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윤경 칼럼]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이 특별함을 잃기 전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선거법 위반 1심 선고로 정국이 격랑에 휩싸였다. 당장 민주당에서는 ‘사법 살인’ ‘법 기술자들의 사악한 입틀막’ 등 격앙된 말들이 오간다. ‘비명계 움직이면 죽이겠다’로 상징된 민주당 내부 균열의 살벌한 조짐은 위태하게까지 느껴진다. 때를 만난 국민의힘은 ‘사필귀정’을 입에 올리고 ‘재판지연방지 TF’를 꾸리는 등 이재명 사법 리스크를 정국 반전 기회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분주하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사생결단의 정치가 연말 정국을 달구게 된 것이다.
이 대표는 1심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최종심에서 1심 형량이 유지되면 향후 10년간 피선거권을 박탈당하는 무거운 형량이다. 정치인의 선거 중 허위사실 공표에 징역형이 선고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공직선거법이 낙선자를 엄하게 처벌하지 않는다는 점에 비춰서도 과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유죄 판결이 내려진 발언들은 이 대표가 대선 과정에서 자신에게 제기된 의혹을 해명하며 한 것이다. 양형에 대한 불만에 앞서 재판부가 사실과 다르다고 판단한 부분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부터 느끼는 게 마땅하다.
정부와 여당이라고 사정이 크게 나을 리 없다. 명태균 씨 사태로 촉발된 김건희 여사 공천·국정 개입 의혹과 윤석열 대통령 공천 개입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명쾌하게 정리하고 가지 않으면 두고두고 국정 발목을 잡을 사안이다. 혹여 이재명 사법 리스크로 대충 덮고 가자고 하는 날에는 화를 더 키우는 결과로 이어질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지금이야말로 정부와 여당이 혁신할 기회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이재명 사법 리스크가 고조될수록 민주당 공세는 더 거세질 것이다. 서로서로 죽이는 게임으로는 한 발짝도 앞으로 전진할 수 없다.
25일은 이 대표 위증교사 혐의 1심 선고일이다. 진행 중인 재판만 4건인데 검찰은 법카 사적 유용으로 이 대표를 추가 기소하며 불난 민주당에 기름을 끼얹었다. 이재명 사법 리스크가 윤 대통령 국정 후반기 정국의 상수로 자리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문제는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국가 미래에 먹구름이 드리운 엄중한 시기를 정쟁으로 날을 새우며 보낼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미국만 위대하게 할 것’이라는 트럼프의 공언은 대미 수출에 목을 매는 우리 경제에 치명상을 예고한다.
더 근본적으로 파고들면 성장잠재력이 추락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망국적 수도권 집중과 초저출생으로 상징되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대외 충격이 아니더라도 안으로부터 무너질 수밖에 없다. 정부와 정치권이 총력을 동원해서 구조 개혁에 나서야 하는데 대통령의 낮은 국정 지지도와 야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에 발목이 잡혔다.
윤 정부 출범 초만 해도 서울과 부산의 두 바퀴로 국가 성장을 이끌어야 한다며 균형발전에 올인하는 분위기였다. 그 모멘텀을 위해 월드엑스포 유치에 국가 역량을 총집결했지만 좌초했다. 대안으로 내세웠던 게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인데 이제 극단적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표류 중이다. 엑스포 유치에 실패한 게 1년 전이니 윤 대통령이 글로벌 허브도시를 공언한 지도 꼭 1년인데 특별법은 21대와 22대 국회를 이어오며 잠자는 중이다.
그나마 중앙 정부와의 협의 과정에서 ‘복합리조트’가 빠지는 등 각종 특례 조항에 대한 수정이 거듭돼 실효성 논란까지 더해진 마당이다. 벼랑 끝에 선 지역을 살리기 위해서는 파격적 규제 혁파가 필요한데 중앙 관료들의 견제에 특별법의 칼날이 무뎌진 것이다. 그래도 글로벌 허브도시의 토대라도 놓자며 시민들이 서명운동까지 해 가며 법 통과에 목을 매고 있는 실정이다.
그 와중에 전남특별자치도법, 전북특별자치도법, 경기북부특별자치도법 등 지자체마다 유사한 특별법을 발의하며 부산의 뒷덜미를 잡는다. 이쯤 되면 노무현 정부의 공공기관 지방 이전과 혁신도시 조성이 지역별 형평성만 고려해 효과를 극대화하지 못했다는 한국은행의 연구 결과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전국에 판교형 테크노밸리를 만들겠다며 부산, 울산, 대구, 광주, 대전에 골고루 도심융합특구를 지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 하겠다는 것은 때론 아무것도 제대로 안 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국가의 성장잠재력을 회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혁신의 출발지로 부산을 키워야 하는데 정부의 의지는 점점 희미해져 가고 정치권은 발목만 잡는다. 결국 기댈 곳은 부산 정치권인데 사생결단의 결의가 보이지 않는다. 지역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국민의힘 책임이 크지만 부산 민주당의 존재감 부재도 적지 않은 원인을 제공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국가균형발전의 시계추를 되돌리기는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2024-11-19 [18:02]
-
[강윤경 칼럼] 전기 요금에 담긴 메시지가 중요하다
올여름 폭염이 지나간 자리에 전기료 폭탄만 남았다고 아우성이다. 8월 기록적 폭염으로 가정마다 치솟은 전기료에 이어 9월 전기료 폭탄 고지서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늦더위로 9월 전기 사용량이 한여름 수준의 가을 신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추석’이 아니라 ‘하석’이라고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전력거래소에 따르면 9월 최대 전력 수요 평균이 78GW로 역대 9월 최대치를 갈아치웠다. 여름인 7월 최대 전력 수요(80.5GW)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주택용 전기료에는 사용량이 늘수록 높은 요금을 매기는 누진제가 적용된다. 다만 여름철(7~8월)에는 누진 구간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전기료를 감면한다. 하지만 9월부터 전기료 할인 혜택은 사라진다. 에어컨을 똑같이 틀었어도 9월 전기료가 더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 때문에 기후변화로 늦더위가 일상인 현실에서 혹서기 전기료 할인을 9월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정부가 올 4분기 전기 요금을 동결한 것도 이 같은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전력의 재무구조 악화가 발등의 불인데도 요금 인상을 감행하지 못했다. 정부가 여론 눈치를 보며 전기료 인상을 주저하고 있다는 지적까지 받는다. 그런데 전기료 인상을 마냥 미적댄다고 될 일일까. 올해 6월 말 기준 한전 부채는 203조 원이다. 판매가격이 원가에 못 미치는 역마진 구조로 적자가 누적되면서 자금 조달을 위한 회사채 발행 규모도 커졌다. 상반기 한전과 자회사가 이자 갚는 데 쓴 돈만 2조 2841억 원, 하루 126억 원꼴이다.
