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 없는 응징, 참교육 될 수 있나[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제도는 무력하고, 정의는 지연되기 일쑤다. 하소연할 곳 없는 약자들은 해결사가 나타나길 꿈꾼다. 복수 대행이 유행을 타는 배경이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현실은 먼 나라 일이 아니다. 가차 없는 마피아 방식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빈센조’, 가톨릭 신부가 맨주먹으로 범죄 집단을 무너뜨리는 ‘열혈사제’, 피해자들이 의기투합해 힘없이 당하는 서민을 구제하는 ‘모범택시’. 최근 한국 드라마에서 한 장르를 형성한 응보주의(應報主義)는 법보다 빠른 응징을 갈망하는 대중의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 이들 드라마는 극적 카타르시스를 강조하기 위해 가해자의 서사를 생략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왜 그런 악행에 이르렀는지, 그를 둘러싼 사회적 구조는 무엇인지, 교화 가능성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건너뛴다. 반면 현실에서 구제받지 못하는 피해자의 고통에 집중해 사적 처벌의 정당성을 구축한다. 악행의 교정, 교화라는 교과서적 해법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 응분의 죗값을 받는 것을 넘어서 ‘쓰레기’는 사회와 영구 격리해야 한다는 위험한 메시지까지 발신한다. ‘모범택시’에서 등장하는 사설 감옥이 극단적인 사례다. 공권력과 제도의 신뢰가 실추된 현실이 응보주의를 소재로 한 드라마를 양산한 토대라는 점은 무참한 대목이다. 이 응징 서사가 마침내 교실로 들어왔다. 바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참교육’이다. ‘참교육’은 가상의 교육부 소속 교권보호국을 내세워 무너진 교육 현실을 바로잡는 이야기를 그렸다. 특전사 출신으로 교권보호국 감독관이 된 나화진(김무열)과 임한림(진기주)은 학교 정상화에 필요하다면 물리력을 동원해도 된다는 초법적 권한을 부여받는다. “말로 해서 듣는 놈은 말로, 때려서 듣는 놈은 때려서라도 가르친다.” 나화진의 선언은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며 행동으로 옮겨진다. 드라마는 불편한 학교 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학교 폭력에 신음하는 학생뿐만 아니라 마약·도박 위험에 노출된 교육 현장, 악성 민원에 시달리는 교사들의 교권 침해 등 학교 안팎의 문제를 체벌과 폭력을 동원해 단죄하는 것이 줄거리다. 학교판 ‘모범택시’로 비유하자면 구원자 역할의 택시 회사 ‘무지개운수’가 ‘교권보호국’으로 바뀐 셈이다. 드라마 속 교권보호국은 학교가 하지 못한 일을 즉각 해결한다. “어른이 애들을 무서워하면 세상은 망하는 겁니다.” 기성세대가 쉬쉬했던 병폐 척결에 과감히 나서는데, 절차보다 결과가 빠르고 설득보다 제압이 확실하다. 인간 병기 수준의 활극으로 악행을 처단하는 장면은 통쾌하다. 시청자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더구나 드라마 속 소재가 허구에 그치지 않기 때문에 울림이 크다. 매회 등장하는 에피소드마다 초등 교사 자살, 여고 시험지 유출 등 실제 사건을 떠올리게 할 만큼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학생 폭력과 수업 방해, 학부모의 과도한 민원, 교사의 무력감, 그 와중에 침해되는 다수 학생의 학습권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닌 모양이다. 그래서 ‘참교육’은 국내를 넘어 해외 시청자들의 공감까지 끌어냈다. 넷플릭스 비영어 쇼 부문 글로벌 1위를 차지하고 전 세계 48개국 상위 10위권에 오르며 돌풍을 일으킨 배경이다. 현실에서 차마 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하는 ‘참교육’은 앞서 인기를 끌었던 사적 복수극 계열을 답습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분명히 다른 결이 드러난다. 선을 넘은 학생과 교사, 학부모의 일탈을 처벌하면서도 학교라는 공간의 복잡성을 외면하지 않으려 장치를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단순한 통쾌함보다 더 불편한 질문을 남긴다. 반성과 교화 없이 응징만으로 학교 현장이 바로잡힐 수 있는가. 2화에서 조폭을 추종하던 폭력 고교생들이 제압된다. 그런데 시리즈 다른 회차에서 이들은 개과천선해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모습으로 깜짝 등장한다. 문제 학생도 변화할 수 있다는 교화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의도다. 4화 시험지 유출 사건 말미에서는 3화 가짜 미투 사건의 가해자 한예리를 다시 불러낸다. 감독관은 성적 조작을 주도한 교사에게 한 학생의 인생을 망가뜨린 책임을 물으며 한예리를 데려와 마주 앉힌다. 이를 통해 드라마는 가해자로 보였던 학생이 과거에는 또 다른 피해자였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 설정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은 현실을 상기시킨다. 문제 학생의 변화 가능성과 가해자의 피해자성을 함께 보여 주는 설정은 기존 보복 대행 드라마와 분명 구별되는 문법이다. 학생을 제압하는 것과 학생을 바꾸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바로 그 차이에 오늘날 학교 현장의 고민이 묻어난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지는 못한다. 드라마의 관심은 결국 구조보다 개인에게 머문다. 입시 경쟁과 교육 격차, 가정 해체와 정서적 방임, 학벌 중심 사회가 어떻게 또 다른 문제 학생을 만들어 내는지까지는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 문제를 일으킨 학생과 무책임한 어른을 심판하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왜 그런 문제들이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충분히 답하지 못한다. 시청자들이 교권보호국의 활약에 통쾌함을 느끼는 동시에 씁쓸함을 떨칠 수 없는 이유다. 교권보호국은 현실이 될 수 있을까. 교육계에서도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안민석 경기도교육감 당선인은 가칭 ‘교육활동보호국’ 신설 구상과 함께 토론회를 제안했다. 정근식 서울시교육감은 폭력을 정당화하는 교권보호국을 “파시즘적 정책”이라고 비판하면서 교권은 폭력이 아닌 교육적 방식으로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 접근법은 대립하는 것으로 비치지만 실은 ‘꽃으로라도 때리지 말라’는 원칙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새로운 조직을 만들 수는 있으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으로 학생들을 다스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교권보호국은 드라마 속 판타지일 뿐이며, 폭력적 권한은 현실의 대안이 될 수 없다. ‘참교육’의 흥행 성공은 학교가 제 기능을 잃고 있다는 사회적 불안의 반증이라는 점에서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대목이다. 폭력을 내세운 교권보호국은 대안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교권보호국이라는 판타지를 소환한 현실 또한 외면할 수 없다. 반성 없는 응징을 참교육이라 부를 수는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임 역시 교육일 수 없다. 학생 인권과 교권, 학생의 학습권과 교사의 생활 지도권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응징과 방임 사이에서 길을 찾는 일, 그것이 드라마 ‘참교육’이 우리 사회에 던진 질문이다. 이제 답은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의 몫이다.
