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AI 학습 자료와 저작권 논란
생성형 인공지능(AI)의 성능을 고도화하고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려면 방대한 양의 고품질 학습 자료가 필요하다. AI 기업들이 생성형 AI를 학습시킬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AI 기업이 별도의 계약 없이 대규모로 수집한 책과 전자책을 대규모 언어모델(LLM) 학습에 활용하면서 저작권 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AI 기업이 책 한 권 값만 내고 구매한 저작물이나 불법 유통 중인 출판물을 확보한 뒤 AI 학습에 활용하는 것이 정당한지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책을 무단 복제하거나 인터넷에 불법 유통하는 행위가 저작권 침해의 핵심이었지만 AI의 등장 이후 저작권 분쟁의 양상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국내 문학 작품들까지 AI 회사에 무단으로 확보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AI 학습에 사용한 출판물의 저작권을 둘러싼 문제가 수면 위로 급부상하고 있다.
■ 한국 작가 도서의 불법 복제본 다운로드
미국 AI 기업 앤트로픽은 AI 학습을 위해 온라인 해적판 도서 사이트에서 700만 권 이상의 디지털 복제본을 다운로드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이 논란은 결국 집단소송으로 비화됐다. 이후 앤트로픽은 약 48만 권의 합의 대상 저작물과 관련해 총 15억 달러(약 2조 원)를 지급하기로 합의했고, 미국 법원은 올해 7월 이 합의를 최종 승인했다.
그런데 앤트로픽 소송 관련 저작권 합의 사이트에 올라온 보상 대상 도서 목록에 한국 작가 책 21종이 등재된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문학번역원에 따르면 앤트로픽이 불법 복제본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진 작품은 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 김영하 <빛의 제국> 외 3종, 김숨 <한 명>,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외 2종, 한강 <소년이 온다> 외 2종, 황선미 <마당을 나온 암탉>, 황석영 <손님> 등이다. 앤트로픽이 국내 작가들의 영문판 도서 등을 무단으로 확보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이들 작품의 AI 학습 활용 여부와 저작권 침해 문제가 주목받고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은 최근 해당 작가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통보한 데 이어 저작권 유관기관 등과 협력해 작가들이 정당한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 한글 도서 대량 구매 움직임도 포착
국내 유명 작가뿐만 아니라 각종 한글 도서를 대량으로 구매하려는 의심스러운 움직임도 잇따라 포착되고 있다. 교보문고에는 올해 초부터 미국과 영국 등 해외 업체들로부터 도서 종류별로 한 권씩 대량 구매하겠다는 요청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교보문고는 AI 학습에 활용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납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다른 온라인 서점에도 이와 유사한 문의가 있었지만 실제 구매로는 이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문제는 다른 곳에도 이런 구매 요청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더욱이 국내 도서가 해외 AI 기업의 학습자료로 얼마나 확보됐는지조차 현재로서는 가늠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와 관련, 국내 출판업계의 대응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대한출판문화협회는 AI 학습용으로 사용할 것으로 의심되는 대량 구매 주문 현황 등을 파악하기 위해 각 서점과 유통사, 출판사 등을 대상으로 실태 조사에 착수했다. 한국출판인회의도 최근 AI 학습에 이용한 출판물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지난 15일 시작된 연명 운동에는 이미 출판사와 관련 기관 등 단체와 작가, 번역가, 출판 관계자 등의 참여가 이어지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국내 저작권자들이 자신의 책이 어떤 경로로 AI 기업에 확보됐으며, 실제 학습자료로 이용됐는지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피해 사례가 확인된다고 해도 거대 AI 기업에 문제를 제대로 제기하고 합당한 보상을 받는 것이 가능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 관련 제도 보완 서둘러야
일반적으로 책 한 권의 판매 가격에는 책을 소유하고 읽을 권리가 반영돼 있다. 하지만 해당 책의 내용을 상업용 AI 모델의 학습 자료로 이용할 권리까지 당연히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I 기업이 책을 대량 구매한 뒤 이를 스캔해 학습자료로 전환할 경우 저작권자에게 추가 사용료를 지급해야 하는가 여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정해져 있지 않다. AI 발전 속도가 워낙 빨라 제도가 이를 뒤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인 셈이다.
현재까지 제도적으로 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한 나라는 없다. 각국은 법률과 저작권 제한 규정에 따라 이 문제를 다르게 해석한다. 하지만 유럽연합의 경우 AI 기술을 발전시키고, 저작권자의 권리도 명확히 보호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제도를 정비하고 있다. 유럽의회는 지난 3월 결의를 통해 AI 기업에 대해 저작권 보호와 정당한 보상, 학습 자료 투명성 강화를 촉구했다. 독일 출판업계는 지난 6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계기로 AI 학습에 대한 저작권 보호 강화를 촉구하는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법적 장치가 미비해 AI 학습에 따른 저작권 침해 사례 대응에 한계가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국내 AI 기업이 시중에서 판매하는 책을 구입해 스캔한 경우 합법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반면 저작권자의 별도 허락이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학습이 위법이라고도 판단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대한출판문화협회 등은 현재 AI 학습 관련 보상 체계를 마련하고 입법화를 서두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관련 법 제도를 정비해 보상금의 산정과 징수 등에 적용할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 과제가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것이다.
특히 전문가들은 AI 기업들이 현재처럼 적절한 보상을 지불하지 않고 저작물을 AI 학습에 무단 사용할 경우 새로운 지식을 생산할 동기와 환경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한다. 즉, 지식 생산 기반인 출판과 저술 환경이 위축되면 장기적으로 AI 발전에도 불리하다는 것이다. 한국이 AI 강국으로 도약하려 한다면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AI 모델 개발에 대한 투자뿐 아니라 작가와 연구자, 출판사 등 지식 생산 그룹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AI 시대, 국내 출판계와 작가들의 저작권이 훼손되지 않도록 정부와 정치권의 발 빠른 대응을 촉구한다.
2026-10-24 [09:00]
-
영화 ‘기생충’이 라 스칼라 무대를 바꿨듯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K컬처는 대중적 인기에 그치지 않고 내면에 스며드는 단계, 즉 소프트 파워로 발전했다. 한국 영화의 주제 의식이 고전 오페라의 결말까지 바꿔 놓는 경우도 낯설지 않은 이유다.
이탈리아 라 스칼라 극장이 2022년 무대에 올린 ‘리골레토’는 영화 ‘기생충’의 사회경제적 불평등 서사를 차용한 파격적인 연출로 충격을 줬다. 만토바 공작은 박 사장, 리골레토는 김 기사로 설정되고, 각각 화려한 빌라와 비루한 은신처라는 공간 격리를 통해 계급적 갈등을 드러내는 식이었다.
원작에 없는 집단 봉기와 복수극이 펼쳐지고, 공작과 귀족들이 살해되는 결말은 평단에 격렬한 논쟁을 불렀다. 주세페 베르디가 의도했던 비극적 카타르시스를 훼손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중세 신분사회의 불합리를 현대의 양극화 프레임으로 재현하려는 문제의식과 도전 정신만큼은 인정받았다.
원작의 과감한 변주는 제작극장의 권위와 능력을 상징한다. 어설픈 해석은 원전을 망치지만, 설득력 있는 재해석은 새 생명을 불어넣는다. 시대의 질문으로 작품을 읽어내고 무대·음악·연기·기술의 총체적 언어로 구현해 낼 수 있어야 본격 제작극장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시설만 번듯하다고 언감생심 넘볼 수 없다는 의미다.
오페라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대중적 공연예술로 발전했고, 밀라노에서 꽃을 피웠다. 그 전통은 각각 라 페니체와 라 스칼라로 이어져 있다. 라 스칼라는 한국과의 인연도 남다르다. 1988년 서울올림픽 문화축전에 단원 400여 명이 내한해 ‘투란도트’를 공연한 것이다. 거액의 비용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지만 한 개발도상국의 용틀임을 세계에 알리는 팡파르였던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또 극장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 음악감독으로 정명훈 지휘자가 선임돼 올해 시즌부터 지휘봉을 잡는다.
중국 상하이대가극원(Shanghai Grand Opera House)과 부산은 묘한 대비를 이루는 선택을 했다. 상하이는 17일 개관하면서 라 페니체의 ‘토스카’를 초청했고, 부산은 2027년 9월 개장을 목표로 라 스칼라 ‘오텔로’ 무대를 계획했다. 하지만 부산시는 14일 예산·준비·지역 연계성을 고려해 해외 명문 극장의 초청을 중단했다. 개관을 2028년으로 미루고 준비 기간을 거쳐 아시아 대표 제작극장으로 육성한다는 방향도 제시했다. 초청 공연 취소와 개관 일정 연기는 분명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를 후퇴로만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찬반에서 드러난 논점을 정리하고 새 판을 짤 기회를 얻었다는 점에서는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신생 극장이 풀어야 할 난제는 쓰나미처럼 덮쳐 온다. 콘텐츠와 제작 역량, 재정 문제는 어쩌면 라 스칼라 논란 이상의 시련일 수 있다. 백전노장의 세계 유명 극장들도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 난관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우선 콘텐츠다. 20년을 기다린 북항 재개발 지역에 세계적 수준의 예술공연장이 들어섰다고 기뻐할 지역민들 앞에 어떤 잔칫상을 차릴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던 점은 처절하게 반성해야 한다. 105억 원이라는 거액의 위압감 때문에 개막작에 대한 논의가 허술했던 것이 사실이다.
당초 개관 기념 페스티벌 리스트에 포함된 오페라 ‘오텔로’와 ‘레퀴엠’은 모두 베르디의 걸작이다. 하지만 ‘오텔로’는 인종, 젠더, 권력, 폭력이 난마처럼 엮인 고난도 비극이다. ‘Dies irae(진노의 날)’로 널리 알려진 레퀴엠은 죽음과 심판을 다룬 장례 미사곡이다. 예술적 완성도 측면에서 손색이 없고 성악과 합창, 관현악이 어우러지는 대작인 점에서 최신 기술을 갖춘 신생 공연장의 강점을 드러낼 기회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지역 랜드마크가 탄생하는 날에 어울리는 최선의 레퍼토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부산시는 지역의 역사와 삶, 문화적 정체성을 담은 창작 오페라를 개관 시즌 때 내놓겠다고 선언했다. 역동하는 부산의 이미지를 대변하지 못하는 작품들 대신 ‘지역의 DNA’를 보여주겠다는 방향은 옳다. 다만 선언만으로 제작극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획부터 대본, 작곡, 연출, 무대, 연습, 공연, 재공연까지 이어지는 제작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부산오페라하우스가 진정한 제작극장을 꿈꾼다면 개관작은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제작 역량을 입증하는 첫 작품이 돼야 한다.
전 세계 오페라극장은 관객 감소와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다. 신생 극장을 여는 부산은 그 냉엄한 현실에 맞닥뜨릴 각오를 해야 한다.
지난달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의 파업은 출발점에 선 부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극장 측은 티켓 판매가 수입의 15%에 불과해서 연간 1500만 달러(우리 돈 200억 원) 적자가 발생한다며 최대 26% 임금 삭감안을 제시했다가 반발을 불렀다. 공연을 할수록 손해가 누적되기 때문에 무대 횟수를 줄여야 하고, 이 때문에 단원들이 받는 보수가 줄어드는 방식을 제안한 것이다. 악단이 거리 시위에 나선 탓에 시즌 개막작까지 취소되자 시장까지 중재해 나선 끝에 노사는 가까스로 합의안을 도출하고 공연을 재개할 수 있었다.
명불허전의 뉴욕메트로폴리탄오페라도 운영난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오죽했으면 조란 맘다니 뉴욕시장이 유료 좌석 7만 개를 추첨으로 시민들에게 나눠주기로 했겠나. 맘다니 시장은 지난달 24일 ‘모두를 위한 오페라(Opera for All)’ 캠페인을 발표했고, 동시에 극장 측은 15억 달러(우리 돈 2조 원) 모금 캠페인을 시작했다.
한국과 달리 미국의 오페라극장은 시 산하 사업소가 아닌 민간 재단이 운영한다. 그래서 시장이 노사 중재나 관람 캠페인을 벌일 의무는 없다. 하지만 오페라극장은 단순한 공연장이 아닌, 멈춰서는 안 되는 도시 문화 인프라라는 사회적 합의가 있다. 행정이 두 팔 걷고 나서는 이유다.
