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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황석영은 왜 챗GPT로 소설 썼나?
최근 ‘한국 문학의 거장’ 황석영 작가가 신작 소설 <할매> 집필 과정에서 챗GPT를 활용했다는 사실을 공개해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80대 노장 작가가 생성형 인공지능이라는 첨단 기술을 창작 도구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문학 영역도 AI(인공지능)의 자장으로 들어왔다는 상징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동안 영화·드라마, 미술 장르에서는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판도를 빠르게 바꿔 왔지만, 문학 분야에서는 상대적으로 변화 속도가 늦었다. 언어와 감정을 섬세하게 다루는 문학의 특성을 고려할 때 전격 도입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황석영 작가처럼 문학계에서 AI를 ‘도구’로 활용하는 시도가 더 활발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 83세 거장과 챗GPT의 만남
황석영 작가의 소설 <할매>는 금강 하구 전북 군산시 하제마을의 600년 된 팽나무를 중심축으로 삼아, 조선 초기부터 근현대까지의 역사를 생명·생태의 관점에서 다시 엮어낸 작품이다. 이야기는 시베리아에서 남하한 개똥지빠귀 한 마리의 죽음에서 출발한다. 새의 뱃속에 있던 씨앗이 서해 갯벌에 내려앉고, 그 씨앗이 600년을 버틴 팽나무 ‘할매’로 자라난다. <할매>는 인간 종(種)의 역사를 넘어 ‘생명 전체의 역사’를 다루는 작품이다. 팽나무 한 그루에 600년의 세월을 실어 ‘삶·죽음·문명·순환’이라는 근원적 물음을 던진다.
황 작가는 지난달 유튜브 채널 ‘이혜성의 1% 북클럽’에 출연해 <할매>를 AI의 도움을 받아 썼다고 솔직하게 밝혔다. 그는 유튜브에서 챗GPT를 조수로 활용했다고 말했다. 소설의 구성 방법, 시대 배경, 글쓰기 형식 등 대여섯 개의 요소를 입력해 놓고 인공지능(AI)과 대화를 나누며 논문을 쓸 정도로 풍부한 자료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특히 하이데거의 난해한 저서 <존재와 시간>의 핵심 개념, 불교의 시간적·관념적 배경을 놓고 AI와 문답을 주고받으며 어렵지 않게 정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작품에서는 불교적 요소인 석가모니의 ‘연기론’(緣起論)이 묻어 나온다. 죽은 개똥지빠귀의 몸속에 있던 팽나무 열매 씨앗이 팽나무가 되어 자라고, 팽나무에 다시 개똥지빠귀들이 날아와서 열매를 먹는 장면이 그러하다. 모든 존재와 현상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원인과 조건(인연)에 의지해 서로 연결되어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불교의 가르침이 녹아 있다. 작가는 ‘무명’(어리석음)에서 시작해 ‘노사’(늙고 죽음)에 이르는 12가지 고리로 윤회의 과정을 설명한다.
■ AI를 생산적으로 활용한 거장
황 작가는 유튜브에서 인공지능과의 협업에서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많이 갖고 준비해야 한다. 준비 없이 (AI에게) 해보라고 해서는 말이 안 된다”고 했다. 인공지능이 기계적인 알고리즘의 결점을 지녀 질문자 성향을 파악해서 그대로 밀고 나간다는 것이다. 질문의 품질이 우수할수록 수준 높은 답변이 나온다는 사실을 간파한 셈이다.
황 작가는 챗GPT가 문학작품이나 그림을 만든다면, 서툴고 투박했던 인간의 손길이 사라지고 매끈함만 남아 굉장히 어색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AI의 부족한 측면이며 오히려 못 그린 것 같은 인간의 면모가 더 강조되고 오래갈 것이라고 본다.
그는 챗GPT로 추리 소설은 가능할지라도 본격적인 문학작품 생산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본격적인 문학작품은 훨씬 복잡한 상상력의 세계를 넘나들어야 하고, 문학이 가진 가장 큰 특성인 독자가 상상하는 여백을 둬야 하기 때문이다. 황 작가는 <할매>를 창작하면서 챗GPT를 썼는데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연필, 볼펜, 붓, 타이프라이터로 넘어가는 과정과 같다는 것이다.
실제로 황 작가는 ‘얼리 어답터’다. 전동 타자기, 워드프로세서, 매킨토시 등 글쓰기 도구를 빨리 습득했고, 소설 <개밥바라기별>을 인터넷에 연재할 정도였다. 트위터가 처음 나왔을 때는 시인들에게 트위터 시를 빨리 쓰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황 작가는 상상력을 확장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도구로 AI를 현명하게 사용한 사례다. AI가 창작을 대신한 것이 아니라 사고의 폭을 넓히고 서사 구조를 점검하는 도구로 쓴 것이다. 창작의 주체로서 AI 기술을 생산적 방식으로 활용한 셈이다.
■ 젊은 작가, AI와 문학 접목 시도
그동안 국내에서는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AI와 문학을 접목하는 시도가 있었다. 2023년 김수영문학상 수상 시집인 박참새 시인의 <정신머리>가 대표적이다. 책에 수록된 박 시인의 시 ‘디펜스’(Defense)는 영어 원문, 챗GPT가 번역한 한국어 문장, 시인이 의도한 내용을 담은 한국어 시를 교차 배열했다. 단순 번역을 넘어 AI가 생성한 문장을 시의 일부로 수용한 실험으로 AI와 문학의 협업 가능성을 보여줬다. 일부 젊은 작가들은 챗GPT를 활용해 초고를 구성하거나 스토리 전개를 점검하는 등 ‘AI와의 공저’ 형태를 모색했다. 윤여경 작가 등 7명은 챗GPT와 함께 쓴 소설집 <매니페스토>를 출간하기도 했다.
해외에서는 이미 AI 협업이 문학 실험의 한 장르로 자리 잡았다. 2024년 일본 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도쿄도 동정탑>의 작가 구단 리에가 대표적인 사례다. 구단은 “소설의 약 5%를 챗GPT 문장으로 채웠다”고 밝히며 주목받았다. 당시 심사위원단은 “완성도가 높고 단점을 찾기 어려웠다” “아쿠타가와 수상작 중에서도 굉장히 독특한 작품”이라고 심사평을 했다. 구단은 2025년에는 AI로 소설의 95%를 집필한 신작 <그림자 비>를 발표했다.
■ AI 시대 작가의 역할은
AI 활용이 문학계로 확장하면서 AI 시대 작가의 역할이 조명받는다. 작가는 AI에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지 결정하고, 결과물 중 무엇을 선택할지 판단하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여 문학적 완성도를 구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AI를 인간의 상상과 서사를 담아낸 새로운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다. AI를 완성품을 던져주는 ‘자판기’ 같은 존재로 봐서는 안 된다.
일본 작가 구단 리에는 “AI는 무난한 대답을 내놓는 데 능숙한 도구일 뿐 도구로 무엇을 할 것인가는 인간에게 달려 있다”며 “창작 영역에서도 예술의 영향력은 기술이 가져오는 게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사람이 가져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작가가 AI를 활용하는 방식은 달라도 좋은 작품을 만들겠다는 본질적 목표는 같다.
AI를 개성 있고 현명하게 다루는 작가일수록 더 큰 창의성과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다. 다만, AI 기술을 얼마나 비판적이고 지적으로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다. AI로 검색한 개별 정보들의 의미를 해석하고 가치 판단을 하고, 이를 활용해 더 풍부한 문학적 표현을 이뤄내는 것이 과제가 됐다.
2026-02-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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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요리] 예고된 미래, 우주 AI 데이터센터
인공지능(AI)의 시대다. 우리 정부도 ‘AI 3강’ 진입을 목표로 제시하는 등 인공지능을 미래 핵심 산업으로 발돋움시키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 중이다. AI 산업의 핵심은 엄청나게 방대한 데이터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이다. 데이터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부지를 마련해 메모리 반도체를 집적한 센터를 짓는 것은 물론 엄청난 전력과 냉각을 위한 물 등도 필요하다. AI 산업이 발전할수록 데이터센터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하지만 이는 지구를 위한 기후 위기 극복 노력과는 상충되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최근엔 지구가 아닌 우주에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지구에 건립하는 데이터센터들이 직면한 전력과 상수원 과다 사용에 따른 환경 훼손 문제, 센터 건립 예정지의 사회적 반발 등을 상쇄할 대안으로 우주 데이터센터가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 데이터센터는 과연 가능한 것일까. 가능하다면 언제쯤 상용화할 수 있을까.
■ 일론 머스크와 인공위성 100만 개
일론 머스크의 항공우주기업 스페이스X가 우주에 대규모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사업을 본격화했다. 스페이스X는 지난달 미국 연방통신위원회에 지구 궤도에 우주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겠다면서 최대 100만 기의 인공위성 발사를 허가해 달라는 신청서를 제출했다. 폭증하는 데이터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는 네트워크를 구축하겠다는 의미다. 이 위성들은 고도 500~2000km에 위치하며, 레이저 링크로 서로 통신할 예정이다.
스페이스X가 추진하는 우주 AI 데이터센터는 태양광으로 구동된다. 물이 아니라 우주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복사 냉각 방식으로 열을 방출하게 된다. 지구 표면에 짓는 데이터센터와 달리 별도의 수자원과 전력이 들지 않아 친환경적이고 비용도 적게 든다는 주장이다. 일론 머스크는 최근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우주에 AI 데이터센터를 짓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선택"이라며 "이는 2년, 길어도 3년 안에 실현될 것"이라며 우주 데이터센터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 인류 첫 시험 가동 성공
지난해 11월 미국 스타트업 스타클라우드(Starcloud)가 인류 최초의 우주 데이터센터를 지구 상공 325km 저궤도에 쏘아올렸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10일 이 우주 데이터센터에서 AI 모델이 학습을 완료하고, 지구에서 보낸 질문에 응답을 보냈다. 인류 최초의 우주 데이터센터가 시험 가동에 성공한 것이다. 이 위성 데이터센터는 크기는 60kg으로 소형이지만, 기존 우주 기반 컴퓨팅 시설보다 100배 이상의 강력한 성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스타클라우드 CEO 필립 존스턴은 “지구상의 데이터센터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앞으로는 우주에서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의 말은 AI 시대엔 우주 공간이 새로운 미래 터전이 될 것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빅테크 기업들의 우주 기술 경쟁도 한층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됐다.
전문가들은 우주 데이터센터와 관련, 2030년대 초반 실증 단계를 거쳐, 2030년대 중반 이후 본격 상용화를 통한 확산 단계에 진입할 것으로 보고 있다. 시장규모는 2025년 약 5억 달러에서 2030년 150~200억 달러, 2035년 이후 750억 달러 이상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됐다.
■ 우주 데이터센터 상용화를 위한 과제는?
우주 데이터센터는 많은 장점을 갖고 있다. 우주는 온도가 영하 270도에 가까운 극저온 진공 상태다. 우주 공간 자체가 거대한 냉각 장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서버에서 발생한 열은 거대한 방열판을 통해 우주로 사라진다. 우주에서는 24시간 내내 태양광으로 안정적인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 태양광 발전 시스템을 갖춘 우주 데이터센터는 자체적으로 태양광으로 전력을 만들고 소비한다. 즉, 데이터센터 냉각과 구동을 위해 지상에서 필요했던 엄청난 양의 물과 전력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우주 데이터센터는 여러 과제를 안고 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지상에 구축하는 데이터센터와 비용 경쟁이 가능한가 여부다. 우선 위성 발사 비용을 낮추는 것이 관건이다. 현재 지구 표면에서 300~600km 상공에 위치한 저궤도에 장비를 쏘아 올리는 비용은 1kg당 약 2000 달러 수준이다. 100톤 규모의 데이터센터 모듈을 발사하려면 대략 2억 달러가 소요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이 비용은 최근 스페이스X의 재사용 로켓 회수와 발사 기술 발전 덕분에 급감하는 추세다. 차세대 로켓인 스타십이 상용화되면 1kg 당 10~20 달러까지 낮아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빅테크 연구팀들은 2030년대 중반경 로켓 발사 비용이 1kg당 200 달러 이하로 떨어지면 우주 데이터센터가 지상 데이터센터와 비용 면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우주 방사선 문제도 중요한 해결 과제다. 지구 대기권 밖에 자리한 데이터센터들은 태양과 우주로부터 날아오는 고에너지 입자에 노출되어 있다. 반도체 메모리 오류를 일으키거나 회로 영구 손상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주기적인 수리와 보수 시스템도 필요하다. 방사선 내성 반도체를 활용하면 되지만 일반 반도체에 비해 성능이 낮고 가격이 높다는 단점이 있다. 통신 지연 문제도 걸림돌이다. 지구 저궤도 우주 상공에서 지상과 데이터를 주고받으려면 속도 지연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레이저 기반 우주 통신 기술의 발전 속도에 따라 이런 단점도 점차 완화될 전망이다.
우주 쓰레기 증가로 인한 위성의 연쇄 충돌 우려도 증가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1978년 NASA의 과학자 도널드 케슬러 박사가 주창한 케슬러 신드롬 이론이다. 특정 궤도의 물체 밀도가 임계치를 넘으면 단 한 번의 충돌로 발생한 파편이 다른 위성에 연쇄적으로 부딪히는 '연쇄 충돌'이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인공위성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 위성 충돌로 기술적 재앙이 발생할 수 있다는 주장인 것이다. 만약 위성에 탑재된 자율 충돌 회피 시스템으로도 막을 수 없는 연쇄 충돌 사태가 발생하면 우주 데이터센터뿐만 아니라 GPS 등 다양한 위성 서비스들도 잇따라 마비돼 재앙 국면에 이를 수 있다는 경고도 이어진다. 하지만 우주는 상상 이상으로 광활하기 때문에 우주 데이터센터의 확장은 이론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는 반론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 AI 강국은 우주산업 강국
현재 지구촌의 동향을 보면 우주 데이터센터 상용화는 이미 예고된 미래로 받아들여진다. 즉, 미래 AI 산업의 패권을 잡기 위해 현재 빅테크기업은 물론 각 국가들이 치열한 우주개발 전쟁에 나서고 있다. 현재 우주 데이터센터 프로젝트는 주로 미국 빅테크 기업과 중국이 주도하는 가운데 유럽과 일본 등은 그 뒤를 추격하는 형국이다.
