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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국민의힘 정당해산 가능할까
■ 민심 거스르자 국민 분노 ‘들불’
탄핵안 가결 뒤 국민의힘 행보가 심상찮다. ‘탄핵 찬성’ 입장을 밝힌 한동훈 대표는 5개월도 못 돼 사퇴하고, 친윤계 권성동 의원이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향후 비상대책위원회도 ‘친윤’ 일색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아졌다.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되레 전면에 나서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국민의힘은 7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1차 표결에 대다수가 불참했다. 14일 2차 표결에 참여하긴 했지만 반대표를 던진 의원이 85명에 달한다. 국민의힘이 비상계엄 사태의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이유다. 뼛속 깊이 반성해도 모자랄 판에 여전히 민심의 반대편으로 달리고 있으니 그 아집이 불안불안하다. 최근에는 헌법재판관 임명 추천을 반대하면서 탄핵심판 절차에 연일 제동을 걸고 있다. 사실상 ‘극우 정당’의 길이다.
이런 행태를 국민들은 어떻게 볼까. 탄핵 정국 속에서 이미 국민의힘 해체 요구가 나온 바 있다. 대통령의 위헌적 행태를 비호하는 정당은 해산돼야 한다는 목소리다. 정치적인 비판을 넘어 헌법상 ‘정당해산’ 사유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공식적인 문제 제기는 지난 9일 국회 청원 사이트에 올라왔다. 국민의힘이 위헌정당이라며 정당해산 심판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해 달라는 국민동의 청원이다. 일주일 만에 동의자 30만 명을 넘긴 청원은 내년 1월 8일까지 진행된다. 5만 명 이상이 동의하면 소관 상임위원회에 회부된다.
■ 통합진보당 사례에 비춰보면
국민의힘 정당해산은 가능할까. 헌법 8조 4항을 보자.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어긋날 때는 정부가 헌법재판소에 그 해산을 제소할 수 있고, 정당은 헌재 심판에 의해 해산된다.’
정당해산 결정의 선례가 있다. 2014년 12월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에 제기된 정당해산 심판 청구를 받아들였다. 이석기 전 의원 등 일부 당원이 연루된 ‘내란 음모’ 사건이 당 차원의 민주적 기본질서를 부정하는 행위라는 게 다수의견이었다. 재판관들은 실행 능력이 의문시되는 의원의 발언만 갖고도 당 차원의 목적과 활동으로 확대 해석했다. 그러면서 ‘피청구인(통진당)의 주도세력(이 전 의원)의 목적과 활동은 피청구인에 귀속된다. (…) 당 구성원에 대한 개별적인 형사처벌로는 정당 자체의 위험성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해산 결정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도 했다.
이 판단에 비춰볼 때,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행위 역시 정당해산의 사유에 해당한다. 허무맹랑한 얘기가 아니다. 국군 통수권자의 특수부대 동원, 국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침탈, 주요 정치인 체포 지시, 정치 활동 전면 금지 및 언론·출판의 자유 박탈 등의 기본권 제한 획책이 있었다. 헌법 원리를 부정하고 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로 봐도 무방하단 뜻이다.
윤 대통령이 국민의힘 주도세력이라는 점도 명확하다. 국민의힘 당원으로 대선 후보 경선을 통해 후보에 선출됐고 대통령이 된 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계엄 사태 이후에도 국민의힘은 대통령의 탈당이나 제명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국정을 책임지는 집권여당으로서 국민의힘은 지금도 계엄 선포를 합리화하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한 몸’이라는 건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통진당은 이 의원의 내란 음모 혐의만으로도 정당해산 결정을 받았다.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실제 행동을 통해 민주 질서를 위협하고 헌정을 유린한 경우다. 그리고 국민의힘은 의원 대부분이 여전히 이를 옹호하는 분위기다. 어떤 게 더 위중한가. 정당해산 국민 청원은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 현실적으로는 힘들다지만…
그러나 국민의힘 정당해산은 현실적으로 이뤄지기 힘들다. 전문가들의 전망도 대체로 비슷하다. 정당해산 심판은 국회가 아니라 행정부 권한이다. 법무부만이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헌재에 청구할 수 있다. 국민 청원이 국회 소관 상임위로 회부된다 해도 국회가 심판을 청구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국민의힘 정당해산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법리적으로 보더라도 헌법이 규정한 ‘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해석이 쉽지 않다. 민주적 기본질서는 ‘폭력적 지배 없이 다수를 존중하고 소수를 배려하는 체제’를 뜻한다. 국민의힘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이를 위배하는지, 탄핵 반대가 헌법 위반 행위인지, 명쾌하게 가려내기 힘든 측면이 있다. 학자들 중에는 헌정 체제 자체를 부인하고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정도에 이르렀을 때만 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예컨대, 독재 정당으로 규정된 정당이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경우가 그렇다. 그 밖에도 의원 108명의 직무 정지가 합당한 것인지, 정당해산 말고는 다른 대안은 없는지, 따져봐야 할 논점들이 적지 않다.
여당의 정당해산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 하더라도 국민의힘은 어째서 정당해산 청원이나 해체 요구가 제기되는지 근본 원인을 돌아봐야 한다. 국민 70% 이상이 윤 대통령 탄핵에 찬성하고 있다. 이 흐름은 일시적인 게 아니라 역사의 거센 물줄기다. 지금은 탄핵에 찬성한 ‘부역자’를 색출하겠다고 선동할 때가 아니라 잘못을 반성하고 국민 지지의 길을 찾아야 할 시기다. 계속해서 대통령의 위헌적 행태를 비호한다면 더 이상 정당의 미래는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국민의힘은 8할 가까운 국민을 버리고 정녕 ‘소멸’의 길을 걷고 싶은가.
2024-12-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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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탄핵 정국, 한국 ‘외교적 고아’ 되나!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으로 외교 리더십의 공백이 심화되면서 한국 외교가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지게 됐다. 패권국 사이에 끼어있는 한국이 ‘고립무원' ‘외교적 고아’의 처지에 놓인 셈이다. 내년 1월 트럼프 복귀를 앞두고, 향후 한 달여 동안 모든 외교적 초점은 ‘트럼프 2기’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 트럼프 2기의 출범으로 인한 불확실성에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까지 엎친 데 덮친 격이다. 한중, 한일 관계도 외줄타기를 하듯 위태롭다. 게다가 러시아 파병을 결행한 북한의 핵무장 능력 강화 등으로 주변국과의 협력이 어느 때보다도 요구되는 상황이지만, 이런 난제를 풀 대한민국의 수장이 사라졌다. 피의자로 입건된 한덕수 국무총리가 윤석열 정부의 외교 정책을 강행하기 쉽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거대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윤석열 정부의 외교 정책에 극렬하게 반대를 해왔기 때문에, 과도기적 성격을 가진 정부가 정책 수정도, 유지도 힘든 ‘딜레마’에 빠지는 상황이다.
■‘미국 우선주의’ 트럼프 2기 대응은
‘트럼프’가 돌아왔다. 대한민국 앞에도 풀어야 할 난제가 쌓여 있다. 돌아온 트럼프 당선자는 더욱 강화된 ‘미국 우선주의’를 예고했다. 트럼프는 줄기차게 동맹국의 방위비 분담금 증액 및 자주적 방위 역량 강화, 미국의 불필요한 군사적 개입 축소를 공언했다. 트럼프는 대미 흑자국인 한국을 ‘머니 머신’이라고 부르면서 합의한 방위비 분담금의 9배 증액(연간 100억 달러)과 관세 인상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일방적 요구에 의해 이미 합의한 분담금까지 인상할 경우 자칫 국내 여론의 반발과 동맹국 미국에 대한 신뢰 상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반미 성향의 정치 지형을 만들 수도 있다.
경제적으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이나 관세 장벽, 보조금 축소 등 정책 변화가 놓여 있다. 또, 반도체, 전기자동차, 배터리 등 주력산업에 대한 리스크 관리가 절실하다. 트럼프는 취임 직후 행정명령을 통해 인플레감축법(IRA)과 반도체법에 따라 미국에 투자한 외국기업에 제공하던 혜택을 없애거나 축소할 예정이다. 민주당 정권 시절에 강화됐던 미국 주도의 공공외교와 민간 차원의 외교·친선·협력도 상당 부분 중단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한국 외교 관계에서 완충재 역할을 했던 민간 영역이 축소될 수 있다는 우려이다.
한국으로서는 트럼프 인수위를 상대로 한 적극적인 외교, 범정부 컨트롤 타워의 선제적 가동이 시급한 상황에서 외교 공백 사태가 뼈아플 수밖에 없다. 특히 일본·호주·필리핀 등 한국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국가들과의 다자 안보 협력 강화, 새로운 안보 협력체 구성, 한미일 안보 협력, 미국과의 핵 안보 협의체 실효성 제고 등이 표류할 위기에 놓였다.
■미중 전략경쟁과 한국
트럼프 2기는 중국 견제에 한국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이 중국의 군사적·경제적 부상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과의 협력을 한층 강화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미중 이익 갈등과 체제 경쟁이 혼합되고, 중국이 보복적인 관세·경제 정책을 실행하면 미중 관세전쟁이 터지고, 자동적으로 한국도 관여할 수밖에 없게 된다”라고 예고한다. 하지만, 중국은 2016~2017년 사드 및 박근혜 탄핵 정국에서 이미 폭력에 가까운 외교 수단을 한국 정부와 재계에 휘둘렀다. 중국은 롯데 손보기를 통한 협박과 보복을 일삼았고, 그 영향으로 오히려 한미일 안보·경제 협력 강화를 초래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중국에 대해 60~100% 공격적인 관세 부과와 기업별 제재를 실행하고, 그 칼춤에 한국이 어쩔 수 없이 맞장구를 칠 경우 한중 간의 갈등 고조마저 우려된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속담이 정확한 상황 묘사일 정도다.
부경대 중국학과 서창배 교수는 “트럼프 2.0 출범과 함께 미중 전략경쟁 심화를 우려하는 중국 정부는 주한 중국대사 지위 국장급 승격, 비자면제 조치 등 한국과 화해 분위기 조성에 노력했고, 사실은 한국과 더 긴밀하게 협력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서 “지금은 시국이 정리될 때까지 관망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본격적인 양국 관계 진전과 협상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밝혔다.
■국교 정상화 60주년, 한일 관계 미래는
한일 양국은 2025년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까지 양국의 국내 정치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한일 관계도 출렁일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역사 문제에서 한국이 기대하는 수준의 전향적 태도를 보일 수 있을지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달 24일, 사도광산 추도식으로 불거진 한일 갈등은 불안정한 양국 관계를 그대로 표출했다. 일본의 선의에만 의지했던 윤석열 정권의 ‘선한 외교’가 실패한 셈이다.
지난 10월 치러진 중의원선거에서 참패한 이시바 내각의 정권 지속 여부도 불확실하다. 자민당은 15년 만에 소수 여당으로 전락했고, ‘비주류파’인 이시바 총리는 당내 장악력이 약하다는 평가다. 내년 7월 치러질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한다면 야당에 정권을 넘겨주는 불안정한 상황이다. 이시바 내각이 한일 관계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기는 쉽지 않다는 분석이다.
이시바 총리는 외교적 성과를 통한 지지율 상승 목적으로도 트럼프 취임과 동시에 조기 미일 정상회담을 가질 전망이다. 이미 총리 보좌관이 지난달 20일부터 미국을 방문해 트럼프 캠프 인사들과 회동했고, 조기 정상회담 일정을 조율한 것으로 보인다. 동북아 외교의 초침이 점점 빨리 돌아가는 상황이다. 엄중한 국제 정세 아래 한일 간 긴밀한 소통과 협력이 더욱 중요한 시점이지만, 한국만 외톨이로 전락할 수 있는 상황이다. 양국은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에 따른 방위비 부담, 한미일 경제·군사 협력 등 공감대를 강화해야 할 상황이다. 현재 주한 미국대사관 홈페이지에는 블링컨 국무장관과 조태열 외교통상부 장관이 ‘한미일 삼각 협력을 강조한 통화 내용’을 공개했다. 하지만, 트럼프 2기가 3국 간 협력을 기조로 한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 정책을 계승할지는 미지수다.
■심화되는 북러 군사·기술 협력
러시아 파병 실행에 따른 북러 간 군사 기술 협력 심화와 북중러 삼각 협력 구도 형성이 한반도를 둘러싼 가장 우려할 안보 위협이다. 중국마저도 최근 러시아 국방장관의 방북 시 중러 연합 공중연습을 실시했다. 북·중·러 삼각 구도마저 형성되는 상황이다. 향후 제일 큰 과제는 북한 핵 위협 방지다. 핵 개발은 물론이고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핵 물질도 문제다. 이 상태로 진행하면 2047년이면 북한이 보유할 핵 물질 누적 생산량은 핵탄두 500개 분량으로 추정된다. 이미 단거리미사일은 완성됐고, 극초음속 중거리미사일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도 러시아와의 군사 기술 협력으로 5~10년 안에 완성될 전망이다. 신형 잠수함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탑재하고 내년부터 한반도 주변 해안을 누빌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취임 초기에 북한 김정은을 다시 만나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하는 엉터리 협상을 벌일 경우 한국은 물론이고 동북아시아의 안보에 엄청난 위협이 된다. 북한의 러시아 파병 등으로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는 가운데, 북한 문제에 대한 한미일 3국의 공동 대응 필요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는 형국이다.
