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호르무즈해협 청해부대 파병, 국회 동의 절차 필요하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일본·중국 등 동북아 3국을 비롯한 5개국을 향해 호르무즈해협으로 군함을 파견하라는 요구를 하고 나섰다. 중국을 제외하면 이란에서 전쟁이 발발한 이후 처음으로 동맹국을 참전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한국과 일본 등 이번에 거론된 동맹국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그동안 안보 무임승차론에 가까운 비판을 들이댄 국가들이어서 기존 방위비 부담 증액 요구를 넘어서는 요구가 본격화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중동산 원유 90% 이상이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해 국내로 들어오는 현실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를 마냥 외면할 수 없는 입장인 정부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4일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호르무즈해협의 유조선 등 선박 통행 정상화를 위해 한국·일본·중국·영국·프랑스 등에 군함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정부는 아직 미국 측으로부터 공식 파병 요청은 없었다고 밝혔으나 트럼프 대통령의 직접 언급에 따른 공식 요청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미국의 이란 공격에 대한 국제법상 논란이 엄연한 가운데 고위험 작전 병력 투입은 자칫 이란을 적으로 돌릴 수도 있기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한미군의 역할과 책임의 재조정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미 동맹 현대화’ 협의가 진행중인 상황에서 미국의 공식 요청을 외면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 때문에 국내에선 2020년 아덴만에 파병된 청해부대가 작전임무 구역을 호르무즈해협까지 확장하는 방식으로 한국 상선 호위 임무를 수행한 전례가 거론된다. 당시 미국이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을 제거하면서 미국과 이란 사이 긴장이 고조되자 고심 끝에 나온 해법이었다. 미국이 호르무즈해협 공동방위를 위해 주도하던 ‘국제해양안보구상’에 참여하지 않고 독자 파병을 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일본도 당시 미국의 협력 요청에 자위대의 정보 수집 임무를 명목으로 독자 노선을 택한 바 있다. 하지만 현재 중동 정세는 당시보다 훨씬 긴박하고 복잡해졌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 방안이 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미국이 콕 집어 파병을 요구한 이상 우리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그다지 많지 않다. 임무를 ‘한국 국적 선박 보호와 해역 감시’에만 국한하고 미군의 지휘와 통제 체계에서 형식상 분리하는 방안도 쉽지 않을 터이다. 어떤 형태로든 파병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면 이번에는 국회의 동의 절차를 거칠 필요가 있어 보인다. 2020년 청해부대 호르무즈 독자 파병 때는 국회 동의를 받지 않았지만 이번 미국의 요구는 다국적군 임무에 해당하기에 절차적 정당성 확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2020년 당시와 마찬가지로 미국과 이란 어느 한쪽에 서는 것은 교민과 기업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기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사설] 초고속 추경, 지방선거용 의혹 불식하고 민생에 쏟아야
정부가 중동 전쟁 발 고유가와 민생경제 충격 완화를 위해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에 가속도를 내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2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신속한 추경 편성을 주문하자 기획예산처는 13일 초고속 예산 편성 작업에 착수했다. 기획처는 추경 주요 항목으로 고유가 상황 대응을 위한 물류·유류비 부담 경감, 서민·소상공인·농어민 등 민생 안정, 외부 충격에 따라 직접적으로 타격을 받는 수출기업 지원 등을 꼽았다. 추경 규모는 추가 국채 발행 없이 10조~20조 원 규모에 달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소상공인·화물 운송업자·에너지 취약계층이 유가 충격에 직격을 당하는 비상 국면에서 추가 재정 투입이 불가피한 측면은 있다. 유가가 요동치고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위협하는 비상 상황에서 재정은 경제와 민생을 안정시킬 효과적인 방어막일 수 있다. 중동 전쟁이라는 중대 변수는 국가재정법상 추경 편성 요건에도 부합한다. 정부가 추경 편성에 자신감을 갖는 배경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 실적에 따른 법인세 세수 급증이다. 또 주식 거래 증가와 맞물려 증권거래세도 예상치보다 5조 원가량 추가로 걷힐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정부는 ‘추가 국채 발행 없는 추경’을 통해 금융시장 충격을 최소화한다는 방침이다. 정부는 각 부처의 사업 계획을 받아야 추경 규모를 가늠할 수 있고 현재 목표치는 없다고 선을 긋는 입장이다. 하지만 정부는 재정지출의 역효과도 면밀하게 따져봐야 한다. 올해 예산은 728조 원으로 역대 최대로 편성된 상태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재차 돈 풀기에 나설 경우 통화량 증가에 따른 물가·환율 상승 등으로 서민 경제에 부담을 줄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말 49.1%였던 국내총생산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올해 사상 처음 50%를 넘어선다는 예측도 나오는 상황이다. 불확실한 전쟁의 향방만큼 추경의 재원이 될 초과 세수 전망은 유동적이다. 섣부른 낙관론에 기대어 추경 규모를 크게 늘렸다가 실제 세수가 받쳐주지 못하면, 다시 빚을 내야 하는 상황에 몰릴 수도 있다. 취약계층을 돕겠다는 취지의 추경이 서민 가계를 더 어렵게 만들지 않도록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재정은 국가 경제의 마지막 보루다. 위기 극복을 위한 마중물인 추가 재정은 취약계층과 민생에 대한 선별 지원 등 꼭 필요한 곳에 적기 투입해야 효과가 극대화한다. 중동 사태 대응이라는 추경 본래 목적과 무관한 사업까지 예산이 풀려서는 안 된다. 추경 시점이 6·3 지방선거와 맞물린다는 점도 우려되는 대목이다. 자칫 ‘지방선거용’이라는 오해를 사는 일이 없도록 지역 예산 끼워넣기나 선심성 지원 등은 차단해야 할 것이다. 실효성 있고 정밀한 추경 설계와 ‘핀셋 지원’은 필수다. 이를 통해 재정 건전성 유지와 민생 안정 달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함이 마땅하다.
