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경 칼럼] 87년 체제 끝내고 지방분권 시대 열자
1987년 6공화국 출범 후 37년
제왕적 대통령제 극한 대립 초래
사회 변화와 다양성 수렴 역부족
성장잠재력 추락 새 체제 필요
대통령 4년 중임과 양원제 핵심
지방분권형 개헌이 미래 위한 길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선포에서 이어진 탄핵 정국으로 개헌 논의가 불붙었다. 제왕적 대통령제와 승자 독식에 따른 대결과 증오의 정치로 점철된 ‘87년 체제’가 다시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87년 체제는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6·29 선언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이 이뤄지면서 구축된 헌정 체제를 말한다. 횟수로 따지면 9차 개헌에 해당하고 통치 구조의 변화로는 제6공화국의 시작이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9차 개헌까지 39년이 걸렸는데 87년 체제가 유지돼 온 게 37년 세월이다.
우리는 87년 체제를 통해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고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루는 민주주의 제도화에 성공했다.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루며 OECD 국가이자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토대가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군부독재 체제 종식에 집중해 형식적 민주 체제는 갖췄지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분야의 본질적 개혁과 민주화 진전에는 한계를 노출하면서 87년 체제를 종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이번 탄핵 정국이 아니어도 그동안 개헌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차고 넘쳤다.
대통령에 집중된 권한과 5년 단임의 권력 구조는 극단적 정쟁을 불러왔다. 3권 분립이라고 하지만 대통령은 입법·사법·행정을 압도하는 권한을 가진다. 이 때문에 대통령 선거는 사투를 벌이는 고지탈환전 양상으로 전개된 지 오래다. 국회는 선거철이면 대선 고지전 베이스캠프가 되고 선거가 끝나면 대통령을 보위하는 세력과 끌어내리려는 세력의 극한 투쟁장으로 변한다. 21대와 22대 국회를 이어오며 우리가 목도한 장면이다. 승자 독식의 게임 룰은 상대방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끊임없이 부추기고 유권자들도 감염시킨다.
정치는 권력 투쟁에 빠져 국가의 미래는 온데간데없고 세상의 변화에 점점 무감각해진다. 이 때문에 후진적 정치 체제로 인한 사회적 비용만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현재 우리 사회는 이념 계층 세대 젠더 등 모든 분야에서 화해할 수 없는 수준의 갈등을 노출하고 있는데 이를 해소해야 할 정치는 정파적 이해에 매몰돼 오히려 확대 재생산한다. 정치인 개개인의 자질을 탓할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헌법 체계의 문제로 귀결된다. 헌법이 사회 통합을 위한 최고 규범으로서 기능을 상실했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개헌도 쉽지 않다는 점이다. 2008년부터 개헌 논의가 본격화했지만 정치적 합의를 이루는 데 실패했다. 엄밀히 말하면 대통령과 대선 주자들의 이해가 엇갈렸다. 이들이 국가의 미래를 위한 개헌보다 자신의 권력을 더 소중히 여긴 때문이다. 지금이라고 달라진 게 없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18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예방한 자리에서 개헌 문제를 꺼냈지만 이 대표는 추경 문제를 거론하며 동문서답했다. 탄핵 정국을 물타기 하기 위한 불순한 의도로 받은 것이다.
그렇다고 국가의 미래를 발목 잡는 낡은 옷을 언제까지 입고 갈 수는 없다. 인공지능(AI)이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과 기후 위기 시대를 헤쳐 나갈 수 없다는 것도 자명하다. 완전군장을 하고 국회로 진입하는 계엄군과 휴대폰을 들고 이를 막아선 시민들의 부조화된 모습이 바로 1980년에 머문 정치 체제로 2024년에 맞서고 있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고 문화 강국으로 도약한 대한민국의 비상계엄과 탄핵 상황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개헌의 방향은 당연히 제왕적 대통령제 해소와 지방시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모든 인재와 자본, 권력을 수도권에 몰빵하는 방식으로 빠른 성장을 이뤘지만 이제는 한계에 봉착했다. 망국적 수도권 집중과 그에 따른 세계에서 유례없는 저출산은 우리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었다. 한국은행은 19일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은 2020년 후반 1.8%까지 떨어지고 2040년대에는 1%에도 미치지 못하는 0.6%로 추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당장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고 지역에 혁신 거점을 만드는 구조개혁에 나서지 않으면 국가의 미래는 없다. 그 출발점이 지방분권형 개헌이다. 대통령 4년 중임제 전환과 함께 중앙의 권한을 전폭 이양해 지자체를 지방정부 수준으로 만들고 국회도 지역 대표형 상원제를 두는 양원제로 바꿔야 한다. G7 국가 모두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고 GDP 상위 15개 국가 중 양원제를 채택하지 않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헌법 개정을 위한 자문위원회를 발족하고 지난달 27일 헌정회 주최로 개최한 토론회에서도 대통령 4년 중임과 양원제를 결합한 지방분권국가가 개헌 방향으로 제시됐다. 정파적 이해를 떠나 국가의 미래에 집중하면 헌법이 가야 할 길이 보이는데 늘 발목을 잡는 게 정치다.
강윤경 논설위원 kyk93@busan.com
강윤경 논설위원 kyk9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