[사설] 국내 첫 SMR 기장에, 전기요금 차등제 도입도 서둘러야
지난 17일 두 곳의 신규 원자력발전소 부지 선정이 이뤄지면서 국내 원전 정책이 다시 확장기로 들어섰다.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 2024~2038)에 따라 열린 한국수력원자력 신규 원전 부지선정평가위원회는 이날 부산 기장군에 국내 첫 소형모듈원자로(SMR) 1기, 경북 영덕군에 1.4GW급 대형 원전 2기를 짓기로 결정했다. 기장군에 들어설 국내 첫 SMR은 2035년, 영덕 원전은 2037~2038년 준공이 목표다. 신규 원전 부지 선정은 2011년 이후 15년 만인데, 2017년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펴면서 신규 원전 건설이 중단된 상태였다. 출범 초만 해도 원전 건설에 부정적이던 이재명 정부는 에너지 전쟁이라고 할 정도로 전력 수요를 끌어올리는 인공지능(AI) 시대, 국제 정세에 널뛰는 한국 에너지 공급망 편중 문제를 고려, 실용적 선택을 했다고 보인다. 중동 전쟁과 지정학적 갈등으로 에너지가 안보 문제로 떠오르면서 각국이 원전 확대에 나서는 글로벌 경쟁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원전 보유 지자체들 간에 펼쳐진 열띤 유치 경쟁도 이번 부지 선정 부담을 낮춰주는 숨은 요인이 됐다. 10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장기 프로젝트인 신규 원전 건설 기간에는 기회와 함께 예상치 못한 여러 위기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탈원전 정책으로 내수 시장이 막힌 국내 원전 기업들이 해외로 눈을 돌려 기술력을 높이고 대규모 수주를 따낸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들 기업에 다시 열린 내수 시장은 기술 개발과 원전기자재 생태계 육성, 인력 공급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래형 원전 모델인 SMR은 미국과 영국, 캐나다 등 주요국이 앞다퉈 선점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한국도 경쟁 대열에 합류하게 됐다. 2030년 가동을 목표로 와이오밍주에 SMR 건설을 추진 중인 미국에 이어 한국이 두 번째 SMR 설치에 성공하길 기대한다. 원전산업 거점인 부산·울산·경남도 조선 자동차를 잇는 새 먹거리인 SMR 육성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여러 가능성에도 원전 산업을 향한 국민 우려가 희석되지는 않는다. 정부와 한수원은 기존 원전 지역에 신규 원전을 추가하는 ‘손쉬운 결정’을 했다는 점에서 책임을 다했는지 묻고 싶다. 원전 밀집 해소 노력은 아예 안 보였다. 부산만 해도 기존 고리 2~4호기, 신고리 1~2호기에 SMR이 더해지면 원전 6개를 짊어져야 한다. 동해안 전체로는 20개 안팎까지 늘어난다. 원전 부지 선정이 시혜인 마냥 여기는 시선도 꿈틀거린다. 수도권으로 전기를 차질없이 보내도록 송배전망 문제부터 해결하라는 목소리가 대표적이다. 위험은 원전 지역이 안고 혜택만 누리려는 못된 심보다. 정부는 원전 밀집지 주민 고통을 생각한다면 전기요금 차등제 실행을 서두르고, 부울경이 임시로 떠안은 고준위폐기물 처리장 해법도 내놔야 한다.
