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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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1958~)

바다는 무얼 저리 찍어내는가

파도, 파도 밀어가며 저리 찍어내는가

푸른 하늘에 흘러가는 흰 구름

다도해 꽃밭에 피워낸 섬, 섬, 섬들

등대 불빛 서너 움큼, 파도 소리 예닐곱 장

몰려갔다가 흩어지는 어린 물고기떼 까지

빠짐없이 찍어내는 바다의 쇄

밀물에 한 쇄, 썰물에 두 쇄

쉬지 않고 찍어내는데

판판이 살아있는 개정판 찍어내는데

-시집 〈시 한 편 읽을 시간〉 (2025) 중에서

‘쇄’는 책의 내용 변화 없이 추가로 인쇄할 때마다 같은 책의 출간 횟수를 세는 단위입니다. 시인은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를 바라보며 바다가 주변의 풍경들을 인쇄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바다는 쉬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온몸으로 찍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멈추지 않는, 멈출 수 없는 이야기들. 매일 다른 파도와 다른 물살로 판판이 다른 이야기들을 살려냅니다. 그렇게 살아있는 책은 사람을 살려내기도 합니다. 가보지 못한 세계, 배우지 못한 세계를 들려주고 보여주면서 사람을 발전하게 하고 진화시킵니다.

위대한 사람 중에 책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합니다. 지식을 갖는다는 건 힘을 갖는 것. 인공지능이 대세인 지금 인간이 기계보다 나을 방법은 책뿐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건 스스로 알고 배우는 것. 순간순간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바다도 한 권의 책입니다. 신정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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