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금융허브 전쟁, 부산의 시간 많지 않다
이명호 부산국제금융진흥원장
국제 금융 거래 활성화 기다리면 늦어
제도 바꾸고 글로벌 시장을 끌어와야
법률·감독·세제·외환·비자 혁신 앞장
베트남 등 신흥국 명운 걸고 추격전
해양·외화 한정 특례 등 제도 개혁
지역 산업 기반 금융특구 성공 가능
세계 금융중심지의 지형이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과거 금융허브 경쟁은 뉴욕·런던·홍콩 등 오랜 시장과 제도적 기반을 축적한 도시들의 영역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는 중동과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와 아프리카의 신흥국까지 국가의 성장 전략을 걸고 국제금융센터 건설에 뛰어들고 있다.
오늘날 금융중심지는 시장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기를 기다리는 공간이 아니다. 법률·감독·세제·외환·비자·분쟁 해결 제도와 전문 서비스를 얼마나 과감하고 정교하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리는 치열한 제도 경쟁의 장이다. 후발국들은 금융 시장과 거래 기반이 부족하다는 한계를 받아들이는 대신, 차별화된 법률 체계와 감독 기구, 파격적인 세제·외환 특례를 앞세워 국제 금융 거래를 선점하려 하고 있다.
두바이 국제금융센터는 영미법 기반의 금융 구역과 독립 규제 기관, 별도 법원을 결합해 기존 금융 시장의 한계를 제도로 뛰어넘었고, 중동·아프리카·남아시아의 금융 관문으로 성장했다. 카자흐스탄의 아스타나 국제금융센터도 영미법 원칙과 독립 감독 기관, 국제 법원·중재센터·거래소를 하나의 플랫폼으로 구축했다.
우즈베키스탄 역시 타슈켄트 국제금융센터 설립을 추진하며 국제상사법원, 별도 금융 감독, 외환과 자본 송금의 자유, 장기 세제 혜택과 외국 전문 인력 특례까지 검토하고 있다. 충분한 시장 기반을 갖추지 못한 후발국조차 시장이 성장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먼저 제도를 만든 뒤 이를 바탕으로 자본과 금융기관을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베트남의 움직임은 부산에 더욱 직접적인 경고다. 베트남은 2045년 고소득 국가 진입 목표와 연계해 호찌민 국제금융센터와 다낭 역내 금융센터를 추진하고 있다. 영국 정부와 금융 산업 단체인 더시티UK(TheCityUK)의 지원 아래 금융 법규 개혁, 국제 중재, 외화 계좌, 녹색 금융, 전문 인력 비자와 금융·법률·회계 생태계를 함께 설계하고 있다. 제조업·수출·항만을 기반으로 성장한 호찌민이 무역 금융과 공급망 금융을 흡수하면 부산과 직접 경쟁할 수 있다.
이들 사례가 부산에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시장의 깊이가 얕다는 사실은 금융허브 도전을 포기할 이유가 아니라 제도 개혁을 서둘러야 할 이유다. 거래가 충분히 쌓일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거래를 끌어오기 위해 금융 법규와 감독 체계를 정비하고 외환·세제 특례, 국제 중재, 전문 인력 유치와 신속한 인허가를 하나의 패키지로 구축해야 한다. 시장의 깊이는 제도를 통해 만들어 가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부산의 금융중심지 전략도 이 관점에서 재설계돼야 한다. 지금까지 부산은 금융 시장 규모와 민간 금융기관의 부족을 반복적으로 지적해 왔지만, 이를 보완할 제도적 장치를 국가 차원의 핵심 의제로 끌어올리는 데는 충분히 적극적이지 못했다. 개별 기관 유치나 공간 조성만으로 국제 거래는 움직이지 않는다. 법률·감독·외환·세제·분쟁 해결 체계를 한 묶음으로 바꾸는 것이 정책의 중심이 돼야 한다.
그러나 제도 개혁만으로 전략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특례를 적용할 구체적인 시장과 거래가 분명하지 않으면 금융특구는 형식에 머문다. 반대로 부산의 산업적 강점만 강조하고 제도를 그대로 둔다면 관련 금융 거래는 계속 서울이나 해외에서 처리될 것이다. 따라서 부산의 제도 개혁과 해양금융 특화는 별개의 과제가 아니라 하나의 전략으로 결합해야 한다.
이 점에서 인도의 GIFT 국제금융서비스센터는 현실적인 이정표다. 인도는 뭄바이라는 기존 금융 중심지를 두고도 구자라트주에 별도의 국제금융특구를 조성했다. 자국 기업의 외화 차입, 국제 채권, 펀드, 재보험, 항공기·선박 리스가 해외에서 처리되면서 수수료와 전문 인력, 세수와 금융 정보가 유출되는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였다. 국내 금융 시장 전체를 개방하지 않고 특정 구역과 기능에 외화·비거주자 거래, 통합 감독과 세제 특례를 적용했다.
부산도 해외에서 처리되는 한국 관련 해양금융 거래를 부산으로 환류시키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한국은 세계적인 조선·해운 산업과 항만·물류 기반을 갖추고 있지만, 선박 금융과 리스, 해상 보험과 재보험, 무역 금융, 항만 프로젝트 금융, 법률·회계 서비스의 상당 부분은 해외 금융허브에서 이루어진다. 선박은 한국에서 건조하고 화물은 부산항을 통과하지만 금융 수익과 전문 서비스는 해외에 축적되는 구조다.
부산의 제도 개혁은 바로 이 해양금융 수요를 겨냥해야 한다. 비거주자와 외화 표시 선박 금융·리스, 해상 보험, 항만·물류 인프라 금융, 친환경 선박 전환 금융 등에 외환·세제·규제 특례를 적용하는 부산형 해양금융특구가 필요하다. 범정부 원스톱 조정 체계와 함께 영문 계약, 국제 중재, 해사·국제상사 분쟁 해결, 금융·법률·회계 전문 인력 유입도 지원해야 한다.
물론 처음부터 국내 금융 질서와 다른 독립적 법률·감독·조세 체계를 전면 도입하기는 어렵다. 제도 이원화와 금융 안정, 조세 형평성, 지역 특혜와 규제 차익을 둘러싼 논란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에는 해양·외화 금융이라는 명확한 기능에 한정해 특례를 적용하되, 국제 금융의 개방성을 높이는 동시에 국내 금융 시장과의 정합성과 금융 안정을 확보할 관리 체계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 이후 거래와 제도적 신뢰가 축적되면 적용 업무의 범위와 법률·감독상의 자율성을 단계적으로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부산의 선택은 제도 개혁과 해양금융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다. 해양 산업이라는 강점을 토대로 개혁의 대상과 범위를 정하고, 과감한 제도 개혁을 통해 그 산업에서 발생하는 국제 금융 거래를 부산으로 끌어오는 것이 핵심이다. 산업적 기반이 없는 금융 특구도, 제도적 뒷받침이 없는 해양금융 구상도 성공하기 어렵다.
세계 금융 도시들은 이미 시장의 부족함을 제도로 보완하며 움직이고 있다. 부산도 조선·해운·항만이라는 실물 경쟁력을 국제 금융 거래로 전환할 제도적 결단을 서둘러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부산은 서울의 축소판이 아니라 아시아 해양금융의 독자적 허브로 발전할 수 있다. 금융허브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부산의 시간은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