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달식의 일필일침] 부산 주거 공간, 그 혁신을 기다리며
논설위원
1980년대 부산서 공동 주택 실험 많아
안전·창의성 입히면 다양한 공간 탄생
‘콜렉티브 힐스’ 구도심 주거 방향 제시
판교하우징 공동체 디자인 눈길 끌어
이제라도 획일화된 아파트서 벗어나
지역 지형·특성 살린 공간 만들었으면
그룹 블랙핑크의 로제가 팝스타 브루노 마스와 협업한 히트곡 ‘아파트(APT.)’가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100에서 지난주 5위에 올랐다. 새해 벽두에는 영국 오피셜 싱글 차트 톱100에서 2위에 오르기도 했다. 발매 3개월 만에 ‘아파트’가 다시 역주행하며 그 인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덕분에 윤수일의 ‘아파트’에 대한 재조명은 물론이고 주거 공간인 아파트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다. 이를 계기로 ‘로제의 아파트발 주거 공간 혁신’도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파트하면 부산을 빼놓을 수 없다. 데이터만 보더라도 부산은 빠르게 아파트화되고 있는 도시다. 2년 전 주택 인허가 물량의 98%가 아파트였다.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올해 부산 지역 아파트 분양 물량은 최대 1만 8000가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미분양 사태가 일어나고 자재비가 올라도 여전히 아파트 물량은 쏟아진다는 얘기다. 이대로라면 아파트가 도시를 빼곡하게 채울 날이 머지않았다. 천편일률적인 형태에 고층화 단지화까지. 이게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부산은 빠르게 획일화되어 가고 있다. 일찍이 독일의 실존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사람들은 보통 남들이 살아가는 방식, 즉 평균적 일상성을 따라 살아간다. 대개 사람들이 그렇듯 자기 자신보다는 자기 밖의 세상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며,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따라 잡담하고, 그들을 따라 애매하게 행동함으로써 서로 동질화하고 평균화를 꾀한다”고 말했다. 마치 우리의 주거 선호 양상이 이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파트는 분명 생활의 편리를 가져왔다. 하지만 도시가 아파트로 채워지면서 그 장점은 상쇄될 만큼 부정적인 요소도 많다. 주거 공간의 획일화는 도시의 단조로움을 초래하고 그 생기마저 앗아가고 있다. 여기에다 우리 사회는 저출생, 고령화, 인구 감소 등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가족 해체가 진행되고, 더는 국가가 이를 대신해 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제는 기존의 주택과 공동체 모델을 넘어서는 새로운 형태의 주거 공간을 고민해야 할 때다. 속된 말로 ‘돈 되는’ 아파트만 지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어쩌면 그 해답은 가까운 곳에 있을 수도 있다. 지금은 부산의 주거 형태가 단조로워졌지만, 과거 30~40년 전만 해도 부산은 달랐다. 당시에는 나름대로 공동체가 살아 있었다. 1970~1980년대에 지어진 부산의 아파트는 대부분 5층짜리였고, 전원도시 개념을 도입해 단지 내 넓은 공간과 풍부한 녹지, 격자형 도로가 설치되었다. 1980년대에는 자연 지형을 활용한 테라스형 아파트도 부산에서 시작됐다. 특히 망미주공 아파트는 우리나라 최초의 테라스형 아파트로 지금 봐도 조경이나 공간 효율성에서 손색이 없다. 수정동 국일주택, 남부민동 동천빌라 등도 이 시대의 혁신적인 공동 주택이었다. 이들은 대지를 무작정 깎아내지 않고, 산복도로의 경사면이나 굴곡을 그대로 살려 자연과 어우러지는 주거 형태를 구현했다.
완전한 주거 공간이라고 할 순 없지만, 지난해 부산의 ‘특별건축구역 활성화 시범사업’ 대상으로 선정된 관광숙박시설인 ‘영도 콜렉티브 힐스’는 구도심 지역에서 공동 주택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던져주고 있다. 전통적인 수직적 호텔 구조에서 벗어나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수평적 호텔 형태를 도입한 이 건물은 주변 구도심 지역과 잘 어우러지도록 디자인됐다. 이 프로젝트는 전문가들로부터 “부산의 빈집 문제와 인구소멸 위기 지역에 대한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부산의 주거 공간이 나아갈 방향은 경기도 성남 판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지난해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일본 건축가 야마모토 리켄이 설계한 판교하우징은 각 건물을 연결하는 공동 덱을 2층에 설치해 이웃들이 모임을 갖거나 놀이터, 정원으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하이데거는 “깊은 권태를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하나, 실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존이란 다른 사람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존재 가능성을 기획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주거 공간에 대입해 보면, 획일적인 아파트 대신 사람들이 자기만의 삶의 방식에 맞춘 공간을 설계하고 구축하는 것을 실존이라 할 수 있다. 이제라도 부산의 주거 공간이 지역의 지형과 특성을 살린 공간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아울러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혁신적인 모델도 필요하다. 1980년대의 특별한 공동 주택 실험들을 재조명하고, 여기에 안전과 창의성이 더해진다면 훨씬 다양한 주거 공간이 탄생할 것이다. 부산의 주거 공간 혁신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그 혁신을 기다린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