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39일, 어떻게 돌려받을 수 있나
■ 시간 불평등 / 가이 스탠딩
‘신성한 노동’ 선동으로 노동 강요
한국, 타국보다 매년 39일 더 일해
노동에 대한 새로운 시각 담은 책
알고들 계시려나. 한국 노동자들이 OECD 평균보다 연간 39일을 더 노동한다는 사실을. 한국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타국의 노동자에 비해 더 많은 일을 당연한 듯 강요 당하고 있다. 만약 매년 39일이라는 긴 휴가가 나에게 추가로 주어진다면? 나는 그동안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주저했던 2종 소형 면허 학원에 당장 등록할 것이며, 여러 특별한 곳에서의 한 달 살이 계획을 세울 테다.
같은 노동자라 하더라도 여권 표지의 색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산다. 여권 표지의 색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 중 하나가 (여유)시간의 차이다. 물론 같은 색의 여권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여러 조건에 따라 ‘시간의 차이’는 극명하다. 영국의 경제학자 가이 스탠딩은 그의 새 책 <시간 불평등>에서 말한다. “모든 불평등 가운데 가장 최악은 시간 불평등이다.”
어떤 꼰대들은 “노동 시간이 많다고 불평하지 말고, 일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고마워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저자는 ‘노동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꼰대들의 설교를 받아친다. 노동주의란 ‘노동이 일하고 생계를 꾸리는 데 적절하고 바람직한 방식이라는 허위의식’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태동의 시기, 자본 권력자들은 노동을 원하지 않았던 대중에게 노동을 강요하기 위해 ‘노동이 신성한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허위의식을 심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이어 저자는 근대 이후 노동이라는 새로운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제도적으로 격리·처벌되었는지 낱낱이 밝힌다.
이쯤에서 눈에 띄는 게, ‘노동을 원하지 않았던 대중’ ‘노동이라는 새로운 질서’라는 문구다. 근대 자본주의가 탄생하면서 우리(피지배계층)의 노동 강도는 이전 시대에 비해 더욱 심해졌다는 의미다. 책은 덧붙여, 휴경하며 긴 축제를 벌였던 중세 유럽 농업사회의 전통이나 의무적으로 정치에 많은 시간을 헌신하게 했던 길드의 관습 등 역사적 사례를 바탕으로 노동에 속박되기 이전 시대의 풍경을 보여준다. 현대에 이르러 시간은 더욱 왜곡되고 불합리해졌다. 경제 성장이 최우선 목표가 되면서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는 것처럼 누명을 쓴 고용안정성 보장 따위는 개나 줘버릴 기세다. 결국 몇 십년 전에 비해 훨씬 많은 노동자가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정한 일자리에서 일하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이런 곤경에서 벗어나는 방안이 ‘완전고용’이라고 주장하지만, 저자는 그 주장을 단호히 반대한다. 완전고용은 모든 사람을 전일제 노동으로 편입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사람들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까다롭지 않고, 지루하고, 임금이 형편없는 일자리’로 밀어넣는 경향이 있다. 저자가 보기에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자리 보장이 아니라 불안정하고 무의미한 일자리에 매달리지 않고도 먹고살 수 있는 방법이다.
저자의 논리는 결국 기본소득으로 귀결된다. 노동하지 않아도 최소한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비용 보전. 기본소득의 재원은 토지가치세와 탄소 배출 부담금 등 공유재의 착취에 매겨진 요금으로 마련하자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유한한 재화 속에서 살아남아야 할, 그리고 유한한 재화를 아껴 후세에게 물려줘야 할 우리의 처지를 생각하면 기본소득이라는 결론이 마뜩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에 대한 지향은 달콤하다. 그리고 실제로 한국의 노동자보다 훨씬 적게 일하는 것이 상식인 다른 나라의 경우를 생각하면, 우리의 노동에 대한 시각도 바뀔 필요가 있다. 노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책. 가이 스탠딩 지음/안효상 옮김/창비/544쪽/2만 8000원.
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