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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호의 오픈 스페이스] 부산을 담아가게 하라!
대전발 0시 50분. 경부선과 호남선이 갈라지던 시절, 플랫폼에서 급하게 삼키던 가락국수 한 그릇의 추억은 온 국민의 향수를 자극하는 대전의 서사였다. 세월이 흘러 지금 대전에는 새로운 풍경이 자리를 잡았다. 성심당이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라. 성심당에 순수하게 빵만 사러 가는 사람은 없다. 전주 한옥마을에 초코파이를 사러 가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럼에도 성심당 앞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이 서 있고, 사람들은 양손 가득 빵 봉투를 들고나온다. 이유는 단 하나다. 언제 또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도쿄에 가면 평소 먹지도 않을 과자를 대형 할인점 ‘돈키호테’에서 쓸어 담는 심리, 이것이 바로 ‘셋업 코스트’(Setup Cost)다. 여행을 위해 이미 지불한 시간과 비용에 대한 최대한의 가치를 뽑아내겠다는 본능적 심리다. 결국 성심당의 빵은 대전이라는 도시의 경험을 소유하려는 가장 확실한 기념품이다. 대전은 빵 하나로 도시를 팔았다.
BTS 공연 때 외국인 관광객 20만 명 방문
도시 곳곳에 깃든 콘텐츠 엮어내지 못해
지역의 삶과 골목의 냄새 브랜딩 시도를
지난 12~13일 부산은 거대한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BTS 공연을 보기 위해 11만 명의 팬을 포함해 20만 명이 넘는 외국인이 부산을 찾았다. 제이홉이 무대 위에서 “오직 부산을 위해서!”를 외쳤을 때 5만 5000명의 관중석이 눈물바다가 됐다. 그런데 20만 명의 세계인은 부산에서 무엇을 가슴에 담아갔는가. 이것이 진짜 물음이다.
숫자만 보면 고무적이다. BC카드 분석에 따르면 공연 주간 외국인 결제액은 전년 동기 대비 73.3% 증가했고, 전통시장 결제액은 두 배 가까이 늘었다. 그러나 뒤에 가려진 다른 숫자를 보아야 한다. 공연 주간 숙박업 결제액은 전주 대비 227.8% 폭증했다. 탐욕스러운 숙박업소들이 평소의 수 배에서 많게는 10배에 달하는 요금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방을 구하지 못한 팬들은 인근 도시로 쫓겨나거나 서울에서 당일치기를 감행했다. 20만 명이 찾아왔지만 상당수는 부산을 통과했을 뿐, 소비하지 못했다. 도시의 탐욕이 셋업 코스트를 스스로 파괴해 버린 꼴이다. 만약 성심당이 유명세를 치렀다고 빵값을 10배로 올렸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 줄은 단 하룻밤 만에 사라졌을 것이다. 부산은 자명한 교훈을 너무나도 비싸게 배웠다.
셋업 코스트가 작동하려면 조건이 필요하다. 가져갈 콘텐츠가 명확해야 하고, 쉽게 가져갈 수 있어야 한다. 부산에는 밀면이 있다. 돼지국밥이 있다. 씨앗호떡이 있다. 광안리 바다와 감천문화마을의 골목이 있다. 서울에서도, 도쿄에서도 살 수 없는 오직 부산만의 것들이다. 문제는 20만 명이 몰려왔을 때 도시가 이것을 제대로 팔 줄 몰랐다는 점이다. 숙박이 없으면 저녁이 없고, 저녁이 없으면 야시장이 없으며, 새벽의 뜨끈한 돼지국밥도 없다. 당일치기 관광객에게 부산의 밤은 존재하지 않았다.
BTS 팬들에게 지민과 정국의 고향인 부산은 그 자체로 성지(聖地)다. 그들이 자란 동네, 다니던 학교, 걷던 길과 먹던 음식이 모두 세계적인 콘텐츠다. 멤버들이 어린 시절 찾던 떡볶이 골목 앞에 영어 안내판 하나만 제대로 세웠어도 전 세계 팬들의 셋업 코스트는 폭발적으로 작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산은 완벽한 성지순례 코스 하나 제대로 엮어내지 못했다. 있는 것을 팔 줄 몰랐다.
부산을 찾게 만드는 진짜 셋업 코스트는 무엇인가. 그것은 밀라노에서 수십억 원을 주고 라 스칼라의 ‘오텔로’를 수입해 오는 것이 아니다. 파리에서 1100억 원을 주고 퐁피두 분관 간판을 빌려오는 것도 아니다. 자갈치 새벽시장의 비릿한 사람 냄새이고, 감천마을 골목을 오르는 가파른 계단이고, 도시 구석구석에 깃든 삶의 궤적이다. 부산은 이미 그 자체로 세계적이다. 외국인 팬이 무인 카페에서 밤을 지새우며 부산의 새벽 부두를 보았다면, 그 새벽의 공기와 풍경을 브랜드로 담아갈 수 있게 해야 했다. 그것이 행정이 할 일이었다.
105억 원으로 라 스칼라를 사 오고, 1100억 원으로 퐁피두 간판을 임차하는 전시 행정에만 혈안이 돼 있었다. 정작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이틀 동안 20만 명이 오는 황금 같은 기회를 주었을 때, 부산 시정이 그들에게 돌려준 것은 바가지 요금과 암표, 차가운 노숙과 당일치기 기차표뿐이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부산에 성심당이 없어서가 아니다. 성심당이 되고도 남을 골목과 콘텐츠가 넘쳐나는데, 행정은 그것을 가꾸고 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겉멋 든 외제 간판을 빌려오는 데 눈이 멀어 진짜 시장(市場)의 논리를 몰랐던 것이다.
이제 부산은 화려한 껍데기 빌리기를 멈추고 자신의 골목을 돌아보아야 한다. 간판을 임차하는 행정이 아니라, 골목의 냄새를 브랜딩하는 진짜 정치가 필요한 때다. 세계가 열광하는 부산의 힘은 거창한 미술관 분관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있었던 부산의 삶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2026-06-18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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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성의 개념 쌓기] 텅 빈 쇼룸의 공포, 시스템이 멈춘 현실
최근 영화 ‘백룸’이 저예산 영화의 기적이라고 불리며 흥행 몰이 중이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우연히 미지의 공간을 발견하고, 그곳을 탐사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공포스러운 사건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서사의 문법을 따른다. 흥미로운 것은 그 서사의 소재이자 무대, 즉 백룸 그 자체다. 영어권에서 백룸(Backroom)은 통상 일반인은 못 들어가는 매장 내 뒷공간을 일컫는다. 고객 입장에서 이 백룸은 분명 자신의 눈에 보이는 공간과 이어져 있는 곳이고, 더 나아가 자신을 다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토대이기까지 하다. 다시 말해 백룸은 가시적 공간을 떠받치는 비가시적 공간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 백룸을 공포의 공간으로 변모시킨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탈바꿈시킬까? 먼저 주목할 점은 영화의 무대가 직원용 통로나 창고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무대는 대형 가구점에서 고객들이 이용하는 가시적 공간인 쇼룸이다. 침대와 소파, 조명 등을 배치해 실제 생활공간처럼 꾸며 놓은 바로 그 쇼룸 말이다. 그런데 영화는 이 쇼룸을 텅 비워버림으로써 백룸으로 전환한다. 몇몇 가구와 노란 단색 벽지, 윙윙거리는 형광등 등 익숙한 공간의 흔적은 남아 있지만, 완성된 인테리어는 철저히 사라져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쇼룸의 백룸화인가? 사실 우리는 일상에서 이와 비슷한 장면을 종종 마주한다. 이를테면 가구점에서 상품 진열을 바꾸기 위해 쇼룸을 모두 비워버리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때는 당연히 리뉴얼을 위해 가구점 문을 닫기 때문에 쇼룸이었던 곳 전체가 오로지 직원들만이 움직이는 백룸이 된다. 이삿짐이 들어가기 전의 아파트 역시 마찬가지다. 입주 전까지는 청소업체 직원이나 옵션 점검을 나온 관계자들만 출입하는 일종의 백룸 상태에 놓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결국 영화의 무대는 오픈을 준비하는 백룸화된 쇼룸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공간 대부분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이다. 설령 뭔가 있더라도, 뒤틀린 모습으로 존재할 뿐이다. 더 큰 문제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직원도, 고객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공간을 채워야 할 사람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낯선 공허함이 생겨나고, 바로 그 공허함이 공포의 근원이 된다.
여기서 느껴지는 공포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극단적인 무력감이다. 앞서 살펴봤듯 백룸의 주체는 고객이 아니라 직원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속 백룸은 노동자의 부재를 드러내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곧 비가시적 백룸이 떠받치고 있던 가시적 공간, 다시 말해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세계가 위태로워졌음을 의미한다. 식료품부터 의류, 안전, 의료, 심지어 커뮤니티까지 모든 것을 ‘구매’ 버튼 하나로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현실이 통째로 소거된다면? 백룸에 빠진 주인공, 좀 더 정확히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바로 상품화된 현실이 삭제된 세계이다. 가구점의 쇼룸이나 아파트 모델하우스가 사실상 현대인의 안방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오늘날 직접 집을 짓거나 가구를 만드는 사람은 극소수이며, 주거 역시 하나의 상품이 된 지 오래다. 화폐를 지불해 필요한 것을 얻는 방식을 제외하면 현대인은 자신의 의식주를 스스로 마련하고 유지하는 능력을 거의 갖추지 못했다. 결국 가장 사적인 공간인 안방에서조차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무력한 존재인 셈이다.
