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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이번 월드컵 우승국이 스페인이라고?
인류는 오래전부터 미래를 알고 싶어했다. 내일 비가 올지, 농사가 풍년일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과학과 기술이 발전한 오늘날에도 이러한 욕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선거철이면 여론조사에 귀 기울이고, 경제 전망에 귀 기울이는 것도 같은 이유다. 다만 과거에는 점성술과 주술에 의존했다면, 오늘날에는 통계와 인공지능(AI), 빅데이터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스포츠는 인간의 예측 본능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영역 중 하나다. 무릇 승부의 향방이 안갯속에 가려져 있을수록 사람들은 더욱 열정적으로 결과를 점친다. 특히 FIFA 월드컵은 전 세계가 참여하는 거대한 예측 실험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승국을 맞히려는 전문가와 팬들의 경쟁은 때로는 그라운드 위 승부 못지않게 관심을 끌어모은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2026 북중미 월드컵이 막을 올린 지금, 팬들의 시선은 이미 결승전과 우승 트로피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개막 전부터 전 세계에서는 우승 후보를 둘러싼 각종 예측과 베팅이 뜨겁게 이어졌고, 온라인 공간에서도 저마다의 전망과 분석이 쏟아졌다. 과연 AI와 빅데이터는 축구의 불확실성마저 읽어낼 수 있을까.
■스페인·프랑스… 엇갈리는 우승국 전망
월드컵 예측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존재는 단연 독일의 문어 ‘폴(Paul)’이다. 독일의 한 해양생물관에 살던 폴은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당시 독일 대표팀 경기와 스페인-네덜란드 결승전 결과 등을 잇달아 맞혀 대회 기간 내내 화제가 됐다. 폴의 예언 방식은 단순했다. 경기를 앞둔 두 나라의 국기가 붙은 유리 상자에 홍합을 넣어두고, 폴이 먼저 선택한 상자의 국가가 승리한다고 보는 것이었다. 과학적 근거는 없었지만 적중이 거듭되자 사람들은 폴의 선택에 열광했다.
2026 북중미 월드컵 우승국 예측 경쟁도 뜨겁다. 독일 경제학자 요아힘 클레멘트는 2014 브라질, 2018 러시아, 2022 카타르 월드컵 우승국을 연속으로 맞힌 인물로 유명하다. 그런 그가 이번 대회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로 지목한 국가는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다. 클레멘트는 월드컵 준우승만 세 차례 경험한 네덜란드가 사상 첫 우승을 차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또한 일본이 32강에서 브라질을 꺾는 이변을 연출하고, 한국은 16강에 진출할 것으로 예측했다.
반면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스페인을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았다. 체스의 순위 평가 방식인 '엘로(Elo) 평점'에 공격력과 최근 경기력, 지리적 요인 등을 결합한 분석 모델에서 스페인의 우승 확률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스포츠 데이터 분석업체 옵타의 슈퍼컴퓨터 역시 스페인을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로 평가했으며, 미국 스포츠 전문 매체 ESPN도 같은 전망을 내놓았다.
반면 영국 레딩대학교 경제학자 제임스 리드 연구팀이 슈퍼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분석한 결과에서는 아르헨티나의 우승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다른 예측도 있다. 2010년 스페인, 2014년 독일, 2018년 프랑스의 우승을 맞히며 '족집게 예언가'로 불린 브라질 출신 마이클 브루노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이끄는 포르투갈이 이번 대회에서 사상 첫 월드컵 우승을 차지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영표 축구 해설위원은 프랑스를 우승 후보국으로 꼽았다. 그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스페인 몰락을 일찍부터 예상했고,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프랑스를 우승국으로 뽑아 맞춘 바 있다. 영국 매체 가디언도 옴바페의 프랑스를 우승 후보국 1위에 올려놓았다. 영국이나 브라질을 우승 후보국으로 꼽는 축구 전문가들도 있다. 이처럼 전문가와 데이터 분석기관, 심지어 예언가들까지 서로 다른 답을 내놓고 있지만, 공통점은 하나다.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축구공은 둥글다”… 예측 장담 못 해
이런 데이터도 있다. 지금까지 유럽에서 열린 11차례 월드컵 가운데 10번은 유럽 국가가 우승했고, 미주 대륙에서 개최된 8차례 대회에서는 7번이나 남미 국가가 정상에 올랐다. 개최 대륙과 우승국 사이에 일정한 상관관계가 존재한다는 의미다. 이런 통계는 리오넬 메시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와 전통의 강호 브라질에 긍정적인 신호로 읽힌다. 과연 이번 대회에서도 이런 ‘대륙의 법칙’이 통할까.
물론 예측이 항상 적중하는 것은 아니다. 2010년 남아공, 2014년 브라질,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우승국을 연속으로 맞혀 주목받았던 마이클 브루노조차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프랑스의 우승을 예상했다가 아르헨티나가 정상에 오르면서 예측이 빗나간 바 있다.
골드만삭스 역시 2014년과 2018년 월드컵에서 예측 모델을 가동했지만, 2018년 브라질의 우승을 점쳤다가 8강 탈락이라는 결과를 맞았다. 전문가들은 선수들의 컨디션과 부상, 감독의 전술, 경기 당일의 흐름 같은 변수까지 완벽하게 반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그 때문에 일부에서는 온라인 베팅 시장처럼 수많은 참가자의 정보와 판단이 집약된 예측이 오히려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분석도 내놓는다.
우승국 예측이 아니라도 월드컵 역사는 예측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가득하다. 1954년 서독은 ‘무적 함대’로 불리던 헝가리를 꺾으며 우승을 차지했고, 2002년 한국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하며 4강 신화를 썼다.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훗날 우승팀이 된 아르헨티나를 2-1로 꺾는 이변을 연출하기도 했다. 데이터와 통계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변수를 계산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결국 축구는 수많은 기록보다 경기 당일 선수들의 투지와 몸 상태, 예상치 못한 변수 등이 승패를 가르는 스포츠다. 데이터는 유용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지만 결과를 보장하지는 못한다. 독일의 명장 제프 헤르베르거는 “축구공은 둥글다”고 말했다. 우승 후보가 반드시 우승하는 것도 아니고, 약체가 끝까지 약체로 남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월드컵은 늘 흥미롭다. 어쩌면 사람들은 결과를 맞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능성을 꿈꾸기 위해 예측하는지도 모른다.
북중미 월드컵은 이제 막 시작됐다. 스페인이든, 네덜란드든, 프랑스든, 아르헨티나든 지금 이 순간 우승팀을 100%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을지 모른다. 한국 대표팀이 다시 한번 기적 같은 여정을 써 내려가는 일이다. 우승국 예측은 전문가와 AI에게 맡겨두자. 한국의 16강, 나아가 8강 진출을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레는 6월이다.
2026-06-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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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한국판 스페이스X ’가능할까?
요즘 글로벌 투자자들의 관심은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우주기업 스페이스X에 쏠려 있다. 이 기업이 오는 12일(현지시간) 나스닥 시장에 등판하기 때문이다. 기업공개(IPO) 규모는 역대 최대인 750억~800억 달러로 전망된다. 기존 최대 기록인 2019년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의 공모 규모 294억 달러를 배 이상 넘어선 수치다. 스페이스X를 신호탄으로 하반기 오픈AI, 앤트로픽 등 초대형 비상장 테크 기업들이 연이어 등판하는 ‘IPO 슈퍼사이클’이 도래하면, 세계 증시의 구도 자체가 바뀔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시장에서는 이 세 기업이 조달하려는 자금만 약 2000억 달러, 합산 기업가치는 4조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한다.
■ ‘스페이스X 상장’ 증시 블랙홀 되나
스페이스X는 챗GPT 개발사 오픈AI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기업가치가 높은 비상장 스타트업으로 평가받는다. 실질적 수익 기반을 갖춘 우주 사업 포트폴리오가 이 같은 기업가치의 배경으로 꼽힌다. 2002년 설립된 이 회사는 위성 발사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며 민간 우주산업 판도를 바꿨다. 현재 전 세계 상업용 우주 발사 서비스 분야에서 60% 넘는 점유율을 차지하며 시장 주도권을 쥐고 있다. 재사용 로켓과 스타링크, 스타십을 기반으로 우주 사업 분야에서 수익성을 확보했다. 재사용 발사체 팰컨9는 발사한 1단 로켓을 지상으로 회수한 뒤 재사용하는 방식이라 총비용과 시간을 대폭 줄였다. 2018년 첫 출시 이후 현재까지 각국의 위성 발사와 스페이스X 주력 위성인 스타링크 발사에 활용되고 있다. 일회용 발사체와 달리 수십 회 이상 반복 사용이 가능해 글로벌 스탠다드로 자리 잡았다.
업계에선 기업 공개 흥행 여부에 따라 스페이스X 시총이 1조 750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내다본다. 현실화할 경우 세계 시가총액 톱10에 진입한다. 스페이스X는 4일(현지시간)부터 시작된 투자자 대상 로드쇼를 통해 자금 조달 규모와 최종 공모가, 기업가치 등을 구체화할 예정이다. 당장 이목이 쏠리는 것은 스페이스X가 기존 인공지능(AI) 성장주에 퍼져있는 자금을 얼마나 흡수할지다. 스페이스X가 상장되면 기존 성장주 비중을 줄이고 이동할 가능성이 있어 주가에 미래 성장 가치가 선반영돼 상승세가 가팔랐던 종목이 우선 영향을 받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일각에선 최근 코스피 시장에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대형 반도체주를 중심으로 외국인 순매도가 늘어난 것 역시 스페이스X 상장에 따른 포트폴리오 재조정 압력이 일부 선반영됐다는 해석도 있다. 스페이스X가 투자 자금을 단숨에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이 될지 투자자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상황이다.
■ 민간 주도 우주산업 시대 가속
스페이스X의 상장은 글로벌 우주산업의 주도권이 정부에서 민간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발사체와 위성 개발을 국가가 직접 주도하던 시대를 넘어, 민간 기업이 기술 혁신과 사업화를 이끌고 정부는 서비스를 구매하는 ‘뉴스페이스’ 체제가 가속하는 것이다.
2000년대 미국은 정부 주도로 장기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올드 스페이스 체제’에서 벗어나 경제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뉴스페이스’로 방향을 틀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과거처럼 발사체를 직접 개발하는 대신 스페이스X의 발사 서비스를 구매하는 방식으로 역할을 바꿨다. 스페이스X는 이를 기반으로 발사체 재사용 기술과 같은 혁신을 이뤄냈고, 이후 위성 인터넷 서비스 스타링크 등 독자적 수익 모델까지 구축하며 세계 최대 우주기업으로 성장했다. 제프 베이조스의 블루오리진, 유럽의 자존심 아리안스페이스 등 추격자들의 도전도 매섭다. 이처럼 우주 전장은 이미 민간 기업들의 치열한 각축장이 됐다.
■ 국내도 뉴스페이스 전환 속도
항공우주 5대 강국을 국가 비전으로 내세운 우리나라도 우주항공청 출범, 누리호 민간 이전, 우주산업 클러스터 조성 등을 통해 뉴스페이스 시대 진입에 속도를 내고 있다. 2020년대 들어 민간 중심 우주산업 육성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자 정부는 기존 국가 주도 개발 체계를 민관 협력 체계로 전환하는 작업을 진행해 왔다. 대표적 사례가 한국형발사체 누리호다. 정부 주도로 개발한 한국형발사체 누리호는 반복 발사하는 고도화사업을 통해 기술 이전이 진행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민간 기업이 발사 서비스를 주도하는 체계 구축을 목표로 한다. 지난달 발사된 차세대 중형위성 사업 역시 정부가 개발한 위성 플랫폼을 민간에 이전해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
2024년 출범한 우주항공청 예산은 올해 처음으로 1조 원을 넘어섰고, 민간 투자를 지원할 뉴스페이스 펀드에도 올해부터 연간 1000억 원 이상 국비가 투입된다. 지역별 강점을 살리는 육성 정책도 이어진다. 정부는 경남을 위성 특화지구, 전남을 발사체 특화지구, 대전을 연구·인재 특화지구로 두는 우주산업 클러스터 사업에 2030년까지 3808억 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이재명 대통령도 지난달 28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우주항공 육성 의지를 내비쳤다. 이 대통령은 “우주항공의 또 다른 주역은 민간과 지방”이라고 강조하며 “한국판 스페이스X가 탄생할 수 있도록 민관협력을 대폭 강화하고 전남과 경남 등 핵심 인프라를 갖춘 남부지방을 우주항공 종합 벨트로 육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 우주산업 생태계 구축해야
뉴스페이스 시대 진입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민간 우주 항공 산업이 아직 뉴스페이스 선도국과는 상당한 격차가 있다는 평가다. 국내 우주산업은 국가 연구개발(R&D)이 70~80%를 지탱할 정도로 공공 수요 비중이 절대적이다. 시장 규모와 민간 사업화 기반도 제한적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한국이 진정한 뉴스페이스 국가로 도약하려면 정부 지원을 넘어 민간 기업이 독자적인 시장과 수익 모델을 확보할 수 있는 환경 조성과 산업 구조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올해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전략적 제휴는 의미 있는 행보다. 우주발사체부터 관측·통신 위성, 탐사에 이르는 한화의 ‘우주 밸류체인’과 KAI가 가진 ‘중대형 위성 개발 및 탐사선’의 시너지가 기대된다. 저궤도 위성통신부터 우주 탐사까지 아우르는 종합 우주 패키지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사업장이 있는 경남 창원과 KAI 본사가 있는 사천을 잇는 우주항공 클러스터가 조성되면, 경남~전남(고흥 우주센터·순천)~제주(한화우주센터)를 잇는 남부 우주산업 벨트로 확장될 수 있다. 한화와 KAI의 종합 역량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시도에 성공한다면 글로벌 시장에서 통하는 ‘한국판 스페이스X’ 탄생도 기대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선 민간 수요 확대, 스타트업 육성, 소재·부품·장비 국산화 등을 통해 우주산업 생태계 전반의 성장으로 이어져야 한다. 물론 넘어야 할 산도 만만치 않다. KAI 최대 주주인 한국수출입은행의 매각 의지, 정부 승인, 노조 반발, 독과점 논란 등은 풀어야 할 과제다.
