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대구의 연합, 반도체에 갈라지나[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기부 대 양여’라는 개념이 있다.
군사시설을 이전할 때 지자체가 대체 부지에 새로운 군사시설을 만들어 국가(국방부)에 기부하면 국가가 기존 군사시설 부지를 지자체에 양여하는 방식을 뜻한다. 군사시설의 이전 비용은 지자체가 양여받은 부지를 개발해 회수하게 된다.
2010년대 경남 창원 정중앙 노른자위 땅에 들어서 있던 39사단을 경남 함안으로 옮길 때, 전북 전주 북부에 있던 35사단을 전북 임실로 옮길 때 등 전국의 모든 군사시설 이전에는 예외 없이 기부 대 양여 방식이 적용돼 왔다. 심지어 창원 39사단 이전은 사단 부지 개발이 부동산 호황과 맞물려 성공적으로 끝나 민간사업자가 막대한 개발 이익을 남기면서 창원시와 민간사업자 사이에 초과 이익 환수를 둘러싼 갈등이 빚어질 정도였다.
■광주와 대구
최근 들어 이 기부 대 양여가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도심에 위치한 군공항의 이전이 신공항 개발을 둘러싸고 이슈화하면서다. 대표적인 지역이 광주와 대구다.
광주는 광주 도심 군공항을 전남 무주 등 타지역으로 이전해 광주·전남 통합 신공항을 만드는 사업을 시도하고 있다. 군공항 이전에는 약 10조 원 규모의 비용이 들 것으로 추산되고 있으나 기부 대 양여 방식으로 이 비용을 마련하기 힘들다는 문제가 발생했다. 광주의 지방 재정이 열악한 데다 군공항 부지 개발의 사업성도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대구도 대구 도심의 군공항을 경북 군위 등으로 옮겨 TK신공항을 조성하는 방안을 추진중이다. 대구에서도 군공항 이전에는 10조 원이 넘는 수준의 비용이 들 것으로 추산된다. 역시나 기부 대 양여 방식으로는 군공항 이전을 통한 신공항 건립 비용 마련이 어려워 답보를 거듭하고 있다.
■반도체 변수
이런 상황에서 지난달 이재명 정부가 갑자기 호남권 800조 원 규모 반도체 메가 프로젝트를 들고 나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전공정 공장 설립 추진 발표 직후 정부는 열흘도 되지 않아 광주 군공항 부지를 반도체 공장 부지로 확정했다. 당초 첨단3지구와 빛그린 산업단지 등 후보지 3~4곳이 거론됐으나 정부는 이미 평평한 대형 부지가 확보돼 있다는 이유 등을 들어 군공항 부지를 쾌속 낙점했다.
이로써 광주 군공항 이전 문제는 글로벌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부지 구매 및 개발자로 나설 수 있게 돼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부지 매각을 통한 군공항 이전 비용 회수라는 기부 대 양여의 가장 큰 난제가 단번에 해결될 수 있어서다. 기껏해야 민간 아파트 분양에 기대는 수준이었던 현실이 초대형 투자자 등장으로 180도 바뀐 것이다.
■기부 대 양여 공식
250만 평에 달하는 광주 군공항 부지는 이재명 정부가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위해 전력·용수·교통 등 핵심 인프라를 직접 지원하겠다고 밝혀 부지 개발 원가의 절감 폭이 매우 커질 전망이다. 그만큼 사업 진행은 수월해지고 군공항 이전에 따른 비용 회수 가능성은 높아지는 것이다. 향후 반도체 공장이 들어서면 양질의 일자리 창출과 함께 소재·부품·장비 협력업체의 집중까지 바라볼 수 있다. 공장 외곽에 조성될 주거·상업·업무 용지 등도 분양 성공률은 급격히 올라간다. 무안 등 공항 이전 예비 후보지와의 합의를 얼마나 빨리 끝낼 수 있는지 정도의 과제만 남았을 뿐 신공항 조성을 통한 군공항 기부와 기존 군공항 부지의 지자체 양여는 시간문제로 보인다.
■형평성 논란
광주 군공항이 반도체 공장 투자로 기부 대 양여의 물꼬가 트일 수 있게 된 것과는 달리 대구는 도심 군공항 부지 개발 여력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지난해 대구 정치권은 광주 정치권과 손을 잡고 군공항 이전 문제를 국가 예산 투입 재정사업으로 진행할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연합전선을 펼쳐 왔다. 하지만 광주 군공항 문제가 반도체 공장 투자로 풀릴 수 있게 됨으로써 두 도시 정치권이 이전처럼 보조를 맞추게 될지가 불투명해졌다. 게다가 대구에서만 군사시설 이전 문제를 재정사업으로 진행할 경우 그동안 숱하게 진행된 바 있는 전국 기부 대 양여 사례와의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도 높다. 이는 향후 군사시설 이전 때에도 국가 예산을 넣을 것인지 여부와도 관련이 있는 문제여서 쉽게 결론이 나기 어려운 상황이다.
■신공항 속도전
광주 군공항 이전으로 광주·전남 신공항 조성에 속도가 붙을 경우 그 여파는 신공항 추진이 답보상태에 놓인 대구뿐만이 아니라 부산에도 미칠 공산이 크다. 이미 20년 가까이 추진 과정을 반복하며 이제야 연내 공사를 위한 첫 삽을 뜨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는 가덕신공항의 건립도 입길에 오르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쪽은 반도체 대기업의 천문학적 투자로 인해 기부 대 양여 방식으로도 신공항 조성이 급물살을 타는 듯한 반면 다른 쪽은 국가의 공항 정책에 따라 국가 예산으로 신공항을 만들면서도 지지부진한 상태여서다.
불과 두어 달 전만 해도 예측조차 불가능했던 이 같은 속도전을 지켜보는 해당 지역민들의 다양한 시각은 앞으로 사업이 진행될수록 더욱 복잡해질 듯하다.
2026-08-01 [09:00]
-
차박·캠핑, 단속과 관광의 차이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차박으로 춘향제 추억을 만드세요.’ 선뜻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이 홍보 문구에 이끌려 지난 4월 30일~5월 6일 전북 남원시에서 열린 제96회 춘향제를 찾았다. 일제강점기였던 1931년 남원 시민들이 성춘향의 절개와 민족의 자긍심을 기리려 자발적으로 시작한 춘향제는 100주년을 앞둔 국내 최장수 지역 축제다. 전통 축제가 차박이라는 새로운 여행 방식을 품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숙박난이나 교통 혼잡 우려로 부산에서 차를 몰고 출발할 엄두를 내기 쉽지 않았지만, 남원시는 사전 신청자에게 공공시설 주차장을 무료 배정하고 화장실과 샤워장, 행사장 순환 셔틀버스까지 제공했다. 남원종합스포츠타운, 함파우 소리체험관, 요천생태공원 등 여섯 곳에 340대를 수용한 것이다. 차박을 축제 질서를 어지럽히는 골칫거리로만 보지 않고, 원거리 방문객의 체류를 유도하는 장치로 활용한 셈이다. 차박 수요를 방치하면 민원이 되지만, 정책적으로 관리하면 관광객 유치로 이어진다는 점을 보여 준 사례다.
경기도 파주 평화누리캠핑장 사례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경기관광공사는 이곳의 카라반·글램핑 시설과 DMZ(비무장지대) 관광 자원을 활용해 해외 관광객 유치에 나섰다. 제3땅굴, 도라전망대를 돌고 파주 전통시장 로컬 맛집 방문에 이어 저녁에 캠핑장으로 돌아오는 여행 상품을 여행사와 공동 개발했다. 외국인들이 캠핑장을 문자 그대로 ‘베이스캠프’ 삼아 지역의 자연, 역사, 음식, 야간 경관을 즐기게 만든 전략이다.
항공편으로 입국하는 외국인들이 캠핑 장비를 갖고 올 수 없으니 카라반·글램핑 숙박은 당연한 수순. 여기에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비무장지대 인근 숙박’이라는 반전 스토리텔링을 가미한 덕분에 2024년 1200명을 유치한 데 힘입어 올해는 2500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일본 편의점 로손의 주차장 유료 숙박 시도도 흥미롭다. 로손은 여유 주차 용지를 유료로 제공하는 ‘차중박’(車中泊·차박의 일본어 표현) 서비스를 17일부터 확대해 연내 약 70개 점포 규모로 운영할 계획이다. 지난해 여름 7곳에서 시범 도입했는데 연휴 기간 평균 가동률이 90%를 넘으면서 호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서비스는 단순히 주차면을 내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전용 홈페이지에서 예약 후 결제(1박 2500엔)하면 주차면 2개와 전기 사용, 화장실 이용, 쓰레기 배출 편의까지 제공된다.
무질서·알 박기·오물 투기 등 민폐가 될 수 있는 차박을 합법적이고 위생적인 숙박 거점으로 바꾼 결과 지방 관광 활성화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 언론은 숙박비 상승과 고령자 차량 여행 증가로 편의점 차박 이용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
다양한 캠핑과 차박 유형이 등장하고,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도 성과를 내고 있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무료 공영주차장과 공원, 노지가 ‘차박 명당’ ‘캠핑 성지’로 좌표가 찍히고 나면 몸살을 앓기 쉽기 때문이다. 부산 강서구 천성동 천성항 일대와 기장군 해안은 고질적이다. ‘장박 텐트’나 무개념 차박족 탓에 미관을 해치고 주민 생업에까지 불편을 주면서 철거 행정대집행이 반복되고 있다.
민폐 차박, 진상 캠핑은 근절돼야 한다. 하지만 단속만이 능사가 아니다. 한때 무료 노지 캠핑객들이 전국에서 몰려 부작용이 커지자, 지자체가 유료 캠핑장으로 정비한 뒤 관광객 유치에 성공한 충북 충주시 목계솔밭캠핑장이 좋은 사례다. ‘남한강 차박의 성지’를 내걸고 168곳의 야영 사이트를 갖춘 정식 캠핑장으로 2023년 개장한 뒤 월 평균 7000명 이상이 방문하는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것이다.
“캠핑 수요는 이미 글램핑, 카라반, 돔하우스, 차박, 체험형 상품으로 옮겨 가고 있는데 관련 제도는 여전히 ‘천막’ 기준에 머물러 있다.” 지난 3일 김용태 의원실 등 주최로 국회에서 열린 ‘K-캠핑 관광 활성화를 위한 세미나’에서는 관광 자원으로 키우기 위한 제도 정비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천막 이외 다양해진 야영 시설의 법적 지위, 건축면적 기준, 미등록 시설 정비, 외국인 수용 태세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부산도 이 문제의식에서 비껴갈 수 없다. 올해 1~5월 부산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193만 6572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약 40% 늘었다. 전국 평균(21%)의 두 배에 가까운 성장세로 그야말로 ‘글로벌 핫플’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대형 공연이나 국제행사가 열릴 때마다 숙소 구하기 전쟁이 벌어지는 것도 낯선 일이 아니다. 지난 6월 BTS 부산 공연 때 터무니없는 숙박 요금이 기승을 부린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숙박 시설의 공급도 늘어나야 하겠지만 성수기와 축제, 공연 기간의 숙박 수요를 분산시키는 보완 장치도 필요하다. 캠핑과 차박이 대안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는데, 야외라는 특성상 부산만의 특색이 있는 관광 콘셉트를 구현할 수 있다면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체류형 도시 관광, 지역 상권의 활성화 고민은 부산만의 것이 아니다. 서울시가 8월 한 달간 여의도·뚝섬 한강공원에서 운영하는 임시 야영장 ‘한강 밤핑’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서울시는 사전 예약 방식으로 텐트 200동 규모의 임시 야영장을 조성하고, 시범사업 기간 장소 이용료를 무료로 했다. 또 야간 디제잉·영화 상영 같은 행사와 배달 할인 혜택을 묶고 한강버스·자전거·수영장까지 연계해서 ‘24시간 체류하는 한강’ 모델을 시도한다. 강변 캠핑을 방치하거나 단속하는 대신, 도심 관광 자원으로 관리하면서 인근 21개 전통시장·골목상권 활성화까지 노린다는 대목이 부산에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부산은 강과 산, 바다를 모두 가진 도시다. 낙동강 하구의 생태 자원, 금정산과 기장 산지, 가덕도와 기장 해안, 영도와 북항의 항만 야경은 다른 지역이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관광 자산이다. 이 자원을 무질서한 노지 차박·캠핑에 내맡겨서는 안 된다. 아웃도어 여행 수요는 이미 우리 곁에 실재하는 흐름이다. 방치하면 민원을 낳고, 배척하면 갈등을 부르지만 활용하면 관광 수요가 된다. 이용 규칙과 적정 이용료를 마련하고, 안전과 환경 기준을 세우고, 지역 상권과 연결하면 체류형 관광이 될 수 있다. 캠핑을 불청객 취급할 것인지, 해양도시 부산의 새로운 관광 유입 자원으로 설계할 것인지가 단속과 관광의 차이다.