이제는 새삼스러운 이야기도 아니지만, 현대인은 소비를 통해 구성된 상품의 우주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집은 곧 쇼륨이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쇼룸은 언제든 백룸이 될 수 있는 공간이다. 상품은 생산과 유통을 담당하는 익명의 노동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상품들로 조립된 현실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상품의 부재는 현실의 부재며, 현실의 부재는 삶의 부재, 곧 죽음을 의미한다. 이보다 더 근원적인 공포가 있을까. 이런 맥락에서 영화 백룸의 소재가 된 ‘도시괴담’이 등장한 것은 2019년이지만, 이를 소재로 한 영상 시리즈가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시점이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2년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당시 전 세계는 대규모 셧다운과 사회적 고립을 경험했고, 그 과정에서 평소 당연하게 여겼던 공급망과 서비스, 그리고 일상의 시스템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놓여 있는지를 목격했다. 만일 익명의 노동에 의해 지탱해 온 세계가 갑자기 종결된다면 어떨까? 가도 가도 텅 빈 세계에 내던져지게 될 것이며, 여기서 굶어 죽게 될 것이란 불안감이 엄습한다.
결국 영화 백룸이 가시화한 공포의 본질은 미지의 괴물이 아니다. 그것은 소비라는 행위를 제외하면 생존에 필요한 그 어떤 것도 스스로 생산할 수 없게 된 현대인의 철저한 무능과 고립이다. 백룸 특유의 서늘함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유리성 같은 취약함에 대한 반작용인 것이다. 백룸의 흥행이 현대인이 당연하게 여겨온 현실의 기반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길 희망해 본다.
2026-06-1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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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학수의 문화풍경] 도그마의 몰락
얼마 전 서울에서 열린 구글 포 코리아 포럼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인공지능 신기원의 한 장을 축하했다. 2016년 3월 알파고가 바둑의 거장 이세돌을 꺾은 지 어느덧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대중은 이를 인간과 기계의 극적 대결로 기억하지만, 이 사건이 촉발한 변화는 훨씬 더 깊다. 그것은 수천 년간 이어져 온 도그마에 대한 공개 처형이었다.
바둑의 고수들은 대를 이어 정수와 정석이라는 전술의 표준을 정교하게 다듬어 왔다. 명문 도장들의 두터운 권위와 프로 9단들의 절대적인 영향력은 이러한 표준들을 철저히 수호했다. 그리하여 인간은 이 수백 년 묵은 제도적 합의를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로 착각하기에 이르렀다.
10년 전 알파고 승리의 함의는
권위 향한 자발적 순종에 경종
독립적 사유 권리 널리 확산되길
그러던 제2국, 이른바 ‘정수’의 세계를 뒤흔든 ‘37번째 수’가 등장했다. 알파고는 5선에 돌을 툭 떨어뜨렸다. 바둑책이 하수의 떡수라고 치부하던 모호하고 낯선 자리였다. 해설자들은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는 프로그램 오류를 의심했다. 그러나 수십 수의 돌이 깔린 후, 그 외롭던 돌은 판 전체로 영향력을 뻗쳐나가며 이세돌의 전략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알파고의 창의적 일탈은 우리가 그토록 칭송하던 ‘정수’가 사실은 심리적 타성이며, 관습에 안주하려는 두려움의 산물이었음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이러한 자발적 순종은 일시적 실수가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 성향에 깊이 뿌리박힌 구조적 질환이다. 우리는 왜 이토록 전통적 권위 앞에 수동적이며 무비판적인가? 우선, 권위를 따르는 것은 안전하다. 기성 도그마를 그대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집단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는 안전을 보장받는다. 나아가, 순종은 책임이라는 무게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훌륭한 정서적 방패가 된다. 매뉴얼대로 하다가 실패하면 “지시대로 했을 뿐”이라는 확실한 핑계가 생기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관습 거역의 공포에서 벗어나 지성을 온전히 발휘할 용기가 있었다면, 알파고가 보여준 혁신적인 수들은 진즉 인간의 머리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의 위험 대신 군중의 안전을 선택해 왔다.
이러한 무비판적 수용의 문화는 철학의 고전, 특히 『노자』를 해석하는 방식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우리는 역대 권위자들이 내놓은 모순되고 혼란스러운 주석을 ‘정답의 바이블’로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왔다. 예컨대 소위 전문가들은 노자가 ‘무위(無爲)’의 원리를 인간에게 권장했다며, 이를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 혹은 ‘인위적으로 행하지 않는 것’이라는 모호한 말로 포장해 왔다. 그러나 이 정의는 지나치게 막연하다. 숙제를 하기 싫은 초등학생이 당장 마음에 이끌리는 대로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이 노자가 말한 ‘자연스러운’ 행동인가?
실마리는 가장 오래된 판본인 ‘곽점 초간본’이 발굴되면서 풀렸다. 무위는 개인의 처세술이나 신하의 행동 지침이 아니라, 오직 왕을 위해 고안된 국가 통치술이다. 세금을 걷고, 성곽을 쌓고, 전쟁을 치르는 실무는 관리와 장수들의 몫이다. 반면 왕은 통치에 직접적 개입을 삼가는 ‘무위’를 실천해야 한다. 대신 왕은 신하들을 감시하고 평가하는, 인사와 상벌의 권력만을 쥐고 군림한다. 만약 백성이 무위하면 가정은 굶주릴 것이고, 신하가 무위하면 국가는 파탄 난다. 이것은 우리가 비판적인 독해력만 발휘했다면 진작에 도달했을 지극히 상식적인 결론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당연한 이치를 뒤로한 채, 이른바 노자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모호한 신비주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했다.
우리는 이 관습적 굴종의 고리를 어떻게 끊어내고, 독립적 사유에 필요한 심리적 용기를 길러낼 수 있을까? 그 해법은 단순히 “비판적으로 생각하자”는 식의 유약한 다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교육 시스템 자체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쳐, 안전한 순종 대신 지적 일탈과 반란을 권장해야 한다. 초등학교에 ‘어린이를 위한 철학’(P4C)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것은 이러한 지적 전환을 위한 강력한 청사진이 될 수 있다. 교실을 탐구 공동체로 전환하여,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전제를 의심하고, 근거를 평가하며, 권위에 건설적으로 도전하는 법을 배운다면, 무비판적인 복종의 문화를 근본적으로 걷어낼 수 있다.
2016년의 대국이 남긴 진정한 가치는 우리가 얼마나 안락하게 눈을 감고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폭로한 데 있다. 우리가 이 편안한 무지의 선잠에서 깨어나 나와 세상을 똑바로 마주하기로 결심했다면, 그 깨어남이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이제는 수천 년 묵은 도그마나 자칭 전문가들이 세워둔 제단에 절하는 짓을 멈춰야 한다. 우리의 과제는 알파고가 시각적으로 증명해 보인 그 거침없고 자유로운 지적 용기를 체득하여, 마땅히 우리 것이었어야 할 독립된 사유의 권리를 마침내 되찾아오는 일이다.
2026-06-0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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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윤의 비욘드 야크] 우리는 어떠한 도시를 꿈꾸는가
흔히 도시를 건물과 도로, 산업과 인구가 밀집한 물리적 공간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사실 도시는 한 사회가 어떤 삶을 꿈꾸는지를 드러내는 집단적 상상력의 결과물에 가깝다. 도시에는 시대의 욕망이 압축되어 인간이 무엇을 두려워하며 무엇을 갈망하는지가 공간의 형태로 새겨져 있다.
고대의 성벽 도시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생존의 구조였다면, 근대의 산업도시는 생산과 속도를 중심으로 설계되었다. 오늘날의 글로벌 도시는 자본과 정보, 이동과 소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재편된다. 도시의 형태는 결국 인간 존재 방식의 변화를 반영한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거주하는 존재’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거주란 단순히 집을 소유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고 시간을 축적하며 삶의 의미를 형성해 나가는 방식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도시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도시의 구조가 시민들의 삶의 태도와 감각, 관계의 방식까지 결정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늘날 많은 도시들이 더 이상 ‘거주의 공간’이 아니라 ‘경쟁의 공간’으로 바뀌면서 몰개성하게 서로 닮아간다는 점이다. 도시들은 앞다투어 더 높은 빌딩을 세우고 더 화려한 야경을 만들지만, 정작 그 안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의 삶은 점점 더 피로해진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도시를 단순한 행정구역이 아니라 ‘삶이 생산되는 공간’으로 보았다. 경제 논리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 경험의 총체라는 의미다. 그는 시민들에게 ‘도시에 대한 권리’를 주창했다. 이는 단순히 도시를 이용할 권리를 넘어 도시의 방향과 의미를 함께 결정할 권리다. 도시를 누가 만들고 누구를 위해 운영할 것인가의 문제는 결국 민주주의의 본질과 직결된다.
인간 경험의 총체로서 도시를 고민할 때 부산은 이러한 도시의 본질적 질문과 생존 전략이 가장 첨예하게 교차하는 도시다. 부산은 한국전쟁 시기 피란수도였고, 산업화 시대에는 항만과 조선, 수출의 전진기지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지탱해 왔다. 그러나 산업구조의 변화 이후 청년 유출과 고령화, 지역경제 침체라는 구조적 위기를 겪으며 ‘지역 소멸’이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 서 있다. 그렇기에 이번 부산시장 선거에서 등장한 도시 공약들은 부산이라는 도시가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점은 박형준 후보와 전재수 후보의 공약이 겉으로는 다른 길을 말하는 듯하면서도 도시의 생존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한 접점을 가진다는 것이다. 양측 모두 AI와 데이터 산업을 부산의 미래 먹거리로 제시한다. 청년 일자리와 산업 생태계 복원을 핵심 과제로 내세우는 점도 같다. 그러나 도시의 미래를 설계하는 철학에서는 명확한 시각 차이가 드러난다.