반도체 이후 한국을 먹여 살릴 산업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글로벌 우주산업 전쟁에 당당하게 참전할 수 있는 ‘한국판 스페이스X’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2026-06-0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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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반도체 불장과 포모주의보
국내 주식시장이 역대 최고 수준의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종목이 엄청난 실적을 기록하면서 국내 증시 상승세를 견인하고 있다. 더욱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이 직원들을 상대로 거액의 성과급을 지급할 것으로 전망되는 등 한국 경제가 연일 신기록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주식시장 상승세에서 소외되거나 성과급 지급을 아예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이른바 포모(FOMO) 심리가 확산 중이라는 지적이다. 포모는 ‘Fear of missing out’의 약자로 ‘소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소외 불안 증후군, 고립 공포감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 한국과 포모 심리
포모는 마케팅에 많이 활용된다.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으려는 소비자들의 심리를 자극해 매출을 올리는 기법이다. 유교 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한국 국민들은 유독 체면 차리기, 타인과 비교하기 등에 익숙하다 보니 포모 마케팅에 취약하다는 평가다. 각종 SNS에 특별한 체험을 한 사진을 올리거나 두쫀쿠(두바이 쫀득 쿠키) 열풍 등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포모의 영향이라는 지적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청년들이 무리한 대출로 집을 사는 ‘영끌’, 증시가 호황 국면을 보이자 빚을 내서 투자하는 ‘빚투’, 가상화폐 열풍 등도 포모 심리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우리 사회에서 드물지 않은 1000만 관객 영화 기록 등도 한국 국민들이 유독 소외감과 유행에 뒤처지는 것을 못 견뎌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특히 자유로운 만남과 소통이 차단된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이런 성향이 한층 강해졌다는 분석이다.
■ 반도체 불장과 성과급 후유증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불장의 영향으로 코스피 지수는 연일 고공행진 중이다. 직장인 등의 대화 주제엔 어김없이 반도체 주식 투자 성공담이 포함된다. 하지만 투자 대열에 합류하지 못했거나 합류할 여력이 없는 청년 등에게 반도체 활황은 달갑지 않은 뉴스일 뿐이다. 더욱이 코스피 지수는 연일 상승세지만 일부 종목을 제외하면 되레 손실을 본 투자자들이 적지 않다. 코스피와 코스닥 모두 상승 종목보다는 하락 종목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원금 손실을 감내하고 있는 상당수 투자자들은 자괴감과 불안감까지 호소한다. 특히 지난 27일 상장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품이 큰 인기를 모으고 있는 것도 포모 심리가 일정 부분 작용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 상품 투자를 위해 2시간 교육을 이수해야 하는데 지난 26일까지 이수한 투자자는 19만 3843명에 달한다.
반도체 기업의 수억 원 대 성과급도 다양한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에서 연봉 1억 원을 받는 직원은 올해 총 세전 6억 원에 육박하는 총급여를 받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반면 2024년 기준 박사 신입 연평균 급여가 공공연구기관의 경우 3900만 원에 그치는 것으로 최근 집계되면서 이공계 출신들 사이에서 소득 양극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더군다나 정규직 취업은커녕 비정규직으로 전전하는 청년들 사이에서는 반도체 성과급만 생각하면 소외감을 느끼고 울화통이 터진다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삼성전자 계열사 직원들도 “우린 한 푼도 받지 못하는 게 형평성에 맞지 않고 우리도 동기 부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번 반도체 성과급 파문이 단순한 포모를 넘어 노노 갈등으로 격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경제계에서는 이번 반도체 성과급이 국내 다른 기업들에게도 연쇄적으로 파장을 미칠 경우 국내 경제에 악영향을 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 조급함 버리고 자기 속도 유지해야
최근 주식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포모 증후군으로 의심할 수 있는 행동들이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두려움에 빠져 무리한 매수에 나서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증세는 다음과 같다. 우선 타인의 수익률을 지나치게 의식한다는 것이다. 반도체 종목에 투자해 높은 수익률을 거둔 다른 투자자의 수익률 등을 볼 때마다 감정적인 흔들림을 느낀다는 것. “왜 나만 이렇게 수익률이 낮은 걸까?”라며 자괴감에 빠지는 사례도 드물지 않다. 투자 계획을 감정적인 출렁임에 따라 수시로 변경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당초 장기 투자와 분산 투자, 여유 현금 보유 등의 전략을 수립했으나 단기적 추격 매수, 특정 종목 집중 매수 등으로 계속 바꾸는 등 투자 패턴이 갈팡질팡하는 유형이라면 포모 심리 때문에 무리한 ‘대박 환상’에 사로잡힌 건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하는 게 좋다.
특정 종목을 사지 않았다고 후회하거나 특정 종목을 샀는데 더 오르지 않으면 또 후회하는 등 만족감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투자 패턴도 포모 증후군을 의심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엔 타인의 수익률에 대한 부러움 때문에 조급한 마음으로 추격 매수를 했다가 작은 조정에도 불안을 느껴 손절한 뒤 재상승할 때 또 후회하는 악순환이 이어질 우려가 높다.
시기와 질투는 인간의 본능이다. 그렇기에 누구나 어느 정도의 포모 심리를 갖고 있다. 하지만 과도한 욕망이나 타인과의 비교는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 전문가들은 투자에서 가장 경계할 것은 기회를 놓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성공을 따라가다 자신의 원칙마저 잃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또 재테크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긴 시간 흔들리지 않는 태도와 원칙이라고 강조한다. 타인과 비교하는 데 시간을 쏟기보다는 조급함 때문에 자신의 속도를 잃지 않도록 완급을 조절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2026-05-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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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흥도와 단종이 부러운 이유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1600만 명을 넘는 관객몰이로 대한민국 영화사를 새로 쓴 ‘왕과 사는 남자’는 단종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성공한 영화다. 단종은 안방극장 사극에서는 단골 주인공으로 등장한 인물이다. 배우 이민우와 정태우, 심지어 여자배우인 윤유선까지 배역을 맡아 인상깊은 연기를 선보인 바 있다. 그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로는 1956년작 ‘단종애사’와 1963년작 ‘단종애사’가 있다. ‘왕과 사는 남자’는 단종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세 번째 영화에 해당한다.
영화의 역대급 인기로 단종 유배지인 강원도 영월이 관광객 러시로 들끓을 정도였다는 얘기들이 조금은 구문이 된 지금, 단종을 둘러싼 얘기를 새로이 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얘기는 사후 240여 년만에 왕으로 복위된 단종을 대중 앞으로 다시 불러 세운 일제 강점기의 두 소설가에게로 향한다.
■수양만이 할 수 있다?
소설가 김동인은 1941년 잡지 <조광>에 ‘대수양’이라는 제목으로 역사소설을 연재했다. 제목에서 보듯이 소설은 수양대군의 영웅적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소설 속 수양대군은 부친인 세종대왕까지 능력을 인정하고 맏이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 할 정도로 뛰어난 위인으로 설정돼 있다. 반면 그의 형 문종은 유학의 원리원칙과 서적의 글귀에만 천착하는 문약한 인물로 그려진다. 김동인은 수양대군이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주살한 계유정난을 어린 조카 단종의 자리를 노린 동생 안평대군 일파의 쿠데타 음모를 사전에 알아채고 선제 진압한 것으로 묘사한다. 계유정난 이후 왕좌에 염증을 느낀 단종이 상왕을 꿈꾸면서 왕위에 오를 생각이 없으나 능력은 출중한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기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김동인이 수양대군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의도는 명확하다. 그는 일제 강점기 극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민족적 자존감이며 수양대군은 이 같은 민족적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의 표본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자칫 왕권이 흔들릴 수 있는 조선 초기에 탁월한 전략으로 나약한 왕을 대신해 왕권 확립을 해낸 것이 수양대군이었다는 분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이 같은 분석은 수양의 세조 등극 이후 벌어진 사육신의 난 같은 왕위 정통성을 둘러싼 동시대의 극한 반발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의 소설이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고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장면까지만으로 끝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 할 것이다.
■한때 왕이었던 소년의 몰락
소설가 이광수는 김동인에 앞서 1928년 말부터 1년여 동안 <동아일보>에 ‘단종애사’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연재했다. 역시나 제목에서 보듯이 이 소설은 단종의 슬픈 이야기를 절절하게 담고 있다. 할아버지 세종과 아버지 문종의 기대 속에 역대 어느 왕보다 단단한 정통성을 가지고 왕위에 오른 단종이 호랑이 같은 삼촌 수양대군과 정인지, 한명회, 신숙주(소설은 이 3명을 대표적인 간신이자 악인으로 묘사한다)의 간계로 쫓겨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얘기다. 고명(顧命) 실국(失國) 충의(忠義) 혈루(血淚) 등 네 편으로 이뤄져 있다.
고명 편은 단종의 탄생과 세종의 총애, 세종 사후 문종의 등극과 문종이 임종하면서 신하들에게 단종을 돌봐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을 다룬다. 실국 편은 계유정난으로 알려진 수양대군의 쿠데타 장면으로서 수양대군 일파의 비열한 음모를 자세히 묘사한다. 충의 편은 사육신들이 상왕으로 쫓겨난 단종의 복위를 위해 안간힘을 쓰다 발각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내용이다. 사육신 일족이 손자까지 삼대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의 참혹함과 죽은 이들의 이름 하나하나까지를 지독히도 자세하게 다뤄 읽는 내도록 서늘함을 느끼게 한다. 혈루 편은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된 뒤 영월로 유배를 갔다가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다룬다.
이광수는 일제 강점기에 단종애사를 통해 왕위를 잃은 단종과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을 동일시하고 단종 복위에 목숨을 건 사육신의 절개를 통해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려 한 듯하다. 단종애사의 내용 중에는 역사와 맞지 않는 부분도 다소 있지만 현재까지 소설의 내용이 독자들에게 단종 관련한 사실(史實)로는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이광수가 의도한 바가 김동인보다 적절했던 것으로 읽힌다.
■한때 수도였던 도시의 추락
여기서 잠시 김동인과 이광수의 소설 속 내용을 한 도시와 겹쳐서 바라보도록 하자.
단종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잇따라 세상을 뜨는 비상시국에 잠시 왕위에 올랐던 것처럼 전쟁이라는 비상시국에 대한민국 수도의 지위에 잠시 올랐던 도시가 있다. 바로 부산이다. 비상시국이 지나가자 수양대군을 영웅시함으로써 강력한 추진력을 토대로 한 효율성 극대화 움직임이 일었던 것처럼 전쟁이 끝나자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효율성 극대화 움직임이 곧장 이어졌다. 단종 복위 시도가 처절하게 무산됐듯이 수도권 버금자리라도 버텨보려던 부산의 시도도 철저히 무산돼 왔다. 그렇게 단종은 목숨을 잃었고 부산은 현재 소멸위기 도시의 반열에 올랐다. 김동인의 소설 대수양과 겹치는 부분은 강력한 추진력을 토대로 한 수도권주의의 득세라 하겠다. 반면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와는 임시수도였던 부산의 처절한 몰락 부분이 겹친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이광수 소설 단종애사의 혈루 부분을 영화화한 것이다. 혈루 편은 소설 전체의 10% 정도에 불과한 분량이다. 다른 편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적은 그 내용 속에서도 엄흥도에 대한 내용은 방치된 노산군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를 지냈다는 단 한 줄 뿐이어서 혹시라도 놓친 부분이 있는지 책을 다시 들춰 보게끔 한다. 영화는 그 한 줄에서 시작해 상상을 가미함으로써 수백년 만에 새로운 생명력을 얻은 단종을 관객들 앞에 생생하게 내보인 것이다.
단종과 비슷한 길을 걸어온 부산에겐 단 한 줄의 엄흥도 같은 씨앗과 거기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계기가 남아 있을까. 씨앗이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이며 생명력은 누가 불어넣어야 할까.
다가오는 부산시장 선거에서는 그 답의 일단면이라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2026-05-2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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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성과급과 임금의 미래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이집트 피라미드가 채찍과 몽둥이로 건설됐다고 여긴다면 오해다. 다수의 숙련된 장인들이 활약한 덕분에 고도로 정교한 건축물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이들에게 어떤 보상이 주어졌을까. 파피루스나 점토판에 하루 지급품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빵 10개와 맥주 3~4L, 그리고 양파와 마늘, 생선, 곡물…. 화폐가 생기기도 전이었지만 숙련 노동의 대가에는 엄정한 셈법이 적용됐다.
조선 숙종 대에 부산 금정산성을 지을 때는 노역에 동원된 장정들에게 끼니와는 별도로 막걸리를 지급했다는 전승이 내려온다. 오늘날 산성 막걸리의 기원이다. 일꾼을 후하게 대접해 일의 능률과 완성도를 높이려는 방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하다.
오늘날 노동의 대가는 임금이다. 사용자는 안정적인 기본급을 보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추가 보상책도 제공한다. 이 제도의 원형은 미국 포드주의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동차 제조사 포드는 1914년 컨베이어벨트를 도입해 대량생산 체제를 완성했는데, 낯선 기계에 적응하지 못한 저숙련 노동자들의 높은 이직률에 발목이 잡혔다. 생산 차질까지 빚자 회사는 인력 확보를 위한 묘안을 내놨다.
포드는 ‘하루 5달러( a day)’ 구호를 내걸고 일당 2.34달러를 배 이상 올렸다. 또 고임금의 대가로 무단결근, 음주, 도박을 금지하는 등 사생활까지 통제했다. 가정에 충실한 가장이 직장에서 일도 잘할 것이라는 생각에 사회부(Sociological Department)를 신설하고 가정 방문을 통해 결혼과 가족 부양, 저축 여부를 일일이 조사했다. 직원이 방탕한 생활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으면 가차 없이 해고했다. 포드주의를 ‘가족임금(family wage)’의 제도화로 부르는 이유다.
이후 산업사회는 포드식 가족임금제가 중심축이 됐다. 임금은 개인에 대한 보상에 그치지 않고 배우자와 자녀를 부양하는 가족 생활비 개념으로 확장됐다. 기업들은 가족수당, 사택과 주택담보 대출, 자녀 학자금, 배우자 건강검진, 경조사 지원 같은 복지 제도를 경쟁적으로 도입했다. 국가는 건강보험 피부양자 제도와 유족연금, 산재보상 같은 사회보험 체계로 이를 뒷받침했다. 기업과 국가는 안정적인 노동력 공급을 위해 핵가족 체제를 유지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한국도 포드주의 기반 위에 산업화를 이뤘다. 한국의 노사는 격렬하게 충돌해 왔지만 동요 ‘아빠 힘내세요’로 상징되는 ‘가장의 생계 책임’만큼은 공유한다. 노조의 쟁의 행위에 일정한 동정 여론이 형성되는 이유도 임금이 가족 생계를 지키는 보루이기 때문이다.