[사설] 부산을 AI 허브로 만든다는데 구체적 실행 전략이 관건
전재수 부산시장 당선인은 부산의 3대 먹거리로 해양·관광·인공지능(AI) 산업을 강조해 왔다. AI 산업은 당선인 공약의 핵심 축 가운데 하나다. 당선인 인수위 ‘다시 뛰는 부산 위원회’는 지난 17일 AI 대전환 공약 실행계획 마련을 위한 전문가 정책 간담회를 열었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K해양 AI 벨트 조성과 AI 중심대학 설립, 부산 청년을 위한 AI 허브 조성 등이 언급됐다. 인수위는 현재까지 부산시의 AI 환경을 도입기와 실증기 수준으로 정의했다. AI 산업을 고도화한 뒤 확산하겠다는 것을 민선 9기의 시정 방향으로 잡았다고 한다. 부산을 AI 허브로 만드는 ‘부산 AI 대전환 로드맵’을 꺼내 든 것이다. 전 당선인은 후보 시절 ‘미래로 가는 AI 선도도시 부산’ 공약을 통해 해양·제조업에 AI를 접목해 고부가가치 미래 산업 대전환으로 이끌겠다는 구상을 밝힌 바 있다. 또 ‘K해양 AI 벨트 구축’으로 국방 분야 AI 전환(AX) 거점 마련, 로봇 기술 결합 피지컬 AI 기반 스마트 항만 구현 등을 약속했다. 지난 15일 열린 첫 기자 간담회에서는 AI를 활용한 제조업 혁신으로 서부산 제조업을 한 단계 도약시키겠다고 했다. 서부산 산업단지에 밀집한 영세 제조업체들이 AI를 활용해 생산성과 경제력을 높일 수 있게 지원한다는 것이다. AI 혁신의 성공 사례가 구상대로 확산한다면 부산 발전의 새로운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세계의 많은 선도 도시가 AI를 도시 운영 자체를 바꾸는 핵심 수단으로 활용하는 추세다. 행정·교통·복지 등 도시 서비스 전반을 AI로 재설계하는 ‘AI 대전환’은 더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전 당신인은 AI 교통운영 플랫폼 구축, 행정·복지·의료 예약을 돕는 AI 생활비서 서비스와 범죄·재난 예측 AI 도시 시스템 도입, AI 기반 부정수급 탐지 시스템 도입 등 생활 혁신과 투명 행정을 위한 AI 공약을 내놓은 바 있다. 이 공약들이 단순히 구호에만 그쳐서는 안 될 일이다. 구체적인 실행 전략을 마련해서 AI 전환이 도시에서 실제로 작동해야 시민이 삶을 통해 진정한 혁신과 변화를 체감할 수 있다. 정부의 ‘5극 3특’ 국가균형성장 전략 아래 광주(AX 실증), 대구(AX R&D), 전북(AI 팩토리), 경남(정밀 제조) 등이 AX 연구·실증 거점을 선점하고 있다. 당선인과 인수위가 거창한 계획을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부산이 AI 국책사업 경쟁에서도 뒤처진 상황이다. 지난 17일 산업 현장에서는 부산시가 전담 부서인 AI미래혁신국을 세워 국실별로 흩어진 AI 관련 정책을 총괄하게 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왔다고 한다. ‘부산 AI 대전환’을 이끌 컨트롤타워는 당연히 필요하다. 당선인의 명확한 비전과 이를 실행에 옮기는 행정력이 결합할 때 부산이 글로벌 AX 선도 도시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곧 관광상품
지난 12일과 13일 BTS 월드투어 ‘아리랑’ 부산 콘서트 전후로, 부산 곳곳에서 외국인 관광객이 넘쳐났다. 이틀간 콘서트장에 11만 명의 팬들이 몰렸는데, 절반 이상이 외국인으로 추정된다. 콘서트 표가 없지만 부산을 찾은 외국인 팬들도 많다. 연일 역대 최다 외국인 관광객 기록이 계속 갱신되는 상황에서, BTS 팬들까지 몰려온 것이다.외국인 관광객들은 관광지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들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해운대·광안리·남포동 등은 물론 관광지 주변 골목 구석구석을 누볐다. 관광지와 떨어진 동네 식당과 동네 마트에서도 외국인 관광객들은 음식을 먹고 물건을 샀다. 요즘 외국인들은 마치 대한민국의 일상을 체험하러 온 것처럼 관광을 한다.2023~2025년 부산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의 신용카드 지출액을 분석해 보니, 지난 3년간 숙박업(38%)·한식(68%)·양식(60%)·편의점(77%) 등의 지출이 가파르게 증가했다고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중국인 관광객이 단체로 와 면세점 쇼핑을 하는 게 대세였다. 그러나 점점 외국인 관광객은 쇼핑 중심에서 벗어나 체류와 식음료, 생활밀착형 소비를 선호하고 있다. 우리가 먹는 음식과 쓰는 물건들을 사는 데 돈을 쓰고 있는 것이다.외국인 관광객의 관광 형태 변화는 미디어와 문화의 영향으로 분석된다. 2019년 영화 〈기생충〉, 2021년 드라마 〈오징어게임〉 등을 거치며 K컬처는 세계인이 소비하는 상품이 됐다. 〈흑백요리사〉 같은 TV쇼도 글로벌 흥행에 성공했다.그 덕에 많은 외국인들은 한국인의 삶에 노출됐고, 자연스레 우리의 일상을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는 설명이다. 드라마에서 본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TV쇼에서 본 한국 음식도 맛보고 싶어졌다는 거다. 한국인의 일상을 경험하면서 그 과정을 SNS에 올리는 게 한국 관광의 목적이라는 거다.‘마인드 마이너’로 활동하는 송길영 작가는 이런 현상에 대해 “드라마와 소셜미디어로 한국의 곳곳이 알려지면서 관광 안내소나 가이드북에서 소개하는 장소를 넘어 우리 땅의 구석구석이 그들에게 탐험의 장소로 열리게 됐다”라고 표현했다.물론 부산의 바다와 산도 훌륭한 관광상품이다. 이제는 관광 명소를 잘 꾸미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일상을 더 매력적으로 세계에 보여주는 게 관광객 유치에 더 중요한 시대가 됐다. 그들은 우리를 보러 오고 있다.