후원자의 기부와 기업의 협찬만으로 운영에 한계를 드러낸 클래식 공연장에 공공 재정은 어디까지 투입돼야 하는가. 그 균형점을 찾는 데에 전 세계가 골몰하고 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지역 오페라극장을 운영하게 된 부산시 앞에는 외로운 결단이 기다리고 있다. 선례를 찾기 어려운 고독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오페라하우스 개관을 주관하게 될 클래식부산 대표의 공모 절차가 진행 중이다. 12월이면 새 진용이 갖춰지고 극장까지 완공된다. 개관에 앞서 남은 1년 남짓의 시간은 여유롭지도, 촉박하지도 않다. 다행히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열악한 출발점은 아니다. 정명훈 지휘자를 비롯해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는 한국의 클래식 역량도 만만찮다. 명문 오페라극장조차 K콘텐츠에서 영감을 얻고 경쟁력을 키우려는 시대다. 라 스칼라 초청 반대 논거 중 ‘문화 사대주의’론까지 제기된 대목은 지나친 감이 있었다. ‘오징어 게임’이 생존 경쟁의 잔혹한 은유로 세계인의 공감을 얻었듯, 한국은 이미 문화 콘텐츠 강국 아닌가.
이제 필요한 것은 그 저력을 오페라라는 종합예술로 옮겨 놓는 상상력과 제작 시스템이다. 부산에는 항구와 바다, 피란과 이산, 산업화와 노동, 이주와 교류가 켜켜이 쌓인 서사가 있다. 이를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이야기로 빚어내는 것이 제작극장의 과제다. 영화 ‘기생충’이 라 스칼라의 ‘리골레토’를 바꿔 놓았듯, 부산의 이야기가 세계 오페라의 새로운 해석과 창작을 이끄는 날을 꿈꾸자. 그때 비로소 부산오페라하우스는 세계적 극장을 흉내 내는 무대가 아니라 세계가 주목하는 제작극장으로 우뚝 설 것이다.
2026-10-17 [09:00]
-
분권형 개헌 한다 하니 지방분권 하는 줄…[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대한민국에서 개헌 논의는 비등점에 다다르고도 오랫동안 끓어 넘치지 않는 물과 같은 상태다.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돼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지만 개헌 절차에 들어가기 위한 정치 협상 단계에서 항상 벽이 생기곤 한다. 그럼에도 현행 헌법이 가지는 여러 공백들이 비상계엄과 이후 정치·사회적 현실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이상 개헌 논의는 언제든 또다시 불거질 터이다.
개헌 논의가 이슈로 떠오르면 입버릇처럼 나오는 표현이 하나 있다. ‘분권형 개헌’이 그 주인공이다. 권한을 나누는 형태로 개헌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보이니 왠지 더 민주적인 것 같고 그럴싸해 보인다. 하지만 이 표현을 두고 수도권 정치세력과 비수도권 국민들이 가지는 생각은 천양지차다.
■수도권 정치세력의 생각
수도권 정치세력들이 분권형 개헌을 얘기할 때는 주로 대통령과 총리 혹은 국회 사이의 권한 배분을 의미한다. 정부 형태의 변경이 핵심이다. 4년 중임 대통령제, 분권형 대통령제, 의원내각제 등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룬다.
현행 헌법 하의 대통령은 권한이 막강해 ‘제왕적 대통령’이라 불리는 만큼 대통령 권한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고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정부 형태로 분권형 대통령제가 돼야 한다는 게 분권형 개헌의 골자다. 대통령제적 분권형이나 총리 중심 분권형 등을 중심으로 대통령 임기의 중임 여부 등을 통한 권력 구조 재설계에 가깝다.
■비수도권 국민들의 생각
비수도권에서 분권형 개헌을 얘기할 때는 주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사이의 권한과 재원의 재배분을 의미한다.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실질적인 지방분권이 핵심이다. 자주재정권, 자치입법권, 자치조직권 등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룬다.
지방자치제가 도입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수도권 쏠림은 갈수록 심화하고 있는 현실에서 중앙정부에 권한과 재정이 집중되는 현 정치 구조를 뜯어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반영된 논리다. 자치입법권·재정권 강화를 필두로 지역 대표형 상원제 도입과 시도지사 장관급 격상 등의 대안까지 광범위하게 거론된다. 현행 헌법에 선언적으로만 삽입돼 있는 지방자치를 실질적으로 구현할 수 있도록 중앙-지방 관계를 대등한 파트너십으로 전환하자는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왜 헷갈리는가
분권형 개헌이 제대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대통령 권한 축소를 넘어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어떻게 총리나 국회뿐만이 아니라 지방정부와 전반적으로 재배분할 것인지를 담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수도권 정치세력은 주로 정부 형태 변경이나 대통령 임기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지방분권은 부수적 의제로 밀려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현재 개헌 논의에서도 지방분권은 대통령 연임 논란, 권력구조 개편, 5·18과 부마항쟁의 헌법 전문 수록 등의 이슈에 가려 흔적도 찾기 힘든 상태다.
■지방분권 개헌의 갈 길
분권형 개헌 논의에서 후순위나 선언적 표현 정도로 밀린 지방분권을 실질적 의제로 만들려면 '지방분권을 개헌에 포함해 달라'는 요구만 반복하는 것으로는 힘에 부치는 느낌이다. 오히려 권력구조 개편과 교환 가능한 구체적인 조문 패키지를 제시하고 나서는 노력이 더 효율적일 것으로 보인다.
그 조문 패키지에는 지방분권을 헌법 전문 혹은 총강의 국가운영 원칙으로 명시하고 자치입법권·자치재정권·자치조직권 등의 조문 명시, 동남권 등 광역 공동 권한과 재정 기반의 보장 명시 등의 내용이 포함될 필요가 있다.
분권형 개헌을 한다고 하니 지방분권 개헌하는 줄 알았다고 뒤늦게 한탄해서는 의미가 없다. 국민의힘이 현 정부에서 개헌은 없다고 못을 박았지만 개헌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수면 아래에서 여전히 끓고 있다. 지방분권을 지향하는 비수도권 국민들은 이제부터라도 수도권 정치세력들이 분권형 개헌의 실현 방향을 어떻게 잡아나가는지 눈을 부릅뜨고 살필 일이다.
2026-10-10 [09:00]
-
AI의 헌책방 싹쓸이, 왜?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최근 유럽, 미국, 일본 등 세계 각국 중고 서점에서 특이한 주문이 부쩍 늘어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구매자들이 수백, 수천권의 책을 사들이면서도 가격 흥정 없이 온라인에 표시된 가격을 그대로 지급한다는 것이다. 배송 방식도 특이하다. 특정 물류 거점으로 보낸 뒤 한꺼번에 미국으로 나르는 주문이 많다고 한다. 각국 서점업계에서는 이 정체불명의 구매자들이 AI(인공지능) 기업의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때아닌 중고 책 호황의 큰손으로 AI 기업이 지목된 것이다.
■ 헌책방에 쏟아지는 대량 주문
지난 7월부터 일본 각지 헌책방에는 온라인 대량 주문이 잇따르고 있다. 9월 27일 니혼TV의 보도에 따르면 하루 100권이 팔리거나 매출이 평소의 5배로 뛴 헌책방이 많다. 평소 많이 팔리던 소설·만화 대신 철학·역사·의학·법률 전문서가 한꺼번에 팔려나간 곳도 있다. <에도 시대의 장신구> <다이쇼 시대 판례집> 등 사료와 전문서도 포함됐다. 니혼TV는 지난해부터 일본의 한 대형 도서 유통회사 자회사가 미국으로 책 50t 이상을 수출한 기록도 공개했다. 한 권을 대략 500g으로 잡으면 약 10만 권 규모에 달한다.
지난 5월 유럽 아일랜드의 한 중고 서점에도 5000권의 대량 주문이 들어왔다. 기관에서 수천 권씩 책을 살 때는 대개 할인을 요구하지만, 구매자는 온라인에 표시된 가격 그대로 지급했다고 한다. 20여 년 전 아일랜드 정부의 특별저축장려계좌(SSIA)를 설명한 투자 안내서 같은 책도 섞여 있었다. 독일 베를린 중고서점과 고서점에는 수만 유로어치 주문이 한꺼번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주문 목록에는 역사서나 전문서뿐 아니라 운전면허 시험 안내서 같은 책도 포함됐다. 각국 헌책방에 주문이 들어온 책에는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희귀본과 절판본 서적도 있다. 아직 한국의 헌책방에서는 중고 서적 대량 구매 정황은 포착되지 않았다.
■ 책 추적했더니 아마존 시설로
지난 7월 미국의 한 중고 책 판매상에게 수상한 주문이 들어왔다. 온라인 중고 책 플랫폼 ‘비블리오’(Biblio)를 통해 한꺼번에 들어온 주문은 약 1000권에 달했다. 책의 분야나 저자도 제각각이었다. 익명으로 책을 사고파는 플랫폼 특성상 판매상은 구매자를 알 수 없었다. 미국 정보기술 매체 ‘404미디어’는 판매상과 함께 주문받은 책 한 권에 애플의 위치추적기 ‘에어태그’를 몰래 넣었다. 미국 곳곳의 물류 거점을 거쳐 책이 도착한 곳은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의 아마존 물류 시설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현장 직원들은 대량으로 들어온 책의 책등을 잘라 낱장을 스캔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종이책은 파쇄됐다고 한다. 아마존 측은 “제품·서비스 개발과 개선을 위해 책을 구매한다”고 설명하면서도 구매량과 구체적인 활용처는 공개하지 않았다.
■ 책 파쇄와 AI 학습, 저작권법의 쟁점
미국 AI 기업 앤트로픽은 2024년 챗봇 클로드 학습을 위해 ‘프로젝트 파나마’라는 이름으로 실물 책 수백만 권을 사들인 뒤 제본을 뜯어 디지털화하고 원본은 폐기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됐다. 작가들이 제기한 저작권 침해 소송 과정에서 책을 대규모로 구매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지난해 6월 미국 연방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앤트로픽은 수백만 달러를 들여 중고책을 포함한 종이책 수백만 권을 샀다. 외주 업체가 책을 해체해 스캔한 뒤 종이 원본을 버렸고, 앤트로픽은 이렇게 모은 자료 중 일부를 AI 학습에 사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법원은 앤트로픽이 책을 구입해 AI 학습에 이용한 행위를 ‘공정 이용’으로 인정했다. 합법적으로 구매한 종이책을 스캔한 뒤 원본을 폐기하고 사내 디지털 자료실에 보관한 행위도 허용했다. 디지털로 스캔한 뒤 원본을 완전히 파괴하면 이를 무단 복제가 아닌 물리적 책을 디지털로 ‘형식 변환’한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다만 이 판단이 모든 AI 기업에 종이책의 무제한 디지털 복제와 학습을 허용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반면 법원은 앤트로픽이 수백만 권 해적판 전자책을 내려받아 보관한 행위까지 ‘공정 이용’으로 보지는 않았다. 결국 앤트로픽은 작가·출판사 측과 15억 달러(2조 원) 규모 합의에 나섰고, 미국 법원은 지난 7월 이 합의를 최종으로 승인했다. 미국 저작권 집단소송 사상 최대 규모였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AI 기업들이 종이책을 합법적으로 구매한 뒤 디지털화하는 방식을 확대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행위가 언제나 공정이용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어서 저작권 보호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 인류 지혜 독점해선 안 돼
AI 기업이 오래된 종이책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학습 데이터의 품질이다. 특히 2022년 11월 챗GPT가 대중화되기 이전에 출판된 책들은 생성형 AI가 만든 글이 섞였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아 학습자료로서 가치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모델 성능이 고도화될수록 학습에 필요한 신뢰도 높은 원문 데이터가 더 많이 필요하다. 학습에 쓰이지 않은 상업 출판물만 아니라 헌책과 희귀본이 ‘원천 데이터’로 몸값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 오래된 종이책에는 인터넷에서 구하기 힘든 지역사, 전문 지식, 생활 문화, 소수 언어 자료까지 담겨 있다. AI 기업 입장에서는 이미 경쟁사들이 긁어간 인터넷 자료와 겹치지 않는 신선한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다. 생성한 AI가 아니라 사람이 직접 쓰고 편집자가 다듬은 2022년 이전의 문장을 담은 책이 상대적으로 희귀 자본이 되었고, AI 개발 회사가 그 가치를 간파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AI 모델 개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종이책 파쇄 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인터넷에 공개된 블로그와 뉴스, 위키피디아 등은 이미 많은 AI 모델의 주요 학습자료로 활용돼 왔다. 반면 종이책은 편집자와 출판사의 검증을 거친 고품질 지식이 담겨 있어 AI의 추론력과 문해력을 높일 핵심 자원이다. 거대 자본을 등에 업은 AI 기업들이 희귀본과 절판본까지 대량으로 사들여 스캔한 뒤 폐기한다면, 일부 도서의 보존과 접근성이 악화될 우려가 있다. 특히 대체할 수 없는 희귀 자료가 사라질 경우 후대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의 지식 접근권이 침해될 수 있다. ‘AI의 분서갱유’로 인해 기술의 발전이 실물 지식의 생태계를 파괴하고 정보 불평등을 심화하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될 일이다. 인류가 쌓아 올린 지식, 지성, 지혜를 소수자만 누린다면 너무 불합리하지 않은가.
