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티어] AI 시대, 부산은 제조를 다시 읽어야 한다
김성희 동의대 대외부총장 인공지능학과 교수
AI 경쟁력은 산업의 깊은 이해와
제조 현장의 축적된 데이터서 나와
부산 곳곳 산업 현장에 가능성 잠재
가장 부산적 AI가 가장 세계적 AI
데이터 자산화, 숙련 기술 아카이브
부산형 피지컬 AI 전략 준비해야
디자인부터 실물 샘플 제작까지 신발 제조의 전 과정을 지원하는 온라인 플랫폼 슈캐치.
김성희 동의대 대외부총장 인공지능학과 교수
사람들은 인공지능(AI)을 이야기하면 거대한 데이터센터와 최첨단 반도체, 화려한 AI 에이전트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앞으로 산업의 판도를 바꿀 AI는 서버 안이 아니라 공장 바닥에서 완성될 가능성이 더 크다. 기계가 사람처럼 보고, 판단하고, 움직이는 피지컬 AI 시대가 열리면서 제조 현장에서 축적된 경험과 데이터가 새로운 전략 자산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변화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AI 시대에 부산은 무엇으로 경쟁할 것인가.
많은 도시는 AI 기업 유치와 연구단지 조성에 집중하고 있다. 물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모든 도시가 같은 방식으로 경쟁할 필요는 없다. 부산에는 다른 도시가 쉽게 가질 수 없는 자산이 있다. 조선, 기계 부품, 항만·물류, 신발 등 제조업의 역사와 현장에 축적된 공정 데이터, 그리고 숙련 기술이다. 우리는 이를 전통산업이라 불렀지만, 피지컬 AI 시대에는 그 축적이 가장 가치 있는 데이터가 된다.
최근 정부와 산업계가 숙련공의 암묵지를 디지털 데이터로 축적하는 사업에 주목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숙련자의 손끝에서 이루어지는 미세한 판단과 공정 노하우는 매뉴얼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를 데이터로 축적하고 학습시킨다면 AI는 실제 생산 현장을 이해하고 함께 일하는 기술로 발전할 수 있다.
필자는 지난 몇 년간 부산 신발산업과 함께 이러한 가능성을 확인해 왔다. 처음부터 스마트팩토리를 목표로 하지는 않았다. 2019년 크리스틴컴퍼니와 산학협력을 시작했을 당시만 해도 AI의 중심은 생성형 AI가 아니라 이미지 인식과 수요 예측 등 분석 기술이었다. 무엇보다 산업을 이해하고 데이터를 축적하는 일이 먼저였다. 120여 개의 신발 제조 공정을 데이터화하고, 브랜드와 공장을 연결하는 제조 매칭 플랫폼 ‘신플(SINPLE)’을 구축하며 산업의 디지털 기반을 쌓아갔다. 이후 생성형 AI의 등장은 디자인 영역으로 연구를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범용 AI가 예상보다 빠르게 발전하면서 자체 AI 모델만으로는 차별화하기 어렵다는 현실도 마주했다.
그 경험은 오히려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AI가 잘하는 것과, 우리만이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제조 데이터와 공정 이해를 바탕으로 디자인 프로세스까지 AI로 확장한 신발·패션 특화 플랫폼 ‘슈캐치(ShoeCatch)’를 개발했다. 브랜드 콘셉트와 스케치, 이미지를 입력하면 AI가 산업 특성에 맞는 형태와 소재, 컬러를 제안하고 가상 피팅 이미지와 홍보 콘텐츠까지 생성한다. 중요한 것은 생성형 AI를 활용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신발산업에 대한 이해와 제조 데이터를 AI와 결합했다는 점이다. 결국 AI의 경쟁력은 산업에 대한 깊은 이해와 현장의 데이터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부산에는 이러한 가능성이 곳곳에 숨어 있다. 조선소의 용접 기술, 신발 장인의 손기술, 항만 운영 경험, 기계 부품 가공 노하우는 모두 세계 어디에도 없는 부산만의 자산이다. 이제는 이를 단순한 경험으로 남겨둘 것이 아니라 데이터 자산으로 축적하고, AI가 학습할 수 있는 형태로 전환해야 한다. 이를 위해 기업은 AI를 얼마나 도입했느냐보다 얼마나 의미 있는 데이터를 축적했느냐를 경쟁력으로 삼아야 한다.
또한 산업별 특성을 반영해 AI 도입 효과를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평가체계와 지표를 마련해야 현장의 데이터가 지속적으로 축적되고 AI의 실질적인 효용도 검증할 수 있다. 대학은 이를 뒷받침할 인재를 양성하고, 기업과 함께 데이터를 축적·실증하는 혁신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부산 역시 AI 기업 유치에 머무르지 말고 산업별 데이터 자산화, 숙련 기술의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제조 AI 실증, 산업별 AI 성과를 체계적으로 평가하는 기반을 갖춘 ‘부산형 피지컬 AI 전략’을 준비해야 한다.
앞으로 AI 시대의 승부는 기술의 속도가 아니라 산업의 깊이에서 결정된다. 부산이 가진 제조의 경험과 현장의 데이터는 미래 AI 산업의 가장 강력한 자산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경쟁력을 가장 부산다운 방식으로 다시 해석하는 일이다. 그 순간, 가장 부산적인 AI가 가장 세계적인 AI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