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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 칼럼] 기후 소송이 시작됐다
헌법재판소가 23일 ‘기후 소송’의 공개 변론을 시작했다. “정부가 온실가스 감축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아 환경권과 생명권, 행복추구권을 침해했다”며 청소년단체 등이 낸 헌법소원 4건을 병합해 본격 심리에 들어간 것이다. ‘청소년기후행동’ 회원 19명이 2020년 3월 헌법재판소에 첫 헌법소원을 낸 지 4년 1개월 만이다. 2021년 ‘기후위기비상행동’ 회원 등 130명이 참여한 ‘시민기후소송’, 2022년 태아를 포함한 어린이 62명을 원고로 한 ‘아기기후소송’, 2023년 탈핵법률가모임 ‘해바라기’가 제기한 기후 소송 등 유사 헌법소원이 이어졌다.
청구인들은 정부가 탄소중립기본법에서 정한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온실가스 40% 감축 목표가 기후 위기 대응에 부족하고 미래 세대에 피해를 전가했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온실가스 감축 목표는 산업구조의 현실과 가용한 기술 수준을 감안해 설정된 것으로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우리 헌재가 기후 소송을 심리한 전례가 없어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날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청구인들은 “기후 위기가 단순히 경제나 환경 정책 문제가 아닌 기본권 문제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며 한국에서 기후 위기 대응이 인권과 기본권 문제라는 결정이 나오면 아시아, 나아가 세계적 기후 문제 해결의 큰 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첫발을 뗀 소송이지만 해외에서는 이미 정부의 기후 위기 대응 책임을 묻는 판결이 잇따랐다. 네덜란드 대법원은 2019년 ‘정부는 2020년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1990년 대비 20%에서 25%로 확대하라’는 ‘우르헨다 소송’ 판결로 기후 소송의 새 역사를 썼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2021년 ‘미래 세대를 보호하기 위한 예방 조치도 국가 의무’라며 ‘온실가스 감축 책임을 미래에 떠넘기는 현행 법령은 위헌이다’고 결정했다. 독일 정부는 헌재 결정에 따라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2030년 65%, 2040년 88%로 상향하고 탄소 순 배출량 0이 되는 탄소 중립 목표 연도도 2045년으로 5년 앞당겼다.
미국에서도 지난해 몬태나주 법원이 ‘정부가 에너지 사업 허가를 내주면서 기후 영향을 고려하지 않도록 한 조항이 위헌’이라며 정부 기후 대응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최근 ‘스위스 정부의 온실가스 정책이 충분하지 않아 2000명이 넘는 여성 노인들의 인권을 명백히 침해했다’며 ‘8만 유로의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기후 소송이 정부는 물론이고 기업과 자본으로 확산하는 추세다. 미국 시카고주는 6개 글로벌 석유기업을 대상으로 이들 기업이 석유와 천연가스 상품이 기후에 미치는 영향을 고의로 호도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우리나라 한 기업은 호주 티모르해에서 천연가스를 개발하다 온실가스 배출로 주민 재산권과 환경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소송을 당했고 결국 사업을 중단했다. 경남환경운동연합 등은 2월 국민연금을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국민연금공단이 ‘탈석탄 선언’을 했음에도 좌초 자산이 될 수 있는 석탄기업에 투자를 확대해 국민연금에 재정적 위험을 초래했다는 취지다.
친환경을 강조하지만 친환경이 아닌 이른바 ‘그린워싱’(위장환경주의)은 환경단체의 주요 소송 타깃이다. 항공사에서부터 패션업계, 육가공업체에 이르기까지 허위 광고 ‘그린워싱’ 사례로 소송을 당하는 일이 줄을 잇는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해 ‘그린워싱’ 판단 기준 마련을 위해 ‘환경 관련 표시·광고에 관한 심사 지침’을 개정했다. 기후 공시제도가 의무화하면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국내 기업에도 이제 먼 나라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최근 각국이 판결을 통해 기후 문제를 구체적 권리로 인정하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각국의 기후 소송은 고유한 법과 제도에 기반하고 있지만 기후 과학에 근거한 기후변화 목표 설정이나 국가와 기업의 책임 범위 등은 국제법상 공통의 법적 문제로 각국 판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눈치 빠른 국내 로펌들이 최근 환경부 고위 공무원을 영입하는 등 환경팀을 키우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이상 기온과 기후 재앙은 더 이상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사과가 금값이 되는 ‘기후플레이션’ 파괴력도 현실이 됐다. 결국 이는 통계적으로 구체화하고 기후 소송의 근거가 될 것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환경단체가 벌이는 퍼포먼스가 아니다. 급증하는 기후 소송은 세상이 기후변화를 ‘천재에 의한 불운’이 아닌 ‘인재에 의한 불의’의 관점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방증이다. 이에 대한 우리 기업, 특히 지역 기업의 대응을 생각하면 걱정이 앞선다. ‘기후 문해력’을 빨리 익히지 않으면 결국 ‘기후 악당’이나 ‘기후 문맹’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2024-04-23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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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 칼럼] 감동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22대 총선을 향한 여야의 공천이 마무리됐다. 감동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역시나 쇄신도 비전도 참신한 인물도 보이지 않는다. 그 자리를 막말이 대신 채웠다. 그것도 역대급으로. 마치 역대급 비호감 대선의 총선판을 보는 느낌이다. 이번 총선의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 22대 국회에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유권자들은 알 길이 없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폄훼하는 북한 개입설을 입에 올리며 국가 폭력의 희생자를 빨갱이로 몰고 ‘발목지뢰 목발 경품’ 발언으로 국가를 지키다 다친 병사를 야비한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다. 전직 대통령을 ‘불량품’에 비유하고 ‘서울 시민의 교양 수준이 일본인의 발톱 밑 때만큼도 못하다’며 민족의 자존까지 건드린다. ‘난교’ 이야기는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하다. 품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어차피 정치는 이해관계의 조정이고 한정 자원에 대한 최적화된 배분의 과정이다. 공천도 결국 인적 자원의 최적화된 배분이라고 한다면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고 다툼도 불가피하다. 그래도 정도가 있고 명분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수준이고 품격이다.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21대 국회에서 오가는 야만의 언어를 통해 우리는 정치 혐오를 지겹도록 경험했다. 그 말의 당사자 중 상당수는 이번 공천 경쟁에서도 살아남아 다시 국회 입성을 노리고 있다.