2026-10-03 [09:00]
-
‘오빠’는 죄가 없다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오빠 수난 시대’다.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 검증 과정에 등장한 ‘오빠’ 단어가 정국을 뒤흔들고 있다. 브로커의 전화에 오빠가 나서서 정상 절차로는 어렵던 신약 허가 기간을 확 줄여준 사실이 드러나며 온 국민이 도대체 어떤 ‘오빠-동생’ 사이인지 지켜보게 만들고 있다.
되돌아 보면 일상의 호칭인 오빠가 정치 스캔들이나 권력 남용, 불미스러운 성희롱 사건에 얽혀 수난을 겪은 사례가 한두 차례가 아니다. 오빠는 시대적·사회적 맥락에 따라 무대 위 스타를 지칭하는 ‘애정의 단어’였다가 ‘정치 거래의 언어’로, 때론 ‘위력 행사의 폭력’으로 변모했다. 오빠의 변천사를 한 번 돌아봤다.
청춘의 우상이자 낭만의 대명사
오빠는 남매 사이에, 연령 차가 있는 남녀 사이에, 때로는 연인 사이에 쓰이는 친근함과 친밀감 담은 호칭이다. ‘동네 오빠’ ‘선배 오빠’ ‘옆집 오빠’ ‘교회 오빠’, 온갖 오빠가 있다. 관계와 상황, 어조에 따라 오빠 호칭에 담긴 감정도 다양했다. 서울 가면 비단 구두 사다 줄 것만 같던 전통적 의미의 오빠에 본격적으로 사회적 의미를 더한 것은 대중문화였다.
1960~70년대 ‘원조 오빠’ 남진·나훈아를 거쳐 ‘영원한 오빠’ 조용필이 인기를 끌면서 오빠는 대중문화 전면에 등장했다. 얼마나 오빠가 편했던지 리처드 클리프 같은 외국인도 ‘오빠’였다. 공연장에서 터지던 오빠 함성은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에 눌려 있던 여성들이 열정과 애정을 발산하는, 사회적으로 용인된 언어였다.
스포츠에도 오빠가 생겨났다. 대략 1990년대 농구대잔치에 실력과 외모를 겸비한 스타들이 등장했을 때다. 농구장을 가득 메우던 ‘오빠 부대’를 향한 우려 섞인 시선도 없진 않았지만 순수한 팬심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게 대체적인 분위기였다.
대중문화 산업도 오랜 기간 스타를 친근하고 보호받고 싶은 오빠로 인식하게 하는 데 성공, 유대감과 충성도 높은 팬덤을 만들어 냈다.
정치에 입성한 ‘오빠’, 팬덤을 만들다
이 낭만적인 단어가 정치와 결합하면서 의미 분화가 이뤄졌다. 정치에서 오빠 단어 효과를 본 정치인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꼽힌다. 노 대통령을 당선시킨 일등공신인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대선 과정에서 세를 불려나가면서 열혈 지지자를 비판하는 ‘노빠’(노무현 오빠 부대) 용어가 나왔다. 하지만 노사모 회원들은 스스로 노빠를 자처하면서 긍정적 의미로 바꿔냈다. 이후 정치권에서는 ‘~빠’가 자연스러워졌다.
수긍이 쉽게 안 가지만 이명박 대통령도 ‘오빠’ 수혜자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때 이 대통령 지지자들은 ‘경제 먼저, 오빠 먼저’ 플래카드를 들고 지지 활동을 펼쳤다. 경쟁자였던 박근혜 후보와 대비시키고, 경제 대통령과 오빠 이미지를 앞세워 지지세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이 대통령이 대선 때도 트로트곡 ‘오빠만 믿어’를 개사한 ‘명박만 믿어’를 로고송으로 쓴 사실을 보면 오빠 마케팅 효과가 없진 않았나 보다. 이때만 해도 정치권에서도 ‘오빠’ 호칭은 정치 팬덤을 지칭하거나 지지를 유도하는 친근함의 의미가 강했다고 할 수 있겠다.
‘오빠의 추락’…공사 경계를 넘다
오빠 호칭에 부정적 의미가 강화된 것은 오빠를 앞세워 공적·사적 영역이 허물어지는 일이 터지면서다. 2007년 신정아 씨 사건 당시 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을 가리킨 ‘예일대 오빠’라는 표현이나, 2021년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에서 이정근 전 민주당 사무부총장이 윤관석 전 의원과의 통화 중 “거기 해야 돼 오빠”라고 말한 녹취록이 대표적이다. 공식 호칭 대신 오빠라는 사적 호칭이 사용된 정치 스캔들이 이어지면서 국민들에게 오빠는 공적 권력과 은밀한 청탁을 뒤섞는 매개로 조금씩 자리 잡게 됐다. 부당한 뒷거래가 있는 것처럼 비쳤고, 때론 정권에 부담이 가기도 했다.
최근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싸고 불거진 ‘오빠 로비’ 의혹도 국민에게 유사한 인식을 부르며 연일 파장이 커지고 있다. 후보자와 사적 친분이 있는 브로커가 오빠라고 부르며 이권 청탁을 시도했고, 김 후보자가 그 청탁을 적극적으로 들어줬다는 게 의혹의 골자다.
‘오빠-동생’이라는 사적 소통 구조가 권력의 그늘에서 작동한 것 아니냐는 점에서 국민 공분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인물이 공적인 검증과 권한 행사가 핵심인 법무부 장관 수장에 적합하냐는 문제제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오빠’ 오남용, 부메랑이 되다
정치인 스스로 부적절한 ‘오빠’ 표현을 써 구렁텅이에 빠지는 일도 잦았다. 우근민 전 제주지사는 2002년 여성단체로부터 성추행 혐의로 고발 당하자 “오빠 동생 하는 사이였다”는 황당한 말로 위기를 모면하려다 반발을 불렀다. 우 전 지사는 추후 대법원으로부터 성추행 최종 판결을 받았다.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오빠 오남용 사례도 있다. 2019년 이 의원이 단식투쟁을 벌이던 황교안 당시 대표를 풍자하는 과정에서 오빠를 잘못 끌어다 쓴 일이다. 이 의원은 황 대표를 비판한다면서 나경원 의원의 이름을 빌려 ‘황교안 오빠, 나경원 올림’ 이란 가상 편지를 써 SNS에 올렸고, 성희롱성 지적에 부랴부랴 글을 수정했다.
최근 사례로는 지난 총선 때 정청래 민주당 대표가 하정우 후보 지원 유세 현장에서 초등학생에게 “여기 정우 오빠, 오빠 해봐요”라고 유도해 논란이 벌어진 일이 있다. 이 사태에 국립국어원까지 나서서 초면에 나이 차이가 40세 이상 나는 연상의 남성에게 오빠 호칭을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답변까지 내놨다.
정치 무대에서 오빠가 등장할 때마다 예외 없이 불거지는 ‘오빠 게이트’, 혹은 ‘오빠의 정치학’은 이제 한국 정치가 넘어야 할 음습한 유산이 돼가고 있다.
권력 가리는 ‘오빠’의 일상화
“교수라 부르면 F학점, 오빠라고 부르면 A학점을 주겠다” “‘오빠, 오빠’하며 술을 따라야 한다” “탄탄대로 걷게 해 줄게. 오빠만 믿어” “오빠들 만나러 가려면 수업 빠져도 돼”…. 쉽게 안 믿기겠지만 최근 수년간 실제로 쓰여져 피해자까지 만들어 낸 말들이다.
오빠를 교묘하고 비열한 방식으로 쓰는 일은 영역이 따로 없다. 교단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스스럼없이 내뱉는가 하면, 공직 사회나 민간 기업에서 상급자가 동료 직원들에게 위력을 행사할 때 오빠라는 가면으로 가렸다. 위계가 분명한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런 성추행과 성희롱은 피해자가 상하관계 때문에 문제 제기를 못할 것이라는 계산도 깔렸다는 점에서 비겁하기까지 하다.
공적 권력과 사적 친밀함을 구분하지 못하고 위력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오용된 오빠라는 호칭. 공과 사의 경계를 바로 세우지 않는 한, 한때 정겹고 낭만적이던 이 단어가 예전의 순수함을 회복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2026-09-19 [09:00]
-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전쟁은 왜 끝나지 않는가
전쟁은 엄청난 비극이다. 막대한 인명 피해는 물론 공들여 구축한 문명 시설을 송두리째 파괴한다. 제2차 세계대전 등에서 드러났듯이 그 잔인하고 참혹한 행태로 인한 후유증은 세대를 넘어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이어진다. 더욱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요되기에 해당 국가 경제도 큰 위기에 처한다. 고가의 최첨단 무기 의존도가 높은 현대전은 더욱 그렇다. 따라서 정치, 경제적 관점으로 볼 때 현대전은 단기간에 종료되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미국과 이란과의 전쟁에서 드러났듯이 요즘 전쟁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최근 발발한 전쟁마다 장기화 양상으로 흐르면서 최근엔 모병제에서 징병제로 전환하는 국가들마저 이어지고 있다. 더욱이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과 러시아의 경우 당초 손쉽게 전쟁을 끝낼 것으로 점쳐졌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최근 전쟁은 왜 끝나지 않는 것인가.
■ 딜레마 빠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2022년 2월 시작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4년 7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종전 중재 시도가 이어졌지만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특사가 두 나라를 방문해 전쟁 종식을 위한 회담 재개를 중재했다. 하지만 미국 특사단이 떠나자마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상대방 거점을 겨냥해 미사일을 발사하는 등 난타전을 재개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종전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양측이 타협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타협할 만한 절박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로 양측이 모두 자신들이 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러시아는 “조금 더 싸우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우크라이나도 “조금 더 버티면 더 나은 조건으로 협상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는 것. 다시 말해 양측 모두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현재 타협 비용이 전쟁을 계속하는 비용보다 더 크다고 판단하는 역설에 빠져 있다는 설명이다.
평화협정을 체결하더라도 상대방이 합의를 이행할 것이라고 신뢰하지 못하는 것도 주된 이유로 꼽힌다. 러시아는 NATO가 동쪽으로 확대돼 우크라이나가 서방 안보질서에 편입되는 것을 자국 안보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위협에서 벗어나려면 NATO 등 서방과 더 가까워질 필요가 있다.
현재까지 양측이 엄청난 희생을 치른 데 따른 매몰 비용과 국내 정치 부담 문제도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고 있다. 특별한 성과를 얻지 못한 채 평화협정을 체결할 경우 자국 내에서 큰 반발을 초래할 수 있고 이는 정치 부담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양측 모두 자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확실한 승리’와 명분이 필요한 상황이다 보니 현재는 평화협정 체결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으로 치달았다는 분석이다.
이 밖에 양측을 효과적으로 중재할 강력한 국제기구가 없다는 점, 전쟁 장기화로 상대방에 대한 적대적 인식이 길수록 커지고 있다는 점 등도 전쟁 장기화 이유로 꼽힌다. 결국 이 전쟁은 ‘소모전의 역설’에 빠졌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 오늘 협상하는 것보다 내일 협상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믿고 있다 보니 평화협정을 서두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설명이다.
전쟁이 끝나려면 양측이 모두 “앞으로 더 싸워도 지금보다 나은 결과를 얻기 어렵다”는 공감대를 갖고 있어야 한다. 서로가 극도로 고통스러운 교착상태에 봉착할 때 평화협정이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1953년 6·25 한국전쟁 휴전 협정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하지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경우 아직까지 이런 단계에 진입하지 못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따라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당분간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비관적인 전망이 계속 힘을 얻고 있다.
