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원픽] AI가 만들 수 없는 온기와 감동
부모님 결혼식 두루마리 축사
그 물건이 나에게 전해진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달 후였다. 어머니께서는 빛바랜 한지 두루마리를 건네주시며 앞으로의 보관과 관리를 맡기셨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2m 남짓한 종이. 그 위에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진솔한 글. 그리고 “西紀 一九六五年 五月 二日”. 지금은 하늘로 가신 나의 아버지와 살아계신 어머니가 백년가약을 맺은 날이다.
외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가족들이 짐을 정리하다 처음 보는 상자 안에서 발견하였다는 그 두루마리는 부모님 결혼식에서 친구분이 낭독한 축사였다. 딸을 지극히 사랑하셨던 외할아버지께서는 금지옥엽 키운 딸이 시집가던 날의 기쁨과 축복이 담긴 축하문을 평생 소중한 보물처럼 보관해 오셨던 것이다.
신랑 신부에 대한 소개와 덕담으로 시작한 축사는, ‘스위트 홈과 희망의 유토피아를 향해 힘차게 항해하라’는 웅장한 분위기로 이어지다가 ‘천하의 신들과 더불어’ 축복을 빌며 마무리되었다.
60년 넘는 세월, 두 분은 이 친구의 바람대로 잘 살아오셨을까? 늘 엄숙하고 무서웠던 아버지도 이런 시절이 있었구나. 21살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 어느덧 여든을 넘긴 어머니는 무슨 다짐으로 그 세월을 헤쳐 오셨을까?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도 있었다. 나는 부모님을 얼마나 이해하고 사랑했을까.
그날 이후 나는 그 글을 상자에 고이 담아 소중하게 보관해오고 있다. 켜켜이 쌓인 근심을 지우고 우울한 여백을 채우고 싶을 때, 나는 이 축사를 꺼내어 읽는다.
AI가 지배하는 디지털 세상에서 2m 한지에 꾹꾹 눌러 쓴 아날로그의 가치. 기술이 채울 수 없는 온기와 감동이 종이 위에 살아있다. 칼 세이건이 말한 광활한 우주 속 ‘창백한 푸른 점’에서 두 사람이 만나 가정을 이룬 것은 숭고한 기적이다. 노사연의 노래 가사처럼 부모님이 함께 하신 세월은 서로를 보듬으며 ‘조금씩 익어가는’ 과정이었으리라. 불교의 가르침처럼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그저 먼 길을 잠시 여행 떠나신 것일 뿐, 언젠가 다른 인연으로 다시 만날 터이다.
최근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다시 읽으며, 내가 돌아가야 할 ‘집’의 의미를 생각한다. 젊은 부모님의 모습과 외할아버지의 사랑, 우리 가족이 걸어온 시간이 스며 있는 이 축하문이 나에겐 ‘집’이다. 가족의 고마움을 일깨우며 나의 역사와 흔적을 되짚어 보게 하는 영원한 내 인생의 원픽이다.
김성희 부산경찰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