전재수 후보의 비전은 부산의 장소성과 역사성에 무게를 둔다. 부산항과 해양 산업, 해사법원 설립, 부울경 연합 같은 구상은 부산을 ‘바다를 중심으로 한 문명권’으로 재정의하려는 시도다. 여기에 해양 AI 데이터센터와 자율운항 선박, 해상풍력 같은 미래 산업을 접목해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이는 도시가 오랜 시간 축적해 온 기억과 자산 위에서 미래를 만들어가려는 ‘축적의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박형준 후보는 글로벌허브도시 특별법, 가덕도신공항, 산업은행 이전, AI 및 데이터 기술 생태계 구축 등을 통해 부산을 세계 도시 네트워크 속에서 경쟁 가능한 플랫폼으로 바꾸려 한다. 그의 비전은 부산을 글로벌 자본과 인재, 기술의 흐름 속으로 과감하게 재배치하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는 도시의 체질 자체를 바꾸어 새로운 성장 구조를 만들려는 ‘전환의 전략’에 가깝다.
건축과 도시계획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두 가지 시선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도시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가능성이 어떻게 공존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 도시들이 추구하는 ‘스마트시티’의 본질 역시 기술이라는 효율적 수단을 통해 시민의 인간적인 삶과 공동체를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선거가 며칠 남지 않았다. 그러나 선거의 진정한 가치는 승패가 갈리는 그날 밤이 아니라, 그 이후에 시작된다. 선거 과정에서는 서로 다른 비전이 충돌할 수밖에 없지만, 선거 이후의 정치는 결국 그 비전들을 하나의 도시 미래로 통합해 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부산이라는 도시가 앞으로 어떤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어떤 시간을 다음 세대에 남길 것인가 하는 것이다. 도시란 인간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내는 가장 거대한 삶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2026-05-28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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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화의 크로노토프] 오페라하우스와 지역순환경제
국적 선사 HMM 본사의 부산 이전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국내 최대 컨테이너 선사의 주소지가 바뀌는 것은 단순한 기업 이전을 넘어 ‘해양수도 부산’이라는 퍼즐 조각을 맞추는 상징적 사건이다. 항만과 물류, 금융과 인재가 한 도시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분권은 구호가 아닌 구조가 된다. 다만 경제와 산업의 물길이 바뀌는 역사적 길목에서, 정작 도시의 영혼을 채워야 할 문화예술 분권이 얼마나 낯설고 허술한지 뼈아프게 목격하고 있다.
산업의 분권만큼 문화적 자생력도 중요하다. 해프닝처럼 지나간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지방 이전 논의 또한 분권의 본질을 비껴가기는 마찬가지다. 애초에 한예종은 학위 수여가 목적이 아닌 실기 중심의 전문 예술인 양성을 위해 설립된 독자적 교육기관이었다. 수능과 학점이라는 기존 틀을 깨고 현장형 인재를 키우던 학교가, 이제 와서 박사학위 과정 신설과 건물 이전에 목매는 것은 스스로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이다. 예술가에게 필요한 것은 박사 가운이 아니라 마음껏 기량을 펼칠 무대와 정당한 노동의 대가다. 학교를 옮길 궁리보다 졸업생들의 일자리를 먼저 고민하고 해결해야 한다.
부산오페라하우스 개관 공연을 둘러싼 예산 논란은 우리 안의 뿌리 깊은 ‘문화 사대주의’를 여실히 드러낸다. 운영 주체는 라 스칼라 초청에 총사업비 105억 원을 투입하는 명분으로 “글로벌 스탠더드를 경험하고 극장 운영 노하우를 전수받는 과정”이라고 미디어를 통해 강조했다. 하지만 100억 원이 넘는 예산을 단 며칠의 박수와 함께 해외로 송금하는 구조는 문화 투자가 아니라 명백한 ‘문화 식민주의’의 산물이다. 이미 세계 주요 극장의 무대와 백스테이지에서 한국인 공연예술 종사자들이 충분히 실력을 증명해 왔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한국 예술현장이 지닌 힘이다. 이처럼 엄연한 증거를 두고도, 우리 인력을 ‘모자란 존재’로 규정하며 서구의 권위를 빌려와야만 개관의 위신이 선다는 발상이 부끄럽지 않은가. 우리가 모자란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성장시킬 예산과 구조가 빈약한 것이 본질이다.
고 황한식 교수를 필두로 한 지방분권화 운동은 지역이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겠다는 ‘존엄의 투쟁’이었다. 긴 세월 동안 우리는 분권을 외쳤지만, 문화예술을 지역 경제의 혈맥인 ‘지역순환경제’ 관점에서 사유하는 데는 실패했다. 부산문화회관의 1년 치 운영비를 넘는 금액, 연간 지역 오페라 지원 예산의 약 50배에 달하는 혈세를 단 며칠의 갈채와 맞바꾸는 행위는 지역경제 순환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오페라하우스는 랜드마크를 넘어 관련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구조여야 한다. 지역의 문화산업은 지역 내에서 기획되고 인력이 투입되며, 그 경험과 수익이 다시 지역에서 다음 창작으로 이어져야 한다.
극장은 본래 모든 예술이 만나는 ‘종합예술의 산실’이다. 불세출의 기획자 디아길레프는 20세기 초 파리를 뒤흔든 ‘발레 뤼스’를 통해 스트라빈스키와 드뷔시의 음악, 피카소와 마티스의 미술, 니진스키의 춤, 샤넬의 의상 등을 결합해 세계 문화사를 새로 썼다. 완성된 공연을 사 오는 ‘하청’에 머물지 않고, 예술가들이 치열하게 협업하며 스스로 새로운 ‘명성’을 창조해 냈다. 수십 년 전문성을 닦은 지역 예술가들이 갈 곳이 없어 고향을 등지는 현실에서 부산오페라하우스는 일방적인 패키지형 수입처가 되기를 자처해서는 안 될 일이다. 지역 인재들이 ‘직업인’으로서 정착해 부산만의 작품을 직조해 내고, 이를 시민들이 고르게 누리는 진정한 향유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부산은 클래식 전용극장이 차례로 들어서며 도시의 예술 지형이 바뀌고 있다. 하지만 건물만으로는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그 공간을 채울 사람들의 시간과 노동에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지역 예술인을 무대 밖 들러리로 세우지 말고 세계적 수준과 대등하게 부딪히며 실질적인 내공을 쌓는 경로를 설계해야 한다. 사대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나, 그 이름이 지나간 자리에 부산의 역량이 남고 다양한 계층의 예술가들이 이 도시를 일터로 삼을 수 있는 촘촘한 구조를 짜야 한다.
선거를 앞두고 있다. 다들 더 큰 건물과 유명한 행사 유치만 외친다. 공연예술을 도시의 순환경제로 이해하는 관점의 공약은 잘 보이지 않는다. 분권은 단순한 권리 이양만이 아니다. 분권을 통해 지방에 가치가 쌓여야 한다. 며칠간의 사치보다 다음 세대 예술가들이 이 도시에서 연습하고, 일하며, 창작하고, 관객을 만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삶의 구조를 설계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진정한 해양수도라면 문화를 ‘소비하는 도시’가 아니라 ‘창조하는 도시’라야 한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부산시 문화정책이 순간의 허영을 걷어내고 도시의 미래를 채울 축적의 길을 밝히는 지혜의 등불이 되기를 서원한다.
2026-05-21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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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의 생각의 빛] 폭풍의 계절에 읽는 한 권의 세계
이사한 동네에 오래된 미장원이 있다. 들어보니 40년가량 영업을 해오셨다. 한창 젊었을 적 개업한 모양으로 일흔을 넘긴 듯한 주인에게 미장원 상호와 똑같은 이름의 목욕탕이 마주하고 있어서 그 ‘선후관계’가 어찌 되냐 물으니, 목욕탕이 먼저라 한다. 미장원 맞은편에 2층 주택을 리모델링한 듯 1층에는 맥줏집이, 목욕탕은 2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직 한 번도 이용하지 않았지만 그 목욕탕은 시내에 있는 큰 규모의 대형 목욕 및 사우나 시설과는 비교할 수도 없게 조그맣다. 앙증맞은 크기의 목욕탕과 미장원을 사이에 둔 골목을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재잘거리면서 지나간다. 문구점, 안경점, 미장원, 분식점, 편의점 등의 가게들이 오밀조밀 밀집해 있는 골목을 지나면 더러 30여 년 전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봄도 한복판이 거의 지나 이제 여름 초입에 들어선 이때, 최근 1~2년 사이에 우리가 경험한 세계를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하루도 쉴 새 없이 숨 가쁘게 들썩였던 나날이었다. 잊을 만하면 터지곤 하는 대형 사고를 비롯하여 진영 간 끝없는 모략과 비난으로 잠잠할 날이 없는 정치권, 기득권 세력의 만연한 탈세 및 불법행위와 계층·지역·신분·성별·세대에 따른 배타주의가 여전한 요즘이다. 게다가 선거가 다음 달 초에 예정되어 있어서인지 오전부터 교차로나 인파가 붐비는 공간에서 선거에 입후보한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공약과 정책을 호소하는 풍경까지 더해 시내 곳곳은 어수선함과 괜한 흥분으로 가득 차 있다. 부쩍 늘어난 외국인 관광객들로 붐비는 국제시장을 비롯하여 자갈치시장이나 부평깡통시장 등의 되살아난 활기도 한몫해서인지, 눈뜨고 집을 나서면서부터 밤에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의 ‘세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방불케 한다.
이렇게 왁자지껄한 도심에서 사람들과 얽혀 살아가는 일은 여러 체험을 할 수 있어서 삶의 공부가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백척간두에 놓인 듯 언제 진창 같은 세계의 바닥으로 추락하거나 휩쓸릴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게 사실이다. 먼 나라에서 진행 중인 여러 전쟁 소식과 이에 영향을 받아 기름값이 치솟는 현실에 정부의 대책과 위정자들의 낙관적인 호소에도 마냥 안심할 수 없는 듯한 시민들의 표정이 봄바람에 떨어지는 시든 꽃잎처럼 그을려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내 주식 시세가 올라야 한다, 몇 번을 찍어야 한다, 그 집 돼지국밥이 제일 맛있더라, 어느 병원에 가면 싸게 진료받을 수 있다, 그 사람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다,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등등.