■ 미국과 이란 전쟁, 장기 분쟁 치닫나
2026년 2월 말 본격화한 미국과 이란의 전쟁도 교착 상태에 빠져있다. 전문가들은 미국과 이란 전쟁 장기화의 가장 큰 원인으로 양측 모두 먼저 양보해야 할 만큼 결정적인 패배 상황에 직면하지 않았다는 점을 꼽는다. 즉, 미국은 압도적 군사력으로 이란의 군사, 핵 시설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지만 이란 정권을 굴복시키지 못하고 있다. 반대로 이란 역시 미국을 군사적으로 이길 능력은 부족하지만 미군 기지와 함정, 걸프 지역 동맹국, 유조선 등을 위협하면서 전쟁 비용을 지속적으로 높이고 있다. 미국은 이길 수는 있어도 쉽게 전쟁을 끝낼 수 없고, 이란은 이길 수는 없어도 패배하지 않으면서 버틸 수 있는 비대칭적 교착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는 세계 에너지 수송 통로인 호르무즈해협이다. 미국이 이란 군사시설을 파괴하더라도 광범위한 호르무즈 해안 지역에 분산된 이란의 군사력까지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어렵다. 해협을 완벽하게 장악하려면 미국은 현재보다 훨씬 광범위한 군사력과 지상군까지 투입해야 하는 데 정치·군사적 부담 때문에 쉽지 않은 상황이다. 미국은 대안으로 경제 제재와 해상 봉쇄를 통해 이란의 원유 수출과 경제 활동을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이란 경제가 심각한 어려움에 빠진 것은 분명하지만 이란 지도부가 장기전을 포기할 수준엔 이르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미국과 이란의 경우 타협 조건도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미국은 이란 핵프로그램 제한과 호르무즈해협의 자유로운 항행, 제재를 완화한 뒤 이란이 핵 개발이나 지역 군사활동을 재개하지 않을 것 등을 요구하는 반면, 이란은 제재 완화와 체제 안전, 자국의 핵 권리와 미국과 이스라엘이 다시 공격하지 않는다는 보장 등을 요구하고 있다. 더욱이 양측은 서로 상대방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보다 군사력과 경제력을 유지하면서 상대를 압박하는 형국을 반복하고 있다.
결국 미국은 이란보다 압도적으로 강하지만 이란을 완전히 점령하거나 체제를 붕괴시키려면 엄청난 비용을 치러야 한다. 하지만 미국 내 전쟁 반대 여론과 11월 중간선거 등을 감안할 때 트럼프 대통령이 지상군 투입 등 확전 카드를 꺼낼 가능성은 높지 않다. 미국과 이란 전쟁은 초강대국의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가 반드시 일방적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 전쟁은 승자와 패자가 분명해지는 상황으로 치닫기보다는 제한적 공격과 보복, 경제제재, 협상이 반복되는 장기분쟁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 끝나지 않는 전쟁…징병제·무력 충돌 불감증 급증
냉전 종식 뒤 상당수 국가들이 징병제를 폐지했다. 특히 제1, 2차 세계대전의 직접적 피해를 입은 유럽 국가들은 1990년대 이후 징병제를 폐지했다. 특히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대규모 지상군 병력보다는 미사일 등 최첨단 무기를 갖춘 군대가 효율적이라는 판단도 징병제 폐지에 한몫을 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이후 장기화된 전쟁 양상은 현대전에서도 결국 대규모 병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현재 유럽연합 회원국 가운데 러시아 인근에 위치한 크로아티아가 2025년 징병제 부활을 결정한 데 이어 오스트리아, 키프로스, 에스토니아, 핀란드, 그리스,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이 남성 징병제를 시행하고 있다.
스웨덴도 2010년 징병제를 사실상 중단했으나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이 커지면서 2017년 징병제를 부활시켰다. 특이한 점은 남녀 모두가 징병 대상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모든 청년을 군대에 보내는 방식이 아니라 신체조건·적성·동기·군의 필요 등을 종합해 필요한 인원만 선발하는 선택적 징병제를 도입했다. 덴마크도 여성을 의무복무 대상에 포함시켜 성중립적 징병제로 전환했다. 2011년 징병제를 중단했던 독일은 조건부 징병제를 도입했다. 자원병을 우선 모집한 뒤 필요한 병력을 확보하지 못하거나 안보상황이 악화되면 징병제를 발동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기나긴 전쟁에 이어 미국과 이란 전쟁까지 장기전 양상을 띄면서 각 국가들이 과거 징병제로 회귀하는 등 지구촌 안보 상황마저 송두리째 바뀌고 있다. 전문가들은 좀처럼 끝나지 못하는 요즘의 전쟁들이 무력 충돌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이른바 ‘전쟁 불감증’을 확산시키는 것이 가장 우려된다는 의견을 공통적으로 개진하고 있다. 전쟁 없는 평화로운 지구촌을 만들기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과 각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2026-09-12 [09:00]
-
의료 민영화만큼 두려운 게 온다[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난치병에 걸린 50대 초반의 가장이 있다. 치료하지 않으면 얼마 살지 못할 수도 있는 병이어서 시급한 치료가 필요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었으나 다행히 최근 새로운 치료법이 개발돼 치료만 제대로 받으면 충분히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문제는 이 치료법에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가계의 기둥뿌리가 뽑힐 정도로 거액의 비용이 든다는 점이다. 이 가장은 과연 치료를 받으려 할 것인가.
이 사례는 의료 민영화를 반대하는 이들이 자주 제기하는 딜레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 기술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이 병자에겐 세계 최악의 지옥이라 불리는 이유로도 자주 꼽히는 딜레마다. 이 딜레마에서 출발한 논의는 한국의 의료보험 제도가 이 같은 구멍을 메울 수 있어야 한다는 쪽으로 곧잘 발전한다. 국가가 담당하는 필수 서비스의 강화로 개인의 막대한 부담을 막아야 한다는 이 논리는 의료 민영화 시도도 곧잘 제동을 걸어 왔다.
■또 다른 민영화
의료 민영화와는 전혀 다른 문제이지만 구조적으로 평행을 이루는 존재가 있다. 바로 최근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강행된 형사소송법 개정 내용이다.
의료 민영화 비판의 핵심은 국가가 담당하던 필수 서비스를 개인이 시장에서 스스로 거액의 비용을 지불하고 사서 써야 하는 구조로 전환된다는 데 집중된다. 이런 논리를 이번 보완수사권 폐지를 골자로 하는 형소법 개정에 적용해 보면 구조적 평행이 드러난다.
바뀐 형소법에 따라 종전에 검사로 대표되는 국가가 무상으로 제공하던 ‘수사 결과의 법률적 완성’ 작업을 이제는 피해자가 자비로 변호사를 고용해 해결해야 할 판이 됐다. 공적인 의료보험으로 해결할 수 있던 병원 치료를 사보험과 자비 부담으로 넘기는 것이 의료 민영화라면 사법 시스템의 이 같은 변화도 ‘사법 민영화’ 혹은 ‘검찰 민영화’가 아니라 하기 어렵다.
■누가 비용을 치르나
의료 민영화에 빗댄 사법 민영화가 비유로서 성립하는 이유는 지불하는 비용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서비스의 질이 달라진다는 데 있다. 앞서 난치병에 걸린 50대 가장의 사례에서는 거액의 치료비를 부담해야만 살 수 있다면 과연 살려는 시도를 할 수 있을지가 딜레마였다. 마찬가지로 거액의 변호사비를 부담해야만 제대로 된 수사 결과의 법률적 완성을 기대할 수 있다면 피해자가 어떻게 할 것인지가 문제인 것이다. 두 경우 모두 가장 큰 문제는 비용 부담 능력이 없거나 모자란 계층은 서비스를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도 국가 몫이 있다?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겠지만 의료 민영화가 되어도 기존 의료보험으로 어느 정도는 치료비 감당이 가능하다. 경제적 약자에게 국가가 제공하는 의료보호 제도 같은 것들도 있다. 마찬가지로 사법의 민영화 이후로도 공적 제공 영역은 여전히 존재할 수 있다. 민주당 내 강경파들이 주장한 것처럼 국선 변호사를 선임하는 방법이 그에 해당할 터이다. 하지만 모든 사건에 국선 변호사 선임이 가능한 것도 아니고 국선 변호사를 무한정 늘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무상으로 의료 서비스를 한다던 유럽 어느 나라에서 병자가 치료에 돈이 안 드는 대신 의사를 만나보려고 기다리다 죽었다는 우스개처럼 국선 변호사를 기다리다 사건의 결정적 시기를 놓치는 피해자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민영화가 아니라면
검찰 보완수사권 폐지 조치를 사법의 민영화로 보는 것은 지나치다는 주장도 있다. 그 조치가 의료 민영화처럼 민간시장으로 서비스를 완전히 넘기는 것이 아니라 검사에서 경찰로 국가 기관의 기능을 재배분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검찰이 경찰에 보완수사를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남아있는 한 피해자의 자비 변호사 선임 시나리오로 곧장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보완 설명'도 곁들여진다.
이 같은 주장과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번 형소법 개정이 사법의 민영화라는 지적을 피할 수 있으려면 논의는 결국 하나로 수렴한다. 경찰을 사법 서비스의 공적인 대체 공급자로 인정할 경우 그동안 검사가 무상으로 제공하던 ‘수사 결과의 법률적 완성’을 경찰이 균질하게 제공할 수 있을지 여부다. 그 논의에 대한 답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면 무소불위 검찰을 개혁한다는 대의에도 불구하고 이번 형소법 개정을 향한 사법의 민영화라는 비판은 더욱 거세질 게 분명하다.
가장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시스템을 방치하는 대한민국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기 때문이다.
2026-08-29 [09:00]
-
서울 사람에게 날씨 걱정을 다 듣다니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잠드는 순간까지 ‘덥다’ 소리를 되뇌던 여름도 사그라들고 있다. 어느덧 서늘한 바람이 스치고, 그늘에 들면 더위도 견딜만해졌다. 역시 지구가 도는 건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돌아보면 올여름 부산·울산·경남 사람들 삶은 간단치 않았다. 물론 날씨 때문이다. 장마철이라더니 비 구경하기 힘들었고, 보통 여름이겠거니 만만히 여기다 큰코다쳤다. 2026년 부울경 여름은 ‘더웠다’ 한마디로는 부족하다. 국내 기상 관측 역사를 새로 쓰며 우리를 멘붕에 빠트린 부울경 올여름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본다.
여름 맞아? 방심하다 당했다
장마철이 됐지만 부산·울산·경남엔 비는커녕 햇빛만 쨍쨍했다. 장마도 6월 30일 시작돼 평년보다 7일이나 늦게 ‘지각 개장’했다. 하지만 기온은 평년 수준이었고, 맑은 날씨가 이어졌다.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될 때만 해도 흔한 여름 수준이 예상됐다. 기상청이 올해 처음 도입한 폭염중대경보 첫 발령 지역이 경북 포항과 경산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12일이었다. 관계부처에 비상이 걸렸지만 이때만 해도 ‘그 지역들이야 원래 더운 곳이니’ 했다.
하지만 7월 하순, 부울경 날씨가 심상찮아졌다. 7월 28~31일 경남 일최고기온이 4일 연속 역대 1위를 찍은 것. 이름도 생소한 ‘티베트고기압’ 용어도 이 즈음 뉴스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7월 말 밀양, 부산, 거창, 진주가 연이어 일최고기온 신기록을 세우며 평년과 다른 판도를 예고했다.
‘대프리카’ 넘어버린 ‘양프리카’
올여름 주인공은 단연 양산이었다. 8월 2일 오후 1시 26분, 무려 42.5도를 찍으며 122년 대한민국 기상 관측 사상 최고기온 챔피언을 차지해버렸다. 2018년 강원 홍천(41도) 기록을 7년 만에 갈아치웠다. 양산은 7월 29일 이후 닷새 연속 40도를 넘기는 기염을 토했다. 이 기록도 역대 처음이다.
덕분에 역대 최고기온 기록 1~3위 자리를 양산이 싹쓸이했다. 2위는 41.6도(8월 1일), 3위는 41.4도(7월 31일)이다. SNS에는 ‘양산 다녀온 옥수수가 팝콘이 아니라 숯으로 연성됐다’는 짤이 밈으로 떠돌았다. 당연히 ‘양프리카’ 수식어도 물려받았다.
양산의 미친 더위는 기온 상승 최적 조건이 두루 갖춰졌기 때문이다. 이중 고기압이 대기를 짓누르며 기온을 올렸고, 고온다습한 서·북풍이 영남알프스를 넘으며 푄현상을 불렀다. 양산은 분지 지형이라 열기가 잘 빠져나가지도 않았고, 바싹 마른 땅도 한몫했다.
더위야, 잠은 좀 자자
입추(지난 7일)가 지나고도 부울경은 밤낮 없이 뜨거웠다. 역시 양산이었다. 양산은 7월 17일부터 8월 10일까지 무려 25일간 열대야 행진을 이어 갔다. 양산 지역 역대 최장 기록이다. 부산도 7~8월에 걸쳐 22일간 이어진 ‘열대야 챌린지’에 성공했다. 열대야는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오전 9시까지 기온이 25도 이상 유지되는 현상이다. 창원 북부와 거제는 숨은 ‘열대야 피해 지역’이었다. 두 곳은 7~8월 두 달간 30일 넘게 열대야에 시달렸다.