2026-07-25 [09:00]
-
2030, 왜 술과 헤어질 결심?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대학가나 직장 내 회식 자리에서 술을 강권하는 풍경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커지며 음주량이 줄어들고,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시대를 거치며 ‘부어라 마셔라’ 하던 음주 문화가 많이 사라진 여파다. 2030 세대에서는 ‘갓생’(부지런하고 계획적으로 생산적인 일상을 사는 것)의 일환으로 술 안 마시는 문화가 자리를 잡았다.
■ ‘주당의 나라’는 이젠 옛말
2030 세대는 이전 세대와 달리 술을 즐기지 않는다. 이는 통계로도 드러난다. 질병관리청의 국민건강통계에 따르면 2024년 20대(만 19세 포함)의 하루 평균 주류 섭취량은 64.8g으로, 1년 전 95.5g에서 30% 이상 급감했다. 이는 60대의 하루 평균 섭취량인 66.8g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또 질병관리청 국민건강영양조사에 응한 19∼29세 중 아예 술을 마시지 않거나, 마시더라도 월 1회 이하라는 응답 비율은 2024년 기준 56.0%를 차지했다. 조사가 시작된 2005년 37.9% 이후 최고치다. NH농협은행 트렌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20대의 주점 소비 금액은 전년 대비 20.9% 급감했다. 30대 역시 15.5% 감소했다.
2030 세대의 주류 기피 문화로 이제 ‘주당의 나라’도 옛말이 됐다. 국세청 국세통계포털에 따르면 국내 주류 출고량은 2015년 407만 3615KL로 정점을 찍은 뒤 2025년 298만 7726KL로 10년새 26.7%나 급감했다. 2020년대 들어 전체 주류 출고량은 2020년 321만 4807KL, 2021년 309만 9828KL, 2022년 326만 8623KL, 2023년 323만 7036KL, 2024년 315만 1371KL, 2025년 298만7726KL을 기록했는데, 2022년 이후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다.
■ 젊은 층, 술 왜 안 마실까?
젊은 층의 술 소비 감소 원인으로는 음주를 절제하는 ‘소버 큐리어스’(Sober Curious) 현상이 꼽힌다. 소버 큐리어스는 술에 ‘취하지 않은’이라는 의미의 소버(Sober)와 ‘호기심이 많은’을 뜻하는 큐리어스(Curious)가 결합한 용어다. ‘마시는 것이 당연한’ 술 중심 문화를 따르기보다 자신의 신체·정신 건강을 위해 알코올 섭취를 멀리하고, 맑은 정신을 지향하는 문화적 흐름이다. 특히 20대는 술자리의 분위기보다 다음 날의 컨디션을, 취하는 즐거움보다 자기관리와 건강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시간 대비 만족도와 효율을 중시하는 ‘시성비’ 가치관은 술자리에 쓰는 시간과 다음 날 숙취까지도 하나의 비용으로 인식한다. 술값을 ‘매몰 비용’으로 생각하다 보니 회수 불가능한 경제적 비용이 아닌 건강이나 취미 활동 등에 투자하는 것이 낫다고 보는 것이다.
2030 세대가 술 없이 여가를 보낼 수 있는 선택지가 늘어난 점도 한 요인이다. 러닝 크루, 독서, OTT, 소모임 등 취미 활동이 생겨나면서 회식이나 술자리를 통해 친목을 도모하던 문화는 점점 밀려나고 있다.
‘소버 큐리어스’에 맞춘 새로운 공간도 등장하는 추세다. 최근 젊은 층이 많이 찾는 서울 성수, 홍대 등 지역을 중심으로 ‘논알코올 편집숍’이나 ‘논알콜 바’ 문화가 확산한 것이 대표적이다. ‘논알코올 편집숍’은 전 세계 수십 종의 논알코올 맥주와 와인, 칵테일을 판매한다. ‘논알코올 바’에서는 먼데이 진 토닉, 정산소종 밀크셰이크 등 다양한 논알코올 칵테일을 즐길 수 있다. 또 젊은 층은 술을 마시더라도 맛과 향을 음미할 수 있는 저도수 주류를 선호하거나, 비교적 건강에 해롭지 않은 제로슈거·저칼로리 주류를 찾는다.
소주, 맥주 위주의 일률적 음주 문화에서 벗어나 다양한 음료를 경험하는 소버 큐리어스 흐름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젊은 세대가 술을 기분 좋을 정도로만 마시는 걸 근사한 라이프스타일로 생각하는 추세가 당분간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비주류’에 맞서는 주류업계
술 안 마시는 신인류의 등장에 주류 업계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한창이다. 제조사들은 주류 시장 포트폴리오를 재편하며 제품 전략을 새로 짜고 있다. 과거에는 알코올 도수가 높고 브랜드 충성도가 높은 인기 제품이 주력이었다. 주류업체는 무알코올, 저도주 등 제품을 선보이며 ‘비주류’(非酒類) 흐름에 대응하고 있다. ‘독주’로 승부했던 과거와 달리 다양한 맛과 부드러움, 저당 등을 강조하는 추세다.
2000년대 초만 해도 25도를 넘나들었던 소주의 알코올 도수는 16도 이하가 ‘뉴노멀’이 됐다. 롯데칠성음료는 지난해 7월 ‘처음처럼’의 알코올 도수를 16.5도에서 16도로 낮춘 데 이어, 올들어 제로 슈거 소주 ‘새로’도 16도에서 15.7도로 조정했다. 하이트진로 역시 2024년 ‘참이슬 후레쉬’를 16도까지 낮췄다.
맥주 시장도 변신 중이다. 무알코올과 비알코올 제품이 빠르게 늘고 있다. 하이트진로는 ‘하이트제로 0.00’과 ‘하이트 논알콜릭 0.7%’를 판매 중이다. 롯데칠성음료는 ‘클라우드 논알콜릭’을 내놨다. 이 회사는 최근 클라우드 광고에서 ‘이 좋은 맥주에 소주를 왜 섞어’라는 문구를 내세워 ‘소맥과의 작별’을 선언하기도 했다. 오비맥주는 ‘카스 0.0’ ‘호가든 제로’ ‘버드와이저 제로’ 등 무알코올 맥주 6종을 보유하고 있다. 건강을 중시하는 웰니스 문화로 인해 국내 무알콜·논알콜 맥주 시장 규모는 2025년 704억 원에서 2027년 946억 원으로 커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삶을 고단함을 잠시 잊기 위해 술을 선택하는 문화는 서서히 위력을 잃어갈 가능성이 높다. 우리 사회에서도 술 대신 식사와 대화, 취미를 중심으로 관계를 형성하고 무알코올 음료를 제공하거나 음주 여부를 개인의 선택으로 존중하는 문화가 확산할 것으로 보인다. ‘술이 술이 아닌 시대’가 이제 대세가 되는 걸까. 기성세대가 격세지감을 느낄 만하다.
2026-07-18 [09:00]
-
벌써 성격 나왔다…부울경 단체장 3인 3색 행보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1일 취임한 부산·울산·경남 광역단체장 3명이 각각의 색깔로 시·도정을 이끌면서 연일 화제를 낳고 있다. 요란한 취임식 대신 민생부터 챙긴 전재수 부산시장, 연일 SNS로 시청 내부 회의를 시민에게 공개하는 김상욱 울산시장, 직원들과 손 잡고 경남 대도약을 선언한 박완수 경남도지사.
관심과 기대가 큰 때문인지 다양한 평가가 나온다. ‘신선한 변화들이 많다’는 긍정적 평가가 주를 이룬다. 특히 부산과 울산 단체장 2명의 행보를 유심히 본다는 시민이 많다. 국회의원 시절에는 미처 몰랐던 매력과 능력이 단체장이 되면서 폭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열흘 남짓 짧은 기간에 쏟아진 변화들을 접한 시민들은 부울경 단체장들의 3인 3색 스타일을 지켜보며 리더십 변화를 체감한다는 반응을 내놓고 있다. 극한 여야 대립에 허니문 기간도 없어졌는지 ‘보여주기 행정’ 등 비난도 없진 않다. 기대와 관심 속에 4년 여정을 시작한 부울경 단체장 3인의 초반 레이스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취임식, 간소화하거나 현장으로
부울경 단체장 3인의 취임식 승자는 전 시장이 아닐까 한다. ‘떠들썩한 취임식 자제’. 민선 9기 단체장 취임식의 특징이다. 전 시장은 아예 취임식을 생략해 그중 도드라졌다. 그는 지난 1일 간단한 취임 절차만 밟고는 곧바로 부산 ‘민생 100일 비상조치 대책 회의’를 주재했다. 하지 않고도 얻을 건 다 얻었다. ‘예산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메시지는 확실히 던지고 민생 행정 의지도 알렸다. 전날 시장 인수위원회가 부산시 순세계잉여금이 80억 원뿐이라고 한 발표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순세계잉여금은 살림하고 남은 돈이다. 덤으로 언론 주목도 한껏 받았다.
울산시장 취임식도 간소하게 치러졌다. 취임식을 마친 김 시장은 직원들과 오찬을 마친 후 덕하 공영차고지에서 126번 시내버스를 타고 시민 일상 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취임사 핵심인 ‘시민 주권 시정’에 맞춘 행보다. 126번 버스는 2024년 시내버스 노선 개편 때 폐지됐는데 김 시장이 취임 첫날 즉시 복원해 다시 달리게 됐다.
재선 단체장이 된 박 지사는 각계 인사 7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가진 취임식에서 도민과 함께 경남 대도약을 이루겠다고 선포했다.
소통, 소통, 또 소통
민선 9기 들어 부울경 시·도민은 시청이나 도청에서 벌어지는 일을 휴대폰으로 확인할 기회가 부쩍 많아졌다. 1980년생으로 40대인 김 시장의 SNS 활용법은 전국적으로도 화제다. 김 시장은 시장직 인수위 출범 후부터 모든 회의를 유튜브 ‘김상욱TV’로 실시간 중계했고, 취임하고는 업무 시작 전에 ‘신문 읽어주는 시장’ 코너를 운영하며 시민과 실시간 소통하고 있다. 실국장 회의도 울산시청 TV 등을 통해 공개하고 있다. 시정 운영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해 시민들의 이해와 관심을 높이고 자연스럽게 공론화를 이끌 수 있다는 긍정적인 반응이 적지 않다. 이 대통령도 “요즘 김 당선자의 공개회의 볼만합니다”고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전 시장도 부산시 유튜브 채널 ‘부산튜브’와 개인 계정을 모두 활용한다. 전 시장은 취임 첫날 ‘민생 100일 비상조치 대책회의’부터 부산튜브로 생중계했다. 이 자리에서 “모든 회의 공개” 원칙을 밝혔는데, 지난 9일 첫 확대간부회의, 뒤이은 실·국 업무보고도 부산시 홈페이지와 청내방송으로 공개하고 있다.
척 하면 척 vs 아직 낯선 그대
4년은 짧지 않다. 20대부터 공직을 경험한 ‘행정 달인’ 박 지사는 첫 임기 때 경남도 공무원을 충분히 파악했을 것으로 보인다. 지사 보고에 들어갈 때마다 긴장해야 한다는 직원들도 박 지사 스타일에 익숙해졌다. 박 지사 재선 취임식 때 흥미로운 일도 있었다. 경남도청공무원노동조합이 박 지사에게 ‘동주공제’(同舟共濟)라고 적힌 서예작품을 선물한 것이다. ‘같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넌다’는 의미. 도정 운영 과정에서 직원의 목소리가 정책으로 이어지는 참여형 노사협력 체계를 함께 만들어가자는 뜻을 담았다는 게 노조의 설명이다.
울산시청 직원 대부분에게 김 시장은 아직 낯설다. “저한테는 협박으로 들립니다.” 첫인상부터 강했다. 인수위 시절 한 부서장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들은 김 시장 반응이 SNS를 통해 퍼져나가면서 시청 공무원들 사이에 긴장과 부담이 감돌았다. 영상에는 해당 공무원을 향한 비난 댓글도 잇따랐다. 김 시장은 ‘김상욱TV’ 등을 통해 공사 구분을 분명히 하고 싶다는 시그널도 수시로 내비친다. 업무 시간 후 이동을 위해 개인 차량을 구매하고, 개인 유튜브 채널도 혼자 진행한다.
전 시장을 그냥 ‘재수’로 칭하는 사람이 많다. 예의 없는 게 아니다. 부산에선 성 빼고 이름만 부르면 친근감의 표현이다. 특히 정치인에겐 큰 장점이다. 부산 북구에선 국민의힘 사람들도 전 시장과 잘 지낸다고 얘기할 정도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성품 덕이다. 얼마 전 출근하던 부산시 공무원들이 낯선 상황을 마주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전 시장이 공무원들을 맞이한 것이다. 하루는 저층부 엘리베이터, 다음 날은 고층부 엘리베이터 앞에서였다. 하지만 전 시장과 시 공무원들은 아직 서로 ‘탐색 중’이다. 이런 상황은 첫 직원 인사에서도 슬쩍 확인된다. 이번 시 고위직 인사 때 전 시장은 전임 시장 측근 기용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냉정하게 보면 전 시장 측이 아직 시청 내 피아 구분이 되지 않는다고도 보인다.