‘가족임금’은 사회적인 역할과 책임의 분담을 전제하고 있다. 노동은 경기 변동과 기업 리스크로부터 보호받되, 기업과 주주는 투자 판단, 이익 처분, 실패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 회사는 직원 가족의 생계가 걸린 기본급을 안정적으로 보장해야 하고, 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사회적 비난과 법적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최저임금 보장, 해고 제한, 퇴직보험과 고용보험 등을 통해 노동자의 생활 안정성은 보장하되, 기업 이익의 처분은 경영진의 판단 영역에 두는 것이다.
인터넷이 등장한 1990년대 이후 정보기술(IT) 혁명과 스타트업 붐은 포드주의 임금 체계에 변형을 일으켰다.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창의적 인재를 붙잡기 위해 월급을 넘어선 대안을 찾았다. 스톡옵션이나 성과조건부주식(RSU, Restricted Stock Units)은 회사 성장에 따라 주가가 오르면 직원이 주식을 받거나 싼값에 살 수 있도록 한 보상 제도다. 이 방식은 한국 IT 업계와 스타트업, 그리고 대기업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다만 포드주의식 단체협상과 달리 실리콘밸리식 보상 체계는 개별 계약과 성과 연동 방식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러한 이익을 나누는 권한이 경영진에 있다는 점만큼은 포드주의와 다르지 않다.
최근 삼성전자 노조가 역대급 영업이익의 일률적 분배를 요구하며 쟁의에 나선 것은 포드주의와 실리콘밸리식 보상 체계의 경계를 흔드는 움직임이다. 노조는 ‘영업이익의 15%’를 성과급 재원으로 고정하고 연봉의 50%로 제한된 성과급 상한 폐지를 목표로 회사를 압박하고 있다. 회사의 이익 중 일정 비율을 노동의 몫으로 공식화하겠다는 것이다. 이 요구가 실현되면 직원 1인당 3년간 26억 원의 성과급을 받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조의 요구는 초과 실적을 성과급 형태로 지급하는 이익공유제(PS, Profit Sharing)와 비슷해 보인다. 다만 기존 PS가 경영진이 설계한 성과 공유 체계라면, 삼성전자 노조는 영업이익의 일정 비율을 노동 몫으로 공식화하자고 요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삼성전자 사측은 기존 초과이익성과급(OPI, Over Profit Incentive)을 유지하면서 실적이 개선되면 특별 보상을 추가하는 안을 제시하고 있다. ‘회사가 잘되면 더 나눠주겠다’는 것이다. 결국 핵심은 성과급 액수보다 누가 배분 권한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충돌이다.
이 쟁점에 노사 모두 양보하지 않을 태세여서 물리적 대결 가능성이 커 보인다. 노조 홈페이지 ‘파업.com’은 21일로 예고된 파업 동참 노조원 수를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노동위원회 중재가 결렬된 뒤 5000여 명이 늘었다.
삼성전자는 창업 때부터 무노조 경영을 고수하면서 업계 최고의 임금과 복지를 제공한다는 서사를 쌓았다. 한국에서 가장 전형적인 ‘가족임금’을 실천한 회사로 손색이 없다. 그런 회사에서 그 틀을 깨는 단체행동이 시작된 것은 역설적이다. 성과 배분 과정의 투명성과 합리성이 부족해 불신이 누적됐다는 지적을 삼성전자는 곱씹어봐야 한다.
노조의 요구가 경계선을 넘었다고 해서 ‘귀족 노조’로 비판만 하면 해결책과 멀어진다. 실제 임금과 성과 배분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다. 1인 가구의 증가로 ‘가족임금’의 취지가 퇴색되는 과정인 점도 감안해야 한다.
다만, 삼성전자와 같은 성공 모델이 존재하기 위한 밑바탕이 되는 우리 사회 내부의 균형 감각을 잃어서는 곤란하다.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13% 수준에 머물러 있다. 노동자 대다수가 노조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의미다. 경영 성과에 대한 노사의 책임 경계가 흐려질 경우 제도가 악용될 가능성도 우려된다. 만약 사용자가 ‘영업 이익이 나면 추가로 가져가되, 손실이 날 때는 기본급에서 공제하자’고 요구하면 어떻게 방어할 수 있나. 경영 실패의 책임이 노동자에게 전가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우리 주변에는 ‘가족임금’의 보호를 받아야 할 노동 약자들이 아직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훗날 삼성전자의 성과급 논쟁이 한국 노동 체제 변화의 기폭제가 됐다고 평가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장은 노동의 양극화와 사회적 균형이라는 더 무거운 질문도 함께 봐야 한다. 삼성전자 노조가 기업 초과 이익의 배분을 요구하는 지금도 대다수 노동자는 노조의 보호 밖에서 불안정한 고용과 임금을 걱정하고 있다.
2026-05-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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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부산시장 후보들 곁에 문화전략가는 있는가?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부산시가 부산오페라하우스의 개관 공연으로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오페라 오텔로를 무대에 올리기로 했다. 시는 오텔로의 3회 공연에 105억 원 규모의 예산을 투입할 계획이다. 시 정책이니, 이는 박형준 부산시장이 추진해 온 문화정책의 방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세계적 문화기관과 콘텐츠를 적극 유치해 부산의 도시 브랜드와 문화 경쟁력을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이다. 반면 더불어민주당 전재수 부산시장 후보는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퐁피두센터 부산분관 건립과 부산오페라하우스 개관 공연 예산을 ‘혈세 낭비’로 규정하며 관련 사업의 집행을 중단한 뒤 이른바 ‘부산 민생 100일 비상조치’에 재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부산의 문화정책을 둘러싼 최근 논란은 6·3 지방선거와 맞물리며 단순한 예산 공방을 넘어서는 양상이다. 특히 세계적 문화 프로젝트를 통한 도시 도약이냐, 민생 중심의 재정 재편이냐를 둘러싼 논쟁은 부산이 어떤 문화적 미래를 지향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 부산오페라하우스 정체성 고민을
박형준 부산시장 후보의 문화정책 방향은 뚜렷하다. 세계적 문화기관과 콘텐츠를 적극 유치해 도시 브랜드와 문화 경쟁력을 끌어올리겠다는 전략이다. 퐁피두센터 부산 분관 추진, 해외 유명 건축가를 활용한 특별건축구역 사업, 그리고 라 스칼라 극장의 오텔로 개관 공연 추진까지, 그 흐름은 하나로 이어진다. 외부의 성공 모델과 세계적 브랜드를 부산으로 가져오면 도시 경쟁력도 함께 높아질 것이라는 인식이다. 물론 이런 접근 자체를 무조건 부정하기는 어렵다. 문화는 때로 외부 자극과 교류를 통해 성장하기 때문이다. 세계적 공연과 기관 유치는 도시 인지도를 높이고 관광 산업에도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국제도시를 지향하는 부산이 글로벌 문화 네트워크 구축에 나서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전략이다. 실제 세계 주요 문화도시들도 국제 교류와 협업 속에서 성장해 왔다.
문제는 지금 부산시의 정책이 교류보다는 외부 의존에 가까워 보인다는 점이다. 특히 라 스칼라 프로젝트는 그 상징성이 크다. 부산시는 개관 시즌에 약 105억 원을 투입해 오텔로 3회 공연을 추진할 계획이다. 지역 문화계에서는 “부산 예술인 지원 예산보다 더 많은 돈이 단 세 차례 외국 공연에 투입된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 예산은 부산문화회관 7개 극장의 연간 기획사업비의 수배에 이르고, 시립예술단 전체 사업비를 크게 웃도는 규모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액수 자체보다 그 막대한 비용이 부산의 문화 생태계에 무엇을 남기느냐에 있다.
개관 공연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다. 부산오페라하우스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시민에게 처음 선언하는 상징적 무대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왜 지금 부산에서 이 작품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혹자는 이야기할 것이다. 오텔로가 부산과 전혀 무관한 작품이 아니라고. 바다와 항구, 폭풍 등 요소는 해양도시 부산과 일정 부분 맞닿아 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상징만으로 부산의 문화적 정체성을 충분히 담아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구나 이번 개관 공연은 부산이 자체 제작한 콘텐츠가 아니라 라 스칼라의 완성된 작품을 들여오는 방식이다. 개관작은 오랫동안 부산오페라하우스의 정체성을 규정할 상징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더욱 신중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만약 지역 예술가와 기술진이 제작 과정에 참여하고, 개관 시즌 전체를 부산의 해양성과 연결하는 기획으로 확장하고, 공연 이후 지역 레퍼토리와 교육 프로그램으로 이어지는 구조까지 그렸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세계적 극장 초청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지역 생태계 성장과 어떻게 연결하느냐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없었다. 한 발짝 양보해 개관 창작 오페라로 논의되었던 ‘새야 새야’가 오텔로와 동등한 상징성을 가지고 함께 추진됐다면 논란은 덜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점에서 박 후보는 뼈아픈 질문을 피하기 어렵다. “부산오페라하우스는 과연 부산만의 콘텐츠를 축적할 준비를 해 왔는가”, “수년간의 준비 기간 지역 창작 오페라와 제작 시스템, 인재 양성 시스템을 얼마나 구축했는가?”
■ 문화 투자 자체 위축 불러올 수도
그렇다고 전재수 후보의 접근 역시 결코 건강해 보이진 않는다. 어쩌면 더 위험한 발상일 수도 있다. 전 후보는 퐁피두센터 부산 분관과 부산오페라하우스 개관 공연 예산의 집행을 중단한 뒤 이를 민생 예산으로 돌리겠다고 했다. 확보한 재원을 통해 영세 화물차주 지원, 공공요금 부담 완화, 전통시장·소상공인 에너지 바우처 지급, 동백전 캐시백 확대 등을 추진하겠다는 구상이다. 시민 생활 안정을 위한 정책은 정말 필요한 정책이다. 이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따로 있다. 문화 예산을 사실상 ‘불요불급한 비용’, 즉 필요하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은 예산처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문화정책을 지나치게 협소한 시각으로 해석하는 접근이다. 문화 투자를 도시 미래를 위한 전략적 투자로 보기보다 경기 상황이 어려우면 언제든 삭감할 수 있는 비용 정도로 인식한다는 얘기다. 이런 시각이 확산될 경우 문화 투자 자체가 위축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이는 ‘기업 하나 유치하는 것이 미술관이나 박물관 하나 세우는 것보다 낫다’라는 식의 단순 경제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오늘날 도시 경쟁력은 기업 숫자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어떤 문화적 자산을 갖고 있으며, 시민들이 어떤 문화적 경험을 누릴 수 있는가가 도시의 품격과 미래 가치를 좌우하는 시대다. 이런 측면에서 두 사업을 모두 중단하고 관련 예산을 민생 예산으로 돌리겠다는 구상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문화 예산을 줄여 단기 민생 예산으로 돌리는 방식은 정치적으로 즉각적인 호응을 얻을 수는 있다. 하지만 도시의 장기적 성장 기반을 잠식할 위험도 크다. 더 심각한 것은 전 후보의 발언 어디에서도 “그렇다면 부산 문화정책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잘못된 사업을 비판하는 것과 문화 투자 자체를 위축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문화정책 예산 안에서의 수평 이동이나 세부 항목 조정, 사업 방식에 대한 구체적 대안 없이 막연히 ‘민생 예산’을 언급하는 것은 결국 표 계산에만 치우친 접근처럼 비친다. 이는 지역 문화예술계에 대한 무성의 일 분 아니라, 그동안 퐁피두 사업을 비판해 온 이들에 대해서도 무책임한 태도로 읽힌다. 적어도 부산시장 후보라면 단순한 찬반 구도에 갇혀서는 안 된다. 문화는 도시의 사치품이 아니다. 도시 경쟁력을 구성하는 핵심 자산이다. 이점을 전 후보가 분명히 알았으면 한다.
■문화 관점서 도시 고민해 줄 사람 필요
박 후보는 세계적 문화기관과 외부 브랜드 유치에 지나치게 기대고 있고, 전 후보는 문화 예산을 우선순위에서 밀려도 되는 비용처럼 접근하고 있다. 문화정책은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다. 결국 두 후보 모두 균형 잡힌 문화정책이라고 할 순 없다. 외부 문화 자원과 지역 문화 생태계 육성은 충돌하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함께 가야 할 상호 보완 전략에 가깝다. 부산에 필요한 것도 ‘라 스칼라를 부를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단순한 찬반 논쟁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공연 이후 부산에 무엇이 남느냐다. 지역 제작 인력은 성장하는가, 시민들의 문화 경험은 확장되는가, 부산만의 콘텐츠는 축적되는가, 그리고 그것이 지속 가능한 시스템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가 핵심이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 사례가 보여주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대구는 해외 유명 공연 초청에 그치지 않고 지역 성악가와 제작 인력을 육성하며 창작 오페라를 꾸준히 축적해 왔다. 화려한 건물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움직이는 운영 시스템이며, 일회성 이벤트보다 중요한 것은 지역 문화 생태계라는 점을 보여준다.
부산은 오랜 시간 다양한 문화가 교차해 온 항구 도시였다. 이제는 외부의 명성과 브랜드를 빌려오는 데서만 머물 것이 아니라, 스스로 콘텐츠를 기획하고 축적하는 도시로 나아가야 한다. 더욱이 지금은 K컬처가 세계 문화시장을 움직이는 시대가 아닌가. 중요한 것은 국적이 아니라 얼마나 탄탄한 서사와 콘텐츠를 만들어 내느냐다. 서구의 오페라라 하더라도 부산만의 해석과 지역의 문화적 역량이 더해진다면 세계인의 관심을 끄는 작품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문제는 그런 상상력이 들어갈 틈이 없다는 점이다. 부산오페라하우스가 추진된 지난 수년간 부산은 과연 어떤 콘텐츠와 문화 생태계를 축적해 왔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부산의 두 시장 후보를 보고 있노라면 정작 그 전략을 설계할 문화전략가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정치적 공방은 요란하지만, 정작 부산의 문화적 미래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부산시장 후보들 곁에는 과연 이 도시의 문화적 미래를 함께 고민할 사람이 있는가?”라고. 지금 문화는 도시의 미래를 설계하는 핵심 전략이 됐다.