유권자들은 선거가 민주주의 축제의 장이 아니라 전쟁터라는 사실도 정치인들이 주고받는 살벌한 언어를 통해 깨닫는다. ‘비명 횡사’ ‘공천 학살’ ‘자객 공천’ ‘저격수’ ‘선전 포고’…. 축제가 아니고 전쟁이니 등장하는 말도 죄다 전쟁 용어다. 상대에 대한 이해와 존중, 배려는 없고 혐오와 적개심만 가득하다. 상대 진영은 ‘독재 집단’이거나 ‘범죄 집단’이고 상대가 하는 공천은 ‘막장’ 아니면 ‘패륜’이다.
욕하면서 닮는다고 정치권의 막말은 사회적으로 학습되고 사회 전반의 품위 손상과 정신적 타락에도 영향을 미친다. 사회관계망서비스에 등장하는 각종 혐오와 증오의 말은 우리 언어 습관이 얼마나 호전적으로 변했는지 말해 준다. 인터넷 기사에 달리는 댓글은 또 어떤가. 언어가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한다면 독한 말은 그만큼 사회가 독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웃음과 여유를 잃었다.
1850년 미국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선거 합동연설회에서 민주당 스티븐 더글러스 후보가 정적인 공화당 에이브러햄 링컨을 이중인격자라는 터무니 없는 말로 몰아붙였다. 이에 링컨은 “내가 정말 두 얼굴을 가졌다면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왜 하필 못생긴 얼굴을 가지고 나왔겠습니까”하고 응대해 현장 분위기를 사로잡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6일 워싱턴DC의 한 호텔에서 진행된 언론인 사교클럽 만찬에서 고품격 자학 개그를 선보였다. 바이든은 “이번 주 두 명이 각 당의 대통령 후보로 확정됐다”면서 “한 후보는 너무 늙었고 대통령이 되기에는 정신적으로 부적합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다른 한 명은 바로 나”라며 자신에 대한 고령 공격을 익살스럽게 받아넘겼다. 미 대선도 극단적 진영 대결과 막말이 논란이지만 간간이 전해지는 이런 유머와 여유로 우리 정치 문화와 차별화된다.
우리에게 그런 정치적 DNA가 없는 것도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정이 피란을 가는 중에도 중신들이 동인·서인으로 나뉘어 당파 싸움을 벌였다. 이에 도승지였던 이항복이 “그렇게 싸움을 잘하는데 동인은 동해로 보내고 서인은 서해로 보내 왜군을 막게 했으면 이 난리가 없었을 것”이라는 일침으로 중신들을 부끄럽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사회의 분열과 혐오를 막고 통합으로 이끄는 일이야말로 정치 지도자의 의무다. 2008년 미 대선 후보이던 존 매케인은 유세 도중 한 청중이 아랍인 오바마를 믿을 수 없다고 하자 “그는 품위 있는 가정의 시민이며 단지 근본적 이슈에 대한 의견이 나와 다를 뿐이다”고 받았다. 반대가 극심했던 이라크 파병을 늘리는 안을 지지하면서 “조국이 전쟁에서 지는 것보다 내가 대선에서 지는 게 낫다”고 했다는 그다. 우리에게는 기껏해야 “멋지게 지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하는 지도자 정도가 있을 뿐이다.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까지 지낸 박광온 의원이 ‘비명 횡사’ 와중에도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상대 후보 진영을 찾아 전폭적 지지를 약속하며 환하게 웃는 모습 정도가 이번 총선 기간에 본 감동적 장면이라면 장면이다. 22일 후보 등록이 마감되면 총선 레이스가 본격화한다. 선거운동 기간만이라도 막말 대신 유머와 여유가 담긴 촌철살인의 언어를 만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강윤경 논설위원 kyk93@busan.com
2024-03-21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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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 칼럼] '센텀2'가 '판교 테크노밸리'처럼 되려면
부산 해운대구 반여·반송·석대동 일원에 추진 중인 센텀2지구 도시첨단산업단지 사업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그동안 사업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부지 내 풍산 공장 이전이 속도를 내는 데 따른 것이다. 박형준 부산시장과 류진 풍산 회장은 19일 센텀2지구 내 풍산 공장 이전을 본격화하기로 손을 맞잡았다. 2021년 기장군 일광면 이전 계획이 알려진 후 주민 반발로 무산된 전력이 있어 조심스러운 입장이지만 이미 이전 부지를 확정한 만큼 조만간 공개 추진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부산의 산업 지형으로 보면 센텀2지구는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현안이다. 2016년 산업단지 지정 후 3단계에 걸친 개발 계획을 수립하고 그린벨트 해제 등 숱한 난관을 넘어왔는데 풍산 이전에 발목이 잡혀 사업이 지연됐다. 풍산 공장도 중요한 산업체인 만큼 지역 내에 품는 게 마땅하다. 시가 이전 부지 주민의 이해를 잘 구하고 관련 지원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풍산의 역할이 중요하다. 공장 이전 지역 주민들에 대한 지원 등 지역사회 공헌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풍산은 그동안 국가 보안 시설이라는 이유로 그린벨트 점용과 부지 이전 보상 차익 등 각종 특혜 논란이 일었지만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는 미미하다는 지적을 받아 온 터다.
무엇보다 센텀2지구 조성을 서둘러야 하는 것은 부산의 산업생태계 혁신이라는 절박성 때문이다. 시는 센텀2지구를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첨단산업을 이끌 지역의 혁신 허브로 만들어 간다는 계획이다. 지역의 산업생태계를 혁신하고 혁신 역량을 모을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라는 기대다. 물론 공간만 조성한다고 저절로 혁신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첨단산업을 일으켜야 하고 자본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혁신 역량을 갖춘 인재들이 모여야 한다.
센텀시티가 당초 기대와 달리 혁신의 허브가 되지 못한 것도 이런 조건들이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6년 수영비행장을 산업단지로 전환할 당시만 해도 대기업 SK가 사업을 주도해 정보통신산업과 디지털 혁신의 거점이 될 것이란 기대가 높았다. 그러나 SK가 자금난을 이유로 손을 뗐고 시는 부산정보단지 이름을 라틴어의 100이란 숫자를 뜻하는 ‘센텀(Centum)’을 따와 센텀시티로 바꾸고 ‘100% 완벽한 첨단미래도시’를 기치로 2000년 착공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기공식에 참석해 21세기 지식정보화를 선도할 동북아시아 중추 도시로 도약하는 발판이 마련됐다며 부산은 아시아와 유럽, 환태평양을 잇는 빛의 실크로드 중심에 서게 될 것이라고 했다.
