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정이한 구속, 테러 자작극 시인하고도 선거 완주했다니
정이한 전 개혁신당 부산시장 후보의 ‘음료 테러 자작극’ 소동은 대한민국 선거사에 씻기 어려운 오점을 남겼다. 증거인멸 우려로 정 전 후보가 8일 구속된 뒤 영장에 기재된 혐의 사실이 알려지면서 충격파가 더 커지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정 전 후보는 6·3 지방선거 보름 전에 이뤄진 조사에서 범행을 시인했다. 하지만 후보직 사퇴는커녕 목 보호대를 착용하고 피해자를 가장한 선거운동을 이어갔고, ‘젊은 정치’와 ‘세대교체’를 호소하며 완주한 결과 2만 7418표(1.56%)를 얻었다. 천인공노할 테러 조작이 드러났는데도 태연히 지지를 호소한 행태는 공직선거를 농락하고 유권자를 기만한 행위나 다름없다. 정 전 후보는 십년지기 헬스 트레이너 A 씨와 짜고 피습 사건을 조작한 혐의를 받는다. 허위 테러 사건으로 동정심과 불안 심리를 자극해서 지지를 얻으려 한 것이다. 이는 실제 선거 폭력 피해자와 시민 불안을 희화화한다는 점에서 용납될 수 없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공동체 윤리를 무너뜨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 전 후보는 테러 자작극 이후 토론회 배제에 반발한 단식, 토론회장 거짓말탐지기 반입, 의문의 잠적 등 선거 과정에서 각종 기행을 이어갔다. 이러한 일관된 돌출 행동은 그가 선거를 정책 경쟁의 장이 아니라 주목을 끌기 위한 정치적 연출의 무대로 여겼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정 전 후보의 일탈은 공공의 이익과 윤리 기준을 한참 벗어난다. 이런 후보가 공당의 공천을 받아 대한민국 제2의 도시 부산을 이끌 광역단체장 선거에 출마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이다. 정치의 세대교체는 필요하지만, 젊다는 이유만으로 검증 부실이 용인될 수 없고, 신선하다는 포장으로 공적 책임이 가벼워질 수도 없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각 정당은 후보 검증과 공천 시스템에 허점이 있지는 않은지 한 번 더 점검할 필요가 있다. 또 선관위는 허위 조작 사건을 일으켜 동정심과 불안 심리를 자극하려는 시도를 예방하고 처벌하는 제도적 장치가 충분한지 살펴야 할 것이다. 이제 수사의 핵심은 범행 동기와 대가 관계, 증거인멸 시도 여부를 끝까지 밝히는 데 있다. A 씨가 친분 때문에 범행에 가담했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대가가 있었는지, 캠프 내부에서 어디까지 인지하고 있었는지 규명해야 한다. 또 정 전 후보 부친 계열사 직원 동원 의혹, 여론조사기관 공정성 논란, 진단서 발급 과정의 의료법 위반 의혹도 밝혀져야 한다. 특히 선거 제도를 흔든 사건인 만큼 개혁신당의 부산시장 후보 공천 과정도 수사 대상에서 빠져서는 안 된다. 범행이 들통났는데도 선거 완주를 강행한 것이 순전히 혼자만의 결정인지, 아니면 조직적 비호가 있었는지도 밝혀야 한다. 선거와 유권자를 농락하는 정치에 철퇴가 내려진다는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사설] 부울경 중소기업 고환율 직격탄, 리스크 해지 대책 없나
지난달 우리나라의 월간 수출액이 반도체 업황 호조에 힘입어 사상 처음으로 1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실질 GDP(국내총생산) 성장률 전망치도 평균 3%에 달하는 등 수치로 본 한국 경제의 성장 전망은 밝다. 하지만 경제는 순항 중이라고 평가받는 상황 속에서 원달러 환율은 가파르게 치솟고 있다. 지난 1일 1552.5원까지 오르는 등 이미 1500원 시대가 뉴노멀이 된 상황이다. 문제는 대기업은 환차익을 누릴 수 있지만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들은 수입 원자재 가격 상승 등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중소 제조업체들이 밀집한 부산과 울산, 경남은 고환율로 지역 경제마저 흔들리고 있다. 부울경 중소 제조업체들의 대부분은 대기업 협력업체들이다. 이들이 원자재를 수입해 제조한 뒤 대기업에 납품하는 방식의 제조업 생태계가 부울경엔 일반화됐다. 특히 자동차와 조선 관련 업체들이 많다. 〈부산일보〉에 따르면 중소 제조업체들은 중동전쟁 이후 두드러진 고환율 때문에 폐업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고 호소한다. 단가 인상을 원청에 요구해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단가를 낮출 대안을 찾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일부 업체들은 원자재 구입 계약 기간을 늘려 할인율을 높이는 방법까지 모색하지만 재고 부담 때문에 이마저도 쉽지 않다. 금융기관들마저 리스크 관리에 나서면서 협력업체들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다. 이번 고환율 사태는 장기화될 조짐이다. 미국의 연내 금리 인상 가능성이 커지면서 달러 강세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여기다가 외국인들이 올 들어 주식시장에서 ‘셀 코리아’에 나서면서 원화 약세를 부채질하고 있다. 지난 6일부터 서울 외환시장 원달러 현물 거래 시간이 24시간 체제로 바뀌면서 환율 변동성 증가 우려도 커졌다. 통상 환율은 해당 국가에 대한 종합 성적표로 여겨진다. 따라서 높은 가계부채와 정치 불확실성, 반도체 산업에 대한 높은 의존도 등도 환율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도 벼랑 끝에 내몰린 중소업체들은 고환율이 더 장기화되면 줄폐업이 불가피하다고 아우성이다. 중소 제조업체는 국가 경제의 실핏줄이다. 이들이 고환율에 신음하지 않도록 하는 종합적인 환율 방어 대책이 필요하다. 중소 제조업체에 대한 긴급 자금 지원 등 맞춤형 처방도 절실하다. 수입 원자재 공급망에 대한 적극적인 점검도 뒤따라야 한다. 대기업들도 상생 차원에서 중소기업에 대한 합리적인 단가 인상을 적극 검토하길 바란다. 대기업들이 은행에 쌓아둔 달러를 국내에 투자하도록 유도하면서 중소기업 친화적 투자 환경을 조성하는 방법도 모색해야 한다. 중소 제조업체들에겐 시간이 없다. 정부가 가능한 모든 방법을 총 동원해 중소기업들이 체감할 수 있는 고환율 대책을 빠른 시간 내에 내놓길 기대한다.
