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다시 등장한 '명백한 운명'론의 광풍
정광용 독자여론팀장
제국주의 시대 미국 팽창주의 이론
취임사서 거론… 영토 확장 의지 밝혀
베네수엘라·이란 침공에 세계 불안
무모한 행보에 경제 생태계 불투명
지난 4일 85만 발의 화려한 불꽃이 미국 워싱턴DC 밤하늘을 뒤덮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베네수엘라를 보라. 이란을 보라. 우리는 그들의 군대를 궤멸시켰다”며 특유의 자화자찬을 쏟아냈다. 미국 건국 250주년을 기념한 자축 행사의 풍경이다. 85만 발의 폭죽은 기네스북에 오를 양이다.
같은 시각 지구 반대편 이란의 테헤란에서는 미국·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숨진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전 최고지도자의 장례식이 열렸다. 검은 옷을 입은 수천만 이란인은 눈물을 흘리며 피의 복수를 다짐했다. 이 극과 극의 장면에 세계 각국의 시선이 모아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취임사에서 “미국은 다시 영토를 확장할 것이며, 우리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을 추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명백한 운명’은 1845년 언론인 존 오설리번이 제시한 개념이다. 미국인이 북미 대륙을 개척하고 자유와 문명을 확장할 사명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주장이다. 백인 문명과 영토 확장이 하나님이 부여한 성스러운 권리라는 것이다.
명백한 운명은 미 팽창주의의 이론적 토대가 됐다. 아전인수식 이론을 근거로 미국은 야금야금 영토를 넓혀 나갔다. 특히 미국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은 이 명백한 운명론의 상징적 인물로 꼽힌다. 그는 ‘인디언 이주법’을 통과시킨 뒤 원주민 부족들을 미시시피강 서쪽으로 몰아냈다. 원주민들은 8000km가 넘는 추방길에 내몰리며 허기와 질병으로 쓰러져 갔다. 이 지옥 같은 행군 여정을 ‘눈물의 길(Trail of Tears)’이라 일컫는데, 당시 1만 5000명의 원주민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잭슨 대통령은 문제적 인물이다. 어린시절 부모를 잃고 열세 살의 나이에 미국 독립전쟁의 연락병 역할을 수행하다 영국군에 붙잡히기도 했다. 공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법률사무소에서 보조생활을 하며 익힌 지식으로 변호사가 됐다. 부동산 투자로 거부가 돼 300여 명에 달하는 노예도 부렸다. 아내의 명예를 지킨다며 ‘결투’를 신청해 상대를 죽이기도 했다.
비엘리트이면서 거칠고 감정적인 인물이 잭슨이다. 또한 백인우월주의의 상징과 같은 존재다. 트럼프 대통령과 비슷한 측면이 있어서 그런지, 트럼프가 가장 존경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집무실에 잭슨의 초상화를 걸어둘 정도로 그를 흠모한다.
또 한 명의 대통령, 윌링엄 매킨리도 트럼프가 롤모델로 삼는 대통령이다. 그는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해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을 점령하며 미국을 제국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알래스카 최고봉을 ‘매킨리산’으로 되돌려 놓은 것은 매킨리의 팽창주의에 대한 계승의 의미가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2015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매킨리산을 원주민의 명칭 ‘디날리산’으로 바꿨으나 다시 뒤집어 버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잭슨과 매킨리를 추종하며 명백한 운명론을 꺼내든 것은 제국주의시대 팽창주의를 재현하겠다는 의지에 다름 아니다. 그는 그린란드 병합 의사를 공공연히 밝혔고, 캐나다를 미국의 51번째 주로 삼겠다고 호언했다. 파나마 운하 통제권을 회복하겠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았다. 올해 벽두엔 기어코 베네수엘라를 침공해 정권을 붕괴시키고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미국으로 압송했다. 지난 2월엔 이란과 협상 도중에 난데없이 이스라엘과 함께 이란을 선제 타격하며 중동을 전쟁의 불구덩이로 몰아넣었다.
얼마 전 부산일보CEO아카데미 강의에서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현 세계를 ‘강대국 국제 정치’란 말로 정의했다. 그는 “소련 붕괴 이후 유일한 초강대국이던 미국의 패권이 저물어가고 당분간 미국, 중국, 러시아 세 나라의 입맛에 맞게 세계 질서가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한 교수의 말대로 유일 패권국 미국의 지위와 영향력은 예전만 못하다. 트럼프의 좌충우돌 행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구축한 국제법 존중, 평화적 분쟁 해결, 식민주의 종식이라는 보편적 세계 질서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다.
건국 250주년 기념식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대이란 전쟁 승리를 외쳤지만,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싸고 여전히 포탄이 오가고 있다. 철 지난 제국주의 시대의 낡은 이론을 꺼내 들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를 소리쳐 봐도 상처뿐인 ‘피로스의 승리’만 남을 지 모른다. 그런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을 보는 우리의 시선은 불안하기만 하다. 종전이 확정돼도 트럼프 대통령이 또 어떤 행보를 보일지 알 수 없고, 예전만 못하다 해도 여전히 세계 경제 생태계를 좌지우지하는 힘을 가진 나라가 미국이기 때문이다.
정광용 기자 kyjeo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