사악한 밤더위는 8월 11일 상층 티베트고기압이 북쪽으로 물러나며 겨우 끝났다. 밤까지 이어지는 열섬 현상이 사그라들었고, 공기에 습도도 줄었다. 하지만 양산은 역대 부울경 열대야 순위에서는 1위 달성에 실패(?)했다. 1994년 29일간 열대야를 이어간 창원이 1위 자리를 지켰다. 부산도 2024년 26일간 열대야를 기록했다.
서울 사람이 부산 날씨 걱정
올여름 날씨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지역 양극화’였다. 7월 폭염일수가 15일을 넘은 곳은 모두 국토 남쪽에 몰려 있다. 대구(22일), 의성(20일), 밀양(20일) 등이 특히 심했다. 반면 7월 서울(2일), 인천(1일)은 상대적으로 쾌적했다.
지역 간 차이를 만든 건 비였다. 비가 중부만 골라 내리며 더위를 눌렀기 때문이다. 반면 남부에서는 비 구경이 힘들었고, 폭염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서울도 8월 들어 34~38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가 덮쳤다. 지난 7일엔 38도를 찍으며 “죽겠다” 소리가 나왔지만, 비슷한 시기 40도를 오르내린 부울경에 댈 정도는 아니었다. 이즈음 서울 사는 친척이나 지인에게서 “아직 살아 있냐”는 안부 전화를 받았다는 사람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밀양에서 횡성·의왕 소방차 구경
폭염에 가뭄까지 덮치자 “해도 너무 한다” 소리가 나왔다. 농업 비중이 큰 경남 물 부족이 특히 극심했다. 6월 중순부터 시작된 가뭄이 두 달째 이어졌고, 7월 경남 강수량은 68.0mm로 평년(304.7mm)의 21.9% 수준에 불과했다. 이 역시 역대 가장 적은 기록. 김해 북창원 양산 의령 함양 밀양 등이 7월 역대 최소 강수량 기록을 새로 썼다. 7월 울산에도 고작 28.0mm의 비가 내렸다.
저수지 바닥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지니 더 지켜볼 수 없었다. 급기야 나라가 나섰다. 전국에서 소방물탱크차 200대와 소방관 400명이 경남으로 출동하는 국가소방동원령이 떨어졌다. 폭염에 따른 국가소방동원령 발령은 지난해 강원 강릉에 이어 사상 두 번째다. 올해 부울경은 폭염과 가뭄이 서로를 강화하며 발생한 복합재난 지역이 됐다.
저 푸른, 아니 ‘초록초록한’ 낙동강
더위와 가뭄의 시간이 지속되자 낙동강과 그 지류를 녹조가 뒤덮었다. 6월 22일 낙동강 물금·매리 지점과 칠서 지점에 내려진 조류 경보 ‘경계’ 단계는 한 달가량 지속됐다. 상황이 좀 나아지나 싶더니 8월 10일 두 지점에 다시 경계 경보가 내려졌다.
소동도 잇따랐다. 창원에선 수돗물에 냄새 물질이 검출됐고, 양산 논과 밭에도 녹조가 밀려들었다. 낙동강 유역 주민 소변에서 유해 남세균이 만드는 독소가 검출됐다는 환경단체 고발도 이어졌다.
환경당국이 녹조를 줄이겠다고 낙동강 하류 보를 열었더니 오히려 남조류가 11배나 폭증하는 ‘레전드 역효과’가 났다. 상류 녹조를 하류로 몰았다는 비난이 뒤따랐다.
더위가 태풍도 막았다?
얼마나 더웠던지 부울경 사람들은 “태풍 안 오느냐” 넋두리도 자주 내뱉았다. 하지만 올해 태풍들은 한반도 고기압 ‘포스’에 기가 죽었는지 모두 한반도를 비껴갔다. 올해 8월 22일 현재 발생한 태풍은 18개. 모두 올라오기도 전에 소멸하거나 한반도 대신 중국·일본으로 향했다.
더위가 태풍을 막은 것 아니냐고? 일정 부분 맞는 말이다. 여름철 태풍은 보통 북태평양고기압 가장자리를 따라 이동하는데 올해는 고기압 세력권이 한반도 주변까지 확장하며 태풍 이동 경로에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국내외 기상 소식을 종합하면 올해 강한 엘니뇨로 태평양 해수면 온도가 높아져 태풍 활동이 활발하다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과거 피해 사례를 보면 늦은 태풍일수록 피해가 컸다. 좋은 것도 있었다. 워낙 더워 모기 활동이 잠잠했다.
‘살고 보자’…야구도 축제도 스톱
더위는 프로스포츠와 축제도 멈춰 세웠다. 한국야구위원회는 8월 들어 폭염으로 프로야구 전 경기를 한동안 취소하는 역대급 결단을 내렸다. 그렇게 취소된 경기가 30개쯤 된다. 프로 축구에서는 경기를 봄과 가을에 여는 ‘추춘제’로 전환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여름 축제들도 휘청였다. 지난 1일 경남 거제시 사등해수욕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해변문화축제가 취소됐고, 에덴밸리 리조트 루지장을 오르는 이색 스포츠 행사인 ‘2026 양산 어필(UP-HILL) 레이스’도 취소됐다. 밀양시는 극한 가뭄에도 지난 7~9일 사흘간 물 900t이 들어가는 ‘밀양수페스티벌’을 강행했다 빈축을 샀다.
2026-08-22 [09:00]
-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2030 뿔난 민심, 왜?
2030세대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지지율이 급락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연이어 나오고 있다. 청년들의 민심에 이상 신호가 켜진 셈이다. 증시 급락, 부동산 정책 등 청년층과 직결된 문제가 최대 현안으로 떠오르면서 이들의 불만이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 검찰 보완수사권 폐지가 안전 문제를 중시하는 2030 여성들의 실망감을 키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증시와 부동산, 청년 실업, 형사사법 체계 개편 등 서로 다른 정책 영역에서 청년들의 불만이 동시에 쌓이는 상황이다.
■ 청년층 지지율 하락 뚜렷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이재명 정부에 대한 2030 청년세대의 지지율 하락이 뚜렷하다.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지난 10~12일 만 18세 이상 1001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13일 발표한 전국지표조사(NBS)에 따르면 이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응답은 49%로 집계됐다. 40대와 50대에서 긍정 평가가 절반을 넘었지만, 20대 이하는 31%, 30대는 40%에 그쳤다. 60대 45%, 70대 이상 44%보다도 낮은 수치다. 또 여론조사 회사 리얼미터가 지난 3~7일 전국 2514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이 대통령 국정 지지도는 43.4%로, 취임 후 최저였다. 특히 20대에서는 27.9%, 30대에서 33.2%로 다른 연령대보다 크게는 20%포인트 이상 낮았다. 특히 20대에서 부정적 평가는 67.5%에 달했다.
■ 부동산 정책에 대한 불신
이재명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한 2030의 분노가 크다. 핵심은 집값은 잡히지 않는데 대출·청약·전세 제도만 조여져 ‘내 집 마련의 사다리’가 끊겼다는 인식이다. 여기에 대통령의 부동산 거래 방식과 정치권의 청년 주거 대안이 ‘내로남불’ 또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비치면서 정책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
정부는 집값을 잡겠다고 나섰지만, 오히려 강남을 비롯해 서울과 경기 대부분이 올랐다. 또 전세 품귀에 월세도 치솟고 있다. 정부가 부동산 대출 규제를 강화해 내 집 마련이 어려워지고, 주택 공급과 전월세가 부족한 상황이 이어지면서 청년층의 불만이 커지는 것이다. 이에 더불어민주당 황희 의원이 제안한 ‘폐버스 청년 주택’ 아이디어는 청년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삽시간에 온라인에 퍼지며 “한남더휠(고가 아파트인 서울 한남더힐에 차 바퀴의 영어 단어인 휠을 합친 말)에 살라는 것이냐”며 조롱과 분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황 의원은 곧바로 사과했지만, 청년 주거난을 대하는 집권 여당의 한심한 인식 수준을 드러냈다.
청년들의 민심 악화가 우려되자 정부는 13일 부동산 공급 대책을 발표하며 ‘청년 주거 지원 방안’을 내놓았다. 한국주택금융공사가 내년 1월부터 ‘청년미래보금자리론’을 선보이는 것이다. 만 39세 이하 생애 최초 주택 구입 청년을 대상으로 연간 3조 원 규모로 2년간 한시 공급한다. 대상 주택은 4억 원 이하, 전용면적 85㎡ 이하 비아파트다. 1인 가구와 사회 초년생 등이 월세를 내는 대신 주택을 매입할 수 있도록 월세 수준의 원리금 상환 구조를 적용하고, 생애 최초 LTV 우대 혜택도 유지한다. 다만 수도권을 중심으로 집값이 높아진 상황에서 4억 원 이하라는 가격 기준에 비아파트라는 조건까지 더해지면 대상 주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 ISA 계좌 개편안에도 반발
최근 증시 하락 상황은 2030 민심 이반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정부 출범 이후 증시에 대한 기대를 갖고 투자에 뛰어든 청년들이 적지 않았지만, 레버리지 ETF 출시 후 변동성이 심해진 국내 증시에서 실제 수익을 본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청년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커질 수 밖에 없다.
정부가 지난 3일 발표한 세제 개편안에 포함된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개편안도 청년층의 반발을 불렀다. 이자·배당소득에 비과세 혜택을 주는 ISA는 자산 형성 기회가 부족한 청년층의 대표적인 절세 및 자산 증식 수단이다. 그러나 정부 개편안은 투자 대상을 국내로 한정한 ‘생산적 금융 ISA’를 신설하면서 기존 ISA에 대해선 만기 연장을 제한하고 납입 한도 이월을 폐지하는 등 혜택을 축소했다. 개편안이 시행되면 가입자는 만기마다 세금을 정산하고 재가입해야 해 장기 절세 혜택이 끊기고, 목돈이 생겼을 때 한꺼번에 납입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특히 소득이 불규칙한 사회 초년생들은 자산 관리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시장에 미칠 파장과 국민의 수용 가능성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채 정책의 혼선만 빚은 셈이다. 반발이 커지자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7일 ISA 개편안에 대해 전면 재검토를 지시했다.
■ 보완수사권 폐지 여성 민심 이반
더 심각한 것은 이 대통령과 여권의 주요 지지 기반이던 2030 여성층의 민심 이반이다. 한국갤럽이 발표한 월별 여론조사 통계표에 따르면 현 정부 출범 후 1년 사이 20대와 30대 여성의 국정 지지율은 평균치보다 더 가파르게 하락했다. 지난해 7월 61%였던 20대 여성의 지지율은 지난 7월 45%로 16%포인트 하락했다. 같은 기간 30대 여성의 지지율은 69%에서 47%로 22%포인트 떨어졌다. 이 기간 전체 지지율이 64%에서 53%로 11%포인트 하락한 것에 비해 하락 폭이 더 컸다.
젊은 여성 지지층 이탈엔 ‘검사 보완수사권 폐지’를 여권이 밀어붙인 것이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 광주 ‘장윤기 사건’에서 경찰이 놓쳤던 중대 혐의를 검찰이 보완수사로 밝혀내면서,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는 보완수사권 폐지 반대 여론이 높았다. 이들은 두 사건을 생명·안전 이슈로 받아들이며 문제 제기에 나섰지만, 이 같은 목소리가 입법 과정에서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법안 처리 이후 일부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행보도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김용민 의원은 김해 봉하마을을 찾아 “노무현 대통령님 ‘야~ 기분 좋다~!’라고 하고 계시지요”라고 SNS에 적었다. 이에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 김진주(가명) 씨는 “지옥에나 가세요”라고 댓글을 달았다.
■ 청년 현안 해결에 진성성 가져야
정부와 여당은 일자리·주거·자산 형성·안전 보장 등 청년의 현재와 미래가 걸린 현안 해결을 위해 진정성을 갖고 접근해야 한다. 청년에게 외면받는 실책이 이어져서는 안 될 일이다. 청년들이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 함께 고민하고 해법을 찾아가는 공감 능력을 갖춰야 한다. 여러 정책 영역에서 축적된 청년들의 구조적 불만에 대해 정부와 여당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이들의 민심 이반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2026-08-15 [09:00]
-
고1 자퇴 증가, 내신 리셋 때문?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지난해 자퇴한 일반계 고등학교 1학년 학생 수가 1만 명을 넘어섰다. 원인을 두고 추측이 분분하다. 일부 사교육 현장에서는 내신 5등급제 도입에 따라 대입에서 내신 성적 영향력이 커진 것을 주된 이유로 꼽는다. 더 좋은 내신을 받기 위해 자퇴와 재입학을 거쳐 고등학교를 1년 더 다니는 이른바 '내신 리셋’의 영향이라고 진단한다. 반면 교육당국은 내신 5등급제 때문에 자퇴가 증가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엇갈린 반응이다.