[사설] "전재수 만나겠다"는 박완수, 부울경 행정통합 본격화해야
박완수 경남지사가 8일 민선 9기 첫 기자간담회에서 “이른 시일 내 행정통합과 관련해 전재수 부산시장과 만나 입장을 들어보겠다”고 말했다. 박 지사는 “경남과 부산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려면 행정통합이 필요하다”며 전 시장과 만나 그동안 추진한 행정통합의 취지와 필요성을 충분히 설명하고 뜻을 구할 것이라고 했다. 박 지사는 지난 1월 박형준 전 부산시장과 2028년 4월 통합자치단체장을 선출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6·3 지방선거 이후 부산과 울산시장이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바뀌면서 부울경 광역행정 개편의 셈법이 복잡해진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박 지사가 전 시장과 소통을 제안한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박 지사는 부산·경남 행정통합 관련 입장은 지방선거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다고 재확인했다. 하지만 전 시장 입장을 듣지 않은 상태에서 결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전 시장이 행정통합에 공감한다면 박형준 전 시장과 합의했던 내용을 토대로 계속 추진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만약 생각이 다르다면 무리하게 강행하기보다는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며 충분한 협의를 거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여지도 남겼다. 전 시장과 김상욱 울산시장은 부울경 메가시티(특별연합) 복원 의지를 내비치고 있지만, 부울경이 수도권 일극 체제에 맞서기 위해 통합 논의를 서둘러야 한다는 점에서는 뜻을 같이한다. 부울경 광역화는 동남권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으로 꼽혀 왔지만, 지방선거 뒤 정치 지형 변화에 따라 부침을 겪어왔다. 부울경 메가시티는 2018년 김경수 당시 경남지사를 중심으로 부울경 시도지사들이 추진했으며 기존 행정구역을 유지한 채 광역 교통, 산업, 관광 등 공동 사무를 처리하는 광역협력 구상이다. 2022년 4월 출범했지만 그해 6월 시도지사들이 국민의힘 소속으로 바뀌면서 동력을 잃고 폐기 절차를 밟았다. 이후 부울경 초광역 경제동맹 체제가 가동됐지만, 특별연합보다 한 단계 낮은 느슨한 협력체였다. 그 뒤 부산·경남 행정통합이 추진돼 왔지만, 6·3 지방선거에서 엇갈린 단체장 구도가 만들어지면서 꼬인 실타래를 풀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부울경 행정통합은 여야를 떠나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다만 통합의 속도와 방식에선 쟁점이 있을 수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부울경 단체장들이 광역 협력과 상생에 대해선 이견이 없다는 것이다. 전 시장은 경남 없는 초광역 경제권으로는 수도권에 대응하기 어렵다고 본다. 박완수 지사는 광역 교통망 구축을, 김상욱 시장은 초광역 협력 복원을 강조한다. 행정통합으로 출범한 전남광주통합특별시는 AI·반도체 메가 프로젝트를 통해 활력을 찾고 있다. 부울경이 제2 경제권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행정통합을 본격화해야 한다. 광역화를 통해 경제·생활 공동체로 나아가는 것이 대도약하는 길이다.
