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유럽의 폭염은 어째서 조롱거리가 되었나
이동수 세대정치연구소 대표 공모 칼럼니스트
이렇게 시원한 여름이 있었나 싶다. 7월이 됐는데도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분다. 한낮에도 그늘에 있으면 그리 덥지 않다. 기상청은 지난달 전국 폭염일수가 0.6일로, 평년(0.7일)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밝혔다. 몇 년 동안 우리를 괴롭혔던 6월 열대야는 자취를 감췄다.
유럽은 정반대다. 대륙 전체가 북부 아프리카에서 유입된 뜨거운 공기에 갇히며 폭염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달 스페인과 프랑스에선 폭염으로 3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폴란드와 체코는 기후가 서늘한 지역에 있음에도 최고기온이 한때 40도를 넘겼다. 북유럽 국가 덴마크도 일부 지역이 37도를 기록했다고 하니, 유럽을 데우고 있는 ‘오메가 열돔’의 위력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여름 날씨 선선해 에어컨 보급 낮고
지구온난화 등 기후 위기 의제 주도
에너지 사용량 많은 제조업 국가 비판
최근 기록적 폭염에 냉방기기 구입 붐
AI 데이터센터 건립 위해 탈원전 철회
일방적 잣대 강요하는 오만 경계해야
기후 위기는 지구적 재앙이다. 유럽에 닥친 폭염은 다른 대륙 사람들에게도 위기감을 줄 법 하다. 그런데 폭염에 속수무책인 유럽의 현 상황은 조롱거리가 된 듯 보인다. 그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소재가 바로 에어컨이다. 유럽의 가정용 에어컨 보급률이 매우 낮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프랑스가 24% 수준이고, 독일과 영국은 10% 이하인 걸로 전해진다. 몽골 정도 되는 높은 위도에 서안 해양성 기후까지 더해지며 여름엔 선선하고 겨울엔 온화한 날씨가 지속됐던 덕분이다. 그런데 근래 들어 폭염이 계속되면서 에어컨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 인터넷에서는 프랑스 파리의 한 마트에서 사람들이 냉방기기를 사기 위해 오픈런을 벌이는 사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에선 언론인·인플루언서를 중심으로 프랑스의 낮은 에어컨 보급률을 비웃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한다. 이에 오드리 풀바 파리 부시장은 “유럽 폭염은 미국의 에어컨 사용 탓”이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럽 폭염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각은 우리도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유튜브에선 “에어컨 설치 기사도 없을 텐데 설치는 할 수 있겠냐”거나 “에어컨 파는 회사 주식 사자”는 댓글이 줄을 잇는다. 현재 나타나고 있는 여론은 한 단어로 압축된다. 업보라는 것이다.
유럽은 에어컨 사용에 부정적이었다. 에어컨이 지구온난화의 주범이자 미국식 과소비의 상징이라는 이유다. 사실 유럽은 에어컨 사용뿐 아니라 기후 위기 대응과 관련한 의제들을 생산하고 주도해 왔다. 탈탄소 재생에너지 확대 기준을 정립하고 때론 강요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2022년 대선 토론 당시 언급하며 국내에도 잘 알려지게 된 RE100이 대표적이다. 2014년 영국에서 시작된 RE100은 기업이 사용하는 모든 전력을 2050년까지 전량 재생에너지로 대체하자는 캠페인이다. RE100 자체는 강제성이 없지만 하나의 지표로서 수출·공급 계약 등에 영향을 끼친다. 원전은 RE100 에너지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유럽은 전체 산업에서 서비스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그래서 재생에너지로 산업에 필요한 전기를 충당하는 게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하지만 우리처럼 제조업 비중이 높은 나라들은 재생에너지만 가지고는 산업을 돌릴 수 없다. 에너지가 많이 드는 제조업 생산기지는 아시아 국가들에 떠넘겨놓고, 원자력·화력 발전 이용을 빌미로 무역장벽을 세우는 건 사다리 걷어차기에 지나지 않는다.
나라마다 놓여 있는 기후 환경이 다르고,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 그것을 깡그리 무시하고 하나의 규범적 기준을 세운다는 건 오만이자 위선이다. 자전거는 선이고 자동차는 악인가. 절대적인 건 없다. 어떤 이들은 네덜란드의 높은 자전거 수송 분담률을 들어 우리나 미국의 자동차 이용을 비판한다. 네덜란드 기온은 연평균 10~11도로, 더워도 25도를 넘는 일이 별로 없고 추워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들처럼 봄가을이 계속되는 날씨라면 우리도 자전거 타는 인구가 늘고 그만큼 인프라도 갖춰졌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오늘날 폭염으로 신음하는 유럽에 조소를 보내는 건 이러한 반발심이 누적된 결과다.
유럽이 주도한 기후 질서는 부메랑이 되어 자신들에게 되돌아가고 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 유럽은 대대적인 탈원전에 나섰다. 부족분은 러시아에서 싼값에 천연가스를 들여와 메웠다. 그러던 중 러·우 전쟁이 발발하며 차질이 빚어졌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EU는 2022년 7월, 탄소 중립 달성을 위한 친환경 가이드라인(그린 택소노미)에 원자력과 천연가스를 포함했다. 최근엔 AI 데이터센터 확대에 따른 전력 수요까지 가세하면서 벨기에·덴마크·스웨덴·이탈리아 등 탈원전을 천명했던 국가들이 ‘탈탈원전’으로 돌아서는 중이다. 프랑스에서는 내년 4월 치러질 대선을 앞두고 에어컨 설치 확대가 주요 화두로 부상했다고 한다. 상대방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강요하는 게 얼마나 무지몽매한 일인지를 새삼 깨닫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