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말할 수 없는, 정치
이자영 사회부 차장
명절에 가족끼리 하지 말아야 할 얘기
다툼 유발 주제 1순위로 꼽히는 정치
세대·젠더 갈등, 이념 양극화 심화
확증편향 강화보단 대화·토론 필요
“나 엄마 톡을 차단했어. 엄마는 모르시겠지만….” 지인 A는 최근 SNS 메신저에서 가족을 차단 목록에 넣는 극단의 조치를 했다. A는 “어머니가 극우 유튜브 채널의 링크나 기사 같은 걸 보내는 게 너무 큰 스트레스라 어쩔 수 없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엔 아버지와 함께 밥을 먹다가 정치 얘기가 나오는 바람에 크게 다퉜다며 울분을 토했다. 넘을 수 없는 세대의 벽 때문일까. 평소엔 부모님과 사이가 좋은 편인데, 정치에 대한 의견만큼은 하나도 맞지가 않아 답답하다는 게 그의 고민이다.
다가오는 설 연휴에 가족들과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 1순위로 정치가 꼽힌다. 8년째 구급대원으로 일해온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당신이 더 귀하다〉라는 책을 펴낸 저자 백경(필명)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명절에 가족끼리 정치 얘기는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119에 신고가 들어올 정도면 말싸움으로 끝나지 않고 주먹다짐에, 심하면 칼부림까지 나기도 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에 비하면 지난해 설에 등장한 ‘잔소리 메뉴판’ 같은 건 애교 수준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이 메뉴판은 걱정하는 척하며 비수를 꽂는 친척들의 말을 유료 결제 후 듣겠다는 기가 막힌 발상을 담았다. 예를 들어 ‘어느 대학 갈 거니?’라는 말에는 10만 원의 가격을 매겼고, ‘회사에서 연봉은 얼마나 받니?’라는 질문을 하려면 50만 원을 내라는 식이다. ‘머리가 좀 휑해졌다’ 같은 상처 주는 말이나 ‘둘째는? 외동은 외롭대’ 같은 선을 넘는 질문엔 최대 100만 원까지 가격을 책정했다. 심지어 올해는 이런 가격표를 옷에 인쇄한 ‘잔소리 티셔츠’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돈 안 되는 잔소리는 원천 차단하겠다는 강한 의지마저 읽히는 세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말을 조심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건전한 상식을 가진 이들이라면 얼마든지 의미 있는 토론이 가능할 것 같은 정치 이슈가 어쩌다 입에 담지 못할 금기의 주제가 된 걸까. 불과 수십 년 사이에 급격한 체제 변화와 경제 발전을 이룬 우리나라의 특수한 환경 탓에 세대 간 인식 차가 지나치게 큰 것이 하나의 원인으로 꼽힌다. 40대 중반인 지인 B는 “개발도상국 시대에 태어난 우리가, 선진국에서 태어난 요즘 애들의 생각을 어떻게 알겠냐”는 우스갯소리를 종종 한다. 극명한 세대 차이를 또 그렇게 ‘팩트 폭행’하며 설명하니, 듣는 이들 또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80대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20대 후배 C는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사태 이후 저녁 식사 시간에 가족끼리 뉴스를 볼 수가 없게 됐다고 한다. 정치 얘기만 나오면 다투게 된다는 게 이유다. 탄핵 찬성 집회에 참가하기도 했던 그는 “할아버지는 ‘어떻게 감히 대통령을 끌어 내리냐’고 생각하고 계신 거 같은데, 대통령을 마치 왕정 시대의 왕 모시듯 하는 것 같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살아온 궤적이 달라서 설득은 절대 불가능한 것 같다”면서 “할아버지도 박박 대드는 60살 차이 손녀가 얼마나 미울까 하는 생각도 든다”고 덧붙였다.
물론 정치적 견해 차를 단순히 세대의 문제로 치부할 순 없다. 지난 19일 서울서부지법에 침입해 난동을 부린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현행범 90명의 절반 이상이 20~30대인 것만 봐도 그렇다. ‘태극기 부대’로 상징되는 기존 극우 세력이 노년층이었던 것과는 확연히 달라진 양상이다. 일부에선 탄핵 찬성 집회의 주요 참가 층이 20~30대 여성이었다는 점과 이번 난동을 주도했던 층이 20~30대 남성이었다는 점을 들어 성별에 따른 차이를 부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이분법적 사고는 젠더 갈등을 더 심화시킬 뿐이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쓴 미국 하버드대 스티븐 레비츠키 교수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소셜 미디어가 정치인의 급진적 행동을 조장한다”며 “한국뿐 아니라 미국 등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인이 과격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우리 사회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는 일부 극우 유튜버 등의 주장을 주류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했다고 지적한다. 그는 “협상과 타협이 민주주의의 본질”이라는 점도 강조한다.
대화와 설득, 협상과 타협이 사라진 곳에 아집과 불통, 갈등과 분열이 자리 잡는다. 각자가 보고 싶은 뉴스만 소비하며 확증편향을 강화하기보다 열린 자세로 토론할 수 있는 문화가 필요한 때다. 가까운 사이에도 논하기 힘든 금단의 영역에 정치가 머물러서는 안 된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고, 다른 의견도 기꺼이 경청하는 성숙한 시민 의식이 가짜 뉴스와 정치 양극화를 막는 예방책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건 억지스러운 침묵이 아니라 건강한 대화와 합리적인 토론이 아닐까.
이자영 기자 2you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