한전은 공기업이다. 국민 세금으로 운영된다는 이야기다. 한전의 적자는 결국 국민 혈세로 메워야 할 돈이다. 전기 요금을 정치적 이해로만 결정하는 게 전형적 포퓰리즘인 까닭이다. 미래 세대에 부담을 전가하는 게 국민연금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전의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적자는 결국 미래 세대가 떠안아야 할 에너지 비용이다. 특히 4차 산업혁명으로 에너지는 국가 안보 차원의 문제로 부상했다. 인공지능(AI)과 미래 모빌리티는 막대한 에너지를 기반으로 한다. 기후변화에 맞선 에너지 전환은 이제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 이슈다.
전기료 폭탄이라는 수식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전기료는 OECD 국가 중 최하위다. 반면 1인당 전기 사용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낮은 전기 요금이 에너지 과소비로 이어지는 아이러니를 생각해야 한다. 에너지 효율 개선과 기술 혁신을 가로막는 게 더 근본적 문제다. 외국 유명 IT기업이 한국에 데이터센터를 짓는 게 무슨 대단한 이유에서가 아니다. 전기료가 싸기 때문이다.
전기 요금 인상을 둘러싼 논쟁이 그리 간단하지 않은 이유다. 국가 미래에 대한 고민이 담겨야 한다. 다양한 방식으로 국민들이 에너지 문제에 참여하고 공감하고 여론을 형성해야 한다. 전기료 폭탄을 말하지만 정작 아껴 쓴 만큼 돈을 돌려주는 정부 ‘탄소중립포인트’나 ‘에너지캐시백’에 대한 국민 참여는 미미하다는 사실은 생각해 봐야 할 대목이다.
전기 요금에 담아야 할 메시지를 가장 잘 반영한 최근 사례가 분산에너지법 시행에 따른 지역별 차등전기료다. 전기사업자가 송전·배전 비용 등을 감안해 지역별로 전기 요금을 차등 부과하는 것이다. 전력시스템의 효율성과 원전에 따른 사회적 비용 부담 등 전기 요금체계 중에서도 강력한 메시지를 담은 정책이다. 에너지 정책에서 앞선 나라들이 이미 시행 중이고 국가균형발전 차원에서도 중요한 제도다.
그런데 최근 공개된 전력거래소의 ‘지역별 가격제 기본(안)’을 보면 이런 고민을 제대로 담았는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2026년부터 적용될 이 제도는 전국을 수도권, 비수도권, 제주 3개 권역으로 뭉뚱그렸다. 원전이 밀집된 부산이나 전력 생산이 거의 없는 대전이나 같은 전기료를 적용한다. 초안이라고 하지만 출발이 이래서야 제도 취지를 제대로 살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특히 2026년은 지방선거의 해여서 정치적 공방에 휘둘릴 우려도 크다.
원전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잠재해 있는 상황에서 차등전기료는 어쩌면 국가 에너지 정책의 미래를 좌우할 중대한 분기점일 수 있다. 행정편의주의에서 벗어나 제도 취지를 살린 정교한 요금체계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야 한다. 원전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면서도 영구방사성폐기물처리장에 대한 논의에서 한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게 지금 우리 사회의 수준이다. 제대로 된 지역별 차등전기료 시행이야말로 에너지 백년대계를 위한 출발이 될 것이다.
2024-10-15 [17:52]
-
[강윤경 칼럼] 강남 불패, 대한민국 필패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세상에 처음 나온 게 2012년의 일이다. 노래와 함께 공개된 뮤직비디오는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코믹한 말춤과 재미있는 노랫말, 중독성 강한 리듬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타고 신드롬을 불러왔다. 세계인이 ‘오빤 강남스타일~’을 떼창하고 말춤을 패러디하며 공유했다. 그해 치러진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스타일’ 영상이 제작됐을 정도다. 그즈음 역사상 말로 세계를 정복한 아시아인이 두 명인데 한 명은 칭기즈칸이고 나머지 한 명이 싸이라는 이야기까지 회자했다.
강남스타일의 세계적 인기는 동시에 강남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을 자극했다. 한국은 곧 강남이었고 한국 문화가 곧 강남 문화였다. 강남은 대한민국 압축 성장의 상징적 공간이었다. 한강의 기적은 강남 기적의 다른 이름이었다. 10여 년이 흐른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강남의 공간적 지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부와 권력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이 됐고 쏠림과 집중의 구심력은 더 강화됐다. 서울공화국, 수도권공화국도 따지고 보면 강남공화국의 확장된 버전이다. 그렇게 강남은 지금도 불패의 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박형준 부산시장이 최근 강남을 공론장으로 소환했다. 한국정치학회가 부산 동서대 센텀캠퍼스에서 ‘2024 국제학술대회’ 일환으로 진행한 대담 자리에서다. 1970년대 이후 우리는 우수한 경제 관료를 중심으로 정치적 리더십과 자원을 집중해 압축 성장을 이뤘다. 그러나 압축 성장은 수도권 일극주의를 심화시켰고 성장 잠재력 저하와 초저출생, 격차 심화로 국가를 위기에 몰아넣고 있다고 했다.
박 시장은 국가 경영의 큰 틀을 수도권 중심의 수직적 구조에서 수평적 구조로 전환해야 하는데 이를 가로막는 주범이 ‘강남’이라고 했다.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이들의 80%가 강남에 살거나 강남권에서 아이를 교육한다. 강남은 엘리트주의의 상징이 됐고 전국이 ‘강남류’를 지향하면서 수도권 중심의 수직적 구조를 강화했다. 강남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학습한 중앙 관료들은 ‘강남 감각’을 체화해 아무리 지역의 문제를 역설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게 박 시장의 호소였다.
박 시장 스스로 부산시장 직을 수행하면서 중앙집권적 의식으로 무장한 관료의 벽이 얼마나 공고한지를 몸소 체험했을 것이다. 지역에 조그마한 권한이라도 넘겨주면 큰일 날 것처럼 이야기하는 관료의 인식 앞에 절망했을 것이다. 돈도 필요 없으니 제발 지역에 권한이라도 제대로 달라는 대목에서는 울분마저 느껴졌다. 우는 아이 달래듯 떡을 나눠 줄 게 아니라 떡시루를 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비슷한 시기 한국은행이 국가 통화정책을 왜곡시키는 주범으로 강남을 지목하고 나선 것도 우연이 아니다. 한은은 ‘입시 경쟁 과열로 인한 사회문제와 대응 방안’ 보고서를 통해 수도권 부동산 가격 급등은 강남 부동산에 대한 초과수요가 상시 잠재해 있는 사회구조적 문제며 이 수요의 근저에는 입시 경쟁이 자리 잡고 있고 교육열에서 파생된 끝없는 수요가 강남 부동산 불패 신화를 고착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를 극복할 대안으로 서울대의 지역비례선발제 도입을 제안했다. 한은의 금리 조정보다 수도권 부동산 가격 안정에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했다.