[사설] 법왜곡죄 1호 고발 조희대 대법원장, 선 넘는 사법개혁
‘사법개혁 3법’이 12일 0시를 기해 정식 공포됐다. 재판소원제와 법왜곡죄는 법률 공포와 동시에 시행됐고 대법관 증원은 2년 뒤인 2028년 3월부터 단계적으로 이뤄질 예정이다. 그러나 제도 시행 첫날부터 사법부 수장이 형사 고발 대상이 되는 상황이 벌어지며 사법 체계는 시작부터 거센 혼란에 휩싸였다. 법왜곡죄와 재판소원 제도가 본격 시행된 바로 그날 조희대 대법원장이 고발된 사실이 확인되면서 정치 사건을 둘러싼 판검사 고소·고발 남발 우려가 현실로 드러난 모양새다. 사법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된 제도가 출발하자마자 사법부 최고 책임자를 겨냥한 형사 고발로 이어진 장면은 제도 변화의 파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할 것이다. 재판소원이나 법왜곡죄 모두 재판의 독립과 직결된 장치다. 이날 이병철 변호사는 이재명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파기환송 판결 과정에서 서면주의 원칙이 의도적으로 배제됐다며 조희대 대법원장과 박영재 전 법원행정처장을 법왜곡죄로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 고발했다. 사법부 최고 책임자가 새로 도입된 제도로 고발된 첫 사례라 하겠다. 대법원장이 지닌 상징성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런 점에서 사법부 수장에 대한 형사 고발이 제도 시행 첫날 등장했다는 사실은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사법 3법은 삼권분립이라는 권력 분립의 한 축을 건드리는 중대 사안이다. 그런데도 법 개혁의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문제는 이런 중대한 제도 개편이 사법부와 충분한 논의 없이 정치권 주도로 밀어붙여졌다는 점이다. 헌법기관의 권한과 구조를 바꾸는 문제를 정치적 다수의 힘으로 처리하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재판의 독립과 직결되는 제도라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법조계에서 재판소원제와 법왜곡죄 도입이 정치의 사법영역 개입을 심화시킬 것이라는 우려를 꾸준히 제기해 왔던 이유기도 하다. 그런데 그 우려가 현실이 된 것이다. 제도 시행 첫날 조 대법원장이 법왜곡죄로 고발된 상황은 그 경고가 단순한 가정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법조계에서는 사법 3법 도입으로 정치가 사법 영역에 개입할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화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에 사법부도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전국 법원장들은 12일부터 이틀간 충북 제천에서 간담회를 열어 재판소원 도입에 따른 절차 변화와 법왜곡죄 대응, 대법관 증원에 따른 사법 구조 조정 등을 논의하고 있다. 당연히 사법개혁 3법이 공포된 이상 초기 혼란과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삼권분립은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그렇기에 대법원 수장의 상징성은 결코 가볍지 않다. 정치 사건을 둘러싼 사법 판단이 형사 고발의 대상이 되는 일이 반복된다면 재판의 독립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총을 든 정부
이란은 ‘정규군’과 ‘혁명수비대’의 2중 군사 체계를 지닌 나라다. 혁명수비대는 1979년 이슬람 혁명 당시 1대 최고지도자 호메이니가 왕정 시절의 기존 정규군을 견제하고, 이슬람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창설했다. 해외 테러 지원, 핵 개발, 민병대 조직화, 사이버 전쟁 등 실질적 작전을 주도한다. 이란 군사력의 핵심인 탄도미사일 체계를 독점하고 호르무즈 해협도 관할한다. 이란 헌법은 혁명수비대의 역할을 ‘쿠데타 및 외국 간섭을 방어해 이슬람 체제를 수호한다’고 규정한다. 신정일치 국가에서 ‘이슬람 수호’는 초법적 권한을 의미한다. 선거로 선출된 행정 수반인 대통령조차 혁명수비대를 통제할 수 없다. 반면 국방부를 통해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정규군(42만 명)은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며 영토 방어와 전통적인 군사 임무에만 집중한다.19만 명에 이르는 혁명수비대는 지상군·해군·항공우주군과 정예 특수부대 쿠드스군으로 구성된다. 특히 쿠드스군은 가자지구의 하마스, 레바논의 헤즈볼라, 예멘의 후티 등 중동 지역 친이란 무장 단체들을 후원·지휘해 왔다. 혁명수비대는 휘하에 30만~50만 명 규모의 바시즈 민병대를 통솔하며, 최대 1100만 명에 이르는 예비군 조직을 통해 지역사회를 통제한다. 혁명수비대가 국가 권력 핵심으로 부상한 계기는 1980~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이었다. 이 전쟁을 거치며 장기전 수행 능력을 키웠다. 혁명수비대 출신들은 대통령·국회의장·장관·국회의원 등 요직을 도맡았다. 혁명수비대에서 활동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집권기(2005~2013)엔 내각 절반 이상이 혁명수비대 출신이었다. 