■정상외교, 2025년 10월 경주 APEC에서 정상화 가능
한반도를 둘러싼 세계 정세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지만, 과연 한국의 과도기 정부가 한미, 한중, 한일, 남북 관계에 불어닥친 위기를 극복할 역량이나 의지가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현실적으로 대통령의 해외순방은 물론이고, 정상급 외빈의 방한도 쉽지 않은 상태이다. 수출과 외교가 핵심인 대한민국, 세계 10대 경제강국에서 정상외교가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한국 외교가 사면초가에 내몰린 상황이다. 외교 전문가들은 이번 비상계엄 사태의 결론과 관계없이 내년 상반기까지 정상외교 공백을 기정사실화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물론, 한덕수 국무총리나 우원식 국회의장이 ‘대타’로 나설 수 있지만, 무게감과 대표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국제관계 전문가들은 “계엄 정국에 따른 수사와 탄핵, 조기 대선까지 염두에 둘 경우 한국 정부가 외교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고, 여야 정치권이 합세해서 국가대표로 거센 파도를 헤쳐 나가야 한다”면서도 “하지만 정상외교의 정상화는 2025년 10월 경주 APEC(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즈음에야 가능하지 않을까 예상한다”라고 우려했다. 대한민국의 국제 정세가 산 넘어 산인 지경이다.
2024-12-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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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시국선언과 계엄, 그 결말
올해 8월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이 윤석열 정권의 ‘계엄 시도’ 의혹을 제기했다. 김 최고위원은 “(김용현 경호처장의) 국방부 장관으로의 갑작스러운 교체는 계엄령 준비 작전이라는 것이 저의 근거 있는 확신”이라고 밝혔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계엄 선포와 동시에 국회의원을 체포·구금하겠다는 계획을 꾸몄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전했다. 당시 대통령실은 “괴담 선동”이라며 펄쩍 뛰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지난 3일 밤늦게 느닷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왜 그랬을까.
■지성들의 잇단 시국선언
윤 대통령은 국회의 예산 삭감과 검사 탄핵 등을 이유로 들었지만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그보다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주목할 부분이 있다. 근래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대학 교수·연구자들의 시국선언이다. 최고 지성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시국선언을 통해 윤 대통령 퇴진을 요구한다.
대학 교수·연구자들의 시국선언은 지난 10월 28일 가천대 교수노조를 시작으로 전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참여 인원은 현재까지 70여 개 대학에서 4000명이 넘는다. 이들의 시국선언문에는 김건희 여사 관련 의혹 해소, 특검 도입 등도 있지만 윤 대통령의 퇴진이 주로 언급됐다. 서울대 교수·연구자 525명의 시국선언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윤 대통령이 하루라도 빨리 물러나야 한다. 한국 사회의 장래를 위해서 그의 사퇴는 필연적이다”라고 선언했다.
교수들이 앞장서니 대학생과 졸업생도 시국선언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경북대, 국민대, 강원대 등 전국으로 확산 중인데, 고려대에서는 한동안 보기 힘들었던 대자보가 등장해 “대학은 시대에 질문을 던지고 옳지 못한 것에 분노하고 목소리를 내 왔다”며 윤 대통령 퇴진을 요구했다.
■시민과 예술·종교계까지
윤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은 시민사회와 종교계 등 전방위로 뻗어가고 있다. 대전에선 퇴직 교사들이 “국정농단 세력이 우리의 제자일 수 있다는 점에서 부끄럽다”며 “모든 권력 남용과 국정농단의 근원인 윤석열 대통령이 퇴진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공감연대라는 이름의 시민단체는 지난 3일 부산, 서울, 광주 등 전국 7개 장소에서 1067명이 서명한 ‘윤석열 대통령 퇴진 요구 시국선언문’을 동시에 발표했다. 같은 날 해병대 예비역들이 ‘채 해병 사건’과 관련해 윤 대통령 탄핵과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행위예술가들이 지난 2일 ‘윤건희 정권을 파면한다’는 내용의 시국선언문을 발표했고, 재미 한인 교수 등 해외에서 활동하는 교수·연구자들의 시국선언도 온라인을 통해 펼쳐지고 있다. ‘보수 텃밭’으로 여겨지는 대구·경북 지역에서도 지식인 396명이 지난달 26일 “윤 대통령에게 어떠한 가능성도 기대하지 않는다”며 윤 대통령 퇴진을 촉구했다. 그에 앞서 지난달 7일 부산에선 송기인 신부 등 원로 인사 등 214명이 “윤석열 대통령은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천주교 사제 1466명은 지난달 28일 ‘어째서 사람이 이 모양인가’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내고 “헌법 준수와 국가 보위로부터 조국의 평화통일과 국민의 복리 증진까지, 대통령의 사명을 모조리 저버린 책임을 물어 (윤 대통령) 파면을 선고하자”고 주장했다.
■민주화 지켜낸 시국선언들
과거에도 각계각층의 시국선언은 현대 한국사의 주요 고비마다 터져 나왔다. 이승만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권위주의 정권 시절 지식인, 학생, 예술인, 종교인 등의 시국선언은 부당한 권력에 저항의 상징이자 민주주의를 이끌어내고 지켜낸 동력이었다. 1960년 4월 25일 대학교수단의 시국선언이 대표적인 예다. 이날 시국선언이 발표되면서 이틀 뒤인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사임을 발표했다. 1986년 3월 28일 고려대 교수 28명은 ‘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제목의 시국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과 언론·사상·표현의 자유를 요구했다. 이후 5월 중순까지 29개 대학에서 785명의 교수들이 시국선언을 이어갔고, 이는 ‘6월 항쟁’을 이끄는 데 큰 힘이 됐다. 그 뒤에도 시국선언은 우리 사회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경종과 방향타 역할을 해 왔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이후 2년 반 동안 독불장군의 모습을 보였다. 자신과 주변을 향한 세간의 비판엔 귀를 닫고 ‘오직 나만이 옳다’는 식으로 국정을 밀어붙였다. 검경 등 사정기관은 물론 군과 방송 등 주요 보직에 자기 사람들을 앉혔으니 무서울 게 없었을 듯하다. 그러나, 짐작건대,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시국선언은 무시하기 힘들었을 테다. 지역과 계층을 불문하고 자신의 퇴진을 요구하는 거센 민심을 어찌 견디겠는가. 지난 3일의 비상계엄 선포는 어쩌면 그런 다급함에서 나온 최후의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계엄 따위로 막을 수 없다
민심은 준엄하다. 계엄 따위로 어찌할 수 없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들도 시민의 저항을 계엄이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억압하려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4·19 혁명’에,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부마항쟁’에, 전두환 전 대통령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응하기 위해 계엄을 이용했다. 하지만 그렇게 계엄에 기댄 정권의 말로는 익히 알려진 대로다.
윤 대통령의 계엄 시도는 더욱 초라해 불과 6시간 만에 좌초했다. 하마터면 유혈 사태로 번질 뻔했던 윤 대통령의 계엄 시도가 국회의 신속한 해제 결의로 차단된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이는 결국은 시민의 적극적인 지원과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날 긴박했던 상황에서 서울 시민들은 국회로 나가 계엄군을 막아섰고, SNS로 소식을 전했고, 전국의 시민들은 가슴을 졸이며 사태를 주시했다. 당일 부산에서도 시민들이 거리로 나가 계엄 반대 시위를 벌였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밤새 눈뜨고 있었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예리코 성의 함성?
시국선언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부산대 교수회가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석열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을 4일 발표했고, 서울대를 비롯한 대학생들의 시국선언도 잇따르고 있다. 종교계도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사태로 들끓고 있다. 천주교를 대표하는 한국천주교주교회는 4일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를 바라보는 한국 천주교회의 입장’이란 성명서를 내고 “대통령이 직접 국민에게 사과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개신교 단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도 이날 “윤석열 대통령은 무릎 꿇어 사죄하고 사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원불교 역시 교무단 명의의 성명을 통해 “배은 중생 윤석열은 마땅히 하야하거나 탄핵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교계에선 불교인권위원회가 “윤석열 대통령 등은 반드시 국민적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규탄했다. 이렇듯 이들이 입을 모아 외치는 건 단 하나, ‘윤석열 퇴진’이다. 바야흐로 예리코 성을 무너뜨린 여호수아 군의 함성을 방불케 한다.
2024-12-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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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도시 부산, ‘빅(Big)’과 ‘품격’ 사이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최근 국내 주요 도시들의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이는 부산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배경에는 좋은 도시디자인이 곧 그 도시의 경쟁력이자 얼굴이 된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으며, 디자인 자체가 도시 간 경쟁의 핵심 요소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부산시는 최근 ‘부산을 바꾸는 빅 디자인(Big Design)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2026년까지 도시를 새롭게 디자인해 시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게 목표다. 이를 위해 총 610억 원을 투입한다. 행복한 시민, 매력적인 도시를 목표로 도시 비우기 사업, 품격 있는 부산 거리 디자인 조성, 글로벌 야간 관광 명소화, 공공디자인을 활용한 시민 관점 사회문제 해결, 사회적 약자가 배려받는 도시 조성, 공공디자인 시민 참여 확대 등 총 8개 분야를 중점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그러나 ‘빅’, ‘품격’을 바라보는 관점의 논란과 더불어 화려한 수사(修辭) 뒤에 따르는 공허함이 있다.
■과연 ‘빅’이라 할 만한가?
부산시는 품격 있는 부산 거리 디자인 등 8개 분야 중점 과제를 통해 부산을 디자인적으로 변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른바 빅 디자인 프로젝트다. 하지만 아쉽게도 깊게 와닿지 않는다. 중점 과제를 살펴보면 종전 부산시가 추진했던 디자인 개념과 크게 다르지도 않다. 공공디자인을 활용한 사회문제 해결, 사회적 약자 배려 디자인 등은 이전에도 강조돼 왔던 개념이다. 이는 도시디자인에 있어 기본이다. 그런데도 빅 디자인이라는 게 다소 낯 뜨겁다. 빅 디자인 허브센터 등 부산시는 무언가를 인공적으로 만들고 디자인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부산 시민에게 더 필요한 것은 풀과 나무, 길, 공원, 벤치가 있는 도시 환경이다.
빅 디자인이라는 거창한 이름보다는 시민들이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는 ‘소확행적 접근’이 오히려 중요하다. 도시 비우기나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디자인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소확행적 디자인에 오히려 더 가깝다. 도시디자인이나 공공디자인의 역할은 간결하고 편안한 환경을 조성해 자연과 사람이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행 방해 요소를 보행 공간에서 분리하는 도시 비우기는 부산을 ‘걷고 싶은 도시’, ‘걷게 하는 도시’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길이 좁아서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이야기할 수 있는 광장이 있고 걷고 즐길 수 있는 자연과 문화가 있다면, 그 도시는 살고 싶은 도시, 사랑받는 도시가 될 것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도시디자인이 시행된다면, 애써 ‘빅’을 강조하지 않아도 시민들에게 디자인 프로젝트가 ‘더 크게’ 다가올지 모른다.
■도시 품격은 어디서 오는가?
부산시는 291억 원을 들여 국제공모 우수디자인으로 선정된 가로등, 벤치 등 공공시설물을 부산의 관문 지역과 관광지 등에 설치해 품격 있는 거리 디자인 조성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품격 있는 거리라는 표현은 주관적이고 모호하며,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품격 있는 거리의 기준은 무엇이고, 또 누가 판단할 것인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품격은 ‘사람 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 ‘사물 따위에서 느껴지는 품위’를 의미한다. 이는 매우 상대적이다. 품격의 높고 낮음을 판가름할 기준은 개개인의 시선에 있다.
도시의 품격과 시민의 삶을 결정하는 척도는 화려함이 아니다. 거리의 디자인은 단순히 시각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안전과 편의성, 그리고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고려해야 한다. 흔히 내로라하는 세계적 문화도시인 빈, 런던, 뉴욕, 파리의 공통점은 ‘걷기 좋은 도시’라는 것이다. 서울시와 경기도가 ‘걷기 좋은 도시, 서울’, ‘쉼이 있는 도시공간’을 모토로 산책로와 공원, 벤치를 확대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한 도시나 사회가 건강하려면 공통의 추억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이 많아야 한다. 돈을 내고 들어가야 하는 카페가 아니라, 공원과 벤치와 같은 공짜로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많을수록 살기 좋은 도시다. 휴게 공간이 많은 도시가 곧 걷기 좋은 도시이자 살기 좋은 도시인 것이다. 흔히 도시 전문가들이 벤치의 디자인이나 그 속에 깃든 배려를 통해 그 도시가 지향하는 정신이나 철학을 읽어낼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제공모 우수디자인 작품을 거리에 설치했다고 해서 그 거리가 품격 있는 거리가 되는 게 아니란 얘기다. 벤치는 작고, 사소한 것이지만 여기서부터 스토리가 담기고, 사람 중심의 도시디자인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 도시는 살기 좋은 도시, 품격 있는 도시가 될 수 있다.
