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재난에는 평균이 없다
이동규 동아대 대학원 재난관리학과 책임교수
지난달 17일 경남 거제에 하루에만 654.3mm 비가 쏟아졌다. 1972년 관측 이래 일 강수량 신기록이자 전국 역대 세 번째 기록으로, 200년에 한 번 내릴 법한 폭우로 판단된다. 사흘 누적 강수량은 평년 여름 한 철 강수량에 육박했다. 섬 지형의 좁은 수로와 경사지 주택 밀집이 피해를 키웠고, 산사태로 1명이 숨졌다. 부산과 통영에서도 침수와 고립이 잇따르자, 정부는 국가소방동원령을 발령했다. 기후 위기가 부르는 극한 재난이 미래 경고가 아니라 현실임을, 이번 폭우가 분명하게 알려준 셈이다.
같은 시각 태평양 건너에선 재난관리 체계를 흔드는 논쟁이 한창이다. 미국 연방재난관리청(FEMA)을 둘러싼 개편 논란이다. 1979년 설립된 FEMA는 대형 재난 시 복구 지원과 이재민 구호, 공공시설 재건을 총괄한다. 노무현 정부가 2004년 이를 벤치마킹해 소방방재청을 세웠던 만큼, 우리 재난관리 체계에도 그 골격이 스며 있다.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닌 이유다.
미국 연방재난관리청 개편 놓고 논란
주 정부 재난 대응 주도 땐 주민 부담
국내 소방방재청 재난관리 체계 비슷
부산·경남, 태풍·해일 등 고위험 지대
국지적 극한 피해까지 담는 게 중요
재난의 새로운 기준과 원칙 세워야
올해 5월, 트럼프 행정부가 구성한 ‘FEMA 검토위원회’는 연방의 역할을 줄이고, 주(州) 정부가 재난 대응을 주도하도록 하는 개편안을 내놓았다. 한 분석 보고서는 개편안이 재난 지원 문턱을 높이고, 비용을 지방정부와 생존자에게 전가할 것이라 경고했다. 재난 선언을 가늠하는 1인당 피해액 지표를 1.94달러에서 2.99달러로 올리면, 2012년부터 2025년까지 주요 재난 선언의 약 29%가 지원 대상에서 빠졌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연간 약 15억 달러(약 2조 원)의 부담이 지방과 피해 주민의 몫으로 돌아갈 것으로 추산된다.
기후 위기 시대에 위험은 배가된다. 이 1인당 피해액 지표는 주 전체 인구를 분모로 삼기에, 인구가 적은 지역은 마을이 초토화돼도 광역 통계에 묻혀 지원에서 배제될 수 있다. 그러나 기후 재난은 이번 거제의 경우처럼 특정 지역에 집중되는 국지성 폭우로 닥친다. 광역 통계로 환산하면 평균에 희석되지만, 그 좁은 지역에 사는 이들에게는 삶터 전체가 무너지는 재난이다. 평균의 함정이 가장 먼저 타격받는 지역을 제도 밖으로 밀어내는 셈이다.
논쟁은 재난 ‘이후’ 지원만이 아니라 ‘이전’의 경보에도 그림자를 드리운다. 개편 논의와 함께 미국 해양대기청의 관측과 예보 예산 감축이 추진되고 있어서다. 지난달 26일 네팔에서는 빙하 붕괴가 부른 돌발홍수로 633명 넘게 숨졌는데, 붕괴는 감시망 밖에서 일어났다. 극한 재난일수록 경보 몇 분이 생사를 가른다. 시간당 100㎜ 이상의 국지성 폭우도 촘촘한 경보와 선제적인 대피 없이는 대참사로 번질 수 있다.
또 다른 뼈아픈 대목은 미국의 개편안이 FEMA의 장기 주거 지원을 없애려 한다는 점이다. 임시 대피에서 더 나은 재건으로 가는 길이 끊기면, 잠깐의 대피가 그대로 돌아갈 곳 없는 처지로 굳어진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지난해 산불로 집을 잃고 임시 조립 주택에 살던 경북 안동과 의성 이재민들은, 올여름 집중호우로 그 임시 주택마저 침수당했다. 이재민을 벼랑 끝에서 붙드는 안전망은, 국가와 지방이 재정과 역량을 함께 쥘 때 비로소 작동한다.
이 논쟁이 묵직한 까닭이 있다. 소방방재청은 2014년 세월호 참사로 국민안전처에 흡수돼 독립 외청의 지위를 잃었고, 2017년에는 행정안전부와 소방청 등으로 다시 쪼개졌다. 통합과 효율의 명분은 있었지만, 재난 대응의 독립성과 전문성이 흔들렸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았다. 재난 전담 역량이 정치적 명분에 따라 흔들릴 수 있다는 점에서, ‘FEMA 축소’ 논쟁은 우리가 지나온 길을 비추는 거울이다.
부산과 경남은 이 질문의 최전선에 있다. 태풍의 길목에 자리해 강해진 태풍과 폭풍해일, 도시 침수, 산사태가 겹치는 고위험 지대다. 이번에도 국가 재난 사태로 대응했기에 특별교부세가 긴급 지원됐다. 우리 역시 특별재난지역 선포 기준과 지역 선정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국지적인 극한 피해가 제도 밖으로 밀려날 수 있다. ‘광역이나 기초 지방자치단체가 알아서 하라’는 책임 전가형 분권으로 흐른다면, 지방의 부담은 감당하기 어렵게 된다.
재난 대응체계를 조정할 때는 세 가지가 고려되어야 한다. 첫째, 중앙과 지방 역할 분담에서 사무 이양보다 재원 이양의 원칙을 먼저 세워야 한다. 둘째, 지방에 대한 책임 전가를 우려하는 것은 지방이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부산시와 경상남도는 자체 재난 기금과 조기경보 체계, 전문 인력을 평시에 축적해야 한다. 셋째, 임시 거처에서 삶의 회복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극한 피해를 반영하도록 지방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재난은 행정구역을 가리지 않지만, 청구서는 늘 특정 지역과 계층에 집중된다. 이제 국지적 극한 피해까지 담아내는 재난의 새로운 기준과 원칙을 세워야 한다. 재난에 평균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