미국 빅테크 기업 가운데 선두 주자가 스페이스X라는 데는 이론이 없다. 스페이스X에 이어 아마존도 우주 데이터센터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아마존은 세계 최대 규모의 데이터센터 인프라와 함께 블루오리진이라는 발사체 기업을 보유해 우주 데이터센터 분야의 미래 강자로 여겨진다. 구글도 2025년 11월 선캐처 프로젝트 계획을 발표했다. 구글은 다수의 소형 위성을 반경 1km 내 군집 배치해 거대한 데이터센터처럼 작동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답게 국가 차원에서 우주 데이터센터 계획을 속도감있게 진행 중이다. 2025년 5월 ‘삼체 군집컴퓨팅’이라는 대규모 프로젝트에 따라 12개의 시험 위성을 발사했다. 2035년까지 소형 위성 2800개를 우주에 띄워 거대한 슈퍼컴퓨팅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EU는 ASCEND(유럽 탄소중립과 데이터 주권을 위한 첨단 우주 클라우드) 프로젝트를 통해 2030년대 우주 데이터센터 배치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일본은 최대 통신기업인 NTT 주도로 스페이스컴퍼스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AI 패권 경쟁은 이제 우주 인프라 선점 경쟁으로 치닫고 있다. 우주산업 경쟁에서 밀리면 AI 강국 진입이 불가능한 시대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 데이터센터와 관련한 각 국가와 기업들의 노력은 한국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정부가 현재 추진 중인 AI 대전환, 즉, 인프라 구축부터 기술 확보, 산업 전환, 인재 양성, 전 국민을 상대로 한 교육 확대 등 모든 영역을 AI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계획은 미래 AI 강국 도약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한층 독보적인 발사체 기술 확보 등 우리 독자적으로 우주 데이터센터를 구축할 수 있는 저력을 서둘러 갖추려는 부단한 노력들도 이어져야 한다. AI 산업은 인프라 산업이다. 우리가 광활한 우주까지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을 때 AI 강국의 미래를 지속적으로 담보할 수 있다.
2026-02-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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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반도체 산단 이전론 불씨는 꺼졌나[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지난달 2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26년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 자리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묘한 뉘앙스의 언급을 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입지 선정과 관련해 지역민들의 반발이 커지고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갈등이 초래된 상황을 묻는 질문에 대한 발언 과정에서였다. 언급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용인 반도체 문제가 워낙 규모가 크고 2050년까지 계획된 것인 데다 정부의 정책으로 결정을 해 놓은 것을 뒤집을 수는 없다. 어쩔 수 없는 환경이 도래할 가능성이 많고 지역균형발전 차원에서 민주당이 재집권을 하더라도 방향은 똑같다. 전기가 생산되는 지역에서 쓰여지게 하는 게 원칙이다. 수도권 다 몰아서 지방에서 생산한 전기를 보내는 송전탑 대대적 건설은 안 된다. 용인에다 원전 만들 건가. 용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대한민국 발전의 거대 방향을 통째 바꾸는 일이라 에너지가 많이 들지만 국민께서 힘 모아주시면 거대한 방향전환이 가능하다.”
정부 정책으로 결정된 용인 반도체 산단을 당장 뒤집을 수는 없지만 전기와 물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송전탑으로 지역 생산분 전기를 보내는 것도 힘들고 용인에 원전 만들 수도 없고 물 문제도 해결이 어렵다. 국민께서 힘 모아주면 방향전환 할 수 있다. 대략 이렇게 이해가 되는 내용인 듯한데 그 내용만으로는 용인 반도체 산단 문제를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호남 이전론의 수난
이 대통령이 용인 반도체 산단 문제를 두고 종잡기 어려운 언급을 내놓은 것은 지난해 말 여권 일각에서 제기된 용인 반도체 산단의 호남 이전 요구에서 비롯됐다. 해당 요구는 전북 새만금에 반도체 산단을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6월 지방선거에서 전북도지사 출마를 선언한 더불어민주당 안호영 의원이 주축이 된 이 같은 주장은 “윤석열 내란을 끝내는 길은 용인 밪도체 산단의 전북 이전”이라는 논리로까지 비약했다. 하지만 그 휘발성은 호남지역에서 유치추진위가 꾸려져 서명운동이 불붙을 정도로 컸다. 송전탑 반대 대책위 주민들까지 나서서 전기 공급을 위한 송전탑의 대규모 건립을 낳는 용인 반도체 산단의 전면 재검토 촉구 시위도 벌어졌다.
이에 대해 수도권 언론은 호남 이전론을 뒷받침할 인프라가 전무하다며 집중 공격을 하고 나섰다. 용인 반도체 산단에는 15GW의 전기 공급이 필요하지만 호남 이전론의 무대로 꼽히는 새만금의 발전 용량은 태양광 0.3GW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이 과정에서 용인의 전기 공급도 현재는 추가로 원전이라도 지어야 할 판이라는 현실은 외면당했다. 수도권 언론은 이어 물 문제도 하루 2만t 수준의 새만금 현지 댐 여유 물량을 들먹이며 용인 반도체 산단에 하루 필요한 76만t의 물을 공급하기 불가능하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용인에서도 물 공급 계획을 놓고 강원도 양구와 경기도 팔당을 오락가락해야 했던 과거는 쏙 빼놓았다.
여기에다 수도권 언론은 석박사급 고급 인력이 주로 수도권 근무를 희망한다는 해괴한 논리까지 들이댔다. 억지로 반도체 산단의 입지를 지방으로 옮기면 핵심 인재들이 외면한다는 협박식 논리가 동원됐다.
■동남권 이전론의 반격
이 대통령이 신견 기자회견 자리에서 반도체 산단을 겨냥한 듯한 전기와 용수 문제 지적을 내놓으면서 지역에선 수도권 언론이 내세운 호남 이전론 비판에 대한 비판이 고개를 들고 있다. 비판은 동남권 이전론으로까지 발전한다.
동남권 이전론의 대표적인 근거는 ‘현지 생산 현지 소비(지산지소)’를 내세운 전기 문제다.
새만금 지역이 전기 공급이 원활하지 못해 반도체 산단으로 부적합하다면 착착 원전의 완공 시점 도래를 앞두고 있는 동남권 원전 밀집지는 계획된 원전의 완공 때 이미 전력 생산량이 10GW를 넘을 것으로 보인다. 전기 공급 측면만 따진다면 국내에서 이보다 더 탁월한 입지는 꼽기 힘을 것이다. 앞으로 전기의 지산지소가 기본 원칙이 돼 가는 마당이라면 더욱 그러할 터이다.
물 문제도 동남권은 공업용수만 하더라도 전국 공업용수 수요 추계 기준을 동남권 물 사용량을 기준으로 할 만큼 안정적이다. 정부는 동남권의 공업 용수 문제가 나오면 낙동강 수자원이 수많은 댐으로 분산돼 한강보다 공업용수를 대기가 어렵다는 쪽으로 논리를 슬쩍 바꾸는 옹색함을 내비친다.
석박사급 인력의 수도권 선호라는 해괴한 논리는 영남권에 포스텍과 UNIST를 비롯해 한국 굴지의 인재 배출 기관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는 논리만으로 극복이 가능할 터이다. 이들이 수도권을 선호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이들이 일할 곳을 수도권으로 몰아 놓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정책 못 뒤집는다” 그 이후
청와대에서 신년 기자회견을 마치고 이틀 뒤 울산을 찾은 이 대통령은 또 다시 반도체 공장 문제를 '굳이' 끄집어낸다. ‘5극 3특’ 체재 재편에 대한 관성과 기득권의 저항에 대한 언급을 하는 과정에서였다. 소위 수도권 ‘몰빵’ 정책을 비판하면서 “수도권은 이제 못 살 정도가 됐다”며 집값 문제를 언급하는 듯하다 “반도체 공장도 수도권에 지을 경우엔 전력·용수 부족 문제가 있다”는 쪽으로 발언의 물줄기를 돌렸다.
이틀 남짓한 동안 반도체 산단을 놓고 내놓은 대통령의 말은 곱씹어 볼수록 정부 정책을 되돌리기 어렵다는 쪽보다는 수도권에 짓는 반도체 산단이 문제가 많다는 쪽에 무게가 더 실린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 후 정부는 추가로 원전 2기와 SMR 등을 건립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역시나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 지어질 가능성이 커 보이는 이들 원전에서 수도권으로 어떻게 송전을 할 것인지는 두고두고 갈등의 씨앗이 될 터이다.
과연 용인 반도체 산단 이전론의 불씨는 완전히 꺼진 것일까.
2026-02-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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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너무 길었다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드디어 걸린다. 오랜 세월 논란과 논쟁의 중심에 서 있던 서울 광화문 현판 문제가 사실상 마침표를 찍게 됐다. 문화체육관광부가 광화문에 한글 현판을 추가로 설치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휘영 문체부 장관은 지난 20일 국무회의에서 ‘광화문 한글 현판 추가 설치’ 검토 계획을 보고했다. 3층 누각 처마에 걸린 기존 한자 ‘광화문(光化門)’ 현판은 유지하되 2층 누각 처마에 한글 현판을 새로 다는 내용이다. 최 장관은 “광화문은 우리 현대사의 역동적인 상징이자 현재 진행형의 공간인 만큼 한자 현판이 지닌 의미를 존중하되 한글 현판을 추가해 그 상징성을 더욱 확장하자는 취지”라며 “전문가 의견 수렴과 공청회, 여론조사를 거쳐 현판 설치를 위한 공식 절차를 밟아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 소식은 반가움과 함께 묘한 감회를 안긴다. 올해가 훈민정음 반포 580주년이자 한글날의 효시인 ‘가갸날’ 선포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1968년 광화문에 내걸렸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글 현판을 둘러싼 사례가 말해주듯 이 논란은 과거에도 있었다. 그리고 2010년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으로 철근 콘크리트 광화문이 철거되고, 원래 자리에 돌과 나무로 지은 광화문이 공개되면서 논쟁은 다시 불붙었다. 흰 바탕에 검은 글씨의 한자 현판(門化光)이 걸리자 그간 잠잠하던 한글 현판의 위상과 표기를 둘러싼 논의가 시작됐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나서야 정부는 한자 현판은 유지하되 한글 현판을 추가로 설치하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한참 늦었지만 이제라도 방향을 바로 잡았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한 결정이다.
■16년 현판 논쟁의 본질
광화문은 1395년 태조 때 창건된 경복궁의 남문이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1865년 경복궁 중건 과정에서 다시 세워졌다.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일부가 훼손된 광화문은 1968년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됐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글씨로 현판을 내걸었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이 추진한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의 일환으로 2006년 철근 콘크리트 광화문이 철거됐으며, 2010년 원래 위치에 돌과 나무로 만든 광화문이 공개됐다. 이때 1865년 중건 당시 훈련대장 임태영이 쓴 흰 바탕에 검은색 한자 ‘光化門’ 현판이 복원돼 걸렸다. 그러나 석 달 만에 균열이 발생하면서 정확한 복원이 아니라는 지적이 제기됐고 이로써 광화문 현판을 둘러싼 논쟁은 다시 본격화됐다. 이후 사료 검토를 거쳐 2023년 10월 검정 바탕에 금색 글씨의 한자 현판이 새로 설치됐다. 2024년에는 유인촌 전 문체부 장관이 세종대왕 탄신일을 맞아 한글 현판 설치를 제안했지만 문화재 복원 원칙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무산됐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광화문 현판의 모습이다.
이처럼 광화문 현판을 둘러싼 논쟁은 이상하리만큼 길었다. 한글이냐 한자냐라는 단순한 선택지 앞에서 우리는 십수 년을 맴돌았다. 현판 하나를 거는 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까. 이 논쟁은 문화재를 어떻게 이해하고 다룰 것인가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와 결단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 시간이었다. ‘원형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특정 시점을 절대화하려는 관점과 문화재 역시 현재의 상징이어야 한다는 요구가 충돌하면서 16년이라는 시간이 허비됐다. 그 결과 국가의 얼굴인 광화문은 오랫동안 일관된 메시지를 갖지 못했다.
■광화문, 살아 있는 상징
광화문은 처음부터 ‘광화문’이 아니었다. 조선 초기 이 문은 정문(正門)이라 불렸다. 세종 8년 정문을 광화문으로 고쳤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남아 있다. 세종 13년에 문이 완성돼 현판이 달렸고, 세종 30년 <태조실록>을 증수(增修)하면서 광화문이라는 이름이 공식 기록으로 굳어졌다. 이는 사소한 개명이 아니었다. 이름은 곧 의미였다. 기능을 드러낸 ‘정문’에서 ‘빛이 널리 비친다’는 뜻의 광화문으로 바뀌는 순간 이 문은 단순한 출입구를 넘어 상징의 공간이 됐다. 세종은 일찍부터 광화문이 갖는 공간의 의미를 알아챈 셈이다.
흔히 역사학자들은 ‘문화유산은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대화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어쩌면 광화문이야말로 여기에 딱 들어맞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은 지금도 축제와 추모, 환희가 교차하는 현재진행형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존중하면서도 현재의 언어로 세계와 대화하는 곳이 바로 광화문이다. 마치 대한민국의 얼굴과 같은 곳이다. 그런 장소이기에 현판이 오직 1865년의 모습만을 고집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보존의 원칙이 오롯이 ‘원형 유지’에만 머문다면, 그건 살아 있는 역사를 박제해 두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광화문 앞에는 세종로가 펼쳐지고 광장에는 세종대왕 동상이 내려다보고 있다. 그 앞에 정작 세종이 만든 글자가 없다는 사실은 너무도 아이러니다. 이는 한글 단체가 줄기차게 주장해 왔던 부분과 맥을 같이한다. 한글 현판을 더 얹는 일은 장식을 하나 보태는 문제가 아니다. 자주국가의 상징이자 대한민국 정체성의 표현이다. 더불어 경복궁과 광화문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에게는 한국의 얼굴을 더 분명히 전하고 우리 국민에게는 한글에 대한 자부심을 되새기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글·한자 현판이 갖는 의미
정부의 이번 절충안은 타협일까, 아니면 진일보일까. 후자에 가깝다. 잠시 세종대왕을 떠올려 보자. 그가 오늘의 광화문을 본다면 오롯이 한자만을 고집하라고 했을까. 세종은 기존 질서와 전통을 부정한 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한자를 버리지 않았다. 대신 백성이 쓰고 읽을 수 있는 문자를 하나 더 만들었다. 훈민정음은 단절이 아니라 확장이었다. 질서를 허문 것이 아니라 질서를 더 많은 사람의 것으로 넓힌 선택이었다. 광화문에 한자 현판을 남기고 한글 현판을 더 얹겠다는 결정은 바로 이 세종의 정신과 닿아 있다. 기존 한자 현판을 유지하는 것은 역사적 연속성과 문화재 복원 원칙을 존중하는 일이다. 여기에 한글 현판을 더하는 것은 오늘을 사는 시민과 세계를 향한 메시지를 보태는 행위다. 문화재의 원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상징을 현재화하는 선택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고 한글 현판 추가 설치 논의는 특정 정부의 성과나 실책으로 얘기할 사안도 아니다. 윤석열 정부 시절 유인촌 장관이 같은 문제의식을 제기했고, 이재명 정부가 병기안을 추진하는 것 역시 같은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현판이 둘이면 상징이 흐려진다’는 우려도 분명 있다. 하지만 세계의 유산은 이미 복수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자금성이 만주어와 한자를 병기했듯이 언어의 병존은 혼란이 아니라 역사적 깊이와 시간의 층위를 드러내는 장치가 될 수 있다. 한자 현판이 1865년의 시간을 말한다면, 한글 현판은 지금의 시간을 말할 것이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고 했다. 우리는 그 문자를 스마트폰 자판과 K 콘텐츠 자막을 통해 세계에 내보내면서도 정작 우리의 얼굴이라 할 광화문에는 오랫동안 한자만 걸어 두었다. 기묘한 자기부정이었던 셈이다. 한글을 세계에 알리면서도 국가의 상징에는 새기지 못했던 모순. 한글 현판은 이를 깨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나라로 기억되고 싶은지를 다시 쓰는 선언과 같다.