지금 들어도 벅찬 이야기이지만 20여 년 세월이 흐른 지금 센텀시티에서 ‘100% 완벽한 첨단미래도시’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당초 기대한 첨단산업 혁신은 일어나지 않았고 주거와 상업시설이 산업단지 부지를 잠식하면서 난개발 논란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벡스코와 영화의전당, 부산문화콘텐츠컴플렉스 등 산업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인프라가 생기고 화려한 도시의 외양은 갖추게 됐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센텀2’가 ‘센텀1’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첨단산업 중심의 개발이 이뤄져야 한다. 마침 13일 부산시청에서 지방시대를 주제로 열린 민생토론회에서도 센텀2지구가 주목받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청년들이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센텀2지구를 경기도 성남 판교에 버금가는 산업·주거·문화가 결합되는 ‘부산형 테크노밸리’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판교 테크노밸리가 어떤 곳인가. 네이버, 카카오, 넥슨, SK바이오팜 등 국내 굴지의 IT, BT 관련 혁신 대기업과 중견기업들이 몰려있는 대한민국 혁신의 심장이다. 1622개 기업의 2022년 기준 총매출이 167조 7000억 원에 달하고 7만 8000명의 일자리 중 30~40대가 70% 가까이 차지한다. 젊은 인재들이 몰려들고 창업이 활성화하면서 제3 판교 테크노밸리 조성 사업도 시작됐다.
이쯤 되면 센텀2지구가 어떤 차별화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부산은 그동안 열악한 환경에서도 R&D 투자 확대와 지산학 협력을 통해 혁신 기업과 인재 육성에 힘쓰고 있다. 그러나 수도권과의 혁신 역량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판교 테크노밸리가 가능한 것은 자본과 인재가 몰려 있는 수도권에 입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이런 입지를 두고 센텀2지구에 투자할 리도 만무하다. 도심융합특구 전략만으로 혁신 기업들을 불러 모을 수 있을까. 기울어진 운동장을 뒤집어엎을 수 있는 더 전향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아니면 현란한 수사는 그냥 희망고문일 뿐이다.
2024-02-20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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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 칼럼] 해운대 포차촌과 광안리 드론쇼
부산국제영화제(BIFF)는 1996년 9월 13일 역사적 개막과 함께 하나의 골칫거리에 직면한다. 당시만 해도 영화제 주 무대는 개봉관이 몰려 있던 남포동 극장가였다. 부산시와 중구청은 국내외 유명 영화인들이 몰려들자 남포동 극장가 일대를 BIFF 광장으로 조성하기로 했다. 문제는 당시 극장가 골목에 난립해 있던 노점상들이었다. 노점상 철거에 나선 행정 당국과 생존권을 내세운 노점 상인들의 극한 대치가 이어졌다. 수개월에 걸친 대립 끝에 노점상을 양성화하는 대신 노점 개수를 줄이고 정비해 2부제로 운영하는 타협안이 나왔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남포동 BIFF 광장 포차 골목이었다.
영화인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BIFF 광장 포차 골목은 명소가 됐다. 당시 영화제를 대표했던 김동호 집행위원장이 탁월한 술 실력과 입담으로 밤을 새우며 세계 영화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공간도 포차였다. BIFF를 찾은 해외 영화인들은 그런 포차를 ‘한국형 스트리트 바’라고 부르기도 했다. 부산연구원이 2011년 부산의 10대 히트 상품으로 꼽았던 ‘씨앗호떡’의 탄생도 BIFF 포차 골목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2011년 ‘영화의 전당’이 개관하고 영화제 주 무대가 해운대로 이동하면서 주목받게 된 곳이 해운대 바다마을 포장마차촌이었다. 그렇게 영화제와 포차의 역사가 이어져 온 것이다. 2015년 영화제 기간 배우 탕 웨이가 포차촌에 모습을 드러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탕 웨이는 “부산 올 때마다 포차촌에 꼭 간다. 부산은 정말 아름다운 도시다”고 밝히기도 했다. 2020년엔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부산에 오면 이곳 라면을 꼭 먹어야 한다”는 글과 함께 인증샷을 SNS에 올리기도 했다.
그렇게 해운대의 명물이 된 포차촌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고 한다. 해운대구청이 2021년 식품위생법 위반으로 고발된 포차촌에 철거 명령을 내린 것이다. 포차촌은 그동안 바가지요금 등 논란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BIFF의 역사를 담고 있는 명소가 사라진다고 하니 아쉽다. 가뜩이나 지역 관광 콘텐츠가 부족한 현실에서 무조건 없애는 것만이 능사인가 싶기도 하다. 당장 주차장이나 공원 활용 이야기가 나와 상상력의 빈곤만 확인하게 된다. 나름 ‘핫플’이었던 민락동 수변공원도 금주 구역 지정 후 마땅한 활성화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포차촌과 달리 새롭게 뜨는 콘텐츠가 광안리 드론쇼다. 2021년 첫선을 보인 ‘광안리 M 드론라이트쇼’는 매주 상설 무대가 열리고 특별 공연까지 생길 정도로 인기다. 2024년 새해 첫날 선보이려던 ‘광안리 M 드론라이트쇼 2024 카운트다운’에는 경찰 추산 10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 그런데 통신 장애로 드론을 띄우지 못해 많은 사람들의 원성을 샀다. 전국은 물론이고 해외에서 부산을 찾은 관광객들이 새해 첫날을 망치고 발길을 돌리며 부산을 어떻게 기억할까를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난다.
부산시는 2020년 국제관광도시에 선정된 후 1391억 원의 국·시비를 투입해 다양한 관광 콘텐츠 개발에 나서고 있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다. 국제관광도시의 핵심 사업인 ‘세븐브리지 랜드마크 사업’도 광안대교를 제외하고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고 제대로 된 콘텐츠가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까지 받고 있는 마당이다. 그만큼 관광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콘텐츠 개발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인데 그래서 포차촌의 명멸과 드론쇼의 파행은 더 뼈아프게 다가온다.
특히 부산 관광이 새로운 분기점을 맞고 있는 시점이어서 더욱 그렇다. 국제관광도시 선정 후 부산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부산의 글로벌 인지도가 높아졌고 코로나 엔데믹에 접어들어 관광 회복세도 두드러진다. 세계적 여행 전문 매거진 ‘내셔널 지오그래픽 트래블러’가 ‘2023년 숨이 막히도록 멋진 여행지 25곳’을 발표하면서 아시아 도시에서 유일하게 부산을 선정하기도 했다. 2030월드엑스포 유치 실패라는 아픈 경험에도 불구하고 유치 운동 과정에서 부산의 브랜드 가치가 많이 상승한 데 따른 효과로도 분석된다.