2026-05-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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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반도체발 ‘슈퍼리치’ 시대 열리나?
K반도체의 투톱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리면서 성과급 논쟁 이슈가 국내를 강타하고 있다. 반도체 슈퍼 사이클을 타고 삼성전자는 올 1분기 57조 원대, SK하이닉스는 37조 원대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SK하이닉스의 올해 연간 영업이익이 250조 원대에 달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기본급 1000%라는 성과급 상한을 폐지했으며, 연간 영업이익의 10%를 재원으로 초과이익분배금(PS)을 지급한다. 이에 따라 올해 SK하이닉스 임직원이 받을 성과급은 수억 원대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 노조도 올해 영업이익 15%(약 45조 원 추산)의 성과급 지급과 상한선(연봉의 50%) 폐지를 요구하는 상황이다. 이 부분이 현실화한다면 반도체발 ‘슈퍼리치’ 시대가 열리는 셈이다.
■ “하이닉스느님” 밈 열풍
SK하이닉스가 사상 최대 실적 행진을 이어가면서 회사를 소재로 한 각종 밈(온라인 유행 콘텐츠)이 쏟아지는 상황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가장 대표적인 밈은 ‘SK하이닉스 로고 조끼’다. 한 게시물에는 조끼를 입은 남성 사진과 함께 ‘대한민국 현시점 최고의 소개팅 룩’이라는 문구까지 붙었다.
4월 25일 예능 프로그램인 ‘SNL코리아’에서는 SK하이닉스 직원을 소재로 한 코너까지 공개됐다. 한 남성이 편한 옷차림으로 명품 매장에 들어서자 직원이 막아선다. 실랑이 끝에 남성이 외투를 벗고, SK하이닉스 로고가 있는 조끼가 드러나자 직원은 곧바로 “하이닉스느님”이라며 태도를 바꾼다는 내용이다. 직원 조끼가 ‘명품 매장 프리패스 룩’이 된 것이다. 최근 임직원 1인당 평균 성과급이 수억 원을 넘을 것이라는 SK하이닉스의 위상을 풍자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생성형 인공지능(AI)으로 만든 패러디 이미지도 확산하고 있다. SK하이닉스 주차장에 고가 외제 차가 빼곡히 주차된 모습을 담은 이미지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인기를 반영하듯 SK하이닉스 입사를 목표로 하는 강좌까지 등장하면서 ‘하닉고시’ 열풍도 분다. SK하이닉스가 올해 생산직 공개 채용을 시작하자 학원가에서 ‘단기 합격반’을 개설했으며, 온라인 서점에선 관련 교재가 실시간 판매 1위에 오르기도 했다.
■ 대학 입시 지형을 흔들다
의학 계열의 인기 전공을 통칭하는 ‘의치한약수’(의대·치대·한의대·약대·수의대)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취업이 보장되는 ‘반도체 계약학과’를 더한 ‘의치한약수반’이 등장한 것도 새로운 풍조다. ‘의대’의 독주 속에서 반도체 계약학과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2026학년도 수시 모집 결과,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와 고려대의 반도체공학과의 합격선은 2021년 첫 신설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수시 최종 등록자 70% 컷을 분석한 결과,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의 학생부교과전형 합격선은 2024학년도 1.47등급에서 2025학년도 1.20등급, 2026학년도 1.14등급까지 수직 상승했다. 고려대 반도체공학과의 학생부종합전형 합격선도 전년도 1.82등급에서 올해 1.47등급으로 올랐다. 의대 비선호 상위권 학생들에게는 이들 학과가 확실한 선택지로 자리 잡은 것이다. ‘삼전닉스 열풍’이 의치한약수의 불패 신화를 넘어 이공계의 부활을 보여준다는 면에선 희망적이다.
2027학년도 입시에서도 ‘반도체 계약학과 독주’는 의대 증원 변수와 함께 상위권 합격선을 뒤흔들 핵심 변수다. 2027년 대입에서 삼성전자는 연세대, 성균관대 등 7개 대학에서 350명을, SK하이닉스는 고려대, 서강대, 한양대 등 3개 대학에서 110명을 선발한다. 두 기업은 합산 총 460명의 정예 인원을 뽑는다.
■ 각광 받는 ‘반도체 셔세권’
시장의 관심은 삼전닉스의 역대급 성과급이 만들어낼 ‘낙수 효과’로 쏠린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셔틀버스가 지나는 곳을 일컫는 ‘셔세권’(셔틀버스+역세권)이 부상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최소 3~4년간 반도체 호황이 이어져 실제 성과급으로만 수십억을 벌게 된다면 풍부한 유동성의 종착지는 결국 부동산일 것이란 예측이 나온다.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는 ‘주요 셔세권 단지 리스트’까지 공유되는 상황이다.
기흥·화성 등에서 사업장을 운영하는 삼성전자는 약 1700개의 노선을 통해 매일 5만여 명의 직원을 실어 나른다고 한다. 이천과 청주에 사업장을 둔 SK하이닉스 역시 500여 대의 통근 버스가 2만여 명의 직원 출퇴근을 책임진다. 총 7만여 명에 달하는 고소득 인구의 이동 경로가 곧 ‘부동산 입지 지도’로 이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셔세권’으로 꼽히는 지역은 시장 평균보다 높은 가격 상승률을 보인다고 한다. 셔틀 노선이 집중된 서울 동남권(강남·서초·송파·강동)과 경기 남부권(분당·수지·동탄·영통)이 대표적이다.
■ 산업 생태계 확장 연결을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역대급 성과급 예상에 부러움과 함께 노동소득 격차를 둘러싼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노동소득 차이가 미래 자산 형성 능력 차이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소득 격차에 따라 ‘K자형’ 양극화가 더 심화하고 일각에선 ‘H자형’으로 굳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H자형 양극화란 위아래 계층 간 격차가 굳어져 이동 사다리가 약해진 현상을 알파벳 H에서 착안한 용어다. 같은 출발선에서 계층이 갈라지기 시작하는 K자형 양극화를 넘어 H자형은 격차가 고착된 상태를 의미한다. 노동시장 이중 구조가 인생 경로를 좌우하고 이로 인해 부동산, 사교육, 채용시장의 양극화가 더 깊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반도체 호황에 따른 일부 대기업 중심의 임금 상승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분위기는 있다. 기업이 투명한 규칙에 따라 이익을 나누는 것은 권장할 일이다. 다만 이러한 성과가 특정 기업과 계층에만 머문다면 산업 전반의 불균형을 심화시킬 수 있다. 이를 사회 전반으로 확산하는 정책적·구조적 대응이 필요하다. 반도체 호황이 촉발한 임금 상승의 과실이 신규 일자리 창출과 산업 생태계 확장으로 이어지고, 협력사와 중소기업, 서비스 분야까지 파급된다면 바람직할 것이다. 반도체 호황을 어떻게 우리 경제 전반의 성과를 연결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 됐다.
2026-05-0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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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누군가 나에게 몰래 마약을 투여한다면…
마약류는 통상 마약과 향정신성의약품, 대마로 크게 분류된다. 마약은 천연 마약(양귀비와 코카엽)과 천연 마약에서 추출물(모르핀, 헤로인, 코데인), 합성마약(펜타닐, 메타돈, 옥시코돈)으로 분류된다. 합성마약 중에서도 펜타닐 남용은 심각한 수준이다. 펜타닐 효력은 모르핀보다 최대 100배, 헤로인보다 50배가량 강력하다. 1959년 벨기에 과학자 폴 얀센이 발명했다. 암 환자 등의 극심한 고통을 줄여주는 용도로 인기를 모았다. 양귀비 등 비싼 천연 재료를 원료로 사용하지 않고 실험실에서 화학적으로 제조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혔다. 1981년 특허 기간이 만료되면서 펜타닐을 제조하는 제약회사들이 급증했다. 문제는 수요가 늘면서 불법 제조도 늘어났다는 것이다. 당초 목적인 진통 용도가 아니라 환각 목적으로 광범위하게 유통되는 등 현재 지구촌은 펜타닐 등 합성마약류로 인한 심각한 부작용을 겪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기존 펜타닐의 분자 구조를 조금씩 변경한 펜타닐 유사체, 저가 합성마약 플래카(Flakka), 합성대마(K2, 스파이스), 사탕과 초콜릿처럼 포장한 이색 마약 식품 등도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다. 철저한 대응 습관을 기르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강력한 합성 마약 등에 노출될 우려가 매우 높은 만큼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 급증하는 마약범죄… 청소년·청년이 위험하다
펜타닐은 뇌의 오피오이드 수용체에 직접 결합해 통증을 없앤다. 도파민을 분출시켜 몽롱하면서도 편안한 상태로 진정시킨다. 하지만 강력한 신체적, 정신적 의존 상태를 유발한다. 펜타닐의 가장 무서운 점은 한 번만 접해도 중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10원짜리 동전 크기의 1% 분량인 2mg 정도만 복용해도 사망에 이를 수 있다. 미국 필라델피아는 ‘좀비 도시’로 불린다. 켄팅턴 거리 등 도시 곳곳에서 펜타닐 투여 후유증 때문에 근육이 경직되면서 좀비를 닮은 기이한 모습으로 멈춰 선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매년 10만 명 이상이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하고, 그중 70% 이상이 펜타닐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마약사범도 폭증했다. 대검찰청이 마약사범 통계를 처음 시작한 1985년에는 1190명이 단속된 것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1999년 1만 589명으로 처음 1만 명을 넘어선 이후 2023년에는 2만 7611명으로 2만 명을 처음으로 상회했다. 2024년에도 2만 3022명에 달했다. 특히 온라인을 통한 마약류 유통이 늘어나면서 20~30대 마약류 사범이 크게 늘고 있다. 전체 마약사범 가운데 20~30대 비중은 2022년 1만 507명(57.2%), 2023년 1만 5051명(54.5%), 2024년 1만 3996명(60.8%)에 달했다. 10대 마약사범도 증가하고 있다. 2005년 30명 수준이었으나 2023년에는 역대 최대인 1477명을 기록했다. 이런 통계들은 1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청소년과 청년층이 마약의 유혹에 쉽게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방증한다.
■ 비자발적 마약 투여 범죄 확산 우려
부산마약퇴치운동본부와 부산시약사회 마약류 및 약물중독예방센터 등의 전문가들은 마약류가 단속, 검거 통계 수치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우리 사회에 확산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펜타닐 성분을 함유한 젤리와 사탕, 에너지 드링크에 혼합한 마약 음료, 대마 성분을 주입한 마약 초콜릿, 합성대마 오일을 넣은 마약 전자담배 등 일상용품으로 교묘하게 위장된 마약류들이 암암리에 유통되고 있는 실정이다.
더군다나 마약 유통업자들은 중독자가 많아질수록 더 많은 수익을 남긴다. 인터넷 세상에서는 마약류를 구입할 때 최초 1회는 무료로 제공한다는 등의 마케팅 전략으로 구매자를 확보하기도 한다. 마약류를 집중력을 높이는 보조제라고 속여 중독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사례도 드물지 않다. SNS로 접촉해 텔레그램으로 거래한 뒤 암호화폐로 대금을 주고받고 퀵 서비스나 택배, 우편물로 배송하는 비대면 거래가 지난해 60%를 넘어선 상황이다.
특히 갈수록 수법은 더 교묘해지고 있다. 2023년 4월 서울 강남구 학원가 일대에서 발생한 사건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당시 4인조 일당들은 시음 행사로 위장해 학생들에게 “기억력과 집중력 향상에 좋은 음료”라며 필로폰과 엑스터시 성분을 섞은 음료를 마시도록 유인했고, 6명의 학생이 피해를 입었다. 범인들은 학생들을 마약사범으로 신고하겠다고 학부모들을 협박, 돈을 뜯어내기 위해 범행을 계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최근 방영 중인 넷플릭스의 ‘사냥개2’에서는 몰래 투여된 약물이 섞인 술 한 잔을 마신 극중 인물이 쓰러지고 후유증에 시달리는 장면이 나온다. 2022년 방영된 ‘약한영웅 클래스1’에서는 고등학교에서 다른 학생의 시험을 망치기 위해 펜타닐 패치를 몰래 붙이는 장면이 나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 ‘마약류 대응 습관’이 필요한 시대
전문가들은 유사 범죄 발생 가능성은 언제나 상존한다고 조언한다. 예를 들어 카페 등에서 음료를 마시다가 화장실에 간 사이 누군가가 몰래 마약류를 음료 컵에 혼합하는 범죄도 예상할 수 있다. 이런 경우 강남구 학원가 사건처럼 차후에 협박을 받는다면 금품을 뜯기는 것은 물론 본의 아니게 중독의 길로 빠질 수 있다. 더욱이 펜타닐 등 강력한 합성마약을 자신도 모르게 투입 당했을 경우 중독성이 워낙 강하다 보니 마약 유통 조직의 고객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또 젤리와 초콜릿 등을 누군가가 선심성으로 포장해 권할 경우에도 무심코 섭취했다가는 원인도 모른 채 중독의 늪에 빠질 수도 있다. 특히 최근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묻지마 범죄’가 이어지고 있는 것과 관련해 펜타닐 등의 강력한 마약류를 범죄 도구로 악용, 누군가의 삶을 망치려는 시도도 있을 수 있다.
마약 관련 기관들은 자신도 모르게 피해를 입을 수 있는 마약류 범죄에 대응하려면 몇 가지를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단 모르거나 의심스러운 타인이 제공하는 음료와 음식물 등을 절대 섭취하지 않아야 한다. 공중장소인 카페 등에서 자리를 비울 경우에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일행 모두가 같이 자리를 비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는 조언이다. 또 비자발적으로 마약류를 접했거나 협박을 받았을 경우에는 즉시 관련 기관에 연락해 상담을 받는 것이 좋다. 주변 지인이나 가족 등이 평소와 다른 이상 행동을 할 때도 신속한 대응이 필요하다. 강력한 합성마약이 판치면서 한 번만 접해도 중독을 피할 수 없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한 번은 괜찮겠지, 극히 소량인데 이 정도면 안전하겠지 등 안일한 생각과 마약에 대한 상식 부족 때문에 소중한 삶을 파괴 당하는 불행한 일은 없어야 한다. 마약류에 대한 상시적 대응 습관을 숙지하길 당부한다.