이들은 석유·가스, 건설, 통신, 금융 등 핵심 산업 분야 기업으로도 진출해 있으며, 경제 활동 규모는 국내총생산의 40%에 달한다. 혁명수비대가 ‘총을 든 정부’ ‘정부 위의 정부’로 통하는 이유다.이번 중동 전쟁에서 미국의 승패는 혁명수비대와의 싸움에 달렸다는 시각이 많다. 혁명수비대는 ‘세계 경제의 목줄’인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한 뒤 광범위한 미사일·드론 보복 공습을 통해 강경 대응에 나서고 있다. 이들은 기득권과 현 체제를 보장해 줄 인물로 새 최고지도자 모즈타바 하메네이를 내세워 ‘국가 총력전’을 펼치는 상황이다. 미국과 이란 모두 휴전 협상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면서 전쟁 장기화 우려가 크다. 미국과 혁명수비대의 ‘강 대 강’ 대치가 어떻게 끝을 맺을까. 전 세계는 ‘호르무즈 블랙홀’에서 언제 빠져나올 수 있을까.
논설주간/상무이사
강윤경
수석논설위원
김승일
논설위원
정달식
이상윤
김상훈
천영철
[데스크 칼럼] 뺑덕 어멈과 행정통합, 그리고 정주영 정신
“삐쭉하면 빼쭉하고~~~, 빼쭉하면 삐쭉하고~~~.” 이렇듯 판소리 심청가 속 뺑덕 어멈의 변명은 끝이 없다. 그녀는 늘 “내 잘못이 아니오”라는 말로 책임을 떠넘기고 억지와 거짓으로 상황을 모면한다. 관객은 그 억지스러운 말에 웃음을 터뜨리지만, 그 웃음 뒤에는 씁쓸한 교훈이 남는다. 공동체 속에서 신뢰를 잃은 사람이 어떤 말로를 맞게 되는지, 뺑덕 어멈은 풍자로 보여준다. 그런데 이 풍자는 단지 옛 이야기 속에만 머무는 것일까. 오늘날 수도권 과밀화 해소와 지역 균형발전을 위해 시작된 광역자치단체 간 행정통합 논의를 들여다보면, 뺑덕 어멈의 그림자가 여전히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 광역단체 간 행정통합 논의는 2009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김태호 전 경남도지사는 부산·울산·경남을 통합해 메가시티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그는 “동남권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행정구역 개편을 포함한 실질적인 대통합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17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부울경 메가시티 논의는 제자리걸음을 반복하고 있다. 메가시티 형태가 행정연합이냐, 행정통합이냐를 두고 ‘옥상옥’ 논란을 빚었다. 조직이 비대해지고 권한이 중복돼 비효율이 생긴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마치 뺑덕 어멈이 “그건 다 심청이 탓이지”라며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과 닮았다. 실제로는 권한 조정과 제도 설계를 통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임에도, ‘옥상옥’이라는 말은 편리한 핑계처럼 소비된다. 문제 해결 의지보다는 현상 유지를 위한 변명에 가깝다. 또 다른 단골 핑계는 “주민투표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민주적 정당성 확보는 중요하다. 그러나 때로는 이 말이 시간을 미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지방선거가 가까워지면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가 등장한다. 주민들에게 충분한 정보와 토론의 기회는 제공하지 않으면서, 주민투표를 핑계로 결정을 미루는 모습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변명을 이어가는 뺑덕 어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수도권 과밀화는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수도권에는 인구와 산업이 과도하게 집중되면서 교통·주거·환경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 반면 지방은 인구 감소와 산업 공동화로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균형발전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국가적 과제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광주·전남을 제외하면 지방의 광역자치단체들은 서로의 이해관계에 묶여 행정통합 논의를 쉽게 진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중앙정부 지원이 불확실하다”는 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지원을 요구하면서도 구체적인 설계와 결단을 미루는 태도 역시 또 다른 변명처럼 들린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다. 그는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도전 정신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인물로 평가받는다. 울산 조선소 건설을 위해 영국 은행을 설득할 때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 지폐를 꺼내 보이며 “우리는 이미 오래전 철갑선을 만든 민족”이라고 말했던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작은 이해관계에 머물지 않고 더 큰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다. 