대한민국의 품격은 우리 국민들이 만들어 가듯이, 품격 있는 도시 또한 그 안에 살고 있는 시민들의 다양한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다. 예술성 높은 공공시설물 하나 더했다고 품격이 딸려오는 건 아니다. 도시의 품격은 그 안에 머무는 사람들의 삶을 떠나 논할 수 없다. 외국 디자이너의 예술성 높은 공공구조물 하나에 부산이란 도시의 품격이 좌우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사용자 중심의 도시디자인 돼야
디자인은 단순히 간판을 정비하고 환경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부산에 필요한 디자인은 공공분야 혁신의 한 방법으로서, 부산 시민의 생각과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는 스위치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공공서비스디자인이다. 8개 중점 과제 중 공공디자인을 활용한 사회문제 해결,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디자인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공공디자인은 경제적 가치보다 시민의 안녕과 행복 같은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또한 대다수 시민의 삶의 질을 향상하고, 시민들이 공유하는 도시공간의 질적 수준을 높여주는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서는 공급자 중심의 서비스가 아닌, 수요자와 사용자 중심의 서비스 디자인이 필요하다. 현장에서 주민들의 요구 사항을 파악하고 수렴하는 것은 물론 시민들이 직접 참여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도시디자인에 있어서 건강한 시민의식에 기초한 참여는 필수적이다. 부산시의 공공서비스디자인 시민참여 프로그램 운영은 이런 점에서 매우 바람직하다. 시민들의 참여로 도시가 모습을 갖추어가는 과정은 시민들에게 자부심을 부여하고 도시에 대한 애착을 갖게 만든다. 시민들이 필요에 의해 디자인 개선안을 만들고, 그 의견을 따라 시행된다면 실용성과 활용성이 더욱 높아질 것이다.
도시디자인은 단순히 2차원적 공간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3차원, 4차원적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도시기본계획과 함께 가야 하며, 문화, 복지, 안전, 교육, 환경 등 다양한 분야와 연계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디자인 도시 부산이 성공할 수 있다. 도시디자인은 우리의 삶과 문화가 담긴 도시의 영혼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단순히 멋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깊은 생각과 공간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도시 전문가들은 흔히 “사람이 느끼는 편안함의 정도가 바로 도시디자인의 수준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부산시가 만들어가야 할 품격 있는 도시는 바로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부산시가 추구해야 할 디자인 도시도 바로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철학이 있는 도시디자인, 사람을 향하는 도시디자인을 통해 도시는 더욱 풍요로워지고, 살아 있는 도시, 살맛 나는 도시가 될 것이다.
2024-11-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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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조선업 몰락 교훈 잊은 트럼프
미국령 푸에르토리코가 2017년 허리케인 마리아로 인해 괴멸적 타격을 입었을 때 일화다. 고립된 주민들은 식량과 음료수, 연료 부족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당시 뉴올리언스에 정박해 있던 노르웨이 선적 그린피스 선박이 구호품을 운반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외국적 선박의 국내 운항을 금지하는 존스법에 발목이 잡혔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존스법이 미국 해운업을 보호하고 있다’는 고집을 피우며 버텼지만 재난 상황이 심각해지자 사상 초유의 ‘10일 면제’ 조치를 발동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열흘 만에 컨테이너 53개에 물자를 싣고 푸에르토리코에 기항하는 건 불가능했다. 인도주의 활동조차 보호무역의 규제를 피하지 못한 것이다.
1920년 제정된 존스법은 ‘America First(미국 우선주의)’의 정수로 꼽힌다. 미국에서 건조되고, 미국인이 소유하고, 미국인 승무원이 일하는 선박만 미국 내 항구를 오갈 수 있게 한 것이다. 자유무역에 반하는 이 보호 조치가 104년간 이어지면서 조선과 해운 분야는 경쟁이 없는 시장으로 전락했고 조선업은 쇠퇴했다. 미국은 상선은 고사하고 군함조차 건조와 유지·보수·정비(MRO, Maintenance, Repair and Overhaul) 분야에서 경쟁력을 상실한 상태다.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윤석열 대통령에게 조선 분야에 협조를 요청한 까닭이다.
‘트럼프 2.0’ 행정부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GA, Make America Great Again)면서 징벌적 관세와 강한 달러를 밀어붙일 참이다. 경제 전쟁 중인 중국뿐만 아니라 동맹인 한국과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자유무역주의를 거스르는 과잉 보호 탓에 조선·해운산업이 몰락한 교훈을 잊었나? 미국발 무역전쟁 광풍에 전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은 커져만 가고 있다.
■ 과보호가 빚은 경쟁력 상실
존스법은 ‘연안무역법’(Merchant Marine Act) 제27조를 지칭한다. 미국 내 해상 운송 권한을 미국 선박에 한정하는 규제다. 당초 전쟁이나 국가 비상사태에 대비해 선박 건조 능력과 필수 인력을 유지하려는 취지로 도입됐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고비용과 경쟁력 저하의 악순환에 빠져들면서 회복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항구와 내륙 수로에서 시장 경쟁이 사라지자 선박 운송료의 고삐가 풀렸다. 화주들은 저렴한 도로와 철도 수송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화물 수요가 줄어들자 해운업계는 신규 선박 발주를 하지 않게 되고 조선업계는 일감이 줄어 쇠락하기 시작했다.
미국에는 상업용 선박이 4만 척 있지만 55%가 미시시피강에서만 운항하는 바지선이다. 2010년 이후 건조된 선박 10척 중 9척이 바지선과 예인선이었을 정도로 편중돼 있다. 1000t 이상 원양 선박은 노후화 탓에 2000년 이후 193척에서 99척으로 감소했다. 미국 컨테이너선 4척 중 3척이 20년 이상, 65%는 30년 이상 노후된 선박이다. 미국에서 대형 선박 건조가 줄어든 것은 터무니없이 비싸고 느린 공정 탓이다. 미국 싱크탱크 카토(CATO)는 2017년 <존스법 : 미국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부담> 보고서에서 미국 내 피더선 건조 비용이 1억 9000만~2억 5000만 달러(우리 돈 2660억~3500억 원)인 반면, 한국, 중국 등에서는 3000만 달러(우리 돈 420억 원)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카토 보고서는 가동 중인 124곳의 조선소 중 군함, 잠수함, 원양 화물선, 시추 장비 등 중형 선박을 건조할 수 있는 중대형 조선소는 22곳에 불과하다면서 한국과 일본, 중국이 제각각 1000~2000곳씩 보유하고 있는 것에 비교했다.
존스법은 군함의 건조와 정비에 차질을 준 것에서 나아가 군사 기동력까지 약화시켰다. 1991년 걸프전 당시 미군은 군수 물자 수송을 외국적 상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책임자인 한 장성은 의회에 출석해 “외국 선박의 지원 없이 존스법을 따르는 미국 선박만 투입했다면 수송에만 3개월이 더 걸렸을 것”이라며 존스법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 밀주업자와 침례교회 동맹
미국 조선·해운업계는 고정된 국내의 상선 및 군함 수요를 독점하기 때문에 최소 이익이 보장된다.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해외로 수출하는 미국 기업은 비용 절감을 위해 외국적 선박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조선·해운업계의 취약성이 가중되는 구조다. 전 세계 선박 건조는 중국과 한국이 주도하고 있는데, 올해 10월까지 점유율에서 중국이 65%, 한국이 26%를 차지했다. 미국 조선산업의 점유율은 0.1% 수준으로 의미가 없어진 상태다.
자유무역주의 전도사였던 미국이 과잉 보호를 고집한 결과는 참담하다. 하지만 조선·해운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존스법은 여전히 건재하다. 비효율·고비용을 이유로 폐지론이 끊임없이 제기되지만 번번이 국익을 앞세운 규제론에 밀린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 상황을 두고 ‘밀주업자와 침례교회’ 이론까지 등장한다. 이해가 엇갈리는 집단에 의해 금주법이 지탱된 데 대한 비유다. 검은 돈을 벌게 되는 밀주업자와 도덕적 권위를 얻는 복음주의 교회. 대척점에 선 두 집단이 금주법을 지킨 아이러니의 판박이라는 것이다. 카토 보고서는 외부 경쟁자가 퇴출된 뒤 업계와 규제 기관, 정치인들끼리 기득권이 공고화됐다고 분석한다. 미 의회 16개 위원회와 6개 연방 기관이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얽혀 존스법을 관리·감독하면서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 후퇴 모르는 보호주의
현재 미국 해군은 노후화에다 유지·보수에 심각한 차질이 발생하고 있다. 존스법에 의거 수리를 하려면 미 본토로 돌아가야 하는데 시일이 소요되고 현지 조선소의 비용과 기술도 한계에 다다랐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됐지만 보호주의는 요지부동이다. 존스법을 완화하거나 폐지할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대신 동맹국을 끌어들여 해결하는 임시방편이 동원된다. 한국과 일본 민간 조선소에까지 미 해군 함정 MRO를 맡기는 식이다. 경남 거제의 한화오션 등이 속속 미국 MRO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조선업 수주에 청신호이긴 하나 미국 정부가 자국 조선소와 일자리 보호를 핑계로 언제 돌변할지 몰라 안심할 수만은 없다. 취임 전부터 벌써 이차전지 보조금 폐지론을 흘려 한국 기업들이 진땀을 흘리고 있다. 약속했던 반도체 보조금도 마찬가지. ‘트럼프 2.0’ 행정부는 자국 산업 보호를 핑계로 과거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고 보고 대처해야 한다.
■ 무역전쟁 불가피… 불확실성 커져
‘트럼프 2.0’ 행정부는 강경 보호무역주의를 공언하고 있다. 미국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징벌적 고율 관세를 무기로 삼겠다는 식이다. 선거 유세 때 국내 산업 보호와 해외에 뺏긴 일자리 회복을 위해 모든 수입품에 10~20% 관세를 매기겠다고 공약했다. 특히 중국에는 60% 관세를 물리겠다고 엄포를 놨다. 관세 부담을 안겨 생산 거점을 미국으로 옮기게끔 강제한다는 발상이다. 하지만 미국의 일방적 관세 장벽에 중국과 유럽은 보복할 것이고, 따라서 전 세계적인 무역전쟁은 불가피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무역전쟁이 발생하면 2026년까지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이 1.3% 감소할 것으로 경고했다.
하지만 휘발유 세금을 올리면 공급자가 아닌 소비자에게 부담이 돌아가는 것처럼 관세 장벽의 부메랑은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관세 전쟁의 효과 분석을 보면 결국 자국 기업과 소비자가 피해를 입었다. 뉴욕 연방준비은행과 콜롬비아대, 프린스턴대가 공동으로 발표한 <2018년 무역전쟁이 미국 물가와 복지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고율 관세로 정부 세수가 늘긴 했지만 오른 세금만큼 제품 가격이 인상됐다. 결국 그 부담은 미국 기업과 소비자들에 고스란히 전가됐다는 것이다.
미국 경제학자와 관료 중 고율 관세 정책의 효율성에 찬성하는 이는 없다. 하지만 ‘트럼프 2.0’ 행정부는 아랑곳하지 않을 태세다. 이미 첫 번째 임기 때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인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에서 돌연 탈퇴한 전력이 있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세계무역기구(WTO)까지 탈퇴하는 초강수를 둘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트럼프 2.0’ 행정부는 자유무역주의를 무시하고 보호무역주의를 전면화할 것이다. 모순 덩어리인 존스법이 조선·해운업을 몰락시키고도 100년 넘게 건재하는 것처럼 미국은 스스로의 경쟁력을 무너뜨릴 보호주의 깃발을 내리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무역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됐다. 벌써 전운이 감돈다. 미군 MRO 수주로 한국 조선업에 ‘반짝 호황’이 올 수는 있겠으나 나머지 산업 전반의 기상도는 흐림 일색이다. 수출 주도로 경제 성장을 일군 한국 경제 앞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장기 불확실성 시대의 한가운데에 들어선 한국은 비상한 각오와 대비책이 필요하다.
2024-11-2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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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은행 역대급 ‘이자 장사’ 누가 판 깔았나
최근 두 달에 걸쳐 국내 은행들의 당기순이익이 ‘역대급’을 기록했다. 거칠게 요약하면, 예금 금리는 내려가는데도 대출 금리는 되레 올라간 결과다. 예대 금리차(예금과 대출금리 차이)는 은행 수익성과 직결된다. 이 격차가 올해 하반기 들어 더욱 벌어지자 은행들이 가만히 앉아 배만 불렸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 배경에는 정부의 일관성 없는 정책이 도사리고 있다. 결국 모든 피해는 이자 부담이 커진 서민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사태가 심각하다.