2026-01-3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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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의지가 있기는 한가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정부가 ‘일하는 사람 기본법’과 함께 ‘근로자 추정제’를 추진하면서 각종 법령에 사용되는 노동자와 근로자의 혼용이 지적되고 있다. 지난해 여야 합의로 근로기준법의 ‘근로자의 날’이 ‘노동절’(5월 1일)로 개정된 뒤 용어 통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하지만 문제가 간단치 않다. 그 기원이 헌법이어서다. 우리 헌법 32조·33조에는 ‘근로자’의 권리와 의무가 명시돼 있다. 헌법을 고쳐야 하위 법령이 바뀌고 국민의 삶과 일에도 영향을 미친다.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사회를 통합하는 최고의 규범이다. 그 가치는 고정불변하지 않고 시대의 흐름에 조응한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탄생한 제6공화국 헌법은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 정치권력과 수도권 집중의 폐해를 시정하자는 취지에는 여야 정치권뿐만 아니라 국민적 공감대가 이뤄진 상태다.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도 민주당은 물론 국민의힘 지도부가 여러 차례 약속한 바 있다. 의지만 있으면 제7공화국으로의 첫걸음을 뗄 수 있다.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합의할 수 있는 헌법적 가치를 도출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대목이다.
개정의 방향뿐만 아니라 시기와 방법도 민감한 이슈다. 지난해 22대 대선 때 개헌 국민투표를 동시 실시하는 제안이 나왔다가 불발되고, 대안으로 올해 6·3 지방선거 때 치르는 방안이 부상했다. 또 합의된 사안은 올해 지선에서, 권력 개편은 2028년 총선 때로 나누는 2단계 개헌론도 제안된 상태다. 정부는 국회의 공론화와 법 개정을 주시하고 있으나 여야의 극단적 충돌이 지속되면서 개헌 논의는 더디기만 하다.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지난 16일 청와대에서 열린 이재명 대통령과 여야 지도부 오찬에서 6·3 지방선거 때 여야 이견이 없는 지방분권, 지역균형발전 조항을 헌법 1조에 넣는 원포인트 개헌 국민투표를 시행하자고 제안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면서 분권공화국이기도 하다는 점을 천명하는 방식이다. 이는 지난해 12월 지방분권균형발전 부산시민연대의 설문에서 지선과 동시 투표(66.6%)와 함께 여야 합의 불발 땐 지방분권 개헌이라도 해야 한다는 의견이 71.2%로 압도적이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논란의 소지가 없는 지방분권 개헌이라면 순조로울 것 같지만, 현실은 안갯속이다. 정치적 속내나 필수 전제 조건을 하나하나 따지면 지뢰밭이 널려 있다. 국회 의결과 대통령 공고 등의 기간을 감안하면 개헌안을 도출할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1월 중 구성되고, 2월에 본격 활동에 들어가야 하는데 여야는 머뭇거리고 있는 상황이다. 거대 여당의 입법 독주에 제1 야당 대표가 단식으로 맞서는 험악한 대치 상황이 대화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또 개헌 논의가 시작되는 순간 모든 정치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여야 모두 몸을 사리는 기색이 역력하다.
개헌안은 국회 재적 3분의 2, 즉 200명 이상의 의원이 찬성해야 의결되고 30일 이내 국민투표에 돌입할 수 있다. 민주당으로서는 과거의 실패 사례가 있기 때문에 국회 통과 여부에 대해 조심스럽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대통령 중임제와 지방분권을 담은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국민의힘 전신인 자유한국당이 표결에 참석하지 않아 의결정족수 부족으로 투표 자체가 무산된 적이 있다. 개헌 저지선을 확보한 국민의힘(107석)이 열쇠를 쥐고 있는 셈이니 민주당이 의석수만을 앞세워 강행할 수 없는 구조다.
또 국민투표법 개정도 의외의 복병이 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2014년 재외국민 투표권 제한 조항에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는데 이후 12년째 국민투표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7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등과 간담회를 갖고 법안 처리를 당부했다. 하지만 이날 소관 행안위 국민의힘 간사는 불참했다. 국민투표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6·3 지선뿐만 아니라 2028년 총선 때도 개헌안을 놓고 국민투표에 부칠 수는 없게 된다.
개헌 논의에 가장 적극적인 우 의장이 제시한 로드맵은 6·3 지선과 2028년 총선으로 나눈 단계적인 개헌이다. 대통령 4년 중임제 등의 권력 구조 개편에 복잡한 셈법이 끼어들면 합의가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정치적 논란이 없는 사안만 올해 지선에서 먼저 처리하자는 취지다. 이를 위해서라면 2월 개헌특위 출범, 3월 국민투표법 개정, 4월 국회 본회의 개헌안 상정, 6·3 지방선거·개헌 동시 투표의 로드맵이 가능하다.
39년째 바뀌지 않는 제6공화국 헌법은 뜯어고칠 곳이 너무 많지만, 작금의 정치 상황에서 단번에 개정하려고 나서면 실패하기 십상이다. 국민적 공감대 형성에 따른 단계적 처리가 현실적이다. 우선 합의 처리 가능한 국토균형발전 명문화 등으로 개헌안을 만드는 게 순리다.
분권형 개헌은 지방소멸을 저지하는 전환점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최근 지역민들의 실망감이 점차 커지고 있다. 올해 지선 때 개헌 국민투표를 치르자는 목소리는 잦아들고 총선으로 미루는 분위기가 노골적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가 이재명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의 개헌 외면 분위기다. 무려 3시간에 걸쳐 25개의 현안 질문이 쏟아졌지만 헌법 개정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123대 국정과제 중 개헌을 1호로 올린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87년 체제 종식의 의지를 피력하지 않은 것이 개헌론이 처한 현실이다.
물론 대통령이 개헌 논의를 주도하면 논란을 부르기 십상이고, 개헌 주체는 국회가 맡는 게 옳다. 내용적,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도 여야 합의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을 넘겨받은 국회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여야 모두 지난 대선 때 개헌 공약을 내놨지만,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지는 관성적 정치 투쟁에만 골몰한 채 나서지 않고 있다. 이재명 정부 집권 초기, 합의 가능한 최소 수준이라는 조건을 고려하면 올해 지선으로 마련된 개헌의 골든 타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여야 모두 지방분권에 국가의 미래가 걸려 있다는 구호를 내건다. 그렇다면 균형발전의 핵심 동력이 될 분권형 개헌에 적극 나서야 한다. ‘대한민국은 분권공화국’이라고 헌법에 명시하면 광역 행정통합 추진도 내실화되고 속도를 낼 수 있다. 행정·재정 분권이 보장되지 않은 채 지금 추진 중인 광역권 통합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문제는 2년 뒤 총선 때까지 기다릴 만큼 지방의 위기는 한가롭지 않다는 데 있다. 정치가 국민과 역사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고 당파적 이익에 급급하다면 존재 이유가 없다. 여야는 분권형 개헌안을 만들어 6·3 지선에서 국민의 총의를 물어야 한다.
2026-01-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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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인공지능의 시대, 한국형 AI 인재란?
세계는 현재 인공지능(AI) 패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 중이다. AI 분야에서 뒤처질 경우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는 물론 지구촌의 모든 부문이 AI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한국은 미국, 중국에 이어 ‘AI 3강 도약’을 목표로 내걸었다. 이재명 대통령의 1호 공약도 AI 대전환이다. 이 대통령은 ‘AI 100조 원 투자 시대’를 선언하며 대대적인 투자 기반 조성을 약속했다. 특히 정부는 2026년을 AI를 기반으로 한 경제대도약 원년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정부는 이에 대한 실행 계획의 일환으로 지난 9일 발표한 '2026년 경제성장전략'을 통해 AI를 미래 성장 전략의 핵심 카드로 제시했다. 인프라 구축부터 기술 확보, 산업 전환, 인재 양성까지의 모든 영역을 AI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구상이다. 이미 현실이 된 AI 시대를 맞아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미래 AI 시대를 견인할 인적자원이다. 그렇다면 현재 정부가 AI 대전환을 통해 양성하려는 한국형 AI 인재는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것일까.
■ AI 전면 전환 방향은
2026년 경제성장전략에서 정부가 가장 강조하는 핵심 축은 'AI 전면 전환'이다. 인프라·기술·산업·인재 전 분야에 걸친 AI 대전환을 통해 AI 3대 강국으로 도약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AI 고속도로 구축, 피지컬 AI 육성, 전국민 AI 활용 기반 조성이 주요 과제로 제시됐다. 올해는 그 비전을 구체화하는 밑그림을 그릴 것으로 기대된다.
AI 혁신 인프라인 'AI 고속도로'는 대규모 연산을 뒷받침할 국가 AI 컴퓨팅 인프라를 확충하고, AI 컴퓨팅센터를 구축하는 것. 정부·정책금융·민간이 함께 안정적인 연산 자원을 확보한다는 구상이다. AI 기술 확보 전략도 함께 추진된다. 대규모 AI 연산에 활용되는 GPU(그래픽처리장치) 의존도를 완화하기 위해 NPU(신경망처리장치) 독자 모델 개발과 국산 패키지 실증 등을 추진한다. 양자컴퓨팅과 슈퍼컴퓨터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컴퓨팅 인프라도 확충한다.
정부는 또 피지컬 AI를 국가 목표로 설정했다. 산학연 연합을 통해 7대 선도 분야를 집중 육성할 계획이다. 제조 현장용 휴머노이드 플랫폼을 비롯해 재난 구조 로봇, 물류 로봇, 농업 완전자율 로봇 등이 주요 육성 대상으로 지목됐다. 자율주행을 위한 AI 전환도 추진된다. 정부는 자율주행 중심 AI 전환 계획을 올해 하반기까지 수립해 자동차 산업 전반에 AI 적용을 본격화할 방침이다. 정부는 이미 2027년까지 전국에 자율주행 실증 도시를 대거 지정한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제조업을 대상으로 한 AI 전환도 추진된다. 한국은 전통 제조업을 기반으로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뤘다. 하지만 산업구조를 첨단화하지 않으면 제조업 자체가 붕괴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상황을 적극적으로 고려한 것이다. 실제로 부산 등은 제조업 기반의 산업구조를 고도화하지 못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는 '제조 AI 2030 전략'을 1분기 안에 마련해 공장과 생산 공정 전반에 AI를 적용하는 산업 AX(AI Transformation)를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중소·중견 제조기업을 포함한 산업 현장의 AI 활용을 단계적으로 확산시키겠다는 구상이다. 정부는 고용, 납세 등 수요가 높은 공공부문에도 공공 AX를 단계적으로 확산해 행정과 공공 서비스의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정부는 기술·산업 전환과 함께 '전국민 AI 한글화'를 포함한 AI 기본사회 구축에도 나선다. 온라인 AI 교육 기반을 구축해 초중고 학생은 물론 대학생, 비전공자, 청년, 재직자, 일반 국민, 소상공인·자영업자까지 폭넓게 AI 활용 역량을 높일 계획이다. 국가 공인 AI 자격증의 확대도 추진된다. 교육과 산업 현장을 연결해 AI 활용 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하겠다는 구상이다. 한마디로 정부의 AI 대전환은 인프라·기술·산업·인적자원 등 국가 산업, 경제, 사회 구조를 완전히 바꾸겠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정부는 이미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 그래픽처리장치(CPU) 대량 확보, AI 데이터 센터 확충 등 핵심 정책을 추진 중이다.
■ 한국형 AI 인재란?
정부가 추진하는 'AI 전면 전환'의 핵심 인프라는 한국의 미래 AI 시대를 이끌 인재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형 AI 인재는 어떤 사람을 의미할까. 최근 생성형 AI 사용이 일반화된 데다 정부가 국가 주도의 AI 대전환까지 추진하면서 “이대로 가면 나만 도태될지 모른다”거나 “나는 점점 효용가치가 떨어지겠구나”는 등의 반응이 이어진다. 학생들의 경우엔 “무엇을 전공해야 할지 혼란스럽다”는 반응도 다수다. AI가 기존 일자리의 상당수를 대체할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가 점점 현실화되면서 불안감은 갈수록 증폭되는 상황이다. 특히 최근엔 AI 시대에 인간 사고력과 문해력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철학 등 인문학 계열 학과의 입학 경쟁률까지 치솟고 있다.
통상 그동안 AI 인재는 생성형 AI 모델 개발자나 자율주행 알고리즘 연구자 등을 의미했다. 즉 새로운 모델을 연구 개발할 수 있거나 AI 기술을 고도화할 수 있는 남다른 수학적 사고력을 갖춘 박사급 연구자나 고급 개발자에 국한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핵심 기술 인재인 것이다. 하지만 이는 협의의 AI 인재라고 할 수 있다.