행정통합은 그 과정에 늘 난관이 따른다. 지역마다 이해관계가 다르고, 정치권은 표 계산에 민감하며, 주민들은 정체성 문제로 반발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이런 복잡한 현실 속에서 지도자의 결단과 추진력이 요구된다. 정주영의 정신은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핑계로 시간을 허비할 것인지, 아니면 비전을 향해 나아갈 것인지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뺑덕 어멈의 변명은 결국 공동체 속에서 신뢰를 잃고 고립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행정통합 논의도 마찬가지다. 변명과 핑계로 시간을 허비한다면 주민들은 행정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고, 지역 발전의 기회도 사라진다. 중요한 것은 핑계가 아니라 해결이다. 지금까지의 행정통합 논의는 마치 판소리 한 대목처럼 반복과 변주를 이어왔다. “효율성이 의문이다”라는 대목이 나오면 곧이어 “주민 동의가 필요하다”는 후렴이 이어지고, 다시 “중앙정부 지원이 불확실하다”는 변주가 반복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문제 해결의 노래라기보다 책임 회피의 변명에 가깝다. 결국 정치가 뺑덕 어멈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행정통합은 또다시 제자리걸음을 할 것이다. 지도자 결단과 비전이 없는 곳에서는 주민의 신뢰도, 지역 발전의 기회도 사라진다. 수도권 과밀화 해소와 지역 균형발전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앞에 두고, 지역 정치인들이 뺑덕 어멈의 변명 대신 정주영의 도전 정신을 배워야 할 때다. 그렇지 않다면 행정통합 논의는 끝없는 변명 속에서 표류할 수밖에 없다. 6·3 지방선거 후보들의 공약을 꼼꼼하게 챙겨봐야할 이유다.
[노트북 단상] 53억 혈세 매몰, 누가 책임지나
울산 태화강변에 때아닌 53억 5000만 원짜리 노면 주차장이 들어섰다. 고작 10대 남짓 주차하는 이곳은 원래 ‘태화 고지배수터널’ 공사 현장이었다. 수해를 막겠다며 5년 넘게 땅만 파더니 민원만 양산한 채 끝내 다시 메워버렸다. 부실 행정과 세금 낭비의 압축판으로 지역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사례다. 애초 사업의 본질은 ‘물길의 분산’이었다. 중구는 2016년 태풍 ‘차바’로 생업의 터전을 잃었던 태화시장 일대의 침수를 막아보자며 ‘자연재해 위험지구 정비사업’이란 명칭 아래 두 갈래 계획을 세웠다. 고지대에서 내려오는 빗물의 55%는 터널을 통해 강으로 바로 빼내고, 나머지 45%는 배수펌프장을 지어 처리한다는 복안이었다. 한데 배수량의 절반 이상을 담당할 고지배수로가 공정률 10~20% 상태에서 통째 무산(부산일보 1월 30일 자 10면 보도)된 것이다. 터널이 막히자 방재 설계의 근본적인 허점이 남았다. ‘터널이 감당하기로 한 빗물 55%는 이제 어떻게 처리한단 말인가.’ 설계대로라면 지난 2월 준공한 배수펌프장은 빗물의 절반도 처리하기 어려운 ‘반쪽짜리’ 시설에 불과하다. 총 600억 원에 달하는 예산을 쏟아붓고도 태화시장은 여전히 침수 위협 앞에 위태롭다는 얘기다. 중구청의 후속 대응은 더욱 납득하기 어렵다. 터널 공사를 ‘잠정 보류’(?)하는 대신, 행정안전부 공모로 103억 원을 확보해 함월산 계곡 상류(무주골·유곡천)에 우수저류시설을 짓겠다고 한다. 이 사업을 준공하면 지방비를 확보해 200억 원대 고지배수터널을 재추진한다는 방침이다. 여기서 의문이 꼬리를 문다. 먼저, 우수저류시설이 터널 몫이었던 빗물 55%를 감당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만약 55% 유량을 처리할 수 있다면 애초 큰돈 들여 민원이 불보듯 뻔한 도심지 터널 공사는 왜 추진했나. 터널을 다시 추진한다는 대목에선 103억 원짜리 저류시설이 결국 임시방편임을 자인하는 셈이다. 계획대로 고지배수터널을 마무리한다 해도 자가당착이다. 현재 추진 중인 우수저류시설의 실효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두 시설 모두 필요하다면 ‘터널과 배수펌프장으로 100% 유량 처리가 가능하다’던 종전 설계가 잘못됐음을 시인하는 꼴이다. 물론, 행안부 공모도, 지방비 확보도 확정된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재추진 시기조차 알 수 없는 막연한 구상에 가깝다. 갈팡질팡하는 중구의 행정 난맥상이 주민 혼란만 부추길까 걱정이 앞선다. 중구가 터널 실패를 ‘잠정 보류’로 규정하며 현실을 호도하는 것도 문제다. 보류란 어떤 일을 잠시 멈추어 두는 것이지, 수억 원의 비용을 들여 공사 현장을 원상복구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저 행정의 실패를 인정하지 못해 책임지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지난 2월 11일 태화시장 인근 배수펌프장에서 정치인들과 주민들이 참석한 축하 행사가 열렸다. 입구 현수막에는 ‘자연재해위험지구 정비사업 준공식’이라는 글귀가 선명했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무색한 광경이다. 흙더미로 터널은 메울수 있어도 주민 불안과 냉소는 가리기 어렵다. 방재의 한 축이 무너진 상태에서 절반의 준공을 전체의 성공으로 포장하는 작태는 110만 시민에 대한 기만이나 다름 없다.