■ 은행권 역대급 ‘이자 장사’
올해 하반기 들어 은행들은 시장 금리 인하를 반영해 예금 금리를 발 빠르게 내렸다. 지방은행이 먼저 시작했고 눈치 보던 시중은행이 나중에 가세했다. 그렇다면 대출 금리도 함께 인하하는 게 당연한데 웬걸 대출 금리는 오히려 인상하는 추세다. 정부가 가계대출 억제를 유도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예대 금리차는 지난 8월에 이어 두 달 연속으로 크게 벌어졌다. 덩달아 은행 수익도 크게 늘었다. 5대 금융지주사의 올해 3분기 누적 순이익은 16조 원 규모로, 2022년에 기록한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3분기 누적 이자 이익 총액으로 따지면 37조 원을 훌쩍 넘기는 수준이다. 금리 조정에 따른 막대한 수익 논란에 ‘땅 짚고 헤엄치기’라는 눈총을 받는 이유다.
물론 대출 규제를 종용하는 정부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은행권의 고충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측면을 감안한다 해도, ‘팩트’는 변하지 않는다. 막대한 이윤을 가져가는 것은 은행이요, 그만큼 이자 부담을 더 떠안는 것은 소비자라는 사실.
■ 이자 수익이 90%라니
어찌 보면 은행업이란 게 원래 그렇다. 돈으로 영업을 하는 일이라 ‘이자 장사’로 수익을 취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다. 그런데 왜 대중들의 시선은 곱지 않을까. 예금 금리는 시중 상황에 맞게 재빠르게 내리면서도 대출 금리는 정부 눈치를 보며 제대로 조정하지 않는 얄미운 행보 때문이다.
국내 은행권의 이자 이익 쏠림이 어느 정도인지는 외국 사례와 비교하면 금방 알 수 있다. 국내 4대 은행의 전체 영업이익에서 이자 이익이 차지하는 비율은 무려 90%에 달한다. 이자 이익 외 비중은 10%에 불과하다. 이와 달리 미국 4대 금융그룹(JP모건체이스·뱅크오브아메리카·씨티·웰스파고)의 이자 이익 의존도는 50%대에 머문다. 나머지는 투자를 통해 돈을 벌고 있다.
은행은 수익을 지향하지만 일반 사기업과는 성격이 다르다. ‘신뢰’와 ‘공공성’이 존립 근거인 만큼 사회적 책임 또한 요구된다는 뜻이다. 고금리 수익에만 목을 매는 방식은 지양하고 이자 이익 외의 영업 확대를 꾀하는 게 바람직하다. 고금리로 확보한 이자 수익의 규모가 크면 그 일부의 사회 환원에도 적극적이어야 한다.
■ 오락가락 정부 정책도 한몫
은행 이자 수익의 확대는 이자율의 영향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대출 총량의 급증에 따른 것이다. 지난 10월 기준으로 1년 새 늘어난 4대 은행의 대출 규모는 100조 원에 육박한다. 우리 사회의 빚이 눈덩이처럼 늘고 있다는 뜻이다. 결국 대출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된 사회 구조적 문제를 상징하는 현상이다. 집값만 보더라도 소득으로 해결하기 힘들 정도로 치솟아 주택담보대출에 대한 의존도가 급격히 상승했다. 자영업자도, 기업체도 다르지 않다. 빚의 악순환에 대출만 계속 쌓이는 형국이다.
이렇게 빚지는 사회를 만들어놓은 정부는 대출을 풀었다 조였다 하는 단순 정책만 반복하고 있다. 그마저도 지난 1년간 잇단 실기(失期)로 점철됐다. 2023년 10월 윤석열 대통령의 지적에 따라 금융 당국은 대출 이자 부담을 낮추는 방안을 은행에 주문했더랬다. 은행이 마지못해 대출 금리를 내렸으나 정책 의도와 달리 부동산 시장이 출렁거렸다. 대출 규모가 급증하면서 부동산 거래가 늘어나고 부동산 가격이 치솟았다. 소상공인이나 자영업자들의 금리 부담을 덜어주려던 취지가 현실에서는 엉뚱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을 둘러싼 논란도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DSR은 대출자의 전체 금융 부채 원리금 부담을 소득 수준과 비교한 지표다. 금융 당국은 가계대출 억제를 위해 DSR을 강화하는 2단계 시책을 지난 7월에 시행하려다 2개월을 미뤘다. 그 사이에, 돈을 더 빌려놓자는 대출 심리가 자극받았고 실제로 대출 급증과 아파트 가격 급등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금융감독원이 정반대 카드를 꺼낸 것이다. 지난달부터 은행권에 대출 축소, 심사 강화 같은 강력한 규제를 요구했는데, 그 결과가 바로 은행권의 역대급 이자 수익이다.
■ 서민들 고충 언제까지
정부가 가계부채 억제와 부동산 시장 활성화라는 상반된 정책을 동시에 펼친 탓이 크다. 창과 방패를 함께 쓰는 격인데, 당연하게도 시장은 혼란을 피할 길이 없다.
문제는 내년에도 이런 현상이 계속되리라는 점이다. 정부가 서민 주거비 부담 경감 명목으로 내년에 55조 원 규모의 부동산 정책 상품을 공급하겠다고 밝힌 게 얼마 전이다. 그렇게 되면 올해도 동일한 현상이 되풀이될 공산이 크다. 가계대출 급증-부동산 시장 불안-은행권 이자 폭리로 이어지는 현실이 그대로 재현될 것이다.
지금 정부가 모순된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이를 섬세하게 관리할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부동산 부양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정책 수정을 하지 않으면 가계부채, 은행권 이자 장사 등의 문제는 해소되기 힘들다. 무엇보다 서민들의 피해와 고통이 언제까지 계속돼야 하는지 그게 걱정이다.
2024-11-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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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플라스틱 종식 부산선언?
플라스틱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리고 위험한 발명품이다. 기적의 소재로 불리며 우리의 일상과 산업에 혁명적 변화를 몰고 왔지만 이제는 악마의 물질로 취급받으며 지탄의 대상으로 변했다. 플라스틱 남용에 따른 환경오염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전 지구적 문제가 됐다. 마침 25일부터 부산 벡스코에서 유엔 플라스틱 국제협약 제5차 정부 간 협상위원회(INC-5)가 열린다. 플라스틱 오염에 대한 구속력 있는 국제협약을 만들기 위한 자리인데 이번 부산 회의가 마지막 정부 간 협상이어서 어떤 결론에 이를지 세계의 이목이 쏠린다.
∎기적의 소재에서 악마의 물질로
플라스틱의 역사는 당구공에서 시작됐다. 1863년 뉴욕타임스에 당구공을 만들 물질을 가져오는 사람에게 상금 1만 달러를 주겠다는 광고가 실렸다. 당시 당구공은 코끼리 상아로 만들었는데 당구 인기가 높아지자 무분별한 밀렵으로 코끼리 개체 수까지 줄어들고 당구공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던 것이다. 당시 미국 발명가이자 인쇄기술자 존 하이엇이 천연 합성수지 플라스틱 셀룰로이드를 이용한 당구공을 만들었다. 물론 너무 잘 깨져 상용화까지 가지는 못했다.
이후 1907년 미국 화학자 베이클랜드가 페놀과 폼알데하이드를 이용해 ‘베이클라이트’라는 물질을 만들었는데 이게 인공 플라스틱의 시초다. 플라스틱은 결합력 강한 탄소를 여러 형태로 결합해 만든다. 오늘날 대부분의 플라스틱은 석유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나프타를 이용해 생산하는데 에틸렌이나 프로필렌 같은 기초 원료를 만들고 결합하는 과정을 거친다. 탄소의 강한 결합력은 플라스틱이 쉽게 변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쉽게 분해되지 않고 썩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플라스틱 남용은 지구와 생명체를 병들게 하는 환경오염의 대명사가 됐다. 또 제조와 폐기 과정의 온실가스 배출로 기후변화의 주범으로까지 부상했다.
∎2060년이면 연간 생산량 12억 톤
OECD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플라스틱 연간 생산량은 2020년 4억 3500만 톤이었는데 2040년이면 7억 3000만 톤, 2060년에는 12억 3000만 톤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연간 폐기량은 2020년 3억 6000만 톤에서 2040년 6억 1000만 톤으로 늘어난다. 반면 재활용률은 6%대에 불과하다. 바다와 강으로 흘러드는 플라스틱이 2040년이면 3000만 톤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2015년 플라스틱 온실가스 배출량 비중은 전체의 3.8%지만 2050년이면 15%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코스타리카 해변에서 코에 빨대가 박힌 채 발견된 바다거북이, 뱃속에 플라스틱을 가득 삼킨 채 죽은 펠리컨, 생수병 뚜껑 고리에 입이 걸린 거북이는 플라스틱 환경오염을 고발하는 상징적 장면이 됐다. 태평양 심해에서부터 에베레스트 정상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에 플라스틱 오염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은 없다고 한다. 바다로 흘러든 플라스틱으로 매년 바닷새 100만 마리와 해양 포유동물 10만 마리가 죽어 간다. 해양생물에 축적되고 대기에 부유하는 미세 플라스틱은 결국 인간을 공격하고 있다.
∎강제력 있는 감축안 도출할 수 있나
세계 175개국 대표들은 2022년 3월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5차 유엔환경총회(UNEP)에서 급증하는 플라스틱 오염을 규제하기 위한 국제협약을 2024년까지 마련하기로 결의했다. 글로벌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2015년 파리기후협약 이후 최대 친환경 합의(그린 딜)가 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이에 따라 구체적 협약안을 만들기 위한 정부 간 협상위원회 회의가 네 차례 진행됐고 부산에서 마지막 5차 회의가 열리는 것이다. 플라스틱 생산 규제, 우려 화학물질 규제, 문제성 플라스틱 규제 등이 쟁점인데 결국 정부 간 합의를 통해 강제적 플라스틱 감축 목표를 정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현재까지 진행된 네 차례 회의에도 불구하고 국가 간 입장 차가 여전히 커 합의에 이르기 쉽지 않다는 전망이 나온다. 플라스틱 생산 단계부터 감축해야 한다는 강성 그룹인 ‘플라스틱 오염 종식을 위한 야심 찬 목표 연합(HAC)’과 재활용·폐기물 관리에 중점을 둬야 한다는 약성 그룹 ‘플라스틱 지속가능성을 위한 국제연합(GCPS)’이 대립하고 있다. 미국, 캐나다, 유럽연합, 아프리카 도서국 등이 HAC에 속해 있고 러시아,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등 생산국과 산유국을 주축으로 GCPS를 이룬다.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의 정책 변화도 주목되는 대목이다. 환경단체들은 부산 회의를 앞두고 플라스틱 생산과 사용, 폐기 등 전 주기에 걸친 감축 목표와 구체적 로드맵을 설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부, 지속적이고 일관된 정책 중요
국가 간 논란에도 불구하고 플라스틱 사용을 줄여야 한다는 큰 틀의 시대적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플라스틱 산업과 사용 비중이 높은 우리로서는 적극적 대응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미국 중국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은 세계 4위 에틸렌 생산국이고 석유화학이 국내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높다. 주요 수출국이기도 하다. 친환경 플라스틱 연구개발, 고부가가치화 등 산업적 측면에서의 적극적 대응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정부의 플라스틱 정책에 대한 중장기적 로드맵 수립과 일관되고 지속적인 추진이 중요하다. 정부가 플라스틱 빨대를 금지하고 종이 빨대로 전환했다 다시 빨대 등 1회용품 규제 의무를 해제하는 등 오락가락하는 과정에서 산업계와 자영업자, 소비자들이 겪었던 혼란을 다 기억할 것이다. 정부는 정부 간 플라스틱 협상 과정에서도 당초 플라스틱 생산 감축안에 부정적이거나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최근 부산 회의를 앞두고 감축이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전환하고 있다. 부산 회의를 계기로 플라스틱에 대한 전향적 정책 전환과 산업 혁신을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
2024-11-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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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주 6일 근무냐, 주 4.5일 근무냐
우리나라에 주 5일 근무가 도입된 때가 2002년 4월.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일이다. 당시 정부 부처에 시범 도입된 이 제도는 이후 2004년부터 1000명 이상 사업장으로 확대됐고 2011년 7월부턴 5인 이상 모든 사업장에도 적용됐다. 주 5일제 시행은 여가 확대 등 국민들의 일상생활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 여간해서는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주 5일제에 최근 균열이 생기고 있다. 주요 대기업이 임원들을 대상으로 주 6일제 근무를 확대하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반대로 주 4.5일제 근무가 일부 지자체를 중심으로 도입되고 있다. 사회의 각 영역에 따라 주간 근무 형태도 분화하고 있는 셈이다.