AI 인재의 범위를 넓게 해석하면 AI 기술을 활용해 데이터를 분석하고 서비스를 개발하거나 업무 혁신을 할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현재 정부가 정한 ‘모두의 AI’라는 국정 비전을 감안하면 AI 인재의 의미는 한층 확장된다. 일부 공학도만 키우는 것이 아니라 교과과정 개편, 직장인 대상 재교육 등을 통해 초중고부터 대학생과 경제활동인구 등 전 생애에 걸쳐 AI 소양 교육을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즉, AI 인재는 AI 기술을 연구·개발하는 소수의 전문가, 의료, 제조, 금융 등 각 산업에서 AI를 잘 활용하는 다수의 실무 인력을 지칭하는 융합인재, AI를 이해하고 결과를 해석할 수 있는 소양을 갖춘 일반 시민 등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로 받아들여 진다. 이런 점에서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이 최근 산하 공공기관 업무보고에서 한 발언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는 “AI 기술혁명은 노동자에게 실직의 공포가 아니라 능력 향상의 도구가 돼야 한다"며 "AI 기술 발전이 사람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일자리가 될 수 있도록 청년·중장년·취약계층 등의 특성에 맞는 모두의 AI를 위한 직업훈련을 실행해달라"고 주문했다. 결국 현재 정부가 바라는 한국형 AI 인재의 범주를 넓게 해석하면 AI를 다룰 수 있는 모든 국민이라는 해석도 가능한 셈이다.
■ 모든 국민이 AI 인재…코파일럿 경제 시대로
현재의 우리는 AI가 미래를 바꿀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기대감도 있지만 불안감도 큰 상황이다. 국제 민간 싱크탱크 세계경제포럼(WEF)이 지난 7일 공개한 ‘AI와 함께 일하는 시대, 2030년 일자리의 네 가지 미래’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 보고서는 AI로 인해 바뀔 미래를 네 가지 시나리오로 분류했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초고속 발전'이다. AI 발전 속도가 빠르고 해당 사회의 적응 준비도 잘 된 상태에서 발생할 것으로 봤다. 여기에서는 생산성이 급증하고 AI가 산업을 재편하고 새로운 직업도 빠르게 창출된다고 한다. 이때 인간의 역할은 AI에이전트를 지휘하는 '오케스트레이터'로 바뀌게 된다. 두 번째는 AI 발전 속도가 인력의 적응 속도를 앞지르는 '대체 시대'다. 조직과 개인이 AI의 빠른 발전 속도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수익을 노린 자동화에만 집중, 대규모 실업과 사회적 균열이 발생할 우려가 높다. 세 번째는 '코파일럿 경제'다. 준비가 잘 된 인간과 AI의 협업에 초점을 맞춘 경우다. 인간의 기술 적응이 AI 발전 속도보다 빠르거나 병행될 때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경제 구조를 의미한다. WEF는 이 사례를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긍정적인 고용 결과를 창출할 수 있는 시나리오로 꼽았다. 네 번째는 '정체된 발전'이다. AI 발전도 부진하고 인간의 대처도 부족한 경우를 가정했다. AI 발전 속도도 느리지만, 인력들의 AI 활용 기술도 부족해 생산성을 떨어뜨린다고 한다. 이런 환경에서는 AI 전문성을 갖춘 일부 기업과 국가에 이익이 집중되며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더욱 심화하는 부작용이 촉발될 것으로 우려된다.
이와 관련, 글로벌 컨설팅사 맥킨지앤컴퍼니는 ‘AI 시대의 협업: 에이전트·로봇·인간’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AI와 로봇의 확산을 통한 자동화가 빠르게 진행될수록 책임 있는 결정과 의사소통, 조정 등 인간 고유의 역량이 더 중요해진다고 강조했다. AI를 만드는 소수의 개발자보다, AI를 이해하고 개입 시기를 자율적으로 판단하는 등 AI와 함께 일하는 능력을 가진 다수의 노동자가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현재 정부의 AI 대전환 계획은 코파일럿 경제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모든 국민이 AI 기술에 제대로 적응할 때 생산성이 급증하고 혁신이 일상화되는 미래를 일굴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거의 모든 국민들이 스마트폰 등을 통해 기본적인 인터넷 사용 소양을 갖췄던 게 IT 강국 도약의 동력이 된 것과 같은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즉, AI 강국 도약을 위해서는 소수의 전문가와 융합인재 육성뿐만 아니라 전 국민을 AI 인재로 거듭 나도록 하는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교육과 우리 사회 전반의 대대적인 인식 전환 자체가 가장 시급하면서도 절실한 목표인 셈이다.
2026-01-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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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는 왜 베네수엘라를…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미국이 지난 3일(현지시간)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수도 카라카스에서 전격 체포해 압송한 군사작전은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취임 후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베네수엘라를 마약 유입의 중요 통로로 보고 마두로 정권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고조시켜 왔다. 마두로 대통령을 체포한 지 나흘 뒤인 7일(현지시간)에는 베네수엘라 석유 판매와 수익 창출, 수익 사용처까지 관리하며 원유 통제권을 장악했다. 베네수엘라산 석유 판매처에서 중국을 배제하고 베네수엘라와 연계된 러시아 유조선을 나포하는 등 서반구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영향력 차단에도 나섰다. 힘에 의한 서반구 장악이 노골화되는 형국이다.
■ 거침없는 ‘돈로 독트린’
마두로 축출 작전과 베네수엘라 석유자원에 대한 관할은 트럼프 대통령의 ‘돈로 독트린’(Donroe Doctrine)이 현실화함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외교안보 정책의 최우선 순위로 천명한 ‘서반구 패권 회복’ 의지를 실제 무력 행동으로 드러낸 것이다. 서반구는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는 본초 자오선(경도 0도)을 기준으로 서쪽 방향 경도 180도까지의 반구를 의미한다. 아메리카 대륙 전체와 유럽·아프리카 서쪽 일부, 아시아·호주 동쪽 일부를 포함한다.
돈로 독트린은 트럼프 대통령의 이름 ‘도널드’와 19세기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 패권을 강조한 제임스 먼로 전 대통령(재임 1817~1825년)의 외교 정책 ‘먼로 독트린’을 합성한 단어다. 중국과 러시아의 서반구 영향력을 억제하고 이 지역에서 미국의 단일 패권을 회복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가 담겨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해 12월 4일 공개한 국가안보전략(NSS)에서도 서반구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중요한 과제로 언급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월 취임 직후부터 베네수엘라뿐만 아니라 콜롬비아, 쿠바, 멕시코, 덴마크령 그린란드 등 서반구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노골적으로 꾀했다.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에너지·광물 등 공급망 문제가 핵심 쟁점이 되면서 단거리 공급망을 구축할 수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 베네수엘라 때린 이유는
베네수엘라는 3030억 배럴의 원유를 지닌 세계 1위 원유 보유국이다. 하지만 서방의 오랜 제재와 경제난으로 관련 인프라가 크게 낙후된 상황이다. 또 차베스 정권과 마두로 정권의 현금성 무상복지 정책과 석유 기업 국유화 조치로 인프라 재건에 차질을 빚고 있다.
베네수엘라에는 과거 미국의 엑슨모빌·걸프오일 등이 진출했지만, 차베스 전 대통령이 2007년 자원 민족주의를 앞세워 석유산업을 국유화하면서 미국 석유기업 자산 일부가 강제 몰수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3일 기자회견에서 베네수엘라가 안정적인 새 정권으로 이양될 때까지 미군이 주둔하며 통치할 것이라며 미국 석유기업들이 베네수엘라 석유 인프라 재건 및 수익 창출에 참여할 것이라고 했다. 루비오 국무장관은 7일(현지시간) 베네수엘라 체제 변화에 대한 진전된 구상을 내놓았다. 대 베네수엘라 정책을 안정화, 회복, 전환 3단계로 나누고 미국 영향력 하에 정권 교체까지 시사한 것이다. 베네수엘라에 친미 정권을 세워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관리하겠다는 의미다.
트럼프 대통령은 7일 “베네수엘라가 새로 체결한 석유 거래로 받은 자금으로 미국산 제품만 구매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의 제재로 수출이 막힌 베네수엘라 원유를 인수해 대신 팔고 그 수익금의 사용처까지 결정하겠다는 계획을 공개하면서 베네수엘라 원유 통제를 본격화하고 있다. 미국의 ‘석유 패권’ 행보가 급가속하는 상황이다.
미국의 앞마당인 중남미에서 중국이 영향력을 확대한 것도 베네수엘라 공습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중국은 2007년 이후 베네수엘라 인프라에 약 670억 달러(약 97조 원)를 쏟아붓는 등 베네수엘라를 중남미 ‘일대일로’의 교두보로 활용했다. 베네수엘라 원유의 약 80%를 사들이는 국가가 중국이다. 특히 2023년 9월 마두로 대통령의 방중 이후 양국 관계는 ‘전천후 전략적 동반자’로 격상됐다. 트럼프 행정부는 베네수엘라가 중국, 러시아, 이란 등 적대 세력과 밀착해 아메리카 대륙 내 반미 교두보 역할을 해온 것을 국가 안보의 핵심 위협으로 간주해 왔다. 마두로 축출은 미국의 허락 없이 외부 세력과 손을 잡는 세력에게는 가차 없는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본보기식 경고로 해석된다. <뉴욕타임스>는 “베네수엘라는 ‘현대판 제국주의’의 첫 번째 대상이 된 것”이라고 전했다.
■ 그린란드까지 눈독
트럼프는 덴마크령 그린란드를 향한 영토 야욕도 노골화하고 있다. 하지만 미 의회가 “위험한 도발”이라며 우려하고, 유럽 주요국들도 ‘그린란드 연대’를 표명하는 등 국내외적으로 강한 반발에 직면했다. 미국은 냉전기부터 매입 등의 방법을 통해 그린란드를 미국령으로 삼으려는 시도를 해 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1기 때부터 그린란드를 향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린란드는 북미와 유럽의 가운데에 자리해 공군과 미사일 전력 운용 측면에서 지정학적 가치가 높다. 네오디뮴·디스프로슘 등 희토류, 니켈·리튬·티타늄 등 전략 광물, 천연가스와 원유가 풍부하다. 특히 희토류는 반도체, 배터리, 방위산업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필수적인 원자재로 중국과 패권 전쟁을 벌이는 미국에 꼭 필요한 것이다. 그린란드는 자원과 안보 측면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모두 견제해야 하는 미국 입장에선 전략적 요충지이다.
■ 힘의 세계질서 가속화?
앞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서반구 지배권을 얼마나, 어디까지 공격적으로 확대해 나갈 것인지가 관건이다. 트럼프는 지난해 자국 이익을 앞세운 관세 전쟁으로 자유무역 체제를 와해시킨 것처럼 이제는 외교·안보의 국제질서까지 바꾸고 있다. 미국의 베네수엘라 장악은 중국과 러시아를 자극해 힘의 세계질서를 가속화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미국이 ‘세계의 경찰’에서 ‘서반구의 경찰’로 물러나는 ‘돈로 독트린’ 폭풍이 거세지면 그 여파는 우리에게도 닥칠 수 있다. 미국이 유럽에선 러시아, 아시아에선 중국의 영향력을 일정 부분 인정하는 소위 ‘강대국 결탁의 시대’ 서막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적나라한 힘의 논리 앞에서 인류 공동 번영이나 상호 협력의 가치가 점점 축소되는 상황이다.
전후 70여 년 동안 유지돼 온 국제질서가 무너지며 ‘힘에 의한 현상 변경’이 가능한 시대로 접어드는 듯하다. 우리 정부도 국제 정세에 대한 냉철한 현실 인식을 지녀야 한다. 트럼프의 ‘자기 앞마당 영역 표시’가 동북아시아의 안보·외교·경제 지형에 불러올 나비효과를 정밀하게 파악하고 만반의 대비에 나서야 할 것이다.
2026-01-1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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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한 해 운세를 보는 법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병오년 말띠의 해가 밝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아직 음력 1월이 되지 않았으니 병오년은 시작되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미디어들은 벌써부터 병오년이 시작됐다며 새로운 기운이 솟아나는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하는 중이다. 특히 올해는 불 중에 가장 큰 불이라는 천간 병(丙)의 기운이 창대하게 뻗치므로 붉은 말의 해라는 해석까지 달아서 이런 저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양력에 따라 일상이 규정되는 게 보편화한 시대에도 이처럼 병오년 운운하며 음력 60갑자를 강조하는 시기인 새해엔 남달리 인기를 끄는 분야가 있다. 한 해의 운을 알아보는 운세 풀이가 그것이다. 운세 풀이는 태어난 연월일시를 네 개의 기둥이라 하여 ‘사주(四柱)’로 일컫고 그 기둥 각각의 위 아래 위치인 천간과 지지 여덟 자리 '팔자(八字)'에 목화토금수 오행과 음양이 어떻게 배치돼 있느냐에 따라 타고난 성향이 있다는 명리학에 토대를 둔다. 그럼 이 명리학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나 믿을 만한 것일까.
■원래 그렇다
근대 과학의 세례를 받은 이들은 흔히들 동양의 명리학은 과학적인 근거가 희박하다는 논리로 공격하곤 한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합리성의 최고봉이라 하는 과학이라는 존재가 터잡고 있는 토대부터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과학이라는 것은 과연 모든 현상을 합리적으로 풀이해 주는 만능 열쇠인가.
근대 과학의 기본적인 토대를 이루는 것은 물리학이다. 모든 과학적 분석은 인간이 고대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물리학의 성과를 토대로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 분석이 지금의 눈부신 문명 발전을 이뤄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물리학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는 것은 바로 근원적인 네 가지 힘이다. 중력과 전자기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이 그것이다. 핵력은 원자핵 내부에서 작용하는 힘이므로 일상생활에서는 경험할 수 없으니 흔히 접할 수 있는 중력과 전자기력을 떠올려 보자. 중력과 전자기력은 물리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것을 발견한 것에 불과하다. 그럼 원래 있던 이 같은 힘들은 왜 있는지 설명이 가능한가. 아직까지 과학은 왜 그런 힘들이 존재하는지는 알지 못 한다.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질량이 큰 물질이 '원래' 당기는 힘이 크다고 중력을 설명했듯이 '원래' 있었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명리학의 기본을 이루는 목화토금수의 오행론을 돌아보면 비슷한 맥락을 발견할 수 있다. 목이 주요 기운을 이루는 사람은 진취적인 활동력을 보인다거나 화의 기운이 많은 사람은 따뜻한 리더십이 있다거나 하는 설명을 한다. 그렇다면 왜 특정 오행의 기운이 왕성한 사람은 특정한 성향을 내비치는가. 이에 대해서 명리학의 답변은 중력이나 전자기력을 두고 과학이 하는 답변과 같다. '원래' 그렇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수천 년 동안 수많은 관찰과 직관 등을 통해 쌓아온 명리학을 단순히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척하기가 곤란해진다.