논설주간/상무이사
강윤경
수석논설위원
김승일
논설위원
정달식
이상윤
김상훈
천영철
[천영철의 사리 분별] 반도체 강국 만든 의롭고 선한 맥락들
반도체 산업이 한국 경제를 견인하고 있다.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놀라운 선전은 중국과 인도의 약진 등에 힘겨워하던 한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반도체 산업 덕분에 미국·이란 전쟁에 따른 유가 폭등 등 최근 위기 국면도 비교적 잘 돌파할 수 있었다는 평가다. 주식시장도 연일 호황이다. 반도체 덕분에 다른 분야의 산업들도 AI(인공지능) 시대로의 대전환에 대비할 시간을 벌었다는 관측도 이어진다. 슈퍼사이클에 진입한 반도체 산업의 초호황은 삼성전자 직원에 대한 수억 대 성과급 등 많은 이슈도 몰고 왔다.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 엔비디아, 대만 TSMC와 함께 AI 시대 세계 반도체 산업의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메모리 분야 최강자인 삼성전자의 경우 2026년 기준 D램 시장에서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고 낸드 플래시 분야에서도 최상위권을 고수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AI 산업 핵심인 GPU에 들어가는 HBM 분야에서 독보적 기업으로 꼽힌다. AI 시대 최대 수혜 기업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삼성전자는 시가총액 2000조 원대를, SK하이닉스는 1900조 원대를 상회하는 최정상권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했으니 실로 엄청난 성장이 아닐 수 없다. 역사를 돌아보면 현재는 과거의 크고 작은 수많은 맥락들의 총합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행운 또는 불운이라고만 여겼던 각종 사건들도 지난 시간의 인과관계들이 얽히고설켜 필연적으로 발생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을 오늘날 반도체 강국으로 만든 역사적인 맥락은 무엇일까. 통상 한국 반도체 신화의 원동력으로 삼성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의 결단과 정부의 적극적 지원 등을 꼽는다. 1970년대 삼성과 금성(현 LG) 등 당시 한국 기업은 미국과 일본 반도체 업체들의 사실상 하청 역할을 했다. 반도체 설계와 제조는 일본·미국이 담당하고 한국은 노동집약적 후공정 작업에 집중한 것이다. 그런데 1983년, 당시 73세였던 이병철 회장은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어렵더라도 전력투구하겠다며 메모리 반도체 국산화와 대대적인 사업 투자에 나선다. 당시 미국과 일본 기업들은 코웃음을 쳤다. 우리 정부 내부에서도 성공 가능성이 적다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았지만 청와대 등의 적극적 지지로 생산라인 구축에 착수할 수 있었다. 금성과 현대도 정부 지원 아래 메모리 반도체 개발에 뛰어든다. 금성 후신인 LG전자는 현재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하지 않지만 현대전자는 SK하이닉스로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반도체 신화의 또 다른 원동력으론 미일 기술패권 경쟁이 꼽힌다. 1980년대 중반 반도체 시장의 최강자였던 일본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견제가 한국에 기회로 작용했다. 1986년 미일 반도체협정 등을 통해 강한 압박을 받은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투자를 줄이며 멈칫하는 동안 한국 기업들이 D램 시장에서 도약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당시 한국이 보유한 수많은 고급 공학 인력도 반도체 산업 발전의 원동력으로 꼽힌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떻게 1980년대 초에 우수한 과학 연구진과 공학 엔지니어 등을 대거 확보하고 있었을까. 자녀 교육열이 남달랐다고 하더라도 대학이 과학·기술 인력을 배출하려면 교수진과 실험 장비 등을 많이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국은 1950~1953년 참혹한 전쟁을 겪은 데다 현대 과학 교육을 할 수 있는 유산 자체도 미미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의 전후 복구 지원 계획인 미네소타 프로젝트였다. 미국 과학자 등이 이 프로젝트에 따라 1950년대~1960년대 서울대와 경북대 등에서 물리학, 전자공학 등을 강의하면서 한국 과학 육성의 밑거름을 구축한 것이다. 특히 이 외국인 스승들은 실험에 뿌리를 둔 최첨단 기초과학 연구법을 한국에 전파했다. 실험 장비도 해외에서 대거 지원됐다. 이후 이들에게 배운 학생들 가운데 일부가 유학 뒤 서울대와 지방 거점 국립대 등에서 열정적으로 물리학 등 과학 교육에 나서면서 한국은 단기간에 전자산업과 반도체에 최적화된 공학 인력 양성 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우리 반도체 산업의 초호황은 한국물리학회 최초 외국인 회원인 미국 과학자 길버트 허드슨(Gilbert Hudson) 등 한국 과학의 미래를 위해 헌신한 국내외 스승들이 뿌린 선한 씨앗이 이후의 다양한 맥락들과 절묘하게 결합해 만든 기적 같은 드라마라는 생각이 든다. 반도체 강국으로 자리매김한 지금, 우리가 잊고 지낸 그 시절 과학자들을 기리는 작업도 본격화되길 소망한다.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미래는 우리가 현재 만들어낸 맥락들의 총합일 것이다. 미래의 한국, 이 땅에서 살아갈 후인들을 위해 의롭고 선한 씨앗을 더 많이 뿌리는 오늘이 되길 기원한다.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
[서상호의 오픈 스페이스] 부산을 담아가게 하라!