계란, 최고의 식재료
계란은 지구상 최고의 식재료다. 사람들은 옛날부터 계란을 참 많이 먹었다. 개인적으로 채식을 한다면 안 먹을지언정, 계란을 먹지 않는 나라는 없다.요리도 무궁무진하다. 프라이도 하고 스크램블, 오믈렛도 있으며 계란말이 지단도 만든다. 빵·과자 등에 필수재료기도 하다. 호불호가 거의 없는 식재료다. 근데 최근엔 계란 가격이 많이 오르면서 마트에서 선뜻 집어들기가 꺼려진다.우리나라에서 계란은 하루 4900만 개 정도가 소비된다. 현재 생산량도 그 정도다. 계란을 낳는 산란계는 3일에 2개 정도 알을 낳는다. 우리나라 전역에서 키우는 산란계는 1분기 기준 7775만 마리에 달한다.지난 겨울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가 유행하면서 산란계 1134만 마리가 살처분됐다. 이 정도 규모면 계란 가격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가 없다. 7월 기준 계란 30개들이(XL사이즈) 소비자가격은 평균 7538원이다. 조류인플루엔자가 본격적으로 닥치기 전인 작년 11월(6499원)보다 16.0% 올랐다. 뿐만 아니라 마트에서는 동물복지란, 무항생제란 등에 특정업체 브랜드까지 더해지면서 실제 체감 가격은 이보다 훨씬 높다.농식품부에서는 계란 가격을 억누르기 위해 상반기 미국산 674만 개, 태국산 337만 개 등 1011만 개의 신선란을 수입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정도 규모는 하루 소비량의 4분의 1도 안 된다. 비행기로 들여오다보니 물류비도 만만치 않다. 모두 손해보고 시장에 푸는 것이다.정부는 앞으로 2억 개를 추가로 수입할 계획이다. 정부의 의도는 계란 유통업자들이 의도적으로 계란 가격을 조정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즉 계란 가격을 낮추지 않으면 언제든지 수입할 수 있다는 신호를 준다는 것이다.계란 1개에는 6~7g의 단백질이 들어 있으며, 비타민 A·D·E, 비타민 B군, 철분, 셀레늄 등 다양한 영양소가 있다. 농촌진흥청의 한 계란 전문가는 등급으로 계란을 고르는 것이 가장 낫다고 한다. 신선함의 정도를 ‘등급 마크’(1+등급, 1등급 등)로 표시한다. 동물복지란, 무항생제란도 좋지만 영양학적으로 차이가 없어 사회적 가치를 소비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는 설명이다.계란 가격에 민감한 것은 그만큼 많이 쓰이는 식재료이기 때문이다. 농식품부 설명은 병아리가 점점 자라고 생산량이 회복되면서 이달부터는 점차 가격이 안정될 것이라고 한다. 마트별로 시기는 다르지만, 계란에 20% 할인정책도 시행할 예정이다.
논설주간/상무이사
강윤경
수석논설위원
김승일
논설위원
정달식
이상윤
김상훈
천영철
[김상훈의 포커스온] 청년이 미래라면
소득보다 가파른 속도로 집값, 월세 등 주거비가 치솟으면서 2030 청년들의 박탈감이 커지는 상황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의 역대급 성과급이나 한때 9000을 돌파했던 역대급 코스피 지수도 많은 청년들에겐 ‘딴 세상 이야기’다. 취업난, 대출 규제, 자산 가격 폭등이 겹치며 2030 세대는 갈수록 심각해지는 ‘자산 양극화’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익히 알려진 대로 2030 청년층과 4050 중장년 세대의 부동산 자산 격차는 크다. 저성장으로 취업난이 장기화하면서 소득이 줄어든 20대와 정부의 강력한 대출 규제로 자산을 불릴 기회를 놓친 30대 청년층의 재산 증식은 정체된 반면, 고성장·저금리와 집값 폭등 수혜를 누린 중장년층은 재산을 늘릴 수 있었다. 그런데 세대 간 양극화에 이어 세대 내 양극화까지 벌어지며 20, 30대의 출발선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은 우려스럽다. 한국은행이 지난달 발표한 ‘우리 경제 가계 양극화의 실태와 파급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순자산과 소득이 모두 하위 20%인 가구에서 청년층 비중이 2020년 7.9%에서 지난해 15.2%로 배 가까이 늘었다. 이 기간 모든 연령대 중에서 20, 30대 비중만 상승했다고 한다. KBS가 지난달 20대 가구 자산을 분석한 결과, 지난해 소득 상위 20%와 하위 20%의 평균 순자산 격차(빚 제외)가 6억 3000만 원 대 3327만 원으로 무려 19배에 달한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나오기도 했다. 20대 가구 상위 20% 평균 순자산은 부동산, 예적금, 주식 등 금융 자산을 모두 포함한 순자산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가난해도 노력하면 중산층으로 올라간다는 희망이 있었지만, 지금 청년들은 출발선부터 벌어진 격차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것이다. 20·30대 내 소득 상하위 간의 순자산 격차가 크게 벌어진 문제의 근원은 청년 고용절벽이다. 고용 양극화는 소득 양극화로 이어진다. 집값 상승으로 자산 형성의 문턱이 높아진 데다 소득 격차가 동시에 커지면서 청년층의 경제적 어려움이 확대되는 것이다. 또 거주 지역과 직장 차이에 따른 ‘이중 격차’ 구조도 한 요인으로 꼽힌다. 같은 청년 세대라도 수도권에 살면서 양질의 일자리를 가진 청년과 지방에서 직장에 다니는 청년 사이의 자산 축적 속도가 극명하게 갈린다는 것이다. 수도권에 사는 대기업 청년은 중장년 세대보다는 덜해도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에 부동산 자산 증식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반면 지방의 중소기업에 다니는 청년은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과 정체된 지역 부동산 시장이라는 이중고를 겪는 상황이다. 소득 격차보다 자산 격차가 삶의 출발선을 가르는 시대가 된 만큼, 2030세대의 초기 자산 형성을 돕는 정책 시행이 더 중요해졌다. 