2026-04-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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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뽕' 한 사발을 누가 마다하리오[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최근 대한민국이 자체 개발한 무기들이 국제 무대에서 큰 관심을 받으면서 시중엔 소위 ‘국뽕’이 차오른다는 표현이 넘실대고 있다. 2010년대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탄생한 단어인 국뽕은 국가와 필로폰(히로뽕·메스암페타민)의 합성어로서 자국에 대한 환상에 도취돼 자국을 찬양하는 행태를 일컫는 비속어에 속했다. 그러던 것이 해가 갈수록 대한민국의 위상이 가슴 벅차도록 올라가는 장면이 반복되자 ‘주모! 여기 국뽕 한 사발 주소’ 같은 밈으로 소비되며 사용빈도가 급격히 올라갔다. 특히 대한민국 방위산업의 발전상에 대한 자부심에서 드러나는 국뽕은 그 어느 때보다 상한가를 치고 있는 중이다.
■방산 신화의 시작
70년이 넘도록 휴전 상태를 지나오면서 차곡차곡 쌓아온 대한민국의 K-방산에 대한 국뽕은 가장 대표적인 국뽕에 속한다. K-방산에 대한 국뽕의 연원은 1998년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8년 미국이 주도한 환태평양 군사훈련, 소위 림팩이라는 훈련이 진행되던 때. 한국에서는 국내 생산 장보고급 잠수함인 ‘이종무함’이 참여한다. 미국의 항공모함과 일본의 이지스함 등 상대적으로 어마어마한 해군 전력을 지닌 국가들 사이에서 이종무함은 초라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하지만 막상 훈련이 진행되자 이종무함은 단 한 번의 고장도 없이 가상 해전에서 미 해군 핵추진 잠수함을 비롯해 일본의 이지스함 등 모두 13척을 가상 격침시키는 활약을 보였다. 디젤 엔진을 끄고 실내가 찜통이 되는 열악한 환경을 배터리로 버티면서 타국의 대잠 기능을 무력화시킨 결과였다. 인터넷 상의 쇼츠 등에선 ‘한국은 다음부터 심판이나 보라’고 푸념했다는 귀여운 미국, 일본의 모습이 떠돌 정도다. 실전에서 국산 방산무기의 성능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 이 훈련은 지금까지도 인구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차세대 전투기 생산국
최근 양산 체계가 본격 가동되기 시작한 4.5세대 전투기 KF-21은 2015년 8조 원이 넘는 개발 투자로 시작된 국산 전투기 개발 사업의 결실이다. 6.25전쟁 이후 미국이 공급한 전투기에 의존해 영공을 지켜야 했던 대한민국이 자체 전투기 생산에 이르기까지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개발에 들어가자마자 전투기 핵심 장비인 AESA 레이더 기술 이전을 미국이 거부하는 사태가 결정적이었다. 대한민국은 연인원 6만 5000명에 가까운 연구진을 ‘갈아넣다시피’ 하며 자체 레이더 기술 등 핵심 기술들을 개발했다. 전투기 개발 이후 42개월간 1600여 회 시험 비행에서 단 한 건의 사고가 없었던 점도 세계 전투기 개발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쾌거. 인도네시아 16대 수출을 시작으로 동남아시아와 중동 국가들의 오픈런이 예고될 정도로 양산 이후 전망은 장밋빛이다. 차후 10년 이내 독자적인 엔진 개발까지 이뤄지고 나면 미국 승인 없이도 전투기 수출이 가능해진다. 그 시기쯤이면 현재 4.5세대인 전투기가 차세대급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높다.
■미사일 강국
천궁-II가 아랍에미리트 하늘에서 이란의 탄도 미사일을 96%나 요격해낸 사실은 한국 미사일 개발의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천궁-II가 가성비까지 보태며 미국의 패트리어트 미사일에 버금가는 요격 미사일로 급부상하는 동안 미국의 사드체계와 어깨를 견주려는 국내 미사일체계도 개발이 착착 진행중이다. LIG넥스원이 지난해 공개한 L-SAM이 그 주인공이다. 천궁-II처럼 수출까지 염두에 둔 L-SAM은 장거리 지대공 미사일 체계다. 천궁-II보다 높은 상층 방어가 가능하기 때문에 사드체계와 곧잘 비교된다. 천궁-II의 중동전 활약 등으로 요격 미사일 실전 데이터가 확보된 이상 L-SAM의 활약도 그에 못지 않을 것으로 기대된다. 국산화한 미사일들은 수비형 미사일만 대단한 것이 아니다. 고고도로 띄운 뒤 수직으로 낙하해 적진을 타격하는 현무 미사일도 핵을 제외한 최강 무기로 세계를 놀라게 하는 중이다. 8톤급 탄두를 장착할 수 있어 북한의 지하 벙커 시설 대부분을 파괴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21년 대한민국 미사일에 대한 미국의 사거리 제한 지침 종료로 국내 미사일 개발은 더욱 날개를 달게 됐다.
■자주포의 나라
한국은 지난해 기준으로 K-9을 비롯한 자주포를 3000대 넘게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각 5000대와 4000대가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러시아와 중국을 제외하면 전 세계 3위이지만 면적당 밀도를 감안하면 세계 최다 자주포 보유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 전체 자주포 수와 맞먹는 규모라는 분석도 있다. K-9 자주포는 지난해 중국과 국경 분쟁을 벌인 인도에 4000억 원 상당의 추가 수출이 이뤄졌을 정도로 실전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폴란드를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도 큰 호평 속에 수출이 잇따르고 있다. 여타 국가보다 엄청나게 빠른 납기와 탄탄한 후속 수리 서비스는 이미 입소문이 자자하다는 평이다. 더 놀라운 것은 한국이 보유하고 있는 포탄 비축량이다. 지난해 미국과 유럽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포탄이 모자랄 때 대한민국은 포탄 비축량이 ‘7일치’밖에 없다면서 50만 발을 빌려준 바 있다. 그 때 드러난 대한민국의 포탄 비축량은 340만 발. 유럽 전체 규모와 맞먹는 자주포가 하루 수십만 발을 발사함으로써 7일만에 340만 발을 소비한다는 개념이 포탄 비축량 ‘7일치’의 실체였던 것이다.
방산강국 대한민국 신화의 출발점이었던 이종무함의 활약은 최근 캐나다로 출발한 도산안창호함의 위용으로 이어진다. 탄탄한 조선업을 배경으로 이룩한 잠수함 관련 기술은 핵추진 잠수함이 아님에도 독보적인 배터리 기술 접목을 통한 오랜 잠항시간으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알려진다. 독일 등 잠수함 생산국들이 서류를 들이밀며 캐나다의 60조 원대 잠수함 도입 계획에 응찰할 때 대한민국은 실물 잠수함으로 직접 태평양을 건너는 퍼포먼스로 응찰하겠다는 자신감을 내비칠 정도다.
기존 국가 대비 절반 이하의 가격과 엄청나게 빠른 납기로 상징되던 대한민국의 무기는 이제 실전에서 검증되며 신뢰까지 확보했다. 국제적인 안보 위기 고조가 뉴노멀이 돼 가는 지금, 가격과 납기에다 신뢰까지 무장한 대한민국 방위산업의 결과물들은 앞으로 더 빛을 발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런 국뽕이라면 정말 사발로 들이키라 해도 마다할 수 없을 듯하다.
2026-04-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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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 이후 달라질 세계와 한국의 선택[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페르시아만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세계 경제가 휘청거린 것이 처음은 아니다. 이슬람권의 패권을 둘러싼 이란·이라크 전쟁 때도 똑같은 에너지 전쟁이 벌어졌다.
1984년 이라크가 이란 유조선을 먼저 공격하면서 ‘탱커(tanker·유조선) 전쟁’이 발발했다. 이란도 바로 보복에 나서 걸프 지역 선박에 미사일, 기뢰, 전투기 공격을 감행했다. 교전 상대국의 석유 수송로를 공격해 수출 경제를 마비시키고 전세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목적이었다. 죽기 살기식 극단적 충돌은 급기야 영국 유조선 등 중립국 상선의 무차별 피격으로 치닫는다.
서로의 숨통을 죄는 공멸적인 ‘탱커 전쟁’은 오늘날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침공 이후 벌어진 양상과 판박이다. 당시 미국은 에너지 공급망 단절로 세계 경제가 막대한 피해를 보는 것을 막기 위해 호르무즈 해협에 군함을 파견하고 ‘해양 경찰’ 역할을 자임했다. 쿠웨이트 유조선에 성조기를 꽂아 미국적 선박인 것처럼 위장하거나, 아예 전함으로 호위하는 방식으로 해상 봉쇄를 뚫어냈다.
‘확고한 의지’(Earnest Will)로 명명된 유조선 호위 작전은 결국 미국과 이란이 교전하는 사태까지 초래했다. 하지만 1988년 이란·이라크전 종전 때까지 미국은 해협 안전을 지키는 전선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주요 항로는 오랫동안 ‘항행의 자유’(Freedom of Navigation)가 보장됐고 덕분에 전 세계는 자유 무역에 기반한 고도성장을 누리게 된다.
오늘날 세계 무역의 80% 이상이 뱃길로 이뤄진다. 과거에는 해적단이 출몰하거나 부당한 영유권 주장, 과도한 통행료로 막히기에 십상이던 바닷길이 안전해진 것은 제2차 대전 이후 압도적 해군력을 앞세워 세계 바다의 질서를 설계하고 유지한 미국 덕분이었다. 1979년부터 항행의 자유 프로그램을 운영한 미국이 ‘탱커 전쟁’에 개입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이 ‘탱커 전쟁’은 미국이 1990년대 걸프전 등 중동 사태에 깊이 빠져드는 계기이자 패권이 작동되는 방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으로 꼽힌다. 국제 유가와 자유 무역, 에너지 공급망 등 경제 이익을 넘어서는 의미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석유-달러-군사력이 맞물려 작동하는 삼각 구조가 놓여 있다. 세계 석유 거래는 오로지 달러로 결제되는 ‘페트로 달러’ 시스템이 원칙이다. 석유가 통과하는 최대 길목은 페르시아만과 호르무즈 해협이다. 그리고 이 수송로의 안전은 미국의 군사력으로 보장된다. 에너지와 금융, 군사력이 일체화되어 배가되는 시너지 효과가 패권을 강화했다. 이는 러시아, 중국 등 경쟁자들을 영원히 따돌릴 수 있는 구조이기도 했다.
38년이 흐른 오늘날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인한 에너지 위기 상황은 같지만, 과거 ‘탱커 전쟁’ 당시 비용과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해상 운송 안전을 떠받쳤던 미국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의지와 능력 면에서 미국이 크게 달라져 자유 진영 전반에 당혹감이 번지고 있다.
미국·이스라엘의 기습 공습으로 시작된 이란 사태는 지도부 참수와 압도적 공중 폭격만으로도 단기 승전보를 얻을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갔다. 이란의 호르무즈 봉쇄 반격에 발목이 잡혔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한국과 일본,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국들이 파병하지 않는 데에 여러 차례 서운한 감정을 표출하면서 노골적인 ‘괘씸죄 뒤끝’ 경고를 거듭했다. 하지만 한국은 유엔 결의 없는 전투 지역 파병은 전례나 현행법에 비춰 볼 때 선택지가 아니기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았다. 유럽 국가들은 한술 더 떠 국제법상 불법으로 규정하고 공개적으로 미국을 비토하고 나서면서 대서양 동맹은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었다.
개전 38일 만인 8일 미국과 이란이 2주간 휴전에 돌입한 것은 다행이지만 앞으로 더 복잡한 셈법과 청구서가 기다리고 있다. 우선 미국의 침공 명분이 무색해졌다. 이란의 레짐 체인지(정권 교체)나 핵 개발 무력화에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러시아 정부가 “미국의 참담한 패배, 이란의 승리”라고 논평한 이유다. 향후 협상에서 난항을 예고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특히 한국과 같이 중동 석유 의존도가 높은 국가에는 이란의 ‘해협 통제권’ 파장이 더 심각한 문제로 다가온다. 타국의 영해를 이용할 수 있는 무해통항권이 허용됐던 호르무즈에서 이란이 거액의 통행료를 징수할 권한을 갖게 된다면 모든 국가는 ‘의문의 1패’를 당하게 된다. 석유 수입국들에 전쟁 비용이 전가되고, 해협 통제권을 쥔 이란은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는 꼴이라서다.
중동 에너지 수송로 통행을 둘러싸고 새 질서가 모색되는 대목은 미국 패권의 추락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심상치 않다. 트럼프 대통령은 해협 개방이 미국의 문제가 아니라면서 “유럽 국가가 하게 두자. 한국이 하게 두자”라며 줄곧 회피한 결과다. 이란은 영해를 공유하는 오만을 끌어들여 공동 관리하면서 서비스와 안전을 대가로 통행료를 부과할 조짐인 반면 영국은 한국, 일본 등 40여 개국과 글로벌 협의체 성격의 채널을 구축해 대응하고 있다.
하지만 휴전이 선언된 직후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과 이란이 통행료를 공동 징수하면서 이권을 나누는 방안을 언급해 충격파를 남겼다. ‘아이디어 차원’이라는 설명이 붙긴 했지만 미국이 적대국과 손잡고 국제 해협의 유료화를 현실화한다면 해양 질서의 근간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말라카 해협이나 대만해협으로 유사한 통제가 확산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법이며, 용납할 수 없고, 세계에 위험하기 때문에 국제 사회가 맞서야 한다.” 지난 3월 27일 G7 회담에서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이란의 통행료 부과 시도를 강력 규탄했다. 하지만 미국이 스스로 만들고 지켜온 항행의 자유 원칙은 폐기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호르무즈는 어떤 형식으로는 ‘통행료를 내는 바다’가 될 가능성이 크다. 11일부터 열리는 종전 협상의 결과는 향후 세계 질서 재편의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중요 에너지 수송로에서 발을 빼는 것은 석유-달러-군사력 삼위일체의 위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치부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라는 미국 내 비판 여론도 거세다. 실제 이란 사태에서 미국 패권이 약화되는 징후는 곳곳에서 포착됐다. 이란이 해협을 통과하는 조건으로 중국 위안화 혹은 암호화폐 결제를 제시한 것은 ‘페트로 달러’ 체제의 균열을 의미한다. 파키스탄과 중국은 이란과 우호 관계를 지렛대로 휴전 협상을 중재하면서 미국이 친 사고를 대신 수습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공동 징수’ 카드로 영향력 유지 의지를 천명한 것은 미 패권의 약화를 부인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그린란드를 얻기 위해선 나토를 포기할 수도 있다… 내겐 국제법이 필요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공언한 대로 미국이 주도한 집단안보와 자유 무역 체제는 해체 수순에 들어갔다. 이미 유엔이나 나토 등으로 대표되는 기존 국제 질서를 헌신짝 취급해 온 데다, 자유 무역의 가치를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로 대체한 지 오래다.