한없이 가볍고, 재빠르고, 요령을 부리면서 잇속을 챙기고, 티 나지 않게 생활하면서 은근히 자금을 불리고, 집값과 주식에 몰두하면서 교양을 두르려 하고, 온 데 간 데 모르는 마음이면서 확신과 맹신을 일삼고, 모자란 게 없는데도 욕심을 내면서 타인을 질시하고 스스로를 높인다. 편리해진 기술의 사용에 여가 시간을 송두리째 빼앗기면서 마음의 평화와 고요를 견디지 못하는 우리 자화상을 떠올린다. 그러다 보면 하루가 다르게 지나가 버린 시간이 옛날이야기처럼 여겨질 때가 잦다. 언제 우리가 그런 시간을 거쳤는지 까마득하게 멀어진 세계를 뒤로한 채 아직 오지 않은 시간 속의 불안과 기대에 온 정신을 내맡기기 일쑤다. 이런 모든 게 변화와 격동의 세월을 보내면서 익숙해지고 단련된 현대인의 마음 풍속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태는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몸에 각인된 면역체계처럼 환경과 시대조류에 관계없이 그 맷집을 유지할 것이다.
일과가 끝나 어스름이 질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생각한다. 나와 한 버스를 탄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방향과 목적으로 혼란스러운 이 세계 모퉁이에서 무늬를 그리고 있는지 말이다. 뜬구름 같은 말인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한없이 가볍고 힘겨운 마음으로 걸어가는 이 길 위에서도 아름다움은 곳곳에 스며 있다.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대체로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하면서 평온함을 지속적으로 불어 넣는 것은 바다와 산과 강과 도시와 길과 골목과 사람이 예전부터 뒤척거리고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잃어버리지 않고 지키려 했던 ‘항상심(恒常心)’이라는 이름의 선물 때문이지 않을까. 변하는 속에서도 꾸준히 간직하면서 지키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의지는, 요즘처럼 급변하는 세태 속에서 든든하면서도 은은한 등불처럼 늘 꿈과 용기를 안긴다. 오랜 항구를 낀 바다와 발전소를 지나, 마치 시간이 멈춰 선 듯한 우리 동네에 내리면서 올라가는 골목을 들여다보면 책을 읽듯 담벼락이나 길바닥에 흘러 지나갔던 시간의 글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혼란스럽고 시끌벅적한 이 시대에도 언제든 돌아가서 뒤적거리면서 배워야 할 진실이 있는 손때묻은 책처럼, 새로운 ‘한 권의 세계’는 사실 바로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계절이다.
2026-05-14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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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호의 오픈 스페이스] '세계적'이라는 주문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중략)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피천득의 시 ‘오월’이다. 계절의 여왕 오월에는 어김없이 가족이 가운데 자리한다. 가정의 달의 거창한 형식보다 “사랑합니다” 한마디가 더 묵직한 계절.그러나 오월, 부산에서는 그 온기를 비집고 불편한 진실이 고개를 든다.
부산시청 집무실 어딘가에는 아마도 이런 지도가 걸려 있을 것이다. 오페라하우스, 퐁피두 분관, 라 스칼라 공연. 점점이 찍힌 세계 지도 위에서 부산은 이미 뉴욕과 밀라노와 파리 사이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박형준 시장에게 문화는 브랜드다. ‘세계적’이라는 형용사는 그의 통치 언어에서 가장 자주 소환되는 주문(呪文)이고, 그 주문이 통할 때마다 시민 혈세는 대서양 너머로 흘러간다. 지금 부산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문화 행정의 성취가 아니다. 문화 이해의 빈곤을 드러내는 연속극이다.
부산오페라하우스 개관 공연으로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오페라 ‘오텔로’를 세 차례 올리기 위한 업무협약 동의안을 부산시의회가 심의 중이다. 1778년 개관해 24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라 스칼라. 그 이름만으로도 개관 첫날의 포스터는 완성된다. 부산시장 입장에서 이보다 완벽한 홍보 그림도 없을 것이다.
화려한 그림의 이면을 보라. 이 공연 하나를 위해 라 스칼라 측에 지불해야 할 금액은 105억 원으로 추산된다. 반면 올해 부산소극장오페라축제와 창작오페라 지원사업에 대한 시비 지원은 2억 2000만 원에 불과하다. 세계 정상급 오페라단 초청에는 100억 원을 쾌척하면서, 그 무대의 씨앗이 될 지역 예술 생태계에는 2억 원을 쥐여준다. 이것이 이 행정의 민낯이다.
오텔로는 공연되고, 객석은 환호하고, 국제 언론은 짧게 보도할 것이다. 그리고 밀라노의 예술단은 유유히 돌아가고, 부산에는 105억 원의 공백과 여전히 무대를 갖지 못한 지역 오페라 가수들만 남는다. 이것은 개관이 아니다. 전시(展示)다.
오페라하우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퐁피두센터 부산 분관 유치는 민선 8기 핵심 공약이다. 부산시는 총 1099억 원을 투입해 남구 이기대 예술공원 일대에 미술관을 건립할 예정이다. 숫자가 말해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연간 예상 수입은 약 50억 원, 총지출은 약 125억 원이다. 매년 75억 원의 적자를 시민 세금으로 고스란히 메워야 한다. 그것도 사업비와 일반 운영비의 ‘전시’ 항목에 브랜드 사용료만 연간 65억 원이 들어갈 것으로 확인됐다. 요컨대, 부산 시민은 매년 65억 원을 내고 ‘퐁피두’라는 프랑스 미술관의 이름을 임차하는 셈이다. 도시의 문화적 자존심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외국 브랜드의 하청 문화 기지가 되겠다는 선언 아닌가! 절차적 문제도 심각하다. 시민단체는 지방재정법상 투자 심사와 타당성 조사 의무를 어겼다며 감사원에 공익 감사를 청구했다. 업무협약(MOU)은 비공개다. 시민의 돈으로 시민이 알 수 없는 계약을 밀실에서 맺는다. 이것이 민주적 문화 행정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독선의 문법, ‘세계적’이라는 면죄부! 작금의 문화 행정에는 일관된 문법이 있다. 세계 최고 브랜드를 유치하면 나머지 논란은 자동으로 봉합된다는 논리다. 라 스칼라가 오면 오페라하우스의 정당성이 증명되고, 퐁피두가 들어서면 부산은 문화도시가 된다는 식이다. 이 논리 안에서 지역 예술인의 소외, 시민 의견 수렴 부재, 천문학적 적자는 모두 ‘보완할 과제’로 가볍게 축소된다.
문화는 수입(輸入)되지 않는다. 비스마르크가 군함을 사들였다고 독일 해군의 전통이 하루아침에 탄생하지 않은 것처럼, 라 스칼라가 북항을 한 번 다녀간다고 부산에 오페라 문화가 뿌리내리지 않는다. 진짜 문화도시는 외부에서 브랜드를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예술가를 성장시키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부산시립미술관과 부산현대미술관에 전략적으로 투자해 동북아시아 특화 미술관을 만드는 길이 있다. 그 길은 선택받지 못했다. 화려한 외국 간판이 그 길을 가렸다.
독선은 나쁜 의도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때로는 스스로 옳다는 확신에서 가장 두꺼운 독선이 자란다. 라 스칼라와 퐁피두를 동시에 향해 달려가는 부산시장의 모습은 웅장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달음박질 속에서 정작 부산의 문화 토양은 짓밟히고 있지 않은지, 이 물음을 시민이 제기할 때가 되었다. 그 시점이 지금이다. 세계적인 것을 꿈꾸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간판을 사들이는 것과 세계적인 문화를 일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임을 모르는가! 하나는 돈의 문제고, 하나는 철학의 문제다. 그 차이를 모른다면, 혹은 알면서도 무시한다면 그것이 바로 독선이다.
2026-05-0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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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성의 개념 쌓기] '재능충'이란 자기합리화에 대한 경계
청년들의 세계에서 ‘재능충’이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 있다. 이는 타고난 재능을 지닌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전통적인 예체능 분야를 넘어 공부, 상업, 연애, 게임, 심지어 노력 자체까지도 재능의 영역으로 보는 인식과 맞닿아 있다. 타고난 뇌 구조나 도파민 체계를 근거로 ‘노력할 수 있는 능력 역시 재능’이라는 설명이 덧붙는 것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이다. 이와 함께 재능충은 ‘노력충’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쓰이기도 한다. 노력충은 노력했음에도 성과를 내지 못한 사람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그 어감 자체에 조롱의 뉘앙스가 있다. 반면 재능충은 적은 노력으로도 뛰어난 성과를 내는 사람을 향한 부러움과 선망이 담긴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재능충은 비하적 의미가 상대적으로 옅기 때문에 SNS를 넘어 공중파 방송에서도 거리낌없이 사용되는 단어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고 재능충이라는 말에 비웃음의 뉘앙스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재능충의 성취를 노력의 결과가 아닌 타고난 재능의 산물로만 치부하는 태도를 들 수 있다. 쉽게 말해 그들이 이룬 성과를 ‘운 좋게 타고난 재능 덕분’으로 환원해 버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선 속에서 재능충은 자신과 달리 재능을 갖지 못한, 아무리 애써도 결국 노력충의 위치에 머물 수밖에 없는 평범한 이들을 기만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이면에는 일종의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있다. 만약 재능 있는 사람이 자신을 평범하다고 말한다면 그 평범함에조차 도달하지 못한 자신은 어떤 위치에 놓이게 될까. 이는 곧 평범함마저도 버거운 열등한 존재가 돼버린다. 따라서 누군가를 재능충으로 규정하는 행위는 타인을 평가절하해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자기변호에 가깝다. 다시 말해 타인을 끌어내려야만 유지되는 불안정한 자존심을 지키려는 방편인 셈이다.
