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학수의 문화풍경] 영화 오디세이 너머, 귀향이라는 오래된 질문
동서철학 아카데미 숲길 대표
고통·위협 극복 정체성 찾는 여정
운명 적극적 개척하는 지혜의 힘
왕국 되찾을 역량 갖추도록 도와
이번 달 부산의 극장가를 집어삼킨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오디세이’는 장엄한 화면으로 관객들을 신화의 세계로 몰입시키고 있다. IMAX 카메라로 담아낸 압도적인 스케일과 재치 있는 연출력은 오디세우스의 방랑을 숨 막히는 스펙터클로 탈바꿈시켰다. 그러나 영화가 선사하는 시각적 경이로움 너머에는 호메로스의 원전에서만 온전히 만날 수 있는 철학적 세계가 있다. 〈오디세이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의 짜릿함을 넘어, 작품을 관통하는 세 가지 지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모두는 바로 노스토스(nostos), 즉 귀향이라는 개념에 엮여 있다.
첫째, 노스토스는 고통을 통해 우리의 본모습을 시험하는 존재론적 탐구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노스토스는 단순히 지도상의 특정 장소에 물리적으로 도달하는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수많은 위협 속에서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잃지 않고, 마침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정체성의 여정이었다. 만약 어떤 신이 오디세우스를 트로이에서 이타카의 침실로 첫날에 공간 이동시켜 주었다면, 그는 아무런 고통도 겪지 않았겠지만, 자신의 왕국을 되찾을 역량을 갖춘 인물로 돌아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통은 노스토스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시험대이다. 오디세우스의 선원들이 로토스 열매를 먹었을 때, 그들은 고통 없는 편안함을 얻었지만 고향을 잊고 자아를 상실했다. 만약 오디세우스가 칼립소의 제안을 받아들여 비밀스러운 섬에서 영생과 고통 없는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기로 했다면, 그는 목숨은 건졌을지언정 이타카 사람의 남편이자 아버지, 그리고 왕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상실했을 것이다. 텔레마코스 역시 필로스와 스파르타로 향하는 거친 여정에 목숨을 걸어야만 했고, 그 시련을 통해 비로소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받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했다. 노스토스가 의미를 갖는 이유는, 여행자가 스스로 자아를 포기하지 않고 고통을 견뎌내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둘째, 메티스(mētis), 즉 지략은 노스토스를 완성하기 위해 갈고닦아야 하는 도구이다. 노스토스가 목표이고 고통이 시험이라면, 메티스는 그 여정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결정적 능력이다. 고대 그리스 사상에서 메티스는 비에(biē), 즉 물리적인 힘과 대비된다. 〈일리아스〉의 아킬레우스가 정면 승부에서 상대를 짓밟기 위해 비에에 의존했던 반면, 오디세우스는 순수한 힘만으로는 결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파악했다. 메티스는 예지력과 자제력, 그리고 탁월한 전략적 유연성을 통해 자신보다 훨씬 강한 상대를 압도할 수 있게 해준다. 메티스는 고정된 힘이 아니라, 변화하는 상황을 읽고 그에 맞추어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는 실천적 지혜이다.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동굴에서 오디세우스는 “내 이름은 ‘아무도 아닌 것(Outis)’이라고 속인다. 압도적인 거인의 신체적 힘에 비에로 맞서는 대신, 그는 전사로서의 혈기를 누르고 유연한 지략을 발휘해 괴물의 동굴에서 빠져나온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위기는 바로 그다음에 찾아온다. 안전하게 탈출한 오디세우스는 자존심을 이기지 못하고 폴리페모스에게 자신의 진짜 이름을 외친다. 결국 폴리페모스는 아버지 포세이돈에게 오디세우스를 저주해 달라고 기도하고, 그의 귀향길은 더욱 험난해진다. 메티스가 그를 구했지만 자만심은 다시 그를 위험에 빠뜨린 것이다. 지혜란 영리한 머리만을 뜻하지 않는다. 자신의 충동을 다스릴 줄 아는 능력까지 포함한다.
셋째, 노스토스는 운명과의 능동적 대화를 통해 완성된다. 고대 그리스 신화를 순전한 숙명론으로 치부하는 것은 흔한 오해다. 모이라(운명)는 정해진 대본이 아니라 역동적인 협상의 대상이며, 오디세우스는 이 협상을 두 가지 방식으로 수행한다. 하나는 저승까지 내려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에게 조언을 구하는 적극적 접근이다. 다른 하나는 그 반대편에 있다. 파도에 휩쓸려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바다의 여신 레우코테아가 마법의 베일을 건네지만, 그는 “혹시 신이 나를 속이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며 스스로 판단을 유보한다. 신에게 다가갈 때도, 신이 다가올 때도 그는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 세계의 위대한 힘들과 이렇게 소통함으로써, 호메로스의 영웅들은 운명이 테두리를 설정할지언정 그 안에서 집으로 돌아갈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선택임을 증명해 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우리에게 잊지 못할 영화적 쾌감을 선사했다. 그러나 영화의 스펙터클이 사라진 뒤에 우리의 질문은 남는다.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우리의 귀향은 지도 위의 한 지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 귀향은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지략을 벼리며, 세계와 끊임없이 대화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