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이 삼킨 ‘8·8 패싸움’… 마초들 영웅담 뒤 잊힌 죽음 [김백상의 레알 #1-2]
베트남전 파병 묻혀 솜방망이 처벌…주동자들은 ‘훈장’과 ‘사령관’으로 복귀
잘못된 집단 이기주의가 낳은 비극, 미화 대신 반성 기억해야 할 역사
언제나 어디선가 사건과 사고가 일어납니다. 일부만이 세상에 알려져 역사로 기록됩니다. 산업화 이후 부울경에서 벌어진 많은 일 중, 기억하고 되짚어야 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것들을 기록합니다. 실화입니다만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입니다. 극단적인 사건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에 집중했습니다. [편집자 주]
해병대 소위 100여 명이 탈영해 공군 부대를 습격하고, 공군 장병 300여 명과 난투극을 벌였다. 비행기가 파손됐고, 부상자들이 속출했고, 해병대 소위 한 명이 숨졌다. 전대미문의 1966년 8.8사건이었지만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뉴스에서 빠르게 사라졌고 관련자들이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 과정은 조용히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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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세주는 베트남전
사건 발생 이틀째인 10일 오후 3시 진해해병학교 잔디밭. 해병학교 장교들과 김해공군비행학교 장교들이 함께 파티를 열고 기념촬영을 한다. 두 기관의 자매결연 행사가 기획돼 열렸다. 낭독된 취지문에는 “사사로운 일로 충돌된 이번 사건의 감정을 풀고 의형제로서 서로 돕고 지내자”라고 적혔다. 사망 사고가 날 정도로 싸웠던 이들이 이틀 만에 ‘의형제’가 됐다. 촌극 같은 일이지만, 당장 ‘화해의 제스처’라도 보여주어야 할 정도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초기에 당국의 대응은 엄중했다. 8월 12일 국방부는 주동자급 장교 15명(공군 5명·해병 10명)을 구속하고,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김해공군비행학교 교장 이배선 대령과 진해해병학교 교장 이영호 대령도 해임하고 예편시켰다.
해병대 구속자 10명은 습격에 주도적으로 가담한 장교들이었다. 구속자 외에도 해병대원 11명이 불구속 입건됐다. 공군 책임자들도 구속됐는데, 부대 경계 실패가 이유였다.
정부 발표 당시 해병대 구속자 명단의 맨 앞에 이름을 올린 이는 송재신 대위다. 그는 습격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해병학교 소위들을 책임지는 간부였다. 학교로 치면 담임 교사 정도의 역할이었다. 송 대위는 책임자로 구속됐지만, 습격을 몰랐다는 점이 인정돼 군검찰이 공소를 취하했다. 이듬해 베트남전에 1년간 파견된 송 대위는 한미 작전 중 공을 세워 미국의 은성훈장을 받기도 했다. 예편 뒤엔 미국으로 이민을 가, 사업에 성공했다고 한다.
이후 기록들을 보면, 송 대위는 35기 장교들과 각별한 사이로 오랫동안 교류를 이어왔다. 2022년 7월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송 대위는 8·8사건을 “공군 소위들이 자초한 것” “공군 측에서 부대 차량을 동원, 진해 근교까지 쫓아와 해병 장교들을 집단 구타한 것에 대한 응징이었을 뿐” 등으로 평가했다.
습격을 주도한 35기 나머지 구속자들도 대부분 해병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군 생활을 이어갔다.
35기 구속자 중 최영언 소위가 있다. 그는 사건의 발단이 됐던 버스에 있었고, 해병학교에서도 ‘조장’ 같은 역할을 맡고 있었다. 습격 당시 공군 위병소 헌병을 제압하는 데 관여하는 등 핵심 주동자였다.
사건 직후 최 소위도 다른 주동자들과 함께 진해 해군사령부 영창에 45일간 갇혔다. 하지만 정작 군법회의는 근신 15일이라는 경미한 처벌을 결정했다. 나머지 동기들도 비슷한 처분을 받았다. 기소유예 등으로 사법 처리 대신 징계 수준으로 처벌이 마무리된 것이다. 이들은 영창 생활이 끝난 뒤 ‘영웅’처럼 학교로 복귀했다. 훗날 최 소위 증언으로 이뤄진 <한겨레21 기사> ‘질 수 없다. 해병이니까’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에 파견할 장교가 부족했던 것이 관대한 처분의 이유로 추정된다.
최 소위는 1942년 부산 출신이다. 별 탈 없이 해병학교로 복귀한 뒤 곧 베트남에 파견돼 전쟁을 몸으로 겪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베트남전에서 벌어진 한국 군인들의 민간인 학살을 증언했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어두운 역사를 밝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 MBC 스포츠국장을 지낸 뒤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을 지낸 최영언과 동일 인물이다.
부산항 3부두에서 월남으로 파병되는 군인과 환송객들. 팔각모를 쓴 해병대원들이 보인다. 부산일보DB
■ 어제의 적이 오늘의 상관
주동자 중 유일하게 학교로 바로 복귀하지 못한 이가 전도봉 소위였다. 그는 평소에도 주도적인 성격으로 동기들의 리더였다고 한다. 습격 과정을 전방위적으로 이끌어 누가 봐도 핵심 주동자였고, 유일하게 현역 불가 판정을 받았다. 학교로 치면 퇴학 조처를 당한 셈이다.