80년대 ‘탱커 전쟁’이 유일 초강대국에 의한 국제 질서를 실증한 것이었다면 호르무즈 이후의 세계 질서는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그것은 단지 중동의 불안정성에 그치지 않고 세계의 불확실성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높다. 국제 질서의 균열로 자유 무역과 공급망 혼란은 시간문제다. 미국의 안보 체제와 자유 무역을 발판으로 고도성장과 번영을 이룰 수 있었던 한국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자원 무기화와 각자도생이 뉴노멀이 되는 약육강식의 시대에 대비해야 한다. 세상은 호르무즈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2026-04-11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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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이러다 다 죽는다
“이러다 다 죽는다.” 지구촌 전쟁 얘기가 아니다. 기후 재난에 대한 경고도 아니다. 부산의 소규모 건축사사무소들이 토해내는 절박한 탄식이다. 지역의 한 건축사는 “30년 가까이 건축사로 활동했지만 최근 2~3년이 가장 힘든 것 같다”고 말할 정도다. 그만큼 어렵다. 여기엔 주거 공간의 획일화가 자리 잡고 있다. 부산의 도시 풍경은 이제 거의 아파트로 수렴된다. 해운대·마린시티의 고층 단지부터 강서·명지를 비롯한 서부산권의 신도시 계획까지, 주거 개발의 중심축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아파트 건설에 맞춰져 있다. 지역의 소규모 건축가와 사무소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거의 없어 보인다. 설계의 다양성과 실험, 지역적 개성이 숨 쉴 공간이 점점 줄어드는 셈이다. 소규모 건축이 사라진 도시, 그 결과는 무엇일까? 이러다간 자칫 도시를 지탱해 온 건축 생태계의 한 축이 붕괴할 수도 있다. 온통 아파트로 뒤덮인 도시.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아파트 편중이 가져온 현주소
한국의 주거 형태는 빠르게 아파트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2024년 기준 전국 주택 중 아파트 비중은 약 65%에 이른다. 여기에 연립·다세대주택까지 포함하면 80%에 육박한다. 부산은 이보다 더 높은데 아파트 비중만 69.9%에 이른다. 신규 인허가 물량도 대부분 아파트다. 주거 구조의 편중은 갈수록 심화되는 양상이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꾸고 건설 수주를 좌우하는 것도 결국 대단지 주거사업이다. 미분양 증가와 자재비 상승에도 아파트 공급은 멈출 줄 모른다. 이대로라면 도시가 아파트로 빼곡히 채워지는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건축은 단순히 물량을 채우는 일이 아니라 도시의 결을 빚어내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 결을 가장 촘촘하게 형성하는 것은 다름 아닌 소규모 건축이다. 골목을 살리고, 상권을 키우며, 지역의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힘이 바로 거기에서 나온다. 동네 병원과 작은 도서관, 근린생활시설과 리모델링 사업이 그 축이다. 그러나 지금의 구조에서는 이러한 영역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대단지 설계는 대형 건축사사무소와 건설사 중심으로 돌아가고, 설계·시공·감리 전반이 그 틀 안에 고착됐다. 그 결과 지역의 소규모 건축사는 점점 주변으로 밀려난다. 남은 영역은 단독주택이나 소규모 공공건축, 리모델링뿐이지만, 이마저도 물량이 줄어 경쟁만 치열해지고 있다. 어렵게 대형 프로젝트를 따내더라도 상황은 녹록지 않다. 부산 지역 정비사업이 평균 12년이나 걸리는 현실에서 작은 사무소들이 이 기간 버텨내기란 쉽지 않다.
■획일화된 공간서 벗어나야
획일화된 주거 공간이 변해야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도시가 단조로워진다. 어디를 가도 비슷한 단지와 입면, 비슷한 배치다. 낮에는 비어 있고 밤에만 켜지는 창문들. 우리는 효율을 얻었지만 도시의 표정을 잃었다. 더 많이 더 빨리 짓는 데는 성공했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도 이제 고민해야 한다. 아파트는 공동주택인데, 정작 아파트 단지 속에서 공동이라는 개념은 찾을 수가 없다. 설령 있다고 해도 그들만의 리그, 그들만의 공동일 뿐이다. 학자도, 언론도, 시민사회도 이 문제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또 간과할 수 없는 문제는 도시의 지속 가능성과 직결된 건축 생태계의 위기다. 소규모 건축사가 설 자리를 잃어가는 것은 건축 생태계의 경직과 도시 다양성의 상실로 이어진다. 대단지 아파트 중심 구조는 지역 건축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다. 그동안 다가구주택과 상가주택, 소규모 프로젝트는 지역의 일자리, 디자인 경쟁과 다양성, 도시의 개성을 떠받쳐 온 기반이었다. 젊은 건축가들의 실험과 도전, 기술 축적 역시 이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기반마저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다.
특히 부산 상황은 더욱 우려스럽다. 부산은 재개발·재건축과 대단지 아파트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구조다. 주택 경기가 식으면 도시 전체가 흔들린다. 건축 생태계가 너무 단선적이기 때문이다. 소규모 건축이 살아 있어야 시장의 충격을 분산할 수 있다. 시장의 허리가 단단해야 함께 버틸 수 있다. 이게 안 되면 도시 경쟁력도 무너진다. “이러다 정말 다 죽는다.”
■대안은 있다
답은 멀리 있지 않다. 이미 다른 도시가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부산에서는 건축과 도시를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정책 방향을 모색하는 ‘특별기획 부산공간대포럼’이 지난달 30일부터 사흘간 열렸다. 포럼 둘째 날인 31일, 박인석 명지대 건축학과 명예교수는 일본의 신도시 마쿠하리 베이타운을 소개했다. 이곳이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히 건축의 형태에 있지 않다. 도시와 건축, 공공과 민간, 그리고 다양한 건축가의 협업이 하나의 질서 속에서 유기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마스터 아키텍트(MA)’ 방식 아래 도시계획과 건축 설계는 분리되지 않고, 처음부터 하나의 과정으로 통합됐다.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5층 이하 저층 건축물에 두 명 이상의 건축가가 공동으로 참여해 설계를 맡는 구조다. 이른바 도시·건축 통합계획, 즉 협동설계 방식이다. 일정한 목표를 공유한 뒤 공공기관과 사업자, 그리고 각 블록을 담당하는 민간 주체들이 역할을 나누고 협의와 조정을 거쳐 도시를 완성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대형 건설사와 소규모 건축가가 각자의 영역을 맡아 조화를 이루고 결과적으로 거리마다 서로 다른 표정을 만들었다. 핵심은 공존이다. 대형과 소형, 공공과 민간, 계획과 설계가 하나의 질서 안에서 긴장과 균형을 이루며 공존한다. 그래서 이 도시는 단조롭지 않다. 가로가 살아 있고, 블록이 살아 있으며, 건축 하나하나가 도시의 생명력을 품고 있다.
마쿠하리 베이타운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흔히 “한국은 땅이 좁아서 고층 아파트가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마쿠하리 베이타운은 5층 내외의 중층 주거만으로도 180~230%의 용적률을 구현한다. 고밀도 개발이 곧 초고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높이가 아니라 구조와 배치, 그리고 도시적 맥락이다. 가로와 블록, 건축이 유기적으로 이어질 때 도시는 비로소 밀도를 품은 채 살아 숨 쉰다.
■의지가 있으면 된다
일본 마쿠하리 베이타운 사례가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5층 이하 저층부 설계를 소규모 건축가에게 맡기는 구조는 단순한 역할 분담을 넘어 공존과 상생의 질서를 만들어낸다. 이는 단지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선택이다. 마쿠하리 베이타운의 설계 지침처럼, 지자체나 대형 건설사가 의지를 갖고 접근한다면 우리 역시 충분히 구현할 수 있는 모델이다. 특히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차원의 권고나 지자체의 조례 제정을 통해 소규모 건축을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방안도 가능하다. 결국 지금 필요한 것은 실행을 향한 결단이다.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우리나라는 재개발이나 신도시를 지을 때 도시계획, 엔지니어링, 건축 영역이 분리되곤 한다. 이제는 초기 단계부터 건축가가 참여하는 통합적 설계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근래 서울시는 도시계획과 건축이 결합해 토지이용계획을 만들었다. 당연히 새로운 디자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지구단위계획은 누가 해야 한다는 명확한 규정이 없다. 건축사가 하면 된다. 이제는 부산시도 이를 상시적으로 가져갈 때가 됐다. 이런 시스템을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처럼 따로 설계한 뒤 억지로 맞춰가는 방식으로는 획일성을 벗어날 수 없다. 마쿠하리 베이타운이 보여주듯 소규모 건축가의 참여를 제도화될 때 비로소 힘을 갖는다. 저층부 설계를 지역 건축가에게 맡기거나 복수 설계자 참여를 의무화하는 방식도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도시재생 구역에서는 소규모 프로젝트 공모를 상시화할 필요도 있다. 골목 단위의 설계 공모가 늘어날수록 건축 시장은 활력을 되찾게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공공이 먼저 이런 실험에 적극 나서야 한다. 부산시와 부산도시공사가 시범사업을 통해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야 할 이유다. 이 문제는 단순한 정책 선택이 아니라 지역 생존의 문제다. 부산도 할 수 있다. 아니, 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아파트를 쌓는 도시에서 만드는 도시로 바꿔나가야 한다. 도시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방향을 정하는 일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다.
2026-04-0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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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스마트기기 GPS, 미사일 부를 수도
전쟁과 첩보 관련 기술의 발전 속도가 눈부시다. 최근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전쟁에서도 알고리즘을 활용해 상대방 국가 주요 인사들의 동선을 파악하는 첨단 기술이 적극 활용되고 있다. 특히 미국과 이스라엘이 지난달 28일 이란 최고지도자인 알리 하메네이의 위치를 정확히 포착, 미사일 공습으로 사망케한 것도 정보 당국의 첨단 사이버 역량 덕분인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전이 이런 양상으로 진행되면서 군인 등 특정 직업군의 경우 적국에 동선 정보를 제공할 여지가 높은 스마트폰이나 스마트워치 등 스마트기기의 위치정보(GPS)와 관련 앱 사용이 지금보다 훨씬 제한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이어지고 있다.
■ 하메네이 암살한 최첨단 정보 수집 역량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이스라엘 대외 정보국 모사드가 하메네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과정은 치밀했다. 뉴욕타임스 보도 등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이란 수도 테헤란 교통 카메라를 대거 해킹하는 방법으로 하메네이 경호 인력과 운전사들이 출근하는 동선을 실시간으로 파악했다. 경호원들의 주차 위치와 자택 주소, 근무 시간, 호위 대상 등도 속속들이 파악했다. 특히 온갖 경로로 수집된 수십억 개의 정보를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첨단 알고리즘을 활용해 오인 정보를 걸러내는 등 데이터베이스의 정확성을 높였다. 이스라엘 등은 이런 방식으로 폭격 당일 하메네이가 집무실에 있을 시점과 동석할 인물까지 정확히 예측했다. 집무실 인근 거리에 있는 12개의 이동통신 기지국을 교란해 하메네이 경호팀이 공습 경고를 제때 받지 못하도록 만드는 기술도 사용했다.
전문가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이 공개하지 않았지만 GPS가 설치된 스마트워치와 스마트폰을 활용한 위치 파악 기술도 적극적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하메네이가 미사일에 폭사한 직후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 당국의 시신 수습 사진까지 확인했다는 점으로 미뤄 적국 인사의 스마트폰을 활용한 정보 수집 기술은 일반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 위험천만 GPS 데이터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전쟁에서 드러났듯이 요즘 전쟁은 첨단 기술을 기반으로 한 데이터 수집 첩보전을 기반으로 한다. 상대방의 정보를 더 많이 수집할수록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물론 공격 정확도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까이 접근하기 어려운 상대 국가의 중요 인물이나 경호원, 군인 등으로부터 가장 쉽게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지구촌 대부분 사람들이 휴대하고 있는 스마트기기에서 나오는 정보를 활용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지적한다.