‘원점 재검토’ ‘정중동’ ‘한걸음 더’
부울경 단체장 3인의 가장 두드러진 차별점은 업무 스타일이다. 김 시장 행보 하나하나에 연일 울산이 들썩이고 있다. 시내버스 개편, 트램 재검토, 시 금고 문제…. 저 일이 뒤집어질 일인가 의구심도 들지만, 어찌보면 울산을 진짜 바꾸고 싶은 모양이다. 트램 문제는 단박에 전문가와 주민 간 의견이 엇갈리는 핫 이슈가 됐다. 2029년 개통 목표로 차량 계약까지 진행된 상황인데 ‘재검토 카드’를 내밀었으니 그럴 수밖에. ‘교통대란, 사업비 증가, 운영 적자 등 시민 불편이 뻔한데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게 김 시장 입장이다. 향후 경과가 주목된다.
3선 국회의원을 지낸 전 시장의 첫출발은 노련해 보인다. 정부의 3대 메가 프로젝트에 부산이 소외됐다는 비판은 아픈 지점일 수 있다. 하지만 전 시장은 “와 우리는 안 주노 해버리면 답이 없다. 부산은 이미 해양중심도시로 방향이 정해졌고, 여러 가지를 받았다’’고 유연하게 넘긴다. 그럴 땐 특유의 진지함이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북항돔구장, 라스칼라 공연, 퐁피두 등 선거 때 내세운 공약이나 전임 시장 사업들에 대해서는 한걸음 물러나기도 한다. 전 시장은 “전임 시장이 했기 때문에 무조건 백지화시키는 일은 없다”고 수차례 얘기했다.
3대 메가 프로젝트 영남권 투자 규모 312조 가운데 알짜는 경남이 챙겼다는 평가가 나온다. 박 지사도 “정부의 이번 투자 계획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는 옳지 않다”고 평가한다. 이번 프로젝트 참여 기업들이 이미 경남과 관련이 있는 만큼 실제 투자 실행률은 경남이 가장 높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부울경 통합 관련해서도 박 지사가 키를 쥐고 있다. 그는 마창진 통합을 주도한 인물로 통합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평소 부울경이 완전히 하나의 지자체가 되는 행정통합이 필요하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다. 반면, 전 시장과 김 시장은 기존 지자체를 두고 별도 기구인 특별연합을 이루는 메가시티를 주장하고 있다.
2026-07-11 [09:00]
-
증가하는 무빈소 장례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무빈소 장례가 늘고 있다. 무빈소 장례는 말 그대로 조문객을 맞이하는 빈소를 마련하지 않고 치르는 장례를 뜻한다. 입관과 발인, 화장 등 필수 절차는 그대로 진행하지만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리지 않다 보니 외부 조문을 받지 않는다. 무빈소 장례가 증가하면서 장례식장 등 장의업계는 한숨을 내쉬고 있다. 하지만 무빈소 장례 열풍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평가다. 전통적인 장례 방식인 3일장 문화 자체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전망도 이어진다.
■ 무빈소 장례 늘어난 이유는
장례업계 등은 최근 무빈소 장례 비중이 20%를 상회 5곳 중 1곳이 빈소 없이 장례를 치른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무빈소 장례가 증가하는 가장 큰 이유로는 경제적 문제, 실용주의 문화 확산 등이 꼽힌다. 상조업계에 따르면 3일장을 치를 경우 조문객 150명을 기준으로 한 장례비용은 1000만~2000만 원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조문객을 맞이하지 않을 경우 빈소 대여비와 각종 식사와 음료, 인건비, 주류 비용 등을 줄일 수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등을 거치면서 개인주의 문화가 확산, 장례식 조문객들이 줄어든 것도 큰 이유로 꼽힌다. 예전에는 부의금으로 장례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으나 요즘엔 유족 부담 비용이 크게 늘어났다.
무빈소 장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근엔 2일장 등 장례 기간을 줄이는 경우도 늘고 있다. 가족들만 모여 고인을 추모하는 가족장도 증가하고 있다. 굳이 전통 방식을 고수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각자의 사정에 맞춰 장례를 치르는 실용주의와 간소화 선호 추세가 결합하면서 무빈소 장례 증가로 이어진 것으로 풀이된다. 여기다가 가족과 떨어져 살거나 가족, 지인들과 교류를 하지 않는 1인 가구들이 늘면서 장례문화까지 급속히 바꿨다는 분석이다.
■ 무빈소 장례 더 증가할 듯
예전엔 불가피한 사정이 없는 한 고인의 빈소를 차리고 조문객들을 맞는 방식으로 고인과의 이별을 애도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심지어 무빈소 장례는 큰 불효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인식이 완전히 바뀌고 있다.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최근 전국 만 19~69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무빈소 장례 관련 소비자 태도’를 조사한 결과 10명 중 7명이 무빈소 장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인 장례를 무빈소 방식으로 치를 의향이 있다는 응답이 71.8%에 달한 것이다. 연령별 무빈소 장례 의향은 20대 57%, 40대 76%, 50대 80%, 60대 79.5%로 집계됐다. 장례를 직접 준비하거나 경험한 연령층일수록 훨씬 무빈소 장례에 대해 긍정적인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반면 전통적인 장례 방식이 더 바람직하다는 응답은 1.7%에 그쳤다. 특히 무빈소 장례가 더 늘어날 것이라는 응답은 80.3%에 달해 사회적 공감대가 예상보다 훨씬 큰 것으로 풀이됐다.
■ 무빈소 장례 서비스도 등장
무빈소 장례 선호도가 증가하면서 장례식장 등도 발 빠른 대응에 나섰다. 충남 천안의료원 추모관(장례식장)은 유족의 경제 부담을 줄이면서도 고인을 제대로 추모할 수 있도록 무빈소 장례 서비스 도입에 나섰다. 이런 추세는 현재 전국적으로 급격히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대다수 업체들이 빈소 중심으로 장례식장을 운영했지만 이제는 무빈소, 가족장 등 맞춤형 장례 서비스 도입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인터넷 등에서는 관련 장례업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상조업체는 고민이 깊다. 상조는 가입자들이 부모 등의 임종에 대비해 매월 납입금을 내며 미래의 장례에 대비하는 상품들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무빈소 장례가 늘어나면 상조업체들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무빈소 패키지를 내놓고 있으나 무빈소 장례를 염두에 두고 상조에 가입하는 경우는 적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상조업체들은 장례 간소화 분위기 확산에 대비해 기존의 단순 장례 대행에서 탈피, 가입자가 납입한 선수금을 결혼식과 여행, 가전제품 구입 등에도 전환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돌파구를 찾고 있다. 무빈소 장례 증가가 전통적인 장례산업의 모습까지 급격하게 변화시켜 가고 있는 셈이다.
2026-07-04 [09:00]
-
투표용지만 있으면 참정권 보장되나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이번 지방선거에서 민심은 절묘한 견제구를 날렸다. 오만에 빠진 집권세력과 '윤 어게인' 환상에 빠진 야권 모두에 경고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이 같은 선거 결과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욱 국민적 관심을 끈 것은 역시나 선관위의 무능 혹은 부패에 기인한 것으로 보이는 참정권 침해 논란이다. 투표용지 부족으로 빚어진 참정권 침해 논란은 유권자들의 다양한 참정권 침해 우려로 확산하는 중이다.
이번 지방선거는 그렇게 끝이 났으나 우리에겐 아직도 많은 선거가 남아 있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를 도입하고 그것을 신줏단지처럼 신봉하고 사는 게 우리 사회인 이상 선거를 피할 도리는 없다. 하지만 선거라는 것은 투표장에 나가 투표용지를 받아 기표만 하고 끝내는 간단한 일이 결코 아니다. 유권자가 하는 그 간단한 기표행위의 결과로 나의, 가족의, 지역사회의, 국가의 운명까지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의 기표행위는 우리가 가진 참정권 즉,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정말 보장해 주는 것인가.
■기표의 곤란함
선거철만 되면 온갖 매체가 일제히 유권자들에게 제대로 된 선택을 강요하는 일이 반복된다. 유권자들은 선거 공보에 드러난 얄팍한 정보와 각종 구호, 이미지 같은 것들 외에는 후보에 대해 깊이 알 수 없음에도 막무가내로 올바른 선택을 강요당한다. 이런 일에 신물이 났는지 영국의 세계적 석학 리처드 도킨스는 유권자들의 투표 행위에 대해 이런 표현을 한다. “차라리 아인슈타인이 대수 계산을 제대로 했는지 전 국민 투표를 실시하거나, 비행기 조종사가 어느 활주로에 착륙해야 할지 승객들이 투표하게 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그렇게 어려운 기표행위를 유권자들은 척척 해내고 선거 결과가 나오면 현명한 선택이 이뤄졌다며 선출권력을 무소불위인 것처럼 휘두르는 것이 우리의 민주주의다.
■후보의 적절성
유권자의 기표행위가 있으려면 당연히 선거에 나오는 후보가 있어야 한다. 그게 선거라는 제도의 본질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권자는 후보가 선정되는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된다. 공당의 공천이 대세를 이루지만 그 과정조차 당원이 아닌 이상 소외되기는 마찬가지다. 설령 당원이라 하더라도 본인이 원하는 후보가 공천이 된다는 보장도 없다.
유권자는 선거에서 자신이 찍을만한 후보가 없다고 판단할 경우엔 정말 선택지가 없는 것일까. 후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선거 참여를 포기하는 건 주권을 포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그렇다고 어쩔 수 없이 참여한 선거에서 가장 덜 부적합해 보이거나 차악이라고 생각하는 후보만 선택해야 하는가. 그렇게 어쩔 수 없이 객관식 문항 선택하듯 선택한 결과가 스스로 최상위 권력이라 일컫는 선출 권력이 되는 것이 진정한 참정권 행사라 할 수 있는가.
■거부권의 필요
최근 관련 학계에서는 유권자가 투표를 포기하거나 차악 혹은 덜 부적합 후보에 기표하는 방법 밖에 택할 수 없는 것은 선택 강요에 의한 참정권 침해에 해당한다고 짚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유권자도 후보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 진정한 참정권이 실현된다는 주장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외대 법학연구소의 문재완 교수가 이 같은 ‘후보자 거부권’을 내세우는 대표주자다.
후보자 거부권은 유권자가 적극적으로 밝히는 정치적 의사표현에 해당한다. 출마한 후보자 가운데 유권자가 적절한 후보자를 찾을 수 없는 경우 출마자 모두를 거부하는 방법이다. 투표지에 출마 후보 이름만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거부란을 별도로 둠으로써 유권자가 거기에도 표기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이 같은 방식은 투표를 포기하는 유권자에 대한 사회적 비판과 이에 따른 의무투표제 도입 필요성 주장 등과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의무투표를 법에 명시한다고 해도 유권자가 반드시 특정 후보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 후보에게도 기표하지 않는 무효표를 던지는 것과는 또 다르다. 무효표가 주권의 포기에 가깝다면 후보자 거부권 행사는 아주 적극적인 주권의 행사여서다.
■운영의 어려움
그렇게 후보자 거부권을 도입하자는 여론이 모아진다고 해도 현실화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아직은 적지 않다. 우선 후보자 거부권 보장을 위한 선거법 개정이라는 산을 넘어야 한다. 투표용지에 정당과 후보자의 게재 순위 등을 규정해 놓은 선거법을 개정해 후보자 거부권 행사를 위한 ‘아무도 지지하지 않음’ 등의 기표란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개표 과정에서 후보자 거부권 기표가 최다일 경우의 처리 방법도 고민해야 한다. 일단은 재선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게 하려면 선거비용 증가와 당선자 처리 지연 등 부작용도 만만찮다. 문재완 교수는 후보자 거부권 기표가 과반 혹은 최다일지라도 당선인을 결정하고 후보자 거부권 다수표 여론을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거론한다.
지금처럼 차악이나 덜 부적합한 후보의 선택을 강요당하는 선거 시스템이 앞으로도 계속 유효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는 한시라도 빨리 본격화해야 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후보자 거부권은 이 같은 논의의 촉발제로 충분한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뽑을 만한 후보가 없을 때 모든 후보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유권자에게 허하라!