■ 대기업은 주 6일, 지자체는 주 4.5일
올해 4월부터 삼성그룹 임원진은 토요일과 일요일 중 하루를 선택해 출근을 시작했다. 전반적인 여건이 어려워지면서 회사 경영의 불확실성이 높아지자 임원들이 근무를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당시 그룹에서 따로 지침을 내리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아마 회사 분위기상 ‘계약직’인 임원들이 주말 근무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조직과 실적 관리가 엄격하기로 이름난 삼성에서나 있을 법한 일로 여겼던 주 6일 근무가 최근 들면서 다른 대기업으로 점차 확산하는 추세다. SK이노베이션은 이달부터 임원들을 대상으로 매주 토요일 ‘커넥팅 데이’를 시작한다. SK이노베이션 임원 50여 명과 SK에너지·SK지오센트릭·SK엔무브 등 계열사 임원들이 토요일 오전 회사로 출근해 전문가 강연이나 워크숍을 한다는 계획이다. SK이노베이션 측은 통상적인 주 6일 출근과는 다르다고 강조했지만 어쨌든 토요일 출근 자체가 회사 임직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클 수밖에 없다. 조직 내부의 기강이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한 회사 차원의 조치로 여겨질 수 있다. 게다가 국내 굴지의 기업이 비록 임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하지만 주 6일 근무 확산은 다른 기업에도 연쇄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대기업의 주 6일 근무와 정반대의 기류도 늘고 있다. 바로 주 4.5일 근무인데, 특히 관공서의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강원도 정선군이 올해 9월부터 4개월간 주 4.5일 근무를 처음 시작한 이후 경기도가 광역지자체 차원에서 강력하게 이 제도의 도입을 검토 중이다. 공청회 등 관련 절차를 밟는 중으로 내년 3월 시범 추진 일정까지 밝힌 상태다. 이 외에도 금요일 오후 퇴근, 유아 자녀를 둔 직원들의 주 4일 출근 등 각 지역 사정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4.5일 근무 형태가 출현하고 있다.
■ 주간 근무 형태도 양극화?
대기업 임원들의 주 6일 근무는 아무래도 직원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임원들의 주말 업무를 위해서는 실무 담당자들의 보좌·협조가 필수적인데, 이미 직원들의 주말 근무가 불가피해진 곳도 있다고 한다. 급변하는 기업 환경 변화에 대응한다는 점에서는 수긍이 간다고 해도 20년 만의 주말 근무가 아무래도 우리나라 직장 문화를 더 경직되게 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과 여가의 균형을 추구하는 시대 흐름과도 어긋난다.
특히 지자체를 중심으로 주 4.5일 근무가 늘고 있는 상황에서 대기업과 일반 관공서의 주간 근무 형태가 확연히 갈라지는 현상을 국민들이 어떻게 평가할지 주목된다. 이미 주 5일 근무가 대세로 굳어진 상황에서 여건 변화를 이유로 주 4.5일 근무와 6일 근무가 양립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지도 논쟁거리다.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핵심적인 가치를 놓고 노동계와 재계, 국민들 사이에 본격적인 논쟁이 일 가능성도 높다.
예나 지금이나 휴식과 노동 시간을 어떻게 배분할지는 인류가 존재한 이래 늘 최고의 고민거리였다. ‘아포리아’, 어쩌면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일 수도 있다. 다만 둘 중 어느 것도 희생할 수 없는 만큼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 맴도는 일이 인류의 몫인 듯싶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2024-11-0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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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5060 남자는 외롭다
■홀로 살다 쓸쓸히 죽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홀로 죽음, 즉 고독사를 맞은 사람이 3700명에 이른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17일 발표한 ‘고독사 사망자 조사 결과’에 나타난 수치다. 그런데 고독사한 이들의 54%가 50~60대(이하 5060) 장년층 남성이다. 5060 여성 고독사 사례는 남성의 5분의 1 정도에 그친다. 5060이면 삶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시기인데, 왜 이 시기에 유독 남성의 고독사가 많을까.
고독사는 가족, 친척 등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 채 사회적 고립 상태로 생활하던 사람이 자살, 병사 등으로 임종을 맞이한 경우를 칭한다. 이는 ‘고독사 예방법’에 규정된 바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사회적 고립 상태’다. 고독사가 늘어나는 주요 원인으로 1인 가구, 즉 홀로 사는 사람의 증가를가 꼽힌다. 하지만 혼자 살지 않더라도 심리적으로든 어쨌든 주변인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가 사회적 고립 상태다. 관계가 끊어졌음은 곧 의지할 데 없이 외로운 처지라는 말이다.
자살률(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 증가 속도도 5060 남성에서 특히 빠르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자살률은 지난해 27.3명으로 전년 대비 평균 2.2명(8.5%) 늘었다. 그런데 같은 기간 50대와 60대 남성의 증가폭이 각각 4.9명(11.6%)과 5.2명(12.6%)으로 평균치를 크게 웃돌았다. 5060 남성에게서 고독사가 많고 자살률이 높다는 건 그만큼 이들이 외로움에 겨워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외로움에 부서지다
남자 나이 50줄에 들어서면 사회생활의 정점을 지나게 되고 일의 중심에서 밀려나면서 박탈감이나 소외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 형편에 실직이나 퇴직, 사업 실패 등을 겪고 가정까지 파탄에 이르면 자의든 타의든 사람들과의 관계도 끊어진다. 경제적 궁핍 역시 위험 수준에 이른다. 지난해 개인파산을 신청한 사람 중 86%가 50대 이상 장년이고, 이 가운데 60% 이상이 홀로 사는 남성이라는 통계도 있다. 생물학적으로도 50대가 되면 남성 호르몬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몸과 마음에 안 좋은 변화를 겪는다. 미국 워싱턴대학의 조사에 따르면 남성 호르몬이 부족한 남성의 56%가 심각한 우울증을 겪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5060 남성들은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주변에 도움 청할 줄을 모른다. 설사 자존심과 체면을 제쳐두고 도움을 요청한다고 해도 딱히 요청할 데가 없다. 관계의 끈이 약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는 일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 관계가 맺어졌지만, 일을 그만두거나 줄인 후에는 그런 관계가 필연적으로 줄어든다. 여성들이 직장은 물론 지역 공동체에서도 개인적인 교류가 활발한 것과는 달리 남성들은 직장 등 조직 이외의 관계에는 익숙하지 않은 게 현실이다. 비근한 예로, 흔한 교류의 장소인 카페를 가장 적게 이용하고 카페에 들어가더라도 가장 빨리 나가는 이들이 5060 남성이라는 보고도 있다. 요컨대 5060 남성은 외로움에 가장 부서지기 쉬운 존재인 것이다.
■동년배 보며 그나마 위안?
5060 남성의 고독사와 자살과 관련해 전문가들의 진단과 처방은 이미 숱하게 나와 있다. 국가와 지역공동체가 사회안전망을 더욱 촘촘하게 다져야 한다거나, 청년·노인층과는 달리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5060 남성을 위한 맞춤형 예방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거나, 사회적 연결을 복원시켜 줘야 한다는 식이다. 하지만 원론적인 논의에 그치는 것들이라 정작 5060 남성들의 마음에 와닿지는 않는다.
고독사나 자살 같은 극단적인 경우까지 이르지 않더라도 5060 남성들은 문득문득 외로움을 절감한다. 그럴 때마다 친구라도 찾자 싶어 전화기를 들지만 이내 머쓱해진다. 오랜 친구들은 가까이 없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오래 두고 사귀지 않아 깊은 정이 없다. 일로 만난 지인은 결국은 일 때문에 만날 뿐, 일이 끝나면 서로 보지 않을 사이다. 도대체 그 많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하는 생각에 속으로 쓴웃음만 지을 뿐이다. “그렇지 않은 5060 남성도 많다”고 힐문하면 딱히 대꾸할 말이 궁색하겠지만, 그래도 가슴 한구석에 서늘한 바람이 스침은 어찌할 수 없다.
그나마 한 줄기 위안은 있겠다. 자기가 그런 것처럼 외로움에 겨워하는 비슷한 처지의 5060 남성들이 옆에 얼마든지 있으니까. 사무치는 외로움 속에 쓸쓸히 삶을 이어가는 ‘또 다른 나’를 바라보며 술잔이나 기울일 밖에!
2024-10-2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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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1년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기습 공격에 대한 이스라엘의 보복으로 시작된 이스라엘-하마스(Hamas) 전쟁이 1년을 넘었다. 가자지구를 중심으로 한 분쟁은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에 이어 이란의 대리 세력인 레바논의 헤즈볼라, 예멘의 후티 및 이라크의 친이란 시아파 군벌의 참전과 이스라엘의 대규모 공습으로 확전됐다. 이스라엘은 지난 7월과 9월 이란과 레바논 영토에서 하마스 정치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와 헤즈볼라 수장 하산 나스랄라를 각각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 32년간 헤즈볼라의 수장이었던 나스랄라의 죽음, 연이은 최고 지도부의 피살로 헤즈볼라는 리더십을 상실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이란은 서로 직접적으로 보복 공격을 감행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이스라엘의 보복 공격이 임박해지면서, 하마스의 기습으로 시작된 전쟁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형국이다.
■‘디지털 트로이 목마’ 등장
새로운 공격 수단이 등장했다. 이스라엘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무선호출기 수천 대를 동시에 폭발시키면서 무기로 활용했다. 9월 17일 레바논 전역에서 헤즈볼라가 사용하는 무선호출기가 연쇄 폭발해 최소 12명이 사망하고, 2800명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9월 18일에는 무전기 폭발로 20명이 사망하고 450명이 부상했다. ‘디지털 트로이 목마’로 호칭되는 새로운 유형의 무기가 가시화된 것이다.
디지털 트로이 목마 사건은 헤즈볼라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고 있다. 헤즈볼라 최고 지도자와 상당한 양의 무기가 일시에 제거되면서 전쟁의 상황, 중동의 세력 균형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이스라엘로서는 ‘당신들이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다 보고 있다’라는 정보력을 과시한 셈이다. 이번 공격으로 헤즈볼라 내부는 물론이고, 이란 등 외부와의 커뮤니케이션에 차질을 빚게 됐다. 헤즈볼라는 지휘·통신 라인이 붕괴된 탓에, 비축해 둔 미사일과 로켓을 이스라엘에 전략적으로 쓰지 못하는 상황이다.
■‘대리전’의 몰락, 전면 나서는 이란
전문가들은 이번 전쟁의 발단인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은 이란이 그린 큰 그림에 따라 대리 세력들이 지원하고, 하마스가 행동으로 옮긴 ‘계산된 모험’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란은 수십 년 동안 하마스와 헤즈볼라의 가장 큰 후원자였다. 이란은 지난 40여 년간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앞세우고 자신은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대리전, 즉 ‘그림자 전쟁’을 전개했다. 대리전쟁이란 한 국가가 직접 전쟁을 하지 않고, 그 우방국 또는 기타 국가나 집단이 대신하여 타 진영이나 다른 국가와 싸우게 하는 전쟁을 뜻한다.
실제로 하마스와 헤즈볼라는 이란과 테헤란의 정권에 대한 대리인, 보험의 성격이었다. 이스라엘과 갈등에서 이란의 ‘국가 보험’ 역할을 했던 헤즈볼라는 예멘에서 후티족을 훈련시키고,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조력했다. 중동 전역의 다른 분쟁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이란은 정권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헤즈볼라를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확대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대리인으로 활용했던 헤즈볼라 지도자부터 총사령관, 정예부대 수뇌부까지 대거 제거되면서 해당 보험이 효력을 발휘하기 어렵게 된 상황이다.
■이스라엘, 어디를 어떻게 더 세게 반격하나?
하마스와 헤즈볼라의 궤멸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이란은 지난 1일 미사일 180발을 이스라엘을 향해 발사했다. ‘약속 대련’ 느낌의 보복마저도 실패로 끝났다는 평가다. 상당수 미사일이 발사 단계 또는 비행 도중에 실패한 것으로 관측됐다.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는 공격 직후 “이란은 대가를 치를 것이다. 이란의 핵시설을 공격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무기체계에서 압도적 우위를 과시하고 있다. 이미 지난 4월 1차 공격에서 이란의 대공미사일 시스템과 방공망을 무력화했다. F-35 라이트닝 스텔스 전투기와 첨단 탄도미사일 체제로 이란 전역을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충분히 전달한 셈이다. 또한, 헤즈볼라가 이란에게서 받아 비축한 미사일과 로켓 12만~20만 기 중 상당수가 파괴되면서 이란으로서는 대리인을 통한 협공 수단이 애매해졌다.