한은 총재가 교육부 장관이냐는 등의 비아냥도 나오지만 한은의 깊은 고민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최근 한은이 보고서 발간과 심포지엄을 잇달아 개최하며 국가균형발전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한은은 실증적 연구를 통해 초저출생이라는 국가적 재앙이 수도권 집중에서 비롯된다며 비수도권에 서울과 같은 거점도시 1~2곳이라도 만들어야 한다는 대안까지 제시한다. 국가균형발전도 결국 돈의 흐름에 관한 문제라고 한다면 한은이 국가적 위기 상황을 먼저 감지하고 대응책을 고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이런 행보의 배경에 대해 국가 통화정책은 국민과의 소통을 통해 컨센서스를 이뤄가는 과정인데 망국적 지역 불균형은 이를 무력화시킨다고 했다. 최근 수도권 집값이 급등한다고 주택담보대출을 옥죄고 있는데 정작 부동산 시장이 꽁꽁 얼어붙은 지역 주민들만 피해를 보고 있는 게 이런 상황이다.
국가 자원 배분의 큰 틀을 다시 바꿔야 하는데 강남의 울타리에 갇힌 중앙 관료의 눈에는 대한민국의 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이미 운동장은 기울었는데 지역 자생력 운운하며 땜질 처방만 해봐야 소용없다. 강남 신화도 결국은 국가의 정책 자원을 ‘몰빵’한 결과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눈부신 성취가 이제는 국가 성장의 잠재력을 갉아먹는 요인으로 변했다면 전략을 바꿔야 한다. 국가 통화정책의 컨트롤타워에서 나오는 경고를 귀담아들어야 한다. 대한민국호는 이미 침몰하기 시작했다.
2024-09-05 [18:11]
-
[강윤경 칼럼] 서울 ‘둥지’가 아니라 지역 ‘먹이’가 문제다
서울 집값이 들썩인다고 한다. 최근 서울의 주간 아파트값 상승률이 19주 연속 오름세를 이어 가고 전세가도 63주 연속 상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래량이 눈에 띄게 늘었고 강남을 중심으로 신고가를 기록하는 단지도 생겼다. 서울 부동산 가격 상승의 불씨는 경기도 과천 성남 하남 용인 광명으로 빠르게 옮겨붙어 수도권 집값 상승을 견인하는 모양새다. 경기도 동탄2신도시 한 아파트단지의 미계약 물량 1가구에 대한 무순위 공급에 294만 4780명이 몰렸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이런 수도권 집값 상승을 바라보는 비수도권 주민의 심사가 편할 리 없다. ‘로또 청약’ 같은 건 애초 딴 세상 이야기다. 전국에서 수도권을 제외하면 비수도권은 지역을 막론하고 부동산 경기가 최악으로 가뜩이나 침체 늪에 빠진 지역 경제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 부산의 아파트 매매가는 2022년 6월부터 떨어지기 시작해 2년 2개월 동안 줄곧 하락세다. 미분양 물량이 쌓여 장기 침체 우려가 높은 상황으로 분양시장도 꽁꽁 얼어붙었다. 이대로라면 수도권과 비수도권 부동산 양극화는 더 심화할 전망이다. 수도권에 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벼락 거지’ 소리를 듣게 생겼다.
한국 사회 모순이 집약된 곳이 부동산이다. 한국인에게 집은 생활공간 이상의 의미다. 부동산이 곧 계급이고 복지인 게 우리 사회다. 사회적 불평등도 토지, 부동산 문제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많다. ‘땀이 아니라 땅으로 잘 사는 사회’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자조 섞인 농담이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다. 그래서 부동산 정책은 때때로 정권의 명운을 가르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지금은 한국 사회의 모순이 가장 극명하게 투영돼 나타나는 부동산 문제가 바로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양극화 확대다.
수도권 집값이 들썩이자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또 수도권 공급 위주 부동산 대책을 내놓았다. 이른바 ‘8·8 부동산 공급 대책’이다. 서울을 포함해 수도권 그린벨트를 해제해 8만 호를 공급한다. 재개발·재건축 활성화를 위해 초과 이익 환수를 폐지하는 촉진법도 제정한다. 이를 통해 향후 6년간 수도권에 모두 42만 7000호 이상의 주택을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국민 주거 안정을 위한 주택 공급 확대 방안’이라며 국민을 내세웠지만 지역민 입장에서 보면 정부 재원과 국가 자원을 쏟아부어 가뜩이나 활황인 수도권 부동산을 부양한다는 이야기로밖에 안 들린다.
수도권 주택 공급 확대가 국민 주거 안정은커녕 수도권 집중과 부동산 투기만 심화시켰다는 것은 이미 검증된 결과다. 수도권 집값이 뛰고, 신도시가 발표되고, 인구가 유입되고, 또 집값이 뛰고, 또 신도시가 발표되고, 또 인구가 유입되고, 수도권은 공급이 더 큰 수요를 부르는 악순환을 반복하는 공간이 됐다. 이명박 정부가 2012년 그린벨트를 헐어 만든 보금자리주택도 일시적 집값 안정이라는 착시는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집값은 못 잡고 개발이익 사유화와 국토균형발전 저해라는 부작용만 낳았다는 게 서울연구원의 연구 결과였다.
수도권 부동산 문제는 공급이 아니라 수요 측면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가뜩이나 좁은 국토인데 그 좁은 땅덩어리의 11.8%에 불과한 수도권에 인구 절반 이상이 몰려 사는 이 기형적 상황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경제적 효율성을 따지더라도 우리의 수도권 같은 기형적 집중은 벌써 붕괴해야 했을 시스템이다. 그 기형적 시스템의 버팀목이 정부다. 수조 원의 예산을 투입해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를 연결하고 그린벨트까지 풀어 택지를 공급하면서 한계에 이른 수도권 투자 효율을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제 이 시스템도 한계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망국적 초저출생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젊은이들이 ‘먹이’를 찾아 수도권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생존 경쟁에 내몰리다 보니 생긴 현상이 초저출생이다. 젊은이가 고향을 떠나는 이유는 수도권이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서가 아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공간이 우리나라엔 오직 서울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수도권은 ‘최선’이 아니라 ‘차악’의 선택지라는 이야기다. 일자리만 있으면 부산에서 살고 싶다는 젊은이들이 많다.
결국 핵심은 서울의 ‘둥지’가 아니라 지역의 ‘먹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인데 지역에는 재원이나 정책 수단이 없고 정부에는 의지가 없다. 정말 문제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수도권 부동산 공급 확대라는 땜질이 아니라 2차 공공기관 지방 이전 같은 근본적 해결에 나서야 하는데 산업은행 부산 이전 하나 해결 안 되는 게 우리 현실이다. 정치에서도 이제 비수도권은 ‘마이너’다. ‘수도권부동산공화국’의 자연적 붕괴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걸까.
2024-08-15 [18:10]
-
[강윤경 칼럼] 대한민국 제2 도시의 소멸이라니!
엄청난 일이지만 그다지 놀랍지 않은 것은 이미 정해진 미래였기 때문일 것이다. 부산의 소멸위험지역 진입 이야기다. 한국고용정보원은 최근 ‘지방소멸 2024: 광역대도시로 확산하는 소멸위험’ 보고서를 통해 부산이 광역시로는 처음으로 소멸위험지역에 들어섰다고 발표했다. 서울을 제외한 광역시 전체 45개 구·군 중 21곳이 소멸위험지역에 포함됐는데 그중 절반 이상인 11곳이 부산의 자치구라는 사실도 덧붙였다.