2026-06-27 [09:00]
-
반성 없는 응징, 참교육 될 수 있나[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제도는 무력하고, 정의는 지연되기 일쑤다. 하소연할 곳 없는 약자들은 해결사가 나타나길 꿈꾼다. 복수 대행이 유행을 타는 배경이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현실은 먼 나라 일이 아니다. 가차 없는 마피아 방식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빈센조’, 가톨릭 신부가 맨주먹으로 범죄 집단을 무너뜨리는 ‘열혈사제’, 피해자들이 의기투합해 힘없이 당하는 서민을 구제하는 ‘모범택시’. 최근 한국 드라마에서 한 장르를 형성한 응보주의(應報主義)는 법보다 빠른 응징을 갈망하는 대중의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
이들 드라마는 극적 카타르시스를 강조하기 위해 가해자의 서사를 생략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왜 그런 악행에 이르렀는지, 그를 둘러싼 사회적 구조는 무엇인지, 교화 가능성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건너뛴다. 반면 현실에서 구제받지 못하는 피해자의 고통에 집중해 사적 처벌의 정당성을 구축한다. 악행의 교정, 교화라는 교과서적 해법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 응분의 죗값을 받는 것을 넘어서 ‘쓰레기’는 사회와 영구 격리해야 한다는 위험한 메시지까지 발신한다. ‘모범택시’에서 등장하는 사설 감옥이 극단적인 사례다. 공권력과 제도의 신뢰가 실추된 현실이 응보주의를 소재로 한 드라마를 양산한 토대라는 점은 무참한 대목이다.
이 응징 서사가 마침내 교실로 들어왔다. 바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참교육’이다. ‘참교육’은 가상의 교육부 소속 교권보호국을 내세워 무너진 교육 현실을 바로잡는 이야기를 그렸다. 특전사 출신으로 교권보호국 감독관이 된 나화진(김무열)과 임한림(진기주)은 학교 정상화에 필요하다면 물리력을 동원해도 된다는 초법적 권한을 부여받는다. “말로 해서 듣는 놈은 말로, 때려서 듣는 놈은 때려서라도 가르친다.” 나화진의 선언은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며 행동으로 옮겨진다.
드라마는 불편한 학교 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학교 폭력에 신음하는 학생뿐만 아니라 마약·도박 위험에 노출된 교육 현장, 악성 민원에 시달리는 교사들의 교권 침해 등 학교 안팎의 문제를 체벌과 폭력을 동원해 단죄하는 것이 줄거리다. 학교판 ‘모범택시’로 비유하자면 구원자 역할의 택시 회사 ‘무지개운수’가 ‘교권보호국’으로 바뀐 셈이다.
드라마 속 교권보호국은 학교가 하지 못한 일을 즉각 해결한다. “어른이 애들을 무서워하면 세상은 망하는 겁니다.” 기성세대가 쉬쉬했던 병폐 척결에 과감히 나서는데, 절차보다 결과가 빠르고 설득보다 제압이 확실하다. 인간 병기 수준의 활극으로 악행을 처단하는 장면은 통쾌하다. 시청자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더구나 드라마 속 소재가 허구에 그치지 않기 때문에 울림이 크다. 매회 등장하는 에피소드마다 초등 교사 자살, 여고 시험지 유출 등 실제 사건을 떠올리게 할 만큼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학생 폭력과 수업 방해, 학부모의 과도한 민원, 교사의 무력감, 그 와중에 침해되는 다수 학생의 학습권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닌 모양이다. 그래서 ‘참교육’은 국내를 넘어 해외 시청자들의 공감까지 끌어냈다. 넷플릭스 비영어 쇼 부문 글로벌 1위를 차지하고 전 세계 48개국 상위 10위권에 오르며 돌풍을 일으킨 배경이다.
현실에서 차마 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하는 ‘참교육’은 앞서 인기를 끌었던 사적 복수극 계열을 답습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분명히 다른 결이 드러난다. 선을 넘은 학생과 교사, 학부모의 일탈을 처벌하면서도 학교라는 공간의 복잡성을 외면하지 않으려 장치를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단순한 통쾌함보다 더 불편한 질문을 남긴다. 반성과 교화 없이 응징만으로 학교 현장이 바로잡힐 수 있는가.
2화에서 조폭을 추종하던 폭력 고교생들이 제압된다. 그런데 시리즈 다른 회차에서 이들은 개과천선해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모습으로 깜짝 등장한다. 문제 학생도 변화할 수 있다는 교화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의도다. 4화 시험지 유출 사건 말미에서는 3화 가짜 미투 사건의 가해자 한예리를 다시 불러낸다. 감독관은 성적 조작을 주도한 교사에게 한 학생의 인생을 망가뜨린 책임을 물으며 한예리를 데려와 마주 앉힌다. 이를 통해 드라마는 가해자로 보였던 학생이 과거에는 또 다른 피해자였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 설정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은 현실을 상기시킨다.
문제 학생의 변화 가능성과 가해자의 피해자성을 함께 보여 주는 설정은 기존 보복 대행 드라마와 분명 구별되는 문법이다. 학생을 제압하는 것과 학생을 바꾸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바로 그 차이에 오늘날 학교 현장의 고민이 묻어난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지는 못한다. 드라마의 관심은 결국 구조보다 개인에게 머문다. 입시 경쟁과 교육 격차, 가정 해체와 정서적 방임, 학벌 중심 사회가 어떻게 또 다른 문제 학생을 만들어 내는지까지는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 문제를 일으킨 학생과 무책임한 어른을 심판하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왜 그런 문제들이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충분히 답하지 못한다. 시청자들이 교권보호국의 활약에 통쾌함을 느끼는 동시에 씁쓸함을 떨칠 수 없는 이유다.
교권보호국은 현실이 될 수 있을까. 교육계에서도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안민석 경기도교육감 당선인은 가칭 ‘교육활동보호국’ 신설 구상과 함께 토론회를 제안했다. 정근식 서울시교육감은 폭력을 정당화하는 교권보호국을 “파시즘적 정책”이라고 비판하면서 교권은 폭력이 아닌 교육적 방식으로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 접근법은 대립하는 것으로 비치지만 실은 ‘꽃으로라도 때리지 말라’는 원칙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새로운 조직을 만들 수는 있으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으로 학생들을 다스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교권보호국은 드라마 속 판타지일 뿐이며, 폭력적 권한은 현실의 대안이 될 수 없다.
‘참교육’의 흥행 성공은 학교가 제 기능을 잃고 있다는 사회적 불안의 반증이라는 점에서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대목이다. 폭력을 내세운 교권보호국은 대안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교권보호국이라는 판타지를 소환한 현실 또한 외면할 수 없다. 반성 없는 응징을 참교육이라 부를 수는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임 역시 교육일 수 없다. 학생 인권과 교권, 학생의 학습권과 교사의 생활 지도권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응징과 방임 사이에서 길을 찾는 일, 그것이 드라마 ‘참교육’이 우리 사회에 던진 질문이다. 이제 답은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의 몫이다.
2026-06-20 [09:00]
-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이번 월드컵 우승국이 스페인이라고?
인류는 오래전부터 미래를 알고 싶어했다. 내일 비가 올지, 농사가 풍년일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과학과 기술이 발전한 오늘날에도 이러한 욕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선거철이면 여론조사에 귀 기울이고, 경제 전망에 귀 기울이는 것도 같은 이유다. 다만 과거에는 점성술과 주술에 의존했다면, 오늘날에는 통계와 인공지능(AI), 빅데이터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스포츠는 인간의 예측 본능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영역 중 하나다. 무릇 승부의 향방이 안갯속에 가려져 있을수록 사람들은 더욱 열정적으로 결과를 점친다. 특히 FIFA 월드컵은 전 세계가 참여하는 거대한 예측 실험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승국을 맞히려는 전문가와 팬들의 경쟁은 때로는 그라운드 위 승부 못지않게 관심을 끌어모은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2026 북중미 월드컵이 막을 올린 지금, 팬들의 시선은 이미 결승전과 우승 트로피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개막 전부터 전 세계에서는 우승 후보를 둘러싼 각종 예측과 베팅이 뜨겁게 이어졌고, 온라인 공간에서도 저마다의 전망과 분석이 쏟아졌다. 과연 AI와 빅데이터는 축구의 불확실성마저 읽어낼 수 있을까.
■스페인·프랑스… 엇갈리는 우승국 전망
월드컵 예측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존재는 단연 독일의 문어 ‘폴(Paul)’이다. 독일의 한 해양생물관에 살던 폴은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당시 독일 대표팀 경기와 스페인-네덜란드 결승전 결과 등을 잇달아 맞혀 대회 기간 내내 화제가 됐다. 폴의 예언 방식은 단순했다. 경기를 앞둔 두 나라의 국기가 붙은 유리 상자에 홍합을 넣어두고, 폴이 먼저 선택한 상자의 국가가 승리한다고 보는 것이었다. 과학적 근거는 없었지만 적중이 거듭되자 사람들은 폴의 선택에 열광했다.
2026 북중미 월드컵 우승국 예측 경쟁도 뜨겁다. 독일 경제학자 요아힘 클레멘트는 2014 브라질, 2018 러시아, 2022 카타르 월드컵 우승국을 연속으로 맞힌 인물로 유명하다. 그런 그가 이번 대회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로 지목한 국가는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다. 클레멘트는 월드컵 준우승만 세 차례 경험한 네덜란드가 사상 첫 우승을 차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또한 일본이 32강에서 브라질을 꺾는 이변을 연출하고, 한국은 16강에 진출할 것으로 예측했다.
반면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스페인을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았다. 체스의 순위 평가 방식인 '엘로(Elo) 평점'에 공격력과 최근 경기력, 지리적 요인 등을 결합한 분석 모델에서 스페인의 우승 확률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스포츠 데이터 분석업체 옵타의 슈퍼컴퓨터 역시 스페인을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로 평가했으며, 미국 스포츠 전문 매체 ESPN도 같은 전망을 내놓았다.
반면 영국 레딩대학교 경제학자 제임스 리드 연구팀이 슈퍼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분석한 결과에서는 아르헨티나의 우승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다른 예측도 있다. 2010년 스페인, 2014년 독일, 2018년 프랑스의 우승을 맞히며 '족집게 예언가'로 불린 브라질 출신 마이클 브루노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이끄는 포르투갈이 이번 대회에서 사상 첫 월드컵 우승을 차지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영표 축구 해설위원은 프랑스를 우승 후보국으로 꼽았다. 그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스페인 몰락을 일찍부터 예상했고,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프랑스를 우승국으로 뽑아 맞춘 바 있다. 영국 매체 가디언도 옴바페의 프랑스를 우승 후보국 1위에 올려놓았다. 영국이나 브라질을 우승 후보국으로 꼽는 축구 전문가들도 있다. 이처럼 전문가와 데이터 분석기관, 심지어 예언가들까지 서로 다른 답을 내놓고 있지만, 공통점은 하나다.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축구공은 둥글다”… 예측 장담 못 해
이런 데이터도 있다. 지금까지 유럽에서 열린 11차례 월드컵 가운데 10번은 유럽 국가가 우승했고, 미주 대륙에서 개최된 8차례 대회에서는 7번이나 남미 국가가 정상에 올랐다. 개최 대륙과 우승국 사이에 일정한 상관관계가 존재한다는 의미다. 이런 통계는 리오넬 메시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와 전통의 강호 브라질에 긍정적인 신호로 읽힌다. 과연 이번 대회에서도 이런 ‘대륙의 법칙’이 통할까.
물론 예측이 항상 적중하는 것은 아니다. 2010년 남아공, 2014년 브라질,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우승국을 연속으로 맞혀 주목받았던 마이클 브루노조차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프랑스의 우승을 예상했다가 아르헨티나가 정상에 오르면서 예측이 빗나간 바 있다.
골드만삭스 역시 2014년과 2018년 월드컵에서 예측 모델을 가동했지만, 2018년 브라질의 우승을 점쳤다가 8강 탈락이라는 결과를 맞았다. 전문가들은 선수들의 컨디션과 부상, 감독의 전술, 경기 당일의 흐름 같은 변수까지 완벽하게 반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그 때문에 일부에서는 온라인 베팅 시장처럼 수많은 참가자의 정보와 판단이 집약된 예측이 오히려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분석도 내놓는다.
우승국 예측이 아니라도 월드컵 역사는 예측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가득하다. 1954년 서독은 ‘무적 함대’로 불리던 헝가리를 꺾으며 우승을 차지했고, 2002년 한국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하며 4강 신화를 썼다.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훗날 우승팀이 된 아르헨티나를 2-1로 꺾는 이변을 연출하기도 했다. 데이터와 통계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변수를 계산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결국 축구는 수많은 기록보다 경기 당일 선수들의 투지와 몸 상태, 예상치 못한 변수 등이 승패를 가르는 스포츠다. 데이터는 유용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지만 결과를 보장하지는 못한다. 독일의 명장 제프 헤르베르거는 “축구공은 둥글다”고 말했다. 우승 후보가 반드시 우승하는 것도 아니고, 약체가 끝까지 약체로 남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월드컵은 늘 흥미롭다. 어쩌면 사람들은 결과를 맞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능성을 꿈꾸기 위해 예측하는지도 모른다.