물론 재능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를테면 수영에서는 물 위에 떠 있기 위한 부력이 중요한데, 인간의 신체 구조상 하체는 상체보다 부력을 덜 받는다. 이 때문에 하체가 짧을수록 유리하며, 다리가 짧으면 물을 밀어낼 때의 힘 손실도 줄어든다. 즉 수영선수에게 상·하체 비율은 체력 안배와 직결되는 요소다. 이러한 점에서 키 195cm에 비해 다리 길이가 81cm에 불과한 수영선수 마이클 펠프스의 신체 조건은 수영에 유리한 요소만을 갖춘 압도적인 재능의 사례로 볼 수 있다. 그가 올림픽에서 금메달 23개를 획득한 전설적인 성과 역시 재능을 배제하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런 사례는 다른 분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필즈상 수상자들의 수학적 직관이나, e-스포츠 게이머의 뛰어난 동체시력 역시 명백히 재능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묻자.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지 못하면 모두 노력충에 불과한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지 못하면 실패한 영화감독이라 할 수 있는가. 이는 반박할 가치조차 없는 터무니없는 잣대다. 누구나 서로 다른 종류와 수준의 재능을 타고난다는 사실로부터 그 재능을 반드시 정상에 이르기 위해 써야 한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음악을 한다고 해서 세 살에 작곡을 시작하고 여섯 살 전에 바이올린을 능숙하게 연주했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될 필요는 없다. 삼각 함수를 이해하기 위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끌어올 필요도 없고, 어깨 근력을 기르겠다고 운동하면서 아놀드 슈왈제네거를 떠올리며 낙담할 이유도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예체능이든 학문이든 기본적인 이해와 성장을 이루는 일이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더 나아가 사소한 경쟁에서의 미미한 우위가 개인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꿔주지도 않는다.
물론 정상만 바라보는 이러한 세태를 단지 개인의 문제로만 돌릴 수는 없다. 1등 외에는 병풍처럼 취급해 버리는 사회 분위기, 과도한 경쟁 압박 등 외부 요인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재능충 운운하는 주체는 이를 통해 결정론적 무결함을 즐기기도 한다. 자신을 ‘재능 없는 피해자’ 위치에 고정하는 순간, 다시 말해 피해자 서사를 내면화하는 순간, 자기 책임성으로부터 벗어나는 듯한 뒤틀린 안도감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만 속에서 흘려보낸 젊음과 세월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반복되는 재능 타령은 결국 자신을 가두는 자기실현적 예언으로 굳어지기 쉽다. 이런 맥락에서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은 새겨들을 가치가 있다. “우리의 허영심과 자기애가 천재 예찬을 부추긴다. 왜냐하면 천재를 한낱 기적으로서 우리와는 아주 먼 존재라고 생각할 때만 천재가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2026-04-30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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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학수의 문화풍경] 비틀거릴 자유… 디지털 시대 칸트의 전언
4월은 '칸트의 달'이라 불러도 좋다. 1724년 4월 22일, 발트해 연안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난 임마누엘 칸트는 규칙적 일상에 갇힌, 다소 따분한 학자로 흔히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 정신의 판을 뒤흔든 급진적 혁명가였다.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계몽'이다. 계몽주의는 교회의 도그마에서 정신을 해방하고, 이성 위에 사회를 재건하려는 운동이었으며, 칸트는 이것을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미성숙 상태로부터의 탈출"이라 정의했다. 계몽은 지식의 양이나 질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겠다는 의지의 문제다. 미성숙의 사슬을 끊고 자립하라는 칸트의 준엄한 명령이 바로 "사페레 아우데!"(Sapere Aude, 알고자 결단하라)이다.
시대에 대한 칸트의 진단은 따끔한 심리학적 통찰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미성숙'한 상태에 머무는 이유는 지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알고자 결단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지 스스로 생각하려 하지 않고 보호자의 말을 따른다. 성인 역시 스스로 판단하는 책임 대신 타인에게 의존하는 편안함을 선택하곤 한다. '스스로 알고자 하는 결단의 부재'가 곧 칸트가 경계한 미성숙의 본질이다.
이 상태를 고착시키는 주범은 '게으름과 비겁함'이다. 1784년 칸트가 남긴 한 문장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돈만 지불할 수 있다면, 나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는 돈이 지적 노력을 면제받는 수단으로 전락했음을 꼬집었다. 우리는 지혜를 얻기 위해 책을 사고, 결혼·직업·투자와 같은 삶의 결정을 대신 내려줄 '후견인'에게 기꺼이 비용을 지불한다. 영적 번뇌는 목자에게, 신체 관리는 의사에게 떠넘기며, 홀로 서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할 '비틀거림의 공포'로부터 비겁하게 도망치는 것이다.
안전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칸트가 말하는 '가축'이 된다. 후견인들은 이 '순한 생명체들'이 '보행기' 없이는 단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도록 공포를 심어준다. 홀로 걷는 위험은 사실 허상이다. 몇 번 넘어져도 결국 걷는 법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한 번의 비틀거림에 겁을 집어먹은 우리는 다시 후견인의 품으로 도망치고 만다.
오늘날 칸트의 경고는 주머니 속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았다. 우리는 과거의 후견인을 두 가지 강력한 대체물로 바꾸어 놓았다. 첫 번째는 스마트폰에서 작동하는 구글이나 AI 기업의 '디지털 알고리즘'이다. 우리는 이들에게 구독료와 데이터를 지불하며, 무엇을 믿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리즘이 대신 결정해 주는 편리함을 누린다. 두 번째는 인플루언서와 온라인 컨설턴트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추종하며 스스로 연구하는 수고를 덜어버린다. 두 경우 모두, 안락함을 위해 사유의 주권을 양도하고 있는 셈이다.
주권을 넘겨받은 이들 새로운 후견인이 우리를 지배하는 수단은 칸트가 말한 '강령과 공식'이다. 1784년에는 이것이 교회의 교리였다면, 2026년 오늘날에는 인터넷의 완성형 답변들이다. 디지털 스트림은 우리에게 정신적인 족쇄가 되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퇴화시킨다. 결국 우리는 '디지털 보행기'를 잡고 걸으며, 독립적인 판단을 두려워하는 '겁쟁이 기계'로 전락하고 만다.
기계적인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칸트는 무정부주의적 반란이나 고립을 제안하지 않았다. 현대 사회에서 검색 엔진과 전문가의 조언 없이 살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신 칸트는 '이성의 공적 사용과 사적 사용'을 구분해 지적 태도에 차이를 둘 것을 요구했다.
칸트의 공·사 개념은 흔히 쓰는 개념과 정반대이다. '이성의 공적 사용'은 국가 기관이나 공공 부문에서 이성 사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지성인으로서' 세계 시민이나 독자 세계를 향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자유로운 소통의 장을 말한다. 반대로 '사적 사용'은 국가나 조직이 부여한 특정한 직무나 직책(공무원, 군인, 은행원 등) 내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기계처럼 작동하고, 정해진 규칙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모든 개인은 동시에 '지성인으로서의 자질', 즉 지성적 시민으로서의 역량을 지니고 있다. 이 '이성의 공적 무대'에서 우리는 지성인으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공동체의 질서와 구조에 대해 비판적 담론에 참여해야 할 신성한 의무가 있다.
우리 시대의 '보행기 끈'은 디지털 인터페이스 속에 촘촘히 엮여 있다. 그러나 칸트 탄생의 달인 4월은 인간의 존엄성이 자율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상기시킨다. 지금이야말로, 오래된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사페레 아우데!" 보행기 없이 걸을 수 있는 용기를 가져라.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2026-04-2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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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애도의 공간, 생명의 건축
하나씩 피고 지며 봄의 진행을 스펙트럼처럼 보여주던 꽃들이 올해는 한꺼번에 폈다. 순서를 무시하고 동시에 피어버리는 이 기형적인 현상 앞에서 아름다움보다 기후 위기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찬란하게 아름다워야 할 4월은 꽃 피기도 전에 떨어져 버린 슬픔의 시간을 머금고 우리 앞에 기억을 소환한다.
제주 4·3사건, 어제 12주기를 맞은 세월호 참사, 그리고 모레 있을 4·19 혁명 기념일. 이 사건들은 서로 다른 내용이지만 기억은 사회 속에서 어떻게 구성되는지, 더 나아가 어떤 미래를 만들어가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애도란 죽음을 정리하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한 통과의례처럼 여겨왔다. 그러나 오늘날 애도는 ‘죽은 대상을 기리다’를 뜻하는 일반적인 추모가 아니라 타자의 슬픔을 느끼고 그 슬픔을 함께 극복하는 개념으로 변하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과거를 정리하는 행위가 아니라, 현재를 견디는 방식이자 미래를 구성하는 태도가 된다.
‘애도 불능 사회’란 상실과 죽음이 끊임없이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그 상실을 충분히 말하고 느끼고 기리는 장이 부재한 사회이다. 그 예로 삼풍백화점 붕괴 자리에 세워진 ‘아크로비스타’를 들 수 있다. 비극의 공간에서 재탄생한 고급 주거지 어디에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에 대한 표식이나 서사는 남아 있지 않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자리에 아무런 기억의 흔적 없이 일상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은 사회가 특정한 죽음을 공적 기억으로 승인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동시에 그 죽음이 우리 삶의 조건을 바꾸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기억되지 않는 죽음은 구조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과거와의 단절은 반복의 조건이 되어 세월호로, 이태원 참사로 이어졌다.