자산 형성 시점이 늦어진다면 ‘스노볼링’(눈덩이 굴리기) 효과 때문에 미래에 따라잡기 힘든 격차가 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정부의 정책금융상품인 청년미래적금의 1차 가입 신청에 234만 3000명이 몰렸다고 한다. 청년미래적금은 정부가 청년층의 자산 형성과 미래 준비를 지원하기 위해 설계한 상품이다. 가입 대상은 만 19~34세 청년으로, 병역 이행자의 경우 복무 기간(최대 6년)은 연령 산정에서 제외된다. 3년 만기 자유적립식 상품으로 매월 1000원부터 최대 50만 원까지 자유롭게 납입할 수 있다. 은행 이자에 정부 기여금과 비과세 혜택을 더하면 우대형 기준 최고 연 19.4% 수준의 수익 효과를 기대할 수 있어 출시 직후 높은 관심을 받았다. 정부는 청년미래적금을 최대 320만 명이 가입할 수 있는 규모로 설계하고 관련 예산을 편성했다. 청년미래적금 2차 가입 신청은 올해 12월 중 실시될 예정이다. 문재인 정부의 ‘청년희망적금’, 윤석열 정부의 ‘청년도약계좌’, 이재명 정부의 ‘청년미래적금’ 등 정권마다 청년 자산 형성을 위한 금융상품을 내놓았다. 하지만 정권 교체 때마다 청년 금융정책의 간판이 바뀌면서 정책 일관성 부족에 대한 지적도 제기됐다. 정권과 상품이 함께 바뀌는 구조는 청년층의 장기적인 금융 계획의 불확실성을 키운다. 청년층의 불안정한 소득과 고용 상황을 고려하면 무엇보다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제도의 설계가 필요하다. 단기적인 성과에 치우치기보다 중·저소득 청년층이 꾸준히 자산을 형성할 수 있도록 일관된 정책의 틀과 실질적인 지원책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청년층이 자산 형성 기회를 잃으면 내수가 위축되고 성장 잠재력 자체가 떨어질 수 있다. 청년들이 희망을 상실하지 않고 다시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야 한다. 정부는 청년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데 국가적 역량을 집중하고, 주택·금융·조세 등 전반에 걸쳐 청년 지원책을 면밀하게 설계해야 할 것이다.
[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부산, 바다의 도시
부산의 모든 길은 바다로 향한다. 금정산과 백양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온천천과 동천을 지나 바다를 만난다. 낙동강은 삼각주를 이루며 남해로 스며들고, 산비탈을 따라 난 골목길은 어느새 항구와 시장으로 이어진다. 도시의 길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바다 앞에 닿는다. 그러나 바다는 길의 끝이 아니다. 부산항을 떠난 배는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으로 향하고, 남중국해를 지나 동남아시아와 인도양으로 이어진다. 조선통신사는 그 길을 오갔다. 개항 이후에는 새로운 문물과 사상이 그 항로를 따라 들어왔다. 한국전쟁 때는 수많은 피란민이 이 항구를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오늘도 컨테이너선은 세계의 항만과 부산을 잇는다. 부산의 길은 육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바다가 되고, 그 바다는 다시 세계로 이어진다.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은 〈지중해〉에서 역사의 무대를 왕조나 국가보다 바다에서 읽어냈다. 그에게 지중해는 하나의 바다가 아니라 수많은 도시를 잇는 거대한 공간이었다. 바다는 영토를 가르는 경계가 아니라 사람과 물자, 언어와 기술, 사상과 생활 방식이 오가는 길이었다. 그렇게 서로 다른 도시들은 오랜 시간을 두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저마다의 문명을 쌓아갔다. 얼마 전 발간한 인문무크지 〈아크〉의 주제를 ‘바다’로 정하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열여덟 명의 필자는 모두 바다를 이야기했지만, 어느 누구도 같은 바다를 바라보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바다는 생업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유년의 기억이었다. 또 다른 이에게는 떠난 이를 기다리는 시간이었고, 생명의 기원을 사유하는 공간이었다. 같은 바다를 두고도 서로 다른 삶과 시간이 겹쳐 있었다. 도시도 그렇다. 같은 항구를 품고도 도시는 서로 다른 얼굴을 갖는다.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를 건너온 상인과 학자들이 모여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세웠고, 베네치아는 동방과 서방을 잇는 항로 위에서 유리와 직물, 건축 기술을 받아들이며 독자적인 도시 문화를 만들었다. 암스테르담은 운하를 도시의 기반시설이자 공공공간으로 발전시키며 상업과 금융의 중심이 되었다. 이 도시들이 남긴 것은 거대한 항만이 아니었다. 바다를 통해 축적된 시간이었다. 부산의 거리를 걸으면 도시의 변화를 실감하게 된다. 광안리와 해운대만이 아니다. 초량의 골목과 영도의 흰여울, 기장의 해안 길, 가덕도의 작은 포구까지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필자의 사무실 근처인 자갈치시장에는 여행객과 상인이 뒤섞이고, 해 질 무렵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다양한 언어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거리에서 만나는 도시의 풍경은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바다는 지금도 새로운 사람들을 부산으로 이끌고 있다. 