부산에 쏠린 관심을 관광의 질적 도약의 계기로 만들어야 할 때다. 이제는 단체 관광 중심의 ‘깃발 관광’ 시대는 지났다. 개별자유관광객(FIT)이 중심이 돼 현지인들의 삶과 문화를 체험하려는 욕구가 강하다. 관광객이 시민의 삶 속으로 스며들고 도시의 활력이 되는 ‘관광 시민’의 개념으로까지 진화하고 있다. 그러려면 이들이 시민들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매력적인 관광 콘텐츠들이 많아져야 하고 불편을 느끼지 않고 시민의 삶에 동참할 수 있도록 명실상부한 글로벌 자유도시로 거듭나야 한다. 부산만의 매력을 고민하고 가꾸고 키워야 할 시점이다.
2024-01-16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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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의 쏘울앤더시티] 부산대가 부산의 미래다
부산대 총장 선거전이 불붙었다는 소식이다. 총장임용추천위원회는 내년 2월 6일 제22대 총장 선거를 시행한다고 알렸다. 다음 달 22~23일 후보 등록을 앞두고 이미 6명 정도의 교수가 출마 후보자로 거론되는 가운데 물밑 선거전도 치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교수회 홈페이지에 ‘사전선거운동 의심 사례들이 발생하고 있어 자중을 당부한다’는 추천위의 글까지 올라왔다. 부산대 총장 선거는 교수들의 투표 결과에 직원·조교와 학생들의 투표를 일정 비율로 반영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선거 결과 1, 2순위 후보자가 정해지면 추천위는 검증을 거쳐 그 결과를 교육부에 전달하고 그중 1명이 교육부 장관 제청과 대통령의 임명으로 임기 4년의 총장에 취임한다.
부산대 총장직선제는 한 교수의 희생으로 지켜 온 전통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국립대 선진화 방안에 맞춰 교육부가 돈줄을 쥐고 대학에 간선제로의 전환을 압박했고 마지막까지 남았던 부산대도 간선제로 전환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2015년 8월 17일 국어국문학과 고현철 교수가 총장직선제, 대학자율화,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며 투신하면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직선제 전통은 지켜졌고 20대 전호환, 21대 차정인 직선 총장으로 이어졌다. 다른 국립대들도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돌아왔다.
문제는 고현철 교수의 죽음으로 지켜 낸 총장직선제 전통이 부산대를 굳건히 세우고 시대의 변화에 맞춰 혁신을 거듭하는 방향으로 끌고 왔느냐는 점이다. 선거를 통해 구성원들의 총의를 모으고 민주적 절차로 선출된 총장이 자율적이고 합리적 의사 결정을 통해 대학을 이끌고 간다는 것은 지극히 이상적인 모델이다. 그러나 해마다 추락하고 있는 부산대의 위상을 보면 대학 구성원들이, 특히 그 중심에 있는 교수들이 대학의 변화와 혁신을 위해 얼마나 자율적으로 매진하고 있느냐는 데에는 의문이 따른다.
부산대는 서울의 웬만한 대학보다 못한 취급을 받은 지 오래다. 정시 합격자의 100%가 빠져나가고 대기 순번으로 채우면서 지원자 전원이 합격하는 학과도 생겼다. 대우 창업자 고 김우중 회장이 1960년대 경기고 재학 중 공부는 안 하고 주먹을 휘두르고 다니다 서울대 갈 성적이 나오지 않자 부산대에 원서를 넣었다가 광탈하고 연세대 갔다는 일화는 이제 전설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지거국(지방거점국립대)의 맏형’이라는 형식적 예우조차 흐릿해진 게 현실이다.
물론 부산대 위상 추락은 망국적 수도권 집중 때문이다. 기업과 자본이 서울 중심으로 쏠리다 보니 너도나도 ‘인 서울’에 목을 맨다. 대학 입학 과정에서부터 지역의 우수한 인재는 서울로 빠져나가고 지역에서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떠난다. 젊은 인재들이 떠난 도시에 희망이 있을 리 없다. 그렇게 부산대의 위상 추락은 부산의 위상 추락과 동의어가 됐다.
그렇다고 부산대 위상 추락을 외부적 요인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벼랑 끝 위기에도 뼈를 깎는 자구 노력은 체감하기 힘들다. 세계를 향한 도전은커녕 우물 안 개구리처럼 그래도 부산에서는 최고라고 위안한다. 지역 사학들은 교수 월급도 못 줄 형편인데 국립대니 망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총장 선거가 변화와 혁신의 계기가 아니라 기득권 지키기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냉정히 돌아볼 때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경북대 총장에게 경북대 의대 수준이 서울 삼류대보다 못해졌다며 의대 질을 높이라고 주문했다는데 부산대 의대라고 다를까.
세계적 도시는 세계적 대학들이 주도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본에 쫓기며 추락하던 미국 경제를 되살리고 3차 산업혁명을 주도한 것은 워싱턴DC나 뉴욕이 아니라 서부의 실리콘밸리였다. 실리콘밸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스탠퍼드와 버클리 같은 훌륭한 대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대가 쇠락하고 있는 부산의 혁신을 주도할 역량을 키우고 있는가.
부산대가 부산교대와의 통합 추진을 계기로 글로컬대학에 선정된 것은 그나마 희망의 씨앗이다. 올해 세계 3대 대학평가기관 평가에서 순위가 약진했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그러나 추락하는 부산대의 위상을 다시 세우려면 깜짝 놀랄 정도의 전폭적 투자와 혁신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 5년간 1500억 원이 적지 않은 돈이지만 일본만 해도 전국에 국제탁월연구대학 7곳을 선정해 각 대학마다 수천억 원씩 쏟아붓는다. 부산이 글로벌 허브 도시가 되려면 부산대가 글로벌 허브 대학이 돼야 한다. 그러려면 정부의 전폭적 투자와 강력한 내부 혁신을 이끌 총장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22대 부산대 총장 선거 과정이 부산대의 위상을 다시 세우기 위한 치열한 논쟁의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게 부산을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2023-12-07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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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의 쏘울앤더시티] 흩어져야 낳는다
국내 최고 인구학 전문가로 꼽히는 서울대 조영태 교수가 2020년 인구와 자원의 수도권 집중을 망국적 초저출산의 원인으로 지목하며 남긴 말이 ‘흩어져야 낳는다’였다. 인류가 시작된 이래 절대 사라지지 않는 두 가지 본능이 생존과 재생산인데 인구 밀도가 높아 경쟁이 심해지면 생존 본능이 우선할 수밖에 없다. 재생산 본능을 발현시킬 수 있는 사람은 자원이 있는 소수로 한정된다. 수도권 인구 밀도의 상승이 초저출산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이야기다.