[2030 칼럼]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어느덧 개봉 한 달이 훌쩍 지난 ‘왕과 사는 남자’의 인기가 좀처럼 식을 줄 모른다. 노산군으로 강등돼 강원도 영월로 유배된 단종과 엄흥도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머지않아 1500만 관객을 돌파하리란 기대도 곳곳에서 심심찮게 들린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소재의 영화가 오늘날 관객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작품이 인정과 의리라는 오랜 가치를 과연 누가 지켜냈는지 새롭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권을 찬탈한 수양대군의 정치적 야욕, 그리고 단종과 그 곁사람들의 비극적 희생을 다룬 서사물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춘원 이광수의 〈단종애사〉일 것이다. 그는 1928년 ‘동아일보’에 이 작품을 연재하기 시작하며 단종을 둘러싼 역사적 사실의 핵심이 ‘인정과 의리’에 있다고 말했다. 인정과 의리.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다. 〈단종애사〉를 필두로 수많은 소설과 영화, 드라마는 어떤 역사적 인물이 인정과 의리를 지켰는지, 혹은 누가 그것을 저버렸는지에 주목했다. 권력을 얻기 위해 왕이자 어린 조카인 단종을 죽음으로 내몬 수양대군과 한명회는 신의를 저버린 자들로 재현되었다. 반면, 단종의 복위를 염원하며 목숨을 바쳤던 사육신, 도의가 사라진 세상을 등졌던 생육신은 숭고한 가치를 끝끝내 지켜낸 이들로 널리 칭송받았다. 국어 시간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사육신 성삼문의 절절한 시조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런데 ‘왕과 사는 남자’는 이러한 인정과 의리라는 가치를 실천한 주체를 전혀 다른 공간에서 찾는다. 영화는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한 이들을 고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이 내지르는 처절한 비명을 들으며 식음을 전폐하는 어린 왕 단종이 등장한다. 창백한 혈색, 갈 곳 잃은 눈동자에는 소년 왕의 두려움과 절망, 비탄이 뒤섞여 있다. 이윽고 그는 왕권을 잃은 채 궁궐과는 멀리 떨어진 청령포로 내몰린다. 작품은 한양의 권력 다툼 대신 외딴 유배지와 그곳에 깃들어 살아가는 이들을 서사의 전면으로 끌어낸다. 극 중에서 청령포를 유배지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운 이는 광천골 촌장 엄흥도다. 유배된 한양의 고관대작을 통해 마을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자식에게 글공부를 가르쳐 입신양명의 꿈을 이루겠다는 지극히 속되고 사사로운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가 맞이한 유배자는 처절한 권력 다툼에서 패배한 어린 소년 이홍위였다. 기대는 한순간 낙엽처럼 부스러졌다. 그렇지만 엄흥도와 광천골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잃은 그를 위해 정성스러운 밥상을 마련한다. 왕과 무지렁이 백성이 마주 앉은 밥상. 그곳에서 맺어진 친밀한 관계와 오가는 사사로운 이야기로부터 인정과 의리가 새롭게 싹튼다. 영화는 역사의 가장자리로 내몰려 잊힌 세인들의 사사로움에 눈길을 준다. 그리고 이홍위는 그들이 보여주는 인정과 의리로부터 정의롭지 못한 권력과 맞서 싸울 용기를 얻는다. 공허하고 무력했던 눈빛에는 다시금 강인한 의지와 결기가 감돈다. 용기를 얻은 것은 이홍위만이 아니었다. 엄흥도 역시 거대한 권력 앞에 마주 서기를 결단하고 그를 따라나선다. 왕위를 되찾으려는 노력은 무산되고 결국 단종은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엄흥도의 용기는 그치지 않는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라는 경고에도 차가운 강물에 떠내려가는 시신을 건져 올려 장례를 치른다. 그 장면은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를 떠올리게 한다.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는 조국 테베를 배신한 오빠 폴뤼네이케스가 전투에서 사망하자, 배신자의 장례를 금지한 국법을 어기고 그의 시신을 매장하려 했다. 그 일로 안티고네는 감옥에서 죽음을 맞는다. 이 비극은 국가의 명령과 인간의 당위적 도리 가운데 무엇이 우선하는가를 날카롭게 질문한다. 엄흥도가 취한 비범한 행동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한낱 산골 촌장에 불과했지만, 인간이라면 마땅히 따라야 할 숭고한 신의와 도리를 지키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어리고 쇠약한 단종의 모습은 언뜻 오늘날 젊은 청년들을 떠올리게 한다. 강파르고 불안정한 현실에 내던져진 청년들의 모습 말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역사를 바꾼 위대한 영웅들의 거대 서사가 아니다. 오히려 힘겹고 숨 가쁜 삶을 버텨 내게 하는 소박하고도 친밀한 인정과 의리의 이야기일 것이다. ‘왕과 사는 남자’가 많은 관객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도 여기 있다. 역사는 마주 앉은 밥상처럼 기록되지 못한 평범한 존재들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이홍위와 엄흥도가 보여준 진정한 용기가 비롯된다.