■옹호파
명리학의 쓸모를 옹호하는 쪽은 명리학이 길흉을 점치는 미신이 아니라 삶과 우주를 사유하는 동양철학적 도구라는 입장이다. 목화토금수의 오행과 음양의 조화가 만들어내는 우주적 리듬을 읽어냄으로써 삶의 패턴을 이해할 수 있다고도 설명한다. 이들 옹호파가 가장 꺼리는 해석은 명리학을 숙명론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사주는 정해진 운명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개인의 기질이 조직이나 돈, 일 등의 요소를 이루는 기운과 관계를 맺고 어떤 성향으로 나타나는지를 알려주는 지도일 뿐이라는 게 옹호파의 입장이다. 이 때문에 “나쁜 사주는 없다, 각자 다른 과제만 있을 뿐”이라며 명리학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킨다. 이들은 같은 사주를 타고 난 이들도 사주의 기운을 주고받는 가족과 주변인들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과제 해결이 달라 다른 성향의 운으로 발현한다고 설명한다. 이들은 또 넘치는 기운은 덜고 부족한 기운은 채우는 실천적 생활방식을 통해 삶을 조율하는 지혜를 가질 것을 주문하기도 한다.
■반대파
명리학에 대한 비판은 최근 들어 과학의 이름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국내에서도 오래 전부터 반대파들이 진지한 비판을 가한 바 있다. 국내 명리학 반대파의 선봉에 섰던 이로는 조선의 천재라 불린 다산 정약용을 들 수 있다. 다산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역법(달력 체계)이 달라지므로 연월일시라는 사주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그걸 60갑자로 표기해 운명을 논하는 것은 허망한 일이라고 비판한다. 다산의 입장은 중국 화북지역의 계절 변화에 맞춘 역법으로 만들어진 명리학은 화북지역 이외의 지역에서는 맞지 않다고 하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명리학이 화북지역과 가까운 한반도에서는 그럭저럭 맞을 수 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과연 맞을 것인지를 묻는 최근의 명리학 비판과도 맥을 같이 한다.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의 사주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는 식의 물음이다. 미국은 지구 북반구에서 중국 화북지역과 위도가 비슷하므로 유사한 계절 변화로 명리학의 해석이 어느 정도 맞다손 치더라도 남반구 호주에서 태어난 사람의 사주는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논리다. 이는 명리학의 가장 취약한 맹점을 찌르는 비판이다.
■일기예보파
이 같은 찬반 논란 속에 최근에는 명리학을 일기예보처럼 여겨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사주는 천간과 지지에 오행과 음양이 배치되는 경우의 수가 51만 8000가지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일기예보에서처럼 고기압과 저기압 등 여러 기상 관련 변수들이 배치돼 있는 기상도와 유사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게 일기예보파의 논리다. 기상도가 똑같다고 해서 다음 날 날씨가 반드시 똑같지는 않다. 같은 기상도를 보고도 다른 예측을 하는 기상 전문가들도 있다. 이는 우리가 아직 모르는 기상의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비가 온다는 예보에도 불구하고 비가 오지 않거나 비가 안 온다는 예보에도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던가. 이처럼 명리학 상의 사주도 성향이 그렇다는 예보만 할 수 있을 뿐 100% 맞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기예보파는 우리가 아직은 모르지만 사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가 있을 수 있기에 일기예보 혹은 그보다 약간 덜한 수준으로 명리학의 예측성을 기대해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그렇다고는 해도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접했을 때 우산을 들고 나가는 것은 현명한 행동으로 치부된다. 마찬가지로 명리학이 알려 주는 성향과 패턴을 접하고 우산을 챙기는 것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불리한 운이 있다면 대비하고 좋은 운이 있다면 용기를 더 낼 수 있는 정도의 마음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점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왜적과의 전투를 앞두고 자주 주역점을 친 것으로 유명하다. 주역점은 사주 풀이보다는 아예 점복에 가까운 행위이지만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전쟁이라는 거친 상황 속에서 장군은 주역점의 점괘를 자주 확인했다. 직접 지은 '난중일기'에도 주역점을 보는 장면이 수시로 등장할 정도다. 하지만 장군은 주역점의 점괘에 매몰돼 전투에 임하지 않았다. 장군은 주역점의 점괘가 나쁠 땐 경계를 더욱 철저히 하는 계기로 삼았고 점괘가 좋을 땐 군영에 용기를 불어넣는 계기로 삼았다. 이 같은 마음가짐이 있었기에 주역점조차 장군에겐 삶을 가꾸는 태도를 확장할 수 있도록 하는 훌륭한 도구가 됐다.
새해를 맞아 운세를 보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운세 풀이를 접하며 이 같은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2026-01-0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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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고 돈 나온들 무슨 소용!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크레바스(Crevasse)는 빙하의 표면에 생긴 균열을 뜻한다. 여기서 착안한 ‘소득 크레바스(Income Crevasse)’는 직장에서 은퇴해 국민연금을 받을 때까지 소득이 없는 기간을 말하는데, 흔히 은퇴 크레바스라고도 불린다. 국가데이터처의 ‘2025 고령자 부가조사’에 따르면 주된 일자리의 평균 퇴직 연령은 52.9세다. 반면 현재 국민연금 수령 개시 나이는 63세인데 2033년부터 65세로 더 늦춰진다. 이럴 경우 최소 10년 안팎의 소득 크레바스가 생긴다. 법적 정년인 60세까지 근무하더라도 몇 년간의 소득 단절은 피하기 어렵다. 국민연금을 55세부터 조기 수령할 수도 있지만, 이 경우 지급액이 줄어들게 된다. 결국 은퇴 이후 연금 개시 전까지의 공백기를 어떻게 메울지가 노후 설계의 핵심 과제다.
퇴직을 2~3년 앞둔 50대 후반의 A 씨 역시 이 공백이 걱정이었다. 그러던 중 A 씨는 지인을 통해 종신보험의 사망보험금을 노후 자금으로 미리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바로 ‘사망보험금 유동화’ 제도다. 이는 종신보험의 해약환급금을 활용해 사망보험금을 생전에 연금처럼 수령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A 씨처럼 최근 퇴직을 앞둔 직장인들 사이에 새로운 노후 자금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 같은 관심은 지난 10월 말, 금융당국 주도로 5대 주요 생명보험사가 사망보험금 유동화 서비스를 본격 도입하면서 더 확산됐다. 과연 사망보험금 유동화가 퇴직 후 국민연금 수령 전까지 소득 공백기를 메우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까?
■ 왜 지금, 유동화에 관심이 쏠릴까
사망보험금은 오랫동안 ‘사후에 남겨지는 돈’으로 인식돼 왔다. 보험의 본래 목적이 유가족 보호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기대수명은 늘어나고 은퇴 이후의 삶이 길어지면서, 그동안 묶여 있던 자산을 생전에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사망보험금 유동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한 제도다.
이 제도가 주목받는 배경에는 구조적인 노후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평균 수명은 계속 늘어나는데, 은퇴 이후 매달 들어오는 고정소득은 충분하지 않다. 국민연금만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고물가와 인플레이션은 중장년층의 지갑을 더욱 얇게 만들고 있다. 국민연금연구원이 2023년 8~11월 전국 5331가구, 8736명을 대상으로 ‘제10차 국민 노후보장패널조사’를 진행한 결과, 50대 이상 중고령자가 생각하는 적정노후생활비는 부부 기준 월 297만 원, 개인 기준 192만 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2년 전 조사보다 각각 20만 원, 15만 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올해 국민연금 월평균 수급액은 67만 원에 불과해 적정노후생활비의 3분의 1 수준에 머문다. 이 격차를 메우기 위해 앞으로도 고령층을 중심으로 유동화 신청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주택을 담보로 연금을 받는 주택연금 수령액이 최근 급증하고 있는 현상과도 맥을 같이한다.
■ 사망보험금 유동화 상품 잇따라 출시
2025년 10월 말 삼성생명, 한화생명, 교보생명, 신한라이프, KB라이프 등 5개 생명보험사가 처음으로 사망보험금 유동화 상품을 출시했다. 최근에는 동양생명도 사망보험금 유동화 특약을 출시하며 이 대열에 합류했다. 금융당국은 내년 1월부터 전 생명보험사로 이 제도를 확대할 계획이다. 종신보험이 더 이상 손대지 못하는 사후 자산이 아니라, 생애 전반에 활용 가능한 자산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한 것이다.
참고로 생명보험협회는 사망보험금 유동화 제도가 도입된 후 10월 30일부터 11월 10일까지 8영업일 동안 605건, 28억 9000만 원 수준을 지급했다고 밝힌 바 있다. 유동화를 시작한 계약자들은 월평균 39만 8000원가량을 수령했다. 평균 신청 연령은 65.6세였다.
사망보험금 유동화 제도는 해외에서도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생명보험의 생활혜택특약 제도가 빠르게 확산 중이다. 이 특약은 피보험자가 사망 이전에 중대한 건강 악화 상황에 처했을 때 사망보험금을 조기에 지급하도록 설계된 상품이다. 홍콩에서는 가속사망보험금 제도가 대표적이다. 질병·요양 등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사망보험금 일부 또는 전부를 선지급 받거나 일정 기간에 걸쳐 정기적 연금 형태로 나누어 수령할 수 있다.
■ 유동화 대상인지 확인하는 법
사망보험금 유동화는 모든 종신보험에 자동 적용되는 제도는 아니다. 보험료를 10년 이상 납입 완료한 월 적립식 종신보험으로, 신청 시점에 보험계약대출 잔액이 없고 계약자와 피보험자가 동일해야 한다. 해약환급금이 충분히 쌓인 고연령 계약자일수록 수령 가능 금액이 커지며, 개인 상황에 따라 유동화 개시 시점과 수령 기간을 선택할 수 있다.
대상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비교적 명확하다. 금리확정형 종신보험이어야 하며, 변액종신보험이나 CI보험은 대부분 제외된다. 가입 연령은 만 55세 이상, 계약 기간과 보험료 납입 기간은 각각 10년 이상, 그리고 보험료 완납 상태여야 한다. 손해보험사에서 판매한 사망담보 상품은 사망보험금 유동화 대상이 아니다.
확인은 생명보험협회의 ‘내보험찾아줌’ 서비스로 가입 내역을 조회한 뒤, 해당 보험사 고객센터나 영업점을 방문해 유동화 가능 여부와 예상 수령액 시뮬레이션을 요청하면 된다. 설계사를 통한 신청은 불가하며, 반드시 계약자 본인이 직접 대면 신청해야 한다. 유동화는 계약자의 몫으로 수익자 동의가 없어도 유동화 신청은 가능하다.
유동화를 선택하면 수령한 연금과 잔여 사망보험금의 합계가 최초 사망보험금보다 줄어든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이는 보험사가 유동화에 대한 이자나 수수료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 제도는 더 받는 선택이 아니라 앞당겨 사용하는 선택에 가깝다. 현재의 생활비 필요와 향후 유가족을 위한 재원 사이에서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
■ 사망보험금 유동화, 적용해 보면
사망보험금 유동화 가입자는 유동화 비율을 최대 90%까지 선택할 수 있고, 수령 시작 시점과 지급기간 역시 본인이 결정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정답은 아니지만, 노후 자금 설계의 한 수단으로는 전략적 활용이 가능하다.
여기서 사망보험금 유동화 가입자가 알아야 할 것은 보험상품의 이율, 위험률, 신청 시 나이, 유동화 비율, 지급기간 등에 따라 지급금이 천차만별이라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지급기간 선택이다. 기간을 짧게 잡으면 월 수령액은 커지지만, 길게 설정하면 금액은 줄어드는 대신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 이는 ‘얼마를 받을 것인가’보다 ‘언제, 얼마나 필요할 것인가’를 먼저 따져야 하는 문제다. 은퇴 직후 소득 공백을 메울지, 장기적인 생활비 보완이 목적일지에 따라 선택은 달라진다.
실제 사례를 보면, 60대 B 씨는 사망보험금 3000만 원의 종신보험을 유동화 비율 90%, 지급 기간 5년으로 설정해 총 1314만 원, 월평균 21만 9000원을 수령한다. 반면 사망보험금 7000만 원의 보험에 가입한 60대 C 씨는 같은 비율에 지급 기간을 7년으로 잡아 총 3436만 원, 월평균 40만 9000원을 받는다.
내년에는 사망보험금을 현금 대신 요양·간병 서비스로 제공하는 서비스형 상품도 출시될 전망이다. 예컨대 C 씨가 70세부터 10년간 80% 유동화를 선택하면, 연평균 512만 원(총 5116만 원) 상당의 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 유동화 비율 나눠서 시뮬레이션해야
사망보험금 유동화 시뮬레이션에서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유동화 구조가 내 삶의 흐름에 맞는지다. 우선 유동화의 기준은 사망보험금이 아니라 해약환급금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같은 사망보험금이라도 가입 시기와 예정이율에 따라 실제 연금 재원은 크게 달라진다. 다음으로는 지급기간 대비 총수령액을 봐야 한다. 월 금액이 커 보여도 지급기간이 짧다면 노후 전반을 버티기 어렵다. 또한 유동화 종료 후 남는 잔여 사망보험금도 중요하다. 이는 유가족에게 남는 사실상 유일한 보장 자산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유동화 비율을 바꿨을 때 월 수령액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반드시 비교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유동화 비율 70%와 90%를 나눠 시뮬레이션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70%는 비교적 보수적인 선택으로, 월 수령액은 줄어들지만 종료 후 남는 사망보험금이 커 유가족을 위한 최소한의 상속 재원을 지킬 수 있다. 다른 연금 소득이 있거나 의료·간병비 부담이 아직 크지 않은 경우에 적합하다. 반면 90%는 현금 흐름을 극대화하는 방식이다. 은퇴 직후 소득 공백이 크거나 국민연금만으로 생활이 빠듯한 경우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지만, 사망보장이 최소 수준으로 줄어든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상속 필요성이 크지 않은 경우에 한해 고려할 선택이다. 한편, 일각에서는 사망보험의 본래 목적이 유가족 보호인 만큼, 이를 줄이도록 유도하는 구조 자체가 모순적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 이제는 나를 위한 노후 설계 시작할 때
은퇴 이후 연금 개시 전까지의 공백기를 메우는 방법으로는 주택연금도 활용할 수 있다. 사망보험금 유동화와 주택연금은 성격이 다른 자산을 연금형 현금흐름으로 전환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제도를 함께 활용하면 노후 소득의 안정성이 높아진다. 국민연금 위에 주택연금으로 생활비를 마련하고, 사망보험금 유동화로 의료비나 간병비 같은 변동 지출을 보완하는 방식이다. 소득원이 분산되면 예상치 못한 지출에도 대응력이 커진다.