소멸위험지수는 우리보다 고령화를 먼저 경험한 일본에서 만든 개념이다. 핵심 지표는 해당 지역에 출산 적령기(20~39세) 여성이 얼마나 사느냐다. 그 인구를 65세 이상 노인 인구로 나눈 값이 소멸위험지수다. 0.5 미만이면 소멸위험진입단계, 0.2 미만이면 소멸고위험단계로 구분된다.
부산의 인구는 2024년 3월 기준 329만 명으로 65세 이상이 23%인데 비해 20~39세 여성 인구는 11.3%에 그쳐 소멸위험지수 0.490을 기록했다. 젊은 여성이 노인 인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다. ‘제2 도시 부산의 소멸이라니!’ 하는 반응이 나오고 있지만 서두에 언급했듯이 ‘소멸위험도시 부산’은 예고된 시나리오다. 부산은 2021년 9월 전국 대도시 중 처음으로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20%를 넘어서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2050년이면 부산 인구는 250만 명으로 쪼그라들고 평균 나이가 60세를 넘어 시민의 절반이 노인이 된다는 게 통계청의 인구추계다.
청년이 부산을 떠나는 주된 이유는 알다시피 일자리다. 지역 소멸의 핵심 지표인 젊은 여성의 이탈이 더 두드러지는 것은 일자리 구조에서 더 취약하기 때문이다. 부산의 젊은 여성 일자리는 블루칼라도 화이트칼라도 아닌 핑크칼라가 주류다. 이른바 돌봄 직군이거나 파트 타임·저임금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청년이 필요로 하는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면 될 일인데 그 해법을 찾지 못해 소멸의 길목에 접어든 게 지금 부산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 경로의존성을 벗어나기 위해 부산이 선택한 방향이 글로벌 허브도시다. 물류와 금융을 축으로 블록체인 기반의 산업생태계를 만들어 지역 산업을 혁신하겠다는 전략이다. 정부의 금융기회발전특구 지정은 이를 위한 구체적 발걸음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실질적 효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그동안의 정부 균형발전 정책은 거창한 레토릭에 그쳤거나 나눠 먹기식 복지정책 성격에 가까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산의 금융중심지와 블록체인특구 지정이 산업생태계 형성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실질적 효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임계점을 넘어서는 과감한 정책 집중이 필요한데 변죽만 울린다. 이 과정에는 수도권 중심의 기득권적 시각도 작동한다. 산업은행 부산 이전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이 누더기로 변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금융기회발전특구라고 다를까.
마침 부산의 소멸위험지역 진입 소식이 알려지기 얼마 전 한국은행이 부산에서 지역경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가로막는 초저출생과 이에 따른 성장 잠재력 약화를 막기 위해서는 수도권 집중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이창룡 총재의 의지가 반영된 행사다. 한국 최고의 경제 싱크탱크가 제시하는 해법은 비수도권 대도시 한두 곳에 투자를 집중해 서울에 비견되는 거점 대도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수도권 대다수 지역이 비슷하게 쇠퇴하는 것보다 거점 대도시 중심의 균형발전으로 얻는 집적경제의 이득이 주변 지역으로 고루 파급되도록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분석 결과도 덧붙인다.
한국은행이 심포지엄의 첫 개최지로 부산을 정한 것도 이런 기대감의 반영일 것이다. 부산이 기회발전특구 전략의 핵심으로 금융을 내세운 것도 산업생태계 혁신에 미칠 파급력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또한 금융은 정책이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점에서 정부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부산은 디지털경제로의 전환에 맞춰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인 블록체인 기반의 디지털 금융 특화 전략으로 방향을 잡았다. 새롭게 형성되는 금융 생태계인 만큼 정부의 규제 이슈가 시장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부산이 씨를 뿌리고 있는 만큼 정부가 임계점을 넘어서는 전폭적 정책 지원을 통해 산업생태계가 꽃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한민국 제2 도시가 소멸의 길로 접어드는데 대한민국이라고 무사할 리 없다. 더 이상 균형발전은 정치적 수사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린 문제다. 선택과 집중으로 소멸의 시계를 되돌릴 수 있다면 지역의 성장 잠재력이 폭발할 수도 있다. 정부의 정책 의지에 달렸다.
2024-07-02 [18:08]
-
[강윤경 칼럼] 지방에 권한을 줘야 능력도 생긴다
행정통합이 다시 뜨거운 관심사로 떠올랐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지난 17일 대구에서 열린 ‘22대 국회의원 당선인과 함께하는 대구·경북 발전결의회’에서 ‘대구·경북(TK) 행정통합’ 카드를 꺼내 들면서다. 그는 행사 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대구와 경북이 통합해 인구 500만의 대구직할시가 되면 한반도 제2의 도시가 된다’는 포부를 밝혔다. ‘현행 3단계 행정 체계에서 도를 없애고 광역시와 국가가 바로 연결되는 2단계로 전환하면 복잡한 행정 체계를 단순화해 행정 효율도 극대화한다’라고도 했다.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즉각 환영의 뜻을 밝혔고 TK 행정통합을 위한 태스크포스(TF) 회의가 열리는 등 추진에 속도가 붙었다. 윤석열 대통령까지 가세하면서 6월 4일 두 단체장과 주무 부처인 행정안전부 이상민 장관, 대통령 직속 지방시대위원회 우동기 위원장이 만나 통합 필요성과 추진 방향, 정부 차원의 지원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행정통합이 국가적 의제로 부상한 것이다. 대구·경북은 2026년 지방선거에서 통합 광역단체장을 뽑는다는 계획이다. 성사되면 광역 지자체 통합 국내 첫 사례다.
TK 행정통합이 급물살을 타는 상황을 지켜보는 부울경은 곤혹스럽다. 국가균형발전의 핵심 어젠다를 선점당하고 향후 국가적 논의에서 끌려다닐 수도 있다. 부산으로서는 홍 시장의 ‘한반도 제2 도시 대구’ 발언이 도발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제2 도시 위상이 인천에 밀리느니 마느니 하는 터라 더 그렇다. 부울경 특별연합 출범을 코앞에서 걷어찬 후폭풍이다. 2018년 6월 공동협력기구 설립 후 부울경 발전 계획을 수립하고 특별연합 규약안이 2022년 국무회의를 통과했을 때만 해도 부울경 메가시티에 대한 꿈이 컸다. 하지만 민선 8기 출범과 함께 박완수 경남도지사와 김두겸 울산시장이 부정적 입장을 취하면서 2023년 1월 출범을 앞두고 특별연합은 좌초됐다.
행정통합 주도권을 TK에 빼앗긴 건 뼈아픈 일이지만 그렇다고 가슴만 치고 있을 일도 아니다. 행정통합이 호락호락한 사안도 아니다. 홍 지사가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TK 행정통합을 주도한 건 이 도지사다. 2020년 이 도지사 제안을 권영진 당시 대구시장이 받아들이면서 대구·경북행정통합 공론화위원회가 출범했다. TK 행정통합을 무산시킨 건 민선 8기 대구시장에 당선된 홍 시장이었다. 또다시 대구와 경북이 의기투합하고 있지만 통합 지자체 명칭부터 미묘한 입장차를 보인다. 단순한 사안 같지만 험난한 통합 과정의 전조다.