대전발 0시 50분. 경부선과 호남선이 갈라지던 시절, 플랫폼에서 급하게 삼키던 가락국수 한 그릇의 추억은 온 국민의 향수를 자극하는 대전의 서사였다. 세월이 흘러 지금 대전에는 새로운 풍경이 자리를 잡았다. 성심당이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라. 성심당에 순수하게 빵만 사러 가는 사람은 없다. 전주 한옥마을에 초코파이를 사러 가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럼에도 성심당 앞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이 서 있고, 사람들은 양손 가득 빵 봉투를 들고나온다. 이유는 단 하나다. 언제 또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도쿄에 가면 평소 먹지도 않을 과자를 대형 할인점 ‘돈키호테’에서 쓸어 담는 심리, 이것이 바로 ‘셋업 코스트’(Setup Cost)다. 여행을 위해 이미 지불한 시간과 비용에 대한 최대한의 가치를 뽑아내겠다는 본능적 심리다. 결국 성심당의 빵은 대전이라는 도시의 경험을 소유하려는 가장 확실한 기념품이다. 대전은 빵 하나로 도시를 팔았다. BTS 공연 때 외국인 관광객 20만 명 방문 도시 곳곳에 깃든 콘텐츠 엮어내지 못해 지역의 삶과 골목의 냄새 브랜딩 시도를 지난 12~13일 부산은 거대한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BTS 공연을 보기 위해 11만 명의 팬을 포함해 20만 명이 넘는 외국인이 부산을 찾았다. 제이홉이 무대 위에서 “오직 부산을 위해서!”를 외쳤을 때 5만 5000명의 관중석이 눈물바다가 됐다. 그런데 20만 명의 세계인은 부산에서 무엇을 가슴에 담아갔는가. 이것이 진짜 물음이다. 숫자만 보면 고무적이다. BC카드 분석에 따르면 공연 주간 외국인 결제액은 전년 동기 대비 73.3% 증가했고, 전통시장 결제액은 두 배 가까이 늘었다. 그러나 뒤에 가려진 다른 숫자를 보아야 한다. 공연 주간 숙박업 결제액은 전주 대비 227.8% 폭증했다. 탐욕스러운 숙박업소들이 평소의 수 배에서 많게는 10배에 달하는 요금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방을 구하지 못한 팬들은 인근 도시로 쫓겨나거나 서울에서 당일치기를 감행했다. 20만 명이 찾아왔지만 상당수는 부산을 통과했을 뿐, 소비하지 못했다. 도시의 탐욕이 셋업 코스트를 스스로 파괴해 버린 꼴이다. 만약 성심당이 유명세를 치렀다고 빵값을 10배로 올렸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 줄은 단 하룻밤 만에 사라졌을 것이다. 부산은 자명한 교훈을 너무나도 비싸게 배웠다. 셋업 코스트가 작동하려면 조건이 필요하다. 가져갈 콘텐츠가 명확해야 하고, 쉽게 가져갈 수 있어야 한다. 부산에는 밀면이 있다. 돼지국밥이 있다. 씨앗호떡이 있다. 광안리 바다와 감천문화마을의 골목이 있다. 서울에서도, 도쿄에서도 살 수 없는 오직 부산만의 것들이다. 문제는 20만 명이 몰려왔을 때 도시가 이것을 제대로 팔 줄 몰랐다는 점이다. 숙박이 없으면 저녁이 없고, 저녁이 없으면 야시장이 없으며, 새벽의 뜨끈한 돼지국밥도 없다. 당일치기 관광객에게 부산의 밤은 존재하지 않았다. BTS 팬들에게 지민과 정국의 고향인 부산은 그 자체로 성지(聖地)다. 그들이 자란 동네, 다니던 학교, 걷던 길과 먹던 음식이 모두 세계적인 콘텐츠다. 멤버들이 어린 시절 찾던 떡볶이 골목 앞에 영어 안내판 하나만 제대로 세웠어도 전 세계 팬들의 셋업 코스트는 폭발적으로 작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산은 완벽한 성지순례 코스 하나 제대로 엮어내지 못했다. 있는 것을 팔 줄 몰랐다. 부산을 찾게 만드는 진짜 셋업 코스트는 무엇인가. 그것은 밀라노에서 수십억 원을 주고 라 스칼라의 ‘오텔로’를 수입해 오는 것이 아니다. 파리에서 1100억 원을 주고 퐁피두 분관 간판을 빌려오는 것도 아니다. 자갈치 새벽시장의 비릿한 사람 냄새이고, 감천마을 골목을 오르는 가파른 계단이고, 도시 구석구석에 깃든 삶의 궤적이다. 부산은 이미 그 자체로 세계적이다. 외국인 팬이 무인 카페에서 밤을 지새우며 부산의 새벽 부두를 보았다면, 그 새벽의 공기와 풍경을 브랜드로 담아갈 수 있게 해야 했다. 그것이 행정이 할 일이었다. 105억 원으로 라 스칼라를 사 오고, 1100억 원으로 퐁피두 간판을 임차하는 전시 행정에만 혈안이 돼 있었다. 정작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이틀 동안 20만 명이 오는 황금 같은 기회를 주었을 때, 부산 시정이 그들에게 돌려준 것은 바가지 요금과 암표, 차가운 노숙과 당일치기 기차표뿐이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부산에 성심당이 없어서가 아니다. 성심당이 되고도 남을 골목과 콘텐츠가 넘쳐나는데, 행정은 그것을 가꾸고 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겉멋 든 외제 간판을 빌려오는 데 눈이 멀어 진짜 시장(市場)의 논리를 몰랐던 것이다. 이제 부산은 화려한 껍데기 빌리기를 멈추고 자신의 골목을 돌아보아야 한다. 간판을 임차하는 행정이 아니라, 골목의 냄새를 브랜딩하는 진짜 정치가 필요한 때다. 세계가 열광하는 부산의 힘은 거창한 미술관 분관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있었던 부산의 삶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도시의 기억을 음악으로 번역한 교토 콘서트홀