[편집국에서] 전쟁이 뒤흔든 세계 경제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이 2주 이상 지속되면서 세계 경제가 휘청이고 있다. 무엇보다 이란의 호르무즈해협 봉쇄로 유가가 급등한 영향이 크다. 국제유가는 전쟁 후 배럴당 120달러 선을 위협 중이다. 지난달 27일 배럴당 72달러에 거래됐던 브렌트유는 지난 9일(현지 시간) 장중 한때 아시아 시장에서 119.50달러까지 치솟았다. 같은 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조기 종전 발언 직후엔 84달러까지 떨어지며, 일간 사상 최대 변동폭을 기록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한 마디에 국제유가도, 글로벌 증시도 출렁이는 모양새다. 특히 중동산 원유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아시아 지역 국가들이 이번 전쟁에 큰 타격을 입고 있다. 우리나라는 30년 만에 석유 최고가격제를 시행하고 나섰다. 필리핀 등에서는 석유 배급제까지 실시되고 있을 정도다. 이번 전쟁의 핵심 지역으로 떠오른 호르무즈해협은 페르시아만과 오만만을 연결하는 좁은 해상 통로다. 미국 현지 매체들의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의 호르무즈해협 봉쇄 가능성을 사전에 보고받고도 이란 공격을 승인했다. 이란이 먼저 굴복하거나 미군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상황을 오판했다는 것이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호르무즈해협 봉쇄를 풀기 위해 한중일 등 5개국에 군함 파견까지 요구하고 나선 상황이다. 이란이 에너지 요충지인 호르무즈해협을 사실상 봉쇄하고 있는 데 대한 대응으로 미국은 지난 13일 이란의 석유 허브인 하르그섬 공습까지 강행했다. 하르그섬은 이란 석유 수출 물량의 90%가 거쳐 가는 곳으로, 미국이 이란의 '역린'을 건드렸단 말도 나온다. 이란은 UAE(아랍에미리트)의 푸자이라항을 드론으로 공격하며 맞섰다. 이곳은 호르무즈해협을 우회해 원유와 석유 제품을 수출할 수 있는 항구다. 전쟁이 중동 전역으로 확산하면서 장기화 우려도 제기된다. 중동 리스크가 커지면서 원달러 환율은 다시 1500원 선을 위협하고 있다. 금융 시장의 변동성이 커지면서 국내 투자자들 사이에선 올해 우리 증시가 쌓은 ‘5000피’(코스피 5000포인트)라는 공든 탑이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감도 나온다. 해상 운임도 상승세다. 글로벌 운송망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해운 시장도 충격을 받고 있다. 국내 수출기업들은 환율, 비용 증가, 물류 차질 등 직격탄을 맞을 위기에 처했다. 고유가가 지속되면 물가 상승, 성장률 하락, 소비 심리 위축 등 우리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이 심화할 전망이다. 일각에선 이번 전쟁의 최대 수혜자는 러시아라는 웃지 못할 분석도 나온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러시아의 석유 수출에 따른 초과 세입이 하루 1억 5000만 달러(약 2248억 원)로 추정된다고 보도했다. FT는 전쟁 발발 이래 러시아 정부가 챙기게 될 추가 세입 총액이 이달 말까지 33억∼49억 달러(4조 9467억∼7조 3451억 원)에 이를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명분 없는 전쟁은 하루빨리 종식돼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는 전쟁 목표와 일정에 대해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락가락하는 형국이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는 이번 전쟁이 “현대적 여론조사가 시작된 이후 미국 대통령이 국민의 지지 없이 시작한 첫 전쟁”이라고 꼬집었다. 개전 직후 긴급 시행된 로이터·입소스 여론조사에서 미국의 이란 공격을 지지한다는 응답자는 27%에 그쳤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2024년 대선을 앞두고 유가 인하를 공약한 바 있다.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유가 관리의 필요성이 그 누구보다 절실한 이유다. 미국 내 평균 휘발유 가격은 갤런당 3.60달러로, 한 달 전(2.95달러)에 비해 20% 이상 상승했다. 현지 정유사가 챙기는 수익과 마진은 큰 폭으로 뛰어 전쟁이 이들의 배만 불린다는 지적도 나온다. 에너지 비용 상승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취약계층에게 더 큰 부담을 안긴다는 점도 문제다. 