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절망과 희망 사이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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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독자여론부 선임기자

모든 세대가 비상계엄 경험한 시대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 국민 위로
K팝과 평화로운 집회 어우러져
한국 민주주의 회복 탄력성 증명

“이제 한국의 모든 세대가 비상계엄을 경험한 시대가 됐다.”

최근 지인이 한 말이다.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온 국민을 혼란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역사 속에 박제된 유물로만 여겼던 비상계엄이 45년 만에 현실화했다. 이 기습계엄은 6시간 만에 해제됐지만, 민주주의를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위기감과 일상의 불안을 안겨주었다. 지난 14일 국회에서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됐고, 내란죄 혐의를 받는 윤 대통령의 진퇴는 헌법재판소의 손으로 넘어갔다.

2024년 12월은 절망과 부끄러움, 희망과 자긍심이 교차한 시간이었다. 45년 만의 비상계엄 선포는 절망과 부끄러움 그 자체였다. 비상계엄 후폭풍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던 지난 10일(현지 시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시상식이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한국인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는 한강의 모습은 많은 국민들에게 자긍심과 희망을 전했다. 한강은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비극을 다루고 국가 폭력의 참상을 고발한 작품들을 써왔다.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장편 소설들이다. 한강은 지난 6일 스톡홀름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소년이 온다〉를 쓰기 위해 1979년 말부터 진행됐던 계엄 상황에 관해 공부를 했었다. 2024년에 다시 계엄 상황이 전개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국과 스웨덴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참 아이러니했다.

스웨덴 한림원 종신회원으로 올해 노벨문학상 심사를 맡은 노벨위원회 엘렌 맛손 위원도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그는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금은 참 기묘한 상황이다. 우리가 한강의 책을 읽은 뒤,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를 보고 있지 않나. 얼마간 책의 내용이 현실이 된 셈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론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힘을 보여주는 모습에 희망을 느꼈다. 노벨문학상이 정치적인 상은 아니지만, 한강의 글은 정치적 경험과 역사를 다룬다. 희망하건대 (한강의) 이번 수상이 한국에 힘을 주는 일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2024년은 K컬처의 위상을 전 세계적으로 드높인 해였다. 현대음악 작곡가 진은숙은 지난 1월 ‘클래식 음악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을 아시아인 최초로 거머쥐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지난 10월 ‘클래식 음반의 오스카’로 불리는 세계적인 권위의 시상식인 ‘그라모폰 클래식 뮤직 어워즈’에서 첫 스튜디오 앨범 ‘쇼팽: 에튀드’로 피아노 부문과 특별상인 ‘젊은 예술가’ 부문 등 2관왕을 차지했다. 한국 피아니스트가 이 상을 받은 것 역시 처음이다. 블랙핑크 로제의 ‘아파트(APT.)’는 최근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 100’과 영국 오피셜 싱글 차트 ‘톱 100’에서 최상위권을 기록하며 K팝의 위용을 이어갔다.

여기에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K문학의 빛나는 쾌거로 K컬처의 세계적 확장을 가속한 사례였다. 이에 앞서 2020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4관왕(최우수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극영화상) 수상, 2021년 영화 ‘미나리’에 출연한 배우 윤여정의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 수상, 2022년 영화 ‘헤어질 결심’으로 박찬욱 감독의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 2021년 황동혁 감독의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세계 83개국(넷플릭스 서비스 기준) 시청률 1위 기록 등은 K영화와 K드라마의 빼어난 경쟁력을 증명했다.

이러한 K컬처의 자산은 비상계엄 사태와 내란·탄핵 정국에서 평화로운 ‘K집회’를 이끌어내는 동력이 됐다고 본다. 지난 14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을 앞두고 국회의사당 인근에 20만 명의 인파가 몰렸지만, 별다른 충돌이나 사고 없이 질서 있게 집회가 마무리됐다. 특히 시민들은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등 K팝을 부르고 응원봉을 흔들며 새로운 시위 문화를 보여줬다. 특히 MZ세대들은 ‘민주주의의 회복’을 외치며 적극적으로 참여해 집회 문화의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외신 반응도 뜨거웠다. 로이터통신은 “시민들이 시위에 들고나온 응원봉이 기존의 촛불을 대체하며 비폭력과 연대의 상징으로 떠올랐다”고 전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차세대형 민주주의의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비상계엄에 따른 탄핵 정국으로 국가적 혼란과 경제적 타격이 심각하다. 국가 안보를 챙겨야 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소비 위축과 저성장도 극복해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 2기 출범에 따른 대응책도 마련해야 한다. K컬처와 융합한 K집회가 한국 민주주의의 높은 회복 탄력성을 보여준 만큼, 이제는 정치권이 화답할 차례다.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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