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들불의 시간, 밀양아리랑
황대욱 신경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사회복지학과장
‘밀양아리랑’은 들판과 강바람이 빚어낸 노래다. 정선아리랑이 첩첩한 산맥의 깊은 울림이라면, 밀양아리랑은 넓은 들녘과 사람 사는 마을의 숨결 속에서 태어난 노래에 가깝다. 빠르고 경쾌한 가락은 밀양강 물길처럼 힘차게 흐르고, 흥을 돋우는 장단 속에는 삶의 고단함마저 웃음으로 견뎌내려 했던 영남 사람들의 기질이 스며 있다. 그래서 밀양아리랑은 단순히 흥겨운 민요가 아니다. 웃음 속에서도 삶을 놓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의 생활 철학이 담긴 노래다.
필자 역시 밀양이라는 공간을 떠올리면 먼저 강과 들판의 풍경이 생각난다. 아침 안개가 밀양강 위로 천천히 번지고, 넓은 들녘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던 모습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산골의 적막과는 다른, 사람의 온기가 살아 있는 풍경이었다. 장터로 향하는 발걸음과 논두렁 사이의 웃음소리, 그리고 저녁 무렵 마을 어귀에서 들려오던 노랫가락은 삶이 힘겨워도 끝내 무너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마음처럼 느껴졌다.
밀양의 삶은 오래전부터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며 이어져 왔다.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물길은 사람과 살림살이를 모이게 했고, 장터와 마을에는 늘 사람 사는 활기가 넘쳤다. 하지만 흥겨움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난과 이별, 긴 노동의 시간 또한 이 땅 사람들의 삶 속에 함께 존재했다. 밀양아리랑은 바로 그런 현실 위에서 태어난 노래다. 힘겨운 삶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 불렀고, 서로의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 함께 가락을 이어갔다.
우리는 흔히 밀양아리랑을 흥의 노래로 기억한다. 실제로 “날 좀 보소”로 시작되는 익숙한 가락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쾌하고 정겨운 정서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그 안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단순한 흥 이상의 감정이 스며 있다. 웃으며 노래하지만, 그 웃음 속에는 삶의 애환과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함께 담겨 있다. 흥은 슬픔의 반대가 아니라, 슬픔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낸 삶의 방식이었던 셈이다.
특히 밀양아리랑은 혼자 부를 때보다 여럿이 함께 부를 때 더욱 살아난다. 장터와 마을 잔치, 들일과 놀이판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목소리를 맞추며 가락을 이어갔다. 누군가 한 소절을 시작하면 다른 이들이 뒤따라 흥을 더하고, 개인의 외로움은 공동체의 웃음 속으로 스며든다. 함께 노래하는 동안 사람들은 서로의 삶을 견디게 했고, 노래는 공동체를 이어주는 힘이 되었다. 밀양의 골목과 장터마다 아리랑이 오래도록 이어져 온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오늘날 밀양의 풍경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오래된 시장은 하나둘 사라지고, 사람 냄새 가득하던 골목과 마을의 정취도 점점 옅어지고 있다. 삶은 편리해졌지만 서로의 안부를 묻고 함께 어울리던 공동체의 시간은 예전 같지 않다. 그럴수록 오래된 민요가 품고 있는 삶의 기억은 오히려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밀양아리랑은 단순히 흥을 돋우는 노래가 아니다. 삶의 무게를 서로의 목소리로 견디게 만든 노래다. 밀양강 바람을 따라 오래도록 흘러온 그 익숙한 가락은 오늘도 우리에게 조용히 말하고 있다. 사람은 결국 혼자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의 삶을 함께 부르며 견뎌내는 존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