서 브랜드를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예술가를 성장시키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부산시립미술관과 부산현대미술관에 전략적으로 투자해 동북아시아 특화 미술관을 만드는 길이 있다. 그 길은 선택받지 못했다. 화려한 외국 간판이 그 길을 가렸다.
독선은 나쁜 의도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때로는 스스로 옳다는 확신에서 가장 두꺼운 독선이 자란다. 라 스칼라와 퐁피두를 동시에 향해 달려가는 부산시장의 모습은 웅장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달음박질 속에서 정작 부산의 문화 토양은 짓밟히고 있지 않은지, 이 물음을 시민이 제기할 때가 되었다. 그 시점이 지금이다. 세계적인 것을 꿈꾸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간판을 사들이는 것과 세계적인 문화를 일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임을 모르는가! 하나는 돈의 문제고, 하나는 철학의 문제다. 그 차이를 모른다면, 혹은 알면서도 무시한다면 그것이 바로 독선이다.
2026-05-07 [18:10]
-
[홍준성의 개념 쌓기] '재능충'이란 자기합리화에 대한 경계
청년들의 세계에서 ‘재능충’이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 있다. 이는 타고난 재능을 지닌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전통적인 예체능 분야를 넘어 공부, 상업, 연애, 게임, 심지어 노력 자체까지도 재능의 영역으로 보는 인식과 맞닿아 있다. 타고난 뇌 구조나 도파민 체계를 근거로 ‘노력할 수 있는 능력 역시 재능’이라는 설명이 덧붙는 것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이다. 이와 함께 재능충은 ‘노력충’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쓰이기도 한다. 노력충은 노력했음에도 성과를 내지 못한 사람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그 어감 자체에 조롱의 뉘앙스가 있다. 반면 재능충은 적은 노력으로도 뛰어난 성과를 내는 사람을 향한 부러움과 선망이 담긴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재능충은 비하적 의미가 상대적으로 옅기 때문에 SNS를 넘어 공중파 방송에서도 거리낌없이 사용되는 단어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고 재능충이라는 말에 비웃음의 뉘앙스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재능충의 성취를 노력의 결과가 아닌 타고난 재능의 산물로만 치부하는 태도를 들 수 있다. 쉽게 말해 그들이 이룬 성과를 ‘운 좋게 타고난 재능 덕분’으로 환원해 버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선 속에서 재능충은 자신과 달리 재능을 갖지 못한, 아무리 애써도 결국 노력충의 위치에 머물 수밖에 없는 평범한 이들을 기만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이면에는 일종의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있다. 만약 재능 있는 사람이 자신을 평범하다고 말한다면 그 평범함에조차 도달하지 못한 자신은 어떤 위치에 놓이게 될까. 이는 곧 평범함마저도 버거운 열등한 존재가 돼버린다. 따라서 누군가를 재능충으로 규정하는 행위는 타인을 평가절하해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자기변호에 가깝다. 다시 말해 타인을 끌어내려야만 유지되는 불안정한 자존심을 지키려는 방편인 셈이다.
물론 재능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를테면 수영에서는 물 위에 떠 있기 위한 부력이 중요한데, 인간의 신체 구조상 하체는 상체보다 부력을 덜 받는다. 이 때문에 하체가 짧을수록 유리하며, 다리가 짧으면 물을 밀어낼 때의 힘 손실도 줄어든다. 즉 수영선수에게 상·하체 비율은 체력 안배와 직결되는 요소다. 이러한 점에서 키 195cm에 비해 다리 길이가 81cm에 불과한 수영선수 마이클 펠프스의 신체 조건은 수영에 유리한 요소만을 갖춘 압도적인 재능의 사례로 볼 수 있다. 그가 올림픽에서 금메달 23개를 획득한 전설적인 성과 역시 재능을 배제하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런 사례는 다른 분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필즈상 수상자들의 수학적 직관이나, e-스포츠 게이머의 뛰어난 동체시력 역시 명백히 재능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묻자.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지 못하면 모두 노력충에 불과한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지 못하면 실패한 영화감독이라 할 수 있는가. 이는 반박할 가치조차 없는 터무니없는 잣대다. 누구나 서로 다른 종류와 수준의 재능을 타고난다는 사실로부터 그 재능을 반드시 정상에 이르기 위해 써야 한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음악을 한다고 해서 세 살에 작곡을 시작하고 여섯 살 전에 바이올린을 능숙하게 연주했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될 필요는 없다. 삼각 함수를 이해하기 위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끌어올 필요도 없고, 어깨 근력을 기르겠다고 운동하면서 아놀드 슈왈제네거를 떠올리며 낙담할 이유도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예체능이든 학문이든 기본적인 이해와 성장을 이루는 일이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더 나아가 사소한 경쟁에서의 미미한 우위가 개인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꿔주지도 않는다.