2020년은 서울·경기·인천을 합한 수도권 인구가 전국 인구의 절반을 넘긴 첫해였고 우리나라 인구 증가가 정점을 지나 감소세로 돌아선 분기점이 된 시기였다. 그는 앞으로 10년이 마지막 남은 기회라고 했다. 인구가 줄긴 하겠지만 크게 줄지 않고 대다수 베이비부머가 여전히 경제활동을 할 것이어서 초저출산에 따른 경제·사회적 여파를 감당할 여력이 있을 것으로 봤다. 이 기간 정권의 부침을 떠나 수도권 집중 완화를 위해 국가적 잠재력을 쏟아붓지 않으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을 것이라는 게 그의 경고였다.
그 10년 중 3년이 다 지나가는 지금 통계로 확인되는 지표는 수도권 집중의 심화이고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합계출산율의 추락이다. 통계청은 7일 국가통계포털을 통해 최근 10년간 비수도권에서 수도권으로 거주지를 옮긴 20대 청년이 60만 명에 달했다고 발표했다. 부산·울산·경남에서만 20만 명의 청년들이 수도권으로 둥지를 옮겼다. 그 결과 국토 면적의 11.8%에 불과한 수도권에 전국 인구의 50.6%가 몰려 있고 쏠림은 점점 가속하는 추세다.
한국은행이 지난 2일 ‘지역 경제 심포지엄’에서 공개한 ‘지역 간 인구이동과 지역 경제 보고서’는 청년층의 수도권 유입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진행되고 저출산으로 이어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2015년 이후 2021년까지 수도권으로 유입된 인구의 78.5%가 청년층(15~34세)이었다. 이들이 수도권행을 선택하는 이유는 지역 간 기대 소득과 문화·의료서비스 격차였다. 2021년 한 해에만 비수도권에서 청년층 유출로 줄어든 출생아 수가 3만 1000명이었는데 수도권으로 청년이 유입된 결과 늘어난 출생아 수는 2만 5000명으로 결국 6000명의 인구 손실이 발생했다. 서울 등 수도권 인구 밀도 상승에 따른 추가적 출산 손실까지 더하면 그 규모는 1만 명을 넘었다. 비수도권에서 수도권으로 향한 청년들은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녀 수를 줄일 수밖에 없고 기존 수도권 청년들마저 경쟁이 심해지자 출산을 줄인 결과다.
보고서는 대안으로 비수도권 거점도시 위주의 성장 전략을 제시했다. 공공과 민간의 자원을 거점도시에 집중해 산업 규모와 도시 경쟁력을 키워야 수도권 팽창을 막을 수 있다는 진단이다. 2000년대 이후 국가균형발전 정책은 혁신도시 사례에서 보듯이 지역 간 형평성만 강조해 역량을 분산시킴으로써 효과를 보지 못했다. 한은의 시뮬레이션 결과 거점도시로의 인구이동이 늘면 현재 50.6%인 수도권 인구 비중은 30년 후인 2053년에는 49.2%로 떨어지고 전국 인구도 50만 명 정도 늘어나는 것으로 추산됐다. 하지만 현재의 이동 추세가 이어지면 2053년 수도권 인구 비중은 53.1%까지 늘어나고 인구 감소세도 지속된다.
통계에 기반한 사회과학적 분석 결과가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더 이상의 수도권 집중은 국가적 재앙을 초래할 것이고 이를 막기 위해서는 수도권에 맞먹는 거점도시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수도권 집중은 지역 불균형이라는 폐해에도 불구하고 국가 경쟁력 측면에서 기여한 바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나 국가 경쟁력 측면에서도 한계를 넘었다. ‘김포 지옥철’은 인프라 투자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더 이상의 수도권 집중은 국가적 재앙이 될 것이라는 경고다.
윤석열 정부의 지방시대위원회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다행인 것은 지방시대위가 지역 주도의 선택과 집중에 의한 균형발전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윤 대통령이 부산과 서울의 두 바퀴론을 들고나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제는 구체적 실행 단계로 들어가면 현실이 녹록지 않다는 것이다. 핵심 전략인 기회발전특구만 해도 실효성에 회의적 시각이 많다. 대한상공회의소 강석구 조사본부장은 현재까지 나온 세제 감면이나 규제 완화 수준으로 기업의 지역 투자를 끌어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밝혔다. 논란을 불식시키려면 부산에서라도 성공 모델을 만들어 보는 일이 중요하다. 공고해진 수도권 집중 구도를 깨는 일은 지역에 대한 투자 확대든 규제 철폐든 드라마틱한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2030년도 이제 머지않은 미래다. 그 안에 해답을 찾지 못하면 공멸이다.
강윤경 논설위원 kyk93@busan.com
2023-11-0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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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의 쏘울앤더시티] 공원은 채우는 곳이 아니라 비우는 곳이다
‘100년의 기다림, 영원한 만남.’ 2014년 5월 1일 부산시민공원 개장은 이 역사적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시작됐다. 세월호 참사로 온 나라가 슬픔에 잠긴 상황에서 개장식은 간소하게 치러졌지만, 공원 개장의 역사적 의미까지 퇴색될 수는 없었다. 일제 강점과 미군 주둔, 우리 땅을 되찾기 위해 온몸을 던졌던 시민들의 저항과 반환 운동의 역사가 오롯이 새겨진 공간이 바로 부산시민공원이었다.