이런 굴곡이 전 소위를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국방부는 그의 재입학을 허락해, 전 소위는 38기로 다시 해병학교에 들어갔다. 두번 입대한 셈이다. 35기 동기들의 파견이 끝날 즈음 베트남에 투입됐는데, 야전 장교로 이름을 날렸다. 귀국 뒤에도 아예 해병대에 남아, 치열한 경쟁을 뚫고, 1996년 사관후보생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해병대 사령관이 된다.
해병대 사령관 진급 당시의 국방부 장관은 이양호였다. 8.8사건에서 김해공군비행학교의 당직사관으로, 급습 초기 해병대 장교들과 기싸움을 벌인 인물이었다. 그 역시 제대로 습격에 대응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구속됐지만, 최종적으로 정직 3개월로 처벌은 마무리됐다. 그 덕에 패싸움 당시 적으로 만난 두 사람이 30년이 지나 군 수뇌부가 돼 한 테이블에 앉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불명예 제대라는 공통점도 있다. 이양호 장관 경전투 헬기 사업 놔물사건으로 징역형을 받고 해임됐다. 전도봉 전 사령관 역시 진급청탁 관련해 뇌물을 약속받았다는 혐의로 구속 뒤 불명예 퇴진을 당했다. 전 전 사령관은 두 번 입대하고, 두 번 강제 전역 당한 셈이다.
전도봉은 군복을 벗은 뒤에도 자서전을 쓰고, 정치에 도전하고, 한전KDN 사장도 한다. 자서전엔 동네 깡패부터 상관까지 치고박고 싸운 이야기가 많다. 부산 남포동에서 유명한 깡패 싸운 일화 등을 직접 밝히는 인터뷰 기사도 남아있다. 스스로 밝힌 일인 만큼 사실 확인은 어렵지만, 그가 남성미가 넘치는 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했던 것은 짐작 가능하다.
전도봉은 8.8사건에 대해서도 자주 이야기했다. ‘싸우면 이겨야 한다’는 군인 정신을 실천하다 벌어진 낭만적인 일화처럼 말하는 뉘앙스가 읽힌다. 어쨌든 핵심 주동자가 해병대 사령관까지 올라갔다는 건, 군이 이 사건에 매우 관대했다는 걸 방증한다.
1966년 8월 11일자 부산일보 지면. 해병대와 공군 집단 난투극의 주동자들 처벌 소식과 함께 해병학교와 김해 공군비행학교 자매 결연 행사 사진이 보인다.
■ 낭만과 부끄러움 사이
해병대와 공군의 집단 난투극은 잊힌 사건이다. 대중이 좋아할 만한 내러티브가 많은 사건이지만, 아는 이는 드물다.
당시 언론을 보면, 사건 규모에 비해 보도가 많지 않다. 그마저도 8월 12일 정부의 관련자 처벌 계획이 나온 뒤 신문 지면에서 사건은 사실상 사라졌다.
군사 정부는 엄벌 약속과 달리 매우 관대했다. 주동자들도 사실상 사법 처리를 피했는데, 1960년대 군사 법정을 생각하면 오롯이 법의 논리가 판결에 반영되지 않았을 것이다. 윗선에서 ‘젊은 장교들의 혈기 어린 행동’으로 판단했고 이게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은 가능하다.
처벌이 흐지부지되는 과정은 조용히 진행됐고, 언론도 침묵에 동참했다. 이렇게 해병대와 공군의 집단 난투극은 공개된 기록에서 사라졌다.
세월이 한참 흘러, 주로 35기 해병학교 소위들의 인터뷰 등에서 8·8사건은 드물게 언급되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담한 사건을 훗날 회상하면, 기억은 미화돼 소환되기 쉽다. 8·8사건이 영웅담처럼 포장되는 거다. 다만 영웅담이 완성되려면, 비극은 축소되어야 한다. 1966년 8월 이후 이의일 소위의 죽음을 언급하는 기사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8·8사건에 얽힌 많은 군인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국방의 최전선을 지켰던 이들이다. 대한민국이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해병대 장교들은 대부분 베트남전에 파견돼 목숨을 걸고 싸웠고, 적들의 총탄에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그곳에서 희생되기도 했다.
하지만 8·8사건만 놓고 보면, 베트남전에서 싸워야 할 용맹한 해병대 소위가 허망하게 숨졌으니, 결과적으로 군인들 스스로 적을 이롭게 한 셈이다. 당시 공군 장교와 해병대 소위들은 자신의 기분이 나쁜 것을 부대의 명예 실추라고 판단했고, 무모함을 용맹함이라고 착각했다. 군인답지 못한 행동이었다.
해병대와 공군 패싸움은 흥미로운 마초들의 전설이 아니라 반성해야 할 역사다. 8·8사건을 떠올릴 때, 홀어머니 우경학 씨의 막내아들 이의일 소위도 함께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 주요 참고문헌
부산일보 <군인들끼리 집단 난투> 1966. 8. 8
부산일보 <관련 책임자 엄단을> 1966. 8. 9
부산일보 <3명 구속> 1966. 8. 11
경향신문 <지휘관도 엄중 문책> 1966. 8. 9
동아일보 <포복 기습 실전 방불> 1966. 8. 9
조선일보 <장교 30여명 입건> 1966. 8. 9
동아일보 <양쪽 15명 구속 군재회부> 1966. 8. 12
한겨레21 <질 수 없다. 해병이니까> 2013. 10. 30
한국학중앙연구원 구술자료관 <정규호>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