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폭염의 한가운데를 지나며…

정광용 기자 kyjeo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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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용 독자여론팀장

1902년 캐리어가 발명한 에어컨
여름철 영화 관람, 마천루 건설 등
120년간 생활영역 확장 가능케 해
친환경 기술로 환경 문제 이겨내야

지난 8월 몰타에서 영국 버밍엄으로 향할 예정이던 라이언에어 항공편 기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여객기 출발 전 한 시간 넘게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찜통더위 속에서 기내는 거대한 가마솥으로 변했고, 무작정 대기해야 했던 승객들은 옷을 벗거나 일부는 어지럼증과 구토 증상을 보였다. 2명이 실신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여객기는 기체 결함 점검 후 출발했으며, 이륙한 뒤에야 에어컨이 가동됐다. 한여름 여객기에서 에어컨이 고장 나 겪게 되는 처절한(?) 풍경이다.

2022년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은 중동의 카타르에서 열렸다. 열사의 나라 중동에서 월드컵이 개최될 수 있었던 건 에어컨 시설이 큰 역할을 했다. 경기장 곳곳에 첨단 냉방시설이 설치됐기에 관중들은 뜨거운 중동에서도 쾌적하게 경기를 관람할 수 있었다.

에어컨이 등장한 건 124년 전이다. 1902년 미국의 엔지니어 윌리스 해빌랜드 캐리어가 발명했다. 코넬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캐리어는 졸업 후 뉴욕의 제조업체에서 일하다 한 인쇄공장로부터 여름철 습기 때문에 종이가 휘고 잉크가 번지는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의뢰를 맡게 된다.

고심하던 그는 기차역을 뒤덮은 안개를 보며 공기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장치(Air Conditioner), 즉 에어컨 발명의 단초를 얻는다. 온도와 습도의 상관관계를 깨달은 캐리어는 난방 코일 속에 차가운 물을 통과시켜 코일 주위의 공기를 냉각시킴으로써 기온을 떨어뜨리고 습기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인쇄공장 문제를 해결하려던 에어컨 기술은 이후 인간의 생활방식 자체를 완전히 바꿔 버린다.

1925년 뉴욕 타임스 스퀘어의 리볼리 극장에 캐리어의 에어컨 시스템이 설치되면서 영화산업은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이전까지 여름은 영화산업의 비수기였다. 덥고 습한 비좁은 공간에서 영화를 보는 건 고역이라, 여름엔 관객들이 극장을 거의 찾지 않았다. 하지만 시원한 에어컨이 들어서자 오히려 여름에 관객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영화산업의 계절적 한계는 사라지게 됐다.

에어컨은 정치환경도 바꿨다. 미국 의회 의사당에 에어컨이 설치된 1928년 이후 의원들은 무더운 여름에도 무리 없이 의정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 당초 선풍기에만 의존했던 터라 의사당 창문을 늘리려던 계획도 없던 일로 돌아갔다.

100층 넘는 초고층 빌딩, 마천루 건설도 에어컨이 있기에 가능했다. 에어컨은 높은 건물 안에서 창문을 열지 않고 사람이 일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대형 여객기나 초고층 빌딩은 물론 백화점, 병원, 호텔 등 현대 문명의 산물들은 에어컨 보급이 기반이 됐다.

사막 한가운데 들어선 라스베이거스 같은 도시도 에어컨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다. 싱가포르의 국부로 불리는 리콴유 전 총리는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은 에어컨”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그는 총리가 되자마자 공무원들이 일하는 공공건물에 에어컨을 달았고, 이를 통해 동남아 무더위를 극복하고 정부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다. 싱가포르 경제발전의 원동력 중 하나가 에어컨인 셈이다.

인공지능(AI) 시대를 떠받치는 반도체 산업과 데이터센터의 필수 설비도 에어컨이다. 반도체는 온·습도와 공기청정도를 정밀하게 관리해야 하고, 데이터센터는 서버가 내뿜는 막대한 열을 끊임없이 제거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고도의 청정과 항온 상태가 유지되어야 하는 의약, 화학, 섬유, 식품 가공 등 산업도 에어컨이 없었다면 발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과거 칭기즈칸은 세계 땅의 절반을 정복했다는데, 캐리어가 발명한 에어컨은 세계인의 생활무대를 정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이 더위를 극복하고 더 높은 곳, 더 뜨거운 곳으로 생활영역을 넓히게 한 동력이 에어컨이다.

하지만 에어컨 사용이 늘어날수록 과도한 전력 소비와 냉매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이란 환경 문제는 당면한 과제다. 몬트리올 의정서 협약에 따라 2030년 이후에는 온실가스 냉매의 사용을 대폭 감축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 냉각, 펠티어 냉각 등 실외기 없는 친환경 냉각 기술 개발이 국내에서 결실을 앞두고 있다는 건 반가운 소식이다.

올해 경남 양산은 기상 관측 이래 최고 기온인 42.5도를 찍었고, 유럽에선 역대급 폭염에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폭염이 일상이 된 시대, 이제 에어컨은 필수품이 됐다. 특히 어린이와 노인 등 취약자에겐 생존의 필수품이나 다름없다. 에어컨이 환경 문제를 유발하지만, 결국 기술력으로 이겨낼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됐다.


정광용 기자 kyjeo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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