일제는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후 이 터에 경마장을 만들었고 동남아시아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와 군사 훈련소로 활용했다. 광복을 맞았지만, 미군이 주둔해 1950년 부산기지사령부인 캠프 하얄리아를 설치했고 더 이상 시민들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1990년대 ‘금단의 땅’을 되찾기 위한 시민들의 반환 운동이 불붙었다. 하얄리아 인간 띠 잇기와 서명 운동이 확산했고 마침내 미군은 2004년 7월 부지 반환을 결정했다. 부산시는 하얄리아 부지를 즉각 근린공원으로 지정해 공원화를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우리 땅 하얄리아 되찾기 시민대책위원회’는 ‘하얄리아 시민공원 추진 범시민운동본부’로 전환됐고 반환 부지의 난개발 방지와 시민공원 조성을 위한 운동에 나섰다. 반환 협상을 둘러싼 한미 간 지리한 공방이 이어졌고 2010년 1월에야 미군으로부터 열쇠를 넘겨받아 공원 조성을 본격화할 수 있었다. 〈부산일보〉 주도로 각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하얄리아 공원포럼’이 결성돼 공원의 방향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이끌었고 시민 참여 숙의 기구인 라운드테이블을 통해 공원 조성과 운영에 대한 정책 방향을 잡았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부산시민공원이다. 부산시민공원에서 ‘시민’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은 이유다. 이즈음 뉴욕에는 센트럴파크, 런던에는 하이드파크가 있고 서울에는 서울숲이 있다면 부산에는 부산시민공원이 있다는 말이 생겼다.
부산시민공원 개장 10년이 가까워져 오고 있다. 그 세월 생활 속 문화 공원을 향한 시민들의 꿈은 얼마나 자랐을까. 센트럴파크의 꿈은 멀다 해도 서울숲에 견줄 만한 부산시민공원의 정체성은 만들어져 가고 있는가. 아쉽게도 관광객들이 찾는 부산의 핫 플레이스는커녕 시민의 사랑을 받는 도심 속 생활 공원으로 자리 잡는 데에도 여전히 한계가 있는 듯하다. 개장 효과로 한 달 평균 100만 명을 웃돌던 방문객은 개장 이듬해부터 월평균 60만~70만 명 수준에 정체돼 있으며 올해 들어서도 7월 말까지 월평균 방문객은 65만 명 수준이다.
공원이 시민들의 일상 속 여가 공간이자 문화 공간으로 자리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접근성이다. 그러나 개장 10년이 되도록 공원의 접근성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서면 도심과 부전역, 송상현광장과의 단절은 여전히 극복되지 않는 난제다. 부전천 물길로 공원과 서면 도심을 연결하려던 부전천 복원 사업은 중단과 재추진을 반복하고 있으며 부전역 역세권 개발도 진척이 없다. 부암고가교 철거도 하세월이다.
공원 개장 당시부터 시민 참여 활성화를 위한 공원 운영 거버넌스 논의가 많았지만 부산시설공단이 관리하는 것으로 결정된 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센트럴파크의 컨서번시나 서울숲의 서울그린트러스트와 같이 시민들에 의한 공원 운영은 애초 역부족이었다. 자연히 공원 운영과 활성화를 위한 시민 참여는 멀어져 가고 있다. 시민공원에서 많은 행사들이 열리지만 공원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살린 콘텐츠로 시민들에게 각인되는 행사가 없는 이유다. 공원은 관리의 대상이 아니고 창조의 대상이라는 말은 시민공원과는 먼 이야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부산시민공원을 주인 없는 빈 땅으로 생각하고 여기저기서 공원을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고개를 들고 있다. 공원의 주인인 시민들이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부산시민공원이 개장 10년에도 불구하고 공원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제대로 만들어 가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공원은 채우는 공간이 아니라 비우는 공간이다. 공원은 언제나 비어 있는 넉넉함으로 남아 있어야 하고 그 속에 채워야 하는 것은 시민들의 창의적 활동으로 만들어 가는 공원 문화다. 센트럴파크를 설계한 프레드릭 로 옴스테드가 “지금 이곳(센트럴파크)에 공원을 만들지 않는다면, 100년 후에는 이 넓이의 정신병원이 필요할 것이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와중에 부산시민공원 수목의 생육이 부진해 정밀 조사에 나섰다고 한다. 공원 문화만 자라지 못 한 게 아니라 수목도 자라지 못 한 모양이다. 이래저래 부산시민공원 전반을 다시 돌아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2024년 5월 1일 개장 10주년에는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수 있도록 시민 사회의 지혜를 모아 나가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강윤경 논설위원 kyk93@busan.com
2023-08-22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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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의 쏘울앤더시티] 대중교통 요금 아닌 수송 분담률 올려야
부산시가 대중교통 요금 인상 절차에 들어갔다. 시의회에 시내버스·도시철도·부산~김해 경전철 요금 조정안을 제출했고, 지난 7일에는 업계와 시민사회 대표, 전문가 등이 참여해 토론회도 했다. 시의 요금 인상안은 대략 현행 1200원(교통카드)인 시내버스 요금을 400원 인상하고 도시철도와 경전철의 경우 1300원(1구간)에서 300~400원 올리는 거다. 대중교통 운영 적자로 인한 재정 부담이 급증해 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게 시의 입장이다. 2007년 989억이던 재정 부담은 2019년 4096억, 지난해에는 7098억 원으로 눈덩이처럼 불었다. 지난해는 코로나로 인해 대중교통 이용이 급감하면서 재정 부담이 크게 확대된 측면이 있는데 이번 요금 인상의 명분으로 활용됐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서울시와 울산시도 요금 인상을 추진 중이다. 이대로 절차가 진행되면 9월이나 10월에는 인상된 요금이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시민들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다. 말이 300원, 400원이지 시내버스 요금 400원이면 인상 폭이 33%다. 도시철도 300~400원은 23~31%의 인상률이다. 대중교통에 의지해 생활하는 서민들 입장에서는 적지 않은 부담이다. 대중교통은 이동권 보장과 관련해 복지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 다른 생활물가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시내버스는 2013년 1월 이후 10년 만에, 도시철도는 2017년 5월 이후 6년 만에 요금 인상이라고 하는데 그만큼 서민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해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시의 이번 요금 인상 추진으로 대중교통 정책 전반을 돌아보게 한다. 시가 2007년 대중교통 활성화의 깃발을 내걸고 시내버스 준공영제를 도입한 지 15년째다. 그동안 나름대로 정책적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도시철도와 연계해 시내버스 노선 조정이 일부 이뤄졌고 대중교통 환승할인제도 도입했다. 막대한 재정을 들여 간선급행버스체계(BRT) 1단계 구축도 완료했다. 그러나 부산의 대중교통 수송 분담률은 그 15년 기간 40% 초반대에서 정체다. 승용차 수송 분담률도 30% 초반대로 크게 변함없고 오히려 추세적으로는 꾸준한 상승세다. 막대한 재정 투입과 정책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송 분담률 지표로 보면 참담한 정책 실패다.
