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공자가 목욕탕에 가셨다면
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
어느 날 공자는 몇몇 제자에게 자기 포부를 말하도록 했고, 그중에서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싶다는 증석의 말에 공감하였다. 기수는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에 있는 강이다. 맑은 물에 목욕하고 산마루에서 옷자락을 날리며 노래를 부르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초연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그래서 율곡 이이도 “나도 벗들과 함께 저 기수를 보러 가리니, 내 옷 벗어 맑은 물에 목욕하고, 내 갓 벗어 맑은 바람에 털어 쓰리라”라고 노래했지 싶다.
그런데 공자가 오늘날 우리나라의 목욕탕에 들른다면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집집이 욕실과 샤워 시설이 있어 동네 목욕탕이 귀한 시절이 되었지만, 살아남은 목욕탕은 그 규모를 키우고 각종 설비를 갖췄다. 미온·고온·저온·냉·급냉탕은 물론이고 습식·건식 사우나에 반신욕·폭포·복부안마탕까지 갖춘 곳도 있다. 바닷물을 제공하는 해수온천도 있다. 시설은 기수보다 몇 배 뛰어난 게 틀림없지만, 무우의 여유로움을 느끼기는 어렵다.
우리 사회 축소판 같은 목욕탕 문화
타인 배려 없는 이기적인 행위 만연
현재의 대학 강단 역시 다르지 않아
기성세대의 일탈 행위 그대로 답습
공자가 강조한 진심 어린 마음·공감
편안한 삶 위해선 모두가 되새겨야
샤워기로 몸을 씻으면서 주변에 물을 튀기는 건 예사고, 온몸에 폭포탕의 강한 물줄기를 맞으면서 그 물줄기가 어디로 튀는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바람에 옆 사람이 봉변을 당하기도 한다. 사우나에서 땀이 줄줄 흐르는 몸으로 나와 그대로 냉탕으로 뛰어드는가 하면, 욕탕 가에 온몸을 드러내 놓고 자는 사람도 있다. 샤워를 마치면 수도꼭지를 잠그라는 안내문이 있는데도 샤워 뒤 그대로 자리를 뜨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드라이기 옆에는 머리 외에 다른 부위는 말리지 말라는 정중한 안내문이 붙어 있지만 별 소용이 없다. 공자가 이런 사람을 본다면 분명히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자라고 여겼을 것이다. 이처럼 목욕탕은 모두에게 필요한 공간이지만 그리 편안하거나 상쾌한 공간이라고는 할 수 없다.
지금과 같은 이런 목욕탕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 아닐까. 목욕탕에 가면 어린아이부터 나이 든 사람까지 한 곳에서 볼 수 있다. 연령층만 다양한 것이 아니라 몸집, 몸매도 각양각색이다. 온몸에 문신을 한 사람도 있고, 팔뚝에 작게 한 사람도 있고, 전혀 없는 사람도 있다. 소지품도 목욕용품부터 음료수까지 꼼꼼하게 챙겨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몸만 덜렁 와서 면도기부터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런 목욕탕에서 보내는 시간이 불편하다고 느끼는 건, 역시 다양한 사람으로 이뤄진 우리 사회에서 사는 것도 그다지 편하지 않다는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무엇이 문제일까.
공자가 우리 목욕탕에 와봤다면 반드시 이렇게 말했을 법하다. “자신이 원하지 않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 누구나 목욕탕에서 신중하게 면도를 하고 있다가, 갑자기 남의 샤워기나 폭포탕의 물줄기를 뒤집어쓰는 일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땀이 흐르는 몸으로 그대로 찬물에 뛰어드는 사람을 보면 눈살을 찌푸릴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자신은 결코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는 마구 저지르는 사람이 있다. 나는 결코 사기를 당하고 싶지 않지만, 남을 등치는 전세사기엔 가담하기도 한다. 나는 절대로 주식 투자로 손해를 입고 싶지 않지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주가조작에는 가담해서 차익을 실현한다. 나는 위층의 소음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지만, 우리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는 너무 흐뭇하다. 나는 남의 담배 연기는 싫지만, 나의 흡연 욕구는 결코 참을 수 없다. 거론하자면 끝이 없을 지경이다.
일반 사회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학 사회도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일부 학생이기는 하지만, 수업 시간에 태블릿이나 노트북만 앞에 둔 채 채팅을 하는 학생이 적지 않다. 이를 지적하면 화를 내면서 강의실을 나가버린다. 출석을 부르고 나면 슬그머니 자리를 뜬 다음, 강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혹 전화가 오면 강의실을 나가 몇십 분이 지나서야 돌아온다. 학생들은 대학에서 배운 것을 사회에 나가서 그대로 써먹을 것이다.
학생들의 행위는 사기나 기만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강의실에 앉아 있어도 강의를 듣는 게 아니라 자기 볼일을 보고 있는 것이다. 출석 체크를 했으니 이제 수업은 듣지 않아도 된다고 여긴다. 일부 기성세대들의 일탈 행위를 그대로 강의실에서 따라 하는 셈이다. 이들이 사회로 나가면 더욱 불편한 사회가 될 수도 있다.
공자가 자신의 도는 하나로 꿰뚫고 있다고 하자, 증자는 그것은 충(忠)과 서(恕)일 뿐이라고 하였다. 충은 진심을 다하는 것(中心)이고, 서는 남과 공감하는 것(如心)이다. 내 진심을 다하고, 남과 공감할 수 있어야 모두 편안하게 살 수 있다. 나의 냉담함과 무관심이 그대로 나에게 되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