반면 단점도 분명하다. 두 제도 모두 자산을 앞당겨 사용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향후 상속 자산은 줄어든다. 주택연금은 주택 처분의 자유를 제한하고, 사망보험금 유동화는 유가족에게 남는 보험금을 감소시킨다. 따라서 현재의 생활 안정과 미래의 상속 사이에서 가족 간 충분한 합의가 필요하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국민연금을 중심으로 개인연금과 퇴직연금을 갖추고, 필요에 따라 주택연금이나 사망보험금 유동화를 활용하면 노후 생활비 부족을 효과적으로 보완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사망보험금 유동화는 종신보험의 본질을 부정하는 제도가 아니다. 오히려 보험을 삶의 전 과정에서 활용할 수 있게 확장한 장치다. 중요한 것은 제도 자체보다 활용 방식이다. 새로운 보험을 추가하기보다, 이미 보유한 보험과 자산이 현재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점검하는 것이 우선이다. 종신보험을 유지하는 것도, 일부를 유동화해 노후의 숨통을 트는 것도 모두 선택이다. 핵심은 그 선택이 ‘남을 위한 보험’이 아니라 ‘나를 위한 노후’로 이어지느냐에 있다.
2025-12-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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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혼산’ 시대를 건너는 법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지난해 1인 가구가 처음으로 800만 가구를 넘었다. 국가데이터처(옛 통계청)가 지난 9일 발표한 ‘통계로 보는 1인 가구’에 따르면 지난해 1인 가구는 전국 804만 5000가구였다. 전체 가구 중 비중도 36.1%로 역대 최고였다. 1인 가구 시대가 가속하면서 ‘나 혼자 산다’(나혼산) 시대를 잘 보내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됐다.
■ 1인 가구 800만 시대
1인 가구는 2019년 614만 8000명(30.2%), 2020년 664만 3000명(31.7%), 2021년 716만 6000명(33.4%), 2022년 750만 2000명(34.5%), 2023년 782만 9000명(35.5%), 2024년 804만 5000가구(36.1%)로 해마다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청년층의 결혼 감소, 고령화 시대 사별 증가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지역별 1인 가구 비중은 서울이 39.9%로 가장 높았고, 대전(39.8%) 강원(39.4%) 충북(39.1%) 순으로 나타났다. 부산의 경우, 전체 147만 1000가구 중에서 1인 가구는 54만 8000가구로 37.2%에 달했다. 부산에서는 1인 가구 고령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연령대별로 보면 70세 이상이 23.7%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어 60대(19.7%), 29세 이하(17.7%), 30대 (14.4%), 50대(14.0%), 40대(10.5%) 순이었다. 60대 이상 비중이 43%에 달하는 것이다. 반면 서울은 29세 이하 1인 가구 비중이 25.4%로 가장 높아 부산과 대조를 보였다.
■ 1인 가구 마케팅 활발
이미 대세가 된 1인 가구는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는 동력이 됐다. 1인 가구를 겨냥한 유통가의 공략은 더욱 거세지는 상황이다.
배달의민족은 4월 1인 가구의 수요를 감안해 ‘한 그릇’ 배달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 서비스는 1인분 식사에 적합한 메뉴를 모은 카테고리로 최소 주문 금액을 없앤 게 가장 큰 특징이다. 9월 누적 1000만 건을 돌파한 데 이어 11월 중순 2000만 건을 돌파했다. 치킨 브랜드 bhc는 배달의민족과 제휴해 반 마리 치킨 메뉴를 9월 출시하고 무료 배달 서비스를 시작했다. 젊은 세대와 혼밥족 등 1인 가구 증가와 소량 배달 수요 확대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이다. 편의점에서도 1인 가구용 소포장이 점점 늘고 있다.
1인 고객을 겨냥한 전용 좌석과 메뉴를 갖춘 식당들이 고깃집, 샤브샤브, 디저트, 복국집 등 다양한 분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효율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의 소비 성향도 영향을 미쳤다. 여러 명이 함께 식사하며 메뉴를 타협하거나 기다리는 대신 자신의 취향과 속도에 맞게 소비할 수 있는 1인 식문화가 새로운 선택지로 자리 잡은 것이다.
특히 막강한 소비력을 갖춘 1인 가구는 이미 가전업계의 큰손이다. 생활공간이 협소한 싱글족은 더 작고, 더 간편한 상품을 선호한다. 세탁기, 냉장고, 에어컨 등 기본 백색가전은 물론, 3kg짜리 미니 건조기, 무선 핸드스틱 청소기, 정수기, 커피 머신 등 소형 가전이 인기다.
■ 지자체도 달라진다
1인 가구 트렌드를 반영해 지자체들도 다양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부산 기장군은 올해부터 돌봄이 필요한 1인 가구에 간병비를 지원하는 ‘기장 SOLO 케어’ 사업을 펼치고 있다. 기장군에 주민등록이 되어 있는 1인 가구원이 입원 중 간병업체를 통해 간병 서비스를 이용한 경우 간병비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사회적 단절, 고립 등에 처할 수 있는 1인 가구의 건강한 생활을 지원하고,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다.
부산진구는 청년 전월세 중개 수수료 지원, 소형 건설기계 조종 교육 등을 새롭게 지원해 1인 가구원의 경제적 자립을 돕고 있다. 부산 중구는 1인 가구의 고독사를 방지하기 위해 부산생명의전화와 업무협약을 맺고 24시간 상담창구를 운영한다.
서울 송파구는 전국 지방자치단체 최초로 1인 가구에 최적화된 0.6L 규격의 음식물쓰레기 종량제봉투를 시범 도입했다. 송파구는 10일부터 내년 3월 31일까지 관내 1인 가구가 많은 일반 주택동인 방이2동, 송파1동, 삼전동, 잠실본동, 석촌동에서 0.6L 규격 봉투 판매를 시범적으로 시작했다. 종전 최소 규격인 1L보다 작은 용량의 봉투가 필요하다는 주민 목소리를 적극 반영한 것이다.
서울 관악구는 올해 전국 최초로 ‘관악형 작은 1인 가구 지원센터’를 동 단위로 구축해 촘촘한 생활권 기반 지원체계를 확립했다. 이를 토대로 교육, 여가, 문화, 소모임, 건강 상담 등 다각적인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했다. 약 1만 명에 달하는 1인 가구 주민이 동네 가까운 곳에서 실질적인 지원을 받는 효과를 거두었다. 서울에서 1인 가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라는 특성을 반영해 1인 가구의 사회적 고립과 불안 해소에 주력한 것이다. 인천시는 내년 1월 ‘외로움돌봄국’을 출범해 노인과 청년 1인 가구의 고립과 은둔 문제를 해결할 예정이다.
■ 새롭게 뜨는 ‘1.5가구’
김난도 서울대 명예교수 연구진은 2026년 10대 소비 트렌드 키워드 중 하나로 ‘1.5가구’를 제시했다. 1.5가구'는 개인의 독립적인 삶을 기반으로 하되 심리적·경제적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 ‘외부의 자원’(0.5)과 전략적으로 결합하는 새로운 관계를 말한다. 고독하지만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싶어 하는 현대인들이 찾아낸 가장 합리적인 라이프 스타일 방안이다.
1.5가구는 ‘지원 의존형’ ‘독립 지향형’ ‘시설 활용형’ 등 세 유형으로 나뉜다. ‘지원 의존형’은 혼자 살지만, 가족 등 외부적인 지원을 끊임없이 받아서 심리적 외로움이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유형이다. ‘독립 지향형’은 2~4인 가구가 한집에서 살지만, 각자 철저하게 독립성을 지켜주는 라이프 스타일을 의미한다. ‘시설 활용형’은 공유 주거 서비스를 통해 최소한의 개인 공간은 확보하면서 공용 공간을 함께 쓰며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이다.
■ 세대·지역별 맞춤 정책을
국가데이터처의 ‘통계로 보는 1인 가구’ 조사에서 1인 가구의 절반은 외롭다고 답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6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은 뇌졸중, 심장병, 당뇨, 인지기능 저하, 조기 사망 등의 위험을 높인다”고 밝혔다. 외로움이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 만큼 사회적 연결을 강화하는 정책이 더 확산돼야 한다. 한국 사회의 복지와 돌봄은 주로 아동과 노인에게 집중돼 있는데 중장년층과 청년층까지 국가 돌봄의 영역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또 세대별·지역별 특성에 맞게 세밀한 1인 가구 정책을 펼쳐야 한다. 정부나 지자체가 청년에게는 공공임대주택 확대, 양질의 일자리 제공을 위해 노력하고, 중장년층에게는 경력 단절 방지, 직업 전환 교육이 필요하다. 고령층을 대상으로는 돌봄 서비스 확대와 생활·의료 지원 등 지속적인 사회 안전망 구축에 나서야 한다. 1인 가구 증가로 가족 구성이 다변화하는 만큼, 모든 국민들이 안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정부와 지자체가 힘을 쏟아야 한다.
2025-12-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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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분노를 되짚어보다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광주가 최근 분노에 휩싸이면서 이재명 정부에 비난의 화살을 쏟아내고 있다. 민주당의 텃밭으로 분류돼 온 광주의 분위기 급변에 민주당 뿐만이 아니라 대통령실도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다.
■분노의 시작
광주의 분노는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 당시 내세운 ‘광주 국가 AI 컴퓨팅센터 확충’ 공약이 시발점이다. 이 대통령이 4차산업 시대를 맞아 AI를 정책의 축으로 삼을 가능성이 큰 상황이었기에 광주는 AI 중심도시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대통령 당선 이후 광주는 삼성SDS 컨소시엄이 추진하는 2조 5000억 원 규모의 초대형 국가 AI 컴퓨팅센터 구축지가 될 것으로 보고 기대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삼성SDS 측은 지난달 해당 사업의 최종 입지로 전남도 해남·영암 일대 기업도시 ‘솔라시도’를 선택했다.
광주는 민주당 정부가 대선 과정에서 표만 챙기고 결국은 광주를 버린 것이 아니냐며 분노에 휩싸였다. 대통령 공약만 믿고 안일하게 대처했다며 광주시에도 비난의 화살이 빗발치고 있다. 예상보다 격앙된 광주의 분위기에 민주당과 광주시장은 당혹해하며 다른 AI 관련 시설을 광주에 유치해 달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나서는 등 부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벌써부터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상당한 후폭풍이 불 것이라는 예측도 만만찮게 나온다.
■분노의 이면
광주의 분노는 표면적으로는 표를 얻기 위한 공약의 변질 측면에서 정치적인 해석이 가능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 보면 또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이번 국가 AI 컴퓨팅센터 구축지 선정은 대통령실의 실용주의 노선과 기업의 수익성 논리가 결합된 결과라는 평가가 있다. 공공과 민간 지분 비율이 3대 7이 된 사업에서 결정권은 민간에 있을 수밖에 없고 민간 기업은 경제성 논리에 충실했다는 것이 평가의 근거다.
산업용지 단가 측면에서 광주는 평당 200만 원인 반면 솔라시도는 평당 40만~50만 원으로 5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여기에다 막대한 열을 방출하는 데이터센터의 특성상 냉각수의 안정적인 공급이 필수적인데 해안과 가까운 솔라시도는 하루 1만 4000t의 산업용수 공급이 가능해 광주보다 비교 우위를 가진다. 현재 솔라시도에 가동중인 98MW 규모의 태양광 발전소도 전력 소모가 많은 데이터센터와 찰떡 궁합을 이룬다는 것이다.
결국 정치적인 계산으로 입지를 저울질하던 국책 사업이 정권의 실용주의 노선이 작동하면서 비용 경쟁력과 경제성에 따라 자리를 찾아갔다는 분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분노의 확장
잠시 시간을 2023년 3월로 되돌려 보면 또다른 분노를 마주할 수 있다. 그 시점 윤석열 정권은 대뜸 경기도 용인에 대규모 반도체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하겠다고 덜컥 발표했다. 이미 SK가 용인에 반도체 산단을 조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발표는 삼성으로 하여금 용인에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짓도록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발표가 분노를 자아내는 것은 반도체 공장에 필요한 막대한 양의 전기와 물에 대한 대책이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SK가 조성하려는 반도체 산업단지에 공급할 전기와 물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반도체 산단 조성을 또 하려 나니 당장 필요해진 것은 원전 10기의 전력 생산량인 10GW 이상의 전력이었다. 윤석열 정권은 급히 LNG발전소 6기를 용인에 건설하고 서남해안과 강원도에서 생산한 전기를 대형 송전탑으로 끌어오는 대책을 발표했다. 물도 강원도 양구에 댐을 건설해 끌어오는 방안을 모색하다 해당 지역 주민 반발이 거세자 팔당에서 물을 끌어온다는 식으로 갈팡질팡했다. 발표부터 해 놓고 뒤늦게 대책 마련에 허둥대는 꼴이었다.
이렇게 졸속으로 마련된 계획에도 불구하고 국토교통부는 지난해 12월 26일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 계획을 승인했다. 4년 이상 걸리던 산단 승인 절차를 절반 이하로 단축했다는 자랑과 함께. 수도권으로 전력과 물을 끊임없이 공급해야 하는 지역의 입장에선 분노가 절로 일 수밖에 없는 행태다.
■분노의 종점
다시 현재 광주의 분노로 넘어오자. 광주의 분노는 대선 공약 파기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재명 대통령이 표방한 실용주의가 작동한 사례로 꼽힌다. 광주 내부에서조차 용지 조성 가격과 전기, 물 공급 측면에서 솔라시도가 비교 우위를 가진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그렇다면 용인에만 올인한 반도체 단지는 어떻게 봐야 할까. 냉정하게 용지 조성 가격과 전기, 물 공급 측면만 따져 본다면 반도체 공장은 전력을 생산하는 비수도권 해안가 같은 곳에 배치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재명 정부가 표방하는 국가 균형발전이라는 가치를 내세운다면 더욱 그래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이 가진 부작용은 명약관화하다. 동남권 신공항 사업이라는 중차대한 국책사업조차 온갖 부작용을 내세우며 숱하게 뒤집고 원점화하곤 하던 게 최근 정권들의 역사다. 동남권 주민들은 역대 정권들이 동남권 신공항 사업에만 유달리 그런 술수를 부렸으리라고 보지는 않는다.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산업단지 같은 사업도 얼마든지 방향을 틀 수 있음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 민심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이번 정부는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 전면 재검토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2025-11-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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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유사시 놓고 미일-중 격돌… 한국은?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동북아 안보 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대만 유사시 집단자위권 행사 발언으로 중일이 격돌하고 있다. 총리 참수론 따위의 말 폭탄에 이어 무역 보복 조치로까지 번지며 확전하는 모양새다. 양국의 강 대 강 충돌은 미중 갈등을 배경으로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다. 대만해협을 둘러싼 안보 지형 변화에 한반도가 무풍지대일 수 없다는 점에서 한국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국면이다.