참사는 우연이 아니라 보이지 않던 위험이 표면으로 드러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참사 이후의 과정이다. 재난 현장에서 반복되어 온 통합 컨트롤타워의 부재, 신속한 구조의 실패, 그리고 책임의 불분명 등 시스템 단절의 패턴은, 사건은 달라도 대응은 놀라우리만치 유사하다. 슬픔은 있었지만, 그것이 구조를 재편하는 힘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이는 사회의 기억이 제도와 공간의 서사로 이어지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재발 방지는 안전 기준 강화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감정의 환기와 이성적 성찰이 동시에 이루어질 때 애도는 비로소 사회적 힘을 갖는다. 이때 건축은 그것을 보여주는 장치의 역할을 한다.
베를린 ‘홀로코스트 기념물’에는 특별한 이름이 없다. 설계를 맡았던 미국의 건축가 피터 아이젠먼은 누군가에게는 묘비로, 누군가에게는 거대한 감옥처럼 느껴질 수 있는 재량을 부여하고 싶었다고 한다. 끝없이 반복되는 콘크리트 기둥들 사이로 걸어 들어갈수록 바닥은 낮아지고 비석이 높아지기 때문에 어느 순간 길을 잃은 듯한 압박감에 발걸음은 불안하게 된다. 기념비들은 질서 정연해 보이지만 나치 체제하에서 파괴된 인간상과 혼란을 느끼게 된다.
뉴욕의 ‘911 메모리얼 파크’ 역시 마찬가지다. 911 메모리얼 파크는 9·11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부재의 반추(Reflecting Absence)’라는 개념으로 설계된 추모 공원이다. 쌍둥이 빌딩 자리에 두 개의 사각형 반사풀을 두고, 풀 중심부로 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게 해서 상실이 결코 봉합될 수 없음을 느끼게 한다. 그렇게 애도는 계속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있음을 알게 되고 애도의 공간은 안타까운 죽음만을 기리는 건축물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삶의 조건을 재구성하는 생명의 건축이 된다. 생명이란 단순히 살아 있음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관계 맺는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서 건축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의 감각과 행동을 깨어있게 하는 사회적 학습의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상처를 지우지 않고, 오히려 그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여는 작업이다. 애도의 공간이 살아 있는 이유는, 그곳이 과거를 보존하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얼마 전, 달 왕복 비행을 마치고 돌아온 아르테미스 2호의 우주비행사 크리스티나 쿡은 “달 근처에서 지구를 바라보았을 때 지구는 우주 공간에 아주 고요하게 떠 있는 한 척의 구명정 같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고 있는 모두가 하나의 팀이라고 느꼈다고 했다. 그 시선에서 보면 우주 공간에 구명정처럼 떠 있는 이 행성은 거대한 애도의 공간일 수도 있겠다. 팀이란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나 함께하는 사람들이다.
수많은 슬픔을 소환하는 이 봄, 안타까운 죽음들을 애도하며 우리의 감각과 행동이 찬란한 생명을 잉태하는 봄으로 깨어나기를 소망한다.
2026-04-16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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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화의 크로노토프] 소비되는 무대, 축적하는 문화
지난달, 3년 9개월 만에 완전체로 돌아온 BTS 광화문 공연은 그 자체로 무성한 담론의 궤적을 남겼다. 누군가는 국가적 성과를, 누군가는 공공성의 훼손을, 또 다른 이는 문화산업의 파급력을 강조했다. 하지만 여기서 정작 주목해야 할 지점은 공연의 이름보다 어떤 공간에서 어떤 언어로 정의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광화문은 단순한 광장이 아니라 대한민국 현대사의 갈등과 공공성이 교차해 온 상징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BTS 역시 현재의 한국이 세계를 향해 호출하는 강력한 문화적 기호다. 이 둘의 결합은 오늘의 정치와 행정이 문화를 어떤 상징체계 속에서 다루고 있는지를 드러낸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무대를 둘러싼 낯선 군중들은 같은 리듬과 감각을 공유하는 거대한 공동체였다. 일상의 위계가 느슨해지고 자유와 평등의 공유된 감각이 분출되는, 이른바 ‘코뮤니타스’의 현장이었다. 뜨거운 일체감은 우리 대중문화가 도달한 절정을 상징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필연적인 질문이 고개를 든다. “K팝이 BTS와 블랙핑크 두 팀에 제한되어 확산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의 지적은 뼈아프다. 지금의 성공이 실력이나 규모의 결과만이 아니라 “운 좋게 ‘케데헌’이 걸린 것”이라는 그의 냉정한 진단은 거대한 스펙터클 너머의 본질적인 물음을 남긴다.
한국 사회는 유난히 ‘1등’이라는 수식어에 집착한다. 문제는 최고만을 지향하는 문화는 다양성을 잠식하고, 결국 역동성마저 잃어버린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고는 우리네 공공극장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전국의 수많은 공공극장은 지역 고유의 문화적 얼굴이라기보다, 어느새 수도권 대형 기획사나 언론사 주최의 흥행 위주 공연을 반복 유통하는 ‘쇼윈도’로 변모했다. 공연 행정이 극장을 예술적 가치를 위한 ‘생산지’가 아닌 선별과 편성의 ‘소비지’로만 이해하는 탓이다. 공공극장의 책무는 이미 완성된 남의 프로그램을 고르는 안일함을 넘어 지역만의 예술적 사유를 길러내는 데 있어야 한다.
도시 문화정책의 소명은 예술의 열망을 일회성 열광으로 휘발시키지 않고, 지속 가능한 ‘상상의 공동체’로 치환하여 축적하는 과정에 있다. 공연장이 백화점식 문화상품의 진열장으로 전락하는 순간, 공공극장은 미래를 생산하는 동력을 잃는다. 일각에서는 외부에서 쇼핑해 온 공연상품을 배치하는 ‘유통형 큐레이션’을 상수라 떠받들며, 자생적 무대를 일궈내려는 노력을 하수의 역량으로 폄훼한다. 그러나 매출과 효율만을 앞세운 행정이 운영 철학을 대신한다면, 결과는 빈곤해질 것이다. 검증된 이름들만 반복 호출하는 안일함은 시민의 취향을 박제하고, 감각의 확장을 마비시켜 ‘취향의 빈곤’을 초래한다. 화려한 ‘시즌’의 숫자 뒤에서 정작 우리만의 ‘내일’은 찾을 수 없다. 스스로 창작 동력을 포기한 무책임한 행정적 체념만 남을 뿐이다.
수도권에는 다양한 문화적 대체 경로가 존재하지만, 지역에서 공공극장은 문화예술 생태계를 지탱하는 결정적인 통로다. 이러한 맥락에서 부산의 공공극장들은 단순히 공연을 올리는 장소를 넘어 예술생태계의 방향을 결정하는 공적 토대로 기능한다. 하지만 그 문이 늘 같은 이름과 포맷에만 열릴 때, 지역은 예술을 생산하기보다 외부의 완성품을 소비하는 거대한 시장으로 고착된다. 이러한 취향의 획일화는 창의적 토양을 메마르게 해 결국 미래를 잠식한다. 오늘의 무대가 내일의 예술가를 기르지 못한다면, 도시는 문화를 소비만 하는 껍데기로 남을 뿐이다.
선거철이면 문화는 늘 ‘명품’, ‘고품격’, ‘세계적’이라는 수사로 손쉽게 소비된다. 정치가 진정으로 존중해야 할 목소리는 행사장의 박수가 아니라,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며 무대를 일구는 예술가들의 구체적이고 공적인 제안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외형적 화려함보다 운영의 철학이다. 찰나의 갈채만으로는 부족하다. 실패와 축적을 견딜 수 있는 ‘반복의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공공예술의 가치는 새로운 건물의 화려한 개관식보다, 지역 예술가와 시민이 그 안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하는 시간으로 온전히 가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은 치적을 위한 수단도, 이해관계의 산물도 아닌, 미래세대를 위한 공공의 기반이어야 한다. 찰나의 열광이 교감의 순간인 ‘코뮤니타스’라면, 그 흥의 열기를 일상의 평온과 질서로 안착시키는 힘은 ‘예악’에 있다. 일찍이 허목이 〈악설〉에서 강조했듯이, 음악은 마음을 조화롭게 하여 공동체의 질서를 바로잡는 근본이다. 소리가 화평을 이루듯 공공문화 역시 단순한 유흥을 넘어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다듬는 공적 실천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 더 큰 건물을 세우는 일보다 더 오래 맞닿을 수 있는 가치를 일구는 일이 우선이다. 부산 문화행정이 가슴 깊이 새겨야 할 핵심 가치도 ‘스타의 힘’ 이전에 ‘관계의 힘’이어야 한다.
2026-04-0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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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의 생각의 빛] 진달래, 지려고 피는 마음씨에 묻은 빛깔
“진달래야 진달래야 어느 꽃이 진달래지 내 사랑의 진달래 너만 홀로 진달래야/ 진달래 나는 진달래 임의 짐은 내질래”(유영모 ‘진달래’ 중에서)
이맘때쯤이면 마을 뒷산을 붉게 물들이던 진달래가 생각난다. 따뜻하고 화사한 봄볕 바람에 흔들리며 잔잔한 향기 번지던 진달래 군락지에 앉아 동무들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뛰놀다 저녁 먹으란 소리에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꽃잎을 따던 이들도 있었는데, 화전을 해 먹기 위해서였다. 얇디얇은 분홍빛 이파리 한 움큼씩 전을 부쳐 찬가지 몇 없는 밥상에 올려 먹던 기억도 새록새록 난다. 진달래, 짧은 동안 활짝 피고 온 산을 순간 붉게 물들이곤 영락없이 지고야 마는 그 꽃을 생각하는 날이다. 김소월(1902~1934)의 시에도 등장하는 진달래는 국화나 장미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이 나라 산천 곳곳 봄의 들목에서 개나리와 함께 가장 먼저 피어나 다른 봄꽃의 길잡이가 되어준다.
