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선으로] 다르다는 슬픔
김대현 연세대학교 글로벌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사람은 서로 참혹하게 다르다는 것을, 그것이 새된 현실인 만큼 사람들은 좀처럼 돌아보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한번 서로의 다름을 맞닥뜨릴 때면, 사람들은 종종 서로 다르다는 것을 부정하거나, 그 다른 것이란 그리 중요하지도 않다고 애써 강변하고는 한다. 그러는 이유는 그게 그만큼 견디기 어려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같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것들이 실은 다를 때, 사람들은 격발하거나 그 나름의 방식대로 자기 상처를 표현한다.
세상의 패권과 폭력은 종종 그렇게 사람이 서로 마땅히 같아야 한다던 범주가 지나치게 좁은 탓으로 생긴다. 가족원들이 내 말을 고분고분 따라주었으면 하는 가부장이나, 내 팀에는 장애인이나 성소수자, 혹은 여성이 없었으면 하는 팀장이나, 내 나라에는 다른 낯선 인종이 되도록 없었으면 좋겠는 국민의 지도자들이 그러하다. 그들이 그러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사람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힘들어한다. 또는 사람들이 서로 참혹하게 다르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내 육친과 일터와 겨레만큼은 되도록 다른 점이 없었으면 하고 바란다.
살던 동네에서 십리 밖을 벗어나는 순간 괴롭다든가, 널리 배운 사람에게 우환이 많다는 옛 속담은, 좁은 기저 속 동일성에 머문 채 거기에 안주하는 삶이 예로부터 보편적으로 달콤했음을 말해준다. 인터넷과 쇼츠로부터 무한대로 공급받는 쉽고 짧은 호흡의 선동과 음모론이 판치기 전의 세상도 그랬다. 나와 다른 남을 대하는 것은 괴롭고, 남들이 나랑 참혹하게 다름을 깨닫는 일은 더 괴롭다. 그것을 이전에는 피할 도리가 없어 눈앞의 다름에 어떻게든 몸맞춰 살아버릇했고, 지금은 그것을 어떻게든 피하고 살아도 될 방도가 많아졌을 뿐이다.
그 모든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서로 참혹하게 다름을 직면하고 사는 이유는, 그것이 꼼짝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서로가 같다고 상정한 가짜 기쁨보다, 서로가 다름을 깨닫고 난 진짜 슬픔이 더 낫다. 내가 덜 슬프고자 있는 다름을 없는 척할 수는 없다. 세상의 많은 폭력은 내가 남의 다름에 슬프지 않고자 거기에 있는 다름을 없애려는 까닭에 생긴다. 그렇게 해서 애써 같아진 세계에는 사람이 살 수 없다. 세상 일은 종종 그릇되게 차있는 것보다 올바르게 비어있는 편이 낫다.
쉽게 살면 쉽게 목마르고, 어렵게 살면 어렵게 배부르다. 슬프고 괴롭지 않으려고 내가 골라낸 동일성의 세계는 금방 말라붙고, 슬프고 괴로워도 내가 감수하기로 한 차이의 세계는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 다름을 감수하기로 한 사람들이 그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말을 건네고 손을 잡고 곁을 내줄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사람 사이의 아름다움이 나왔다. 그것은 본래 어렵던 것이 쉬워지는 기적의 반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