우선은 대중교통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지 못 한 것이 원인일 수 있다. 환승 불편이나 긴 배차 간격 등 시민들이 느끼는 불편이 여전하다. 도시철도 중복 노선이라든지 장거리 노선 정리 등도 개별 지역적 이해 등에 발목이 잡혀 전면적으로 혁신하지 못 했다는 지적이다. 더 본질적으로 들어가면 승용차 수요 관리 정책과 맞물린다. 대중교통 활성화 정책의 효과를 위해서는 승용차 수요 관리 정책을 병행해야 하는데 민선 자치단체의 성격상 상대적으로 목소리가 큰 승용차 운전자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도심 내 승용차 진입이나 주차 규제 등을 통한 수요 관리는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다. BRT만 해도 승용차 운전자들의 저항이 거세자 오거돈 전 시장이 백지화를 밀어붙이다 시민 숙의를 위한 공론화위원회까지 거치는 우여곡절 끝에 1단계가 겨우 완공됐다.
대중교통 활성화를 위해서는 전향적 정책이 필요하다. 8월부터 시행되는 대중교통통합할인제도인 ‘동백패스’를 주목하는 이유다. 월 4만 5000원을 초과하는 이용 요금에 대해서는 최대 4만 5000원 한도 내에서 돌려준다는데 어느 정도 파급력이 있을지가 관건이다. 독일이 5월 49유로 한 달 정액권으로 지역 철도, 지하철, 버스, 트램 등 전국 모든 근거리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도이칠란트 티켓’을 도입해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 물가 상승으로 인한 가계 부담을 덜고 환경보호에도 기여한다는 평가다. 독일 사회가 활기를 띠는 계기가 됐다고까지 하니 대중교통 활성화가 갖는 영향력을 실감하게 한다. 지난해 9유로 티켓의 큰 호응으로 정책을 확대한 결과다. 동백패스도 도시 근로자 출퇴근 교통비를 감안해 4만 5000원 기준을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용 현황 등을 면밀히 분석해 기준을 낮추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교통정책은 선택과 집중의 문제다. 모든 이용 주체를 만족시킬 수 없다. 도시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이냐 하는 비전과 철학의 문제다. 대중교통 활성화를 위해서는 그만큼 소신과 뚝심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지금의 부산을 대중교통 친화도시라고 말하기 어렵다. 다녀 보면 안다.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것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보다 편하다. 대중교통 수송 분담률이 정체 상태인 명확한 이유다. 동백패스 이상의 파격이 필요할 수 있다. 동백패스에 투입되는 500억 원, 1000억 원의 예산을 아까워할 일이 아니다. 도로 건설 하나 포기하면 해결될 수도 있는 일이다. 부산도 이제 그런 고민을 할 때가 됐다.
2023-07-11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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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의 쏘울앤더시티] 2024년 부산 우주산업 도약의 원년 만들자
누리호 3차 발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지난 30일 중간결과 발표를 통해 누리호 발사 성공을 공식화했다. 누리호 3차 발사 초기 데이터 분석 결과 목표 고도 550㎞, 목표 투입 속도 7.58㎞/s를 정확히 달성하는 정밀도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주 탑재 위성인 차세대소형위성 2호는 안테나 전개 후 위성 자세 제어 기능까지 제대로 선보였다. 부 탑재 위성 도요샛 4형제 중 3호 다솔이 우주로 나오지 못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지만 계획된 세계 최초 편대비행이나 임무 수행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 항우연의 설명이다.
누리호 3차 발사 성공으로 우리는 자체 기술로 만든 발사체로 원하는 장소, 원하는 시간, 원하는 궤도에 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는 독자적 우주 수송 능력을 갖추게 됐다. 1992년 8월 한국 최초의 인공위성 우리별 1호를 기아나 쿠루기지에서 쏘아 올리며 우주개발에 첫발을 내디딘 후 30년 만에 이룬 ‘글로벌 우주 강국’(G7)의 꿈이다. 북한이 31일 정찰위성을 탑재한 우주발사체(로켓) 발사에 실패한 것도 누리호 발사 성공에 자극받아 조급하게 시도했기 때문이라는 분석까지 나올 정도다.
누리호 3차 발사는 성능검증위성을 탑재했던 2차 때와 달리 실제 우주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실용위성을 태워 첫 실전 발사 성공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무엇보다 누리호 3차 발사 성공이 의미를 갖는 것은 우리도 이제 민간이 우주산업을 주도하는 뉴스페이스 경쟁에 나서게 됐다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3차 발사에는 민간기업인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체계종합기업’으로 참여했다. 미국의 우주기업 스페이스X가 미 항공우주국(NASA) 기술을 이전받아 민간 우주시대를 연 것처럼 우리도 민간 주도로 우주산업 생태계 조성에 나서게 됐다.
우주는 이제 더 이상 꿈과 낭만의 공간이 아니라 전쟁터다. 국가 안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이고 우주 자원과 첨단산업을 선점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다. 국가의 명운을 걸고 우주산업을 키워야 하는 이유다. 기존 우주 강국들에 비하면 한국은 우주 지각생이다. 한국의 글로벌 우주산업 시장점유율은 1%에 불과하다. 역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가능성이 많다는 이야기도 된다.
누리호 발사 성공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우주산업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진 건 반가운 일이다. 때맞춰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도 우주산업 궤도 진입을 위해 나서고 있다. 한국항공우주산업이 위치하고 있는 경남, 항우연 등 연구시설이 밀집한 대전, 나로우주센터가 있는 전남, 자연 입지를 내세운 제주가 지자체 우주 전쟁 대열에 가세했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이 2024년 전국 지자체 최초로 자체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의미 있는 발걸음을 내딛는다. 해양 미세먼지 측정 등 해양 데이터 수집용 초소형위성 ‘부산샛(BusanSat)’이 주인공이다. 부산테크노파크를 중심으로 부산시가 해양과 우주기술 융합을 통한 해양 신산업 육성을 위해 국가 공모사업으로 이룬 성과물이다. 이 사업을 위해 대한민국 1호 인공위성 스타트업으로 꼽히는 ㈜나라스페이스테크놀로지가 2019년 영도 해양혁신도시에 본사를 이전하고 지난해 부산샛을 완성했다. 올해 발사 예정이었으나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내년 하반기로 미뤄졌다.
부산샛 발사가 국제적으로 더 주목받게 된 것은 NASA와 국제 협력 프로젝트로 진행하기로 하면서다. NASA가 해양 데이터 공유를 조건으로 인공위성 발사를 돕기로 한 것이다. 앞서 NASA는 국내 기업으로는 최초로 초소형위성 분야 기술성숙도에서 나라스페이스를 최고 등급으로 평가해 세계적으로 기술력을 인증했다.
