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자기 세계의 '주인'으로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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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세계는 언제나 반짝이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균열과 상흔이 공존한다. 아이들의 세계는 오히려 균열에 더 민감하다. 아이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작은 충돌은 때로 거대한 파국으로 번지기도 하고, 말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들은 조용히 쌓여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윤가은 감독은 ‘우리들’ ‘우리집’을 통해 아이들의 세계를 일관되게 응시해 왔다. 그리고 ‘세계의 주인’에서도 그는 한 소녀의 일상을 깊숙이 관찰하며, 상처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조심스럽게 건넨다.

영화는 여고생 ‘주인’이 교실 한쪽에서 남자친구와 키스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성과 사랑에 호기심이 많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중심에 서 있는 주인은 여느 또래와 다르지 않은 명랑하고 씩씩한 인물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전교생이 동의한 ‘성폭행범 출소 반대 서명 운동’에 주인만이 거부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주인은 “성폭행이 피해자의 삶을 망가뜨린다”는 한 문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윤가은 감독 화제작 '세계의 주인'

명랑한 웃음 뒤 숨겨진 깊은 슬픔

과거 파헤치거나 과장 없이 묻는다

피해자다움은 어떤 자세여야 하나?

서명문을 작성한 ‘수호’는 주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채 비난하기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때 주인은 자신도 모르게 “나도 성폭행 피해자”라고 외친다. 주변이 순식간에 고요해지고 주인은 곧 자신의 말이 농담이었다며 웃어넘긴다. 이 짧은 외침은 바로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주인의 지나치게 명랑한 웃음 뒤에 숨겨진 깊은 슬픔, 말로 풀어낼 수 없는 과거가 숨겨져 있음을 눈치챈다.

영화는 어떤 것도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주인이 어떤 아이라고 함부로 규정지을 수 없게 만든다. 주인이 보여주는 행동들에 의문이 생길 때쯤, 주인이 과거 성범죄 피해자였음을 어렴풋이 눈치챈다. 하지만 영화는 상처의 원인을 파헤치거나 고통의 깊이를 과장하지 않는다. 대신 감독의 시선은 ‘이후의 삶’, 다시 말해 상실과 고통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일상에 머문다. 상처를 딛고 살아가는 인물의 태도와 선택을 차분히 따라가며, 설명보다 흔들리는 눈빛과 애써 웃는 표정에서 더 많은 것을 읽어낸다.

이러한 태도는 연출 전반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카메라는 잔혹했던 과거를 재현하기보다, 태권도를 배우고 봉사활동을 하며 자신의 삶을 성실히 채워가려는 주인의 삶에 머문다. 특히 영화는 다른 피해자들과의 모임을 중요한 장면으로 제시한다. 그곳에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어둡고 침잠된 분위기 대신 웃음과 수다, 소소한 일상이 흐른다. 이는 ‘피해자다움’이라는 고정된 이미지가 얼마나 폭력적인 규정이었는지를 되묻게 한다. 피해자는 연민과 동정 속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가고 선택하며 변해가는 현재형의 인간임을 영화는 조용히 강조한다.

영화에서 주인이 엄마와 함께 세차하러 가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눌러왔던 분노와 고통을 터뜨리는 순간, 그 절규는 세차기의 거센 물소리에 파묻힌다.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고, 고통은 완전히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세차가 끝나면 주인은 다시 숨을 고르고 현실로 돌아온다. 이 과정을 지켜보는 인물이 엄마 ‘태선’이다. 딸 앞에서는 강인한 어른으로 남아야 하지만, 사실 엄마도 힘들다. 하지만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함께 견디며 저항하며 바로 서고자 노력한다.

‘세계의 주인’은 한 소녀의 상처를 통해 우리 사회가 피해자를 어떻게 규정해 왔는지를 되묻는 영화다. 동시에 이는 상처를 지닌 존재가 어떻게 다시 삶의 중심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로 인해 주인은 피해자라는 단일한 이름으로 설명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는 여전히 흔들리고 웃고 분노하며 나아간다. 영화의 마지막,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고통의 완결이 아니라 가능성의 지속이다. 주인은 어떤 규정 속에 머물지 않으며 다시 자신의 세계를 살아가며 ‘주인’이 되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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