북중미 월드컵은 이제 막 시작됐다. 스페인이든, 네덜란드든, 프랑스든, 아르헨티나든 지금 이 순간 우승팀을 100%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을지 모른다. 한국 대표팀이 다시 한번 기적 같은 여정을 써 내려가는 일이다. 우승국 예측은 전문가와 AI에게 맡겨두자. 한국의 16강, 나아가 8강 진출을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레는 6월이다.
2026-06-13 [09:00]
-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한국판 스페이스X ’가능할까?
요즘 글로벌 투자자들의 관심은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우주기업 스페이스X에 쏠려 있다. 이 기업이 오는 12일(현지시간) 나스닥 시장에 등판하기 때문이다. 기업공개(IPO) 규모는 역대 최대인 750억~800억 달러로 전망된다. 기존 최대 기록인 2019년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의 공모 규모 294억 달러를 배 이상 넘어선 수치다. 스페이스X를 신호탄으로 하반기 오픈AI, 앤트로픽 등 초대형 비상장 테크 기업들이 연이어 등판하는 ‘IPO 슈퍼사이클’이 도래하면, 세계 증시의 구도 자체가 바뀔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시장에서는 이 세 기업이 조달하려는 자금만 약 2000억 달러, 합산 기업가치는 4조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한다.
■ ‘스페이스X 상장’ 증시 블랙홀 되나
스페이스X는 챗GPT 개발사 오픈AI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기업가치가 높은 비상장 스타트업으로 평가받는다. 실질적 수익 기반을 갖춘 우주 사업 포트폴리오가 이 같은 기업가치의 배경으로 꼽힌다. 2002년 설립된 이 회사는 위성 발사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며 민간 우주산업 판도를 바꿨다. 현재 전 세계 상업용 우주 발사 서비스 분야에서 60% 넘는 점유율을 차지하며 시장 주도권을 쥐고 있다. 재사용 로켓과 스타링크, 스타십을 기반으로 우주 사업 분야에서 수익성을 확보했다. 재사용 발사체 팰컨9는 발사한 1단 로켓을 지상으로 회수한 뒤 재사용하는 방식이라 총비용과 시간을 대폭 줄였다. 2018년 첫 출시 이후 현재까지 각국의 위성 발사와 스페이스X 주력 위성인 스타링크 발사에 활용되고 있다. 일회용 발사체와 달리 수십 회 이상 반복 사용이 가능해 글로벌 스탠다드로 자리 잡았다.
업계에선 기업 공개 흥행 여부에 따라 스페이스X 시총이 1조 750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내다본다. 현실화할 경우 세계 시가총액 톱10에 진입한다. 스페이스X는 4일(현지시간)부터 시작된 투자자 대상 로드쇼를 통해 자금 조달 규모와 최종 공모가, 기업가치 등을 구체화할 예정이다. 당장 이목이 쏠리는 것은 스페이스X가 기존 인공지능(AI) 성장주에 퍼져있는 자금을 얼마나 흡수할지다. 스페이스X가 상장되면 기존 성장주 비중을 줄이고 이동할 가능성이 있어 주가에 미래 성장 가치가 선반영돼 상승세가 가팔랐던 종목이 우선 영향을 받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일각에선 최근 코스피 시장에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대형 반도체주를 중심으로 외국인 순매도가 늘어난 것 역시 스페이스X 상장에 따른 포트폴리오 재조정 압력이 일부 선반영됐다는 해석도 있다. 스페이스X가 투자 자금을 단숨에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이 될지 투자자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상황이다.
■ 민간 주도 우주산업 시대 가속
스페이스X의 상장은 글로벌 우주산업의 주도권이 정부에서 민간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발사체와 위성 개발을 국가가 직접 주도하던 시대를 넘어, 민간 기업이 기술 혁신과 사업화를 이끌고 정부는 서비스를 구매하는 ‘뉴스페이스’ 체제가 가속하는 것이다.
2000년대 미국은 정부 주도로 장기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올드 스페이스 체제’에서 벗어나 경제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뉴스페이스’로 방향을 틀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과거처럼 발사체를 직접 개발하는 대신 스페이스X의 발사 서비스를 구매하는 방식으로 역할을 바꿨다. 스페이스X는 이를 기반으로 발사체 재사용 기술과 같은 혁신을 이뤄냈고, 이후 위성 인터넷 서비스 스타링크 등 독자적 수익 모델까지 구축하며 세계 최대 우주기업으로 성장했다. 제프 베이조스의 블루오리진, 유럽의 자존심 아리안스페이스 등 추격자들의 도전도 매섭다. 이처럼 우주 전장은 이미 민간 기업들의 치열한 각축장이 됐다.
■ 국내도 뉴스페이스 전환 속도
항공우주 5대 강국을 국가 비전으로 내세운 우리나라도 우주항공청 출범, 누리호 민간 이전, 우주산업 클러스터 조성 등을 통해 뉴스페이스 시대 진입에 속도를 내고 있다. 2020년대 들어 민간 중심 우주산업 육성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자 정부는 기존 국가 주도 개발 체계를 민관 협력 체계로 전환하는 작업을 진행해 왔다. 대표적 사례가 한국형발사체 누리호다. 정부 주도로 개발한 한국형발사체 누리호는 반복 발사하는 고도화사업을 통해 기술 이전이 진행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민간 기업이 발사 서비스를 주도하는 체계 구축을 목표로 한다. 지난달 발사된 차세대 중형위성 사업 역시 정부가 개발한 위성 플랫폼을 민간에 이전해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
2024년 출범한 우주항공청 예산은 올해 처음으로 1조 원을 넘어섰고, 민간 투자를 지원할 뉴스페이스 펀드에도 올해부터 연간 1000억 원 이상 국비가 투입된다. 지역별 강점을 살리는 육성 정책도 이어진다. 정부는 경남을 위성 특화지구, 전남을 발사체 특화지구, 대전을 연구·인재 특화지구로 두는 우주산업 클러스터 사업에 2030년까지 3808억 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이재명 대통령도 지난달 28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우주항공 육성 의지를 내비쳤다. 이 대통령은 “우주항공의 또 다른 주역은 민간과 지방”이라고 강조하며 “한국판 스페이스X가 탄생할 수 있도록 민관협력을 대폭 강화하고 전남과 경남 등 핵심 인프라를 갖춘 남부지방을 우주항공 종합 벨트로 육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 우주산업 생태계 구축해야
뉴스페이스 시대 진입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민간 우주 항공 산업이 아직 뉴스페이스 선도국과는 상당한 격차가 있다는 평가다. 국내 우주산업은 국가 연구개발(R&D)이 70~80%를 지탱할 정도로 공공 수요 비중이 절대적이다. 시장 규모와 민간 사업화 기반도 제한적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한국이 진정한 뉴스페이스 국가로 도약하려면 정부 지원을 넘어 민간 기업이 독자적인 시장과 수익 모델을 확보할 수 있는 환경 조성과 산업 구조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올해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전략적 제휴는 의미 있는 행보다. 우주발사체부터 관측·통신 위성, 탐사에 이르는 한화의 ‘우주 밸류체인’과 KAI가 가진 ‘중대형 위성 개발 및 탐사선’의 시너지가 기대된다. 저궤도 위성통신부터 우주 탐사까지 아우르는 종합 우주 패키지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사업장이 있는 경남 창원과 KAI 본사가 있는 사천을 잇는 우주항공 클러스터가 조성되면, 경남~전남(고흥 우주센터·순천)~제주(한화우주센터)를 잇는 남부 우주산업 벨트로 확장될 수 있다. 한화와 KAI의 종합 역량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시도에 성공한다면 글로벌 시장에서 통하는 ‘한국판 스페이스X’ 탄생도 기대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선 민간 수요 확대, 스타트업 육성, 소재·부품·장비 국산화 등을 통해 우주산업 생태계 전반의 성장으로 이어져야 한다. 물론 넘어야 할 산도 만만치 않다. KAI 최대 주주인 한국수출입은행의 매각 의지, 정부 승인, 노조 반발, 독과점 논란 등은 풀어야 할 과제다.
반도체 이후 한국을 먹여 살릴 산업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글로벌 우주산업 전쟁에 당당하게 참전할 수 있는 ‘한국판 스페이스X’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2026-06-06 [09:00]
-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반도체 불장과 포모주의보
국내 주식시장이 역대 최고 수준의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종목이 엄청난 실적을 기록하면서 국내 증시 상승세를 견인하고 있다. 더욱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이 직원들을 상대로 거액의 성과급을 지급할 것으로 전망되는 등 한국 경제가 연일 신기록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주식시장 상승세에서 소외되거나 성과급 지급을 아예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이른바 포모(FOMO) 심리가 확산 중이라는 지적이다. 포모는 ‘Fear of missing out’의 약자로 ‘소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소외 불안 증후군, 고립 공포감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 한국과 포모 심리
포모는 마케팅에 많이 활용된다.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으려는 소비자들의 심리를 자극해 매출을 올리는 기법이다. 유교 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한국 국민들은 유독 체면 차리기, 타인과 비교하기 등에 익숙하다 보니 포모 마케팅에 취약하다는 평가다. 각종 SNS에 특별한 체험을 한 사진을 올리거나 두쫀쿠(두바이 쫀득 쿠키) 열풍 등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포모의 영향이라는 지적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청년들이 무리한 대출로 집을 사는 ‘영끌’, 증시가 호황 국면을 보이자 빚을 내서 투자하는 ‘빚투’, 가상화폐 열풍 등도 포모 심리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우리 사회에서 드물지 않은 1000만 관객 영화 기록 등도 한국 국민들이 유독 소외감과 유행에 뒤처지는 것을 못 견뎌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특히 자유로운 만남과 소통이 차단된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이런 성향이 한층 강해졌다는 분석이다.
■ 반도체 불장과 성과급 후유증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불장의 영향으로 코스피 지수는 연일 고공행진 중이다. 직장인 등의 대화 주제엔 어김없이 반도체 주식 투자 성공담이 포함된다. 하지만 투자 대열에 합류하지 못했거나 합류할 여력이 없는 청년 등에게 반도체 활황은 달갑지 않은 뉴스일 뿐이다. 더욱이 코스피 지수는 연일 상승세지만 일부 종목을 제외하면 되레 손실을 본 투자자들이 적지 않다. 코스피와 코스닥 모두 상승 종목보다는 하락 종목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원금 손실을 감내하고 있는 상당수 투자자들은 자괴감과 불안감까지 호소한다. 특히 지난 27일 상장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품이 큰 인기를 모으고 있는 것도 포모 심리가 일정 부분 작용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 상품 투자를 위해 2시간 교육을 이수해야 하는데 지난 26일까지 이수한 투자자는 19만 3843명에 달한다.
반도체 기업의 수억 원 대 성과급도 다양한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에서 연봉 1억 원을 받는 직원은 올해 총 세전 6억 원에 육박하는 총급여를 받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반면 2024년 기준 박사 신입 연평균 급여가 공공연구기관의 경우 3900만 원에 그치는 것으로 최근 집계되면서 이공계 출신들 사이에서 소득 양극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더군다나 정규직 취업은커녕 비정규직으로 전전하는 청년들 사이에서는 반도체 성과급만 생각하면 소외감을 느끼고 울화통이 터진다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삼성전자 계열사 직원들도 “우린 한 푼도 받지 못하는 게 형평성에 맞지 않고 우리도 동기 부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번 반도체 성과급 파문이 단순한 포모를 넘어 노노 갈등으로 격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경제계에서는 이번 반도체 성과급이 국내 다른 기업들에게도 연쇄적으로 파장을 미칠 경우 국내 경제에 악영향을 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 조급함 버리고 자기 속도 유지해야
최근 주식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포모 증후군으로 의심할 수 있는 행동들이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두려움에 빠져 무리한 매수에 나서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증세는 다음과 같다. 우선 타인의 수익률을 지나치게 의식한다는 것이다. 반도체 종목에 투자해 높은 수익률을 거둔 다른 투자자의 수익률 등을 볼 때마다 감정적인 흔들림을 느낀다는 것. “왜 나만 이렇게 수익률이 낮은 걸까?”라며 자괴감에 빠지는 사례도 드물지 않다. 투자 계획을 감정적인 출렁임에 따라 수시로 변경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당초 장기 투자와 분산 투자, 여유 현금 보유 등의 전략을 수립했으나 단기적 추격 매수, 특정 종목 집중 매수 등으로 계속 바꾸는 등 투자 패턴이 갈팡질팡하는 유형이라면 포모 심리 때문에 무리한 ‘대박 환상’에 사로잡힌 건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하는 게 좋다.
특정 종목을 사지 않았다고 후회하거나 특정 종목을 샀는데 더 오르지 않으면 또 후회하는 등 만족감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투자 패턴도 포모 증후군을 의심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엔 타인의 수익률에 대한 부러움 때문에 조급한 마음으로 추격 매수를 했다가 작은 조정에도 불안을 느껴 손절한 뒤 재상승할 때 또 후회하는 악순환이 이어질 우려가 높다.