교토는 일본의 과거를 상징하는 도시다. 천년 수도의 역사와 수많은 사찰, 전통 가옥이 어우러져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문화유산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교토를 찾는 사람들은 흔히 과거의 시간 속을 걷는 듯한 경험을 기대한다. 그렇다면 이런 도시 한가운데에 현대적인 콘서트홀을 짓는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 가 아라타 이소자키는 1995년 완공된 '교토 콘서트홀'을 통해 자신만의 해답을 제시했다. 교토 콘서트홀은 교토 천도 1,200주년 기념사업의 핵심 문화시설로 건립되었다. 당시 교토시는 단순한 공연장이 아닌, 전통 도시의 미래를 상징할 새로운 문화 공간을 원했다. 설계를 맡은 이소자키는 전통 건축의 형태를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 '교토'라는 도시의 본질을 건축으로 풀어내는 데 집중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교토의 격자형 도시 구조였다. 현재의 교토는 794년 헤이안쿄 조성 당시 만들어진 도시 계획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이소자키는 기와지붕이나 처마 같은 표면적인 전통 요소를 차용하는 대신, 도시를 지탱해 온 질서와 구조를 건축 언어로 번역했다. 건물 내부에 등장하는 바둑판식 구조의 로비 공간은 이러한 해석의 결과다. 그에게 교토의 정체성은 눈에 보이는 형태가 아니라, 도시를 구성하는 보이지 않는 질서 그 자체였다. 건물은 메인홀을 담은 직육면체와 소공연장이 들어선 원통형 공간, 그리고 이를 연결하는 중앙 로비로 구성된다. 서로 다른 기하학적 형태들이 만나 만들어내는 독특한 긴장감과 균형은 하나의 양식에 머무르지 않았던 이소자키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건물의 진정한 매력은 내부를 경험할 때 드러난다. 관람객은 곧바로 객석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수변 공간을 따라 걷고, 넓은 로비를 지나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이동한 뒤에야 공연장에 도착한다. 이 과정은 마치 음악회의 전주곡과 같다. 일상의 공간에서 음악의 공간으로 천천히 감정을 전환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이소자키는 건축을 단순한 시설이 아니라 사람의 경험을 이끄는 하나의 장치로 이해했다. 메인홀은 1,833석 규모의 슈박스(Shoebox) 형식을 채택했다. 세계적인 음향 설계사인 나가타 어쿠스틱스와 협업해 빈 무지크페라인이나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바우 같은 전통적인 명홀의 장점을 현대적으로 구현했다. 외관은 실험적이지만 음악을 담아내는 공간만큼은 가장 검증된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2019년 프리츠커상 심사위원단은 이소자키를 두고 "동서양을 연결한 건축가"라고 평가했다. 교토 콘서트홀은 이러한 평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이 건물에는 전통 일본 건축의 직접적인 재현도, 서구 현대 건축의 일방적인 모방도 없다. 대신 교토라는 역사적 도시의 기억과 현대 건축의 언어가 균형 있게 공존한다.
[데스크 칼럼] 10년 EU 떠난 영국과 지금의 부울경
딱 10년 전이다. 2016년 6월 24일 오전 7시 20분경 영국발 뉴스에 세계가 경악했다. EU(유럽연합) 탈퇴에 대한 국민투표 결과가 공식적으로 확정됐다. 탈퇴 51.9%, 잔류 48.1%. 설마가 현실이 된 결과였다. 3.8% 차이로 영국은 ‘브렉시트(Brexit)’를 결정했다. 투표를 강행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그날 바로 사임 의사를 밝혔다. 그는 원래 EU 잔류파였다. 탈퇴 논란을 아예 털고 가기 위해 국민투표를 밀어붙였는데, 결국 브렉시트 1등 공신으로 역사에 남게 됐다. 그만큼 투표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후임 총리는 탈퇴 지지자인 테리사 메이였다. 당시 EU는 회원국들의 더욱 강한 결속을 다지고 있었다. 미국에 이어 중국이 경제 패권 국가로 부상하고 있었다. 금융 통합을 강화해 유럽 내 경제 효율성을 높여야 했다. 유럽을 하나의 경제 블록으로 묶어, 외부 협상력을 높일 필요도 있었다. 대체로 유럽 안에선 지지를 받는 논리였다. 영국의 다수 경제학자들도 영국이 EU에서 빠지면 매우 곤란해질 것이라고 꾸준히 경고했다. 하지만 영국 안에선 EU에 법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종속되는 것에 불만이 커졌다. 나라 통제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게 핵심 주장이었다. 한때 세계 최강 국가였던 영국민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메시지였다. 경제보다 자존심을 선택한 투표 결과라는 평가도 있다. 10년이 지나면서, 영국의 경제는 더 추락했다. EU 탈퇴 시 제기됐던 여러 우려가 적잖게 현실이 됐다. 지금 영국에선 브렉시트를 후회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이어지고 있고, EU 재가입 논쟁도 불거졌다. 노동당 안에선 EU 재가입을 공약으로 내걸자는 주장도 공식적으로 나왔다. 2016년 6월의 3.8% 차이 대가는 꽤 무거웠다. ‘규모의 경제’는 규모가 커져야 경제적 효율성이 좋다는 의미로 쓰인다. 많이 만들어야 하나를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 줄고, 이익은 커진다. 시장이 커야 투자가 몰리고, 또 그 덕에 시장은 더 커지고, 성장의 선순환에 올라탈 수 있다. 영국은 큰 시장의 일부가 아닌 자신만의 시장을 만든 셈이다. 시장의 논리만으로 경제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도 살펴야 한다. 경제 활동은 정책과 행정의 불확실성에 노출돼 있다. 주변 EU 회원국들과 비교해, 영국만 관세와 행정 시스템이 다르면 영국의 경제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 등으로 시장 통합, 행정 통합, 경제 블록화 등이 불경기 타개책으로 자주 언급된다. 80년대, 90년대 명절이면 부산에서 조부모가 있는 경남 고성으로 갔다. 부산의 지근거리에 있는 곳이지만, 매번 지겨워서 힘들었다. 차가 막히면 4~5시간도 걸렸다. 지금은 우회도로가 많고, 길도 좋아져, 경상남도 저 멀리 구석구석까지 웬만하면 2시간 남짓이다. 교통 인프라 덕에 부울경은 물리적으로 가까워졌다. 나머지는 제자리다. 부울경이 정서적으로 딱히 가까워지고 멀어질 일도 없었다. NC다이노스의 탄생으로 롯데자이언츠 팬이라는 공통분모가 오히려 줄었다. 경제 교류도 마찬가지다. 부울경은 서로 붙어 있어 자연스레 교류가 많을 수밖에 없지만, 딱 그 수준이다. 경제적으로 협업하며 함께 성장하는 사이는 아니다. 유럽의 나라들이 EU를 강화하면서 했던 고민은 부울경에도 유효하다. EU는 미국, 중국 등으로부터 유럽의 경제를 지켜야 했다. 어떤 면에서 대한민국 수도권은 미국과 중국보다 더 위협적이다. 지난 수십 년간 서울공화국은 돈과 사람을 끌어당겼다. 이런 극단적인 불균형을 극복하려 나온 아이디어가 지역 통합이다. 부울경 경제 블록화, 부울경 행정통합, 부울경 메가시티 등 부울경이 뭉치자는 아이디어는 여러 이름으로 나왔다. 이번 6·3 지방선거에서도 정부 지원과 맞물려 꽤 큰 쟁점이 됐다. 안타깝게도 부울경 통합에 대한 관심은 금세 또 식고 있다. 부울경 단체장 당선인들의 정당이 달라, 통합 동력이 떨어졌다는 전망도 있다. 민주당은 메가시티, 국민의힘은 행정통합을 원하기 때문이다. 10년 전 브렉시티가 결정될 때, 이미 영국의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건 자명했다. 그럼에도 영국 국민은 경제보다 자존심을 우선시했다. 부울경이 경제 블록화를 달성해 시장을 키우고 행정 효율성을 높이면, 결국 경제가 좋아진다는 것도 자명하다. 다만 단체장의 당이 서로 달라 뭉치기 쉽지 않다는 게 서글프다. 당의 자존심을 지키는 게 먹고 사는 문제보다 중요하지는 않다면, 당선인들은 지금부터 머리를 맞대야 할 것이다. k103@busan.com