이제 최종 반격에 나설 이스라엘에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미국 대선 전에 이란 공격을 감행하고, 공격할 표적을 결정한 것으로 보도됐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란에 곧 대응할 것"이며 "정확하고 치명적인 대응"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스라엘로서는 헤즈볼라와 하마스의 위협을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주변이 정리되면서 방어 위주에서 최대 공격으로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이제는 ‘어디를, 얼마나 세게 공격하느냐’의 선택만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은 이란의 미사일 생산기지와 우라늄 농축시설 타격 등 어려운 군사작전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전체 GDP의 20%를 차지하는 페르시아만 정유시설, 원유 수출 터미널 등 경제 인프라까지 보복 대상에 올려놓고 있다. 또한, 이란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를 제거하거나 신정 정권에 타격을 주는 등 다양한 공격 방안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동 전문가들은 “이란에 대한 전면전을 피하면서도, 이란의 전쟁 의지를 꺾을 수 있는 대담한 전략을 사용할 수 있다”라고 전망했다. 이란 정권이 국민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지원하는 것에 대한 국민의 불만도 심상치 않다는 관측도 한 배경이다. 실제로 네타냐후 총리는 이란 국민을 상대로 “이란 정권이 핵무기와 외국 전쟁에 낭비한 막대한 돈을 모두 당신들 자녀의 교육, 건강, 국가 인프라, 물, 하수 등 필요한 것에 투자했다고 상상해 보라”는 내부 분열용 메시지를 계속 던지고 있다. 이란을 안팎에서 흔들려는 전략이다.
이스라엘은 이란 정권 교체, 핵시설 파괴 등이 힘들다면 최소한 레바논과 접경지역인 이스라엘 북부지역의 피란민 6만여 명을 귀환시키겠다는 목적을 실현할 수 있다. 최근 이스라엘에서는 구소련과 동유럽 출신 유대인 인구 유입이 급증했다. 이들의 정착촌 확보를 위해 레바논과 이스라엘 국경 지역에서 헤즈볼라의 완전한 무력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스라엘로서는 북부 접경지역에 안전지대를 만든 뒤, 자국 피란민을 복귀시키겠다는 전략이다. 어떤 경우든 이스라엘로서는 군사력을 투사해 중동의 판도를 바꿔 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활용 여부를 고민하고 있다.
■2주 앞으로 다가온 미국 대선이 변수
이스라엘은 중동전쟁으로 확전되는 것을 극구 만류하는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시간을 갖고 있다. 11월 5일 미국 대선까지 2주 남짓 남았다. 미국의 권력 교체기에 이스라엘을 통제할 국제적인 외교 수단조차 없다. 설령 이스라엘이 핵과 정유시설 파괴 등 ‘과도한 보복’을 해도, 대선이 코앞인 미국 정치권에서 구두 비판 외에 적극적으로 막아설 의지나 여유, 주체가 불분명하다는 뜻이다. 이는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이스라엘이 미국 대선 이전에 이란 공격을 감행하겠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워싱턴 근동정책연구소 싱크탱크(The Washington Institute for Near East Policy think tank) 연구 책임자인 데이나 스트룰 전 미국 국방부 중동 담당 차관보는 최근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은 지금이 중동 지도를 재편하면서 가능한 한 많은 역량과 리더십을 계속 발휘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다”면서 “이스라엘은 헤즈볼라 리더십 소멸로 새로운 중동을 상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라고 분석했다.
■이란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
이란은 지난 40여 년간 이스라엘을 무너뜨리고 미국을 중동에서 몰아내는 것을 정권의 핵심 이익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미국은 이스라엘에 미국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포대와 이를 운영할 약 100명의 군인을 추가로 파견했다. 두 개의 항모전단이 지중해에 배치되는 등 미군의 개입이 훨씬 많아지고 있다. 현재도 이라크와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에 미군 4만 명이 주둔하고 있다. 쿠웨이트에서 오만에 이르기까지 아라비아반도에는 미군기지들이 배치돼 있다. 이란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상황이 질주하고 있는 셈이다.
부경대 국제지역학부 안상욱 교수는 “미국의 유일무이한 중동 교두보인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란의 개혁·개방과 미국 등 서방과의 관계 회복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면서 “현재의 전쟁 상황은 이란과 미국의 외교관계 정상화를 막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안 교수는 “하마스가 시작한 갈등의 파장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지켜봐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중동 사태가 주는 시사점
이란과 이스라엘의 분쟁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대만해협, 한반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무기 재고가 소진되고, 추가 전쟁을 준비해야 하는 이란의 입장에서 러시아와 주변 집단에 대한 무기 지원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란의 탄도미사일 비축량과 이란제 드론이 1, 2차 공격과 예멘 후티 반군과 헤즈볼라 무기 지원으로 바닥을 보이게 되면, 북한에까지 손을 내민 러시아로의 무기 수출은 어려운 상황이 될 수 있다. 결국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국가 간 관계여서 중동의 대리전과는 다른 상황이지만, 러시아와 중국도 북한을 이용한 동북아시아 대리전 전략의 효용성도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하마스·헤즈볼라 전쟁에서 보듯 대리전쟁 전략이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는 시사점을 주기 때문이다. 향후 국제 정세의 변경에 따라 이들 국가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보복을 선언한 이스라엘이 이란 핵시설을 파괴하는 시도를 한다면, 북한 입장에서도 상당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브렛 스티븐스는 기고문에서 “깡패 국가는 몽둥이에만 반응한다”며 “지금이야말로 누군가 이란 핵시설에 대해 뭔가를 해야 할 때이며, 그게 이스라엘일 수 있다”라고 했다. 강경파 입장에서는 북한을 떠올릴 수도 있는 솔깃한 대목이다. 그만큼 한반도 위기의 변동성에도 영향을 준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비극
전쟁 발발 1년이 지나면서 전 세계인이 어린이를 포함한 무고한 민간인 사상자와 고향을 떠나야 하는 난민의 상황에 둔감해지고 있다. 전쟁과 봉쇄로 인해 사실상 감옥으로 변해버린 가자지구 상황은 이젠 언론에도 띄엄띄엄 보도되는 실정이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지상전이 이어지면서 레바논 주민 120만명 이상이 집을 잃었다. 수많은 사람이 전쟁터에 갇힌 것이다. 또한, 1년 전 하마스의 불시 공격으로 이스라엘인 1200여 명이 숨졌다. 또, 붙잡혀간 인질 100여 명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국민이라는 사실을 이번 중동 사태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2024-10-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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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그냥 쉬는’ 청년 세대
중국의 Z세대 뤄화중(駱華忠)은 초경쟁 사회에서 ‘번아웃’됐다고 느꼈다. 31세이던 2021년 4월 회사를 그만 두고 ‘탕핑’(躺平)주의 선언을 블로그에 올렸다. 탕핑은 ‘가만히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신조어다. 뤄화중은 쓰촨(四川)성에서 티베트까지 2000㎞가 넘는 거리를 자전거로 여행하면서 ‘2년이 넘도록 직업이 없어 놀고 있지만 잘못됐다는 생각은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미국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탕핑이 정의다”(Lying flat is justice)라고 말한 뒤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탕핑족은 중국의 청년 세대에 주어진 극도의 경쟁 환경에 대한 반발감에서 생겨났다. ‘996’으로 대표되는 과로 사회를 못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중국 회사들은 법정 근무 시간을 어긴 채 오전 9시~오후 9시, 주 6일 근무제를 강요하는 게 예사다. 이런 가혹한 직장 문화와 함께 21%가 넘는 높은 청년 실업률이 젊은이들의 미래를 짓누르고 있다. 모진 사회경제적 조건이 강요되고 있으니 MZ세대가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다. 성공에 대한 강박을 거부하고, 최소한의 안분지족, 즉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뛰쳐나오는 것이다. 탕핑은 단순히 구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 사회의 압박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발전했다.
졸업 후 취업을 통해 기성 사회로 편입되는 전통 경로를 벗어나는 현상은 중국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영미권의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 일본의 ‘사토리 세대’(悟り世代)는 직장에서 희망을 추구하지 않는다. 한국의 ‘N포 세대’와 유사하다. 한데, 최근 고용 통계에서 청년 세대의 ‘쉬었음’ 비중이 역대 최고를 기록해서 상황의 심각성을 일깨우고 있다. ‘취준’도 아닌 자발적인 ‘백수’ 상태의 젊은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사회 현상이다. 해석과 대책이 필요한 대목이다.
■ 쉬는 청년 46만 명 역대 최고 수준
통계청의 8월 고용동향을 보면 15~29세 청년의 ‘쉬었음’ 인구는 지난해 8월(40만 4000명) 대비 13.8% 늘어난 46만 명이다. 또래 인구 집단의 5.3%를 차지하는,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는 규모다. 직전 6월 42만 6000명, 7월 44만 3000명과 비교해도 확연한 증가 추세다. 2016년 8월 24만 5000명에 비하면 무려 87.8% 폭증했다. 이후 2017년 8월 29만 6000명, 2019년 37만 8000명 등 증가세는 꺾이지 않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는 비대면, 휴업이 늘면서 비정상적인 폭증이 있었다. 2020년 8월 46만 7000명, 2021년 44만 5000명. 팬데믹 종료 후 ‘그냥 쉬는’ 청년 인구는 원상 회복되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내 반등세로 돌아서 역대 최고치 수준을 기록한 것은 심상치 않은 조짐이다.
통계청 고용 조사의 ‘쉬었음’ 항목은 질병이나 장애가 아닌 이유로 구직 활동을 하지 않은 채 쉬는 경우다. ‘쉬었음’은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돼 실업률 통계에서 빠진다. 실업자로 분류되면 구직 활동을 하는 경우지만 ‘쉬었음’ 청년은 취준생조차 아닌 상황을 의미한다. 눈높이에 맞는 일자리를 찾지 못하자 구직을 단념하고 고용시장 밖으로 이탈하려는 추세가 강화되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
8월 청년 고용률은 46.7%로 역대 최고치였다. 청년층 고용지표는 지속적으로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지만 실상은 플랫폼 고용이나 단순 노무직 증가가 두드러진 결과다. 양질의 일자리가 늘었다고 보기 어렵고, 일자리 미스매치와 고용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런 조건에서 ‘그냥 쉰다’는 청년 증가세를 허투루 봐서는 안 된다.
■ ‘그냥 쉬는’ 세대 이해하기
영미권에서 Z세대의 행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의미로 ‘눈송이’(snowflake)란 속어가 쓰인다. 회사에서 불평만 터뜨리는 젊은 세대가 눈송이처럼 연약하고 쉽게 바스러진다는 뜻이다. 나약하고, 예민하고 한심한 존재라는 의미의 비아냥이다. <꼰대들은 우리를 눈송이라고 부른다>의 저자 해나 주얼 미국 워싱턴포스트 비디오저널리스트는 눈송이 세대가 이전 세대와 다른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부당한 지시에 항의하고,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하고, 더 나은 처우를 요구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주저 없이 사표를 던진다.
직업에 대한 가치관이 기성세대와 현저하게 달라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지난 2일 지역노동사회연구소 주최 ‘지역 청년 일자리 및 유출 현황과 과제’ 세미나에서 2030세대 815명 중 51.5%가 ‘프리터’(freeter)가 될 의향이 있다고 응답한 설문 조사가 발표됐다. 프리터는 고정된 직장을 갖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반복하면서 생계를 잇는 사람을 말한다. 학업과 취업의 과도한 경쟁주의에 대한 저항감이 위험 수위에 다다른 결과다.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라이프 사이클에서 젊은 세대의 이탈이 시작됐다고 봐야 된다.
■ 변화 받아들이고 사회도 바뀌어야
탕핑의 기수 뤄화중은 기성세대가 정해 놓은 규칙을 박차고 나가자고 선언했다. 아마도 그전에 무수히 많은 문제 제기를 했으나 기성세대는 귀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에 대한 절망이 결국 사회 밖으로의 탈주로 나타났으리라.
뤄화중이 비판하는 ‘숨막히는 경쟁과 위계 사회’에서 한국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한국 청년 세대의 ‘쉬었음’ 급증 현상을 한국판 탕핑으로 봐도 전혀 무리가 없는 이유다. 개인적인 나약함이나 부적응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현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규직, 대기업에 높은 임금이면 야근이나 주말 근무, 위계나 부당한 관행이 강요되는 직장 문화가 당연시되는 시절이 있었다. 지금 세대는 차라리 ‘쉬었음’을 선택한다. 학업을 마칠 때까지 수평적 관계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기성세대에 거슬리는 언행을 할 가능성도 높다. 이들을 별종 인간으로 취급해서는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다. 부정적으로 볼 게 아니라 변화로 받아들여야 해결책에 다가갈 수 있다.
쉬는 청년들을 사회에 나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결책은 기성세대가 쥐고 있다. ‘눈송이’라고 비꼬거나 낙오자로 취급하는 대신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요구를 들어주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들은 이미 ‘쉬었음’을 선택하면서 무언의 외침을 하고 있다. 이들을 고독과 은둔의 세상에 방치하면 세대 간 괴리가 커지고, 사회 불안 요인으로 이어진다. 사회의 지속 가능성이 걸린 문제다. 그들이 사회로 나올 수 있는 통로를 열어야 한다. 책임은 기성세대에 있다.