해 질 무렵 가덕도에서 거가대교와 부산 앞바다를 본 적이 있다. 그곳에서 본 바다는 하나의 거대한 항로가 되었다. 노을이 천천히 수평선 위로 번질 무렵 대만의 양밍해운 선박이 지나고, 프랑스 CMA CGM의 컨테이너선이 뒤를 이었다. 일본 ONE의 자주색 선박과 스위스 MSC의 초대형 선박도 같은 시간 같은 바다를 지나고 있었다. 국적도, 선사도 달랐지만 모두 부산 앞바다에서 만났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 문득 부산의 미래는 이미 바다 위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그 풍경을 석양이 아름다운 관광지로 기억할 것이다. 다른 누군가는 세계 물류가 교차하는 항로로 읽을 것이다. 건축을 하는 내게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하나의 공간에서 관광과 산업, 풍경과 경제, 시민의 일상과 세계의 흐름이 동시에 만나는 장면이었다. 좋은 건축은 건물을 드러내기보다 이런 풍경을 오래 머물게 한다. 자연과 사람이, 그리고 도시와 바다가 서로를 바라보도록 만드는 일이 건축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부산은 다시 바다를 중심에 놓기 시작했다. 새롭게 출범한 시정은 해양 관련 산업과 기관을 유치하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 북항 재개발과 해양관광을 중심으로 도시의 새로운 가능성도 모색하고 있다.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낸 시장이 시정을 맡으면서 해양은 더 이상 여러 정책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도시의 핵심 의제로 자리 잡았다. 부산이 오랫동안 품어온 해양수도의 구상이 한층 속도를 낼 것이라 기대한다. 해양수도는 해양산업의 규모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세계의 사람들이 찾아와 머무는 공간, 시민이 일상 속에서 바다를 누리는 수변, 오래된 항만의 기억과 새로운 도시의 시간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때 비로소 설득력을 얻는다. 해양도시는 바다를 가진 도시가 아니라, 바다를 삶 속으로 끌어안은 도시이기 때문이다. 부산은 오래전부터 바다를 통해 세계를 만났다. 그 바다는 오늘도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
[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로마의 소나무, 그 막강한 피날레
지금이야 하루 만에 비행기로 전 세계를 오갈 수 있지만, 과거에는 한 지역을 벗어나 활동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세상에는 열악한 환경을 사뿐히 뛰어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생의 3분의 1을 여행으로 보낸 모차르트가 그랬고, 전 유럽을 돌며 콘서트를 가진 파가니니와 리스트가 그랬다. 오토리노 레스피기(Ottorino Respighi) 역시 같은 부류의 음악가였다. 1879년 7월 9일에 태어난 레스피기는 이탈리아 볼로냐 음악학교를 거친 뒤, 1900년부터 1903년까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작곡을 배웠다. 이듬해에는 베를린으로 건너가 막스 브루흐를 사사했다. 그는 바이올린, 비올라, 피아노 연주에도 재능이 뛰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 오페라단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903년부터 1908년까지는 무젤리니 현악 4중주단의 멤버로도 활동했다. 1913년부터는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작곡과 교수가 되었으며, 1924년에는 원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작곡과 연주 활동에 주력하면서 유럽과 미국 등지를 여행했다. 행적으로만 보자면 진정한 코스모폴리탄이라 할 수 있지만, 레스피기의 정서적 고향은 항상 이탈리아 로마였다. 그중에서도 ‘로마 3부작’은 레스피기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린 대표작이다. ‘로마의 분수’(1914~16), ‘로마의 소나무’(1923~24), ‘로마의 축제’(1928)로 이어지는 로마 시리즈는 색채적 관현악법과 감각적인 화성이 돋보이는 명곡들이다. 마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림스키-코르사코프, 드뷔시의 음악을 한데 모아놓은 듯하다. 레스피기는 후기 낭만주의 전통에 서 있는 음악가였지만, 중세 이탈리아의 그레고리안 성가 형식에도 큰 관심을 보여 ‘교회의 유리창’, ‘류트를 위한 옛 아리아와 무곡’처럼 고풍스러운 작품들도 남겼다. 레스피기의 이름을 가장 진하게 남긴 작품으로는 역시 ‘로마의 소나무(Pini di Roma)’를 꼽을 수 있다. 그가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교수 시절 작곡한 이 곡은 총 4부로 구성된 교향시이다. 제1부 ‘보르게제 저택의 소나무’, 제2부 ‘카타콤베 부근의 소나무’, 제3부 ‘자니콜로의 소나무’, 제4부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로 이어지는데, 특히 4부에서 묘사되는 로마 군단의 행진 장면이 유명하다. 안개 낀 새벽, 저 멀리서 로마 군단이 다가오는 듯 저음 현악기가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이 장면은 금관악기가 합세하면서 점점 선명해지고, 이어 오케스트라가 거대한 음향으로 확대된다. 곡의 길이는 5분 정도에 불과하지만, 듣고 있노라면 시간을 거슬러 그 대열에 끼어 함께 걷고 있는 듯한 판타지에 사로잡힌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노르웨이 축구 응원단에 섞여 함께 노를 젓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데스크 칼럼] 마지막 기회