[중앙로365] BTS 이후, 부산 관광의 골든타임
최근 부산은 다시 한번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BTS의 부산 공연을 보기 위해 국내는 물론 해외 각국에서 수많은 팬들이 부산을 찾았다. 공연장은 열광으로 가득 찼고, 호텔과 음식점, 카페와 관광지는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았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축제장이 되었고 부산은 글로벌 관광도시로서의 잠재력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번 공연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의미는 공연의 성공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왜 수많은 사람들이 부산을 찾았는가”라는 질문에 있다. 과거 관광객들은 유명 관광지와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찾아 이동했다. 하지만 오늘날 관광의 흐름은 달라지고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단순히 관광지를 보기 위해 여행하지 않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콘텐츠를 경험하기 위해 이동한다.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보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드라마 촬영지를 방문하기 위해 국경을 넘으며, 스포츠 경기와 문화행사를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관광의 중심이 장소에서 콘텐츠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해외 각국에서 팬들이 몰려 온 부산 글로벌 관광도시의 잠재력 재입증 자연환경·관광명소 넘어선 콘텐츠 관광 패러다임 재정립 필요성 부상 이벤트 관광도시 부산 비전 수립해 새로운 관광 생태계 구축 서둘러야 이번 BTS 공연은 이러한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공연을 보기 위해 부산을 찾은 팬들은 단순히 콘서트만 관람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부산에 머물며 음식을 먹고, 쇼핑을 하고, 관광지를 방문했다. 공연은 여행의 목적이었지만 부산은 여행의 경험이 되었다. 최근 관광학계에서는 이를 ‘콘텐츠 관광(Content Tourism)’ 또는 ‘팬덤 관광(Fandom Tourism)’이라 부른다. 관광객이 특정 장소를 방문하는 이유가 자연환경이나 관광명소가 아니라 콘텐츠와 문화적 경험에 있다는 것이다. BTS, 영화, 드라마, 게임, 스포츠와 같은 콘텐츠는 이제 강력한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실제로 세계 주요 도시들은 이러한 변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는 세계적인 공연과 스포츠 이벤트를 통해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으며, 싱가포르는 F1 그랑프리를 도시 브랜드 구축의 핵심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일본 오사카 역시 국제박람회와 글로벌 문화행사를 통해 관광수요를 창출하고 있다. 관광객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관광객이 찾아올 이유를 만드는 전략이다. 부산 역시 이제 새로운 관광 패러다임을 고민해야 한다. 그동안 부산 관광은 해양 관광을 중심으로 성장해 왔다. 해운대와 광안리, 태종대와 송도는 부산을 대표하는 관광자산이다. 하지만 세계 어느 도시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가질 수 있다. 반면 사람을 움직이는 콘텐츠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BTS 공연을 통해 초대형 이벤트나 행사가 도시경제와 관광산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확인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초대형 이벤트나 행사가 개최되는 것 자체가 아니다. 관광도시의 경쟁력은 행사를 유치하는 능력이 아니라 행사를 관광자산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에서 결정된다. 숙박과 교통, 다국어 안내체계, 관광상품 개발, 지역상권 연계 프로그램, 문화체험 콘텐츠는 충분히 준비되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또한 방문객들이 부산에 하루 더 머물고 싶어 하고, 귀국 후에도 다시 찾고 싶은 도시로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경험 설계 역시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지금이야말로 부산 관광의 골든타임이다. 부산국제영화제, 원아시아페스티벌, 국제 크루즈, MICE 산업, e스포츠 국제대회, 그리고 2027 세계청년대회까지 부산은 이미 다양한 글로벌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이를 개별 행사로 바라보느냐, 아니면 하나의 도시 전략으로 연결하느냐에 있다. 