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레일에 T를 더하면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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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진 TV총괄부장

미국 소도시 컬럼비아의 ‘MKT 트레일’
폐선 부지 14km 활용해 도시 핏줄로
부산 경부선 지하화 사업에 참고할 만
300만 시민 뜻 모아 최우선 추진해야

‘50TH WEDDING ANNIVERSARY, JUNE 8 1996’(50번째 결혼기념일, 1996년 6월 8일). 미국 미주리주에 있는 소도시 컬럼비아의 한 벤치에 적힌 문구다. 사연의 주인공은 마을의 토박이 리드(Reid) 할아버지·할머니 부부. 해외연수 중이던 지난해 어느 봄날, 낡은 나무 벤치 등받이에 쓰인 글귀를 만났다. 그 아래엔 더 선명한 한 줄이 추가돼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70주년, 2016년 6월 8일’. 미국판 백년해로 사연만큼이나 눈길을 끈 건 벤치가 설치된 장소 ‘MKT 트레일’이다. 컬럼비아 주민들이 매일같이 이용하는 이 산책로는 원래 같은 이름의 철도회사가 운영하던 기찻길이었다.

컬럼비아의 자랑 MKT 트레일은 미국에서 폐선 철로를 산책로와 자전거길로 전환하는 정책, 이른바 ‘레일스 투 트레일스(Rails to Trails)’의 선도 프로젝트로 추진됐다. 이름과 달리 이 프로젝트는 ‘레일(Rail)’에 알파벳 ‘T’ 하나 더하는 것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1978년 MKT 철로가 폐선하자 컬럼비아시는 토지 소유주를 상대로 지난한 협상과 법적 분쟁을 이어가며 철도 길을 조금씩 사들였다. 1982년 우선 일부 구간만 산책로를 개통했고, 이후 10년이 흘러 지금의 MKT 트레일이 완성됐다. 지구 반대편 미국의 산책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내 고장의 모습이 눈에 밟혀서다. 부산에는 한 세기 넘도록 도시 한가운데를 단절시킨 철길이 있다. 1905년 개통한 ‘경부선’이다. 최근 닻을 올린 민선 9기 전재수호는 인수위 백서에 93개 추진과제 중 하나로 ‘경부선 지하화 및 지상부 그린웨이 조성’ 공약을 담았다. 기존 철로를 지하화하고 상부를 공원화하는 내용이 골자다. 과연 100년 묵은 잿빛 기찻길이 녹색 산책길로 변신할 수 있을까.

경부선 지하화 공약은 8년 전, 민선 7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오거돈 당선인 인수위는 일명 ‘철도재생 뉴딜사업’라는 이름으로 부산진역부터 구포역까지 경부선 13.1km 구간을 땅속으로 집어넣겠다는 청사진을 내놨다. 철도 지하화로 생긴 지상 공간은 공원으로 조성하고, 철길 주변 낙후 지역은 광범위한 도시재생 사업을 추진한다는 복안이었다. 2027년까지 사업을 완공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이후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몇 차례 수정을 거쳤다. 그러다 박형준 시장 시절인 지난해, 부산역과 부산진역 사이 2.8km 구간이 국토부 ‘철도 지하화 통합개발 선도사업’에 선정되며 비로소 추진 동력이 생겼다. 하지만 계획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지하화’라 부르기 힘든 수준이다. 기존 철도 위에 인공지반을 조성해 지붕처럼 덮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에 이번 민선 9기 인수위는 ‘무늬만 지하화’인 인공지반 방식이 또 다른 장벽이 될 수 있다며 사업 방향 재검토를 제안했다. 아울러 부산진역부터 가야역까지 4.6km 구간에 대한 지하화 계획을 추가로 담았다.

전재수 시장은 8년 전 밑그림에 그쳤던 계획의 첫 삽을 뜰 수 있을까. 가장 큰 걸림돌은 막대한 사업비다. 철도 지하화를 통한 도시재생 성공 사례로 꼽히는 서울 ‘경의선 숲길’의 경우 가좌역과 용산역 사이 6.3km 구간을 지하화하는 데만 국비 4500억 원이 들어갔다. 주머니 사정이 훨씬 열악한 부산으로선 국가 지원 없이 사업 추진이 불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국비 확보를 위해 지금부터 시민 목소리를 하나로 모아내고, 면밀한 실행 전략을 세워야 하는 이유다. 수 km에 달하는 철로를 걷어내고 공원으로 재탄생시킨다는 계획은 일견 북항 돔구장보다 더 먼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디서나 살기 좋은 균형성장 도시’ ‘모두가 건강한 시민행복 도시’ ‘미래를 열어가는 혁신경제 도시’ 등 민선 9기의 도시 목표를 고려하면 최우선 순위로 놓아 마땅한 과제다.

앞서 소개한 MKT 트레일은 반세기 가까이 도시의 핏줄 역할을 해오고 있다. 트레일 양쪽, 모세혈관처럼 뻗은 샛길을 통해 시민들은 앞마당처럼 산책로를 오간다. 걷는 이, 뛰는 이, 페달을 밟는 이가 뿜은 땀과 노폐물을 떠안고, 신선한 산소와 에너지를 불어 넣는 ‘정맥’이다. 공교롭게도 부산역에서 구포역까지 경부선 길이가 MKT 트레일과 비슷하다. 고작 인구 13만 도시의 산책로를 300만 부산 시민이 못 가질 이유가 없다. 철로를 걷어낸 자리에 얼마를 들여 무엇으로 채울지는 시민과 함께 고민하면 된다. MKT 트레일처럼 자연의 흙길로 비워둔 채, 간간이 쉬어갈 의자와 음수대 정도면 족하다. 리드 할아버지·할머니 같은 시민 기부금으로 시설물을 갖추면 예산 절감과 참여 행정이란 ‘왕복 티켓’을 잡을 수 있다. 단절에서 연결의 길로 거듭나는 경부선. 그 길 위를 걸으며 백년해로한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 BTS 지민·정국의 인사말이 담긴 벤치를 보고 싶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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