부산 경제를 말할 때 결정적인 두 가지 장면이 있다. 1982년 정부의 대도시 성장억제정책과 1990년대 말 시작된 디지털 대전환이다. 처음에는 도시 성장의 흐름이 꺾였고, 두 번째는 악순환에 빠져 침체가 심화됐다. 부산은 박정희 시대에 수출 주도형 산업화 전략에 따라 경부고속도로와 부산항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성장했다. 그러다 1982년 제2차 국토종합개발계획에서 서울과 함께 성장관리도시로 지정됐다. 많은 지역이 그린벨트로 묶이고 신규 공장이나 창업 기업에는 중과세가 부과됐다. 제조업 기업들이 부산을 떠나 역외로 이전했다. 대기업 없는 부산의 시작이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극복하면서 정보화 시대가 열렸다. 인터넷과 휴대폰이 등장했고, 정부 정책 방향과 민간 투자 모두 제조업과 중화학공업 중심에서 디지털과 벤처산업 육성으로 이동했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거치며 서울 개발을 억제하는 정책은 고삐가 풀린 상태였다. IT 기업과 양질의 일자리가 자본을 따라 수도권에 쏠렸다. 부산은 첨단산업을 키우지도 데려오지도 못했다. 두 장면 모두 중앙정부가 국토균형발전을 제대로 계획하고 이행하지 못한 책임이 크지만, 지방정부도 산업과 정책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기업 생태계와 인재 기반이 미비한 상황에서 투자나 연구개발보다 전통 서비스업에만 의존했고, 기존 제조업을 혁신하고 사업을 재편하는 데도 더뎠다. 그 결과 부산은 경제 성장의 주도권을 놓쳤고, 기업과 일자리는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이제 세 번째 장면이 펼쳐질 참이다. 인공지능(AI) 대전환 시대를 맞아 정부는 반도체와 AI 데이터센터, 피지컬 AI의 ‘3대 메가 프로젝트’를 국가 발전 비전으로 제시했다. 지방 주도 성장이라는 방법론도 함께 내놓고 호남권, 충청권, 영남권에서 보고회도 열었다. 권역별로 주력 분야에서 대기업 투자와 정부 집중 지원을 결합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권역별로 투자 규모를 줄세우는 건 의미 없지만, 영남권은 기존 사업을 재탕하는 수준이고 구체성도 떨어진다. 무엇보다 당장 원전 추가 건설을 말하는 건 우려스럽다. 이미 원전 10기가 운영 또는 계획 중인 동남권에 원전을 더 지을 수 있다는 당국자 발언이 어떤 논의나 합의 과정도 없이 흘러나온다. 이미 위험을 감수하면서 원전을 이고 사는 지역 주민들은 아랑곳없다. 그럼에도 세 번째 장면을 부산 경제의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건 분명하다. 지방정부가 지금부터 어떻게 대응하고 준비하고 실행을 이끌어내느냐가 중요하다. 영남권 312조 원, 도합 1600조 원이라는 선뜻 와닿지 않는 목표가 아니라 부산시의 치밀한 전략과 적극적인 노력이 ‘3대 메가 프로젝트’와 ‘지방 주도 성장’의 과실을 결정한다. 부산시는 대규모 투자를 마중물 삼아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조성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산업 현장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기존 자원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른바 ‘중후장대’ 산업과 다양한 분야의 부품·기자재산업, 그리고 숙련된 현장 인력들의 암묵지는 AI가 디지털 공간을 넘어 물리적 환경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피지컬 AI 기술을 구현하는 데 최적의 자산이자 경쟁력이 될 수 있다. 첨단사업 전략과 도시공간 전략은 함께 가야 한다. 국토의 균형발전만큼이나 부산의 균형발전도 시급하다. 핵심 공약에 포함된 권역별 AI 전략은 기대할 만하다. 북항과 원도심은 글로벌 AI 혁신 거점, 서부산과 에코델타시티는 제조업 AX와 글로벌 AI 데이터센터 거점, 센텀지구를 포함한 동부산은 문화콘텐츠 AI 거점으로 조성하는 구상을 차질 없이 추진해야 한다. 동남권 공동 대응은 필수다. 동남권이 수도권과 경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성장축이 되기 위해서는 더 이상 부산과 울산, 경남이 서로 경쟁해서는 답이 없다. 부·울·경은 조선과 우주항공 분야는 물론이고, 국가전략기술 지정이 유력한 소형모듈원전(SMR) 분야에서도 이미 산업 기반을 공유하고 있다. 연구개발과 인재 양성부터 힘을 모아야 같이 강해질 수 있다. 부산은 ‘3대 메가 프로젝트’에 앞서 이미 해양수산부와 HMM 이전이라는 상징적인 ‘선물’을 받았다. 그러나 ‘부산시장’ 전재수의 시정은 이제 시작이다. 부산시는 중앙정부의 ‘지방 주도 성장’이 기득권을 가진 수도권의 반발과 재정을 가진 정부 부처의 어깃장에 힘이 빠지지 않도록 더 목소리를 내고 요구하고 때로는 맞서야 한다. 세 번째 장면은 부산 경제가 다시 활력을 찾고, 청년들을 돌아오게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디지털 대전환이 그랬듯 AI 대전환의 흐름은 가차가 없고, 그 파급력은 더욱 클 것이다.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다음은 없을지도 모른다. 최혜규 경제부 부장 iwill@busan.com
[중앙로365] 유럽의 폭염은 어째서 조롱거리가 되었나
