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부울경 경제동맹을 보는 불안한 눈빛
안현실 울산과학기술원(UNIST) 연구부총장
경제동맹 표방 EU, 미중에 뒤처져
다양성·규모 못 갖춰 경쟁력 상실
소지역주의 고집 탓… 동남권 교훈
자기중심주의, 혁신 생태계의 적
개방·협력의 대지역주의로 가야
지역 정치 지도자들 결단이 관건
상상을 한 번 해보자. 에어버스(프랑스·독일)와 사브(스웨덴)가 합병해 미국과 중국에 대항하면 어떻게 될까. 방산·항공만이 아니다. 에너지·유틸리티에서 이베르드로라(스페인)와 에넬(이탈리아), 금융·은행에서 도이치방크(독일)와 BNP 파리바(프랑스) 합병도 생각할 수 있다. 반도체와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ASML(네덜란드)과 미스트랄(프랑스)이 한 몸이 되면 파괴력이 어느 정도일까. 제약과 바이오에서 사노피(프랑스)와 바이엘(독일)이 합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산업 자동화로 눈을 돌리면 지멘스(독일)와 슈나이더(프랑스) 합병도 있을 수 있다.
‘상상 속 합병(Fantasy M&A)’은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FT)가 보도한 유럽연합(EU) 이야기다. 그 배경에는 EU의 짙은 위기감이 깔려 있다. 최근 10년간 경제성장률을 보더라도 EU(연 1.3~1.5%)는 미국(2.2%)과 중국(5%)에 크게 밀렸다. 이대로 가면 빅테크의 미국과 제조업의 중국 사이에서 EU의 존재감은 사라지고 말 판이다.
슬프게도 상상과 현실은 사뭇 다르다. 27개 EU 회원국 정치 지도자들은 ‘유럽 챔피언론’에 공감하면서도, 정작 자국 기업의 피인수는 죽기 살기로 반대한다. 돌이켜보면 EU는 지긋지긋한 전쟁을 다시는 하지 말자며 그 불씨를 제거하는 자원·경제동맹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지금의 EU는 하나의 국가나 단일 시장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국경별 파편화와 ‘작은 것이 좋다’는 뿌리 깊은 고정관념이 그렇다.
제대로 된 혁신을 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다양성(scope)과 규모(scale)이다. ‘규모 없는 다양성’은 강자 앞에서 무력하다. ‘다양성 없는 규모’는 불확실성 앞에서 취약하다. 다양성과 규모가 혁신의 양대 무기로 꼽히는 이유다. EU 회원국의 다양성은 미국과 중국의 규모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중이다.
시선을 한국 내 지자체로 돌리면 EU 딜레마가 남의 일 같지 않다. 당장 부울경이 그렇다. 부울경 대통합을 말하지만 이제 겨우 ‘경제동맹 선언’이란 폼을 한 번 잡아본 정도다. 이런 수준으로 부울경이 초광역권 경쟁에서 ‘메가 프로젝트’를 엮어낼 수 있을까. 수도권에 맞설 새로운 성장축이 될 수 있을까.
‘작은 것이 좋다’는 이념은 종종 다양성으로 포장된다. 하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내 것만 지키면 된다는 소지역주의의 또 다른 표출이다. 근원적으로는 인류가 진화 과정에서 너무 오랫동안 소규모 전통 사회로 수렵·채집 생활을 해 온 탓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먼 조상은 ‘고귀한 야만인’이 아니었다. 전쟁이 지금보다 빈번했고, 그로 인한 사망 비율도 높았다. 심지어 전쟁의 90%가 이웃 집단과의 전쟁이었다는 연구도 있다. 우리는 ‘선’이고 저들은 ‘악’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전쟁은 시작된다. 그 후 인류는 얼마나 진화했을까. 켜켜이 쌓인 소지역주의가 21세기에 와서도 무슨 계기만 생기면 깊숙한 곳에서 바로 얼굴을 내미는 곳이 아직도 많다.
부울경은 소지역주의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부산의 진짜 적은 부산이고, 울산의 진짜 적은 울산이고, 경남의 진짜 적은 경남이 아닌가. 개방과 협력을 외면하는 ‘자기중심주의’야말로 혁신의 가장 큰 적이다. 대학이든 기업이든 지자체든 말이다.
불편한 진실을 앞장서 깨야 할 사람들은 부울경의 정치 지도자들이다. 그들이 자기희생을 각오하고 개방과 협력을 이끌면 서로의 다름은 창조적 파괴로 꽃을 피울 수 있다. 개인은 물론 기업, 대학, 연구소 등 혁신 주체들이 다양성과 규모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마침내 새로운 혁신 생태계가 출현하는 것이다.
부울경은 수도권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인구와 가장 큰 지역내총생산의 초광역권이다. 부산의 해양·물류·관광, 울산의 조선·자동차·석유화학·에너지, 경남의 우주항공·방산·기계라는 산업 포트폴리오는 다른 나라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북극항로 시대가 열리면 수도권을 능가하는 세계적인 도시로 급부상할 가능성이 높다.
폐쇄와 분열의 소지역주의로 갈 것인가. 개방과 협력의 대지역주의로 갈 것인가. 부울경은 기로에 서 있다. 2026년 Kearney 외국인직접투자(FDI) 신뢰 지수는 가장 중요한 글로벌 투자 결정 요인으로 기술·혁신 역량을 꼽았다. 부울경이 대지역주의로 가면 기술 및 혁신 역량을 끌어올릴 수 있다. 2026년 IMD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싱가포르(1위), 홍콩(2위), 스위스(3위), 대만(4위), UAE(5위), 덴마크(6위), 아일랜드(7위) 등이 앞자리를 차지했다. 한국의 국가경쟁력은 21위이지만, 부울경이 대지역주의로 가면 글로벌 도시·강소국과 경쟁할 수 있다. 희망찬 미래를 열 단 하나의 열쇠는 부울경 정치 지도자들의 결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