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천년 토성' 기장고읍성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김종한 경성대학교 경제금융물류학부 교수
매주 주말 아침이면 어김없이 빗자루를 들고 집 앞 기장고읍성 맨발 걷기 길을 나선다. 주말에 새벽 공기를 가르며 이 길을 쓸다 보면 이곳을 찾는 익숙한 등산객들과 이웃 주민들이 고마움의 인사를 건네고 정겨운 덕담을 나눈다.
기장향교를 부드럽게 감싸안은 채 이어진 이 옛 성곽길은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걸쳐 쌓은, 장장 1100년의 역사를 품은 ‘천년 토성’이다. 이 길을 걷다 보면 시공간의 벽을 초월하여 고대 기장 읍내에 살았던 선조들의 발길과 오늘날 우리의 발길이 물리적으로 맞닿아 있다는 깊은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기장고읍성은 부산지역 지방행정의 원초적 기원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천년 이상의 상징적 유적일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보기 드문 ‘고려 이전 지방 읍치(邑治) 토성’이라는 특별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성의 존재를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대다수 시민은 그저 기장읍 동부리에 석성으로 축조된 ‘기장읍성’만을 유일한 역사적 유적으로 기억할 뿐이다. 현재 지자체에서는 기장읍성의 복원 사업에 막대한 행정력과 예산을 집중적으로 쏟아붓느라, 미처 기장읍 교리의 고읍성까지는 세심하게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고읍성 현장에는 그저 표지판 하나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을 뿐 사실상 방치 수준에 머물러 있다. 다행히 이 고대의 성벽이 순수한 황토로 축조된 덕분에 일부 구간이 자연스럽게 맨발 걷기 길로 애용되며 역사 속에서 겨우 숨을 쉬고 있다. 필자 역시 매일 이곳을 걸으며 오랜 풍화 속에 깨어진 채 흙 속에 파묻혀 있는 옛 기와나 토기 조각들을 발끝으로 마주할 때마다 선조들의 거친 숨결을 체감하곤 한다. 가벼운 산책과 사색을 즐기기에는 나에게 이보다 더 훌륭하고 멋진 유산이 없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길을 걸을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는 늘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과연 우리 조상들의 땀방울이 서려 있는 소중한 역사 유적을 이렇게 함부로 밟고 지나가도 되는가라’는 도덕적 부채감 때문이다. 전면 복원은 당장 요원해 보이는 것이 현실이지만, 예산 타령만 하며 이 귀중한 현장을 언제까지나 이대로 방치해 둘 수는 없다.
이제 부산시와 기장군은 지금 당장 우리의 작은 의지와 세심한 행정력만으로도 실천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을 고민해야 마땅하다. 그 해법은 맨발 걷기 길가에 아무렇게나 나뒹굴며 행인들의 무심한 발길에 치이고 깨어져 가는 옛 기와 조각과 토기 파편들을 정성스럽게 수습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렇게 모인 역사의 흔적들을 길 한편에 정돈된 형태로 보존하고, 오가는 이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소박한 야외 전시대를 길옆에 마련하는 디테일한 행정이 시급하다.
나아가 이 길을 전국에서 가장 특색 있고 매력적인 ‘천년 토성 위를 걷는 역사문화 맨발 길’로 브랜드화하여 정식 조성할 것을 제안한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지금 이대로 천년 기왓장을 디디며 걸어가는 행복감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과거의 소중한 역사적 파편들을 수집하여 길옆에 단정하게 전시하고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작은 실천, 그것이야말로 예산의 한계만을 핑계 대며 뒷짐 지고 있는 관행에서 벗어나 세심한 행정의 디테일로 지역 문화유산을 대하는 로컬의 진정한 품격이다. 거창한 토목 복원보다, 발밑에 흩어진 역사적 흔적들을 귀하게 모아 시민의 일상 및 건강 생활 속으로 고읍성을 온전히 복원해 내는 작은 정성이야말로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진정한 역사 보존의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