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기의 미술 미학 이야기] 성백의 베를린 탁본과 분단의 기억
성백의 탁본 작업 장면, 2024 ArtsBus World Tour Project, 베를린장벽 기념공원. 작가 제공
10월 3일은 독일 통일의 날이다. 1990년 이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어진 분단은 법적으로 끝났다. 앞선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사람들은 장벽 위에 올라가 환호하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장벽이 무너졌다고 분단의 상처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헤어진 가족의 시간과 서로 다른 체제에서 살아온 기억은 하루아침에 하나가 될 수 없다.
부산의 전위 예술가 성백은 바로 그 흔적을 찾아가는 작가다. 2019년부터 유라시아를 횡단하며 거리와 벽, 맨홀 뚜껑, 총탄 자국에 종이를 대고 먹을 묻힌 솜뭉치로 두드려 탁본했다. 낡은 표면이 그의 손을 만나면 역사의 문서가 된다.
베를린에서도 그는 분단과 냉전의 흔적 앞에서 몸을 낮추고 종이를 댔다.
탁, 탁, 탁.
오래전에 멎은 총성 자리에서 또 다른 소리가 시작된다. 그의 두드림은 과거의 죽음과 상처를 다시 기억하게 한다.
탁본은 본래 비석이나 금석문의 문자와 문양을 종이에 옮기는 기법이다. 그러나 성백의 탁본은 퍼포먼스다. 장소를 찾아가 종이를 밀착시키고 수없이 두드리는 과정 전체가 작품이다. 완성된 ‘사물’보다 그 시간과 장소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중요하다. 현재의 예술가가 과거의 상처를 품은 벽과 거리에 몸으로 접촉한다. 그는 손으로 누르고 두드리며 역사를 읽는다.
베를린 작업에는 자신의 그림자 실루엣도 들어간다. 거리의 표면을 탁본한 화면 속에 작가 자신의 그림자까지 함께 남겼다. 이렇게 과거의 베를린과 현재의 성백이 한 화면에 포개진다. 이로써 그는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한 사람으로 자신을 기록한다. 그의 탁본은 그래서 ‘몸으로 역사를 읽는 퍼포먼스’라 부를 만하다.
독일과 한반도의 분단은 같지 않다. 그러나 한국에서 온 예술가가 베를린의 표면에 종이를 대는 순간 독일의 과거 위에 한반도의 현재가 겹친다. 베를린의 흔적은 철원의 총탄 자국과 휴전선의 철책, 아직 서로 건너지 못하는 남과 북의 시간을 불러온다.
발터 벤야민의 ‘역사의 천사’가 바라본 것도 승리의 행렬이 아니라 뒤에 쌓여가는 폐허와 잔해였다. 36년 전 독일의 장벽은 무너졌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아직 철책과 지뢰, 서로 오갈 수 없는 길이 있다. 오랜 세월 쌓아온 마음의 장벽도 남아 있다. 예술이 그 장벽을 당장 무너뜨릴 수는 없다. 그러나 작가는 길 위에 멈춰 서 역사의 상처에 종이를 대고 두드린다.
탁, 탁, 탁.
그 소리는 어쩌면 오래 닫힌 문을 두드리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과거가 현재를 두드리고, 베를린이 한반도를 두드리고, 사라진 사람들이 우리의 기억을 두드린다. 성백은 ‘길 위의 메신저’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어쩌면 이것일 것이다. “장벽이 남긴 상처를 기억하라. 그리고 언젠가 우리도 서로에게 가는 길을 다시 열어야 한다.” 미술평론가·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