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칼럼] 혐오의 시대, 윤리는 어디서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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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현 부산대 국어교육과 강사

지난 7월 중순 무렵 부산의 한 고등학교에서 주제탐구 수업을 진행했다. 1~2학년 학생들 각자가 자신의 관심 분야나 진로와 관련한 주제를 선정해 탐구 활동을 수행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수업이다. 인문·사회 분야에 관심을 둔 20여 명이 선정한 주제는 나름대로 진지한 고민과 궁금증을 담고 있었다. 학생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하나씩 읽어가는 가운데 특별히 눈길을 사로잡는 글이 있었다. 바로, 윤리 수업을 통해 ‘혐오’를 어떻게 근절할 수 있을지를 다룬 글이었다. 뜻밖이었다. 고등학교에서 만나게 되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주제였기 때문이다.

혐오의 언어, 놀이처럼 소비 현상 지속

디지털 공간 통해 전파되며 일상 잠식

예전엔 특정 대상 조롱 용인되지 않아

금기시하는 윤리적 감각이 옅어진 탓

망각된 역사·개별적 삶의 기억 복원을

타인의 얼굴 마주하려는 용기 지녀야

수업이 이루어진 시기는 고교생 야구대회에서 불현듯 울려 퍼진 혐오의 목소리가 온 사회를 들끓게 만든 직후였다. 학생들 사이에서 혐오가 일상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공공연하게 발화될 수 있다는 사실은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혐오에 휩싸인 교실의 실태를 조명한 보도와 방송이 각종 매체를 통해 전해졌다. 놀이가 된 혐오는, 그것을 놀이‘쯤’으로 치부했던 우리 사회의 방만하고 무책임한 태도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주지하듯이, 교실 현장에서 혐오가 문제시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학생들이 ‘일베’를 비롯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양산되는 혐오의 말들을 일종의 놀이처럼 소비하는 현상은 꽤 오랜 기간 지속되어 왔다. 주위에서 전해지는 현장의 실상은 매체가 전하는 소식보다 처참하다. 교실 책상마다 비극적으로 생을 마친 대통령의 이름이 거칠게 새겨져 있고, ‘일베어’는 교사를 도발하고 희롱하는 말로 사용된다. 커뮤니티에 직접 접속하지 않더라도, 학생들의 주요한 생활세계인 SNS와 게임 등의 디지털 공간은 혐오의 언어를 빠르게 전파하며 일상을 잠식하고 있다. 디지털 공간에 접속하는 빈도와 시간이 증가하는 만큼, 혐오는 빠르고 광범하게 퍼져 나간다.

문득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보면, 누군가 일베어를 쓰는 것으로 의심만 되어도 다른 친구들로부터 숱한 눈총을 맞았다. 그것이 호기심이건, 놀이이건 특정 대상을 조롱하고 희화화하는 것은 쉽사리 용인될 수 없는 잘못된 행동이라는 인식이 또래 집단 내에서 공유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한 인식은 타인에 대한 윤리적 감각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정은 다르다. 혐오를 금기시하는 윤리적 감각은 옅어질 대로 옅어졌다. 디지털 세계 속 밈과 숏폼 영상, 노래 등은 어느새 혐오를 놀이의 형태로 뒤바꿔 놓았다. 혐오가 유희적 놀이로 재배치되는 순간 윤리적 잣대는 힘을 잃는다.

이러한 혐오의 놀이화는 혐오의 대상을 실재 세계로부터 ‘탈맥락화’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대상을 그들이 속해 있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삶의 맥락으로부터 떼어내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가 겪어 왔던 숱한 비극적 사건은 물론 그 속에 존재했던 개개인의 삶의 궤적들이 사라질 때, 혐오는 윤리적 잣대가 개입하기 힘든 놀이가 되고 만다. 예컨대, 1980년 5월 목숨을 내던지며 광주를 지켰던 수많은 시민의 삶과 희생이 비가시화될 때, 역사적 비극은 ‘탱크’라는 조롱 섞인 밈으로 치환되어 버린다. 역사적 사건뿐 아니라 인물, 지역, 젠더를 대상으로 한 혐오가 작동하는 방식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이러한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적 논의도 잇따르고 있다. 지난달 부산에서 열린 국가교육위원회 ‘학교시민교육 국가기본원칙’ 토론회에서 차정인 위원장은 “정치 사회의 쟁점을 주제로 삼아 논쟁적으로 다루는 교과수업은 학생의 사고력과 자율적 판단력을 기를 것”이라 전망했다. 학교가 활발하고 건전한 토론의 장으로서 시민교육의 거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무도 강파르고 뒤틀린 오늘날 학교 현실을 점진적으로나마 뒤바꿀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관건은 윤리를 회복하는 데 있다. 놀이의 의장을 걸친 혐오가 대상으로부터 삶의 구체성을 지우는 탈맥락화를 통해 교실 깊숙이 침투했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은폐되고 망각된 역사와 개별적 삶의 기억을 복원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윤리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는 데서 윤리가 시작된다고 말했다. 그것은 타인의 삶의 궤적과 맥락, 그리고 그 속에 자리한 숱한 마음과 직접 대면하는 것이다. ‘탱크’라는 폭압적 기호의 자리에 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희생했던 이들의 기억이 오롯이 들어찰 때, 윤리는 비로소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혐오로 가득한 시대를 지나며, 타자를 향한 윤리를 기대하기는 요원할지 모른다. 불안함과 무력함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우연히 마주한 고등학생의 보고서가 그토록 새삼스러웠던 까닭도 바로 거기 있었다. 그러나 그 작은 글에서 발견했던 것은 이토록이나 암울한 시대를 의연히 건너가려는 의지, 그리고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려는 용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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