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의 포커스온] 레바논의 눈물
논설위원
동서양 문명 가교 '다문화 공존 국가'
미국·이란 전쟁 휩쓸리며 '비극의 땅'
이스라엘, 헤즈볼라 격퇴 명분 공습
지속될 경우 휴전 협상 중대 변수로
민초들 삶 흔들고 폭력 희생양 양산
휴전 회담서 전쟁 종식 결과 도출을
20여 년 전 찾았던 레바논 베이루트는 독특한 도시였다. 중동 국가지만, 미국 팝이 거리에서 자주 들렸다. 영어, 프랑스어, 아랍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젊은이들은 음악 리듬에 맞춰 거리에서 흥겹게 춤을 췄다. 노천 카페에서 여유로운 일상을 즐기는 모습은 서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베이루트가 프랑스 식민 통치의 영향으로 한때 ‘중동의 파리’로 불린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반면, 전쟁으로 파괴된 건물이 방치되거나 중무장한 군인들이 경계를 서는 모습은 이질적이었다. 서구의 자유와 아랍의 절제, 문화의 융성과 전쟁의 피폐라는 상반된 풍경이 공존했다.
동지중해 연안에 있는 레바논은 페니키아 문명의 발상지로 동서양 문명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베이루트는 그리스, 로마, 비잔틴, 이슬람 등 지중해 주요 문명의 흔적이 혼재돼 있다. 비잔티움제국 시기(330~1453년) 이후 기독교를 믿던 레바논 사람들은 15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놓이면서 무슬림으로 개종하는 이들이 늘었다. 이것이 오늘날 레바논이 종교적 다양성을 보이는 역사적 배경이다.
하지만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에 휩쓸리면서 ‘다문화 공존 국가’였던 레바논은 지금 ‘비극의 땅’이 됐다. 지난 7일 이란과 조건부 휴전에 합의한 이스라엘은 헤즈볼라 격퇴를 명분으로 걸고 레바논을 휴전 대상에서 제외했다. 미국은 공세 수위를 낮추라고 요구하는 상황이다. 지난달 초부터 이어진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레바논에선 헤즈볼라 대원과 민간인 등 8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보도가 나온다. 국제사회와 주변 아랍 국가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이 지속될 경우 미국과 이란의 휴전 협상을 복잡하게 만들 공산이 크다. 이스라엘이 레바논 공습을 멈추지 않는 배경에는 친이란 시아파 무장 단체인 헤즈볼라를 타격해 안보 위협을 줄이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최대한 전선을 확대한다는 분석도 있다. 네타냐후 총리는 레바논과 이란에 대한 강경 대응을 토대로 이스라엘 보수 진영의 지지를 받아 왔다. 이를 바탕으로 자신이 장기간 이끌고 있는 극우 정권을 연장한다는 시각이 많다. 각종 부정부패와 비리 혐의로 이스라엘 수사 당국의 수사를 받아 온 그가 최대한 전시 상황을 이어가는 게 수사를 피하는 데도 유리하다는 전망이다. 그는 지난 12일(현지시간) 헤즈볼라와 대치하고 있는 레바논 남부 접경지대를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했다. 그러면서 미·이란 종전 협상과 별개로 레바논에 대한 공격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위기 상황에서 레바논의 대응은 무력하기만 하다. 이는 건국 과정부터 잉태된 비극이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1943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할 때 지도자들은 기독교·이슬람을 아울러 18개 종파가 얽힌 권력 배분 방식을 놓고 타협했다. 그 결과 인구 등을 고려해 대통령은 기독교, 총리는 이슬람 수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파가 맡는 ‘삼두 체제’가 만들어졌다. 미리 갈등·분열의 여지를 없애고 국가의 화합과 발전을 도모하자는 게 취지였다. 그러나 이런 시스템은 되레 족쇄가 됐다. 주변 강대국 개입과 만성적인 정파 간 갈등을 초래하며 국정 혼란으로 이어진 것이다. 지정학적 환경과 정치 체계, 정부를 능가하는 헤즈볼라의 영향력까지 얽힌 레바논 상황에 근본적 변화가 없는 한 수난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김재명 국제 분쟁 전문가는 저서 〈오늘의 세계 분쟁〉에서 “전쟁은 무한 폭력이 합법적으로 벌어지는 특수한 공간”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전쟁의 광풍은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대고, 폭력의 희생양을 만들어낸다.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겁에 질린 채 구조를 기다리는 레바논 여인과 식량 배급을 받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그러하다. 전쟁은 장엄한 서사시나 위대한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처럼 민초들의 눈물과 고통, 피를 남긴다. 폐허가 된 절망 속에서도 이들은 힘겨운 일상을 이어가려고 한다. 레바논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스라엘이 헤즈볼라의 거점인 레바논 남부 빈트 즈베일을 사실상 점령했다는 소식도 나온다. 헤즈볼라 수장은 레바논 정부에 평화 협상 파기를 요구하고 있고 독자적으로 맞설 태세다. 강 대 강 대치 속에 레바논과 이스라엘은 1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휴전을 위한 최고위급 회담을 갖는다. 이번 회담에서 이들은 지리한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까. “영구 평화는 무덤에서나 가능하다”는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말이 이번에는 빗나갔으면 한다.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