2018년 1월 조깅, 자전거 타기, 트래킹을 즐기는 사람들이 이동 경로, 평균 속도, 심박수 측정, 달린 거리 계산 등을 위해 애용하는 트래킹 앱 때문에 미군 비밀기지들의 위치가 드러나는 일이 발생했다. 발단은 미국의 한 트레킹 앱 업체가 제공한 GPS 기반 서비스 때문이었다. 이 서비스를 이용하면 앱 사용자들은 다른 사용자들의 위치를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다. 당시 미국 매체들은 “조깅앱 스트라바의 ‘글로벌 히트 맵’은 전 세계 수억 명의 사용자들이 어떤 경로로 이동했는지 보여주는데 그 과정에서 드러난 위도와 경도가 3조 개에 달한다”면서 “이때 세계 곳곳의 미군기지와 그곳에 주둔하는 미군 장병들의 현재 위치까지도 파악하기 쉽게 나타나 논란이 됐다”고 보도했다. 실제 아프가니스탄에서 작전 중인 미군 부대들의 주둔지와 순찰 경로 등도 노출됐다. 앱 사용자가 이 앱을 사용하는 장병들의 위치와 이동 경로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사 사례는 2023년 7월 러시아 크라스노다르에서도 발생했다. 흑해함대 소속 잠수함장을 역임한 퇴역 해군 장교인 스타니슬라프 르지츠키가 자택 인근에서 운동을 하다가 우크라이나인에 의해 피살됐는데 이 과정에서도 GPS 데이터가 활용된 것으로 추정됐다. 2022년 7월 르지츠키가 지휘한 잠수함은 우크라이나 도시 빈니차 도심을 순항 미사일로 공격해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우크라이나는 이 공격과 관련해 르지츠키를 전범으로 지정한 상태였다. 러시아 매체들은 범인이 르지츠키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 스트라바를 활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 매체들은 또 르지츠키가 자신의 이름으로 된 피트니스 앱 계정에 조깅 기록을 업로드하고 늘 비슷한 코스를 달렸다고 밝혔다. 피트니스 앱이 표적 확인 도구로 활용되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특정 직군 스마트기기 통제 더 강화되나
스마트워치나 스마트폰에서 유출된 데이터가 정확한 타격 좌표를 제공하는 시대로 진입하면서 각 국가마다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당장 미국·이스라엘과 전쟁 중인 이란 혁명수비대는 개인 스마트폰과 GPS 내장 웨어러블 기기의 기지 내 반입을 전면 금지하는 등 강력한 제한 대책을 추진하고 있다. 최고지도자 폭사를 계기로 피트니스 앱 기록 관리의 중요성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미 국방부는 이미 2018년 8월 국방부 부장관 명의로 '작전 지역 내 위치 정보 기능 사용 금지' 지침을 하달했다. 군인들이 작전 지역에서 사용하는 스마트폰은 물론 각종 스마트워치와 피트니스 트래커 등 GPS 기능을 갖춘 모든 기기의 위치 표시 기능을 전면 금지하는 강력한 조치다. 이란과 미국뿐만 아니라 지구촌 대다수의 국가들도 군인들의 스마트워치와 스마트폰에서 나오는 데이터를 통제하기 위해 강력한 규제를 실시 중이다. 우리 군도 GPS 기능과 통화 녹음, 카메라 기능을 차단하도록 요구하는 등 보안 규정을 가동 중이다.
하지만 최근엔 AI 스크래핑 봇이 피트니스 앱의 공개 데이터를 대규모로 수집해 비정상 패턴을 자동 탐색하는 등의 기술이 갈수록 발전함에 따라 향후 군대 내 스마트워치나 스마트폰의 사용은 지금보다 한층 강력한 규제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기술의 발전 때문에 군대와 국가 지도자 경호팀 등 일부 직군 종사자들은 되레 첨단 통신 기기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직면한 셈이다.
2026-03-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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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와 글로벌 부산의 만남은 필연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BTS가 완전체로 돌아왔다. 드디어 21일 오후 8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방탄소년단(BTS) 더 컴백 라이브: 아리랑’의 막이 오른다. 공연명은 20일 공개한 정규 5집 앨범 ‘아리랑’에서 따왔다. BTS는 K팝을 글로벌 주류로 이끈 월드 스타다. 3년 9개월 만에 일곱 멤버가 완전체로 귀환해 공연을 선보이는 것은 현대 팝 음악의 역사적 장면이다. 전석 무료인 공연 객석은 2만 2000여 석이지만 광화문 일대에는 전 세계 BTS 팬인 ‘아미’(ARMY)를 비롯해 최대 26만 명이 운집할 것으로 예상된다. 넷플릭스는 이날 공연을 190개국에 단독 생중계한다. 넷플릭스가 특정 가수의 단독 콘서트를 단독 중계하는 것은 처음이다.
■ 광화문과 K컬처가 만드는 서사
BTS는 21일 공연 당일 경복궁 내부 근정문에서 출발해 흥례문을 거쳐 광화문을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이어 해태(해치)상이 자리한 월대를 지나 길 건너편 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무대로 향할 전망이다. 월대는 조선 시대 국가 중요 행사가 있을 때 왕과 백성이 소통했던 장소다. ‘근정문→흥례문→광화문→월대’로 이어지는 길은 ‘왕의 길’로도 불렸다. 1866년 만들어진 광화문 월대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 전차 선로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사라졌다가 2023년 광화문 현판과 함께 복원됐다. 스탠딩석과 지정석은 세종대왕 동상, 이순신 장군 동상 등이 있는 무대 남쪽 방향에 설치되며 시청역 인근까지 늘어선다.
이번에 주목할 부분은 ‘광화문’이라는 공연의 장소성이다. 600년 역사를 품은 경복궁과 현대적인 빌딩 숲이 공존하는 광화문이라는 상징적 공간에서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아리랑’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왕의 길’을 따라 무대에 오르는 퍼포먼스는 한국 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전통 건축의 미를 자연스럽게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드러낼 것이다. 600년 조선 왕조의 서사와 21세기 대중문화의 서사가 하나로 결합하며 더 묵직한 임팩트를 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공연은 문화 혼종성의 관점에서도 주목받는다. 서양 팝 음악에 뿌리를 둔 K팝과 조선 왕조를 상징하는 광화문, 경복궁이라는 전통 공간의 조합이 독특한 문화적 긴장과 새로운 예술적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질적인 문화 요소의 충돌과 융합은 고품격 콘텐츠를 창출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BTS는 과거에도 한복을 재해석한 무대 의상, 전통 부채춤을 현대 안무에 접목한 퍼포먼스 등을 통해 전통과 현대의 결합을 정체성으로 삼아왔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 열풍으로 북촌한옥마을, 낙산공원 등은 이미 외국 관광객들 사이에서 성지순례 코스로 자리잡았다. 애니메이션 한 편이 서울을 거대한 K컬처 체험 공간으로 바꿔 놓은 셈이다. 이번 공연을 통해 광화문이 K팝의 글로벌 랜드마크로 부상할 것이란 기대감도 나온다. 마치 영국 런던 북부의 ‘애비로드’처럼 말이다. 이곳은 비틀스라는 이름과 함께 전 세계 팬들에게 영원히 기억되는 장소다. 1969년 자신들의 마지막 앨범을 녹음한 비틀스는 스튜디오 바로 앞 애비로드의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진을 앨범 커버 이미지로 사용했다. 이 앨범의 재킷 사진은 수많은 영화와 문화 콘텐츠의 오마주 대상이 됐으며, 팝 역사의 중요한 상징물이다. 2010년 영국의 중요 문화재로도 지정된 애비로드는 문화적 의미까지 부각되면서 런던의 대표적인 랜드마크가 됐다. 이로 인해 애비로드는 전 세계 음악 팬이 순례하는 성지가 됐다.
■ 공연장 일대 ‘BTS노믹스’
BTS는 오는 2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컴백쇼를 연 뒤 4월부터 월드 투어에 돌입한다. 4월 9~12일 고양종합운동장 공연, 6월 12~13일 부산 공연을 포함해 일본 도쿄, 미국 로스앤젤레스 등 전 세계 34개 도시에서 82회에 걸쳐 투어를 진행한다. 콘서트 개최지마다 경제 활성화 효과를 낳는 이른바 ‘BTS노믹스’(BTS+이코노믹스)가 본격화할 전망이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은 2022년 BTS의 국내 콘서트 1회당 창출되는 경제적 파급 효과가 최대 1조 2207억 원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한 바 있다. 콘서트 티켓 판매액, 외래 관광객의 관광 소비 지출, 교통비, 숙박비 등을 종합해 경제적 효과를 산출했다.
이번 BTS 컴백은 미국 인기가수 테일러 스위프트의 ‘테일러노믹스’에 견줄만한 수준이란 평가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공연과 음반, 마케팅 등으로 수조 원의 경제효과를 불러일으킨다. BTS에 팬덤 아미가 있다면 스위프트에게는 팬덤 ‘스위프티’가 있다. 이들은 스위프트 공연이 열리는 곳마다 찾아가고 이를 위한 호텔 숙박과 굿즈(기획 상품) 구매 등을 아끼지 않는다. 아미는 스위프티와 충성도, 연령층, 소비 의향 등 여러 측면에서 유사하다. 하지만 다른 국가에서 열리는 콘서트에도 기꺼이 참석하려는 의지를 보인다는 점에서 아미의 열정과 헌신의 정도가 스위프티보다 더 높다는 평가도 나온다.
서울은 이미 ‘BTS노믹스’로 들썩이고 있다. 공연 당일 서울 도심 호텔은 객실이 동나고 백화점, 면세점은 외국인 손님맞이에 분주하다. 광화문 대형 전광판은 기업뿐 아니라 BTS 팬클럽인 ‘아미’(ARMY)까지 가세해 광고 특수를 누리고 있다. 다음 달부터 차례로 공연이 열리는 경기 고양, 부산까지 ‘BTS노믹스’ 온기가 이미 퍼지는 중이다.
■ 부산, BTS 성지 생기나
부산은 BTS에 상당한 지분(?)을 가진 도시다. 멤버 7명 중 지민과 정국 2명이 부산 출신이다. 지민은 금정구 회동초등학교와 윤산중학교 출신이다. 정국은 북구 백양초등학교와 백양중학교를 다녔다.
BTS는 2022년 10월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 기원 콘서트 ‘BTS 옛 투 컴 인 부산’(Yet To Come in BUSAN)을 개최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부산 연제구 아시아드 주경기장에서 펼쳐진 이 공연 현장에는 5만 명이 몰렸다.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 야외 주차장에 마련된 ‘라이브 플레이’로 1만 명이 공연을 관람했다. 이번 월드 투어의 한국 공연에 부산이 비수도권에선 유일하게 들어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6월 BTS 부산 콘서트를 앞두고 부산 서구 아미동을 BTS 관광 콘텐츠로 개발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팬덤 ‘아미’(ARMY)와 이름이 같은 아미동을 BTS의 ‘성지’로 만들자는 취지다. 김병근 서구의원은 ‘아미(ARMY)가 아미에 오다’ 캠페인 추진을 제안하고 나섰다. 서울이 BTS 복귀에 맞춰 도심 전시 공간과 미디어 파사드 등 다양한 이벤트를 열고 있듯이 아미동에 포토 존과 팝업스토어 등을 만들어 관광객들이 아미로 하나 되는 모습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멤버 지민은 올 1월 아미동 등 서구 13개 동에 라면 200박스를 기부하며 인연을 맺었다.
과거 멤버들이 방문했던 부산 여행지를 중심으로 한 ‘BTS 순례 코스’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부산진구 부산시민공원에는 멤버 뷔가 산책하며 사진을 촬영한 장소를 중심으로 인증샷 공간이 조성돼 있다. 또 RM이 방문한 부산시립미술관 내 이우환 공간도 주요 코스로 꼽힌다. 이 공간은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 이우환이 입지 선정부터 건축 기본 설계와 디자인까지 참여했다. 지민의 부모가 운영하는 부산 남구의 한 카페도 전 세계 아미들의 필수 방문지로 꼽힌다. 해당 카페에는 각국 팬들이 보낸 편지와 선물, 트로피 등이 전시돼 있다.
지난해 부산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 수가 364만 명을 넘었다. ‘글로벌 도시 부산’의 저력을 발휘한 셈이다. 부산시는 올해 500만 명 유치를 목표로 잡았고 이를 위해 체험형 관광 상품 개발에 본격 나서고 있다. 전 세계에 엄청한 영향력을 지닌 글로벌 아티스트 BTS를 테마로 한 성지 순례 코스를 만든다면 많은 아미들이 찾을 것이다. BTS와 글로벌 부산의 만남은 필연이다.
2026-03-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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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당 대표 잔혹사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국민의힘이 지난 9일 ‘절윤(윤석열 절연)’을 선언했다. 그간 ‘윤(석열) 어게인’ 차단 요구에 선을 그었던 장동혁 당 대표에겐 어떤 의미일까. 지도자가 자신이 고수한 노선을 꺾는다는 것, 혹은 꺾인다는 것은 권위와 리더십의 추락을 의미한다. 자신이 내건 어젠다를 내려놓는 순간 내리막이 시작된다는 것을 야당 대표가 모를 리 없다. 그가 풍찬노숙과 24시간 필리버스터 등 강경책과 반대파 징계·축출 같은 무리수를 동원하면서까지 ‘윤 어게인’의 손을 놓지 않았던 이유다.
당장 ‘절윤’ 선언을 행동으로 보이라는 반대파의 압박 수위는 높아지고 있다. 인적 쇄신과 징계 철회에 이어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혁신 선대위에 권한을 넘기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선거 패배 후 불명예 퇴진하느냐, 아니면 선거 전부터 식물 대표가 되는 수모를 받아들이느냐. 대한민국 보수의 적통을 계승한 정당은 또다시 리더십 혼란에 빠졌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정치적 복귀 요구에 반대한다.” 국힘 의원 106명 전원이 ‘윤 어게인’ 반대를 결의한 것은 뒤늦었지만 다행이라는 반응이 다수다. 하지만 결의문에 이름을 올린 장동혁 대표는 의구심을 말끔히 해소하는 실천 행보에 나서지 않으면서 ‘지방선거용 정치 쇼’라는 비아냥이 이어지고 있다.
‘절윤’ 결의의 후속 조치가 없으면 ‘꼼수’라는 비판이 잇따르자, 장동혁 대표는 이틀 만에 침묵 모드를 깨고 “선언을 존중한다”면서도 인적 쇄신 요구를 일축했다. 후보 등록을 거부하는 승부수를 띄워 노선 전환을 끌어낸 오세훈 서울시장은 ‘가시적 변화’가 필요하다며 12일 추가 공모마저 불참했다. 오세훈 시장까지 공개적으로 혁신 선대위를 요구했는데 이는 사실상 장동혁 대표의 2선 후퇴를 압박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 대표가 주요 선거를 앞두고 그림자 취급받는 걸 수용할 리가 없다. 강 대 강 충돌의 전운이 고조되는 와중에서 이정현 공천관리위원장이 돌연 사퇴하면서 당 상황은 안갯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여기에 총선 패배 책임 등을 이유로 ‘절한(한동훈 절연)도 해야 한다’는 반격이 나오면서 여진이 잦아들 기미가 안 보인다. “마지막 입장… 더 이상의 논란은 선거 승리에 도움이 안 된다”는 장동혁 대표의 바람과는 반대로 당내 혼란은 위기일발이다.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지난 9∼1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더불어민주당은 43%, 국힘은 17% 지지율을 기록했다. 제1야당이 12·3 계엄 때(26%) 밑으로 떨어진 것은 중도층 민심 이반 외에 설명할 길이 없다. 국회 다수당을 내세운 민주당의 입법 독주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은 야당을 견제 세력으로 여기지 않은 탓이다. 대통령 임기 중 치러지는 지방선거는 집권 여당이 불리하기 마련인데, 올 6·3 지선은 되레 야당 심판론으로 흘러갈 조짐마저 보인다. 장동혁 대표가 법원의 내란 판결에 ‘무죄 추정’ 운운하며 국민적 상식을 비껴가면서 자초한 곤경이다. 성난 민심 앞에서 제1야당 대표의 리더십의 붕괴는 초읽기에 몰려 있다.