지난달 27일 국내에 소개된 책 〈미국은 왜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가〉(부제 ‘트럼프와 1조 달러 전쟁 기계의 야망’)에 따르면, 미국은 해외 전쟁에서 2001년 이후 약 10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 중 민간인 사망자만 40만 명에 달한다. 이 책의 저자 윌리엄 D. 하텅과 벤 프리먼은 미국의 군사적 우위 추구는 미국을 덜 안전하게 만들고, 결국 미국의 힘과 영향력 쇠퇴를 앞당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쟁에 대한 과도한 지출은 대형 방산업체와 그 동맹 세력을 부유하게 만드는 반면, 민주주의와 안전, 번영의 토대를 훼손한다는 것이다. 15일 미국 CNN 방송에 따르면 중동 전역에서 숨진 각국 군인과 민간인은 벌써 3000명을 웃도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자영 경제부장 2young@busan.com
[김은영의 문화시선] ‘휴먼브리지’와 문화 DNA
부산 수영구 망미동 주택가에 자리한 한 갤러리에 취재 차 들렀다가 수영구와 해운대구를 잇는 ‘수영강 휴먼브리지’를 건넜다. 날씨가 좋아 쉬엄쉬엄 걷고, 보고 하다 보니 어느새 다리 위에 올라 있었다. 영화의전당으로 건너간 김에 영화까지 봤더라면 ‘완벽’한 반나절 문화생활이 되었겠지만, 할 일이 남아 오후 시간은 영화의전당 라이브러리에서 보냈다. 출발점은 이웰갤러리(망미번영로 110번길 7)였다. 오는 27일까지 열리는 박주현 조각가의 개인전 ‘새겨진 시간-울리는 소리’를 돌아보고, 나선 김에 4월 11일까지 이어지는 대만 출신의 조각가 팀 리 개인전 ‘Toward the Light’를 보기 위해 리앤배(좌수영로 127)로 향했다. 이웰에서 리앤배까지 곧장 가면 걸어서 10분인데, 복합문화공간 F1963(구락로 123번길 20)을 가로지르면 7분 거리에 또 다른 전시 공간인 국제갤러리 부산점과 현대 모터스튜디오 부산이 있다. 전시가 아니더라도 F1963에는 F1963 도서관, 금난새 뮤직 센터, Yes24 중고 서점 등이 있어 잠시 숨 고르듯 둘러보기 좋다. F1963을 나와 다시 7분 거리의 리앤배에선 팀 리 전시를 관람했다. 리앤배에서 수영강 휴먼브리지까진 10여 분이 걸렸지만, 강변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니 산보 나온 듯 느긋해졌다. 다리는 구경 삼아 나온 시민들로 붐볐다. 보행 전용교여서 4~20m에 이르는 다리 폭이 생각 밖으로 넓게 느껴졌고, 중앙에는 20m 높이 전망대 ‘씨네 아일랜드’가 있었다. 강과 도시 풍경을 시원하게 내려다볼 수 있는 수영강 휴먼브리지였지만 아직은 약간 휑뎅그렁한 인상도 남았다. 어떤 식으로든 수영강 휴먼브리지에 사람들이 즐길 만한 문화 콘텐츠가 하루빨리 장착되면 좋겠다 싶었다. 언젠가 서울에 갔을 때 봤던 ‘차 없는 잠수교 뚜벅뚜벅 축제’가 떠올랐다. 그곳은 매주 일요일에만 차도를 보행로로 바꾸어 두 발로 걸으며 즐기는 다양한 문화예술 체험 프로그램을 선보이는데, 수영강 휴먼브리지는 일요일만 기다릴 필요가 없는 상시 보행 전용교라는 점이 다르다. 사실 아무 목적 없이 무작정 걷는 것도 좋지만, 일삼아 찾아오는 이들에겐 볼거리, 느낄 거리, 체험할 거리가 한두 개쯤 더해져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다리 이쪽과 저쪽 끝 어딘가에 주변 전시·공연 소식을 알리는 안내 지도나 게시판이 생기고, 플리마켓과 두 개 구가 함께 여는 ‘휴먼브리지 페스티벌’(가칭) 같은 것이 자리 잡아 이름처럼 ‘휴먼’브리지다운 다리가 된다면, 다리 하나만 보러 오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 수영구민은 해운대구로, 해운대구민은 수영구를 넘나들며 자연스레 문화를 나누게 된다면, 그것 또한 이 다리가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오션 뷰] AI는 바다의 비밀을 풀어낼 열쇠다
인공지능(AI)이 전 세계 정치·경제 지형을 흔들고 있다. 반도체를 비롯한 AI 산업 역량이 미래의 국가 경쟁력을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것이라는 전망에도 이견이 없는 듯하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새로운 지능이 인류에 기여하여 세상을 더욱 나아지게 할 것이라는 기대 역시 AI 시대를 긍정적으로 보게 하는 중요한 요소다. AI에 대한 이러한 전망과 기대의 근원은 새로운 창조 행위를 통해 미래의 힘과 부를 얻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그동안 인류가 해결하지 못한 한계 또는 숙제를 풀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가치 인식에 근거를 둔다. 전자는 각국 정부와 선도 기업들에 의해 폭발적으로 확장되고 있고 상품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필자는 후자에 주목한다. 지구상에서 그동안 인류가 해결하지 못한 가장 큰 숙제는 무엇일까? 