TK 행정통합 반대에서 찬성으로 돌아선 홍 시장 속내야 알 수 없지만 균형발전을 향한 이 지사의 뚝심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는 국회의원과 도지사를 지내며 일관된 입장을 견지해 온 균형발전론자다. 수도권 일극 체제에 맞짱을 뜨기 위해서는 지역이 뭉쳐야 한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윤석열 정부 초대 전국시도지사협의회장을 맡았던 그는 지방분권형 개헌을 역설했다. 단순한 행정통합을 넘어 국방과 외교 외 모든 권한을 지방에 이양하는 완전한 자치정부를 이뤄야 지방소멸과 초저출생이라는 국가적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행정통합의 전국적 확산 필요성도 일관되게 주장한다.
TK 행정통합과 부울경 특별연합 무산의 전례에서 보듯 광역 단체의 통합은 지난한 과정이다. 주민 동의를 이끌어내야 하고 각종 법령도 만들어야 한다. 중앙이 주도하면 첫걸음을 떼기 어렵고 지방이 주도하면 최종 관문을 넘기 어렵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단순한 기계적 결합으로는 효과를 이루기도 어렵다. 마·창·진 통합 결과가 그렇다. 거점 도시 육성을 목표로 통합 창원시를 출범시켰지만 결과는 하향 평준화였다. 광역 단위 행정통합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행정통합은 단순히 행정구역의 결합이 아니라 도시와 지역이 연계됨으로써 시너지를 창출하는 광역적 공간을 새로 구성하는 일이어야 한다.
행정통합이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완전한 자치정부 수준의 혁명적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는 이 지사의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지름길이 지방분권형 개헌이다. 1995년 시작된 지방자치 30년을 앞둔 지금 행정구역의 근본적 변화를 고민해야 할 때가 됐다. 소멸 위기에 놓인 지역의 운명은 그 필요성을 더 강하게 뒷받침한다. 부산과 경남도 행정통합 연구를 이어가고 있고 광주·전남 행정통합, 충남·충북·대전·세종 특별연합 논의도 진행 중이다. 전국적 행정통합 논의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부산·경남 행정통합 1차 토론회에서 나온 이야기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거였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는 절박한 외침이었다. 지역은 이제 뭉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린 것이다. 다 죽게 생겼는데 먼저 죽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2024-05-28 [17:58]
-
[강윤경 칼럼] 기후 소송이 시작됐다
헌법재판소가 23일 ‘기후 소송’의 공개 변론을 시작했다. “정부가 온실가스 감축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아 환경권과 생명권, 행복추구권을 침해했다”며 청소년단체 등이 낸 헌법소원 4건을 병합해 본격 심리에 들어간 것이다. ‘청소년기후행동’ 회원 19명이 2020년 3월 헌법재판소에 첫 헌법소원을 낸 지 4년 1개월 만이다. 2021년 ‘기후위기비상행동’ 회원 등 130명이 참여한 ‘시민기후소송’, 2022년 태아를 포함한 어린이 62명을 원고로 한 ‘아기기후소송’, 2023년 탈핵법률가모임 ‘해바라기’가 제기한 기후 소송 등 유사 헌법소원이 이어졌다.
청구인들은 정부가 탄소중립기본법에서 정한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온실가스 40% 감축 목표가 기후 위기 대응에 부족하고 미래 세대에 피해를 전가했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온실가스 감축 목표는 산업구조의 현실과 가용한 기술 수준을 감안해 설정된 것으로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우리 헌재가 기후 소송을 심리한 전례가 없어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날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청구인들은 “기후 위기가 단순히 경제나 환경 정책 문제가 아닌 기본권 문제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며 한국에서 기후 위기 대응이 인권과 기본권 문제라는 결정이 나오면 아시아, 나아가 세계적 기후 문제 해결의 큰 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첫발을 뗀 소송이지만 해외에서는 이미 정부의 기후 위기 대응 책임을 묻는 판결이 잇따랐다. 네덜란드 대법원은 2019년 ‘정부는 2020년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1990년 대비 20%에서 25%로 확대하라’는 ‘우르헨다 소송’ 판결로 기후 소송의 새 역사를 썼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2021년 ‘미래 세대를 보호하기 위한 예방 조치도 국가 의무’라며 ‘온실가스 감축 책임을 미래에 떠넘기는 현행 법령은 위헌이다’고 결정했다. 독일 정부는 헌재 결정에 따라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2030년 65%, 2040년 88%로 상향하고 탄소 순 배출량 0이 되는 탄소 중립 목표 연도도 2045년으로 5년 앞당겼다.
미국에서도 지난해 몬태나주 법원이 ‘정부가 에너지 사업 허가를 내주면서 기후 영향을 고려하지 않도록 한 조항이 위헌’이라며 정부 기후 대응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최근 ‘스위스 정부의 온실가스 정책이 충분하지 않아 2000명이 넘는 여성 노인들의 인권을 명백히 침해했다’며 ‘8만 유로의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기후 소송이 정부는 물론이고 기업과 자본으로 확산하는 추세다. 미국 시카고주는 6개 글로벌 석유기업을 대상으로 이들 기업이 석유와 천연가스 상품이 기후에 미치는 영향을 고의로 호도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우리나라 한 기업은 호주 티모르해에서 천연가스를 개발하다 온실가스 배출로 주민 재산권과 환경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소송을 당했고 결국 사업을 중단했다. 경남환경운동연합 등은 2월 국민연금을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국민연금공단이 ‘탈석탄 선언’을 했음에도 좌초 자산이 될 수 있는 석탄기업에 투자를 확대해 국민연금에 재정적 위험을 초래했다는 취지다.
