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기후 위기 시대의 도시 해법
(주)상지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 대표이사
공원·녹지·저류시설·수변공간
하나의 물순환 체계로 연결 필요
건물도 폭염과 폭우에 견뎌내야
폭염에 지친 뒤였다. 해갈에 대한 기대감으로 비가 내리기를 바랐다. 그러나 지난 주말, 기다리던 단비가 아니라 남부지방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짧은 시간에 쏟아진 비로 인해 곳곳에서 피해가 속출했다.
올여름 날씨는 좀처럼 평범하지 않다. “올해가 가장 시원한 여름일 것”이라는 말이 진심으로 와닿았다. 대구의 ‘대프리카’에 이어 ‘양프리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부산도 예외가 아니다. 바다를 끼고 있어 비교적 시원하다는 말이 무색하게 서울보다 기온이 높은 날도 있었다. 그러다 폭우가 쏟아진 것이다. 비가 그치면 다시 더위가 시작된다. 이것이 기후 위기의 가장 선명한 얼굴인지 모른다. 기온이 조금씩 오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통의 날씨’가 사라지는 것이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는 에어컨을 둘러싼 논쟁이 뜨거웠다. 폭염을 견디기 위해 냉방시설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유럽에서 에어컨은 오랫동안 환영받지 못했다. 에너지 소비와 탄소배출 때문이다. 오래된 건축물의 외관을 보존해야 하는 규정도 설치를 어렵게 했다.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해 에어컨 사용을 줄여야 하는데, 기후가 변할수록 에어컨 없이는 견디기 어려워지는 역설이다.
우리는 지금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해 만든 원칙과 기후 위기에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현실 사이에서 새로운 선택을 요구받고 있다. 그렇다면 질문은 조금 더 근본적이어야 한다. 폭염에도 적응해야 하고, 폭우에도 적응해야 한다면 결국 적응해야 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도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자연재해를 만나면 시설을 보강하고 피해를 복구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폭우가 내리면 배수로를 정비하고 물을 빨리 도시 밖으로 흘려보내려 한다. 도시의 배수 능력을 높이는 것이 오랫동안 재해에 대응하는 가장 당연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시간당 100㎜를 훌쩍 넘는 비가 쏟아지는 시대에도 이 방식만으로 충분할까. 문제는 비가 많이 오는 것만이 아니다. 비가 오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데 있다.
비가 오지 않을 때는 지나치게 건조하고, 비가 오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쏟아진다. 그런데 우리의 도시는 여전히 과거의 비를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다.
땅은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덮여 있다. 하천은 물을 빨리 흘려보내도록 정비됐다. 물이 흘러갈 곳은 많아졌지만, 비가 잠시 머물 곳은 줄어들었다. 폭우가 잦아진다면 물이 도시 밖으로 빨리 빠져나가기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빗물이 스며들 수 있는 땅이 필요하다. 하천과 습지가 살아 있어야 한다. 공원과 녹지, 저류시설과 수변공간이 각각의 시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물순환 체계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것은 폭우만을 위한 도시가 아니다. 빗물이 스며드는 땅에는 나무가 자란다. 나무는 그늘을 만든다. 물을 머금은 녹지는 증발을 통해 주변의 열을 낮춘다. 흙과 나무가 있는 공간은 폭우가 내릴 때는 빗물을 받아들이고, 폭염이 찾아오면 도시의 열을 낮춘다. 결국 폭염과 폭우는 서로 다른 재난처럼 보이지만 그 뿌리는 닮았다. 뜨거워진 도시와 빗물을 받아내지 못하는 도시는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도시다. 자연의 흐름을 끊고 땅을 덮어버린 도시다.
기후 위기 시대의 건축은 비를 막고 더위를 피하는 건축을 넘어, 물과 열을 다루는 건축이어야 한다.
부산은 산과 바다가 만나는 도시다. 낙동강과 수영강이 흐르고, 수많은 골짜기와 하천이 바다로 이어진다. 바람이 있고 물이 있다. 자연의 힘을 가까이 가진 도시다. 그런데 우리는 도시를 개발하면서 자연이 가진 힘을 조금씩 밀어냈다. 산과 하천의 흐름을 끊고, 땅을 포장하고, 바람의 길을 건물로 막았다. 더워지면 에어컨을 켜고 비가 오면 배수시설을 늘렸다. 이렇게 도시는 오랫동안 사람의 편의를 위해 자연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왔다. 하지만 기후 위기 앞에서는 이 방식이 한계에 부딪힌다. 그것은 새로운 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다. 건물의 성능을 에너지 효율만으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폭염과 폭우에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처마와 차양, 녹화와 물순환, 자연 환기와 일사 조절 같은 오래된 건축의 지혜를 다시 불러낼 필요도 있다.
바다를 바라보는 고층건물을 많이 짓는 것만으로 해양도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도시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바다로 흘러가는 물의 길을 살리고, 폭우가 쏟아질 때 잠시 비를 받아낼 공간을 곳곳에 마련하는 것. 그것 역시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도시를 만드는 일이다. 이미 달라진 기후를 과거로 되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도시다. 기후 위기 시대의 좋은 도시는 자연을 이기는 도시가 아니라, 자연과 함께 인간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도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