2024-10-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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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간 일궈온 ‘문화도시 영도’ 헛되게 하지 마라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2019년 부산 영도구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한 제1차 법정문화도시에 선정됐다. 지난해 9월 7~10일 영도구는 전국문화도시 의장도시 자격으로 봉래동 물양장에서 ‘2023 전국문화도시 박람회 & 국제 콘퍼런스’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김기재 영도구청장은 “영도 문화도시 사업이 종료되더라도 지속적으로 이어 나갈 조직과 공간 구축을 계획하고 있다”며 “이는 자발성에 기반한 문화도시 사업의 발전 가능성을 체감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최근 영도구청은 내년부터 이 사업을 주관한 영도문화도시센터 예산을 편성하지 않겠다고 밝혀 ‘문화도시 영도 사업’이 종료 위기에 처했다. 만약 김 구청장이 언급한 조직과 공간이 혹여 ‘영도문화도시재단’ 설립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재단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기에 문화도시 사업은 중단될 수밖에 없다. 문화 지속성의 관점에서 영도 문화도시 사업을 절대 일몰(종료)해서는 안 된다. 사업 종료만이 능사가 아니다.
■문화도시 영도 5년간의 성과
영도구는 법정문화도시에 선정되면서 2020년부터 5년간(내년 2월 종료) 총사업비 160억 원(실제 집행은 140억 8000여만 원)의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이 예산은 국비 50%와 시비 및 구비 각각 25%로 구성돼 있다. 이를 바탕으로 영도문화도시센터는 구민을 주요 문화 주체로 삼아 문화 자생력을 키우고, '예술과 도시의 섬, 영도'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고령화, 청년 감소, 환경오염 문제를 문화 프로젝트로 해결하고, 지역 이미지 개선을 위한 브랜딩 사업을 통해 주민들에게 영도에 대한 자부심을 높이고자 했다.
지역 예술가들이 문화도시 사업을 계기로 협업하고, 어르신들은 산복도로, 깡깡이마을, 흰여울마을, 동삼동 등지에서 글쓰기, 그림 그리기, 도자기 만들기, 노래 부르기 등 다양한 문화 활동에 참여했다. 특히 센터에서 주도한 각종 문화 사업은 지역 주민들의 연대감을 강화하는 중요한 마중물이 됐다.
이전에 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영도구 대평동 일대에 문화 예술을 입힌 깡깡이 예술마을 프로젝트 등 일련의 문화사업이 있었지만, 5년간의 법정문화도시 사업의 성과는 놀라웠다. 영도구의 특성을 살린 시각 브랜딩과 글자체(영도체) 개발로 국내 최초 세계디자인어워드 4관왕에 올랐고, 방문 예술활동·예술치유 공간 운영으로 외로움 완화에 기여해 문체부 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영도 기획자 학교를 운영하며 매년 30건 이상의 문화 창업 지원, 영도 문화유산 자료를 담은 아카이브 개설, 어린이 문화활동 거점 공간 조성, 깡깡이 예술마을 투어 프로그램 운영 등의 성과를 인정받아 지난 3월에는 전국 24개 문화도시 중 ‘최우수 도시’로 선정되기도 했다.
사업을 주관한 영도문화도시센터에 대한 평가도 놀랍다. 첫해인 2020년 미흡(3등급)에서 2023년 최우수(1등급)로 평가가 상승하는 놀라운 저력을 보여주었다. 문화도시 사업의 성과는 주요 도시 지표로도 확인됐다. 문화 분야 사업체 수와 거주 예술인 수가 크게 증가했으며, 2023년 부산사회조사에서는 구민의 문화여가시설 및 여가 활동 만족도가 원도심 중 1위를 기록했을 정도다. 많은 지역 주민이 “문화도시 사업 덕분에 영도에 대한 자부심을 느낀다”고 할 정도로 만족도가 높았다.
이처럼 문화도시 사업으로 지역 이미지를 향상하고 주민 삶을 개선하는 성과를 냈음에도 사업 종료 결정은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다.
■사업은 종료하면서, 재단은 만들겠다고
지난달 20일 열린 ‘2024년 영도문화도시 추진위원회’ 회의에서 영도구는 문화도시 사업을 종료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추진위원들은 사업의 지속성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영도구는 “내년부터 정부 지원 예산이 없다. 문화도시 사업을 계속하려면 자체 예산을 투입해야 하지만 재정 여건 등의 현실적인 어려움이 일몰의 이유다”라고 설명했다. 김태만 추진위원장은 “사전 논의 없이 일방적인 통보였다”고 전했다.
영도구는 연간 30억 원의 예산 중 7억 5000만 원을 분담해왔으나, 이마저도 부담스러운 상황이라는 것이다. 영도구의 재정자립도가 9.3%로 열악한 점은 이해할 수 있지만, 9개월 전에는 영도문화도시재단을 설립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던 만큼, 단순히 예산 문제로 지원을 중단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영도문화도시재단 설립의 취지는 좋지만, 초기 비용과 운영비가 더 많이 드는 재단 설립이 오히려 센터를 유지하는 것보다 더 많은 예산을 필요로 한다. 이쯤 되면 구청의 예산난은 단순히 핑계에 불과하다는 의구심이 든다. 향후 재단을 설립하더라도 문화도시 사업의 성과를 고려했을 때 영도문화도시센터는 지속되면서 자연스럽게 재단으로 흡수·전환되는 게 바람직하다. 무엇보다 문화는 지속성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문화도시 사업은 첫 5년이 끝난 후 지자체가 예산과 조직을 운영해야 한다. 이를 알고 있는 영도구가 지난 5년간 후속 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것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영도의 문화도시 사업의 성과와 기여를 무시하는 것은 부당하다. 지역 주민과 문화 활동가들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으면 지역 문화 발전이 저해될 수 있다. 문화도시 사업이 종료되면 그동안 쌓아온 유·무형의 성과가 사라질 위험이 있다. 주민들과의 관계를 형성해온 만큼, 종료 결정은 지역 사회의 반발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주민들은 사업 종료 소식에 반발하고 있다. 김지영 영도구 의원은 “문화도시 사업을 계속할 의지가 있다면 일몰을 선언할 것이 아니라 지방 소멸 대응 기금을 활용한다든지 여러 방안을 모색하는 게 맞다”고 얘기한다. 부산문화재단과 부산시도 영도 문화도시 사업 활성화에 관심이 있어 얼마든지 연계도 가능하다.
■영도문화도시센터 가치 인정받아야
도시는 에너지가 넘칠 때 매력적이다. 도시는 사람들의 욕구를 이해하고 이에 부합하는 매력을 통해 사람들을 불러 모아야 한다. 도시의 고유한 역사와 환경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예술 콘텐츠를 생산할 때, 도시는 활력이 넘친다. 영도문화도시센터는 영도의 역사와 자연을 활용해 지속 가능한 문화유산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센터는 이를 통해 영도를 에너지 넘치는 곳으로 변화시켰다. 앞서 언급했던 성과가 이를 말해 준다.
영도 문화도시 사업은 전국적으로도 우수 사례로 평가받고 있으며, 주민 80%가 정책 지속을 원하고 있다. 김지영 의원은 이 사업이 영도와 같은 소멸 도시에서 꼭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사업 진행 중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이를 통해 영도는 새로운 문화도시로 나아갈 수 있는 플랫폼과 인적 자원을 구축했다. 지난 5년간의 성과가 모두 사라질 경우, 문화정책의 특성상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전문가들은 “지난 5년의 문화도시 사업으로 도시·문화적 자본이 축적됐다”며 “이 자본을 어떻게 활용할지 이제 고민할 때”라고 얘기한다.
문화 정책은 장기적 비전과 일관성이 필요하다.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은 주민과 문화 단체에 혼란을 주고 안정적인 문화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영도 문화도시 사업은 지역소멸 등 지역 현안 해결을 위해서도 지속되어야 한다. 센터는 영도 문화도시 사업을 지속가능하게 해 준 ‘중심 앵커’였다. 5년간 지역 문화에 기여한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전국적으로도 우수 사례로 손꼽히는 영도 문화도시 사업이 단지 재정적 이유로 중단된다면 이를 지속시키기 위한 재원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 이를테면 지역 기업과의 협력 프로젝트를 통해 자금을 유치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주민 참여 기금 조성이나, 영화 촬영 장소 제공과 같은 수익형 사업도 고민해 볼 수 있다.
국비 지원이 사라진 상황에서 영도문화도시가 어떻게 성과를 이어갈지 부산 시민들은 주시한다. 아직 여지는 있다. 일몰 결정이 나도 12월까지 예산을 수립하면 지속 가능하다.
그동안 영도구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함께 만들어온 문화도시 사업의 성과가 이어지도록 영도구청의 정책 변화와 함께 예산 배정을 촉구한다. 문화는 도시의 정체성과 고유성을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어 주는 주요한 요소다. 또 도시와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활기차게 미래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해 주는 중요한 매개체이자 가치다. 도시를 아름답게 만들고 활기차게 하는 힘은 바로 문화에서 나온다. 영도구청의 사려 깊은 결정을 기다린다.
2024-10-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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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로또 당첨금 ‘얼마면 되니’
로또의 상징성은 ‘인생 역전’이다. 열심히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 비루한 일상과 불안한 미래를 한 방에 반전시킬 수 있는 희망의 다른 이름이 로또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로또의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로또에 당첨됐는데 집 한 채도 살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다. 최근 1등 당첨자가 무더기로 쏟아져 당첨금이 3억 원 남짓에 불과하자 이게 무슨 ‘인생 대박’이냐는 볼멘소리까지 들린다. 결국 정부가 로또 당첨금 규모에 대한 국민 의견 수렴에 나선다고 한다.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에 따르면 국민권익위원회 국민생각함 홈페이지를 통해 ‘로또복권 1등 당첨금 규모 변경, 어떻게 생각하시나요?’라는 제목의 설문조사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국내 로또 발생 초기 사행성 논란
로또(lotto)는 이탈리아어로 행운을 의미하는데 ‘제비뽑기’를 뜻하는 라틴어 롯(lot)에서 유래했다. 복권을 뜻하는 영어 로터리(lottery)도 이 말에서 나왔다. 1530년 이탈리아 제노바공화국에서는 90명의 정치가 중 추첨을 통해 5명의 대표의원을 선출했는데, 이를 본떠 피렌체 지방에서 90개의 숫자 중 5개를 추첨하는 ‘5/90 로또 게임’이 생겨났다. 당시 도시국가였던 피렌체는 공공사업 자금 마련을 위해 번호추첨식 복권인 ‘피렌체 로또’를 발생했는데 이게 근대적 의미의 복권 시초다.
우리나라에서 로또가 처음 발행된 것은 2002년 12월 2일의 일이다. 당시 로또 가격은 게임당 2000원이었다. 1등 평균 당첨금이 35억 원을 웃돌았고 무제한 이월 규정으로 로또 1등에 당첨되면 수백억까지 손에 쥘 수 있었다. 2003년 4월 12일, 당첨금 이월로 1등 당첨자 한 명이 사상 최대인 407억 2000만 원을 차지하면서 그야말로 ‘로또 광풍’이 불었다. 정부는 사행성 논란이 거세지자 로또 당첨금 이월 횟수를 제한하고 2004년 8월 한 게임당 가격을 2000원에서 1000원으로 내렸다.
∎인생 역전 퇴색된 우리나라 로또
로또는 사실 정해진 확률 게임이다. 우리나라 ‘로또 6/45’는 1부터 45까지의 숫자 중 6개를 고르는 방식이다. 1등 당첨 확률은 814만 5060분의 1이다. 1만 6000년 동안 빠지지 않고 매주 10장씩 구입해야 1등에 당첨될 수 있는 확률이다. 벼락 맞을 확률보다 낮다는데 내가 당첨될 확률이 거의 없지 거의 매회 당첨자는 나온다. 현재 로또는 회당 약 1억 1000만 건이 판매돼 1등 당첨자는 평균 12명, 1인당 1등 당첨 금액은 평균 21억 원 수준이다. 당첨자가 무더기로 나오면 당첨금은 크게 줄어든다. 7월 13일 제1228회에는 1등 당첨자가 무려 63명이 나왔다. 1등 당첨금은 4억 1993만 원(실수령액 3억 1435만 원)에 불과했다. 인생을 바꾸기에는 턱없는 수준이다. 로또 발행 20년 동안 3억 원이던 서울의 평균 집값은 13억 원으로 4배가량 뛰었다. 화폐 가치는 떨어지고 자산 가격은 크게 올랐는데 로또 당첨금은 제자리걸음이니 대박의 꿈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반면 미국 로또인 파워볼의 경우 조 단위 당첨자 탄생으로 화제가 되곤 한다. 파워볼은 1부터 69가 적힌 흰색 공에서 5개, 1부터 26이 적힌 붉은색 공에서 1개를 선택하는데 이를 모두 맞히면 1등이다. 파워볼 잭팟 확률은 2억 9220만 1338분의 1이다. 우리 로또보다 36배나 어렵고 이월 제한이 없다 보니 당첨자 없이 상금이 이월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고 조 단위 당첨금도 가능하다. 결국 확률 게임이다.