필요한 것은 ‘365일 이벤트 관광도시 부산’이라는 비전이다. 특정 계절이나 특정 행사에 의존하는 관광이 아니라 연중 다양한 이벤트와 콘텐츠가 관광객을 불러들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연과 축제, 스포츠와 문화행사, 국제회의와 전시산업을 하나의 관광 생태계로 연결해야 한다. 관광은 더 이상 관광지만으로 성장하는 산업이 아니다. 문화와 예술,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도시 브랜드가 결합된 종합산업이다. BTS 공연은 부산이 가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BTS는 부산을 찾아왔다. 그리고 세계의 시선을 부산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이후다. 이번 공연의 성공을 일회성 이벤트로 남길 것인가, 아니면 부산 관광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출발점으로 만들 것인가. 부산 관광의 미래는 바다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람을 움직이는 콘텐츠와 세계를 끌어들이는 이벤트, 그리고 이를 연결하는 전략 속에서 완성된다. 관광객을 기다리는 도시에서 관광객이 찾아오게 만드는 도시로, 해양관광도시에서 이벤트 관광도시로의 전환. 지금이 바로 부산 관광의 골든타임이다.
[김필남의 영화세상] 혼종의 시대, 공존이 가능할까?
그 상자 속에 정말 ‘양’이 있었을까. 중요한 것은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가 아니라, 누군가 그것을 양이라고 믿고 사랑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 ‘상자 속의 양’은 부재를 존재로 바꾸고, 기억을 사랑으로 이어 붙이는 영화다. 그런데 이미 떠난 사람이 다시 나타난다면 어떨까. 그를 예전의 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는 이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하고, 사랑과 상실의 경계를 담담히 응시한다. 드론이 날아다니며 택배를 배달하는 가까운 미래. 건축가 ‘오토네’와 목재소를 운영하는 ‘켄스케’ 부부는 7살 아들 ‘카케루’를 사고로 잃었다. 아들을 떠나보낸 지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부부는 여전히 상실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상자 하나가 배달된다. 고인의 얼굴과 목소리, 생전 사진과 영상을 학습해 휴머노이드를 제작해 주는 렌탈 업체 ‘리버스(환생)’의 광고물이다. 부부는 고민 끝에 아들의 모습을 한 휴머노이드를 ‘배송’ 받는다. 아들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음식을 먹을 수도, 물에 들어갈 수도 없으며 정기적으로 충전을 해야만 움직이는 휴머노이드 카케루.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아들을 마주할 수 있다는 현실은 부모에게 위로와 혼란을 동시에 안긴다. 처음엔 낯설었던 부부도 카케루와 시간을 보내며 조금씩 웃음을 되찾고, 적막했던 집에도 활기가 돌기 시작한다. 그러나 영화는 쉽게 감동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카케루가 아들의 빈자리를 채워갈수록 오히려 아들의 부재가 더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목소리를 재현하고 기억을 학습한다고 해도 휴머노이드는 진짜 아들이 아니다. 게다가 휴머노이드와 함께하는 삶에는 미래가 없다. 오늘은 행복하지만 그 행복은 과거에만 머물러 있기에 언제나 불안하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가져온 영화 제목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양을 그려 달라는 어린 왕자의 부탁에 조종사는 양 대신 상자 하나를 그려 보이며, “네가 원하는 양은 이 안에 있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실재하는 양이 아니다. 상자 안에 자신만의 양을 상상하고, 믿고,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고 믿는 것, 눈앞의 형상 너머를 상상하는 일. 영화는 그 모티프를 카케루를 바라보는 방식과 겹쳐 놓는다. 부모는 상자 속에 자신이 원하는 카케루를 투영하지만 자신들의 뜻대로 될 리 없다. 게다가 휴머노이드 카케루는 스스로 상자 속에서 걸어 나와 자신만의 카케루로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 작품을 두고 SF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기술이 열어갈 미래보다 인간 감정의 본질에 가 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화 속에서도 휴머노이드 기술의 작동 원리나 윤리적 논쟁은 드러나지 않는다. 감독은 영화 내내 건축가 오토네를 통해 ‘공존’을 말한다. 기계와 인간, 유리와 나무 등 이질적 존재가 어우러지는 ‘집’을 완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기계를 품에 안고 잠드는 사람들이 있는 혼종과 공존의 시대임을 알리는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의 버려진 아이들, ‘걸어도 걸어도’의 가족, ‘어느 가족’의 혈연 너머 공동체까지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줄곧 관계의 본질을 탐구해온 감독이다. 이번 작품은 다소 낯설 수 있지만 그 연장선상에 있다. 다만 질문의 대상이 인간에서 휴머노이드로 확장됐을 뿐이다. 이미 중국에서 실제로 등장한 ‘디지털 부활 서비스’에서 영감을 얻은 이 영화는 첨단 기술을 소재로 삼지만, 결국 향하는 곳은 인간이다. 상실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 그리고 삶은 때로 보이지 않는 상자 안의 무언가를 믿는 힘으로 이어진다는 것. 고레에다의 카메라는 여전히 인간을 향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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