대한민국 근대화를 이끈 보수 정당의 추락은 정체성과 리더십의 분열에서 비롯됐다. 당의 노선과 지도 체제의 흐름으로 보자면 ‘당 대표 잔혹사’의 악순환으로 설명된다.
국힘 대표는 임기를 채우기는커녕 1년 미만 단명이 반복되는 불안정이 일상인 정당이 됐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당명이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 국민의힘으로 바뀌는 동안 대표는 ‘소모’되고 마는 존재가 됐다. 총선 패배 책임을 지고 퇴진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징계위 회부나 대통령의 압박으로 당의 얼굴이 쫓겨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버젓이 되풀이된 것이다.
장동혁 대표의 전임인 김기현, 한동훈, 이준석 모두 대통령실의 ‘찍어 내기’와 징계 및 퇴진 연판장 압박 끝에 내쳐졌다. 황교안 전 대표는 탈당한 뒤 부정 선거론을 전파하는 극우의 최전선에 서 있다. 역시 탈당한 홍준표 전 대구시장도 유사 종교와 결탁한 당내 세력 탓에 자신이 대선 후보 경선에 패배했다고 믿고 국힘에 ‘해산되어야 할 정당’이라는 저주를 퍼붓고 있다. 역대 대표들의 정치 캐릭터를 지금 시각에서 들여다보면 공통분모를 찾기조차 어렵다. 그들을 보고 지지했던 유권자들에게 국힘의 본질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오늘날 국힘이 겪고 있는 정체성 분열은 일시적인 게 아니라 누적된 결과다.
자중지란의 뿌리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6년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20대 총선 공천권을 둘러싸고 ‘친박(근혜)’과 충돌했다. 대통령 권력은 ‘친박 감별’을 내세워 미래 권력의 부상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옥새 들고 나르샤’ 사건으로 비화한 공천 파동으로 집권당은 죽다 살았다. 한국 정당사에서 청와대와 당 대표 사이에 계파 갈등이 폭발한 것은 유례없던 일이다. 그러다 대통령 탄핵의 쓰나미가 덮쳤다. 보수 세력은 분당과 합당을 거치는 동안에도 정치적 셈법에 매몰돼 과감한 쇄신 대신 미봉책을 선택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소위 탄핵의 강을 넘지 못한 것이다. 정체성 분열과 내분의 씨앗이 이때 뿌려졌다.
내부의 혁신 동력을 잃다 보니 종교 등 외부 세력 지원이나 명망가 ‘업둥이’에 의존하는 병폐가 고착화된 게 화근이다. 그 결과 윤석열 정부의 실패는 국힘에 씻지 못할 생채기를 남겼다. 문제는 내란 정당이라는 가해자 프레임을 벗어나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해도 모자랄 판에 역주행을 거듭한 것이다. ‘절윤’을 주장하는 반대파를 징계로 축출하는 ‘데스노트 정치’ 행태에 중도는 물론 보수층마저 지지를 철회하기 시작했다.
“당 대표는 당원 개개인의 자유 의지의 총합… 자연인 인격체가 아니다.” 지난 1월 국힘 중앙윤리위원회가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게 내린 ‘탈당 권유’ 징계 결정문은 신박한 논리로 화제를 뿌렸다. 당 대표를 비판했으니 내쫓겠다는 식이다. 이른바 ‘당 대표 모독죄’다. 이는 민주 정당의 운영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정치 결사체는 구성원 사이에 공동의 이념과 노선 공유로 결속한다. 구심력을 발휘해 조직이 한 방향으로 전진하게끔 이끄는 것이 리더십이다. 대표직을 유지한다고 해서 정치적 권위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지금 국힘에 가장 필요한 것은 국민 눈높이에 맞춘 상식적인 리더십이다.
당의 지도 체제가 흔들리는 국힘이 무게 중심을 되찾는 것은 단지 제1야당의 과제에 그치지 않는다. 보수 정당이 회복 불가능하게 무너지면 한국 정치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헌법적 위기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입법부와 행정부, 사법부 나아가 지방 정부까지 하나의 정당에 쏠리는 상황은 상상하기조차 두렵다.
권력이 폭주하지 못하도록 우리 국민은 항상 견제 구도를 선택하는 집단 지성을 발휘했다. 역대 선거 결과를 살펴보면, 표심은 여야 모두에게 골고루 기회를 주되, 딴마음을 품거나 딴짓하면 매섭게 내쳐 왔다.
보수가 재건된다면 기회는 다시 온다. 결의문 한 장으로 얼렁뚱땅 넘기려는 야바위는 통할 리가 없다. 10년 전 혁신을 외면한 대가가 내란 가해자 프레임이라는 지울 수 없는 주홍 글씨로 되돌아왔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국힘 스스로 당 대표가 ‘당원 의지의 총합’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토록 중요한 당 대표가 왜 지금까지 헌신짝 취급을 당하면서 소모품이 되었는지 성찰해야 한다. 보수 정당의 정체성을 정립하면서 리더십을 착실히 세우는 것이 정도다. 당 대표 잔혹사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힘은 갈 길이 멀다.
2026-03-14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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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항로에 거북선 간다면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최근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이란 공습 여파로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사실상 봉쇄하면서 군사적 긴장과 함께 국제 해상 물류의 취약성이 또 한 번 시험대에 올랐다. 세계 원유 해상 물동량의 5분의 1가량이 통과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데다 한국이 들여오는 중동산 원유의 90% 이상이 이 해협을 지난다. 이곳이 막히자 국제 에너지 시장은 즉각 요동쳤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도 경고등이 켜졌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더 한층 관심이 높아진 게 바로 북극항로다.
■관심 더 높아진 북극항로
호르무즈 해협은 중동 산유국들의 원유와 가스를 아시아와 유럽으로 실어 나르는 핵심 통로다. 이곳의 불안은 곧 에너지 가격의 불안으로 직결된다. 특히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동아시아 국가들에는 치명적이다. 한국, 일본, 중국은 중동산 원유 비중이 높다. 단기간 봉쇄나 군사적 긴장만으로도 보험료 상승, 선박 우회, 운임 인상 등 비용 증가가 발생한다. 이 지점에서 북극항로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진다. 에너지 수급과 안보, 물류와 조선업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과제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부산에서 유럽까지 수에즈운하를 거치면 약 2만 km 이상이지만, 북극항로를 이용하면 1만 3000km 안팎으로 줄어든다. 항해 기간도 30일 이상에서 20일 내외로 단축된다. 운임, 연료비, 탄소배출이 동시에 줄어드는 구조다. 무엇보다 물류 경쟁력과 환경 규제가 함께 강화되는 시대에 전략적 가치가 분명하다. 그리고 지금, 중동 정세가 격화되면서 북극항로는 더 이상 먼 미래의 구상이 아니라 유사시를 대비한 현실적 선택지로 성격이 바뀌고 있다.
■북극항로 대체항로 맞나
그렇다면 북극항로가 당장 에너지와 물류 수급의 대체항로가 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전략적 의미는 분명히 커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대체항로의 부상으로 이어진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호르무즈 해협과 북극항로 사이에는 기능적 차이가 있다. 호르무즈 해협이 원유와 가스 등 에너지 자원의 핵심 수송로라면, 북극항로는 아직 컨테이너 화물과 러시아산 자원 운송 비중이 더 크다. 북극해에 전 세계 미발견 원유의 약 13%, 천연가스의 30%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를 곧바로 북극을 통해 대체 수급할 수 있다는 발상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북극항로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는 분명하다. 에너지의 ‘대체’가 아니라 ‘다변화’의 관점 때문이다. 세계 경제는 이제 효율성만을 기준으로 경로를 선택하지 않는다. 안정성과 복원력, 정치적 리스크 등이 판단 기준이 됐다. 물론 북극항로 역시 환경적·정치적 위험을 안고 있다. 항로 상당 구간이 러시아 영향권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국가와 기업은 안정적 수급을 위해 복수의 선택지를 확보해야 한다. 북극항로의 전략적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는 얼음… 쇄빙 역량이 핵심
북극항로는 북극해를 지나는 모든 항로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러시아 연안을 따라가는 북동항로(NSR), 캐나다 북쪽을 지나는 북서항로, 북극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중앙항로다. 이 가운데 현재 상업적으로 가장 현실화한 노선은 북동항로다. 러시아가 항로 관리권을 행사하며 쇄빙선 지원과 통항 허가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다만 운항 가능 기간은 통상 7월에서 10월까지 약 4개월에 불과하다. 기후 온난화로 해빙이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은 계절 항로에 가깝다. 관련 연구기관들은 2060년쯤이 돼야 일반 상선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북극항로가 상시적인 대안 항로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조건이 분명하다. 바로 쇄빙 역량이다. 두꺼운 얼음층을 깨며 항해해야 하는 만큼 쇄빙선이 핵심 인프라다. 지난해 10월 열린 세계해양포럼에서는 북극항로 산업 선점을 위한 쇄빙선 기술과 친환경 연료 시스템 구축이 핵심 의제로 다뤄졌다. 이에 앞서 같은 해 9월 부산항만공사가 주최한 북극항로 전문가 정책 간담회에서도 친환경 쇄빙선 건조의 필요성이 강조됐다. 쇄빙선은 단순한 선박이 아니다. 새로운 패권지역으로 부상하는 북극항로에서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전략 기술이다. 결국 쇄빙선 건조 능력 및 운용은 븍극항로의 주도권을 가를 결정적 요소가 될 수 있다.
■상상력 더한 ‘거북쇄빙선’
쇄빙선은 말 그대로 얼음을 깨며 항로를 여는 배다. 일반 선박보다 훨씬 두꺼운 강재를 사용하고, 얼음 위로 선수(船首)를 밀어 올린 뒤 선체의 무게로 얼음을 눌러 깨뜨리는 방식으로 전진한다. 보통 선박보다 1.5~2배 두꺼운 고강도 강철과 이중 선체를 갖추고 얼음에 갇히는 비상 상황에 대비해 360도 회전이 가능한 추진기와 혹한에서도 작동하는 난방·배관 보호 시스템을 장착한다. 얼음에 고립될 경우에는 밸러스트 탱크의 물을 좌우로 이동시켜 선체를 흔들며 빠져나온다. 그러나 쇄빙선의 본질은 따로 있다. 뒤따르는 상선과 에너지 운반선을 위해 항로를 개척하는 선도선이라는 점이다. 북극항로의 실질적 개방 여부 역시 결국 이러한 선박 체계의 구축에 달려 있다.
최근에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흥미로운 제안도 나왔다. 부산 울산 경남을 무대로 활동하는 양덕복 건축가가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을 모티브로 한 ‘거북쇄빙선’을 구상해 설계한 것이다. 그는 “북극항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쇄빙선이자 관광·테러 대응 기능을 겸한 거북쇄빙선을 상상하게 됐다”며 “특히 고출력 엔진 장착 등과 관련해 카이스트 측에서도 관심을 보였다”고 전했다. 거북쇄빙선은 얼음 위로 올라타기 쉽도록 선체 바닥을 둥글게 만들고, 등판은 열리는 구조로 설계됐다. 상징적 제안이지만 의미는 분명하다. 과거 바다의 판도를 바꾼 배가 기술과 창조성, 전략의 결합이었다면, 오늘의 쇄빙선 역시 그러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우리는 준비돼 있는가.
현재 우리나라에는 쇄빙연구선인 ‘아라온호’가 있다. 극지연구소가 운영하는 국내 유일의 쇄빙연구선으로 부산의 한진중공업이 설계해 2009년 11월 인도됐다. 두께 1m의 얼음을 깨며 3노트(시속 5.5km)로 운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아라온호는 극지 탐사와 연구, 해상 구조 지원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국내 조선업계는 러시아 야말 LNG 프로젝트에 투입된 쇄빙 LNG 운반선을 다수 건조했다. 한화오션은 20척이 넘는 쇄빙 LNG선을 인도했고, 삼성중공업도 양방향 쇄빙선, 쇄빙 LNG 운반선 건조 경험이 있다. 나아가 대전에 있는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KRISO)는 국내 유일의 ‘빙해 수조’를 운영하며 쇄빙 성능을 시험한다. 국내 기업이나 연구소의 기술적 기반은 이미 축적돼 있단 얘기다.
문제는 국가 전략 차원의 전용 쇄빙선 체계는 아직 갖춰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쇄빙선 건조 경험과 별개로 항해 데이터 축적, 정밀 해도 제작, 위성 정보 확보, 구조·구난 체계, 보험 시스템, 전문 인력 양성이 종합적으로 결합해야 비로소 상업 항로가 된다. 한두 차례의 시범 운항으로는 부족하다. 장기 계획과 일관된 투자가 필요하다. 북극항로는 조선 산업의 수주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 안보와 물류 주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해수부의 부산 이전이 갖는 의미가 커진다.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은 앞으로도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세계는 점점 더 분절되고 있고, 해상 교통로는 군사, 정치적 압박 수단으로 활용되는 현실이다. 이런 시대에 북극항로는 단순한 해상 통로가 아니다. 지정학적 변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전략 공간이 될 가능성을 지닌다. 다만 북극항로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환경적 제약에 더해 정치·외교적 부담도 적지 않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이어지는 상황에서는 현실적 제약이 더욱 크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순 없다.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북극항로가 기회의 땅이 될지, 아니면 다른 위험의 바다가 될지는 아직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해수부가 부산에 있으면서도 북극항로 준비가 선언에 그친다면 이전의 의미는 반감될 것이다. 반대로 쇄빙선 건조와 항로 개척이 본격화된다면 부산 이전은 해양국가 전략의 전환점으로 기록될 수 있다.
호르무즈 해협의 불안은 우리에게 분명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 북극의 문이 완전히 열리기 전에 그 문을 두드릴 배를 갖추는 일. 그것이 해양국가를 자임해 온 나라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대비일 것이다.
2026-03-07 [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