시기와 질투는 인간의 본능이다. 그렇기에 누구나 어느 정도의 포모 심리를 갖고 있다. 하지만 과도한 욕망이나 타인과의 비교는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 전문가들은 투자에서 가장 경계할 것은 기회를 놓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성공을 따라가다 자신의 원칙마저 잃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또 재테크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긴 시간 흔들리지 않는 태도와 원칙이라고 강조한다. 타인과 비교하는 데 시간을 쏟기보다는 조급함 때문에 자신의 속도를 잃지 않도록 완급을 조절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2026-05-30 [09:00]
-
엄흥도와 단종이 부러운 이유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1600만 명을 넘는 관객몰이로 대한민국 영화사를 새로 쓴 ‘왕과 사는 남자’는 단종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성공한 영화다. 단종은 안방극장 사극에서는 단골 주인공으로 등장한 인물이다. 배우 이민우와 정태우, 심지어 여자배우인 윤유선까지 배역을 맡아 인상깊은 연기를 선보인 바 있다. 그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로는 1956년작 ‘단종애사’와 1963년작 ‘단종애사’가 있다. ‘왕과 사는 남자’는 단종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세 번째 영화에 해당한다.
영화의 역대급 인기로 단종 유배지인 강원도 영월이 관광객 러시로 들끓을 정도였다는 얘기들이 조금은 구문이 된 지금, 단종을 둘러싼 얘기를 새로이 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얘기는 사후 240여 년만에 왕으로 복위된 단종을 대중 앞으로 다시 불러 세운 일제 강점기의 두 소설가에게로 향한다.
■수양만이 할 수 있다?
소설가 김동인은 1941년 잡지 <조광>에 ‘대수양’이라는 제목으로 역사소설을 연재했다. 제목에서 보듯이 소설은 수양대군의 영웅적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소설 속 수양대군은 부친인 세종대왕까지 능력을 인정하고 맏이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 할 정도로 뛰어난 위인으로 설정돼 있다. 반면 그의 형 문종은 유학의 원리원칙과 서적의 글귀에만 천착하는 문약한 인물로 그려진다. 김동인은 수양대군이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주살한 계유정난을 어린 조카 단종의 자리를 노린 동생 안평대군 일파의 쿠데타 음모를 사전에 알아채고 선제 진압한 것으로 묘사한다. 계유정난 이후 왕좌에 염증을 느낀 단종이 상왕을 꿈꾸면서 왕위에 오를 생각이 없으나 능력은 출중한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기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김동인이 수양대군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의도는 명확하다. 그는 일제 강점기 극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민족적 자존감이며 수양대군은 이 같은 민족적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의 표본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자칫 왕권이 흔들릴 수 있는 조선 초기에 탁월한 전략으로 나약한 왕을 대신해 왕권 확립을 해낸 것이 수양대군이었다는 분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이 같은 분석은 수양의 세조 등극 이후 벌어진 사육신의 난 같은 왕위 정통성을 둘러싼 동시대의 극한 반발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의 소설이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고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장면까지만으로 끝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 할 것이다.
■한때 왕이었던 소년의 몰락
소설가 이광수는 김동인에 앞서 1928년 말부터 1년여 동안 <동아일보>에 ‘단종애사’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연재했다. 역시나 제목에서 보듯이 이 소설은 단종의 슬픈 이야기를 절절하게 담고 있다. 할아버지 세종과 아버지 문종의 기대 속에 역대 어느 왕보다 단단한 정통성을 가지고 왕위에 오른 단종이 호랑이 같은 삼촌 수양대군과 정인지, 한명회, 신숙주(소설은 이 3명을 대표적인 간신이자 악인으로 묘사한다)의 간계로 쫓겨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얘기다. 고명(顧命) 실국(失國) 충의(忠義) 혈루(血淚) 등 네 편으로 이뤄져 있다.
고명 편은 단종의 탄생과 세종의 총애, 세종 사후 문종의 등극과 문종이 임종하면서 신하들에게 단종을 돌봐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을 다룬다. 실국 편은 계유정난으로 알려진 수양대군의 쿠데타 장면으로서 수양대군 일파의 비열한 음모를 자세히 묘사한다. 충의 편은 사육신들이 상왕으로 쫓겨난 단종의 복위를 위해 안간힘을 쓰다 발각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내용이다. 사육신 일족이 손자까지 삼대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의 참혹함과 죽은 이들의 이름 하나하나까지를 지독히도 자세하게 다뤄 읽는 내도록 서늘함을 느끼게 한다. 혈루 편은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된 뒤 영월로 유배를 갔다가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다룬다.
이광수는 일제 강점기에 단종애사를 통해 왕위를 잃은 단종과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을 동일시하고 단종 복위에 목숨을 건 사육신의 절개를 통해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려 한 듯하다. 단종애사의 내용 중에는 역사와 맞지 않는 부분도 다소 있지만 현재까지 소설의 내용이 독자들에게 단종 관련한 사실(史實)로는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이광수가 의도한 바가 김동인보다 적절했던 것으로 읽힌다.
■한때 수도였던 도시의 추락
여기서 잠시 김동인과 이광수의 소설 속 내용을 한 도시와 겹쳐서 바라보도록 하자.
단종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잇따라 세상을 뜨는 비상시국에 잠시 왕위에 올랐던 것처럼 전쟁이라는 비상시국에 대한민국 수도의 지위에 잠시 올랐던 도시가 있다. 바로 부산이다. 비상시국이 지나가자 수양대군을 영웅시함으로써 강력한 추진력을 토대로 한 효율성 극대화 움직임이 일었던 것처럼 전쟁이 끝나자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효율성 극대화 움직임이 곧장 이어졌다. 단종 복위 시도가 처절하게 무산됐듯이 수도권 버금자리라도 버텨보려던 부산의 시도도 철저히 무산돼 왔다. 그렇게 단종은 목숨을 잃었고 부산은 현재 소멸위기 도시의 반열에 올랐다. 김동인의 소설 대수양과 겹치는 부분은 강력한 추진력을 토대로 한 수도권주의의 득세라 하겠다. 반면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와는 임시수도였던 부산의 처절한 몰락 부분이 겹친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이광수 소설 단종애사의 혈루 부분을 영화화한 것이다. 혈루 편은 소설 전체의 10% 정도에 불과한 분량이다. 다른 편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적은 그 내용 속에서도 엄흥도에 대한 내용은 방치된 노산군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를 지냈다는 단 한 줄 뿐이어서 혹시라도 놓친 부분이 있는지 책을 다시 들춰 보게끔 한다. 영화는 그 한 줄에서 시작해 상상을 가미함으로써 수백년 만에 새로운 생명력을 얻은 단종을 관객들 앞에 생생하게 내보인 것이다.
단종과 비슷한 길을 걸어온 부산에겐 단 한 줄의 엄흥도 같은 씨앗과 거기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계기가 남아 있을까. 씨앗이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이며 생명력은 누가 불어넣어야 할까.
다가오는 부산시장 선거에서는 그 답의 일단면이라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2026-05-23 [09:00]
-
삼성전자 성과급과 임금의 미래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이집트 피라미드가 채찍과 몽둥이로 건설됐다고 여긴다면 오해다. 다수의 숙련된 장인들이 활약한 덕분에 고도로 정교한 건축물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이들에게 어떤 보상이 주어졌을까. 파피루스나 점토판에 하루 지급품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빵 10개와 맥주 3~4L, 그리고 양파와 마늘, 생선, 곡물…. 화폐가 생기기도 전이었지만 숙련 노동의 대가에는 엄정한 셈법이 적용됐다.
조선 숙종 대에 부산 금정산성을 지을 때는 노역에 동원된 장정들에게 끼니와는 별도로 막걸리를 지급했다는 전승이 내려온다. 오늘날 산성 막걸리의 기원이다. 일꾼을 후하게 대접해 일의 능률과 완성도를 높이려는 방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하다.
오늘날 노동의 대가는 임금이다. 사용자는 안정적인 기본급을 보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추가 보상책도 제공한다. 이 제도의 원형은 미국 포드주의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동차 제조사 포드는 1914년 컨베이어벨트를 도입해 대량생산 체제를 완성했는데, 낯선 기계에 적응하지 못한 저숙련 노동자들의 높은 이직률에 발목이 잡혔다. 생산 차질까지 빚자 회사는 인력 확보를 위한 묘안을 내놨다.
포드는 ‘하루 5달러( a day)’ 구호를 내걸고 일당 2.34달러를 배 이상 올렸다. 또 고임금의 대가로 무단결근, 음주, 도박을 금지하는 등 사생활까지 통제했다. 가정에 충실한 가장이 직장에서 일도 잘할 것이라는 생각에 사회부(Sociological Department)를 신설하고 가정 방문을 통해 결혼과 가족 부양, 저축 여부를 일일이 조사했다. 직원이 방탕한 생활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으면 가차 없이 해고했다. 포드주의를 ‘가족임금(family wage)’의 제도화로 부르는 이유다.
이후 산업사회는 포드식 가족임금제가 중심축이 됐다. 임금은 개인에 대한 보상에 그치지 않고 배우자와 자녀를 부양하는 가족 생활비 개념으로 확장됐다. 기업들은 가족수당, 사택과 주택담보 대출, 자녀 학자금, 배우자 건강검진, 경조사 지원 같은 복지 제도를 경쟁적으로 도입했다. 국가는 건강보험 피부양자 제도와 유족연금, 산재보상 같은 사회보험 체계로 이를 뒷받침했다. 기업과 국가는 안정적인 노동력 공급을 위해 핵가족 체제를 유지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한국도 포드주의 기반 위에 산업화를 이뤘다. 한국의 노사는 격렬하게 충돌해 왔지만 동요 ‘아빠 힘내세요’로 상징되는 ‘가장의 생계 책임’만큼은 공유한다. 노조의 쟁의 행위에 일정한 동정 여론이 형성되는 이유도 임금이 가족 생계를 지키는 보루이기 때문이다.
‘가족임금’은 사회적인 역할과 책임의 분담을 전제하고 있다. 노동은 경기 변동과 기업 리스크로부터 보호받되, 기업과 주주는 투자 판단, 이익 처분, 실패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 회사는 직원 가족의 생계가 걸린 기본급을 안정적으로 보장해야 하고, 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사회적 비난과 법적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최저임금 보장, 해고 제한, 퇴직보험과 고용보험 등을 통해 노동자의 생활 안정성은 보장하되, 기업 이익의 처분은 경영진의 판단 영역에 두는 것이다.
인터넷이 등장한 1990년대 이후 정보기술(IT) 혁명과 스타트업 붐은 포드주의 임금 체계에 변형을 일으켰다.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창의적 인재를 붙잡기 위해 월급을 넘어선 대안을 찾았다. 스톡옵션이나 성과조건부주식(RSU, Restricted Stock Units)은 회사 성장에 따라 주가가 오르면 직원이 주식을 받거나 싼값에 살 수 있도록 한 보상 제도다. 이 방식은 한국 IT 업계와 스타트업, 그리고 대기업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다만 포드주의식 단체협상과 달리 실리콘밸리식 보상 체계는 개별 계약과 성과 연동 방식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러한 이익을 나누는 권한이 경영진에 있다는 점만큼은 포드주의와 다르지 않다.
최근 삼성전자 노조가 역대급 영업이익의 일률적 분배를 요구하며 쟁의에 나선 것은 포드주의와 실리콘밸리식 보상 체계의 경계를 흔드는 움직임이다. 노조는 ‘영업이익의 15%’를 성과급 재원으로 고정하고 연봉의 50%로 제한된 성과급 상한 폐지를 목표로 회사를 압박하고 있다. 회사의 이익 중 일정 비율을 노동의 몫으로 공식화하겠다는 것이다. 이 요구가 실현되면 직원 1인당 3년간 26억 원의 성과급을 받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조의 요구는 초과 실적을 성과급 형태로 지급하는 이익공유제(PS, Profit Sharing)와 비슷해 보인다. 다만 기존 PS가 경영진이 설계한 성과 공유 체계라면, 삼성전자 노조는 영업이익의 일정 비율을 노동 몫으로 공식화하자고 요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삼성전자 사측은 기존 초과이익성과급(OPI, Over Profit Incentive)을 유지하면서 실적이 개선되면 특별 보상을 추가하는 안을 제시하고 있다. ‘회사가 잘되면 더 나눠주겠다’는 것이다. 결국 핵심은 성과급 액수보다 누가 배분 권한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충돌이다.
이 쟁점에 노사 모두 양보하지 않을 태세여서 물리적 대결 가능성이 커 보인다. 노조 홈페이지 ‘파업.com’은 21일로 예고된 파업 동참 노조원 수를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노동위원회 중재가 결렬된 뒤 5000여 명이 늘었다.