■ 자퇴 원인은 내신 리셋?
전국 일반계 고교 1학년 자퇴생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교육정보시스템(NEIS) 학적변동 통계 등에 따르면 2021년 6112명, 2022년 7880명, 2023년 9373명, 2024년 9346명을 기록했다가 지난해엔 1만 6명을 기록했다. 이 현상을 두고 일부 사교육 현장에서는 내신 리셋의 영향이 크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고교 내신 등급제는 2025학년도부터 기존 9등급제에서 5등급제로 전환됐다. 2028년도 대입부터 5등급제를 적용한다. 9등급제는 1등급 상위 4%, 2등급 누적 11%, 3등급 누적 23%, 4등급 누적 40% 등으로 나뉜다. 5등급제는 1등급 10%, 2등급 24%, 3등급 32%, 4등급 24%, 5등급 10%로 나뉜다. 1등급 비율이 4%에서 10%로 늘었지만 2등급 이하로 떨어지면 서울권 대학 진학이나 의대 진학을 할 수 없을 우려가 커졌다는 게 일부 입시학원 등의 입장이다. 9등급제 체제에서는 내신 2등급대도 서울 중하위권 대학을 노려볼 수 있었으나 5등급제 전환으로 합격 가능성이 훨씬 낮아질 것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3학년 1학기까지의 고교 성적을 반영하는 대입 내신의 경우 고1 내신을 망칠 경우 치명적이다. 남은 3학기 동안 내신을 만족할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학년 내신을 망쳤을 경우엔 불안감 때문에 내신 리셋 결정을 내리는 학생들이 많다는 것이다. 치열한 성적 경쟁 폐단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도입한 5등급제가 다시 다른 폐단을 낳는 악순환을 초래한다는 지적도 이어진다.
■ 자퇴 부추기는 ‘사교육 불안 마케팅’?
교육당국은 내신 5등급제가 도입된 2025학년도 고교 자퇴생 수가 유의미할 정도로 급증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2025학년도에 학업을 중단한 학생이 2026학년도에 다시 입학하거나 재·편입학 규모도 전년과 유사하다고 짚었다. 재입학 이유도 질병 치료와 가정 사정 등 다양한 원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내신 리셋을 위한 재입학이 증가했다고 단정할 근거도 없다고 한다. 또 전 과목 1등급을 받지 않으면 서울권 대학 진학이 어렵다는 주장은 사교육 현장의 불안 마케팅에 불과하다고 선을 그었다.
특히 2025학년도 고교 1학년 1·2학기 전 과목에서 모두 1등급을 받은 학생 수는 4659명(1.08%)으로 1학기 대비 38% 감소했다. 3년 동안 모두 1등급을 받는 학생 수는 갈수록 더 줄어드는 구조라는 것. 따라서 전 과목 1등급을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너무 큰 불안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더욱이 2025년 고교 1학년 자퇴생들의 평균 등급은 5등급제 기준 3.7등급, 9등급제로 환산하면 6.7등급에 해당한다고 한다. 1학년 자퇴생 중 내신 하위 등급 학생이 많은 것으로 확인된 것도 내신 리셋으로 인한 자퇴 증가의 반박 증거로 제시된다.
■ 증가하는 학교 밖 청소년
고교생 학업중단엔 대인관계 및 심리·정서적 요인에 의한 학교생활의 어려움, 해외 출국, 질병 등 복합적 요인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자퇴, 퇴학, 무단 결석 등 학업중단을 부른 사유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부족하다. 현재로서는 원인을 특정하는 것 자체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내신 리셋을 위한 자퇴와 재입학, 검정고시 응시를 위한 자퇴 등 다양한 원인이 중첩적으로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일반계 고교뿐만 아니라 특성화고 등의 학업중단 사유도 한층 정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학교 밖 청소년들이 계속 증가한다는 것이다. 학령기 학교 밖 청소년(6~17세)은 2024년 기준 17만 3800명으로 추산됐다. 학업중단 학생 통계는 있지만 학교 밖 청소년 규모에 대한 정확한 자료조차 없는 상황이다. 이들의 상당수는 고립과 은둔에 빠지기도 한다. 정부와 광역지자체 교육청 등의 정확한 실태조사와 맞춤형 지원책 마련이 절실하다. 청소년 자퇴를 자발적 학업 중단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개선되어야 한다. 자퇴 증가는 우리 사회의 입시 중심 교육제도 등이 초래한 비자발적 선택의 증가로 봐야 한다. 1년 동안 1만 명이 넘는 일반계 고교 1학년이 학교를 떠났다는 절망적 통계 앞에서 그 원인이 내신 리셋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학업을 중단한 그들의 상당수가 학교 밖 청소년으로 방치될 우려가 높아진 현실 자체가 이미 너무도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과 보완정책 마련이 절실한 시점이라는 공감대 확산이 필요할 뿐이다.
2026-08-08 [09:00]
-
광주·대구의 연합, 반도체에 갈라지나[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기부 대 양여’라는 개념이 있다.
군사시설을 이전할 때 지자체가 대체 부지에 새로운 군사시설을 만들어 국가(국방부)에 기부하면 국가가 기존 군사시설 부지를 지자체에 양여하는 방식을 뜻한다. 군사시설의 이전 비용은 지자체가 양여받은 부지를 개발해 회수하게 된다.
2010년대 경남 창원 정중앙 노른자위 땅에 들어서 있던 39사단을 경남 함안으로 옮길 때, 전북 전주 북부에 있던 35사단을 전북 임실로 옮길 때 등 전국의 모든 군사시설 이전에는 예외 없이 기부 대 양여 방식이 적용돼 왔다. 심지어 창원 39사단 이전은 사단 부지 개발이 부동산 호황과 맞물려 성공적으로 끝나 민간사업자가 막대한 개발 이익을 남기면서 창원시와 민간사업자 사이에 초과 이익 환수를 둘러싼 갈등이 빚어질 정도였다.
■광주와 대구
최근 들어 이 기부 대 양여가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도심에 위치한 군공항의 이전이 신공항 개발을 둘러싸고 이슈화하면서다. 대표적인 지역이 광주와 대구다.
광주는 광주 도심 군공항을 전남 무주 등 타지역으로 이전해 광주·전남 통합 신공항을 만드는 사업을 시도하고 있다. 군공항 이전에는 약 10조 원 규모의 비용이 들 것으로 추산되고 있으나 기부 대 양여 방식으로 이 비용을 마련하기 힘들다는 문제가 발생했다. 광주의 지방 재정이 열악한 데다 군공항 부지 개발의 사업성도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대구도 대구 도심의 군공항을 경북 군위 등으로 옮겨 TK신공항을 조성하는 방안을 추진중이다. 대구에서도 군공항 이전에는 10조 원이 넘는 수준의 비용이 들 것으로 추산된다. 역시나 기부 대 양여 방식으로는 군공항 이전을 통한 신공항 건립 비용 마련이 어려워 답보를 거듭하고 있다.
■반도체 변수
이런 상황에서 지난달 이재명 정부가 갑자기 호남권 800조 원 규모 반도체 메가 프로젝트를 들고 나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전공정 공장 설립 추진 발표 직후 정부는 열흘도 되지 않아 광주 군공항 부지를 반도체 공장 부지로 확정했다. 당초 첨단3지구와 빛그린 산업단지 등 후보지 3~4곳이 거론됐으나 정부는 이미 평평한 대형 부지가 확보돼 있다는 이유 등을 들어 군공항 부지를 쾌속 낙점했다.
이로써 광주 군공항 이전 문제는 글로벌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부지 구매 및 개발자로 나설 수 있게 돼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부지 매각을 통한 군공항 이전 비용 회수라는 기부 대 양여의 가장 큰 난제가 단번에 해결될 수 있어서다. 기껏해야 민간 아파트 분양에 기대는 수준이었던 현실이 초대형 투자자 등장으로 180도 바뀐 것이다.
■기부 대 양여 공식
250만 평에 달하는 광주 군공항 부지는 이재명 정부가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위해 전력·용수·교통 등 핵심 인프라를 직접 지원하겠다고 밝혀 부지 개발 원가의 절감 폭이 매우 커질 전망이다. 그만큼 사업 진행은 수월해지고 군공항 이전에 따른 비용 회수 가능성은 높아지는 것이다. 향후 반도체 공장이 들어서면 양질의 일자리 창출과 함께 소재·부품·장비 협력업체의 집중까지 바라볼 수 있다. 공장 외곽에 조성될 주거·상업·업무 용지 등도 분양 성공률은 급격히 올라간다. 무안 등 공항 이전 예비 후보지와의 합의를 얼마나 빨리 끝낼 수 있는지 정도의 과제만 남았을 뿐 신공항 조성을 통한 군공항 기부와 기존 군공항 부지의 지자체 양여는 시간문제로 보인다.
■형평성 논란
광주 군공항이 반도체 공장 투자로 기부 대 양여의 물꼬가 트일 수 있게 된 것과는 달리 대구는 도심 군공항 부지 개발 여력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지난해 대구 정치권은 광주 정치권과 손을 잡고 군공항 이전 문제를 국가 예산 투입 재정사업으로 진행할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연합전선을 펼쳐 왔다. 하지만 광주 군공항 문제가 반도체 공장 투자로 풀릴 수 있게 됨으로써 두 도시 정치권이 이전처럼 보조를 맞추게 될지가 불투명해졌다. 게다가 대구에서만 군사시설 이전 문제를 재정사업으로 진행할 경우 그동안 숱하게 진행된 바 있는 전국 기부 대 양여 사례와의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도 높다. 이는 향후 군사시설 이전 때에도 국가 예산을 넣을 것인지 여부와도 관련이 있는 문제여서 쉽게 결론이 나기 어려운 상황이다.
■신공항 속도전
광주 군공항 이전으로 광주·전남 신공항 조성에 속도가 붙을 경우 그 여파는 신공항 추진이 답보상태에 놓인 대구뿐만이 아니라 부산에도 미칠 공산이 크다. 이미 20년 가까이 추진 과정을 반복하며 이제야 연내 공사를 위한 첫 삽을 뜨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는 가덕신공항의 건립도 입길에 오르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쪽은 반도체 대기업의 천문학적 투자로 인해 기부 대 양여 방식으로도 신공항 조성이 급물살을 타는 듯한 반면 다른 쪽은 국가의 공항 정책에 따라 국가 예산으로 신공항을 만들면서도 지지부진한 상태여서다.
불과 두어 달 전만 해도 예측조차 불가능했던 이 같은 속도전을 지켜보는 해당 지역민들의 다양한 시각은 앞으로 사업이 진행될수록 더욱 복잡해질 듯하다.
2026-08-01 [09:00]
-
차박·캠핑, 단속과 관광의 차이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차박으로 춘향제 추억을 만드세요.’ 선뜻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이 홍보 문구에 이끌려 지난 4월 30일~5월 6일 전북 남원시에서 열린 제96회 춘향제를 찾았다. 일제강점기였던 1931년 남원 시민들이 성춘향의 절개와 민족의 자긍심을 기리려 자발적으로 시작한 춘향제는 100주년을 앞둔 국내 최장수 지역 축제다. 전통 축제가 차박이라는 새로운 여행 방식을 품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숙박난이나 교통 혼잡 우려로 부산에서 차를 몰고 출발할 엄두를 내기 쉽지 않았지만, 남원시는 사전 신청자에게 공공시설 주차장을 무료 배정하고 화장실과 샤워장, 행사장 순환 셔틀버스까지 제공했다. 남원종합스포츠타운, 함파우 소리체험관, 요천생태공원 등 여섯 곳에 340대를 수용한 것이다. 차박을 축제 질서를 어지럽히는 골칫거리로만 보지 않고, 원거리 방문객의 체류를 유도하는 장치로 활용한 셈이다. 차박 수요를 방치하면 민원이 되지만, 정책적으로 관리하면 관광객 유치로 이어진다는 점을 보여 준 사례다.
경기도 파주 평화누리캠핑장 사례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경기관광공사는 이곳의 카라반·글램핑 시설과 DMZ(비무장지대) 관광 자원을 활용해 해외 관광객 유치에 나섰다. 제3땅굴, 도라전망대를 돌고 파주 전통시장 로컬 맛집 방문에 이어 저녁에 캠핑장으로 돌아오는 여행 상품을 여행사와 공동 개발했다. 외국인들이 캠핑장을 문자 그대로 ‘베이스캠프’ 삼아 지역의 자연, 역사, 음식, 야간 경관을 즐기게 만든 전략이다.