미국은 한미 정상회담 결과를 담아 13일 발표된 공동 팩트시트와 한미안보협의회(SCM) 공동성명에서 콕 집어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대만을 침공하려는 중국을 겨냥한 구도를 명확히 했다. 대만해협의 평화·안정 유지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strategic flexibility) 증대가 합의문에 포함된 것은 중국의 팽창을 막는데 주한미군을 앞장세우겠다는 의도다. ‘돈 잘 버는(money machine) 부자 나라를 왜 지켜 주느냐’라며 주둔 비용 인상을 압박하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모습이 어색하게 겹치는 대목이다.
주한미군을 한반도 방위군이 아닌 동북아 기동군으로 쓰겠다는 구상은 20년 넘게 한미 양국에 뜨거운 감자였다. 도널드 럼즈펠드 전 미 국방부 장관은 2004년 글로벌 방위 태세 검토(Global Defense Posture Review, GDPR)를 발표하고 주한미군의 역외 기동 능력 강화와 더불어 한미연합군의 통합적 작전 능력을 강조했다. 주한미군만의 독자적 작전이 아니라, 한국군과 함께 동북아 및 역내 여러 지역에서 동반 작전 수행을 전제한 것이다. 미군이 역외 분쟁 지역에 한국군을 데리고 다니겠다는 구상을 당시 노무현 정부가 받아들일 리 없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5년 3월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시아의 분쟁에 휘말리는 일은 없다”는 폭탄 발언으로 미국에 경고장을 날렸다.
우여곡절 끝에 2006년 1월 한미 외교장관 공동성명으로 사태는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The ROK respects the necessity for strategic flexibility of the U.S. forces in the ROK. The U.S. respects the ROK position that it shall not be involved in a regional conflict in Northeast Asia against the will of the Korean people.’ 영문을 앞세운 이유는, 애당초 이 합의문이 영문으로만 발표됐고, 백악관 홈페이지에만 원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외교부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의 필요성을 존중한다. 미국은 한국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동북아 지역 분쟁에 한국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
이 성명에 대한 미국의 해석은 일관됐다. 주한미군은 더 이상 대북 억지력으로서의 붙박이가 아니라 동북아 정세에 따라 한반도를 넘나드는 동북아 신속기동군을 자처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 정부의 인식은 전혀 달랐다. 2006년 11월 송민순 외교부 장관 후보자는 분쟁에 휘말리지 않는 주체, 즉 대명사 ‘it’이 한국군이 아닌 주한미군이라고 국회에서 대답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한국 정부가 동의하지 않는 한 주한미군은 움직이지 못한다”며 같은 맥락의 주장을 폈다. 한국인의 의사에 반해 주한미군이 역외 분쟁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합의문 해석의 논란은 한국 외교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2006년 이래의 관련 양해를 확인한다.’ 2025년 한미 공동 팩트시트에서 2006년 합의문은 중요한 전거로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미국은 2006년 합의를 발전시켜 한국군이 북한에 대한 재래식 전력 방어에 집중하는 대신 주한미군이 한반도를 넘나들며 동북아의 기동군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한미동맹을 손질하고 싶어 한다. 중국의 팽창에 주한미군이 직접 대응할 수 있으려면 이른바 동맹의 현대화가 필요하다는 논리다.
이에 대해 역대 한국 정부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원칙적으로 이해와 공감을 표명하지만, 주한미군의 대북 억지력이 약화하는 방향에 동의하지 않았고, 또 한국군이 한국 국민의 의지에 반하여 동북아 등 역외 분쟁에 자동 개입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대명사 ‘it’이 한국군이건, 주한미군이건 한국의 역외 분쟁 개입 가능성 차단이 역대 한국 정부의 기준이 된 것이다.
미국은 주한미군이 동북아의 리베로가 된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니얼 드리스콜 미국 육군장관이 최근 방한해 주한미군이 중국과 북한의 위협에 모두 대응해야 한다고 언급한 대목이다. 논란이 커지자, 안규백 국방부 장관은 13일 국정감사에 출석해 “그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라고 선을 그었다. 이어 “주한미군의 전력 증강은 한반도 대북 억지력에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노무현 전 정부의 인식과 연결돼 있다.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이 최근 사령부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중국·러시아·북한을 견제하는 ‘전략적 중심축’으로 규정한 것도 한국인의 시선에서 마뜩잖다. 경기도 평택과 오산의 미군기지가 대북 방어가 아닌 대중, 대러 견제를 위한 불침 항모처럼 역할이 전환되는 것에 한국은 합의한 적이 없다. 최근 미 국방부(전쟁부)의 존 노 인도·태평양 차관보 후보자가 한국이 미국과 함께 중국의 군사적 위협에 맞설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로 주장한 것도 동맹 간 공식 입장을 벗어난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거론된 지 오래됐지만, 실제 실행된 적은 없다. 최근 중일 간의 충돌이 격화되는 양상을 보면 주한미군의 한반도 밖 출동이 언제 이뤄져도 이상하지 않게 됐다. 미국은 대만 유사시에 주한미군의 군사적 개입을 당연시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한국은 시험대에 오른다. 한국군의 동반 개입 혹은 지원을 요구할 경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2006년과 2025년 한미의 합의 문서에 따르면 주한미군이 유연화되더라도, 한국은 원치 않는 분쟁에 휩쓸리지 않아야 하는데, 두 조건의 양립 가능성에는 물음표가 붙을 수밖에 없다.
이 대목에서 70년 된 동맹의 가치를 되돌아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미동맹은 출발부터 비대칭적 구조였지만, 내용적으로 시혜 동맹이 아닌 호혜 동맹이었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한국에 베푸는 동맹이 아니라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동맹이라는 의미다. 미국은 자신들의 세계 전략에 비춰 동맹의 이해득실을 끊임없이 따져 왔다. 70년간 한미동맹이 유지된 데는 미국에도 그만한 쓸모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한미동맹을 통해 한국이 얻은 안전보장의 가치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동맹도 시대의 부침을 겪는다. 미국이 먼저 동맹의 성격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의존형 동맹에서 부담 분담형 동맹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한국 스스로가 방위력을 키우라는 의미다. 왜냐하면 주한미군에는 변화된 세계 전략 변화에 따라 새 역할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은 중국의 팽창을 견제해야 하고, 따라서 북한 방어를 넘어 인도·태평양 안보의 핵심축으로 격상시키려는 정책 기조가 분명해졌다. 70년 된 한미동맹의 실상은 합의된 문구와 현장 사이의 간극이 점점 커지는 형국이다.
한미동맹의 성격이 변해야 한다면, 그 변화는 정부 간의 협의로만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 안보 정책일수록 공개된 논의와 합의가 필요하다. ‘국민의 의사에 반하지 않는’이라는 단서가 구두선에 그치지 않으려면, 달라진 안보 환경에 걸맞은 동맹의 틀을 국민과 함께 재설계해야 할 시점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동맹은 국민의 동의 위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
2025-11-2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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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왜 백범 김구를 소환했나?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중략) 이 일을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사상과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 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다.” 백범 김구 선생의 자서전 <백범일지> 속 ‘나의 소원’에 나오는 대목이다. 그는 일제의 폭압, 해방의 혼란 속에서도 나라의 미래를 ‘문화’에서 찾았다. 물질이 아닌 정신, 총칼이 아닌 품격이 나라의 힘이 된다고 믿었다.
지난달 31일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총회. 고대 실크로드의 도시에서 한 이름이 거명됐다. 바로 백범 김구다. 이날 유네스코는 그의 탄생 150주년이 되는 2026년을 ‘유네스코 세계 기념의 해’로 공식 지정했다. 유네스코 기념의 해는 50주기나 100주기 등 특정 주기를 맞은 인물이나 유산 가운데, 인류의 가치에 기여한 대상을 선정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앞서 다산 정약용(2012년, 탄생 250주년)과 김대건 신부(2021년, 탄생 200주년)가 선정된 바 있다. 1994년 서울 수도 지정 600주년, 1996년 한글 창제 및 반포 550주년, 2013년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을 포함하면 대한민국 유산이나 인물이 지정된 것은 이번이 여섯 번째다. 이는 단순한 외교적 성취를 넘어, 한국 문화의 깊이와 사상적 유산이 인류 보편의 가치로 자리매김했음을 뜻한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이 생긴다. 유네스코는 왜 21세기인 지금, 이미 세상을 떠난 한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다시 불러냈을까? 그 이유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그를 불러낸 이유는
유네스코는 회원국이 제안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교육·과학·문화를 통한 국가 간 협력 촉진과 평화·안보 기여라는 유네스코의 목표와 가치에 부합하는 경우 유네스코 기념의 해로 지정해 오고 있다. 유네스코의 답은 명료하다. 김구 선생의 ‘교육을 통한 문화강국 건설’과 ‘평화의 실현’에 대한 신념이 유네스코 헌장의 정신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고 평가했다. 백범 김구 선생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며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광복 이후에는 남북통일을 위해 분단을 넘어선 협력을 호소했다. 무엇보다 교육과 예술, 인격과 교양이 나라의 힘이 된다고 믿었다. 유네스코는 그 신념을 ‘평화와 인류애, 문화의 힘을 통한 행복의 철학’으로 평가했다.
우리는 김구를 종종 독립운동가로만 기억한다. 그러나 그는 혁명가이자 동시에 철학자였다.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을 그는 이미 ‘문화의 힘’으로 제시했다. <백범일지> ‘나의 소원’은 그 사유의 정수를 담고 있다. 그에게 문화는 단지 예술이나 교양에 머물지 않았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힘이자, 인류를 하나로 잇는 윤리였다.
그가 문화의 힘을 말하던 1940년대, 조국은 총칼 아래 신음하고 있었다. 그런 시대에 문화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은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로 비쳤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현실을 직시한 혁명가였다. 무력의 한계를 누구보다 깊이 체험했기에 그는 정신의 힘을 믿었다. 도덕과 예술, 인격과 교양이 어우러진 힘만이 궁극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문화의 힘으로 세계를 감동시키는 나라를 꿈꾸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소프트파워의 선구적 개념이었다.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아닌 문화적 영향력으로 세계를 움직이는 비전과 통찰은 21세기 K-콘텐츠의 시대를 미리 내다본 듯하다. 방탄소년단(BTS) 멤버 RM이 자주 언급하는 ‘오직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도 바로 김구 선생의 말이다. 2024년 작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가장 많이 회자된 말 또한 백범의 ‘문화의 힘’이었다. 그의 사상이 세대를 건너 젊은 언어로 다시 숨 쉬는 순간이었다.
종종 우리는 GDP, 수출액, 국방비, AI 경쟁력으로 국가의 위상을 재단한다. 하지만 김구는 그와는 다른 좌표를 제시했다. 그가 꿈꾼 문화 강국은 힘의 논리를 넘어 인류의 감동을 주는 나라였다. 현실의 냉혹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그는 끝내 문화의 힘을 믿었다. 무력은 한 시대를 지배할 수 있을지 몰라도 문화는 세대를 이끈다고 보았다. 그의 사유는 제국주의가 지배하던 시대에 역행하는 듯 보였지만, 바로 그 점에서 가장 혁명적이었다. 시대를 거슬러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말했던 그 철학이 지금 유네스코를 통해 다시 호명된 이유다.
■김구가 꿈꾼 나라
21세기 세계는 ‘힘의 논리’에 의해 다시 요동치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의 전장, 가속화되는 군비 경쟁, 디지털 패권 다툼, 그리고 인공지능이 불러온 인간성의 위기까지. 혐오와 분열의 언어가 SNS를 떠돌고 기술의 진보가 오히려 마음의 거리를 넓히고 있다. 전쟁은 멈추지 않고 군비는 늘어만 간다. 디지털 권력은 인류의 사유를 지배하고 혐오와 차별은 네트워크 속을 떠돈다. 유네스코가 2026년 세계 기념의 해로 김구 선생을 선정한 것은 이 물음에 대한 응답이자, 인류에게 던지는 경고의 메시지다. 문명은 눈부시게 진보했지만, 인간의 마음은 그만큼 평화롭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은 영화, 음악, 드라마, 게임, 패션, 음식까지 문화의 모든 장르에서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K-팝이 세계인의 지구 반대편 젊은이들을 춤추게 하고,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과 영화 <기생충>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이야기와 감정으로 세계를 사로잡았다. 이는 김구가 말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의 한 단면일지도 모른다. 그가 말한 아름다움은 부나 권력이 아니라, 타인을 감동시키는 문화의 힘이었기 때문이다. 백범의 비전이 K-컬처의 현실로 잇닿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뿌듯한 자부심을 준다. 실제 문화가 국가 브랜드가 되고 외교 언어가 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됐음을 우리는 최근 경주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을 통해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구가 말한 문화 강국은 오늘의 ‘K-콘텐츠 강국’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그는 문화의 가치를 숫자나 시장의 논리로 측정하지 않았다. 문화의 진정한 힘은 얼마나 많은 팬을 모았느냐가 아니라, 그 문화가 사람의 삶을 바꾸고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게 만들었는가에 달려 있다. 백범이 말한 아름다움은 ‘세계에서 가장 잘 팔리는 나라’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감동을 주는 나라’였다. 그의 문화관은 시장의 논리가 아니라 감동의 윤리였다. 문화의 힘은 배타적 우월감이 아니라 공감과 화해의 힘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김구가 말한 ‘문화의 힘’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가. K-콘텐츠는 세계를 사로잡았지만, 동시에 자본의 논리 속에서 피로를 낳고 있지는 않은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 번쯤 되돌아봐야 한다. 백범은 문화의 품격을 강조했다. 단지 ‘보여주는 힘’이 아니라 ‘사람을 바꾸는 힘’. 유네스코가 그의 이름을 다시 부른 것은 바로 이 본질을 우리에게 되묻기 위해서일 것이다.
■우리가 가야 할 길
유네스코의 이번 결정은 우리 사회가 성장의 다음 단계를 고민해야 함을 일깨운다. 경제력과 기술력으로 국격을 세운 시대를 지나, 이제는 ‘문화의 품격’이 국가의 품위를 결정한다. AI(인공지능)가 글을 쓰고, 데이터가 세상을 움직이는 시대일수록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힘, 타인을 이해하고 세계를 공감시키는 예술과 교육의 가치가 더욱 소중해진다.