삼성전자는 창업 때부터 무노조 경영을 고수하면서 업계 최고의 임금과 복지를 제공한다는 서사를 쌓았다. 한국에서 가장 전형적인 ‘가족임금’을 실천한 회사로 손색이 없다. 그런 회사에서 그 틀을 깨는 단체행동이 시작된 것은 역설적이다. 성과 배분 과정의 투명성과 합리성이 부족해 불신이 누적됐다는 지적을 삼성전자는 곱씹어봐야 한다.
노조의 요구가 경계선을 넘었다고 해서 ‘귀족 노조’로 비판만 하면 해결책과 멀어진다. 실제 임금과 성과 배분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다. 1인 가구의 증가로 ‘가족임금’의 취지가 퇴색되는 과정인 점도 감안해야 한다.
다만, 삼성전자와 같은 성공 모델이 존재하기 위한 밑바탕이 되는 우리 사회 내부의 균형 감각을 잃어서는 곤란하다.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13% 수준에 머물러 있다. 노동자 대다수가 노조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의미다. 경영 성과에 대한 노사의 책임 경계가 흐려질 경우 제도가 악용될 가능성도 우려된다. 만약 사용자가 ‘영업 이익이 나면 추가로 가져가되, 손실이 날 때는 기본급에서 공제하자’고 요구하면 어떻게 방어할 수 있나. 경영 실패의 책임이 노동자에게 전가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우리 주변에는 ‘가족임금’의 보호를 받아야 할 노동 약자들이 아직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훗날 삼성전자의 성과급 논쟁이 한국 노동 체제 변화의 기폭제가 됐다고 평가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장은 노동의 양극화와 사회적 균형이라는 더 무거운 질문도 함께 봐야 한다. 삼성전자 노조가 기업 초과 이익의 배분을 요구하는 지금도 대다수 노동자는 노조의 보호 밖에서 불안정한 고용과 임금을 걱정하고 있다.
2026-05-16 [09:00]
-
과연 부산시장 후보들 곁에 문화전략가는 있는가?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부산시가 부산오페라하우스의 개관 공연으로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오페라 오텔로를 무대에 올리기로 했다. 시는 오텔로의 3회 공연에 105억 원 규모의 예산을 투입할 계획이다. 시 정책이니, 이는 박형준 부산시장이 추진해 온 문화정책의 방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세계적 문화기관과 콘텐츠를 적극 유치해 부산의 도시 브랜드와 문화 경쟁력을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이다. 반면 더불어민주당 전재수 부산시장 후보는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퐁피두센터 부산분관 건립과 부산오페라하우스 개관 공연 예산을 ‘혈세 낭비’로 규정하며 관련 사업의 집행을 중단한 뒤 이른바 ‘부산 민생 100일 비상조치’에 재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부산의 문화정책을 둘러싼 최근 논란은 6·3 지방선거와 맞물리며 단순한 예산 공방을 넘어서는 양상이다. 특히 세계적 문화 프로젝트를 통한 도시 도약이냐, 민생 중심의 재정 재편이냐를 둘러싼 논쟁은 부산이 어떤 문화적 미래를 지향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 부산오페라하우스 정체성 고민을
박형준 부산시장 후보의 문화정책 방향은 뚜렷하다. 세계적 문화기관과 콘텐츠를 적극 유치해 도시 브랜드와 문화 경쟁력을 끌어올리겠다는 전략이다. 퐁피두센터 부산 분관 추진, 해외 유명 건축가를 활용한 특별건축구역 사업, 그리고 라 스칼라 극장의 오텔로 개관 공연 추진까지, 그 흐름은 하나로 이어진다. 외부의 성공 모델과 세계적 브랜드를 부산으로 가져오면 도시 경쟁력도 함께 높아질 것이라는 인식이다. 물론 이런 접근 자체를 무조건 부정하기는 어렵다. 문화는 때로 외부 자극과 교류를 통해 성장하기 때문이다. 세계적 공연과 기관 유치는 도시 인지도를 높이고 관광 산업에도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국제도시를 지향하는 부산이 글로벌 문화 네트워크 구축에 나서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전략이다. 실제 세계 주요 문화도시들도 국제 교류와 협업 속에서 성장해 왔다.
문제는 지금 부산시의 정책이 교류보다는 외부 의존에 가까워 보인다는 점이다. 특히 라 스칼라 프로젝트는 그 상징성이 크다. 부산시는 개관 시즌에 약 105억 원을 투입해 오텔로 3회 공연을 추진할 계획이다. 지역 문화계에서는 “부산 예술인 지원 예산보다 더 많은 돈이 단 세 차례 외국 공연에 투입된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 예산은 부산문화회관 7개 극장의 연간 기획사업비의 수배에 이르고, 시립예술단 전체 사업비를 크게 웃도는 규모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액수 자체보다 그 막대한 비용이 부산의 문화 생태계에 무엇을 남기느냐에 있다.
개관 공연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다. 부산오페라하우스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시민에게 처음 선언하는 상징적 무대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왜 지금 부산에서 이 작품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혹자는 이야기할 것이다. 오텔로가 부산과 전혀 무관한 작품이 아니라고. 바다와 항구, 폭풍 등 요소는 해양도시 부산과 일정 부분 맞닿아 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상징만으로 부산의 문화적 정체성을 충분히 담아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구나 이번 개관 공연은 부산이 자체 제작한 콘텐츠가 아니라 라 스칼라의 완성된 작품을 들여오는 방식이다. 개관작은 오랫동안 부산오페라하우스의 정체성을 규정할 상징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더욱 신중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만약 지역 예술가와 기술진이 제작 과정에 참여하고, 개관 시즌 전체를 부산의 해양성과 연결하는 기획으로 확장하고, 공연 이후 지역 레퍼토리와 교육 프로그램으로 이어지는 구조까지 그렸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세계적 극장 초청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지역 생태계 성장과 어떻게 연결하느냐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없었다. 한 발짝 양보해 개관 창작 오페라로 논의되었던 ‘새야 새야’가 오텔로와 동등한 상징성을 가지고 함께 추진됐다면 논란은 덜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점에서 박 후보는 뼈아픈 질문을 피하기 어렵다. “부산오페라하우스는 과연 부산만의 콘텐츠를 축적할 준비를 해 왔는가”, “수년간의 준비 기간 지역 창작 오페라와 제작 시스템, 인재 양성 시스템을 얼마나 구축했는가?”
■ 문화 투자 자체 위축 불러올 수도
그렇다고 전재수 후보의 접근 역시 결코 건강해 보이진 않는다. 어쩌면 더 위험한 발상일 수도 있다. 전 후보는 퐁피두센터 부산 분관과 부산오페라하우스 개관 공연 예산의 집행을 중단한 뒤 이를 민생 예산으로 돌리겠다고 했다. 확보한 재원을 통해 영세 화물차주 지원, 공공요금 부담 완화, 전통시장·소상공인 에너지 바우처 지급, 동백전 캐시백 확대 등을 추진하겠다는 구상이다. 시민 생활 안정을 위한 정책은 정말 필요한 정책이다. 이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따로 있다. 문화 예산을 사실상 ‘불요불급한 비용’, 즉 필요하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은 예산처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문화정책을 지나치게 협소한 시각으로 해석하는 접근이다. 문화 투자를 도시 미래를 위한 전략적 투자로 보기보다 경기 상황이 어려우면 언제든 삭감할 수 있는 비용 정도로 인식한다는 얘기다. 이런 시각이 확산될 경우 문화 투자 자체가 위축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이는 ‘기업 하나 유치하는 것이 미술관이나 박물관 하나 세우는 것보다 낫다’라는 식의 단순 경제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오늘날 도시 경쟁력은 기업 숫자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어떤 문화적 자산을 갖고 있으며, 시민들이 어떤 문화적 경험을 누릴 수 있는가가 도시의 품격과 미래 가치를 좌우하는 시대다. 이런 측면에서 두 사업을 모두 중단하고 관련 예산을 민생 예산으로 돌리겠다는 구상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문화 예산을 줄여 단기 민생 예산으로 돌리는 방식은 정치적으로 즉각적인 호응을 얻을 수는 있다. 하지만 도시의 장기적 성장 기반을 잠식할 위험도 크다. 더 심각한 것은 전 후보의 발언 어디에서도 “그렇다면 부산 문화정책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잘못된 사업을 비판하는 것과 문화 투자 자체를 위축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문화정책 예산 안에서의 수평 이동이나 세부 항목 조정, 사업 방식에 대한 구체적 대안 없이 막연히 ‘민생 예산’을 언급하는 것은 결국 표 계산에만 치우친 접근처럼 비친다. 이는 지역 문화예술계에 대한 무성의 일 분 아니라, 그동안 퐁피두 사업을 비판해 온 이들에 대해서도 무책임한 태도로 읽힌다. 적어도 부산시장 후보라면 단순한 찬반 구도에 갇혀서는 안 된다. 문화는 도시의 사치품이 아니다. 도시 경쟁력을 구성하는 핵심 자산이다. 이점을 전 후보가 분명히 알았으면 한다.
■문화 관점서 도시 고민해 줄 사람 필요
박 후보는 세계적 문화기관과 외부 브랜드 유치에 지나치게 기대고 있고, 전 후보는 문화 예산을 우선순위에서 밀려도 되는 비용처럼 접근하고 있다. 문화정책은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다. 결국 두 후보 모두 균형 잡힌 문화정책이라고 할 순 없다. 외부 문화 자원과 지역 문화 생태계 육성은 충돌하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함께 가야 할 상호 보완 전략에 가깝다. 부산에 필요한 것도 ‘라 스칼라를 부를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단순한 찬반 논쟁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공연 이후 부산에 무엇이 남느냐다. 지역 제작 인력은 성장하는가, 시민들의 문화 경험은 확장되는가, 부산만의 콘텐츠는 축적되는가, 그리고 그것이 지속 가능한 시스템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가 핵심이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 사례가 보여주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대구는 해외 유명 공연 초청에 그치지 않고 지역 성악가와 제작 인력을 육성하며 창작 오페라를 꾸준히 축적해 왔다. 화려한 건물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움직이는 운영 시스템이며, 일회성 이벤트보다 중요한 것은 지역 문화 생태계라는 점을 보여준다.
부산은 오랜 시간 다양한 문화가 교차해 온 항구 도시였다. 이제는 외부의 명성과 브랜드를 빌려오는 데서만 머물 것이 아니라, 스스로 콘텐츠를 기획하고 축적하는 도시로 나아가야 한다. 더욱이 지금은 K컬처가 세계 문화시장을 움직이는 시대가 아닌가. 중요한 것은 국적이 아니라 얼마나 탄탄한 서사와 콘텐츠를 만들어 내느냐다. 서구의 오페라라 하더라도 부산만의 해석과 지역의 문화적 역량이 더해진다면 세계인의 관심을 끄는 작품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문제는 그런 상상력이 들어갈 틈이 없다는 점이다. 부산오페라하우스가 추진된 지난 수년간 부산은 과연 어떤 콘텐츠와 문화 생태계를 축적해 왔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부산의 두 시장 후보를 보고 있노라면 정작 그 전략을 설계할 문화전략가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정치적 공방은 요란하지만, 정작 부산의 문화적 미래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부산시장 후보들 곁에는 과연 이 도시의 문화적 미래를 함께 고민할 사람이 있는가?”라고. 지금 문화는 도시의 미래를 설계하는 핵심 전략이 됐다.
2026-05-09 [09:00]
-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반도체발 ‘슈퍼리치’ 시대 열리나?
K반도체의 투톱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리면서 성과급 논쟁 이슈가 국내를 강타하고 있다. 반도체 슈퍼 사이클을 타고 삼성전자는 올 1분기 57조 원대, SK하이닉스는 37조 원대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SK하이닉스의 올해 연간 영업이익이 250조 원대에 달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기본급 1000%라는 성과급 상한을 폐지했으며, 연간 영업이익의 10%를 재원으로 초과이익분배금(PS)을 지급한다. 이에 따라 올해 SK하이닉스 임직원이 받을 성과급은 수억 원대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 노조도 올해 영업이익 15%(약 45조 원 추산)의 성과급 지급과 상한선(연봉의 50%) 폐지를 요구하는 상황이다. 이 부분이 현실화한다면 반도체발 ‘슈퍼리치’ 시대가 열리는 셈이다.
■ “하이닉스느님” 밈 열풍
SK하이닉스가 사상 최대 실적 행진을 이어가면서 회사를 소재로 한 각종 밈(온라인 유행 콘텐츠)이 쏟아지는 상황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가장 대표적인 밈은 ‘SK하이닉스 로고 조끼’다. 한 게시물에는 조끼를 입은 남성 사진과 함께 ‘대한민국 현시점 최고의 소개팅 룩’이라는 문구까지 붙었다.