항공편으로 입국하는 외국인들이 캠핑 장비를 갖고 올 수 없으니 카라반·글램핑 숙박은 당연한 수순. 여기에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비무장지대 인근 숙박’이라는 반전 스토리텔링을 가미한 덕분에 2024년 1200명을 유치한 데 힘입어 올해는 2500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일본 편의점 로손의 주차장 유료 숙박 시도도 흥미롭다. 로손은 여유 주차 용지를 유료로 제공하는 ‘차중박’(車中泊·차박의 일본어 표현) 서비스를 17일부터 확대해 연내 약 70개 점포 규모로 운영할 계획이다. 지난해 여름 7곳에서 시범 도입했는데 연휴 기간 평균 가동률이 90%를 넘으면서 호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서비스는 단순히 주차면을 내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전용 홈페이지에서 예약 후 결제(1박 2500엔)하면 주차면 2개와 전기 사용, 화장실 이용, 쓰레기 배출 편의까지 제공된다.
무질서·알 박기·오물 투기 등 민폐가 될 수 있는 차박을 합법적이고 위생적인 숙박 거점으로 바꾼 결과 지방 관광 활성화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 언론은 숙박비 상승과 고령자 차량 여행 증가로 편의점 차박 이용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
다양한 캠핑과 차박 유형이 등장하고,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도 성과를 내고 있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무료 공영주차장과 공원, 노지가 ‘차박 명당’ ‘캠핑 성지’로 좌표가 찍히고 나면 몸살을 앓기 쉽기 때문이다. 부산 강서구 천성동 천성항 일대와 기장군 해안은 고질적이다. ‘장박 텐트’나 무개념 차박족 탓에 미관을 해치고 주민 생업에까지 불편을 주면서 철거 행정대집행이 반복되고 있다.
민폐 차박, 진상 캠핑은 근절돼야 한다. 하지만 단속만이 능사가 아니다. 한때 무료 노지 캠핑객들이 전국에서 몰려 부작용이 커지자, 지자체가 유료 캠핑장으로 정비한 뒤 관광객 유치에 성공한 충북 충주시 목계솔밭캠핑장이 좋은 사례다. ‘남한강 차박의 성지’를 내걸고 168곳의 야영 사이트를 갖춘 정식 캠핑장으로 2023년 개장한 뒤 월 평균 7000명 이상이 방문하는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것이다.
“캠핑 수요는 이미 글램핑, 카라반, 돔하우스, 차박, 체험형 상품으로 옮겨 가고 있는데 관련 제도는 여전히 ‘천막’ 기준에 머물러 있다.” 지난 3일 김용태 의원실 등 주최로 국회에서 열린 ‘K-캠핑 관광 활성화를 위한 세미나’에서는 관광 자원으로 키우기 위한 제도 정비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천막 이외 다양해진 야영 시설의 법적 지위, 건축면적 기준, 미등록 시설 정비, 외국인 수용 태세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부산도 이 문제의식에서 비껴갈 수 없다. 올해 1~5월 부산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193만 6572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약 40% 늘었다. 전국 평균(21%)의 두 배에 가까운 성장세로 그야말로 ‘글로벌 핫플’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대형 공연이나 국제행사가 열릴 때마다 숙소 구하기 전쟁이 벌어지는 것도 낯선 일이 아니다. 지난 6월 BTS 부산 공연 때 터무니없는 숙박 요금이 기승을 부린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숙박 시설의 공급도 늘어나야 하겠지만 성수기와 축제, 공연 기간의 숙박 수요를 분산시키는 보완 장치도 필요하다. 캠핑과 차박이 대안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는데, 야외라는 특성상 부산만의 특색이 있는 관광 콘셉트를 구현할 수 있다면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체류형 도시 관광, 지역 상권의 활성화 고민은 부산만의 것이 아니다. 서울시가 8월 한 달간 여의도·뚝섬 한강공원에서 운영하는 임시 야영장 ‘한강 밤핑’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서울시는 사전 예약 방식으로 텐트 200동 규모의 임시 야영장을 조성하고, 시범사업 기간 장소 이용료를 무료로 했다. 또 야간 디제잉·영화 상영 같은 행사와 배달 할인 혜택을 묶고 한강버스·자전거·수영장까지 연계해서 ‘24시간 체류하는 한강’ 모델을 시도한다. 강변 캠핑을 방치하거나 단속하는 대신, 도심 관광 자원으로 관리하면서 인근 21개 전통시장·골목상권 활성화까지 노린다는 대목이 부산에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부산은 강과 산, 바다를 모두 가진 도시다. 낙동강 하구의 생태 자원, 금정산과 기장 산지, 가덕도와 기장 해안, 영도와 북항의 항만 야경은 다른 지역이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관광 자산이다. 이 자원을 무질서한 노지 차박·캠핑에 내맡겨서는 안 된다. 아웃도어 여행 수요는 이미 우리 곁에 실재하는 흐름이다. 방치하면 민원을 낳고, 배척하면 갈등을 부르지만 활용하면 관광 수요가 된다. 이용 규칙과 적정 이용료를 마련하고, 안전과 환경 기준을 세우고, 지역 상권과 연결하면 체류형 관광이 될 수 있다. 캠핑을 불청객 취급할 것인지, 해양도시 부산의 새로운 관광 유입 자원으로 설계할 것인지가 단속과 관광의 차이다.
2026-07-25 [09:00]
-
2030, 왜 술과 헤어질 결심?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대학가나 직장 내 회식 자리에서 술을 강권하는 풍경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커지며 음주량이 줄어들고,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시대를 거치며 ‘부어라 마셔라’ 하던 음주 문화가 많이 사라진 여파다. 2030 세대에서는 ‘갓생’(부지런하고 계획적으로 생산적인 일상을 사는 것)의 일환으로 술 안 마시는 문화가 자리를 잡았다.
■ ‘주당의 나라’는 이젠 옛말
2030 세대는 이전 세대와 달리 술을 즐기지 않는다. 이는 통계로도 드러난다. 질병관리청의 국민건강통계에 따르면 2024년 20대(만 19세 포함)의 하루 평균 주류 섭취량은 64.8g으로, 1년 전 95.5g에서 30% 이상 급감했다. 이는 60대의 하루 평균 섭취량인 66.8g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또 질병관리청 국민건강영양조사에 응한 19∼29세 중 아예 술을 마시지 않거나, 마시더라도 월 1회 이하라는 응답 비율은 2024년 기준 56.0%를 차지했다. 조사가 시작된 2005년 37.9% 이후 최고치다. NH농협은행 트렌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20대의 주점 소비 금액은 전년 대비 20.9% 급감했다. 30대 역시 15.5% 감소했다.
2030 세대의 주류 기피 문화로 이제 ‘주당의 나라’도 옛말이 됐다. 국세청 국세통계포털에 따르면 국내 주류 출고량은 2015년 407만 3615KL로 정점을 찍은 뒤 2025년 298만 7726KL로 10년새 26.7%나 급감했다. 2020년대 들어 전체 주류 출고량은 2020년 321만 4807KL, 2021년 309만 9828KL, 2022년 326만 8623KL, 2023년 323만 7036KL, 2024년 315만 1371KL, 2025년 298만7726KL을 기록했는데, 2022년 이후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다.
■ 젊은 층, 술 왜 안 마실까?
젊은 층의 술 소비 감소 원인으로는 음주를 절제하는 ‘소버 큐리어스’(Sober Curious) 현상이 꼽힌다. 소버 큐리어스는 술에 ‘취하지 않은’이라는 의미의 소버(Sober)와 ‘호기심이 많은’을 뜻하는 큐리어스(Curious)가 결합한 용어다. ‘마시는 것이 당연한’ 술 중심 문화를 따르기보다 자신의 신체·정신 건강을 위해 알코올 섭취를 멀리하고, 맑은 정신을 지향하는 문화적 흐름이다. 특히 20대는 술자리의 분위기보다 다음 날의 컨디션을, 취하는 즐거움보다 자기관리와 건강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시간 대비 만족도와 효율을 중시하는 ‘시성비’ 가치관은 술자리에 쓰는 시간과 다음 날 숙취까지도 하나의 비용으로 인식한다. 술값을 ‘매몰 비용’으로 생각하다 보니 회수 불가능한 경제적 비용이 아닌 건강이나 취미 활동 등에 투자하는 것이 낫다고 보는 것이다.
2030 세대가 술 없이 여가를 보낼 수 있는 선택지가 늘어난 점도 한 요인이다. 러닝 크루, 독서, OTT, 소모임 등 취미 활동이 생겨나면서 회식이나 술자리를 통해 친목을 도모하던 문화는 점점 밀려나고 있다.
‘소버 큐리어스’에 맞춘 새로운 공간도 등장하는 추세다. 최근 젊은 층이 많이 찾는 서울 성수, 홍대 등 지역을 중심으로 ‘논알코올 편집숍’이나 ‘논알콜 바’ 문화가 확산한 것이 대표적이다. ‘논알코올 편집숍’은 전 세계 수십 종의 논알코올 맥주와 와인, 칵테일을 판매한다. ‘논알코올 바’에서는 먼데이 진 토닉, 정산소종 밀크셰이크 등 다양한 논알코올 칵테일을 즐길 수 있다. 또 젊은 층은 술을 마시더라도 맛과 향을 음미할 수 있는 저도수 주류를 선호하거나, 비교적 건강에 해롭지 않은 제로슈거·저칼로리 주류를 찾는다.
소주, 맥주 위주의 일률적 음주 문화에서 벗어나 다양한 음료를 경험하는 소버 큐리어스 흐름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젊은 세대가 술을 기분 좋을 정도로만 마시는 걸 근사한 라이프스타일로 생각하는 추세가 당분간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비주류’에 맞서는 주류업계
술 안 마시는 신인류의 등장에 주류 업계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한창이다. 제조사들은 주류 시장 포트폴리오를 재편하며 제품 전략을 새로 짜고 있다. 과거에는 알코올 도수가 높고 브랜드 충성도가 높은 인기 제품이 주력이었다. 주류업체는 무알코올, 저도주 등 제품을 선보이며 ‘비주류’(非酒類) 흐름에 대응하고 있다. ‘독주’로 승부했던 과거와 달리 다양한 맛과 부드러움, 저당 등을 강조하는 추세다.
2000년대 초만 해도 25도를 넘나들었던 소주의 알코올 도수는 16도 이하가 ‘뉴노멀’이 됐다. 롯데칠성음료는 지난해 7월 ‘처음처럼’의 알코올 도수를 16.5도에서 16도로 낮춘 데 이어, 올들어 제로 슈거 소주 ‘새로’도 16도에서 15.7도로 조정했다. 하이트진로 역시 2024년 ‘참이슬 후레쉬’를 16도까지 낮췄다.
맥주 시장도 변신 중이다. 무알코올과 비알코올 제품이 빠르게 늘고 있다. 하이트진로는 ‘하이트제로 0.00’과 ‘하이트 논알콜릭 0.7%’를 판매 중이다. 롯데칠성음료는 ‘클라우드 논알콜릭’을 내놨다. 이 회사는 최근 클라우드 광고에서 ‘이 좋은 맥주에 소주를 왜 섞어’라는 문구를 내세워 ‘소맥과의 작별’을 선언하기도 했다. 오비맥주는 ‘카스 0.0’ ‘호가든 제로’ ‘버드와이저 제로’ 등 무알코올 맥주 6종을 보유하고 있다. 건강을 중시하는 웰니스 문화로 인해 국내 무알콜·논알콜 맥주 시장 규모는 2025년 704억 원에서 2027년 946억 원으로 커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삶을 고단함을 잠시 잊기 위해 술을 선택하는 문화는 서서히 위력을 잃어갈 가능성이 높다. 우리 사회에서도 술 대신 식사와 대화, 취미를 중심으로 관계를 형성하고 무알코올 음료를 제공하거나 음주 여부를 개인의 선택으로 존중하는 문화가 확산할 것으로 보인다. ‘술이 술이 아닌 시대’가 이제 대세가 되는 걸까. 기성세대가 격세지감을 느낄 만하다.
2026-07-18 [09:00]
-
벌써 성격 나왔다…부울경 단체장 3인 3색 행보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1일 취임한 부산·울산·경남 광역단체장 3명이 각각의 색깔로 시·도정을 이끌면서 연일 화제를 낳고 있다. 요란한 취임식 대신 민생부터 챙긴 전재수 부산시장, 연일 SNS로 시청 내부 회의를 시민에게 공개하는 김상욱 울산시장, 직원들과 손 잡고 경남 대도약을 선언한 박완수 경남도지사.