부산으로서는 우주산업 생태계를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최근 우주산업은 해당 도시가 어떻게 수요를 만들어 내느냐가 훨씬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고 있다. 부산이 지향하고 있는 스마트시티를 위한 4차 산업혁명도 필수 인프라가 우주산업이다. 해양과 결합한 우주산업 분야 특화도 가능하다. 국립해양조사원, 한국해양수산개발원, 한국해양과학기술원, 국립수산과학원 등 국가기관이 이미 해양환경 조사와 생물자원 탐사 등에 인공위성 데이터를 활용 중이다. 해양 우주산업 생태계 조성에 더없이 유리한 조건이라는 이야기다.
우주산업이야말로 산업이 갖고 있는 특성 상 민관이 함께 키워 가야 하는 미래산업이다. 부산이 우주산업 생태계를 주도하면 젊은이들이 우주 스타트업에 도전할 수 있는 환경도 조성될 것이다. 새로운 산업 생태계 조성이 말처럼 쉽지 않지만 혁신에 목마른 부산으로서는 우주가 새로운 도전 영역인 것만은 분명하다.
2023-06-0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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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의 쏘울앤더시티] 과학이 아니라 신뢰의 문제다
지금은 고철 신세로 전락한 부산 기장 해수담수화 시설은 애초 미래 물 산업을 이끌 전진기지가 될 것이라는 기대에서 출발했다. 그 역사는 2006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건설교통부는 미래 가치를 창출할 국가 10대 전략산업의 하나로 해수담수화를 선정하고 광주과학기술원에 해수담수화플랜트사업단을 발족한다. 광주과기원을 중심으로 고려대 등 학계와 두산중공업 등 산업계를 포함해 50여 기관이 참여하는 대규모 조직이 꾸려졌다. 사업단은 R&D를 통해 기존 열을 이용한 증발식이 아니라 에너지 효율이 높은 역삼투압 방식의 해수담수화 신기술을 개발하고 실증 단지(테스트 베드)를 만들어 산업화를 이룬다는 계획이었다. 이를 통해 세계 물 시장을 선점한다는 원대한 목표도 세웠다. 기장읍 대변리 2만 6400㎡ 부지에 2000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하루 4만 5000톤 생산 규모의 세계 최대 해수담수화 시설을 2014년 12월 완공했다.
그런데 2010년 착공과 함께 당시에는 용어조차 생소했던 삼중수소의 등장으로 논란이 시작됐다. 바닷물을 식수로 추진하면서 주민 수용성을 간과한 게 문제였다. 원전 인근 해상에서 취수가 이뤄지는데 주민 공청회는 물론이고 식수 공급 계획조차 숨겨 불신을 키웠다. 결국 식수 공급은 벽에 부딪혔고 완공된 시설은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부산시 상수도사업본부는 미국위생재단(NFS)에 의뢰해 삼중수소는 물론이고 방사능 52개 품목에서 수차례 식수 적합 판정을 받았다며 주민 설득에 나섰지만 한번 잃은 신뢰는 되돌릴 수 없었다.
삼중수소 논란은 일본 정부가 지난해 4월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상 방류를 결정하면서 다시 불붙었다. 일본은 2011년 후쿠시마 사고 후 제1원전에서 발생하는 오염수를 1000개 이상의 탱크에 보관해 왔다. 그러나 매년 늘어나는 오염수 저장이 한계에 부딪히자 해상 방류를 결정한 것이다. 일본은 오염수를 ‘알프스’(ALPS·다핵종제거설비)로 정화한 뒤 걸러지지 않는 삼중수소는 해수로 희석시켜 방류한다고 밝혔다. 현재 130만 톤에 이르는 오염수를 30년에 걸쳐 조금씩 방류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미국의 동의를 받은 상태로 상반기 국제원자력기구(IAEA) 검증을 마치고 올 여름부터 방류한다는 계획이다.
일본의 방류 결정 후 우리나라를 비롯해 바다를 접하고 있는 주변국들이 반발하고 나선 건 당연한 수순이다. 세슘 등 인체에 치명적인 방사성 물질이 포함된 오염수를 알프스로 걸러 낸다지만 삼중수소 등 일부는 거르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진데다 유해성을 놓고도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국내 전문가들도 오염수 방류에 따른 환경 영향이 미미하다는 주장과 해양 생태계에 누적돼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주장이 맞선다. 이런 상항에서 불신을 더 키운 건 일본의 태도다. 주변국과의 충분한 협의나 투명한 자료 공개 없이 IAEA 검증만 내세웠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일본이 일방적으로 공개한 데이터 신뢰성이 떨어진다며 객관적 검증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심지어 일본의 아소 부총리 겸 재무상은 “후쿠시마 제1원전 오염수라도 처리 과정을 거치면 마셔도 괜찮다”고 발언해 논란만 자초했다. 지난달 일본 홋카이도에서 열린 G7 기후·에너지·환경장관 회의가 끝난 후 일본의 니시무라 경제산업상이 후쿠시마 처리수의 바다 방류를 환영한다는 것이 공동성명에 포함된 것처럼 발표하다 독일 렘케 환경부장관이 “오염수 방류를 환영할 수는 없다”고 밝히면서 발언을 정정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일본은 1986년 옛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 직후 ‘신속하고 투명한 정보 공개’를 요구하고 전투기를 출격시켜 대기 중 방사능을 채집하는 등 민감하게 반응했던 역사를 돌아봐야 한다.
한·일 간 셔틀 외교 복원으로 관계가 급진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쟁점으로 부상하자 일본 기시다 총리가 우리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한국 시찰을 수용하기로 했다. 정부는 23~24일 전문가로 구성된 시찰단을 파견한다. 일본이 오염수 문제에 진전된 입장을 보인 것이라는 평가와 일본에 면죄부를 주려는 정치 쇼라는 비판이 동시에 나오는 가운데 실효성 있는 현장 검증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높다. 기시다 총리도 처리수 방류와 관련해 한국민들의 우려가 많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고 밝힌 만큼 제대로 된 검증을 위한 일본 정부의 성의 있는 자세가 중요하다. 아무리 과학이라며 데이터를 들이댄들 검증 과정의 신뢰가 전제되지 않으면 소용없다. 일본의 오염수 방류를 바라보는 우리 국민들은 불안하다. 하물며 일본과 바다를 마주하고 있고 수산업의 중심지인 부산 시민의 불안은 더하다. 이 불안을 해소시키는 것은 일본의 몫이다.
2023-05-09 [1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