4월 25일 예능 프로그램인 ‘SNL코리아’에서는 SK하이닉스 직원을 소재로 한 코너까지 공개됐다. 한 남성이 편한 옷차림으로 명품 매장에 들어서자 직원이 막아선다. 실랑이 끝에 남성이 외투를 벗고, SK하이닉스 로고가 있는 조끼가 드러나자 직원은 곧바로 “하이닉스느님”이라며 태도를 바꾼다는 내용이다. 직원 조끼가 ‘명품 매장 프리패스 룩’이 된 것이다. 최근 임직원 1인당 평균 성과급이 수억 원을 넘을 것이라는 SK하이닉스의 위상을 풍자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생성형 인공지능(AI)으로 만든 패러디 이미지도 확산하고 있다. SK하이닉스 주차장에 고가 외제 차가 빼곡히 주차된 모습을 담은 이미지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인기를 반영하듯 SK하이닉스 입사를 목표로 하는 강좌까지 등장하면서 ‘하닉고시’ 열풍도 분다. SK하이닉스가 올해 생산직 공개 채용을 시작하자 학원가에서 ‘단기 합격반’을 개설했으며, 온라인 서점에선 관련 교재가 실시간 판매 1위에 오르기도 했다.
■ 대학 입시 지형을 흔들다
의학 계열의 인기 전공을 통칭하는 ‘의치한약수’(의대·치대·한의대·약대·수의대)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취업이 보장되는 ‘반도체 계약학과’를 더한 ‘의치한약수반’이 등장한 것도 새로운 풍조다. ‘의대’의 독주 속에서 반도체 계약학과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2026학년도 수시 모집 결과,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와 고려대의 반도체공학과의 합격선은 2021년 첫 신설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수시 최종 등록자 70% 컷을 분석한 결과,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의 학생부교과전형 합격선은 2024학년도 1.47등급에서 2025학년도 1.20등급, 2026학년도 1.14등급까지 수직 상승했다. 고려대 반도체공학과의 학생부종합전형 합격선도 전년도 1.82등급에서 올해 1.47등급으로 올랐다. 의대 비선호 상위권 학생들에게는 이들 학과가 확실한 선택지로 자리 잡은 것이다. ‘삼전닉스 열풍’이 의치한약수의 불패 신화를 넘어 이공계의 부활을 보여준다는 면에선 희망적이다.
2027학년도 입시에서도 ‘반도체 계약학과 독주’는 의대 증원 변수와 함께 상위권 합격선을 뒤흔들 핵심 변수다. 2027년 대입에서 삼성전자는 연세대, 성균관대 등 7개 대학에서 350명을, SK하이닉스는 고려대, 서강대, 한양대 등 3개 대학에서 110명을 선발한다. 두 기업은 합산 총 460명의 정예 인원을 뽑는다.
■ 각광 받는 ‘반도체 셔세권’
시장의 관심은 삼전닉스의 역대급 성과급이 만들어낼 ‘낙수 효과’로 쏠린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셔틀버스가 지나는 곳을 일컫는 ‘셔세권’(셔틀버스+역세권)이 부상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최소 3~4년간 반도체 호황이 이어져 실제 성과급으로만 수십억을 벌게 된다면 풍부한 유동성의 종착지는 결국 부동산일 것이란 예측이 나온다.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는 ‘주요 셔세권 단지 리스트’까지 공유되는 상황이다.
기흥·화성 등에서 사업장을 운영하는 삼성전자는 약 1700개의 노선을 통해 매일 5만여 명의 직원을 실어 나른다고 한다. 이천과 청주에 사업장을 둔 SK하이닉스 역시 500여 대의 통근 버스가 2만여 명의 직원 출퇴근을 책임진다. 총 7만여 명에 달하는 고소득 인구의 이동 경로가 곧 ‘부동산 입지 지도’로 이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셔세권’으로 꼽히는 지역은 시장 평균보다 높은 가격 상승률을 보인다고 한다. 셔틀 노선이 집중된 서울 동남권(강남·서초·송파·강동)과 경기 남부권(분당·수지·동탄·영통)이 대표적이다.
■ 산업 생태계 확장 연결을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역대급 성과급 예상에 부러움과 함께 노동소득 격차를 둘러싼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노동소득 차이가 미래 자산 형성 능력 차이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소득 격차에 따라 ‘K자형’ 양극화가 더 심화하고 일각에선 ‘H자형’으로 굳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H자형 양극화란 위아래 계층 간 격차가 굳어져 이동 사다리가 약해진 현상을 알파벳 H에서 착안한 용어다. 같은 출발선에서 계층이 갈라지기 시작하는 K자형 양극화를 넘어 H자형은 격차가 고착된 상태를 의미한다. 노동시장 이중 구조가 인생 경로를 좌우하고 이로 인해 부동산, 사교육, 채용시장의 양극화가 더 깊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반도체 호황에 따른 일부 대기업 중심의 임금 상승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분위기는 있다. 기업이 투명한 규칙에 따라 이익을 나누는 것은 권장할 일이다. 다만 이러한 성과가 특정 기업과 계층에만 머문다면 산업 전반의 불균형을 심화시킬 수 있다. 이를 사회 전반으로 확산하는 정책적·구조적 대응이 필요하다. 반도체 호황이 촉발한 임금 상승의 과실이 신규 일자리 창출과 산업 생태계 확장으로 이어지고, 협력사와 중소기업, 서비스 분야까지 파급된다면 바람직할 것이다. 반도체 호황을 어떻게 우리 경제 전반의 성과를 연결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 됐다.
2026-05-02 [09:00]
-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누군가 나에게 몰래 마약을 투여한다면…
마약류는 통상 마약과 향정신성의약품, 대마로 크게 분류된다. 마약은 천연 마약(양귀비와 코카엽)과 천연 마약에서 추출물(모르핀, 헤로인, 코데인), 합성마약(펜타닐, 메타돈, 옥시코돈)으로 분류된다. 합성마약 중에서도 펜타닐 남용은 심각한 수준이다. 펜타닐 효력은 모르핀보다 최대 100배, 헤로인보다 50배가량 강력하다. 1959년 벨기에 과학자 폴 얀센이 발명했다. 암 환자 등의 극심한 고통을 줄여주는 용도로 인기를 모았다. 양귀비 등 비싼 천연 재료를 원료로 사용하지 않고 실험실에서 화학적으로 제조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혔다. 1981년 특허 기간이 만료되면서 펜타닐을 제조하는 제약회사들이 급증했다. 문제는 수요가 늘면서 불법 제조도 늘어났다는 것이다. 당초 목적인 진통 용도가 아니라 환각 목적으로 광범위하게 유통되는 등 현재 지구촌은 펜타닐 등 합성마약류로 인한 심각한 부작용을 겪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기존 펜타닐의 분자 구조를 조금씩 변경한 펜타닐 유사체, 저가 합성마약 플래카(Flakka), 합성대마(K2, 스파이스), 사탕과 초콜릿처럼 포장한 이색 마약 식품 등도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다. 철저한 대응 습관을 기르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강력한 합성 마약 등에 노출될 우려가 매우 높은 만큼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 급증하는 마약범죄… 청소년·청년이 위험하다
펜타닐은 뇌의 오피오이드 수용체에 직접 결합해 통증을 없앤다. 도파민을 분출시켜 몽롱하면서도 편안한 상태로 진정시킨다. 하지만 강력한 신체적, 정신적 의존 상태를 유발한다. 펜타닐의 가장 무서운 점은 한 번만 접해도 중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10원짜리 동전 크기의 1% 분량인 2mg 정도만 복용해도 사망에 이를 수 있다. 미국 필라델피아는 ‘좀비 도시’로 불린다. 켄팅턴 거리 등 도시 곳곳에서 펜타닐 투여 후유증 때문에 근육이 경직되면서 좀비를 닮은 기이한 모습으로 멈춰 선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매년 10만 명 이상이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하고, 그중 70% 이상이 펜타닐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마약사범도 폭증했다. 대검찰청이 마약사범 통계를 처음 시작한 1985년에는 1190명이 단속된 것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1999년 1만 589명으로 처음 1만 명을 넘어선 이후 2023년에는 2만 7611명으로 2만 명을 처음으로 상회했다. 2024년에도 2만 3022명에 달했다. 특히 온라인을 통한 마약류 유통이 늘어나면서 20~30대 마약류 사범이 크게 늘고 있다. 전체 마약사범 가운데 20~30대 비중은 2022년 1만 507명(57.2%), 2023년 1만 5051명(54.5%), 2024년 1만 3996명(60.8%)에 달했다. 10대 마약사범도 증가하고 있다. 2005년 30명 수준이었으나 2023년에는 역대 최대인 1477명을 기록했다. 이런 통계들은 1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청소년과 청년층이 마약의 유혹에 쉽게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방증한다.
■ 비자발적 마약 투여 범죄 확산 우려
부산마약퇴치운동본부와 부산시약사회 마약류 및 약물중독예방센터 등의 전문가들은 마약류가 단속, 검거 통계 수치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우리 사회에 확산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펜타닐 성분을 함유한 젤리와 사탕, 에너지 드링크에 혼합한 마약 음료, 대마 성분을 주입한 마약 초콜릿, 합성대마 오일을 넣은 마약 전자담배 등 일상용품으로 교묘하게 위장된 마약류들이 암암리에 유통되고 있는 실정이다.
더군다나 마약 유통업자들은 중독자가 많아질수록 더 많은 수익을 남긴다. 인터넷 세상에서는 마약류를 구입할 때 최초 1회는 무료로 제공한다는 등의 마케팅 전략으로 구매자를 확보하기도 한다. 마약류를 집중력을 높이는 보조제라고 속여 중독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사례도 드물지 않다. SNS로 접촉해 텔레그램으로 거래한 뒤 암호화폐로 대금을 주고받고 퀵 서비스나 택배, 우편물로 배송하는 비대면 거래가 지난해 60%를 넘어선 상황이다.
특히 갈수록 수법은 더 교묘해지고 있다. 2023년 4월 서울 강남구 학원가 일대에서 발생한 사건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당시 4인조 일당들은 시음 행사로 위장해 학생들에게 “기억력과 집중력 향상에 좋은 음료”라며 필로폰과 엑스터시 성분을 섞은 음료를 마시도록 유인했고, 6명의 학생이 피해를 입었다. 범인들은 학생들을 마약사범으로 신고하겠다고 학부모들을 협박, 돈을 뜯어내기 위해 범행을 계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최근 방영 중인 넷플릭스의 ‘사냥개2’에서는 몰래 투여된 약물이 섞인 술 한 잔을 마신 극중 인물이 쓰러지고 후유증에 시달리는 장면이 나온다. 2022년 방영된 ‘약한영웅 클래스1’에서는 고등학교에서 다른 학생의 시험을 망치기 위해 펜타닐 패치를 몰래 붙이는 장면이 나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 ‘마약류 대응 습관’이 필요한 시대
전문가들은 유사 범죄 발생 가능성은 언제나 상존한다고 조언한다. 예를 들어 카페 등에서 음료를 마시다가 화장실에 간 사이 누군가가 몰래 마약류를 음료 컵에 혼합하는 범죄도 예상할 수 있다. 이런 경우 강남구 학원가 사건처럼 차후에 협박을 받는다면 금품을 뜯기는 것은 물론 본의 아니게 중독의 길로 빠질 수 있다. 더욱이 펜타닐 등 강력한 합성마약을 자신도 모르게 투입 당했을 경우 중독성이 워낙 강하다 보니 마약 유통 조직의 고객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또 젤리와 초콜릿 등을 누군가가 선심성으로 포장해 권할 경우에도 무심코 섭취했다가는 원인도 모른 채 중독의 늪에 빠질 수도 있다. 특히 최근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묻지마 범죄’가 이어지고 있는 것과 관련해 펜타닐 등의 강력한 마약류를 범죄 도구로 악용, 누군가의 삶을 망치려는 시도도 있을 수 있다.
마약 관련 기관들은 자신도 모르게 피해를 입을 수 있는 마약류 범죄에 대응하려면 몇 가지를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단 모르거나 의심스러운 타인이 제공하는 음료와 음식물 등을 절대 섭취하지 않아야 한다. 공중장소인 카페 등에서 자리를 비울 경우에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일행 모두가 같이 자리를 비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는 조언이다. 또 비자발적으로 마약류를 접했거나 협박을 받았을 경우에는 즉시 관련 기관에 연락해 상담을 받는 것이 좋다. 주변 지인이나 가족 등이 평소와 다른 이상 행동을 할 때도 신속한 대응이 필요하다. 강력한 합성마약이 판치면서 한 번만 접해도 중독을 피할 수 없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한 번은 괜찮겠지, 극히 소량인데 이 정도면 안전하겠지 등 안일한 생각과 마약에 대한 상식 부족 때문에 소중한 삶을 파괴 당하는 불행한 일은 없어야 한다. 마약류에 대한 상시적 대응 습관을 숙지하길 당부한다.
2026-04-25 [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