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산업은행 부산 이전, 페스티나 렌테
정현민 부산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전 부산시 행정부시장
산은 이전 위한 개정법 국회서 낮잠
균형발전에 찬물, 부울경 주민 실망
부산 상공계 등 국민동의청원 나서
국회, 빨리 처리해 실기하지 않아야
지역경제 활성화에 지렛대 역할을
‘천천히 서둘러라’라는 뜻의 ‘페스티나 렌테’(Festina Lente)는 로마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일생 좌우명이다. 중요한 정책은 너무 서두르면 졸속이 되고, 너무 늦추면 성공에 결정적인 순간을 실기한다. 필자는 30여 년의 공직생활 중 가장 관심을 가졌던 정책분야가 국가균형발전이었다. 이 문제는 인구감소와 더불어 대한민국의 존망이 걸린 중차대한 정책인 만큼 참으로 신중하게 준비하되, 서둘러 실행해야 하는 난제 중 난제이다.
국가균형발전이 성공하려면 지역에 기관과 자원을 나누어 주는 분산정책 수준을 넘어 지역의 혁신성장을 견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기업금융, 투자금융, 혁신성장금융 그리고 국제금융 등 실물경제 발전을 토털 패키지로 지원하는 한국산업은행의 부산 이전 정책은 침체일로에 있는 지역경제의 새로운 혁신성장 모멘텀을 창출하고, 국가균형발전을 일으키는 지렛대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미 2년 전에 정부는 산업은행 부산 이전 효과에 대한 용역을 마쳤고, 균형발전위원회 심의를 거쳐 부산 이전 공공기관으로 결정한다는 내용을 담은 ‘한국산업은행 이전 공공기관 지정 고시문’도 공표하였다. 정부가 할 수 있는 행정조치를 완료한 만큼 빠르게 실행하는 단계만 남았다. 그러나 본점 위치를 ‘서울특별시’에서 ‘부산광역시’로 불과 다섯 글자만 바꾸면 되는 산업은행법 개정안은 21대에 이어 22대 국회에서도 심사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800만 부산·울산·경남 주민들의 실망과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다. 더 이상 국회에만 이 문제의 처리를 맡겨둬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상공계를 중심으로 최근 조속한 산은법 개정을 촉구하는 ‘국민동의청원’이라는 실천 행동에 나섰던 것이다.
산업은행 부산 이전은 지역 이슈를 넘어 국가균형발전 차원에서 그동안 추진이 지지부진하던 2차 공공기관 지방이전 논의에 본격적인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될 것으로 기대를 받아왔다. 2019년 국가균형발전위원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2차 공공기관 지방이전 계획은 2022년 정부의 국정과제로 포함되었지만 이후 수도권의 반대 여론과 일부 공공기관의 내부 반발로 아직도 구체적인 이전 계획조차 발표되지 못한 상태다.
이로 인해 지방소멸은 점점 가속화되고, 지방경제 활성화와 수도권 집중 해소를 위한 정부의 정책적 의지는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 공공기관 이전을 통한 국가균형발전은 ‘수도권은 폭발 걱정, 지방은 소멸 걱정’ 현상을 해소하는 데 정부가 쓸 수 있는 가장 가시적이고 실효성 있는 정책 수단으로, 과거 노무현 정부의 성공적인 체감 정책으로 평가된다.
30일 내에 5만 명 이상이 본인 인증 절차를 거쳐 동의해야 성립되는 이번 청원은 부울경 지역 주민들의 뜨거운 관심과 지역 경제계를 비롯한 유관기관들의 참여 속에 21일 만에 5만 5284명이 동의해 목표를 초과 달성하였다. 이는 산업은행 부산 이전이 단순한 공공기관 이전을 넘어 국가 생존이 걸린 국가균형발전의 중차대한 지렛대 정책임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현재 국회에는 산업은행법 개정안 외에도 농협중앙회를 호남으로 이전하는 내용의 법 개정안도 발의되어 있다. 많은 지자체들이 침체 늪에 빠져있는 지방경제를 위해 혁신성장의 모멘텀을 찾고자 하는 절박함으로 2차 금융 공공기관 지방이전에 목을 매고 있다. 특히 부산은 광역시로는 처음으로 소멸위험지역에 포함된 만큼 비수도권 지역들과 연대하여 산업은행 부산 이전은 물론 2차 금융 공공기관 지방이전의 물꼬를 터 나갈 필요가 있다.
미국, 독일, 중국 등 우리의 경쟁 국가들이 제조업 르네상스를 부르짖고 있는 지금, 동남권 산업벨트는 여전히 대한민국 실물경제의 토대라 할 수 있다. 동남권의 신산업 육성과 소부장 산업 스케일 업 그리고 금융중심지 활성화와 혁신 벤처기업에 대한 정책금융 지원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을 산업은행의 부산 이전에 대해 국회는 우물쭈물 고민할 때가 아니다.
모든 일은 그 시기가 있다. 국회는 산업은행법 개정안을 빛보다 빠르게 처리하고 지역경제를 살리는 데 바람처럼 세게 행동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국회가 그 존재의 리더십을 보여줘야 할 때이다. 동남권 800만 주민들은 국회의 현명한 응답을 예의주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