김구가 말한 ‘문화강국’은 영화나 음악의 흥행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존중, 다양성의 포용, 평화를 향한 상상력으로 세계를 감동시키는 나라를 의미했다. 유네스코가 김구를 ‘세계의 기념 인물’로 선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년은 김구 탄생 150주년이다. 기념 행사보다 중요한 것은 그 정신을 오늘의 언어로 되살리는 일이다. 그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 말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의 문화는 단지 소비되는가, 아니면 세상을 바꾸는가. 우리가 문화의 힘을 말할 때, 그 중심에 사람과 존중, 평화가 있는가.
백범 김구는 정치인이기 이전에 사상가였고, 독립운동가이면서 동시에 인문주의자였다. 그가 바란 ‘아름다운 나라’는 총칼로 지킬 수 없고 돈으로 살 수도 없는 나라였다. 오직 사람의 마음과 문화의 품격으로 완성되는 나라였다. 그의 말은 20세기의 독립운동 언어이면서, 동시에 21세기의 문화 비전이었다. 유네스코가 그를 다시 불러낸 이유는 분명하다. 그의 ‘문화의 힘’이 여전히 인류가 가야 할 길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물음은 지금 우리에게도 향한다. “우리는 과연, 김구가 꿈꾼 그 아름다운 나라를 향해 가고 있는가?”
2025-11-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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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젠슨 황 선물의 딜레마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의 통 큰 선물이 화제다. 그는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 회의 기간에 방한해 지난달 31일 한국에 26만 장의 블랙웰(Blackwell) GPU(그래픽 처리 장치) 공급 계획을 밝혔다. 향후 5년간 한국 정부와 삼성전자·SK그룹·현대차그룹·네이버클라우드에 제공한다는 것이다. 젠슨 황의 GPU 선물은 한국이 글로벌 ‘AI 제조 기지’로 도약하는 변곡점이 될 수 있다는 평가가 많다. 반면, 이 선물이 남긴 과제도 만만찮다.
■ 젠슨 황, 왜 한국에 GPU 공세?
젠슨 황이 블랙웰을 집중 공급하는 이유는 한국이 소프트웨어·제조·AI 3가지 역량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젠슨 황은 AI 기술 발전을 4단계로 분류했다. 음성 인식, 의료 영상 분석이 가능한 1단계 ‘인식형 AI’, 새로운 콘텐츠와 디자인 창작이 가능한 2단계 ‘생성형 AI’, 자율적으로 의사 결정을 내리고 목표 지향적인 행동을 취하는 3단계 ‘에이젠틱 AI’, 로봇이나 자율주행차 등 현실 세계에서 인간처럼 시각과 언어를 이해하고 물리적인 행동을 수행하는 ‘피지컬 AI’로 나뉜다. 예를 들어 기존 자동화 로봇이 기계적으로 정해진 절차만 따랐다면, 피지컬 AI 로봇은 센서, AI 모델, 제어 기술을 결합해 실시간으로 최적의 조치를 실행할 수 있다. 젠슨 황은 반도체와 제조업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을 피지컬 AI를 처음 실현할 최적의 무대로 점찍은 것이다.
엔비디아가 한국에 공급하기로 한 GPU 26만 장은 주로 피지컬 AI 분야에 활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전자·SK·현대차그룹이 ‘AI 팩토리’ 구축을 통해 반도체·자동차 생산을 효율화하고 로봇 등을 개발하겠다는 게 대표적이다. AI 팩토리는 칩·시스템·소프트웨어·모델 구조를 모두 고려하는 설비로, 넓은 개념의 인공지능 인프라를 말한다. 현대차는 자율주행·로보틱스 등 직접 산업 응용을 준비 중이다. 네이버는 공공과 기업을 대상으로 한 AI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AI 허브 클라우드’를 구축할 계획이다.
아직 초기 단계인 피지컬 AI는 제조업과 밀접하게 맞닿아 한국이 강점을 발휘할 수 있다. 제조업 중심인 한국은 피지컬 AI에 필요한 데이터를 쌓을 수 있는 산업 현장이 많다. 엔비디아의 GPU 26만 장 공급도 이러한 한국의 제조 경험과 역량에 주목한 결과라는 것이다. 엔비디아가 한국을 ‘피지컬 AI 테스트베드’로 삼았다는 분석도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4일 내년도 예산안 설명을 위한 국회 시정연설에서 “AI 3대 강국 목표 달성을 위해 총 10조 1000억 원을 편성했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가장 집중 투자할 AI 분야로 피지컬 AI를 들었다. 반도체·조선·가전 등 제조업에 피지컬 AI가 활용되면 생산 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 있다.
■ 이공계 인재의 ‘탈한국’ 조짐
젠슨 황이 GPU 26만 장을 공급하기로 하면서 한국은 AI 산업 발전을 위한 최소한의 실탄을 챙겼다는 평가다. ‘AI 3대 강국’으로의 도약도 가능하다는 장밋빛 기대감도 나온다. 하지만 국내 제조업의 ‘AI 대전환’을 이끌 인재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미국과 중국이 자본력을 앞세워 전 세계 AI 인재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상황이다.
AI 인재 확보가 시급한 상황에서 이공계 인재의 ‘한국 탈출’이 더 가팔라질 조짐을 보인다. 국내 이공계 인력 10명 중 4명은 외국으로 떠날 의향이 있거나 실제로 준비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20~30대는 10명 중 7명이 해외 이직을 원해 과학기술 인재 유출에 비상등이 켜졌다. 한국은행이 지난 3일 발표한 ‘이공계 인재 해외 유출 결정요인과 정책적 대응 방향’ 보고서를 보면, 석박사 학위를 소지하고 국내 대학·연구소·기업 등에서 근무하는 이공계 인력 1916명 중 42.9%가 “향후 3년 내 외국 이직을 고려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공계 인력이 해외 이직을 고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연봉 등 금전적 요인’(66.7%)이었다. ‘연구생태계·네트워크’(61.1%)와 ‘경력 기회 보장’(48.8%) 등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 원인은 열악한 처우와 부족한 일자리다. 실제로 이공계 연봉의 국내외 격차가 컸다. 해외 이공계 전문가는 13년차에 가장 많은 36만 6000달러를 받는데, 국내 이공계 전문가는 19년차에 가서야 최고점(12만 7000달러)을 찍었다.
한국의 이공계 인재 유출은 이미 진행 중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22년까지 해외로 떠난 이공계 인력은 총 34만 명이다. 이 중 석박사급 엘리트 인력만 9만 6000명에 달한다. 특히 AI 인재 품귀 현상이 지속되면 26만 장의 GPU를 손에 쥘 기업들도 비상에 걸릴 수밖에 없다. 고교 최상위권 인재 상당수가 의료 분야로 진학하고, 이공계 인재들 역시 더 나은 연구 환경과 경력 기회를 찾아 해외로 진출하는 게 현실이다. 젠슨 황의 선물을 받은 대한민국이 처한 딜레마다.
■ 인재 확보·독자적 기술 개발을
AI는 인재 자체가 핵심 자원이라고 한다. 미국의 구글, 메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테슬라 등은 세계 최고 수준의 AI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엄청난 연봉을 준다. 중국도 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 등을 중심으로 인재 확보 경쟁에 나서고 있다. 우리도 AI 분야에 최고 인재가 모일 수 있는 산업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인재 유출을 막지 못한다면 ‘AI 3강 도약’은 신기루에 그칠 수 있다. 국내 과학자들의 처우와 사회적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 금전적 보상 체계 혁신, 연구개발 투자 실효성 강화, 기술창업 기반 확충, 혁신 생태계 확장 등을 위해 범국가적으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또 이공계 인재들이 창업에 실패하더라도 재도전이 용이한 사회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이미 해외로 떠난 인재들이 복귀할 수 있도록 파격적인 복귀 프로그램 마련도 필요하다.
GPU 26만 장은 한국의 제조업 혁신을 가속할 귀한 선물이지만, 우리의 AI 기술 주권과 경쟁력을 약화할 함정이 될 수도 있다. 엔비디아는 칩 공급만 하지 않고 디지털 공장을 구현하는 플랫폼 ‘옴니버스’, 피지컬 AI 기술 ‘코스모스’ 등을 한국 기업들에 적용한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엔비디아가 한국 기업의 제조 공정 데이터와 표준 등을 장악하고 지배하는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국이 엔비디아의 생태계에 묶이는 기술적 족쇄가 될 수 있다는 해외 IT업계의 경고도 지나치기 힘들다. 결국, 우리가 AI 분야에서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해 글로벌 기준을 선점할 필요가 있다.
2025-11-0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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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이 소멸해야 나라가 산다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이재명 정부의 첫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전재수 의원이 취임하고 공식적인 취임 절차를 마친 7월 말께. 전 장관의 취임사를 접한 부산의 한 시인이 전 장관에게 따끔한 충고를 한마디 하고 나섰다. 전 장관은 당시 취임사에 해수부가 부산으로 ‘내려간다’는 표현을 몇 번이나 반복한 바 있다. 언어가 곧 세계관을 반영한다고 생각한 시인은 앞으로는 절대로 부산으로 내려간다거나 서울로 올라간다는 식의 표현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일침을 가했다.
이 에피소드는 이후 전 장관이 시인에게 직접 연락해 앞으로는 ‘해수부가 부산으로 이전한다’는 표현으로 통일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하지만 해프닝 같아 보이는 이 에피소드에는 시인의 생각처럼 오랫동안 굳어 금강석처럼 단단해진 우리 사회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박혀 있다. 바로 철저한 중앙 중심적 사고다.
■지방, 그 공고함
한국인들이 중국을 비판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이 바로 지나친 중국 중심 사고다. 나라 이름부터 가운데 중(中)을 쓸 정도로 세상의 중심이 자신들이라 여김으로써 여타 국가들을 변방이라 치부한다는 것이다. 그런 한국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도 지나친 서울 중심 사고에 젖어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은 서울을 중앙으로 인식하고 서울 이외의 지역은 모두 지방이라는 명칭으로 불러왔다. 최근 들어 서울과 경기도 권역을 묶어 수도권이라 부르며 수도권 밖 지역을 지방이라 여기는 정도의 변화만 있었을 뿐이다.
‘지방(地方)’이라는 용어는 한자어로서 ‘어떤 방향의 땅’ 정도로 풀이할 수 있으며 특정 공간 영역을 의미할 뿐이다. 이것이 서울 이외의 지역을 일컫기 시작한 것은 전국을 팔도의 행정구역으로 나누며 구분하던 고려시대부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 서울 밖 방향의 땅을 일컫던 용어는 점차 중앙을 의미하는 서울에 비해 위계상 아래 혹은 주변적 의미를 지닌 용어로 변질돼 간다. 용어의 변질은 ‘서울 영전, 지방 좌천’ 등의 뜻으로 불리며 더 공고하게 가속화했다. 지방으로 가는 것을 주변으로 쫓겨나는 것쯤으로 여기는 인식이 공고해진 사회에서 지방의 인구유출이 일어나지 않을 재간이 있을까.
■지역이면 어떤가
이 같은 현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뜻 있는 ‘지방인’들은 일단 이 ‘지방’이라는 용어부터 뜯어고치자고 팔을 걷고 나섰다. 2016년엔 전국의 시장·도지사들이 모여 국회 총선 공약으로 현행 특별지방행정기관에 사용하는 ‘지방’ 명칭의 삭제를 포함시켜 달라고 목소리를 높인 바 있다. 부산지방경찰청은 부산경찰청이라 부르고 부산지방노동청도 부산노동청으로 부르자는 것이다. 이후 일부 반영이 되긴 했지만 아직도 지방이라는 명칭은 곳곳에서 부지기수로 발견된다. 지방의회, 지방자치단체, 지방공무원, 지방세, 지방공기업 등등….
지방은 사실 서울을 포함하는 명칭이다. 지방선거 실시 지역에 서울이 포함되는 사실만 미뤄 보더라도 서울은 분명히 행정구역상으로 지방의 한 단위다. 그럼에도 서울은 마치 지방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건 ‘지방’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오용돼 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겠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지방이라는 표현 대신에 ‘지역’이라는 표현을 쓰자는 주장도 한다. 지방이라는 표현을 일거에 없애지 못한다면 대안으로 지역으로 바꿔도 무방할 듯하다.
■세계관의 전복
사실 서울에 간다고 할 때 상경(上京)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방위상으로 서울이 대부분의 지역보다 북쪽에 있기에 그렇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방위상 북쪽을 위로 보는 개념이 왕조시대 세계관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동양 철학에서 북쪽은 천자나 왕의 자리가 있는 방향이다(북한 쪽에서 보면 임금이 살고 있는 곳이 더 높은 곳이기에 서울이 남쪽에 있음에도 곧 북쪽이라 여겼을 터이다). 좌청룡 우백호를 얘기할 때 좌가 동쪽, 우가 서쪽인 것도 왕의 자리인 북쪽에서 남쪽을 내려다 봤을 때라야 이해가 가능한 이유다. 이 때문에 아예 방위 자체를 뒤집는 사고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박근혜 정부 시절 해양수산부에 내걸었던 거꾸로 된 세계지도다. 최근에는 한국해양재단이 서울 도시철도 광화문역에 거꾸로 된 세계지도를 내걸어 놓기도 했다. 김태호 전 경남도지사도 도지사 근무 시절 집무실에 거꾸로 된 한반도 지도를 걸어놓고 ‘생각을 달리하면 미래가 보인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강조한 적도 있었다. 기존 메르카토르 도법 지도의 위아래를 바꾼 이 지도들을 보노라면 서울로 가는 것을 상경이라 하는 것이 왜 왕조시대 세계관인지를 금세 깨닫게 된다.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은 한국인의 DNA에 새겨져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공고하다. 헌법재판소가 2004년 신행정수도법 위헌 확인 결정에서 ‘관습헌법’이라는 해괴한 개념을 들이대며 한국의 수도는 헌법에 명시돼 있지 않아도 관습적으로 서울이었기에 변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을 정도이니 그 공고함은 비길 데가 없다. 하지만 수도권 과밀화와 비수도권 소멸화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는 지금, 그 세계관은 어떤 식으로든 극복해야만 한다. 그 시작은 가장 손쉽게 실현할 수 있는 ‘지방’이라는 용어의 소멸에서부터여야 하지 않을까 한다.
2025-10-25 [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