관심과 기대가 큰 때문인지 다양한 평가가 나온다. ‘신선한 변화들이 많다’는 긍정적 평가가 주를 이룬다. 특히 부산과 울산 단체장 2명의 행보를 유심히 본다는 시민이 많다. 국회의원 시절에는 미처 몰랐던 매력과 능력이 단체장이 되면서 폭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열흘 남짓 짧은 기간에 쏟아진 변화들을 접한 시민들은 부울경 단체장들의 3인 3색 스타일을 지켜보며 리더십 변화를 체감한다는 반응을 내놓고 있다. 극한 여야 대립에 허니문 기간도 없어졌는지 ‘보여주기 행정’ 등 비난도 없진 않다. 기대와 관심 속에 4년 여정을 시작한 부울경 단체장 3인의 초반 레이스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취임식, 간소화하거나 현장으로
부울경 단체장 3인의 취임식 승자는 전 시장이 아닐까 한다. ‘떠들썩한 취임식 자제’. 민선 9기 단체장 취임식의 특징이다. 전 시장은 아예 취임식을 생략해 그중 도드라졌다. 그는 지난 1일 간단한 취임 절차만 밟고는 곧바로 부산 ‘민생 100일 비상조치 대책 회의’를 주재했다. 하지 않고도 얻을 건 다 얻었다. ‘예산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메시지는 확실히 던지고 민생 행정 의지도 알렸다. 전날 시장 인수위원회가 부산시 순세계잉여금이 80억 원뿐이라고 한 발표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순세계잉여금은 살림하고 남은 돈이다. 덤으로 언론 주목도 한껏 받았다.
울산시장 취임식도 간소하게 치러졌다. 취임식을 마친 김 시장은 직원들과 오찬을 마친 후 덕하 공영차고지에서 126번 시내버스를 타고 시민 일상 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취임사 핵심인 ‘시민 주권 시정’에 맞춘 행보다. 126번 버스는 2024년 시내버스 노선 개편 때 폐지됐는데 김 시장이 취임 첫날 즉시 복원해 다시 달리게 됐다.
재선 단체장이 된 박 지사는 각계 인사 7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가진 취임식에서 도민과 함께 경남 대도약을 이루겠다고 선포했다.
소통, 소통, 또 소통
민선 9기 들어 부울경 시·도민은 시청이나 도청에서 벌어지는 일을 휴대폰으로 확인할 기회가 부쩍 많아졌다. 1980년생으로 40대인 김 시장의 SNS 활용법은 전국적으로도 화제다. 김 시장은 시장직 인수위 출범 후부터 모든 회의를 유튜브 ‘김상욱TV’로 실시간 중계했고, 취임하고는 업무 시작 전에 ‘신문 읽어주는 시장’ 코너를 운영하며 시민과 실시간 소통하고 있다. 실국장 회의도 울산시청 TV 등을 통해 공개하고 있다. 시정 운영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해 시민들의 이해와 관심을 높이고 자연스럽게 공론화를 이끌 수 있다는 긍정적인 반응이 적지 않다. 이 대통령도 “요즘 김 당선자의 공개회의 볼만합니다”고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전 시장도 부산시 유튜브 채널 ‘부산튜브’와 개인 계정을 모두 활용한다. 전 시장은 취임 첫날 ‘민생 100일 비상조치 대책회의’부터 부산튜브로 생중계했다. 이 자리에서 “모든 회의 공개” 원칙을 밝혔는데, 지난 9일 첫 확대간부회의, 뒤이은 실·국 업무보고도 부산시 홈페이지와 청내방송으로 공개하고 있다.
척 하면 척 vs 아직 낯선 그대
4년은 짧지 않다. 20대부터 공직을 경험한 ‘행정 달인’ 박 지사는 첫 임기 때 경남도 공무원을 충분히 파악했을 것으로 보인다. 지사 보고에 들어갈 때마다 긴장해야 한다는 직원들도 박 지사 스타일에 익숙해졌다. 박 지사 재선 취임식 때 흥미로운 일도 있었다. 경남도청공무원노동조합이 박 지사에게 ‘동주공제’(同舟共濟)라고 적힌 서예작품을 선물한 것이다. ‘같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넌다’는 의미. 도정 운영 과정에서 직원의 목소리가 정책으로 이어지는 참여형 노사협력 체계를 함께 만들어가자는 뜻을 담았다는 게 노조의 설명이다.
울산시청 직원 대부분에게 김 시장은 아직 낯설다. “저한테는 협박으로 들립니다.” 첫인상부터 강했다. 인수위 시절 한 부서장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들은 김 시장 반응이 SNS를 통해 퍼져나가면서 시청 공무원들 사이에 긴장과 부담이 감돌았다. 영상에는 해당 공무원을 향한 비난 댓글도 잇따랐다. 김 시장은 ‘김상욱TV’ 등을 통해 공사 구분을 분명히 하고 싶다는 시그널도 수시로 내비친다. 업무 시간 후 이동을 위해 개인 차량을 구매하고, 개인 유튜브 채널도 혼자 진행한다.
전 시장을 그냥 ‘재수’로 칭하는 사람이 많다. 예의 없는 게 아니다. 부산에선 성 빼고 이름만 부르면 친근감의 표현이다. 특히 정치인에겐 큰 장점이다. 부산 북구에선 국민의힘 사람들도 전 시장과 잘 지낸다고 얘기할 정도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성품 덕이다. 얼마 전 출근하던 부산시 공무원들이 낯선 상황을 마주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전 시장이 공무원들을 맞이한 것이다. 하루는 저층부 엘리베이터, 다음 날은 고층부 엘리베이터 앞에서였다. 하지만 전 시장과 시 공무원들은 아직 서로 ‘탐색 중’이다. 이런 상황은 첫 직원 인사에서도 슬쩍 확인된다. 이번 시 고위직 인사 때 전 시장은 전임 시장 측근 기용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냉정하게 보면 전 시장 측이 아직 시청 내 피아 구분이 되지 않는다고도 보인다.
‘원점 재검토’ ‘정중동’ ‘한걸음 더’
부울경 단체장 3인의 가장 두드러진 차별점은 업무 스타일이다. 김 시장 행보 하나하나에 연일 울산이 들썩이고 있다. 시내버스 개편, 트램 재검토, 시 금고 문제…. 저 일이 뒤집어질 일인가 의구심도 들지만, 어찌보면 울산을 진짜 바꾸고 싶은 모양이다. 트램 문제는 단박에 전문가와 주민 간 의견이 엇갈리는 핫 이슈가 됐다. 2029년 개통 목표로 차량 계약까지 진행된 상황인데 ‘재검토 카드’를 내밀었으니 그럴 수밖에. ‘교통대란, 사업비 증가, 운영 적자 등 시민 불편이 뻔한데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게 김 시장 입장이다. 향후 경과가 주목된다.
3선 국회의원을 지낸 전 시장의 첫출발은 노련해 보인다. 정부의 3대 메가 프로젝트에 부산이 소외됐다는 비판은 아픈 지점일 수 있다. 하지만 전 시장은 “와 우리는 안 주노 해버리면 답이 없다. 부산은 이미 해양중심도시로 방향이 정해졌고, 여러 가지를 받았다’’고 유연하게 넘긴다. 그럴 땐 특유의 진지함이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북항돔구장, 라스칼라 공연, 퐁피두 등 선거 때 내세운 공약이나 전임 시장 사업들에 대해서는 한걸음 물러나기도 한다. 전 시장은 “전임 시장이 했기 때문에 무조건 백지화시키는 일은 없다”고 수차례 얘기했다.
3대 메가 프로젝트 영남권 투자 규모 312조 가운데 알짜는 경남이 챙겼다는 평가가 나온다. 박 지사도 “정부의 이번 투자 계획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는 옳지 않다”고 평가한다. 이번 프로젝트 참여 기업들이 이미 경남과 관련이 있는 만큼 실제 투자 실행률은 경남이 가장 높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부울경 통합 관련해서도 박 지사가 키를 쥐고 있다. 그는 마창진 통합을 주도한 인물로 통합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평소 부울경이 완전히 하나의 지자체가 되는 행정통합이 필요하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다. 반면, 전 시장과 김 시장은 기존 지자체를 두고 별도 기구인 특별연합을 이루는 메가시티를 주장하고 있다.
2026-07-11 [09:00]
-
증가하는 무빈소 장례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무빈소 장례가 늘고 있다. 무빈소 장례는 말 그대로 조문객을 맞이하는 빈소를 마련하지 않고 치르는 장례를 뜻한다. 입관과 발인, 화장 등 필수 절차는 그대로 진행하지만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리지 않다 보니 외부 조문을 받지 않는다. 무빈소 장례가 증가하면서 장례식장 등 장의업계는 한숨을 내쉬고 있다. 하지만 무빈소 장례 열풍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평가다. 전통적인 장례 방식인 3일장 문화 자체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전망도 이어진다.
■ 무빈소 장례 늘어난 이유는
장례업계 등은 최근 무빈소 장례 비중이 20%를 상회 5곳 중 1곳이 빈소 없이 장례를 치른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무빈소 장례가 증가하는 가장 큰 이유로는 경제적 문제, 실용주의 문화 확산 등이 꼽힌다. 상조업계에 따르면 3일장을 치를 경우 조문객 150명을 기준으로 한 장례비용은 1000만~2000만 원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조문객을 맞이하지 않을 경우 빈소 대여비와 각종 식사와 음료, 인건비, 주류 비용 등을 줄일 수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등을 거치면서 개인주의 문화가 확산, 장례식 조문객들이 줄어든 것도 큰 이유로 꼽힌다. 예전에는 부의금으로 장례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으나 요즘엔 유족 부담 비용이 크게 늘어났다.
무빈소 장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근엔 2일장 등 장례 기간을 줄이는 경우도 늘고 있다. 가족들만 모여 고인을 추모하는 가족장도 증가하고 있다. 굳이 전통 방식을 고수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각자의 사정에 맞춰 장례를 치르는 실용주의와 간소화 선호 추세가 결합하면서 무빈소 장례 증가로 이어진 것으로 풀이된다. 여기다가 가족과 떨어져 살거나 가족, 지인들과 교류를 하지 않는 1인 가구들이 늘면서 장례문화까지 급속히 바꿨다는 분석이다.
■ 무빈소 장례 더 증가할 듯
예전엔 불가피한 사정이 없는 한 고인의 빈소를 차리고 조문객들을 맞는 방식으로 고인과의 이별을 애도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심지어 무빈소 장례는 큰 불효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인식이 완전히 바뀌고 있다.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최근 전국 만 19~69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무빈소 장례 관련 소비자 태도’를 조사한 결과 10명 중 7명이 무빈소 장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인 장례를 무빈소 방식으로 치를 의향이 있다는 응답이 71.8%에 달한 것이다. 연령별 무빈소 장례 의향은 20대 57%, 40대 76%, 50대 80%, 60대 79.5%로 집계됐다. 장례를 직접 준비하거나 경험한 연령층일수록 훨씬 무빈소 장례에 대해 긍정적인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반면 전통적인 장례 방식이 더 바람직하다는 응답은 1.7%에 그쳤다. 특히 무빈소 장례가 더 늘어날 것이라는 응답은 80.3%에 달해 사회적 공감대가 예상보다 훨씬 큰 것으로 풀이됐다.
■ 무빈소 장례 서비스도 등장
무빈소 장례 선호도가 증가하면서 장례식장 등도 발 빠른 대응에 나섰다. 충남 천안의료원 추모관(장례식장)은 유족의 경제 부담을 줄이면서도 고인을 제대로 추모할 수 있도록 무빈소 장례 서비스 도입에 나섰다. 이런 추세는 현재 전국적으로 급격히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대다수 업체들이 빈소 중심으로 장례식장을 운영했지만 이제는 무빈소, 가족장 등 맞춤형 장례 서비스 도입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인터넷 등에서는 관련 장례업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상조업체는 고민이 깊다. 상조는 가입자들이 부모 등의 임종에 대비해 매월 납입금을 내며 미래의 장례에 대비하는 상품들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무빈소 장례가 늘어나면 상조업체들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무빈소 패키지를 내놓고 있으나 무빈소 장례를 염두에 두고 상조에 가입하는 경우는 적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상조업체들은 장례 간소화 분위기 확산에 대비해 기존의 단순 장례 대행에서 탈피, 가입자가 납입한 선수금을 결혼식과 여행, 가전제품 구입 등에도 전환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돌파구를 찾고 있다. 무빈소 장례 증가가 전통적인 장례산업의 모습까지 급격하게 변화시켜 가고 있는 셈이다.
2026-07-04 [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