∎ 명당론·번호 예측 과학적 근거 없다
로또 무더기 당첨이 나올 때마다 조작설이나 음모론이 확산하지만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다. 로또를 구입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이 굴절된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소위 ‘로또 명당’도 마찬가지다. 로또 추첨일이 가까워질수록 전국의 로또 명당에는 긴 줄이 이어진다. 그러나 로또 명당도 구매자 비율에 따른 상대적 확률일 뿐 크게 유의미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전국의 로또 명당을 표본 분석한 결과 전체 매출액과 당첨자 비율에 있어 일반적 로또 판매점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로또 명당 주인이 로또 맞았다는 말이 맞는 셈이다.
독특한 알고리즘으로 당첨번호를 맞출 수 있다며 로또 마니아들을 유혹하는 예측 업체도 마찬가지다. 2022년 6월 있었던 1019회차 로또 1등 당첨자 가운데 42명이 수동으로 번호를 맞췄는데 당첨번호 예측 업체에서 1등 당첨번호의 6개 숫자를 분석해 내놓은 번호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출연 빈도를 이용한 로또 번호 예측은 이미 로또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상식이 된 이야기지만 이 또한 검증되지 않았다. 출현 횟수가 상위에 속하는 숫자와 그렇지 않은 숫자의 출현 빈도 차이가 유의미할 정도로 크지 않다. 로또 당첨번호는 애초에 정보가 없는 수열에 불과할 뿐이다.
∎당첨 확률 낮추거나 게임비를 올리거나
정부가 공식적으로 복권 당첨금에 대한 여론 수렴에 들어간 만큼 어떤 방향으로 개편안이 나올지 주목된다. 로또 당첨금 개편은 당첨 확률을 낮추거나 게임비를 올리는 방안이 대안으로 이야기된다. 서울대 통계연구소는 1~45에서 6개의 번호를 고르는 것에서 1~70에서 6개의 번호를 고르는 것으로 바꾸면 1등 당첨 확률이 1억 3111만 5985분의 1로 약 16배 낮아져 당첨금이 높아지는 효과로 이어질 것이라 했다. 조세재정연구원은 게임당 가격을 1000원에서 2000원으로 상향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세금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나라 로또 복권에 당첨되면 3억 원까지 22%, 3억 원을 초과하면 33%의 세금을 부과하는데 이를 낮출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24% 세율로 원천 징수하고 추가로 주정부가 별도 세금을 가져간다. 반면 영국을 비롯해 프랑스 캐나다 호주 일본 등 국가에서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다. ‘꿈에는 세금이 없다’는 말인데 로또 마니아들은 퇴색한 인생 역전의 의미를 보완할 현실적 대안으로 주장한다.
복권위는 다음 달 25일까지 설문조사 결과와 전문가 의견을 취합해 당첨구조를 손질한다는 계획이다. 기재부 내에서는 현 당첨금 수준이 적정하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인 것으로 알려져 개편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사행성 조장이나 근로 의욕 감퇴 등 부정적 여론도 부담이다. 하지만 로또의 의미가 갈수록 퇴색해 개편 목소리는 점점 커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로또는 사는 순간 절반을 손해 보는 게임이다. 이런 수학적 명징성에도 불구하고 로또의 효용 가치는 서민의 빈 주머니를 따뜻하게 해주는 소박한 환상에 있는지도 모른다. 로또의 효용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구조개편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2024-09-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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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쇠퇴의 길로 접어든 ‘전통 추석’
추석 명절이 낀 제법 긴 연휴가 지났다. 추석이 되면 으레 ‘민족 최대의 명절’, ‘오곡백과가 풍성한 한가위’ 같은 상투어가 등장하지만 요즘은 딱히 가슴에 와닿지 않는 느낌이다. 추석이 되어도 고향길 대신 개인 여행을 떠나거나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느는 추세다. 추석은 이제 ‘전통 명절’이라기 보다 사실상 ‘여행 또는 휴가철’로 더 효용 가치를 지니는 듯 여겨진다.
■ 갈수록 사라지는 명절 분위기
근래 수년간 전통 명절 추석의 퇴보는 두드러지고 있지만 올해의 경우 이런 경향은 더 짙어졌다. 특히 추석이 있는 9월 중순은 절기상 가을인데도 오히려 8월보다 더한 폭염이 기승을 부리면서 계절적으로도 과연 앞으로 전통적인 개념의 추석이 지속될 수 있을지 많은 사람이 의구심을 갖게 됐다. 더구나 폭염이 갈수록 더 심해질 것이라는 예측은 이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때문인지 추석 아침에 차례를 올리는 경우도 눈에 띄게 줄고 있다. 경제적 부담이 만만찮은 데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추석에 평소 잘 먹지도 않은 음식으로 차례를 올리는 것이 시대 흐름과 맞지 않는 것이다. 특히 젊은 층의 거부감은 훨씬 더하다. 그러니 아예 추석 당일 차례를 올리지 않는 게 큰 흐름으로 자리 잡는 분위기다.
실제로 주변을 둘러봐도 작년까지는 차례를 올렸지만 올해부턴 이를 생략하는 집이 무척 많아졌다. 한국리서치가 추석을 앞두고 18세 이상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59%가 ‘차례나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답했다. 다른 기관의 조사 결과도 거의 60% 정도로 이와 비슷했다.
대신 벌초나 성묘가 차례나 제사를 대체하는 분위기다. 대행업체에 맡기거나 아니면 친지나 가족들과 현장에서 만나 함께 벌초나 성묘를 하는 것으로 추석 행사를 갈음한다. 세월이 조금 더 흐르면 추석 차례 장면은 아마 쉽게 보기 어려운 모습이 될 것 같다.
■ 여행·휴가 등 개인 활동 더 선호
추석 때 흔히 언급되는 ‘민족 대이동’이라는 말도 그 의미가 변했다. 집을 나서는 사람들의 행선지는 이제 고향이 아닐 경우가 더 많다. 장년 이후의 세대라고 해도 지금의 고향은 더는 예전 어린 시절의 고향 모습이 아니다. 또 고향에 가더라도 뵐 수 있는 친지나 동네 어른들도 많이 없다. 젊은 층은 대체로 도시에서 태어나 고향이라는 의식 자체가 희미하다. 이런 고향을 굳이 도로가 북적이는 시기에 찾을 간절한 이유는 없는 것이다.
최근 여론 조사에서도 이런 경향은 뚜렷하다. SK텔레콤이 AI 기반 설문 서비스인 ‘돈 버는 설문’을 통해 변화된 추석에 대한 인식 조사 결과를 지난 17일 공개했는데, 1021명의 응답자 중 추석 연휴에 고향이나 가족·친지 방문 계획이 있다고 답한 경우는 42.7%에 그쳤다. 나머지는 대부분 휴식이나 여행 등 개인 여가 활용을 들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추석 문화 자체가 편의성 위주로 급변하는 모습이 분명해 보인다. 이는 대세로 굳어지는 분위기다. 차례나 고향·친지 방문 등 추석 명절을 상징하던 전통적인 관습이나 의례는 이제 추석의 주류가 아니다. 그런데 젊은 층은 물론 예전의 전통적인 추석 문화에 익숙한 장년층 이상 세대들도 이런 추세를 어색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달라진 사회경제적인 여건과 함께 변화하는 세태를 감안하면 전통적인 추석 풍습 등 문화를 이제 더는 고수할 수 없다고 여기는 듯하다.
일부에선 여전히 이런 변화를 걱정하는 시각이 있기는 하다. 전통적인 추석의 본질은 외면하고 개인적인 편의성만 추구한다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추석과 관련한 전통 풍습은 현재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고, 점점 희미해지는 추석 명절의 분위기를 되살리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아무리 수천 년을 이어온 전통문화라고 해도 시대와 세태의 변화로 인한 영고성쇠는 어쩔 수 없는 듯하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2024-09-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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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콘크리트 묘지? ‘장묘 문화’ 어디로…
10년 전쯤이었나. 전남 지역의 한 야산에 시멘트 묘지가 등장해 화제가 된 적 있다. 그런데 지금도 형태는 다르지만 콘크리트 묘지는 심심찮게 보인다. 고령화 사회가 깊어지고 벌초가 갈수록 힘들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장묘 문화 전환기의 상징적 모습, 어떤 의미로 읽어야 할까.
■ 관리 힘들어 시멘트로…
시멘트 묘지는 10여 년 전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장묘 양식이다. 2013년 전남 지역의 어느 문중에서 선산 묘지 일대를 시멘트로 두른 모습이 여러 매체에 뉴스로 보도된 바 있다. 멧돼지 등 산짐승으로부터 훼손을 막는다는 취지였다. 당시 봉분에 잔디를 심고 주변은 시멘트나 인조 잔디로 포장한 묘지가 적지 않았다. 또 다른 농촌 지역에서는 묘 주변 바닥을 시멘트로 덮은 뒤 초록색 페인트를 칠하기도 했다. 봉분까지 아예 인조 잔디를 올리거나 페인트로 도색한 경우도 있었다.
시멘트 묘지의 등장은 묘지 관리의 어려움을 웅변하는 현상이다. 묘지 벌초가 고된 작업인 데다 멧돼지 등 산짐승에 의한 무덤 훼손도 심하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매장보다는 화장에 대한 부정적 생각이 깔려 있다.
최근에는 또 다른 형태의 콘크리트 묘가 등장해 이목이 쏠렸다. 유골함을 땅에 묻은 평장묘인데, 묘 주변 바닥을 콘크리트로 타설하고 위에 쇄석(잘게 부순 돌)을 깔았다. 봉분도 없고 주변엔 잡초도 자라지 않아 묘역이 깔끔한 게 특징이다. 10여 년 전 시작된 시멘트 묘지가 곱지 않은 시선을 받자 새롭게 나온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석재 업계에 따르면, 이런 형태는 어느 정도 대중화돼 있는 상태라고 한다.
■ “예의 아니다” “현실 수용을”
시멘트 묘지. 여기에 대해서는 “조상에 대한 예가 아니다” “관리 고충 생각하면 이해된다” 등 여러 견해들이 교차한다.
유림계는 당연히 콘크리트 타설을 반대한다. 흙은 뭇 생명을 품는 대지의 상징이다. 그래서 땅의 기운은 예로부터 신앙처럼 여겨졌다. 사람이 죽은 뒤에 흙에 묻히는 것도 본래의 자연으로 다시 돌아감을 의미한다. 묘지는 떠난 자와 남은 자를 잇는 역할을 한다. 조상의 묘를 섬기고 찾는 일의 소중한 뜻이 여기에 있다. 흙이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는 삭막한 시멘트 묘가 망혼에 대한 예의일 수 없다는 한탄이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풍수지리 쪽에서도 시멘트가 지기(地氣)를 망쳐 후손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고 본다.
하지만 묘지 관리가 쉬운 방식으로 세태가 바뀌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농촌의 노령화, 벌초를 비롯한 선산 관리, 산짐승 출몰 등 복합적인 요인이 얽혀 있다. 후손들은 대부분 외지에 있고 묘지를 지켜온 사람은 고령이 되어 간다. 관리가 지속되기 힘든 건 당연하다. 1년에 여러 차례 벌초를 해야 하는데 일꾼 구하기도 어렵다. 콘크리트 묘는 집안끼리 의논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인 경우가 많다.
이런 상충된 입장과는 별개로 콘크리트 묘가 환경 훼손으로 이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시멘트나 페인트·석재·인조 잔디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환경이나 미관 문제와 관련된 또 다른 갈등이 빚어질 소지가 있다는 얘기다.
■ 바람직한 장묘 문화는
묘지 관리 문제는 한국의 전통적 봉분 매장 중심의 장묘 문화에서 비롯한다. 변화하는 장묘 문화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예가 콘크리트 묘다. 전통적 가치는 지켜내고 싶은데 벌초는 현실적으로 힘든 상황. 그 가운데 나타난 전환기의 장묘 방식이란 뜻이다.
지금은 화장 문화가 대세다. 전국 화장률은 지난해 기준으로 91.9%에 이른다. 장례 유형도 마찬가지다. 2023년 통계를 보면, 화장 후 봉안이 35.2%, 화장 후 자연장(수목·화초·잔디에 묻는 장례)이 33.2%, 화장 후 산분장(산·강·바다에 뿌리는 장례)이 22.6%, 매장이 8.5% 순이다. 매장 사례가 가장 적음을 알 수 있다.
장례와 장묘 문화는 앞으로 더 거센 변화의 바람을 맞을 것이다. 한때 매장 중심의 장례가 주류였다면 이제는 자연에 가까운 방식으로 변하고 있다. 조상을 기리는 소중한 전통을 계승하되 후손들이 거부감 없이 흐름을 이어갈 방법은 없을까. 환경도 살리고 추모도 할 수 있는 방향으로 문화의 개선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이 변화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2024-09-14 [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