이렇게 시원한 여름이 있었나 싶다. 7월이 됐는데도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분다. 한낮에도 그늘에 있으면 그리 덥지 않다. 기상청은 지난달 전국 폭염일수가 0.6일로, 평년(0.7일)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밝혔다. 몇 년 동안 우리를 괴롭혔던 6월 열대야는 자취를 감췄다. 유럽은 정반대다. 대륙 전체가 북부 아프리카에서 유입된 뜨거운 공기에 갇히며 폭염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달 스페인과 프랑스에선 폭염으로 3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폴란드와 체코는 기후가 서늘한 지역에 있음에도 최고기온이 한때 40도를 넘겼다. 북유럽 국가 덴마크도 일부 지역이 37도를 기록했다고 하니, 유럽을 데우고 있는 ‘오메가 열돔’의 위력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여름 날씨 선선해 에어컨 보급 낮고 지구온난화 등 기후 위기 의제 주도 에너지 사용량 많은 제조업 국가 비판 최근 기록적 폭염에 냉방기기 구입 붐 AI 데이터센터 건립 위해 탈원전 철회 일방적 잣대 강요하는 오만 경계해야 기후 위기는 지구적 재앙이다. 유럽에 닥친 폭염은 다른 대륙 사람들에게도 위기감을 줄 법 하다. 그런데 폭염에 속수무책인 유럽의 현 상황은 조롱거리가 된 듯 보인다. 그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소재가 바로 에어컨이다. 유럽의 가정용 에어컨 보급률이 매우 낮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프랑스가 24% 수준이고, 독일과 영국은 10% 이하인 걸로 전해진다. 몽골 정도 되는 높은 위도에 서안 해양성 기후까지 더해지며 여름엔 선선하고 겨울엔 온화한 날씨가 지속됐던 덕분이다. 그런데 근래 들어 폭염이 계속되면서 에어컨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 인터넷에서는 프랑스 파리의 한 마트에서 사람들이 냉방기기를 사기 위해 오픈런을 벌이는 사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에선 언론인·인플루언서를 중심으로 프랑스의 낮은 에어컨 보급률을 비웃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한다. 이에 오드리 풀바 파리 부시장은 “유럽 폭염은 미국의 에어컨 사용 탓”이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럽 폭염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각은 우리도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유튜브에선 “에어컨 설치 기사도 없을 텐데 설치는 할 수 있겠냐”거나 “에어컨 파는 회사 주식 사자”는 댓글이 줄을 잇는다. 현재 나타나고 있는 여론은 한 단어로 압축된다. 업보라는 것이다. 유럽은 에어컨 사용에 부정적이었다. 에어컨이 지구온난화의 주범이자 미국식 과소비의 상징이라는 이유다. 사실 유럽은 에어컨 사용뿐 아니라 기후 위기 대응과 관련한 의제들을 생산하고 주도해 왔다. 탈탄소 재생에너지 확대 기준을 정립하고 때론 강요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2022년 대선 토론 당시 언급하며 국내에도 잘 알려지게 된 RE100이 대표적이다. 2014년 영국에서 시작된 RE100은 기업이 사용하는 모든 전력을 2050년까지 전량 재생에너지로 대체하자는 캠페인이다. RE100 자체는 강제성이 없지만 하나의 지표로서 수출·공급 계약 등에 영향을 끼친다. 원전은 RE100 에너지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유럽은 전체 산업에서 서비스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그래서 재생에너지로 산업에 필요한 전기를 충당하는 게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하지만 우리처럼 제조업 비중이 높은 나라들은 재생에너지만 가지고는 산업을 돌릴 수 없다. 에너지가 많이 드는 제조업 생산기지는 아시아 국가들에 떠넘겨놓고, 원자력·화력 발전 이용을 빌미로 무역장벽을 세우는 건 사다리 걷어차기에 지나지 않는다. 나라마다 놓여 있는 기후 환경이 다르고,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 그것을 깡그리 무시하고 하나의 규범적 기준을 세운다는 건 오만이자 위선이다. 자전거는 선이고 자동차는 악인가. 절대적인 건 없다. 어떤 이들은 네덜란드의 높은 자전거 수송 분담률을 들어 우리나 미국의 자동차 이용을 비판한다. 네덜란드 기온은 연평균 10~11도로, 더워도 25도를 넘는 일이 별로 없고 추워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들처럼 봄가을이 계속되는 날씨라면 우리도 자전거 타는 인구가 늘고 그만큼 인프라도 갖춰졌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오늘날 폭염으로 신음하는 유럽에 조소를 보내는 건 이러한 반발심이 누적된 결과다. 유럽이 주도한 기후 질서는 부메랑이 되어 자신들에게 되돌아가고 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 유럽은 대대적인 탈원전에 나섰다. 부족분은 러시아에서 싼값에 천연가스를 들여와 메웠다. 그러던 중 러·우 전쟁이 발발하며 차질이 빚어졌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EU는 2022년 7월, 탄소 중립 달성을 위한 친환경 가이드라인(그린 택소노미)에 원자력과 천연가스를 포함했다. 최근엔 AI 데이터센터 확대에 따른 전력 수요까지 가세하면서 벨기에·덴마크·스웨덴·이탈리아 등 탈원전을 천명했던 국가들이 ‘탈탈원전’으로 돌아서는 중이다. 프랑스에서는 내년 4월 치러질 대선을 앞두고 에어컨 설치 확대가 주요 화두로 부상했다고 한다. 상대방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강요하는 게 얼마나 무지몽매한 일인지를 새삼 깨닫는 요즘이다.