지구 표면의 70%를 차지하는 바다는 지구 생명의 가장 큰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물 순환의 99%를 책임진다. 산업화 이후 인류가 배출한 초과 에너지(열) 가운데 약 90% 이상을 흡수하여 더 급격한 온난화를 막아내는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인류에게 건강한 식량을 공급하고, 대항해시대 이후에는 해상무역을 통해 세계 경제 발전을 주도했다. 해상은 예나 지금이나 국가 안보의 핵심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바다를 잘 모른다. 해저 지형의 80%는 정밀하게 조사되지 않았고, 해저 상태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알지 못한다. 더군다나 넓고 깊고 이동이 자유로운 바닷속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해양 생태계를 이해하고 이에 대해 정확한 예측을 한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나마 존재하는 해양 데이터는 국가별, 해역별로 상이한 기준으로 조사되거나 부분적이며 전통적 방식으로는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기후변화로 인한 해양 변화가 가속화하는 지금, 해양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서 거대 AI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바다는 수온과 염분, 해류, 용존 산소, 영양염 등 변수들이 복잡하게 얽힌 거대한 자연 시스템이다. 하지만 현장 관측은 날씨의 제약을 받고, 위성 관측은 대부분 표면 정보만 제공하며, 부이나 조사선 관측은 빈틈이 많다. 이 ‘관측의 공백과 단절’이 해양 예측의 불확실성을 키운다. 이 정보들은 해상 풍력, 해저 케이블, 해양플랜트, 항만 시설 등 전략 인프라의 안전 관리에도 필수적이다. 앞으로 기존 예측 모델과 AI를 결합한 하이브리드형 예측이 확대되어 제한된 데이터를 보완하며 재해나 재난 예측과 적조, 저산소 수괴, 갯녹음 등 해로운 자연 현상을 빠르고 정밀하게 예측하게 될 것이다. 수산자원 관리에서도 AI는 미래 어업의 ‘새로운 두뇌’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기후변화로 주요 어종의 분포와 산란 시기가 바뀌고, 회유 경로도 예측 불가능할 수준으로 일정하지 않다. 선박 중심의 자원 추적·조사 방식만으로는 광범위하고 급변하는 해양 생태계를 따라잡기 어렵다. AI는 기존 조사에 더해 드론, 위성, 수중 카메라, 음향 센서, 선박 AIS 등을 결합해 어종을 자동 식별하고 자원량을 추정하며, 산란장 변화와 회유 패턴을 정밀하게 분석하게 될 것이다. 불법 어업 감시도 AI 기반 패턴분석으로 한층 정교해질 것이다. 해저 탐사에서도 AI는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 것이다. 심해는 인간이 직접 확인하기 어려워 미지의 공간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미래 에너지·광물 자원, 독특한 생태계, 기후변화 정보를 담은 지질 기록 등이 존재한다. AI와 자율무인잠수정(AUV)의 결합은 이 영역을 빠르게 열어젖히고 있다. AUV는 AI 기반 경로 설정과 자율 운항으로 정교한 해저 탐사가 가능하며, 수집한 고해상도 영상과 음향을 AI가 분석해 해저 지형 변화, 해저 생물상과 같은 해저의 실상을 정확히 알려줄 것이다. 이처럼 AI는 해양 예측·수산 자원·해저 탐사라는 영역에서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일부는 이미 현실화되고 있지만, 기술적 가능성에 비해 제도적·행정적 준비는 아직 미흡하다. 국가 차원의 해양 데이터 통합 플랫폼 구축, AI 기반 관측·예측 연구 투자 확대, 민간과 공공이 함께 참여하는 디지털 해양수산 생태계 조성이 필요하다. 특히 ICT(정보통신기술)가 발달한 연안 국가인 한국은 이러한 전환을 선도할 충분한 역량과 필요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바다는 기후 위기의 최전선이자 인류의 식량과 산업, 과학의 미래를 품은 공간이다. 특히 바다로 둘러싸인 대한민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바다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미래의 해양 위기를 예측하기를 바라는 것과 바다가 가진 새로운 가능성을 경쟁력 있게 활용하기를 바라는 것은 단지 욕심일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다를 매우 지능적으로 깊이 이해하는 기술이며, 그 중심에는 AI가 있다. 잘 보이지 않는 바닷속의 비밀을 풀어내고 예측하는 AI라는 열쇠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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