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2025년 '오헌완'을 실천하자
최인규 부산혈액원장
코로나를 기억한다. 모든 것이 멈춰버렸던 그 피폐한 순간을. 거리두기의 일상화, 임시 선별소에서 PCR검사를 기다리던 끝없는 군중, 코로나 백신의 안전성에 관한 ‘카더라’ 소문들. 마스크는 일주일에 2개만 분배됐고, 사람들은 흩어졌다. 사랑하는 사람의 입관을 볼 수 없었고, 모든 것은 비대면으로 변했다.
두려움, 공포감, 무력감, 분노, 슬픔…. 여러 감정의 단계를 관통해 우리는 코로나를 일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됐고, 확진자와 발음이 유사한, ‘확찐자’(코로나로 외부 활동을 못 해 살이 확 찐 사람)라는 우스갯소리 신조어가 등장했다. ‘오운완’(오늘 운동 완료)이란 단어가 유행한 것도 그 무렵인 걸로 기억한다. 코로나 시기 피트니스 클럽은 못 가도, 집에서 자신이 할당한 일일 운동량을 완료하고 SNS에 글을 올리면서 #오운완 태그를 다는 것이다. 확찐자에서 탈피하기 위한 오운완 몸부림이 전국민적으로 일어났다고 할까.
연말에 왜 뜬금없이 코로나 얘기냐고? 우리가 당연시하는 것들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얘기가 하고 싶어서다. 우리는 일상을 살다가 아프면 병원에 가고, 의사를 만나서, 상태가 심각하면 수술을 받는다. 수술하면 절개를 해야 하므로 수혈을 받고, 수술이 끝나면 퇴원해서 다시 일상을 살아간다. 당연한 공식이다. 그런데 수혈받는 그 혈액은 어디서 오는 걸까?
혈액은 인공적으로 만들 수 없고,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은 건강한 누군가의 헌혈을 통해서다. 당신이 수혈을 받았다면, 누군가 당신을 위해 헌혈했기 때문이다. 좀 세게 얘기하면 누군가 헌혈하지 않으면, 누군가는 죽는다. 2023년 기준 우리나라 총 헌혈 건수는 254만 1446건이지만, 실헌혈자 수는 120만 8632명이다. 약 120만 명의 헌혈자가 여러 번 헌혈을 해서 254만 건의 헌혈이 나온 것이다.
헌혈가능인구(만 16~69세)의 겨우 3~4%만 헌혈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 더 암담한 건 120만 명의 실헌혈자중 10, 20대 헌혈자(16~29세)가 64%(77만 2595명)에 달한다는 거다. 저출산 고령화 대표 국가인 우리나라 16~29세 인구는 2023년 기준 885만 명이지만, 2030년 744만 명, 2040년엔 564만 명으로 급감한다. 전체 인구의 감소는 헌혈 인구의 감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터. 어쩌면 우리가 겪었던 코로나 시기의 대혼란은, 다가올지도 모를 혈액 대란에 비하면 시시한 예고편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란 시가 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한 해가 가는 이 시점에 여러분께 나직이 묻고 싶다. 당신은 올해, 아니 평생에, 단 한 번이라도 타인을 위해 기꺼이 팔을 내어 헌혈한 적이 있느냐고?
헌혈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혈액이 나오는 시간은 10분 남짓, 모든 주사가 그렇듯, 통증도 바늘이 들어가는 1초의 순간이 다다. 생각해 보라. 내게 있는 여분의 것으로 10분 만에 타인의 하나뿐인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봉사가 또 있는지? 당신의 10분이 누군가의 10년이 되고, 당신의 1초 찡그림으로 누군가 10년 넘게 웃을 수 있다.
새해가 밝아온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아프지 마시길. 1년에 단 한 번이라도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선물, 헌혈에 꼭 참여하시길. 부디 혈액이 모자라 애타게 발을 동동 구르는 보호자들이 줄길. 오운완만큼 ‘오헌완’(오늘 헌혈 완료)이란 단어를 많이 볼 수 있게 되길. 바라고 바란다. 자! 그럼, 우리 모두 새해엔 #오헌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