[프런티어] AI 시대, 부산은 제조를 다시 읽어야 한다
사람들은 인공지능(AI)을 이야기하면 거대한 데이터센터와 최첨단 반도체, 화려한 AI 에이전트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앞으로 산업의 판도를 바꿀 AI는 서버 안이 아니라 공장 바닥에서 완성될 가능성이 더 크다. 기계가 사람처럼 보고, 판단하고, 움직이는 피지컬 AI 시대가 열리면서 제조 현장에서 축적된 경험과 데이터가 새로운 전략 자산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변화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AI 시대에 부산은 무엇으로 경쟁할 것인가. 많은 도시는 AI 기업 유치와 연구단지 조성에 집중하고 있다. 물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모든 도시가 같은 방식으로 경쟁할 필요는 없다. 부산에는 다른 도시가 쉽게 가질 수 없는 자산이 있다. 조선, 기계 부품, 항만·물류, 신발 등 제조업의 역사와 현장에 축적된 공정 데이터, 그리고 숙련 기술이다. 우리는 이를 전통산업이라 불렀지만, 피지컬 AI 시대에는 그 축적이 가장 가치 있는 데이터가 된다. 최근 정부와 산업계가 숙련공의 암묵지를 디지털 데이터로 축적하는 사업에 주목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숙련자의 손끝에서 이루어지는 미세한 판단과 공정 노하우는 매뉴얼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를 데이터로 축적하고 학습시킨다면 AI는 실제 생산 현장을 이해하고 함께 일하는 기술로 발전할 수 있다. 필자는 지난 몇 년간 부산 신발산업과 함께 이러한 가능성을 확인해 왔다. 처음부터 스마트팩토리를 목표로 하지는 않았다. 2019년 크리스틴컴퍼니와 산학협력을 시작했을 당시만 해도 AI의 중심은 생성형 AI가 아니라 이미지 인식과 수요 예측 등 분석 기술이었다. 무엇보다 산업을 이해하고 데이터를 축적하는 일이 먼저였다. 120여 개의 신발 제조 공정을 데이터화하고, 브랜드와 공장을 연결하는 제조 매칭 플랫폼 ‘신플(SINPLE)’을 구축하며 산업의 디지털 기반을 쌓아갔다. 이후 생성형 AI의 등장은 디자인 영역으로 연구를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범용 AI가 예상보다 빠르게 발전하면서 자체 AI 모델만으로는 차별화하기 어렵다는 현실도 마주했다. 그 경험은 오히려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AI가 잘하는 것과, 우리만이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제조 데이터와 공정 이해를 바탕으로 디자인 프로세스까지 AI로 확장한 신발·패션 특화 플랫폼 ‘슈캐치(ShoeCatch)’를 개발했다. 브랜드 콘셉트와 스케치, 이미지를 입력하면 AI가 산업 특성에 맞는 형태와 소재, 컬러를 제안하고 가상 피팅 이미지와 홍보 콘텐츠까지 생성한다. 중요한 것은 생성형 AI를 활용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신발산업에 대한 이해와 제조 데이터를 AI와 결합했다는 점이다. 결국 AI의 경쟁력은 산업에 대한 깊은 이해와 현장의 데이터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부산에는 이러한 가능성이 곳곳에 숨어 있다. 조선소의 용접 기술, 신발 장인의 손기술, 항만 운영 경험, 기계 부품 가공 노하우는 모두 세계 어디에도 없는 부산만의 자산이다. 이제는 이를 단순한 경험으로 남겨둘 것이 아니라 데이터 자산으로 축적하고, AI가 학습할 수 있는 형태로 전환해야 한다. 이를 위해 기업은 AI를 얼마나 도입했느냐보다 얼마나 의미 있는 데이터를 축적했느냐를 경쟁력으로 삼아야 한다. 또한 산업별 특성을 반영해 AI 도입 효과를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평가체계와 지표를 마련해야 현장의 데이터가 지속적으로 축적되고 AI의 실질적인 효용도 검증할 수 있다. 대학은 이를 뒷받침할 인재를 양성하고, 기업과 함께 데이터를 축적·실증하는 혁신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부산 역시 AI 기업 유치에 머무르지 말고 산업별 데이터 자산화, 숙련 기술의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제조 AI 실증, 산업별 AI 성과를 체계적으로 평가하는 기반을 갖춘 ‘부산형 피지컬 AI 전략’을 준비해야 한다. 앞으로 AI 시대의 승부는 기술의 속도가 아니라 산업의 깊이에서 결정된다. 부산이 가진 제조의 경험과 현장의 데이터는 미래 AI 산업의 가장 강력한 자산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경쟁력을 가장 부산다운 방식으로 다시 해석하는 일이다. 그 순간, 가장 부산적인 AI가 가장 세계적인 AI가 될 것이다.
부산해사법원 ‘법관 10명·직원 40명 체제’
윤석열 ‘체포방해’ 징역 7년 확정
상폐 위기 한성기업, 애국 개미 ‘돈쭐’로 기사회생
‘AI 대체 불가’ 전문 기능인 꿈꾸는 30~40대
與 ‘보완수사권 폐지’ 법안 발의… 野 “민주당 살인자 편”
박준 의장 "행정통합, 경남도민 삶 나아지는지 꼼꼼히 따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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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한 자작극’ 핵심 물증은 헬스장 CCTV… 범행 시인하고도 선거 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