친환경을 강조하지만 친환경이 아닌 이른바 ‘그린워싱’(위장환경주의)은 환경단체의 주요 소송 타깃이다. 항공사에서부터 패션업계, 육가공업체에 이르기까지 허위 광고 ‘그린워싱’ 사례로 소송을 당하는 일이 줄을 잇는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해 ‘그린워싱’ 판단 기준 마련을 위해 ‘환경 관련 표시·광고에 관한 심사 지침’을 개정했다. 기후 공시제도가 의무화하면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국내 기업에도 이제 먼 나라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최근 각국이 판결을 통해 기후 문제를 구체적 권리로 인정하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각국의 기후 소송은 고유한 법과 제도에 기반하고 있지만 기후 과학에 근거한 기후변화 목표 설정이나 국가와 기업의 책임 범위 등은 국제법상 공통의 법적 문제로 각국 판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눈치 빠른 국내 로펌들이 최근 환경부 고위 공무원을 영입하는 등 환경팀을 키우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이상 기온과 기후 재앙은 더 이상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사과가 금값이 되는 ‘기후플레이션’ 파괴력도 현실이 됐다. 결국 이는 통계적으로 구체화하고 기후 소송의 근거가 될 것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환경단체가 벌이는 퍼포먼스가 아니다. 급증하는 기후 소송은 세상이 기후변화를 ‘천재에 의한 불운’이 아닌 ‘인재에 의한 불의’의 관점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방증이다. 이에 대한 우리 기업, 특히 지역 기업의 대응을 생각하면 걱정이 앞선다. ‘기후 문해력’을 빨리 익히지 않으면 결국 ‘기후 악당’이나 ‘기후 문맹’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2024-04-23 [17:58]
-
[강윤경 칼럼] 감동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22대 총선을 향한 여야의 공천이 마무리됐다. 감동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역시나 쇄신도 비전도 참신한 인물도 보이지 않는다. 그 자리를 막말이 대신 채웠다. 그것도 역대급으로. 마치 역대급 비호감 대선의 총선판을 보는 느낌이다. 이번 총선의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 22대 국회에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유권자들은 알 길이 없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폄훼하는 북한 개입설을 입에 올리며 국가 폭력의 희생자를 빨갱이로 몰고 ‘발목지뢰 목발 경품’ 발언으로 국가를 지키다 다친 병사를 야비한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다. 전직 대통령을 ‘불량품’에 비유하고 ‘서울 시민의 교양 수준이 일본인의 발톱 밑 때만큼도 못하다’며 민족의 자존까지 건드린다. ‘난교’ 이야기는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하다. 품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어차피 정치는 이해관계의 조정이고 한정 자원에 대한 최적화된 배분의 과정이다. 공천도 결국 인적 자원의 최적화된 배분이라고 한다면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고 다툼도 불가피하다. 그래도 정도가 있고 명분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수준이고 품격이다.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21대 국회에서 오가는 야만의 언어를 통해 우리는 정치 혐오를 지겹도록 경험했다. 그 말의 당사자 중 상당수는 이번 공천 경쟁에서도 살아남아 다시 국회 입성을 노리고 있다.
유권자들은 선거가 민주주의 축제의 장이 아니라 전쟁터라는 사실도 정치인들이 주고받는 살벌한 언어를 통해 깨닫는다. ‘비명 횡사’ ‘공천 학살’ ‘자객 공천’ ‘저격수’ ‘선전 포고’…. 축제가 아니고 전쟁이니 등장하는 말도 죄다 전쟁 용어다. 상대에 대한 이해와 존중, 배려는 없고 혐오와 적개심만 가득하다. 상대 진영은 ‘독재 집단’이거나 ‘범죄 집단’이고 상대가 하는 공천은 ‘막장’ 아니면 ‘패륜’이다.
욕하면서 닮는다고 정치권의 막말은 사회적으로 학습되고 사회 전반의 품위 손상과 정신적 타락에도 영향을 미친다. 사회관계망서비스에 등장하는 각종 혐오와 증오의 말은 우리 언어 습관이 얼마나 호전적으로 변했는지 말해 준다. 인터넷 기사에 달리는 댓글은 또 어떤가. 언어가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한다면 독한 말은 그만큼 사회가 독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웃음과 여유를 잃었다.
1850년 미국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선거 합동연설회에서 민주당 스티븐 더글러스 후보가 정적인 공화당 에이브러햄 링컨을 이중인격자라는 터무니 없는 말로 몰아붙였다. 이에 링컨은 “내가 정말 두 얼굴을 가졌다면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왜 하필 못생긴 얼굴을 가지고 나왔겠습니까”하고 응대해 현장 분위기를 사로잡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6일 워싱턴DC의 한 호텔에서 진행된 언론인 사교클럽 만찬에서 고품격 자학 개그를 선보였다. 바이든은 “이번 주 두 명이 각 당의 대통령 후보로 확정됐다”면서 “한 후보는 너무 늙었고 대통령이 되기에는 정신적으로 부적합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다른 한 명은 바로 나”라며 자신에 대한 고령 공격을 익살스럽게 받아넘겼다. 미 대선도 극단적 진영 대결과 막말이 논란이지만 간간이 전해지는 이런 유머와 여유로 우리 정치 문화와 차별화된다.
우리에게 그런 정치적 DNA가 없는 것도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정이 피란을 가는 중에도 중신들이 동인·서인으로 나뉘어 당파 싸움을 벌였다. 이에 도승지였던 이항복이 “그렇게 싸움을 잘하는데 동인은 동해로 보내고 서인은 서해로 보내 왜군을 막게 했으면 이 난리가 없었을 것”이라는 일침으로 중신들을 부끄럽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사회의 분열과 혐오를 막고 통합으로 이끄는 일이야말로 정치 지도자의 의무다. 2008년 미 대선 후보이던 존 매케인은 유세 도중 한 청중이 아랍인 오바마를 믿을 수 없다고 하자 “그는 품위 있는 가정의 시민이며 단지 근본적 이슈에 대한 의견이 나와 다를 뿐이다”고 받았다. 반대가 극심했던 이라크 파병을 늘리는 안을 지지하면서 “조국이 전쟁에서 지는 것보다 내가 대선에서 지는 게 낫다”고 했다는 그다. 우리에게는 기껏해야 “멋지게 지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하는 지도자 정도가 있을 뿐이다.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까지 지낸 박광온 의원이 ‘비명 횡사’ 와중에도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상대 후보 진영을 찾아 전폭적 지지를 약속하며 환하게 웃는 모습 정도가 이번 총선 기간에 본 감동적 장면이라면 장면이다. 22일 후보 등록이 마감되면 총선 레이스가 본격화한다. 선거운동 기간만이라도 막말 대신 유머와 여유가 담긴 촌철살인의 언어를 만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강윤경 논설위원 kyk93@busan.com
2024-03-21 [18:25]
-
[강윤경 칼럼] '센텀2'가 '판교 테크노밸리'처럼 되려면
부산 해운대구 반여·반송·석대동 일원에 추진 중인 센텀2지구 도시첨단산업단지 사업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그동안 사업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부지 내 풍산 공장 이전이 속도를 내는 데 따른 것이다. 박형준 부산시장과 류진 풍산 회장은 19일 센텀2지구 내 풍산 공장 이전을 본격화하기로 손을 맞잡았다. 2021년 기장군 일광면 이전 계획이 알려진 후 주민 반발로 무산된 전력이 있어 조심스러운 입장이지만 이미 이전 부지를 확정한 만큼 조만간 공개 추진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부산의 산업 지형으로 보면 센텀2지구는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현안이다. 2016년 산업단지 지정 후 3단계에 걸친 개발 계획을 수립하고 그린벨트 해제 등 숱한 난관을 넘어왔는데 풍산 이전에 발목이 잡혀 사업이 지연됐다. 풍산 공장도 중요한 산업체인 만큼 지역 내에 품는 게 마땅하다. 시가 이전 부지 주민의 이해를 잘 구하고 관련 지원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풍산의 역할이 중요하다. 공장 이전 지역 주민들에 대한 지원 등 지역사회 공헌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풍산은 그동안 국가 보안 시설이라는 이유로 그린벨트 점용과 부지 이전 보상 차익 등 각종 특혜 논란이 일었지만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는 미미하다는 지적을 받아 온 터다.