‘진달래꽃’의 시인 소월이 다녔던 오산학교의 제8대 교장을 지냈던 다석 유영모(1890~1981)도 ‘진달래’란 시를 지었다. 그는 서울 구기동에 살 무렵, 진달래를 보고 그 꽃 이름을 한참이나 궁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면서 누구보다 먼저 피우고 누구보다 먼저 지는 진달래의 모습에서 생명의 신비와 함께 영적인 삶의 본질을 깨달았다. 그가 지은 ‘진달래’는 언뜻 알쏭달쏭한 의미와 맥락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아 보이지만, 오랫동안 지지 않고 아름다움과 명성을 유지하려고 발버둥을 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뜻이 적지 않다. ‘지기 위해 피우는 꽃’이란 해석을 보태기도 했던 다석의 ‘진달래론’을 곱씹으면, 무릇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는 우리가 어떤 정신과 형식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곰곰이 되짚게 된다.
제주 4·3과 4·19혁명 때 목숨을 잃은 수많은 이들이 다시 한번 우리에게 ‘말 없는 말’을 건네는 달이다. 희생당한 이들이 무슨 거창한 이념과 사상을 펼치기 위해서라든지, 혁명으로 나라를 뒤바꾸려는 장엄한 꿈을 이루려는 마음으로 국가 권력의 ‘제거 대상’이 되었던 건 아니다. 이들은 단지 거짓과 술수와 명분 잃은 폭력의 희생양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희생되었지만, 살아남은 이들의 기억에서 결코 잊어서도 안 되고 잊을 수도 없는 우리 현대사의 상흔이 되었다.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한참이나 머뭇거리면서 여백에 묻은 젖은 피가 내지르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우리가 끝내 찾아서 잊지 않고 동시대인들에게 전해야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4월 지나 5월이 되면 각종 봄꽃이 피었다 지는 속에 수목은 그 푸르름을 더욱 짙게 가져갈 것이다. 진작에 피었다 진 진달래는 뒤를 줄줄이 이은 봄꽃 무리 속 상춘객의 밝은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러지기 위해 찬란히 불 밝혔던 ‘사건’으로 남게 된다. 이를 기억하는 이들에겐 생명이 지녀야 할 의무 가운데 하나인 가없는 희생과 사랑만이 마음속에 오롯이 남아있을 것이다. 진달래, 진분홍 이파리의 떨굼이 연두 천지의 세상을 지피고 남긴 고귀한 소식. 우리 앞에 주어진 생명의 길을 내어주고 물러난 역사의 희생자들이 어느 곳 어느 때 불쑥불쑥 입술을 드러내어 참된 삶의 의미를 묻는다면 이에 곧바로 답을 할 자 몇이나 될까.
국가 폭력의 희생자를 기리고 기념하는 목적은 단지 이들이 희생당해야만 했던 역사적 사건이나 진실을 재구성해 오늘날 우리에게 남기는 의미를 되새기는 데에만 놓여 있지는 않다. 수많은 사람의 가슴속에 맺힌 한이 유전되어 면면이 쌓이는 과정에서 반드시 개선해야 할, 집단 이데올로기에 따른 소수자를 향한 기만과 폭력의 유대를 끊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기회를 언제라도 붙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담겨 있다. 아울러 ‘살아남은 자’가 반성과 자책으로 값진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순간순간 돋아나는 삶의 뜻을 헤아리면서 잊지 말고 지녀야 할 시선이 들어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화학자이자 작가였던 프리모 레비(1919~1987)는 저서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삶의 의미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모든 힘줄 속에 뿌리박혀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문제는 훨씬 더 단순하다. 오늘 그리고 여기서 우리의 목표는 봄에 도달하는 것이다.” 희망도 용기도 실종된 극한의 지대에서 부르짖은 말이었을지라도, 그가 힘주어 강조했던 점은 당장 ‘오늘 여기’에서 찾아야만 했던 생명의 목적이었다. 이 목적은 꽃봉오리 활짝 지려고 피었던 진달래가 우리 마음에 물들이는 빛깔이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모든 폭력의 희생자가 입을 열어 전해주려 했던 메시지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2026-04-02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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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호의 오픈 스페이스] K컬처의 외연 확장과 부산의 과제
최근 방탄소년단(BTS)의 컴백 무대를 둘러싼 담론이 뜨겁다. 디지털 플랫폼의 실시간 피드에는 찬사보다 날 선 비판들이 더 날카롭게 박힌다. 과도한 보안 시스템과 경직된 통제가 시민들의 일상적 권리를 침해했다는 항변부터, 한국적 정서에 무지한 해외 연출진이 빚어낸 미학적 패착이라는 지적까지 다양하다. 더욱이 지역 상권이 기대했던 낙수효과는 신기루에 그쳤고, 숙박업계의 기회주의적 폭리는 ‘관광 도시’의 민낯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러나 이러한 소모적 논란의 이면에서 우리가 반드시 포착해야 할 본질적 함의는 따로 있다.
아시다시피 글로벌 OTT 기업 넷플릭스가 보여준 행보는 영리함을 넘어 치밀하다. 이들은 전 세계 팬덤의 시선에 맞추었고 해외 시청자들은 바로 눈치챘을 것이다. 사실 ‘방탄소년단(防彈少年團)’이라는 한자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이 그룹의 초기 정체성은 동아시아 시장을 겨냥한 ‘전략적 수출 모델’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들은 예상을 깨고 서구권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성장했고, 이제는 영어 가사로 세계인의 보편적 감성을 지배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이제 BTS는 단순한 K팝 그룹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세계와 어떻게 조우하고 있으며, 글로벌 문화 지형도에서 어느 위치에 점유하고 있는지를 상징하는 ‘연결체’ 그 자체다. 그 상징의 중심부에 국뽕 넘치는 광화문과 아리랑이 자리 잡고 있다. 광화문은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관통하며 ‘K민주주의’의 역동성을 세계에 각인시킨 성소(聖所)이자 역사의 현장이다.
마셜 맥루언은 일찍이 “미디어가 메시지다”라고 역설했다. 메시지의 구체적 내용보다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형식과 매체 자체가 인간의 사고방식과 사회적 관계를 재규정한다는 뜻이다. 넷플릭스가 지난주 ‘데몬 헌터스’가 오스카 두 개를 차지하는 대박 사건과 BTS 생중계를 전 세계 3억 명 이상의 시청자에게 실시간으로 송출하는 현상은 단순한 공연 중계를 넘어선다. 이는 한국의 특정 장소를 세계적 ‘문화 성지’로 각인시키는 공간적 브랜딩 과정이다. 과거 파리의 에펠탑과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이 미디어를 통해 선망의 대상이 되었듯, 이번 광화문 공연의 전 세계적 노출은 대한민국을 향한 경외심과 방문 욕구를 비약적으로 증폭시킬 것이다. 아미(ARMY)라는 거대 팬덤의 결집과 이동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경제적 낙수효과를 동반할 것임이 자명하다.
이러한 거시적 흐름 속에서 우리는 부산의 현주소를 냉철히 짚어보아야 한다. 최근 부산 원도심과 남포동, 국제시장 일대에는 외국인 관광객이 넘쳐나니 성공인가? 천만에다. 양적 팽창은 고무적이나, 질적 성숙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남는다. 현대 관광의 패러다임은 그 지역만의 고유한 ‘속살’, 즉 역사성과 시간성이 응축된 ‘지역성(Locality)’을 탐닉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과연 부산은 원도심의 기억과 이야기를 정교하게 직조하여, 이방인들을 다시 불러들일 만큼 섬세한 미학적 준비가 되어 있는가.
부산의 미래 산업이 해양과 관광에 있다면, 문화는 더 이상 주요 아젠다의 잉여물이나 행사용 수단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진정한 문화적 정체성은 관(官) 주도의 대규모 토건 사업이 아니라, 지역 예술가들의 창의적 실험과 자유로운 상상력이 놀이터처럼 펼쳐지는 토양 위에서만 자생한다. 한국 인디 문화를 선도했던 부산의 저력과 BTS 멤버 중 2명이나 속해있는 도시라는 문화적 유전자는 이미 훌륭한 밑거름이다. 부산은 ‘아미’들의 성지순례 코스가 되어 있다
하지만 며칠 전 발표된 영도 폐교 부지의 K팝 아레나 건립 계획은 당혹감을 안겨준다. 목불인견(目不忍見) 수준이다. 이미 북항 재개발 구역 내에도 민간 컨소시엄 주도의 아레나 건립이 추진 중이기 때문이다. 불과 6km 남짓한 거리, 물리적으로는 원도심권으로 묶이는 두 지점에 수조 원의 예산을 투입해 유사한 대형 공연장을 중복 설치하겠다는 발상은 정책적 효율성 측면에서 납득하기 어렵다. 선거철마다 반복되는 선심성 하드웨어 경쟁은 아닌지, 혹은 외형적 성과에만 매몰되어 문화의 내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뼈아픈 성찰이 필요하다.
요청하건대, 부산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는, 지역 사회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소통의 방식은 부산에는 불가능한가! 지금 부산에 시급한 것은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를 늘리는 일이 아니다. 지역 예술가들의 창의성이 고사하지 않도록 생태계를 조성하고, 시민들의 문화적 인식과 환대(Hospitality)의 온도를 높이는 소프트웨어의 고도화가 우선이다. ‘문화 도시 부산’의 진정한 경쟁력은 아레나의 규모가 아니라, 그 안을 채울 지역적 독창성과 지역 예술가들의 혼과 삶에 달려 있다. 하드웨어가 비대해질수록 소프트웨어가 빈곤해지는 ‘문화적 역설’을 경계해야 함을 모르는가!.