물론 정상만 바라보는 이러한 세태를 단지 개인의 문제로만 돌릴 수는 없다. 1등 외에는 병풍처럼 취급해 버리는 사회 분위기, 과도한 경쟁 압박 등 외부 요인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재능충 운운하는 주체는 이를 통해 결정론적 무결함을 즐기기도 한다. 자신을 ‘재능 없는 피해자’ 위치에 고정하는 순간, 다시 말해 피해자 서사를 내면화하는 순간, 자기 책임성으로부터 벗어나는 듯한 뒤틀린 안도감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만 속에서 흘려보낸 젊음과 세월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반복되는 재능 타령은 결국 자신을 가두는 자기실현적 예언으로 굳어지기 쉽다. 이런 맥락에서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은 새겨들을 가치가 있다. “우리의 허영심과 자기애가 천재 예찬을 부추긴다. 왜냐하면 천재를 한낱 기적으로서 우리와는 아주 먼 존재라고 생각할 때만 천재가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2026-04-30 [18:16]
-
[배학수의 문화풍경] 비틀거릴 자유… 디지털 시대 칸트의 전언
4월은 '칸트의 달'이라 불러도 좋다. 1724년 4월 22일, 발트해 연안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난 임마누엘 칸트는 규칙적 일상에 갇힌, 다소 따분한 학자로 흔히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 정신의 판을 뒤흔든 급진적 혁명가였다.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계몽'이다. 계몽주의는 교회의 도그마에서 정신을 해방하고, 이성 위에 사회를 재건하려는 운동이었으며, 칸트는 이것을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미성숙 상태로부터의 탈출"이라 정의했다. 계몽은 지식의 양이나 질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겠다는 의지의 문제다. 미성숙의 사슬을 끊고 자립하라는 칸트의 준엄한 명령이 바로 "사페레 아우데!"(Sapere Aude, 알고자 결단하라)이다.
시대에 대한 칸트의 진단은 따끔한 심리학적 통찰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미성숙'한 상태에 머무는 이유는 지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알고자 결단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지 스스로 생각하려 하지 않고 보호자의 말을 따른다. 성인 역시 스스로 판단하는 책임 대신 타인에게 의존하는 편안함을 선택하곤 한다. '스스로 알고자 하는 결단의 부재'가 곧 칸트가 경계한 미성숙의 본질이다.
이 상태를 고착시키는 주범은 '게으름과 비겁함'이다. 1784년 칸트가 남긴 한 문장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돈만 지불할 수 있다면, 나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는 돈이 지적 노력을 면제받는 수단으로 전락했음을 꼬집었다. 우리는 지혜를 얻기 위해 책을 사고, 결혼·직업·투자와 같은 삶의 결정을 대신 내려줄 '후견인'에게 기꺼이 비용을 지불한다. 영적 번뇌는 목자에게, 신체 관리는 의사에게 떠넘기며, 홀로 서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할 '비틀거림의 공포'로부터 비겁하게 도망치는 것이다.
안전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칸트가 말하는 '가축'이 된다. 후견인들은 이 '순한 생명체들'이 '보행기' 없이는 단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도록 공포를 심어준다. 홀로 걷는 위험은 사실 허상이다. 몇 번 넘어져도 결국 걷는 법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한 번의 비틀거림에 겁을 집어먹은 우리는 다시 후견인의 품으로 도망치고 만다.
오늘날 칸트의 경고는 주머니 속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았다. 우리는 과거의 후견인을 두 가지 강력한 대체물로 바꾸어 놓았다. 첫 번째는 스마트폰에서 작동하는 구글이나 AI 기업의 '디지털 알고리즘'이다. 우리는 이들에게 구독료와 데이터를 지불하며, 무엇을 믿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리즘이 대신 결정해 주는 편리함을 누린다. 두 번째는 인플루언서와 온라인 컨설턴트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추종하며 스스로 연구하는 수고를 덜어버린다. 두 경우 모두, 안락함을 위해 사유의 주권을 양도하고 있는 셈이다.
주권을 넘겨받은 이들 새로운 후견인이 우리를 지배하는 수단은 칸트가 말한 '강령과 공식'이다. 1784년에는 이것이 교회의 교리였다면, 2026년 오늘날에는 인터넷의 완성형 답변들이다. 디지털 스트림은 우리에게 정신적인 족쇄가 되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퇴화시킨다. 결국 우리는 '디지털 보행기'를 잡고 걸으며, 독립적인 판단을 두려워하는 '겁쟁이 기계'로 전락하고 만다.
기계적인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칸트는 무정부주의적 반란이나 고립을 제안하지 않았다. 현대 사회에서 검색 엔진과 전문가의 조언 없이 살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신 칸트는 '이성의 공적 사용과 사적 사용'을 구분해 지적 태도에 차이를 둘 것을 요구했다.
칸트의 공·사 개념은 흔히 쓰는 개념과 정반대이다. '이성의 공적 사용'은 국가 기관이나 공공 부문에서 이성 사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지성인으로서' 세계 시민이나 독자 세계를 향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자유로운 소통의 장을 말한다. 반대로 '사적 사용'은 국가나 조직이 부여한 특정한 직무나 직책(공무원, 군인, 은행원 등) 내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기계처럼 작동하고, 정해진 규칙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모든 개인은 동시에 '지성인으로서의 자질', 즉 지성적 시민으로서의 역량을 지니고 있다. 이 '이성의 공적 무대'에서 우리는 지성인으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공동체의 질서와 구조에 대해 비판적 담론에 참여해야 할 신성한 의무가 있다.
우리 시대의 '보행기 끈'은 디지털 인터페이스 속에 촘촘히 엮여 있다. 그러나 칸트 탄생의 달인 4월은 인간의 존엄성이 자율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상기시킨다. 지금이야말로, 오래된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사페레 아우데!" 보행기 없이 걸을 수 있는 용기를 가져라.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2026-04-23 [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