무엇보다 센텀2지구 조성을 서둘러야 하는 것은 부산의 산업생태계 혁신이라는 절박성 때문이다. 시는 센텀2지구를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첨단산업을 이끌 지역의 혁신 허브로 만들어 간다는 계획이다. 지역의 산업생태계를 혁신하고 혁신 역량을 모을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라는 기대다. 물론 공간만 조성한다고 저절로 혁신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첨단산업을 일으켜야 하고 자본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혁신 역량을 갖춘 인재들이 모여야 한다.
센텀시티가 당초 기대와 달리 혁신의 허브가 되지 못한 것도 이런 조건들이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6년 수영비행장을 산업단지로 전환할 당시만 해도 대기업 SK가 사업을 주도해 정보통신산업과 디지털 혁신의 거점이 될 것이란 기대가 높았다. 그러나 SK가 자금난을 이유로 손을 뗐고 시는 부산정보단지 이름을 라틴어의 100이란 숫자를 뜻하는 ‘센텀(Centum)’을 따와 센텀시티로 바꾸고 ‘100% 완벽한 첨단미래도시’를 기치로 2000년 착공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기공식에 참석해 21세기 지식정보화를 선도할 동북아시아 중추 도시로 도약하는 발판이 마련됐다며 부산은 아시아와 유럽, 환태평양을 잇는 빛의 실크로드 중심에 서게 될 것이라고 했다.
지금 들어도 벅찬 이야기이지만 20여 년 세월이 흐른 지금 센텀시티에서 ‘100% 완벽한 첨단미래도시’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당초 기대한 첨단산업 혁신은 일어나지 않았고 주거와 상업시설이 산업단지 부지를 잠식하면서 난개발 논란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벡스코와 영화의전당, 부산문화콘텐츠컴플렉스 등 산업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인프라가 생기고 화려한 도시의 외양은 갖추게 됐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센텀2’가 ‘센텀1’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첨단산업 중심의 개발이 이뤄져야 한다. 마침 13일 부산시청에서 지방시대를 주제로 열린 민생토론회에서도 센텀2지구가 주목받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청년들이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센텀2지구를 경기도 성남 판교에 버금가는 산업·주거·문화가 결합되는 ‘부산형 테크노밸리’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판교 테크노밸리가 어떤 곳인가. 네이버, 카카오, 넥슨, SK바이오팜 등 국내 굴지의 IT, BT 관련 혁신 대기업과 중견기업들이 몰려있는 대한민국 혁신의 심장이다. 1622개 기업의 2022년 기준 총매출이 167조 7000억 원에 달하고 7만 8000명의 일자리 중 30~40대가 70% 가까이 차지한다. 젊은 인재들이 몰려들고 창업이 활성화하면서 제3 판교 테크노밸리 조성 사업도 시작됐다.
이쯤 되면 센텀2지구가 어떤 차별화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부산은 그동안 열악한 환경에서도 R&D 투자 확대와 지산학 협력을 통해 혁신 기업과 인재 육성에 힘쓰고 있다. 그러나 수도권과의 혁신 역량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판교 테크노밸리가 가능한 것은 자본과 인재가 몰려 있는 수도권에 입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이런 입지를 두고 센텀2지구에 투자할 리도 만무하다. 도심융합특구 전략만으로 혁신 기업들을 불러 모을 수 있을까. 기울어진 운동장을 뒤집어엎을 수 있는 더 전향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아니면 현란한 수사는 그냥 희망고문일 뿐이다.
2024-02-20 [18:09]
-
[강윤경 칼럼] 해운대 포차촌과 광안리 드론쇼
부산국제영화제(BIFF)는 1996년 9월 13일 역사적 개막과 함께 하나의 골칫거리에 직면한다. 당시만 해도 영화제 주 무대는 개봉관이 몰려 있던 남포동 극장가였다. 부산시와 중구청은 국내외 유명 영화인들이 몰려들자 남포동 극장가 일대를 BIFF 광장으로 조성하기로 했다. 문제는 당시 극장가 골목에 난립해 있던 노점상들이었다. 노점상 철거에 나선 행정 당국과 생존권을 내세운 노점 상인들의 극한 대치가 이어졌다. 수개월에 걸친 대립 끝에 노점상을 양성화하는 대신 노점 개수를 줄이고 정비해 2부제로 운영하는 타협안이 나왔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남포동 BIFF 광장 포차 골목이었다.
영화인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BIFF 광장 포차 골목은 명소가 됐다. 당시 영화제를 대표했던 김동호 집행위원장이 탁월한 술 실력과 입담으로 밤을 새우며 세계 영화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공간도 포차였다. BIFF를 찾은 해외 영화인들은 그런 포차를 ‘한국형 스트리트 바’라고 부르기도 했다. 부산연구원이 2011년 부산의 10대 히트 상품으로 꼽았던 ‘씨앗호떡’의 탄생도 BIFF 포차 골목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2011년 ‘영화의 전당’이 개관하고 영화제 주 무대가 해운대로 이동하면서 주목받게 된 곳이 해운대 바다마을 포장마차촌이었다. 그렇게 영화제와 포차의 역사가 이어져 온 것이다. 2015년 영화제 기간 배우 탕 웨이가 포차촌에 모습을 드러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탕 웨이는 “부산 올 때마다 포차촌에 꼭 간다. 부산은 정말 아름다운 도시다”고 밝히기도 했다. 2020년엔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부산에 오면 이곳 라면을 꼭 먹어야 한다”는 글과 함께 인증샷을 SNS에 올리기도 했다.
그렇게 해운대의 명물이 된 포차촌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고 한다. 해운대구청이 2021년 식품위생법 위반으로 고발된 포차촌에 철거 명령을 내린 것이다. 포차촌은 그동안 바가지요금 등 논란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BIFF의 역사를 담고 있는 명소가 사라진다고 하니 아쉽다. 가뜩이나 지역 관광 콘텐츠가 부족한 현실에서 무조건 없애는 것만이 능사인가 싶기도 하다. 당장 주차장이나 공원 활용 이야기가 나와 상상력의 빈곤만 확인하게 된다. 나름 ‘핫플’이었던 민락동 수변공원도 금주 구역 지정 후 마땅한 활성화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포차촌과 달리 새롭게 뜨는 콘텐츠가 광안리 드론쇼다. 2021년 첫선을 보인 ‘광안리 M 드론라이트쇼’는 매주 상설 무대가 열리고 특별 공연까지 생길 정도로 인기다. 2024년 새해 첫날 선보이려던 ‘광안리 M 드론라이트쇼 2024 카운트다운’에는 경찰 추산 10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 그런데 통신 장애로 드론을 띄우지 못해 많은 사람들의 원성을 샀다. 전국은 물론이고 해외에서 부산을 찾은 관광객들이 새해 첫날을 망치고 발길을 돌리며 부산을 어떻게 기억할까를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난다.