2026-03-2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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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성의 개념 쌓기] 지능과 능지 그리고 교만한 안도감
새삼스러운 지적이긴 하나, 사기가 횡행하고 있다. 곧 대박이 날 주식 정보를 알려주겠다거나 손쉬운 부업을 통해 고수익을 올리게 해주겠다는 등의 온갖 스팸 문자들이 쇄도한다. 금융기관을 사칭해 가짜 정책금융상품 가입을 유도하고 돈을 갈취하기도 한다. 사기는 유행에도 발 빠르게 적응한다. 최근 중동 사태가 불거지면서 주민센터 직원 행세를 하며 유류비 지원을 미끼로 악성 앱 설치를 유도하는 신종 수법까지 등장했다. 통신사와 경찰청 통합대응단이 손잡고 실시간 대응 체계를 구축하려 한다지만, 유감스럽게도 미래를 낙관하긴 힘들다. 지난날을 돌아보건대, 새로운 대책에 맞춘 또 다른 사기 수법이 등장할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인간사에는 사기에 대한 일종의 절대량 보존 법칙 같은 게 작용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사기를 둘러싼 또 하나의 익숙한 풍경은, 가해자보다 피해자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경향이다. 보이스피싱 피해를 다룬 유튜브 영상에는 어김없이 이른바 ‘능지’를 비난하는 댓글이 넘쳐난다. 이 단어는 ‘지능’을 거꾸로 뒤집어 누군가의 지적 수준을 비꼬는 신조어인데, 곱씹어 보면 묘한 함의가 있다. 본래 지능이란 상황을 파악하는 ‘지’혜와 이를 실행으로 옮기는 ‘능’력이 조화를 이루는 개념인데, ‘능지’는 그 순서가 뒤바뀐 상태를 가리킨다. 즉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우둔함을 뜻한다. 결국 이는 수화기 너머의 사기꾼이 던진 미끼를 의심 없이 덥석 무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통상 지능과 양(+)의 상관관계를 갖는다고 여겨지는 고학력자들은 사기로부터 자유로울까? 통상 이들은 사회에서 상황의 본질을 눈치 빠르게 파악하며, 복잡한 정보를 논리적으로 처리하는 존재로 인식되기에, 사기에 대한 절대적인 면역체계를 가졌을까? 자신 있게 대답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 필자는 직업상 상아탑 안에 있기에, 박사학위 소지자들을 종종 본다. 그런데 여기서도 사기 피해는 낯선 일이 아니다. 당장 지난 겨울에도, 검찰을 사칭하는 사기꾼 꾐에 넘어가 수사 협조를 명목으로 텔레그램을 설치했던 한 선생님의 소식을 들었을 정도다. 또한 회식 자리에서 주식 리딩방에 깜빡 속아 목돈을 급등주에 밀어 넣었다가 큰 손실을 본 교수의 이야기가 오르내리기도 했다. 다시 말해 학력과 사기 피해는 별다른 상관이 없다.
어떤 의미에서 고학력자들이야말로 사기꾼에게는 손쉬운 먹잇감이 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사기는 심리적 허점과 정보의 불균형을 파고드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두 요소는 서로를 강화하며 작동한다. 예컨대 사기꾼이 가장 신뢰하는 통로는 오만이다. 자신의 판단이 틀릴 리 없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주어진 정보의 왜곡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동시에 왜곡된 사실에서 비롯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자만이 더 강화되기도 한다. ‘나 같은 사람이 속을 리 없다’라고 믿으며 감지된 논리적 균열을 애써 외면하는 것이다. 이처럼 오만과 오류는 서로를 조건 지으며 점점 증폭된다. 그렇다면 자신의 지식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는 고학력자들이 사기꾼의 눈에 얼마나 매력적인 표적일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기의 결정적 한 수는 공포다. 공포는 이성을 마비시킨다. 실제로 공포는 사고를 담당하는 대뇌피질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편도체에서 발산된다. 숲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 후 피하는 것보다 즉시 그 자리서 벗어나는 게 생존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공포는 정확성보다 신속성을 우선하는 감정이다. 그렇기에 공포가 작동하는 순간, 고학력자들이 자부하던 대뇌피질은 사실상 먹통이 되고 만다. 마치 최첨단 무기는 있는데, 정작 그걸 작동시킬 전선이 뽑혀버린 꼴이다. 그렇다면 사기꾼은 고학력자에게 어떻게 공포를 심어줄까? 이는 어리석은 질문에 가깝다. 오만이 곧 공포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고학력자에게 공포는 자신의 최대 자산인 지능이 무력화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중간에 사기를 의심하게 되더라도, 이를 좀처럼 인정하지 못한다. 금전적 피해를 넘어, 스스로의 지능이 ‘능지’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데서 지혜가 시작된다고 말하며, 이른바 ‘무지의 지’를 설파했다. 그러나 상아탑에서도 빈번히 벌어지는 사기 피해를 보면, 이 교훈이 제대로 계승되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다만 이러한 문제는 비단 박사학위 소지자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을 향해 ‘무지의 지’를 강조했듯 자만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약점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기 피해자를 조롱하는 이들은, 그들을 통해 자신의 지능은 아직 ‘능지’로 전락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얻는다. 그리고 바로 그 교만한 위안이야말로 사기꾼들이 가장 노리는 지점이다.
2026-03-1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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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학수의 문화풍경]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답다
이른 봄이 오면 사람들은 나무를 올려다보기 시작한다. 거리와 공원, 하천가의 나무들은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마른 가지였지만 어느새 꽃망울이 터져 나온다. 한국에서 벚꽃 개화는 모두가 손꼽아 기다리는 특별한 사건이 된다. 가족들은 사진을 찍기 위해 모이고, 연인들은 꽃 아래를 거닐며, 여행사들은 꽃구경 관광버스를 운행한다. 온 나라는 짧은 기간 동안 펼쳐지는 색채의 향연에 잠시 걸음을 멈춘다. 고작 며칠이면 사라질 꽃에 사람들은 왜 이토록 마음을 빼앗길까.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꽃은 단지 식물의 생애 주기에서 나타나는 한 단계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문화 속에서 꽃은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을 넘어서는 상징이 되어 왔다. 시와 그림, 음악 속에서 봄꽃은 생명의 재탄생을 의미한다. 긴 겨울 동안 얼어붙어 있던 땅과 나무는 마치 생명이 멈춘 듯 보이지만, 봄이 오면 다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다. 그래서 많은 문화에서 봄꽃은 죽음처럼 보였던 자연이 다시 살아나는 순간을 상징한다.
봄꽃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삶도 오래 머물지 않아 감동적이며
찰나의 아름다움, 함께 즐기라는 것
그러나 우리가 꽃에 매혹되는 이유를 단지 부활 때문이라고만 설명할 수는 없다. 꽃의 아름다움은 그 연약함에 있다. 여기서 연약함이란 오래 머물지 않는 존재라는 의미다. 강한 바람이나 며칠의 비에도 꽃잎은 쉽게 흩어진다. 꽃은 잠시 피었다가 곧 사라진다. 꽃은 짧은 생을 지녔음에도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짧은 생 때문에 더욱 아름답다.
아름다움이 덧없음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일상 속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사람들이 석양을 바라보는 순간을 떠올려 보자. 하늘의 색이 몇 분 안에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을 멈추고 조용히 수평선을 바라본다. 만약 석양이 밤새 계속된다면 지금처럼 감동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은 ‘등락유원’(登樂遊原)」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석양은 한없이 아름다운데, 이미 황혼이 가까이 왔다.”(夕陽無限好,只是近黃昏). 봄꽃의 아름다움도 이와 같다. 오래 머물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강하게 마음을 울린다.
예술 가운데 이러한 순간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르는 음악일지도 모른다.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 ‘봄’ 1악장에서는 활기찬 바이올린 선율이 꽃이 피어나는 장면과 새들의 노래를 그려낸다. 그러나 곧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을 동반한 폭풍이 몰아치며, 온화한 봄 풍경을 휩쓸어 버린다. 꽃과 새와 따뜻한 봄 공기는 빗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렇게 음악 속에서도 봄의 아름다움은 한순간 스쳐 지나간다.
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덧없음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다. 꽃이 피는 계절이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모인다. 공원과 강변에는 낯선 사람들이 모여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는 작은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부산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온천천 벚꽃길을 걷거나 삼락생태공원의 봄꽃을 찾아 나선다. 또 전국적으로는 진해 벚꽃축제가 열리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며칠 동안 꽃은 평범한 공간을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는 장소로 바꾸어 놓는다.
이런 순간들은 종종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가까운 친구와 저녁 식사를 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앞으로도 수없이 다시 만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저녁은 평범하게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친구가 먼 나라로 떠나간다는 사실을 안다면 같은 저녁도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이러한 깨달음은 철학자들도 오래전부터 이야기해 왔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드 몽테뉴는 〈에세이〉에서 “철학 한다는 것은 인간이 언젠가 죽는 존재임을 배우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죽음은 두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각하려 하지 않지만, 몽테뉴는 그것이 어리석은 태도라고 보았다. 우리는 항상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며, 그럴 때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20세기 철학에서도 중요한 통찰로 이어진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를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설명했다. 죽음은 삶의 끝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들에 긴장과 의미를 부여하는 지평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꽃을 사랑하는 데에는 여러 겹의 이유가 있다. 꽃은 긴 겨울 뒤에 찾아오는 생명의 부활을 알리고, 사람들을 거리와 공원으로 불러 모아 함께 아름다움을 나누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꽃이 우리 마음을 깊이 움직이는 이유는 그것이 오래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매년 봄 꽃잎이 하나둘 떨어질 때 우리는 깨닫는다. 아름다움은 사라질 것을 알 때 더욱 깊이 마음을 울린다는 사실을. 그래서 봄이 오면 사람들은 또다시 나무를 올려다보게 되는지도 모른다.
2026-03-12 [1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