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달러는 이미 있다, 원화는 지금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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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홍열 비댁스 대표·변호사

일상에 스며든 달러 스테이블코인
'원화 코인'도 개별 서비스 실증 진행

해외선 국가 차원 생태계 구축 박차
한국도 개별 서비스 넘는 도전 시급

관광·항만 보유한 부산, 실험 최적지
'스테이블코인 결제 실증지구' 지정을

최근 글로벌 결제기업 비자(VISA)가 공개한 수치들이 눈길을 끌었다. 2026 회계연도 2분기 기준, 전 세계에서 운영되는 스테이블코인 연계 카드 프로그램이 160개를 넘어섰고, 결제 규모는 전년 동기 대비 약 200% 늘었으며, 연환산 정산 규모는 200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27조 원에 달했다. 1년 전만 해도 스테이블코인은 거래소에서 코인을 사고파는 결제 수단에 머물러 있었다. 지금은 카드를 긁는 순간, 그 뒤에서 스테이블코인이 정산을 처리하는 시대가 됐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이미 투자 자산이 아니라 결제 인프라의 한 축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원화는 어디쯤 와 있을까. 놀랍게도 그리 멀리 뒤처져 있지 않다. 셀프 사진관 포토부스 결제에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도입하는 작업, 국내 기업들이 해외에서 스테이블코인으로 받은 무역 대금을 원화로 정산하는 인프라를 구축하는 작업, 여기에 더해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비자의 카드 결제망과 연동하는 작업도 추진 중이다. 이들이 실현되면 해외 여행이나 유학 중인 국내 이용자의 현지 소비, 해외에서 활동하는 콘텐츠 창작자의 정산, 해외 법인을 둔 기업의 출장 경비 관리에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곧바로 사용할 수 있다.

세 가지 사례 모두 의미가 작지 않다. 그러나 냉정히 보면 아직 개별 기업의 실증 단계 수준이다. 포토부스에서 결제가 되고, 무역 대금이 정산되고, 카드망에 연동되는 각각의 실험은 훌륭하지만, 이 점들이 하나의 도시, 하나의 산업 생태계로 이어지지 않으면 결국 개별 서비스의 흥미로운 사례로 남을 뿐이다. 결제 인프라는 점이 아니라 면으로 존재할 때 비로소 힘을 갖는다.

이미 다른 도시들은 그 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싱가포르는 통화청(MAS) 주도의 ‘프로젝트 가디언’을 통해 채권과 펀드, 외환의 토큰화 실증을 국가 차원에서 진행하는 한편, 관광객이 스테이블코인으로 결제할 수 있는 가맹점 네트워크를 함께 넓혀 가고 있다. 두바이는 별도 가상자산규제청(VARA)을 세워 토큰화 자산과 결제 인프라를 하나의 감독 체계 아래 통합했고, 관광과 부동산, 무역 결제 전반에 스테이블코인을 끌어들이는 실험을 국가 정책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두 도시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개별 기업의 실험이 자연스럽게 쌓이기를 기다리지 않고, 도시나 국가가 먼저 판을 깔고 규칙을 정한 뒤 민간이 그 위에서 뛰게 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도시가 있다면, 단연 부산이다. 부산은 두 가지 결제 접점을 동시에 가진 드문 도시다. 하나는 관광이다. 매년 수백만 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해운대와 남포동, 크루즈 터미널을 오가며 결제를 한다. 환전 수수료 없이 원화 스테이블코인으로 즉시 결제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도시 경쟁력이 된다. 다른 하나는 해운이다. 선박 급유비, 도선료, 컨테이너 물류비처럼 국경을 넘나드는 무역 대금 정산이 부산항에서 매일 이뤄진다. 관광이라는 소액 결제와 해운이라는 대규모 정산이 한 도시 안에 공존한다는 것은, 결제 인프라를 실증하기에 이보다 좋은 조건은 찾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도전적인 실행이다. 부산이 이미 가진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라는 제도적 자산을 살려, 관광특구와 크루즈 터미널, 항만 배후 단지를 하나로 묶는 ‘스테이블코인 결제 실증지구’를 지정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지구에서는 포토부스와 같은 관광 소비 접점, 무역 정산 인프라, 비자와 같은 국제 카드망이 각자 흩어져 실험하는 대신 한자리에서 검증받도록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세 가지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우선 지자체가 관광특구 내 가맹점들을 대상으로 원화 스테이블코인 결제 시범 사업을 공모해 초기 가맹점망을 빠르게 확보하고, 둘째로 항만공사와 선사, 물류 기업이 참여하는 무역 대금 정산 실증을 병행해 대규모 결제의 신뢰성을 검증하며, 셋째로 실증에서 쌓인 데이터를 중앙정부의 디지털자산기본법 시행령 논의에 실증 근거로 제시해야 한다. 서로 다른 사업자들이 각자 만든 결제 실험을 한 도시가 하나의 생태계로 묶어 내는 시도는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은 사례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전 세계 카드망 깊숙이 들어와 있는 지금, 원화가 실물경제와 만나는 접점을 만들어 성공하기에는 시간이 그리 길게 남아 있지 않다. 결제 표준은 한 번 자리 잡으면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관광객 지갑과 항만 정산 창구에 어떤 통화가 먼저 자리를 잡느냐가, 향후 수십 년의 결제 지형을 결정할 것이다.

부산이 관광객의 손끝과 항만의 대금 정산에서 동시에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증명해 낼 수 있다면, ‘블록체인 특구’라는 이름은 비로소 간판이 아니라 실체를 갖게 될 것이다. 결제의 실험실이 되는 도시, 그것이 지금 부산이 쥘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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