부산시는 2020년 국제관광도시에 선정된 후 1391억 원의 국·시비를 투입해 다양한 관광 콘텐츠 개발에 나서고 있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다. 국제관광도시의 핵심 사업인 ‘세븐브리지 랜드마크 사업’도 광안대교를 제외하고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고 제대로 된 콘텐츠가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까지 받고 있는 마당이다. 그만큼 관광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콘텐츠 개발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인데 그래서 포차촌의 명멸과 드론쇼의 파행은 더 뼈아프게 다가온다.
특히 부산 관광이 새로운 분기점을 맞고 있는 시점이어서 더욱 그렇다. 국제관광도시 선정 후 부산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부산의 글로벌 인지도가 높아졌고 코로나 엔데믹에 접어들어 관광 회복세도 두드러진다. 세계적 여행 전문 매거진 ‘내셔널 지오그래픽 트래블러’가 ‘2023년 숨이 막히도록 멋진 여행지 25곳’을 발표하면서 아시아 도시에서 유일하게 부산을 선정하기도 했다. 2030월드엑스포 유치 실패라는 아픈 경험에도 불구하고 유치 운동 과정에서 부산의 브랜드 가치가 많이 상승한 데 따른 효과로도 분석된다.
부산에 쏠린 관심을 관광의 질적 도약의 계기로 만들어야 할 때다. 이제는 단체 관광 중심의 ‘깃발 관광’ 시대는 지났다. 개별자유관광객(FIT)이 중심이 돼 현지인들의 삶과 문화를 체험하려는 욕구가 강하다. 관광객이 시민의 삶 속으로 스며들고 도시의 활력이 되는 ‘관광 시민’의 개념으로까지 진화하고 있다. 그러려면 이들이 시민들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매력적인 관광 콘텐츠들이 많아져야 하고 불편을 느끼지 않고 시민의 삶에 동참할 수 있도록 명실상부한 글로벌 자유도시로 거듭나야 한다. 부산만의 매력을 고민하고 가꾸고 키워야 할 시점이다.
2024-01-16 [18:38]
-
[강윤경의 쏘울앤더시티] 부산대가 부산의 미래다
부산대 총장 선거전이 불붙었다는 소식이다. 총장임용추천위원회는 내년 2월 6일 제22대 총장 선거를 시행한다고 알렸다. 다음 달 22~23일 후보 등록을 앞두고 이미 6명 정도의 교수가 출마 후보자로 거론되는 가운데 물밑 선거전도 치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교수회 홈페이지에 ‘사전선거운동 의심 사례들이 발생하고 있어 자중을 당부한다’는 추천위의 글까지 올라왔다. 부산대 총장 선거는 교수들의 투표 결과에 직원·조교와 학생들의 투표를 일정 비율로 반영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선거 결과 1, 2순위 후보자가 정해지면 추천위는 검증을 거쳐 그 결과를 교육부에 전달하고 그중 1명이 교육부 장관 제청과 대통령의 임명으로 임기 4년의 총장에 취임한다.
부산대 총장직선제는 한 교수의 희생으로 지켜 온 전통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국립대 선진화 방안에 맞춰 교육부가 돈줄을 쥐고 대학에 간선제로의 전환을 압박했고 마지막까지 남았던 부산대도 간선제로 전환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2015년 8월 17일 국어국문학과 고현철 교수가 총장직선제, 대학자율화,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며 투신하면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직선제 전통은 지켜졌고 20대 전호환, 21대 차정인 직선 총장으로 이어졌다. 다른 국립대들도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돌아왔다.
문제는 고현철 교수의 죽음으로 지켜 낸 총장직선제 전통이 부산대를 굳건히 세우고 시대의 변화에 맞춰 혁신을 거듭하는 방향으로 끌고 왔느냐는 점이다. 선거를 통해 구성원들의 총의를 모으고 민주적 절차로 선출된 총장이 자율적이고 합리적 의사 결정을 통해 대학을 이끌고 간다는 것은 지극히 이상적인 모델이다. 그러나 해마다 추락하고 있는 부산대의 위상을 보면 대학 구성원들이, 특히 그 중심에 있는 교수들이 대학의 변화와 혁신을 위해 얼마나 자율적으로 매진하고 있느냐는 데에는 의문이 따른다.
부산대는 서울의 웬만한 대학보다 못한 취급을 받은 지 오래다. 정시 합격자의 100%가 빠져나가고 대기 순번으로 채우면서 지원자 전원이 합격하는 학과도 생겼다. 대우 창업자 고 김우중 회장이 1960년대 경기고 재학 중 공부는 안 하고 주먹을 휘두르고 다니다 서울대 갈 성적이 나오지 않자 부산대에 원서를 넣었다가 광탈하고 연세대 갔다는 일화는 이제 전설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지거국(지방거점국립대)의 맏형’이라는 형식적 예우조차 흐릿해진 게 현실이다.
물론 부산대 위상 추락은 망국적 수도권 집중 때문이다. 기업과 자본이 서울 중심으로 쏠리다 보니 너도나도 ‘인 서울’에 목을 맨다. 대학 입학 과정에서부터 지역의 우수한 인재는 서울로 빠져나가고 지역에서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떠난다. 젊은 인재들이 떠난 도시에 희망이 있을 리 없다. 그렇게 부산대의 위상 추락은 부산의 위상 추락과 동의어가 됐다.
그렇다고 부산대 위상 추락을 외부적 요인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벼랑 끝 위기에도 뼈를 깎는 자구 노력은 체감하기 힘들다. 세계를 향한 도전은커녕 우물 안 개구리처럼 그래도 부산에서는 최고라고 위안한다. 지역 사학들은 교수 월급도 못 줄 형편인데 국립대니 망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총장 선거가 변화와 혁신의 계기가 아니라 기득권 지키기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냉정히 돌아볼 때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경북대 총장에게 경북대 의대 수준이 서울 삼류대보다 못해졌다며 의대 질을 높이라고 주문했다는데 부산대 의대라고 다를까.
세계적 도시는 세계적 대학들이 주도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본에 쫓기며 추락하던 미국 경제를 되살리고 3차 산업혁명을 주도한 것은 워싱턴DC나 뉴욕이 아니라 서부의 실리콘밸리였다. 실리콘밸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스탠퍼드와 버클리 같은 훌륭한 대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대가 쇠락하고 있는 부산의 혁신을 주도할 역량을 키우고 있는가.
부산대가 부산교대와의 통합 추진을 계기로 글로컬대학에 선정된 것은 그나마 희망의 씨앗이다. 올해 세계 3대 대학평가기관 평가에서 순위가 약진했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그러나 추락하는 부산대의 위상을 다시 세우려면 깜짝 놀랄 정도의 전폭적 투자와 혁신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 5년간 1500억 원이 적지 않은 돈이지만 일본만 해도 전국에 국제탁월연구대학 7곳을 선정해 각 대학마다 수천억 원씩 쏟아붓는다. 부산이 글로벌 허브 도시가 되려면 부산대가 글로벌 허브 대학이 돼야 한다. 그러려면 정부의 전폭적 투자와 강력한 내부 혁신을 이끌 총장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22대 부산대 총장 선거 과정이 부산대의 위상을 다시 세우기 위한 치열한 논쟁의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게 부산을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2023-12-07 [1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